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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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즐기는 법

출판 관련 업계의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하다 보면, "무라카미 씨는 현재 어떤 잡지를 가장 재미있게 보고 계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일이 많다. 요즘은 잡지 전쟁이 워낙 치열하므로 그만큼 만드는 쪽도 상당히 진지하게 상황을 분석해 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해봤자 나는 잡지를 열렬히 읽는 독자가 아니고, 가끔 마음이 내키면 손에 들고 페이지를 훌훌 넘기는 정도기 때문에 어떤 잡지가 현재 가장 재미있고, 어떤 잡지가 제일 급진적인지 따위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첫째로 이렇게 엄청난 양의 비슷비슷한 잡지들이 서점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지금, 나로서는 선택 그 자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 같다. 대체 누가 오후 4시 30분의 어슴푸레함과 ..

길만 있으면

골프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그 이야기를 계속할까 보다. 내가 골프를 하지 않는 이유를 87개쯤은 즉석에서 읊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만을 들어 보겠다. (1) 혼자서 할 수 없다. 타인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2) 일일이 멀리까지 가야 한다. (3) 도구를 모두 사서 갖고 다녀야 하는 것이 힘이 든다. (4)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성가시다. 역으로 말하면, 그 반대에 있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가 될 것이다. 요컨대 달리기이다. 달리는 것은 혼자 할 수 있고, 길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적당한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다. 그런 이유로 벌써 20년쯤 날마다 달리기를 하고 있지만, 달리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특히 여행을 할 때이다. 낯선 외국..

작은 과자빵 이야기

컴퓨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컴퓨터 스위치를 누른 후부터 화면이 셋업 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긁어모을 때도 마찬가지다. 화면을 노려보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지는데(모든 새로운 편리함은 예외 없이 새로운 종류의 불편함을 낳는다), 그럴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지? 나는 화면은 일체 잊어버리고 옆으로 돌아앉아 여유롭게 문고판 책을 읽는다. '넌 너 좋을 대로 해. 나도 나 좋은 거 할 테니까.'하는 식으로. 뭐, 그런 식으로 잠깐씩 단속적으로 읽는 것이니 장대하고 줄거리가 복잡한 책(예를 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라든가)은 용도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굴러다니는 잡지를 읽는 것도 어지간히 '시간땜질' 같은 느낌이 들어 재미가 없다. 이것저..

식당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최근에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나는 식당차란 것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식사 때는 식당차에 가서 천천히 여유롭게 식사하는 것을 즐겼다. 별로 돈이 없던 젊은 시절에도 여행을 떠나게 되어 열차를 타면 무리를 해서라도 식당차에 갔다. 흰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설령 곳곳에 오래된 소스 자국이 남아 있더라도), 무겁고 고풍스러운 꽃병에 카네이션 한 송이가 꽂혀 있다면,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었다. 먼저 맥주를 주문한다. 차가운 작은 병과 그야말로 날씬한 고풍의 맥주잔이 날라져 온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테이블보 위에 맥주의 호박색 그림자가 떨어진다. 아직 독일이 동서로 분열되어 있던 시절, 동독 지역을 통과하는 열차를 탔다.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가는 열차였던 것 같다. 식당차가 붙어 있었..

오블라디 오블라다

나는 1960년대에 십 대 시절을 보내서 데뷔 때부터 해산 때까지의 비틀스와 동시대적인 체험을 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을 대단찮게 생각했다. "예스터데이"가 히트했을 때도, 처음에는 '좋은 곡이군' 하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예스터데이"만 나와서 결국에는 '빌어먹을, 제발 그만 좀 틀라구' 하며 진절머리를 쳤다. 지금도 "예스터데이" 전주가 들리면, '젠장, 작작 좀 틀어 줘' 하는 생각이 조건반사적으로 치밀어 오른다. 미안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에는 재즈와 클래식에 빠져 비틀스는 경원시하는 쪽이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흥' 하고 생각했던 것도 있다. 어쨌든 한창 건방질 때여서 그런 돼먹잖은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해도 라디오에서..

네코야마 씨는 어디로 가는가?

전에 어딘가에서 아주 어려운 일을 비유해서 '고양이에게 손(앞발) 내밀기를 가르치는 것만큼 어렵다'라고' 썼더니, '아뇨, 우리 고양이는 손 내밀 줄 압니다.' 하는 메일이 상당히 많이 왔다. 맙소사, 놀라웠다. 어떤 사람은 먹이를 주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면, 대부분의 고양이는 손 내미는 것을 익히게 된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고양이를 키워왔다. 그러나 도저히 그런 훈련이 가능한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고양이에게 손 내미는 것을 가르친다는 생각을 나는 결코 하지 못했다. 나의 경우,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사이좋은 친구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한 파트너여서 재주를 가르친다는 것은 이미지로서 '좀 아닌데'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네코야마 씨(이런 이름으로 의인화해서 부르고..

싸움을 하지 않는다

내 성격은 결코 온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솔직히 타인과 싸움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적어도 내 쪽에서 말하자면 누군가와 싸워서 헤어진 기억은 전혀 없다. 욕을 들어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의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일 때문에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서 심한 말을 듣는다. 말로 들을 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로 인쇄되기도 한다. 칭찬받는 일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비난받는 쪽이 많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는 바보다.'라든가 '무라카미는 위선자다.'라든가 '무라카미는 거짓말쟁이다.'라든가.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그런 말들을 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솔직히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좋은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성격 이상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

이걸로 됐어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태어나서 '무라카미 씨는 핸섬하군요.' 하는 칭찬을 받은 적이 나는 한 번도 없다.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여자가 '길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사모하게 되었어요.' 하고 편지를 건네 준 경험도 없다. 못생겨서 시선을 돌리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지만(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은 있겠군),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본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뿐만이 아니라, 이 불완전하여 내일도 모르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런 너무나도 불확실하고 어두컴컴한 시공간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꼬박꼬박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내 멋대로 상상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걸까. 아내는 종종 '아, 좀 더 미인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거울..

올림픽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올림픽 일기

7월 20일 (월) 여름의 아침식사로는 누가 뭐래도 샐러드가 최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미역과 토마토와 양상추를 마구 섞은 뒤, 거기에 특제 생강 드레싱을 쳐서 맛있게 먹는다. 더운 여름엔 샐러드 말고는 아침에 먹고 싶은 것이 없다. 일본에서는 여름에 미역이 금메달이다. 은메달은 찬 모밀국수, 동메달은 빙수다. 외국에서 여름 내내 머물다 보면 가장 곤란한 것이 미역이 없다는 점이다. 어째서 서양 사람들은 미역을 먹지 않는 걸까? 언젠가 시애틀에서 페리 보트를 탔을 때, 바다 밑바닥에서 거대한 미역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먹고 싶어서 군침을 흘린 적이 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어제부터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감상을 말한다면, 올림픽이라는 것은 20년쯤 세월이 지나..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특정한 상황이 되면 반드시 머리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이를테면 하늘이 깨끗한 밤에 별을 올려다보며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Like Someone in Love)"이라는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린다. 재즈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스탠더드 곡이다. 아시는지. 요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기타 소리에 넋을 잃고 있기도 해.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있다. 의식은 어딘지 기분 좋은 영역을 살랑살랑 나비처럼 떠돌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잊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긴 시간이 흐른 뒤이다. 생각건대,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열여섯에서 스물하나까지가 아닐까.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으니 간단히 단언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