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410

끝으로 젊은이에게 보내는 메시지

나는 비교적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서 1년 이상 연재를 계속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 에세이는 1년 예정이었는데 1년 9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것은 바로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 덕택이다. 이번에는 옆에 어떤 그림이 붙을까 하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글이 써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주에는 무얼 쓸까? 쓸 게 없는 데 난처하군.' 하는 경우는 없고, 매주 '자아, 그러면 이번에는...' 하는 기분으로 쓱쓱 써 나갔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이 라는 잡지가 주로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격려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허리 근처까지 찰랑찰랑한 중년의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어서(미즈마루 씨는 가슴 근처까지), 특별히 새삼스럽게 젊은 사람들에게 아첨을 할 생각..

랑겔한스섬의 오후

옛날이야기. 중학교에 들어가던 봄, 생물 첫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잊고 안 가져와 집에까지 가지러 돌아간 일이 있다. 우리 집은 그때 학교에서 걸으면 십오 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냅다 뛰어서 왕복을 하면 수업에는 거의 지장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는 아주 순진한 학생이어서 -옛날 중학생들은 모두 순진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하신 말씀대로 열심히 뛰어 집으로 가서는 교과서를 들고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마시고서는 다시 학교를 향해서 뛰었다. 우리 집과 학교 사이에는 강이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리 깊지도 않고 깨끗한 물이 졸졸졸 흐르는, 그리고 거기에 낡은 다리가 걸려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 다리였다. 그 주변은 공원이고, 협죽도가 눈가리개..

무즙

낙타사나이가 여느 때처럼 식사 쟁반을 들고, 지하실 계단을 비칠비칠 내려왔다. 여전히 더럽고, 추한 사나이다. 낙타사나이는 하루하루 더 불결해지고 더 추해져 가는 것 같다. 콧물은 뚝뚝 아래로 떨어지고, 눈에는 커다란 눈곱이 끼어 있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이빨은 누런 데다 다 바스러졌고, 귓밥은 때 때문에 변색되어 있고, 길게 자란 머리는 비듬투성이라, 걸을 때마다 하얀 비듬이 하늘하늘 주변에 떨어진다. 입 냄새로 말하자면 엄청나다. 그런 사나이가 날라 온 식사 같은 걸 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낙타사나이는 수프 접시 안에 탁탁 침을 뱉고 나서 즐거운 듯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굶어 죽어도 나는 모른다고. 하긴 넌 어차피 죽을 거니깐 마찬가지겠군. 헤헤헤." 보통 때라면 이까..

인도 장수 아저씨

대략 두 달에 한 번 정도, 인도 장수 아저씨는 우리 집에 온다. "슬슬 인도 장수 아저씨가 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엄마가 말하면, 마치 그 말을 듣기나 한 듯 2, 3일 뒤에는 인도 장수 아저씨가 우리 집 현관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엄마, 인도 장수 아저씨 일은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엄마가 생각하면 언제나 인도 장수 아저씨가 와버리니깐." 이라고 말했고, 엄마는 그때에는 "그러게 말야, 엄마가 생각을 하는 게 잘못인가 보지?" 하며 반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랬던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슬슬 인도 장수 아저씨가..." 라고, 또 깜박 말해버린다. 그러면 이내 인도 장수 아저씨는 확실하게 우리 집 현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도 장수 아저씨는 ..

장편 끝내고 2주 동안 영화만 봤다

장편소설이 겨우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2주일 동안 영화만 봤다. 금년 봄에는 등 상당한 역작이 구색별로 갖춰져 있어서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다만 나는 와 같은 부자지간이 즐길 수 있는 작품에는 역시, 끝이 없는 이야기처럼 제대로 된 일본어 제목을 붙여 주는 것이 친절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기다란 영어 제목은 어린애들이 기억하기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의 팬이기도 해서,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주연하는 를 상당히 좋아한다. 와 과 을 함께 섞어 놓은 것 같은 스릴 넘치는 이 영화는 미국에서 6주간 연속 관객 동원수 제1위를 기록하여 업계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독일 사투리가 심한 거구의 사나이가 주연한 영화가 대히트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놀드 슈왈츠네거는 19..

나 홀로의 조조 상영 영화관

얼마 전 볼일이 있어서 교토에 여행을 갔었는데, 시간이 남아서 언제나처럼 눈에 띄는 영화관으로 뛰어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식으로 여행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도쿄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영화관에 가는 것도 아닌데, 낯선 도시에 여행을 가서는 영화관의 간판이 눈에 띄면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교토에서는 라고 하는 전쟁영화를 보았는데, 아침의 조조 상영을 보러 들어갔기 때문에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객석에는 나 한 사람밖에 손님이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쯤 되었을 때, 두 번째의 손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얼마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은 주위가 휑뎅그렁해서 불안..

대학의 영화과 입학-영화만 봤다

나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의 연극영화과라는 데에서, 영화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영화에 정통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람에 비해서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학교육이라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의 영화과에 들어가서 좋았던 점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거다. 영화과에도 일단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원서로 읽는다든가 하는 강의가 있어서 예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학생 쪽에서는 '체! 이론만 해가지고 어떻게 영화를 알 수 있겠어?'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했느냐, 수업을 빼먹고 아침부터 명화좌(역주: 옛날 명작만 상영하는 곳)에서..

언제나 비슷한 옷을 입는 나

며칠 전에 낡은 와이셔츠를 세 장 가량 처분했기 때문에, 그 대신 입을 것을 하라주쿠의 '폴 스튜어드'로 사러 갔다. 나는 특별히 옷에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어서 언제나 비슷한 것만 입는 편인데, 와이셔츠를 사는 것만은 비교적 좋아한다. 남성복 전문점의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와이셔츠를 보고 있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지라든가 블레이저 코트라든가 스웨터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와이셔츠뿐이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유로 와이셔츠를 좋아한다. 새로 사 온 와이셔츠 포장을 풀 때 희미하게 풍기는 옥스퍼드 면 냄새를 좋아하고, 빨아서 빳빳하게 마른 와이셔츠를 다림질해 나갈 때의 그 감촉도 좋아한다. 고교시절과 대학시절에는 VA..

홀리오 이글레시아스

속아서 모기향을 빼앗긴 뒤, 우리한테는 바다거북의 습격에서 몸을 지킬 만한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전화나 우편으로 통신회사에서 새 모기향을 주문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짐작했던 대로 전화선은 끊겨 있었고, 우편배달도 보름 전부터 끊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저 교활한 바다거북이 그런 일을 쉽사리 하도록 놓아둘 리가 없다. 그 녀석은 여태까지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기향 때문에 실컷 쓴 맛을 보았었다. 지금쯤 틀림없이 푸른 바다 밑바닥에서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밤에 대비해서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린 인제 끝장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밤이 되면 둘 다 바다거북에게 먹혀 버릴 거예요." "희망을 버려선 안돼." 내가 말했다. "지혜를 짜내면 절대로 바다거북 따위한테 지지 않을 거야." "..

인디언

그 친구는 정말로 많은 돈을 벌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본인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회사를 몇 개나 가지고 있었고 그 하나하나의 회사가 또 다른 하나하나의 회사에게 마치 질투심 많은 다족동물과 같이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A회사는 B회사에게 돈을 빌려주고, B회사는 C회사를 착취하고, C회사는 D회사를 교묘하게 속이는 그런 수법이었다. 그래서 그의 회사조직이 얼마나 수익을 올리고 있는지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잉크 지우개처럼 못생긴 회계사가 찾아왔다.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회계사는 작은 볼펜으로 무언가 숫자를 썼다. 그리고 칠판에다 그래프를 그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금을 B회사로 옮기지요." 회계사는 권유했다. "음-." "허나 이건 명목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