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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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혼자 여행하는 여자를 만날 때

연중행사인 이사를 해서-도대체 이 18년 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집 안이 혼란스러워 아무튼 소설을 쓸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야쓰가다케의 호텔에 한 열흘 정도 틀어 박혀 작업을 하기로 했다. 간혹 호텔에 틀어박혀 일을 하면 기분 전환도 되고 별로 싫진 않지만, 도심지의 호텔에서는 대개의 경우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놓는 바람에 몸에 오히려 해로운 수가 많다. 그래서 야쓰다가케까지 일부러 갔던 것이다. 조용하고 공기도 좋고 일 자체가 잘 진행된다. 다만 리조트 호텔에 묵으면서 작업하는 것의 문제점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만을 생각해버리는 데 있다. 이제 슬슬 아침을 먹어야지 라든가, 점심은 몇 시에 식당에 가면 된다든가, 오늘 저녁 메뉴에는 뭐가 나올까라든가,, 하루 종일 그런 것만 생각하게 ..

자동차 유감

나는 운전이란 걸 하지도 않고, 또 자동차라는 물건 자체에도 별 흥미가 없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어쩐 일인지 운전을 하는 사람의 수가 굉장히 적다. 대충 아는 사람 중의 30퍼센트 정도만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일본 총인구의 60퍼센트 가까이가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한심할 정도로 적은 숫자다. 어째서 이렇게 내 주변 사람들이 운전하지 않는가 하면,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 불필요한 신경을 써야 하고, 쓸데없는 돈이 들며, 술도 마실 수 없고, 세차니 차량 검사니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서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야 홋카이도 들판 한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면 차 없이는 생활할 수 없을 테지만, 도쿄 근교..

장수하는 것도 말이지

요절과 장수 중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물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고 나는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 사전을 펴놓고 동서고금의 작가들의 얼굴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 장수하는 것도 좀 그렇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어 죽은 작가들은 언제까지나 젊을 때 얼굴이 남아 있는 데 비해, 장수를 한 작가는 죽기 직전의 사진이 당연한 듯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랭보나 푸슈킨의 사진은 항상 젊고 발랄하다. 거기에 비해 톨스토이나 시가 나오야는 벌써 '노인네!'하는 느낌이다. 시가 나오야? '아, 그 교과서에 사진 실린 대머리 할아버지 말이지.' 하게 되어 버린다. 그들로서 보면 ''한 번쯤은 젊을 때 사진도 좀 실어 봐. 이거야 마치 나는 평생 노인네였던 것 같잖아.'..

탈모와 스트레스

며칠 전 어떤 주간지로부터 라는 난에 싣고 싶으니 20대 시절에 찍은 사진을 한 장 빌려 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지금도 그렇지만) 20대에 찍은 사진이라고는 거의 없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뒤적이다 보니 대여섯 장 정도가 나왔다. 그런데 불과 10년밖에 안 된 사진을 보고 발견한 사실인데, 20대 시절보다도 지금이 확실히 머리숱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헤어스타일이 달라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아도 지금이 더 머리숱이 많다. 부푼 데다가 밀도도 높다. 이발소에 다니는 횟수도 전보다 잦아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머리숱이 많아졌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은 "옛날에 비해 머리를 쓰지 않게 돼서, 스트레스가..

욕실 속의 악몽

나는 학생 때 동급생한테서 "너는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나는 교실 안에서 생각에 잠긴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니까, 그 무렵부터 나의 '방심' 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아니 전보다 한층 더-나는 자주 '방심' 상태에 빠진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긴장하고 있으니까 그러한 일이 거의 없지만, 혼자 있게 되면 몇 분 간인가 의식이 전혀 없는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된다. 특히 욕실에서 심한데, 무엇인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헤어브러시에 치약을 얹어서 이빨을 닦고 있기가 일쑤고 칫솔에 샴푸를 짜서 묻힌 적도 있다. 세 번에 한 번은 린스로 머리를 감은 뒤에 샴푸를 사용하고, 셰이빙 크림을 얼굴..

재수 좋은 고양이를 만날 확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어제 우리 집 고양이가 등뼈가 어긋나서 입원을 했다. 이 고양이는 여덟 살 된 암놈의 샴 고양이로, '재수 좋은' 고양이다.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양이 중에는 '재수 좋은' 고양이와 '재수 없는' 고양이의 두 종류가 있다. 시계 같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만은 길러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외견상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혈통도 믿을 수가 없다. 어쨌든 몇 주일 동안 키워보고 나서야 '응, 이건 재수가 좋은 놈이군.' 이라든가, '아뿔사! 재수 없는 놈이군.' 하는 것을 겨우 알 수 있는 것이다. 시계 같은 거라면 바꿔올 수도 있다. 그러나 고양이의 경우에는 그것이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해서 어딘가에 내 다 버리고,, 그 대신에 다른 놈으로..

봄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진 오후

옛날이야기. 중학교에 들어간 해 봄, 생물 첫 시간에 교과서를 잊고 와서, 집까지 생물책을 가지러 돌아간 적이 있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15분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까, 뛰어서 왕복하면 수업 시간에는 거의 지장 없이 되돌아올 수가 있었다. 나는 매우 순진한 중학생이었으니까(옛날 중학생들은 모두 순진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열심히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 교과서를 집어 들고,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들이키고 나서 다시 학교를 향해 뛰었다. 우리 집과 학교 사이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그다지 깊지 않고 물이 깨끗한 강인데, 그곳에 오래된 돌다리가 걸려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 다리이다. 주위는 공원으로 되어 있어서, 협죽도가 눈가리..

내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가끔 어떤 설문 조사에서 취미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난감해하는 일이 있다. 제대로 답하면 독서와 음악이지만, 요즘에는 책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건 취미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귀찮아서 그럴 때는 대개 겸손하게-그렇지도 않나?-'무취미'라고 대답하기로 했다. 소설을 쓰게 된 뒤로는 독서가 일의 일환이 되어 버렸으므로 이건 이미 현실적으로 취미라고 부를 수 없다. 그래서 가까스로 음악만이 취미 영역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음악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취미로 남겨 본업이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고 있으면서 특정 분야를 피해 지나가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집에서 나 말고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최근에 어떤 소설을 읽다가, 돈을 내고 여자와 성교하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남성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하는 문장을 마주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문장을 읽으면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과연,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게 반드시 내가 그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사고방식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납득할 뿐이다. 적어도 그러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남자가 존재한다는 상황은 납득이 간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나도 돈을 내고 여자와 성교하지는 않는다. 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별로 해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신념의 문제가 아니고, 이른바 취향의 문제다. 그래서 돈을 내고 여자와 자는 사람을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연히' 그러한 처지가..

책 한권 갖고 무인도에 간다면 무슨 책을?

책을 한 권만 갖고 무인도에 간다면 무슨 책을 갖고 갈 것인가, 하는 앙케트가 흔히 나온다. 어째서 일부러 무인도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언저리의 사정과 경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쫓겨나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자진해서 가는 것일까? 누가 자진해서 무인도에까지 가겠는가) 별로 앙케트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쨌든 잔소리를 늘어놓아 봤자 소용없다. 무인도에 어떤 책을 갖고 갈 것인가? 나는 내가 쓴 소설책을 갖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것을 읽고 '아, 이 대목은 안 좋아'라든가 '이 대목은 이렇게 고쳐야겠어'라든가' 하며 열심히 볼펜으로 써넣을 것이다. 아마 이런 일을 하다 보면 한 달쯤 후에는 완전히 딴 소설로 탈바꿈해버릴 것 갖고 가지 않더라도 내가 자꾸 소설을 써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