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작은 과자빵 이야기

chocohuh 2021. 6. 2. 12:22

컴퓨터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컴퓨터 스위치를 누른 후부터 화면이 셋업 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긁어모을 때도 마찬가지다. 화면을 노려보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지는데(모든 새로운 편리함은 예외 없이 새로운 종류의 불편함을 낳는다), 그럴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지?

 

나는 화면은 일체 잊어버리고 옆으로 돌아앉아 여유롭게 문고판 책을 읽는다. '넌 너 좋을 대로 해. 나도 나 좋은 거 할 테니까.'하는 식으로. , 그런 식으로 잠깐씩 단속적으로 읽는 것이니 장대하고 줄거리가 복잡한 책(예를 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라든가)은 용도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굴러다니는 잡지를 읽는 것도 어지간히 '시간땜질' 같은 느낌이 들어 재미가 없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동화가 가장 좋았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잉글랜드 동화집/스코틀랜드 동화집/아일랜드 동화집>으로 가족들의 책장에 있는 것 중에서 적당히 골라 온 것인데, 훑어보는 동안 재미있어서 짧은 시간의 독서지만, 제법 심취하게 되었다. 원본이 1954년에 출판된 것이라 지금 읽으면 문체가 다소 고풍스러운데, 그 점이 오히려 더 동화답구나 하는 바람직한 맛을 내고 있다.

 

'옛날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작은 강 옆의 작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아주 명랑해서 조금도 화 같은 것은 내지 않았습니다. 집도 정원도 있고, 그리고 건강한 두 마리의 황소와 다섯 마리의 암탉과 한 마리의 수탉도 있었습니다. 또 늙은 고양이가 한 마리, 새끼 고양이가 두 마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정말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 분위기가 있지 않은가. 이야, 지금부터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까 하면서 소년기에서 한참 멀어진 인간이 읽어도 상당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이야기의 주역은 바로 '작은 과자빵'에게로 넘어가고, '부자라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처음에만 나왔을 뿐,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아예 완전히 빠져 그대로 망각 속에 방치되어 버린다. 아주 이상한 이야기이다. 동화에는 그런 구조적인 이상함이 항상 따라다녀서 더욱 흥미롭다.

 

컴퓨터를 기다리는 시간에 동화책 페이지를 넘기는 것, 참 좋다. 화면이 셋업 되어도 그대로 더 읽을 수 있기도 하고. 과자빵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지, 관심이 있는 분은 스스로 읽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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