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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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진구구장에 대하여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10월 초순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에 문예 잡지의 편집자와 둘이 진구 구장에 가서 감을 먹고, 이야기를 하면서 야쿠르트 대 주니치의 일정 때우기 게임을 구경하는 일이다. 나는 꼭 한 번 그렇게 해본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것만큼 처량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날씨에 일부러 야구장을 찾아오는 사람치고 변변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내 근처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시합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주니치의 외야수를 놀려대며 즐기고 있었다. "야, 임마, 너. 이봐, 센터 XX(이름) 멍청한 놈. 잠깐 이쪽 좀 보라니까, 이봐, 야!" 이런 식이다. 이런 걸 몇 시간씩이나 하고 있으니까, 듣고 있는 쪽도 나쁘지만은 당하는 쪽은 더 기분 나쁠 것 같다. 더군다나 ..

빌리 와일더의 선셋 스트리트

나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의 연극영화과라는 데에서, 영화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영화에 정통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람에 비해서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학 교육이라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와세다의 영화과에 들어가서 좋았던 점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거다. 영화과에도 일단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원서로 읽는다든가 하는 강의가 있어서 예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학생 쪽에서는 '체! 이론만 해가지고 어떻게 영화를 알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했느냐, 수업을 빼먹고 아침부터 에서 영화를 보았다. 수업을 빼먹는다고 해도 영화..

사전 이야기

사전에는 대개 삽화가 들어가 있다. 나는 그 삽화를 무척 좋아한다. 삽화라고는 해도, 그것은 별로 독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구의 의미를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겐큐샤의 사전으로 말하자면, 퍼골라(Pergola)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시렁 지붕이 있는 정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미지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옆에 실제로 퍼골라(Pergola)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담쟁이 덩굴이 감겨 올라간 기둥과 지붕이 있고 덩굴 밑 벤치에는 젊은 남녀가 걸터앉아 양손을 맞잡고 있다. 남자쪽이 좀 더 적극적이지만, 여자쪽도 별로 싫지는 않은지, 은근한 눈으로 대답하고 있다. '이상한 짓..

분쿄쿠 센고쿠와 고양이 피터

미타카의 아파트에서 2년쯤 살고 나서 분쿄쿠의 센고쿠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고이시카와 식물원 근처이다. 어째서 교외에서 다시 단숨에 도심으로 되돌아왔느냐 하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아내의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내의 친정집은 침구 상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트럭을 빌려 이사를 했다. 이사라고 해도 짐이라고는 책과 옷, 고양이 정도밖에 없었다. 고양이는 '피터'라는 이름이었는데, 페르시아종과 얼룩 고양이의 혼혈로 개만큼 커다란 수고양이였다. 사실은 침구 상점에서 고양이를 키울 수 없으니까 데려오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고 갈 수가 없어서 결국 데려가고 말았다. 아내의 아버지는 한동안 투덜거렸지만, 얼..

꿈처럼 몸에 익숙한 만년필

만년필 가게는 대로에서 두 골목쯤 떨어진 옛날의 상점가 한가운데쯤 있었다. 가게의 넓이는 유리문 두 개 정도로, 간판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문패 옆에 '만년필 가게'라고 조그맣게 씌어져 있을 뿐이었다. 형편없이 엉성하게 만든 유리문은 열리고 나서 제대로 닫히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은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물론 소개장이 없으면 안 된다. 시간도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하지만 말이야, 꿈처럼 마음에 쏙 드는 만년필을 만들어 주거든, 하고 친구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찾아왔다.. 주인은 예순 살쯤 되어 보였는데, 숲 속에 사는 거대한 새 같은 풍모였다. "손을 내놓아 보게" 하고 그 새가 말했다. 그는 나의 손가락 하나하나의 길이와 굵기를 재고, 피부의 기름기를 확인하고, 바늘 ..

에게해 2 대 1

서른 살이 넘으면 여름이 섹스의 계적이라는 말 따위와는 별로 관계없이 혼자 무료하게 맥주를 계속 마셔댈 뿐이지만, 어쨌든 여름은 성적으로 고양되는 계절인 모양이다. 특히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여름의 에게 해 같은 곳은 그야말로 성의 도가니 같아서, 아베크족이 대낮부터 길 한가운데에서 위장까지 닿으라는 듯이 진한 키스를 펼쳐 보인다. 아무래도 좋지만, 그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육식을 하는 짐승'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트워트 공항에서 단체로 밀려나오는 영국 펑크족 소년 소녀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벌써 성기가 백팩킹하고 로큰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리스는 관광국이라서 여행자들의 볼썽사나운 대부분의 품행은 눈감아주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물론 한계가 있어서 ..

서든데스

안경을 쓰면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잘 보인다. 자신은 지금껏 알지 못했어도 정말 눈이 나빠진 것이 갑자기 잘 보인다. 자신은 지금껏 알지 못했어도 정말 눈이 나빠진 것은 틀림없다. 안경을 쓰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면 아마 거의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버린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았던 부분도 선명히 보이는 예가 있고, 이제까지 완전히 볼 수 없었던 부분이 잘 보이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원숭이'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내가 이따금 길모퉁이에서 원숭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안경을 쓰고 나서였다. 분명히 단언해서 말할 수 있지만 내가 그때까지 원숭이를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는데, 내가 넉 달 전에 안경을 쓴 다음부터 모두 일곱 ..

오오모리 가즈키 감독과 나

오오모리 가즈키는 효고 현에 있는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의 나의 3년 후배이며, 내가 쓴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영화화 되었을 때 감독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 친구는 겉보기에는 짐승 같고, 부랑자처럼 술을 퍼마시며, 지저분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고, 자주 큰소리를 지르지만, 꽤 좋은 사람이다. 최소한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그러나 아무래도 이건 칭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군). 오오모리는 현재 아시야 시 히라다초의 맨션에 살고 있으며, 일거리도 없어서 대낮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근처에 있는 해안을 산책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안됐다. 소설가라면 의뢰가 오지 않더라도 혼자 꾸준히 소설을 쓸 수 있지만, 영화감독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자금이 필요하고, 스태프가..

도난당한 폭스바겐 코라드

12월 5일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자면 길어지지만, 어쨌든 내 자동차가 도난을 당했다. 집 앞에 세워두었던 나의 폭스바겐 코라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곳에 흰색의 혼다 어코드가 세워져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둑맞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 자동차가 혼자서 제 멋대로 어딘가로 가 버릴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정말 난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보다 2주일 전에 하버드 광장에서 내 소중한 자전거를 도둑맞았던 참이다. 가로수의 몸통에 체인만 남아 있고 자전거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전에는 대학의 체육관 사물함이 훼손당하고 스쿼시용 운동화를 도둑맞기도 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까지 도둑맞았으니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

도그푸드

집에 있는 개는 보통 한 번 밥을 먹는데 시간이 약 사십초에서 오십초 걸린다. 하루에 두 번 밥을 받아먹으니, 스물네 시간 중 약 이 분 정도는 밥을 먹는데 소비하는 시간이 되는 셈이다. '토로'란 개에 있어 욕망의 우선순위를 매겨보면 '밥을 받아먹는 일'이 당당히 톱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루 스물네 시간 중에서 단 사십초면 너무 적은 게 아닌가 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게 된다. 안정감 있는 플라스틱 황색 용기에 사람 손으로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분량, 그것도 반 건조한 상태의 개 먹이가 주어진다. 사람 손이 그릇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개는 밥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마치 사자탈춤을 추듯 긴 털을 마냥 흔들어대며 쩝쩝거리고 밥을 먹는다. 개먹이가 서로 부딪친다. 삼십 초 정도가 지나면 대체로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