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전체 글 2671

설날은 즐거워

1 옛날부터 설날이란 날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안 갔다. 어째서 1월 1일이 설날이고, 어째서 설날이 새해의 시작인지, 그런 것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필연성이 전혀 없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치로 따지면 동짓날이 지난 그 다음 날부터 신년이 시작된다고 하는 편이 그나마 타당성이 있을 듯하다. 어째서 1월 1일이 한해의 시작이 아니면 안 되는 걸까? 그렇긴 해도 거기엔 물론 무슨 필연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인류가 몇 천 년이나 아무런 불평없이 그런 습관을 꼬박꼬박 지켜왔을 리가 없다. 그 점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조사해 봐야지, 조사해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껏 조사하지 못하고 있다. 머잖아 틀림없이 조사해 봐야지. 그런 까닭으로 나는 설날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대학생..

이상한 하루

며칠 전 갑자기 딕킨스의 가 읽고 싶어져서 모 대형서점에 가서 찾아보았는데, 이게 도대체 눈에 띄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안내데스크에 있는 젊은 여점원에게 "미안합니다만, 딕킨스의 를 찾고 있는데요." 라고 했더니, "그게 어떤 분야의 책인데요?" 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엣?" 라고 했더니, 상대방도 역시 "엣?" 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딕킨스의 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이냐니까요?" "에, 그러니까, 소설인데요."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 그것에 관해서는 소설 카운터에다 문의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소위 서점의 안내라면서 딕킨스를 모른다니"라며 아연했지만,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딕킨스 같은 건 우선 읽기조차 않으니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징크스

검은 고양이기 앞길을 가로막아도 이건 아무 일도 아니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노벨상에 낙선되는 날에는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진다. 작년에 공중전화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전화는 안 되고 돈만 먹었다. 자동차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다친 일도 있었다. 핫도그의 비엔나소시지를 통째로 떨어뜨린 일도 있었다. 비 오는 날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방금 사온 우산을 찢겨버린 것처럼. 밤에 강도가 침입해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 아직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교실에 들어가 미인 여학생들이 앞자리에 앉아도 그건 아무 일도 아니다. 즐겁기도 하지만 신경이 무디어진다. 그러나 역시 목숨 잃는 경우가 최악이다. 며칠 전 그 날이 복권 파는 날인 것처럼.

여고생의 지각에 대하여

나는 대충 시간에는 꼼꼼한 편이라서, 여간한 일이 없는 한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부터 쭉 그래왔던 게 아니고, 학생시절에는 지각 상습범이었고,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뻔뻔스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하여 타인에게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도록.' 이라고 명령하는 입장이 되고 부터는 내 자신의 지각벽도 깨끗이 나아 버렸다. 지각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킨 당사자가 지각을 해서야 누가 그 인간의 말을 듣겠는가.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학생 시절에는 지각쯤 해도 별 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는 시간이 좀 늦어진다고 해서, 별 재미도 없는 수업의 앞대가리 부분을 좀 못 듣는다고 해서, 그런 것을 손실..

미케네의 소혹성 호텔

그리스에 미케네란 이름의 동네가 있다. 슈리만이 아가멤논의 묘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명하다 해도 미케네는 정말 조그만 마을로, 규모는 다케시타 거리 정도이다. 관광버스가 오면 사람들로 웅성웅성 붐비지만, 버스가 떠나면 소음 하나 없는 조용한 마을로 되돌아간다. 지리적으로는 아테네에서 당일 코스에 들어가니까 구태여 이곳에 머무는 손님도 없다. 나는 이 미케네 마을을 제법 좋아한다. 미케네에서 가장 좋은 호텔은 '르 푸치 플라넷' 소혹성이란 이름의 호텔이다. 하기야 우리의 감각으로는 호텔이라기 보단 펜션이나 산장에 가깝다. 설비도 그리스에 있는 호텔의 95퍼센트가 그렇듯 대충대충이고, 방도 딱히 깨끗하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호텔은 아담하여 차분하게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다. '르 푸치 플..

책 이야기

1. 버릴 책과 간수할 책 우리 집에 책이 너무 많아져서 며칠 전 책장을 새로 사들였다. 직업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책이란 점점 늘어나기 마련인 그런 것이다. 짜증이 나서 1/3 정도는 팔아 치우자고 아침부터 선별 작업에 착수했는데, 막상 처분을 하려고 하니 '이건 이미 절판된 책이고', '또 언제 읽을지도 모르니까', '팔아 봤자 싸구려인데'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전혀 숫자가 줄지 않는다. 제일 화가 나는 것은 신간 하드커버 원서를 사 두었는데 읽지도 않은 사이에 번역본이 잽싸게 나와 버린 예로, 번역본이 있는데 힘들게 영어로 책 읽을 기분도 나지 않고, 영어책 따위 팔아봐야 돈도 안 되고, 이런 경우엔 정말 울고 싶어 진다. 그리고 보존해 두어서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잘 분간이 안 가는 잡..

내가 만난 유명인

1 나는 소위 유명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별로 만난 적이 없다. 이건 어째서인가 하면 그냥 내가 눈이 나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 이상 깊은 의미는 없다. 눈이 나빠서 좀 떨어진 데 있는 사람의 얼굴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경우라도, 나는 비교적 주변 상황에 대해 부주의한 편이라, 그만 무심결에 여러 가지 일들을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로부터 곧잘 '무라카미는 길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한다.'는 비난을 듣는다. 그런 까닭으로, 유명인과 우연히 만났다 하더라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내 마누라는 그런 일에 있어서는 실로 눈이 밝은 사람으로, 아무리 혼잡한 중에서도 어김없이 유명인의 존재를 캐치한다. 이런 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산세도 서점에서 생각한 일

며칠 전 산세도(三省堂) 서점에서 책을 사고 있으려니, 같은 계산대에서 내가 쓴 책을 사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책을 두 권 샀는데, 그중 한 권이 내 책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권이 뭐였는지 그때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책의 저자라고 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책이 다른 어떤 종류의 책과 더불어 구매되는가에 대해 상당히 흥미를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그 가상 이웃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이상하다고 하면 책방에서 누군가가 자기의 책을 사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도 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소설을 썼을 무렵 출판사 사람이 '자기 책을 사고 있는 사람을 책방에서 발견하게 되면, 그것은 베스트셀러라고 여겨..

고양이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

우리 집은 비교적(아니, 꽤) 시골에 있어, 사방에 도마뱀이 우글거린다. 도마뱀이란 외견상으로는 그다지 인간들에게 사랑을 못 받는 타입의 동물이지만, 사람에게 이렇다 할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벌레도 잡아먹어 주는 데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좀 수줍어하는 듯한 구석도 있어, 결코 나쁜 성격을 지닌 동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는 하여튼 도마뱀 골려 먹기를 세끼 밥보다 좋아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도마뱀을 흔들어대며 장난을 친다. 도마뱀 쪽은 고양이가 붙잡고 뒤흔들어대는 게 싫어 곧바로 꼬리를 끊고 달아난다. 자연계란 참으로 미스테리어스 한 것으로, 고양이는 열번이면 열 번 다 도마뱀의 몸뚱이를 쫓지 않고 잘려진 꼬리쪽에 집착한다. 어째서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

개미에 관하여

1 개미란 동물은 위대하다. 빈 말이 아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옛날부터 개미를 쳐다보는 걸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곧잘 개미를 관찰하는데, 며칠 전에도 집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발밑에서 열심히 집을 짓고 있는 개미 떼들이 있어, 십오 분 정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개미란 동물은 땅속에 구멍을 파서 집을 짓는데, 구멍을 팔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판 흙을 어떻게 땅 위로 운반해 내는가이다. 이 점은 영화 를 보신 분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제법 성가신 문제다. 개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면 그게 또 참 단순하게도 모두들 한 알갱이씩 흙을 앞발로 부둥켜안고 지상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꽤 고된 노동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개미라고 하는 것은 일하는 게 본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