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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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부 생활

결혼하고 2년째쯤 되었을 때의 일인데, 나는 반년 정도 '주부(하우스 허즈번드)' 노릇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극히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반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페이지였던 것 같다. 하긴 그 당시에는 특별한 '주부' 노릇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우연찮게 사소한 인연으로 아내가 일하러 나가고 나는 집에 남게 된 것이다. 이럭저럭 벌써 12-13년 전 얘기로, 존 레논이 '주부'가 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전이다. '주부'의 일상은 '주부(하우스 와이프)'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평온하다. 우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아내를 출근시킨 뒤 뒷정리를 한다. 싱크대 속에 있는 그릇들은 곧바로 닦아야 하는 것이 가사의 철칙 ..

토끼정 주인

나는 나의 단골집을 소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면 왠지 모르게 '잘난 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섣불리 소개를 해서 가게가 붐비게 되어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토끼정'의 장소와 전화번호를 여기에 쓰지 않기로 하겠다. '토끼정'은 우리 집 근처에 있고, 나는 종종 이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손님이 열 명만 들어가면 꽉 차 버릴, 카운터만 달랑 있는 작은 집인데 꽉 차는 일이 거의 없다. 인테리어도 극히 평범하고, 바깥에는 간판도 달려 있지 않다. 입구 옆에 '서양 정식,토끼정'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무척 조용히 영업을 하고 있는 집이다. '토끼정'에는 두 종류의 요리밖에 없다. 하나는 매일 바뀌는 정식이고, 또 하나는 고로케 정식이다. 두 음식..

찰스턴의 유령

찰스턴에서 유령이 나오지 않는 오래된 집을 발견하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다,라고, 어떤 책에 써져 있었다. 뭐 다소 문장상의 과장은 있었다 해도, 확실히 해질 무렵에 찰스턴의 고요한 코블스톤 거리를 걷다 보면 정교하게 세공된 검은 철문 너머로, 혹은 어렴풋한 등불이 뿌옇게 비치는 현관 한 구석에서 뭔가 이상한 그림자를 본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한밤의 정원은 어쩐지 울적하고, 거대한 떡갈나무 가지에 몰(역주: 인도 모골 지방이 원산지인 돋을무늬의 모직물)처럼 축 늘어진 착생 식물이 강바람에 흔들거리며, 땅거미 속에 백일홍이 아련하게 떠 있다. 찰스턴이란 곳은 그런 도시다. 모든 것이 오래되고 고요하며, 그리고 우아하다. 기왕 나올 바에는 유령도 뉴욕 시티보다는 이런 도시에 출몰하는 쪽이 훨씬 기분이 좋을..

고양이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며칠 전 우리 집 고양이가 죽고 말았다. 이 고양이는 무라카미 류 씨에게서 얻어 온 아비시니언 종으로 이름은 '기린'이었다. 류 씨 집에서 왔기 때문에 '기린'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맥주(역주: 일본의 유명 맥주 상표에 '기린'이 있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이는 네 살로, 사람으로 따지자면 아직 20대 후반이나 서른 정도니까 요절인 셈이다. 이 고양이는 방광에 결석이 쌓이기 쉬운 체질이고 전에도 수술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항상 다이어트 캣 푸드(라는 게 이 넓은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를 줬는데 결국 방광이 악화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애완동물 전문 업자에게 화장을 의뢰해서 그 뼈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미다나(역주: 집 안에 부적을 모시는 선반)에 올려놓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

8월의 크리스마스

행위 그 자체는 그다지 곤란한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하기가 곤란한 종류의 일이 이 세상에는 몇 가지 존재한다. 가령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사들이는 것도 그런 일 중 하나다. 레코드를 한 장 사는 것은 그다지 중대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 레코드가 크리스마스 캐럴이고, 계절이 8월이라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언제나 '망설임의 바다(그것이 달 표면에 있으면 좋겠는데)'의 깊고 어두운 해저를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금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정말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가 듣고 싶어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같은 것이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8월의 한가운데에서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의 주변적 사물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강요당하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히 괴로운..

그러나 자유업은 즐겁다

대도시에서 자유업을 공연히 화려한 직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성인 남자가 대낮부터 빈둥빈둥 놀고 있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나처럼 대도시를 벗어나-도심지의 집세가 너무 비싼 데 질려서-교외의 중소 도시를 전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 고충이 많은 직업이 자유업이다. 우선 첫째로 다른 사람들이 '자유업'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보너스 시즌의 은행이다. 정말 싫다싫다 해도 이것처럼 싫은 건 없을 것이다. 창구의 업무가 끝나기를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은행 직원이 다가와선 "보너스를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런 걸 결정할 턱이 없으니까 "정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그러시면 우선 이..

나의 고소 공포증

나는 높은 곳이라면 딱 질색이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아마 죽을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장소에 가면 허리께가 찡한 게 더 이상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런 나에 비하면 아내는 높은 곳을 밥보다 좋아해서 함께 여행을 가기라도 하면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 깡총깡총 뛰기도 하고 한 발로 서 있기도 하면서 즐거워한다. 그런 행동을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남이 싫어하는 짓을 굳이 하려 드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은 곳이라고 해서 어디든 다 무서워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같은 높이라도 산이라든가 절벽같이 자연적으로 생긴 높은 곳은 빌딩이라든가 탑 따위의 위에 비하면 그다지-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무섭지 않다. 제일 무서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렇게 인공적으..

긴자센에서의 원숭이의 저주

얼마 전에 지하철을 탔더니, 맞은편 좌석에 모녀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백화점의 쇼핑백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꼭 쌍둥이처럼 닮았었다. 무료하던 차에 나는 '모녀간이라서 그런지 정말로 꼭 닮았구나. 틀림없이 저 아가씨도 나이를 먹으면 저런 아주머니가 될 거야' 하고 감탄하면서 힐끔힐끔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전철이 아카사카이쓰케 역에 정차하자, 나이 많은 쪽의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재빨리 내려 버렸다. 요컨대, 그 두 사람은 모녀간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옆에 앉았던 생판 모르는 타인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자주 그런 착각을 한다. 판단력에 결함이 있는데다가, 상상력이 저 혼자서만 앞질러 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 관한 헛소문 사태

소문이란 그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교우 관계가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라서-정확하게 말하면 좁다-소문에 말려드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에는 고맙게도 그리 나쁜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무라카미가 BMW를 산 것 같아"라든가(살리가 없다), "무라카미는 매일 두부를 세 모나 부쳐 먹는대"라든가(한 모밖에 안 먹는다), 그 정도의 것들이다. 이해가 잘 안 가서 "어째서 내가 하루에 두부를 세 모씩 부쳐 먹어야만 한답니까?" 하고 상대방에게 물어 보면, "아니, 잡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라고 묻는다. 잘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렇게 대답을 한 기억이 있다. 몇 번이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질문이 거의 비슷해서 ..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얼마 전에 별안간 깨달은 건데, 요즘에는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가 나오는 화장품 만화 광고를 전혀 볼 수 없다. 미시족풍의 30대와 20대의 아가씨가 번갈아 까맣게 되기도 하고 하얗게 되기도 하면서 "어머, 어떻게 된 거야. 하얀 아가씨, 요즘 아주 뽀얗게 됐네?", "사실은요, ...를 썼거든요"라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광고 말이다. 시종일관 똑같은 패턴의 광고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광고를 무척 좋아해 만약에 진짜로 없어진 거라면 섭섭할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하얗게 됐다가 까맣게 됐다가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부단히 입장을 바꾸다 보면 때때로 착각해서 양쪽 모두 까매지거나 양쪽 모두 하얘지거나 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