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chocohuh 2020. 6. 10. 14:07

얼마 전에 별안간 깨달은 건데, 요즘에는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가 나오는 화장품 만화 광고를 전혀 볼 수 없다. 미시족풍의 30대와 20대의 아가씨가 번갈아 까맣게 되기도 하고 하얗게 되기도 하면서 "어머, 어떻게 된 거야. 하얀 아가씨, 요즘 아주 뽀얗게 됐네?", "사실은요, ...를 썼거든요"라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광고 말이다. 시종일관 똑같은 패턴의 광고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광고를 무척 좋아해 만약에 진짜로 없어진 거라면 섭섭할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하얗게 됐다가 까맣게 됐다가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부단히 입장을 바꾸다 보면 때때로 착각해서 양쪽 모두 까매지거나 양쪽 모두 하얘지거나 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어느 한 쪽이 희면, 다른 한 쪽은 까맸다. 어느 한 쪽이 검으면, 다른 한 쪽은 하얗다.

 

그 광고가 없어졌다면 언제쯤 없어졌을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봤지만 아무도 몰랐다. 어느 사이엔가 '그러고 보니' 하는 식으로 없어졌나 보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요즘 잘 안 보이네요"라는 식으로 말이다.

 

요즘에는 백색 미인도 별로 인기가 없는 듯하니까 광고를 하는 쪽도 틀림없이 심드렁해졌을 것이다. 하얀 아가씨는 O이고, 까만 아가씨는 X라는 단순한 양극 구조적인 도식이 통용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광고 기반 자체가 소멸되고 만다. 까만 아가씨와 하얀 아가씨가 "이거 산모리츠에서 스키 타면서 태운 거야", "어머, 부럽다. 얼마 동안이나 가 있었는데?" 하는 얘기를 하게 된다면, 더 이상 광고로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갈색 미인'이라는 캐릭터까지 나온다면 대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된다. 옛날에는 단순해서 좋았는데 말이다.

 

하긴 하얀 아가씨, 까만 아가씨 하면 어쩐지 요즘에는 스트립쇼를 하는 술집의 간판 같은 느낌도 있다. '흑백 절정 대결. 졸라매는 까만 아가씨, 몸부림치는 하얀 아가씨'라는 식으로 말이다. 가능하면 이런 대결은 다이애나 로스와 올리비아 허시의 콤비로 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광고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 시리즈도 좋았지만, 옛날의 양명주 광고도 좋았다. 이 광고는 대략 여덟 컷 정도의 만화로, 주인공은 이름이 이치로인가 하는, 이름부터도 확실히 순수 그 자체인 초등학생이다. 이치로 군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늘 자리에 누워 있다. 그래서 이치로 군은 학교엘 가도 왠지 생기발랄하지 않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동급생인 스스무 군(이름부터가 친절할 것만 같다)"우리 엄마도 몸이 약했는데 양명주를 드시더니 요즘에는 완전히 건강해 지셨어."라고 이치로 군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치로 군은 집으로 돌아가 그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럼, 나도 시험 삼아 한번 양명주를 마셔 볼까"라며 관심을 갖는다. 마시면 당연히 기운이 난다(하여튼 광고니까 기운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마지막 장면은 이치로 군의 가족이 오쿠타마 부근에서 등산을 하는 장면으로, 이치로 군의 어머니는 몰라볼 정도로 건강해졌다. 얼굴도 젊어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도 흐뭇해하는 것 같다. 다 양명주 덕분이다. 잘 됐다.

 

이 광고의 맥락은 '하얀 아가씨, 까만 아가씨'의 경우와 거의 비슷하다. 즉 어떤 특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구제된 인간 A,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 B에게 지식을 나눠 주고 자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AB에게 구해 줬다고 생색을 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상의 호의며 구제인 것이다. A는 어디까지나 B가 있어야 할 상황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AB가 자신처럼 좋아진 것을 순수하게 잘됐다고 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 광고가 역시 훌륭한 광고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하얀 아가씨도 사람이니까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까만 아가씨를 ', 참내, 뭘 모른다니까' 하며 깔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얀 아가씨는 심술 같은 건 부리지 않고 까만 아가씨에게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까만 아가씨는 구제받게 되고 하얀 아가씨는 자신이 한 순간 안 좋은 생각을 했던 것을 남몰래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런 건 사실적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실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지난날 전후 민주주의의 이상 세계다. 요컨대 거기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상태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노력만 하면 인간은 거기에 분명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세계라 해도 인간이 모두 평등하지는 않다. 하얀 아가씨는 까만 아가씨보다, 스스무 군은 이치로 군보다 한 발 앞서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평등한 세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하얀 아가씨도 스스무 군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쳐진 사람에게 손을 빌려 주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옛날이 좋았고 지금은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확실히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만한 곳에는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때도 없었던 곳에는 없었다. 그래도 있는 곳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얀 아가씨는 늘 까만 아가씨를 구제했고, 스스무 군은 늘 이치로 군을 구제했으며, 그것이 제법 오랫동안 한 패턴의 시리즈 광고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정신적인 여유 같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혹은 '놀이'라고 할까, 정신의 예비 공간 같은 것이 거기에는 있었던 것이다. 유토피아는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이 공통 환상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세계에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람들은 다들 건강했고, 여자들은 모두들 얼굴이 하얗고, 오쿠타마는 날씨가 좋았다.

 

물론 이제는 그런 환상은 사라져 버렸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그것을 깨끗이 날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환상 자체가 상품화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환상은 자본 투자의 새로운 개척지인 것이다. 더 이상 환상은 아무 대가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배급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화되고 세련화 되어 아름답게 포장된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서의 하얀 아가씨는 더 이상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스스무 군은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하얀 아가씨와 까만 아가씨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것이 이 글의 테마다.

 

아마 어디로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