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410

백화점의 사계절

여자들은 대개 백화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나도 백화점을 끔찍이 좋아한다. 그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는 동물원을 빼놓고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고, 더군다나 입장료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는 놀랍게도 백화점이 다섯 군데나 있다. 물론 교외 도시라서 도심의 백화점처럼 규모가 크거나 물건을 많이 갖추어 좋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10분쯤 걸어간 곳에 백화점이 다섯 군데나 있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만 있으면(대개 매일 시간이 있지만) 역 앞까지 걸어가 백화점 안을 돌아다닌다. 백화점을 돌아다니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는 뭐니뭐니해도 평일 오전 중이다. 붐비지 않고, 공기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손을 대지 않은 느낌으로 빽빽이..

생두부 네 모를 단숨에 먹어치운 맛

이 수필은 계속 안자이 미즈마루씨가 삽화를 그려주고 있는데, 나로서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안자이씨에게 엄청나게 어려운 테마로 그림을 그리게 해 보려고 내 나름대로 상당히 오랫동안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완성된 삽화를 보면 전혀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고생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 것이 프로라 하더라도 조금은 '난처하거나 어려운' 곤경에 빠뜨려 즐겨보려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식당차에서 비프커틀릿을 먹는 롬멜 장군' 이라는 테마로 문장을 써 보았지만, 비프커틀릿을 먹고 있는 롬멜 장군의 삽화가 제대로 붙어왔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결국은 어려운 테마를 내놓으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영원히 안자이씨를 골탕먹일 수가 없었던 거다. 예를 들면 '낙지와 거대한 지네의 결투'라든가, '수염..

슬픈 여름의 끝

마침내 여름도 끝나가고 있다. 나는 여름을 끔찍이 좋아하는 소년 아저씨(라는 표현을 요즘 들어 비교적 자조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이기 때문에, 여름이 끝날 때가 되면 꽤 슬퍼진다. 여름이란 다시 내년에도 찾아오지 않느냐고 나 자신에게 타일러 봐도, 바닷가에 있던 별장이 폐쇄되거나, 잠자리가 하늘을 높이 날아다니거나, 해안에 잠수용 고무옷차림의 서퍼들이 늘어나거나 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 좋은 일은 이미 모두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감정은 발상으로서는 어린애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얼마 전에 모 광고회사에 다니는 근처의 친지 집에 놀러 갔더니, 부인이 나와서 "미안합니다. 여름휴가가 끝나서 오늘부터 출근했어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그렇구나, 여름이 끝나서 ..

집사람이 UFO를 유포라고 읽을 때

얼마 전에 집사람과 비행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보아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그게 도대체 뭘까? 하고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놀랍게도 영국의 국영항공사 'BOAC'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초의 'BOAC'라는 회사는 이미 없어졌고, 지금은 '브리티시 에어웨이'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러자 어쨌든 간에 'BOAC(비 오 에이 씨)'를 '보아크'라고 읽는 게 엉터리냐 하면, 그건 얼른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BOAC'는 어디까지나 '비 오 에이 씨'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집사람은 "당신처럼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잔소리만 해대면, 나이를 먹어서 모두한테 따돌림을 당한다구요"하고 말했다. 분명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UFO'를..

오해가 불러일으킨 소동

며칠 전 영자신문을 읽다가 광고란에 개가 목을 매달고 있는 사진이 실린 걸 보았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어서 읽어보니, 이것은 애견가 협회의 메시지로 "한국에서는 개를 잡아먹는 관습이 있는데 이것은 야만스러운 일이므로 저지하자"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한 달쯤 뒤에 호놀룰루에서 신문을 읽다 보니 "중국인은 들개사냥을 하는 데다 그 일부를 먹기까지 하는데, 이건 너무나도 야만스러운 행위다. 이제부터 중국제품을 보이콧하자"는 내용의 투서가 실려 있었다. 북경에서 대규모의 개사냥이 행해져 6주일 동안 약 20만 마리의 개가 처분된 사건이 있었는데(굉장하죠!), 그것은 거기에 대한 한 호놀룰루 시민의 반응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선과 영국간의 개 소동은 100년쯤 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때 빅토리아 여..

도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유로움

1981년 여름에 도심에서 교외로 이사를 와서 가장 난처했던 것은 대낮부터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인구의 태반이 샐러리맨이라서 그런 사람들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때 집에 돌아온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대낮의 거리에는 주부들밖에 없다. 나는 원칙적으로 아침과 저녁때밖에 글을 쓰지 않으니까, 오후에는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왠지 아주 묘한 기분이 든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몹시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힐끔거려대니까, 나 스스로도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나를 아무래도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이봐요, 하숙집 구해요?" 하고 말을 걸어왔고, 택시 운전사는 "공부하기 힘들지요?" 하..

소피의 선택과 브루클린 다리

윌리엄 스타이런의 원작을 영화화한 은 매우 뛰어나고 참으로 볼만한 영화였다. 나는 과 이래의 앨런 J.파큘러의 가장 괜찮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영화를 지나치게 기교적으로 만들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한 소재를 가지고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유태인 청년 네이선 랜드 역이 케빈 클라인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탁월하다. 이러한 영화에는 좀처럼 관객이 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관심이 있는 분은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중에 네이선이 주인공인 작가 지망생 청년의 새 출발을 축하하면서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 샴페인 병을 터뜨리는 대목이 있다. 이 영화의..

나는 신문을 보지 않는다

나는 요즘 죽 신문이란 걸 구독하지 않는다. 절대로 구독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때로 기분이 내키면 구독해 보는 수도 있다. 뭐, 없다고 해서 크게 부자유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느 신문은 좋아하고 어느 신문은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 우리 집에서는 죽 과 을 구독했기 때문에 그 두 신문 지면에는 비교적 익숙해져 있지만, 그것들 이외에 라든가 라든가 는 싫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무슨 신문이든 비슷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좀 더 발행 부수가 적어져서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한 퀄리티 페이퍼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는 있지만, 이것 역시 없어서 불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외국에 갈 때는 대부분 지를 사서 읽는다. 그 신문은 얇..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새로 사귄 애인 사진

얼마 전에 오래간만에 옛 친구와 만나서 잡담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지갑에서 젊은 여자 사진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진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새로 사귄 애인 사진이라고 했다. 꽤 귀여운 얼굴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그는 나와 나이가 같지만 독신이다. "어때, 어리지?"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 어리군."하고 내가 대답했다. "후후후, 열여덟 살이란 말이야, 열여덟"하고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강조했다. 상당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기뻤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갑 속에 자기 나이의 절반쯤 되는 어린 애인 사진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니 정말로 대단하다. 어쨌든 꽤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친구는 정말로 특수한 예고-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이쪽 머리까지 이상해질..

거짓말쟁이 니콜

거짓말쟁이 니콜은 진구마에 2가에 살고 있고 가끔 나한테 놀러 온다.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거짓말쟁이 니콜'이라 부른다. 니콜이라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본인이다. 어째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사정은 나는 모른다. 아무튼 거짓말쟁이 니콜은 이름 그대로 거짓말을 잘한다. 거짓말이 틀림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속게 된다. 굉장한 재능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난달에도 그녀는 나를 찾아와서 아주 중요한 비밀을 나에게만 털어놓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젖이 세 개였어요." 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나는 거짓말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상대방은 거짓말쟁이 니콜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