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410

난생처음 스테레오를 선물받던 날

난생처음으로 부모님이 스테레오를 사주셨을 때, 그것과 함께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레코드가 따라왔다. 그렇다면, 그때는 크리스마스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에 스테레오를 샀는데,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끼워줬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레코드에는 와 과 와 4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튼 벌써 20여 년 전의 이야기니까,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것도 네 곡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것도 빙 크로스비의 노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1960년 12월, 우리는 무척이나 심플하고 무척이나 행복하고 무척이나 중산 계급적이었다. 그리고 빙 크로스비는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 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를 노래했다.

부루 수에드 슈즈

"우리집에 불지르고 싶으면 그래봐요. 우리집의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셔봐요. 뭐든 원한다면 하고 싶은대로 해봐요. 그런데 베이비 우리 부루 수에드 슈즈만은 절대로 안돼요." 칼 파킨즈 '부루 수에드 슈즈' 이 노래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부루 수에드 슈즈(부드럽게 무두질한 양가죽 신)를 동경해 왔다. 부루 수에드 슈즈를 신고 있으면 인생의 모든 것이 정말 쉽게 그리고 편하게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열네살 때였다. 아무튼, "그런데 베이비-우리 부루 수에드 슈즈만은 안돼요." 라는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열여섯 살이 되면 틀림없이 부루 수에드 슈즈를 살 것이다. 열여섯 살의 나이는 왠지 부루 수에드 슈즈가 꼭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다. 열여섯 살이 되면 여자친구도 열다섯 명쯤 생기고 그녀들과 매일 데이..

택시 운전사의 별난 취미

얼마전의 일인데 아오야마에서 택시를 탔더니 택시 안에 설치된 조그만 스피커에서(카스테레오가 아니다) 어느 나라 음악인지 모를 민속 음악 비슷한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척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운전사는 30대 중반으로 나와 같거나 조금 위일 것 같았다. "이건 어느 나라 음악입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한번 알아 맞춰보시겠어요?" 하고 되물어왔다. 알아 맞혀도 택시 요금이 공짜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프가니스탄?" 하고 어림짐작으로 말해보았다. "아깝습니다. 이란입니다. 바로 이웃 나라지요" 하는 거였다. 아깝다니,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음악의 차이를 알 수 있을 턱이 없잖은가. 이야기를 해보니까 그는 민속 음악 팬인 모양으로 대개 온종일 여러 나라의 음악을 틀어놓고 택시를 운..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도 초콜렛을 못받았다.

조금 오래 전 이야기인데 2월 14일 저녁때 무말랭이 반찬을 만들었다. 세이유(대형슈퍼마켓)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농가의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비닐 봉지에 담긴 무말랭이를 팔고 있길래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산 것이다. 한 봉지에 50엔이다. 그리고 나서 근처의 두부 가게에서 두껍게 지진 두부와 맨두부를 샀다. 그 두부 가게집 딸은 조금 털이 많기는 하지만 꽤 친절하고 귀엽게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말랭이를 한 시간쯤 물에 불렸다가 참기름으로 볶고 거기에 여덟조각으로 자른 지짐 두부를 넣고 육수와 간장, 설탕과 조미용 술로 맛을 내어 중간불에서 졸였다. 그동안 카세트 테이프로 B.B.킹의 노래를 들으면서 당근과 무채초무침, 무와 유부를 넣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부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도루..

걸핏하면 잃어버리는 전철표

나는 걸핏하면 전철표를 잃어버리는 타입의 인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 모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막 개찰구를 빠져 나가려고 하면 전철표가 보이지 않는다. 코트 주머니, 바지 주머니, 셔츠 주머니를 홀랑 뒤집어 보지만, 전철표는 아무데도 없다.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전철 안에서 딱히 유별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문고판 책을 읽을 뿐이다. 전철표를 넣어 둔 주머니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전철표가 사라져 버리는 걸까? 수수께끼다. 더구나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어났다. 이래서는 전철표만 전문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내 주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다 큰 남자가 개찰구 옆에서 옷 ..

말보로의 세계로 오세요

나는 얼마 전에 담배를 끊었으나, 지금도 이따금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에 불을 붙여 가지고 입에 물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은 하지만, 피워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으냐며 그대로 피우고 만다. 끊고 나서 5개월이 지났는데요. 아직도 이런 꼴인 걸 보면, 담배라는 것은 상당히 끈질긴 물건이다. 외국 잡지에 실리는 담배 광고는 상당히 자극적이다. 일본과는 달리 담배를 나라에서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광고가 각기 독특하다. 그래서인지 보고 있기만 해도 무의식적으로 담배에 손이 가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말보로 담배 광고인데, 광고 모델은 전원이 카우보이고, 카피는 언제나 단 한 줄, "말보로의 세계로 오세요."다. 피터 예이츠의 영화 에는 이 말..

하이네켄 맥주의 빈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대한 단문

동물원이 폐쇠되었을때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돈을 내 코끼리를 손에 넣었다. 동물원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너절한 동물원이었고 코끼리는 늙고 진이 빠져 있었다. 너무나도 늙고 진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동물원에서도 그 코끼리를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선택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고 그런 관에 한쪽 다리를 처넣은 것 같은 코끼리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인수하려고 할 만큼 유별난 것을 좋아하는 동물원도 없었다. 동물 거래업자도 그 코끼리를 처치 곤란해하며 거저라도 좋으니까 코끼리를 인수해 주지 않겠느냐고 마을에 말을 꺼냈다. "나이를 먹어서 먹이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습니다. 난폭하게 굴지도 않습니다. 그저 장소만 있으면 됩니다. 싸게 잘 사시는 겁니다. 여하..

실수에 대하여

직업적으로 글을 쓰게 되면서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이 "사람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글을 쓰기 이전부터 일상적으로 이런저런 실수를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런 것을 절감할 필요도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글을 쓰기 이전의 실수는 대개 "아- 미안 실수"로 해결된다. 상대방도 "이제 와서 할 수 없지"라며 끝낸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으면 실수라는 것은 확실하게 뒤에 남게 되고 게다가 그 실수가 광범위하게 흩어지게 된다. 그 실수를 알게 되도 "아, 미안 실수"라고 독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과하고 다닐 수도 없다. 이런 일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그 대신 ―라고 말하는 것도 좀 뭐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꽤 관대한 편이 ..

왠지 이상한 하루

며칠전 갑지기 딕킨스의〈데이비드 커퍼필드〉가 읽고 싶어져서 모 대형서점에 가서 찾아 보았는데 이게 도대체 눈에 띄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안내데스크에 있는 젊은 여점원에게 "미안합니다만 딕킨스의〈데이비드 커퍼필드〉를 찾고 있는데요" 라고 했더니 "그게 어떤 분야의 책인데요?" 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엣?" 라고 했더니 상대방도 역시 "엣?" 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딕킨스의〈데이비드 커퍼필드〉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이냐니까요?" "에, 그러니까 소설인데요"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 그것에 관해서는 소설 카운터에다 문의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소위 서점의 안내라면서 딕킨스를 모른다니"라며 아연했지만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딕킨스 같은 건 우선 읽기 ..

굿 하우스킵핑(Good Housekeeping)

결혼해서 2년쯤 지난 후였다고 생각되는데, 나는 반년 정도 주부(主夫=House husband)노릇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극히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반년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한 페이지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당시는 특별히〈주부(主夫)〉노릇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공교롭게도 집사람이 직장에 나가고 내가 집에 남게 되는 운명이 되었던 것이었다. 벌써 이럭저럭 12, 3년전의 일로, 죤 레논이〈주부(主夫)〉노릇을 한다해서 화제가 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주부(主夫)〉의 일상은〈주부(主婦)〉의 일상과 다를 게 없이 평온하다. 우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차리고, 집사람을 출근시킨 다음, 설것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