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410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새벽 두 시에 그녀가 말했다. 여자라는 사람은 정말로 적격이 아닌 시간에, 적격이 아닌 것만을 생각했다. 특별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도 나는 장개석과 국민당정부가 걸어가야 하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며 셔츠를 갈아입고는 큰길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든 좋으니까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는 곳으로 가 주십시오." 나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그 다음은 눈을 감은 채 하품을 해댔다. 십오 분쯤 지나 택시는 잘 모르는 거리의, 잘 모르는 빌딩 앞에 멈췄다. 무척 낡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현관만이 묘하게 컸다. 옥상에는 잘 알 수 없는 기(旗)가 일곱 개 꽂혀 있었다. "정말 여기가 아이스크림 파는 곳입니까?" 운전사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

5월의 해안선

옛 친구가 보내 온 한 통의 편지 -청첩장-를 받고, 나는 예전에 살던 거리를 찾아가게 되었다.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얻고, 호텔 방을 예약한다. 나는 그 거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몸의 절반이 투명해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나 자신의 몸에서 빠져 나가는 것 같다. 맑게 게인 5월의 아침에, 나는 작은 여행 가방에 소지품 등을 챙겨 신칸센 열차에 올라탄다. 창가 쪽에 앉아, 책을 보다가 덮어 두고, 캔 맥주를 다 마시 고, 좀 자다가 체념하고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신칸센 열차의 유리창에 비치는 풍경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맥락이 있고, 부자연스러우며 메마른 풍경이다. 이따금 그것은 풍경이기를 그만두어 버린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공간 이동에 필요한 일종의 시간적 ..

크로켓

내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여자아이가 한 명 찾아왔다. 초록색 울 코트를 입은 열여덟 살, 아니면 열아홉 살 쯤 된 예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문간에서 우물쭈물하면서 핸드백의 금속 장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 연말 선물인데요." 라고 그 여자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도장 말이군."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닌데요. 제가 바로 연말 선물이에요."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 "에, 저---, 말이죠. 그러니까, 선생님은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되는 겁니다. 어쨌든 연말 선물이니깐요. K사의 선물 담당 직원이 여기로 찾아가라고 했어요." '음.' 나는 신음했다. K사라고 하는 데는 내가 몇 번인가 일한 적이 있는 큰 출판사로, 그러고 보니 잔뜩 취했을 때, "연말 선물로는 무엇..

강치축제

강치가 온 것은 오후 1시였다. 나는 마침 간단히 점심을 끝내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던 참이었다. 집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현관의 벨이 딩동댕 해서 내가 문을 열다 거기에 강치가 서 있었다. 별로 특징이 있는 강치는 아니다. 아주 보통의,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강치다. 아르마니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브룩스 브라더스의 스리피스를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대개의 강치는 보통의 얼굴을 하고 보통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강치라고 하는 동물은 10여 년 전의 인민복을 입은 중국인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그 강치는 말했다. "혹시 바쁘신 걸 방해하는..

택시를 탄 흡혈귀

나쁜 일이란 종종 겹치는 법이다.이 말은 물론 일반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쁜 일이 몇 번 인가 겹치게 되면, 이 말은 더 이상 일반론이 아니게 된다. 만나기로 한 여자와는 길이 엇갈리고, 윗도리의 단추가 떨어져 버리고, 전철 안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충치가 아프기 시작하는데다가, 비까지 내리고, 택시를 타니 교통사고로 도로가 막혀 버리는 형편이다. 이럴 때 만약, 나쁜 일이란 겹치는 법이라고 말하는 녀석이 있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 놈을 때려눕힐 것이다. 일반론 따위란 결국 그런 것이다. 일반론이나 격언이란 것은 때때로 나를 몹시 초조하게 만든다. 현관 깔개나 그 비슷한 것이 되어 평생을 뒹굴면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하고, 나는 그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쩌면 현관..

뉴욕탄광의 비극

뉴욕 탄광의 비극 지하에선 구조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몰라. 아니면 모두들 단념하고, 이젠 물러났을지도 몰라. -- (작사*노래 : 비지스) 태풍이나 집중 호우가 들이닥칠 때마다 동물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하는 다소 기묘한 습관을, 10년 이래 꾸준히 지켜 온 사내가 있다. 그는 나의 친구다. 그는 동물원에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서 살고 있다. 태풍이 거리에 접근해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덜컹거리는 덧문을 닫거나, 생수를 사러 내달리거나, 트랜지스터라디오와 회중전등의 상태를 확인할 무렵이 되면, 그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 에 입수한 미군용 판초로 몸을 감싸고, 양쪽 주머니에 캔 맥주를 쑤셔 넣은 채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는 이를 위해, 태풍이 불면 늘 회사를 쉬곤 했다. ..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내기 잔디를 깎았던 것은 열여덟 살인가 열아홉 살 때였으니까, 벌써 14~15년 전의 일이다. 상당히 오래됐다. 때때로 14~15년 정도를 옛날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짐 모리슨이 를 노래하거나, 폴 매커트니가 를 노래하던 시대-약간 이전이나 이후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시대였다.-가 그렇게 먼 옛날이었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나 자신은 그 시대와 비교해 볼 때 그다지 많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도 틀림없이 상당히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꽤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변했다. 그리고 14~15년 전은 상당히 먼 옛날 이야기다. 집 근처에-나는 얼..

졸립다

나는 수프를 먹으면서 졸았다. 졸음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지독했다. 스푼이 나의 손을 떠나서, 접시에 부딪히며 '딱'하고 꽤나 큰소리를 냈다. 몇 사람인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옆자리에서 그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순간을 얼버무리기 위해,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서 그것을 겉으로 했다 뒤집었다 하며 설펴보는 척 했다. 수프를 먹으면서 졸았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15초 가량 오른손을 점검하는 척하며 살짝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머리 뒤쪽이 멍하니 마비되어 있었다. 아주 부드러운 물건에 실컷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부분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수프 접시 바로 위 30센티미터 쯤 떨어진 곳에 계란형의 흰 가스가 둥실 떠 있었다. ..

하루키 구함

일전에 어느 편집자와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그가 나카노구에서 발견했다는 기묘한 얘기가 나왔다. 그 벽보에는 '하루키 구함'이라는 글자와 전화 번호만 씌어 있었다고 한다. "뭡니까, 그게?" "글쎄, 뭘까요?" 하고, 그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요컨대 하루키를 구하고 있으니까 전화를 해 달라는 뜻이겠는데....잘 모르겠군요." "개를 찾고 있는 건 아니겠죠?" "네, 개라면 보통 어떤 품종이라든가 특성을 쓰기 마련이죠. 역시 인간 하루키겠죠." "그게 특정의 하루키인지, 아니면 불특정한 하루키인지?" "허, 모르겠군요. 뭐, 어찌 됐든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전화 번호를 메모해 두었다가 가르쳐 드릴테니까, 직접 연락해 보는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그건 상상..

빠지는 머리털 문제

벌써 10년 전 일인데, 공장을 견학하는 책을 쓰기 위하여 미즈마루 씨와 함께 취재차 유명한 가발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먼저 별실에서 홍보 담당 아저씨를 만나 '가발이란 어떤 것인가, 사람이 대머리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초보적이며 학술적인 강의를 들었다. 대충 설명이 끝난 다음, 그 아저씨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저 말이죠, 무라카미씨. 당신은 지금 노란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머리가 벗겨진 사람은 그런 스웨터 입기 힘들어요. 그런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런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걸 입고 있으면 말이죠, '체, 대머리 주제에 저렇게 화려한 스웨터를 입다니'라고 말들이 많아요. 아니 실제로 말들은 안해도 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