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도 초콜렛을 못받았다.

chocohuh 2012. 12. 6. 11:52

조금 오래 전 이야기인데 2월 14일 저녁때 무말랭이 반찬을 만들었다.

 

세이유(대형슈퍼마켓)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농가의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비닐 봉지에 담긴 무말랭이를 팔고 있길래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산 것이다. 한 봉지에 50엔이다. 그리고 나서 근처의 두부 가게에서 두껍게 지진 두부와 맨두부를 샀다. 그 두부 가게집 딸은 조금 털이 많기는 하지만 꽤 친절하고 귀엽게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말랭이를 한 시간쯤 물에 불렸다가 참기름으로 볶고 거기에 여덟조각으로 자른 지짐 두부를 넣고 육수와 간장, 설탕과 조미용 술로 맛을 내어 중간불에서 졸였다.

 

그동안 카세트 테이프로 B.B.킹의 노래를 들으면서 당근과 무채초무침, 무와 유부를 넣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부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도루묵을 구웠다. 이것이 그 날의 저녁 반찬이었다.
그걸 먹으면서 문득 생각이 났는데 2월 14일은 성 발렌타인데이이다.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는 날은 여학생들이 남학생에게 초콜렛을 선물하는 날이다.

 

그런 날 저녁 식사에 어째서 나는 내 손으로 만든 된장국을 홀짝홀짝 마시고, 내가 만든 무말랭이를 먹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내 인생이 정말로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초콜렛 같은 건 아무도 주지 않는다. 아내까지도 "발렌타인 데이요? 흥!" 하고 대답하면서 내가 만든 무말랭이 반찬을 묵묵히 먹고 있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다.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세 명의 여학생이 앞을 다투어 초콜렛을 선물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 재학중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돌연 내 인생은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버리고, 나는 성 발렌타인데이 저녁때 무말랭이와 두껍게 지진 두부 반찬을 만드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짓을 하고 있다가는 얼마 뒤에 <황혼>에 나오는 헨리 폰다 같은 노인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스스로도 무섭다.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