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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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응(Dawn Ng) 색채 아티스트

완벽한 타인(Perfect Stranger), 2017년, 아카이벌 지클리 프린트(Archival Giclee Print) 싱가포르(Singapore)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 던 응은 새벽 어스름의 시간이 느껴지는 색으로 거대하고 연속적인 디자인과 미술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이다. 선명한 색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시각적인 자극을 주지만, 미려한 색으로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극적인 연출 장치가 필요하다. 던 응은 연속적인 설치물이나, 천고가 높은 장소에서 넓은 면적의 작업을 선보이며, 차분한 색감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되도록 연출하는 재주가 탁월하다. 내 눈 속에 창이 있다(There is a Window in My Eye), 2023년, 철 합판 비닐, 5.6m x 4.3m 싱가포르 하늘의 일출과 ..

착한디자인 2023.05.11

에릭 시걸과 러브 스토리

러브 스토리의 작가 에릭 시걸이 얼마 전에 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출판했다. 시걸의 대부분의 책에 대한 서평이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다지 작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좋은 평판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라고 그는 낙담한 모습으로 신문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텔레비전의 프로듀서들이 그 영화와 판권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비평에서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해서 "유감입니다(I'm sorry)"라고 말하고 있다. 동업자로서는 안됐다(I'm sorry)고는 생각하지만, 동시에 후회하지 않는 것(Never say I'm sorry)도 작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아내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며 '만일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

텔레비전과 먹는 것에 대하여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텔레비전이 없으니까 당연히 비디오도 없다. 내 친구의 집에는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있어서 이따금 한꺼번에 몰아서 보러 간다. 지난번에는 가서 하루 종일 와 과 이렇게 세 편의 비디오를 보고 왔다. 그때 사람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정말로 잘 먹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에 거의 간식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담배를 끊고 얼마 안되었을 때에는 입이 심심해서 여러 가지 것을 열심히 먹어댔지만, 이러다가는 살이 한없이 찌개 될 것 같아 어느 날 단단히 결심을 하고 쓸데없는 것은 일체 입에 넣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은 간식을 하지 않는다. 간식을 먹고 안 먹고는 습관적인 문제라서,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까지도,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이것저것 꽤나..

지금은 잊혀져 가는 베트남 전쟁이지만

얼마 전에 영화를 보는데, "베트남에 얼마나 있었어?" 하는 질문에 어떤 파일럿이 "2년 반"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나왔다. 자막은 "두 번 왕복하고 반"으로 처리되었다. 직업상 나도 다른 사람의 번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건 역시 '2년 반'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내 기억으로는 마이클 파가 쓴 이라는 베트남 전쟁 리포트에 이 '턴(Turn)'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확실히 원 턴이 1년이었다. 베트남에서 1년을 근무했다면 이미 베테랑 군인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그런 것을 2년 반이나 근무했으니 이 파일럿은 상당히 거친 사내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두 번 왕복하고 반'이라면 도무지 뭐가 뭔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 미국 본토와 베트남을 두 번 왕복하고..

음식의 좋고 싫고가 인생의 갈림길

나는 꽤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다. 생선과 야채와 술에 관한한은 거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좋고 싫은 게 없지만, 육류는 쇠고기만 먹고, 조개류는 굴을 빼고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요리는 아예 못 먹는다. 그러니까 대개 생선과 야채를 중심으로 담백한 음식을 먹으면서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곤약이라든가 녹미채, 두부 따위. 그러고 보니 완전히 노인식이군요. 이것은 때때로 나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은 좋고 무엇은 싫다는 판단기준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 먹는단 말인가?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그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운명'이라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나는 어..

야쿠르트 팀이여, 30년에 한 번쯤은 이겨다오

나는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팬이라서 자주 진구구장에 간다. 진구라는 곳은 꽤 좋은 야구장이다. 고라쿠엔 구장과는 달리 그 주위를 숲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바쁘기만 한 일상과 단절된 느낌이 들어서 느긋하게 야구 구경을 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탓이겠지만 고라쿠엔 구장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야쿠르트가 우승한 해에는 대학야구 탓으로 진구 구장에서 일본 시리즈를 치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기를 가졌다. 진구구장에서 싸우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유감스러웠지만, 거꾸로 말하면 '교진팀, 약오르지'라는 느낌이라서 기분은 좋았다.(교진 팀의 본거지가 고라쿠엔 구장이다.-역주). 고라쿠엔 구장의 1루석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야쿠르트의 팬으로서 한마디 한다면, 19..

인터뷰를 당할 때와 할 때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지만 한때 미국판 지에 실려 있는 '플레이보이 인터뷰'가 재미있어서 매화 다 빠뜨리지 않고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인터뷰 시리즈는 물론 매회 얼마간 잘 되고 못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높은 평균점을 줄 만하다고 생각되며 특히 커트 보네거트나 멜 브룩스를 다룬 내용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그다지 신기하지도 않지만 이전에는 그처럼 넓은 스페이스를 할애해 가며 상대방에게 실컷 떠들게 만드는 인터뷰 기사는 다른 잡지에는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도 열심히 떠들어대서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 타이틀 그대로 '탁 털어놓고 하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이 길다고 해서 상대방이 솔직하게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 잡지는 미리 대충 ..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디크의 소설

점보기의 추락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사고일지도 모르지만, 몇 년 전에 태풍이 불어서 중앙선 열차 속에서 하룻밤 내내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저녁 때 마쓰모토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오쓰키 조금 못 미친 곳까지 갔을 때, 산사태가 일어나서 열차가 완전히 멈추어버린 것이다. 날이 밝자 태풍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나, 철로의 복구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서, 우리들은 결국 그날 오후까지 열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애당초 한가한 몸이니까 하루나 이틀쯤 도쿄에 돌아가는 것이 늦어져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열차가 정차한 작은 마을을 산책하고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디크의 문고본을 세 권 사가지고 좌석에 돌아와서 포도를 먹으면서 느긋하게 독서를 했다. 바쁜 여행을 하고 있던..

돌 쌓기 고문과 드릴 고문

영화에는 고문 장면이 곧잘 나온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시대극에는 종종 돌 쌓기 고문이 등장했었다.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꽤 그럴듯한 고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우선 주판처럼 울퉁불퉁 튀어나온 판 위에 죄인을 꿇어앉히고 그 무릎 위에 평평한 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것이다. 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무릎 밑에 방석을 포개가는 것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반대인 셈이다. 올려놓은 돌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무릎이 으드득거리고, 결국은 바스러지고 만다. 내가 실제로 당해 본 일은 아니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아플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돌 쌓기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 불쌍한 반면 퍽 섹시하기도 하다. 옆에..

커피가 있는 풍경

그날 오후에는 윈톤 켈리의 피아노가 흐르고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흰색 커피 잔을 내 앞에 갖다 놓았다. 두텁고 무거운 잔이어서 테이블에 놓을 때 둔탁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풀의 물 밑 바닥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의 소리처럼 오랫동안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항구 도시였고 언제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바다 냄새가 났다. 하루에 몇 번씩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고, 나는 몇 번씩이나 그것을 타고 대항 여객선이나 독의 풍경을 물리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다. 비 오는 날에도 우리는 흠뻑 젖어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 근처에는 스탠드바의 좌석 외에는 테이블이 한 개밖에 없는 조그만 커피숍이 있었는데, 그곳의 천장에 달려 있는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