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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론 너는 실제로 그놈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 맹렬한 폭풍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인 모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 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폭풍이 사라져 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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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 줄 공간은-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어디에도 없다. 네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그러나 네가 침묵을 구할 때 거기에는 끊임없는 예언의 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가 이따금 네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비밀 스위치 같은 것을 누른다.
네 마음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범람한 큰 강물과 비슷하다. 지상의 표지판이나 방향판 같은 건 하나도 남김없이 그 탁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미 어딘가 어두운 장소로 옮겨져 있다. 그리고 비는 강 위로 계속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그런 장마 광경을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꼭 그대로다. 그게 바로 내 마음과 같은 거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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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현장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예를 들면 냄새라든가 소리라든가 빛이라든가?
(잠시 생각한다)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위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소리에도 빛에도 냄새에도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희 반 아이들이 전부 그곳에 쓰러져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때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척 고독했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독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인솔교사로서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고쳐먹고, 구르듯이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학교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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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남의 눈에 잘 띄는 얼굴이라고 할까, 아무렇게나 주물러 반죽해서 만든 얼굴이라고 해도 억울할 게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체적인 인상은 전혀 나쁘지 않다. 본인도 자기의 용모에 만족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친숙하고 편해 보인다.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녀의 어딘가 어린애 같은 인상이 상대방에게 호의를 느끼게 한다. 딴 사람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얼굴에서 호감을 느낄 수 있다. 나를 안심시킨다.
"나에게도 네 또래의 남동생이 있어" 문득 생각난 듯이 그녀는 말한다.
"사정이 있어서 벌써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아, 그런데, 너 그 애랑 굉장히 닮았어. 누가 그런 말 한 적 없니?"
"그 애라니?"
"왜 그 밴드에서 노래 부르는 아이 말이야. 버스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쭉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거야. 머리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계속 진지하게 생각해 봤지만 안되더라고, 왜 그럴 때 있잖아?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면서도 끝내 생각나지 않는 경우 말이야.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 지금까지 들은 적 없어?"
나는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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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무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은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은 보지 않고,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목격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쪽이 제가 받은 인상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표정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매우 평온하고 고통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그대로 거기에 눕혀 놓고 상황을 살피려고 생각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일단 괴로워하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그대로 놓아둬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업을 받고 노래를 부르고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을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인솔했던 담임 여교사만은 그 뒤에도 충격이 상당히 오래갔던 것 같습니다.
다만 나카타라는 남자아이만은 하룻밤이 지나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다음 날 고후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뒤 바로 육군병원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마을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들은 끝내 아무런 통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날 산속에서 일어난 아이들의 집단 실신 사건은 신문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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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두 시를 가리켰을 때, 나는 책 읽기를 중단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도서관 견학에 참가한다. 안내를 해주는 사에키 상이라는 사람은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날씬한 여성이다.
그녀는 나에게 무척 강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인상을 준다. 이 사람이 내 어머니라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름다운 (혹은 느낌이 좋은) 중년 여성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이 내 어머니라면 좋을 텐데, 하고.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사에키 상이 실제로 내 어머니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아주 조금은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의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모르니까. 요컨대 그녀가 내 어머니여서 안 된다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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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다,라고 생각한다. 눈을 감고, 내가 자유다,라는 것에 대해 한동안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외톨이라는 사실뿐이다. 혼자 모르는 고장에 와 있다. 자석도 지도도 잃어버린 고독한 탐험가처럼.. 자유란 이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조차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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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고였는데?"
"그게 아무리 해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들은 얘기에 따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 같은 것에 걸려서 삼주일 동안 나카타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줄곧 병원 입원실에서 링거라는 걸 맞으면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그때까지의 일을 전부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어머니 얼굴도, 글씨를 읽는 법도, 산수를 하는 것도, 살고 있던 집의 배치도, 그리고 제 이름까지 몽땅 잊어버렸습니다. 욕조의 마개를 뽑아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깨끗이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나카타는 매우 성적이 좋은 수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갑자기 쓰러졌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나카타는 머리가 나빠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이렇게 돼버린 나카타 때문에 자주 울곤 하셨습니다. 나카타의 머리가 나빠져서 어머니는 울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고 했지요. 아버지는 울지는 않으셨지만 언제나 화를 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신에 고양이와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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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네도 어느 집 말 뼈다귀인지도 모를 미아가 된 고양이를 찾기보다는, 차라리 진지하게 자기 그림자의 나머지 절반을 찾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카타 상은 손에 들고 있던 등산모를 몇 번 잡아당겼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것은 나카타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그림자가 희미한 것 같다고.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해도 저는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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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나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거기 있는 모든 사물이 허무한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에 날려 당장이라도 흩날려 없어질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내 두 손을 펼치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고 밖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둔다. 백 년 뒤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 현재의 일만 생각하도록 한다. 도서관에는 읽어야 할 책이 있고 체육관에는 몸을 단련할 수 있는 기구가 있다. 그런데 백 년 뒤의 먼 미래를 생각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야지"라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왜냐하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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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현실 세계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문자 그대로 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하기 시작한 지 이주일 뒤에, 우리가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어 자신감을 잃고 지칠 대로 지쳐 파김치가 되었을 때, 그 소년은 갑자기 깨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도한 결과 그것이 효과를 나타내서 깨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해진 시간이 된 것처럼, 그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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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라 도서관 말고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 배낭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다. 지갑 속에서 사쿠라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서 그 번호를 누른다. 손가락이 아직 진정이 안 되어 여러 번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그 긴, 긴 번호를 마지막까지 누를 수 있었다. 고맙게도 휴대전화는 부재자 녹음으로 되어 있지 않다. 열두 번째 신호음에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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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카타 상은 시계조차 갖고 있지 않다. 나카타 상에게는 그에게 걸맞은 시간의 흐름이 있었다. 아침이 오면 밝아지고 해가 지면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면 근처 목욕탕에 가고, 목욕탕에서 돌아오면 잠이 온다. 목욕탕은 요일에 따라서 문을 닫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체념하고 집에 돌아오면 된다.
나카타 상은 몸에서 힘을 빼고, 머리의 스위치를 끄고, 존재를 일종의 '통전상태'로 만들었다. 그렇게 통전상태란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고 일상적으로 해온 일이다. 얼마 뒤 그는 의식주변의 가장자리를, 나비처럼 흔들흔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장자리 너머에는 어두운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이따금 가장자리를 벗어나 그 아찔한 심연 위를 날았다. 그러나 나카타 상은 거기에 있는 어둠이나 깊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명의 세계에는, 그 무거운 침묵과 혼돈은 오래된 그리운 친구이자 지금은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카타상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글씨도 없고, 요일도 없고, 무서운 지사님도 없고, 오페라도 없고, BMW도 없다.
가위도 없고, 길쭉한 모양의 모자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장어도 없고, 팥빵도 없다.
거기에는 전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분은 없다. 부분이 없으니까 이것하고 저것을 바꿀 필요도 없다. 떼어내거나 덧붙이거나 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전부 속으로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카타 상에게는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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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진지하게 묻고 싶은데, 괜찮을까?" 상관없다고 나는 말한다.
"네 누나는 양녀지? 다시 말하면, 네가 태어나지 전에 어디에선가 얻어온 아이지?" 그렇다고 나는 말한다. 부모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양녀를 얻었고, 그 후에 내가 태어났다. 아마도 우연히 그렇게.
"넌 틀림없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 거지?"
"내가 알기로는 그래" 하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도 네 어머니는 집을 나갈 때 네가 아닌, 핏줄이 닿지 않은 누나를 데리고 나갔단 말이지?" 하고 사쿠라는 말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는 법이야“
나는 잠자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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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기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관한 책을 고른다.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은 나치 전범자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히 그 책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에 뽑아 든 것뿐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략 6백만 명(목표의 절반을 넘는 수준)의 유태인이 그가 계획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그는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텔아비브의 법정에서 방탄유리가 둘러쳐진 피고석에 앉아, 자기가 어째서 이런 거창한 재판에 회부되어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아이히만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는 한 사람의 기술자로서, 자기에게 부여된 과제에 대해 가장 적합한 해답을 제출했을 뿐이다. 전 세계의 모든 양심적인 관료가 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한 것뿐이지 않은가? 어째서 자기만 이처럼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조용한 아침의 숲 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 '실무가' 이야기를 읽는다. 책 뒤쪽 표지 안에는 오시마 상이 연필로 메모를 남겨놓았다. 나는 그것이 오시마 상의 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특색 있는 글씨체인 것이다.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오시마 상이 이 의자에 앉아서 뾰족한 연필을 손에 들고 책 표지 안쪽에 메모를 쓰고 있는 광경을 상상한다. 꿈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그 말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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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죽이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지. 자네는 그런 일에 별로 어울리지 않네. 그러나 나카타 상, 세상에는 그런 논리가 잘 통하지 않는 곳도 있는 걸세. 어울리느냐, 어울리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도 있는 거라네. 자네는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네. 예를 들면, 전쟁이 그렇지. 전쟁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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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정확히 말하면, 너는 이제부터 도서관의 일부가 되는 거야. 도서관에서 기거하고 거기서 생활하게 되지. 시간이 되면 도서관 문을 열고, 폐관 시간이 되면 도서관 문을 닫으면 돼.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또 한 가지, 자네가 알아둬야 할 것이 있어."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그것은 사에키 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지. 물론 너도 나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 크건 작건 간에 말이야. 그것은 틀림없어. 하지만 사에키 상은 그런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 좀 더 개별적으로 앓고 있는 거야. 영혼의 기능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위험하다든가, 그런 말은 아니야. 일상생활에서 사에키 상은 지극히 정상적이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정상적이야. 깊이가 있고 현명하고 매력적이거든. 다만 그녀에게 만약 무엇인가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너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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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첫째로, 저는 남성이 아닙니다."하고 오시마 상은 선언한다. 모두가 말을 잃고 침묵한다. 나도 놀라서 숨을 삼키고 곁의 오시마 상을 힐끔 쳐다본다.
"나는 여자입니다"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같은 인간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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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다무라상 살해되다.
다무라 상은 장남(15세)과 단 둘이 살고 있는데, 가정부 말에 따르면 10일 전쯤부터 장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장남은 같은 시기부터 학교에도 등교하지 않고 있어서 경찰은 현재 행방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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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젯밤 이 방에서 본 것은 틀림없는 열다섯 살 때의 사에키 상의 모습이었다. 진짜 사에키 상은 물론 살아있다. 오십이 넘은 여성으로, 이 현실 세계에서 현실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지금도 이층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서 본 것은 그녀의 '유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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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아저씨, 장소는 이 근방이면 될 것 같나?"
"네, 호시노상, 아마 여기면 될 것 같습니다. 나카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소는 결정되었다 치고. 그래. 지금부터 무엇을 할 건데?"
"입구의 돌을 찾으려고 합니다."
"입구의 돌?"
"네"
"흐응" 하고 청년은 말했다.
"틀림없이 거기에는 긴 사연이 있겠지?"
나카타 상은 그릇을 기울여서 우동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네, 긴 사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길어서 나카타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거기 가면 아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이번에도 가보면 알 수 있다는 얘기군?"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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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상은 얼굴을 들어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먼 곳에 떨어진 걸 알고는 내 얼굴을 보면서 말을 잇는다. 그리고 고개를 흔든다.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 상징성과 의미성은 별개의 것이니까. 사에키 상은 아마도 의미나 논리 같은 장황한 절차를 생략하고, 거기 있어야 할 적당한 말을 가려 넣었던 거야. 공중을 날고 있는 나비의 날개를 살짝 붙잡는 것처럼, 꿈속에서 노랫말을 잡은 거지. 예술가란 장황한 걸 회피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잖아."
"저어 오시마 상,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한다는 거, 나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거든요" 오시마 상이 고개를 가볍게 갸우뚱한다.
"사에키 상이 내 어머니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오시마 상은 침묵한다.
"네가 말하고 싶은 걸 대충 요약하면, 요컨대 사에키 상은 스무 살 때 절망을 느끼고 다카마쓰를 떠나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네 아버지인 다무라 고이치 씨를 알게 되어 결혼하고, 축복 속에 너를 출산했다, 그런데 그 사 년 뒤에 어떤 사정 때문에 자네를 버려둔 채 집을 나가, 그 후 한동안 수수께끼에 찬 공백이 있었고, 그러고 난 뒤에 다시 고향인 시코쿠로 돌아왔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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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펼친다. 그러나 글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책에 가득 찬 글자를 그냥 눈으로 쫓고 있을 뿐이다. 난수표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가서 정원을 바라본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주변에 바람은 불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열다섯 살 소녀로서의 사에키 상인지, 아니면 현재의 쉰 살이 넘은 사에키 상인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그 둘 사이에 있어야 할 경계선이 흔들리다가 희미해지면서 그 모습은 흐려진다. 그것이 나를 혼란시킨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속에 있는 중심축 같은 것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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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를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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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쿠라 상은 현실 세계에 살며 현실의 공기를 마시고,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어. 사쿠라 상과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내가 현실세계와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 그건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야."
"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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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쨌든 아저씨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부처도 아니란 말이지?"
"나는 본래 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고로 비정하다. 비정한 존재로서 인간의 선악을 따지고,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신도 부처도 아니니까 인간의 선악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또한 선악의 기준에 따라 행동할 필요도 없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아저씨는 선악을 뛰어넘은 존재로군."
"호시노 짱, 그건 지나친 칭찬 같아. 딱히 선악을 뛰어넘은 건 아니야. 다만 관계가 없을 뿐이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내가 맡고 있는 역할을 완전히 끝내는 일이지, 나는 매우 실용적인 존재일세. 말하자면 중립적 객체인 게야."
"기능을 완수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사물이 본래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을 말하네. 내 임무는 세계와 세계 사이를 잇는 상관관계를 관리하는 일일세. 사물의 순번을 정확히 맞추는 거지. 원인 뒤에 결과가 오게 하고, 어떤 의미와 또 다른 의미가 뒤섞이지 않게 해야 해. 현재 앞에는 과거가 오고, 현재 뒤에는 미래가 오게 하지. 다소 앞과 뒤의 차이가 있을 수 있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란 없으니까 말일세. 호시노 짱, 결과적으로 계산만 그런대로 맞으면 나도 까다롭게 따지며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네. 나는 이래 봬도 꽤 대충대충 넘어가는 면이 있거든"
"그럼, 아저씨가 직접 열면 되잖아? 나는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나한테는 실체란 것이 없단 말일세. 나는 추상 개념에 지나지 않아.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일부러 자네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 아닌가? 그 때문에 서비스 요금으로 세 번이나 하게 해 주었고 말이야"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멋진 말을 했네. '만일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온다면, 그것은 발사되어야만 한다.'라고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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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에키 상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사에키 상을 자기한테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사에키 상을 손에 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아들이자, 사에키 상의 아들이기도 한 내 손에 죽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제가 당신과 누나하고도 관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예언이고 저주입니다. 그는 그것을 내 몸 안에 프로그램으로 장치해 두었습니다."
사에키 상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달그락하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본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어딘가에 있는 공백을 보고 있다.
"내가 다무라 군의 아버지를 알고 있을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것은 가설입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에키 상이 열다섯 살이었을 때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열다섯 살 때의 당신을 사랑한 겁니다. 아주 깊이.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 소녀는 지금도 당신 안에 있습니다. 언제나 당신 안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잠들면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보입니다."
:::
"그런데 어째서 나카타 상이 그 돌을 책임져야 하는 거야? 왜 그것은 나카타 상이 아니면 안 되는 거냐고?" 청년은 천둥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물었다.
"나카타는 나갔다 돌아온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갔다 돌아오다니?"
"네, 나카타는 일단 이곳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일본이 큰 전쟁을 하고 있었을 무렵의 일입니다. 그때 어떤 계기로 뚜껑이 열려 여기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문에 나카타는 보통 나카타가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림자도 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지금은 잘 못하지만, 고양이 상하고 얘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늘에게 물건을 떨어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난번의 거머린가 뭔가 하는 얘기군?"
"네,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텅 비었다는 것은 빈집이나 마찬가집니다. 자물쇠가 잠겨 있지 않은 빈집과 같습니다. 들어갈 생각만 있으면, 누구나 마음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카타는 그것이 몹시 두렵습니다. 예를 들면, 나카타는 하늘에서 무엇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을 하늘에서 떨어뜨릴지, 대개의 경우 나카타도 전혀 모릅니다. 만일 다음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릴 것이 만 자루의 부엌칼이라면, 커다란 폭탄이라면, 혹은 독가스라면, 나카타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카타가 여러분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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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도 부자유를 좋아하지. 물론 정도껏이긴 하지만" 하고 오시마상이 말한다. "장 자크 루소는 인류가 울타리를 만들었을 때 문명이 태어났다고 정의했지. 그야말로 예리한 관찰력이라고 할 수 있어. 그의 말대로 모든 문명은 울타리로 구획된 부자유의 산물이야.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아보리지니(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만은 별개지. 그들은 울타리가 없는 문명을 17세기까지 유지하고 있었거든. 그들은 나면서부터 자유인이었어. 마음 내킬 때 마음 내키는 곳에 가서 마음 내키는 일을 할 수가 있었지. 그들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돌아다니는 것이었어. 걸어서 돌아다니는 것은 그들 삶의 깊은 메타포였지. 영국인이 건너와서 가축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그리고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반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로서 황야로 추방되었지. 그러니까 너도 가능한 한 주의하는 게 좋아. 다무라 카프카군. 결국 이 세계에서는 높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인간이 유효하게 살아남게 되는 거야. 그것을 부정하면 넌 황야로 추방당하게 돼"
"다무라 군은 강해지고 싶은가 보지?"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제 경우에는."
"다무라 군은 외톨이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힘으로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 합니다.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까마귀나 같죠. 그래서 저는 카프카라는 이름을 저에게 붙였습니다. 카프카란 체코 말로 까마귀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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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뿔뿔이 흩어진 의식을 천천히 회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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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가 지금까지 계속 찾고 있던 곳이 바로 저 장소입니다."
호시노 청년은 지도에서 얼굴을 들고 나카타 상의 눈을 보았다. 간판의 글자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었다. 말보로 담뱃갑을 꺼내 흔들어서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인 뒤 열려 있는 차창 밖으로 내뿜었다.
"정말로?"
"네, 틀림없습니다."
"우연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군." 하고 청년이 말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고 나카타 상도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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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이 느릿느릿 물 흐르듯 이음새도 없이 지나간다. 어느 하루와 다른 하루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라고는 거의 날씨뿐이다. 만일 날씨까지 비슷하다면, 날짜 감각은 점점 더 없어진다.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닻을 잃은 배처럼 정처 없이 넓은 바다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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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나 베토벤 시대에는 자아의식이 강조되는 자부심의 발로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이전 시대에는, 즉 절대왕정 시대에는 옳지 못한 일로서, 혹은 사회적인 일탈로서 엄중하게 억압되어 왔습니다. 그런 억제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실권을 잡자 일제히 해방되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자아가 노출된 것입니다. 자유와 자아를 한껏 발산하는 것 같은 의미였습니다. 예술, 특히 음악이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정면으로 맞받았습니다. 베토벤의 뒤를 따르듯이 나타난 사람들,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 슈만.. 모두 나름대로 세상의 상식적인 궤도에서 벗어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그처럼 만인이 가는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경향이야 말로 이상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우 단순하게 낭만파 시대라고 불렸습니다. 분명히 본인들에게는 그런 삶의 방식은 때로는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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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숲의 한가운데에 발을 들여놓는다. 난 속이 텅 빈 인간이다. 나는 실체를 잡아먹는 공백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숲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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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주 오랫동안 친구가 없었습니다." 하고 사에키 상이 말했다. "추억 속의 친구는 있지만요."
"사에키상"
"네" 하고 사에키 상은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나카타에게는 추억이라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나카타가 머리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추억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듯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카타 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려운 문제군요. 추억에 대해선 나카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카타는 현재의 일밖에 모릅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 반대인 것 같아요" 하고 사에키 상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카타는 나카노 구에서 사람을 한 명 죽이기도 했습니다. 나카타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니 워커 상한테 이끌려서, 나카타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열다섯 소년 대신에 사람을 한 명 죽였습니다. 나카타는 그 일을 떠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은 내가 먼 옛날에 그 입구의 돌을 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요? 그것이 아직도 꼬리를 물고 있어서 지금도 여기저기에 일그러진 현상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나요?"
"나카타는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나카타의 임무는 단지 지금 현재 사물을 있어야 할 형태로 되돌려놓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위해 나카타는 나카노 구를 떠나 커다란 다리를 건너서 시코쿠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알고 계시겠지만, 사에키 상은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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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네가 숲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일부가 되고, 네가 빗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쏟아지는 비의 일부가 되지. 네가 아침 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아침의 일부가 되고, 네가 내 앞에 있을 때 너는 내 일부가 돼. 간단히 말하면 그런 이야기야" 그녀는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내가 나이면서 온전히 네 일부가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일단 익숙해지면 아주 간단한 일이야. 하늘을 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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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게 잊혀진 삶 혹은 시간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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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에 담은 말은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공허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내 목소리에 필요한 무게가 결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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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시간의 웅덩이 속에 죽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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