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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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와 가라앉은 대륙

1 쌍둥이와 헤어져 반 년 정도 흘렀을 때,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잡지에서 발견했다. 그 사진 속의 쌍둥이는 예의-나와 함께 지낼 때 늘상 입고 있던-과 라는 번호가 붙은 같은 모양의 싸구려 트레이닝 셔츠가 아니라, 한결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니트 원피스를 입었고, 또 한 명은 성글게 짠 코트 재킷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머리는 이전보다 부쩍 길게 자라 있었고, 눈 주위에는 엷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 쌍둥이라는 걸 곧바로 알았다. 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고 있었고 또 한 사람도 옆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 페이지를 펼친 순간 이미 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백 번이나 듣고 철저하게 주입된 레코드의 처음 한 음을 들었을 때처럼 나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

서재기담

처음 보는 얼굴의 하녀였다. 아마 새로 들어왔을 것이다. 수수한 무늬의 기모노에서 희미하게 향냄새가 나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서재?"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선생이 나를 서재에 들여보내 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나는 선생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현관 참에 붙어 있는 팔각형의 거실로 가, 그곳에서 벙어리 미소녀로부터 그 달의 원고를 받는다. 그녀는 선생의 먼 친척인데, 이곳에 거두어져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선생은 절대로 사람들 앞에는 나서지 않는다. 출판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적잖이 놀라기는 했지만, 선생이 서재로 오란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 그다지 이의를 달 이유는 없었다. 만..

헬 W의 공중 정원

내가 처음으로 헬 W의 공중 정원에 안내된 것은 안개가 심한 11월의 아침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헬 W는 말했다. 확실히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 바닷속에 공중 정원이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공중 정원의 크기는 대략 세로 8미터, 가로 5미터 정도이다. 그것은 공중 정원이란 점을 별개로 하면, 전혀 보통의 정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랄까, 그것은 지상의 기준으로 친다면, 분명히 삼류 정원이었다. 잔디는 너절하고, 화초 종류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며, 토마토 줄기는 바싹 말랐고, 주위에 울타리조차 없었다. 게다가 하얀 정원 의자는 전당포 물건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 드린 거예요."라고 헬 W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헬 W는 줄곧 내 시선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헤르만 게링 요새 1983년

헤르만 게링은 베를린 언덕을 파내 거대한 요새를 구축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문자 그대로 언덕을 통째로 파내어, 그 내부를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발라 버렸던 것이다. 그건 흡사 불길한 흰개미의 탑처럼 황혼의 엷은 어둠 속에 선명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급한 사면을 기어 올라가 요새의 정상에 서면, 우리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동베를린 시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팔방으로 구축된 포대(포대)는 수도를 향해 다가오는 적군의 모습을 포착해 그걸 격파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떤 폭격기도 그 요새의 두꺼운 장갑(裝甲)을 파괴할 수 없고 어떤 전차도 그곳에 올라올 수 없을 터였다. 요새 안에는 2,000명의 SS 전투부대가 몇 달이라도 굳게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료품과 음료수와 탄약이..

로마제국의 붕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 느낀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 2시 7분이다. 그때 나는 여느 때처럼-즉, 언제나 일요일 오후면 그렇듯이-부엌의 식탁 앞에 앉아서 괜찮은 음악을 들으면서 일주일분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메모해 뒀다가 일요일에 그것들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정리하고 한다. 화요일까지의 사흘 분 일기를 다 쓰고 났을 때 나는 창밖을 휩쓸고 가는 거센 바람 소리를 느꼈다. 나는 일기 쓰던 일을 중단하고, 펜 뚜껑을 덮은 다음, 베란다로 나가서 빨래를 걷어 들였다. 빨래는 마치 떨어져 나가려는 혜성의 꼬리처럼 퍼덕퍼덕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조금씩 기세를 더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