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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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기담

처음 보는 얼굴의 하녀였다. 아마 새로 들어왔을 것이다. 수수한 무늬의 기모노에서 희미하게 향냄새가 나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서재?"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선생이 나를 서재에 들여보내 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나는 선생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현관 참에 붙어 있는 팔각형의 거실로 가, 그곳에서 벙어리 미소녀로부터 그 달의 원고를 받는다. 그녀는 선생의 먼 친척인데, 이곳에 거두어져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선생은 절대로 사람들 앞에는 나서지 않는다. 출판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적잖이 놀라기는 했지만, 선생이 서재로 오란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 그다지 이의를 달 이유는 없었다. 만..

헬 W의 공중 정원

내가 처음으로 헬 W의 공중 정원에 안내된 것은 안개가 심한 11월의 아침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헬 W는 말했다. 확실히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 바닷속에 공중 정원이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공중 정원의 크기는 대략 세로 8미터, 가로 5미터 정도이다. 그것은 공중 정원이란 점을 별개로 하면, 전혀 보통의 정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랄까, 그것은 지상의 기준으로 친다면, 분명히 삼류 정원이었다. 잔디는 너절하고, 화초 종류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며, 토마토 줄기는 바싹 말랐고, 주위에 울타리조차 없었다. 게다가 하얀 정원 의자는 전당포 물건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 드린 거예요."라고 헬 W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헬 W는 줄곧 내 시선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헤르만 게링 요새 1983년

헤르만 게링은 베를린 언덕을 파내 거대한 요새를 구축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문자 그대로 언덕을 통째로 파내어, 그 내부를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발라 버렸던 것이다. 그건 흡사 불길한 흰개미의 탑처럼 황혼의 엷은 어둠 속에 선명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급한 사면을 기어 올라가 요새의 정상에 서면, 우리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동베를린 시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팔방으로 구축된 포대(포대)는 수도를 향해 다가오는 적군의 모습을 포착해 그걸 격파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떤 폭격기도 그 요새의 두꺼운 장갑(裝甲)을 파괴할 수 없고 어떤 전차도 그곳에 올라올 수 없을 터였다. 요새 안에는 2,000명의 SS 전투부대가 몇 달이라도 굳게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료품과 음료수와 탄약이..

로마제국의 붕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 느낀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 2시 7분이다. 그때 나는 여느 때처럼-즉, 언제나 일요일 오후면 그렇듯이-부엌의 식탁 앞에 앉아서 괜찮은 음악을 들으면서 일주일분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메모해 뒀다가 일요일에 그것들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정리하고 한다. 화요일까지의 사흘 분 일기를 다 쓰고 났을 때 나는 창밖을 휩쓸고 가는 거센 바람 소리를 느꼈다. 나는 일기 쓰던 일을 중단하고, 펜 뚜껑을 덮은 다음, 베란다로 나가서 빨래를 걷어 들였다. 빨래는 마치 떨어져 나가려는 혜성의 꼬리처럼 퍼덕퍼덕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조금씩 기세를 더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아침에..

택시를 탄 남자

나의 인생은 이미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이 끝났을 따름이며,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을 거라구요. 몇 년 전에, 필명을 사용해 조그마한 미술 잡지의 화랑 탐방 비슷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화랑 탐방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어서 특별히 전문적인 기사를 쓴 건 아니었고, 화랑의 분위기며, 그 화랑 주인의 인상을 가벼운 터치로 기술하는 정도의 기사였다. 유달리 의욕적으로 덤벼들었던 것이 아니라 하찮은 관계로 해서 공교롭게 손댄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퍽이나 재미난 작업이 되었다. 나 자신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사로 정리하는 작업은 문장을 배우는 데 매우 좋은..

뾰쪽구이

이번엔 귀하께서 만들어 오신 신제품 뽀쪽구이를 뿌려 봅시다. 먹으면 입선, 안 먹으면 낙선입니다. 별 생각없이 아침 신문을 들춰보는데 구석 쪽에 '명과 뾰쪽구이 신제품 모집 대설명회'라는 광고가 실려 있었다. '뾰쪽구이'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명과'라고 했으니까 과자임은 분명하다. 나는 과자에 관해선 좀 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한가하기도 해서, 그 '대설명회'라는 곳에 한 번 얼굴을 내밀어 보기로 했다. '대설명회'는 한 호텔의 홀에서 열렸는데, 차와 과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과자는 물론 '뾰쪽구이'였다. 나는 한 개를 집어먹어 보았는데, 특별히 감탄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단맛은 끈적끈적하기만 하고, 껍질도 너무 두꺼웠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걸 즐겨 먹으리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

작지만 확실한 행복

최근에는 바지를 미국식으로 '팬츠'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따금 그 안에 받쳐 입는 종래의 팬츠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영어라면 '언더팬츠'가 되겠지만, 그러한 명칭이 뚜렷이 정착되어 있지 않은 일본에서는 그 바깥 팬츠와 안 팬츠의 혼란 상황이 혼미의 도를 더욱더 깊게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언더팬츠' 모으기를(물론 남성용이지만) 꽤 좋아한다. 때때로 직접 백화점에 가서, '이것으로 할까, 저것으로 할까?' 하고 망설이면서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사기도 한다. 덕택에 옷장 서랍에는 상당히 많은 팬츠가 쌓여 있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쩌면 나 혼자만의 특수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