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을 이루지 못한 지 열이레 째다.
나는 불면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면증에 대해서라면 조금은 알고 있다.
대학생 시절, 한번 불면증 비슷한 것에 걸린 일이 있다. 구태여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증상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불면증이라 부르는 증상과 일치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에 갔더라면 그것이 불면증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병원에 간다한들 필경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딱히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병원에도 가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줄곧 아무 말 않고 지냈다. 누군가와 의논을 하면, 틀림없이 병원에 가 보란 말밖에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그 '불면증 비슷한 것'은 계속되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한 번도 정상적인 잠을 자지 못했다. 밤이 되면 침대로 들어가 이제 잠을 자자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순간, 마치 조건 반사처럼 의식이 말짱해지고 만다. 아무리 자려고 노력을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자자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반대로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시험 삼아 술이나 수면제를 먹어보기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졸음이라도 올까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잠이 아니다. 나는 잠의 테두리 같은 것을 손가락 끝으로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깨어 있다. 나는 잠시 존다. 그러나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옆방에서, 그 의식은 말똥말똥하게 깨어, 나를 지그시 보고 있다. 나의 육체는 어슬렁어슬렁 어두컴컴한 공중을 떠다니면서, 내 자신의 의식과 시선과 숨결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잠자고 싶어 하는 육체이며, 그와 동시에 각성하려 하는 의식이다.
그렇게 불완전한 졸음이 단속적으로 하루 종일 이어진다. 내 머리는 늘 뿌옇게 안개가 서린 듯하다. 나는 사물의 거리와 질량과 감촉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가 없다. 그리고는 졸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도처럼 밀려온다. 전철 좌석에서, 교실 책상에서, 혹은 저녁 식탁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존다.
의식이 내 몸에서 떠나간다. 세계가 소리도 없이 흔들린다.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연필과 핸드백과 포크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엎드려 푹 잠에 빠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각성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졸면서 걷고, 졸면서 밥을 먹고, 졸면서 대화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주변에 있는 모두가 내가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하는 듯하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실로 6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졌다. 그런데도, 가족도 친구도 누구 하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내내 졸면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 나는 말 그대로 자면서 살고 있었다. 내 몸은 익사체처럼 감각을 상실했다. 모든 것이 둔하고, 탁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불확실한 환각처럼 느껴졌다. 세찬 바람이 불면 내 몸은 저 세계의 끝으로 휘날려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세계의 끝에 있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땅으로, 그리하여 내 몸과 의식은 영원히 분리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꼭 매달려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매달릴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극단적인 각성 상태가 찾아온다. 그 각성 앞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했다. 나는 강력한 힘으로 각성의 핵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그 힘은 너무도 강력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침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각성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나는 밤중에 줄곧 깨어 있다. 거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계가 때를 새기는 소리를 들으며, 밤이 조금씩 깊어졌다가, 다시 옅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끝나 버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무런 외적 요인도 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끝나버렸던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갑자기 의식이 아득해질 만큼 깊은 잠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기억도 없다.
나는 비틀비틀 내 방으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장 침대로 파고들어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로부터 27시간을 푹 잤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나는 흔들어 대고, 뺨을 두드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27시간,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어떤 이유로 불면증에 걸렸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이유로 갑작스레 나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바람을 타고 멀리에서 날아온 두터운 구름 같은 것이었다. 그 구름 속에는, 내가 모르는 불길한 것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날아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날아와 내 머리 위를 뒤덮었다가는,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잠들지 못하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다르다. 나는 단순히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한숨도 잘 수 없다. 하지만 잠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다. 잠은 전혀 오지 않지만, 의식은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 오히려 보통 때 이상으로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몸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다만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남편도 아이도, 내가 한잠도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봐야, 병원에 가보란 말밖에 하지 않을 터이므로.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병원 따위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번 불면증도 옛날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내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의 것임을.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의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다. 아주 평온하고, 아주 규칙적으로, 나는 아침이면 남편과 아이를 배웅한 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시장을 보러 간다. 남편은 치과 의사이고, 우리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한 십 분쯤 되는 거리에 병원이 있다. 그는 치과 대학 시절의 친구와 공동으로 그 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기공사도 접수 아가씨도 두 사람이 공동으로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예약 손님으로 시간이 꽉 차 있으면, 나머지 한쪽이 그 환자를 맡는 일도 가능하다. 남편도 연줄 없이 그 장소에서 개업을 하여 아직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셈치고는, 꽤 환자가 많다. 환자가 너무 많아 여유가 없을 지경이다.
"나로서는 좀 더 느긋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뭐, 투정은 부릴 수 없지." 라고 남편은 말한다.
그렇죠, 라고 내가 말한다. 투정은 부릴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병원을 개업하기 위하여, 우리는 은행에서 처음에 예상했던 것 이상의 돈을 빌려야만 했다. 치과란 설비에 거액을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경쟁은 가혹하다. 개업을 했다고 그 다음날부터 환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그런 일은 없다. 환자가 오지 않아서 망한 치과도 무수히 많다.
병원을 개업했을 때, 우리는 아직 젊고 가난하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있었다. 우리가 이 터프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 그럭저럭 우리는 살아남았다. 투정은 부릴 수 없다.
빚만 해도 아직 삼분의 이는 남아 있다.
"틀림없이 당신이 핸섬한 남자라서 환자들이 몰려오는 걸 거야." 라고 나는 말한다. 늘 하는 농담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전혀 핸섬하지 않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편은 불가사의한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 어떻게 하다 내가 저렇게 불가사의한 얼굴의 남자랑 결혼을 했을까, 훨씬 더 핸섬한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하고 말이다.
그의 얼굴이 지니고 있는 불가사의함을, 나는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물론 핸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인 것도 아니다. 소위 말하는 분위기가 있는 얼굴도 아니다. 정직하게 말해, 그저 '불가사의 함'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아니면 '인상에 남는 구석이 없다'란 형용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훨씬 중요한 포인트는 남편의 얼굴을 그릴 일이 있어, 그의 얼굴을 그려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릴 수가 없었다. 연필을 들고 종이를 대하면, 남편의 얼굴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일로 조금 놀랐다. 이렇게 오래도록 함께 살았는데, 남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다니, 물론 보면 알 수 있다. 머리에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그림으로 그리려고 하면,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나는 어쩔 바를 모른다. 그저 불가사의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일로 이따금 불안해진다.
하지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고,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그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치과 의사가 되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도 그는 성공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안도감을 품는다. 나는 남편을 만나기까지, 그런 타입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내 여자 친구들도, 그런 그를 모두 좋아한다. 물로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아무튼 그는 어린아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싱긋 웃을 줄을 안다. 보통 어른 남자들은 그런 웃음을 웃지 못한다. 그리고 이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아주 근사한 치열의 소유자이다.
"내가 핸섬한 것은 내 탓이 아니야." 라고 남편은 웃으며 말한다. 늘 똑같은 반복이다. 그 농담은 우리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농담을 주고받음으로 해서, 말하자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겐 꽤나 중요한 의식이다.
그는 아침 8시 15분에 블루버드를 타고 아파트 주차장을 나선다. 아이를 옆자리에 앉히고, 아이가 다니는 국민학교가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것이다.
"조심해요"
"괜찮아."
언제나 똑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괜찮아, 라고. 그는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테이프를 카스테레오에 꽂고, 흥흥 멜로디를 웅얼거리며 엔진을 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떠나간다. 두 사람은 기이할 정도로 닮은 포즈로 손을 흔든다. 똑같은 각도로 얼굴을 갸웃하고, 똑같이 손바닥을 내게로 향하고, 그것을 살며시 좌우로 흔든다. 마치 누군가에게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내 전용 차는 중고 혼다 시티이다. 2년 전에, 나는 그것을 여자 친구한테서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물려받았다. 범퍼도 움푹 들어갔고, 구형이다.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기도 하다. 주행 거리가 무려 25만 킬로미터나 된다. 가끔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쯤, 엔진이 극단적으로 말을 안 들을 때가 있다. 아무리 키를 돌려도 엔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수리 공장으로 끌고 가야할 정도는 아니다. 한 십 분쯤 어르다 말다 하다 보면, 엔진이 부르릉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할 수 없는 일이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누구든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상태가 안 좋은 때도 있고,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남편은 내 자동차를 '당신의 당나귀'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그것은 나의 차다.
나는 그 시티를 타고 슈퍼마켓으로 시장을 보러 간다. 시장을 다 보면 집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오전 중에 가능한 한 몸을 빨리 움직여 일을 끝내도록 유념한다. 저녁 식사 준비도 가능하면 다 해 놓는다. 그러면 오후 내내 내 마음대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이 12시가 조금 넘어 점심을 먹으러 온다. 그는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혼잡하고, 맛도 없고, 옷에 담배 냄새가 밴다." 라고 말한다. 오고가느라 시간이 걸려도, 집에 돌아와 식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봐야, 나는 점심때에는 그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전날 먹다 남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데워먹고, 없으면 메밀국수로 때운다. 그래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물론 나 역시 혼자 묵묵히 밥을 먹기보다는, 남편과 함께 먹는 편이 즐겁다.
이전, 그러니까 병원을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약된 환자가 없어 오후 첫 타임이 비는 경우가 흔히 있었는데, 그런 때 우리는 점심을 다 먹고 나면 곧잘 침대로 들어갔다. 그것은 멋진 섹스였다. 사방은 조용하고,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방안 가득했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젊고, 그리고 행복했다.
지금도 물론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 가정에는 문제의 그림자 하나 없다. 나는 남편을 좋아하고,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 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흘러감과 함께 생활의 질이 조금씩 변화해 간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의 예약도 늘 만원이다. 그는 식사가 끝나면 목욕탕에서 이를 닦고, 재빨리 차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간다. 몇 천 몇 만의 병든 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늘 우리는 투정을 부릴 수 없다.
남편이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수영복과 수건을 들고 근처 스포츠클럽으로 차를 몬다. 그리고 그곳에서 30분 정도 수영을 한다. 꽤 하드하게 물살을 가른다. 딱히 수영을 하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수영을 하는 까닭은, 단지 몸에 불필요한 살이 붙는 게 싫어서이다. 나는 옛날부터 나의 몸 선을 아주 좋아했다. 솔직히 나는 내 얼굴이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못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몸은 좋아한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는 것이 좋다. 그 부드러운 윤곽이며, 균형 잡힌 생명감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그것에는 내게는 상당히 중요한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른 살이다. 사른 살이 되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서른이 되었다고 해서 세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 일이 그리 반가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러나 나이를 먹어 편해지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른이 된 여자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선을 유지하고 싶다고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어머니는, 과거에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
수영을 한 후, 오후의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그날그날에 따라 다르다. 역 앞 상점가로 나가 어슬렁어슬렁 아이쇼핑을 하는 일도 있다.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FM방송을 듣거나, 그대로 끄덕끄덕 잠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윽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나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간식을 준다. 아이는 간식을 다 먹으면 밖으로 나간다. 친구랑 함께 놀러 가는 것이다. 아직 2학년이니까, 학원에도 가지 않고, 과외 활동도 시키지 않는다. 그냥 놀게 내버려두면 돼, 라고 남편은 말한다. 놀다 보면 자연히 크니까, 라고. 아이가 밖으로 나갈 때면, 나는, 조심해라, 라고 말한다. 아이는, 괜찮아요, 라고 대답한다. 남편과 똑같다.
느지막한 오후에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6시까지는 돌아온다. 그리고 텔레비전 만화를 본다. 진료 시간이 연장되지 않는 한 남편은 7시까지는 돌아온다. 남편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쓸데없는 일로 타인과 만나거나 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대개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들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우리들은 각자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잘 조잘대는 것은 역시 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신선하고,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것이다. 아들이 얘기를 하면, 남편과 나는 거기에 대해 감상을 얘기한다.
식사가 끝나면, 아들은 혼자서 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논다.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또는 남편과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숙제가 있을 때에는, 방에 틀어박혀 숙제를 해치운다. 그리고 8시 반에는 침대로 들어가잔다. 나는 아들에게 이불을 반듯하게 펴 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잘 자라." 라고 말하고 전등을 끈다.
그 다음은 남편과 나의 시간이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석간을 읽으며 나와 얘기를 한다. 환자 이야기, 신문에 난 기사 이야기다. 그리고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를 듣는다. 나도 음악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차이를 구별할 수가 없다. 내 귀에는 어느 쪽이나 똑같이 들린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남편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아무 상관없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 그것으로 족하잖아, 라고 말한다.
"당신이 핸섬한 것처럼." 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래, 내가 핸섬한 것처럼." 남편이 말하면 싱긋 웃는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그것이 내 생활이다. 즉,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기 전의 생활이다.
대략,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의 연속이다. 나는 간단한 일기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데, 이삼 일 깜빡 잊고 안 쓰다 보면,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구별할 수 없다. 어제와 엊그제가 뒤바뀌어도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때로 참 이게 무슨 인생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놀랄 뿐이다. 어제와 엊그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런 인생에 내 자신이 포함되어 있고,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내가 새긴 발자취가 그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에.
그런 때 나는 목욕탕 거울 앞에 서서 나의 얼굴을 본다. 15분 정도 꼼짝 않고 본다. 머리를 텅 비우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을 점차 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간다. 그저 순수하게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나는 이것이 현재라고 인식한다. 발자취 따위 관계없다. 나는 이렇게 지금 현실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고.
하지만 지금 나는 잠들 수 없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이래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있다.
2
잠을 이룰 수 없게 된 첫날밤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무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아주 암울하고, 끈적끈적한 꿈이었다. 꿈의 내용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불길한 감촉뿐이다. 그리고 그 꿈의 정점에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꿈속에 잠겨 있다가는 되 돌이킬 수 없을 위태로운 시점에서, 무언가가 나를 현실로 끌어 잡아당기듯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눈을 뜨고서도 한참이나, 나는 하아 하아 숨을 크게 쉬었다. 손발이 저려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꼼짝 못하고 있으려니, 마치 동굴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내 숨결만이 유난스레 커다랗게 들렸다.
꿈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장을 향하고 누워, 가만히 숨결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거기에 재빨리 혈액을 공급하기 위하여, 폐가 풀무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그맣게 수축하였다. 그러나 그 진폭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서서히 감소하였다. 도대체 지금은 몇 시쯤일까. 베갯머리에 있는 시계를 보려 했지만, 고개를 제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 때 발밑으로 문득 무언가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희미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심장도 폐도, 내 몸 속의 모든 기관이 순간에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하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는 급격하게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윤곽이 명확해지고, 그 안으로 실체가 부어져 세부가 떠올랐다. 그것은 꼭 맞는 검은 옷을 입은, 야윈 노인이었다. 머리칼은 회색으로 짧고, 뺨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 노인이 내 발치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구멍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방금 전에. 그것도 막연하게 깨어난 것이 아니고, 퉁겨 오를 듯 잠에서 깨어났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꿈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나는 움직이려 하였다. 남편을 깨우든가, 아니면 불을 켜든가 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힘을 다해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것은 근원적인, 마치 바닥없는 기억의 우물에서 소리도 없이 피어오르는 냉기 같은 공포였다. 그 냉기는 내 존재의 뿌리까지 알알이 스며들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혓바닥조차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노인을 그저 빤히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노인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길쭉하고, 둥글둥글한 것이었다. 하얗게 빛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뚫어지게 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그 무언가도 확실한 형태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전자였다. 내 발치에 있는 노인은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옛날식 도기 주전자였다. 마침내 그는 그것을 위로 들어올려, 내 발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의 감촉을 느낄 수도 없었다. 내 발에 떨어지는 물이 보인다. 그 물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내 발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노인은 하염없이 내 발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암만 뿌려도, 그 주전자의 물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내 발이 머잖아 썩어 녹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긴 시간 물을 맞고 있으면 썩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내 발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의 혀는 공기를 진동시킬 수 없었다. 그 비명은 내 몸 속에서 그저 공허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음의 비명은 내 몸속을 윙윙 달리고, 내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내 세포의 구석구석까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죽고, 무언가가 녹아 버렸다. 폭발의 섬광처럼, 그 진공의 떨림은 내 존재에 관계되어 있는 많은 것을, 뿌리째 억지로 태워버리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노인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주전자도 없었다. 나는 내 발을 보았다. 침대에 물이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침대보는 마른 채였다. 그 대신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끔찍할 정도의 땀이었다.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땀을 흘리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땀이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또 하나 움직여보고, 그 다음에는 팔을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다리도 움직여 보았다. 발목을 돌려보고, 무릎을 구부려 보았다. 그렇게 원활하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각 부분은 그럭저럭 움직여 주었다. 나는 주의 깊게 몸 전체를 한 차례씩 움직여 확인을 하고서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방의 구석구석을 휘 둘러보았다. 방안 어디에도 노인의 모습은 없었다.
베갯머리의 시계는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로 들어간 것이 11시 전이니까, 한 시간 반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옆 침대에서는 남편이 쿨쿨 자고 있다. 남편은 마치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잠꼬대 하나 내지 않고 숙면하고 있다. 그는 한번 잠이 들면, 웬만한 일이 없는 한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목욕탕으로 가서는, 땀으로 젖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던져놓고,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몸을 닦고, 서랍장에서 새 잠옷을 꺼내 입었다. 그런 다음 거실 스탠드를 켜고, 소파에 앉아 브랜디를 한 잔 마셨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편처럼 체질적으로 전혀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제법 많이 마셨지만, 결혼을 하고부터는 일체 마시지 않게 되었다. 가끔가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날 밤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한 잔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선반 안에 레미 마르탱이 한 병 들어 있다. 그것은 이 집안에 있는 유일한 알코올이었다. 누군가가 선물을 한 것이다. 오랜 옛날 일이라, 누구한테 받았는지도 잊어버렸다. 병에는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다. 브랜디 잔 따위 있을 리가 없으므로, 나는 보통 잔에다 그것을 따라,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몸으로는 아직도 잔물결이 일고 있었지만, 공포감은 점차 엷어져 갔다.
아마도 가위에 눌렸었나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가위에 눌린 것은 처음이지만, 가위를 경험한 적이 있는 대학시절 친구한테 예전에 얘기를 들었었다. 그것은 아주 생생하고 선명해서 도저히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었다.
"그 당시에도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지금 생각해도 그래." 라고. 과연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은 꿈이다. 꿈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종류의 꿈인 것이다.
비록 공포감은 줄어들었지만, 몸의 떨림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 피부의 표면은 지진이 일어난 다음의 물결처럼, 언제까지고 부들부들 잘게 떨고 있었다. 그 잘디잔 떨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 비명 탓이다.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그 비명이 내 몸 속에서 웅크리고 있어, 그것이 내 몸을 이다지도 떨게 하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또 한 모금 브랜디를 마셨다. 목구멍에서 위로 천천히 내려가는 따끈한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리얼한 감촉이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아들일이 걱정스러워졌다.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하였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잰 걸음으로 아이 방에 갔다. 아이 역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한 손은 입 언저리에 놓여 있고, 또 한 손은 이불 밖으로 삐죽 나와 있다. 아이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안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의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해 주었다. 나의 잠을 난폭하게 방해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나 혼자에게만 엄습했던 모양이다. 남편도 아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거실로 돌아가, 하릴없이 잠깐 걸었다. 전혀 졸리지 않았다.
또 한 잔 브랜디를 마셔볼까, 하고 생각했다. 실은 좀 더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짜릿한 강렬한 냄새를 다시 한 번 입 속으로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안마시기로 하였다. 내일까지 취기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브랜디를 선반에 다시 올려놓고, 잔을 싱크대로 가져가 씻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 먹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피부의 떨림은 어언 가라앉아 있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전혀 기억에 없는 노인이다. 그 검은 옷도 기묘했다. 몸에 딱 맞는 니트 양복 같은, 고풍스런 것이다. 그런 옷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그 눈. 깜빡거리지도 않는 충혈된 눈. 누구였을까? 그리고 또 어째서 내 발에 물을 부었을까? 어째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갈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내 친구는 그녀의 약혼자 집에 묵으러 갔다가 가위에 눌렸다고 하였다. 그녀가 잠을 자고 있는데 쉰 살 정도의 까다로운 표정을 한 남자가 나타나, 너,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 사람은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령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나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하고 그녀는 그때 생각했다. 하지만 이튿날 약혼자가 보여 주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니, 그것은 전날 밤 꿈에 나타난 남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가위에 눌리기까지 한걸. 거야라고.
하지만 나는 긴장은커녕, 아무 걱정도 없이 살고 있다. 여기는 우리 집이다. 여기에 나를 위협하는 요인이 있을 리가 없다. 어째서 내가 이 집에서 가위에 눌리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저었다. 그만 생각하자. 생각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건 그냥 단순히 리얼한 꿈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틀림없이 엊그제 테니스를 친 탓이리라. 수영을 한 후에, 클럽에서 친구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 지나치다 싶게 오래 쳤던 것이다. 그 다음 손발에 한동안 힘을 줄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나는 딸기를 다 먹고 나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시험 삼아 눈을 감아 보았다.
하지만 전혀 자고 싶지 않다.
아이 참,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전혀 졸리지 않은 것이다.
잠이 올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침실로 들어가, 책꽂이에서 소설을 한 권 골랐다. 불을 켜고 찾는데도, 남편은 아무 반응이 없다. 내가 고른 책은 '안나 카레리나', 오랜 옛날에 한 번 읽은 일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줄거리가 어땠는지, 거의 기억에 없다. 맨 첫 줄과, 마지막에 주인공이 철도 자살을 하는 부분만 기억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의 종류는 한 가지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기 다르다.' 이것이 맨 첫 문장이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첫 부분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경마장 장면이었던가? 아니면 그건 다른 소설의 한 장면인가?
나는 하여튼 소파로 돌아가 책을 펼쳤다. 이런 식으로 차분하게 책을 읽어 본 지가 몇 년 만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오후의 남는 시간에 한 30분이나 1시간 정도 책을 읽는 일은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그것은 독서라고 할 수 없다. 책을 보고는 있지만, 내 머리는 금방 딴 생각으로 점령당하고 만다. 아이 일이라든가, 시장볼 일이라든가, 아니면 냉장고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등, 친척 결혼식에 무슨 옷을 입고 가면 좋을까, 아니면 한 달 전에 위 수술을 받은 아버지 일이라든가, 그런 잡다한 일들이 머리로 떠올라, 그것이 점점 파생적인 방향으로 부풀어 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만 경과해 있고, 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어느 사이엔가 책을 읽지 않는 생활에 길들고 말았다. 새삼스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상당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는 일이 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었고, 용돈은 거의 전부 책값으로 사라졌다. 먹을 것을 줄여가며, 그 돈으로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었다.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나만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다섯 형제 중 가운데였고, 부모님은 양쪽 다 일을 갖고 있어서 바쁜 사람들이었고, 가족 중 어느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읽고 싶은 만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독서 감상문 콩쿠르가 있으면 반드시 응모를 하였다. 상품으로 주는 도서권이 탐이 나서였는데, 대개는 입상을 하였다. 대학은 영문과로 진학했다. 거기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캐더린 맨스필드에 관해 쓴 졸업 논문은 최고점을 받았다. 교수는 대학원에 남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나는 학구적인 인간도 아니고, 나 또한 그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책읽기를 좋아했을 뿐이다. 대학에 남고 싶었다 한들, 우리 집에는 나를 대학원에 보낼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내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 집을 나와 자립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나는 말 그대로 자신의 두 손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책을 한 권 읽었던 게 언제였더라? 그리고 그때 읽은 책이 뭐였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책의 제목조차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인생이란 어째서 이다지도 싹 그 양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뭣에 홀린 것처럼 책을 마구 읽어대던 과거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 세월과, 정상이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그 격렬한 열정은 도대체 내게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나는 그날 밤, '안타 카레리나'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몰두하여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안나 카레리나와 우론스키가 모스크바 역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장면까지 단숨에 읽고 나서,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놓고는, 브랜디 병을 다시 꺼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잔에 따라 마셨다.
옛날에 읽었을 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면 기묘한 소설이다. 소설의 히로인인 안나 카레리나가 무려 소설이 116페이지까지 진행되어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별로 부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 점에 대해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우론스키라는 별 볼일 없는 인물의 생활상이 언제까지고 지루하게 묘사되어 있어도, 그들은 지그시 인내하면서, 아름다운 히로인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적인 여유만은 듬뿍 있었으리라. 적어도 소설을 읽는 계층 사람들에게는.
불현 듯 시계를 보니, 바늘은 벌써 3시를 가리키고 있다.
3시? 그런데 나는 전혀 졸리지 않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이대로 죽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 다음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잠을 자야만 한다. 나는 이전에 불면으로 시달렸던 때의 일을 문득 떠올렸다. 하루 종일 뿌연 구름에 둘러싸여 있듯 살았던 때의 일을. 이제 두 번 다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도 살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한 남자의 아내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이다. 내게는 책임이란 것이 있다. 남편의 점심도 준비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 침대로 들어간다 해도 아마 한잠도 잘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고, 더구나 책을 계속 읽고 싶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결국 나는, 아침 해가 창문을 물들일 때까지 '안나 카레리나'에 빠져 있었다. 안나와 우론스키는 무도회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안나는 경마장(역시 경마장이 등장했다)에서 우론스키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광란하며, 남편에게 자기의 부정함을 고백한다. 나는 우론스키와 함께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 넘으며, 사람들의 환성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관객석에서 우론스키가 낙마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창이 밝아오자, 나는 부엌에서 커피를 끓여 마셨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소설의 장면과, 갑작스레 찾아온 격렬한 공복감 탓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 의식과 육체는 어딘가에서 어긋난 채, 그대로 고정된 것 같았다. 나는 빵을 잘라, 버터와 머스터드를 발라,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싱크대 앞에 선 채 그것을 먹었다. 이렇게 배가 고프기는 나로선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실로 숨 쉬기 어려울 정도의 폭력적인 공복감이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났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파, 나는 샌드위치를 하나 더 만들어 그것도 먹어치웠다. 그리고 커피도 한 잔 더 마셨다.
3
가위에 눌렸던 일도, 아침까지 한잠도 자지 못했다는 것도, 남편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딱히 숨길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말한다고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고, 게다가 하룻밤쯤 잠을 못 잤다고 해서 별 대수로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한테든 가끔은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에게 커피를 끓여 주고, 아이에게는 뜨거운 우유를 주었다. 남편은 토스트를 먹고, 아이는 콘플레이크를 먹었다. 남편은 신문을 죽 훑어보고, 아이는 새로 배운 노래를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블루버드를 타고 나갔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선 다음, 나는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생각하였다. 할 일이 무엇인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점검하였다. 그리고는 오늘 하루쯤 시장을 보지 않아도, 특별히 지장은 없겠다고 확인하였다. 빵도 있다. 우유도 있다. 계란도 있다. 고기도 냉동되어 있다.
은행에 갈 일이 있었지만, 반드시 오늘 중에 가야하는 일은 아니었다. 내일로 미뤄도 지장은 없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다시 읽으며 새삼스레 깨달은 일인데, 나는 '안나 카레리나'의 내용을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등장인물도, 장면도, 별 기억이 없었다. 전혀 생소한 책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읽었을 때는 제법 감동을 했을 텐데, 결국은 아무 것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당시 느꼈을 감정의 떨림이며 고양된 기분은, 어느 틈엔가 깨끗이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져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내가 책을 읽느라 소비한 방대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을 덮고, 한참을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불현 듯, 나는 그저 멍하니 창밖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상권의 한 가운데를 조금 지난 부분에 초코렛 부스러기가 끼어 있었다. 초코렛은 바싹 말라, 바슬바슬한 채로 책에 눌러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초코렛을 먹으면서 이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언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이래 초코렛을 전혀 먹지 않았다. 남편이 단 과자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이한테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다 과자류를 사 두는 법은 일체 없다.
10년이나 오랜 옛날에 먹다 남은 그 하얗게 변색한 초코렛 부스러기를 보고 있는 사이에, 초코렛이 무지하게 먹고 싶어졌다. 나는 옛날처럼 초코렛을 먹으며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싶었다. 온몸의 세포란 세포가 초코렛을 원하며 숨을 죽이고, 수축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나는 카디건을 걸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가게에 가서 그 중에서도 유독 달콤해 보이는 밀크 초코렛을 두 개 샀다. 그리고는 가게를 나오자마자 껍질을 까 걸어가면서 먹었다. 밀크 초코렛의 향이 입 안으로 퍼졌다. 그 사뭇 직접적인 달콤함이 몸 구석구석까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두 번째 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초코렛 향이 떠다녔다.
나는 소파에 앉아, 초코렛을 먹으면서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초코렛을 하나 고스란히 먹어치우고, 두 개째 껍질을 벗겨, 그것도 반이나 먹었다. 상권의 삼분의 이 정도를 읽을 즈음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40분이었다.
11시 40분?
이제 금방 남편이 돌아올 것이다. 나는 황망하게 책을 덮고는,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는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 불을 켰다. 그리고 양파를 썰어 메밀국수를 삶을 준비를 하였다.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찬 두부 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아, 초코렛 냄새를 없앴다.
물이 끓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남편이 돌아왔다. 예정보다 일이 일찍 끝났어, 라고 남편은 말한다.
우리는 둘이서 메밀국수를 먹었다. 남편은 메밀국수를 먹으며 새로 구입하려 계획하고 있는 의료 기구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치석을 제거할 수 있는 기계라고 한다.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가격은 뭐 늘 그런 것처럼 제법 비싸지만, 본전은 뽑을 수 있을 거야, 라고 남편은 말했다. 요즘은 치석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부러 오는 환자도 많으니까 말이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남편이 내게 물었다. 나는 치석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 중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깊이 생각하고픈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장애물 경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석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남편은 심각하다. 나는 그 기계가 얼마나 하냐고 물은 뒤, 생각하는 척하였다. 꼭 필요한 기계라면 사면되잖아, 라고 말했다. 돈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노는 데 쓰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 라고 남편은 말했다. 노는 데 쓰는 돈이 아니니까, 라고 남편은 나의 말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묵묵히 메밀국수를 먹었다.
창밖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새가 줄줄이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망연히 그 새들을 보고 있었다. 졸리지 않았다. 나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릇을 치우는 동안 남편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안나 카레리나'가 놓여 있었지만, 그는 책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든 말든 남편은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설거지를 다 끝내자, 오늘은 좋은 일이 있어, 라고 남편이 말했다. 뭘 거 같아? 모르겠는데, 라고 나는 말했다. 오후 첫 번째 손님이 약속을 취소했거든. 그래서 한 시 반까지 난 여유야. 그렇게 말하고 남편은 싱긋 웃었다. 나는 남편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왜 그것이 좋은 일인지 짐작이 안 갔다. 무슨 소리일까?
그 말이 섹스를 하고 싶다는 뜻인 줄을, 나는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자고 했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왜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빨리 책을 읽고 싶었다. 소파에 혼자 드러누워, 초코렛을 먹으면서, '안나 카레리나'의 페이지를 넘기고 싶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줄곧 우론스키라는 인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톨스토이는 등장인물을 모조리 이토록 능숙하고 아주 멋지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기에, 거기에는 구원이 그 손길을 뻗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란 즉―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고 실은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요, 라고 말했다. 미안, 미안하지만, 이라고. 나는 종종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일이 있어 남편은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무리하지 말고 잠깐이라도 누워서 쉬는 게 좋지 않겠어,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 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2시가 넘어서까지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의료 기구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최신품에다 값비싼 기계를 사다 놓아도 이삼년 지나면 구식이 되고 마니, 계속 새것으로 바꿔 사야 한단 말이야, 의료 기구를 만들어내는 제조 회사만 돈을 벌고 있어, 그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말에 가끔 대꾸를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지만, 거의 아무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남편이 오후 진료를 위해 집을 나가고 난 뒤, 나는 신문을 접어 치우고, 소파의 쿠션도 탁탁 두드려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창틀에 기대어, 방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잠이 오지 않는 것일까? 예전에 몇 번이나 철야를 해본 일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시간 깨어 있었던 일은 한 번도 없다. 보통 때의 나 같으면 벌써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을 것이고, 만약 잠에 빠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잠이 와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졸리지 않고, 머리도 말짱하다.
나는 부엌에 가서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이제 뭘 하지 하고 생각했다. 물론 '안나 카레리나'를 계속 읽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느 때처럼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결국 수영장에 가기로 하였다. 뭐라 설명은 하긴 어렵지만, 한껏 몸을 움직임으로 하여,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를 내쫓고 싶은 느낌이었다. 내쫓는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내쫓는단 말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무엇을 내쫓는다는 말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내 몸 속에서 어떤 가능성처럼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언어를 찾아내는데 서투른 것이다. 아마도 톨스토이라면 딱 어울리는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테지만.
하여튼 나는 가방에다 수영복을 집어넣고, 시티를 타고 스포츠클럽으로 갔다. 풀에는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젊은 남자 한 명과, 중년의 여자 한 명이 수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전요원이 따분하다는 듯 수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안경을 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30분 동안 수영을 하였다. 그런데 30분으로는 모자랐다. 나는 15분이나 더 수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하여 크롤로 왕복을 하였다. 숨은 가빴지만, 몸에는 아직도 힘이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내가 풀에서 나오자,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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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나는 시티를 몰아 은행으로 가서 볼일을 보았다. 슈퍼마켓에 들러 시장을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안나 카레리나'를 읽으며 나머지 초코렛을 먹었다. 4시에 아들이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주스를 먹이고, 내가 만든 과일 젤리를 주었다. 그리고는 저녁 준비를 하였다. 우선 냉동실에서 고기를 꺼내 해동을 하고, 채소를 썰어 볶을 준비를 해 놓았다. 된장국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나는 아주 재빠르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일을 해치웠다.
그러고 나서는 또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졸리지 않았다.
10시가 되어 나는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같이 자는 척하였다. 남편은 금방 잠이 들었다. 머리맡에 있는 전등을 끄자, 거의 동시에 그는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마치 전등의 스위치와 그의 의식이 코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참 대단하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잠이 오지 않아 고생스러워하는 사람 쪽이 훨씬 많은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는 언제나 숙면을 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리셨다. 잠도 어렵사리 드는데다가, 바스락하고 조그만 소리라도 나거나 사소한 기척에도 눈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내 남편은 그렇지 않다. 일단 잠이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나는 그 점이 하도 이상해서,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눈을 뜨는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실험을 해 보았다. 스포이트로 얼굴에 물을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브러시로 콧잔등을 간지러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끈덕지게 계속하면, 그제야 간신히 성가시다는 듯 뭐라 웅얼거릴 뿐이었다. 남편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적어도, 어떤 꿈을 꾸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몰론 가위에 눌린 일도 없다. 그는, 진흙탕 속에 묻힌 거북이처럼, 그저 잠에 푹 빠져 있을 뿐이었다.
참 대단한 일이다.
나는 10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 가서는 불을 켜고, 그라스에 브랜디를 따랐다. 브랜디를 한 모금 핥듯이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기분이 내키면 선반에 감추어 두었던 쿠키나 초코렛을 꺼내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침이 왔다. 나는 책을 덮고,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매일, 같은 일을 거듭하였다.
나는 재빨리 집안일을 끝마치고, 오전 중에는 내내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이 되면, 책을 놓고 남편을 위해 점심을 준비했다. 남편이 1시가 되기 전에 다시 나가고 나면, 차를 타고 스포츠클럽에 가서 수영을 하였다. 잠을 자지 않게 된 이후로는, 매일 꼬박 1시간이나 수영하였다. 30분 운동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수영을 하고 있는 동안은 수영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였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효율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만 생각하며,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별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어디에 가자고 하는 일이 있으면, 미안해요, 집에 일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 봐야 돼요, 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와도 관계하고 싶지 않았다. 낯모르는 누구와 두서없는 수다를 떨 틈이 없는 것이다. 나는 실컷 수영을 한 후에도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싶었다.
나는 의무로써 시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상대하였다. 의무로써 남편과 섹스를 하였다. 길들고 나면, 결코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간단한 일이었다. 머리와 육체의 연결을 끊으면 되는 일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동안, 내 머리는 내 자신의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집안일을 하였다. 아이에게 간식을 주고, 남편과 세상 이야기를 하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부터 나는 현실이란 이 얼마나 쉬운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현실을 살아가는 따윈 실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현실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저 집안일에 불과했고, 그저 가정이었다. 단순히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번 작동 순서를 기억하고 나면, 그 다음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쪽 단추를 누르고, 저쪽 레버를 잡아당긴다. 눈금을 조절하고, 뚜껑을 닫고, 타이머를 맞춘다. 그런 반복에 불과하다.
물론 때로는 변화도 있었다. 남편의 어머니가 다니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동물원에 갔다. 아이가 심한 설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 사건들 어느 하나 내 존재를 흔들지는 못했다. 그들은 소리 없는 바람처럼 내 주위를 불며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시시껄렁한 세상 이야기를 하고, 4인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곰 우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의 배를 따뜻하게 해 주고, 약을 먹였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이 지났다.
나의 끊임없는 각성 상태가 두 주일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과연 불안해졌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사람은 으레 잠을 자는 법이고,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예전에, 사람을 잠재우지 않는 고문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치스가 행한 고문이었다. 사람을 좁은 방에다 가두고, 잠을 잘 수 없도록 눈을 뜨고 있게 하고는 빛을 갖다 대거나, 커다란 잡음을 쉴 새 없이 들려주거나 한다. 그러면, 사람은 발광을 하고, 끝내는 죽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어 발광을 하는지, 나는 기억 할 수 없다. 사흘이나 나흘째쯤, 그런 정도가 아닐까? 내 경우 잠을 자지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났다. 아무리 뭐라 해도 너무 길다. 그런데도 내 몸은 전혀 쇠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건강할 정도니까.
나는 어느 날 샤워를 한 후, 알몸인 채로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선이 터져나갈 듯한, 생명력을 띠고 있음에 놀랐다. 나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구석구석 체크해 보았지만, 거기에서 단 한 조각의 불필요한 군살이나 한 줄기 주름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 몸은 물론 소녀 시절의 몸매와는 달랐다. 하지만 내 피부는 옛날에 비해 훨씬 더 빛나고 탄력이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뱃살을 손가락으로 집어 보았다. 그것은 탄탄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아픔다워져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나는 마치 젊음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스무 살이라 해도 틀림없이 통할 것이다. 피부는 매끈매끈하고,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고, 불거져 나온 광대뼈의 그림자(나는 내 몸 중에서 그곳을 가장 싫어했다)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30분 정도 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러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아름다워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변이 생긴 것일까?
병원을 찾아볼까 하고도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절친한 의사가 있다. 하지만 의사가 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하면,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무지 그가 나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줄 것 같지가 않다. 일주일이나 전혀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우선 내 머리를 의심할 것이다. 아니면 단순한 불면증 노이로제로 결론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나를 어디 다른 큰 병원으로 보내 검사를 받도록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거기에 갇혀, 검사를 받는다는 빌미로 이리저리 뺑뺑이를 돌아야 할 것이고, 이런저런 실험을 당할 것이다. 뇌파 검사며 심전도며 소변 검사며 심리 테스트며, 등등의.
내가 그런 것들을 견뎌 내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다. 매일 1시간을 꼬박 수영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자유가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병원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게다가 병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닥치는 대로 검사를 해대고는, 산더미 같은 가설을 세울 것이다. 나는 그런 곳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도서관에 가서 잠에 관한 책을 읽어보았다. 잠에 관한 책은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대수로운 내용도 없었다. 결국 그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딱 한가지였다. 잠이란 휴식이다. 그뿐이었다. 그것은 자동차의 엔진을 끄는 것과 마찬가지다. 엔진을 끄지 않고 내내 작동시키면, 그것은 금방 마모된다. 엔진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열을 동반하고, 고인 열은 기계 자체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방열을 위해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쿨 다운하는 것이다. 엔진을 끈다. 그것이 수면인 것이다. 인간의 경우, 그것은 육체의 휴식이며 동시에 정신의 휴식이기도 하다. 인간은 몸을 눕히고 근육을 쉬게 함과 동시에, 눈을 감고 사고를 중단한다. 그러고도 남은 사고는 꿈이란 형태로 자연 방전된다.
어떤 책에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인간이란 사고에 있어서나 육체의 행동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일정한 경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라고 그 책의 저자는 말한다. 사람이란 것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행동, 사고의 경향을 형성해가는 법이고, 일단 형성된 그런 경향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지워지지 않는다. 즉 사람은 그런 경향이란 우리 안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잠이야말로 그런 경향의 편향을 구두굽이 한쪽만 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화시킨다. 즉 잠이 그 편향을 조정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잠을 통해 집중적으로 사용한 근육을 자연스레 풀고, 집중적으로 사용된 사고 회로를 진정시키고, 또 방전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쿨 다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시스템 안에 숙명적으로,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만약 그것에서 벗어나면, 존재 그 자체가 존재 기반을 잃게 된다, 라고 저자는 썼다.
경향? 하고 나는 생각했다.
경향이란 말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집안일이었다. 내가 아무런 감동 없이 기계적으로 매일매일 하고 있는 수많은 집안 일. 요리니 시장보기니 빨래니 육아니, 그런 것들은 그야말로 경향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도 그런 일들을 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경향에 지나지 않으므로. 단추를 누르고 레버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이란 것이 점점 앞으로 흘러간다. 똑같은 식으로 움직이는 몸, 그저 경향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구두굽이 한쪽만 달 듯 경향적으로 소비되어지고, 그것을 조정하고 쿨 다운시키기 위해 나날의 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겨우 그런 일인가?
나는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잠을 잔다. 내 인생은 단지 그 반복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디로도 갈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도서관 책상을 향하고 머리를 저었다. 잠 따위 필요 없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발광한다 해도, 잠을 자지 못하여 내가 그 생명적 '존재기반'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래도 좋다. 상관없다. 나는 아무튼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경향적 소비를 치유하기 위한 잠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그런 것도 필요 없다. 내게는 필요 없다. 만약 내 육체가 경향적으로 소비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정신은 내 자신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드시 내 자신을 위해 취하리라.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리라. 치유 따위 필요 없다. 나는 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는 도서관에서 나왔다.
5
그런 식으로, 나는 잠을 못 자는 데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이 없다. 좀 더 미래를 내다보며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의 시간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간을 지금까지 잠이란 작업에 쿨 다운시키기 위한 치유 작업이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에 낭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지금 나만을 위한 것이 되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어떤 요구도 받지 않고. 그렇다, 그것은 그야말로 확대된 인생이다. 나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그런 짓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과연 당신이 말하는 대로다. 그리고 나는 그 비정상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는 데 대한 빚을, 언젠가 갚지 않으면 안 될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 확대된 부분을 나중에 반납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가설이지만, 그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 또한 없다. 나는 일단은 이치가 맞는 생각이라고 느낀다. 요컨대 최후에는 빌린 시간과 갚을 시간의 아귀가 꼭 맞는 셈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그런 일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약 어떤 예기치 못한 일로 자신이 일찍 죽어야만 한다 해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가설에 따른 길을 저 좋은 대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나는 나의 인생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멋진 일이었다. 거기에는 보람이란 것이 있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실감이 있다. 나는 소비되고 있지 않다. 적어도, 소비되고 있지 않은 부분의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고 실감할 수 없는 인생 따위 제 아무리 오래 지속돼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에야 분명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혼자 브랜디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나는 첫 일주일 동안 '안나 카레리나'를 세 번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그 장대한 소설은 수많은 발견과 수많은 수수께끼를 내포하고 있었다. 세공한 상자처럼, 세계 안에 조그만 세계가 있고, 그 조그만 세계 안에 또 조그만 세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세계가 복합적으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우주는 내내 거기에 있으면서, 독자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그들 세계의 일면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관통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그런 메시지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소설적인 결정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이 소설의 무엇이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을 능가하고 있는지. 나는 그것들을 꿰뚫을 수가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하여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싶은 만큼 실컷 읽은 후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나는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하여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난해한 부분도 나는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것이 내 원래의 모습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이 없는 인생 따윈 눈만 반짝 뜨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상태나 다름없다.
마침내 브랜디가 바닥을 드러내었다. 나는 거의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셔버린 것이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같은 레미 마르탱을 한 병 샀다. 초코렛과 쿠키도 샀다. 그리고 고급 브랜디잔도 샀다. 사는 김에 붉은 포도주도 한 병 샀다.
때로, 책을 읽으면서, 기분이 상당히 고양되는 일이 있다. 그런 때, 나는 책 읽기를 중단하고 방안에서 몸을 움직인다. 유연체조를 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가볍게 방안을 거닐기도 한다. 기분이 내키면 밤중에 산책을 하기도 한다.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에서 시티를 타고 근처 거리를 정처 없이 달린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일도 있지만,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어, 대개는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위험하지 않을 성싶은 곳에다 차를 세우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일도 있고, 항구까지 가서 한동안 배를 바라보는 일도 있다.
한번은 경찰이 다가와, 몇 가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깊은 밤, 시간은 2시 반이었고, 나는 부두 근처에 있는 가로등 밑에 차를 세우고, 배의 불빛을 보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경찰이 톡톡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유리창을 내렸다. 젊은 경관이었다. 핸섬하고, 말투도 정중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라고 나는 경관에게 설명하였다.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여, 나는 보여 주었다. 경관은 잠시 그것을 보았다. 지난달 여기에서 살인 사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라고 경관은 말했다. 아베크족이 세 젊은이의 습격을 받아, 남자는 죽고, 여자는 강간을 당했다. 그 사건이라면 나도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부인, 만약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렇게 깊은 밤에 이런데서 어슬렁거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제 갈게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말을 건 것은 그 한 번뿐이었다.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밤거리를 1시간이나 2시간 정도 헤매 다닌다. 그리곤 아파트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어둠 속에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남편의 하얀 블루버드 옆으로. 그리고 식어 가는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가 사라지면, 나는 차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간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우선 침실로 들어가 남편이 자고 있는가를 확인한다. 남편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고 있다. 그리고 아이 방으로 가 본다. 아이도 똑같이 숙면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세계는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점점 변화하고 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어느 날 밤,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 적이 있다. 침실에서 탕하는 소리가 나, 당황하여 가보니 자명종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남편이 잠결에 팔을 움직이거나 해서, 그때 떨어진 것이리라. 그런데도 남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숙면하고 있었다. 어이휴, 도무지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야 눈을 뜨는 것일까? 나는 시계를 주워, 머리맡에 놓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운데서 바라보다니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다. 몇 년 만일까?
막 결혼했을 무렵에는 곧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이 이렇듯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한, 나는 무사할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남편이 잠든 후면, 그렇게 종종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로, 나와 남편의 어머니 사이에 말다툼 비슷한 것이 있었던 때부터라고 생각된다. 남편의 어머니는 종교에 집착하고 있어, 거기에서 이름을 받아 왔던 것이다. 어떤 이름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나는 그 이름을 받을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시어머니는 꽤 격렬하게 언쟁을 벌였다. 하지만 남편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우리를 달랠 뿐이었다.
나는 그때, 남편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믿음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 남편은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화가 났다. 물론 그것은 옛날 일이고, 나와 시어머니는 화해를 하였다. 아이의 이름은 내가 붙였다. 물로 나와 남편은 금방 화해를 하였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나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침실에 선 채 남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평소처럼 곤히 잠들어 있다. 이불 끝으로 묘한 각도로 맨발이 쑥 삐져나와 있다. 마치 누군가 타인의 발 같은 각도로, 그것은 큼직하고 우둘투둘한 발이었다. 커다란 입은 반쯤 헤 벌어져 있고, 아랫입술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 코언저리가 피뜩 움직였다. 눈 아래에 있는 사마귀가 징그럽도록 크고 볼품없어 보였다. 감은 눈도 어딘가 모르게 품위가 없다. 눈꺼풀이 늘어져, 그것이 색 바랜 살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보처럼 잠자고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 잠든 얼굴에는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다지도 추한 꼴을 하고 자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결혼했을 당시, 이 사람의 얼굴은 훨씬 팽팽했다. 똑같이 숙면을 하고 있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칠칠맞은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이 옛날에는 어떤 모습으로 잤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한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 혼자만의 지나친 느낌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감정 이입을 하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라면 아마도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어머니 특유의 논리로, 너 말이지, 결혼해서 행복한 시절도 고작해야 이삼 년뿐이라니까. 이것이 그녀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대사다. 잠든 얼굴이 귀엽다는 둥. 반해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는 둥이라고. 그녀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틀림없이 남편은 추해졌다. 얼굴은 팽팽함을 잃었다. 그것이 아마도 나이를 먹는다는 일일 것이다. 남편은 나이를 먹었고, 그리고 지쳐 있다. 닳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점점 더 추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리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아주 힘겨운 한숨이었지만, 물론 남편은 옴짝도 하지 않았다. 한숨 정도로는 눈을 뜨지 않는 것이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브랜디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책을 덮고, 아이 방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 복도의 불빛을 배경으로 아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이도 남편처럼 곤히 잠들어 있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나는 한동안 아들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아들은 아주 매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과는 상당히 다르다. 아직 어린애인 것이다. 피부는 반들반들하고, 저질적인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가 내 신경에 거슬렸다. 아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체 아들의 무엇이 내 신경에 거슬리는 것일까. 나는 거기에 선 채, 또 팔짱을 끼었다. 물론 나는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 몹시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확실하게 지금,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떠 아들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짜증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아들의 잠든 얼굴이 남편과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또 시어머니와 똑같았다. 혈통적인 완고함, 자기 충족성, 나는 남편의 가족이 지니고 있는 그런 류의 오만함을 싫어하였다. 물론 남편은 나에게 잘 대해 준다. 자상하고, 많은 배려를 해 준다. 바람 한 번 피운 일 없고, 일도 열심히 한다. 성실하고, 아무한테나 친절하다. 내 친구들도 모두, 네 남편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라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흠잡을 데가 없다, 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흠잡을 데가 없다는 완벽함이 때론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그 흠잡을 데 없음 안에는, 왠지 상상력의 개재를 허락하지 않는 듯한, 딱딱하고 야릇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들 또한 같은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또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은 타인이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된다 해도, 결국은 내 기분 따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편이 지금 나의 기분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아들을 사랑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장래, 이 아들을 그렇게 진지하게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엄마답지 않은 생각이다. 세상의 엄마들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앞으로 언젠가는 불현 듯 이 아이를 경멸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슬퍼졌다. 나는 아이 방의 문을 닫고, 복도의 불을 껐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그러나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다시 책을 덮었다. 시계를 보니 3시 조금 전이었다.
잠을 자지 않게 된 이후로, 오늘이 며칠 째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처음 잠을 자지 못한 날이 그러니까, 지지난주 화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로 꼭 열이레가 된다. 나는 열이레 동안 한 잠도 자지 않았다. 열일곱 번의 낮과 열일곱 번의 밤. 아주 긴 시간이다. 잠이란 것이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아 보았다. 그리고는 잠의 감각을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깨어 있는 어둠이 존재할 뿐이었다. 깨어 있는 어둠, 그것은 내게 죽음을 상기시켰다. 만일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던가.
하지만 내 인생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내가 알리가 없다.
그럼,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잠을 일종의 죽음의 원형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즉 나는 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죽음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란 요컨대, 보통 때보다 훨씬 깊은, 의식이 없는 잠, 영원한 휴식, 블랙아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문득 생각하였다. 죽음이란, 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상황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끝이 없고 깊은 깨어 있는 어둠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죽음이란 상황이 휴식이 아니라면, 우리들의 이 피폐로 가득한 불완전한 생에 대체 어떤 구원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은, 아무도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누가 죽음을 실제로 보았는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죽음을 본 사람은 이미 죽어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추측이든, 그것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죽음이 마땅히 휴식이어야 한다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작스런 두려움이 내 전신을 감쌌다. 등줄기가 얼어붙고,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어둠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둠은 우주 그 자체인 것처럼 깊고, 구원이 없다. 나는 외톨이였다. 나는 의식을 집중하고, 확대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주의 저 깊은 곳까지 환히 꿰뚫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안 보려 하였다. 아직 이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죽는다는 것이, 영원한 각성 상태에서, 이렇게 어둠을 지그시 응시하는 것이라면?
나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잔에 남아 있던 브랜디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6
나는 잠옷을 벗고 블루진과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다 요트 파카를 입었다. 그리고는 머리칼을 뒤에서 하나로 뭉쳐 파카 속으로 쑤셔 넣고, 남편의 야구 모자를 썼다. 거울을 보니, 남자처럼 보인다. 이제 됐다. 그리고 나는 운동화를 신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나는 시티에 올라타자마자 키를 돌려, 엔진을 잠시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소리다. 나는 핸들에 양손을 얹고,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기어를 L로 한 후, 아파트 밖으로 차를 몰았다. 차가 보통 때보다 훨씬 가볍게 달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얼음 위를 달리는 것 같다. 나는 기어를 조심스레 바꾸어, 거리를 빠져 나와, 요코하마로 향하는 간선 도로로 들어섰다.
벌써 3시가 넘은 시간인데, 도로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 수는 결코 적지 않다. 거대한 장거리 운송 트럭이 노면을 울리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잠자지 않는다. 운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낮에 자고, 밤에 일하는 것이다. 나라면 밤낮으로 일할 수 있는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잠잘 필요가 없으므로.
그것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부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자연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어떤 상태가 생물학적으로 자연인가 하는 따위, 결국은 경험적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추론을 넘어선 지점에 있는 것이다. 가령, 나를 인류의 비약적 진화의 선험적 샘플로 간주한다면 어떨까? 잠들지 않는 여자. 의식의 확대. 나는 웃고 만다. 진화의 선험적 샘플.
나는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항구까지 달렸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한밤중에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방송국은 없었다. 어떤 주파수에 맞추어도 흘러나오는 음악이라니, 별 볼일 없는 일본의 록 뮤직뿐이다.
끈적끈적한 랩 송. 할 수 없이 나는 그런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은 나로 하여금 아주 먼 장소로 오고 만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하얀 줄로 구분된 공원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사방이 탁 트인, 가로등 아래 가장 밝은 곳을 골랐다.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즐겨 탈법한 차다. 하얀 투 도어 쿠페. 낡은 형이다. 아마 연인들이겠지. 호텔에 묵을 돈이 없어, 차 안에서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혹 생길지도 모르는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하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여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했다. 문이 잠겨 있는지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멍하니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대학교 1학년 때 남자 친구와 둘이서 드라이브를 갔다가, 차 안에서 페팅을 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도중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넣게 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는 핸들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들으며 그때 일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나는 상대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했다. 모든 일들이 터무니없이 먼먼 옛날에 일어난 일인 듯한, 기분이 든다.
잠을 못 이루기 이전의 기억이, 점점 가속도적으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아주 신기한 느낌이다. 매일 잠잘 시간이 되면 잠잤던 당시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 아니고, 그 당시의 기억도 나 자신의 기억이 아닌 듯 느껴진다. 사람은 이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 모른다. 설명을 해도 그들은 모르리라.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만약 믿는다 해도, 내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가. 따위, 절대로 정확하게 모를 것이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이 추론한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로밖에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
얼마만큼 긴 시간 거기에 그러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핸들 위에 양손을 얹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잠이 없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불현 듯 내 자신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있다. 나는 눈을 뜨고 사방을 보았다. 누군가 창밖에 있다. 그리고 문을 열려 하고 있다. 문은 물론 잠겨있다. 검은 그림자가 양쪽으로 보인다. 오른쪽 문과 왼쪽 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로,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두 그림자에 끼어, 내가 타고 있는 시티는 아주 작게 느껴진다. 마치 조그만 케이크 상자 같다. 자동차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오른쪽 유리창을 톡톡 두드린다. 하지만 그 사람이 경찰이 아님을 나는 알 수 있다. 경찰은 그런 식으로 두드리지 않는다. 차를 흔들어 대거나 하지도 않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어쩌면 좋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머리는 몹시 혼란스럽다. 겨드랑이 밑으로 땀이 배 인다. 빨리 어디론가 가야겠다, 고 생각한다. 키다, 키를 돌리자. 나는 손을 뻗어 키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린다. 셀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엔진이 점화되지 않는다.
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키를 천천히 돌려본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거대한 벽을 긁는 듯한, 키리릭 키리릭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헛바퀴를 돌고 있다. 그리고 남자들의 그 그림자는 내 차를 계속 흔들어대고 있다. 흔들림이 점점 커진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 차를 뒤엎을 작정이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하자, 침착하게, 천천히 생각하자.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나는 모른다. 내 머리 속은 농밀한 어둠으로 꽉 차 있다. 그것은 이미 나를 어디로도 데리고 가지 않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손가락이 떨려 열쇠구멍에 키를 집어넣을 수가 없다. 키를 빼어, 다시 꽂으려고 한 순간, 열쇠가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것을 주우려고 한다. 하지만 주울 수가 없다. 차체가 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구부리려 하다가, 나는 핸들에 이마를 거세게 부딪치고 만다.
나는 단념하고 시트에 몸을 기대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운다. 나는 우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나는 외톨이이고, 이 조그만 상자에 갇힌 채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지금은 밤의 가장 깊은 시각이고, 그리고 남자들은 내 차를 뒤흔들어대고 있다. 그들은 내 차를 엎어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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