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운명의 미로에서
1
나는 자주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즉 일종의 계속되는 상황으로 나는 그 호텔 안에 포함되어 있다. 꿈은 분명 그러한 계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꿈속에서의 이루카 호텔의 모습은 일그러져 있다. 아주 길쭉한 것이다. 어찌나 길쭉한지 그것은 호텔이라기 보단 지붕이 있는 긴 다리처럼 보인다. 그 다리는 태고로부터 우주의 종국에 이르기까지 길쭉하게 뻗어 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포함돼 있다. 거기에선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호텔 그 자체가 나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그 고동 소리나 온기를 또렷이 느낄 수가 있다. 나는, 꿈속에선, 그 호텔의 일부이다. 그런 꿈이다.
잠을 깬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 입 밖에 내어 나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물음이다. 물을 것까지도 없이 대답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여기는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 나라고 하는 현실 존재의 부속물, 특별히 인정한 기억이 없는데도 어느 틈엔가 나의 속성으로서 존재하게 된 몇 가지의 사항, 사물, 상황, 옆에서 여자가 잠자고 있는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나 혼자다. 방 바로 맞은편을 달리는 고속도로의 진동 소리와 베갯머리의 유리잔 바닥엔 5밀리미터 쯤 위스키가 남아 있다. 적의를 품은 아니, 그건 단순한 무관심인지도 모르지만 티끌 투성이의 아침햇살, 때론 비가 내리고 있다.
잔에 위스키가 남아 있으면, 그걸 마신다. 그리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면서, 이루카 호텔의 일을 생각한다. 팔다리를 천천히 뻗어본다. 그리곤 자신이 그저 자신일 뿐이며,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어디에도 포함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꿈속의 감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선 내가 손을 뻗치려고 하면, 거기에 호응해서 나를 포함한 전체상이 움직인다. 물을 이용한 자잘한 구조를 갖춘 장치처럼, 하나씩 하나씩 서서히 주의 깊게, 한 단계 한 단계 아주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그것은 차례차례 반응해 간다. 내가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진행해 가는 방향을 들을 수가 있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그리곤 누군가의 조용한 흐느낌 소리를 듣는다. 아주 조용한 소리, 어둠 속 깊숙한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흐느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이루카 호텔은 현실로 존재하는 호텔이다. 삿포로(홋카이도의 제1 도시) 거리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한쪽에 있다. 나는 몇 해 전이던가 거기에 1주일가량 머문 적이 있다. 아니지, 분명히 기억해내자. 명백히 해 두자. 그게 몇 해 전이더라? 4년 전,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4년 반 전이다. 나는 그때는 아직 20대였다. 나는 어떤 여자아이와 둘이서 그 호텔에 투숙했다. 그녀가 그 호텔을 선택했다. 그 호텔에 숙박하자고 그녀가 말했던 것이다. 그 호텔로 정하는 것이 좋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요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루카 호텔 같은데 엔 아마 숙박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작고 초라하기만 한 호텔로, 우리들 말고는 숙박객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그 1주 동안 그 호텔에 있으면서 로비에서 눈으로 본 손님이라곤 둘 아니면 셋 정도였고, 그나마 숙박객인지 아닌지조차 몰랐었다. 하지만 프런트의 보드에 걸린 열쇠가 군데군데 비어 있었으니까, 우리들 말고도 숙박객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다지 많지는 않다 해도 조금쯤은. 아무튼 작으나마 작은 도시의 한편에 호텔 간판을 내걸고, 직업별 전화부에조차 의젓하게 번호가 나와 있으니, 전혀 손님이 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말고 손님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무척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들이었을 게다. 우리들은 그들의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고, 그 무슨 소리도 듣지 못했고, 느낌도 갖지 못했었다. 보드위의 열쇠 배치만이 매일 조금씩 바뀌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아마도 희미한 그림자처럼 벽을 기어서 복도를 오가곤 했나 보다. 가끔씩 덜컥덜컥, 덜컥덜컥 하는 엘리베이터의 주행음이 조심스레 울려 왔지만, 그 소리가 그치면 침묵은 전보다도 오히려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든 이해할 수 없는 호텔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생물 진화의 막다름 같은 것을 연상케 했다. 유전자적 후퇴. 빗나간 방향으로 진행한 체 되돌이 킬 수 없게 된 기형 생물. 진화의 힘을 가진 인자가 소멸하고, 역사의 박병속에 정처 없이 우두커니 서 보니 마치 고아라도 된 것 같은 고독한 생물. 시간의 익곡.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누가 나쁘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가 그것을 구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첫째로 그들은 그곳에 호텔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오는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제 1보부터, 모든 것이 그릇돼 있었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져, 거기에 맞춰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혼란되어 있었다.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시도는, 새로운 세세한 세련됐다 곤 할 수 없다. 그저 세세할 뿐이다 혼란은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결과, 모든 것이 다 조금씩 비뚤어져 보였다. 거기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만히 응시하려고 하면, 극히 자연히 목이 몇 도쯤 기울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비뚤어짐, 기울인다지만 아주 작은 각도니까 특별한 해악 정도야 없고, 따로 부자연함을 느낄 정도도 아니며, 줄곧 거기에 있으면 그것에 이골이 나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역시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비뚤어짐 게다가 그런 것에 이골이 나 버린다면 이번엔 온당한 세계를 볼 때조차도 목을 기울이게 될지 모른다."
이루카 호텔은 그런 호텔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함은 그 호텔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한 끝에 포화점에 달해서, 이윽고 머지않은 장래에 시간의 크나큰 소용돌이에 몽땅 삼켜져버리게 될 것이라는 건 누가 보든 일목요연했다. 애처로운 호텔이었다. 마치 12월의 비에 젖은, 발이 셋밖에 없는 점은 개처럼 애처롭게 보였다. 물론 애처롭게 보이는 호텔은 세상엔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루카 호텔은 그런 것과도 또 좀 다르다. 이루카 호텔은 좀 더 개념적으로 애처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애처롭다. 말할 나위도 없다곤 생각하지만, 그런 호텔을 택해서 일부러 숙박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잘못 찾아든 손님 말고는 별로 없다.
이루카 호텔은 정식 명칭은 아니다. 정식으로는 그것은 '돌핀 호텔'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과 실체로부터 받는 인상이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문에 돌핀 호텔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에게 바다 언저리의, 사탕과자처럼 새하얀 리조트 호텔을 연상케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입구에는 이루카 돌고래를 새겨놓은 꽤나 훌륭한 부조가 걸려있다. 간판도 결려 있다. 하지만 만일 간판이 안 걸려 있다면, 그건 전혀 호텔로는 보이지 않을 게다. 간판이 있는데도, 아무래도 호텔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까. 무엇으로 보이느냐 하면, 그것은 꼭 퇴락한 박물관처럼 보인다. 특수한 전시물을 보기 위해, 특수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살그머니 찾아올 듯한, 그런 특수한 박물관. 하지만 사람이 이루카 호텔을 눈앞에 두고 그러한 인상을 품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빗나간 상상력의 비상은 아니다. 사실은 이루카 호텔의 일부는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런 호텔에 숙박하겠는가? 그 일부가 영문 모를 박물관이 되어 있는 그런 호텔에? 어둑한 복도 안쪽에 양의 박제니, 먼지투성이의 모피니, 곰팡내 물씬 나는 자료니, 검붉게 변색한 낡은 사진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런 호텔에. 못다한 상념이 마른 진흙처럼 구석구석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그런 호텔에? 모든 가구는 색이 바래고, 모든 테이블은 삐걱거리고, 모든 열쇠는 제대로 잠가지질 않았다. 복도는 닳아 떨어지고, 전구는 어두웠다. 세면대의 마개는 일그러져서 물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뚱뚱한 여자아이(그녀의 다리는 코끼리를 연상케 했다)는 복도를 걸으면서 칵칵 불길한 기침을 했다. 언제나 카운터에 있는 지배인은 애처로운 듯한 눈을 가진 중년 사내로, 손가락이 두 개 없었다. 이 사내는 보기에도, 무엇을 하건 우선 잘돼 나가지는 않을 그런 타입이었다. 그러한 타입의 바로 표본 같은 사내였다. 마치 짙은 청색 잉크 용액에 하루 동안 담가 두었다가 끄집어 낸 것처럼, 그의 존재의 구석에서 구석까지에 실패와 좌절의 그림자가 깊이 배어들어 있었다. 유리 상자에 넣어 가지고, 학교 실험실에 놓아두고 싶어질 그런 사내였다. <무엇을 하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내>라는 딱지를 붙여 가지고, 그를 보고 있기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의 차이야 있겠지만 비참한 기분이 들었고, 화를 내는 자도 적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사람은 그러한 타입의 비참한 인간을 보고 있기만 해도, 의미도 없이 무턱대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법이다.
누가 그런 호텔에 숙박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들은 숙박했다. 우린 여기에 숙박할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런 뒤에 그녀는 없어져 버렸다. 나 하나를 남겨놓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가 가버렸다는 걸 내게 알려준 사람은 '양 사나이'였다. 그 여잔 가버렸단 말이오, 하고 '양 사나이'는 내게 알려주었다.
'양 사나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나로서도 이제는 알겠다. 그녀의 목적은 나를 거기로 인도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몰로다브 강이 바다로 이르는 것같이. 나는 처마의 빗방울을 보면서, 그 일을 생각한다. 운명. 내가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꾸게끔 되었을 때에, 우선 떠올린 것은 그녀에 대해서였다. 그녀가 다시 나를 요구하고 있다.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선, 왜 잃게 몇 번이고 꿈을 꾸는 건가? 그녀,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몇 달 동안인가 살았는데도, 나는 그녀에 대해서 실질적으론 무엇 하나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녀가 어느 고급 콜걸 클럽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클럽은 회원제로, 신원이 확실한, 제대로 규격에 맞는 고객밖엔 상대하지 않았다. 최고급의 창녀다. 그녀는 그밖에도 몇 가진가의 일을 갖고 있었다. 평소의 낮 동안은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교정 일을 하고 있었고, 파트 타임으로 귀 전문 모델도 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녀는 매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녀에겐 물론 이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말이지, 그녀는 몇 개나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녀의 소지품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느 것에도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정기권도, 면허증도, 크레디트 카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조그만 수첩을 하나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영문 모를 암호가 볼펜으로 지저분하게 적혀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존재에는 시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창부는 이름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그녀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나이가 몇 살인지도, 생일조차 알지 못한다. 학력도 알지 못한다. 가족이 있는지 어떤지조차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비처럼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기억만을 남겨놓고, 하지만 지금 나는 나의 주위에서 그녀의 기억이 또다시 어떤 종류의 현실성을 띠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이루카 호텔이라는 상황을 통해서 나를 부르고 있다라고, 그렇다, 그녀는 이제 또 다시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루카 호텔에 다시 한 번 포함되는 것으로써만, 그녀와 다시 한 번 해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거기서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낙숫물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무엇엔가에 포함된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것은 몹시 먼 세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달인가 우주인가 그런 곳에서의 사건처럼 느껴진다. 결국 그건 꿈인 것이다. 손을 제아무리 길게 내뻗어도,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나는 거기에 당도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어째서 누군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가?' 아니지, 그래도, 그녀는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저 이루카 호텔의 어딘가에서, 그리고 나도 역시 마음의 어느 구석에선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장소에 포함될 것을, 그 기묘하고도 치명적인 장소에 포함된 것을. 하지만 이루카 호텔로 돌아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화로 방을 예약하고,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에 가면 그걸로 끝날 일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호텔인 동시에 하나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호텔이라는 형태를 취한 상황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그림자와 다시 한 번 상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나는 이 4년 동안, 그 냉랭하고 어둑시근한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루카 호텔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4년 동안 조용히 부지런히 모아온 모두를 송두리째 포기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그 거의 대부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으며, 그 같은 잡동사니를 제법 그럴싸하게 짝을 맞춰 가지고 현실과 자신을 연결하고, 내 나름의 조촐한 가치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쌓아온 것이다. 다시 한 번 전의 텅 빈 자리로 되돌아가라는 것인가? 창문을 열고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인가?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로선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밖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침대에 나뒹굴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념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단념하자, 무슨 생각을 하건 소용없다. 그것은 너의 힘을 넘어선 것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거기서부터 밖엔 시작되지 않는 거다. 그러게 마련이다. 이미.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자기소개. 옛날, 학교에서 자주 했다. 학급이 새로 편성되었을 때, 순번으로 교실 앞쪽에 나가서, 여럿 앞에서 자신에 관해 여러 가지를 지껄인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질색이었다. 아니, 질색일 뿐만도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행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내가 내 의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일까? 바로 테이프레코드에 취입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파악하는 나 자신의 상은, 왜곡되게 인식되어 적당하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상은 아닐까?...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남들 앞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마다, 나는 마치 성적표를 멋대로 고쳐 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언제나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럴 때, 나는 되도록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도록 마음을 썼지만 "나는 개를 기르고 있습니다. 수영을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음식물은 치즈입니다. 등등", 그래도 어쩐지 가공의 인간에 대한 가공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으로 다른 여럿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도 역시 그들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겐 느껴졌다.
우리들은 모두가 가공의 세계에서 가공의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지껄이기로 하자.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 지껄이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선 제 1보인 것이다.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판단하면 된다. 나 자신이 판단해도 되고 다른 누군가가 판단해도 된다. 어떻든 간에, 지금은 이야기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도 이야기하는 것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제는 치즈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나, 어느 틈엔가 자연히 좋아하게 되었다. 기르고 있던 개는 내가 중학교로 전학한 해에 비를 맞고 폐렴으로 죽었다. 그 후로 개는 한 마리도 기르지 않고 있다. 헤엄치는 일은 지금도 좋아한다. 끝. 하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하게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인생에서 찾으려 할 때(찾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인생은 좀 더 많은 데이터를 그에게 요구한다. 명확한 도형을 그리기 위한, 보다 많은 점이 요구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아무런 회답도 절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키를 눌러 주시오.' 취소키를 누른다. 화면이 흐려진다. 교실 안의 인간들이 나에게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좀 더 지껄여라. 좀 더 자기 이야기를 지껄여라, 하고. 교사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교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지껄이자. 그러지 않고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도 되도록 길게.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때때로 여자가 내방에 묵으러 왔다. 그리곤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회사로 출근했다. 그녀에게도 역시 이름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름이 없는 건, 다만 단순히 그녀가 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그 존재를 지우고 만다. 그러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의 존재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여겨선 안 된다. 나는 그녀를 몹시 좋아했으며, 없어져버린 지금에 와서도 그 심정은 다르지 않다. 나와 그녀는 이를테면 친구였다. 적어도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던 인간이다. 그녀에겐 나 말고 제격인 연인이 있다. 그녀는 전화국에 근무하고 있으며, 컴퓨터로 전화 요금을 계산하고 있다. 직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특별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러한 느낌의 일자리였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전화번호마다에 요금을 집계해서 청구서를 만든다든지 하는 그런 종류의 일이다. 그래서 매달 우편함 속에 전화 요금 청구서가 들어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꼭 개인적인 편지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일과는 관계없이, 나와 동침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아니면 세 번인가, 그 정도. 그녀는 나를 달 세계인인가 무엇인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봐요, 당신 아직도 달로 돌아가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말한다.
침대 속에서 알몸뚱이로, 서로 몸뚱이를 밀착시켜 가면서. 그녀는 젖가슴을 나의 옆구리에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는 새벽녘 시간에 곧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고속도로의 소음이 줄곧 끊일 새 없이 계속되고 있다. 라디오에서 단조로운 휴맨 리그의 노래가 들려온다. 휴맨 리그. 싱거운 이름이다.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옛날 인간들은 밴드에 좀 더 진지하고 절도있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임패리얼즈, 쉬프림즈, 플라밍고즈, 임프레션즈, 도어즈, 포 시즌즈, 비치 보이즈.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웃는다. 그리고 내가 변했다고 한다. 나의 어디가 변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매우 성실한 생각을 하는 매우 성실한 인간이라고 알고 있다.
"당신과 있는 게 좋아요" 하고 그녀는 말한다.
"가끔 가끔 말예요, 지독하게 당신과 만나고 싶어지는 거예요.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라든지 말예요.",
"응" 하고 나는 말한다.
"가끔 가끔" 하고 그녀는 어조를 강조해서 말한다. 그리곤 30초 정도의 사이를 둔다. 휴맨 리그 노래가 끝나고, 알지 못할 밴드 곡으로 바뀐다.
"그게 문제점이에요. 당신의" 하고 그녀는 계속한다.
"난 당신과 둘이서 이렇게 있는 게 아주 좋지만,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함께 있고 싶진 않아요. 웬일인지."
"응" 하고 나는 말한다.
"당신과 있으면 답답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함께 있으면 말예요, 가끔 가끔 공기가 쑤욱 엷어져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마치 달에 있는 것처럼."
"이건 극히 작은 한 예이지만..."
"봐요, 이거 농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나, 당신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말해 주는 사람, 달리 또 있어요? 어때요? 그런 말 해주는 사람, 달리 또 있어요?"
"없지"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한다. 한 사람도 없다. 그녀는 다시 옆으로 누워, 젖가슴을 정겹게 내 옆구리에 밀착시킨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아무튼 가끔가끔, 달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엷어진단 말예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달의 공기는 엷지 않아" 하고 나는 지적한다.
"달 표면엔 공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엷은 거예요"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한다. 그녀가 내 발언을 무시한 건지, 또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은 건지는,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작다는 것이 나를 긴장하게 한다. 왠지 모르지만, 거기엔 나를 긴장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가끔 가끔 쑤욱 엷어진단 말예요.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공기를 당신이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인식된단 말예요."
"데이터가 부족한 거야" 하고 나는 말한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럼?"
"나 자신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하고 나는 말한다.
"정말 그래. 특별히 철학적인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야. 좀 더 실제적인 의미로 말하는 거야. 전체적으로 데이터 부족이야."
"하지만 당신 벌써 서른셋이죠?"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스물여섯이다.
"서른 셋"하고 나는 정정을 한다.
"서른네 살하고도 2개" 그녀는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침대에서 나와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젖힌다. 창 밖에는 고속도로가 보인다. 도로 위에는 뼈처럼 하얀 아침 여섯 시의 달이 떠 있다. 그녀는 내 파자마를 걸치고 있다.
"달로 돌아가요, 당신" 하고 그녀는 그 달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춥지?" 하고 나는 말한다.
"춥다니. 달 말예요?"
"아니, 지금의 당신 말이야" 하고 나는 말한다. 지금은 2월 달인 것이다. 그녀는 창문께에 서서 하얀 숨을 토해내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제서야 추위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급히 침대로 돌아온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 파자마는 지독히 차다. 그녀는 코끝을 내 목에 밀어붙인다. 그 코끝도 차다.
"당신이 좋아" 하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 이렇게 둘이서 침대 속에 있으면 아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녹여주거나 머리칼을 조용히 어루만지거나 하는 게 좋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잠결의 숨소리를 듣거나, 아침이 되어 그녀를 회사로 보내거나, 그녀가 계산한 그렇게 내가 믿고 있는 전화 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거나, 커다란 내 파자마를 그녀가 걸치고 있는 걸 보거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란, 막상 말하려고 들면 한 마디로 잘 표현되지 않는다. 사랑하고 있다는 건 물론 아니고,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하지만 어떻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이라는 게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으로써 그녀가 상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녀는 그걸 내가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에겐 느껴진다. 부드러운 피부 위로부터 그녀의 등뼈 형상을 더듬으면서 나는 그걸 느끼는 것이다. 매우 선명하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 껴안은 채, 제목도 알지 못하는 노래를 듣고 있다. 그녀는 내 아랫배에다 살며시 손바닥을 갖다 댄다.
"달세계의 여인과 결혼해서 훌륭한 달세계인의 아이를 가져와" 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한다.
"그게 제일이에요."
열어 젖혀진 창문으로는 달이 보인다. 나는 그녀를 껴안은 채, 그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달을 보고 있었다. 가끔씩 무엇인지 몹시 무거운 물건을 실은 장거리 트럭이, 붕괴하기 시작한 빙산 같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고속도로를 질주해 갔다. 도대체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침 식사, 무엇이 있지요?" 하고 그녀는 내게 묻는다.
"특별히 색다른 건 없어. 햄과 계란과 토스트와 어제 낮에 만든 포테이토 샐러드, 그리고 애플파이. 당신을 위해 밀크를 데워 가지고 카페오레를 만들지" 하고 나는 말한다.
"훌륭해요" 하고 그녀는 미소 짓는다.
"햄에그를 만들고,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구워 줄래요?"
"물론이지. 기꺼이" 하고 나는 말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짐작이 안 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무엇이냐 하면 말예요" 하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한다.
"겨울의 추운 아침에, 싫구나, 일어나고 싶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커피 향기와, 햄에그를 굽는 지글거리는 냄새와, 토스터가 끊기는 탁 소리에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침대를 박차고 빠져나오는 거예요."
"좋아. 해보자구"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색다른 인간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평균적인 인간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러나 색다른 인간도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지극히 성실한 인간인 것이다. 매우 직선적이다. 화살처럼 직선적이다. 나는 나로서 극히 필연적으로, 극히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어서, 타인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전혀 관계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우둔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종류의 인간은 나를 실제 이상으로 계산이 빠르다고 생각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려면 어떤가. 게다가 <실제 이상으로>라는 표현을, 내가 파악한 나 자신의 상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 우둔하며, 어쩌면 계산이 빠르다. 그것은 뭐 어느 쪽이건 좋다.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은 없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따로, 그 한편에서, 내 안의 그 <성실함>에 끌리는 인간이 있다. 아주 수효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존재한다. 그들 그녀들과 나는 마치 우주의 어두운 공간에 뜨는 두 개의 유성처럼 극히 자연스레 연결되고, 그리고 떨어져 간다. 그들은 내게로 와서 나와 관계하고, 그리고 어느 날 가버린다. 그들은 내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아내도 된다. 어떤 경우엔 대립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다들 내 곁에서 사라져 간다. 그들은 체념하고, 혹은 절망하고, 혹은 침묵하고 수도꼭지를 비틀어도 이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져 간다. 내 방에는 두 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하나가 입구이고 하나가 출구다, 호환성은 없다. 입구로는 나갈 수가 없고, 출구로는 들어올 수가 없다. 그건 뻔한 일이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간다. 어느 누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기 위해 나갔으며, 어느 누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나갔다. 어느 누구는 죽었다. 남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재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사라져 간 사람들을. 그들이 입에 담은 말들이랑, 그들의 숨소리랑, 그들이 읊조린 노래가 방의 이 구석 저 구석에 티끌처럼 떠돌고 있는 게 보인다. 그들이 본 나의 상은 아마도 꽤 정확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나 있는 데로 곧장 찾아와서는, 그리곤 얼마 후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들은 내 안의 성실함을 인정하고, 내가 그 성실함을 유지해 가려고 하는 내 나름의 성실성 이 밖의 표현을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고도 했으며, 마음을 열려고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지는 못했다. 가령 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가능한 것은 전부 했다. 나도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잘 되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라져 갔다. 그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괴로운 일은, 그들이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서글프게 방을 나가는 일이었다. 그들이 몸 안의 무엇인가를 한 단계 마멸시켜 가지고 나가는 일이었다. 나로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묘한 이야기지만, 나보다는 그들 쪽이 더 많이 마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언제나 내가 남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언제나 내 수중엔 마멸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럴까? 알 수 없다.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 결여돼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업무 협의를 하고 돌아와 보니, 우편함에 그림엽서가 들어 있었다. 우주 비행사가 우주복을 입고 달의 표면을 걷고 있는 사진의 그림엽서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써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엽서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젠 우리는 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적고 있었다.
"저는 아마 가까운 장래에 지구인과 결혼하게 될 것 같으니까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키를 눌러 주시오. 화면이 흐려진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서른네 살이다. 언제까지 이것이 계속될 것인가? 나는 서글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책임인 것이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서도 알고 있었고, 나로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조그마한 기적을 찾고도 있었던 것이다. 하찮은 계기로 해서 근본적인 전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것을. 그러나 물론 그러한 것은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가버렸다. 그녀가 없게 되어 나는 쓸쓸한 심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 쓸쓸함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쓸쓸함을 제법 잘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내장으로부터 검은 액체가 듬뿍 짜내어져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면실 거울 앞에 서서, 이게 나 자신이다, 하고 생각했다. 이게 너다. 네가 너 자신을 마멸시켜 온 것이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너는 마멸된 것이다, 하고.
내 얼굴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비누로 천천히 얼굴을 씻고, 로션을 피부에 문지르고, 그 다음에 다시 손을 천천히 씻고, 새 타월로 손과 얼굴을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캔맥주를 마시면서 냉장고 정리를 했다. 시들어 빠진 토마토를 버리고, 맥주병들을 가지런히 해놓고, 용기들을 바꾸어놓고, 사올 물건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새벽녘에 나는 혼자서 멍청하니 달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윽고 또 어디선가 다른 여자와 해후하게 될 게다. 우리들은 유성처럼 자연스레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헛되이 기적을 기대하며, 시간을 갉아먹으며, 마음을 마멸시키며, 헤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2
그녀로부터 달 표면의 그림엽서가 온 1주일 뒤에, 나는 일 때문에 하코다테로 가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별로 매력이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일의 좋고 싫고를 선택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뿐더러 도대체가 나에게 돌아오는 어느 일을 놓고 보아도, 거기엔 좋고 싫고를 가릴 만한 차이는 없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반적으로 사물이란 것은 가장자리로 가면 갈수록 그 질의 차이가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주파수와 마찬가지다. 어느 한계점을 넘어버리면, 인접하는 두 음향의 어느 쪽이 높은가 하는 따위는 거의 분간해낼 수 없으며, 이윽고 분간은커녕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고 만다.
그것은 어느 여성지를 위해 하코다테의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한다는 기획이었다. 나와 카메라맨 둘이서 몇몇 가게를 돌며, 내가 기사를 쓰고, 카메라맨이 그 사진을 찍는다. 모두 5페이지. 여성지란 그런 기사를 요구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런 기사를 써야 한다. 쓰레기 치우기나 눈 치우기와 다름없는 일이다. 누군가 해야 하는 것이다. 좋고 싫고 와는 관계없이. 나는 3년 반 동안, 이러한 식의 문화적 우수리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문화적 눈 치우기란 말이다.
어떤 사정으로 그때까지 친구와 둘이서 경영하고 있던 사무실을 그만둔 다음, 나는 한 반 년 동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청히 살고 있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전 해,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서는 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이혼을 했다. 친구가 죽었다. 불가사의한 죽음이었다.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갔다. 기묘한 사람들을 만났고, 기묘한 사건에 말려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는 그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깊은 정적에 푹 휩싸여 있었다. 무시무시할 만큼의 농밀한 부재감이 나의 방 안에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 방 안에 반 년 동안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제외하면, 낮 동안은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새벽녘 시간에 나는 목표도 없이 산책을 했다. 삶들이 거리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 되면 방으로 돌아와서 잠들곤 했다. 그리고 저녁 전에 잠이 깨어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서 먹고, 고양이에게도 먹이를 주었다. 식사가 끝나면 방바닥에 앉아서 내 몸에 일어난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 생각해서 정리해 보았다. 순번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거기에 존재했을 터인 선택지를 리스트 업도 하고,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이모저모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 일을 새벽녘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 정처도 없이 무인의 거리를 헤매어 다녔다.
나는 반 년 동안 그 짓을 매일 매일 계속했다. 그렇지 1979년의 1월부터 6월까지. 나는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신문조차 펼치지 않았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보자 않았으며,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술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유명해졌으며 누가 죽었는지, 나는 무엇 하나 알지를 못했다. 일체의 정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별히 알고 싶다고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에 꼼짝 않고 있어도, 나는 그 움직임을 피부로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가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미풍처럼 나의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다만 방바닥에 앉아서, 머릿속에 과거를 재현해내고만 있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반 년 동안 그것을 매일 매일 계속해도 나는 권태나 따분함이라는 것을 통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체험한 그 사건은 너무나도 거대했으며, 너무나도 많은 단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그리고 사실적이었다.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그것은 마치 밤의 어둠 속에 솟구쳐 선 모뉴멘트와도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모뉴멘트는 나 한 사람을 위해 솟구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검증했다.
나는 그 사건을 통과한 일로 해서 물론 그 나름의 피해를 입고는 있었다. 많은 피가 소리도 없이 흘렀다. 얼마간의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지만, 얼마간의 아픔은 뒤에야 찾아왔다. 그러나 반 년 동안 꼼짝 않고 그 방 안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그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 사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정리하고 검증하는 데에 반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자폐적이 되거나, 외적 세계를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단순히 그것은 시간적인 문제였다. 다시 한 번 자신을 제대로 회복하고, 재정비하지 위한 순수한 물리적인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을 재정비한다는 의미와, 그 다음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선 다시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우선 첫째로 평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고양이하고 조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때때로 문을 노크했지만,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편지도 몇 통인가 왔다. 나의 예전의 공동 경영자가 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써 왔다.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선 급한 대로 이 주소로 편지를 써 놓는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말해 달라. 이쪽 일은 지금 현재로선 순조로운 편이다. 그렇게 쓰여 있었다. 친지의 소식에 관해서도 적혀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그것을 되읽어 보고,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 파악까지에는 네 번 또는 다섯 번 되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헤어진 아내로부터의 편지도 왔다. 편지에는 몇몇 실제적인 용무가 쓰여 있었다. 매우 사무적인 어투의 편지였다. 그러나 끝머리에 자기는 재혼하기로 되었다. 재혼의 상대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앞으로 잃게 될 것도 없을 게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한 쌀쌀맞은 투였다. 그 뜻은, 나와 이혼했을 때에 사귀고 있던 상대와는 헤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그럴 테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대수로운 남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즈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특별히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재미난 인물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째서 그런 남자에게 끌렸는지 나로선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글쎄, 그건 타인과 타인 사이의 문제이다. 나에 대해선 아무 걱정도 낳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쓰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든 간에 제대로 착착 해가는 사람이니까. 제가 걱정하고 있는 건 앞으로 당신이 관련을 가지게 될 사람들에 대한 일이에요. 저는 요즈음 그런 일이 어쩐지 몹시 걱정된답니다, 하고. 나는 그 편지도 몇 번인가 되읽고, 그리고 역시 책상 서랍에 쑤셔 넣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금전 면에서의 문제는 없었고, 그 다음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봄은 나의 방을 따스하고 평화로운 빛으로 충만하게 했다. 창문으로 들이비치는 햇살이 그리는 빛의 무테를 매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태양의 각도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봄은 또 내 마음을 갖가지 옛 추억으로 충만하게 했다. 사라져 간 사람들, 죽어버린 사람들. 나는 쌍둥이들에 대한 회상을 했다. 나는 그녀들과 셋이서 얼마동안 지냈었다. 1973년의 일이었다, 분명. 그 무렵 나는 골프장 옆에 살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우리들은 철망을 타고 넘어서 골프장 안에 들어가, 목표도 없이 거닐고, 골퍼들이 잃어버린 볼들을 줍곤 했다. 봄날의 해질녘은 나에게 그런 정경을 회상하게 했다.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입구와 출구. 죽어버린 친구와 둘이서 다니던 조그마한 스낵 바 일도 생각났다. 우리는 거기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이제껏 인생에서 가장 실체가 있는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묘한 일이다. 거기서 틀어줬던 옛 음악도 생각났다. 우리는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우리는 그런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고 밖엔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젠 죽어버렸다. 온갖 것을 끌어안고 그는 죽어갔다. 입구와 출구. 봄은 점점 깊어만 갔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져 갔다. 밤의 어둠의 색깔도 변화했다. 소리도 다른 울림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절은 초여름으로 바뀌었다. 오월 달 끝 무렵에 고양이가 죽었다. 당돌한 죽음이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고양이는 부엌 한구석에서 둥글게 꼬부라져 죽어 있었다. 아마 저 자신도 영문을 모르는 채 죽어버렸을 게다. 시체는 식어빠진 구운 통닭처럼 빳빳해지고, 털 뭉치는 살았을 때보다 한층 지저분해 보였다. <정어리>라는 이름의 고양이. 그의 생활은 결코 행복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누군가로부터 깊이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무엇인가를 깊이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불안한 듯한 눈으로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읽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그런 눈으로. 그런 눈짓을 할 수 있는 고양이란 좀처럼은 없다. 하지만 어떻든 죽어버렸다. 한번 죽어버리면, 그 이상 잃어버려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죽음의 훌륭한 점이다.
나는 고양이의 시체를 슈퍼마켓의 종이봉지에 넣어서 자동차의 뒷좌석에 놓고, 근처 철물점에서 삽을 샀다. 그리고 실로 오래만에 라디오의 스위치를 맞춰, 록 뮤직을 들으면서 서쪽으로 향했다. 대개는 시시한 음악이었다. 프리트우드 맥, 아바, 메리사 맨체스터, 비이지이즈, 도너 서머, 이글즈, 보스턴, 쿠모도어즈, 존덴버, 시카고, 케니 로긴즈... 그런 음악들이 거품처럼 떠올랐다간 꺼져갔다. 시시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친 에이저로부터 푼돈을 앗아내기 위한 쓰레기 같은 대량 소비 음악. 하지만 나는 곧 서글픈 기분이 되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그것뿐인 것이다. 나는 핸들을 잡으면서, 우리들이 틴 에이저였던 시절에 라디오에서 흐르고 있던 시시한 음악을 몇 가지인가 생각해 내보려고 했다. 낸시 시나트라. 음, 그건 하잘 것 없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몽키즈도 엉터리였다. 엘비스만 해도 다분히 쓰잘 데 없는 곡을 잔뜩 부르고 있었다. 토리니 로페스 녀석도 있었지, 팻분의 대개의 곡은 나에게 세숫비누를 생각나게 했다. 페비언, 보비 라이델, 아네트, 그리고 또 물론 허먼즈 허미츠, 그건 재앙이었다. 꼬리를 물고 연신 등장해온 무의미한 영국인들의 밴드. 머리카락이 기다랗다. 기묘한 바보스러운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얼마나 생각해낼 수 있을까? 허니캄즈, 딥 클라크 파이브, 젤리와 페이스메이커즈, 프레디와 드리머지... 끝도 없다. 사후경직을 생각하게 하는 제퍼슨 에어프레인, 톰 존즈 이름을 듣기만 해도 몸이 굳어진다. 그 톰 존즈의 추악한 크론인 엔겔벨트 훈퍼닝. 무엇을 듣건 광고 음악으로 들리는 허브 알파트와 티파나 브러스. 저 위선적인 사이몬과 가펑클. 신경질적인 잭슨 파이브. 비슷비슷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진 않았다. 언제든 언제든 언제든, 사물의 존재 양식은 같은 것이다. 다만 연호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 들어섰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 없는, 쓰고 버릴 음악은 어느 시대에건 존재했고, 이제부터 앞날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처럼.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꽤 긴 시간을 차를 몰았다. 도중에서 롤링 스톤즈의 <브라운 슈거>가 나왔다. 나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멋진 곡이었다. 제법인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정확하게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1971년이건 1972년이건, 이제 와선 어는 쪽이건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왜 그런 일을 일일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적당하게 산이 깊어진 곳에서 나는 고속도로를 내려와, 적당한 나무숲을 찾아서 거기에 고양이를 묻었다. 숲속 깊은 곳에 삽으로 1미터가량 깊이의 구덩이를 파고, 백화점 종이봉지로 뚤뚤 뭉친 채로 정어리를 던져 넣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겐 이게 걸맞은 거야, 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정어리에게 말해 주었다. 내가 구덩이를 묻고 있는 동안, 어디선가 작은 새가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플롯의 고음부 같은 음색으로 우는 새였다. 구덩이를 깡그리 메워버린 후, 나는 삽을 차의 트렁크에 놓고, 고속도로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음악을 들으면서 도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로드 스튜어트와 가일즈 밴드가 나왔다. 그 다음에 아나운서가 여기서 올디즈를 한 곡, 하고 말했다. 레이 찰즈의 <본 투루즈>였다. 그건 구슬픈 곡이었다.
"난생 줄곧 잃어버리기만 했어" 하고 레이 찰즈가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지금 그대를 잃어버리려고 해."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까, 나는 진정 슬퍼졌다. 나는 진정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때때로 그런 일이 있다. 무엇인가 하찮은 일에 내 마음의 가장 연한 부분이 건드려지는 것이다. 나는 도중에서 라디오를 끄고, 서비스 센터에 차를 멈추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야채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세면실에 들어가 손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고, 샌드위치를 한 조각만 먹고, 커피를 두 잔 마셨다. 고양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곳은 캄캄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종이봉지에 흙이 닿는 소리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걸맞은 거야. 네게나 내게나. 나는 한 시간 동안 그 레스토랑에서 야채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꼭 한 시간 후에 제비꽃빛 제복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앞에 와서, 그 접시를 치워도 좋으냐고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사회로 되돌아가야 할 때였다.
3
이 거대한 개미무덤 같은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일을 얻는다는 것은 그다지 곤란한 작업이 아니다. 물론 그 일의 종류며 내용에 대해서 군소리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사무실을 가지고 있을 무렵 편집 일과는 곧잘 관련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잘한 문장도 내 손으로 쓰곤 했었다. 그러한 업계의 관계자 몇몇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기고가로서 나 한 사람 몫의 생활비를 벌어들이는 것쯤은 뭐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원래 나는 그다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나는 예전의 수첩을 꺼내어 몇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내게 어떤 할 만한 일거리는 없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정상 얼마동안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가능하면 다시 일을 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들은 이내 몇 가지 일을 내게 제공해 주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개는 홍보용 잡지나 기업 팸플릿의 공백을 메우는 기사를 만드는 일이었다. 아주 겸손하게 말하면, 내가 쓰게 된 원고의 절반은 전혀 무의미해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그런 것이었다. 종이와 잉크 낭비.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 착착 성실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처음엔 업무량이 별 대수로운 것도 없었다. 하루 두 시간 가량 일을 하고, 나머지는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했었다. 꽤 많은 영화를 보았다. 3개월가량 그런 식으로 나는 느슨하게 해나갔다.
일이야 어떻든, 얼마간은 사회와 관련을 갖고 있다 싶어서 나는 안도하는 심정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주위의 상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가을로 접어든 지 얼마 안돼서였다. 업무 의뢰가 돌연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내 방 전화는 끊일 새 없이 울리고, 우편물의 양도 늘었다. 나는 업무 협의를 위해 숱한 사람과 만나고, 함께 식사를 했다. 그들은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거리를 주겠노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일감의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았고, 돌아오는 일감은 닥치는 대로 떠맡았다. 기한 전에 제대로 완성해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글씨도 깨끗했다. 일솜씨도 꼼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적당하게 할 것도 성실하게 했고, 대가가 낮아도 싫은 얼굴 빛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오전 두시 반에 전화가 걸려 와서 어떻게든 여섯 시까지는 4백자 원고지 20장을 써 달라 아날로그 식 시계의 장점에 대하여, 또는 마흔세 살 여성의 매력에 대하여, 또는 헬싱키 도시 물론 가본 적은 없지만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그런 주문을 받으면, 틀림없이 다섯 시 반에는 해냈다. 고쳐 쓰라고 하면 여섯 시까지는 고쳐 썼다. 평판이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눈을 치우는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눈이 내리면 나는 그것을 효율성 있게 길옆으로 치웠다. 치우는 대로 거침없이 체계적으로 처리해 나갈 따름이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이건 인생의 낭비가 아니냐고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와 잉크가 이만큼 낭비되고 있으니, 내 인생이 낭비되었다 해도 군소리를 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선 낭비가 최대의 미덕인 것이다. 정치가는 그것을 내수의 세련화라고 부른다. 나는 그것을 무의미한 낭비라고 부른다. 사고방식의 차이다. 하지만 비록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떻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글라데시나 수단에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따로 방글라데시에도 수단에도 흥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일을 계속 했다. 그러는 동안 홍보지뿐 아니라, 일반 잡지 일의 의뢰도 오게끔 되었다. 웬일인지 여성지의 일이 많았다. 인터뷰 일이며, 사소한 취재 기사를 직접 쓰게끔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홍보지에 비교해 특별히 일거리로서 재미나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인터뷰하는 상대는 잡지의 성격상, 태반이 예능인이었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보아도 도장을 찍은 듯 똑같은 대답밖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대답할지는 질문하기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심할 때엔 먼저 매니저가 나를 불러 놓고는, 어떤 질문을 하겠느냐, 미리미리 알려 달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질문의 대답은 처음부터 전부 척척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그 열일곱 살짜리 여자 가수에 대해 정해진 이외의 질문을 하면, 옆에 있는 매니저가 "그런 건 이야기가 다르니까 잘 대답할 수가 없다" 하고 참견을 했다. 어이구, 이 여자아이는 매니저 없이는 10월의 다음은 몇윌인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나는 때때로 진지하게 걱정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건 물론 인터뷰랄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되도록 면밀한 조사를 했고, 남이 좀처럼 하지 않을 그런 질문을 생각했다. 구성에 세밀하게 신경을 썼다. 그런 일을 한댔자 특별히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서 따스한 말 한마디 들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나로선 제일 편했기 때문이다.
자기 훈련. 얼마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손가락과 머리를 실제적인 그리고 되도록 무의미한 사물에 대해 혹사하는 일. 사회 복귀. 나는 그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정기적인 일거리를 몇 가지인가 맡은 데다가, 불시에 뛰어드는 일거리도 많았다.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일거리는 반드시 내게로 돌아왔다. 문제점을 지닌 꽤 까다로운 일거리도 반드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 사회 속에서는 도시 변두리의 폐차장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떤 일의 형편이 잘못 되면, 모두 내게로 그것을 버리러 왔다.
누구나가 잠들어버린 으슥한 한밤에. 덕분에 나의 저금통장의 숫자는 내가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듯한 액수로 부풀어 올랐으며, 너무나 바빠서 그것을 사용할 틈도 없었다. 스바루 레오네를 싼 값으로 양도받았다. 유행이 한물 간 모델이었지만, 별로 많은 거리는 주행하지 않았고, 카스테레오와 에어컨디셔너까지 달려 있었다. 그런 것이 있는 차를 탄다는 건 난생 처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아파트는 도심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부야 근처로 이사를 했다. 창문 바로 앞이 고속도로라 얼마간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것만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어지간히 쓸 만한 아파트였다. 일 관계로 서로 알게 된 몇몇 여자아이와 동침했다.
사회복귀. 나는 내가 어떤 여자아이와 동침하면 좋은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와 동침할 수 있으며 누구와 동침할 수 없는가도 알고 있었다. 누구와 동침해선 안 되는지도. 나이가 들면 그런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어디가 끝낼 때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아무도 상처받게 하지 않았고, 내 쪽도 상처 받지 않았다. 저 조여 매는 듯한 마음의 떨림이 없을 뿐이었다. 내가 제일 깊이 관계한 것은, 예의 전화국에 근무하는 여자아이였다. 그녀와는 어딘가의 연말 파티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 둘이 다 술이 취해 있어서, 농담을 주고받고 의기투합해서, 내 아파트에 가서 동침했다.
그녀는 머리가 좋고 다리가 아주 예쁜 아이였다. 우리는 중고차 스바루를 타고, 여러 곳으로 드라이브도 갔다. 그녀는 마음이 내킬 때에 나에게 전화를 걸고선, 자러 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처럼 한 걸음 나간 관계가 된 상대는 그녀뿐이었다. 그런 관계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의 어떤 종류의 유예 기간 비슷한 것을, 우리는 둘이서 조용히 공유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오랜만에 마음 편안한 나날이었다. 우리는 다정하게 서로 껴안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요리를 만들고, 생일에는 선물을 교환했다. 우리는 재즈클럽에 가서 칵테일을 마셨다. 우리는 말다툼도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끝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사라져 갔다는 것은 내속에 예상 이상의 상실감을 가져왔다. 얼마 동안은,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모두가 차례차례 사라져가고, 나만이 연장된 유예 기간 속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인생. 하지만 그것이 내가 공허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는 그녀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그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와 둘이 있으면, 나는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온순한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나는 그녀를 요구하고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그 사실을 명백히 인식했다. 그렇지, 결국은 그녀의 옆에 있으면서도 나는 달 위에 있었던 것이다. 옆구리에 그녀의 젖무덤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내가 진심으로 구하고 있었던 것은 좀도 다른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4년이 걸려 어떻게든 나 스스로의 존재의 평행성을 되찾았다.
나는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착착 처리해 왔고, 사람들은 나에게 신뢰감을 가져 주었다. 그토록 많지는 않았다 해도, 몇몇 사람은 내게 호의 비슷한 것을 가져 주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것만 가지고선 모자랐던 것이다. 전혀 모자랐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시간을 들여서 겨우 출발점에 되돌아와 섰을 뿐인 것이다. 서른넷이 되어 나는 다시금 출발점에 되돌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은가? 생각할 것까지도 없었다. 무엇을 하면 좋은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론은 훨씬 전부터 딱딱한 구름처럼 내 머리 위에 빠끔하게 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만 실천으로 옮길 결심을 할 수가 없어서, 하루 또 하루하고 미루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루카 호텔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이루카 호텔로 이끈, 그 고급 창녀 여자아이를. 왜냐하면 키키는 지금 내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그녀는 이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임시변통의 이름이었다 해도 그렇다. 그녀의 이름은 키키라고 한다. 나는 그 이름을 뒤에 가서 알게 된다. 그 사정은 뒤에 가서 자세히 쓰겠지만, 나는 이 단계에서 그녀에게 그 이름을 부여키로 한다. 그녀는 키키인 것이다. 적어도, 어떤 기묘한 좁은 세계 속에서 그녀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키키가 출발점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시 한 번 이 방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 나가버린 자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이 방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든 해보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짐들을 정리하고, 우선 급한 대로 마감이 절박해 있던 일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예정표에 써있던 일들을 전부 취소했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으로 아무래도 한 달간 도쿄를 떠나있게 되었다, 하고 말했다. 몇몇 편집자는 투덜투덜 불평을 말했지만, 내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이것이 처음이었고, 일정도 아직 훨씬 앞의 일이었으므로, 그들로서도 이제부터라면 어떻게든 손을 쓸 방법은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다들 양해해 주었다. 한 달 후에도 어김없이 돌아와 다시 일을 할 테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1983년 3월 초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그 전장 이탈은 한 달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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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를 이틀 동안 빌려 카메라맨과 둘이서 눈이 내려 쌓인 하코다테의 음식점들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나의 취재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취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밑조사와 면밀한 스케줄의 설정이다.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좋다. 나는 취재하기 전에 철저하게 자료 수집을 한다. 나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을 위해 갖가지 조사를 해 주는 조직이 있다. 회원이 되어 1년 회비를 내면, 대개의 일은 조사해 준다. 예컨대 하코다테의 음식점에 관한 자료를 보고 싶다고 하면, 상당한 양을 수집해 준다. 대형 컴퓨터를 사용해서 정보의 미궁 속으로부터 효과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끌어 모아 오는 것이다. 그리곤 카피를 하고, 착착 철해 가지고 가져다준다. 물론 그 나름의 돈은 줘야 하지만, 시간과 수고를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결코 비싼 금액은 아니다. 그것과는 따로, 나는 자신의 발을 사용해서 돌아다니며 독자적인 정보도 모은다. 여행 관계의 자료를 모아놓은 전문 도서관도 있고, 지방 신문, 출판물을 모아놓은 도서관도 있다. 그러한 자료를 전부 모으면 상당한 양이 된다. 그 가운데서 꺼리가 될 만한 음식점을 선정한다. 그 각각의 음식점에 미리 전화를 걸어놓고 영업시간과 정기휴일을 체크한다. 이만큼만 해두면 현지에 가서부터의 시간이 상당히 절약된다. 노트에 선을 그어서 하루의 예정표를 짠다. 지도를 보고, 움직일 루트를 써 놓는다. 불확정한 요소는 최소한으로 제한한다.
현지에 도착하면 카메라맨과 둘이서 음식점을 차례로 돌아다닌다. 전부 해서 약 30여 곳. 물론 아주 조금만 먹고 나머지는 시원스레 남긴다. 맛을 볼 뿐이다. 소비의 세련화. 이 단계에선 우리는 취재라는 걸 숨기고 다닌다. 사진도 결코 찍지 않는다. 음식점을 나온 다음, 카메라맨과 나는 맛에 대해 토의하고, 10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좋으면 남겨놓고, 나쁘면 떨어뜨린다. 대충 절반 이상을 떨어뜨릴 요량으로 한다. 그리고 그와 병행해서, 그 지방의 미니콤 잡지와 접촉하여 리스트에서 빠진 음식점을 대여섯 곳 추천을 받아 돌아보고 선택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선택이 끝나면 각 가게에 전화를 걸고, 잡지의 이름을 말하고는, 취재와 사진 촬영을 신청한다. 여기까지를 이틀 동안에 끝낸다. 그리고 밤이 새기 전에 나는 호텔 방에서 대강 원고를 써낸다.
다음날은 카메라맨이 요리 사진을 재빨리 찍고 그러는 동안에 내가 가게 주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 짤막하게 모든 것은 사흘이면 치러진다. 물론 더 빨리 끝내버리는 동업자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적당히 유명 음식점을 골라서 돌뿐이다. 개중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원고를 쓰는 축도 있다. 쓰려고 마음먹으면 쓸 수 있단 얘기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유의 취재를 나처럼 꼼꼼하게 하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하자면 참으로 힘든 일인 것이고, 수고를 덜 하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하건, 수고를 덜 해결하건, 기사로서의 완성도에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조금은 다르다. 나는 특별히 자만을 하고 싶어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개요 같은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내가 관련된 소모가 어떤 종류의 소모인가 하는 것의 이해를.
그 카메라맨과 나와는 전에도 몇 번인가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비교적 마음이 맞았었다. 우리는 프로다. 청결한 흰 장갑을 끼고, 커다란 마스크를 하고, 얼룩 한 점 없는 케니스 슈즈를 신은 사체처리 담당원처럼. 우리는 이일 저일을 척척 간결하게 치리 한다. 쓰잘 데 없는 말은 하지 않으며, 서로의 일에 경의를 표한다. 이게 생활을 위해 하고 있는 시답지 않은 일이라는 건 어느 쪽이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게 된 바엔 제대로 꼭꼭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로인 것이다. 사흘째 되던 밤에는 나는 원고를 완성해 버렸다. 나흘째는 예비로 비워 놓은 날이었다. 일도 끝났겠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우리는 차를 빌려서 변두리로 나가 하루 종일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했다. 그리고 밤에는 둘이서 안주 냄비를 휘저어가면서, 천천히 술을 마셨다. 한가하게 지낸 하루였다. 나는 원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러면 내가 없어도 다른 사람이 뒷일을 인계해서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자기 전에 나는 삿포로의 전화 안내원에게 전화를 걸어, 돌핀 호텔 번호를 물어보았다. 번호는 곧 알게 됐다. 나는 침대 위에 고쳐 앉아서 후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걸로 아직 이루카 호텔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일단 안심해도 좋은 셈인 것이다. 언제 없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호텔인 것이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 번호를 돌렸다. 곧 사람이 나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곧 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지간히 혼란을 느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진행된다 싶어서였다. 전화에 나온 상대는 젊은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 이상한데, 하고 생각했다. 이루카 호텔은 카운터에 젊은 여자아이가 있을 그런 호텔은 아닌 것이다.
"돌핀 호텔입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좀 어리둥절해서 다짐을 하기 위해 주소를 확인해 보았다. 주소는 틀림없이 예전대로의 주소였다. 아마 새로이 여자아이를 고용한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특별히 신경을 쓸 만한 일도 아니다. 예약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곧 예약 담당으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그녀는 또렷또렷한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예약 담당? 나는 다시 혼란을 느꼈다. 여기까지 오고 보면 어떻게도 해석할 방도가 없다. 도대체 그 이루카 호텔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예약 담당입니다" 하고 역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활발하고 붙임성 있는 목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로인 호텔맨의 목소리다. 나는 아무튼 3일간 싱글룸을 예약했다. 이름과 도쿄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3일간 싱글룸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남자가 확인했다.
그 이상 더는 이야기 할 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혼란한 상태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더욱 혼란상태가 깊어졌다. 그리곤 한동안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와, 거기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지나 않을까, 하는 느낌으로. 하지만 설명은 없었다. 그래 좋아, 될 대로 될 테지, 하고 나는 단념했다. 실지로 가보면 모든 것은 명백해진다. 가보는 수밖에 없다. 어떻든 거기를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달리 특별히 두드러진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호텔의 프런트에 전화를 해서, 삿포로 행 열차의 출발 시각을 알아달라고 했다. 오전중의 마침 좋은 시간에 특급이 하나 있었다. 그런 다음 나는 룸서비스 담당에게 전화를 걸어, 위스키의 하프 보틀과 얼음을 가지고 오게 해서 그것을 마시면서 텔레비전의 심야영화를 보았다. 크린티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서부극이었다. 크린트 이스트우드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고소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인가 웃음을 던져 봐도 그는 동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위스키도 대충 마셔버리고 나서, 나는 전기를 끄고 아침까지 쿨쿨 잠이 들었다. 꿈 한 번 꾸지 않았다.
특별열차의 창으로는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맑게 게인 날이어서, 얼마동안 바깥을 보고 있자니까 눈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나 말고는 바깥을 보고 있는 승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밖을 보았자 눈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아침 식사를 걸렀기에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식당차에 가서 점심 식사를 했다. 맥주를 마시고 오믈렛을 먹었다. 내 맞은편에는 넥타이를 얌전히 매고 슈트를 받쳐 입은 50세 안팎의 남자가 역시 맥주를 마시고, 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는 어딘지 기계 기사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기계 기사였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와서, 자기는 기사이며, 자위대의 항공기 정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폭격이며 전투기의 영공 침범에 관해 이것저것 소상하게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기 영공 침범의 위법성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신경을 쓰는 것은 팬텀 에프4의 경제성에 관해서였다. 그것이 1회의 스크램블로 얼마만큼의 연료를 소모하느냐 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연료의 지독한 낭빕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일본의 항공기 회사에 만들게 하면, 훨씬 더 싸게 할 수 있어요. 에프4에 성능적으로 지지 않는, 보다 저렴한 제트 전투기 같은 거 만들려고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래서 나는 낭비라는 건,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최대 미덕인 것이라고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팬텀 제트를 사들여, 스크램블해서 쓸데없이 연료를 소비함으로써, 세계의 경제가 그 몫만큼 더 회전하고, 그 회전에 의해 자본주의는 보다 고도의 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만일 모두가 낭비인 것을 일체 생산하지 않게 된다면, 대공황이 일어나서 세계의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낭비라는 것은 모순을 일으키게 하는 연료이며, 모순이 경제를 활성화하고, 활성화가 다시 낭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고 그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물자 부족의 극한이라고도 할 전쟁 중에 유년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러한 사회 구조가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저희들은, 아무래도 당신들 젊은이들과는 달리, 그러한 복잡한 것엔 아무래도 제대로 익숙해질 수가 없어요." 하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도 결코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기가 이 이상 길어지는 것도 곤란하기에 별로 반론을 하지 않았다.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파악,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양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아무튼 나는 오믈렛을 다 먹어치우고, 그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삿포로까지의 열차 속에서 나는 30분가량 자고, 하코다테 역 가까이의 서점에서 산 잭 런던의 전기를 읽었다. 잭 런던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비기면, 나의 인생 같은 건 떡갈나무 꼭대기의 구렁에서 호두를 베개 삼아 꾸벅꾸벅 졸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는 다람쥐처럼 평온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전기란 것은 그러한 것이다. 도대체 어디의 누가 평화로이 무사 안일하게 살다가 죽어간 가와자키 시립 도서관원의 전기를 읽겠는가? 요컨대 우리들은 대상 행위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삿포로 역에 당도하자 건들건들 이루카 호텔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바람 없는 평온한 오후였으며, 짐이라곤 숄더백 하나뿐이었다. 거리의 이쪽저쪽에 지저분한 눈덩이가 덩그마니 쌓아 올려 이었다. 대기는 팽팽하게 느껴졌고 사람들은 발부리를 조심하면서 간결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고생들은 다들 뺨이 발갛게 물든 채로, 기운 좋게 하얀 입김을 공중에 뱉어내고 있었다. 그 위에다가 글씨를 쓸 수 있을 만큼 또렷한 하얀 입김이었다. 나는 그런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가하게 걸었다. 삿포로에 온 것은 4년 반 만인데도, 그것은 퍽도 오랜만에 보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나는 도중에서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 담배 한 모금을 피우고, 브랜디를 넣은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나의 주위에선 지극히 정상적인 도회지 사람들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인들끼리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비즈니스맨이 둘이서 서류를 펼쳐놓고 숫자를 검토하고, 대학생들이 몇몇이 모여서 스키여행이나 폴리스의 새 음반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온 일본의 어느 도시에서나 일상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이 가게의 내부를 그냥 그대로 요코하마나 후쿠오카 같은 데로 갖다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이 외면적으로는 거의 같다는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 가게 안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 나 한 사람만이 완전한 국외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거리에도, 이들의 일상생활에도 나는 전혀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도쿄의 커피 하우스의 어디에 내가 소속돼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나는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도쿄의 커피 하우스에서는 그러한 치열한 고독을 느끼는 적은 없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극히 평범하게 시간을 보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히 이렇다 하게 깊이 생각할 것까지도 없는 일상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삿포로라는 거리에서, 나는 꼭 극지의 섬에 혼자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격렬한 고독을 느꼈다. 정경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다. 어디에나 있는 정경이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겨버리면, 이 지면은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장소에도 통해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닮아 있다. 하지만 다르다. 마치 행성과도 같다. 언어도 복장도 표정도 모두 같지만,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다른 별개의 행성. 어느 종류의 기능이 되지 않는 별개의 행성 하지만 어느 기능이 통용되고 어느 기능이 통용되지 않는가는 하나하나를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를 실수하면, 내가 별개의 행성의 인간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들키고 만다. 모두들 일어나서 나를 손가락질하고 규탄할 것이다. 너는 다르다, 라고. 너는 다르다 너는 다르다 너는 다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멍하니 그럴 걸 생각하고 있었다. 망상이다. 하지만 내가 고독하다는 것 이것은 진실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그것이 나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나를 되찾으면서 있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앞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언제의 일이었을까? 아주 옛날이다. 언젠가의 빙하기와 언젠가의 빙하기와의 사이. 어떻든 아주 옛날이다. 역사적 과거. 1억5천만 년 전의 지질시대인 쥐라기라든가, 그런 종류의 과거다. 그리고 모두 다 사라지고 말았다. 공룡도 맘모스도 사벨 타이거도. 미야시타 공원에 쏟아진 가스탄도. 그리고 고도 자본주의 사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 나는 외톨토리로 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산을 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않고 이루카 호텔까지 곧장 걸었다.
이루카 호텔의 위치를 나는 똑똑히는 기억하고 있지는 않아서, 그것이 이내 찾아질지 어떨지 어지간히 걱정스러웠지만, 걱정할 필요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호텔은 이내 찾아졌다. 그것은 26층짜리 거대한 빌딩으로 변모해 있었다. 바우하우스 풍의 현대적인 곡선, 휘황찬란한 대형 유리와 스테인레스 기둥, 주차장에 줄지어 선 깃대와 거기서 펄럭이는 각국 깃발, 단정한 제복을 입고 택시를 손짓해 부르고 있는 배차계, 최상층의 레스토랑까지 직행하는 유리 엘리베이터... 그런 것들을 누가 아무렇지도 않게 볼 것인가? 입구의 대리석 기둥에는 돌고래의 부조가 박혀 있고, 그 밑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돌핀 호텔>이라고. 나는 20초가량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입을 반쯤 열고는 그 호텔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곧바로 뻗치면 달까지라도 도달할 만큼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독히 놀란 것이다. 지극히 부드럽게 표현해서.
5
언제까지나 호텔 앞에 멍하니 서서만 있을 수는 없어서, 어떻든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주소도 맞으며 호텔 이름도 맞다. 예약도 해놓은 것이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느슨한 비탈로 된 주차장을 걸어 올라가, 반짝거리도록 닦아놓은 회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는 체육관처럼 넓고, 천장은 휑하니 뚫려 있었다. 훨씬 위쪽까지 유리벽이 계속되고, 거기서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 퍼붓고 있었다. 현관 한 쪽에는 커다랗고 안락한, 사뭇 값비싸 보이는 소파가 줄지어 있고, 그 사이에 관엽식물 화분이 호기 있게 듬뿍 배치되어 있었다. 로비의 안쪽에는 호화로운 커피숍이 있었다. 이런 데서 샌드위치를 주문하면, 명함 크기의 고상한 햄 샌드위치가 커다란 은접시에 네 쪽이 담겨져 나온다. 포테이토칩과 피클은 또 얼마나 예술적으로 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커피를 곁들이면, 웬만한 4인 가족의 푸짐한 점심 가격이 되는 것이다. 벽에는 훗카이도의 어딘가의 습원을 그린 듯한 6미터 평방 크기의 유화가 걸려 있었다. 특별히 예술적이랄 수는 없으나, 어떻든 볼만한 값어치는 있는 커다란 그림인 것만은 확실했다.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듯, 로비는 제법 붐비고 있었다. 옷매무새가 좋은 중년 남자의 무리가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점잖게 웃기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비슷하게 턱을 쑥 내밀고, 비슷하게 다리를 포개어놓고들 있었다. 의사나 대학교수의 단체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과는 따로 아니, 같은 모임일까? 성장을 한 젊은 여성의 그룹도 있었다. 절반은 일본 옷을 입고, 절반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외국인도 몇몇 있었다. 비즈니스 슈트로 몸을 감싸고, 수수한 넥타이를 매고, 아타셰 케이스를 끼고 있는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한 듯한 비즈니스맨의 모습도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 이루카 호텔은 번창하고 있는 호텔이었다. 확실히 자본을 투자하고, 확실히 그것을 회수하고 있는 호텔인 것이다. 이러한 호텔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한번 어떤 호텔 체인의 홍보 잡지 일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텔을 만들기에 앞서서, 사람들은 미리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확실하게 계산하는 법이다. 프로가 모여서 컴퓨터를 사용해서, 온갖 정보를 투입하고, 철저하게 계산을 시험한다. 심지어 화장실 휴지의 매입 가격과 그 사용량까지도 계산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고용해서 삿포로 거리의 각 통로의 통행인의 숫자도 조사한다. 결혼식의 수효를 산정하기 위해, 삿포로의 적령기의 남녀의 수효도 조사해낸다.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이나 다 조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률을 자꾸 자꾸 줄여간다. 그들은 긴 시간을 들여서 면밀한 계획을 짜고, 프로젝트 팀을 만들고 토지를 매입한다. 인재를 모아 요란한 선전을 한다. 돈으로 해결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 돈이 언젠가 되돌아온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들은 거기에 얼마든지 돈을 쏟아 넣는다. 그런 종류의 빅 비즈니스인 것이다. 그러한 빅 비즈니스를 다룰 수 있는 것은, 갖가지 종류의 기업을 산하에 수용한 대형 복합 기업뿐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험을 줄여나간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계산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이 남으며, 그러한 위험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그 종류의 복합체뿐이기 때문이다.
새 이루카 호텔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좋아하는 형태의 호텔이랄 수는 없었다. 적어도, 평상시라면 나는 자신의 돈을 내고 이런 호텔엔 숙박하지 않는다. 요금이 비싸고 쓸데없는 게 너무 많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어떻든 간에 이게 변모를 마친 새로운 이루카 호텔인 것이다. 나는 카운터에 가서 이름을 말했다. 라이트 블루 제복인 블레이저코트를 걸친 여자아이들이 치약 선전처럼 방긋 웃으면서 나를 마중해주었다. 이런 미소 교육도 자본 투자의 일부인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다들 처녀성처럼 새하얀 블라우스를 걸치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셋이었고, 내게로 온 아이만이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이 잘 어울리는, 인상이 좋은 여자아이였다. 그녀가 와주었다는 데서 나는 약간 안도했다. 세 아이 중에선 그녀가 제일 예뻤으며, 나는 첫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무엇인지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마치 호텔에 있어야 할 모습을 구현화한 호텔의 요정 같다고 나는 느꼈다. 손에 조그마한 금 지팡이를 들고 쓱 흔들면, 디즈니 영화처럼 마술의 가루가 흩날리고, 룸 키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금 지팡이 대신 컴퓨터를 사용했다. 키보드로 내 이름과 신용 카드의 번호를 솜씨 좋게 입력하고,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방긋 웃고는 카드식 키를 주었다.
1523이 내 방 번호였다.
나는 그녀에게 부탁해서 호텔의 팸플릿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이 호텔은 언제부터 영업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지난 해 10월입니다, 하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직 5개월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저, 좀 물어보고 싶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의례적인 우아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띤 채였다. 나 역시 그런 것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여기 이 장소에 같은 이름의 돌핀 호텔이라는 작은 호텔이 있었죠? 그게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그녀의 웃는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고상하고 조용한 샘물에 맥주병 마개를 집어던진 것처럼 조용한 파문이 그녀의 얼굴에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이전의 그것보다는 다소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나는 그러한 변화를 감탄하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샘의 요정이 나타나서, 당신이 지금 집어던진 건 금 마개인가요, 아니면 은 마개인가요, 하고 질문하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물론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그녀는 말하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안경다리를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개업 전의 일이라서, 저희들은 그런 일은..."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나는 그 뒷말을 기다렸으나. 뒷말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나도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
"그럼, 누구에게 물으면 알까, 그러한 경위를?"
그녀는 잠시 동안 숨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웃음은 이젠 사라져 있었다. 웃으면서 숨을 멈추기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해보면 알 수 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 30초 후에 그녀는 40세 안팎의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얼핏 보아도 호텔 비즈니스의 프로맨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이러한 인물과는 전에도 몇 번인가 일 관계로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기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노상 웃음을 띠고 있는데, 상황에 따라 웃는 얼굴을 25종류 가량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정중한 냉소로부터, 적당하게 억제된 만족의 웃음까지. 그 웃는 얼굴의 단계별 변화에는 넘버 1로부터 넘버 25까지 전부 번호가 매져져 있다. 그런 것들을 그들은 상황에 따라 골프 클럽을 골라잡듯 분간해 사용한다. 그는 바로 그런 타입의 남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그는 보통의 웃는 얼굴을 나에게 향하고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나의 복장은 그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는지, 웃는 얼굴이 3단계만큼 하강했다. 나는 안에 모피가 달린 따뜻한 헌팅용 하프코트에 털실 모자를 썼는데, 하프코트는 가슴에 키이스 헤링의 배지를 달았고, 털실 모자는 오스트리아 육군의 알프스부대가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켓이 잔뜩 달린 터프한 양복바지를 입고, 눈길을 걷기 위한 튼튼한 워크 부츠를 신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규격에 맞고 훌륭한, 그리고 현실적인 물품이었으나, 그 호텔 로비에는 좀 어울리지 않게 둔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탓은 아니다. 그런 건 생활 방식의 차이이며 사고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저희 호텔에 관해 질문하실 것이 있다 하셨다는데요." 하고 그는 아주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카운터에 양손을 얹고 아까 여자아이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남자는 염좌한 고양이의 앞발을 바라보는 수의사 같은 눈으로, 내가 차고 있는 디즈니 시계를 힐끗 보았다.
"실례입니다만" 하고 그는 잠시 사이를 둔 다음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이전의 호텔에 관한 것을 아시고 싶어 하시는지요? 만일 괜찮으시다면,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몇 해 전에 이전의 돌핀 호텔에 묵고, 거기주인과 친해졌었다. 이번에 오래간만에 찾아와 보니, 이처럼 싹 바뀌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 어떻든 간에 전혀 개인적인 일이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몇 번인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도 자세한 사정까진 잘 알지 못합니다." 하고 남자는 조심스레 말을 골라가면서 말했다.
"다만 간단하게 설명을 해 드리자면, 이전의 그 돌핀 호텔이 소유했던 토지를 저희가 사들여 그 자리에 새로 호텔을 지었습니다. 분명 이름은 같습니다만, 경영하는 데 있어서는 전혀 별개의 호텔이므로, 구체적인 관계 같은 건 일체 없습니다."
"어째서 이름이 같을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러한 사정까지는 좀..." 하고 그는 말했다.
"이전의 주인이 어딜 갔는지도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그는 웃는 얼굴을 넘버 16으로 바꿔 가지고 대답했다.
"누구한테 물으면 알게 될까요, 그런 일들을?"
"글쎄올시다" 그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희들은 현장의 사람들이어서, 개업 이전의 사정 같은 건 전혀 모른답니다. 그러므로 누구한테 물으면 좋으냐는 말씀이시지만, 갑자기는 좀 무엇이라고도..."
그의 말에도 분명 일리는 있었으나 무엇인가 머리에 걸렸다. 그 남자의 반응에도, 여자아이의 반응에도, 어딘지 작위적인 냄새가 떠돌고 있는 것이다. 어디가 안 돼 먹었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인터뷰를 하고 있노라면 자연히 이런 직업적인 육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을 때의 어투,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의 표정.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문득 느끼는 것이다. 여기엔 무엇인가 언외에 숨겨진 것이 있다고. 하지만 이 이상 여기서 그들을 밀어붙인댔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임은 명백했다. 나는 그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는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검정 양복의 남자가 사라진 다음, 나는 여자아이에게 식사와 룸서비스에 대한 것을 물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알려 주었다. 그녀가 말하고 있는 동안, 나는 물끄러미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주 깨끗한 눈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엇인가 보일 것만 같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낯을 붉혔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어째서 그럴까? 그녀가 호텔의 요정으로 보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카운터를 떠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1523호실은 제법 훌륭한 방이었다. 싱글룸 치고는 침대도 욕실도 널찍했다. 냉장고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듬뿍 들어 차 있었다. 편지지도 봉투도 잔뜩 있었다. 글쓰는 책상도 훌륭한 것이었다. 욕실에는 샴푸에서 린스, 애프터 쉐이브, 욕의 까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옷장도 넓었다. 카펫은 새롭고 푹신푹신했다. 나는 코트와 부츠를 벗고 소파에 앉아 호텔의 팸플릿을 읽어보았다. 팸플릿도 훌륭한 것이었다. 나도 이런 것을 만든 적이 있으니까 잘 안다. 어디 한 군데도 손이 안 간 데가 없는 정성들인 것이다. 이 돌핀 호텔은 아주 새로운 타입의 고급 도시 호텔이다. 그렇게 팸플릿에 씌어 있었다. 모든 현대적 설비를 갖추고, 24시간 끊임없는 만전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각 방은 모두 넉넉하게 여유를 갖고 만들어져 있다. 선택된 집기, 조용함, 따스함이 있는 거주성 <인간성 있는 공간>이라고 팸플릿에는 씌어 있었다. 요컨대 돈을 들였다는 것이고, 요금이 비싸다는 것이다. 팸플릿을 자세히 읽어보니, 여기는 확실히 온갖 것이 참으로 잘 갖춰진 호텔이었다. 지하에는 거대한 쇼핑센터가 있었다. 실내 풀장이 있는가 하면, 사우나도 있고, 일광욕실도 있었다. 실내 테니스장이 있고, 운동기구를 들여놓은 코치 딸린 헬스클럽이 있고, 동시통역이 가능한 회의실이 있고, 레스토랑이 3개 있고, 바도 3개나 있었다. 야간 영업을 하는 카페테리아도 있었다. 리무진 서비스까지 있었다. 온갖 종류의 문방구, 사무용품을 완비한 학습 공간이 있어서 아무나 그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 고안해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있었다. 옥상에는 훼리보트까지 있었다. 없는 것이 없었다. 최신의 설비. 호화로운 내장. 하지만 도대체 어느 기업이 이 호텔을 소유하여 경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팸플릿이며 기타 자료될 만한 것들을 구석구석까지 읽어보았다. 하지만 경영 모체에 관해서는 어디에도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이야기였다. 이만한 슈퍼 A급의 호화 호텔을 세우고 경영한다는 것은 호텔 체인을 가진 프로기업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그런 기업이라면 반드시 회사명을 넣어서 자사의 다른 호텔의 선전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프린스 호텔에 숙박하면, 그 팸플릿에는 전국의 프린스 호텔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인쇄돼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훌륭한 호텔이 왜 돌핀 호텔 따위의 옛날에 있었던 하찮은 호텔의 이름을 굳이 인계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의 부스러기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팸플릿을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치고, 소파에 푹신하게 기대어 다리를 내던지듯 하고, 15층 창밖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이 소리개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예전의 이루카 호텔이 그리워졌다. 그곳 창문으로는 온갖 것이 다 보였었다.
6
저녁때까지 나는 호텔 안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레스토랑이며 바를 체크하고 풀이나 사우나를, 헬스클럽이나 테니스 코트를 기웃거리며, 쇼핑센터에서 책을 사기도 했다. 로비를 서성거리고, 게임센터에서 팩만을 몇 게임인가 했다. 그런 것만을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저녁이 되고 말았다. 마치 유원지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는 이런 식의 시간 소비법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호텔에서 나와서, 저녁거리를 서성거려 보았다. 서성거리고 있는 동안에 차츰 그 부근의 지리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예전의 이루카 호텔에 숙박하고 있었을 때. 나는 진저리가 날 만큼 거리를 돌아다닌 것이다. 어디를 돌아가면 무엇이 있는지도 대강은 기억할 정도다. 이루카 호텔엔 식당이 없었기 때문에 가령 있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무엇인가 먹을 생각은 아마도 나지 않았겠지만 나하고 그녀 키키는 언제나 둘이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다. 나는 예전에 살고 있었던 집 가까이를 어쩌다가 지나가게 된 그런 기분으로, 한 시간 가량 정처 없이 눈에 익은 이 거리, 저 거리를 걸어 다녔다. 날이 저물자 냉기가 피부에 똑똑히 느껴졌다. 길바닥에 달라붙듯 남아 있던 눈이 발밑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바람은 전혀 없었고 거리를 걷는 건 즐거웠다. 공기는 깨끗하게 맑았고 거리 모퉁이의 어디에나 쌓여 있는 배기가스 때문에 회색으로 얼룩진 눈도 밤거리의 빛 아래에서는 청결하고 환상적으로까지 보였다. 예전에 비하면, 이루카 호텔이 있는 지역은 뚜렷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기야 예전이라고 해도 고작 4년 남짓한 전의 일이니까, 우리들이 예전에 보았거나 들락거리거나 한 가게의 대부분은 그냥 그대고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거리의 분위기도 기본적으로는 예전 그대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이 근처에서 무엇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몇 가게는 문을 닫아걸고, 그곳에 <건축 예정>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았다. 실제로 건축 중인 커다란 빌딩도 있었다. 드라이브 드루의 햄버거 가게며, 디자이너의 브랜드 부티크며, 유럽 차의 쇼룸이며, 가운데 사과나무를 심은 참신한 인테리어의 다방이며, 유리를 잔뜩 사용한 말끔한 사무실이 운집된 빌딩 등, 이전엔 없었던 새로운 타입의 가게나 건물이 예전대로의 허름한 색깔의 3층짜리 빌딩이나 포렴이 걸린 대중식당, 언제나 스토브 앞에서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는 과자가게 등을 밀어젖히는 꼴로 차례차례 서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이가 새로 돋아날 때처럼, 거리의 건물들에는 일시적인 기묘한 공존이 눈에 띄었다. 은행도 새로이 점포를 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돌핀 호텔의 파급 효과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큰 호텔이 아무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어지간히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조차 있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 돌연 솟아나듯이 출현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거리의 밸런스는 크게 변화하게 된다. 사람의 흐름이 바뀌고, 활기가 솟게 된다. 땅값도 오른다. 어쩌면 그 변화는 좀 더 종합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돌핀 호텔의 출현이 거리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 아니라 돌핀 호텔의 출현이 그 거리의 변화의 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장기적으로 계획된 도시의 재개발처럼.
나는 예전에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는 어떤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좀 마시고 간단한 식사를 했다. 지저분하고, 시끌시끌하고, 값이 싸고, 맛이 좋은 가게였다. 나는 혼자서 밖에서 식사를 할 때는 언제나 될 수 있는 대로 시끌벅적한 음식점을 택하기로 하고 있었다. 그러는 편이 안정이 되는 것이다. 쓸쓸하지 않으며, 혼잣말을 해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식사를 끝냈는데도 어쩐지 흡족하지 않아 나는 조금 더 술을 주문했다. 그리곤 따끈한 정종을 위 속으로 서서히 흘려 넣으면서 난 도대체 이런 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루카 호텔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든 어떻든 이루카 호텔은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스타워즈의 비밀 기지 같은 저 우스꽝스러운 하이테크 호텔이 서 있다. 모든 것은 그저 때늦은 꿈이었던 것이다. 나는 헐리어서 소멸해버린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꾸고, 출구로 나가 사라져버린 키키의 꿈을 꾸고 있었을 뿐이다. 분명 거기에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장나고 말았다. 이미 이 장소에는 아무 것도 남이 있지는 않다. 이 이상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구하려는 것인가? 그렇군,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밖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렇다. 여기엔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는 않다. 여기엔 내가 구할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동안 물끄러미 카운터 위의 간장병 주둥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혼자서 생활하고 있노라면, 별의별 것을 다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때때로 혼잣말을 하게도 된다. 웅성웅성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도 된다. 중고 스바루 차에 친밀한 애정을 품게도 된다. 그리고 조금씩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어 간다.
나는 가게를 나와 호텔로 되돌아 왔다. 퍽 멀리까지 가 있었지만,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은 간단했다. 머리를 위로 치켜들면 거리의 어디에서나 돌핀 호텔이 보였기 때문이다. 동방의 세 박사가 밤하늘의 별을 목표로 간단하게 예루살렘에 당도했던 것처럼 나도 간단하게 돌핀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머리칼을 말리면서 창밖에 펼쳐지는 삿포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이루카 호텔에 숙박했을 때는, 그렇고 보니 창밖에 작은 회사가 보였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무슨 회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아무튼 회사였다. 사람들이 바쁜 듯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방의 창문으로 하루 종일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곤 했던 것이다. 그 회사는 어떻게 됐을까?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아니 그건 도대체 무엇을 하는 회사였을까?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는 얼마동안 방 안을 별 생각 없이 어정어정 걸어 다녔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엉터리 같은 프로밖엔 하고 있지 않았다. 갖가지 종류의 조작물의 구토물을 전시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작물이라서 별로 더럽지는 않지만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진짜 토사물로 보여 오는 것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양복을 입고 26층에 있는 바로 갔다. 그리고 카운터에 앉아 소다를 넣고 레몬즙을 짜서 넣은 워트카를 마셨다. 바의 벽은 전부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거기서 삿포로의 야경이 보였다. 여기에 있는 이것저것 모두가 나에게 스타워즈의 우주 도시를 상기하게 했다. 하지만 그걸 제쳐두면 느낌이 좋은 조용한 바였다. 술 만드는 법도 제대로 돼 있었다. 유리잔도 고급스런 것이었다. 유리잔이 맞부딪치면 아주 좋은 소리가 났다. 손님은 나 말고는 셋밖엔 없었다. 두 사람의 중년 남자가 안쪽 테이블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소곤소곤 나지막한 말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보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혹은 다스베이더의 암살 계획을 짜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바로 오른쪽 테이블에는 열 두세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워크맨의 헤드폰을 귀에 꽂고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예쁜 아이였다. 긴 머리카락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꼿꼿하고, 그것이 매끄럽고 부드럽게 테이블 위에 흘러 떨어졌는데, 속눈썹이 길고 눈동자는 어딘지 애처로운 투명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려 리듬을 잡고 있었는데, 그 가녀린 손가락 끝만이 다른 것에서 받는 인상에 비해 묘하게 어려 보였다. 별로 그녀가 어른스러웠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여자아이에게는 무엇인지 모든 것을 위로부터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격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뭐라고 할까, 중립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창문으로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주위의 사물은 전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블루진에 흰 캔버스의 스니커를 신고 제네시스라는 레터링이 붙은 트레이너 셔츠를 입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팔굽 언저리까지 걷어 부치고 있었다. 그녀는 똑똑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워크맨의 테이프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다. 때때로 조그만 입술이 희미한 언어의 단편을 만들어냈다.
"레몬주습니다, 저건" 하고 변명하듯 바텐더가 내 앞에 와서 말했다.
"저 애는 저기서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 하고 나는 애매하게 대꾸를 했다.
생각해 보면 확실히 열두세 살의 여자아이가 밤 10시에 호텔의 바에서 혼자 워크맨을 들으면서 음료수를 마신다는 건 이상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바텐더에게서 그런 말을 듣기까지, 나로선 특별히 그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식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워트카를 한 컵 더 시키고 바텐더와 세상 이야기를 했다. 날씨라든가 경기라든가, 그러한 두서없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별 생각 없이 주위도 바뀌었군, 하고 말해보았다. 바텐더는 난처한 듯이 미소를 짓고, 실은 자신은 이 호텔 이전엔 도쿄의 호텔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삿포로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새 손님이 들어와서 그 대화도 결국 실속 없이 끝나고 말았다. 나는 워트카 소다를 전부 해서 네 잔 마셨다.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끝이 없을 것 같기에 네 잔으로 그만 두고 계산서에 사인을 했다. 내가 일어서서 카운터를 떠났을 때에도 그 여자아이는 아직 테이블 의자에서 워크맨을 계속 듣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레몬주스의 얼음은 모두 녹아버렸건만, 그녀는 그런 것쯤은 전연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그녀는 문득 눈길을 들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2초나 3초 동안 내 얼굴을 보고 나서 아주 가볍게 방긋이 웃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그런 입술의 희미한 떨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그녀가 나를 향해 웃어 보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가슴이 한 순간 떨렸다. 나는 어쩐지 내가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기묘한 가슴의 떨림이었다. 나는 내 몸이 5센티미터나 6센티미터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내려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어째서 그렇게 어리둥절해 하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열둘인가 고만한 여자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해서. 아가씨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제네시스 이건 또 싱겁기 짝이 없는 이름의 밴드다. 하지만 그녀가 그 이름이 붙은 셔츠를 입고 있으면, 그건 아주 상징적인 어휘인 것처럼 느껴졌다. 기원 하지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고작 밴드에게 그런 대단한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가? 나는 부츠를 신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그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워크맨.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는 하얀 손가락. 제네시스. 녹아버린 얼음. 기원.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몸 안에 알코올이 서서히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부츠의 끈을 풀고,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피곤해서 줄곧 술에 취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옆에 있는 여자아이가
"보세요, 좀 과음인 것 같아요" 하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혼자인 것이다.
기원.
나는 손을 뻗쳐서 전등의 스위치를 꺾다.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꾸게 될까, 하고 나는 어둠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꿈같은 건 아무것도 꾸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어쩔 수도 없이 텅 비어 있다고 느꼈다. 제로야, 하고 나는 느꼈다. 꿈도 없고 호텔도 없다. 난데없는 곳에서, 난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침대 발밑에는 부츠가 길바닥에 쓰러진 두 마리의 강아지 같은 꼴로 동그마니 고꾸라져 있었다. 창 밖에는 남색 구름이 나직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눈이 내리기 시작할 것만 같은 냉랭한 하늘이었다. 그런 하늘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계 바늘은 일곱 시 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고 잠시 동안 침대에 누운 채 아침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다가올 선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15분가량 보고 나서 단념하고 침대를 나와 욕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기운을 내기 위해 <피가로의 결혼> 서곡을 허밍해 보았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것이 <마적> 서곡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차이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이었지? 무엇을 하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은 날이었다. 수염을 깎으려다가 턱을 베이고, 셔츠를 벗으려고 하다가 소매 단추가 떨어졌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제 바에서 만났던 소녀를 또 만났다. 그녀는 어머니인 듯싶은 여자와 함께였다. 그녀는 오늘 아침엔 워크맨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과 같은 제네시스의 트레이너 셔츠를 입고 심심한 듯이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빵에도, 스크램블드에그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겠지, 아마 40대 전반의 작달막한 여성이었다. 머리를 뒤에서 꼭 묶고, 흰 블라우스 위에 카멜의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눈썹의 생김새가 딸과 꼭 같았다. 코의 생김새가 날렵하고 품위가 있고, 귀찮은 듯이 토스트에 버터 칠을 하는 동작에는 어딘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데가 있었다. 타인의 주목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는 여성만이 터득할 수 있는 그런 류의 몸놀림이었다. 내가 그 테이블 옆을 지나가려 했을 때, 소녀는 문득 눈길을 들어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방긋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이번의 미소는 어젯밤의 것보다는 훨씬 단정한 미소였다. 잘못 보았다 곤 할 수 없는 그런 미소였다. 나는 혼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무엇인가 생각하려 했으나, 그 소녀의 미소를 보고 난 후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건 머릿속에서 꼭 같은 말이 꼭 같은 데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멍하니 고춧가루 병을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아침 식사를 했다.
7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해야 할 일>도 없거니와, <하고 싶은 일> 도 없었다. 나는 이루카 호텔에 숙박하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 근본 명제인 이루카 호텔이 없어져버린 셈이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손을 들었다. 어떻든 로비로 내려가 그곳의 그 훌륭한 소파에 앉아서 오늘 하루의 계획을 세워 보기로 했다. 하지만 계획 같은 건 세워지지 않았다. 거리를 구경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고도 생각했으나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으며, 도대체가 삿포로까지 와서 영화관에서 시간 낭비를 한다는 것도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 무엇을 하면 좋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렇지, 이발소에나 가자,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도쿄에 있는 동안은 일이 바빠서 이발소에 갈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벌써 한 달 반 가까이 이발을 하지 않고 있다. 정상적인 생각이었다. 현실적이며 건전한 생각이다. 틈이 생겼으니까 이발소로 간다. 이야기가 맞는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발상이다.
나는 호텔의 이발소로 갔다. 청결하고 인상이 좋은 이발소였다. 붐벼서 기다리게 되면 좋을 텐데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평일의 아침이라 역시 비어 있었다. 청회색의 벽에는 추상화가 걸렸고, 비지엠에는 작게 잭 루셰의 플레이 바하가 걸려 있었다. 그런 이발소에 들어간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 건 이미 이발소라고도 부를 수가 없다. 그러다간 대중탕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세무서의 대합실에서 팝송을 들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머리를 잘라준 건 스무 살이 넘어 지나 보이는 젊은 이발사였다. 그도 삿포로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이 호텔이 생겨나기 전에 같은 이름의 조그만 호텔이 이곳에 있었는데 하고 말해도, 예예하고 대답할 뿐 특별히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투였다. 시원했다. 게다가 멘즈 비기의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솜씨는 나쁘지 않아서, 나는 일견 만족해서 그곳을 나왔다. 이발소를 나서서, 나는 다시 로비로 돌아와 자, 이제부터 무엇을 하지, 하고 생각했다.
겨우 45분이 소비되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로비의 소파에 앉아서 얼마동안 멍청하니 그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런트에는 어제의 안경을 쓴 그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좀 긴장한 듯이 보였다. 왜 그럴까? 나의 존재가 그녀 속의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러는 중에 시계가 열한시를 가리켰다. 점심 식사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각이었다. 나는 호텔을 나가서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음식점을 돌아보아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식욕이 일지 않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적당하게 눈에 띈 가게에 들어가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았으나, 아직 눈이 내리지는 않았다. 구름은 까딱도 하지 않고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하늘에 떠 있는 나라처럼, 도시의 머리 위를 무겁게 덮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어 보였다. 포크도 샐러드도 맥주도 모두가 회색으로 보였다. 이런 날에는 정상적인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 중심지로 가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양말과 내의를 사고, 예비용 전지를 사고, 여행용 칫솔과 손톱깎이를 샀다. 야식용 샌드위치를 사고, 브랜디 작은 병을 샀다. 어느 것도 특별히 필요해서 산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메우기 위해 산 물건들이었다. 그래도 어떻든 두 시간이 소비됐다. 그 뒤 나는 큰길을 산책하고, 특별히 목적도 없이 거리의 쇼윈도를 기웃거리고, 그런 일에도 싫증이 나자 다방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고 잭 런던의 전기를 읽었다. 이럭저럭 하는 가운데 가까스로 해질녘이 되었다. 길고 지루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하루였다.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인 것이다.
호텔로 돌아와 프런트 앞을 지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예의 안경을 낀 접수부의 여자아이였다. 그녀가 거기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자, 그녀는 좀 떨어진 카운터의 구석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는 렌터카의 접수 데스크로 돼 있었지만, 간판 옆에 팸플릿이 쌓여 있을 뿐 담당 계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볼펜을 손바닥에서 뱅글뱅글 돌리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혼란과 곤혹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렌터카 상담을 하고 계신 척해주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옆 눈으로 힐끗 프런트 쪽을 보았다.
"손님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어서요."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렌터카 요금을 당신한테 물어보고, 당신은 그에 대해 대답하고 있어.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냐."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미안합니다. 이 호텔은 굉장히 규칙이 번거로워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안경이 굉장히 잘 어울려."
"실례?"
"그 안경이 당신한테 잘 어울려, 아주 귀여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잠깐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아마 잘 긴장하는 타입인 것 같다.
"실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하고 그녀는 기분을 바꾼 듯 말했다.
"개인적인 일이에요"
나는 가능하다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져 기분을 안정시켜 주고도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잠자코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말씀하셨던, 이전에 여기 있었던 호텔 이야기입니다만"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같은 이름의 돌핀 호텔이라는... 그건 어떤 호텔이었죠? 건실한 호텔이었나요?"
나는 렌터카의 팸플릿을 한 장 집어 들고 그것을 보고 있는 시늉을 했다.
"건실한 호텔이라니 어떤 걸 의미하지, 구체적으로?"
그녀는 흰 블라우스의 양쪽 깃을 손가락으로 끄집어 당겼다. 그리고 다시 기침을 했다.
"그... 제대로 잘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좀 별난 인연이 있는 호텔이랄까 그런 거 아닌가요? 전 어쩐지 신경이 쓰여요, 그 호텔이."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요전에도 느꼈던 것처럼 그것은 순진하고 깨끗한 눈이었다. 내가 물끄러미 눈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아가씨가 신경이 쓰인다는 게 무슨 말인지 나로선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든 이야기를 하자면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아가씨도 바쁜 것 같고."
그녀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 쪽으로 얼핏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아랫입술을 새하얀 이빨로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일이 끝나고 나서 만나서 이야기하실 수 있겠어요?"
"일은 몇 시에 끝나지 ?"
"어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리로 가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데스크에 마련돼 있는 메모 용지에 볼펜으로 약속 장소와 간단한 약도를 그렸다.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여덟시 반까지는 가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 메모를 코트의 포켓에 간직했다. 이번엔 그녀가 내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를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주세요. 이런 일 하는 건 처음이에요. 규칙을 깨다니.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이상하게 생각진 않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고 나는 말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다지 남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남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지."
그녀는 볼펜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거기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말한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입가에 애매한 미소를 띠고, 그리곤 다시 집게손가락을 안경테 쪽으로 가져갔다.
"그럼, 나중에 또"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의례적인 눈인사를 하고선 자기 일자리로 되돌아갔다. 매력적인 여자아이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다소 불안정한 데가 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고, 백화점의 지하 식료품 매장에서 사온 구운 쇠고기 샌드위치를 절반 먹었다. 이제 어쩌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걸로 우선 뭘 해야 할지 결정된 셈이다. 기어를 낮게 놓아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상황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쁘지는 않다. 나는 욕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또 수염을 깎았다. 잠자코, 조용히,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고 수염을 깎았다. 애프터쉐이브 로션을 바르고, 이를 닦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물끄러미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수로운 점은 딱히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로 용기도 솟아나지 않았다. 여느 때나 다름없는 그저 내 얼굴이었다. 나는 일곱 시 반에 방을 나서서 호텔 현관에서 택시를 타고 그녀의 메모 용지를 운전수에게 보여주었다. 운전수는 잠자코 끄덕이고는 나를 그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택시 요금으로 1천 엔 남짓한 거리였다. 5층짜리 건물인 빌딩 지하에 있는 작고 아담한 바로 문을 열자 알맞은 음량으로 제리 마리건의 낡은 레코드음악이 들려왔다. 마리건이 아직 크루 캣으로, 버튼다운 셔츠를 입던, 체트 베이커라든가 B 불크마이어가 들어 있었던 무렵의 밴드. 예전에 곧잘 들었다. 애담 앤트 같은 가수가 나오기 이전 시절의 이야기이다.
애담 앤트.
참으로 싱겁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서 제리 마리건의 품위 있는 솔로를 들으면서 물을 탄 양주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셨다. 여덟 시 사십오 분이 되어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마 하는 일이 길어지고 있겠지. 약속된 장소에 앉아 있는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으며, 혼자서 시간을 소비하는 데엔 익숙해 있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물탄 양주를 홀짝거리고, 다 마시자 두 잔째를 주문했다. 그리고 특별히 볼 만한 것도 없기에 눈앞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은 아홉 시 오 분 전이었다.
"미안합니다." 하고 그녀는 빠른 말로 사과를 했다.
"하는 일이 늦어져서요. 갑자기 손님이 붐빈데다가 교대할 사람이 늦게 와서요."
"난 괜찮아. 신경 쓸 것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차피 어디든 가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물탄 양주잔을 가지고 이동했다. 그녀는 가죽장갑을 벗고, 체크무늬 머플러를 풀고, 회색의 오버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노랑색 엷은 스웨터에 다크 그린의 울 스커트의 모습이 되자, 그녀의 가슴이 생각보다 훨씬 풍만해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귀에는 고상한 순금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그녀는 브라디 마리를 주문했다. 마실 것이 오자 그녀는 우선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식사는 했느냐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직 안했지만 그다지 배는 고프지 않아요. 네 시에 가볍게 먹었으니까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는 브라디 마리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는 바삐 오느라고 그랬는지 그로부터 30분가량을 가만히 잠자코 앉아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나는 땅콩 한 개를 집어 들어 그것을 깨물어 먹고, 다시 한 개를 집어 들어 깨물어서는 먹고 하는 짓을 되풀이하면서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번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굉장히 긴 한숨이었다. 자신도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고개를 들고 신경질적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일이 고된가 보지?" 하고 나는 물었다.
"네"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제법 고돼요. 아직 하는 일에 잘 익숙하지 못한 데다 호텔 자체가 개업한 지 얼마 안 되고 해서 윗사람도 여러 가지로 신경이 예민하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내놓고,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새끼손가락에는 조그마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장식이 거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은반지였다. 나와 그녀는 얼마동안 그 반지를 보고 있었다.
"그 옛날의 돌핀 호텔 이야기입니다만"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 취재라든가 그런 관계의 분은 아니겠지요?"
"취재?"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째서 또?"
"좀 물어보았을 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한참동안 벽의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말썽이 있었던지 윗사람들이 굉장히 경계하고 있어요. 매스컴에 대해서요. 토지 매수라든가, 그런 일로... 아시겠죠? 그런 걸 신문지상 같은 데서 써 제끼면 호텔로선 곤란할 수밖에요. 손님 상대의 장사니까요. 이미지가 나빠지겠죠?"
"이제까지 뭔가 기사로 쓰여 진 적이 있나?"
"한 번 주간지에요. 오직 비슷한 일이라든가, 퇴거 거부를 하던 사람을 회사가 폭력배인가 우익을 동원해서 내쫓았다느니 어쩌니 하는 그런 일."
"그래서, 그 말썽에 예전의 돌핀 호텔이 먹혀들었단 말인가?"
그녀는 약간 어깨를 으쓱하고는 브라디 마리를 마셨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서 매니저도 그 호텔 이름이 나오자 경계를 한 것 같아요, 당신에 대해서. 그렇죠, 경계했죠? 하지만 정말 전 거기에 대해선 자세한 건 알지 못해요. 다만 이 호텔에 돌핀 호텔이란 이름이 붙은 건, 그전의 호텔과 관계가 있었다는 이야긴 들은 적이 있어요. 누구에게 선가."
"누구에게?"
"검둥이 중 한 사람에게서."
"검둥이?"
"검정 옷을 입은 작자들 말예요."
"과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밖에 뭐든 돌핀 호텔에 대해들은 건 없나?"
그녀는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왼쪽 손가락으로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무서워요, 나" 하고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무서워서 못 견디겠어요. 어쩌지도 못할 만큼."
"무서워? 잡지에 취재를 당하는 게?"
그녀는 약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얼마동안 컵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살며시 대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렇진 않아요. 뭐 잡지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글쎄, 잡지에 무엇이 나오든 저는 상관이 없어요, 안 그래요? 윗사람들이 당황해 할 뿐이에요. 제가 말하는 건 전연 다른 거예요. 그 호텔 전체에 대한 거. 저 호텔엔, 즉 말이죠, 무슨 좀 이상한 데가 있어요. 좀 비정상이라고나 할까... 비뚤어진 데가 있어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위스키를 다 마시고 다음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도 두 잔째의 브라디 마리를 시켰다.
"어떤 식으로 비뚤어졌다고 느끼지,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고 나는 물었다.
"가령 뭔가 구체적인 것이 있다면?"
"물론 있어요." 하고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있긴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말로 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선 여지껏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느낀 일은 굉장히 구체적인 것인데도, 막상 그것을 말로 해보면 그런 구체성 같은 것이 자꾸자꾸 엷어져가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요."
"사실적인 꿈처럼?"
"꿈과는 또 달라요 꿈이라는 건, 저도 잘 꾸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퇴해 가요. 그 사실성이.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요. 언젠가도 똑같아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사실적이에요. 언제까지 가도 거기에 그대로 있다구요. 쓱 눈앞에 떠올라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좋아요, 어떻게든 이야기해 보겠어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1월 달이었어요. 1월 초. 설이 끝나고 조금 지났을 무렵. 그날 저는 늦당번이라서 늦당번을 자주 하진 않지만 그날은 사람이 없어서 하는 수가 없었죠. 그래서 아무튼, 일이 끝난 게 밤중인 열두 시께였어요. 그 시간에 일이 끝나면, 회사에서 택시를 불러선 모두를 순번으로 집까지 보내주는 거예요. 그땐 전철도 없고 하니까. 그래서 열두 시전에 일을 끝내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16층까지 종업원용 엘리베이터로 올라갔어요. 16층엔 종업원의 탈의실이 있는데. 전 거기에 책을 놓고 왔었거든요. 뭐 그런 거 다음날이라도 좋았지만 그게 읽다 만 것이었고, 게다가 또 같은 택시로 귀가하기로 돼 있던 여자아이의 하는 일이 좀 늦어져서요. 그래서 이왕 그렇게 시간이 남게 됐으니 내친김이라 생각하고 가지러 올라간 거죠. 16층엔 객실과는 별도로 그런 종업원용 설비가 있어요. 탈의실이라든지, 잠시 쉬면서 차를 마시는 곳이라든지. 그래서 가끔가끔 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저는 언제나처럼 밖으로 나섰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래요, 그런 일이 있죠. 언제나 언제나 이골 나게 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늘 가는 눈익은 장소라든지, 그런 건 아무 생각 없이 행동을 하죠, 반사적으로요. 저도 극히 자연스레 쓱 발을 내디뎠어요. 생각에 잠겨 있었던가 봐요, 무엇엔가 필시. 무엇이었는진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코트의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복도에 서서 문득 깨닫자 주위가 캄캄하지 않겠어요. 아주 캄캄절벽.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엘리베이터의 문은 이미 닫혀 버렸겠죠. 정전인가 했어요, 물론.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우선 첫째로 호텔은 확고한 자가 발전 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정전이 된다 해도 곧 그쪽으로 전환할 수 있거든요. 자동적으로, 참으로 순간적으로. 저도 그런 훈련에 참여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원칙적으로 정전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요, 가령 만에 하나라도 자가발전 장치마저 고장났다. 하더라도 복도의 비상등은 켜져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캄캄절벽이 될 까닭이 없거든요. 복도는 녹색 빛으로 비춰지고 있을 테니까. 도대체 그렇지 않을 까닭이 전혀 없거든요. 온갖 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런데 그때, 복도는 마냥 캄캄하기만 했어요. 보이는 빛은 엘리베이터의 버튼과 층계 숫자 표시뿐. 빨간 디지털의 숫자. 저는 물론 버튼을 눌렀죠.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자꾸 자꾸 아래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거 야단났구나 싶어 저는 주위를 살펴봤어요. 물론 무서웠지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거 성가시게 됐구나 그렇게도 생각했죠. 어째서 그랬는지 아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으로 캄캄절벽이 돼버린다는 건, 뭔가 호텔의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겠어요? 기계적으로라든지, 구조적으로라든지, 그런 거. 그러면 또 야단법석이 벌어지지요. 휴일을 반납하고 일을 더하게 된다든지, 훈련, 훈련으로 지고 새고 한다든지, 윗사람들이 신경질적이 된다든지. 그런 거, 이젠 진절머리가 나거든요. 가까스로 안정된 셈인데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그런 걸 생각하고 있으니 점점 화가 치밀어 온 셈이죠. 무섭다기보단 화나는 편이 더 심했던 거예요. 그래서 전, 어떻게 된 건지 좀 봐두자,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두세 걸음 걸어 보았어요. 천천히, 그랬더니 뭔지 이상해요. 즉 발소리가 여느 때와는 달라요. 저는 그때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여느 때와는 걷는 기분이 다르지 뭐예요. 여느 때의 카펫 감촉이 아니더란 말예요. 좀 더 딱딱한 거예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곰팡내가 난단 말예요. 호텔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저희 호텔은 말이죠, 완전히 공기 조절을 통제 제어 장치로 운영하고 있어요.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죠. 보통의 공기가 아니라 좋은 공기를 만들어 보내고 있어요. 다른 호텔처럼 너무 건조해서 코가 막히거나 하지 않도록 자연스런 공기를 내보내고 있죠. 그래서 곰팡내난다 거나 하는 일은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때 공기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낡은 공기 그거였어요. 몇 십 년 전의 공기. 어릴 적에 시골의 할아버지 댁에 놀러갔다가 낡은 헛간을 열고 맡아본 것 같은 그런 냄새예요. 여러 가지 낡은 것들이 뒤섞여 가지고 가만히 침전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거, 저는 다시 한 번 엘리베이터를 뒤돌아보았어요. 하지만 이번엔 이미 엘리베이터의 스위치 램프마저 꺼져 있지 뭐예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전부 죽어버린 거예요, 완전히. 정말 무서웠어요. 당연하잖아요? 캄캄한 어둠 속에 저 혼자만인 걸요. 무서웠어요. 하지만요, 이상해요. 너무나도 주위가 조용하지 뭐예요? 글쎄, 정전이 되어서 캄캄절벽이 됐단 말예요. 다들 떠들어대야 하겠죠? 호텔은 거의 만원이었고, 그런 상황이 되면 굉장한 소동이 벌어져야 했겠죠? 그런데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하단 말예요. 그래서 난 무엇이 무엇인지 영문을 모르게 됐어요."
마실 것이 나왔다. 나와 그녀는 한 모금씩 그것을 마셨다. 그녀는 컵을 아래에 내려놓고 안경에 손을 댔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기분을 아실 수 있겠어요?"
"대충 알 만해" 하고 나는 끄덕였다.
"1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캄캄절벽이었다. 냄새가 다르다. 너무나 조용하다. 어쩐지 이상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그토록 겁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적어도 여자로선 용감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전기가 꺼졌대서, 그것만으로 보통의 아이처럼 빽빽 아우성을 치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그야 무섭긴 무섭지만, 그런 것에 지면 안 된다고도 생각해요. 그래서 무엇이든 간에 확인해 보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손으로 더듬어 복도를 나가 보았어요."
"어느 쪽으로?"
"오른쪽" 하고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서 그것이 틀림없이 오른쪽이었을 확인했다.
"그래 오른쪽으로 나아갔지요. 천천히, 복도는 일직선이었어요. 벽을 끼고 얼마동안 나가니까 복도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졌어요. 그리고 그 앞쪽에 희미하게 빛이 보였어요. 굉장히 희미한 빛이. 훨씬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양초빛 같았어요. 그래서 전, 누군가 양초를 찾아가지고 그걸 켰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아무튼 그리로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다가서서 보니까, 그 촛불 빛은 아주 약간 열린 문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이상한 문. 눈에 설은 문. 저희 호텔에 그런 문은 있을 턱이 없거든요. 하지만 아무튼 거기서 불빛이 흘러나왔어요. 저는 그 앞에 서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었죠. 안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이상한 사람이 나와도 곤란하고, 게다가 문도 전혀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시험 삼아 살며시 문을 노크해 보았죠. 들릴락 말락 하게 살며시, 똑똑. 하지만 그 소리는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크게 울렸어요. 주위가 굉장히 조용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어요. 10초 가량요. 그 10초가량을 전 그 문 앞에서 꼼짝 않고 있었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그 다음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겠어요. 그 무엇이랄까, 무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방바닥에서 일어서는 것 같은, 그런 소리. 그리고 발소리가 들렸어요. 굉장히 느릿느릿한 발소리. 살...살...살... 그렇게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걷는 것 같은 발소리. 그것이 한 걸음 한 걸음 문 쪽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녀는 그 소리를 떠올리듯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소릴 듣는 순간에 전 몸서릴 쳤어요. 이건 인간의 발소리가 아니야, 그런 느낌이 들었죠. 근거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어요. 이건 인간의 발소리가 아니라고.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처음 알았죠, 그때. 등골이 정말 오싹한 거예요. 수사학적 과장이 아니고요. 전 도망쳤어요.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중에서 한 번인가 두 번 굴렀던가봐요. 스타킹이 망가졌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다만 도망쳤다는 기억밖엔 생각나지 않거든요. 달리는 동안 줄곧 엘리베이터가 아직도 작동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그것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어요. 층계 숫자 표시도 버튼도 제대로 전기가 켜져 있었고요. 한껏 버튼을 눌렀더니 엘리베이터가 올라오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 올라오는 게 굉장히 느리지 뭐예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지 뭐예요. 2층... 3층... 4층... 그런 느낌이에요. 어서 오라구, 어서 와, 하고 계속 애태웠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굉장히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무언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그녀는 한숨 들이키고 브라디 마리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손가락의 반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나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음악은 꺼져 있었다.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들리는 거예요. 발소리가. 살... 살... 살... 그렇게. 방에서 나와서, 복고를 지나, 내쪽으로 걸어오는 거예요. 무서웠어요. 아니 무섭다고 할 정도가 아니에요. 꾸욱 위가 치밀려 올라와 목구멍 바로 가까이까지 와 있지 뭐예요. 그리고 온몸에서 땀이 솟구쳤어요. 불쾌한 냄새가 나는 차가운 땀. 오한. 마치 살갗 위를 뱀이 기어가는 그런 느낌. 엘리베이터는 그래도 오지 않았어요. 7층... 8층... 9층... 그리고 발소리는 다가오고."
20초나 30초 동안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천천히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 마치 라디오의 채널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카운터 석에서 여자가 뭐라고 말하고, 남자가 다시 웃었다. 어서 음악을 틀어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무서움이란 경험해 보지 않고선 몰라요" 하고 그녀는 메마른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하고 나는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어깨를 약간 으쓱했다.
"문이 열리고, 거기서부터 정다운 불빛이 비쳐 나왔어요. 전 거기로 흘러 들어갔죠. 그리곤 벌벌 떨면서 1층 버튼을 눌렀어요. 로비에 돌아가자 모두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글쎄 안 그러겠어요, 전 새파랗게 질려서 말도 못할 만큼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요. 매니저가 와서, 아니 웬일이냐고 묻겠죠. 그래서 전 숨을 헐떡거리면서 설명했어요. 16층이 어쩐지 이상하다고요. 매니저는 그 말만 듣더니 이내 남자아이 하나를 불러가지고 저와 셋이서 16층까지 올라갔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체크하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16층은 아무 일도 없지 뭐예요. 전등도 휘황하게 켜져 있었고,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고요. 여느 때나 똑같아요. 탈의실에 가서 거기에 있던 사람에게도 물어봤지요. 그 사람은 줄곧 깨어 있었지만 정전 같은 건 전혀 없었다고 하지 않겠어요. 확인하기 위해 16층을 구석구석 다 돌아보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 뭐예요. 여우한테 홀린 것만 같았어요. 아래에 내려오자 매니저는 자기 방으로 저를 부르더군요. 그래 저는 필경 야단맞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더군요. 그리고 좀도 자세히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 자잘하게 전부 설명했어요. 그 살살 하는 발소리 이야기까지. 어째 좀 싱거운 느낌이 들었지만요. 필시 꿈이라도 꾸고 있었나 보군, 그렇게 일소에 부쳐지지나 않을까 하면서요.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어요. 되레 굉장히 진지한 얼굴을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 있었던 일, 누구에게든 절대 아무 말도 하지마> 하고요. 친절하게 타이르는 듯한 어투로. <무슨 착오인 것 같은데, 다른 종업원들이 겁을 먹으면 안 되니까 잠자코 있어> 하고요. 좀 더 권위주의적으로 말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쩌면 이런 경험을 한 건 재가 처음이 아니지 않느냐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가 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무엇인가 질문하는 편이 좋을 듯 싶었다.
"그래 다른 종업원이 그런 이야길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하고 나는 물었다.
"무슨 당신의 체험에 통하는 이상한 일이라든지, 색다른 일이라든지, 야릇한 일이라든지? 지나가는 소문 같은 거라도 좋으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요, 저는 느끼는 걸요. 거기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게 있다고. 제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매니저의 반응도 그랬고요, 그리고 거기엔 어쩐지 비밀스런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거든요.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이상해요. 제가 이전에 근무하던 호텔에선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걸요. 물론 이만큼 큰 호텔은 아니었으니까 사정이 조금은 다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다른 걸요. 이전 호텔에도 괴담 같은 건 있었지만요. 어느 호텔에나 한 가지쯤은 그런 거 있잖아요. 저희들은 그런 거 웃어버리고 말았어요. 하지만 여기는 그렇지가 않아요. 웃어버리고 말 분위기가 아녜요. 그래서 더욱 무서운 거예요. 아니면 호통을 치던가 말예요. 그랬으면 아도 어쩌면 무슨 착오라도 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에 든 유리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후로 16층에 기본 적은 있나?" 하고 나는 물었다.
"몇 번이나" 하고 그녀는 평탄한 소리로 말했다.
"일터니까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가는 건 낮 동안이고 밤엔 안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가요. 이젠 두 번 다신 그런 꼴 당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래서 늦은 당번도 안 하기로 했어요. 하고 싶지 않다고 윗사람한테 말했어요. 분명하게."
"이제까지 누구한테도 그 이야기 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한 번만 짤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누군가에 이야기한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이야기할래야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던 걸요. 그리고 어쩌면 선생님이 그 일에 대해서 무슨 짚이는 데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 16층의 사건에 대해서."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녀는 멍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선생님은 이전의 돌핀 호텔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그 호텔이 없어지게 된 사정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그래서 무엇인가 제가 경험한 일에 대해서 짚이는 데가 있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특별히 짚이는 일은 없는 것 같았는데" 하고 나는 좀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 호텔에 대해 특별히 자세히 알고 있는 것도 아냐. 작은, 그다지 인기있는 호텔은 아니었지. 4년 전쯤에 그 호텔에 묵고 거기 주인과 알게 되고, 그래서 다시 찾아온 거야. 그것뿐이야. 나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고."
이루카 호텔이 보통의 호텔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 이상 더 이야기의 범위를 확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 오후 제가 돌핀 호텔이 건실한 호텔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했어요. 그건 왜 그랬어요?"
"그 이야기란 건 아주 개인적인 일이거든" 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길어지지. 하지만 지금 아가씨가 이야기해준 건 아마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약간 낙담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비뚤어뜨리고 한참동안 자신의 손등을 보고 있었다.
"도움이 되지 않아 미안하군. 어렵게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선생님 탓은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튼 이야기하게 돼서 좋았어요. 이야길 하고 나니 얼마만큼 기분 전환이 됐거든요. 이런 건 가만히 혼자서 안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잖아요."
"그렇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품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그것이 자꾸자꾸 부풀어 오르지."
나는 두 손을 펼쳐서 풍선이 부푸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잠자코 끄덕였다. 그리고 반지를 뱅글뱅글 돌리고 마지막에 손가락에서 빼어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보세요. 제 이야기 믿어주시죠? 그 16층 이야기를?" 하고 그녀는 자신을 보면서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물론 믿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하지만 그런 거, 이상한 이야기잖아요?"
"분명 이상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은 있는 법이야. 나는 이해해. 그래서 아가씨가 하는 말은 믿어. 무엇과 무엇이 문득 연결되는 거야. 무엇인가의 계기로."
그녀는 그 일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일을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있어요?"
"무서웠어요, 그때?" 하고 그녀가 물었다.
"아니, 무섭다고 할 건 아냐" 하고 나는 대답했다.
"즉 말이지, 여러 가지 연결방식이 있는 거야. 내 경우엔..." 하지만 거기서 돌연 할 말을 잃었다. 먼 곳에서 누군가 전화 코드를 잡아 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위스키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모르겠는데, 하고 말했다.
"제대로 말할 수가 없군. 하지만 그런 일이란 분명 있어. 그러니까 믿지. 다른 누가 믿지 않더라도 나는 아가씨가 하는 말을 믿어. 거짓이 아니야."
그녀는 얼굴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까지의 미소와는 좀 느낌이 다른 미소였다. 개인적인 미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다 했다는 데서 좀 느긋해졌던 것이다.
"왜 그럴까요?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잘은 모르겠지만 기분이 안정돼는 것만 같아요. 전 굉장히 사람을 가리는 편이라서, 초면의 사람과는 그다지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데, 선생님과는 별 저항감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어요."
"그건 우리들 두 사람 사이엔 어딘가 모르게 통하는 데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게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쁜 느낌을 주는 한숨은 아니었다. 다만 단순히 호흡을 조정했을 뿐이었다.
"저, 뭐 좀 먹지 않을래요? 갑자기 배가 고파오는 것 같아요."
나는 어딘가로 제대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권해 보았지만, 그녀는 여기서 가볍게 먹는 정도로 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웨이터를 불러 피자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호텔에서 하는 일이며, 삿포로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스물 셋이었다. 고교를 나와 호텔의 종업원 교육을 하는 전문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다음, 도쿄의 호텔에서 2년 간 일하고, 그 다음에 돌핀 호텔의 모집 광고에 응모해서 채용되어 삿포로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삿포로로 오는 것은 그녀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양친이 아사히카와 근처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괜찮은 여관이에요. 오래 전부터 해왔고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럼, 여기서 당신은 견습이랄까 수습이랄까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셈이겠군, 가업을 승계하기 위한?"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또 안경테로 손을 가져갔다.
"승계 한다느니 그런 앞날의 일까진 전혀 생각지 않고 있어요, 아직은. 저는 다만 단순하게 좋은 거예요, 호텔에서 일하는 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오고, 묵고, 가버리고, 그러는 게. 그런 속에 있으면 아주 마음이 놓여요. 안심이 돼요. 어릴 적부터 그런 환경에 있었어요. 익숙해 있는 거겠죠."
"과연"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과연이에요?"
"프런트에 서 있으면 아가씨는 어쩐지 호텔의 요정처럼 보여."
"호텔의 요정?" 하고 그녀는 웃었다.
"멋진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멋지겠어요."
"아가씨 같으면 노력하면 될 수가 있지" 하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호텔엔 아무도 머물지 않아. 그래도 좋아? 다들 왔다간 그저 지나쳐 갈 뿐인데."
"그렇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무엇이건 머물면 무서울 것만 같아요. 어째서 그럴까? 겁이 많아서 그럴까? 다들 왔다간 가버리고 말아요. 하지만 그래서 안도하거든요. 안 그래요? 하지만 전 안 그래요. 어째서 그럴까? 모르겠어요."
"아가씨는 이상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을 뿐이야."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으음, 어떻게 그런 걸 선생님이 알아요?"
"어떻게 알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도 좋으니 듣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조금만 했다. 서른넷이고, 이혼 경험이 있고, 글을 쓰는 반둥건둥한 일을 하고 생계를 꾸리고 있다. 스바루 중고차를 타고 있다. 중고차라지만 카스테레오와 에어컨디셔너가 달려 있다. 자기소개. 객관적 사실. 하지만 그녀는 좀 더 내가 하는 일의 내용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숨길 필요도 없고 해서 나는 말해 주었다. 최초에 했던 여배우 인터뷰 이야기와 하코다테의 음식점 취재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일이란 아주 재미날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재미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 글 쓰고 있으면 긴장이 느슨해지지. 하지만 쓰고 있는 내용은 제로인 거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예를 들면 하루에 열다섯 곳이나 레스토랑이며 요리점을 돌고, 내놓는 요리를 한 입씩 먹어보고, 나머지는 전부 남겨놓는 일. 그런 것이 어딘가 결정적으로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해."
"하지만 전부를 다 먹을 순 없잖아요?"
"물론 그럴 순 없지. 그런 짓을 하면 사흘이면 죽어버려. 다들 나를 바보인 줄 알지. 그런 짓을 하고 죽어도 아무도 동정하지 않아."
"그럼, 하는 수가 없지" 하고 나는 되풀이 말했다.
"그건 알고 왔어. 그러니까 제설 작업 같은 거야. 하는 수 없으니까 하고 있는 거야. 재미나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구."
"제설 작업" 하고 그녀는 말했다.
"문화적 제설 작업"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이혼에 관해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이혼하고 싶어서 이혼한 건 아냐. 그녀 쪽에서 어느 날 돌연 나가버린 거야. 남자와 함께."
"상처받았어요?"
"그런 처지에 서게 되면,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소 상처를 받게 되겠지."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내 눈을 보았다.
"미안해요. 묘한 질문을 해서. 하지만 선생님은 어떻게 상처를 받는지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은 어떤 식으로 상처를 받는 걸까?"
"키이스 헤링의 배지를 코트에 다는 것처럼 되지."
그녀는 웃었다.
"그것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건 만성화 된다구. 일상생활에 함몰해서 어느 것이 상처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지. 상처라는 건 그런 거야. 이거다 하고 끄집어내어 보여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건 대수로운 상처는 아냐."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은 잘 알아요."
"그래?"
"그렇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 역시 여러 가지로 상처를 받았어요. 꽤나"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럭저럭 하다가 결국 도쿄의 호텔도 그만뒀어요. 상처를 받은 거예요. 고통스러웠고. 나란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일은 제대로 남처럼 처리하질 못하거든요."
"으음"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도 상처를 입고 있어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때때로 문득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녀는 다시 반지를 뺐다가 다시 제자리에 끼웠다. 그러고 나서 브라디 마리를 마시고 안경을 만졌다. 그리고서 방긋 웃었다. 우리는 제법 술을 마셨다. 몇 잔을 주문했는지 모를 만큼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고, 내일 아침은 일찍 나가야 하니까 이젠 가겠다고 했다. 집까지 택시로 보내주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차를 타면 10분쯤 되는 곳에 있었다. 내가 술값을 치렀다. 밖으로 나서니 아직 눈발이 희끗희끗 흩날리고 있었다. 대단한 눈은 아니지만 길바닥은 얼어붙어서 미끌미끌했다. 그래서 우리는 단단히 어깨를 끼고 택시 타는 데까지 걸었다. 그녀는 좀 취해서 휘청거렸다.
"저 말이지, 그 토지 매수의 말썽에 관해서 기사를 쓴 주간지 말인데" 하고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그 주간지 이름은 기억하고 있나? 그리고 대강의 발매 날짜와."
그녀는 그 주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신문사 계열의 주간지였다.
"아마 지난 해 가을이었던가,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우리는 눈이 희끗희끗 내리는 속에서 5분가량 택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내 팔을 줄곧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을 풀고 있었다.
"이렇게 한가로이 지낸 건 오랜만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한가로이 지낸 건 오랜만이었다. 우리들 두 사람 사이엔 무엇인지 상통하는 데가 있어, 하고 나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바로 그렇기에 만났을 때부터 첫눈에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택시 안에서 우리는 별 거리낄 것 없는 잡담들을 했다. 눈이라든가 추위라든가, 그녀는 근무 시간이라든가, 도쿄라든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후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고민했다. 이제 한 번만 밀어붙이면 그녀와 함께 잘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그저 아는 것이다. 그녀가 나와 함께 자고 싶어하는 지 어떤지 그것까지는 물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와 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건 눈매나 호흡이나 말투나 손놀림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로서도 물론 그녀와 자고 싶었다. 자도 성가시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와서는 가버릴 뿐인 것이다. 그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나로선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그녀와 함께 잔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의 한구석에서 아무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나보다 열 살 아래이고, 어딘 지 불안정하고, 게다가 어지간히 술에 취해서 다리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건 표를 해놓은 카드로 트럼프 게임을 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정당한 게 아니다. 하지만 섹스의 영역에서 공정이라는 게 얼마만큼의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고 나는 자문해 보았다. 섹스에서 공정성을 구한다면 어째서 차라리 선태류로나 되지 않느냐, 그러는 게 이야기가 간단하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도 정론이었다. 나는 그 두 가치관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하고 있었는데, 택시가 그녀의 아파트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그녀가 아주 시원스럽게 그 갈등을 해소해 주었다.
"저, 여동생하고 둘이서 살고 있어요." 하고 그녀가 내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상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버리자, 나는 다소 안도했다. 택시가 아파트 앞에 머물자 그녀는 미안하지만 무서우니 문 앞까지 바래다주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말했다. 밤이 늦어지면 때때로 복도에 이상한 사람이 있는 수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운전수에게 5분이면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그녀의 팔을 잡고 입구까지 얼어붙은 길을 걸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계단을 3층까지 올라갔다. 쓸데없는 물건이 붙어 있지 않은 단순한 철근구조 아파트였다. 306이라는 번호가 붙은 문 앞까지 오자, 그녀는 백을 열고 손을 집어넣어 키를 찾아내었다. 그리곤 나를 향해 어딘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마워요, 즐거웠어요, 하고 말했다. 나도 즐거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키를 다시 백 속에 집어넣었다. 자물쇠가 열리는 짤깍 하는 메마른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흑판에 씌어진 기하 문제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그런 눈매였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당혹해하고 있었다. 나에게 제대로 안녕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벽에다 손을 집고 그녀가 무엇인가 결심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결심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잘 자요. 여동생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4초나 5초 동안 입술을 꼭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여동생과 살고 있다는 거,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혼자 살고 있어요."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서서히 낯을 붉혔다.
"어떻게 그걸 알죠?"
"어째서일까? 그저 알게 되지" 하고 나는 말했다.
"선생님, 나쁜 사람이군요." 하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처음에 말해둔 것처럼 남이 싫어하는 일은 안 하지. 무슨 허점을 이용하거나 하지는 않아. 그러니 무슨 거짓말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그녀는 얼마동안 망설이고 있더니, 이윽고 체념한 듯이 웃었다.
"그렇군요. 거짓말 같은 거 할 필요가 없었겠네요."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아주 자연스레 거짓말을 했어요. 저도 제 나름으로 상처를 받았어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요."
"나 역시 상처받고 있어. 키이스 헤링의 배지조차 가슴에 달고 있어."
그녀는 웃었다.
"으음, 안으로 좀 들어와 차라도 마시고 갈래요? 좀더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나도 아가씨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오늘은 돌아가겠어.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가씨와 나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째서일까?"
그녀는 간판의 작은 글씨를 읽을 때와 같은 눈매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 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야기할 것이 많을 때엔 조금씩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가 한 밀에 대해 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기를 단념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저어" 하고 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문이 15센티 가량 열리고 그녀가 얼굴을 보였다.
"다시 가까운 날에 아가씨를 불러도 괜찮을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문에 손을 댄 채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택시 운전수는 무료한 듯 신문을 펼쳐 읽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자리에 돌아와 호텔 이름을 말하자, 그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정말 돌아가는 겁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필경 이젠 됐으니 가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요. 분위기 상으로, 보통은 대개 그렇게 되기가 십중팔구거든요."
"그럴 테지" 하고 나는 동의했다.
"오랫동안 이런 직업을 갖다 보니, 대개 육감은 틀리지 않더라구요."
"오랫동안 하다 보면 틀리는 수도 있죠. 확률적으로."
"그야 그렇지만" 하고 운전수는 약간 미심쩍은 듯한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손님,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나는 이상해져 있는 것일까?
방에 돌아와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이를 닦으면서 좀 후회했지만 결국 그대로 깊이 잠들고 말았다. 나의 후회는 대체로 언제나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 것이다. 아침에 우선 나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방의 계약을 3일 연장했다.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계절은 성수기가 아니다.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신문을 사가지고 호텔 가까이의 던킨 도너츠 하우스에 들어가 플레인 머핀을 두 개 먹고, 커다란 컵에 커피를 두 잔 마셨다. 호텔의 아침 식사란 하루만 지나도 싫증이 난다. 던킨 도너츠가 제일이다. 값이 싸고 커피도 더 청할 수 있다.
다음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도서관으로 갔다. 삿포로에서 제일 큰 도서관으로 가달라고 했더니 어김없이 데려다 주었다. 도서관에서 나는 그녀가 알려준 주간지의 백넘버를 찾아보았다. 돌핀 호텔의 기사가 나와 있는 건 10월 20일 호였다. 나는 그 부분의 카피를 떠 가지고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진득이 앉아 그것을 읽어보았다. 난잡한 기사였다.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몇 번이고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자는 알기 쉽게 쓰려고 한껏 노력한 듯했지만, 그 노력도 사태의 복잡성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꼼꼼히 읽으면 그런대로 대략의 윤곽은 알 수 있었다. 기사의 타이틀은 <삿포로의 토지 의혹. 검은 손이 농간하는 도시 재개발>이라고 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찍은, 완성을 목전에 둔 돌핀 호텔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요약하면 이런 줄거리였다. 우선 첫째로 삿포로 시의 일부에서 대규모의 토지 매점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 2년 동안에 수면 밑에서 토지의 명의가 이상하게 움직였다. 땅값이 의미도 없이 뛰어올랐다. 기자가 그런 정보를 얻고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를 해보니, 토지는 여러 회사에 의해 매입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명의만의 유령회사였다. 회사는 등록도 돼있고 세금도 냈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사무실도 없고 사원도 없다. 그리고 그 유령회사에 연결돼 있었다. 실로 교묘하게 명의상 토지전매가 행해지고 있었다. 2천만 엔에 팔린 토지가 6천만 엔으로 전매되고, 그것이 2억 엔에 팔려 있었다. 여러 가지 유령회사의 미로를 하나하나 끈질기게 더듬어 갔더니 그 행방은 하나였다. 비산업이라고 하는, 부동산을 취급하는 회사였다. 이것은 실재하는 회사였다. 아카사카에 커다랗고 패셔너블한 본사 빌딩을 갖고 있다. 그 비산업은 공공연하게는 아니지만 에이 그룹이라는 복합체에 연결돼 있었다. 철도며 호텔 체인이며 영화회사며 식료품 체인이며 백화점이며 잡지. 크레디트 금융에서 손해보험까지를 산하에 수용하는 거대 기업이었다. 거기에 에이 그룹은 정계에도 거대한 파이프를 갖고 있었다.
기자는 계속 그 끝까지 추궁했다. 그러자 좀도 흥미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비산업이 매점하고 있던 지역은 삿포로 시가 재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토지였던 것이다. 지하철 건설이며, 청사 이전이며, 그러한 공공 투자가 그 지역에 시행되기로 돼 있었다. 그 자금의 대부분은 국가에서 나오게 돼 있었다. 정부와 홋카이도와 삿포로 시가 타협해서 재개발 계획을 짜고 최종 결정에 이르렀다. 장소며 규모며 예산, 등등.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 결정한 지역의 토지는 요 몇 년간에 누군가의 손에 단단히 매점되어 있었다. 정보가 에이 그룹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계획이 최종적으로 결정되기 이전부터 토지의 매점이 지하 깊숙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즉 그 최종적인 결정은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결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 매점의 첨병이 돌핀 호텔이었다. 우선 돌핀 호텔이 일등지를 확보했다. 그 거대 호텔이 에이 그룹의 헤드쿼터의 역할을 맡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지역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끌고, 사람의 흐름을 바꾸고, 그 지역의 변모의 상징이 되었다. 모든 것은 면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가장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가 가장 유효한 정보를 입수하며, 가장 유효한 이익을 얻게끔 된다. 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본 투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내포한 행위인 것이다. 자본 투자를 하는 자는 그 투자액에 상응한 유효성을 요구하게 된다. 중고차를 사는 사람이 타이어를 발로 걷어차고 엔진을 살펴보고 하듯이, 1천억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는 그 투자의 유효성을 세세히 검토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조작도 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선 공정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투자 자본의 액수가 너무 큰 것이다. 강압적인 일도 한다. 가령, 토지 매수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디서인지 해결사 같은 자들이 나선다. 거대 기업이라는 건 제법 그런 루트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회사는 정치가로부터, 소설가, 록 싱어, 폭력배에 이르기까지 입김이 들어간 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일본도를 휴대한 해결사 패거리가 들이닥친다. 경찰도 그러한 사건에는 그렇게 열심히 손을 쓰려 하지 않는다. 경찰의 제1위까지 이야기는 이미 통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패랄 것도 아니다. 시스템인 것이다. 그것이 자본 투자란 것이다. 물론 예전부터 많건 적건 그런 일은 있었다. 예전과 다른 점은, 그 자본의 그물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치밀해지고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거대 컴퓨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과 사상이 그 그물 속에 고스란히 수용되어 있다. 집약과 세분화에 의해 자본이라는 것은 일종의 개념으로까지 승화되어 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행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본이 갖는 다이내미즘을 숭상했다. 그 신화성을 숭상한다. 도쿄의 땅값을 숭상했으며, 번쩍거리는 포르쉐가 상징하는 것을 숭상했다. 그것 이외에는 이 세계에는 이미 신화 따위가 남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건 안 들건 간에, 우리들은 그러한 사회에 살고 있었다. 선악이라는 기준도 세분화되었다. 궤변론적인 것이다. 선 가운데에도 유행을 좇는 악과 유행을 좇지 않는 악이 있었다. 유행을 좇는 선 가운데에도 정연한 것과, 헐렁한 것이 있고, 최신 유행에 정통한 것과, 속물 근성인 것이 있었다. 짝짓기도 즐길 수 있었다. 미소니의 스웨터에 투르살리의 팬티를 걸치고, 폴리니의 구두를 신는 것처럼 복잡한 스타일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한 세계에서 철학은 자꾸 자꾸 경영이론을 닮아갔다. 철학은 시대의 다이내미즘에 근접하는 것이다. 당시엔 그렇게 생각지 않았지만, 1969년의 세계는 아직 단순했다. 기동대원에게 돌을 던진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은 자기 의사 표명을 다할 수가 있었다. 그런 대로 좋은 시절이었다. 궤변론적인 철학 밑에서 도대체 누가 경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자진해서 최루가스를 뒤집어쓴단 말인가? 그것이 현재인 것이다. 구석구석에 그물이 쳐져 있다. 그물 바깥에는 또 다른 그물이 있다.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돌을 던지면 그것은 되돌아 자기에게로 온다. 정말 그런 것이다.
기자는 전력을 기울여서 그 의혹을 추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 아무리 목청을 높였다 해도, 아니 목청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 기사는 미묘하게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호소하는 힘을 갖지 못했다. 그로선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의혹일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고도 자본주의의 당연한 과정인 것이다. 그런 것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런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대 자본주의가 부정하게 정보를 입수하여 토지를 매점하고, 또는 정치적 결정을 강요하고, 그 말단에서 폭력배가 작은 신발 가게 주인을 협박하거나, 인기 없는 작은 호텔의 경영자를 구타했다 해서, 누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것인가? 그런 것이다. 시대는 물에 쓸려가는 모래처럼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는, 우리들이 서 있었던 장소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훌륭한 기사였다고 생각한다. 잘 조사되어 있었고 정의감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추세는 아니었다.
나는 그 기사의 카피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커피 한 잔을 더 마셨다. 나는 이루카 호텔의 지배인 생각을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실패의 그림자로 뒤덮인 그 불행한 사나이에 대해서. 그에게는 이 시대를 타고 넘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추세가 아니다> 하고 나는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웨이트리스가 지나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8
방에서 예전의 공동 경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수화기에 나와서 내 이름을 묻고는 다시 다른 사람이 나와서 내 이름을 묻고, 그러고 나서야 겨우 그가 나왔다. 바쁜 것 같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그를 의식적으로 회피했던 건 아니다. 다만 단순히 이야기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해 줄곧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나에게 있어선 그리고 나는 그에게 있어선 <이미 통과해버린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내가 그를 거기에 밀어 넣은 건 아니다. 그가 스스로 거기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그 두 갈래 길은 웬만해선 교차하지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건강한가, 하고 그가 물었다. 건강해,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삿포로에 와 있다고 하자 춥지 않느냐고 그는 물었다. 춥다고 나는 대답했다. 하는 일은 어떠냐고 나는 물었다. 너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나는 말했다. 요즘은 별로 마시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쪽은 지금 눈이 내리고 있는가 하고 그는 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한바탕 그런 예의 바른 주고받기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좀 부탁할게 있어" 하고 나는 말을 꺼냈다.
나는 훨씬 이전에 그에게 한 가지 빌려준 게 있었다. 그도 그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고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렇게 늘 남에게 부탁 같은 것을 하는 인간은 아닌 것이다.
"좋아" 하고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예전에 함께 업계 기관지에 관계된 일을 한 적이 있었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한 5년 전 일인데 말이야, 기억하나?"
"기억하고 있어."
"그 관계의 라인은 아직 살아 있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별로 활발하다곤 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건 살아 있어.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거기에 한 사람, 왜 업계의 이면에 굉장히 소상한 기자가 있었잖은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마르고, 항상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 그와 연결될 수 있을까?"
"아마 할 수 있겠지. 그래 무엇을 알고 싶나?“
나는 그에게 돌핀 호텔의 스캔들 기사에 관해 대충 이야기했다. 그는 주간지 이름과 발매 날짜를 메모했다. 그리곤 대 돌핀 호텔이 생기기 전에 거기에 있었던 소 돌핀 호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고 했다. 우선, 왜 새로운 호텔이 <돌핀 호텔>이라는 이름을 인계했는가? 그리고 소 돌핀 호텔의 경영자는 어떠한 운명을 더듬었는가? 스캔들은 그 후 어떠한 진전을 보였는가? 그는 그것들을 전부 메모하고는 전화통 앞에게 읽어 내렸다.
"이거면 되나?"
"그거면 돼" 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급할 테지?" 하고 그가 물었다.
"미안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연락을 취하도록 해보겠어. 그쪽 전화번호를 알려 주게."
나는 호텔의 전화번호와 룸 넘버를 알려 줬다.
"그럼, 뒤에"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호텔의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했다. 로비에 내려와 보니, 카운터에 예의 그 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로비의 구석쪽 의자에 앉아서 얼마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쁜 듯이 일하고 있었고, 나의 존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알아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모습을 잠깐 보고 싶었을 뿐인 것이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저 아이와 함께 자려고 생각했으면 잘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용기를 갖게 할 필요가 있었다. 10분가량 그녀를 바라보고 엘리베이터로 15층까지 올라가 방에서 책을 읽었다. 오늘도 하늘은 잔뜩 흐려 어둠침침해 있었다. 아주 조금만 햇빛이 비치는 종이상자 속에서 지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 전화가 걸려올지도 몰라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고, 방안에 있으면 책을 읽는 정도밖엔 할 일도 없었다. 잭 런던의 전기를 마지막까지 읽어버리고는 스페인 전쟁에 관한 책을 읽었다. 길게 길게 늘어진 저녁녘 같은 하루였다. 늦추고 당기고 하는 게 없다. 창밖의 잿빛에 조금씩 검정이 섞여들더니 이윽고 밤이 되었다. 음울함의 질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었다. 세계에는 두 가지 색깔밖엔 색깔이 존재하지 않았다. 회색과 흑색. 그것이 일정 시간을 두고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룸서비스에게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샌드위치를 한 개씩 천천히 먹고,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셨다. 맥주도 역시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할 일이 없으면 여러 가지 일을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하게끔 된다.
일곱 시간 만에 공동 경영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연락이 됐어." 하고 그는 말했다.
"힘들었지?"
"그럭저럭" 하고 그는 좀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아마도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대충 간단하게 알려 주지. 우선 첫째로, 이 문제는 이젠 완전히 뚜껑이 닫혀 버린 상태야. 뚜껑이 닫히고 끈으로 묶여 금고 속에 들어가 있지. 아무도 이젠 다시 파헤치려 하지 않아. 끝난거야. 스캔들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 거야. 정부 부서든가 시청에서 2,3명 드러나지 않는 인사이동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대수로운 건 없어. 아주 작은 조정 같은 거지. 그 이상은 아무도 접촉할 수가 없어. 검찰청도 약간은 움직였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잡지 못했어. 여러 가지로 까다로운 줄이 얽혀 있어. 다루기 어려운 거야. 그래서 알아내기가 어지간히 힘들었어."
"이건 개인적인 일이고 누구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겠어."
"상대에게도 그렇게 말해 뒀어."
나는 수화기를 든 채 냉장고까지 가서 맥주를 꺼내. 한 손으로 마개를 열고 한 손으로 컵에 맥주를 따랐다.
"하지만 집요한 것 같은데, 섣불리 손을 내밀었다간 다친다구" 하고 그는 말했다.
"이건 굉장히 큰 사건이야. 어째서 자네가 이런 일에 물렸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게 좋겠어. 사정은 있겠지만 좀 더 조용하게 신분에 걸맞은 인생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나처럼 이라고 까진 말하지 않겠지만."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기침을 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전의 돌핀 호텔은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을 당했지. 깨끗하게 물러섰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않았어. 대세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야."
"그런 타입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흐름을 깨닫지 못한 거야."
"여러 가지 몹쓸 일을 당했지. 예컨대 폭력배가 몇 명인가 호텔에 줄곧 묵어대면서 하고 싶은 짓은 다 했어. 법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이를테면 겁을 주는 친구가 로비에 늘 앉아 있다가 누가 들어오면 노려보는 거야. 알겠지, 그런 거? 하지만 호텔 측은 웬만해선 까딱도 하지 않았지."
"알 만하군" 하고 나는 말했다.
이루카 호텔의 지배인은 온갖 인생의 불행에 길들여져 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최후에 가서 돌핀 호텔은 기묘한 조건을 내놓았어. 그리고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물러서겠다고 말했지. 상상해 보라구, 어떤 조건인지?"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 보라니까. 조금쯤은" 하고 그는 말했다.
"그건 자네의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되는 것이니까."
"돌핀 호텔이라는 이름을 인계한다는 조건?"
"나쁜 이름은 아니니까. 안 그래? 돌핀 호텔 나쁜 이름은 아냐."
"글쎄 그렇군." 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에이 그룹은 새로운 호텔 체인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야, 때마침. 이제까지의 중상급의 체인이 아닌 최고급의 체인을 말이야, 그리고 그 이름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지."
"돌핀 호텔체인"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그렇지. 힐튼이라든가, 하아야트라든가에 필적하는 고급의 체인이야."
"돌핀 호텔 체인"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인계되고, 확대된 꿈.
"그래서 예전의 돌핀 호텔의 경영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건 아무도 모르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시고, 볼펜으로 귓불을 긁었다.
"나갈 때에 아무튼 상당한 돈을 얻었으니까 그걸로 무엇인가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알아볼 길이 없어. 통행인 같은 구실만 하는 인물이니까."
"으음, 그렇겠지" 하고 나는 수긍했다.
"대략 그런 정도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만을 알았어. 그 이상은 알 수 없었어. 됐는가?"
"고마워. 큰 도움이 됐어" 하고 나는 감사를 표했다.
"응" 하고 그는 다시 기침을 했다.
"돈을 썼나?"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아니" 하고 그는 말했다.
"한번 밥을 먹이고, 긴자의 클럽에나 데리고 가서, 소개비를 주는 정도면 되겠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전부 경비로 빠지니까. 무엇이건 경비에서 빠지거든. 회계사도 좀 더 경비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야. 그러니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만일 긴자의 클럽에 가고 싶다면 이번에 한번 데리고 가지. 경비로 빠지니까. 어차피 가본 적이 없을 테지?"
"술이 있고, 여자가 있지" 하고 그는 말했다.
"저번에 갔어." 하고 그는 신통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난 다음에, 나는 공동 경영자에 대해 좀 생각해 보았다. 나와 같은 나이로 이미 배가 나오기 시작한 사내. 책상에 몇 종류나 약을 넣어두고, 선거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내. 아이들의 학교에 대해 골치를 앓으며, 노상 부부 싸움을 하며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는 가정을 사랑하고 있는 사내. 심약한 데가 있고, 때때로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어김없이 착실한 일을 하는 사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건실한 사내. 우리는 대학을 나와서부터 콤비가 되어 오랫동안 잘 해왔다. 작은 번역 사무실로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일의 규모를 확장해 갔다. 우리는 애초부터 그다지 친근한 친구랄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마음이 맞는 데가 있었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말다툼 한번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나는 또한 말다툼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소의 차이야 있었지만 서로 존경하면서 함께 일을 계속해 왔었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가장 좋은 시기에 헤어졌던 것이다. 내가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나서도 그는 나 없이도 제법 잘 하고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없어진 뒤로 오히려 잘 하고 있었다. 일의 업적도 순조롭게 신장되고 있었다. 회사도 커졌다. 새로이 사람을 써서 그들을 잘 부리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혼자가 되면서부터 오히려 안정돼 있었다. 아마도 내 쪽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 속의 무엇인가가 그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건전치는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없어지고 나서부터 오히려 훨씬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치켜세우고 달래고 하면서 사람을 제법 잘 부렸고, 경리 보는 여자아이에게 쓰잘 데 없는 농담도 하고, 하잘 것 없다 싶으면서도 한껏 경비를 쓰고, 누군가를 긴자의 클럽으로 데리고 가서 접대도 한다. 가령 나와 함께 있었다면, 그는 긴장해서 그런 일을 순순히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늘 내 눈을 의식하고 이런 걸 하면 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내인 것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가 내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지만. 그 친구는 혼자가 되어서 오히려 잘 된 것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요컨대 그는 내가 없어짐으로써, 그 연륜에 상응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륜상응"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연륜상응" 하고 입 밖에 내어 말해 보았다.
입 밖에 내고 보니, 그건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홉시에 다시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가 걸려올 만한 데는 전혀 없었고, 당초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음향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였다. 나는 네 번째 벨소리에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선생님, 오늘 로비에서 저를 말끄러미 보고 있었죠?" 하고 프런트의 여자아이가 말했다. 목소리로 보아 별로 화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가워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였다.
"보고 있었지" 하고 나는 수긍했다.
"일할 때에 그런 식으로 보고 있으면 긴장해요, 전, 굉장히. 덕분에 잔뜩 실수했어요. 선생님이 보고 있는 동안에."
"이젠 안 보지"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아가씨를 보고 있었어. 그렇게까지 아가씨가 긴장할 줄은 몰랐어. 이제부턴 조심해서 보지 않도록 하겠어. 지금 어디에 있지?"
"집이에요. 이제부터 목욕을 하고 잠을 잘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숙박을 연기했나 보죠?"
"응. 볼일이 좀 연장돼서"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보거나 하지 말아요. 그런 일 당하면 곤란해요."
"이젠 보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 나 좀 너무 긴장해 있는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글쎄, 모르겠는데. 그런 건 개인차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누구나 타인이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많건 적건 긴장하는 게 아닐까. 특별히 신경 쓸 건 없어. 그리고 난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무엇을 너무 물끄러미 응시하는 경향이 있어. 여러 가지를 물끄러미 보는 거야."
"어째서 그런 경향이 있죠?"
"경향이라는 건 설명하기가 어렵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서 안 보도록 하겠어. 하는 일을 실수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녀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잘 자요" 하고 나는 말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목욕을 하고 열한 시 반까지 소파에서 책을 읽었다. 그 뒤 옷을 입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긴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았다. 현관의 제일 끝 깊숙한 곳에 종업원용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종업원용 엘리베이터는 대개 일반객의 눈에는 띄지 않게끔 되어 있었지만 감추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비상계단이라는 화살표 쪽으로 걸어갔더니 객실 번호가 없는 문이 몇몇 줄서 있고, 그 한 모퉁이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숙박객이 잘못해서 타지 않도록 <화물 전용>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얼마동안 그 앞에서 상황을 엿보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는 내내 아래층에 머물러 있는 채였다. 이 시각에는 이미 이용자가 거의 없는 것이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직이 흐르고 있었다. 폴 모리아의 <사랑은 물빛>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보았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문득 잠이 깬 듯 그 고개를 치켜들고 위로 올라왔다. 층 표시의 디지털 숫자가 1, 2, 3, 4, 5, 6, 그렇게 상승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것은 접근해 왔다. 나는 <사랑은 물빛>을 들으면서 그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 누군가 있으면 숙박객용 엘리베이터와 오인했다고 하면 된다. 호텔 숙박객이란 어차피 노상 오인만 하기가 일쑤이니까. 11, 12, 13, 14, 그렇게 그것은 상승했다.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15라는 데서 숫자의 상승은 머물렀다. 그리고 일순의 틈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문이 쓰윽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굉장히 조용한 엘리베이터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저 천식환자 같은 예전의 이루카 호텔의 엘리베이터와는 너무도 다르다. 나는 안에 들어서서 16버튼을 눌렀다. 문이 소리도 없이 닫히고 희미한 이동의 감각이 있고, 다시 문이 열렸다.
16층이었다. 하지만 16층은 그녀가 말하던 것 같은 암흑은 아니었다. 제법 불빛이 켜있고 천장에서는 여전히 <사랑은 물빛>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시험삼아 16층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았다. 16층은 15층과 꼭 같은 구조였다. 복도는 꼬불꼬불 구부러졌고, 어디까지나 객실이 계속되고, 그 사이에 자동판매기를 모아놓은 공간이 있고, 몇 대인가 숙박객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문 앞에 룸서비스한 저녁 식사의 접시가 몇몇 내놓인 채로였다. 카펫은 짙은 적색이고, 부드럽고 양질이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음악이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의 <여름날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나는 끝까지 걸어가선 중간까지 되돌아와 숙박객용 엘리베이터로 15층에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해 보았다. 종업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6층에 올라가 여전히 불빛 환한 지극히 당연한 플로어를 앞에 했다. <여름날의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단념하고 다시 15층으로 내려와 브랜디를 두 모금 마시고 잠을 청했다.
날이 밝자 검정빛이 잿빛으로 변화해 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무얼 하면 좋을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눈 속을 던킨 도너츠까지 걸어가서 도너츠를 먹고, 커피 두 잔을 마시고, 신문을 읽었다. 신문에는 선거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영화관에는 여전히 보고 싶은 영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꼭 한편, 나의 중학교 때의 동급생이 배우가 되어 조역으로 출연한 영화가 있었다.
<짝사랑>이란 타이틀의 청춘 영화로, 한창 인기 상승의 가수가 공연하는 청춘물이었다. 나의 예전의 동급생이 어떤 역을 맡아 할 것인지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예상할 수가 있었다. 근사하게 생기고 젊고 이해심이 많은 선생역을 하는 것이다. 늘씬하게 키도 크고, 스포츠도 만능이고, 여학생들은 이름을 불리우기만 해도 실신 하리만큼 그를 동경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역의 여자아이 역시 그를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 일요일에 쿠키를 만들어 선생의 아파트로 갖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극히 보통의, 좀 마음이 약한 남자아이... 아마 그런 줄거리일 게다. 생각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배우가 되고서 얼마동안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몇 편인가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그러다가 전혀 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어느 영화나 영화로서 전혀 재마가 없었고, 그는 언제나 도장을 찍은 것처럼 똑같은 역할밖엔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사하게 생기고, 스포츠에 만능이고, 청결하고, 다리가 긴 역할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대학생 역이 많았고, 그 다음에 선생이라든지 의사라든지 젊은 엘리트 샐러리맨이라든지 하는 역이 많아졌다. 하지만 맡는 역은 언제나 똑같았다. 여자아이들이 그를 동경해서 소동을 부리는 역인 것이다. 이가 깨끗해서, 방긋 웃으면 내가 보아도 인상이 깊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뭐 펠리니라든지 탈코프스키 같은 것밖엔 보지 않는다는 그런 진지하고 속물근성 있는 영화팬은 아니지만, 그가 나오는 영화는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줄거리는 뻔 한데다가 대화도 진부하고 돈도 들이지 않아서, 감독도 포기하고 만 것 같은 작업을 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배우가 되기 전부터 참으로 그러한 타입의 사내였다. 인상은 좋다. 그러나 실체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5년간 그와 같은 학급이었다. 실험실에서는 같은 테이블을 사용했었다. 그래서 가끔씩 이야기도 했다. 예전부터 꼭 영화 그대로 묘하게 인상이 좋은 사내였다. 여자아이에게 이야기를 걸면, 다들 황홀해하는 눈매를 했다. 과학실험 때에도, 여자아이들은 다들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그에게 물었다. 그가 제법 우아한 손놀림으로 가스버너에 불을 켜면, 다들 올림픽의 개회식이라도 보는 눈매로 그를 보고 있곤 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건 누구 한 사람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성적도 좋았다. 언제나 반에서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건방진 구석이 전혀 없었다. 어떤 옷을 입건 청결하고 깔끔해서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을 때조차 품위 있었다. 소변을 보고 있는 모양새가 기품있어 보이는 사내란 좀처럼 없다. 물론 스포츠도 만능이었고, 학급 위원으로서도 유능했다. 학급에서 제일 인기가 있는 여자아이와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도 그에게 열중했고, 부모들의 참관일이 있으면 어머니들이 다들 그에게 열중했다. 그런 타입의 사내였다. 하지만 나는 도통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영화와 꼭 같았다. 그런 영화를 이제 새삼스레 돈을 들여 보러 갈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신문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눈 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로비를 지날 때에 프런트 쪽을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휴식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비디오게임이 있는 코너에 가서 팩맨과 갤럭시를 몇 게임씩 했다. 잘 돼 있긴 하나 신경질적인 게임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호전적이다. 하지만 소일거리는 된다. 그러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쓰잘 데 없는 하루였다. 책읽기가 싫증나자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하루 종일 계속 내렸다. 아니 이토록 눈이 잘도 내려 쌓이는 구나, 하고 감탄할 만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두 시가 되자 호텔의 카페테리아로 가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방에 돌아와 책을 읽고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혀 쓰잘 데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침대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네 시에 노크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그녀가 서 있지 않는가. 안경을 쓰고 라이트 블루의 블레이저코트를 걸친 프런트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납작한 그림자나 되는 것처럼 쓰윽 방안에 들어서더니 잽싸게 문을 닫았다. <이런 걸 들키면, 나 모가지예요. 이 호텔은 그런 일에 굉장히 엄격하거든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한번 주욱 방안을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더니 스커트의 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그리곤 한번 숨을 쉬었다.
"휴식 시간이에요, 지금"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뭐 좀 마시겠어? 난 맥주를 마시겠어."
"괜찮아요. 별로 시간이 없어요. 저, 선생님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무얼 해요? 특별히 하는 게 없어. 시간만 보내고 있지. 책도 읽고 눈도 보고 하면서" 하고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컵에 따르면서 말했다.
"무슨 책?"
"스페인 전쟁에 관한 책. 시작에서부터 끝나기까지 소상히 써있어. 여러 가지 시사하는 게 많아."
스페인 전쟁이라는 건 정말 여러 가지 시사를 많이 담고 있는 전쟁인 것이다. 옛날엔 제법 그러한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보세요,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상하게?" 하고 나는 되물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다니, 말하자면 아가씨가 여기 왔다는 데 대해서?"
"네."
나는 컵을 들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상하게는 생각지 않아. 좀 놀라긴 했지만, 와 줘서 기뻐. 따분하기도 했고, 이야기 상대도 필요했거든.“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서더니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소리도 없이 쓰윽 벗고는, 주름이 집히지 않게끔 라이팅 데스크의 의자 등에다가 걸었다. 그리곤 걸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상의를 벗고 나니, 그녀는 어딘지 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여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하얀 블라우스는 말끔하게 다림질해 있었다. 한 5분 정도를 그녀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은 채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이 거리의 음향을 빨아들이면서 언제까지나 내리고 있었다. 음향이라는 게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쳐 있어서 어디선가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나는 받침대 같은 것이다. 나는 그녀가 지쳐 있다는 데에 대해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처럼 젊고 예쁜 여자아이가 그렇게 지친다는 건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합리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았다. 피로라는 것은 미추나 연령과는 관계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나 지진이나 벼락이나 홍수처럼.
5분이 지나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내 곁에서 떨어지더니 윗도리를 집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윗도리를 걸치자 그녀는 다시 좀 긴장해서 서먹서먹해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그 16층에서 이상한 일을 당했을 때의 그것 말인데" 하고 나는 물었다.
"그때 무슨 보통 때와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나?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이나 타고나서?"
그녀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듯했다.
"글쎄요. 어쨌던가? 별로 다른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아요."
"뭐 여느 때와는 다른 이상한 조짐 같은 건 없었어?"
"보통이었어요." 하고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상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주 보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어 문이 열리자 캄캄절벽이었어요. 그것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오늘 어디서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안 됐지만, 오늘은 좀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은 어때?"
"내일은 수영 학교에 가요."
"수영 학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고대 이집트에도 수영 학교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 거 몰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거짓말이죠?"
"정말이야. 내가 하는 일 관계로 한 번 자료를 조사해본 적이 있거든"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라고 해서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고마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쓰윽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그날의 유일한 쓸 만한 일이었다. 하찮은 일이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사람들조차 나날의 하찮은 사건에서 기쁨을 찾아내면서 하찮은 인생을 보내고, 그리곤 죽어가지 않았던가. 수영을 배우기도 하고, 미라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쌓여 온 것을 사람들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9
열한 시가 되자 마침내 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할 수 있는 일은 어떻든 전부 했다. 손톱도 깎았고, 목욕도 했고, 귀 소제도 했고, 텔레비전의 뉴스도 보았다. 엎드려 팔 굽혀 펴기도 했다. 저녁 식사도 했다. 책도 마지막까지 다 읽어버렸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종업원용 엘리베이터를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일렀다. 종업원들의 왕래가 끊기는 열두 시가 지나기까지 가다리는 게 좋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결국 26층을 바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창밖의 막막한 어둠을 보면서 마티니를 마시고, 이집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지내고 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이 수영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까? 아마 파라오 일족이라든지 귀족이라든지, 그러한 상류층의 사람들일 게다.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제트 세트 이집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나일강의 일부를 어떻게 해서 전용 풀 같은 것을 만들고, 거기서 세련되고 멋스러운 수영을 가르쳤을 것이다. 영화배우가 된 내 친구와 같은 인상이 좋은 교사가 붙어 있어서, 높은 사람들에게 "예, 전하. 훌륭하옵니다. 다만 크롤의 오른손을 조금만 더 곧바로 내미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옵니다." 그런 소리를 제법 그럴싸한 얼굴로 말하곤 했을 게다. 나는 그러한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잉크처럼 짙은 블루의 나일 강물, 쨍쨍 내리쬐는 태양, 악어나 평민들을 몰아내기 위한 창칼을 든 병정, 서걱거리는 갈대, 파라오의 왕자들. 그리고 왕녀는 어떨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도 수영을 배웠을까? 예컨대 클레오파트라. 조디 포스터 같은 느낌의 젊은 날의 클레오파트라. 그녀도 내 친구 수영 교사를 보고 실신했을까? 아마 했겠지.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이니까. 그런 영화를 만들면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보러 가도 좋다. 수영 교사는 비천한 태생의 인간은 아니다. 이스라엘 아니면 앗시리아 언저리의 왕족의 아들인데, 전쟁에 패배해 이집트로 끌려와 노예가 된다. 하지만 노예가 되어서도 인사의 좋음을 추호도 잃지 않는다. 그런 데다 찰튼 헤스톤인지 커크 더글러스인지와는 다르다. 흰 이를 보이고 방긋 웃으며, 우아하게 소변을 본다. 우클렐라를 들게라도 하면 나일 강 기슭에 서서 <로카프라 베이비> 라도 노래하기 시작할 것만 같다. 이런 역은 그 아니고선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파라오 일행이 그의 앞을 지나게 된다. 그는 강기슭에서 갈대를 베어 모으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강물에서 배가 뒤집힌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텀벙 강물에 뛰어들어, 멋진 크롤솜씨로 거기까지 헤엄쳐 가서, 작은 여자를 껴안고 악어와 경쟁하면서 기슭까지 돌아온다. 굉장히 우아하게. 과학 실험 반에서 가스버너를 켤 때처럼 굉장히 우아하게. 그것을 파라오가 보고 있다가 감탄을 하고 그렇지, 저 청년을 왕자들의 수영 교사로 하자고 마음먹는다. 먼저 번의 교사는 말버릇이 고약해서 바로 1주일 전에 밑창 없는 우물에 던져 넣은 것이다. 그런 연휴로, 그는 왕립 수영 학교의 선생이 된다. 어쨌든 인상이 좋아서 다들 그에게 열중하게 된다. 밤이 되면 여관들이 몸에 갖가지 향료를 칠해대고는 그의 침대로 기어든다. 왕자들과 왕녀들도 그에게 심복한다. 여기서 수영복의 여왕과 임금님과 나를 범벅해 놓은 것 같은 볼 만한 신이 끼인다. 그와 왕자, 왕녀들이 모두들 싱크로나이즈드 같은 짓을 해서 파라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것이다. 파라오는 몹시도 즐거워하고, 그래서 또 그의 주가가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코에 걸거나 하지 않는다. 겸허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방긋이 미소를 품고, 품위있게 소변을 본다. 여관이 침대로 들어오면 전희에 한 시간을 들여 제대로 절정에 도달하게 해주고, 끝나고 나서는 머리칼을 만지면서 "최고였어." 하고 말한다. 친절한 것이다. 이집트의 여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리하게 이미지를 환기하려 하자 아무래도 20세기 폭스사의 <클레오파트라>가 떠오르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과 렉스 하리슨이 나왔던 형편없는 영화. 기다란 자루가 달린 부채로 팔락팔락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부채질하고 있던, 헐리우드적으로 이국적인 다리가 길고 피부가 검은 여자들, 갖가지 대담한 포즈를 취해, 그를 즐겁게 해준다. 이집트 여자들은 그런 일에 익숙한 것이다. 때문에, 조디 포스터적인 클레오파트라가 그에게 실신할 만큼 열중하게 된다. 진부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선 영화가 되지 않는다. 그로서도 조디 클레오파트라에게 열중하게 된다. 하지만 조디 클레오파트라에게 열중하는 건 그만이 아니다. 새까만 아비시니아 왕자도 그녀에게 애태우고 있다. 그녀만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춤추고 싶을 만큼 그녀가 좋은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마이클 잭슨이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는 사랑 때문에 아비시니아로부터 아득한 사막을 넘어서 이집트까지 찾아온 것이다. 카라반의 모닥불 앞에서 탬버린이나 그 비슷한 걸 가지고 <빌리진>을 부르며 춤을 춘다. 별빛을 받아 눈이 번쩍 빛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수영 교사와 마이클 잭슨 사이에 갈등이 있다. 사랑의 칼싸움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소리도 없이 슬슬. 나는 안에 들어가 15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다시 이야기를 계속 연결해 보았다.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치려 해도 그쳐지지 않는 것이다. 무대는 일변해서 황폐할 대로 황폐한 사막이다. 사막 깊숙이 있는 동굴에서는 파라오에게 추방당한 예언자가 아무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숨죽은 듯이 고독하게 살고 있다. 그는 눈꺼풀이 벗겨졌지만 어떻게든 사막을 횡단해서 기적적으로 연명한 것이다. 양가죽을 쓰고 강렬한 일광을 패해, 그는 암흑 속에서 살고 있다. 벌레를 먹고 풀을 씹으면서. 그리고 심령의 눈을 얻어 미래를 예언한다. 오고야말 파라오의 몰락을, 이집트의 황혼을, 그리고 세계의 전환을. 양사나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돌연 양사나이가 나오는 건가? 문이 또 슬슬 소리도 없이 열렸다. 나는 멍청하니 생각에 골몰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양사나이.
그는 이집트 시대로부터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건 모두 내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의미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포켓에 손을 쑤셔 넣은 채 어둠 속에 서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암흑? 정신을 차리니 주위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조그마한 빛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혀버리자 주위에는 칠흑의 어둠이 내렸다. 내 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젠 음악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랑은 물빛>도 <여름날의 사랑>도 들려오지 않았다. 공기는 냉랭하고, 곰팡내가 났다. 나는 그런 어둠 속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10
그것은 두려울 정도의 완벽한 어둠이었다. 어느 하나도 형태있는 것을 식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몸마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기미마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흑색의 허무뿐이다. 그런 진정한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순전히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되게 된다. 육체가 어둠 속으로 용해하고, 실체를 갖지 않는 나라는 관념이 마치 심령파처럼 공중에 떠올라 온다. 나는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나, 새롭게 가야 할 장소가 주어지지는 않고 있다. 나는 그 허무의 우주를 방황하고 있다. 악몽과 현실의 기묘한 경계선을. 나는 얼마 동안 거기에 꼼짝 않고 우뚝 서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손발은 마비된 것처럼 본래의 감각을 잃고 있었다. 마치 깊은 바다의 밑바닥에 침몰된 것만 같았다. 농밀한 어둠이 나에게 기묘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침묵이 나의 고막을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어둠에 눈을 익숙케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눈이 익숙해진다는 그런 어중간한 어둠이 아닌 것이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흑색 물감을 몇 겹이고 몇 겹이고 덧칠한 것 같은 깊고 빈틈없는 어둠이었다.
나는 포켓을 무의식적으로 더듬어 보았다. 오른쪽 포켓 속에는 지갑과 키홀더가 들어 있었다. 왼쪽에는 방의 카드 키와 손수건과 얼마간의 잔돈. 하지만 그런 건 어둠 속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다. 나는 담배를 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담배를 끊지 않았던들 거기엔 라이터나 성냥이나 그런 게 있었을 게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걸 뉘우친들 별 수 없다. 나는 포켓에서 손을 빼어, 벽이 있을 법한 쪽으로 뻗어 보았다. 어둠의 깊숙이에 나는 딱딱한 세로의 평면을 느꼈다. 벽이 거기에 있었다. 벽은 미끈하고 냉랭했다. 돌핀 호텔의 벽치고는 너무나 냉랭하다. 돌핀 호텔의 벽은 이렇게 차지 않다. 히터가 언제나 혼화할 정도로 공기를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하고 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진정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선 첫째로, 이건 그 여자아이가 조우한 것과 꼭 같은 사태인 것이다. 나는 그걸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겁먹을 건 없는 것이다. 그녀만 해도 혼자서 조용히 이 상황을 돌파한 것이다. 물론 나로서도 할 수 있다. 안 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해야 한다. 그녀가 한 것과 꼭 같게만 행동하면 좋은 것이다. 이 호텔엔 뭔가 기묘한 것이 숨겨져 있으며, 그건 아마도 나 자신과도 관련되는 것 일게다. 이 호텔은 틀림없이 어딘가에 저 이루카 호텔과 연관되어 있는 점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온 게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그녀와 같게 행동하고, 그리고 그녀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두려운가? 두렵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두려운 것이다. 알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싫은 기분이다. 깊은 암흑은 폭력의 입자를 나의 주위에 떠돌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바다뱀처럼 소리도 없이 슬슬 다가오는 걸 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구제할 수 없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온 몸의 모공이 모조리 막바로 어둠에 노출되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다. 목구멍이 칼칼해진다. 침을 삼키기에도 굉장히 힘들어진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돌핀 호텔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여기는 어딘지 다른 장소인 것이다. 나는 무엇인지를 딛고 넘어서, 이 기묘한 장소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커다랗게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다. 바보스런 일이지만, 폴 모리아 그랜드 오케스트라의 <사랑은 물빛>이 듣고 싶었다. 지금 그 음악이 들려온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얼마나 힘이 날 것인가. 리처드 크라이더만이라도 좋다. 지금이라면 참을 수 있다.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라도, 패트리지 패밀리라도, 무엇이라도 좋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음악이 듣고 싶었다. 너무너무 조용한 것이다. 이제 그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걸 너무나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다. 머릿속의 공백을 무엇인가로 채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공포 탓이다. 공백 속으로 공포가 파고들어오는 것이다. 모닥불 앞에서 탬버린을 두드리며 <빌리진>을 춤추는 마이클 잭슨. 낙타들조차 황홀한 듯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머리가 좀 혼란해 있다. 나의 사고가 어둠 속에서 가벼이 메아리친다. 사고가 메아리치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에서 무의미한 이미지를 추방한다. 언제까지나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없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는가? 나는 각오를 하고 어둠 속을 더듬으며 천천히 오른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육과 신경이 잘 연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셈이지만, 실제로는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암흑의 물 같은 어둠이 나를 푹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그 어둠은 계속되고 있다. 지구의 중심점까지. 나는 지구의 중심점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면, 이젠 두 번 다시는 지상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다. 무슨 다른 것을 생각해보자,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무엇이나 생각하지 않고선 공포가 점점 몸을 지배해 간다.
영화의 계속을 생각해 보자. 어디까지 이야기가 진행됐었지? 양사나이가 나오는 데까지. 하지만 사막의 장면은 현재로선 그걸로 끝. 화면은 다시 파라오의 궁전으로 되돌아간다. 휘황찬란한 궁전. 아프리카 전체의 부가 거기에 모아져 있다. 누비아 인 노예가 온통 그 언저리에 대령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파라오가 있다. <미크로스 로자> 비슷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파라오는 분명 초조해 있다. 이집트에서 무엇인가 썩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것도 이 궁전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일아 진행되고 있다. 아는 그것을 확실히 느낀다.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레 발을 앞으로 내민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여자아이는 잘도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군, 하고. 나는 참으로 감탄하고 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돌연 내던져져, 그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혼자서 확인하러 가다니. 나조차 이러한 이공간적인 어둠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미리 들은 나조차 이토록 겁을 먹고 있는 데도. 가령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어둠 속에 혼자서 내던져져 있다면, 나는 앞으로 나가려는 생각도 미처 못했을 게다. 필시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옴짝 못하고 서서 가만히 있었을 게다. 나는 그녀 생각을 했다. 그녀가 수영 경기용의 미끌거리는 옷을 걸치고, 수영 학교에서 수영을 배우고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리고 거기에도 영화배우를 하고 있는 나의 예전의 동급생이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실신할 만큼 동경하고 있다. 그가 크롤의 오른손 내미는 법에 대해 주의를 주자, 그녀는 황홀해하는 눈빛으로 내 친구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밤이 되자 그의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나는 슬펐다. 상심하기까지 했다. 그런 짓하면 안 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어. 그는 인상이 좋고 형식적으로 친절을 베풀 뿐이야. 그는 네게 상냥한 말을 걸고 너를 절정에 도달하게 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저 친절 그것일 뿐이야. 그건 다만 단순한 전희의 문제일 뿐이지.
복도가 오른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녀가 말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그녀는 그 나의 동급생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옷을 부드럽게 벗기고, 몸의 부분 부분을 하나하나 칭찬했다. 그것도 본심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정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감탄해 마지않겠군. 하지만 그러는 중에 차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건 잘못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복도가 오른쪽으로 꺾여 있었다. 나는 벽에 손을 댄 채 오른쪽으로 꺾어 걸었다. 멀리 작은 불빛이 보였다. 몇 겹의 베일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흐릿한 작은 불빛.
그녀가 말한 그대로다. 나의 동급생은 그녀의 몸에 상냥하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목덜미로부터 어깨로부터 젖가슴으로, 그렇게 천천히. 카메라는 그의 얼굴과 그녀의 잔등을 비추고 있다. 그 다음에 빙그르르 카메라는 회전한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아니다. 그것은 키키의 얼굴인 것이다. 옛날에 나와 이루카 호텔에 묵었던, 멋진 귀를 가진 고급 창녀인 키키. 아무 말 없이 나의 인생으로부터 사라져버린 키키. 나의 동급생과 키키가 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컷 배치가 정연하다. 너무나 정연한 것 같다. 평범하다 해도 좋을 만큼. 그들은 아파트의 한방에서 서로 껴안고 있다. 창문 블라인드로부터 빛이 들어오고 있다.
키키. 어째서 여기에 돌연 그 아이가 나온단 말인가? 시공이 혼란돼 있다. 나는 빛을 향해 나갔다. 발을 내디디니 머릿속의 이미지가 쓱 사라졌다. 페이드아웃. 나는 침묵의 어둠 속을 벽을 끼고 나갔다. 나는 그 이상 더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보았자 별 수 없다. 다만 시간을 연장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발을 앞으로 내미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주의 깊게, 확실하게. 빛이 은은히 주위를 비치고 있다. 하지만 거기가 어떤 장소인지가 확인될 만큼 밝지는 않다. 다만 문이 보일 뿐이다. 본 적이 없는 문. 그래, 그녀가 말했던 그대로다. 오래된 목재 문. 거기에는 번호표가 붙어 있다. 하지만 그 숫자까지는 읽을 수가 없다. 너무나 어둡고, 표도 지저분하다. 어떻든 간에 여기는 돌핀 호텔은 아니다. 돌핀 호텔에 이런 낡은 문이 존재할 턱이 없다. 그리고 공기의 질도 다르다. 이 냄새는 대체 무엇일까? 마치 헌 종이 냄새 같다. 빛이 가끔씩 흔들흔들 흔들렸다. 아마 양초 불빛일 게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한동안 그 빛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저 프런트의 여자아이 생각을 했다. 그녀와 그때 잠자리를 함께 해 두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그 현실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아이와 데이트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현실세계와 수영학교에 대해 질투가 일었다. 어쩌면 그것은 정확하게는 질투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확대되고 왜곡된 후회의 상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면적으로는 그것은 꼭 질투 그것이었다. 적어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질투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정말, 어째서 이런 데서 질투를 느낀단 말인가. 무엇에 질투를 하다니, 굉장히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나는 질투라는 감정을 거의 느끼는 적이 없는 인간인 것이다. 무엇에 질투를 하기엔 나는 필경 너무나도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놀라울 만큼 강렬한 질투를 느끼고 있다. 그것도 수영 학교에 대해서. 싱겁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의 누가 수영 학교에 질투를 하는가?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도 없다. 나는 침을 삼켰다. 드럼통을 금속 배트로 때린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저 침을 삼켰을 뿐인데도. 소리가 기묘한 울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그래, 나는 노크해야 하는 것이다. 노크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노크해 보았다. 주저 없이 마음먹고. 작게 똑똑. 들리지 않으면 좋을 텐데, 라고 할 만큼 작은 소리로. 하지만 되돌아 나온 소리는 거대했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음 그 자체처럼 무겁고 차가웠다. 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잠시 동안 침묵이 있었다. 그녀의 그때와 마찬가지다. 얼마만한 시간인지는 모른다. 5초일지도 모르고, 1분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는 시간이 똑똑히 정해지지 않는다. 흔들려 움직이고, 끌어당겨지고, 응축된다. 그 침묵 속에서 나 자신도 흔들려 움직이고, 끌어당겨지고, 응축된다. 시간의 비뚤어짐에 맞추어서 나 자신도 비뚤어지는 것이다. 깜짝 하우스의 거울에 비치는 상처럼. 그 다음에 그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바스락 하는 과장된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인 것이다. 무엇인지 마룻바닥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발소리. 그것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슬리퍼를 끄는 듯한 사륵 사륵하는 소리. 무엇인가 다가온다. 무엇인가 인간이 아닌 것, 하고 그녀는 말했었다. 그녀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그것은 인간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다.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 하지만 여기에선 존재하고 있다. 나는 달아나지 않았다. 땀이 잔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발소리가 다가옴에 따라서 기묘하게도 내 안의 공포는 반대로 조금씩 엷어져 갔다. 문제없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사악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건 없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단 말이다. 나는 온갖 장소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일 강변이랑, 키키랑, 이루카 호텔이랑, 낡은 로큰롤이랑, 그 모든 것에게. 향료를 칠한 누비아 인 여관들. 똑딱 똑딱 시간을 새기는 폭탄. 낡은 빛, 낡은 음향, 낡은 목소리.
"기다렸어요." 하고 그것은 말했다.
"줄곧 기다렸어요. 안으로 들어와요."
그것이 누구인지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양사나이였다.
11
작고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작고 동그란 테이블로 그 위에는 양초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양초는 초라한 사기 접시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방에 있는 가구라면 고작 그 정도의 것이었다. 의자도 없어서 우리는 방바닥에 쌓아놓은 책을 의자로 대신했다. 그것이 양사나이의 방이었다. 기다랗고 비좁은 방이었다. 벽이랑 천장의 분위기가 예전의 이루카 호텔의 방과 좀 느낌이 비슷하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맞은편 벽에 창문이 있다. 하지만 창문에는 안쪽으로부터 판자가 못질 되어 있다. 못질을 하고서 퍽이나 세월이 지났나 보다. 판자 틈에 회색 먼지가 쌓이고 못대가리가 녹슬어 있다. 그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저 그런 네모진 상자 같은 방이다. 전등도 없다. 벽장도 없다. 욕실도 없다. 침대도 없다.
그는 아마 방바닥에서 잠자는 것이리라. 양의 의상으로 몸을 감싼 채. 방바닥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걸어서 다닐 정도의 공간만을 비우고, 나머지는 낡은 서적이며 신문이며 자료를 모은 스크랩북이 비좁다는 듯이 쌓아올려져 있었다. 어느 것이나 다갈색으로 변색되고, 어떤 것은 절망적으로 좀이 먹고, 어떤 것은 갈가리 흐트러져 있었다. 내가 힐끗 본 바로는 어느 것이나 홋카이도에 있어서의 면양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예전의 이루카 호텔에 있었던 것을 여기에 모아 놓은 것이리라. 예전의 이루카 호텔에는 양에 관한 자료실 같은 게 있어서, 주인의 부친이 그걸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양사나이는 반짝반짝 흔들거리는 양초 불빛 너머로 한동안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양사나이의 커다란 그림자가 얼룩이 있는 벽 위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확대되고 과장된 그림자였다.
"꽤 오래간만이군요." 하고 그는 마스크 안쪽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변함이 없군요. 좀 야위었나?"
"그래요, 좀 야위었는지도 모르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바깥세상 사정은 어떻습니까? 무슨 별다른 일은 없습니까? 여기에 있으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다리를 포개어 얹고 고개를 저었다.
"여전해.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세상이 조금씩 복잡해져 갈 뿐이야. 그리고 세상사가 진행되는 속도는 차츰 빨라지고 있어. 하지만 그밖에는 대체로 마찬가지야. 특별히 달라진 건 없어."
양사나이는 끄덕거렸다.
"그럼 아직 다음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겠군요?"
양사나이가 생각하는 이전의 전쟁이 도대체 어느 전쟁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두었다.
"아직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또 시작돼요" 하고 그는 장갑을 낀 두 손을 마주 문질러대면서 억양이 없는 단조로운 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야지. 죽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요. 전쟁이라는 건 반드시 있는 거야. 언제건 반드시 있어. 없다는 법은 없는 거야.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있어. 인간이란 건 말이야. 진짜 마음속으로는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걸 좋아하거든. 그리고 다들 서로 지쳐 떨어질 때까지 죽이고 죽고 하는 거야."
그가 걸친 양의 모피는 예전보다 다소 지저분해 보였다. 털은 빳빳하고 전체적으로 기름때가 껴 있었다. 그의 얼굴을 가린 검정 마스크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는 훨씬 더 궁상스럽게 보였다. 임시변통으로 만든 조잡한 가장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 움막처럼 습기 찬 방과 빈약하고 희미한 빛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게 언제나 불확실하고 융통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상뿐 아니라 양사나이 자신도 예전보다는 얼마간 피곤한 것 같아 보였다. 요 한 4년 동안에 그는 나이를 먹어 몸통이 잔으로 줄어든 것처럼 나에겐 느껴졌다. 그는 가끔가끔 깊은 숨을 쉬었는데, 그 숨은 기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꼭 파이프 속에 무엇인가 꽉 막혀 있는 것 같은 콜록콜록하는 언짢은 소리였다.
"좀 더 빨리 오리라고 생각했어요." 하고 양사나이는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지. 저번에 누군가가 왔었지. 당신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건 어떻던, 당신은 좀 더 빨리 올 줄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여기에 오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어. 하지만 오겠다는 결심이 어지간히 서지를 않았어. 퍽도 많은 꿈을 꾸었지. 이 루카 호텔의 꿈 말이오. 노상 그 꿈을 꾸었지. 하지만 여기에 오리라고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어"
"여기 일을 잊어버리려고 했단 말인가요?"
"도중까지는"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흔들흔들 흔들리는 양초 불빛에 비친 나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가,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도중까지는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잊어버리려고 생각했지. 여기하곤 이젠 아무 관련 없이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죽은 친구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건가요?"
"그래요, 나의 죽은 친구 탓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결국 여기에 왔어요."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렇군요. 나는 결국 여기로 돌아왔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장소의 일을 잊어버릴 순 없었어. 잊어버리려고 하면, 무엇인가가 반드시 나에게 여기 생각을 하게 했지. 필시 여기는 나에게 특별한 장소이겠지. 좋고 싫고에 관계없이, 나는 나 자신이 여기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걸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는 나로서도 몰라"
양사나이는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세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여기는 아주 넓고, 아주 어두워요. 얼마나 넓고, 얼마나 어두운지는 나도 알 수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방에 관해서 뿐이오. 다른 장소에 관해선 알지 못해요. 하니까 자세한 건 아무것도 알려줄 수가 없어요."
양사나이는 두 손을 싹싹 문질러댔다. 몸의 움직임에 맞추어 벽위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마치 검은 유령이 머리 위로부터 나에게 엄습해 오려는 것처럼. 마치 옛날의 만화영화처럼. 새가 둥지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만 그 흐름을 쫓아 여기에 왔을 뿐인 것이다.
"자 이야기해 봐요" 하고 양사나이는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여기는 당신의 세계야. 사양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이야기하고 싶은 걸 그대로 천천히 이야기하면 되는 거요. 당신에겐 필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을 거요."
양사나이는 아무 말 없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거의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그는 눈을 떴다.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이루카 호텔에 정말로 포함되어 있는 거요"하고 양사나이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까지도 줄곧 포함돼 있었고, 이제부터도 줄곧 포함돼 있지.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거요. 여기가 당신의 장소란 말이오. 그건 변함이 없어요. 당신은 여기에 연결돼 있어. 여기가 모든 것에게 연결돼 있어. 여기가 당신을 맺어주는 매듭인 거요."
"모든 것?"
"잃어버린 것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 그러한 모든 것인 것이오, 그것들이 여기를 중심으로 모두 연결돼 있는 거요."
나는 양사나이가 한 말에 관해 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막연해서 나로선 따라갈 수가 없었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 줄 수는 없느냐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양사나이는 그 말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자, 만들어 붙인 귀가 팔락팔락 흔들렸다. 벽 위의 그림자도 커다랗게 흔들렸다. 벽 자체가 무너져 내려앉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 만큼 커다랗게, 흔들흔들.
"그건 이제 곧 알 수 있는 일이오. 그건 이해될 만한 때가 오면 이해 될 수 있는 일이거든" 하고 그는 말했다.
"보라구, 그것과는 별도로 한 가지 아무래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루카 호텔의 주인은 어째서 이 새 호텔에 똑같은 이름을 붙이게 했단 말인가?"
"당신 때문이야" 하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당신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같은 이름으로 해 두었던 거야. 글쎄 이름이 바뀌었다면, 당신인들 어디로 가면 좋을지 알지 못하게 되고 말 게 아닌가? 이루카 호텔은 틀림없이 여기에 있는 거요. 건물이 달라지건 무엇이 달라지건. 그런 건 관계가 없거든. 여기에 있지.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이름도 그대로 해 둔거요."
나는 웃었다.
"나를 위해서?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이 거창한 호텔 이름이 돌핀 호텔로 돼 있단 말인가?"
"그렇지. 그게 우스운 일이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우습단 말이 아냐. 그저 좀 놀란 거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니까. 어쩐지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만 같애"
"현실의 이야기요"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호텔은 이렇게 현실로 존재하고 있어요. 돌핀호텔이란 간판도 제대로 현실로 존재하고 있지. 안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닌가?"
그는 손가락으로 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양초 불이 거기에 맞춰 흔들렸다.
"나도 제대로 여기에 있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모두가 정연해. 사뭇 생각하고 있는 거요. 당신이 돌아올 수 있도록. 모두가 제대로 잘 연결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흔들리는 양초 불을 한동안 보고 있었다. 나로선 아직 제대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보게, 어째서 나를 위해 일부러 그런 일을 하는 거요? 일부러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여기가 당신을 위한 세계이기 때문이오." 하고 양사나이는 당연한 일처럼 말했다.
"뭐 까다롭게 생각할 건 없어요. 당신이 찾고 있다면, 그건 있는 거요. 문제는 말이오, 여기가 당신을 위한 장소라는 거요. 알겠는가? 그걸 이해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건 정말로 특별한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제대로 잘 돌아오게 되도록 노력했어요. 그것이 깨지지 않게끔. 그것이 안 보이지 않게끔. 그저 그것뿐이오."
"나는 정말로 여기에 포함돼 있는 거겠지?"
"물론이오. 당신도 여기에 포함돼 있어. 나도 여기에 포함돼 있고. 다들 여기에 포함돼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당신의 세계란 말이오."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치켜들었다. 거대한 손가락이 벽 위에 떠올랐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난 양사나이요" 하고 그는 목쉰 소리로 웃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양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쫓겨서 숲 속으로 들어갔어. 훨씬 옛날 일이지만 생각나지 않을 만큼 옛날 일이오. 그 이전에 내가 무엇이었는지도 이젠 생각나지 않아. 아무튼 그 후로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되었어요. 눈에 띄지 않으리라 눈에 띄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하면 자연히 눈에 띄지 않게 돼버리는 법이오. 그리고 언제부턴가 숲속을 떠나 여기에 정착하게끔 됐지. 여기에 있게 되고, 여기를 지키고 있지. 나 같은 것도 비바람을 막는 장소는 필요하니까 말야. 안 그런가?"
"물론이지" 하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여기서의 내 역할은 연결하는 일이오. 그래 배전반처럼 말이지, 여러 가지 것을 연결한단 말이오. 알겠소?"
"그럭저럭"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바로 내가 필요한 게요. 당신은 혼란돼 있으니까. 당신은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알지 못해. 당신은 볼 것을 못 보며, 당신 자신도 남에게 보이지 않거든 어딘가 가려고 해도 어디를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해요. 당신이 맺어져 있는 장소는 여기뿐이오."
나는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하고 나는 질문을 한 번 해보았다.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겠소. 당신이 제대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 보겠어"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당신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 해.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기어 있어선 안 돼요. 그렇게 했댔자 어디에도 갈 수가 없거든. 알겠는가?"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춤을 추는 거야"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고 있는 동안은 어떻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이 말을 알아듣겠는가?"
나는 눈을 들어, 다시 벽 위의 그림자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춤을 추는 수밖에 없는 거요" 하고 양사나이는 계속했다.
"그것도 기운차게 훌륭하게 추는 거야. 다들 감탄할 만큼. 그렇게 하면 나도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는지도 몰라. 그러니 춤을 추는 거요, 음악이 계속되는 한."
사고가 또 메아리친다.
"저 자네가 말하는 이쪽 세계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자네는 내가 굳어지면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끌려들어간다고 하지. 하지만 여기는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닌가? 이 세계는 나를 위해 존재해 있잖은가? 만일 그렇다고 하면, 내가 내 세계로 들어가는 데에 어떤 문제가 있단 말인가? 여기는 현실로 존재한다고 자네는 말하지 않았는가?"
양사나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가 다시 커다랗게 흔들거렸다.
"여기에 있는 것은, 저쪽과는 또 다른 현실인 거요. 당신은 지금은 아직 여기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여기는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넓어. 당신에게 나의 말로 그것을 설명하기란 어려워.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나로서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고 있는 거요. 여기는 물론 현실이지. 이렇게 해서 당신이 현실로 나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건 틀림이 없어. 하지만 말이지, 현실은 단 하나밖엔 없다고 할 순 없는 거요. 현실은 여러 개 있지. 현실의 가능성은 몇 개나 있어. 나는 이 현실을 택했어. 여기엔 전쟁이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에겐 버려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당신은 달라. 당신에겐 생명의 따스함이 아직 뚜렷이 남아 있거든 그래서 이 장소는 지금의 당신에겐 너무나 추워. 여기에는 먹을 것만 해도 없어요. 당신은 여기에 오지 않았어야 했던 거요."
양사나이의 그 말을 듣고, 나는 방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포켓에 두 손을 넣고, 가벼이 몸을 떨었다.
"추운가?" 하고 양사나이가 물었다. 나는 끄덕였다.
"별로 시간이 없어" 양사나이는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추워지지. 이젠 슬슬 가는 게 좋겠어. 여기는 당신에겐 너무 추우니까."
"이제 한 가지만 더 들어주고 싶은 게 있어. 아까 문득 생각했지. 문득 깨달았어. 나는 이제까지의 인생 속에서 줄곧 자네를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그리고 이제까지 여러 가지 장소에서 자네의 그림자를 보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자네가 여러 가지 형태로서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오, 그 모습은 굉장히 흐리멍텅했었지. 어쩌면 자네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전부 자네였던 것처럼 생각된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느끼는 거요."
양사나이는 두 손의 손가락으로 알쏭달쏭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야.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야.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지. 나는 그림자로서, 단편으로서, 거기에 있었소."
"하지만, 모르겠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나는 이렇게 분명히 자네의 얼굴이나 형상을 볼 수 있게 됐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 이렇게 지금은 볼 수 있게 됐어. 왜 그럴까?"
"그건 당신이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오."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가야 할 곳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금 당신은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거요."
나로선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냐"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리고 어깨를 크게 흔들어 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 여기는 죽음의 세계 따위는 아냐. 당신도, 나도 틀림없이 살아 있어. 우리는 두 사람이 다같이, 같은 정도로 분명히 살아 있어. 둘이서 이렇게 숨을 쉬고, 이야길 하고 있어. 이건 현실이란 말이오."
"나로선 이해가 안 가는데."
"춤을 추는 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밖엔 방법은 없는 거야. 여러 가지를 좀 더 잘 설명해 주었으면 하곤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안 되는 거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오. 춤을 추는 거요. 아무 생각 말고, 되도록 춤을 잘 추는 거요. 당신은 그렇게 해야만 해."
온도는 급격히 낮아지고 있었다. 이 추위는 기억에 있다, 하고 나는 몸을 떨면서 문득 생각했다. 뼈에 스며드는 것 같은 습기를 품은 그 냉기를, 나는 전에도 어디선가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먼 옛날에, 먼 장소에서. 하지만 그것이 어디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날 것만 같은 데도, 아무래도 안 되었다. 머리의 어딘가가 마비돼 있는 것이다. 마비돼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이젠 가는 게 좋겠군."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여기에 있으면, 몸이 얼어붙고 말겠어. 또 얼마 안 가서 만나게 될 거요. 당신이 찾기만 한다면.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어요. 나는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복도 모퉁이까지 나를 전송해 주었다. 그가 걷자 그 스륵스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악수도 하지 않았다. 특별한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녕,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헤어졌다. 그는 비좁고 기다란 그의 방으로 돌아가고,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내가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밝고 부드러운 빛이 복도에 흘러나와 내 몸을 감쌌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 잠시 동안 벽에 기대어서 가만히 있었다. 문이 자동적으로 닫혔고, 그래도 나는 가만히 벽에 기대고 있었다. 자, 이제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 이제"의 다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사고의 거대한 공백 속에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건, 어디까지 가건 공백이었다. 그 무엇에도 부딪치지 않았다. 양사나이가 말하듯, 나는 지치고 겁먹고 있었다. 그리고 외돌터리였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는 거야, 하고 사고가 메아리쳤다. 춤을 추는 거야, 하고 나는 입 밖에 내어 복창해 보았다. 그리고 15층 버튼을 눌렀다. 15층에 다다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천장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흐르는 헨리 맨시니의 <문리버>가 나를 맞아 주었다. 현실의 세계, 내가 필경 행복해질 수도 없고, 필경 어디에도 갈 수 없는 현실의 세계.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시계에 눈길이 갔다. 귀환 시각은 오전 세 시 이십 분이었다. 자 이제,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자 이제 자 이제 자 이제 자 이제 자 이제..., 하고 사고가 메아리쳤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12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우선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벌거숭이가 되어, 거기에 천천히 몸을 담갔다. 하지만 몸이 쉽사리 훈훈해지지는 않았다. 몸의 내부 근육까지 얼대로 얼어서, 창속에 몸을 대면 되려 한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나는 그 한기가 사라지기까지 탕에 잠겨 있을 작정이었는데, 그러기 전에 김에 쐬어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해서 단념하고 이내 탕에서 나왔다. 그리고 창유리에 머리를 대어 좀 식힌 다음 브랜디를 잔에 가득히 따라 단숨에 마시고나서 그대로 침대에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얼룩 한 점 없는 머리로 푹 잠을 자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되었다. 잠을 잘 수는 절대로 없었다. 나는 경직된 의식을 간직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아침이 왔다. 흐릿하게 어두운 회색 아침이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다 뿐이지, 하늘은 이음매 하나 없이 회색 눈구름에 뒤덮이고, 거리는 구석구석이 그 회색으로 듬뿍 물들어 있었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망쳐버린 넋이 살고 있는 망쳐버린 거리.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잠들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진 않았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엔 내 머리는 너무나 피곤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나의 몸과 정신의 거의 모든 부분은 잠을 희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머리의 일부가 딱딱하게 굳어진 채 완강히 잠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신경이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특급 열차의 창문으로 역이름 표시를 읽어내려고 할 때의 초조감과도 비슷했다.
역이 다가온다. 자, 이번엔 눈길을 집중시켜 틀림없이 읽어 내야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다. 글자의 형상은 막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은 뒤로 지나쳐 버린다. 그런 일이 끝없이 계속 되었다. 연달아 역과 역이 다가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변경의 작은 역들. 열차는 몇 번이고 기적을 울렸다. 그 드높은 음향은 벌처럼 나의 의식을 찔러댔다. 아홉 시까지 그것이 계속되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단념하고 침대에서 나왔다. 안 되겠다, 결코 잠들진 못하겠는데, 하고 나는 느꼈다. 욕실에 가서 수염을 깎았으나 제대로 다 깎아내기엔 몇 번이고 자신을 향해
"난 지금 수염을 깎고 있는 거야" 하고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뒤에 나는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창가의 좌석에 앉아 콘티넨탈 블랙퍼스트를 주문해서, 커피 두 잔을 마시고, 토스트 한 개를 먹었다. 토스트 한 개를 먹는 데도 퍽 긴 시간이 걸렸다. 회색 구름이 토스트마저도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먹으면 솜먼지 같은 맛이 났다.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것 같은 날씨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 식사 메뉴를 한 50번은 되읽었다. 하지만 머리의 딱딱함은 내내 풀리지 않았다. 열차는 여전히 계속 달리고 있었다. 기적 소리도 들렸다. 치약이 굳어서 말라붙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딱딱함이었다. 나의 주위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커피에 설탕을 넣고,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고,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베이커 에그를 자르곤 했다. 절꺽, 절꺽, 절꺽하는 접시와 식기가 맞부딪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꼭 차를 조립하는 공장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문득 양사나이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호텔의 어딘가에 있는 조그마한 시공의 일그러짐 속에 그는 있는 것이다. 음, 그는 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무엇인지를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나로선 읽어낼 수가 없다.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머릿속이 굳어져 있어서 글자를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멈춰 있는 것밖엔 읽을 수가 없다. 웨이터다. 그는 흰 윗도리를 입고, 커피포트를 두 손으로 들고 있다. 마치 무슨 상품처럼.
"커피를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정중하게 질문을 한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가 가버리자 나는 일어나서 레스토랑을 나섰다. 절꺽, 절꺽, 절꺽, 그러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언제까지나 계속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또 욕탕에 들어갔다. 이번엔 더는 한기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욕조 속에서 천천히 몸을 펴고, 시간을 들여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듯 몸의 관절 하나 하나를 다독거려 갔다. 손가락 끝도 제대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렇지, 이건 내 몸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현실적인 세계에 있는 방 안의, 실제의 욕조 속에 있다. 특급 열차에 타고 있지도 않다. 기적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젠 역이름을 읽어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욕탕에서 나와 침대에 기어들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열 시 반이었다. 어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젠 잠자는 건 단념하고 산책이나 나갈까 하는 생각조차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는 중에 돌연 잠이 찾아왔다. 무대의 암전같은 일순의 급격한 잠이었다. 잠에 빠져든 순간의 일을 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거대한 회색 원숭이가 해머를 들고 어디선지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나의 뒷머리를 맘껏 두드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절한 것처럼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것은 딱딱하고 긴장된 한 잠이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경 음악도 없었다. <문리버>도 <사랑은 물빛>도 없었다. 그저 단순하고 맛이 없는 잠이었다.
"16의 다음 수는?"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지, 난 잠들어 있다. 딱딱하디 딱딱한 철구속에서 나는 몸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다람쥐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 빌딩을 허물 때에 사용하는 그러한 철구. 속이 도려내져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잠들어 있다. 딱딱하고 긴장하고 단순하고... 무엇인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기적 소리일까? 아니지, 그렇지 않아, 틀려, 하고 갈매기들이 말한다. 누군가 철구를 버너로 태워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소리가 난다. 아니지, 틀려, 그렇지도 않아, 하고 갈매기들은 소리를 모아 말한다. 그리스극의 코러스처럼.
전화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갈매기들은 이젠 없어졌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어재서 갈매기들은 없어져 버린 것인가? 나는 손을 뻗어 베갯머리의 전화를 들었다.
"예"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찌잉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뜨르르르르르르, 하는 소리는 다른 공간에서 울리고 있었다. 문 앞의 벨 소리다. 누군가 문 앞의 벨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문의 벨" 하고 나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이젠 없었고, 아무도 "정답" 하고 칭찬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욕의를 걸치고 입구까지 가서,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문을 열었다. 프런트의 여자아이가 쓱 안으로 들어서더니 문을 닫았다. 회색 원숭이에게 얻어맞은 뒷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렇게 호되게 두드리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머리가 움푹 들어가 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내 욕의를 보고, 그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오후 세 시에 자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오후 세 시"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나로서도 어째서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째 설까?"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몇 시에 잤는가, 도대체?"
나는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생각지 말아요." 하고 그녀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소파에 걸터앉아서, 안경테에 잠깐 손을 대곤 내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님, 그런데 그 얼굴이 왜 그래요?"
"응. 그러리라고 생각해" 하고 나는 말했다.
"안색도 나쁘고 부석부석하고. 열이 있는 것 아녜요? 괜찮아요?"
"괜찮아, 푹 자고 나면 제대로 돼. 걱정할 것 없어. 워낙 건강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아가씨는 휴식 시간?"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선생님 얼굴을 보러 왔어요. 어쩐지 흥미가 있어서. 하지만 방해가 된다면 나갈게요."
"방해는 무슨 방해" 하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죽도록 졸립지만, 그러나 방해는 안 돼."
"이상한 짓도 안 해요?"
"이상한 짓도 안 해."
"모두 그런 말 하지만, 꼭같이 이상한 짓 한다구요."
"모두는 그렇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안 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생각의 결과를 확인이나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럴지도 모르죠.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게다가 지금은 무엇을 하기엔 너무 졸리고" 하고 나는 덧붙였다.
그녀는 일어나서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벗고, 그것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의자 등에 걸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엔 내 옆으로 오지 않았다. 창께 까지 걸어가서, 거기에 서서 물끄러미 회색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욕의 하나만 걸친 꼴이고, 게다가 말이 아닌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게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나에게도 내 사정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좋은 얼굴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 것이다.
"저어" 하고 나는 말했다.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 나와 아가씨 사이엔, 약간이긴 하지만 무엇인지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만 같아."
"그래요?" 하고 그녀는 무감동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한 30초 동안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예를 들면?" 하고 30초 뒤에 그녀는 말했다.
"예를 들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머리의 회전은 완전히 멈춰져 있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인 것이다 이 여자 아이와 나 사이에는 약간의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상통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면도, 그래서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좀 더 이것저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단계적 사고. 정리하고, 그러고 나서 확인하지."
"굉장해" 하고 그녀는 유리창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어투에는 야유의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로 감탄하고 있다는 인상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고 중립적이었다.
나는 침대 속에 들어가 등받이에 기대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하얀 블라우스. 감색의 타이트한 스커트, 스타킹에 감싸인 날씬한 다리.
그녀도 역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탓으로 그녀는 마치 낡은 사진 속의 상같아 보였다. 그런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자신이 무엇엔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발기마저 느낀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회색 하늘, 죽도록 졸린 오후 세 시의 발기. 나는 꽤 오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래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봐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수영 학교에 질투하고 있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고, 그리곤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사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상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약간 혼란해 있을 뿐이야. 사고를 정지할 필요가 있어."
그녀는 내 곁에 다가서서 내 이마로 손을 가져왔다.
"뭐 열은 없는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푹 자요. 좋은 꿈을 꾸고."
그녀가 줄곧 여기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줄곧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걸치고 방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가버리자, 엇갈리듯 또 회색 원숭이가 해머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괜찮다니까. 그런 짓 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잠들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일격이 가해졌다.
"25의 다음은?" 하고 누군가가 질문했다.
"71" 하고 나는 말했다.
"잠들었군." 하고 회색 원숭이가 말했다. 당연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강하게 쳤잖아. 잠들 건 뻔 한 일이잖아, 하고. 혼수상태라고 하는 게 정확한 어휘이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13
매듭,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밤 아홉 시로, 나는 혼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후 여덟 시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잠과 각성의 중간적 지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에는 나는 이미 각성의 중추에 있었다. 머리의 움직임은 완전히 정상을 회복한 것처럼 느껴졌다. 회색 원숭이에게 얻어맞은 뒷머리의 아픔도 사라지고 없었다. 몸도 나른하지 않고, 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똑똑히 떠올릴 수도 있었다.
식욕도 생겼다 라기보다는 차라리 지독하게 배가 고팠다. 그래서 나는 맨 첫날밤에 들렀던 호텔 근처의 목로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안주 몇 개를 먹었다. 생선구이라든지, 삶은 야채라든지, 게라든지, 감자라든지 그런 것들을 이것저것. 가게는 전과 같은 정도로 붐비고 있었고, 같은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무슨 연기인지 냄새인지가 가게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누구나가 다 큰 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매듭, 하고 나는 그런 카오스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그리곤 조용히 입 밖에 내어 말해 보았다. 내가 찾고, 양사나이가 잇는다. 나로선 그것이 어떤 일인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나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아마 그것은 비유적으로 밖엔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양사나이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해서 나를 희롱하고 즐긴다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시 그는 그러한 말로밖에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형태로밖엔 나에게 표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저 양사나이의 세계를 통해서 그의 배전반을 통해서 온갖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고 그는 말했었다. 그리고 그 연결에 혼란이 생겨난 것이라고. 어째서 혼란이 생겨났는가? 내가 제대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매듭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혼란해 있는 것이다.
나는 술을 마시고, 눈앞의 재떨이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래서 키키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꿈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그녀가 나를 여기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이루카 호텔로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이젠 내 귀엔 도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메시지는 차단되어 있었다. 무선기의 플러그가 빠져버린 것처럼. 어째서 이것저것이 이다지도 막연해진 것일까?
이음새가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나는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양사나이의 도움을 빌어 사물을 하나하나 연결해 가는 것이다. 상황이 제아무리 막연해 보이더라도, 하나하나 견디고 참을성 있게 풀어 나갈 밖에 없는 것이다. 풀어놓고, 그리고 연결한다. 나는 상황을 회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어디에도 붙잡을 데가 없다. 나는 높다란 벽에 달라붙어 있다. 주위의 벽은 거울처럼 미끌미끌하기만 하다. 나는 어디에도 손을 뻗칠 수가 없다. 붙잡을 데가 없다. 나는 어리벙벙해 있다.
나는 술을 몇 병인가 마시고,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섰다. 하늘에서 커다란 눈 조각이 서서히 흩어 날리고 있었다.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 탓으로 거리의 음향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들렸다. 나는 취기를 식히기 위해 그 블록을 휙 일주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내 발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안되겠다,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을 향하면 좋을지조차 알지 못한다. 녹슬어 버린 것이다. 녹슬어서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있으면, 점점 나 자신이 상실되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정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아무튼 어디서부터인지 시작해야 한다. 저 프런트의 여자아이는 어떨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무엇인지 마음이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가령 그녀와 함께 자고 싶다면 잘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서부터 어디로 갈 수 있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더 잃어버릴 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로선 나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가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한은, 헤어진 아내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온갖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블록을 일주하고, 그리고 또다시 일주했다. 눈은 조용히 계속 내리고 있었다. 눈은 나의 코트에 떨어져 잠시 헤매고, 그리고 사라져 갔다. 나는 걸어가면서 머릿속을 계속 정리해 나갔다.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밤의 어둠 속에 띄우면서 내 곁을 지나갔다. 추위 탓으로 나의 피부가 쓰라렸다. 하지만 나는 그 블록을 시계 바늘 방향으로 계속 걸었고, 계속 생각했다. 아내의 말은 마치 저주와 같이 내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그녀의 말 그대로인 것이다. 이대로 하면 나는 나에게 관련되는 누군가를 영원히 상처 입게 하고, 계속 손상을 입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달로 돌아가요' 하고 말하고 나의 여자 친구는 사라져 갔다. 아니, 사라져간 게 아니다. 돌아간 것이다. 그녀는 현실이라는 저 위대한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키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최초의 착수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메시지는 도중에서 연기처럼 꺼져버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눈을 감고 회답을 찾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양사나이도 있지 않았고, 갈매기들도 있지 않았고, 회색 원숭이마저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방에 내가 혼자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 방안에서 나는 나이를 먹고 늙어서 메말라 지쳐 있었다. 나는 이미 춤을 추고는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서글픈 광경이었다.
역 이름을 아무리 해도 읽어낼 수가 없다. 데이터 부족으로 회답 불가능, 취소키를 눌러 주시오. 하지만 회답은 다음날 오후에 와 닿았다. 여느 때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회색 원숭이의 일격처럼.
14
묘하게도 별로 그렇게 묘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날 밤 나는 열두 시에 침대에 들어 그대로 푹 잤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아침 여덟 시였다. 엉터리 같은 수면 패턴이었지만, 어떻든 어김없이 아침 여덟 시에 눈을 뜨는 것이다. 일주를 하고 나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기분은 좋았다. 배도 고팠다. 그래서 또 던킨 도너츠에 가서 커피 두 잔을 마시고 도너츠 두 개를 먹고, 그리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거리를 어정어정 걸었다. 길은 굳게 얼어붙어, 부드러운 눈이 숱한 깃털처럼 조용히 퍼부어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끝에서 끝까지 흐리터분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산책에 좋은 날씨라곤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거리를 걷고 있으니 정신이 해방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줄곧 계속되고 있던 무겁고 답답한 압박감이 사라지고, 준엄한 냉기마저도 살갗에 상쾌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쨌단 말인가? 하고 나는 걸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아직 어느 것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한 시간 가량 걸은 다음 호텔에 돌아오니 프런트에 예의 그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있었다. 카운터에는 그녀 외에도 또 한 사람 프런트 담당이 있었고, 그쪽 여자아이가 손님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영업용 미소를 띠운 채 손가락에 끼운 볼펜을 무의식적으로 뱅글뱅글 돌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 나는 무엇이든 좋으니 그녀와 이야기해 보고 싶어졌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무의미한 것이 좋다. 의미를 이루지 않는 그런 싱거운 화제가 요구되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로 가서, 전화가 끝나기를 참고 기다렸다. 그녀는 내 얼굴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끗 보았고, 영업 매뉴얼 그대로의 인상이 좋은 미소는 여전했다.
"무슨 용무시죠?" 그녀는 전화를 마치자 나를 향해 정중히 물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실은 어젯밤, 이 근처의 수영 학교에서 여자아이 둘이 악어에 먹혀 죽었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하고 나는 되도록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글쎄요, 어떻게 된 거지요?" 하고 정교한 조화 같은 영업용 미소를 띤 채 그녀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눈을 보면 그녀가 화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뺨이 좀 불그레하고, 비강이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야기는 저희들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례입니다만 손님의 무슨 착각이 아닐까요?"
"굉장히 큰 악어로, 본 사람의 이야기로선 덩치가 볼보의 스테이션왜건만큼이나 되고, 그것이 돌연 천창을 깨고 안으로 뛰어 들어와선, 한 입에 여자 아이 둘을 냉큼 삼켜 먹어치우곤, 디저트로 야자수를 절반이나 먹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그건 이젠 잡혔습니까? 만일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면 밖으로 나가는 건..."
"죄송합니다만" 하고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내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좋으시다면, 손님께서 직접 경찰에 전화로 문의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그러는 게 차라리 확실치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아니면 현관을 나가 오른쪽으로 곧장 가시면 파출소가 있으니, 그쪽에서 물으셔도 좋을 거예요."
"그렇군. 어디 그래 볼까" 하고 나는 말했다.
"고맙소. 이력이 당신과 함께 있기를."
"죄송합니다." 하고 그녀는 안경테에 손을 얹고 냉정하게 말했다.
방에 돌아와서 잠시 있으니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예요, 그거?" 하고 그녀는 노여움을 누른 것 같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무 중에는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고 요전번에 말했잖아요. 근무 중에 그런 일 당하는 거 싫단 말예요."
"잘못했어." 하고 나는 정직히 사과했다.
"무엇이든 좋으니 아가씨와 이야기하고 싶었어. 아가씨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 쓸데없는 농담이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농담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야. 그저 아가씨와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특별히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긴장한다구요. 전에도 말했었잖아요? 근무를 하는 동안엔 난 굉장히 긴장한단 말예요. 그러니 훼방 놓지 말아 달라구요. 약속하지 않았어요? 힐끔힐끔 보거나 하지 않겠다고."
"힐끔힐끔 보지 않았어. 이야기를 걸었을 뿐이야."
"그럼 이후로 더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걸지 말아줘요. 부탁이에요."
"약속하지. 이야길 걸지 않겠어. 보지도 않겠고, 이야기도 걸지 않겠어. 화강암처럼 가만히 얌전하게 굴겠어. 저, 그런데 아가씨는 오늘밤은 한가해? 아니면 오늘은 등산 교실이 있는 날이었던가?"
"등산 교실?" 하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농담이죠, 그거."
"그래, 농담이야."
"가끔, 난 그런 농담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등산 교실이라니, 호호호."
그녀는 벽에 쓰인 글자를 읽어내듯 메마른 평탄한 소리로 호호호하고 다시 웃었다. 그리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대로 30분을 기다려 보았으나, 다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유머 감각은 때때로 전혀 상대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나의 진지함이 때때로 전혀 상대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리 할 일도 생각나지 않기에 다시 잠시 동안 밖을 걸어보기로 했다. 잘만 하면 무슨 일에 부닥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안 하기보다는 움직이는 편이 낫다. 무엇이나 시도해 보는 편이 낫다. 이력이 나와 함께 있기를.
한 시간 동안 걸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몸이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아직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열두 시 반에 맥도날드에 들어가 치즈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코카콜라도 마셨다. 그런 거 전연 먹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마구 먹게 돼버린단 말이다. 아마 몸이 정기적으로 이것저것 음식을 요구하는 그런 구조로 돼 있나 보다.
맥도날드를 나와서 다시 30분 동안 걸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눈이 더욱 심하게 내릴 뿐이었다. 나는 코트의 지퍼를 맨 위까지 끌어올리고, 머플러를 코 위에서 뚤뚤 말아 감았다. 그래도 추웠다. 몹시 소변이 마려웠다. 이런 추운 날에 코카콜라 같은 걸 마시니까 그렇다. 어디 화장실이 있을 법한 곳은 없을까 하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거리의 맞은편에 영화관이 보였다. 몹시 초라해 보이는 영화관이었지만 아마 화장실 정도는 있겠지. 그리고 소변을 보고 난 다음에, 영화를 보면서 몸을 녹인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여가가 너무 많아서 주체하지 못하는 판이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간판을 보았다. 국산 영화 2편 동시 상영으로, 그중 한편이 <짝사랑>이었다. 내 동급생이 출연하고 있는 영화다.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꽤나 참았던 소변을 시원하게 마치고 나서 나는 매점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서, 그걸 들고 안에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예상한 대로 엉성했지만 장내는 따뜻했다. 나는 좌석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영화를 보았다. <짝사랑>은 시작되어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지만, 처음의 30분을 보지 않고서도 줄거리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상상한 대로의 줄거리였기 때문이다. 나의 동급생은 다리가 길고 근사하게 생긴 생물 선생이었다. 주인공인 여자아이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예에 따라 실신할 만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검도부의 남자가 있었다. 아주 초보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엉터리 배우였다. 이런 영화라면 나라도 만들 수 있다.
단, 나의 동급생 고혼다 료이치라는 게 그의 본명이었는데, 물론 제법 훌륭한 예명을 가지고 있었다. 고혼다 료이치라는 건 유감이지만 여자아이들이 공감을 품을 만한 이름은 아닌 것이다. 언제나 아주 약간은 복잡한 성격의 역을 맡고 있었다. 그는 잘 생기고 인상이 좋을 뿐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학생 운동에 관련되어 어쩌고저쩌고 하든지, 애인을 임신시킨 채 버리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러한 퍽도 진부한 상처였는데 그런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때때로 그러한 회상이 원숭이가 점토를 벽에 던지는 것처럼 엉성하게 삽입되곤 했다. 야스다 강당(동경대학의 대강당)의 공방전의 실사 필름이 끼어들기도 했다. 나는 그만 '의의 없다!' 하고 작은 소리로 외쳐 볼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너무 싱거운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아무튼, 무엇보다도 고혼다는 그러한 상처를 입은 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열성적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형편이 없었고, 감독에게는 재능의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대사의 절반은 부끄러울 만큼 치졸한 것이고, 어리둥절하게 하는 무의미한 장면이 지루하게 계속되기도 했다. 여자아이의 얼굴이 줄곧 의미도 없이 클로즈업 되곤 했다. 그러니 그가 제아무리 한껏 연기를 해도 주위로부터 들떠 보일 수밖에. 나는 그에 대해 차츰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고 있으면 애처로운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어느 의미에선 예전부터 줄곧 이런 종류의 애처로운 인생을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군데 베드 신이 있었다. 고혼다가 일요일 아침에 자기 아파트 방에서 여자와 함께 자고 있는 장면에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손수 만든 쿠키인지 뭔지를 들고 찾아오는 장면이다. 정말, 내가 상상한 것과 꼭 같지 않은가. 고혼다는 내가 예상한 대로 침대 속에서도 상냥하고 친절했다. 아주 느낌이 좋은 섹스.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날 법한 겨드랑이 밑. 섹시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는 발가벗은 여자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카메라가 휙 돌아가듯 이동하면서 그 여자의 얼굴을 비춘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키키였다. 좌석 위에서 내 몸은 얼어붙었다. 뒤편에서 데굴데굴 데굴 하는 병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키다. 저 복도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이미지 그대로다. 진짜로 키키가 고혼다와 자고 있는 것이다. 연결돼 있다, 하고 나는 느꼈다.
키키가 나오는 장면은 거기뿐이었다. 그녀는 그 일요일 아침에 고혼다와 함께 잔다. 그것뿐, 고혼다는 토요일 밤에 어딘가에서 술이 취해서 그녀를 길거리에서 만나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한 번 그녀를 안는다. 거기에 제자인 주인공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일이 안 되려고 문에 열쇠 잠그는 걸 잊었다. 그런 장면이다. 키키의 대사는 또 한 마디뿐. '뭐래요?' 하고 말할 뿐. 주인공 여자아이가 쇼크를 받고 달려 나가버린 다음에 고혼다가 망연자실해 있는데 키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형편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유일한 대사였다.
"뭐래요?"
그 목소리가 정말 키키의 목소리인지 어떤지는 나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그토록 정확하게 키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고, 게다가 영화관의 스피커의 음향도 형편이 없었다. 하지만 키키의 몸에 대해선 기억이 있었다. 등의 형상이다 목줄기나 미끈한 젖가슴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 그대로의 키키였다.
나는 몸을 굳게 경직시킨 채 스크린 속의 키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시간으로 5분이나 6분, 아마 그 정도였던가 싶다. 그녀는 고혼다의 포옹을 받고 애무를 받고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입술을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조그맣게 한숨도 쉬었다. 그것이 연기인지 어떤지 나로선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마 연기일 테지.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이니까. 하지만 나로선 키키가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매우 혼란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가령 그것이 연기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녀는 정말 고혼다의 포옹을 받고 도취해 있다는 것이 되며, 가령 연기였다고 한다면, 내 안에서의 그녀의 존재의식이 혼란해지게 된다. 그렇다. 그녀는 연기를 하거나 해선 안 되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그 영화에 대해 몹시 질투를 했다. 수영 학교, 그리고 영화. 나는 여러 가지 것에 질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건 좋은 징후일까?
그런 다음에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문을 연다. 그리고 그녀는 두 남녀가 알몸으로 서로 껴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숨을 삼킨다. 눈을 감는다. 그리곤 달려가 버린다. 고혼다가 망연자실해 한다. 키키가 말한다. '뭐래요?' 망연자실해 있는 고혼다 얼굴의 클로즈업. 페이드아웃. 그저 그것뿐, 키키는 다시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줄거리 따위는 생각지 않고 다만 물끄러미 주의 깊게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저 그때뿐,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혼다와 어디선가 서로 알게 되어, 그와 함께 자고, 그리고 그와 인생의 한 신에 입회하고, 그리고 사라져 간다. 그러한 배역인 셈이다.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득 나타났다가, 입회했다가, 사라져 간다.
영화가 끝나고, 장내의 조명이 들어왔다. 음악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몸을 경직시킨 채 물끄러미 허연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건 현실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그것은 전혀 현실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키키가 영화에 나오는가? 그것도 고혼다와 함께. 우습다. 나는 필시 어딘가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회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상상력과 현실이 교차하여 혼란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영화관을 나와서 한동안 그 주위를 걸어 다녔다. 그리고 줄곧 키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래요' 하고 그녀는 나의 귀밑에서 속삭여대고 있었다. 뭐라는 건가? 하지만 그건 키키였다. 틀림없이 그랬다. 나의 포옹을 받을 때에도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하고, 그런 식으로 입술을 떨고, 그런 식으로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 그건 연기 같은 건 아니다. 정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영화란 말이야, 그건.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건 단순한 환상이었단 달인가?
한 시간 반 후에 나는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짝사랑>을 보았다. 일요일 아침, 고혼다는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 여자의 등이 보였다. 카메라가 돌아간다.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키키였다. 틀림없다.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들어온다. 숨을 삼킨다. 눈을 감는다. 달려 나가 버린다. 고혼다는 망연자실해 한다. 키키가 말한다. '뭐래요?' 페이드아웃. 페이드아웃. 하지만 영화가 끝나자 나로선 그것이 전혀 믿겨지지가 않았다. 무슨 착각일 것이라고 느꼈다. 어째서 키키가 고혼다와 잔단 말인가?
다음날, 나는 다시 한 번 영화관에 가 보았다. 나는 가만히 그 장면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굉장히 초조해하면서. 가까스로 그 장면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 고혼다는 여자를 껴안고 있다. 여자의 등이 보였다. 카메라가 돌아간다.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키키다. 틀림이 없다.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들어온다. 숨을 삼킨다. 눈을 감는다. 달려 나가 버린다. 고혼다는 망연자실해 한다. 키키가 말한다. '뭐래요?' 나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오케이, 이건 현실이다. 틀림이 없다. '연결되어 있다’
15
나는 영화관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코앞에서 양 손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여느 때와 꼭 같은 질문을 나 자신을 향해 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언제나의 질문. 하지만 침착하게 앉아서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연결의 혼란을 해소할 것. 확실히 무엇인가 혼란되어 있다. 그건 틀림이 없다. 키키와 나와 고혼다가 서로 얽혀 있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아무튼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풀어 헤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성의 회복을 통한 자기 회복. 어쩌면 이것은 연결의 혼란이 아니라 그것과는 관계없이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연결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든 나로서는 이 선을 더듬어갈 수밖엔 없을 거 같다. 이 실이 끊기지 않게끔 주의 깊게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실마리인 것이다. 어떻든 움직일 것. 멈춰 서지 말 것. 계속 춤을 출 것. 모두가 감탄할 만큼 잘 출 것.
춤을 추는 거야, 하고 양사나이가 말한다.
춤을 추는 거야, 하고 사고가 메아리친다.
어떻든 간에 도쿄로 돌아가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이상 여기에 있어도 별 수 없다. 내가 이루카 호텔을 방문한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했다. 도쿄로 돌아갈 태세를 바로잡고 그 이음새를 끌어당겨 보자. 나는 코트의 지퍼를 올리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코 위까지 뚤뚤 말아 감고 영화관을 나섰다. 눈은 더욱더 심하게 내려, 앞도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리 전체가 냉동된 사체처럼 절망적으로 굳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호텔에 돌아오자 전화를 걸어 오후 제1번 하네다 행을 예약했다.
"눈이 심해서, 직전에 사서 혹 늦어지거나 결항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좋으신지요?" 하고 예약 담당의 여성이 말했다.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돌아가리라고 결정했으니 한시 빨리 도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짐을 꾸리고 아래로 내려와서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카운터에 가서 안경을 낀 그녀를 렌터카의 데스크로 불렀다.
"갑작스레 용건이 생겨서, 도쿄로 돌아가게 됐어" 하고 나는 서둘러 말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하고 그녀는 영업적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돌아가겠다고 발설함으로써 그녀는 좀 상처를 입었으리라고 나는 느꼈다. 상처 입기 쉬운 것이다.
"저어" 하고 나는 말했다.
"또 올 거야. 가까운 시일 안에, 그때 둘이서 천천히 식사라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자구, 아가씨에게 확실히 이야기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도쿄로 가서 여러 가지 일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돼. 단계적 사고. 전향적인 자세. 종합적 전망. 그런 것들이 내게 요구되고 있어. 그런 것들이 끝나면 다시 여기로 오겠어. 몇 개월이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어김없이 돌아오겠어. 왜냐하면, 여기는 나에겐... 즉 뭐라고 할까, 특별한 장소인 것만 같기 때문이야. 그러니 조만간에 여기로 돌아오겠어."
"흐흥" 하고 그녀는 부정적으로 말했다.
"흐흥" 하고 나는 긍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하는 말은 바보스럽게 들리겠지."
"그렇지는 않아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몇 개월이 될지도 모르는 앞 일이 잘 생각나지 않을 뿐예요."
"그렇게 먼 일은 아닐 거야. 또 만난다구. 나와 아가씨 사이에는 무엇인지 상통하는 데가 있으니까" 하고 나는 그녀를 설득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설득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지 않아?"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볼펜 머리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을 뿐, 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비행기로 돌아가나요, 갑자기"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 작정이야. 날라 주기만 한다면 말야. 하지만 이런 날씨여서 어떻게 될지 확실한 건 알 수 없어."
"다음 비행기로 돌아간다면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주겠어요?"
"물론."
"실은 열세 살의 여자아이가 혼자서 도쿄로 돌아가야만 해요. 어머니가 용건이 생겨서 먼저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그래서 그 아이 혼자서 이 호텔에 남겨졌어요. 미안하지만, 그 아이를 고이 도쿄까지 데리고 가 주지 않을래요? 짐도 제법 있고, 혼자서 비행기를 태우는 것도 걱정되고."
"잘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어머니가 아이를 혼자 내동댕이치고 어딘가로 가버린 거야? 그건 경우에 어긋나잖아."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니까 엉망인 사람이죠. 유명한 여성 사진작가라지만, 좀 이상한 사람이에요. 아이 일은 잊어버리고. 그래요, 예술가라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걸로 머리가 꽉 차버린다지 뭐예요. 나중에 생각이 나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어요. 아이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 적당히 비행기에 태워서 도쿄로 돌려보내 달라구요."
"그런 건 자신이 하면 되잖아."
"그런 건 난 몰라요. 어쨌든 앞으로 1주일, 일 때문에 아무래도 카트만두에 있어야 한다면서요. 게다가 그 사람 유명한 사람이고 우리 호텔의 고객이기도 해서, 그렇게 함부로 할 수도 없거든요. 그녀는 공항까지만 데려다 주면 그 다음은 혼자서 돌아갈 수 있다고 마음 편한 소리를 하지만, 그렇게도 할 수 없잖아요? 여자아이겠다, 만일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저도 굉장히 곤란해져요. 책임 문제도 있고."
"맙소사"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해보았다.
"으음, 그 아이 어쩌면 머리칼이 길고, 록 가수의 트레이너를 입고, 워크맨을 늘 듣는 여자아이 아닌가?"
"그래요. 아니, 잘 알고 있잖아요."
"맙소사"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항공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나와 같은 항공편의 좌석을 예약했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방에 전화를 걸어, 함께 돌아갈 사람을 찾았으니까, 짐들을 꾸려 곧 내려오라고 말했다. 걱정 마, 잘 알고 있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보이를 불러, 그녀의 방으로 짐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곤 호텔을 서비스 리무진을 불렀다. 쾌활하고 아주 솜씨가 좋았다. 유능했다. 아주 솜씨가 좋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일이 좋다고 했잖아요. 취향에 맞아요."
"하지만, 야유를 받으며 흥분을 하던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또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건 또 별개예요. 농담을 받거나 야유를 받는 거, 별로 좋지가 않아요. 예전부터, 그런 일 당하면 굉장히 긴장해요, 난."
"저어, 아가씨를 긴장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반대야. 난 좀 더 여유를 갖게 하고 싶어서 농담을 하는 거야. 쓸데없고 무의미한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노력해서 농담을 하는 거야. 물론 때에 따라선 나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상대가 재미있어 하지 않는 수도 있어. 하지만 별로 악의는 없어. 뭐 아가씨에 대해 웃고 있는 건 전혀 아냐. 내가 농담을 하는 건 나로선 그런 게 필요하기 때문이야."
그녀는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서서 홍수가 물러간 흔적을 바라보는 그런 눈매였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쉬는 듯한, 콧소리를 내는 듯한, 복잡한 소리를 내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 명함 주실 수 없어요? 한 여자아이를 맡긴 체면상 하는 말인데요."
"체면상" 하고 나는 우물거리면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명함쯤은 갖고 있다. 응당 명함쯤은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12명쯤 되는 사람에게 충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걸레라도 보는 눈으로 말끄러미 그 명함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 이름은?"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다시 만날 때에 알려 드릴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경다리를 만졌다.
"만일 만나게 된다면."
"물론 만나게 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초승달처럼 담담하고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10분 후에 여자아이가 보이와 함께 로비로 내려왔다. 보이는 샘소나이트의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독일산 세퍼트가 선 채로 한 마리 들어갈 만한 커다란 슈트케이스였다. 확실히 이런 물건을 열세 살의 여자아이에게 들려서 공항에 내동댕이칠 수는 없었다. 그 여자아이는 오늘을 '토킹 헤드'라고 쓰인 트레이너 셔츠를 입고, 통 좁은 블루진과 부츠를 신고, 그 위에 고급스러운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전에 본 것과 똑같이 그 여자아이에게서는 투명하리 만큼 기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아주 미묘한 내일 사라져도 우습지 않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보는 자에게 어떤 종류의 불안정한 감정을 일으키게 할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토킹 헤드"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은 밴드 이름이었다. 케라웍의 소설 한 구절과 비슷한 이름이었다.
"이야기를 건네는 머리가 내 곁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몹시 소변이 마려웠다. 소변을 보고 오마고 나는 '이야기를 건네는 머리'에게 말했다."
반가운 케라웍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여자아이는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생긋 웃지도 않았다. 눈썹을 찌푸리듯 하고 나를 보고, 그리곤 안경을 낀 여자아이를 보았다.
"괜찮아.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겉보기만큼 나쁘진 않아" 하고 나는 덧붙였다.
여자아이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리곤 뭐 할 수 없지, 하는 듯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할 입장은 아니야, 하는 듯이. 그래서 나는 그녀에 대해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크루지 영감님.
"걱정하지 마. 괜찮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 아저씬 농담도 잘하고, 재치 있는 말도 해 주고, 여자아이에겐 친절해. 게다가 이 언니의 친구야. 그러니 괜찮아, 그렇지?"
"아저씨 아냐. 아직 서른넷이야. 아저씨라니 너무 지독하군."
하지만 아무도 내가 하는 말 같은 건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멈춰선 리무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보이는 샘소나이트를 벌써 차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내 백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아저씨',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공항행 리무진을 탄 사람은 나와 그 여자아이뿐이었다. 날씨가 너무 나쁘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어디를 향해도 눈과 얼음밖에 보이지 않았다. 꼭 극지 같다.
"그래, 너, 이름은 뭐지?" 하고 나는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여자아이는 말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리고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무엇인가 찾는 것처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향해도 눈밖엔 보이지 않았다.
"유키" 하고 여자아이는 말했다.
"유키?"
"이름"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 유키."
그리곤 여자아이는 워크맨을 포켓에서 꺼내 개인적인 음악 속에 잠기었다.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내 쪽은 전혀 쳐다보지를 않았다. 지독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유키라는 건 그 아이의 진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땐,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즉석에서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이름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약간 거부감도 느꼈다. 그 아이는 가끔 포켓에서 껌을 꺼내 혼자 씹고 있었다. 나에겐 단 한 개도 권하지 않았다. 나는 별로 껌 따위는 씹고 싶지 않았지만, 의례적으로 권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한 이런저런 일로 나는 어쩐지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옛일을 생각했다. 내가 그 아이의 나이 무렵이던 당시의 일을.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무렵엔 록 레코드를 수집하고 있었다. 45회전의 싱글판을. 레이 찰즈의 <떠나거라, 잭>이니, 리키 넬슨의 <트레블링 맨>이니, 브렌다 리의 <올 얼론 앰 아이>, 그런 걸 백 장 정도 가사를 다 외울 만큼 매일 되풀이해서 들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시험 삼아 <트레블링 맨>의 가사를 떠올리고 노래를 불러 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아직도 가사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쩔 수도 없는 시시한 가사였지만, 노래를 불러 보니 제법 술술 나왔다. 젊은 시절의 기억력이란 대단한 것이기도 하다. 무의미한 일들을 참으로 잘 기억하고 있다.
And the China doll
down in old Hongkong
waits for return
토킹 헤드의 노래와는 확실히 매우 다르다. 시대는 바뀐다. 타아아아임즈 아 체에에인징...
나는 유키를 대합실에 혼자 놔두고, 공항 카운터로 가서 표를 샀다. 나중에 정산할 생각으로, 두 사람 몫 요금을 내 크레디트 카드로 지불했다. 탑승까지 앞으로 한 시간이 남았었지만, 아마 좀 더 늦어지게 될 것이라고 담당자는 말했다.
"안내 방송이 있을 테니까 잘 들어 주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무튼 지금대로라면 시계가 너무 나쁩니다."
"날씨가 좋아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예보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몇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어요." 하고 그녀는 따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같은 말을 2백 번 정도 했던 것이다. 뭐, 누군들 따분하지 않겠는가.
나는 유키에게로 돌아와 눈이 그치지 않아 비행기가 좀 늦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얼굴을 힐끗 보고 나서 "흐흥"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짐은 체크인 하지 말고 그냥 두자구. 한번 체크인 하면 빼내기가 귀찮게 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좋을 대로" 하는 얼굴을 그 아이는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그렇게 재미있는 장소도 아니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점심은 먹었나?" 그 아이는 끄덕였다.
"커피숍에라도 가지 않겠어? 뭣 좀 마실까? 커피나 코코아나 홍차나 주스나, 뭣이든"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글쎄요" 하는 얼굴을 그 여자아이는 했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그럼 가자구" 하고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샘소나이트를 밀고, 그 아이와 함께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숍은 붐비고 있었다. 어느 비행편이나 출발이 늦어버린 듯, 다들 한결같이 지쳐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끌시끌한 가게 안에서, 나는 점심 대신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부탁하고 유키는 코코아를 마셨다.
"저, 며칠 동안 그 호텔에 묵고 있었지?" 하고 나는 물었다.
"열흘" 하고 그 여자아이는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머니는 언제 떠났지?"
그 아이는 잠시 동안 창밖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사흘 전" 하고 말했다. 꼭 초보 영어 회화 레슨이라도 하고 있는 꼴이었다.
"학교는 봄방학인가, 줄곧?"
"학교는 안 가요, 줄곧. 그러니까 내버려둬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포켓에서 워크맨을 꺼내고, 헤드폰을 귀에다 꽂았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신문을 읽었다. 아무래도 요즈음 나는 여자아이를 화나게만 하고 있다. 왜일까? 운이 나쁜 걸까, 아니면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걸까?
아마 운이 나쁠 뿐이다, 하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신문을 내쳐 읽어버리고는 포크너의 <울림과 분노>의 문고판을 가방에서 꺼내 읽었다. 포크너와 필립 K딕의 소설은, 신경이 어떤 종류의 피곤함을 느낄 때에 읽으면 매우 잘 이해가 된다. 나는 그런 시기가 오면 반드시 어떤 소설이든 읽기로 하고 있다. 그 밖의 시기에는 거의 읽지 않는다. 도중에서 유키는 한 번 세면실로 갔다. 그리고 워크맨의 전지를 갈아 넣었다. 30분 뒤에 실내 방송이 있었다. 하네다 행 비행편은 네 시간 늦게 출발한다는 실내 방송이었다. 날씨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맙소사, 여기서 앞으로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가. 하지만 뭐 별 수 없다. 그런 건 처음부터 경고되어 있었던 것이니까. 좀 더 전향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물을 생각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명확한 사고의 힘. 5분 동안 신중하게 생각하자, 좀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번득였다. 잘 돼 나갈지도 모르겠고,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시끄럽고 담배 냄새가 고리타분한 곳에서 멍청하니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나는 유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공항의 렌터카 회사의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차를 빌려달라고 했다. 카운터의 여직원은 곧 수속을 해주었다. 카스테레오가 달린 카롤라 스프린터였다. 나는 마이크로 버스로 렌터카 사무실까지 옮겨가 거기서 카롤라의 키를 받았다.
사무실은 공항에서 차로 10분가량의 거리에 있었다. 새 스노우타이어가 달린 백색의 카롤라였다. 나는 그 차를 타고 공항까지 되돌아 왔다. 그리고 커피숍으로 가서 유키에게 "이제부터 세 시간 가량 이 주위를 드라이브해 보자" 하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오지 않아요. 드라이브라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일 거예요" 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죠?"
"어디로도 안 가. 차를 타고 달릴 뿐"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큰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지. 음악을 듣고 싶겠지. 실컷 들려줄게. 워크맨만 듣고 있으면 귀가 나빠져."
그녀는 글쎄 하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자 가자, 하고 일어서자 그 아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왔다.
나는 슈트케이스를 메어 올려 트렁크에 집어넣고, 눈이 퍼붓는 도로를 천천히 어디랄 것도 없이 차를 몰았다. 유키는 숄더백 속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어 카스테레오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데이빗 보위가 <차이나 걸>을 부르고 있었다. 그 다음엔 필 코린즈, 스타쉽, 토마스 돌비, 톰 페티, 앤 하트 브레이커즈, 홀 앤 오츠, 톰프슨 츠인즈, 이기포프, 바나나라마, 그러한 십대 전반의 여자 아이들이 아주 보통으로 들을 법한 음악이 줄곧 계속되고 있었다. 스톤즈가 <고잉 투 아고고>를 불렀다.
"이 곡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예전에 미라클즈가 불렀어. 스모키 로빈슨과 미라클즈. 내가 열다섯 아니면 열여섯 살 무렵."
"히이" 하고 유키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고잉 투 아 고고" 하고 나도 곡에 맞춰서 불렀다.
그 다음에 폴 매카트니아와 마이클 잭슨이 <세이 세이 세이>를 물렀다. 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는 얼마 안 되었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와이퍼가 사뭇 귀찮다는 듯이 창에 달라붙은 눈 조각을 스럭 스럭 스럭 훑어내고 있었다. 차 안은 따뜻하고 로큰롤은 유쾌했다. 듀란듀란마저 유쾌했다. 나는 제법 느슨해져서 가끔씩 테이프에 맞춰 노래하면서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유키도 얼마간은 기분이 편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그 90분짜리 테이프를 다 듣고 나자 내가 렌터카 사무실에서 빌려온 테이프에 눈을 돌렸다.
"그거 뭐?" 하고 그 아이는 물었다. 올드팝의 테이프라고 나는 대답했다. 공항에 돌아오기까지의 도중에 틈틈이 내가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듣고 싶어요." 하고 그 아이는 말했다.
"마음에 들지 어떨지 모르겠다. 모두 낡은 거라서"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 아무거나. 요 한 열흘 동안 줄곧 같은 테이프만 듣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 테이프를 세트했다. 먼저 샘 쿡이 <원더풀 월드>를 불렀다.
"난 역사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좋은 노래다. 샘 쿡, 내가 중학 3학년 때에 총을 맞아 죽었다. 버디 호리 <오 보이>. 보디 호리도 죽었다. 비행기 사고. 보비 다링 <비욘드 더 시>. 보비 다링도 죽었다. 엘비스 <하운드 덕>. 엘비스도 죽었다. 마약에 절어서. 모두 죽었다. 그 다음엔 척 베리가 노래했다. <스위트 리틀 식스틴>. 에디 콕란 <서머타임 브루스>, 에브리 브러더즈 <일어나라, 수지>. 나는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부분만을 함께 불렀다.
"잘 기억하고 있네요." 하고 유키가 감탄한 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 나도 예전엔 너만큼 열심히 록을 들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네 나이 때에 말야. 매일 라디오에 매달리고, 용돈을 모아 레코드를 샀지. 로큰롤. 이 세상에 이만큼 멋진 건 없다고 생각했어. 듣고 있기만 해도 행복했었지."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듣고 있지. 좋아하는 곡도 있고. 하지만 가사를 암송할 만큼 열심히 듣지는 않아. 예전만큼은 감동하지 않아."
"왜 그래요?"
"왜 그럴까?"
"가르쳐 줘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적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렇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아주 적거든 무엇이든 그래. 책이나, 영화나, 콘서트나, 정말로 좋은 건 적거든. 록 뮤직만 해도 그렇지. 좋은 건 한 시간동안 라디오를 들어도 한 곡 정도밖에 없어. 나머진 대량 생산의 찌꺼기 같은 거야. 하지만 예전엔 그런 거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무엇을 듣건 제법 재미있었어. 젊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게다가 사랑을 하고 있었어. 시시한 것에도,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떨림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 내가 하는 말 알겠어?"
"어딘지 모르게" 하고 유키는 말했다.
델 봐이킹즈의 <캄 고 위드 미>가 걸렸기에, 나는 잠시 동안 그것을 함께 합창했다.
"따분하지 않아?" 하고 나는 물었다.
"으응, 나쁘지 않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도 말했다.
"지금은 사랑을 안 해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좀 깊이 생각했다.
"어려운 질문인데"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나?"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싫은 녀석은 잔뜩 있지만."
"기분은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 편이 즐거워요."
"그 기분도 알겠어."
"정말 알아요?" 하고 말하고, 유키는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았다.
"정말 알아"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들 그것을 도피라고 불러. 하지만 뭐 그건 그걸로 좋아.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무엇을 구하느냐만 명백하다면, 너는 너 좋을 대로 살면 좋은 거야. 남이 뭐라고 하건 알 게 뭐야. 그런 녀석들은 왕 악어에게 먹혀 죽으면 되는 거야. 나는 예전에 , 너 만한 나이에 그렇게 생각했었어.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건 어쩌면 내가 인간적으로 성장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내가 영원히 옳은 것인지도 몰라. 아직은 잘 모르겠어. 쉽게 해답이 나오지 않거든."
지미 길머 <슈거 색>. 나는 이빨 틈새로 휘파람을 불며 운전했다. 도로의 왼편에는 드넓은 평지가 새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수수하고 조그마한, 나무로 만든 커피숍이지만, 에스프레소 커피가 너무나 맛있어.“
좋은 노래다. 1964년.
"그런데" 하고 유키가 말했다.
"아저씬, 좀 이상한 것 같아. 남들이 그렇게 말 안 해요?"
"흐흥" 하고 나는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결혼했어요?"
"한 번 했었지."
"이혼했어요?"
"그래,"
"어째서?"
"아내에게 버림받았지."
"정말, 그거?"
"정말이야. 아내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서 함께 어딘가로 가버린 거야."
"가엾어라" 하고 유키는 말했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부인의 마음은 알 것 같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떤 식으로?" 하고 나는 물었다.
유키는 어깨를 움츠리곤 아무 말도 않았다. 나도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저어 껌 씹을래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고마워. 하지만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조금씩 사이좋게 되면서, 비치 보이즈의 <서핑 USA>의 백 코러스를 둘이서 계속했다. "inside-outside-USA" 라든가, 그러한 간단한 것. 하지만 즐거웠다.
<헬프 미 론다>도 둘이서 불렀다. 나도 아직은 버려진 건 아니다. 나는 스크루지 영감은 아닌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눈은 차츰 약해지게 되었다. 나는 공항으로 되돌아와 키를 렌터카의 카운터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짐을 체크인하고, 3분 후에 게이트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결국 다섯 시간 늦게 이륙했다.
유키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의 잠든 얼굴은 희한하게 예뻤다. 어딘지 비현실적인 재료로 만든 정밀한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누군가가 세차게 치면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스튜어디스가 주스를 가지고 와서, 유키의 얼굴을 보고 아주 눈부신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진 토닉을 주무했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면서, 키키 생각을 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녀와 고혼다가 침대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재생해 보았다. 카메라가 돌아가듯 이동했다. 키키가 거기에 있었다. "뭐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뭐래요, 하고 사고가 메아리쳤다.
16
하네다에서 짐을 찾은 다음, 나는 유키에게 집은 어디냐고 물었다.
"하코네" 하고 유키는 말했다.
"꽤 멀 군."하고 나는 말했다.
벌써 밤 여덟 시도 지나 있었고, 이제부터 택시를 타든 어떻든 간에, 하코네로 돌아가기엔 좀 힘들 것 같았다.
"도쿄에 아는 사람은 없나? 친척이라든가, 친한 사람이라든가. 그런 사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런 사람은 없지만, 아카사카에 아파트가 있어요. 작은 아파트지만, 엄마가 도쿄에 가면 사용해요. 거기 묵으면 돼요. 아무도 없으니까."
"가족은 없나? 어머니 외엔."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와 엄마 둘뿐."
"흠"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쩐지 까다로운 듯한 가정이었는데, 그건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나 있는 데까지 택시로 가서 함께 저녁을 어디서 먹자구. 그 다음에 내가 차로 너를 아카사카의 아파트까지 보내주지. 그러면 되겠지?"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택시를 불러서 시부야의 내 아파트까지 갔다. 그리고 유키를 현관에서 기다리게 하고, 방으로 혼자서 돌아와 짐을 두고 권의주의풍의 옷차림이 아닌 보통의 옷 모양으로 갈아입었다. 보통의 운동화에 보통의 가죽잠바와 보통의 스웨터. 그리고서 스바루에 유키를 태우고, 차로 가면 15분가량의 거리에 있는 이탈리언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나는 라뷔오리와 야채샐러드를 먹고, 그녀는 봉골레 스파게티와 시금치를 먹었다. 그리고 생선 프리트 미스트를 한 접시 주문해서 둘이서 나누었다. 프리트는 꽤 많은 양이었는데, 그녀는 굉장히 속이 비어 있었던 듯 테라미즈마저 먹었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맛있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디에 음식 맛이 좋은 가게가 있다든가, 그런 것만은 잘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맛좋은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유키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래서 잘 알지" 하고 나는 말했다.
"프랑스에 꿀꿀 코를 끌면서 땅 밑 버섯을 찾아내는 돼지가 있는데, 그것과 같아."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취미를 가질 수가 없어, 도저히.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야. 맛좋은 음식점을 찾아내 잡지에 내어 모두에게 소개하지. 이곳으로 가시오, 이런 걸 먹으시오. 하지만 어째서 일부러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다들 제멋대로 저 좋은 걸 먹고 살면 되지 않아. 안 그래? 어째서 타인에게 음식점 지시까지 일일이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 메뉴의 선택법까지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말이지, 그런 데서 소개를 받는 음식점이란, 유명해짐에 따라서 맛도 서비스도 자꾸자꾸 떨어지게 돼. 십중팔구는 말야.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야.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야. 무엇을 찾아내선 그걸 하나하나 점잖게 경멸해 가는 거야. 새하얀 것을 찾아내어 때투성이로 만들어 가는 거야. 그것을 사람들은 정보라고 부르지. 그런 일에 이젠 진절머리가 나. 자신이 하고 있으면서도."
유키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말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진기한 생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하지만 하고 있잖아요?"
"직업이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서 나는 돌연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게 열세 살쯤 되는 여자아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정말, 나란 인간은 도대체 이런 조그만 여자아이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가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밤도 늦었고, 그 아파트까지 보내줄게"
스바루를 타자, 유키는 그 주위에 굴러 있는 테이프를 집어 들어 카스테레오에 꽂았다. 내가 만든 올디즈의 테이프였다. 나는 혼자서 운전하면서 곧잘 그런 걸 듣고 있는 것이다. 포 톱스의 <리치 아웃 아일비 데>.
도로가 한산해서 아카사카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는 유키에게 아파트의 위치를 물었다.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째서지?" 하고 나는 물었다.
"아직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깐."
"보라구, 벌써 밤 열 시가 지났어." 하고 나는 말했다.
"길고 지루한 하루였어. 이젠 개처럼 자고 싶어."
옆자리로부터 유키는 말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앞쪽 노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줄곧 왼쪽 뺨에 느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거기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 시선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한동안 나를 응시하고 나서, 그녀는 시선을 반대편 창밖으로 돌렸다.
"나 자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아파트로 가도 혼자이고, 좀 더 드라이브 해보고 싶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제 한 시간만. 그리고 집으로 가서 푹 자는 거야. 그러면 되겠지?"
"그러면 돼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도쿄 거리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까 점점 대기가 오염되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소음이 늘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고, 지하자원이 고갈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키는 머리를 시트에 기대고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카트만두에 있다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하고 그녀는 고단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돌아올 때까진 혼자겠군."
"하코네로 돌아가면 가정부 아줌마가 있지만" 하고 그녀는 말했다.
"흠, 이런 일이 흔히 있나?" 하고 나는 물었다.
"날 내동댕이치고 가버리는 그런 일? 흔해요. 그 사람, 사진 일로 이내 머리가 꽉 차버려요. 악의는 없지만, 그런 사람이에요. 요컨대 자기 일밖엔 생각지 않아요. 내가 있다는 걸 잊어버려요. 우산과 같이. 단순히 잊어먹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서 훌쩍 어딘가로 가버리곤 하죠. 카트만두에 가고 싶다 하면, 그 일밖엔 머리에 남지 않는 거예요. 물론 뒤에 반성하고 사과는 하지만, 이내 또 같은 짓을 해요. 변덕쟁이라서 나를 훗카이도로 데려가서는, 거기까진 좋지만 매일같이 난 호텔 방에서 워크맨만 듣고 엄마는 거의 돌아오지 않아 나 혼자 밥을 먹으면서... 하지만 이젠 체념했어요. 이번만 해도 1주일이면 돌아온다고 했지만, 믿거나 말거나 예요. 카트만두에서 또 어디로 갈지 알 게 뭐예요."
"어머니 이름은 무어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이름을 말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어본 적 없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아메라는 이름으로 직업상의 이름을 따로 갖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아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줄곧. 그래서 내 이름을 유키라고 했어요. 바보스럽다고 생각 안 해요?"
나는 아메를 알고 있었다. 누구든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 매우 유명한 여류 사진작가이다. 다만 매스컴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본명조차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밖엔 하지 않는다. 기행으로 알고 알려져 있다. 공격적이고 예리한 사진을 찍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너의 아버지는 그 소설가인가? 마키무라 히라쿠, 분명 그래."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 사람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재능은 없지만."
나는 유키의 부친이 쓴 소설을 예전에 몇 권인가 읽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에 쓴 두 권의 장편과 한 권의 단편집은 나쁘지 않았다. 문장도 시점도 신선했다. 그래서 책은 웬만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도 문단의 총아 같은 존재가 되었다. TV니 잡지니 하는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고 사회의 온갖 사상에 관해 의견을 말했다. 그리고 당시 신진작가였던 아메와 결혼했다. 그것이 그의 절정이었다.
그 뒤가 형편이 없었다. 특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돌연 그는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쓴 두세 권의 글은 어쩌지도 못할 '물건'이었다. 비평가도 혹평했고, 책도 팔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그는 뒤집듯이 스타일을 바꾸었다. 예리한 청춘 소설의 작가로부터 돌연 실험적 전위작가로 전향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없음에는 다름이 없었다. 문체도 프랑스 전위소설 언저리의 부분 부분을 가져와서 꿰맞춰 놓은 것 같은 섬뜩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상상력의 파편조차 없는, 새것 좋아하는 몇몇 평론가가 그것들을 칭찬했다. 하지만 한 2년이 지나자 비평가들도 역시 이건 글렀다, 싶었던지 입을 다물게 되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떻든 그의 재능은 최초의 3권으로 완전히 고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문장만은 그런대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거세당한 개가 과거의 기억을 따라 암캐의 냄새를 맡듯, 문단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아메는 그와는 이혼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메가 그를 단념하고 만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일반의 정설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키무라 히라쿠는 그대로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모험 작가라고 떠벌이며 새로운 분야에 손을 댔다. 1970년대 초반의 무렵이다. 전위에, 행동과 모험. 그는 세계의 비경을 돌며 거기에 관해 문장을 썼다. 에스키모와 함께 해표를 잡아먹기도 하고, 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생활하기도 하고, 남미의 게릴라 취재도 했다. 그리고는 서재형의 작자들을 맹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처음엔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10년이나 같은 짓을 하고 있는 동안에 뭐 당연한 일이지만 다들 거기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도대체 세계의 그토록 많은 모험의 씨가 있을 턱이 없다. 리빙스턴이나 아문젠의 시대는 아닌 것이다. 모험의 길은 엷어지고, 문장만이 호들갑스러워졌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모험조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모험'에는 코디네이터라든가 편집자라든가 사진작가라든가가 줄줄이 동행했었다. TV가 관련되면, 거기에 열 명 가량의 스태프와 스폰서가 붙었다. 연출도 있었다. 나중이 되면 될수록 연출이 불어났다. 그것은 업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토록 악한 사람은 아닐 게다. 하지만 재능이 없었다. 그 딸이 말하듯.
우리는 그 작가인 아버지에 관해선 그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유키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나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동안 말없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핸들을 잡고 앞을 주행하는 블루의 BMW의 테일 램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키는 솔로먼 버크에 맞추어 부츠 끝으로 리듬을 잡으면서 거리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이거 좋은 차군요" 하고 조금 뒤에 유키는 말했다.
"무슨 차죠?"
"스바루" 하고 나는 말했다.
"중고의 구식 스바루. 일부러 칭찬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그다지 없지만."
"잘 모르지만, 타고 있으면 어쩐지 친밀한 느낌이 들어요."
"아마도 그건 이 차가 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게야."
"그렇게 하면 친밀한 느낌이 들게 돼요?"
"조화성" 하고 나는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와 차가 서로 도와주고 있는 거야. 간단하게 말해 내가 이 공간에 들어가지. 나는 이 차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여기에 그런 공기가 생겨. 그리고 차도 그런 공기를 느끼게 돼. 나도 기분이 좋게 되고 차도 기분이 좋게 돼."
"기계도 기분이 좋게 돼요?"
"물론, 되지"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 하지만 기계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해. 이론적으로는 해명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말해서 그래. 틀림없이."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과는 달라. 이런 건 말이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감정이거든 인간에 대한 감정이란 건 그것과는 달라. 상대에게 맞춰서 늘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어. 흔들리거나 망설이거나, 부풀거나, 꺼지거나, 부정되거나, 상처를 입기도 해. 대개의 경우 의식적으로 통할 수는 없어. 스바루를 대하는 것과는 달라."
유키는 그에 관해 한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과는 서로 통하지 못했었나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통해 있다고 난 줄곧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어. 견해의 차이. 그래서 어디론가 가버리는 편이 차라리 빨랐던가봐."
"스바루처럼은 잘 되지 못했던가 보죠?"
"말하자면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맙소사, 도대체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를 상대로 하는 이야기란 말인가, 이것이.
"저 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죠?" 하고 유키는 물었다.
"나는 아직 너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또 내 왼쪽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왼쪽 뺨에 구멍이 뻥 뚫리지나 않을까 싶었다. 그토록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알겠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넌 내가 여태껏 데이트한 여자아이 중에선 아마 제일 예쁜 여자아이 일거야." 하고 나는 내 시선 정면의 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아니지, 아마가 아냐. 틀림없이 제일 예뻐. 내가 열다섯이라면, 확실히 너와 사랑을 했을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서른넷이니, 그렇게 간단하게 사랑은 하지 않아. 이 이상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 스바루 편이 더 쉬워. 그런 정도로 말하면 될까?"
유키는 이번에는 평온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곤 "이상한 사람" 하고 말했다. 유키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 나는 내가 정말로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악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유키의 그런 소리를 들으니 꽤 사무치는 것이다.
열한시 십오 분에 나는 아카사카로 돌아왔다.
"자, 어쩌지" 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에는 유키는 제대로 나에게 그 아파트의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붉은 벽돌을 사용한 아담한 맨션인데, 노기신사 가까이의 조용한 길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차를 멈추고 엔진을 껐다.
"돈 말인데" 하고 그녀는 시트에 앉은 채 조용히 말했다.
"비행기 삯이라든가, 식사대라든가 그런 거."
"비행기 표는 어머니가 돌아와서 돌려주면 돼. 그 이외의 것은 내가 내겠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제몫내기 데이트는 안 해. 비행기 표만으로 좋아."
유키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씹고 있던 껌을 화분 속에다 버렸다.
"고마워, 천만에" 하고 나는 혼잣말로 소리를 내어 예절 바르게 대화를 해 보았다. 그리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유키에게 주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이걸 줘. 그리고 만일 혼자 있다가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이리로 전화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줄 테니까."
그녀는 얼마동안 내 명함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곤 코트의 포켓 속에 쑤셔 넣었다.
"이상한 이름"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뒷좌석으로부터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끌어내어 그것을 엘리베이터에 실어 4층까지 운반했다. 유키는 숄더백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나는 슈트케이스를 안에다 넣었다. 식당을 겸한 부엌과 침실과 욕실만 있는 구조였다. 건물은 아직 깨끗하고, 방안은 모델 룸처럼 제법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식기니 가구니 전기 기구는 갖출 대로 갖춰져 있었고, 어느 것이나 세련되고 값나가는 것 같았지만, 생활의 냄새랄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든 돈을 주고 전부를 사흘 동안에 구색 맞춰 사들였다고나 할 그런 격이었다. 취미는 좋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엄마가 어쩌다 사용할 뿐예요" 하고 유키는 내 시선을 좇은 다음에 말했다.
"엄마는요 그곳에 스튜디오를 갖고 있어서 도쿄에 있을 때엔 거의 거기서 살다시피 하고 있어요. 거기서 자고 거기서 밥 먹고 하면서. 여기론 어쩌다가 돌아올 뿐."
"과연" 하고 나는 말했다.
바쁜 듯한 인생이다.
그녀는 모피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가스스토브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버지니아 슬림 갑을 가져다가 한 가치 입에 물고 종이 성냥을 조용히 켜서 불을 당겼다. 열세 살의 여자아이가 담배를 피운다는 건 좋지 못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살갗도 거칠어진다. 하지만 그녀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프로 끊어낸 것 같은 엷고 예각적인 입술에 필터를 살짝 물고 불을 켜서 댕길 때에 기다란 속눈썹이 자귀나무 잎사귀처럼 서서히 아름답게 덮어졌다. 이마에 흘러 떨어진 가느다란 앞머리가 그녀의 작은 몸놀림에 맞추어 부드럽게 흔들렸다. 완벽했다.
열다섯 살이었다면 사랑에 빠졌어, 하고 나는 새삼 느꼈다. 그것도 봄의 눈사태와도 같은 숙명적인 사랑에. 그리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지독히 불행해져 있을 게다. 유키는 내가 옛날에 알고 있었던 어느 여자아이 생각을 나게 했다. 내가 열셋이던가 열네 살 무렵에 좋아하게 되었던 한 여자아이의 생각을. 그 당시에 느꼈었던 절절한 심정이 문득 되살아났다.
"커피나 뭣 좀 마실래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늦었으니까 이제 돌아가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일어서서 나를 문에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담뱃불과 스토브를 조심해" 하고 나는 말했다.
"아빠 같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시부야의 아파트에 돌아와 나는 소파에 뒹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우편함에 들어 있던 네댓 통의 편지를 체크했다. 어느 것이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 관계의 편지였다. 읽는 건 전부 뒤로 미루고 개봉만 한 채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쳤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몹시 신경이 흥분해 있어서 제대로 잠이 들 것 같지가 않았다. 긴 하루였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길게 늘어졌던 하루. 하루 종일 제트 코스터를 타고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도대체 며칠 동안이나 삿포로에 있었단 말일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뿐. 수면 시간이 혼란돼 있었다. 하늘은 벌어진 틈새도 없이 회색이었다. 사건과 날짜가 온통 뒤섞여져 있었다. 우선 프런트 담당의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했다. 옛날의 동료에게 전화를 해서 돌핀 호텔에 관한 조사를 하게 했다. 양사나이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영화관에 들어가 키키와 고혼다가 나오는 영화를 봤다. 열세 살 예쁜 여자아이와 둘이서 비치 보이즈를 합창했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왔다. 모두 며칠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내일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일 생각할 수 있는 일은 내일 생각하자.
나는 주방으로 가서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라서, 아무것도 넣지 않은 스트레이트로 그냥 마셨다. 그리고 반쯤 남아 있던 크래커를 몇 개 먹었다. 크래커는 내 머릿속처럼이나 습기를 머금고 눅눅했다. 정다운 모다네아즈가 다정한 토미 도오시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낡은 레코드를 작은 소리로 틀었다. 내 머리처럼이나 약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소음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폐는 끼치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 완결돼 있다.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내 머리처럼.
웬일이세요, 하고 내 머릿속에서 키키가 말했다. 카메라가 빙그르르 회전했다. 고혼다의 단정한 손가락이 그의 등허리를 상냥하게 기어 다니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숨겨진 수로라도 찾아다니듯. 웬일일까, 키키? 나는 분명 어지간히 혼란되어 있다. 나는 예전만큼 자신에게 자신을 갖지 못한다. 애정과 중고 스바루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런가? 나는 고혼다의 단정한 손가락에 질투하고 있다. 유키는 어김없이 담뱃불을 껐을까? 어김없이 가스스토브의 스위치를 껐을까? 아빠 같애. 정말. 자신에게 자신을 갖지 못하겠다. 그리고 나는 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코끼리의 무덤 같은 곳에서 이런 식으로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면서 늙어버리게 된단 말인가? 하지만 모든 것은 내일이다. 나는 이를 닦고, 파자마로 갈아입고, 그리곤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다 마셨다. 침대에 들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잠시 동안 방 한가운데에 서서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금방 스토브를 껐어." 하고 유키가 말했다.
"담뱃불 처리도 했어. 그러면 되지요? 안심돼요?"
"그러면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잘 자" 하고 나는 말했다.
"저어" 하고 유키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두었다.
"당신은 삿포로의 그 호텔에서 양모피를 걸친 사람을 보았겠지요?"
나는 금이 간 타조 알을 품고 있는 그런 꼴로 수화기를 가슴에 안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 알 수 있어요. 아저씨가 그걸 봤다는 걸. 줄곧 잠자코 있었지만 알 수 있어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넌 양사나이를 만났어?" 하고 나는 물었다.
"으응" 하고 유키는 애매하게 말하고는, 킁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이야긴 또 다음에, 다음에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죠. 오늘은 이젠 졸려."
그리고 그녀는 찰칵 전화를 끊었다. 관자놀이가 아팠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다시 위스키를 마셨다. 내 몸은 어쩔 수도 없이 흔들려대고만 있었다. 제트 코스터는 소리를 내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결돼 있어"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연결돼 있어" 하고 사고가 메아리쳤다. 이것저것들이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고 있다.
17
주방에서 싱크대에 기대어 서서 또 한 잔 위스키를 마시고,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다. 유키에게 다시 한 번 이쪽에서 전화를 걸어볼까도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 양사나이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하지만 나는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긴 하루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또 다음에" 하고 전화를 끊었지 않은가. 또 다음번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그녀의 아파트 전화번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침대로 들어가 잠이 오지 않는 대로 베개 맡의 전화를 10분이나 15분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또 유키에게서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은 유키가 아닌 다른 누구로부터라도. 그럴 때의 전화기는 내동댕이쳐진 시한폭탄처럼 여겨진다. 언제 울리기 시작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가능성만이 시간을 새긴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전화기라는 건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다. 참으로 기묘하다. 평소엔 깨닫지 못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입체성에는 불가사의한 절실함이 느껴진다. 전화는 몹시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도 보이며, 역으로 그러한 전화라는 형태에 묶여 있는 것을 증오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서툰 육체에게 주어진 순수 개념처럼 보인다.
전화. 나는 전화국을 생각했다. 선이 연결돼 있다. 이 방에서 죽 어디까지나 그 선은 연결돼 있다. 나는 원리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연결될 수가 있다. 앵커리지에라도 전화를 걸 수 있다. 돌핀 호텔에라도, 헤어진 아내에게라도 전화를 걸 수 있다. 거기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있다. 연결점은 전화국에 있다. 컴퓨터가 그 연결점을 처리하고 있다. 숫자 배열에 의해 연결점이 전환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한다. 전선이나 지하 케이블이나 해저 터널이나 통신 위성 등등을 통해서 우리들은 연결된다. 거대한 컴퓨터가 그것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방식으로서 제아무리 우수하고 정밀한 것이라 해도, 우리들이 이야기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연결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러한 의지를 가졌다 해도, 가령 이번과 같이 이쪽이 상대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한다면 물어보는 걸 잊는 것이다. 연결될 수가 없다. 또한 번호를 제대로 들었다 해도, 잊어버리거나 메모를 분실해 버리는 수도 있다. 번호를 기억하고 있더라도 다이얼을 잘못 돌리는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무반성한 종족인 것이다. 그리고 또 있다. 내가 가령 그러한 조건들을 완비해서 유키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해도, 그녀는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안녕(탕!)" 하고 전화를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대화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방적인 감정의 제시일 수밖에 없다. 전화는 그런 사실에 초조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나는 전화라는 것을 여성형으로 간주하기로 한다. 자신이 순수 개념으로서 자립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불확정하며 불완전한 의지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 불완전하고, 너무나 우발적이며, 너무나 수동적인 것이다.
나는 베개 위에 한쪽 팔꿈치를 짚고 그 같은 전화의 초조해 하는 꼴을 얼마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내 탈은 아니다, 하고 나는 전화를 향해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건 그런 것이다. 불완전하고 우발적이며 수동적인 것이야. 내가 나쁜 건 아니다. 필시 그녀는 어딜 가나 초조해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방에 속해 있음으로써 그녀의 초조감은 얼마쯤은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선 얼마간은 나도 책임을 느낀다. 내가 그 불완전성과 우발성과 수동성을 부지불식중에 부채질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나는 헤어진 아내를 문득 생각했다. 전화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는 아내를 사랑했었다. 우리는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 농담도 주고받곤 했다. 몇 백 번이나 성교를 했다. 이곳저곳으로 여행했다. 하지만 때때로 아내는 가만히 이런 식으로 나를 비나하곤 했다. 밤중에, 조용히, 가만히 그녀는 나의 불완전성과 우발성과 수동성을 비난했다. 그녀는 초조해했다. 우리는 잘해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요구하고 있는 것, 그녀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과 나의 존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아내는 커뮤니케이션의 자립성 같은 것을 요구했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얼룩 한 점 없는 백기를 내걸고 사람들을 빛나는 무혈 혁명으로 선도해 가는 그런 장면을. 완전성이 불완전성을 삼키고 치유해버리는 그런 상황을. 그런 게 그녀에게 있어서의 사랑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물론 그렇지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의 사랑이란 어색한 육체를 가지게 된 순수한 개념이며, 그것은 지하케이블이니 전선이니를 뭉기적뭉기적 통과해 가까스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딘가로 연결돼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굉장히 불완전한 물건인 것이다. 가끔 혼선도 있다. 번호도 알지 못하게 된다. 전화가 잘못 걸려오는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탓은 아니다. 우리들이 이 육체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은 영원히 그런 것이다. 원리적으로 그런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나가버렸다. 어쩌면 내가 그 불완전성을 부채질하고 조장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전화를 보면서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나가버릴 때까지의 마지막 3개월가량은 그녀는 나와 한 번도 잠자리를 함께 해 주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엔 그녀가 다른 누구와 자고 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만.
"저어 미안하지만, 다른 데로 가서 다른 사람과 자고 와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다른 여자와 별로 자고 싶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로 정말로 다른 여자와는 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여자와 자고 오면 좋겠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의 일을 서로가 좀 다시 생각해 봐요, 하고. 결국 나는 누구와도 잠자리를 함께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성적으로 결백한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좀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 여자와 자거나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와 자고 싶으니까 자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그녀는 집을 나가버렸다. 가령 내가 그때 아내가 하는 말대로 어딘가에서 다른 여자와 자거나 했으면, 아내는 집을 안 나갔을까?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약간이나마 자립시키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싱거운 일이다. 나는 그때에 다른 여자와 전혀 자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나로선 잘 알 수가 없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혼한 후에도 아무 말도 없었다. 극히 상징적으로밖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언제나 상징적인 어투로만 이야기 했다.
고속도로의 울림은 열두 시를 지나서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이따금씩 오토바이의 심한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방음용의 밀폐 유리를 통해서 그 음향은 희미하게 침잠해 있었지만, 그 존재감은 무겁고 농밀했다.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며 나의 인생에 근접해 있었다. 나는 지표의 어느 한 부분에다 확고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전화를 바라보기에 싫증이 나자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력감이 소리도 없이 그 공백을 채웠다. 제법 솜씨 좋게, 재빠르게. 그리고 서서히 잠이 찾아왔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나는 주소록을 뒤져 잘 아는 사이인 예능 관계의 대행 업무를 하고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잡지의 인터뷰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그와는 이제까지 몇 번인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아침 열 시여서 그는 아직 취침 중이었다. 나는 잠을 깨워버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그러고 나서 고혼다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좀 투덜거리는 투였지만, 그래도 고혼다의 소속된 프로덕션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중견 프로덕션이었다.
나는 그 번호를 돌렸다. 그리고 담당 매니저가 나오자 잡지의 이름을 알려주고, 고혼다와 연락을 취하고 싶다고 말했다. 취재할 것인가요, 하고 상대는 물어왔다. 정확하게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뭔가요, 하고 상대는 물었다. 하긴 정당한 의문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어서,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냐고 상대는 다시 물었다. 우리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리고 그와 꼭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했다. 이름을 말해 달라고 상대는 말했다. 나는 이름을 댔다. 그는 이름을 메모했다. 중요한 일이다, 하고 나는 말했다. 저희 쪽에서 전해 드리지요, 하고 상대는 말했다.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학교 동창생만 해도 몇 백 명이 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 만일 이번에 이 일로 연락을 취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이쪽도 업무상 편의를 봐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상대는 그 점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에겐 그런 벌충을 해줄 만한 힘은 없다. 내가 하는 일은 인터뷰하고 오라는 상대를 인터뷰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상대로선 그런 건 모른다. 안다면 문제가 된다.
"취재는 아니군요." 하고 상대는 말했다.
"취재라면 나를 통해 주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공식적으로 행해 주지 않으면."
아니다, 백 퍼센트 개인적인 일이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쪽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가르쳐 주었다.
"중학교 동창생이라구요." 하고 그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늘밤 아니면 내일에라도 전화 드리게 하지요. 물론 본인에게 그럴 생각이 있으면 그러겠다는 말입니다만."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바쁜 사람이고, 중학교 동창생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죠. 어린애가 아니니 무리하게 전화통 앞으로 끌고 올 수도 없으니까요."
"물론"
그리고서 상대는 하품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하는 수 없지. 아직 아침 열시인 것이다.
오전 중에 차를 몰고 아오야마의 기노쿠니야로 가서 쇼핑을 했다. 주차장에서 나는 서브와 메르세데스 사이에 스바루를 멈춰 세웠다. 마치 나의 분신처럼 초라해 보이는 구형의 스바루. 하지만 나는 기노쿠니야에서 쇼핑하기를 좋아한다. 싱거운 소리 같지만, 여기 이 가게의 상추가 제일 오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폐점 후에 상추를 모아놓고 특수한 처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재자 전화를 세트했다. 메시지는 아무것도 남겨있지 않았다. 아무한테서도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라디오에서 흐르는 <샤프트의 테마>를 들으면서 사 가지고 온 야채를 하나하나 포장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 사내는 누구냐?" 샤프트! 그러고 나서 나는 시부야의 영화관에 가서 또 <짝사랑>을 보았다. 이제 이걸로 네 번째였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대강 시간을 계산해서 영화관에 들어가, 키키가 나오는 장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잘한 부분까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정경은 언제나,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일요일 아침. 어디에나 있는 한가한 일요일의 햇빛. 창문의 블라인드. 알몸인 여자의 등허리. 그 위를 기어 다니는 남자의 손가락. 벽에는 르꼬르뷔제의 그림이 걸려 있다. 침대의 베개 맡에는 커티셔크의 병이 놓여 있다. 유리잔이 두 개, 그리고 재떨이. 세븐스타의 담뱃갑. 방에는 스테레오 장치가 있다. 꽃병도 있다. 꽃병에는 마가렛 비슷한 꽃이 꽂혀있다. 방바닥에는 벗은 옷이 던져져 있다. 책장도 보인다. 카메라가 빙그르르 돌아간다. 키키다. 나는 무의식중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고혼다 군이 키키를 안고 있다. 살그머니 상냥하게. "아니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입으로 말하고 만다. 저쪽 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내 쪽을 힐끗 건너다본다.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온다. 그녀의 머리는 뒤에서 묵어 아래로 드리운 형태로 하고 있다. 요트파커와 블루진, 빨간 아디다스 슈즈, 손에는 케이크인지 쿠키인지 그런 것을 들고 있다. 그녀가 방안에 들어왔다가 달아난다. 고혼다 군은 망연자실해 한다. 그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눈부신 빛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가 달려 나간 뒤의 공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키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한다. "웬일이세요?"
나는 영화관을 나섰다. 그리고 정처 없이 시부야 거리를 걸어 돌아다녔다. 벌써 봄방학에 들어가 있었던 탓으로, 거리는 중학생과 고교생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맥도날드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먹고, <포파이>인지 <핫덕 프레스>인지 이름도 잘 모르는 가게에서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사고, 게임 센터에서 잔돈을 쓰고 있었다. 그 언저리의 가게에선 커다란 소리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스티비 원더랑 홀 & 오츠랑, 빠징꼬 가게의 행진곡이랑, 우익 선전차의 군가랑, 이런 것 저런 것이 혼연일체가 되어 혼돈과도 같이 시끌벅적했다. 시부야 역전에서는 선거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나는 키키의 허리를 기어 다니는 고혼다 군의 날렵하고 단정한 열 개의 손가락 끝을 떠올리면서, 거리를 걸어갔다. 하라주쿠까지 걷고, 그로부터 세다가야를 빠져나와서 진구구장에 갔다가, 아오야마 큰길로 해서 묘지 아래를 향해 걷고, 네즈 미술관으로 향하고, <피카로>의 앞을 지났으며, 그리고 다시 기노쿠니야까지 갔다. 그리고 진탄빌딩 앞을 지나서 시부야로 돌아왔다.
제법 적당한 거리였다. 시부야에 도착하자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다. 고개 위에서 보니, 가지각색의 네온이 켜지기 시작한 거리의 큰길을. 거무칙칙한 코트에 몸을 감싼 무표정한 샐러리맨들이 암류를 거슬러 오르는 차가운 연어 떼처럼 균일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방에 돌아와 보니 전화의 빨간 램프가 켜져 있었다. 나는 방안의 불을 켜고, 코트를 벗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의 재생 스위치를 눌러 보았다. 테이프가 되감기고, 그 다음에 플레이 백 되었다.
"어이, 오랜만이군." 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18
"어이, 오랜만이군." 하고 고혼다 군이 말하는 소리는 아주 투명하고 명쾌한 목소리였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으며,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으며, 긴장도 없으나, 그렇다고 너무 늘어져 있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완벽한 목소리. 그것이 고혼다 군의 목소리라는 건 일순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한번 들으면 웬만해선 잊을 수 없는 종류의 목소리였다. 그의 웃는 얼굴이랑, 청결한 잇속이랑, 쑥 빠진 콧줄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혼다 군의 목소리 같은 건 그때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며, 떠올린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목소리는 조용한 한밤중에 잘 울리는 종이라도 친 것처럼 나의 머리 한구석에 매달려 있던 잠재적 기억을 일순에 또렷또렷하게 되살려 놓았다. 대단하구나, 확실히, 하고 나는 느꼈다.
"난 오늘밤 집에 있을 테니까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 주시오. 어차피 아침까지 자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그는 말하고, 전화번호를 두 번 되풀이했다.
"그럼 또" 하고 그는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국번으로 보아 나의 아파트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말한 번호를 메모하고 나서, 그것을 천천히 돌려보았다. 6회째의 콜에서 부재중이므로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취입해 주십시오,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와 전화한 시간을 취입했다. 그리고 줄곧 여기 있겠노라고 말했다. 꽤 까다로운 세상이군.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가서, 샐러리를 씻었다. 잘게 썰어서 마요네즈를 끼얹어, 그것을 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까 전화가 걸려왔다. 유키한테서였다. 지금 뭘 하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부엌에서 샐러리를 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고 말했다. 비참하네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럴 정도는 아니야, 나는 말했다. 더욱 비참한 건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할 뿐인 것이다.
"넌 지금 어디 있지?"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아직도 아카사카의 아파트"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제부터 어딘가 드라이브 가지 않을래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는 걸"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고 있거든. 요 다음으로 하자구. 보라구, 그렇지, 어제의 이야기
인데, 양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을 넌 못 봤니? 그 이야기가 듣고 싶단 말이야. 그거, 굉장히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다시 요, 다음" 하고 그녀는 한껏 찰칵 소리는 내어 전화를 매정하게 끊었다.
맙소사, 하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한참동안 손에 든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나는 샐러리를 다 씹고 나서,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했다. 스파게티로 할까, 하고 생각했다. 마늘을 두 알 굵직하게 잘라서 올리브 오일로 볶는다. 그 다음에 빨간 고추를 통째 거기에 넣는다. 그것도 마늘과 함께 볶는다. 쓴맛이 나기 전에 마늘과 고추를 꺼낸다. 꺼내는 순간을 맞추기가 제법 까다롭다. 햄을 잘라서 거기에 넣고, 매콤해질 때까지 볶는다. 거기에다 막 삶은 스파게티를 넣어 살짝 건져내가지고 잘게 다진 파슬리를 뿌린다. 그러고 나서 산뜻한 모짜레라 치즈와 토마토 샐러드... 나쁘지 않지.
스파게티 국물을 막 끊이려는 참에 또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가스를 끄고 전화기 앞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이, 오랜만이군." 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반가운데. 건강한가?"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매니저가 말하던데, 무슨 용건이 있다면서? 설마 함께 또 개구리 해부라도 하고 싶다, 그건 아닐 테지?" 그는 유쾌하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아니,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야. 그래서 바쁜 줄은 알면서도, 전화해 본 거야. 좀 이상한 이야긴데 말이지. 실은..."
"저 말이지, 지금 바쁜가?" 고혼다 군이 말했다.
"아니, 별로 바쁘진 않아. 시간이 남기에 저녁 식사를 만들까 하는 참이야."
"거 마침 잘 됐군. 좋다면 밖에서 함께 저녁이라도 먹자구. 나도 마침 누군가 밥 먹을 상대가 없을까 하고 찾고 있던 참이라네."
"하지만 괜찮을까? 갑자기 이런 식으로 전화해서. 말이지, 저어..."
"사양할 것 없잖아. 어차피 날마다 그 시간이 오면 배가 고프고, 좋건 싫건 간에, 밥은 먹어야 하잖아. 자네를 위해 억지로 밥 먹는 건 아니겠고. 천천히 식사하면서 술이라도 마시고 둘이서 옛이야기를 하자구. 옛 친구들과도 만나지 못했다구. 자네만 폐가 되지 않는다면 꼭 만나고 싶군. 폐가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할 이야기가 있는 건 이쪽이란 말이야."
"그럼 지금 자네한테로 갈게. 어디야, 거기?"
나는 주소와 아파트 이름을 말했다.
"응, 그렇다면 바로 우리 집 근처군. 한 20분이면 갈 수 있을 게야. 곧 나올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으라구. 지금 제법 배가 고프단 말이야. 오래는 기다리지 못하겠어."
그렇게 하마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기울였다. 옛이야기?
나하고 고혼다 군 사이에 어떤 옛이야기가 있는지, 나로선 전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하고 그하고는 당시에 특별히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며, 이야기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었다. 그는 훌륭한 학급의 찬란한 엘리트이고, 나는 어느 쪽이냐면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가 내 이름을 이제껏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나로선 기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옛이야기란 도대체 무엇이냐? 이야기할 그 무엇이 있담? 하지만 그래 어떻든 간에, 쌀쌀맞은 대접을 받기보다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대접을 받는 편이 훨씬 좋았다.
나는 잽싸게 면도를 하고, 오렌지색 스트라이프의 셔츠 위에다 캘빈 클라인의 트위드 재킷을 걸치고, 이전의 여자 친구가 생일날에 선물로 준 아르마니의 니트 타이를 매었다. 그리고 갓 세탁한 블루진을 걸치고, 사서 얼마 안 되는 새하얀 <야마하>의 테니스 슈즈를 준비했다. 그것은 나의 워드로브 중에선 제일 멋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러한 '멋'을 이해해 주면 좋으련만 싶었다. 나는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영화배우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럴 때에 어떤 복장을 하고 가면 좋은 것인지 어림도 서지 않았다.
꼭 20분 만에 그는 찾아왔다. 50세 안팎의 예절 바른 말씨를 쓰는 운전수가 나의 방문 벨을 누르고, 고혼다 군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운전수라면 메르세데스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메르세데스였다. 꼭 모터보트 같다. 유리는 안이 보이지 않게끔 되어있다. 운전수가 찰깍! 하는 기분 좋은 소라를 내며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고혼다 군이 있었다.
"어이, 반갑군." 하고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악수 같은 걸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굉장히 안도했다.
"오랜만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극히 보통의 V넥 스웨터 위에다 감색 윈드브레이커를 걸치고, 낡은 크림빛 코듀로이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구두는 색 바랜 아식스의 조깅 슈즈였다. 하지만 그의 옷매무새는 훌륭했다. 훌륭하지도 않은 복장인데도, 그가 입으면 아주 고상하고 기분 좋아 보이니 말이다. 그는 나의 복장을 빙그레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아주 멋지군." 그는 말했다.
"취미가 좋은데."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영화 스타 같군." 그가 말했다.
야유가 아니라, 그저 그런 농담이었다. 내가 웃고, 그도 웃었다. 둘이 다 느슨했다. 그런 다음에 고혼다 군은 차칸을 둘러보았다.
"어때, 굉장한 자동차 아닌가? 필요할 때에 프로덕션이 빌려주는 거지. 운전수까지 붙여서. 이러면 사고를 일으키지 않으며, 음주 운전도 하지 않고 안전하단 말일세. 그들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렇고. 어느 쪽이나 다 행복해지거든."
"옳거니"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이런 거 운전하지 않지. 나는 좀 더 작은 차를 좋아하거든."
"포르쉐?"
"마세라티."
"나는 그보다 좀 더 작은 차를 좋아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시빅?"
"스바루."
"스바루" 고혼다 군은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탔었지. 내가 맨 처음 샀던 차라구. 내 돈으로 샀지. 최초의 영화에 출연한 개런티로 중고를 샀단 말이야. 2편째로 주역에 버금가는 역할이 붙었던 무렵이야. 곧 주의를 받았지. 너, 스타가 되려거든 스바루 같은 거 타지 말라구. 그래서 다시 샀지. 그런 세계라구, 영화계란. 하지만 좋은 차였어. 실용적이고. 값이 싸. 난 이게 좋아."
"나도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어째서 마세라티 같은 걸 탄다고 생각했지?"
"모르겠는 걸."
"경비를 사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하고 그는 좋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듯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매니저가 더욱 더 경비를 사용하라지 뭔가. 씀씀이가 부족하다는 걸세. 그래서 비싼 차를 사면 경비가 잔뜩 빠지거든. 모두가 행복해진다구."
맙소사, 모두들 경비 이외의 것을 생각지 못한단 말인가?
"배가 고픈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툼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자리를 함께 해 주겠나?"
알겠다고 내가 말하자, 그는 운전수더러 행선지를 말했다. 운전수는 잠자코 끄덕거렸다. 고혼다 군은 내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짓고는, "자, 그럼" 하고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만, 혼자서 저녁 식사 채비를 하고 있다면, 자넨 필시 독신인 모양이군?"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결혼하고 이혼했지."
"그럼, 나하고 마찬가지야" 하고 그는 말했다.
"결혼하고, 이혼했지. 그래서 위자료는 물었나?"
"안 물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한 푼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받지 않더라구."
"행운의 사나이로군." 그는 말했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나도 위자료는 물지 않았지만, 결혼 탓으로 빈털터리가 돼버렸지. 내 이혼 이야기 조금은 알고 있나?"
"막연히"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4년이던가. 5년 전에 인기 여배우와 결혼해서, 2년 남짓 지나서 이혼을 했었다. 주간 잡지가 거기에 관해서 이러쿵 저러쿵 써댔다. 진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상대방 여배우의 가족과 그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정은 알려진 것 같았다. 흔히 있는 경우였다. 상대방 여배우에게는 공 사 양면에 걸쳐 집요한 친척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반면 그는 '철부지'로 자라나, 태평스레 혼자서 살아왔다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되어 나갈 리가 없다.
"묘한 이야기지. 엊그제까지 함께 과학 실험을 하고 있었나 했더니, 다음에 만났을 때엔 어느 쪽이나 이혼 경험자로 돼 있다, 묘하다고 생각지 않나?"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둘째손가락 끝으로 눈두덩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런데, 자넨 어째서 이혼하게 됐지?"
"간단하다구. 어느 날 여편네가 나가버렸단 말야."
"돌연?"
"그렇다구. 아무 말 없이. 돌연 나가버렸지. 예감조차 없었어. 집에 돌아와 보니 없었어. 어딘가 쇼핑하러 갔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었지. 그래서 저녁밥을 짓고 기다렸었지. 하지만 아침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어. 그 다음에 이혼 청구 용지가 날아들었지."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투는 자네를 다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자네는 나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 하고 그는 말했다.
"어째서?" 내가 물었다.
"내 경우, 여편네는 나가버리지 않았지. 내가 두들겨 맞고 쫓겨났단 말이야. 말 그대로 말야. 어느 날 두들겨 맞고 쫓겨났지." 그는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먼 데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이야기라구. 하나에서 열까지 계획적이었단 말이야. <사기>나 다를 바 없었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것저것의 명의가 서슴없이 바뀌어 지고 있었지. 그건 참 볼 만한 솜씨였어. 나는 그런 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지. 나는 그 여자와, 같은 세무사한테 의뢰하고 있어서 아주 위임해 버렸었지. 신용했었어. 인감도장만 해도, 증서만 해도, 세금 신고에 필요하니까 맡기라고 하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맡겼다구. 나는 그러한 세세한 일은 질색이고 해서, 맡길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맡기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 놈이 저쪽 친척들과 붙어 있었더란 말일세. 알고 보니 난 깨끗이 빈털터리가 돼 있었지. 뼈다귀마저 씹힌 꼴이지 뭔가. 그리고 난 쓸모없게 된 개처럼 두들겨 맞고 쫓겨난 셈이지. 좋은 공부가 됐어." 그리고 그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나도 좀 어른이 되었지."
"벌써 서른네 살이야. 싫어도 모두 어른이 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구. 바로 그렇지.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인간이란 묘하다구. 일순에 나이를 먹는단 말일세. 참말이지. 나는 예전엔 인간이란 건 1년, 1년 순번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고혼다 군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듯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진 않지. 인간은 일순에 나이를 먹는다구."
고혼다 군이 데리고 간 곳은, 롭퐁기 변두리의 조용한 한 모퉁이에 있는,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운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현관에 메르세데스를 세우자, 가게 안에서 매니저와 보이가 나와서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고혼다 군은 한 시간 가량 지나서 와달라고 운전수에게 말했다. 메르세데스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거대한 물고기처럼, 소리도 없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우리는 조금 깊숙한 벽 쪽에 가까운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가게 안은 화려한 복장을 한 고객들뿐이었는데, 코듀로이 바지와 조깅화의 매무새의 고혼다 군이 제일 멋스럽고 맵시있어 보였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떻든 그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뜨인단 말이다. 우리가 안에 들어서자 고객들은 다들 눈을 들어 그의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잠깐 2초만 보고 나서 사람들은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그 이상 보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인가 보다. 참으로 복잡한 세계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우선 스카치 워터를 주문했다.
"헤어진 여편네들을 위하여"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위스키를 마셨다.
"어리석은 이야기 같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난 그 여자를 아직도 좋아한단 말일세. 잊혀 지지가 않아. 다른 여자를 좋아할 수가 없어."
나는 크리스털 텀블러 안의, 굉장히 고상한 모양새로 쪼개진 얼음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는 어떤가?"
"내가 헤어진 여편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것?" 하고 내가 물었다.
"그래."
"모르겠는 걸"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난 그 여자가 가버리지 않기를 바랐었지. 하지만 그 여자는 가버렸어. 누가 나쁜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그건 일어나고 만 일이고, 이젠 기정사실이란 말이야. 그리고 나는 시간을 들여서 그 사실에 익숙해지려고 해왔단 말이야. 그것에 익숙해진다는 이외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해왔지. 그러니까 알 수 없다구."
"응" 하고 그는 말했다.
"보라구, 이런 이야기는 자네한테 고통일까?"
"그렇진 않아" 나는 말했다.
"이건 사실이란 말일세. 사실을 회피할 도리가 없어. 그러니까 고통이 아니라잖아. 잘 알 수 없는 감각이지."
그는 딱! 하고 가볍게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그래, 그렇다구. 잘 알 수 없는 감각. 바로 그렇지. 인력이 변화해 버린 것 같은 감각. 고통일 수조차 없지."
웨이터가 왔다. 우리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둘이 다 스테이크는 중간 정도로 익힌 것과 두 잔의 스카치 워터를 주문했다.
"그렇지"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넨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다고 했겠다. 먼저 그걸 들어 두지. 술 취하기 전에 말이지."
"좀 이상한 이야기란 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을 나에게 돌렸다. 잘 훈련돼 있기는 하지만, 불쾌감을 주지 않는 웃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이야기라는 거 좋아한다구" 하고 그는 말했다.
"저번에 자네가 출연한 영화를 보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짝사랑>?"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편없는 영화. 형편없는 감독. 형편없는 각본. 여느 때나 다름없지. 그 영화에 관계한 축들은 모두 다 그 일을 잊어버리고 싶어 하지."
"네 번 봤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허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돈을 걸어도 좋지만, 그 영화를 네 번 본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다구. 이 은하계 우주의 어디에도. 무엇을 걸어도 좋아."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영화에 나와 있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곤 "자네 말고 말이야" 하고 덧붙였다. 고혼다 군은 둘째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았다.
"누구?"
"이름을 모른다구. 일요일 아침에 자네와 함께 자고 있는 배역의 여자아이."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키."
"키키"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기묘한 이름이다. 딴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게 그 여자의 이름이라구. 적어도 아무도 그 이름밖엔 알지 못해. 우리들의 조그만 기묘한 세계에선 그 여자는 키키라는 이름으로 통했고, 그걸로 충분했었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여자한테 연락을 취할 수 있을까?"
"안 되지" 하고 그는 말했다.
"어째서?"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지. 우선 첫째로 키키는 직업적인 여배우가 아니지. 그래서 이야기가 까다롭단 말일세. 배우라는 건 유명이건 무명이건, 모두 어김없이 어느 프로덕션엔가 소속돼 있지. 그래서 곧 연락이 된다구. 그들의 대부분은 전화통 앞에 앉아서 연락을 기다리지. 하지만 키키는 그렇지 않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어. 그 여자는 공교롭게 그 영화에 나왔을 뿐이야. 완전한 파트 타임이란 말이야."
"어째서 그 영화에 나오게 됐지?"
"내가 추천했어." 하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키키한테 영화에 나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래서 감독에게 키키를 추천했단 말일세."
"어째서?"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약간 입술을 찡그렸다.
"그 아이한테 재능 같은 게 있었거든. 그 뭐랄까, 존재감. 그런 게 있단 말일세. 느낀단 말이야. 굉장한 미인이랄 것도 아니지. 연기력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도 아니지. 다만 그 아이가 있는 것만으로도 화면이 제법 잡힌다 그 말일세. 그래서 영화에 내놓아 봤지. 결과는 좋았어. 다들 키키에 대해선 호감을 가졌었지.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 장면은 잘 됐었지. 사실적이었어. 안 그래?"
"그렇더군."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적이었어. 확실히."
"그래서, 난 그 아이를 그냥 영화의 세계로 넣으려고 했었지. 그 아이라면 어지간히 해낼 줄 알았거든. 하지만 안 됐어. 꺼져버렸어. 이게 제2의 문제점이야. 그 아이는 꺼져버렸어. 연기처럼. 아침이슬처럼."
"꺼졌어?"
"응, 글자 그대로 꺼져버렸다구. 한 달쯤 전 일인데, 오디션에 오지 않았더란 말야. 오디션에만 나오면, 그 새 영화에서 꽤 그럴싸한 배역이 붙게끔 공작해서 세트해 놓았는데 말이야. 시간에 늦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결국 키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그걸로 마지막. 그뿐이란 말일세. 어디에도 종적이 없어."
그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서 웨이터를 부르고, 스카치 워터 두 잔을 더 주문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자넨 키키하고 함께 잔 적이 있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응, 즉 말일세, 가령 내가 그 아이하고 잔 적이 있다고 한다면, 자넨 기분 상하게 될까?"
"상하지 않어"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았어." 하고 고혼다 군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난 거짓말하는 게 질색이거든. 그러니까 명백히 말해 두겠어. 난 몇 번인가 그 아이하고 잤어. 좋은 아이야. 좀 색다른 데가 있지만, 하지만 무엇인지 남에게 호소하는 데가 있어. 여배우가 됐더라면 좋았을 걸. 좋은 데까지 갔을지도 몰라. 애석한 일이야."
"연락처는 알지 못하는가? 본명이라든지 그런 거?"
"안 되겠던 걸. 찾아낼 수가 없어. 아무도 알지 못해. 키키라는 것밖엔 모르지."
"영화회사의 경리부에 지불 전표가 있을 테지?" 하고 나는 말했다.
"개런티의 지불 전표. 그런 건 본명과 주소가 필요할 테지. '원천 징수'가 있으니까."
"물론 그것도 조사해 봤다구. 하지만 안 될 걸. 그녀는 개런티를 받지 않았단 말이야. 돈을 받지 않았으니, 영수증도 없을 수밖에. 제로야."
"왜 돈을 받지 않았을까?"
"나한테 물어봤자 난처할 뿐이야" 하고 고혼다 군은 석 잔째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이름이라든가 주소라든가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모르겠는 걸. 그녀는 수수께끼의 여자라구. 하지만 어쨌든 나하고 자네 사이엔 세 가지 공통점이 생긴 셈이지. 첫째로 중학교 과학실험반이 같았다는 것. 둘째로 어느 쪽이나 이혼했다는 것. 셋째로 어느 쪽이나 키키하고 잤다는 것."
얼마 후 샐러드와 스테이크가 나왔다. 훌륭한 스테이크였다. 그림에 그린 것 같이 정확하게 중간 정도로 익힌 고기였다. 고혼다 군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식사를 했다. 그의 테이블 매너는 매우 편한 것이어서, 매너 교실에선 도저히 좋은 점수는 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함께 식사를 하기엔 편했으며, 아주 맛을 즐기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본다면 '차밍' 하다고 말할 게다. 그러한 몸놀림이라는 건 갑자기 터득하려고 한 대서 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넨 어디서 키키하고 알게 됐지?" 내가 고기를 썰면서 물어보았다.
"어디였었지?" 하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여자아이를 불렀을 때에, 그녀가 따라왔었지, 여자아이라지만, 그래, 전화로 부른 여자.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한 후로 말이지, 난 줄곧 그런 여자들하고 잠자리를 함께 했지. 번잡하지 않거든. 풋내기는 마땅치 못하고, 동업자 상대는 주간잡지에서 써대고 하니. 전화 한 통이면 와 주거든. 요금은 비싸다구. 하지만 비밀은 지켜주지. 절대로 지켜 주지. 프로덕션의 작자가 소개해 줬단 말이야. 여자아이들도 모두 좋은 아이야. 편하거든. 프로니까 말야. 하지만 닳지 않았지. 서로 즐기고." 그는 고기를 썰어서 천천히 맛보면서 먹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집 스테이크 나쁘지 않지?" 하고 그가 물었다.
"나쁘지 않군." 내가 말했다.
"더 나무랄 데가 없군. 좋은 집인데." 그는 끄덕였다.
"하지만 한 달에 여섯 번쯤 오면 싫증도 나지."
"어째서 여섯 번이나 온단 말이지?"
"단골이니까 그렇지. 내가 들어서도 아무도 수선거리지 않거든. 종업원들이 수군대지도 않고 말이야. 손님들도 유명인에게 익숙해 있으니까, 멀끔멀끔 보지도 않거든. 고기를 썰 때에 사인해달라고 하는 일도 없고, 그런 집이 아니고선 차분하게 식사도 할 수가 없단 말일세. 솔직한 이야기지만."
"피곤한 인생 같군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경비도 써야겠고 말이지."
"참말이야." 그가 말했다.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콜걸을 불렀다는 데까지야."
"그렇지" 하고 고혼다 군은 냅킨 가장자리로 입가를 닦았다.
"그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단골 여자아이를 불렀지. 그런데, 그 아이는 없었어. 그래서 딴 여자아이가 둘 왔었지. 어느 쪽이든 골라잡으라는 거 였나봐. 나는 고급 손님이라서 말야. 서비스가 좋다구. 그중 하나가 키키였거든. 어떡할까 했지만, 골라잡기가 귀찮아서, 두 아이와 함께 잤지."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기분 상하지 않겠나?"
"걱정 마. 고교 시절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고교 시절엔 나도 그런 짓은 안 했지" 하고 고혼다 군은 웃었다.
"그래 어떻든, 그 두 아이와 잤다. 야릇한 짝 맞추기였지. 게다가, 또 한쪽 여자아이는 굉장히 화려하단 말야. 짜릿할 만큼 말야. 굉장한 미인인데, 몸뚱이 구석구석까지 돈을 들였어. 이거 거짓말 아니라구. 나도 이 세계에서 이런 저런 잘 생겼다는 여자들을 보아왔지만, 그 아인 그중에서도 제법 좋은 편이지. 성격도 좋고 말이야. 머리도 나쁘지 않고, 그럴싸한 대화도 할 수 있고. 그런데 키키 쪽은 그렇지 않단 말이야. 그다지 미인이랄 것도 아니지. 그래, 예쁘긴 예쁘다구. 하지만, 그 클럽 아이들이란 말야, 다들 제법 반듯한 미인이라구. 그런데 그녀는 뭐랄까..."
"캐주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그거야. 캐주얼하단 말야. 참으로. 양복만 해도 보통 옷이겠다, 이야기도 별도 하지 않겠다, 화장끼도 그다지 없겠다. 아무러면 어떠냐는 느낌이고. 한데 묘한 일이지만 말야, 차츰 차츰 그녀한테로 마음이 끌리더란 말이야 키키 쪽으로. 셋이서 하고 난 다음에, 모두 함께 방바닥에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 오래간만에 유쾌하더군. 학생 시절 같아서. 그런 식으로 느슨하고 여유로울 수 있다는 건, 내내 없었단 말야. 그 후로 세 사람이서 잤지."
"언제쯤의 일이지?"
"이혼하고 반 년 쯤 뒤의 일이니, 그렇군, 1년 반쯤 전의 일일까"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세 사람이서 잔 건 아마 다섯 번 아니면 여섯 번쯤 될 거라고 생각돼. 키키하고 단 둘이서 잔적은 없군. 왜 그럴까? 자도 됐을 텐데 말이지."
"왜 그럴까?" 하고 나도 물었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다 놓고, 또 집게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가볍게 대었다. 그것이 그가 무엇을 생각할 때의 버릇인 것 같았다. 차밍, 하고 여자아이라면 말할게다.
"어쩌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몰라"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두렵다?"
그 아이하고 단 둘이 되는 거 말일세"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그리곤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키키의 안에는 말이지, 뭔가 사람을 자극하고, 도발하게 하는 것이 있단 말이야. 적어도 나는 그러한 느낌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극히 막연하겠지만. 아니지, 도발이랄 건 아니지.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
"시사하고, 이끄는..." 하고 나는 말했다.
"응, 그럴지도 몰라. 잘은 모르겠어. 내가 느낀 건 굉장히 막연하다는 것이기 때문이야. 정확한 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어떻든 그녀하고 단 둘이 되는 건,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 사실은 그녀 쪽으로 훨씬 더 마음이 끌렸지만 말이야. 내가 하는 말, 어떻게 좀 이해가 되었을까?"
"알 것만 같애."
"요컨대 말이지, 키키하고 둘이서 잔다 해도, 난 편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일세. 그녀하고 관련을 가지면 나는 좀 더 깊은 데까지 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단 말일세. 어쩐지 말이야. 난 다만 편안하기 위해 여자아이하고 자고 싶었을 뿐이거든. 그래서 키키하고 둘이선 자지 않았었지. 그녀에게 대해선 아주 호감을 가졌었지만 말야."
우리는 얼마동안 잠자코 식사를 했다.
"오디션에 키키가 오지 않았던 날에, 나는 그 클럽에 전화를 걸어 봤어." 잠시 후에 고혼다 군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리곤 키키를 대달라고 했지. 하지만 그녀는 있지 않았어. 없어졌다고 하더군. 꺼졌단 말이야, 훌쩍. 어쩌면 내가 전화하더라도 키키는 없다고 하기로 했었는지도 몰라. 그건 알 수 없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어떻든 간에, 그녀는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지."
웨이터가 와서 접시를 거두고, 식후에 커피를 갔다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커피보단 술을 좀 더 마시고 싶군."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자넨 어때?"
"그러자구"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넉 잔째의 술이 왔다.
"오늘 낮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겠나?" 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줄곧 치과의사의 조수 노릇을 했었지. 배역 구실을 익히기 위해서지. 지금 TV의 연속 드라마에서 치과의사 역을 맡고 있거든. 내가 치과의사이고 나카노 요시코가 안과의사란 말이야. 두 병원이 같은 읍내에 있는데 말이지. 소꿉동무인데, 좀처럼 잘 어울려지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 어차피 TV드라마라는 건 다 흔히 있는 이야기 아닌가. 본 적이 있나?"
"본 적이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TV같은 거 보지 않거든, 뉴스밖엔. 뉴스도 주에 두어 번밖엔 보지 않지."
"현명하군." 고혼다 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쓰잘 데 없는 프로야. 나 자신이 출연하지 않았다면 나도 절대로 안 보지. 하지만 인기는 있어. 정말이지, 굉장히 인기가 있다구. 흔히 있는 이야기라는 건 민중의 지지를 받거든. 매주 투서가 잔뜩 몰려들지. 전국의 치과의사들이 편지를 보내온단 말이야. 손놀림이 다르다느니 치료법이 잘못됐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하고 그러한 세세한 항의를 해 온다구. 이러한 적당주의의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신경질이 치민다느니 하고 말야. 싫으면 안보면 그만이 아닌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말야, 의사라든지 학교선생님의 역이라면 언제나 나를 지명한다 그 말씀이야. 의사 역만도 수없이 했지. 해본 적이 없는 건 항문과의사 정도이지. 그건 TV영상이 좋지 못하거든 수의사까지도 했지. 산부인과의사도 했지. 학교선생님도 전체 교과를 했다구.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가정과 선생마저 했지. 왜 그럴까?"
"신뢰감을 가질 수 있어서 그렇지 않겠나?" 고혼다 군은 끄덕였다.
"필시 말이지. 필시 그렇겠지. 예전에 중고차 세일즈맨 역을 한 적이 있어. 한쪽 눈이 의안이고, 무척 넉살이 좋은 역이지. 나는 굉장히 그 역이 좋았지. 보람도 있었고. 잘 해냈다 싶었지. 하지만 글렀어. 투서가 잔뜩 몰려들지 않겠나. 나한테 그런 역을 시키는 건 너무한다, 가엾지 뭐냐고 말야. 나한테 이런 역을 시킨다면 이젠 그 프로그램 스폰서의 상품은 사지 않겠노라고 그러지 않겠나. 뭐였더라, 그때의 스폰서는? 라이온치약이라던가 그랬지 아마, 아니지 선스타였던가, 잊어버렸어. 하지만 어떻든 도중에서 내 역은 꺼져버렸다구. 소멸했단 말야. 제법 중요한 역이었는데도, 자연소멸을 했지. 재미있는 역이였는데 말야... 그 후로 의사와 선생의 연속이라구."
"복잡도 한 인생이군 그래."
"혹은 단순하기도 한 인생" 하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글쎄, 오늘은 그 치과의사한테서 조수 노릇을 하면서, 의료 기술 공부를 하고 있었지. 벌써 몇 번이고 거기에 다니고 있어. 기술도 퍽 향상됐어. 정말이야. 선생님도 칭찬해 주시지. 사실 말이지 단순한 치료정도는 할 수 있게끔 됐어. 아무도 나라는 걸 알지 못해. 마스크하고 있으니깐 말야. 하지만 말이지, 나하고 이야기하면 환자들은 모두가 굉장히 여유로워진단 말이야."
"신뢰감" 하고 나는 말했다.
"응"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나 자신도 굉장히 편안해진단 말일세. 나는 정말로 의사라든지 선생님이라든지 적성이 맞지 않을까 하고 나 자신을 곧잘 생각해. 현실적으로 그러한 직업에 종사했던들, 나는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있을 수 있었잖아 하고 말이지. 그건 별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단 말이야. 되려고 생각하면 될 수도 있었단 말이야."
"지금도 행복하잖나?"
"어려운 문제야"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그리곤 집게손가락 끝을 이번엔 얼굴 한복판에다 대었다.
"요컨대 신뢰감의 문제란 말이야, 자네 말대로. 자신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지 어떤지 하는 것, 시청자들은 나를 신뢰해 주지. 하지만 그건 허상이야. 그저 그런 이미지일 뿐. 스위치를 끊고 영상이 꺼져버리면, 난 제로야. 안 그래?"
"응."
"하지만 지금만 해도 연기하고 있는 자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고 있지 않나?"
"가끔가끔 몹시 지쳐버린다구, 그런 것에"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굉장히 지치지. 두통이 난다고, 진짜 자기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게 되지. 어느 것이 내 자신이고 어느 것이 등장인물인지 말이지. 자기를 잃어버리는 수가 있어. 자기와 자기 그림자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돼버리지."
"누구든 많건 적건 그런 거야. 자네뿐 만은 아니지"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그건 알고 있단 말일세. 누구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지. 다만 내 경우, 그러한 경향이 너무나 강하단 말이야. 그 뭐랄까, '치명적이란 말이야'. 예전부터 줄곧, 솔직히 말해서 자네가 부러웠었지."
"내가?"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잘 모르겠는 걸. 도대체가 나의 어디가 부럽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데."
"그 뭐랄까, 자네는 늘 혼자서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타인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그런 건 별로 생각지 않고, 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쉬운 식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확고한 자기라는 것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는 스카치 워터가 담긴 잔을 약간 위로 치켜들고, 그것을 투시해보았다.
"여보게, 나는 언제나 우등생이었지. 철이 들 즈음부터 줄곧 그랬었단 말일세. 성적도 좋았지. 인기도 있었지. 겉보기도 좋았지. 교사들에게도 부모에게도 신뢰를 받았지. 언제나 학급의 리더였지. 운동도 능했지. 내가 배트를 휘두르면, 언제나 롱 히트가 된단 말이야. 그런 심정이란 알지 못하겠지?"
"알지 못하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야구 시합이 있으면, 다들 나를 부르러 왔었지. 거절할 수도 없었어. 변론대회가 있으면, 반드시 내가 대표가 됐지. 선생님이 날더러 하라고 했어. 거절할 수가 없었지. 하면 우승했어. 학생회장 선거가 있으면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지. 다들 내가 나설 줄로 알고 있단 말이야. 테스트에서도 내가 좋은 성적을 얻을 줄 다들 예상하고 있었지. 수업 중에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선생님은 대개 나를 짚어서 질문을 했지. 지각 한 번 하지 않았지. 전혀 나 자신이라는 건 없는 거나 다름없었지. 다만 그저 그러는 게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걸 해왔을 뿐이야. 고교 시절도 그랬었지. 대동소이했지. 그렇지. 자네하고 고교가 달랐었지. 자네는 공립의 고교로 가고, 난 사립의 수험교로 갔었거든. 난 고교 시절엔 축구부로 들어갔다구. 수험교이긴 했지만, 축구부는 꽤나 강했었지. 조금만 잘했더라면 전국 대회에 나갈 뻔도 했었다구. 중학교 때하고 대개 같았어. 이상적인 고교생이었었지. 성적도 좋겠다. 스포츠도 만능, 리더십도 있겠다. 인근의 여고 여자아이들의 동경의 표적이었어. 연인도 있었다구. 예쁘장한 아이였지. 늘 축구 시합을 응원하러 와주었는데, 그래서 서로 알게 됐거든. 하지만 그건 하지 않았지, 페팅뿐. 그녀의 집에 놀러 가서, 부모가 없는 사이에 손으로 한단 말야. 서둘러 말야. 하지만 그 걸로도 재미있었어. 도서관에서 데이트했지. 그림에 그린 것 같은 고교생이었지. NHK의 청춘물 같은 거."
고혼다 군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는 약간 양상이 달라졌지. 분쟁이 있었지. 전공투. 당연히 내가 또 리더 격이 되었지. 움직임이 있는 곳, 반드시 내가 리더가 되거든. 뻔한 일이야. 바리케이드를 봉쇄하고, 여자와 동거생활 하고, 마리화나를 빨고, 딥 퍼플을 듣고. 그 무렵, 다들 그런 짓들을 하고 있었지. 기동대가 들어오고, 좀 유치장 신세도 졌지. 그리곤 할 일이 없어져서, 같이 살던 여자를 따라 연극이라는 걸 해보았어. 처음엔 장난삼아 했었지만, 하고 있노라니까 차츰 재미나지 않겠나. 신참이었지만, 좋은 역도 맡겨 주더군. 나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지. 무엇인가 연기한다는 재간이 있었던가 봐, 자연 그렇게 됐지. 한 2년 하고 있노라니까, 제법 인기가 있어지더군. 그 무렵엔 제법 짓궂은 짓도 했지. 퍽도 술을 마셨고, 한껏 여자와 잤지. 하지만 다들 그 무렵엔 그런 짓들을 했었다구. 영화회사 사람이 와서, 영화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하더군. 흥미다 있었으니까 나가 봤지. 나쁜 역은 아니었어. 다치기 쉬운 고교생 역이었지. 이내 다음 역이 왔겠지. TV에서도 요청이 왔어. 나머지는 뻔할 뻔자야. 바빠져서 극단을 그만 뒀지. 그만 둘 때에 당연히 옥신각신 한 번 했었지. 하지만 하는 수 없었어. 언제까지 전위연극을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나. 난 좀 더 크고 넓은 세계에 흥미가 있었거든. 그리고 현재 요 모양이란 말일세. 의사와 교사와 스페셜리스트. 광고엔 두 군데 나가고 있어. 위장약과 인스턴트커피. 이것이 그 '크고 넓은 세계' 라는 셈이지."
고혼다 군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매력적인 시늉의 한숨이었는데, 그래도 한숨은 한숨이었다.
"그림에 그린 것 같은 인생, 그런 것 같지 않나?"
"그렇게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는 사람도 잔뜩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긴 말이지" 하고 그는 말했다.
"행운이었다는 건 나 자신이 인정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것만 같은 느낌이야. 그래 한밤중에 문득 잠이 깨어 그렇게 생각하면, 난 참을 수 없이 두려워진단 말이야. 나라는 실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 연신 내 앞에 돌아오는 배역을 다만 그저 부족함이 없이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 아니냐 하는 느낌이 든다구. 나는 결국 주체적으로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하지 못했어."
나로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다는 느낌이었다.
"너무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군."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고 싶을 땐 실컷 말하는 게 좋다구. 퍼뜨리진 않을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한다구." 고혼다 군은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난 처음부터 자네에 대해선 신용하고 있어. 어째선지는 몰라. 하지만 그렇다구. 자네에게라면 이야기 할 수 있거든. 안심하고 말야. 누구한테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니야. 거의 아무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구. 헤어진 여편네하곤 이야기했지 굉장히 솔직하게. 우리는 곧잘 이야기를 했지. 우리는 잘해 나갔더랬어. 서로 이해도 했고, 서로 사랑하고도 있었지. 주의의 놈들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기까진 말야. 나하고 그녀하고 단 둘이라면, 지금이라도 훨씬 더 잘돼 나갔을 거야. 하지만 그녀한텐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데가 있었거든. 그녀는 딱딱한 가정에서 자라났거든. 가족한테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었지. 자립하지 못했었지. 그래서 난... 아니지, 이야기가 너무 비약되는 것 같군.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네가 상대라면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그걸세. 다만, 내 이야기를 듣는 게 피곤하지 않느냐 하는 것뿐이란 말일세."
"피곤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과학 실험반 이야기를 했다. 늘 긴장해 있었다는 것. 꼬박꼬박 실험을 제대로 잘 마치려고 했었다는 것. 그러는 동안, 내가 태연하게 내 신념대로 작업을 해내고 있는 모양이 부러웠었다는 것. 하지만 중학교의 과학 실험 시간에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하는 건, 나로선 전연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 부럽다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그가 굉장히 솜씨 좋게 작업을 해내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버너에 불을 댕기거나, 현미경을 세트하는 동작이 아주 우아했다는 것. 여자아이들은 마치 기적을 목전에 보고 있는 것처럼 말끄러미 그의 일거일동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 내가 태연하게 하고 있었던 건, 그가 어려운 것은 전부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다만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의 친지인 듯싶은 사십대 안팎의 옷매무새가 좋은 남자가 찾아와서, 그의 어깨를 탁 치고는, 어어, 이거 얼마만이냐, 고 했다. 번쩍번쩍하는 게 눈이 부시어 무심코 눈을 돌려버리고 싶을 만큼 멋들어진 로렉스를 팔목에 끼고 있었다. 그는 최초에 5분의 1초가량 힐긋 나를 보았는데, 나의 존재는 그저 그때뿐, 잊혀지고 말았다. 마치 현관 매트를 볼 때와 같은 그런 눈짓이었다. 비록 아르마니의 넥타이를 매고 있을지언정,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로선 5분의 1초면 알 수 있다 말이다. 그와 고혼다 군은 얼마 동안 잡담을 하고 있었다.
"요즘 어때?" 라든가, "아니, 바빠서 말야" 라든가, "또 며칠 후에 골프치러 가고 싶군." 이라든가, 그런 식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나서 로렉스 사나이는 탁 하고 또 고혼다 군의 어깨를 치고는 "그럼 또 보세" 하고 가버렸다.
그 남자가 가버리자 고혼다 군은 5밀리 가량 눈썹을 찌푸리고나서, 손가락 두 개 치켜세우고 웨이터를 부르더니, 계산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계산서가 오자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거기에 볼펜으로 사인을 했다.
"사양할 것 없다구. 어차피 경비이니까" 하고 그는 말했다.
"이건 돈도 아니란 말이야. 경비라니까."
고맙게 잘 먹었다, 고 나는 말했다.
"잘 먹긴 뭘 잘 먹어. 경비란 말야." 그는 표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19
고혼다 군과 나는, 그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아자부의 뒷골목에 있는 어느 바로 술 마시러 갔다. 거기 카운터의 구석 쪽에서 우리는 칵테일을 몇 잔씩 마셨다. 고혼다 군은 술이 센 듯, 아무리 마셔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말투에나 표정에나 변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다. TV방송국이 얼마나 시시한가에 대해서. 감독이 얼마나 머리가 나쁜가에 대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은 상스러운 탤런트들에 대해서. 뉴스쇼에 나오는 엉터리 평론가에 대해서. 그의 이야기는 퍽 재미있었다. 표현이 생생하고 관찰은 신랄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했다. 자네는 어떤 인생을 더듬어 왔을까, 하고.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을 대충 대충 끄집어내어 말했다. 대학을 나와 가지고, 동료하고 사무소를 열고 광고랑 편집일을 했다는 것.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는 것. 하는 일은 잘 돼갔지만, 사소한 일로 해서 그곳을 그만두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를 하고 있다는 것. 대단한 금액은 되지 않지만, 어차피 돈을 사용할 겨를도 없다는 것... 대충 대충 이야기하고 보면, 그것은 평온한 인생 같게도 느껴졌다. 어쩐지 나의 인생 같지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바가 조금씩 붐비어서 이야기하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축들도 있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구" 하고 고혼다 군은 일어섰다.
"바로 가까운 데이고, 아무도 없다구. 술도 있고."
그의 맨션은 바로부터 두세 번 모퉁이를 돌아선 곳에 있었다. 그는 메르세데스 운전수에게 이젠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훌륭한 맨션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두 개가 있고, 그 중 한 개에는 전용의 키가 필요했다.
"이 맨션은 이혼하고 집을 쫓겨났을 때에 사무소에서 사주었던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여편네한테 쫓겨나 빈털터리로 싸구려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말씀이 아니거든. 이미지가 망가진단 말야. 물론 내가 집세는 물고 있지. 형식으로선 내가 사무소로부터 여기를 임대 받고 있는 셈이지. 집세는 경비에서 빠진다구. 그거 참 편리한 거야."
그의 방은 맨 위층에 있었다. 널찍한 거실과 방 두 개, 게다가 부엌이 딸려 있었다. 베란다가 있고, 거기서 도쿄 타워가 뚜렷하게 보였다. 가구의 취미는 나쁘지 않았다. 단순하고 청결하고 보기만 해도 값져보였다. 거실 방바닥은 마룻바닥인데, 그 위에 크기가 다른 페르시아 융단이 여러 장 깔려 있었다. 어느 것이나 고상한 디자인이었다. 소파는 크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았다. 커다란 관엽식물 화분이 몇 개인가 시각적인 효과가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진 펜던트 조명과 테이블 위의 스탠드는 현대인 분위기가 나는 것이었다. 장식품은 적었다. 사이드보드 위에 명나라 때 것으로 보이는 접시가 몇 개 진열돼 있을 뿐이다. 방안은 티끌 한 점 없이 정돈돼 있었다. 아마 파출부가 매일 청소를 하고 가는 것이리라. 테이블 위에는 건축 잡지가 놓여 있었다.
"좋은 방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촬영에 쓸 만하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느낌도 드는 군"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다보면서 말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부탁하면 다들 이렇게 되지. 촬영 현장처럼 되거든. 사진이 잘 받거든. 가끔씩 벽을 두드려 본다구. 종이로 발라붙인 벽이 아닌가하고 말야, 생활의 냄새랄 것이 없거든. 겉보기뿐이란 말일세."
"그럼, 자네가 생활의 냄새를 내면 되잖아."
"문제는 생활이 없다는 걸세." 하고 그는 무표정한 소리로 말했다.
그는 B&O의 플레이어에 레코드를 얹고, 바늘을 내렸다. 스피커는 정다운 JBL의 P88이었다. JBL이 신령스러운 스타디오 모니터를 세계에 흩뿌리기 이전의 시대, 아직 스피커가 정상적인 소리로 울리고 있던 시대의 멋들어진 제품이었다. 그가 걸어놓은 것은 봅 쿠퍼의 낡은 LP였다.
"무엇이 좋지? 무엇을 마실래?" 하고 그가 물었다.
"아무거나. 자네 마시는 걸 마시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보드카와 토닉 워터의 병 몇 개와 아이스 페일에다가 그득한 얼음과 절반으로 자른 레몬을 세 쪽,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시원하고 청결한 웨스트 코스트 재즈를 들으면서 레몬 맛을 한껏 풍기는 보드카 토닉을 마셨다. 확실히 생활의 냄새란 것이 희박하군, 하고 나는 느꼈다. 무엇이 어떻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희박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희박하대서, 특별히 부자유스러운 건 없는 것 같았다. 요컨대 사고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나로선 그것은 아주 안락한 방이었다. 나는 기분 좋은 소파 위에서 느슨해져서 술을 마셨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 하고 고혼다 군은 유리잔을 얼굴 위에 치켜들고 천장의 불빛에 비쳐보면서 말했다.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의사도 될 수 있었지. 대학 때는 교직 과정도 이수했었지. 일류 회사에 취업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어. 이런 생활, 묘한 거야. 눈앞에 카드가 주룩 줄지어 있었어. 어느 걸 집을 수도 있었지. 어느 걸 집거나 잘 될 것만 같았어. 자신은 있었어. 그래서 되려 고를 수가 없었어."
"카드 같은 거 본 적도 없었지"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하고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마 농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두 번째 술을 유리잔에 따르고 레몬을 꾹 짜고는,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결혼만 해도, 하다 보니 그렇게 됐지. 나하고 여편네는 영화에서 공연을 하면서, 어느 틈엔가 가까워졌지. 로케이션에서 함께 술도 마시고, 차를 빌려 가지고 드라이브도 하고 말이야.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몇 번인가 데이트를 했지. 주위에서도 우리는 잘 어울리는 커플이고, 결혼을 할 거라고들 생각했었지. 결국 물 흐름에 밀리듯 결혼했었지. 자네로선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여긴 정말 좁은 세계란 말이야. 뒷골목 안의 연립에서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구. 한번 물 흐름이 형성되기만 하면, 그건 완전히 현실적인 힘을 띠게 된단 말일세.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선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 그 아이는 내가 이 인생에서 손에 넣은 것 중에선 제일 알찬 것의 하나였지. 결혼하고 나서 난 그 사실을 인식했어. 그리고 나는 어김없이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지. 하지만 글렀어. 내가 진정으로 그것을 골라잡으려고 들면, 그것은 달아나고 만단 말이야. 여자도 그렇고, 배역도 그렇고, 저쪽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나는 최고로 잘 다룰 수가 있어. 하지만 나 스스로 요구하면, 모두 다 내 손가락 사이로부터 쓰윽 빠져 달아나고 만단 말일세."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둡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하고 그는 말했다.
"난 그녀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어. 그저 그것뿐이야. 가끔씩 이렇게 생각한다구. 내가 배우를 그만두고, 그녀도 배우를 그만두고, 둘이서 한가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야. 패셔너블한 맨션도 필요 없어. 마세라티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착실한 일과 조그마한 가정이 있으면 그걸로 돼. 어린애도 갖고 싶고,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하고 어느 목로집에 들러선 술을 마시며 불평을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가 있다. 월부로 시빅이나 스바루를 산다. 그런 생활,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바라고 있는 건 그러한 생활이었단 말일세. 그녀가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돼. 하지만 글렀어. 그녀는 그것과는 다른 걸 바라고 있어. 가족들이 다 그녀한테 기대하고 있어. 어머니는 전형적인 무대 위의 인생이고, 아버지는 철저한 수전노란 말야. 오빠는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어. 아우 놈은 늘 문제만 일으키고 있어서, 그 뒤치다꺼리에 돈이 들고, 여동생은 가수로서 한창 인기가 나는 중이었거든. 도저히 빠질 수가 없지. 그리고 그녀 자신도 서너 살 때부터 그러한 가치관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었고 줄곧 아역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왔겠다, 조작된 이미지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나나 자네하곤 전혀 다르지. 현실 세계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일세. 하지만 아주 마음이 깨끗한 여자야. 굉장히 깨끗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지. 나로선 그걸 알 수 있어. 하지만 글렀어. 어쩔 수도 없어. 보게나, 알겠어. 난 지난달에 그녀하고 잤단 말일세."
"헤어진 부인하고?"
"그래. 이상하잖아?"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 하고 나는 말했다.
"이 방에 왔단 말일세. 어째서 왔는지는 모르겠어. 전화가 걸려왔는데, 놀러 가도 좋으냐고 하지 않겠어. 물론 좋다고 했지. 그래서 둘이서 예전처럼 술을 마시고, 이야길 하고, 그리고 잤지. 굉장히 좋았다구. 그녀는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하더군. 난 당신하고 다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말했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지. 나는 평범한 가정 이야기를 했어. 아까 자네한테 이야기한 그런 거 말일세. 그녀는 역시 빙그레 웃으면서 듣고 있을 뿐이었어. 하지만 사실은 그런 건 전연 듣고 있지 않았던 거야. 처음부터 듣고 있지 않았단 말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전연 반응이라는 게 없단 말이야. 그녀는 그저 쓸쓸해서 누군가의 포옹을 받고 싶었던 게야. 공교롭게 그 상대가 나였을 뿐이란 말이야.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단 말일세. 그녀는 나나 자네하곤 전연 다르단 말이야. 누군가의 힘으로 해소해야 할 쓸쓸한 감정이 인거야. 누군가가 해소해 주기만 하면 된단 말일세. 그러면 끝나는 거지. 거기서부터 더는 나가지 않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레코드판이 다 돌아 음악이 끝나고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는 바늘을 떼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자를 부를까?" 하고 고혼다 군은 말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아. 자네 좋을 대로 하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돈을 주고 여자와 잔적은 있나?" 그가 물었다.
"없다."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 없었는 걸"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혼다 군은 어깨를 움츠리고, 거기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나하고 사귀는 게 좋지" 하고 그는 말했다.
"키키하고 함께 왔던 여자아이를 부르겠어. 그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자네 하자는 대로 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설마 이건 경비로 빠지진 않겠지?"
그는 웃으면서 유리잔에 얼음을 넣었다.
"믿지 않을는지 모르겠지만, 빠진다구, 그게. 그런 시스템으로 돼 있거든. 파티 서비스 회사라는 간판이고, 제법 정확한 그러면서도 좀 화려한 영수증을 끊어준단 말일세. 조사를 한다 해도 간단하게 알 수 없는 복잡한 장치로 돼 있거든. 그리고 여자하고 잔다는 일이 바로 접대비가 된다, 굉장한 세상이 됐지."
"고도 자본주의 세계"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아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나는 문득 키키의 참 좋은 귀를 생각하고, 고혼다 군에게 키키의 귀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그는 나를 보았다.
"아니, 본 적이 없는 걸.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귀가 어떻단 말이지?"
"별 것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아이 둘이 찾아온 것은 열두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 하나는 고혼다 군이 "대단해"라고 표현한, 키키하고 콤비를 짜고 있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확실히 '대단한' 여자였다. 어딘가에서 문득 만나 그때는 서로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줄곧 만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던 것 같은, 그런 타입의 여자아이였다. 남자의 영원한 꿈을 일깨워 주는 것 같은 그런 여자아이. 몸치장이 요란하지가 않았다. 기품이 있다. 그녀는 트렌치코트 밑에 녹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지극히 보통의 울 스커트. 장신구는 조그마하고 심플한 귀걸이뿐이었다. 품격이 있는 여자 대학의 4년생이란 느낌이었다.
또 한 사람의 여자아이는 시원한 색깔의 원피스를 걸치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창부가 있다는 사실은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있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역시 아주 매력적인 아이였다. 손발이 날렵하고,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였다. 지난주에 줄곧 괌으로 수영하러 가 있었다고 했다. 짧은 머리칼을 다시 머리핀으로 단정하게 고정시켰다. 그녀는 은 브래스래트를 달고 있었다. 몸놀림이 활달하고, 살갗이 매끄러운 육식수처럼 우아하게 꽉 죄어져 있었다.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까 나는 문득 고교 시절의 동창회가 떠올랐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어느 쪽 타입의 여자아이건 하나쯤 씩은 어김없이 동창회에 있는 법이다. 예쁘장하고 품위가 있는 여자아이와 활동적이면서도 규율이 있는 느낌을 주는 매력적인 여자아이. 꼭 동창회 같구나, 하고 나는 느꼈다. 동창회가 끝난 다음, 긴장이 풀린 다음, 마음 맞는 끼리끼리가 2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싱겁기 짝이 없는 연상이지만, 참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고혼다 군이 편안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전에 그 어느 쪽과도 함께 잔 적이 있는 듯, 여자아이들도 그도 격의 없이 인사를 했다. "여어"니 "잘 있었어?" 하는 그런 느낌. 고혼다 군은 나를 중학교 동급생이며, 현재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잘 봐 주세요, 하고 여자아이들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다들 친구인 걸요, 하는 느낌의 미소였다. 현실 세계에선 그다지 흔히 볼 수 없는 종류의 미소다. 잘 봐 주시오, 하고 나도 말했다.
우리들은 방바닥에 앉기도 하고, 소파에 뒹굴기도 하고, 브랜디 소다를 마시고, 조 잭슨이랑 알렌 파슨즈 프로젝트의 LP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제법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우리는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으며, 여자아이들도 즐기고 있었다. 고혼다 군은 안경을 낀 쪽 여자아이를 상대로 치과의사 연기를 보여 주었다. 확실히 잘했다. 진짜 치과의사보다도 치과의사 다웠다. 재능이다.
고혼다 군은 안경을 낀 여자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소곤거리는 소리로 무슨 이야기인지를 했으며, 여자아이가 가끔씩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러는 중에 화려하고 대단한 쪽 여자아이가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와서는 내 손을 잡았다. 제법 멋진 냄새가 났다. 가슴이 꽉 차고 숨이 막힐 듯한 냄새였다. 정말 동창회 같구나, 하고 나는 느꼈다. 그 무렵에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당신이 좋았다구요. 어째서 날 유인해 주지 않았죠? 남자의, 소년의 꿈. 이미지. 나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코끝으로 내 귀 밑을 더듬었다. 그 다음엔 내 목에다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빨았다.
문득 알고 보니, 고혼다 군과 또 하나의 여자아이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필시 베드룸으로 갔을 게다. 조금만 더 불빛을 어둡게 하겠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벽의 조명 스위치를 찾아서 끄고, 조그만 테이블 스탠드의 불빛만을 그냥 뒀다. 알고 보니 레코드 대신 밥 딜런의 테이프가 걸려 있었다. 곡은 <잇 올오버 나우, 베이비 블루>였다.
"천천히 벗겨 줘요" 하고 그녀가 귀밑에서 속삭였다.
나는 하라는 대로 그녀의 스웨터랑 스커트랑 블라우스랑 스타킹을 천천히 벗겨 주었다. 나는 벗겨준 것들은 반사적으로 접어놓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곤 그만뒀다. 그녀도 내 옷을 벗겼다. 아르마니의 넥타이랑, 리바이스의 블루진이랑, 티셔츠를. 그리고 조그만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내 앞에 섰다.
"어때요?" 하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멋지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아주 예쁜 몸매를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생명감이 넘치고, 청결하고, 섹시했다.
"어때요. 멋지죠?" 하고 그녀는 물었다.
"좀 더 자세히 표현해 주세요. 잘 표현한다면 굉장히 친절하게 해 드릴게."
"옛날 생각이 나게 해. 고교생 시절"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좀 독특하네요."
"서툰 대답이었나?"
"전혀"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내 옆으로 와서, 내가 삼십 사년의 인생에서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것 같은 일을 해 주었다. 섬세하고 대담하고 좀 간단하게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하지만 누군가가 생각해낸 것이란 말이다. 나는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고,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경험한 그 어느 섹스와도 다른 것이다.
"나쁘지 않죠?" 하고 그녀가 내 귀밑에서 속삭였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멋들어진 음악처럼 마음을 위로하고, 육신을 상냥하게 풀어주었으며, '시간'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거기에 있는 것은 세련된 친밀감이었으며, 공간과 시간과의 평온한 조화이며, 한정된 형태에서의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경비로서 빠진단 말이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밥 딜런은 무엇인가를 노래 부르고 있다. 무엇이었더라, 이건? <하드 레인>이다. 나는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녀는 힘을 빼고 내 팔속에 들어왔다. 밥 딜런을 들으면서 경비로 대단한 여자아이를 껴안는다는 것은 어째 좀 이상한 것이었다. 정겨운 1960년대에는 이런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스위치를 누르면 모든 것은 꺼지고 만다. 3D의 성적 이미지. 섹시한 오데코롱 냄새와,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과, 뜨거운 입김.
내가 정해진 코스를 어김없이 더듬어 사정하고 나서 이윽고, 우리는 둘이서 욕실에 가서 몸을 씻었다. 그리고 커다란 목욕 타월 바람으로 거실로 돌아와 브랜디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다이어 스트레이츠인지 뭔지 하는 음악을 들었다.
"어떤 글을 쓰고 있죠?" 하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의 내용을 대충 설명했다.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쓰는 것에 따라서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이를테면 문화적 제설 작업이란 말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하고 있는 건 관능적 제설 작업이에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웃었다.
"보세요, 다시 한 번 둘이서 제설 작업을 하지 않을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융단 위에서 섞이었다. 이번엔 굉장히 간단하게, 그리고 천천히. 심플한 형태를 취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커다랗고 기다란 욕조 속에 둘이서 나란히 드러누워서, 나는 그녀에게 키키에 대해 물어보았다.
"키키" 하고 그녀는 물었다.
"다정한 이름이네요. 당신 키키를 알고 있어요?" 나는 끄덕거렸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후욱 하고 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젠 있지 않아요. 그 사람 돌연 사라졌대요. 우린 제법 사이가 좋았더랬어요. 가끔씩 둘이서 함께 쇼핑을 가기도 하고요, 술도 마시고 했죠.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돌연 없어져버렸죠. 한 달 전이던가, 두 달 전이던가. 하지만 그런 거 그다지 드문 일 아니잖아요? 이런 직업이란 퇴직원 낼 필요도 없고, 그만두고 싶으면 잠자코 훌쩍 그만둬버리거든요. 그녀가 없어져버렸다는 건 유감이에요. 하지만, 하는 수 없지요. 걸 스카우트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길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나의 아랫배를 만지고 살며시 페니스를 건드렸다.
"키키하고 자본 적 있어요?"
"예전에 얼마동안 함께 살았었지. 한 4년 전에."
"4년 전이라" 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퍽도 옛날이야기 같군요. 4년 전엔 난 아직 얌전한 여고생이었어요."
"어떻게 좀 키키하고 만날 수 없을까?"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어려운 걸요. 정말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단 말예요. 지금도 말한 것처럼 그저 없어져 버렸는걸요. 마치 벽 속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단서랄 것 하나 없고, 찾으래야 찾을 방도도 없을 것 같아. 당신 키키의 지금도 좋아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탕 속에서 몸을 느리게 펼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도 키키를 좋아하는 걸까?
"모르겠는 걸. 하지만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난 아무래도 그녀하고 만나지 않으면 안 되겠어. 키키가 날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어. 줄곧 그녀의 꿈을 꾸어대고 있거든."
"별일이야" 하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나도 가끔씩 키키의 꿈을 꾸어요."
"어떤 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듯 미소를 머금었을 뿐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거실로 돌아와 방바닥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술을 마셨다. 그녀는 내 가슴에 기대고, 나는 알몸인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있었다. 고혼다 군과 그의 상대 여자아이는 잠들어버렸는지 전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세요, 믿지 않을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하고 이렇게 하고 있는 거 즐거워요. 정말이에요. '직업'이니 '연기'니 그런 것과 관계없이 즐거운 거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이거 믿어줄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믿는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이러고 있으면 아주 즐거워. 편안하고 여유롭다구. 어쩐지 동창회 같아."
"당신도 역시 독특해" 하고 그녀는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키키말이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도 알지 못한단 말인가. 그녀의 주소라든가, 본명이라든가, 그런 거?"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 그런 거 거의 얘기하지 않는 걸요. 다들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고 산다구요. 키키라든가 말야. 나는 메이. 또 한 아이는 마미. 다들 가나가나의 두 글자예요. 사생활 같은 거, 다들 알지 못하며, 그런 건 묻지 않거든요. 상대방이 저 자신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묻지 않거든요, 예의상. 사이는 좋아요, 제법. 함께 놀러가기도 하고.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죠. 나는 메이이고, 그녀는 키키일 뿐이거든. 우리들에겐 현실은 없단 말예요. 우리들은 그 뭐랄까, 그저 그런 이미지예요. 허공에 떠 있는 거죠. 두둥실. 이름 같은 거 환상에 붙여진 그저 그런 기호이죠. 구래서 우리들도 되도록이면 서로의 이미지를 존중하려고 해요. 그런 거 이해돼요?"
"이해되지" 하고 나는 말했다.
"손님 중에 우리들한테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건 아니거든요. 돈 때문에만 이런 일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들도 이러고 있을 때, 제법 즐기고 있단 말예요. 우리네 클럽은 엄밀한 회원제라서 손님의 질도 좋겠다. 다들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고요, 우리들도 그 이미지의 세계를 즐기고 있거든요."
"즐거운 제설 작업" 나는 말했다.
"그래, 즐거운 제설작업" 하고 말했다. 그리곤 내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가끔가끔 눈을 던지기도 하고."
"메이" 하고 나는 말했다
"예전에 진짜 메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있었지. 내 사무소 옆 치과의사에게서 접수를 보고 있었지. 훗카이도의 농가 출신의 여자아이였지. 염소 메이라고 다들 불렀었지. 살갗이 검고 여위었었지만. 좋은 아이였어."
"염소 메이" 하고 그녀는 되풀이했다.
"당신 이름은요?"
"곰의 푸우" 하고 나는 대답했다.
"동화 같네요." 그녀는 말했다.
"최고. 염소 메이하고 곰의 푸우."
"동화 같군." 하고 나도 말했다.
"키스해줘" 하고 메이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했다. 멋진 키스였다. 정다운 키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몇 잔째인지 모르게 브랜디 소다를 마시고, 폴리스의 레코드를 들었다. 폴리스, 또 시시하기 짝이 없는 밴드 명칭. 어째서 폴리스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내 팔 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고 말았다. 내 팔 안에서 잠들어 있을 때의 메이는 이미 대단한 여자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나 있는 그저 보통의 다치기 쉬운 소녀처럼 보였다. 동창회 같군, 하고 나는 또 생각했다. 시계는 벌써 네 시를 지나고 있었다.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염소 메이와 곰의 푸우. 그저 그런 이미지. 경비로 빠져지는 동화. 폴리스. 또 다시 기묘한 하루. 연결될 듯 하면서도 연결되지 않는다. 염소 메이와 서로 알게 되었다. 그녀와 잤다. 썩 좋았다. 나는 곰의 푸우가 되었다. 관능적 제설작업. 하지만 어디에도 당도하지 못했다.
내가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자니까, 나머지 세 사람이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아침 여섯 시 반이었다. 메이는 욕의를 입었다. 마미는 고혼다 군의 베이드리의 파자마 윗도리만을 걸치고, 고혼다 군은 아랫도리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블루진에 티셔츠를 입었다. 우리들은 넷이서 식탁을 둘러싸고 커피를 마셨다. 빵도 구워 버터랑 마멀레이드와 함께 먹었다. FM에 <바로크음악을 그대에게>가 걸려 있었다. 헨리 퍼셀 캠프의 아침 같았다.
"캠프의 아침 같군."하고 나는 말했다.
"어쩜!" 하고 메이가 말했다.
일곱 시 반에 고혼다 군은 전화로 택시를 불러 여자아이를 돌려보냈다. 돌아갈 때, 메이는 나에게 키스했다.
"만일 잘 되가지고 키키를 만나거든 내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해주세요, 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슬쩍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만일 무엇이건 알게 된다면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또 기회가 닿으면 함께 제설 작업해요" 하고 메이는 한쪽 눈을 감고 말했다.
"제설 작업?" 하고 고혼다 군이 말했다.
둘이만 남자, 우리는 다시 한 잔씩 커피를 마셨다. 내가 커피를 끓였다. 나는 커피 끓이는 솜씨가 있다. 소리도 없이 태양이 솟아오르고, 도쿄 타워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까, 예전의 네스카페의 광고를 떠올렸던 것이다.
착실한 사람들은 회사며 학교를 향해 서두르고 있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대단히 프로페셔널한 여자아이와 하룻밤을 즐기고, 멍청하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필경 이제부터 푹 잠을 자리라. 좋아하건 싫어하건 어떻던,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우리들은 나와 고혼다 군은 극히 보통 세상의 생활양식으로부터는 벗어나 있었다.
"오늘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고혼다 군이 머리를 내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자겠어." 내가 말했다.
"특별한 스케줄은 없어."
"난 이제부터 한잠 자고, 낮에 누구를 만나. 의논할 게 있거든"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얼마동안, 우리는 잠자코 또 도쿄 타워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재미있었어?" 하고 고혼다 군이 물었다.
"재미있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훌쩍 사라져버렸대. 자네 말대로. 단서랄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이름마저 알지 못해."
"나도 영화회사 측들에게 키키 소식을 좀 물어보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
"잘하면 뭣 좀 알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는 약간 입술을 찡그리고, 스푼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차망" 하고 여자아이들이라면 말할 게다.
"보게, 그런데 자넨 키키를 만나 가지고,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가 물었다.
"옛정을 회복하겠다든가, 그런 건가? 아니면 회포를 풀겠든가 그것뿐?"
"모르겠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다. 만나서 어떻게 할지는 만나고 나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고혼다 군은 그의 티 한 점 없는 다색 마세라티로 나를 시부야의 아파트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택시로 돌아가겠노라 했지만, 그는 가깝다면서 끝내 바래다주었던 것이다.
"가까운 동안에 또 전화해서 불러내도 괜찮을까?"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하고 이야기를 하니 즐거웠어. 나한텐 제대로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없단 말일세. 자네만 괜찮다면, 가까운 동안에 또 만나고 싶은데 말야. 그래도 좋을까?"
"물론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스테이크와 여자아이에 대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말이 없어도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20
그러고서 며칠 동안은 별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매일 몇몇 건 일 관계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나는 줄곧 부재자 전화 음성을 넣어둔 채 응답하지 않았다. 나의 인기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식사를 직접 해 먹고, 시부야 거리로 나가서 매일 한 번씩 <짝사랑>을 보았다. 봄방학이었으므로 영화관은 만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제법 붐비고 있었다. 관객은 거의 고교생 아니면 중학생이었다. 참다운 성인 관객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주연의 여자아이나, 우상인 가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찾아온 것이지, 영화의 줄거리나 질이 어떤가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예의 스타가 등장하면 와아 와아 목청을 돋구어 아우성을 쳐댔다. 야견 수용장 같은 소란이었다. 스타가 등장하지 않을 떼엔, 다들 꿍적 꿍적,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어 무엇을 먹거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저 ㅅㅅㅅㅅ거야아" 또는 "너어구나아" 하고들 소리를 지르곤 했다. 영화관을 통째로 불태워버리면 속 시원하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짝사랑>이 시작되자, 나는 타이틀의 크레딧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분명 키키라는 이름이 조그맣게 들어 있었다. 키키가 나오는 장면이 끝나자마자, 나는 영화관에서 나와 거리를 서성거렸다. 언제 나와 대략 같은 코스였다. 하라주쿠로부터 신궁구장, 아오야마 묘지, 오모테산도, 진탄빌딩, 시부야. 도중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수도 있었다. 지상엔 확실히 봄이 와 있었다. 정다운 봄의 냄새가 났다. 지구는 참을성 있게 태양의 주위를 계속 공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신비, 나는 겨울이 끝나고 이렇게 같은 봄 냄새가 나는 것일 까고. 매년 매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이 냄새가 난다. 아주 미묘하고 희미한 냄새이긴 하지만, 언제나 같다.
거리에는 선거 포스터가 넘쳐 있었다. 어느 것이고 다 추악한 포스터였다. 선거 연설의 차량도 돌아치고 있었다. 무슨 말들을 지껄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시끌시끌할 뿐이다. 나는 키키 생각을 하면서, 그런 거리거리를 계속 걸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조금씩 자신의 발이 움직임을 되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걸음이 가볍고, 확실해졌으며, 그럼에 따라서 머리의 움직임도 이전엔 없었던 예민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은 앞으로 나가고 있단 말이다. 나는 목적을 가졌으며, 그럼으로써 극히 자연스럽게 걸음걸이를 터득해 왔던 것이다. 나쁘지 않은 징후였다. 춤춘단 말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이것저것 생각해도 소용없다. 어떻든 제대로 스텝을 밟고, 자신의 체계를 유지할 것. 그리고 이 흐름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주의 깊게 계속 주시할 것. '이쪽 세계'에 머물러 있을 것.
삼월 하순의 너덧 새가 그런 식으로 아무 일없이 흘렀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나는 쇼핑을 하고, 부엌에서 조촐한 식사를 준비하고, 영화관에 가서 <짝사랑>을 보고, 긴 산책을 하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부재자 전화를 플레이백 해보았으나, 들어 있는 건 일에 관한 용건의 전화뿐이었다.
밤에는 혼자서 책을 읽고 술을 마셨다. 날마다 비슷비슷한 되풀이였다. 이럭저럭하는 중에 엘리어트의 시와 카운트베이시의 연주로 유명한 사월이 찾아왔다. 밤중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염소 메이와의 섹스가 문득 떠올랐다. 제설 작업. 그것은 기묘하게 독립된 기억이었다. 어디에도 연결돼 있지 않다. 고혼다 군에게도, 키키에게도, 그 아무것에도 연결돼 있지 않다. 그것은 굉장히 사실적인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잘한 데까지 생생하게 떠올려지는 데도, 어떤 의미에선 현실보다도 선명한데도, 결국은 아무것에도 연결돼 있지 않는 사실적인 꿈. 하지만 그것은 나에겐 아주 바람직한 사건인 것처럼 여겨졌다. 아주 한정된 형태로서의 마음의 사귐. 둘이서 힘을 합쳐 가지고 환상이건 이미지이건 그것을 존중한다는 것.
"괜찮아요, 우리들 모두 친구이니까" 하는 그런 미소. 캠프의 아침. 어쩜!
키키는 고혼다 군과 어떤 모양으로 잤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그녀도 역시, 메이와 마찬가지로 고혼다 군에게 굉장히 섹시한 서비스를 해주었을까? 그러한 서비스는 그 클럽에 소속한 여자아이들 모두가 직업상의 기본 기술로서 터득한 노하우일까, 아니면 그건 어디까지나 메이의 개인적인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다. 고혼다 군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나하고 살고 있었을 때, 키키는 섹스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다. 내가 껴안으면 그녀는 거기에 따뜻하게 응대해 주었지만, 결코 자진해서 요구하거나,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의 포옹을 받았을 때, 키키는 몸의 힘을 빼고, 아주 느슨해 가지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섹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느슨한 그녀를 껴안고 있는 것은 멋들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부드러운 몸뚱이와, 편안한 숨 쉼과, 따뜻한 성기와. 나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누구에겐가 예컨대 고혼다 군에게 적극적인 완숙한 성적 서비스를 한다는 건, 나로선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나에게 상상력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녀라는 것은 사생활과 영업용의 섹스를 어떻게 분간해서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에겐 어림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고혼다 군에게도 말한 것처럼, 이제까지 창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키키와는 잤다. 키키는 창녀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창녀로서 키키와 잔 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키키와 잤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창녀로서의 메이와는 잤지만, 개인으로서의 메이와는 잔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 두 경우를 대조해 본다 하더라도, 아마 의미가 없을 게다. 집착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려운 문제였다.
도대체 섹스라는 것은 어디까지가 정신적인 것이고, 어디부터가 기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실상이고 어디부터가 연기일까? 충분한 전희는 정신적인 것일까, 아니면 기술적인 것일까? 키키는 정말로 나와의 성교를 즐기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 영화 속에서 정말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고혼다 군의 손가락에 등허리를 애무당하고 정말로 도취해 있었던 것일까? 실상과 이미지가 혼란돼 있었다. 예컨대 고혼다 군. 그의 의사로서의 모습은 그저 그런 이미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진짜 의사보다는 훨씬 의사다워 보인다. 신뢰감을 가지게 한다. 나의 이미지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춤추란 말이야"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것도 잘 추란 말이야, 다들 감탄할 만큼."
다들 감탄할 만큼, 이라면 나에게도 역시 이미지랄 것은 있는가 보다.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다 나의 이미지에 감탄하는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나의 실상에 감탄하거나 한단 말인가?
졸렸다. 나는 개수대에서 컵을 씻고, 이를 닦고서 잤다. 눈을 뜨니 다음날이 와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벌써 사월이다. 사월의 초순. 트루만 카포티의 문장처럼 섬세하고, 변하기 쉽고, 다치기 쉽고, 아름다운 사월 초순의 나날. 나는 아침나절에 기노쿠니야에 가서, 싱싱한 야채를 샀다. 커피콩도 샀다.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한 훈제 상어도 샀다. 된장과 두부도 샀다. 집에 돌아와서 부재자 전화의 플레이 백 해보니, 유키로부터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재미도 흥미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열두 시에 다시 한 번 전화해 볼 테니 집에 있으라구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탕 하고 전화를 끊었다. 탕 하고 전화를 끊은 건 그녀에게 있어선 일종의 보디랭귀지 같은 것이리라.
시계는 열한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뜨겁고 진한 커피를 끓였다. 그것을 마시면서 방바닥에 앉았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의 신간을 읽었다. 벌써 10년쯤 전부터 그런 거 그만 사려고 생각은 했었지만, 신간이 나오면 그만 사고 만다. 타성이라고 해버리기에는 10년이라는 것이 너무나 긴 세월이다.
열두 시 오 분에 전화가 걸려왔다. 유키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주 안녕하구요"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뭘 하고 있죠?" 그녀는 말했다.
"슬슬 점심을 만들까 하던 참이야. 싱싱한 상치하고 훈제 상어하고 면도날처럼 얇게 썰어서 얼음물에 헹궈낸 양파하고 호스래디쉬 머스타드를 사용해서 샌드위치를 만든다구. 기노쿠니야의 버터 프렌치가 훈제 상어의 샌드위치엔 질 맞는단 말야. 잘만하면 고베의 데르타데센 샌드위치 스탠드의 훈제 상어 샌드위치 비슷한 맛이 나지. 잘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나 목표가 있고, 시행착오가 있어야 사물은 비로소 이룩되는 법이지."
"바보스러워."
"하지만 맛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거짓말 같거든, 꿀벌한테 물어봐도 좋아. 클로버 꽃한테 물어봐도 좋아. 정말 맛있다니까."
"뭐예요, 그거? 꿀벌하고 클로버 꽃이라는 건?"
"예를 들면 그렇단 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맙소사" 하고 유키는 한숨 섞인 말로 말했다.
"아저씬 좀 더 어른이 되잖구. 이젠 서른네 살이죠? 내 눈으로 봐도 좀 바보스러워요."
"사회화하라는 건가, 네가 말하는 건?"
"드라이브 가고 싶어요."하고 그녀는 나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오늘 저녁은 시간이 나요?"
"날 것 같아" 나는 생각한 다음에 말했다.
"다섯 시에 아카사카의 아파트로 마중하러 와요. 장소는 기억하겠죠?"
"기억하고 있어" 내가 말했다.
"그래 이것 봐, 그때부터 줄곧 거기에 있니, 혼자서?"
"네. 하코네 같은 데 돌아가도 아무것도 없는 걸요. 아무튼 산꼭대기에 있는 텅 빈 집인 걸요. 그런 데로 혼자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여기 있는 게 더 재미나요."
"엄마는 어떻게 됐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니?"
"모르겠는 걸. 엄마가 뭘 하는지 연락한 번 없는 걸. 아직도 카트만두가 아닐까? 그래서 말했잖아요. 그 사람의 일은 전연 신용할 수가 없다고요. 언제 돌아올지 그런 거 모른다구요."
"돈은 어떻게 하고 있지?"
"돈은 걱정 없어요. 현금 카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거든요. 엄마의 현금 카드를 지갑에서 한 장 꺼내 뒀어요. 그 사람 그런 거 한 장쯤 없어져도, 전연 알아채지 못하거든요. 나도 자기 방위하지 않음 죽고 마는 걸요. 그 사람은 비정상이니깐요, 그 정도는 당연하죠, 뭐. 안 그래요?"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멍청한 대꾸를 했다.
"제대로 밥은 먹고 있나?" 하고
"먹고 있죠. 무얼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안 먹음 죽어버리잖아요?"
"'제대로 된 걸' 먹고 있느냐 말이야."
유키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며 맥도날드며 데일리 퀸이며 인스턴트 음식 그런 거. 그밖엔 따끈따끈한 도시락..."
잡종 인스턴트 음식.
"다섯 시에 마중하러 가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뭐 좀 그럴싸한 걸 먹으러 가자구. 그건 식생활로선 너무 너무 형편없어. 사춘기의 소녀는 좀 더 제대로 된 걸 먹어야 해. 그런 생활을 오래 계속하다간 어른이 된 다음 생리 불순이 돼. 어떻게 되건 네 마음대로지 뭐냐구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생리 불순이 되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애먹게 되지. 주위 사정도 생각해야 해."
"바보스럽게" 하고 작은 소리로 유키가 말했다.
"보라구, 그런데 만일 싫지 않으면 너의 그 아카사카 맨션의 전화번호를 좀 알려 주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일방적인 통화라는 건 정당하지 않단 말이야. 넌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난 너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해. 넌 마음 내키면 나한테 전화를 걸어오지만, 난 마음이 내켜도 너한테 전화 걸 수가 없어 불공평하지 뭐냐. 그리고 오늘처럼 만날 약속을 했다가, 여차할 때에 갑자기 예정이 바뀌었을 때에 연락이 닿지 않게 된다면 불편하지 뭐냐."
그녀는 잠시 곤혹스러운 듯이 콧소리를 좀 냈으나, 결국은 번호를 알려 주었다. 나는 수첩 주소록 난에 적힌 고혼다 군 연락처 아래 칸에 유키의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하지만 간단히는 예정을 바꾸거나 하지 말아요, 응"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런 적당주의인 상대자는 엄마 하나면 충분하니깐."
"걱정 마. 난 간단히 예정을 바꾸거나 하진 않아. 거짓말이 아니라구. 배추흰나비한테 물어봐도 좋구, 클로버한테 물어봐도 좋아. 나만큼 꼬박꼬박 약속을 지키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어. 다만 세상엔 돌발 사고라는 게 있단 말이야. 예상도 하지 못한 일이 갑작스레 일어나거든. 세계는 넓고 복잡하니까. 어떤 경우엔 내 힘이 넘치는 일이 생겨날지도 몰라. 그럴 때에 너한테 연락이 닿지 않으면, 아주 곤란하지. 내가 하는 말은 알아듣겠지?"
"돌발사고" 하고 그녀는 말했다.
"청천벽력" 하고 나는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네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참말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21
그들은 오후 세 시 지나서 찾아왔다. 둘이 함께 왔다. 내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에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욕의를 걸친 채 문을 열 때까지 초인종은 여덟 번이나 울렸다. 신경질이 피부를 찌르고 드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내가 문을 열고 보니, 남자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사십대 중반이고, 또 하나는 나하고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편이 키가 크고, 코에 상처 자국이 있었다. 아직 봄무렵인데도 햇볕에 꽤나 그을려 있었다. 어부와 같은 그을림이었다. 괌의 해변이라든가 스키장에서 그을린 그런 류의 것은 분명 아니다. 머리칼은 보기만 해도 빳빳하고, 손이 징그럽게 컸다. 그는 회색의 오버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젊은 편은 키가 크고, 머리칼이 제법 같은 한편 눈이 가늘고 날카로웠다. 한 10년 전의 문학청년 같게 보였다. 동인지의 모임에서 이마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역시 미시마라구" 그런 소리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예전에, 대학의 학과에도 이런 작자가 몇몇 있었다, 이 작자는 감색스텐 칼라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어느 쪽이나 그다지 패셔너블하다곤 할 수 없는 검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길에 떨어져 있었다면 비켜서 지나고 싶을 그런 물건이었다. 싸구려인데다가 그것도 너무 신어서 낡아버렸다. 어느 쪽 '신사'도 내가 특별히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고 싶을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어부'와 '문학'이라고 나는 우선 급한 대로 이름을 붙였다.
문학이 코트의 포켓에서 경찰수첩을 꺼내어 아무 말 없이 내게 보였다. 영화 장면 같군, 하고 나는 느꼈다. 나는 그때까지 경찰수첩 같은 건 본 적이 없었지만, 얼핏 보아 그것은 진짜 같게 느껴졌다. 낡은 폼이 가죽 구두 낡은 폼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코트의 포켓에서 꺼내어 내밀자, 어쩐지 동인지의 강매를 당한 기분이었다.
"아카사카 서 사람이오."하고 문학이 말했다.
나는 끄떡였다. 어부는 오버코트의 포켓에 두 손을 밀어 넣은 채 한 마디도 말을 떼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문어귀에 한쪽 발을 놓고 있었다.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맙소사, 정말로 영화 같군. 문학은 수첩을 포켓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한차례 내 모양새를 점검했다. 머리칼은 축축이 젖은 채로, 욕의 밖에 걸치지 않았겠다. 초록의 레노마 상표인 욕의 바드로브. 물론 라이센스 생산이긴 하지만, 등허리를 돌려대면 분명 '레노마'라고 씌어 있겠다. 샴푸는 웨터. 창피해 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이 무슨 말이건 뻥긋하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실은 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하고 문학이 말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가능하시다면 서까지 가주실 수 없을까요."
"물어보겠다니, 무엇에 대해서?" 하고 나는 질문해 보았다.
"그건 다시 나중에, 그때 가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상대방은 말했다.
"다만 말씀을 듣는 데에 여러 가지로 형식이라든지 서류라든지 그런 것이 필요하므로, 되도록이면 서까지 가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옷 갈아입어도 되겠지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물론이죠, 어서" 하고 문학은 표정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아주 평탄한 목소리이고, 아주 평탄한 표정이었다. 고혼다 군이 형사를 한다면, 한층 더 사실적이고 한층 더 솜씨 좋게 할 수 있는데,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현실이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다.
내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 둘은 문을 열어놓은 채 문의 어귀에 서 있었다. 나는 늘 입는 블루진에 회색의 스웨터를 입고, 트위드의 쟈켓을 걸쳤다. 머리를 말려 빗고, 지갑과 수첩과 키홀더를 포켓에 넣고, 창문을 닫고, 가스 밸브를 잠그고, 전기를 끄고, 부재자 전화의 스위치를 온으로 했다. 그리고 감색 톱사이더를 신었다. 그 둘이는 내가 구두 신는 것을 신기한 듯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부는 아직도 문어귀에 한쪽 발을 들여놓은 채로였다. 아파트의 입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눈에 띄지 않게끔 패트럴카가 세워져 있었다. 극히 보통의 패트롤카로, 운전석에 제복의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어부가 먼저 타고, 그 다음에 내가 타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탔다. 그런 것도 영화 장면 그대로였다. 문학이 문을 닫자, 차는 이윽고 출발했다.
도로는 붐비고 있었는데, 패트럴카는 경적음 따위도 울리지 않고 서서히 달렸다. 차타는 기분은 택시와 대충 같았다. 미터기가 없을 뿐이었다. 달리는 시간보다는 멈춰 있는 시간이 더 많고, 덕분에 주위의 운전수들은 내 얼굴을 모두 다 힐끔힐끔 엿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부 쪽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앞쪽을 보고 있었다. 문학쪽은 풍경묘사의 연습이라도 하듯 까다로운 표정으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묘사를 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필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어휘들을 사용한 어두운 묘사일 게다.
"개념으로서의 봄은 암흑의 조류와 더불어 치열하게 찾아왔다. 그 찾아옴은 도시의 간격에 메말라 붙은 이름도 모를 사람들의 정념을 흔들어 깨우고, 그것을 불모의 유사대로 소리도 없이 흘러 밀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문장을 닥치는 대로 모조리 퇴고해 나가고 싶었다. '개념으로서의 봄'이란 무엇이냐? '불모의 유사'란 무엇이냐? 하지만 도중에서 싱거워져서 그만뒀다. 시부야 거리는 여전히 빤들빤들한 어릿광대옷 같은 꼴을 한 멍텅구리 같은 중학생으로 덮여 있었다. 정념도 유사도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나는 2층의 취조실로 끌려갔다. 조그마한 창문이 있는 2평 남짓한 넓이의 바이었다. 창문으로는 거의 햇빛이 들지 않았다. 이웃 건물과 너무나 근접해 있는 탓일 게다. 방안에는 책상이 하나 있고, 사무의자가 둘, 그리고 비닐 시트의 보조용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이 이상 심플하게는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의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력도 걸려 있지 않으며, 그림도 걸려 있지 않다. 서류장도 없다. 꽃병도 없다. 표어도 없다. 다기 세트도 없다. 책상과 의자와 시계가 있을 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재떨이용 펜접시가 놓였고, 가장자리 쪽에 서류철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방안에 들어서자 코트를 벗고 접어서 보조 의자 위에 놓고, 그리고 나를 철제사무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나의 맞은편에 어부가 앉았다. 문학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수첩을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얼마 동안 둘이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 어젯밤, 무얼 보고 있었소?" 하고 한껏 사이를 두었다가 어부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어부가 말을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어젯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젯밤은 어떤 밤이었지? 어젯밤과 그저께 밤과 그 전날 밤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인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 잠자코 생각하고 있었다. 떠올리기에 시간이 걸린다.
"당신 말이야" 하고 어부가 말했다. 그리고 헛기침이 했다.
"법률적인 걸 이것저것 말하자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구요. 다만 단순히 간단한 걸 묻는 것뿐이란 말이오. 어제 저녁 때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얼 하고 있었나. 간단한 일이 아니겠소. 대답해 준대서 손해 볼 거 없지 않소?"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보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거요? 바로 어제 일이란 말이오. 작년 8월의 일을 물어보고 있는 건 아니잖소.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텐데" 하고 어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야, 하고 말할까고도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필경 그러한 기억의 일시적 결락같은 건 그들에겐 이해되지 않을 게다. 머리가 돌았나 하고 생각되기가 십상이다.
"기다리겠소." 하고 어부는 말했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생각해내시구려." 그러곤 그는 윗도리의 포켓에서 세븐 스타를 꺼내어 빅크의 라이터로 불을 댕겼다.
"당신도 피우겠소?"
"필요 없소" 하고 나는 말했다. 첨단의 도시 생활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브루터스>에 쓰여 있다. 하지만 그 둘은 그런 것엔 아랑곳없이 맛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웠다. 어부는 세븐 스타를 피우고, 문학은 쇼트 호프를 피웠다. 둘이 다 줄담배 골초에 가까웠다. 그들은 <브루터스> 따위는 읽지 않는 것이다. 전연 유행과는 담쌓은 사람들인 것이다.
"5분 기다리겠소." 하고 문학이 여전히 표정이 없는 평탄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동안 어떻게 좀 제대로 떠올려 주시지 않겠소. 어젯밤, 어디서 무엇을 했었는지."
"하니까 말야, 이 사람 인텔리란 말야"하고 어부가 문학 쪽을 향해서 말했다.
"조사해 보니 전에도 취조 받은 적이 있어. 틀림없이 지문이 등록돼 있지 않겠나. 학생운동, 공무 집행 방해, 서류 송검. 이런 것에 이골이 났단 말야. 법률에도 자세하고, 헌법에서 보장된 국민의 권리라든지 그런 걸 제법 소상하게 알고 있어. 이제 곧 변호사를 부르라고 발언할 테지."
"하지만 우리들은 임의 동행을 해 가지고, 극히 간단한 질문을 하고 있을 뿐이란 말이오." 하고 문학이 사뭇 놀랐다는 모양으로 어부에게 말했다.
"뭐 체포하라든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잘 모르겠는 걸. 변호사를 부를 이유 같은 건 아무것도 없겠지요? 어째서 그런 까다로운 생각을 하는 거죠? 이해하기가 힘들구먼."
"그래서 말야, 난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다만 단순히 경찰이 싫은 게 아닐까. 경찰이라고 이름이 붙는 건 어쨌든 무엇이건 생리적으로 싫은 거야. 패트롤카로부터 교통순경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선 죽어도 협력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하고 어부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구요. 빨리 대답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깐. 실제적인 사고방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필시 제대로 응해 주겠지요. 그리고 말이죠. 어젯밤에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만 가지고선 변호사를 불렀댔자 오진 않았거든. 변호사님만 해도 바쁘시니깐 말이야. 인텔리라면 그런 정도는 알고 있다구요."
"그건 그래" 하고 어부는 말했다.
"그런 걸 제대로 알고 계시다면, 서로 간에 시간 절약을 할 수 있다 그 말씀이거든, 우리들도 바쁘겠다, 이 사람도 바쁠 테지. 오래 끌면 서로 간에 시간 낭비일 뿐더러 피곤해지지. 이게 제법 피곤해진단 말야."
"자" 하고 어부가 말했다.
"어떻소, 뭐 좀 떠올리셨소?"
떠올려지지 않았으며, 떠올리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아마 떠올려지겠지.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떠올려지지 않는다. 기억이 끊어진 채 되돌아오지 않는단 말이다.
"무슨 일인지, 우선 사정을 알고 싶은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사정을 알지 못하고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소. 사정을 알지 못하면서, 불리한 말은 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 우선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질문을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니겠소. 당신들의 소행은 전연 예의에 맞지 않소,"
"불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소." 하고 문학이 문장을 검증이나 하듯 되풀이했다.
"예의에 맞지 않소." 하고 문학이 말했다.
"그러니까 인텔리라잖어" 하고 어부가 말했다.
"사물을 보는 눈이 뒤틀려져 있는 거야. 경찰을 싫어한단 말이야. <아사히신문>을 구독하면서 <세카이>를 읽고 있는 거야."
"신문 같은 거 구독도 안하며 <세카이>도 읽지 않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든 무슨 이유로 내가 여기로 연행됐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짓궂게 굴고 싶거든 좋을 대로 짓궂게 굴어봐요. 이쪽은 어차피 한가하거든. 시간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구." 두 형사는 힐끗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사정을 알려 주면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 이거요?" 하고 어부가 말했다.
"아마"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사람에겐 무의식적인 유머 감각이 있군 그래" 하고 문학이 팔짱을 끼면서 벽 위쪽을 보고 말했다.
"아마, 라고 말야."
어부가 콧등 옆으로 곧바로 난 생채기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무슨 칼자국 흉터 같았다. 흉은 제법 깊어, 둘레의 살이 몹시 옥죄어 있었다.
"저 말씀이죠."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들, 바쁘단 말이오. 빨리 이걸 해결하고 싶단 말씀이오. 우리들도 이걸 하고 있는 건 아니라오. 되도록이면 저녁 여섯 시에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느긋이 밥을 먹고 싶소. 우리들은 당신한테 별 원한도 없고, 의도적인 것도 없소. 당신이 어젯밤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지 그걸 말해 준다며, 그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소. 꺼림칙한 데가 없다면 알려줘서 나쁠 것도 없지 않겠소? 아니면 무슨 꺼림칙한 데가 있어서 말하지 못하는 거요?"
나는 테이블 위의 유리 재떨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문학이 수첩을 탁 치고서 포켓에 밀어 넣었다, 한 30초 동안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부가 또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불을 화난 듯 세게 당겼다.
"대단한 배짱이야" 하고 어부가 말했다.
"인권옹호위원회라도 불러?" 하고 문학이 말했다.
"여보게, 이런 거 인권도 아무것도 아니라구" 하고 어부가 말했다.
"이런 건 인권도 아무것도 아니라구" 하고 어부가 말했다.
"이런 건 시민의 의무란 거야. 시민은 경찰의 수사에 가능한 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법 법률에도 써 있단 말야. 당신이 좋아하는 법률에도 제법 그렇게 쓰여 있고 말야. 어째서 그렇게도 경찰을 싫어하오? 당신도 경관에게 길을 물어본 일쯤은 있겠지? 도둑이 들면 경찰에 전화도 하겠고? 상부상조가 아니겠소. 어째서 이런 간단한 일도 협력해 주지 않소. 참으로 간단한 형식적 질문이 아니오? 어젯밤, 당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가? 까탈 부릴 것 없이 빨리 끝내버립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도 다음으로 나갈 수 있어.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고, 만사 오케이 아니겠소. 그렇게 생각지 않소?"
"우선, 사정을 알고 싶은데요."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문학이 포켓에서 화장지를 꺼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어부는 책상 서랍에서 플라스틱 잣대를 꺼내어, 손바닥을 찰싹 찰싹 두드렸다.
"당신, 알고 있기나 해?" 하고 문학이 화장지를 책상 옆의 휴지통에 내버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자꾸자꾸 악화시키고 있단 말이오."
"알겠나, 지금은 1970년은 아니란 말이야. 당신하고 여기서 반권력 놀이를 하고 있을 겨를은 없단 말이오" 하고 진저리난다는 듯이 어부가 말했다.
"그런 시대는 말야, 끝났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당신도 모두가 이 사회에 꽉 묻혀 있단 말이오. 권력이고 반권력이고 없단 말이야, 이젠. 아무도 그런 사고는 하지 않거든. 커다란 사회란 말이야. 풍파를 일으킨들, 좋을 건 아무것도 없는 거요. 시스템이 말이지. 꽉 맞도록 돼버렸단 말이오, 이 사회가 싫다면 가만히 대지진이라도 기다리는 거지. 구덩이라도 파고서, 하지만 지금 여기서 제아무리 버틴다 해도 아무런 득도 없다구, 서로 간에. 소모일 뿐이야. 인텔리라면 그런 것쯤 아실 텐데 그래?"
"그건 그래, 우리도 좀 피곤해서 말투가 어지간히 거칠었던 지도 몰라. 그랬다면 잘못했어. 사과한다구" 하고 문학이 수첩을 또 팔락팔락 넘기면서 말했다.
"하지만 말이지, 우리도 피곤하다구. 계속 근무증이란 말일세. 어젯밤부터 거의 잠을 못 자고 있어. 어린 것들의 얼굴을 벌써 닷새나 못 보고 있어. 제대로 밥도 못 먹었고, 당신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구. 거기에 당신이 나와 가지고 버티기만 하면서 아무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거야. 그야 신경질도 나겠지. 아시겠소? 당신이 자신의 입장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건 말이지, 결국 우리도 피곤하면 자꾸자꾸 기분이 언짢아진다는 그거란 말이야.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것도 간단히 끝낼 수 없게 되지. 일이 뒤틀려지거든. 물론 당신이 의뢰할 만한 법률은 있어. 국민의 권리도 있어. 하지만 그런 걸 운용하는 건 시간이 걸리지. 시간이 걸리는 동안, 당신은 불쾌한 꼴을 당할지도 몰라. 법률이라는 건 굉장히 혼잡한 것이라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니깐 말이지. 아무래도 현장의 운용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있긴 있거든. 이해해 주겠나, 그런 거?"
"오해하면 곤란하지만, 뭐 위협하는 건 아니구" 하고 어부가 말했다.
"충고하고 있는 걸세, 우리는. 우리들도 당신이 불쾌한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나는 잠자코 재떨이를 보고 있었다. 재떨이엔 아무런 표시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저 낡고 지저분한 유리 재떨이였다. 처음엔 투명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이미 그렇지는 않았다. 부유스름하게 흐리고, 구석에는 담뱃진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것이 몇 년쯤 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10년쯤 놓여 있었겠군, 하고 나는 상상했다. 어부는 잠시 동안 플라스틱 잣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좋겠지요." 하고 그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사정을 설명하지요. 사실은 우리들에게도 질문하는 절차라는 게 있는 것이지만, 당신 쪽에도 말할 게 있는 거 같으니, 지금은 거기에 따릅시다. 지금 같은 경우엔."
그리고 잣대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서류철을 집어, 팔락 팔락 넘기고 봉투를 손에 집어, 거기에서 큰 사진을 꺼내 내 앞에다가 밀어내듯하며 내놓았다. 나는 그 세장의 사진을 손에 집어 들고 보았다. 흑백의 실제적인 사진이었다. 그것이 예술적인 목적에서 찍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진엔 여자가 찍혀 있었다. 우선 처음은 알몸의 등허리를 보이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사진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엉덩이가 탄탄해 보였다. 머리카락이 부채처럼 펼쳐져서 목부터 위를 덮고 있었다. 다리는 약간 벌어져, 음부가 보이는 듯했다. 손은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여자는 잠자는 것처럼 보였다. 침대의 특징이랄 것은 없었다.
두 번째는 좀 더 사실적이었다. 여자는 위를 쳐다보는 자세였다. 유방과 음모와 얼굴이 보였다. 손과 다리는 똑바로 '차렷' 자세가 되어 있었다. 여자가 죽어 있다는 점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눈을 뜨고, 입가가 묘하게 굳어 일그러져 있었다. '메이'였다.
나는 세 번째의 사진을 보았다. 얼굴을 업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메이'였다.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대단하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무감동이라고나 해야 할 것을 몸에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목둘레에 싸악 싹 문질러댄 자국과 같은 줄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입속이 바싹바싹 마르고, 침이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손바닥의 피부가 근질거려 왔다.
메이. 그녀의 멋지던 섹스. 우리는 아침까지 걸려서 즐겁게 <제설작업>을 하고,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듣고, 그리고 커피를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죽어버렸다. 지금은 이미 있지 않다. 나는 고개를 젓고 싶었다. 하지만 젓지 않았다. 나는 세장의 사진을 포개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부에게 돌려주었다. 그 둘이는 내가 사진을 보고 있는 모양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얼굴로 나는 어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여자엔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요?" 하고 어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만일 내가 알고 있다고 한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혼다 군이 이에 말려들게 된다. 그가 나하고 메이의 연결고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를 말려들게 해선 안 된다. 어쩌면 그도 이 사건에 이미 말려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나로선 알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래서 고혼다 군이 내 이름을 불고, 내가 메이하고 동침했다는 사실을 이미 불었다고 한다면, 나는 어지간히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나는 거짓 진술을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얼렁뚱땅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내 편에서' 고혼다 군 이름을 끄집어 낼 수는 없단 말이다. 그하고 나하고는 입장이 다르다. 그런 짓을 했다간 큰 일이 난다. 주간지가 뛰어온다.
"다시 한 번 자알 보고요" 하고 어부가 느릿느릿하고 함축성 있는 어투로 말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다시 한 번 잘 보고, 그리고 답변해 주세요. 어때요, 이 여자 본 적이 있어요? 거짓말만은 하지 말고요. 우리는 프로라서, 누구나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이라는 건 금방 들킨 다구요. 경찰서에서 거짓말을 하면, 이건 일이 커집니다. 알겠지요?"
나는 다시 한 번 시간을 들여 세 장의 사진을 보았다. 외면하고 싶었으나, 외면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죽었군."
"죽었군." 하고 문학이 되풀이했다.
"굉장하게 죽었어. 확실히 죽었어. 진짜 죽었어, 보면 알거든. 우린 그걸 보았다구요. 현장에서. 미녀였지. 알몸으로 죽어 있었거든. 미녀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지. 하지만 죽고 말면 말이지, 미녀고 뭐고 별로 관계가 없거든. 알몸이란 것도 관계없고 그저 그런 송장이지. 내버려두면 썩어가지. 피부가 망가지고 뒤집혀서 썩은 살덩이가 튀어나오지. 고약한 냄새가 나고, 벌레가 끓고 당신 그런 거 본 적이 있소?"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린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구요. 그게 거기까지 가면, 미녀였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다구. 다만 살덩이가 썩어 있을 뿐. 썩은 스테이크 고기나 다름없지. 그 냄새를 맡으면 좀 얼마동안은 밥 먹을 수가 없거든. 우린 프로지만,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이번엔 뼈다귀만 남게 되지. 여기까지 가면 냄새는 없지. 죄다 온통 깡말라 있지. 새하얗고, 아주 깨끗하지. 뼈다귀란 깨끗해서 좋다구. 그래, 그것이, 어떻든, 이 여자는 거기까지 가지 않았어. 뼈다귀까지도 가지 않았고, 썩지도 않았어. 그저 죽었을 뿐. 그저 딱딱할 뿐. 미녀였다는 건 분명해. 살았을 때 저러한 미녀하고 차분히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는 걸. 하지만 알몸뚱이 보고 있어도 아무 느낌이 없어. 이미 죽어 있으니까. 우리들과 송장이란 건 전연 달라요. 송장이란 건 말이야, 석상과도 같은 거란 말씀이야, 이렇게 분수령이 있는데, 거길 한 걸음이라도 넘으면 제로가 되거든. 완전한 제로가 되는 거지. 그 다음은 분신이 되기를 기다릴 뿐. 하지만 미녀였지. 가엾게시리. 살았더라면 훨씬 나은 미녀로 있을 수 있었는데 말야. 누군가 죽였단 말이야. 안 될 노릇이지. 이 여자에게도 살 권리가 있었단 말이야. 아직 스무 살 남짓하단 말야. 누군가 스타킹으로 목을 졸랐지. 여간해서 갑자기 죽어간다는 걸 알 수 있거든. 어째서 내가 이런데서 죽어야 한다니, 하고 생각하지. 좀 더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산소가 적어져서 질식해 간다는 걸 느끼게 되거든. 머리가 멍해진다. 소변을 갈기고 만다.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힘이 모자란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꼴이 별로 좋지 않군 그래. 우린 그녀에게 그런 꼴로 죽게 한 범인을 잡고 싶다 그거야. 잡지 않으면 안 된단 말씀이야. 이건 범죄란 말이야. 그것도 대단히 악질적인 범죄야. 힘이 있는 자가 폭력적으로 힘이 약한 자를 죽였단 말이야.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런 걸 허용하게 된다면, 사회의 근저가 흔들리고 말어. 범인을 잡아가지고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임무이다. 그러지 않으면, 범인은 또 딴 여자를 죽일지도 몰라.“
"이 여자는 어제 낮 즈음에 아카사카의 고급 호텔의 더블 룸을 예약해 가지고, 다섯 시에 혼자서 들었어." 하고 어부가 말했다.
"나중에 남편이 온다고 말했어. 이름과 전화는 가짜였고 돈은 선불이었지. 여섯시에 룸서비스로 저녁식사 일인분을 시켰어. 그때엔 혼자였어. 일곱 시엔 쟁반을 복도에 내놓았었지. 그리고 '깨우지 마시오.' 표시를 문 앞에 붙여두었지. 이튿날 열두시가 체크아웃 시간이었거든. 열두 시반에 프런트 담당이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문에는 아직도 '깨우지 마시오.' 표시가 걸려 있었고, 노크했지만, 응답은 없었어. 호텔 종업원이 열쇠로 문을 열었어. 여자가 알몸으로 죽어 있었지. 첫 번째 사진과 같은 모양으로, 남자가 온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했어. 맨윗층에 레스토랑이 있는데, 다들 쉴 새 없이 엘리베이터로 왔다 갔다 하고들 있지. 출입이 심하단 말이야. 때문에 이 호텔은 흔히 밀회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꼬리가 잡히지 않거든."
"핸드백 속엔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하고 문학이 말했다.
"면허증도, 수첩도, 신용카드도 없었지. 현금카드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 의복에는 이름의 약자도 붙어 있지 않고. 있는 건 오로지 화장 도구하고 3만 엔 남짓 들어 있는 지갑하고, 피임약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어. 아니지. 꼭 하나가 있었어. 지갑의 제일 안쪽 좀 알기 힘든 곳에 말이지, 명함 한 장이 들어 있지 뭔가. 바로 당신 명함이 말야."
"진짜, 모르겠어?" 하고 어부가 다짐하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되도록이면 경찰에 협력해서, 그녀를 살해한 범인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우선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것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럼, 당신이 어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겠소? 이거면 우리들이 당신한테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 사정 청취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겠지요?" 하고 문학이 말했다.
"여섯 시에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그리고 책을 읽고, 술을 몇 잔 마시고, 열두시 전에 잤소." 하고 나는 말했다.
나의 기억은 그제야 회복되고 있었다. 필시 '메이'의 시체 사진을 본 탓일 게다.
"그러는 동안에 누군가 만났소?" 하고 어부가 질문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소. 줄곧 혼자였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전화는 어땠소? 누군가 전화는 걸어오지 않았소?"
"아무한테도 걸려오지 않았소." 하고 나는 말했다.
"아홉시 전후해서 한 번 걸려왔지만, 부재자 전화를 해두었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나중에 물어봤더니 일 관계의 전화였소."
"어째서 집에 있으면서 부재자 전화로 해두었지?" 하고 어부가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휴가 중이라서 일 관계자하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들이 그 전화의 상대방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 하기에 나는 알려 주었다.
"그래서, 혼자 저녁을 먹고 나서 내내 책을 읽고 있었소?" 하고 어부가 질문했다.
"먼저 접시를 치우고 나서 책을 읽었소."
"어떤 책?"
"믿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카프카의 <심판>"
어부는 종이에다가 카프카의 <심판>이라고 섰다. 그가 글자인지도 몰랐으므로 문학이 가르쳐 주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는 확실히 카프카의 <심판>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열두 시까지 읽고 있었다고 했겠다." 하고 어부는 말했다.
"술도 마시고 있었다고."
"저녁에 우선 맥주, 그 다음엔 브랜드."
"얼만큼 마셨지요?"
나는 상기해 보았다.
"캠 맥주가 두 개, 그 다음엔 브랜디를 병으로 4분의 1가량. 복숭아 통조림도 먹었고요."
어부는 그것을 전부 종이에 메모를 했다. '복숭아 통조림도 먹었다.’
"그밖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생각해 보겠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참으로 사소한 특징이 없는 밤이었던 것이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특징이 없는 조용한 밤에 '메이'는 누군가에게 스타킹으로 교살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나지 않소, 하고 나는 말했다.
"보라구, 심각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구" 하고 문학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당신, 지금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있다니까."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불리하고 어쩌고가 없소. 아시겠소." 하고 나는 말했다.
"난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 명함쯤은 일 관계자들에게 얼마든지 주고 다니지요. 어째서 그 여자가 내 명함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그렇대서 내가 그 여자를 죽였다 곤 할 수 없지 않아요?"
"전연 관계가 없는 명함이라면 일부러 지갑 구석 쪽에 소중히 한 장만을 갖고 있거나 하진 않겠지요." 하고 어부가 말했다.
"우리들은 두 가지 가설을 가지고 있소. 우선 첫째로 이 여자는 당신들 업계의 관계자이며, 호텔에서 남자와 밀회를 하고, 필경은 그 상대방 남자가 백 속의 꼬리가 잡힐 것들을 깡그리 가져가버린 거요. 다만 명함만은 지갑의 제일 안쪽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거지. 둘째로, 이 부류는 꼬리가 잡힐 만한 건 휴대하지 않거든. 일류 호텔을 이용하는 그것. 범인은 이상자일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선을 생각할 수 있겠소? 어떻소?"
나는 잠자코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든 간에, 당신의 명함이 키가 돼 있어. 어떻든 지금 같아선 우리들에겐 그것밖엔 단서랄 것이 없거든" 하고 어부가 볼펜 대가리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타이르듯이 말했다.
"명함이라는 건 이름을 인쇄한 것뿐인 종이 쪽지지" 하고 말했다.
"증거고 뭐고 될 턱이 없지. 그것만 가지고선 아무 입증도 할 수 없어."
"지금 같아선 그렇지" 하고 어부는 말했다. 그는 계속 볼펜 대가리로 테이블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것만 가지고선 아무 입증도 되지 않는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감식반이 그 방과 유류품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사체 해부도 있고, 내일이면 좀 더 여러 가지가 판명됩니다. 어떻게 연결됐느냐가 알아집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리지요. 기다리는 동안에 당신한테도 좀 더 여러 가지를 상기해 주기를 바라고 싶소. 혹은 하룻밤 걸릴지도 모르지만, 철저하게 하겠습니다. 차분히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로 생각이 되살아나는 일도 나오게 될지도 몰라.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처음부터 고쳐합시다. 명백하게 어제 하루 있었던 일을 상기해 주시오. 아침에서부터 하나하나 순번으로."
나는 벽의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사뭇 재미없다는 듯이 다섯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때 돌연 유키와의 약속을 상기했다.
"전화를 빌려주시겠소?" 하고 나는 어부에게 말했다.
"다섯 시에 누구하고 만날 약속을 했답니다. 중요한 약속이오. 연락하지 않으면 곤란해요."
"여자아이?" 하고 어부가 물었다.
"그래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구개를 끄떡이고 전화를 내 쪽으로 돌려서 내밀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어 '유키'의 전화번호를 찾아보고 다이얼을 돌렸다. 세 번째 신호음이 가자 그녀가 받았다.
"용건이 생겨서 가지 못한다 그거겠죠?" 하고 유키는 앞질러서 말했다.
"사고가 났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내 탓은 아니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경찰에 연행돼 가지고 취조를 받고 있어. 아카사카 서에 있어. 설명하자면 길어지는데, 아무튼 간단하게 풀려날 것 같지 않아."
"경찰? 뭘 한 거요. 도대체?"
"아무것도 안했어. 살인 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 나왔다구. 말려든 거야."
"바보스럽게" 하고 유키는 무감동하게 말했다.
"분명 그래" 하고 나도 인정했다.
"물론 내가 죽인 건 아니지" 하고 나는 말했다.
"난 여러 가지로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고. 사정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야. 여러 가지로 질문을 받고 있어. 하지만 아무튼 너한텐 미안하게 됐어. 머지않아 어김없이 봉창을 할 테니까."
"진짜 바보스러워"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러곤 탕 하고 때려 부수듯 전화를 끊었다.
나도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를 어부에게 돌려주었다. 둘이는 나하고 유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특별히 얻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와 데이트 약속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들은 필시 나에 대한 의혹을 한층 더 깊게 할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필시 이상 성욕자나 무엇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사회 일반의 서른네 살의 남자는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나의 어제 하루의 행동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캐물었으며, 그것을 서류로 만들었다. 편지지 같은 종이에 두꺼운 종이를 밑받침하고서 볼펜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적어 넣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서류였다. 시간과 노력의 낭비였다. 거기엔 내가 무엇을 먹었으며, 어디에 갔느냐가 실로 극명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저녁 식사로 먹은 전골 만드는 법까지도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런 농지거리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지 한 가지 꼼꼼히 그것을 적어놓았다. 꽤나 두툼한 서류가 되었다. 참으로 무의미한 서류.
여섯 시 반에 그들은 근처 음식점에서 도시락을 주문해 주었다. 그다지 좋은 도시락이라곤 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잡다한 음식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고기경단이라든가 포테이토 샐러드라든가, 어묵 삶은 꼬치 등 그런 것이 들어 있었다. 양념도 너무 진했다. 야채절임은 인착색료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부나 문학이나 똑같은 것을 사뭇 맛있게 먹고 있었으므로, 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치웠다. 긴장해서 식사도 목구멍을 넘기지 못한다고 생각될까 보아 괘씸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자, 문학이 싱겁고 미지근한 차를 갖다 주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들 둘이는 또 담배를 피웠다. 비좁은 방안은 연기로 자욱해졌다. 눈이 아려오고, 윗도리에까지 니코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차 마시는 시간이 끝나자, 질문을 다시 시작했다. 끝장나지 않는 무의미한 행위의 축적이었다. <심판>을 어느 언저리로부터 아는 언저리까지 읽었느냐든가 몇 시경에 파나마로 갈아입었느냐 라든가, 그러한 시시한 것 말이다. 나는 카프카 소설의 줄거리를 어부에게 설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은 그다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스토리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 일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은 과연 21세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문득 나는 걱정스러워졌다. 어떻든 간에, 그는 <심판>의 줄거리까지 서류에 적어 넣었다. 어째서 그런 것을 일일이 물어서 서류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나로선 전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로 프란츠 카프카적이었다.
나는 차츰 싱거운 느낌이 들면서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곤해졌다. 머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세세하고, 너무나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은 참을성이 있었고, 온갖 사상의 틈새를 찾아내 가지고선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나의 답변을 용지에다가 자잘하게 써넣어 갔다. 가끔가끔 무슨 글자인지 몰라서, 어부가 문학에게 물었다. 그들은 그러한 작업에는 전연 따분해하지 않는 것만 않았다. 필시 피곤하기는 했겠지만, 결코 수고를 덜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어딘가에 흠이 없을까 해서 귀를 기울이고, 눈빛을 반짝이곤 했다. 가끔씩 어느 쪽인가 밖에 나가고, 5~6분이 지나서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끈질긴 사람들이었다.
여덟 시가 되자 질문하는 담당이 어부에게 문학으로 바뀌었다. 어부는 미상불 팔이 피곤한 듯 일어선 채 기지개를 펴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고 목을 돌려보기도 하곤 했다. 그러곤 또 담배를 피웠다. 문학도 질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한 개비 담배를 피웠다. 환기가 나쁜 방안에는, 마치 웨더 리포트의 스테이지처럼 온 방안에 흰 연기가 자욱이 서려 있었다. 이것저것 잡다한 음식과 담배연기. 나는 밖으로 나가 한껏 심호흡을 하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나는 말했다.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막다른 데서 왼쪽, 하고 문학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소변을 보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돌아왔다. 변소에서 심호흡을 한다는 것도 이상야릇한 일이었고, 사실 그다지 기분 좋은 것은 못 되었다. 하지만 살해당한 메이 생각을 하면 군소리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나는 살아있단 말이다. 적어도 나는 호흡을 할 수 있단 말이다.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문학이 질문을 다시 시작했다. 그날 밤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에 대해 그는 자세히 질문했다. 어떤 관계인가? 어떤 일로 관련을 가졌는가? 어떤 용건이 있어서 걸어왔는가? 어째서 뒤미처 곧 전화를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그렇게 긴 휴가를 가졌는가? 그만한 경제적 여유는 있는가? 세금 신고는 마쳤는가? 그런 여러 가지 세세한 것을 물었다. 내가 답변을 하면, 그는 그것을 어부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들여서 깨끗한 해서체로 용지에 써넣었다.
그런 작업에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나로선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는 일상적인 작업일는지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적으로, 혹은 또 그들은 나를 파김치가 되게 하여, 그럼으로써 진실을 끄집어내려고 일부러 이러한 쓸데없는 사무 작업을 밑도 끝도 없이 계속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확실히 그 목적을 이룩한 것이다. 나는 파김치가 다 되고, 따분해 가지고, 질문 받은 건 전부 확실히 답변하게끔 되어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어서 끝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열한 시가 되어 서도 그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끝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열 시에 어부가 방에서 나갔다가 열한 시에 돌아왔다. 선잠을 자고 왔는지, 눈이 좀 발그레했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쓰인 서류를 체크했다. 그리곤 문학과 교대했다. 문학은 커피 석잔을 가져왔다. 인스턴트 커피였다. 게다가 설탕과 크림마저 듬뿍 넣어진 것이었다. 잡다한 음식.
나는 이제 따분할 대로 따분해 있었다. 열한 시 반에 피곤하고 졸리고, 이제 이 이상은 아무것도 지껄일 수가 없다고 나는 선언했다.
"안 되겠군" 하고 문학은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깍지 끼고선 우드득 우드득 꺽는 소리를 내면서 사뭇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굉장히 급한 일이고, 수사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랍니다. 죄송합니다만 되도록이면 힘을 내어 끝까지 해버리고 싶은 데요."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다 곤 믿어지지 않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쇄말적인 것이 나중에 가서 제법 도움이 된답니다. 쇄말적인 것이 사건을 해결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반대로 쇄말적인 것을 소홀히 했다가 후회한 예도 몇몇 있습니다. 어떻든 이건 살인 사건이니까요. 사람 하나가 죽은 것 아닙니까. 우리들도 진지하답니다. 미안하지만 참고 협력해 주시오. 솔직히 말해서 말이죠, 하려고만 들면 중요참고인으로서 당신의 구치허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 간에 귀찮은 일이 많아지거든. 안 그렇소? 잔뜩 서류가 필요해지고, 융통도 없게 되고. 하니까 여기서 좀 순탄하게 합시다. 협력해 준다면, 그런 거친 조치는 취하지 않겠소."
"졸리거든, 가면실에서 한잠 자는 게 어떻겠소?" 하고 어부가 옆에서 참견했다.
"누워서 한잠 푹 자면 또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나는 끄떡였다. 어디라도 좋다. 이렇게 못 견딜 방에 있는 것보다는 어디건 나을 것 같았다.
어부가 그 가면실을 데려다 주었다. 음산한 복도를 걸어서, 한층 더 음산한 계단을 내려가, 또 복도를 걸었다. 모든 것에 음산히 배어든 것 같은 장소였다. 그가 말하는 가면실이란 건 유치장이었다.
"여기는 나로선 유치장 같기만 한데요" 하고 나는 아주 메마른 미소를 띠고 말했다.
"만약에 내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죠."
"여기밖엔 없다오. 미안하지만" 하고 어부는 말했다.
"농담 말라구. 난 집에 가겠소." 하고 나는 말했다.
"내일 아침 다시 오겠소."
"아니오. 잠그지 않을 테니" 하고 어부는 말했다.
"보시오, 부탁합시다. 오늘 하루만 참아달라구요. 유치장이라도 잠그지 않으면 보통의 방 아니겠소."
나는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는 게 차츰 귀찮아졌다.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하긴 유치장이라도 잠그지 않으면 보통의 방이 아닌가. 어떻든 나는 몹시 지쳐 있었고, 몹시 졸렸다. 누구하고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 딱딱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정다운 감촉이었다. 촉촉한 매트리스와 싸구려 모포, 변소의 냄새. 절망감.
"잠그지 않을 테니까" 하고 어부는 문을 닫았다.
덜커덩! 하고 몹시 차가운 소리가 났다. 잠그건 안 잠그건, 제법 차가운 소리가 난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누군가 어디선가 코고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굉장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지구가 가고 올 수 없는 여러 개의 자잘한 절망적인 층으로 갈라져 있어서, 그 근접한 층의 어디선가부터 흘러나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그런 소리였다. 서글픈 듯도 하고, 손이 닿지 않는, 그리고 현실적인 소리였다.
메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젯밤 네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단 말이다. 그때 너는 아직 살아 있었는지, 또는 이미 죽어 있었는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튼 그때 네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지. 너하고 동침했던 때의 일을, 네 옷을 천천히 벗기고 있었을 때의 일을. 그건 참으로, 무엇이라면 좋을까, 동창회 같았단 말이다. 온 세계의 태엽이 풀린 것처럼 나는 느슨해 있었지. 그런 일이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지. 하지만 말이야, 메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지금 같아선 아무것도 없어.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모두가 아주 연약한 인생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나로선 고혼다 군을 스캔들에 밀어 넣고 싶진 않단 말이야. 그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내야. 그가 매춘부와 동침하고 살인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된다면, 그 이미지의 세계는 엉망이 되고 만단 말이야. 프로그램에서도 상업광고에서도 빠지게 될지도 모르거든. 하잘 것 없다고 하면 하잘 것 없지. 하잘 것 없는 이미지이고, 하잘 것 없는 세상이기도 해. 하지만 그는 나를 친구로서 신용하고 대접해 주었어. 하니까 나도 그를 친구로서 대접한다. 그것은 신의의 문제란 말이야.
메이, 염소의 메이. 나는 너하고 둘이 있어서 아주 즐거웠어. 너하고 자는 게 아주 즐거웠었어, 꼭 동화 같았어. 그것이 너에게 위안이 되는지 어떤지는 나에겐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너에 대해선 줄곧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우리들은 둘이서 아침까지 제설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게지. 관능적 눈 치우기.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경비를 써가면서 서로 껴안았던 것이다.
곰의 '푸우'와 염소의 '메이' 목 졸리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웠겠지. 아직 죽고 싶진 않았겠지. 필시. 하지만 나로선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지 어떤지,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나로선 이렇게 할 수밖엔 없다구. 그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란 말이야. 시스템이란 말이야.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잘 가거라, 염소의 메이, 적어도 너는 이제 두 번 다시는 죽지 않아도 된다.
"잘 자거라" 하고 나는 말했다.
"잘 자거라." 사고가 메아리쳤다.
"어쩜!" 하고 메이가 말했다.
22
다음날도 대개 비슷한 일이 되풀이 되었다. 아침에 우리들은 또 같은 방에 모여서 셋이서 묵묵히 맛이라곤 조금도 없는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빵이었다. 그러고 나서 문학이 나에게 전기면도기를 빌려주었다. 나는 전기면도기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별수 없이 그걸로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잘 것 없는 쇄말적인 질문. 합법적인 고문.
낮까지 그것이 태엽 장치를 한 달팽이 모양같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낮까지에 그들은 질문할 수 있는 만큼은 전부 질문하고 말았다. 질문거리도 그제야 다해 버린 것 같았다.
"대략 이 정도겠지요" 하고 어부가 볼펜을 책상 위에 놓고서 말했다. 두 형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아마 그들은 여기에 붙들어 두기 위해 시간 벌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넘겨짚었다. 아무려면 살해당한 여자의 지갑 속에 명함 한 장이 들어 있었기로서니 구치허가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록 나에게 유효한 알리바이가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싱겁기 짝이 없는 카프카적인 미로 속에다가 나를 붙들어두고 있는 것이다. 지문이니 사체해부니 하는 결과가 나와서, 내가 범인인지 아닌지가 명백해지기까지, 하잘것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떻든 이제 질문은 끝난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목욕을 하고, 이를 닦고, 제법 단정하게 수염을 깎는다. 제대로 커피를 마신다. 제대로 식사를 한다.
"자, 이제" 하고 어부가 등을 펴고 탁탁 허리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슬슬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이젠 질문도 끝난 것 같으니, 난 집에 가겠소." 하고 나는 말했다.
"그게 글쎄 그렇게만 할 수도 없답니다." 하고 어부가 거북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요?" 하고 나는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하는 성명이 필요하거든요."
"좋아요. 서명합시다."
"그러기 전에 우선 내용이 틀림이 없는지 읽고서 확인해 주시오. 한 줄 한 줄 확실히.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깐."
나는 30장 또는 40장이 되는 차곡이 써넣어진 사무용 괘지를 천천히 주의 깊게 읽었다. 한 20년이나 지나면 이런 문장에도 혹은 풍속 자료적인 가치는 있게 될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병적이랄 만큼 세밀하고, 실증적이다. 연구자의 도움은 될 것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34세의 독신 남성의 생활이 어느 정도 역력히 떠올라 온다. 평균적 남성이랄 순 없다 하더라도, 그런 대로 시대의 눈이요, 잣대이긴 하다. 하지만 이제 경찰서의 취조실에서 읽고 있노라니 깐 그저 따분해질 뿐이었다. 다 읽어내는 데에 15분이 걸렸다. 하지만 그런 대로, 이걸로 끝난단 말이다. 이것만 다 읽고 서명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단 말이다. 읽고 나자 나는 책상 위에 대고 일부러 큰소리로 종이갈피를 맞추었다.
"좋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내용에 이의는 없어요. 서명하지요. 어디다 서명하면 됩니까?"
어부는 손가락 사이에서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문학 쪽을 보았다. 문학은 라디에이터 위에 놓은 쇼트 호프 갑을 집어, 거기서 한 개비를 끄집어내어, 입에 물고, 불을 댕기곤, 얼굴을 찡그리며 그 연기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쩐지 몹시 언짢은 예감이 들었다. 말이 죽어가고 있고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답니다." 하고 문학이 아주 느릿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프로가 아마추어에게 설명할 때의, 마치 어린애에게 타이르듯한 어투였다.
"이런 서류는 말입니다. 자필이 아니고선 안 된답니다."
"자필?"
"즉 말이죠? 이걸 다시 한 번 고쳐 써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말씀입니다. 당신이. 자기 손으로. 그러지 않으면 법률적으로 유효하지 않답니다."
나는 그 사무용 괘지 묶음에 눈길을 보냈다. 나에겐 화낼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화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건 그릇된 일이다. 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책상이라도 두드리고 싶었다.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할 권리는 없다. 나는 법률에 의해 보호된 시민이란 말이다, 하고. 나는 일어나서 서슴없이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그것을 말릴 권리가 그들에게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지쳐 있어서,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주장이라도 할 양이면, 차라리 하라는 대로 무엇이나 해주리라 하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 편이 마음 편할 듯싶었다.
"어설퍼졌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쳐서 어설퍼졌어."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 예전엔 좀 더 진지하게 화를 냈었다. 잡다한 음식부스러기든 담배 연기든 전기면도기든 간에, 그런 것쯤에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나이를 먹은 탓이다. 마음이 약해졌어.
"못하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젠 지쳤어. 집에 돌아가겠어. 돌아갈 권리가 있다구. 아무도 막을 수 없어."
문학이 으르렁거리 듯한, 하품을 하는 듯한 애매한 소리를 냈다. 어부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볼펜대가리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톡톡톡.톡, 톡톡.톡톡.톡, 그런 식으로 리듬에 변화를 주어 두드렸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이야기가 까다로워지는군." 하고 메마른 소리로 어부가 말했다.
"좋았어.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구치허가를 받겠다. 강제적으로 구치해 가지고 취조하겠다. 그렇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점잖게는 굴지 않는다구. 그래, 좋다구, 그러는 편이 이쪽도 하기가 쉽지. 어때, 그렇지?" 하고 그는 문학에게 물었다.
"좋으실 대로."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구치허가가 나오기까지는 나는 자유요. 집에 있을 테니까, 나오거든 마중하러 와주시오.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집으로 가겠소. 여기 있으면 기분이 울적해."
"구치허가가 나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구속할 수 있다구" 하고 문학은 말했다.
"그런 법률은 이미 있었다구."
육법전서를 갖다가 보여 달라고 말할 까라고도 생각했으나, 거기서 내 에너지도 다해버렸다. 저편이 공갈로 그러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거기에 맞서기엔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알겠소." 하고 나는 체념하고 말했다.
"하라는 대로 쓰지요. 그 대신 전화를 걸게 해주시오."
어부가 전화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유키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아직도 경찰에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밤까지 걸릴 것 같아. 하니까 오늘도 그쪽엔 갈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아직도 있어요?" 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바보스럽지" 하고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전에 나 먼저 말했다.
"정당하지 못하네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사물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하는 방법이 있다.
"뭘 하고 있어, 지금?" 하고 나는 말했다.
"그저 빈둥빈둥하고 있을 뿐. 나뒹굴면서 음악 듣고, 잡지나 그런 거 읽고, 케이크를 먹고, 그런 거요."
"흐응"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튼 여기서 나가게 되면 전화하겠어."
"나오게 되면 좋겠네요." 하고 유키는 평탄한 소리로 말했다.
두 형사는 또 내 전화의 대화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서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특별히 얻을 건 없었던 것 같다.
"그럼, 그래, 어떻든 점심 먹기로 하자구." 하고 어부는 말했다.
점심은 국수였다. 젓가락으로 집어서 들어올리기만 해도 끊어져버릴 정도로 불은 국수였다. 환자용의 유동식 비슷했다. 불치병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둘이는 제법 맛난 듯이 먹었으므로, 나도 그렇게 했다. 국수를 다 먹고 나자, 문학이 또 미적지근한 차를 가져왔다.
오후는 흐리디흐린 강물처럼 고요히 흘러갔다. 시계 소리가 재깍 째깍 방안에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옆방의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저 사무용 괘지에다 글자를 쓰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두 형사는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가끔씩 둘이서 복도로 나가 작은 소리로 쑤군대곤 했다. 나는 책상에 마주앉아 묵묵히 펜을 놀리고 있었다. 쓰잘 것 없는 문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베껴가고 있었다.
"나는 여섯 시 십오 분경에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고, 우선 냉장고에서 꼬냑을 꺼내 가지고..." 순수한 소모.
"어설퍼졌어." 하고 나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굉장히 어설퍼졌어. 하라는 대로하고 있어.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뿐은 아니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조금은 어설퍼지긴 했다. 그러나 제일 문제되는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그것이다. 그래서 버티지 못한단 말이다. 내가 하고 있는 건 참으로 옳은 것일까? 나는 고혼다 군을 비호하는 대신, 모든 것을 털어놓고 수사에 협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거짓말이건, 별로 기분 좋은 것이 못된다. 비록 친구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에게 타이를 수는 있다. 비록 무엇을 한다하더라도 메이가 살아날 수 없는 노릇이라고.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버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서류를 베껴 쓰고만 있었다. 장시간에 걸쳐 잔글씨를 써대는 건 어지간히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차츰차츰 손목의 맥이 풀려온다. 팔꿈치가 무거워진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이내 글씨가 잘못된다. 잘못되면 줄을 긋고, 거기에 손도장을 찍는다. 기분이 울적해진다.
저녁에 또 도시락을 먹었다. 식욕은 거의 없었다. 차를 마셨더니 위장이 메스꺼웠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나로서도 형편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결과는 안 나왔소?" 하고 나는 어부에게 물어보았다.
"지문이라든가 유류품이라든가 사체 해부의 결과 같은 건?"
"아직 안 나왔는걸." 하고 그는 말했다.
"좀 더 시간이 걸리지."
열 시까지 걸려서 이제 다섯 장만하면 되는데, 그것이 나의 능력의 한계였다. 이 이상은 이제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하겠다, 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어부가 다시 나를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나는 거기서 푹 잠이 들었다. 이를 닦을 수 없다는 것도,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는 것도,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아침이 되어 또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밀고,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그리고 이제 다섯 장을 썼다. 그리곤 한 장 한 장에 또박또박 서명을 하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것을 문학이 체크였다.
"이걸로 이제 해방시켜 주겠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질문에 답변해 준다면, 돌아가도 좋아요" 하고 문학이 말했다.
"걱정 마시오, 간단한 질문이니까. 조금만 보충하고 싶은 게 생각났으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또 서류로 꾸민다 그거겠지요, 물론?"
"물론이지요." 하고 문학은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관청이란 건 그런 곳 아니겠소. 서류가 전부지요. 서류와 인감이 없이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지요."
나는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관자놀이 속에 꾸덕꾸덕한 이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어디선가로부터 들어와서, 머릿속에서 부풀어 올랐단 말이다. 이젠 와서 이미 끄집어낼 수는 없다. 손쓰는 게 늦었네요. 조금만 일렀더라면 간단하게 끄집어낼 수 있었겠는데요. 참 안됐네요.
"걱정 마시오. 그렇게 시간은 걸리지 않습니다. 곧 끝납니다."
내가 새로운 쇄말적인 질문에 힘없이 답변하고 있노라니까, 어부가 방으로 돌아와서, 문학을 불러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둘이서 수군수군 선 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등대기에 기대어 목을 치켜들고, 방안의 천장 구석에 얼룩처럼 말라붙은 검은 곰팡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곰팡이는 마치 시체 사진의 음모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벽의 금간 데를 따라, 프라스코 그림처럼 스며든 점이 아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그 곰팡이에는 이 방에 드나든 숱한 인간들의 체취랑 땀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이 나에겐 느껴졌다. 그러한 것들이 몇 십 년이나 걸려서 이런 음산한 곰팡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고 보니 퍽도 오래토록 바깥 풍경을 보지 못했었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음악도 듣지 못했다. 지독한 장소다. 여기서는 온갖 수단을 써서 인간의 자아며 감정이며 자부심이며 신념이며를 압살하려고 든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짓이겨대고, 개미굴 같은 관료적 미로 속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사람이 품는 불안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태양의 광선을 멀리하고, 부스러기 같은 음식을 먹게 한다. 불쾌한 땀을 흘리게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곰팡이가 생겨난다.
나는 책상 위에다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눈을 감고 눈 내리는 삿포로 거리를 생각했다. 거대한 돌핀 호텔과 거기 프런트 담당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프런트에 서서 저 광채 나는 영업적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고 있을까? 나는 지금 여기서부터 전화를 걸어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쓰잘 데 없는 농지거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름도 알지 못한단 말이다." 전화를 걸 방도가 없다. 귀여운 여자아이였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특히 그녀가 일하고 있는 모습이 훌륭했다. 호텔의 요정. 그녀는 호텔에서 일하기를 좋아한단 말이다. 나하곤 다르다.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규칙적인 일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녀는 하는 일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게 되면 그녀는 어딘지 연약해 보인다. 불안정하고 다치기 쉬워 보인다. 나는 그때, 그녀와 동침하려고만 생각했었던들 동침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동침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하고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살해되거나 하기 전에.
그녀가 어딘가에 사라지고 말거나 하기 전에.
23
이윽고 두 형사는 방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둘이 다 앉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멍청하니 곰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만 돌아가도 됩니다."하고 어부가 무표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돌아가도 된다구요?" 하고 나는 어리벙벙해서 되물었다.
"이젠 질문이 끝났어. 끝났다구" 하고 문학이 말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달라졌다구요" 하고 어부가 말했다.
"이 이상 당신을 여기에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됐소. 그러니 돌아가도 되오. 수고하셨소."
나는 완전히 담배 냄새에 절어버린 쟈켓을 입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언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든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돌아가 버리는 게 좋을 성싶었다. 현관까지 문학이 전송해 주었다.
"보시오. 당신이 무혐의라는 건, 어젯밤에 이미 알고 있었소." 하고 그는 말했다.
"감식과 해부 결과가 나와서, 당신하곤 전혀 관련성이 발견되지 않았거든. 남아있던 정액의 혈액형도 달랐고, 당신 지문도 나오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었지. 그래서 두어본 거요. 그걸 볼 때까지 좀 더 들추어보려고 말야.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건 우리들로선 알 수 있거든. 육감이란 말이야. 직업적인 육감. 그 여자가 누구인지, 힌트 정도는 갖고 있겠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그걸 숨기고 있어. 안 될 일이야. 우린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구. 프로니깐 말야. 도대체 사람 하나가 살해당했단 말야."
"미안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또 와줘야 하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하고 그는 포켓에서 성냥을 꺼내어, 성냥개비로 손톱 거스러미를 누르면서 말했다.
"일단 한다고 하면, 우리들은 끈질기단 말야. 이번엔 옆에서 변호사가 나오더라도 꼼짝도 안할 만큼 확고부동하게 준비해 주겠어."
"변호사?" 하고 나는 물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벌써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욕조에 더운 물을 채우고, 천천히 거기에 몸을 담그었다. 이를 닦고, 수염을 밀고, 머리를 감았다. 온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지독한 장소였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꼭 뱀굴이었다.
욕탕에서 나오자 나는 컬리프라워를 삶아, 그것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아더 플라이속이 카운트 베이스 오케스트라를 경음악으로 노래하는 레코드를 들었다. 반성 없이 화려한 레코드. 16년 전에 샀었지. 1967년. 16년 동안 들어왔다. 그래도 싫증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나는 좀 잠을 잤다. 잠깐 어디론가 갔다가, "뒤로 돌아가"를 해서 되돌아오는 것 같은 잠이었다. 30분인가 그 정도의 잠이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아직 한 시였다. 나는 수영복과 타월을 백에 넣어 가지고, 스바루를 타고 센다가야의 실내 수영장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를 충분히 헤엄쳤다. 그러고 나니 그제서야 인간다운 기분이 생겼다. 식욕도 좀 생겼다.
나는 유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녀는 있었다. 가까스로 경찰에서 해방됐단다, 하고 나는 말했다. 거 잘 됐네요, 하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점심은 먹었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먹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침부터 슈크림 두 개를 먹었을 뿐,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여전히 형편없는 식생활이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마중하러 가겠다, 뭐 좀 먹으러 가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응,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스바루를 타고 바깥 정원을 돌아, 회화관 앞 가로수 길을 지나, 아오야마 일가로부터 노기신사로 나섰다. 하루하루 봄기운은 짙어지고 있었다. 내가 아카사카 경찰서에서 이틀 동안을 취조당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람의 감촉은 온화해지고, 나무들의 이파리는 눈에 보이게 푸르름을 더하고, 햇빛은 둥글둥글해지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마저 아트 파머의 프류겔 혼처럼 우아하게 들렸다. 세계는 아름답고, 배도 고팠었다. 관자놀이 안쪽의 일그러진 형상을 한 응어리도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현관 벨을 누르자, 유키는 이내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오늘은 데이빗 보위의 트레이너 셔츠를 입고, 그 위에다 가죽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캔버스 천의 숄더백에는 스트레이 캣과 스트리 던과 컬쳐클럽의 배지가 붙어 있었다. 기묘한 배합이었으나, 글쎄 아무려면 또 어떠랴 싶었다.
"경찰은 재미있었어요?" 하고 유키는 물었다.
"지독하더구나" 하고 나는 말했다.
"보이 조지의 노래하고 같을 만큼 지독했어."
"흐응" 하고 그녀는 감동 없이 말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배지 사줄테니까, 바꿔 달면 어때?" 하고 나는 숄더백의 컬쳐 클럽 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묘한 사람"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말하기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우선 그녀를 제대로 된 가게로 데리고 가서, 홀 호이트의 빵으로 만든 로스트비프 샌드위치와, 야채샐러드를 먹이고, 참하고 신선한 우유를 마시게 했다. 나도 같은 것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맛난 샌드위치였다. 소스가 담백하고, 고기가 부드럽고, 진짜 호스래디쉬 머스터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미각에 기운이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식사라고 한단 말이다.
"자 이제부터 어디로 갈까?" 하고 나는 유키에게 물었다.
"쯔지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아" 하고 나는 말했다.
"쯔지도로 가자꾸나. 하지만 어째서 쯔지도라지?"
"아빠네 집이 있거든" 하고 유키가 말했다.
"아저씨를 만나고 싶대."
"나를?"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두 번째 커피를 마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뭐 나쁜 사람이라곤 말하지 않았다고 유키네 아빠가 어째서 일부러 나를 만나고 싶다지? 네가 내 이야기를 아빠한테 했나?"
"그래요. 전화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경찰에 끌려가서 귀가시켜 주지 않아서 곤란을 당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빠가 잘 아는 변호사한테 경찰에 당신에 대해 문의를 하게 했지요. 그 사람 그런 교제가 넓데요. 상당히 현실적인 사람이니깐."
"옳거니"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랬었구나."
"도움이 됐겠죠?"
"도움이 됐어. 참으로."
"아빠는 말했지만, 경찰에선 당신을 잡아둘 만한 권리는 없었대요. 귀가하고 싶다면 당신은 언제라도 자유로이 귀가할 수 있었죠, 법률적으로는."
"알고 있었어, 그 점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죠? 인제 돌아갑니다. 하고."
"까다로운 문제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에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을 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보통이 아니네요." 하고 그녀는 두 손으로 빰을 괴고 말했다. 말하기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스바루를 타고 쯔지도까지 갔다. 오후 늦은 시각이라서, 도로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숄더백에서 갖가지 테이프를 꺼내서 틀었다. 봅 마리의 <엑소더스>로부터 스틱스의 <미스터 로봇>까지, 실로 각양각색의 음악이 차안에 흘렀다. 재미난 것도 있는가 하면, 시시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경치와 같은 것이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자꾸자꾸 지나가버린다.
유키는 거의 입을 열지 않은 채 시트에 느슨히 기대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대시보드에 있던 나의 선글라스를 집어 들어, 그것을 끼고, 도중에서 버지니아 슬림을 한 개비 피웠다. 나도 잠자코 운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기어를 자주자주 바꾸면서 훨씬 앞쪽 노면을 내다보고 있었다. 교통 표지판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체크했다.
이따금 그녀가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지금 열세 살이라는 게 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갖가지 일들 모두가 신선하게 비치리라. 음악이며 풍경이며 사람들이. 나 역시 옛날에는 그랬다. 내가 열세 살 때, 세계는 훨씬 단순했다. 노력은 당연히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말은 보증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아름다움은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혼자 있을 때의 자신을 믿을 수 있었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대개의 경우 혼자 있지는 못했었다.
가정과 학교라는 완강한 테두리 속에 갇혀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한 나이였다. 나는 여자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순조롭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하고 거의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재치가 없는 소년이었다. 선생이나 부모가 강압으로 밀어붙이는 가치관에 이의를 말하고 반항하려 했지만, 이의를 제기할 말이 제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거나 솜씨 있게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거나 척척 되어 가는 고혼다 군과는 전혀 반대 입장에 놓였다. 하지만, 나는 사물의 신선한 모습을 볼 줄은 알았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냄새가 제대로 풍겼고, 눈물은 진실로 훈훈했으며, 여자아이는 꿈처럼 아름다웠으며, 로큰롤이었다. 영화관의 어둠은 우아하고 친밀했으며, 여름밤은 끝없이 그윽하고 관능적이었다. 그러한 초조한 나날을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과 더불어 지냈다. 샘 쿡이랑 리키 넬슨의 유행가 가사를 암송하면서 지냈다.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열세 살 때였다. 그리고 고혼다 군과는 같은 과학 실험반에 있었다. 그는 여자아이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성냥을 그어 가스버너에다 우아하게 쏘옥 불을 댕기곤 했다.
어째서 그가 나를 부러워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보라구" 하고 나는 유키에게 말을 걸었다.
"양가죽을 걸치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너 어디서 그 사람을 만났지?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녀는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고, 선글라스를 벗어서 대시보드에 되올려 놓았다. 그리곤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우선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겠어요?"
"좋아"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얼마동안 술 취한 다음날 아침 모양 어둑어둑하고 구슬픈 필 콜린스의 유행가에 맞추어 허밍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선글라스를 집어 들고 안경대를 만지작거렸다.
"저어, 전에 당신이 훗카이도에서 내게 말했죠? 지금까지 데이트한 여자아이 중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고요."
"분명 그렇게 말했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거 정말인가요? 아니면 내 비위를 맞춰주기 위한 것이었나요?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어요."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까지 몇 사람쯤하고 데이트했지요?, 2백 명 쯤."
"설마" 하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게는 그만한 인기는 없다구,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느 편인가 하면 아주 국지적이야. 폭이 좁아서, 범위가 크지 못하거든. 고작 열대 명쯤이 아닐까."
"고것밖엔 안 돼요?"
"한심한 인생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어둡고, 축축하고, 좁고."
"국지적"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같은 인생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른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아직 너무 어리니까.
"열댓 명" 하고 그녀는 말했다.
"대개"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34년의 보잘것없는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대개 그 정도. 글쎄 많아야 고작 스무 명쯤 될까."
"스무 명이라" 하고 유키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튼, 그중에서 내가 가장 예쁘다, 그 말이죠?"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예쁜 사람하곤 별로 교제하지 않았나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리고 두 개비 째 담배에다 불을 댕겼다. 교차점에 순경의 모습이 보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빼앗아 창밖에다 버렸다.
"제법 예쁜 여자아이하고도 데이트를 했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유키 쪽이 더 예쁜 걸. 거짓말 아니라니까. 이런 말 이해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유키의 아름다움은 독립해서 기능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야. 다른 아이들하곤 전혀 다르지.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차안에서 담배 피우지 마. 바깥에서 보이기도 하고, 차에서도 냄새가 나. 전에도 말했지만, 여자가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담배를 피우면, 이담에 커서 생리 불순이 된다구."
"바보스럽게"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양가죽을 쓴 사람 이야기를 좀 해봐" 하고 나는 말했다.
"양사나이 말이죠?"
"어떻게 알았지, 그 이름을?"
"당신이 말했잖아요. 요전 번 전화에서 양사나이라고요."
"그랬던가?"
"그랬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도로는 정체해 있어서, 나는 두 번이나 신호 대기에 걸렸다.
"양사나이 이야기 좀 해줘. 어디서 양사나이를 만났지?"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구요. 단지 문득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 걸요. 당신을 보고 있다가요." 그리고 가늘게 쭉 뻗은 머리칼을 손가락에다 돌돌 말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양가죽을 쓴 사람이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색을 말이죠. 당신을 그 호텔에서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구요. 그래서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해본 거예요. 거기 대해 특별하게 뭔가 알고 있다는 게 아니에요."
나는 신호 대기를 하는 동안, 그 일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머리에 태엽을 조일 필요가 있다. 조일 대로 꽈악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하고 나는 유키에게 물었다.
"말하자면 유키한테는 그 모습이 보였다 그 말이 아니겠어. 그 양사나이의 모습이 말야?"
"표현이 잘 안 되네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말하면 될까? 그 양사나이라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분명하게 떠오른다는 게 아니고요. 알겠어? 뭔가 이렇게, 그런 것을 본 사람의 공기처럼 이쪽으로 전달되는 거라고요.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야. 눈에는 안보이지만, 난 그것을 느끼고, 형태를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정확한 형태는 아니고, '형태 비슷한 거'죠. 만약 누구한테 그것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겐 뭔가 분간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즉 나밖엔 아무도 모르는 형태예요. 어째,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어요. 우습지요. 그렇죠. 내가 하는 말 알 수 있어요?"
"막연하게 밖엔 알 수 없는 걸" 하고 나는 선글라스 다리를 깨물고 있었다.
"예컨대,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유키는 내 속에 있는, 혹은 내게 달라붙어서 존재하고 있는 감정이나 사념을 느끼고, 그것을 예컨대 상징적인 꿈처럼 영상화할 수 있다. 그말인가?"
"사념?"
"강렬하게 생각된 것 말이지."
"그렇군요. 그럴지도 몰라. 강렬하게 생각된 것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죠. 그 강렬하게 생각된 일을 만들어낸 것, 그런 물건이 있죠. 그 아주 강력한 무엇. 생각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고 하면 좋을지, 그런 물건이 있으면 난 그걸 느껴버리거든요. 감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내 나름으로 보죠. 하지만 꿈처럼은 아니고요. '텅 빈 꿈'. 그래요, 그런 거. 텅 빈 꿈이에요. 거기엔 아무도 없지요.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죠. 왜 그 TV의 콘트라스트 말이죠, 그걸 굉장히 어둡게 할 때와 마찬가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든요. 하지만 거기엔 누군가 있지요.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요. 그걸 느낀단 말예요. 거기에 있는 건 양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이구라요. 악인은 아니에요. 하지만 보이진 않죠. 불에 쬐인 종이에 나타난 그림처럼, 그건 거기에 있죠.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인단 말예요. 형상이 없는 형상이에요." 그녀는 혀를 찼다.
"형편없는 설명이죠?"
"아니야, 유키는 잘 설명했어."
"정말?"
"아주" 하고 말했다.
"유키가 말하려는 그것은 알 듯하다고. 내가 그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야."
거리를 빠져나와 쯔지도의 바다로 나서 나는 소나무숲 옆의 주차 공간의 하얀 선속에 차를 세웠다. 다른 차는 거의 없었다. 좀 걷자고 나는 유키에게 말했다. 기분 좋은 4월의 오후였다. 거센 바람도 없고 파도도 잔잔했다. 마치 먼 바다 쪽에서 누군가 살며시 시트를 흔들고 있는 듯 자잘한 파도가 밀려왔다간 다시 밀려가곤 했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파도였다. 서퍼는 그만 단념하고 뭍에 올라, 젖은 수트를 입은 채 백사장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쓰레기를 태우는 모닥불의 하얀 연기가 거의 직선적인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왼편에는 에노시마가 신기루처럼 어슴푸레 흐려 보였다. 커다란 검정개가 생각이 깊은 얼굴로 물가의 오른쪽에서 왼편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나갔다. 먼 바다에는 몇 척인가 어선이 떠 있고, 그 상공을 하얀 소용돌이 모양 소리 없이 갈매기 떼가 날고 있었다. 바다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졌다.
우리는 해안의 보행자 도로를 산책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랑 자전거를 탄 여고생들이랑 엇갈리면서 후지사와 쪽을 향해 한가하게 걷다가, 적당한 곳에서 백사장에 앉아 둘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흔히 그런 걸 느끼게 되나?"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가끔씩. 가끔씩 밖엔 안 느끼죠. 그런 걸 느끼는 상대란 그렇게 많진 않거든요. 아주 조금뿐, 하지만 되도록 그 일은 생각지 않으려고 하거든. 무엇을 느낄 것만 같아지면 이내 닫아버리도록 하거든요. 대개 그런 경우란 느낌으로 알게 되니깐요. 닫아 버리면, 깊게는 느끼지 않아도 되거든요,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닫아버리는 거죠.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죠. 무엇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보이진 않아.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돼. 그래. 영화 같은 데서 무서운 게 나올 것만 같으면 눈을 감아버리죠. 그것과 마찬가지죠. 그것이 지나가 버릴 때까지 감고 있지요. 가만히 말이죠."
"어째서 감아버리지?"
"싫으니까 그러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예전엔 좀 더 어렸을 적엔 감지 않았죠. 학교서도 말예요, 무엇을 느끼면 그걸 말로 했어요. 하지만 그러면, 모두가 언짢아하지 뭐예요. 예컨대 말이죠. 누군가 다칠 것만 같다고 느끼겠죠. 그래서 동무한테 '쟤가 다칠 거야' 하고 말하면, 결국 그 애가 어김없이 다치고 말지 뭐예요. '유령'이란 소릴 들은 적도 있다구요. 그런 소문이 떠돌았대요. 그래서 난 굉장히 다친 셈이죠. 그래서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죠.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죠. 보일 듯하면 싸악 자기를 닫아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내 경우엔 닫지 않았잖아?"
그녀는 으쓱 어깨를 움츠렸다.
"어째 돌연한 것 같았어요. 경계를 할 틈도 없었던 걸요. 돌연 훌쩍, 그 이미지 같은 게 떠올랐겠죠. 맨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말이죠. 호텔 바에서. 내가 음악을 듣고 있다가... 아무 거면 어때요. 듀란 듀란이건 데이빗 보위건... 응,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을 때란 그렇죠.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아요. 여유롭고 그래서 음악이란 좋은 거죠."
"예지능력이 있단 말일까?" 하고 나는 물었다.
"예컨대 그, 다칠 것을 미리 안다든가, 그런 건?"
"글쎄 어떨지. 그런 것하곤 또 좀 다르지 않을까. 난 예지하는 건 아니겠고. 거기에 있는 걸 다만 느껴 알아챌 뿐예요. 하지만 그 무엇이랄까, 무엇인가 일어나자면 일어나기 위한 분위기 같은 게 있겠죠. 이해가 가요? 예컨대 철봉을 하다가 다치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방심이랄까 과신이랄까 그런 것이 있겠지요? 들떠 가지고 제멋에 겨워 있다든가. 그러한 감정의 파도 같은 것이, 나한텐 굉장히 민감하게 느껴진단 말예요. 그리고 이건 위태위태해, 하는 생각이 들죠. 그렇게 되면 텅 빈 꿈 비슷한 게 훌쩍 튀어나오죠. 그것이 튀어나오면... 일어나죠. 보인다구요. 하지만 이젠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을 하면 모두들 나를 유령이라고 부르니까. 그저 보는 거예요. 여기서 이 사람은 화상을 입은 게 아닐까하고요. 그러면 화상을 입거든요. 하지만 나로선 아무 말도 할 수 없거든요. 그런 건 비참하지 뭐예요. 닫아버리면 자기 자신이 미워지지 말지요. 하니까 닫지요. 닫아버리면 자기 자신이 미워지지 않아도 되고요."
그녀는 한참동안 손에 모래를 쥐고 놀고 있었다.
"양사나이는 정말로 있어요?"
"정말로 있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그 호텔 안에는 그가 살고 있는 장소가 있단 말이야. 호텔 안에 또 다른 호텔이 있어. 그건 보통으론 보이지 않는 장소인 거야. 하지만 그건 어김없이 거기에 남겨져 있어. 나를 위해 남겨져 있는 거야. 그건 나를 위한 장소니깐 말이지. 그는 거기에 살아 있으면서, 나하고 여러 가지 사물을 연결하고 있는 거야. 그건 나를 위한 장소이며, 양사나이는 나를 위해 일하고 있어. 그가 있지 않으면, 나는 여러 가지 것들과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그가 그러한 것들을 관리하고 있거든. 전화 교환수처럼."
"연결한다?"
"그래. 내가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무엇인가를 연결하려고 한다. 그가 그것을 연결한다."
"잘 모르겠는걸."
나도 유키와 마찬가지로 모래를 움켜쥐고선, 손가락 사이로 떨어뜨렸다.
"나로서도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양사나이가 나한테 그렇게 설명해 줬어."
"아직 옛적부터 양치기, 있었어?" 나는 끄떡였다.
"응, 옛적부터 있었어. 내가 어렸을 적부터. 나는 그걸 줄곧 느껴왔었다구. 거기엔 무엇인가 있다고 말야. 하지만 그것이 양사나이라는 또렷한 형태를 가지게 된 건, 그다지 전의 일이 아니지. 양사나이는 조금씩 조금씩 형태를 잡게 돼있단 말이야. 내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서 말이지. 내가 그럴까? 나로서도 알 수 없지. 아마 그럴 필요가 있어서 그랬겠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라, 거기에 대해 줄곧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알 수가 없어. 바보스럽지 뭐야."
"그 이야기, 다른 누구한테 이야기했어?"
"아니,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런 거 이야기했자 아무도 믿지 않을 거고 말야.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 게다가 나로선 제대로 잘 설명할 수가 없어. 유키한테라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나도 제법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줄곧 잠자코 있었어요. 아빠도 엄마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내가 먼저 이야기한 적은 없거든요. 훨씬 어릴 적부터 그런 건 이야기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거든요. 본능적으로."
"서로 이야기해서 좋았어."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도 '유령조직'의 한 사람이에요" 하고 유키는 모래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차를 세운 데까지 걸어서 돌아오는 동안에, 유키는 학교 이야기를 했다. 중학교가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는가 하는 것을 그녀는 이야기했다.
"여름 방학 때부터 줄곧 학교에 가지 않고 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공부가 싫어서가 아니에요. 그저 그 장소가 싫은 거예요. 참을 수가 없는 걸요. 학교에 가면 기분이 언짢아지면서 곧 토해버리는 걸요. 매일 매일 토했어요. 토하고 나면 그 때문에 또 구박을 당하거든요. 여럿이 달려들어 구박한다구요. 선생님까지 합세해서 구박하는 걸요."
"내가 동급생이었다면, 유키 같은 예쁜 아이는 절대로 구박하지 않을 텐데 말야."
유키는 얼마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예쁘니까 구박한다는 경우도 있잖아요? 게다가 난 유명 인사의 자식이기도 하고. 그런 아이란, 굉장히 애지중지 되든가, 아니면 굉장히 구박을 받든가, 그 어느 한 쪽이죠. 모두들하고 제대로 사귈 수가 없거든요. 난 언제나 긴장해 있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보세요, 늘 상 마음을 닫아버릴 수 있도록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든. 내가 노상 그런 식으로 쭈뼛거리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 말예요. 쭈뼛쭈뼛해 하면, '미끼'로 보이나 봐요. 그래서 구박하는 거죠. 굉장히 징그러운 방식으로 말이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징그럽게요. 굉장히 창피한 짓을 하거든요. 그런 짓을 어떻게 하느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그런 짓. 글쎄..."
나는 유키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쓰잘데 없는 거 잊어버리려무나. 학교 같은 거 억지로 갈 건 없다구.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돼. 나도 잘 알고 있지. 그건 형편없는 곳이야. 언짢은 놈이 커다란 얼굴을 하고 있겠지. 시시한 교원이 뽐내고 있겠지. 명백히 교원의 80퍼센트까지는 무능력자 아니면 새디스트야. 또는 무능력자이자 새디스트야.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 가지고, 그걸 징그러운 방식으로 학생들한테 내던지지. 무의미한 세세한 규칙이 너무나 많아. 사람이 개성을 압살하다시피 하는 시스템이 돼 있어서, 상상력의 부스러기도 없는 바보 같은 놈이 좋은 성적을 받거든."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지. 학교라는 게 얼마나 시시한 곳이냐 하는 데 대해선 한 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지."
"하지만 의무 교육이에요, 중학교는."
"그런 건 누군가 딴 사람이 생각할 일이지, 유키가 생각할 일이 아니야. 모두가 유키를 구박하는 그런 장소에 가야 할 의무란 아무것도 없어 전혀 없어. 그런 걸 싫다고 할 권리는 유키에게 있는 거야. 큰 소리로 '싫다'하고 말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 앞은 어떻게 되죠? 줄곧 이런 일의 되풀이에요?"
"나도 열세 살 때엔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고 나는 말했다.
"이런 식 그대로의 인생이 계속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야. 하지만 그렇진 않아. 어떻게든 되지 않는다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좀 더 크게 되면 사랑도 하게 돼. 브래지어도 선물 받게 되고,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아저씨란 사람, 바보 같군." 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세요. 요즘의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들은 다들 '브래지어' 쯤은 갖고 있어요. 아저씬 반세기쯤 늦었잖아요?"
"에게게" 하고 나는 말했다.
"응?"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러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저씬 바보야."
"그럴지도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에 서서 차 있는 데까지 걸었다.
24
해변 가까이에 있는 유키의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정원수가 많은 넓고 오래 된 집이었다. 그 한쪽 모서리에는 소오낭이 아직 해변의 별장 지대였던 시절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풍경이, 봄날의 해질녘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정원의 여기저기에 심어진 벚나무들에는 두툼하게 꽃봉오리가 져 있었다. 벚꽃이 다 피고 나면, 이윽고 목련이 꽃을 피우리라. 그러한 식으로 색조와 냄새가 나날이 희미하게 변해 가는 것을 통해 계절의 변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장소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마키무라의 집은 판자로 만들어진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대문은 지붕이 딸린 고풍스런 것이었다. 문패만이 아주 새로웠는데, 거기에는 또렷한 먹글씨로 <마키무라>라고 쓰여 있었다. 벨을 누르자, 잠시 후에 20대 중반의 키가 큰 사나이가 나타나, 나와 유키를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붙임성 있는 사나이였다. 나에게나 유키에 대해서도 붙임성이 있었다. 유키와는 이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혼다와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좋은 느낌을 주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물론 고혼다가 훨씬 더 세련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안마당으로 안내하면서, 자신은 마키무라 선생의 시중을 들고 있다고 말하였다.
"자동차의 운전수 노릇을 하거나, 원고를 전달하고, 필요한 것을 조사하고, 골프 치는데 모시고 따라가고, 마작 상대를 하고, 외국에도 따라가는 등 아무튼 무슨 일이든 다 합니다" 하고 그는 특별히 묻지 않았는데도 즐거운 듯이 내게 설명하였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입주하고 있는 서생 같은 거죠."
"네"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지겨워" 하고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상대를 보고 말을 하는가 보다.
마키무라 선생은 뒷마당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소나무 줄기와 줄기 사이에 녹색의 네트를 치고, 한가운데서 표적을 겨냥해 마음껏 공을 치고 있었다. 골프채가 하늘을 가르자, 흇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의 하나이다. 비참하고 서글프게 들린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골프라는 스포츠를 이유도 없이 싫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들어가자, 돌아다보며 골프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건을 집어 들어 정중히 얼굴의 땀을 닦고는, 유키에게 "잘 왔다" 하고 말하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들은 체했다. 눈을 딴 데로 돌리고, 잠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종이를 벗겨서 입에 넣고는 쩍쩍 소리를 내며 씹었다. 그리고 포장지를 구겨서 가까이에 있는 화분 속에 버렸다.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 정도도 하지 않고" 하고 마키무라 선생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유키가 마지못해 인사했다. 그리고 잠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어디론가 훌쩍 가버렸다.
"이봐, 맥주를 가져와" 하고 마키무라 선생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서생에게 말하였다. 서생은 "네" 하고 아주 맑고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나갔다. 마키무라 선생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 땅에 침을 탁 뱉고는, 또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나의 존재는 무시하고, 한참 동안 가만히 녹색의 네트와 하얀 표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종합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동안 이끼가 끼어 있는 정원의 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소의 분위기가 내게는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인공적이며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어디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누가 잘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떤 패러디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모두들 제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와 서생. 하지만 고혼다 같으면 더 매력적이고 능숙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고혼다는 무슨 일이든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각본은 졸렬하더라도.
"자네가 유키를 돌보아 주었다지." 하고 선생은 말했다.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을 뿐이에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경찰 쪽이 고마웠습니다. 도움을 받았어요."
"음, 아니, 그건 좋아. 아무튼 이로써 모든 게 무마됐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게다가 딸이 내게 무슨 일을 부탁한다는 건 드문 일이니까. 뭐, 그건 괜찮아. 나도 경찰은 옛날부터 싫어해요. 60년에는 나도 곤욕을 치렀지. 가바 미찌고가 죽었을 때, 나는 국회 주변에 있었어. 옛 얘기야. 옛날에는……."
그리고 그는 허리를 구부려 골프채를 주워 들고는, 나를 바라보고, 골프채로 자신의 발을 툭툭 가벼이 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내 발을 내려다보고는 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발과 얼굴의 상관관계를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옛날에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정의가 아닌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지"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나는 별로 열의가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골프를 치나?"
"치지 않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골프를 싫어하는가?"
"좋아하고 싫어하고가 없어요.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는 웃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가 없을 턱이 없겠지. 대체로 골프를 쳐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모두들 골프를 싫어해요. 그렇게 돼 있어. 정직하게 말해도 돼. 정직한 의견을 듣고 싶으니까."
"좋아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말해"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하였다.
"왜?"
"모든 게 우습게 느껴져요" 하고 나는 말했다.
"거창한 도구라든지 대단한 컷이나 깃발, 입는 옷이나 신는 신발, 웅크리고 앉아 잔디를 살펴볼 때의 눈매나 귀를 기울이는 모양 따위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귀를 기울이는 모양?" 하고 그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냥 한 말이에요, 의미는 없어요. 다만 골프에 수반되는 모든 게 마음에 거슬린다는 것뿐이에요. 귀를 기울이는 모양이라는 건 농담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마키무라 히라쿠는 또 잠시 공허한 눈으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약간 별난 편인가?" 하고 그는 물었다.
"별나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보통 인간이에요. 단지 농담이 재미가 없을 뿐입니다."
이윽고 서생이 맥주 두 병과 컵 두 개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쟁반을 복도에 내려놓고, 오프너로 병마개를 따고는 컵에 맥주를 따랐다. 그리고 또 빠른 걸음으로 이내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 마셔요" 하고 그는 복도에 걸터앉으면서 말하였다.
"들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는 맥주를 마셨다. 목이 갈증 나 있었기 때문에 맥주가 아주 맛있었다.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은 마실 수 없다. 한 잔 만이다.
마키무라 히라쿠의 나이가 몇인지 나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마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을 듯했다. 그다지 키는 크지 않지만, 체격이 다부져서 실제보다 더 몸집이 큰 사나이로 보였다. 가슴이 두텁고 팔이나 목도 굵었다. 목은 너무 굵어 보였다. 좀 더 목이 가늘었으면 스포츠맨 타입으로 보이기도 했겠지만, 턱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그 뭉툭함과 귀 밑의 숙명적인 근육의 느슨함이 오랜 세월에 걸친 불섭생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한 것은 아무리 골프를 한대도 제거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간다. 시간이 제 몫을 뽑아간다.
내가 예전에 사진으로 본 마키무라 히라쿠는 몸이 홀쭉하고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특별히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남의 눈을 끄는 데가 있었다. 과연 전도가 유망한 신진 작가다운 풍모였다. 이는 몇 년 전의 일이었을 까? 15년이나 16년 전의 일이었을까? 눈매에는 아직 날카로움이 남아 있었다. 이따금 햇빛이나 각도에 따라 그 눈이 맑아 보이는 수가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있는데, 군데군데 백발이 섞여 있었다. 아마 골프를 치기 때문이리라, 햇볕에 잘 그을어 셔츠의 단추는 끼우지 않고 있었다. 목이 너무 굵기 때문이다. 불그스레한 색깔의 폴로셔츠를 몸에 잘 어울리게 입기는 어려운 일이다. 목이 너무 가늘면 빈한하고 궁상맞아 보인다. 또 너무 굵으면 답답해 보인다.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다. 고혼다 같으면 틀림없이 잘 어울리게 입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 그만두자, 이제 고혼다에 관한 생각은 하지 말자.
"자네는 뭔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지?"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하였다.
"글을 쓴다고 할 만한 게 못 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구멍을 메우기 위한 문장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에요. 뭐든 좋아요. 글자가 씌어져 있으면 돼요. 하지만 누가 쓰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서 내가 쓰고 있는 겁니다. 눈을 치우는 일과도 같아요. 문화적인 눈 치우기."
"눈 치우기"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하였다.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골프채를 힐끗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표현이야."
"고맙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는 좋아한다거나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어요. 그러한 차원의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유효한 눈 치우기의 방법이라는 것은 확실히 있어요. 요령이라든지 노하우라든지, 자세라든지, 힘을 기울이는 방식 따위는 말예요. 그러한 것을 생각하는 건 싫어하지 않아요."
"명쾌한 대답이군." 하고 그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수준이 낮으면, 머리 자체가 매우 단순해요."
"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15초쯤 잠자코 있었다.
"그 눈 치우기라는 표현은 자네가 생각했나?"
"그래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어디서든 사용해도 괜찮을까? 그 '눈 치우기'라는 말. 재미있는 표현이야. 문화적인 눈 치우기."
"네. 좋습니다. 특별히 특허를 받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도 알 수 있어"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귓불을 만지면서 말하였다.
"이따금 나도 그렇게 느껴요. 이런 문장을 쓰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말야, 이따금.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어. 세계가 훨씬 작았어. 반응 같은 것이 있었어.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 사람들이 모두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어. 미디어 자체가 작았어. 작은 마을 같았어요.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컵의 맥주를 다 마시고, 병을 집어 들어 양쪽 컵에 따랐다. 나는 사양했지만, 무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무엇이 정의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어. 모두들 알지 못하고 있어. 그러므로 눈앞의 일을 다투고 있을 뿐이야. 눈 치우기야. 자네 말이 맞아."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나무의 줄기와 줄기 사이에 쳐진 녹색의 네트를 바라보았다. 잔디밭 위에는 하얀 골프공이 삼사십 개쯤 떨어져 있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마키무라 히라쿠는 다음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본인은 별로 그러한 일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모두들 그가 이야기하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나도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죽 귓불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는 마치 새 지폐 뭉치를 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딸아이가 자네를 따르고 있어"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그 애는 누구나 따르는 애가 아녜요. 아니 거의 아무도 따르지 않아요. 나하고는 별로 말도 하지 않아. 엄마하고도 별로 말을 하지 않지만, 적어도 엄마에 대한 존경심은 있어. 나는 존경하고 있지 않아, 전혀. 오히려 무시하고 있어. 친구도 전혀 없어. 몇 개월 전부터 학교에도 다니고 있지 않아요. 집에 틀어박혀 시끄러운 음악만 듣고 있지. 문제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고, 실제로 담임선생도 그렇게 말했어. 타인과는 어울릴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는 따르고 있거든. 왜 그럴까?"
"왜 그럴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마음이 맞는가?"
"그럴지도 몰라요."
"딸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약간 생각해 보았다. 마치 면접시험을 치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직하게 말해야 하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어려운 연령이에요. 어느 경우라도 어려운데, 가정환경이 엉망이어서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워지고 있어요. 아무도 그 뒷바라지를 하고 있지 않아요.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요.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요. 그녀의 마음을 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심하게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부모가 너무 유명해요. 얼굴이 너무 예뻐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요. 그리고 약간 보통이 아닌 점이 있거든요. 감수성이 너무 예민하다고 할까... 약간 특수한데가 있어요. 하지만 원래는 순진한 아이에요. 제대로 돌보아 주면 온전하게 자랍니다."
"하지만 아무도 돌보아 주고 있지 않아요."
"그래요."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귀에서 손을 떼고, 한참 동안 그 손가락 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야.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요. 우선 첫째로, 이혼했을 때에 분명히 서류를 교환했거든. 나는 일체 유키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말야. 할 수 없었어. 나도 그 무렵에는 꽤 여자를 밝히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지.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렇게 유키를 만나는 데도 사실은 아메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구. 쓸모없는 이름이지, 아메와 유키야. 어쨌든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둘째로, 아까도 말한 것처럼 유키는 나를 전혀 따르고 있지 않아. 무슨 말을 하든, 내 말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나로선 그러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구. 딸아이야 귀엽지, 물론. 단 하나뿐인 자식인 걸. 하지만 글렀어. 손을 쓸 길이 없어."
그리고 또 녹색의 네트를 바라보았다. 해질녘의 어둠이 이미 상당히 깊어져가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 흐트러져 있는 하얀 골프공들은, 바구니에 가득 담겨진 관절의 뼈들을 흩뜨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일을 해내기에도 힘에 겨워 온 세계를 뛰어다니고 있으니, 아이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죠. 아이가 있는 것조차 늘 잊어버려요. 돈도 치르지 않은 채 훗카이도의 호텔방에 남겨두고는, 이를 생각해 내는 데 사흘이나 걸렸어요. 사흘이에요. 도쿄로 데리고 돌아오니, 딸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혼자서 아파트의 방에 틀어박힌 채 로큰롤 음악을 듣고, 프라이드치킨이나 케이크 따위만 먹으며 지내고 있어요. 학교에도 가지 않아요. 친구도 없어요. 이런 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역시 정상이 아닙니다. 뭐, 남의 가정 일이니까요. 이런 말을 하는 건 지나친 참견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너무 심해요. 혹은 내 생각이 너무 현실적이고, 상식적이고, 지나치게 중산 계급적인 것일까요?"
"아냐, 백 퍼센트 자네 말이 맞아"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 나로서도 할 말이 없어. 2백 퍼센트 자네 말대로야. 그래서 상의할 게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와달라고 한 거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말이 죽었다. 인디언의 북 치는 소리도 멎었다. 너무 조용하다. 나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요컨대, 자네가 유키를 돌보아줄 수 없을까" 하고 그는 말했다.
"돌보아 준다고 해도 대수로운 게 아냐. 이따금 그 애와 만나주기만 하면 돼. 하루에 두 시간이나 세 시간. 그리고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함께 온전한 식사를 해주면 돼. 그렇게만 해주면 돼요. 일을 맡기는 거니까 제대로 돈은 치르겠네. 말하자면, 공부를 가르치지 않는 가정교사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면 돼요. 자네의 수입이 지금 얼마쯤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수입에 가까운 액수는 보증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밖의 시간은, 자네가 좋을 대로 사용하면 돼. 다만 하루에 몇 시간 정도만 유키를 만나 주었으면 좋겠어.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이에 대해서는 아메에게도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했어요. 그녀는 지금 하와이에 있어. 하와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지. 대충 상황을 설명했더니, 아메도 자네에게 부탁하는 데는 찬성했어. 그녀도 그녀 나름으로 유키의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단지 인간이 약간 색다를 뿐이야. 신경이 정상이 아니라구. 재능은 있지만 말야, 굉장히. 머리가 이따금 돌아버려. 퓨즈가 끊어지는 것처럼. 그러면 모든 걸 잊어버려요. 현실적인 일은 통 다루질 못해. 뺄셈도 변변히 못하는 걸."
"잘 알 수 없군요." 하고 나는 힘없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아셔야 합니다. 그 애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애정이에요. 누가 무상으로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확신이에요. 그러한 것을 내가 유키에게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뿐이에요. 그것을 당신이나 당신의 부인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째고, 둘째로 그 연령의 여자이이에게는 아무래도 동성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연민을 서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동성의 친구, 그러한 친구가 있기만 해도 꽤 편안해져요. 나는 남자고, 나이차이도 너무 많아요. 그뿐만 아니라, 도대체 당신이나 부인도 나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잖아요? 열세 살짜리 여자 아이라면, 어떤 의미에선 이미 어른이에요. 무척 예쁘고, 게다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자 아이에요. 그러한 아이를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나이에게 맡겨도 되는 겁니까? 나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도대체? 나는 얼마 전까지 살인 문제와 관련되어 경찰에 끌려 다니고 있었어요. 만일 내가 범인이었다면 어떠시겠어요?"
"자네가 죽였나?"
"설마"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부녀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죽이지 않았어요."
"그럼, 됐잖아. 나는 자네를 신용하고 있어. 자네가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죽이지 않았겠지."
"어떻게 신용할 수 있죠?"
"자네는 사람을 죽일 타입이 아냐. 그리고 소녀를 강간할 타입도 아냐. 그 정도는 보면 알 수 있어요"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하였다.
"그리고 나는 유키의 육감을 믿고 있어. 그 애에게는 이전부터 굉장히 육감이 예리한 데가 있었지. 보통 육감의 예리함과는 좀 달라. 뭐라고 할까, 이따금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예리하다구. 영매 같은 데가 있어. 함께 있으면,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그 애가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이따금 있거든. 그러한 느낌을 알 수 있겠나?"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한 점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 그러한 괴상한 점. 다만 어머니쪽은 예술에 그것을 집중시키고 있어.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재능이라고 부르지. 그러나 유키는 그러한 집중시킬 대상을 아직 갖고 있지 않아. 그냥 목적없이 넘쳐흐르고 있는 거야. 물통에서 물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처럼. 영매 같은 거지. 어머니 혈통의 피야, 그것은. 내게는 그러한 점은 별로 없어. 상식을 벗어나지 않아. 그러니까 어머니나 딸아이도 나 따위는 변변히 상대를 하지 않아. 나도 그 두 사람과 함께 지내기에는 약간 피곤해졌어. 당분간 여자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 자네는 분명히 알 수 없을 거야. 그 아메와 유키와 함께 지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아메와 유키라구, 쓸모없는 이름이야. 마치 일기 예보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물론 둘 다 좋아해요. 지금도 이따금 아메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하지. 하지만 두 번 다시 함께 지내고 싶지는 않아. 그건 지옥이야. 내게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하더라도 있었지 그 생활 때문에 아주 깨끗이 사라져 버렸어, 솔직히 말해. 하지만 재능이 없어진 형편치고는 내가 비교적 잘 해 왔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네. 눈 치우기야. 자네가 말하는 유효한 눈 치우기야. 능숙한 표
현이야.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나를 신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죠."
"그래, 나는 유키의 육감을 신용하네. 유키는 자네를 신용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자네를 신용해. 자네도 나를 신용해도 돼. 나는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냐. 이따금 변변치 못한 문장을 쓰지만, 나쁜 인간은 아냐." 그는 또 헛기침을 하고는 땅에 침을 뱉었다.
"어때, 해주지 않겠나? 유키를 돌보아주는 일을? 자네 말은 나도 잘 알 수 있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확실히 부모의 역할이야. 하지만 그건 여느 경우와는 좀 다르다구. 아까도 말한 것처럼 손을 쓸 길이 없거든. 자네밖에는 의뢰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
나는 내 잔속의 맥주 거품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기묘한 집이다. 세 명의 별난 사람과 서생인 프라이데이. 우주의 로빈슨 가족같다.
"그녀와 이따금 만나는 건 상관없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매일은 만날 수 없어요. 내게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또 의무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만나고 싶을 때 만나겠어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현재 금전상의 어려움은 없고, 그녀와 친구로서 어울리는 만큼, 내가 그 정도의 돈을 치릅니다. 그러한 조건으로밖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군요. 그녀를 나도 좋아하고, 만날 수 있으면 나로서도 즐거울 거예요. 하지만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어요. 좋죠. 그녀가 어떻게 되었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책임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신들에게 있으니까요. 이를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라도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마키무라 히하쿠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귀 밑의 근육이 흔들렸다. 골프로는 그 근육의 느슨함을 제거할 수 없다. 더 근본적인 생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가능하다면 훨씬 전에 해냈을 것이다.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잘 알 수 있고, 조리가 닿는 이야기야"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에게 책임을 떠맡기려 하고 있는 건 아냐, 책임 따위는 느낄 필요가 없네. 우리에게는 자네밖에 선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하고 있는 거야. 책임 따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돈에 관한 건 또 언제든 그때 가서 생각하세. 나는 빚을 지면 잊지 않고 분명히 갚는 인간이니까. 그것만은 기억해 달라구. 하지만 지금은 자네 말 대로인지도 몰라. 자네에게 맡기네. 지네가 좋을 대로하면 돼. 돈이 필요하거든 나한테나 아메에게나 어디든 좋으니까 연락해 줘요. 양쪽 다 금전상의 어려움은 없으니까. 사양할 거 없어."
나는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자네도 꽤 완고해 보이는 사나이군" 하고 그는 말했다.
"완고하지는 않아요, 내게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의 시스템이라는 게 있을 뿐이에요."
"시스템"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귓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이제 그러한 것은 별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아. 손으로 만든 진공관 앰프와 마찬가지야. 노력과 시간을 들여 그러한 것을 만들기보다는, 오디오 숍에 가서 신품인 트랜지스터 앰프를 사는 편이 싸게 먹히고, 소리도 좋아. 부러지면 곧 수리를 하러 오구, 신품을 살 때에는, 신품 대금의 일부로 중고품을 판매자가 인수하기도 하지. 생각의 시스템 운운할 시대가 아냐. 그러한 가치를 갖고 있던 시대도 확실히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지. 사고방식도 그래. 적당한 것을 사 갖고 와서 연결하면 돼. 간단하다구. 그날부터 이내 사용할 수 있지. A를 B에 삽입하면 되는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해낼 수 있지. 낡아져 구애되어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돼요. 눈치 빠르게 행동할 수가 없어. 남들이 귀찮게 여긴다구."
"고도 자본주의 사회" 하고 나는 요약하였다.
"그애"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그리고 또 잠시 침묵에 잠겼다. 주위가 꽤 어두워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개가 신경질적으로 잦고 있었다. 누가 서투르게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치고 있었다. 마키무라 히라쿠는 복도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무엇을 생각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 이후로 아무래도 기묘한 사람들만 만나고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고혼다, 두 명의 고급 창부(한 명은 죽었다.) 터프한 2인조 형사, 마키무라 히라쿠와 서생인 프라이데이. 어두운 마당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개 짖는 소리나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현실이 점점 용해되어 어둠 속으로 녹아 흡수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들이 그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며 뒤섞여 버리고, 의미를 상실하면서 하나의 카오스가 된다. 키키의 등을 어루만지는 고혼다의 우아한 손가락이나, 눈이 계속 내리고 있는 삿포로의 거리, "좋다"고 말하는 메이, 형사가 툭툭 손바닥을 치고 있던 플라스틱 자, 어두운 복도 안쪽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양사나이의 모습 따위도 모두 용해되어 하나로 되어갔다. 피로해진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피로해져 있지는 않았다. 다만 현실이 용해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용해되어 하나의 둥근 카오스의 공 모양을 이루고 있다. 마치 일종의 천체 같은 형태를. 그리고 피아노 소리가 울리고, 개가 짖고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다. 누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다.
"이봐"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 여자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살해된 여자를. 신문을 보았어. 호텔에서 살해되었잖아. 신원 불명이라고 쓰여 있더군. 명함 한 장만이 지갑에 들어 있어. 그 인물에게 연유를 묻고 있다고 나와 있었어. 자네 이름은 나와 있지 않더군.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자네는 경찰에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버티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모르는 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저 문득“
그 골프채를 집어 들어 칼처럼 앞으로 반듯이 내밀고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한 느낌이 들었어. 무엇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져, 문득. 자네와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점점 그러한 느낌이 든다구, 세밀한 일에 일일이 구애되면서, 큰일에 대해서는 묘하게 관대해져. 그러한 패턴이 드러나 보인다구. 재미있는 성격이야. 그러한 의미에서 유키를 닮았어. 살아가기가 힘겨워져. 남이 이해하기 어렵고, 쓰러지면 치명적이 돼요. 그러한 의미에서 자네와 유키는 동류야.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경찰은 손쉽게 넘어가지 않으니까. 이번은 잘되었지만, 다음에도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네. 시스템도 좋지만, 버티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아. 이미 그러한 시대가 아니거든."
"버티고 있는 것도 아녜요" 하고 나는 말했다.
"댄스 스텝 같은 거예요. 습관적인 겁니다.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음악이 들리면 몸이 자연히 움직여요. 주위가 변해도 관계없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스텝이어서, 주위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헛디뎌 버리니까요. 단지 서투를 뿐이에요. 멋쟁이가 아녜요."
마키무라 히라크는 또 잠자코 골프채를 응시하고 있었다.
"별나"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는 내게 무엇인가를 연상시켜. 무엇일까?"
"무엇일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무엇일까? 피카소의 '네덜란드 풍의 꽃병과 수염을 기른 3명의 기사'일까?
"하지만 나는 자네가 썩 마음에 들었고, 자네라는 사람을 신용하네. 미안하지만 유키를 돌보아 주게. 언제든 분명히 사례를 하겠어. 나는 빚을 지면 반드시 갚는 사람이야. 이 말은 아까도 했지?"
"들었습니다."
"그럼 됐어"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그리고 골프채를 살며시 툇마루에 걸쳐놓으며 "좋아" 하고 말했다.
"신문에는 그밖에 무슨 얘기가 나와 있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밖에는 거의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더군. 스타킹으로 교살되었다, 일류 호텔이라는 건 도회의 맹점이다 하고 씌어져 있었어. 이름이나 그 밖의 사항도 모두 알 수 없다. 신원을 조사하고 있다고 나와 있더군. 그뿐이야. 흔히 있는 사건이야. 금방 모두들 잊어버려요."
"그렇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 하고 그는 말했다.
"아마 그렇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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