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그림자와 춤추는 공백 지대
25
일곱 시가 되어 유키가 훌쩍 돌아왔다.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떡하겠니? 식사라도 하고 가겠니?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가 물었다. 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시장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집에 돌아가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럼 또 마음이 내키면 놀러 와라. 이번 달은 죽 일본에 있을 것 같으니까" 하고 그녀의 부친은 말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일부러 와주었으나 아무런 대접도 못해서 미안하고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인 프라이데이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정원 안쪽의 주차장에 지프차로 키와 혼다와 일반도로가 아닌 곳에서 달릴 수 있는 특제 자전거 등이 보였다.
"과소비적 생활 같군요." 하고 나는 프라이데이에게 말해 보았다.
"에로문학 작가가 아닙니다." 하고 프라이데이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이른바 작가 타입이 아닙니다. 어쨌든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니까요."
"바보 같아." 하고 작은 목소리로 유키가 말했다. 나도 프라이데이도 못 들은 체했다.
스바루에 올라타자 유키는 이내 시장하다고 말했다. 나는 바닷가에 자리한 '헝그리 타이거' 앞에 차를 세우고,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알콜이 제거된 맥주를 마셨다.
"무슨 이야기였어요?" 하고 그녀는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먹으면서 말했다.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대강 설명했다.
"그런 것일 줄 알았어요." 하고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분이 생각할 만한 일이에요. 그래, 당신은 어떻게 했어요?"
"사양했지, 물론. 그러한 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이따금 만나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해. 서로를 위해서. 우리는 나이 차이가 많고, 생활환경도, 사고방식도, 살아가는 방식도 많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둘이서 여러 가지를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만나고 싶어지면 네가 전화를 걸어주면 돼. 사람과 사람이 의무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어. 만나고 싶어지면 만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서로가 누구에게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숨김없이 털어 놓으면서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 그렇지? 틀리나?"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응." 하고 말했다.
"그런 것은 내버려 두면 몸 안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는 수가 있어. 억제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는 거야. 이따금 공기를 뽑아주지 않으면, 펑하고 폭발해 버려. 알겠어? 그렇게 되면 살아가기가 어려워져. 무엇인가를 혼자서 떠맡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너도 고통스럽고 나 역시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수가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내게 전화를 걸어주면 돼. 이것은 너의 아버지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혹은 내가 너에 대해 세상 물정에 밝은 오빠나 아저씨 역할을 하려 하는 것도 아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해.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따금 만나는 게 좋아."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디저트를 먹어버리고는,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 옆의 테이블에서 온 가족이 비만한 체격으로 볼이 미어져라 음식을 입에 넣으며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곁눈으로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부모와 딸과 어린 사내아이가 하나. 모두가 꽤나 살들이 쪄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커피를 마시면서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예쁜 아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구불구불 복잡하게 구부러져 있는 구멍의 깊숙한 안쪽이므로, 웬만해서는 도달할 턱이 없지만 그녀는 거기에 제대로 돌멩이를 던져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열다섯이었으면 사랑에 빠졌을 텐데, 하고 나는 스무 번째쯤 새삼스레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서른넷이고, 열셋의 여자아이와는 연애를 하지 않는다. 잘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동급생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기분을 나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도 그들의 일상성을 넘어설 만큼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너무 예리하다. 게다가 그녀 쪽에서는 결코 그들에게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워하고, 또 히스테릭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녀에 의해 자신들의 친밀한 공동체가 부당하게 깎아내려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고혼다와 다른 점이다. 고혼다는 타인이 자신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이를 제대로 유지, 제어하고 있었다. 그는 타인에게 공포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그의 존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커져 버렸을 때에는 생긋 미소 지으며 농담을 하였다. 훌륭한 농담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기분 좋게 생긋 웃으며 보통의 농담을 입에 올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생긋 웃으며 즐거운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좋은 녀석이야', 하고 모두들 생각했다. 이것이 아마 정말 좋은 사나이 일 것이다. 고혼다였다. 하지만 유키는 그렇지가 않았다.
유키는 자기 한 사람을 떠맡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다. 자신 주변 인간들의 감정의 움직임까지 세밀히 생각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그럼으로써 타인을 통해 스스로도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고혼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고단한 인생이다. 열 살의 여자 아이에게 있어서는 너무 고단한 편이다. 어른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고단한 일인 것이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되어갈지, 나는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잘 풀리면, 모친처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어떤 방법을 발견하고 획득하여, 예술적인 분야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이 어떠한 분야든 간에, 그녀가 지니고 있는 힘의 방향성에 맞기만 한다면, 그녀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큼의 일을 하리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내부에는 힘이 있고, 재능이 있다. 비범한 데가 있다. 눈치우기 같은 게 아닌가.
혹은 그녀가 열여덟이나 열아홉이 될 때까지는 아주 보통의 여자아이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예를 나는 더러 보았다. 열 서넛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예리한 소녀가, 사춘기의 계단을 올라감에 따라 조금씩 그 광채를 상실하여 간다. 손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져 버릴 듯한 예리함이 둔화되어 간다. 그래서 예쁘긴 하지만 그다지 인상적이라 할 수 없는 아가씨가 된다. 그래도 본인은 그런대로 행복해 보인다.
유키는 둘 가운데 어느 성장 과정을 거쳐 가게 될지, 물론 나로선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기묘하게도 인간에게는 각기 절정이라는 게 있다. 거기에 올라가 버리면, 다음에는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괜찮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분수령이 다가온다.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자는 절정에서 죽는다. 많은 시인이나 작곡가들은 질풍처럼 살면서 너무 급격히 꼭대기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여든 살이 넘어서도 힘찬 그림을 그리다가 그대로 편안히 죽었다. 이 점만은 끝나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떤가하고 생각해 보았다.
절정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되돌아보면, 이는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든다. 약간의 기복은 있었다. 꾸역꾸역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의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아무것도 만들어낸 게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있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기묘하게 평탄하며, 풍경이 단조롭다. 마치 비디오 게임 속을 걸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팩맨 같다. 잇따라 미로 속의 점선을 먹어 간다. 목적도 없이, 그리고 언젠가는 확실하게 죽는다.
당신은 행복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춤을 추는 수밖에 없어, 사람들이 모두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나는 생각하기를 중지하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니 유키가 테이블 맞은편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쩐지 의기소침해져 있는 것 같아요, 몹시. 내가 무슨 심한 말을 했나요?"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언짢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럴지도 몰라."
"그런 일을 곧잘 생각해요?"
"이따금."
유키는 한숨을 쉬고, 잠시 테이블 위의 종이 냅킨을 접으며 놀고 있었다.
"몹시 쓸쓸해지는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밤중에 그러한 일을 문득 생각하나요?"
"물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왜 지금 여기서 그러한 일을 갑자기 생각했죠?"
"아마 네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유키는 그녀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눈으로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값은 유키가 치러 주었다. 아빠가 돈을 잔뜩 주었으니까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계산서를 갖고 카운터로 가서, 주머니에서 1만 엔짜리 지폐 대여섯 장을 한꺼번에 꺼내고는 그 중의 한 장으로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제대로 세어 보지도 않고 다시 가죽 잠바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분, 내게 돈을 건네주면 다 된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엉터리야. 그래서 오늘은 내가 대접해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대등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선' 언제나 대접만 받아왔으니까, 때로는 괜찮지 않았어요."
"잘 먹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후배를 위해 한 마디 한다면, 그러한 짓은 클래식한 데이트의 매너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럴까요?"
"데이트를 하면서 식사를 한 후에, 아가씨가 스스로 계산서를 갖고 카운터로 가서 돈을 치르면 안 돼. 남자에게 먼저 치르게 하고, 나중에 돌려주는 거야. 그게 세상살이의 매너야.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 나는 물론 손상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떠한 관점에서 보든 간에 인색한 인간이 아니니까. 어쨌든 나는 괜찮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남자도 세상에는 꽤 많이 있어, 세계는 아직도 인색하거든."
"바보 같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그런 남자와는 데이트 따윌 하지 않아요."
"그건 말하자면 하나의 식견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스바루를 몰고 나왔다.
"하지만 사람은 불합리하게 사랑에 빠지는 수가 있어. 좋아하는 상대방만을 고를 수 없는 수도 있어.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너도 브래지어가 필요해질 나이가 되면, 아마 그걸 알 수 있을 거야."
"갖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하고 그녀는 주먹으로 내 어깨를 마음껏 쳤다.
그래서 나는 하마터면 붉게 칠해진 커다란 쓰레기통에 자동차를 부딪칠 뻔했다.
"농담이야." 하고 나는 차를 멈추고 말했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모두들 농담을 하고 서로 웃거든. 혹은 그게 시시한 농담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그러한 일에 익숙해져야 해."
"흠." 하고 그녀는 말했다.
"흠." 하고 나도 말했다.
"바보처럼." 하고 그녀는 말했다.
"흉내 내지 말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흉내 내기를 중지하였다. 그리고 자동차를 주차장에서 몰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을 치면 안 돼, 농담이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짓을 하면 어디에고 부딪쳐 둘 다 죽어버리게 돼. 이게 제2의 데이트 매너야.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
"흠." 하고 유키는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유키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의 힘을 빼고 녹초가 된 듯한 자세로 시트에 기대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따금 졸고 있는 듯했지만, 깨어 있을 때와 졸고 있을 때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이미 음악도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시험 삼아 존 콜트레인의 발라드 테이프를 돌려 보았지만, 그녀는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무슨 곡이 흘러나오고 있는지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콜트레인의 솔로에 맞추어 작은 목소리로 허밍하면서 자동차를 몰았다.
소오낭으로부터 밤중에 도쿄로 돌아오는 길은 지루한 길이다. 나는 앞 자동차의 미등에 죽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다. 수도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죽 껌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치의 담배를 서너 번 빨더니 창밖으로 버렸다. 두가치를 피우면 언짢은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한가치 밖에 피우지 않았다. 그만큼 눈치가 빠른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안다. 물러설 때를 알고 있다.
아카사카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나는 자동차를 멈췄다. 그리고 "도착했어요, 아가씨." 하고 말했다. 그녀는 껌을 포장지로 싸서 대시 보드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른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자동차에서 내려, 그대로 가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말도 하지 않고, 문도 닫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복잡한 나이다. 혹은 단순한 생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건 마치 고혼다가 출연하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상처입기 쉽고 복잡한 나이의 소녀. 아니, 고혼다 같으면 나보다 훨씬 더 능숙하고 솜씨 좋게 해낼 것이다. 그가 상대라면 유키도 달아올라 사랑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면 영화가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런, 또 고혼다에 관한 걸 생각하고 있군. 나는 고개를 젓고는, 조수 자리로 옮아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문을 닫았다. 쾅. 그리고 프레디 하버드의 레드 클레이를 허밍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역까지 신문을 사러 갔다. 아홉시 전이었으므로, 시부타니 역 앞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봄철인데도 미소 짓고 있는 사람은 손꼽을 수 있은 정도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어쩌면 미소가 아니라, 그저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매점에서 두 가지의 신문을 산 다음, 던킨 도너츠에서 도너츠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었다. 어느 신문에도 메이의 기사는 이제 실려 있지 않았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전쟁을 하고 있는 일이며, 도지사 선거에 관한 일, 중학생의 비행에 관한 일 따위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교살당한 일에 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말한 것처럼, 흔해빠진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들 금방 잊어버린다. 물론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살인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 두 명의 형사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 영화라도 볼까 하고 신문의 영화란을 펼쳐보았다. 짝 사랑은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혼다에 관한 일을 생각해 내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메이에 관한 일을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기회에 그가 조사라도 받게 되고, 그때 내 이름이 나오게 되면, 나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경찰에서 또 추궁당할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나는 던킨 도너츠에 있는 핑크색의 공중전화기 앞으로 다가가, 고혼다의 맨션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물론 그는 나오지 않았다. 녹음 전화였다. 나는 좀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연락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문을 휴지통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걸어오면서 왜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전쟁 따위를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잘 알 수 없다. 복잡한 세계다.
조정을 하기 위한 하루였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하루가 있다. 현실적이 되어, 현실적인 현실과 맞붙어 씨름을 해야 하는 하루. 우선 나는 몇 개의 셔츠는 세탁소에 갖다 주고, 몇 개의 셔츠를 찾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은행에 들러 현금을 찾고, 전화 요금과 가스 요금을 지불했다. 집세도 불입해 두었다. 구둣방에 들러 뒤축을 새 것으로 갈아 끼웠다. 자명종의 전지와 카세트테이프도 여섯 개나 샀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면서 방안을 정리하였다. 욕조를 깨끗이 씻었다. 냉장고 속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내부를 깨끗이 닦고, 식품을 점검하고 정리하였다. 가스레인지를 닦고, 더러워진 환풍기를 손질하고,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쓰레기를 한데 모아두었다.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갈아 끼웠다. 청소기로 청소를 하였다. 이만큼의 일을 하는데 두 시까지 걸렸다. 스틱스의 미스터 로보트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서 걸레로 블라인드를 닦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고혼다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한번 만나 천천히 이야기할 수 없을까? 전화론 좀 이야기하기 곤란해."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 하지만 그게 급한 일인가? 지금 일정이 좀 빡빡해. 영화와 TV의 비디오 촬영이 겹쳐 있어. 2,3일 지나면 편하게 천천히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바쁜데 정말 미안해. 하지만 사람이 하나 죽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의 공통된 친구인데, 경찰이 움직이고 있어."
그는 수화기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용한 능변의 침묵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침묵이라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일일 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혼다의 침묵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고혼다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모든 자질들과 마찬가지고 단정하고 냉정하면서 어딘지 지적인 것이었다. 이상한 표현이라고는 생각되지만, 귀를 기울이면 그의 두뇌가 가장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알았어. 오늘 밤에 만날 수 있을 거야. 늦어질지도 모르겠는데, 괜찮겠니?"
"괜찮아."
"아마 한 시나 두 시쯤에 전화를 걸게 될 거야. 안됐지만 지금으로선 그 전에는 아무래도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좋아, 괜찮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고혼다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두 생각해 내 보았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 죽었어. 우리의 공통된 친구인데, 경찰이 움직이고 있어.' 이는 마치 범죄 영화 같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고혼다가 관련되면, 모든 게 영화의 장면처럼 되어 버린다. 왜 그럴까? 현실이 조금씩 후퇴하여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이 주어진 역할을 해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 간다. 아마 그는 그러한 마력 같은 것을 갖고 있는가 보다.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마세라티로부터 내려오는 고혼다의 모습을 상상했다. 매력적이다. 래디얼 타이어의 선전 같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블라인드의 나머지 부분을 닦는다. 이제 그러한 생각은 그만 하자, 오늘은 현실적인 자세를 갖는 날이다.
다섯 시에 나는 하라주쿠까지 산책을 하고, 타케시타 가에서 엘비스표 바지를 사려고 찾아보았다. 하지만 엘비스표 바지는 손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키스표, 자니표, 아이언 메이딘표, AC/DC표, 모터헤드표, 마이클 잭슨표, 프린스표 따위는 잔뜩 있었지만, 엘비스표는 없었다. 하지만 세 번째 가게에서 겨우 'ELVIS. THE KING'이라 표시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 그것을 샀다. 나는 농담으로 점원에게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표 바지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작은 보자기만한 리본을 달고 있는 열일곱이나 열여덟쯤 되어 보이는 여자 점원이 놀라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게 뭐죠? 들어본 적이 없어요. 뉴 웨이브나 펑크니 하는 것들 말인가요?"
"대체로 그 중간쯤인데."
"최근엔 새로운 게 잔뜩 나오고 있어요, 정말 거짓말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는 혀를 찼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정말." 하고 나는 동의했다.
나는 이어 '루오카'에서 맥주를 마시고, 튀김을 먹었다. 그렇게 길었던 시간이 흐르고, 해가 기울었다. 동이 트고 석양이 지고 나는 한 명의 평면적인 행상인으로서 목표도 없이 그저 점선을 계속 파먹어 간다. 사태는 전혀 진전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디에도 접근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도중에 자꾸 복선이 증가 되어 왔다. 그리고 키키와 이어지는 중요한 선은 툭 끊어져 버렸다. 나는 옆길로 자꾸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메인 이벤트에 도달하기 전에, 부속된 연예와 관련되어 시간과 노력을 헛되이 소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대체 주요 경기는 어디서 진행되고 있을까? 그리고 정말 하고 있는 것일까?
밤중까지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일곱 시부터 시부야의 영화관에서 폴뉴먼의 '평길'을 보았다. 나쁘지 않은 영화였지만, 도중에 몇 번 이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줄거리가 토막토막 분리되어 버렸다.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거기에 키키의 벌거벗은 등허리가 문득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만 그녀에 관한 일을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키키 너는 내게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영화의 끝 표시가 나오자, 나는 거의 줄거리를 알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조금 걷다가, 이따금 들르는 바에 들어가 땅콩을 먹으면서 보드카 김렛을 두 잔 마셨다. 그리고 열 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으면서 고혼다로부터 걸려올 전화를 기다렸다. 나는 이따금 전화기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전화기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편집증적이다.
나는 책을 덮어 두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땅에 묻은 '갈매기'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건 이미 뼈만 남아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땅 속은 조용하리라. 그리고 뼈 역시 조용하다. 뼈는 새하얗고 깨끗하지, 하고 형사는 말하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다. 나는 숲의 땅 속에 그것을 묻었다. 쇼핑백에 담아 가지고.
아무 말도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무력감이 조용히 소리도 없이 물처럼 방 안에 차 있었다. 나는 무력감을 밀어 헤치듯이 목욕실로 가서 레드 클레이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샤워를 하고, 부엌에 선 채로 캔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스페인 어로 하나에서 열까지 센 다음, "끝났다." 하고 소리 내어 말하고는 손뼉을 치자 무력감은 바람에 날려가듯이 휘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나의 주술이다. 혼자서 지내는 인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능력을 익히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26
열두 시 반에 고혼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하지만, 가능하면 지금부터 자네 차를 몰고 우리 집까지 와줄 수 있겠나?"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 집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지?" 기억하고 있다고 나는 말했다.
"하도 어수선해서 결국 시간을 제대로 잡지 못했어. 하지만 차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자네 차를 사용하는 게 좋을 거야. 운전수가 들으면 곤란할 테니까."
"그렇군."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 출발하겠어. 약 20분 후에는 거기에 도착할 거야."
"그럼 그때 만나지."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부근의 주차장에서 스바루를 몰고 나와, 그의 맨션까지 갔다.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관의 '고혼다'라는 본명이 씌어져 있는 벨을 누르자, 그는 금방 내려왔다.
"늦어져서 미안해. 굉장히 바빴어. 지독한 하루였어." 하고 그는 말했다.
"지금부터 또 요코하마까지 가야 해. 내일 아침 일찍 영화 촬영이 있거든. 그때까지 잠시 눈을 붙여 두어야겠어. 호텔은 잡아 두었어."
"그럼 요코하마까지 배웅하겠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그 동안에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
"그렇게 해주면 도움이 되겠는데." 하고 그는 말했다.
고혼다는 스바루에 올라타자, 신기한 듯이 차 안을 둘러보았다.
"안정이 돼." 하고 그는 말했다.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과연." 하고 그는 말했다.
고혼다는 놀랍게도 정말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잘 어울렸다. 선글라스는 끼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투명한 렌즈의 보통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안경도 썩 잘 어울렸다. 매우 지성적으로 보였다. 나는 차를 몰고 깊은 밤의 한적한 도로를 제3게이힌(요코하마 지역)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는 대시 보드 위에 놓여 있던 비치 보이즈의 테이프를 손에 들고, 잠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운데." 하고 그는 말했다.
"예전엔 이 노래를 곧잘 들었어. 중학 시절이야. 비치 보이즈 뭐라고 할까, 특별한 음성이었어. 친밀하고 달콤한 음성이야.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바다 내음이 풍기며, 옆에서 예쁜 아가씨가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듯한 음성이야.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러한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언제까지나 모두들 젊고 언제까지나 모든 게 빛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신화적 세계야. 영원한 사춘기. 동화야."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 그래."
그는 마치 무게를 다는 것처럼 손바닥 위에 테이프를 올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건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는 않아. 모두들 나이를 먹어. 세상도 변해. 신화라는 건 모두 언젠가는 죽어버려.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맞아."
"그러고 보니, 굿 바이브레이션 이후의 비치 보이즈의 노래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군. 왠지 듣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어. 더 딱딱한 노래를 듣게 되었어. 크림, 더 후, 레드 제프린, 지미 핸드릭스... 메마른 시대가 된 거야. 비치 보이즈의 노래를 듣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어. 하지만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지. 더 파걸 따위 말야. 동화야. 하지만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굿 바이브레이션 이후의 비치 보이즈도 나쁘지 않아. 들을 만한 가치는 있어. 20/20이나 와일드 허니, 홀랜드, 서프즈 업 따위도 나쁘지 않은 음악이야. 난 좋아해. 초기의 것들만큼 광채를 발하고 있지는 않아. 내용도 혼란스러워. 하지만 어떤 확실한 의지의 힘이 느껴지는 거야. 브라이언 윌슨이 점점 정신적으로 침체되고 마지막에는 밴드에 거의 공헌하지 못하게 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모두 힘을 합쳐 살아남으려는 그러한 필사적인 마음이 전달되어 오거든. 하지만 확실히 시대에는 맞지 않았어.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쁘지 않아."
"이 다음에 들어 보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
"틀림없이 마음에 안 들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팬 팬 팬>이 흘러나왔다. 고혼다는 테이프에 맞추어 잠시 작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리워." 하고 그는 말했다.
"믿어지나? 이게 유행한건 이미 20년 전의 일이야."
"마치 바로 어제처럼 생각되는군." 하고 나는 말했다.
고혼다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이따금 자네는 복잡한 농담을 하는군." 하고 그는 말했다.
"모두들 별로 이해해 주지 않지만 말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농담을 하면 대개 모두들 진담으로 받아들여. 지독한 세상이야 농담하나 할 수 없으니."
"하지만 분명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하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거기서는 도시락에 장난감 개똥을 집어넣는 게 고급 농담인 줄 알고 있다구."
"진짜를 넣는 편이 농담으로서는 더 고급이지."
"정말."
그리고 한참 동안 우리는 잠자코 비치 보이즈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걸즈, 409, 캐치 어 웨이브 따위의 예전의 주목 했었던 곡들뿐이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와이퍼를 움직였다간 잠시 멈추고, 또 움직였다. 그 정도의 비였다. 부드러운 봄비.
"중학 시절이라고 하면, 자네는 어떤 일을 생각해 내나?" 하고 고혼다가 내게 물었다.
"보기 싫고 혐오스러운 자신이라는 존재."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밖에는?"
나는 약간 생각해 보았다.
"자네가 과학 실험 시간에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고 있던 일이 생각나는군."
"왜 또?" 하고 이상하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불을 붙이는 방식이 말야, 뭐라고 할까, 아주 세련돼 보였어. 자네가 불을 붙이면 그게 인류의 역사에 남을 위업처럼 보였다구."
"그건 좀 과장된 얘기군." 하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 수 있어.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요컨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행위의 얘기겠지. 몇 번인가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리고 그 때문에 예전에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 나 자신은 그런 두드러진 행위를 하려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고 있었을 거야.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죽 모두들 내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어. 주목을 받고 있었어. 그러므로 당연히 의식하거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다소 연기적으로 돼. 그러한 게 몸에 배어 버리지. 요컨대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므로 배우가 되었을 때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어. 앞으로는 이제 당당히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바닥을 마주 포개었다. 그리고 그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지독한 인간은 아냐. 나는 내 나름대로 순수한 인간이고 또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쉽다구. 죽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냐."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의미로 말한 게 아냐.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다만 자네가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 세련되어 있었다는 것뿐이야. 한 번 더 구경하고 싶을 정도지."
그는 즐거운 듯이 웃고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닦는 모양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좋아, 그럼 이 다음에 해 보자." 하고 그는 말했다.
"가스버너와 성냥을 준비해 두었어."
"실신했을 경우에 대비하여 베개를 가져가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킥킥거리며 웃고는 또 안경을 썼다. 약간 생각하고는,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낮췄다.
"괜찮다면, 자네가 말한 그 죽은 사람 이야기를 이제 해보지 않겠나?
"메이." 하고 나는 와이퍼 너머의 앞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녀가 죽었어. 피살되었어.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죽었어. 범인은 알지 못하고 있어."
고혼다는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3초나 4초쯤 걸렸다. 그리고 이해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의 표정이 변화하는 걸 몇 번이고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쇼크를 받고 있는 듯했다.
"피살된 날짜는?"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정확한 날짜를 가르쳐 주었다. 고혼다는 마음을 정리하는 것처럼 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혹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가혹해. 죽일 이유라고 하나도 없어. 좋은 아이였어. 그리고 -." 그는 또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좋은 아이였지." 하고 나는 말했다.
"동화나 옛날이야기처럼."
그는 몸의 힘을 빼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피로가 급격히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처럼. 그는 그 피로를 죽 몸속의 어딘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두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피로한 고혼다는 여느 때보다 약간 늙어 보였다. 하지만 피로마저도 그의 몸에 걸쳐지면 매력적으로 보였다. 인생의 액세서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 역시 정말 피로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무슨 일을 하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뿐이다. 마치 무엇에 손을 가져가든 간에 그것이 황금으로 변해 버리는 그 전설에 나오는 임금님처럼.
"곧잘 셋이서 아침까지 이야기를 했어." 하고 고혼다는 조용히 말했다.
"나와 메이와 키키 셋이서 말야. 즐거웠어. 친밀한 기분에 잠길 수 있었어. 자네는 동화라고 하지만, 동화도 그처럼 손쉽게는 손에 들어오지 않아. 그래서 나는 소중히 하고 있었지. 하지만 하나씩 사라져 가는군."
그리고 둘 다 죽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전방의 노면을 바라보고 그는 대시 보드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와이퍼를 정지시켰다가 움직이곤 했다. 비치 보이즈는 작은 목소리로 옛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태양과 서핑과 자동차 레이스에 관한 노래를.
"어떻게 자네는 그녀가 죽은 걸 알았지?" 하고 고혼다는 내게 물었다.
"경찰에 불려갔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녀가 내 명함을 갖고 있었던 거야. 지난번에 주었지. 키키에 관한 일을 알게 되면 가르쳐 달라면서 말야. 메이는 그것을 지갑 속에 깊숙이 넣어두고 있었어. 왜 그런 걸 갖고 다녔을까? 하지만 아무튼 갖고 있었다구. 그리고 난처하게도 그것이 그녀의 신원 확인에 이어지는 유일한 유류품이었어. 그래서 내가 불려갔지. 사체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 여자를 아는 가고 묻더군. 강하게 생긴 형사 두 명이 말야. 모른다고 했지. 거짓말을 했어."
"왜?"
"왜? 자네의 소개를 받아 둘이서 창녀를 데리고 놀았다고 말하면 좋았겠나?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해?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자네의 상상력은 어디로 갔나?"
"미안해." 하고 그는 솔직히 사과했다.
"나도 약간 머리가 혼란되어 있어. 쓸데없는 질문이었네. 그것쯤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어. 시시해. 그래 어떻게 되겠어?"
경찰은 전혀 신용하지 않았어. 프로니까 말야,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 냄새를 맡아 알 수 있어. 사흘 동안 곤욕을 치렀지. 법에 걸리지 않도록, 몸에 자국이 남지 않도록 철저히 괴로움을 당했어. 꽤 지독했어. 이제 나이가 들어 예전과는 달라. 따로 잠을 잘 장소도 없어서 유치장에서 잤지. 자물쇠로 잠그지는 않더군. 하지만 자물쇠로 잠가두지 않더라도 유치장은 유치장이야. 마음이 어두워져. 나약해져."
"알 수 있어. 나도 예전에 2주일 동안 들어가 있었어. 입을 다물고 있었지. 아무튼 입을 다물고 있었지. 하지만 두려웠어. 2주일 동안 한 번도 태양을 볼 수 없었네. 이제 두 번 다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 그런 기분이 든다구. 그자들은 사람을 쓰러질 때까지 마구 패거든. 맥주병으로 고기를 두들기는 것처럼 말야." 그는 손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흘 동안 곤욕을 치르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당연하지 않아, 그렇다고 도중에 '사실은...' 하고 말하기 시작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짓을 하면 그야말로 돌아올 수 없게 돼버리지. 그러한 곳에서는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끝까지 사수하는 수밖에 없어.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딱 잡아떼는 수밖에 없어."
고혼다는 약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됐군. 내가 그녀를 소개한 탓에, 자네가 골탕을 먹었어. 말려들어 버렸어."
"자네가 사과할 건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때는 그때니까. 그때는 나도 즐거웠어. 그리고 이번 일은 이번 일이고. 그녀가 죽은 것은 자네 탓이 아냐."
"그건 그래. 하지만 어쨌든 자네는 나를 위해 경찰에서 거짓말을 해 주었어. 내가 말려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혼자서 곤욕을 치렀어. 그건 내 탓이야. 내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그에게 설명하였다.
"그건 이제 괜찮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사과하지 않아도 돼. 감사하지 않아도 돼. 자네에게는 자네의 입장이 있고,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네. 문제는 말야, 내가 그녀의 신원을 밝힐 수 없었다는 점이야. 그녀에게도 가족은 있을 테고, 범인도 붙잡히길 바랐어. 나도 모조리 이야기해 주고 싶었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어. 난 그게 괴로워. 메이 역시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채 혼자 죽어버렸으니 쓸쓸하지 않겠어?"
그는 오랫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들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비치 보이즈의 테이프가 대충 끝났으므로, 나는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꺼내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자동차의 타이어가 노면의 엷은 빗물을 스쳐가는 균일한 소리가 들릴 뿐 이었다.
한밤중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경찰에 전화를 하겠어." 하고 고혼다는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익명으로 전화를 하겠어. 그리고 그녀가 속해 있던 클럽의 이름을 알려주는 거야. 그러면 그녀의 신원도 알 수 있고 수사하는데 도움이 되겠지."
"훌륭해."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말 머리가 좋아. 과연 그러한 방법이 있었군. 그러면 경찰은 클럽을 덮치겠지. 메이가 살해당하기 며칠 전에 자네가 그녀를 지명하여 집으로 불러들였음을 알게 돼. 당연히 자네는 경찰에 불려가겠지. 그렇게 되면 내가 사흘 동안 곤욕을 치르면서도 꾹 참으며 입을 다물고 끝까지 비밀을 지킨 의미가 어디에 있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난 정말 머리가 돈 모양이야. 혼란되어 있어."
"혼란되어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한 때는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러면 모든 게 지나가 버려. 시간문제야. 호텔에서 여자가 목 졸려 살해되었을 뿐이야. 흔히 있는 일이고, 조만간 모두들 잊어버린다구. 자네가 책임을 느낄 성질의 것이 아냐. 자네는 그저 목을 움츠리고 조용히 하고 있으면 되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돼. 지금 자네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 일이 복잡해져."
목소리가 너무 차가웠는지도 모른다. 표현이 좀 과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다. 내게도...
"미안해."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를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닐세. 단지, 나 역시 괴로웠다구.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해주질 못했어. 그뿐이야. 자네 탓이 아냐."
"아냐, 내 탓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나는 새 테이프를 끼웠다. 벤킹이 스패니시 하렘을 노래하고 있었다. 요코하마 시내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각기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 덕분에 나는 고혼다에게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친밀한 감정을 품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 이제 됐네, 끝난 일이니까, 하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이 하나 죽어 버린 것이다. 사람이 하나 차갑게 땅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것은 내 힘을 넘어선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누가 죽였을까?" 하고 한참 있다가 그는 말했다.
"글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한 장사를 하고 있으면 온갖 상대를 다 만나게 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 동화 같은 일뿐만이 아냐."
"하지만 그 클럽은 신원이 확실한 사람밖에는 상대하지 않아. 그리고 조직이 확실하게 중개를 하고 있으니까, 조사해 보면 누가 상대였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때는 아마 클럽을 통하지 않았겠지. 그러한 느낌이 들어. 장사하는 이외의 개인적인 상대였거나, 아니면 클럽을 통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을 거야, 틀림없이. 어느 경우든 선택한 상대가 나빴어."
"가엾게도."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아이는 동화를 너무 믿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 아이가 믿고 있었던 것은 이미지의 세계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러한 게 계속될 턱이 없지. 그러한 걸 계속시키는 데는 정확한 룰이 필요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룰을 존중하며 지켜주는 건 아니니까. 상대를 잘못 택하면 지독한 꼴을 당하게 돼."
"이상하게 여겨졌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왜 그토록 예쁘고 머리가 좋은 아이가 창부 노릇을 하고 있을까, 하고 말야. 이상하게 생각 되었어. 그 정도의 아이라면 더 좋은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깔끔한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테고, 돈 많은 사나이를 발견할 수도 있었을 거야. 모델이 될 수도 있어. 왜 창부 노릇 따위를 하고 있을까? 확실히 돈은 벌리겠지. 하지만 그 아이는 그토록 돈에 흥미가 있는 건 아냐. 아마 그녀는 자네가 말하는 그 동화를 찾고 있었을 거야."
"그럴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와 마찬가지로, 그밖에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들 각기 구하는 방식이 달라. 그래서 이따금 엇갈림이나 오해가 생겨난다구. 그리고 사람이 죽는 수도 있어."
나는 뉴그랜드 호텔 앞에 차를 멈췄다.
"오늘은 자네도 여기서 묵고 가지 않겠어?" 하고 그는 내게 물었다.
"방은 잡을 수 있을 거야. 룸서비스로 술을 가져오게 하여, 둘이서 조금 마시고 싶어. 이 상태로는 어차피 이내 잠이 올 것 같지 않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시는 건 이다음으로 미루고 싶군. 나도 약간 피로해 있어. 되도록 이면 이대로 집에 돌아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어."
"알았어." 하고 그는 말했다.
"죽은 사람에 관한 일이면 급히 생각할 필요는 없네. 괜찮아, 줄곧 죽어 있으니까. 좀 더 기운을 얻은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도 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죽어 있는 거야. 아주 완전히 죽어 있어요. 해부되고 냉동된 채로 있는 거야. 자네가 책임을 느끼든, 무엇을 느끼든 간에 되살아나지 않아."
고혼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은 잘 알 수 있어."
"잘 자게." 하고 그는 말했다.
"이 다음에 가스버너에 불을 붙여주면 돼."
그는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리려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얘기지만, 내게는 자네밖에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20년 만에 만나고, 그것도 오늘 만나는 게 두 번째인데 말야. 이상해."
이렇게 말하고 그는 가버렸다. 그는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봄의 가랑비를 맞으며 뉴그랜드 호텔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카사블랑카'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름다운 우정이 싹트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그에 대해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점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카사블랑카'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나는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을 들으면서 곡조에 맞추어 핸들을 두드리면서 도쿄로 돌아왔다. 그리운 에브리데이 피플.
나는 평범한 인간이고
너도 엇비슷하다
하는 일은 달라도
우리는 비슷한 친구들이야
우하하, 에브리데이 피플
비는 여전히 조용히 얌전하게 계속 내리고 있었다. 밤사이에 식물의 싹을 이끌어 내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비. '아주 완전히 죽어 있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 보았다 그리고 그 호텔에 묵으며 고혼다와 함께 술을 마셔야 했을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나와 고혼다 사이에는 네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과학 실험 시간에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둘 다 이혼을 하여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둘 다 키키를 데리고 잔 적이 있다. 그리고 둘 다 같이 잔적이 있는 메이는 죽어 버렸다. 아주 완전히. 술을 함께 마실 만한 가치는 있다. 같이 어울려도 괜찮았던 것이다. 나는 어차피 한가하고, 특히 내일 무슨 일을 하려는 예정도 없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와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게 영화의 장면처럼 보이는 게 싫었으리라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가엾은 사나이다. 너무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는 아마 그의 탓이 아니리라. 시부야의 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블라인드의 틈새로 고속도로를 바라보면서 위스키를 마셨다. 네 시 가까이 되어 졸음이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27
1주일이 지나갔다. 봄이 발판을 굳히며 확실하게 전진하여 가는 1주일이었다. 봄은 한 번도 뒷걸음치지 않았다. 3월과는 전혀 다르다. 벚꽃이 피고, 또 밤비가 그 꽃잎들을 흩날려 버렸다. 선거는 겨우 끝나고, 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도쿄 디즈니랜드가 개관하였다. 비에른 보르크가 은퇴하였다. 라디오의 톱텐의 1위는 죽 마이클 잭슨이었다. 죽은 자는 죽 죽은 자인 채로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게 두서없는 1주일이었다. 어디로 가려는 목표도 없는 나날의 나열이었다. 나는 지난주에 두 차례 풀을 찾아가 수영을 하였다. 그리고 이발소에 갔다. 이따금 신문을 사서 읽어 보았지만, 메이에 관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 시부야 역의 매점에서 신문을 사고, 던킨 도너츠에서 그것을 읽고, 다 읽은 다음에는 휴지통에 버렸다. 특별한 기사는 없었다.
지난주에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유키와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리고 지난주의 첫날인 월요일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동차를 몰고 멀리 드라이브를 했다. 그녀와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가한 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 귀국하고 있지 않았다. 나와 만나지 않을 때는 일요일 이외에는 낮에 거의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있으면 선도를 받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 다음에 디즈니랜드에 가보지 않겠어?"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런 데는 가고 싶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건 싫어요."
"그처럼 부드럽고, 어설프고, 부자연스럽고, 어린애 취향이며, 상업주의적이고, 미키마우스적인 곳은 싫단 말이지?"
"그래요." 하고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에 좋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하와이에 가지 않겠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하와이?"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내게 잠시 하와이에 와 있으라는 거예요. 그 사람, 지금 하와이에 있어요. 하와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요. 나를 내팽개쳐 두었기 때문에 갑자기 걱정이 된 거죠. 그래서 전화를 걸어왔어요. 엄마는 아직 얼마 동안은 일본에 돌아올 수 없고, 어차피 나도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으니까. 하와이는 나쁘지 않잖아요. 그래서 만일 내가 올 수 있다면, 내 몫의 돈도 마련해 주겠다는 거예요." 나는 웃었다.
"디즈니랜드와 하와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지?"
"하와이에는 선도원은 없어요, 적어도."
"나쁜 생각은 아니군." 하고 나는 인정했다.
"그럼 함께 갈 거예요?"
나는 이 문제를 약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와이에 가 보아도 좋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도쿄 거리를 떠나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옮아가 보고 싶었다. 나는 이 도쿄 거리에서 정신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생각의 실은 끊어진 채로 있었고, 새로운 실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몸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틀린 것을 계속 먹고, 틀린 것을 계속 사들이고 있는 듯한 음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아주 완전히 죽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약간 피로해 있었다. 경찰에서 곤욕을 당한 그 사흘 동안의 피로가 아직 말끔히 가셔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하와이에 하루 동안을 체재한 적이 있었다. 일이 있어 로스엔젤레스로 가다가 도중에 비행기의 엔진에 이상이 있어서 하와이에서 발이 묶여지는 바람에, 호놀룰루에서 1박했던 것이다. 나는 항공회사가 준비해준 호텔의 매점에서 선글라스와 수영복을 산 다음, 해변에서 뒹굴며 하루를 보냈었다. 멋있는 하루였다. 하와이, 나쁘지 않다. 거기서 1주일 동안 한가로이 지내면서 실컷 수영을 하고, 피나 코라다를 마시고 돌아온다. 피로도 가시고, 행복한 기분도 된다. 햇볕에 그을린 몸으로, 새롭게 시점을 바꾸어 사물을 다시 보고 생각을 고쳐 본다.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리라. 그렇다, 이러한 사고 양식이 있었다. 하고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결정됐어요. 표를 사러 가요."
그 전에 나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마키무라 히라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비서인 프라이데이가 전화를 받았다. 내 이름을 대자 그는 상냥하게 전화를 바꾸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하와이엘 다녀와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정말 좋은 일이라고, 바라는 바라고 그는 말했다.
"자네도 잠시 외국에 나가 한가로이 지내다 오는 게 좋아." 하고 그는 말했다.
제설 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도 휴가는 필요해요. 경찰이 괴롭히지도 않을 테고, 그 사건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지? 그 자들이 또 자네를 찾아갈 거야, 틀림없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가 있도록 하게." 하고 그는 말했다.
이 사나이와 이야기를 하면 결국 언제나 돈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현실적인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지만 곤란합니다. 겨우 1주일 정도일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제게도 여러 가지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좋아. 자네가 좋을 대로 하면 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 언제 갈 텐가? 빠른 편이 좋을 거야. 여행이란 건 그런 거야. 생각이 떠오르면 이내 가는 거야. 그게 요령이지.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 없어. 시베리아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 모자라면 저쪽에서 사면 돼. 저쪽에서 무엇이든 팔고 있으니까. 그렇군, 모레 비행기 표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겠나?"
"괜찮지만, 제 표 몫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나는 이러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비행기 표쯤은 굉장히 싼 값으로 살 수 있다구. 금방 좋은 자리를 구할 수 있어. 이건 내게 맡겨두면 돼. 사람에겐 각기 나름대로의 능력이라는 게 있는 거야.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 시스템이 어떻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말게. 호텔도 내가 잡아 두겠어. 방 두 개로 자네와 유키의 몫이야. 어떻겠나? 부엌이 딸린 게 좋을까?"
"네 자취를 할 수 있으면, 저는 그편이 더 좋겠습니다만."
"좋은 데를 알고 있어. 해변에 가깝고, 조용하고 깨끗해. 전에 묵은 적이 있지. 우선 그곳을 2주일 동안 잡아 두겠어. 마음 내키는 대로 있으면 돼."
"하지만요."
"쓸데없는 일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게. 모두 내게 맡겨 괜찮아. 유키 엄마에게는 내가 연락해 두겠어. 자네는 호놀룰루로 가서, 유키와 함께 해변에서 뒹굴며 식사를 하고 있으면 돼. 유키 엄마는 어차피 일 때문에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일을 하고 있으면 돼, 딸이든 무엇이든 안중에 없지. 그러니까 자네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한가로이 지내면 되는 거야, 유키가 제때 식사를 하도록 해주면 된다구. 긴장을 푸는 거야. 몸의 힘을 빼는 거야. 그뿐이야. 아, 그래, 비자는 갖고 있겠지?"
"갖고 있습니다. 다만."
"모레야. 알겠지. 수영복과 선글라스와 패스포트만 갖고 가면 돼. 나머지는 사면 돼. 간단해. 시베리아에 가는 게 아니니까. 시베리아에 갔을 때는 정말 애먹지. 거긴 지독해. 아프가니스탄에 갔을 때도 힘들었고. 하와이는 디즈니랜드 같은 곳이야. 잠깐이야, 멍하니 누워 있으면 돼. 그런데 자네 영어 할 줄 알지?"
"일상의 이야기 정도면"
"좋아." 하고 그는 말했다.
"충분해. 완벽해. 더 얘기할 건 없어. 나카무라가 내일 비행기 표를 그쪽으로 가져가도록 하겠네. 가기 전에 전화하겠어."
"나카무라?"
"아르바이트 학생이야, 지난번에 만났잖은가. 내일을 돕기 위해 입주해 있는 젊은이."
충실한 하인인 프라이데이.
"뭐 질문할 게 있나?" 하고 마키무라 하라쿠가 물었다.
질문할 게 많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하나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특별히 물어볼 건 없다고 나는 말했다.
"좋아." 하고 그는 말했다.
"이해가 빨라.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야. 아,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보낼 또 하나의 선물이 있네. 이것도 받아 주게. 그게 무엇인가는 저쪽에 가면 알 수 있어. 리본을 끄르고 뚜껑을 열어 보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하와이, 좋은 곳이야. 유원지야. 여유. 일할 필요가 없어. 냄새가 좋아. 즐기고 오라구. 또 다음에 만나세."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과소비한 심한 작가.
나는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모레 출발하게 될 것 같다고 유키에게 말했다.
"잘 됐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혼자 준비할 수 있어? 짐이나 백, 수영복 따위 말야."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하지만 하와이잖아요?" 하고 그녀는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긴 해변에 나가는 거나 별 차이가 없어요. 카트만두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우선 여행하기 전에 해둘 일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이튿날 은행에 가서 예금을 찾아, 여행자 수표를 취결하였다. 예금은 아직 꽤 많이 있었다. 지난달 몫의 원고료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불어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샀다. 세탁소에 들러 셔츠를 가져왔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의 식품을 정리하였다. 세 시에 프라이데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마루노우치에 있는데, 지금부터 그쪽으로 비행기 표를 갖고 가도 되겠는가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미리 시간을 정하여, 팔코의 커피 룸에서 만났다. 그는 내게 두터운 봉투를 건네주었다. 속에는 삿포로부터 도쿄까지의 유키의 비행기 요금과 항공회사의 퍼스트 클래스 오픈티켓 2인분 및 아멕스의 여행자 수표책 2권이 들어 있었다. 그밖에 호놀룰루의 아파트먼트 호텔의 지도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 가서 당신의 이름만 알려주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고 프라이데이는 말했다.
"2주일간으로 예약해 두었지만, 더 짧게든 길게든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표에는 당신의 사인을 해 두세요. 마음대로 사용해 주세요. 어차피 경비로 처리되니까 사양할 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뭐든 경비로 처리되는군." 하고 말했다.
"전부는 무리겠지만, 되도록 이면 영수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수증을 받아두어 주세요. 나중에 내가 처리하게 되는데, 그러면 도움이 됩니다." 하고 프라이데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결코 불쾌감을 주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러겠다고 나는 말했다.
"주의하여 좋은 여행을 하십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고맙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하와이니까요." 하고 프라이데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짐바브웨에 가는 건 아니니까." 여러 가지 말솜씨가 있다.
해가 진 다음에 나는 냉장고 속의 재료들을 끄러 모아 저녁 반찬을 만들었다. 야채샐러드와 오믈렛과 된장국이 마련되었다. 내일부터 하와이에 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있어서는 이것은 내일부터 짐바브웨에 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는 아마 내가 짐바브웨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나는 벽장에서 별로 크지 않은 여행용 비닐 가방을 꺼낸 다음, 거기에 세면도구가 담겨진 백과 책, 갈아입을 내의, 양말 따위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영복과 선글라스와 햇볕에 탄 피부용 크림을 집어넣었다. 티셔츠 두 개와 폴로셔츠, 반바지, 스위스 아미 나이프 등을 넣었다. 마드라스 체크 무늬의 여름 윗도리를 반듯이 접어 제일 위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의 파스너를 잠그고, 패스포트와 여행자 수표, 면허증, 비행기의 티켓, 크레디트카드 따위를 확인하였다. 그밖에 또 가져 갈만한 게 있을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와이에 가기란 아주 간단한 일이다. 확실히 가까운 해변에 나가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 훗가이도로 갈 때는 짐이 훨씬 더 많았다. 나는 의복 등이 담겨진 가방을 바닥에 놓아두고, 입고 갈 옷을 준비 하였다. 블루진과 티셔츠, 요트 파커, 엷은 윈드브레이커 등을 개어 쌓아 두었다. 이만큼의 일을 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 따분해져 버렸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할 수 없이 목욕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TV뉴스를 보았다. 특별한 뉴스는 없었다. 날씨가 내일부터 나빠지리라고 아나운서는 예보하고 있었다. 좋아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이미 호놀룰루에 가 있을 테니까. 나는 TV를 끄고, 침대 위에서 뒹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또 메이에 관해 생각했다. 아주 완전하게 죽어 있는 메이, 그녀는 지금 몹시 차가운 곳에 있다. 신원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인수할 사람도 없다. 다이어 스트레이트나 밥 딜런도 이미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내일부터 하와이로 가려하고 있다. 그것도 타인의 경비로, 이게 세상의 올바르고 바람직한 상태일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메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몰아내었다. 또 언젠가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선 너무 딱딱한 화제다. 너무 딱딱하고 너무 뜨겁다.
나는 삿포로에 있는 돌핀 호텔의 아가씨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안경을 낀 프런트의 아가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꿈까지 꾸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하며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안경을 낀 프런트의 아가씨와 이야기 하고 싶은데요, 하고 말하면 될까? 안 돼. 그런 식으로 하면 잘 될 턱이 없어. 아마 상대해 주지도 않으리라. 호텔이란 매우 진지한 직장인 것이다. 나는 이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틀림없이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의지가 있는 데서는 방법이 생겨나는 법이다. 잘 될 것이냐의 여부를 떠나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나는 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리고 내일 할 일을 상의하였다. 아침 아홉 시 반에 택시를 잡아 맞으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건 김에 덧붙여 물어보는 거처럼, 그 아가씨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가고 물어보았다. 너를 내게 맡겼던 호텔의 프런트에 있던 여자 말야. 안경을 낀 사람.
"음,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꽤 이상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일기에 적어 두었어요. 지금은 생각해낼 수 없지만, 일기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 TV를 보고 있거든요. 나중에도 좋죠?"
"미안하지만, 급하다구 굉장히."
그녀는 불평을 했지만, 그래도 일기를 펼쳐보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유미요시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유미요시?" 하고 나는 말했다.
"대체 무슨 글자지?"
"몰라요. 그래서 꽤 이상한 이름이라고 말했잖아요. 무슨 글자인지는 몰라요. 혹시 오키나와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잖아요?"
"아니, 오키나와에도 그런 이름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불러요. 유미요시라구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이제 됐어요? TV를 보고 있어요."
"무엇을 보고 있지?" 그녀는 이에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도쿄의 전화 명부를 모조리 뒤적이며 유미요시라는 이름을 찾아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도쿄에는 2명의 유미요시가 있었다. 세상에는 가지각색의 이름들이 있다. 나는 곧 돌핀 호텔로 전화를 걸어, 유미요시 씨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바로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상대는 그녀에게 제대로 전화를 바꿔 주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에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차갑고 간결하게 말했다.
"나중에 전화하겠어요."
"좋아요, 나중에 그럼." 하고 나는 말했다.
유미요시로부터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고혼다의 집에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 갑자기 얼마 동안 하와이에 가 있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녹음 전화에 녹음시켜 두었다. 고혼다는 집에 있었는지, 이내 전화를 걸어왔다.
"잘 됐군, 부러운데." 하고 그는 말했다.
"기분 전환을 하는 데 아주 좋아. 갈 수 있으면 나도 가고 싶군."
"자네도 갈 수 없는 건 아니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그게 그처럼 간단치가 않아. 사무실에는 빚이 있어. 결혼, 이혼 등의 복잡한 일을 치르느라 굉장히 돈을 많이 빌렸어. 그래서 내가 무일푼이 됐다는 얘기는 자네에게 분명히 했지? 그 빚을 갚기 위해 나는 뼈 빠지게 일하고 있어. 나가고 싶지도 않은 광고에도 나가지. 정말 갈 수 없어. 세상이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고 있어. 자신이 가난뱅이인지 부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구. 물품은 풍부하게 있는데, 갖고 싶은 게 없어. 돈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데, 정말로 사용하고 싶은 게 없어. 정말로 사용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어, 예쁜 여자는 얼마든지 데리고 놀 수 있는데, 좋아하는 여자와는 잘 수가 없어. 이상한 인생이야."
"빚은 많은가?"
"상당한 액수야."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상당한 액수인 줄 알고 있을 뿐이고,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당사자인 나 자신도 통 알 수 없어. 이봐,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웬만한 건 보통 내지는 보통 이상으로 할 수 있어. 그런데 돈을 계산하는 일 따위는 아주 질색이야. 장부에 쓰인 금액의 숫자를 보면 생리적으로 오싹 소름이 끼칠 것 같아 눈을 돌려버려. 우리 집은 완고한 가정이어서 그런 식으로 가르침을 받았어. 숫자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분수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고 말야. 그건 하나의 사고 양식일 수는 있어.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어. 하지만 분수에 맞도록 살아간다는 관념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사고 양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래서 이야기는 까다롭게 됐지. 거시적이라는 게 없어지고, 숫자에 약하다고 하는 것만 남았어. 최악의 상태야.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나는 통 알 수가 없어. 사무실의 계리사가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지. 하지만 까다로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돈이 여기저기로 이동하고 있고, 명목상의 빚이 있고, 명목상의 대출이 있는가 하면, 경비로 처리된 부분이 있는 등 굉장히 복잡해. 좀 더 명료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말하지.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 그럼 아무튼 결과만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지. 그러면 가르쳐 줘. 이건 간단해. 아직 꽤 많은 빚이 있어. 상당히 줄었지만 아직 이러이러한 것들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일하라. 그 대신 경비는 얼마든지 사용하라 그러한 얘기야. 지겨워. 일하는 건 좋아해, 나는 별로 싫어하지 않아. 그러나 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건 곤란한 일이야. 이따금 두려워질 때가 있어. 아, 또 너무 지껄이고 있군. 미안해. 자네하고 이야기를 하면 그만 너무 지껄이게 돼.
"괜찮아. 상관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자네와는 관계없는 일이고, 이다음에 또 만나 천천히 이야기할 수 있지." 하고 그는 말했다.
"잘 다녀오게. 자네가 없으면 적적해. 틈이 나면 만나서 함께 한 잔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죽."
"하와이야."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상아 해안에 가는 것도 아냐. 1주일이면 돌아올 거야."
"아, 그건 그래. 돌아오면 어쨌든 전화를 해주지 않겠나?"
"전화하겠네."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가 와이키키 해변에서 뒹굴고 있을 동안, 나는 치과의사 흉내를 내면서 빚을 갚고 있을 거야."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생이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사람마다 각기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구."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하고 그는 손가락 끝을 튕겨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같은 세대의 인간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확실히 일종의 수고를 덜게 된다.
유미요시는 열 시 가까이 되어 내게 전화를 걸어 주었다. 지금 직장에서 돌아와, 집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계속 내리고 있는 눈 속의 그녀의 아파트를 문득 생각해 내었다. 아주 심플한 아파트, 아주 심플한 계단. 아주 심플한 문. 그녀의 신경질적인 미소. 그러한 것들이 모두 그리웠다. 나는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조용히 눈이 흩날리고 있는 모양을 상상하였다. 마치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어요?" 하고 우선 그녀는 물었다.
유키가 가르쳐 주었다고 나는 설명했다.
"올바르지 않은 짓을 하진 않았어. 매수하지도 않았어. 도청하거나 누군가를 때려 알아낸 것도 아냐. 그 아이에게 예의 바르게 물었더니 가르쳐 주더군."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때요? 제대로 무사히 데려다 주었나요?"
"무사해." 하고 나는 말했다.
"제대로 데려다 주었고, 지금도 이따금 만나고 있어. 건강해. 좀 별난 아이지만."
"당신과 어울려요." 하고 유미요시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지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는 온 세계의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처럼 들렸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좋아한다든지, 사하라 사막에는 별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내게 이름을 죽 감추고 있었지?"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렇잖아요. 이다음에 오면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잖아요? 감추고 있었던 건 아녜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감추고 있는 게 아니라, 가르쳐 주기가 귀찮았을 뿐예요. 무슨 글자냐, 그러한 이름이 흔한 거냐, 어느 곳 출신이냐는 따위만을 묻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귀찮아 남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는 당신이 생각하기보다는 훨씬 더 번거로운 일이에요.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좋은 이름이야. 아까 찾아보았는데 도쿄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했죠. 그 정도는 벌써 알아보았어요. 별난 이름을 갖고 있으면, 옮겨갈 때마다 그곳의 전화 명부를 뒤적여 보는 버릇이 들어버려요. 어디엘 가든 우선 전화 명부를 뒤적여 봐요. 유미요시를 찾아보는 거예요. 교토에도 한 명 있어요. 그래, 내게 무슨 용무가 있어요?
"특별한 용무는 없어."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내일부터 얼마동안 여행을 떠나게 돼. 그래서 그 전에 네 목소리를 들어두고 싶었어. 그뿐이야. 이따금 네 목소리를 들어두고 싶었어. 그뿐이야."
그는 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화가 약간 혼선이 되어 있었다. 굉장히 먼 곳에서 여자가 지껄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작고 메마른 소리가 묘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내용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척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들렸다. 그 목소리는 괴로운 듯이 띄엄띄엄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더니 칠흑같이 깜깜했었다는 이야기를 했죠?"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응, 들었어." 하고 말했다.
"실은 그러한 일이 또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도 잠자코 있었다. 먼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는 이따금 맞장구를 쳤는데, 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불안정한 목소리가 "아아.", "응." 하고 아마 그렇게 말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여자는 천천히 사닥다리라도 올라가는 것처럼, 괴로운 듯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치 죽은 자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기다란 복도의 끝에서 죽은 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죽어 있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에 대해.
"이봐요, 듣고 있어요?" 하고 유미요시가 말했다.
"듣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해봐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그때 한 말을 정말 믿어 주었어요? 그저 적당히 이야기를 들어준 것 아녜요?"
"믿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네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후에 나도 너와 똑같은 장소에 갔었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여 똑같은 어둠속으로 말야. 그리고 너와 똑같은 체험을 했어. 그래서 네가 한 말을 모두 믿고 있어."
"갔어요?"
"그건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하겠어. 지금은 아직 제대로 잘 말할 수 없어. 여러 가지 일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으니까. 이다음에 너를 만날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설명하겠어. 그래서 나는 그 때문에 너를 한 번 더 만날 필요가 있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지금은 어쨌든 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어? 이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혼선이 되어 들려오던 이야기 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전화에서만 있을 수 있는 침묵이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에."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10여 일 전쯤일 거예요.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리려 했어요. 밤 여덟 시쯤에. 그런데 또 그 장소로 나갔어요. 지난번과 같은 곳 말예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거기에 있었어요. 이번은 한밤중도 아니고, 16층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똑같았어요. 캄캄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고, 습기 찬 곳이었어요. 냄새나 어둠이나 습기가 똑같아요. 난 이번에는 아무 데로도 가지 않았어요. 거기서 가만히 엘리베이터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한 느낌이 들지만요.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되돌아와, 그걸 타고 거기서 나왔어요. 그뿐이에요."
"그걸 누구에게 이야기했지?" 하고 나는 물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두 번째잖아요?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좋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아."
"대체 어떡하면 좋죠? 요즘에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문이 열리면 그 어둠이 또 나타날까봐 두려워져요. 하지만 이처럼 큰 호텔에서 일하고 있으면, 하루에 몇 번이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떡하죠? 이 일에 관해서는 당신밖에는 상담할 상대도 없어요, 내게는."
"유미요시." 하고 나는 말했다.
"왜 좀 더 일찍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지?
그러면 좀 더 일찍 네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는데."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어요." 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부재중이었어요."
"녹음 전화 장치가 되어 있잖아?"
"그건 싫어요. 무척 긴장하게 되니까."
"알았어. 그럼 지금 간단히 설명하겠어. 그 어둠은 사악한 게 아니며, 네게 악의를 품고 있지도 않아. 그러니 두려워할 건 없어. 거기서 어떤 것이 살고는 있지만 네가 그 발소리를 들었지, 이는 결코 너를 해치지는 않아. 이는 무엇에 상처를 입히는 건 아냐. 그러니까 너는 만일 또 어둠과 마주치면, 가만히 눈을 감고, 거기서 엘리베이터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돼. 알았어?"
유미요시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내가 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정직한 감상을 말해도 좋겠어요?"
"물론."
"난 당신을 잘 알 수가 없어요." 하고 유미요시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이따금 당신 생각을 해요. 하지만 당신이라는 인간의 실체를 잘 알 수가 없어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서른넷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연령에 비해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유보 사항도 너무 많아. 지금 그것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참이야. 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그러므로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를 네게 정확히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하고 그녀는 아주 제3자처럼 말했다. TV의 뉴스 캐스터 같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네, 그럼 다음의 뉴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다음의 뉴스...
실은 내일부터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다고 나는 말했다.
"네." 하고 그녀는 무감동하게 말했다. 이로써 우리의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위스키를 한 잔만 마시고, 전기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28
그럼 다음의 뉴스.
나는 포토 데라시의 해변에서 뒹굴며, 높고 푸른 하늘과 야자나무 잎과 갈매기를 올려다보며 이 말을 입에 올려 보았다. 내 옆에는 유키가 있었다. 나는 돗자리 위에 벌렁 드러누워 있고, 그녀는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놓인 거대한 산요 라디오 카세트로부터 에릭 크립톤의 신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키는 올리브 그린의 작은 비키니를 입고 코코넛 오일을 발가락까지 잔뜩 바르고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작은 어린 돌고래처럼 매끈해 보였다. 젊은 사모안이 서프보드를 껴안고 앞을 가로질러 가고,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은 라이프 가드가 감시용 전망대 위에 보이며, 쇠사슬의 펜던트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온 거리에 꽃과 과일과 햇볕에 타는 걸 막는 오일 따위의 냄새가 났다. 하와이.
그럼 다음의 뉴스.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며, 잇따라 장면이 전환된다. 얼마 전까지는 눈이 계속 내리는 삿포로 거리를 목표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호놀룰루의 해변에서 뒹굴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되어가는 형편, 점을 따라 선을 그어 갔더니, 이렇게 되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다. 나는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사태의 진행을 차례로 더듬어 보고, 이에 대해 자신이 취한 행동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썩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한 번 더 똑같은 입장에 놓인다할지라도, 나는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이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일단 발은 움직이고 있다. 스텝을 계속 밟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호놀룰루에 있다. 휴식 시간이다.
휴식 시간 하고 나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유키에게 들린 모양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나를 향하고는, 선글라스를 벗고 의심스러운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찮은 거야.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일들." 하고 나는 말했다.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옆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지 말아요, 그런 말하고 싶으면 방안에 혼자 있을 때에나 중얼거려요."
"미안해. 이제 말하지 않겠어."
유키는 온화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같아요, 그건."
"응." 하고 나는 말했다.
"마치 고독하게 홀로 지내고 있는 노인 같애."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저쪽으로 돌아누웠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놀룰루의 아파트먼트 호텔로 가서, 방에 짐을 내려놓고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그리고 우선 제일 먼저 우리가 한 일은 부근의 쇼핑몰로 가서 대형 카세트 라디오를 사는 일이었다. 유키가 이를 요구했다.
"되도록 크고 소리가 우렁찬 것." 이라고 유키는 내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부친이 준 수표를 사용하여 적당한 크기의 산요 카세트 라디오를 샀다. 그리고 몇 개의 테이프와 전지를 듬뿍 샀다. 그밖에 또 갖고 싶은 게 없는가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의복이나 수영복 따위는 필요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해변에 나갈 때, 그녀는 반드시 그 카세트 라디오를 갖고 갔다. 물론 들고 가는 건 내 역할이었다. 내가 그것을 타잔 영화에 나오는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원주민처럼 어깨에 둘러메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디스크자키는 논스톱으로 팝송을 계속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해 봄에 유행하고 있던 곡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청결한 역병처럼 세계를 뒤덮고 있었다. 그보다는 약간 범용한 홀 앤드 오츠도 스스로의 길을 열어 나가려고 건투하고 있었다. 상상력이 결여된 듀란듀란, 어떤 광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편화할 능력이 약간 부족한, 부족하다고 내게는 생각된다. 조 잭슨,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장래성이 없는 프리텐더즈, 언제나 중립적인 쓴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슈퍼 트럼프와 카즈... 따위의 많은 팝 싱어와 팝송.
방은 그녀의 부친이 말한 것처럼 꽤 좋은 편이었다. 물론 가구나 내장 디자인, 벽의 그림 따위는 세련된 멋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쾌적한 느낌을 주었고, 해변도 가까워 편리했다. 방이 10층에 있었으므로, 조용하고 전망도 확 틔어 있었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일광욕을 할 수도 있었다. 부엌도 넓고 기능적이며 청결했다. 전자레인지로부터 접시닦이까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옆에 유키의 방이 있는데, 그것은 내 방보다 작고, 부엌 대신 조그마하고 아담한 간이 부엌이 딸려 있었다. 엘리베이터나 프런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외양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라디오를 산 다음에 나는 혼자서 부근의 슈퍼마켓으로 나가 맥주와 캘리포니아 와인, 과일, 주스 따위를 듬뿍 샀다. 그리고 우선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식료품을 샀다. 그리고 유키와 둘이서 해변으로 나가, 나란히 누워 뒹굴며, 저녁때까지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우리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몸을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고, 그밖에는 별로 하는 일 없이 그저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햇볕이 온통 아낌없이 지상에 내리쬐며 모래를 달구어댔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습기를 포함한 바닷바람이 이따금 생각난 듯이 야자나무 잎사귀를 흔들어대었다. 나는 몇 번이고 꾸벅꾸벅 졸고, 그리고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바람 소리에 문득 깨어나며, 그때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와이에 있다고 자신을 납득시키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땀이 햇볕에 그을리는 오일과 뒤섞여 볼을 타고 내려와서, 귀 언저리에서 뚝뚝 지면으로 떨어졌다.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물결처럼 몰려왔다 몰려가곤 했다. 이따금 그 소리에 섞여 자신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역시 지구의 거대한 영역 속의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머리의 나사를 늦추고 긴장을 풀었다. 휴식 시간인 것이다. 유키의 얼굴 표정도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내려 하와이 특유의 달콤하고, 미적미적한 공기에 접한 순간에 그것은 일어났다. 그녀는 트랩을 내려서자마자 멈춰선 채 눈이 부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그리고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에는 이미 그녀의 얼굴이 엷은 막처럼 뒤덮고 있던 기색도 없었다. 머리칼을 손으로 만지거나, 추잉검을 구겨 버리거나, 의미도 없이 어깨를 움츠리곤 하는 그녀의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동작들마저도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대로, 이 아이는 지금까지 정말 지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구나, 하고 나는 실감했다. 그것은 지독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그릇된 생활인 것이다.
유키가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진한 색깔의 선글라스를 끼고, 작은 비키니를 걸치고 해변에서 뒹굴고 있으면, 그녀의 연령을 잘 알 수 없었다. 몸매 자체는 아직 어린애지만, 그녀의 자연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자기 완결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몸의 동작이, 그녀를 진짜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손과 다리는 날씬하고 가늘지만 화사한 건 아니며 거기에는 뭔가 힘찬 것이 있었다. 그녀가 그 네 개의 수족을 마음껏 뻗치면, 그 주위의 공간마저 사방으로 쭉 뻗쳐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 성장의 가장 다이내믹한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격렬하고 급속하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등에 오일을 발라 주었다. 우선 유키가 내 등에 오일을 발랐다. 등이 굉장히 넓다고 그녀는 말했다. 등이 크다는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발라주자, 유키는 간지러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희고 작은 귀와 목덜미가 보였다. 그리고 이는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해변에 엎드려 있는 유키는 이따금 나마저도 흠칫 놀랄 만큼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목덜미만은 나이에 걸맞게 앳되고 거기에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애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애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여성의 목덜미는 나이테처럼 차례로 나이를 먹어 간다. 왠지 알 수 없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 가고 물어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소녀는 소녀와 같은 목덜미를 하고 있고, 성숙한 여성은 성숙한 목덜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몸을 햇볕에 천천히 태우는 거예요." 하고 유키는 그러한 일에 밝은 사람처럼 내게 말하였다.
"우선 응달에서 태우고, 잠시 양지로 나가서 태우고, 또 응달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되어 버리니까요. 화상으로 물집이 생기고 자국도 남아요. 아주 보기 흉해지거든요."
"응달, 양지, 응달 하고 나는 그녀의 등에 오일을 바르면서 흥겹게 복창했다.
그리하여 하와이에서의 첫째 날 오후에, 우리는 대체로 야자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FM의 디스크자키가 진행하는 방송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바다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바닷가의 스탠드 바에서 냉각 시킨 피나 코라다를 마셨다. 그녀는 헤엄을 치지 않았다.
"우선 휴식." 하고 그녀는 말했다.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고, 마스터드아 피클을 듬뿍 곁들인 핫도그를 천천히 먹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며 수평선이 토마토소스처럼 붉게 물들고, 선셋 크루즈의 선박이 돛대에 불을 켜기 시작할 때까지 거기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한 줄기의 햇살까지 음미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하고 나는 말했다.
"해도 지고 배도 고프다. 조금 산책을 하면서 제대로 만들어진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구. 고기가 연하고 토마토케첩이 넉넉해서 맛있게 구워지고 실로 엄청난 양파를 곁들인 진짜 햄버거."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지만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드러누운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하루의 나머지 근사한 시간을 아끼며 소중히 여기는 의식처럼. 나는 돗자리를 말아 들고, 라디오를 둘러메었다.
"괜찮아, 또 내일이 있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일이 끝나면 모레가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29
이튿날 아침, 유키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의 전화번호밖에 알지 못했으므로, 내가 전화를 걸어 간단한 인사를 하고, 집의 위치를 물었다. 그녀는 마카하 부근에 있는 시골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호놀룰루로부터 자동차로 30분쯤 걸린다고 그녀는 말했다. 아마 한 시간 조금 지날 무렵엔 찾아 뵐 수 있으리라고 나는 말해 두었다. 그리고 나는 부근에 있는 렌터카 사무실로 가서 미쓰비시 랜서를 빌렸다.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드라이브였다. 우리는 카 라디오를 크게 틀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해안에 연해 있는 고속도로를 시속 120킬로의 속력으로 달렸다. 모든 곳에 빛과 바닷바람과 꽃의 향기가 차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 살고 있는가 하고 나는 문득 마음에 걸려 물어보았다.
"설마." 하고 유키는 약간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혼자서 그토록 오랜 동안 외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턱이 없어요. 정말 비현실적인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무슨 일을 통해 나갈 수가 없어요. 내기를 해도 좋아요. 보이 프랜드와 함께 있을 거예요. 아마 잘생기고 젊은 보이 프랜드일 거야. 아빠하고 같아요. 아빠의 집에도 있었죠, 그 매끄럽고 혐오감을 주는 동성연애자인 보이 프랜드 말예요. 그 사내는 틀림없이 하루에 세 번쯤 목욕을 하고, 두 번쯤 속옷을 갈아입고 있을 거예요."
"동성연애자?" 하고 나는 물었다.
"몰랐어요?"
"아니 몰랐는데."
"어수룩하군요.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아빠에게 그러한 취미가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동성연애자예요, 완벽한. 200퍼센트."
로큰롤 뮤직이 흘러나오자, 유키는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엄마는요, 이전부터 죽 시인을 좋아해요. 시인이나 시인 지망생인 젊은이 말예요. 사진 연상 따위를 하고 있을 때에 뒤에서 시를 낭독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취미에요. 별난 취미야. 시라면 뭐든지 좋은 거예요. 숙명적으로 끌리는가 봐. 그러니까 아빠도 시를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 사람은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시를 쓸 수는 없을 테고..."
이상한 가족이다. 하고 나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우주 가족. 행동파 작가와 천재 여류 사진작가와 영매적 소녀와 동성연애자인 학생과 시인인 보이 프랜드. 아이고 맙소사. 나는 이 환각을 일으키는 듯한 '확대 가족' 속에서 대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별난 소녀의 시중을 드는 익살스러운 남자 수행원쯤 되는 셈일까. 나는 프라이데이가 내게 보여준 호감을 주는 미소를 생각해 내었다. 이는 어쩌면 연대적인 미소가 아니었을까? 이봐, 관두라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건 일시적인 거야. 휴식시간인 거야. 알겠나? 휴가가 끝나면 나는 또 생업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그러면 이미 너희들과 놀고 있을 틈 같은 거 없다구, 이건 정말 일시적인 거야. 본론과는 관계없는 삽화 같은 거야. 곧 끝나. 그 다음에는 너희는 너희끼리 하면 돼. 나는 나대로 해 나간다구. 나는 더욱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세계가 좋은 거야.
나는 아메가 가르쳐준 대로 마카하 앞에서 고속도로를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산을 향해 잠시 달렸다. 이다음에 큰 태풍이 불어오면 지붕이 날아가 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만들어진 집들이 도로 양쪽에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지만, 이윽고 그것도 자취를 감추고, 알려준 대로 주택 단지의 문이 나타났다. 수위실에 있는 인도 사람 같은 얼굴을 한 수위가 어디로 가는 가고 물었다. 나는 아메의 집 번지를 대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보고,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들어가요." 하고 말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골프 카트 같은 것을 타고 있는 몇 사람의 정원사들이 묵묵히 잔디와 수목을 손질하고 있었다. 부리가 노란 새의 무리가 잔디 위를 벌레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정원사들 중의 한 사람에게 유키 어머니의 주소를 보여 주며 위치를 물었다. 저기요, 하고 그는 말하면서 간단히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에는 풀과 수목과 잔디가 보였다. 새까만 아스팔트 도로가, 풀의 뒤쪽을 향해 커다랗게 커브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대로 차를 몰았다. 고개를 내려갔다가 다시 고개를 올라간 지점에, 유키 어머니의 집이 보였다. 열대풍의 분위기로 배열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현관 앞에 베란다가 있고,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과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나는 차를 멈추고, 유키와 둘이서 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풍경 소리가 졸려운 미풍에 유혹되는 것처럼 이따금 메마르고 작은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어 젖혀진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비발디의 음악 소리와 기묘하면서도 쾌적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15초쯤 지나자 문이 조용히 열리고, 사나이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햇볕에 잘 그을고 별로 키가 크지 않은 백인 미국인인데, 어깨 부분에서부터 왼쪽 팔이 없었다. 몸매가 다부지고 사려 깊어 보이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색이 바랜 알로하셔츠에 조깅용 반바지를 입고, 고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잘생겼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시인으로서는 외양이 좀 강인한 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에는 강인한 시인도 있을 것이다. 그다지 우스운 일이 아니다. 세계는 넓으니까.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유키를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보고는 턱을 약간 돌리며 미소 지었다. "헬로." 하고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하고 일본어로 다시 말했다. 그리고 유키와 악수하고 나하고 악수하였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악수였다. "자, 들어가요." 하고 그는 깨끗한 일본어로 말했다.
그는 넓은 거실로 우리를 안내하여 커다란 소파에 앉게 하고는, 주방으로 가서 프리머 맥주 두 병과 콜라 한 병과 컵 세 개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나와 그는 맥주를 마시고, 유키는 음료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스테레오 앞으로 가서, 비발디의 볼륨을 낮추고 되돌아왔다. 어쩐지 서머셋 모옴의 소설에 나올 듯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창문이 크고,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으며, 벽에는 남양의 민예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 사진 현상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10분쯤 지나면 올 겁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조금 기다려 줘요. 나는 딕이라고 합니다. 딕 노스. 그녀와 함께 여기서 살고 있어요."
"잘 부탁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일 나무들 틈사이로 파랗게 빛나는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 위에는 원인의 두 개골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한 점의 구름이 외로이 떠 있었다. 구름은 움쩍도 하지 않고, 또 움직일 듯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어쩐지 완고해서 미혹한 느낌을 주는 구름이었다. 표백된 것처럼 새하얗고, 윤곽이 아주 뚜렷했다. 부리가 노란 새들이 지저귀면서 이따금 그 구름 앞을 날아갔다. 비발디가 끝나자, 딕 노스는 플레이어의 바늘을 들어 올리고, 외팔로 능숙하게 레코드를 집어 들어 레코드 자켓에 넣고는, 그것을 선반에 되돌려 놓았다.
"우리말을 잘 하시는 군요." 하고 나는 물었다. 그밖에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딕 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눈썹을 움직이며 눈을 감고, 그리고 미소 지었다.
"일본에 오래 있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입을 여는 데 시간이 걸린다.
"10년 있었어요. 전쟁 중에, 베트남 전쟁 중에 처음으로 일본에 갔는데 마음에 들어, 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우에오지 대학이에요, 지금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젊지도 않고,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역시 시인이다.
"그리고 일본의 하이쿠나 단가, 시 따위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덧붙였다.
"어려운 작업이에요, 아주."
"그렇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맥주를 한 병 더 마시지 않겠는가고 내게 물었다. 마시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맥주 두 병을 더 가져왔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아하게 한 손으로 병마개를 따고, 그것을 컵에 따라 맛있는 듯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는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젓고는 벽에 붙여져 있는 워홀의 포스터를 점검하듯이 차분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얘기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세상에는 외팔이 시인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외팔이 피아니스트도 있습니다. 외팔이 투수도 있었어요. 왜 외팔이 시인이 없을까요? 시를 쓰는 데는 팔이 하나든 셋이든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렇다고 나는 생각했다. 팔이 몇 개든 시를 쓰는 일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외팔이 시인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까?" 하고 딕 노스는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시에 관해선 거의 알지 못하고, 양팔을 온전히 갖고 있는 시인의 이름도 별로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다.
"외팔이 서퍼는 몇 명 있어요."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노를 움직이는 작업을 발로 하는 거예요. 꽤 능숙합니다만."
유키는 일어나 방안을 돌아다니며, 레코드 함에 있는 레코드를 대충 살펴보고는, 그녀가 좋아하는 게 없었는지 이마를 찌푸리며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악이 사라지자, 주위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이따금 잔디 깎는 기계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희미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새도 울었다. 하지만 정적은 압도적이었다. 무슨 소리가 나든, 그 소리는 눈 깜짝 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정적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수천 명의 '침묵의 사나이'들이 투명한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조리 흡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소리가 나면, 모두들 그리로 달려가 소리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조용한 곳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딕 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중한 듯이 자신의 하나뿐인 손바닥을 내려다보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조용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특히 나나 아메가 하고 있는 일과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조용함이 필요해요. 북적거리는 곳은 질색이에요. 뭐라고 하던가, 아, 저작거리 말이에요. 번화한 곳, 좋지 않아요. 어때요? 호놀룰루는 시끄럽죠?"
나는 특별히 호놀룰루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길어져도 번거로울 것 같아 일단 그의 말에 동의해 두었다. 유키는 여전히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밖의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카우아이는 좋은 곳입니다. 조용하고 사람도 적어요. 사실 나는 카우아이에서 살고 싶어요. 오아프는 좋지 않아요. 관광지 같고 자동차도 너무 많고, 범죄가 많아요. 하지만 아메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겁니다. 1주일에 두세 번쯤은 호놀룰루 거리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기재 관계로 말예요. 여러 가지 기재가 필요 합니다. 그리고 오아프에 있어야만 연락하기도 쉽고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그녀는 지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생활하는 사람들을 찍고 있는 거예요. 어부나 정원사, 농부, 요리사, 도로 공사장의 인부, 생선 장수... 따위를 모두 찍어요. 훌륭한 사진작가입니다. 그녀의 사진에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재능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아메의 사진을 그다지 열심히 들여다본 적이 없지만, 이 말에도 일단 동의해 두었다. 유키는 아주 미묘하게 킁킁거렸다. 그는 내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가고 질문하였다. 자유기고가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내 직업에 흥미를 갖고 있는 듯했다. 아무 종형제의 종형제쯤 되는 사이의 동업자로 여겨진 모양이다. 무엇을 쓰고 있는 가고 그는 물었다. 무엇이든, 하고 나는 말했다. 주문을 받으면 무엇이든 씁니다. 요컨대 눈을 치우는 일과 같은 거죠, 하고. 눈을 치는 일, 하고 그는 말하고,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 치우는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줄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때 마침 아메가 방에 들어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버렸다.
아메는 반소매 셔츠에 하얀 색깔의 구겨진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화장도 하고 있지 않고, 머리는 잠자리에서 갓 일어난 것처럼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내가 삿포로 호텔의 식당에서 보았을 때와 똑같은 우아하고 호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면 순간적으로 그녀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존재라는 것을 모두가 실감하는 것이다. 설명도 없이, 일순간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유키에게로 가서, 그녀의 머리를 껴안고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실컷 휘젓고는 관자놀이에 코를 비벼대었다. 유키는 별로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은 짓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항하지는 않았다. 머리를 두세 번 흔들어, 머리칼을 본디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차갑게 선반에 놓인 꽃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그녀의 아버지와 만나고 있을 때의 그 어쩔 수 없는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의 동작에서, 어색한 감정의 흔들림 같은 것을 문득 엿볼 수 있었다. 이 모녀 사이에는 확실히 어떤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아메(비)와 유키(눈). 확실히 너무 심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너무 심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녀의 부친 말처럼 마치 일기 예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면, 대체 어떤 이름을 붙였을까?
아메와 유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강하냐?" 라든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라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딸의 머리칼을 휘젓고, 관자놀이에 코를 비벼댔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메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옆에 걸터앉은 다음 셔츠의 포켓에서 샐럼을 꺼내어 종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시인은 어디서 재떨이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마치 타당한 장소에 재치 있는 장신구를 삽입하는 것처럼, 아메는 거기에 성냥개비를 버리고, 연기를 뿜어내고는 코를 씰룩거렸다.
"미안해요. 일을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고 아메는 말했다.
"중간에 손을 놓을 수 없는 성격의 일이에요. 일하기 시작하면 도리가 없어요."
시인은 아메를 위해 맥주와 컵을 날라 왔다. 그리고 또 한 손으로 능숙하게 병마개를 따고, 맥주를 컵에 따랐다. 그녀는 거품이 가라앉는 걸 확인하고는 절반을 죽 마셨다.
"그래, 당신은 언제까지 하와이에 있을 수 있어요?" 하고 아메는 나에게 물었다.
"알 수 없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정해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마 1주일쯤일 겁니다. 지금은 휴가 중입니다. 곧 일본에 돌아가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요..."
"오래 있는 게 좋아요, 좋은 곳이에요."
"네, 좋은 곳이죠." 하고 나는 말했다.
아이고 맙소사,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듣고 있지 않는 모양이다.
"식사는 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도중에 샌드위치를 먹고 왔습니다." 하고 아메는 시인에게 물었다.
"우리는 틀림없이 한 시간 전에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요." 하고 시인은 천천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전은 열두 시 십오 분이니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점심식사라고 부를 거예요, 일반적으로."
"그럴까요?" 하고 멍한 얼굴로 아메는 말했다.
"그래요." 하고 시인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일에 열중하면 여러 가지의 현실적인 일들을 잊어버립니다. 식사를 했는지, 지금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한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려요.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리는 겁니다. 강렬한 집중력이에요."
이는 집중력이라기보다는 정신병의 영역에 속하는 사례가 아닐까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지만, 물론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 위에서 예의 바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메는 잠시 멍한 눈으로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생각을 돌린 것처럼 그걸 집어 들고 또 한 모금 마셨다.
"이봐요, 하지만 그건 그렇고, 시장하군요. 우리는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불평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사실을 말한다면, 당신은 아침 일곱 시 반에 커다란 토스트와 그레이프 후르츠와 요구르트를 먹었어요." 하고 딕 노스는 설명했다.
"그리고 아주 맛있다고 말했어요. 아침 식사가 맛있는 건 인생의 커다란 기쁨의 하나라고 말예요."
"그랬던가요." 하고 아메는 말하고 콧등을 긁었다.
그리고 또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이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히치코크의 영화 장면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점점 무엇이 뒤틀려 있는 건지 판단할 수 없게 되어간다.
"하지만 아무튼 굉장히 시장해요." 하고 아메는 말했다.
"먹어도 상관없겠죠?"
"물론 상관없어요." 하고 시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당신의 배지 내 배가 아냐, 당신이 먹고 싶으면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먹으면 돼요. 식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당신은 언제나 그래요. 일이 잘 되어가고 있으면 식욕도 생겨요.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주겠소."
"고마워요. 그리고 함께 맥주도 한 병 더 갖다 주겠어요?"
"물론." 하고 그는 말하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당신은 점심 식사를 했어요?" 하고 아메는 또 나에게 물었다.
"아까 도중에 샌드위치를 먹고 왔습니다."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유키는?"
"필요 없어요." 하고 유키는 간단히 말했다.
"딕과는 도쿄에서 만났어요." 하고 아메는 소파 위에서 다리를 포개고,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 말은 마치도 유키를 향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가 카트만두에 가도록 권해 주었어요. 그곳은 영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고 말예요. 카트만두는 좋은 곳이었어요. 딕은 베트남에서 한쪽 팔을 잃었어요. 지뢰가 터져서. 바운싱 베니라는 거예요. 우리말이 능숙하죠? 우리는 얼마 동안 카트만두에 있다가 하와이로 왔어요. 얼마 동안 카트만두에 있었더니 더운 곳으로 가고 싶어졌지요. 그래서 딕이 이곳의 집을 발견해 주었어요. 여기는 그의 친구의 시골집이에요. 손님용의 욕실을 암실로 꾸몄죠. 좋은 곳이에요."
이만큼 말하고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허리를 죽 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후의 깊은 침묵. 창밖에는 강한 빛의 입자들이 티끌처럼 떠돌며,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천천히 옮아가고 있었다. 원인의 두 개골 같은 모양의 흰 구름은 아직도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수평선 위에 떠 있었다. 아메가 재떨이에 놓는 샐럼은 거의 손도 대어지지 않은 채 재떨이 속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딕 노스는 어떻게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빵을 어떻게 자를까?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쥔다. 이건 당연하다. 그러면 빵을 어떻게 고정시킬까? 발 따위를 사용하는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혹은 능숙하게 운을 밟으면 빵이 저절로 잘려지는 것일까? 그런데 왜 그는 의수를 달지 않는 것일까?
잠시 후에 시인은 쟁반에 아주 우아하게 배열된 샌드위치를 갖고 나타났다. 오이와 햄으로 만들어진 샌드위치인데, 영국 풍으로 잘게 썰어 가지런히 담겨져 있고, 올리브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매우 맛있어 보였다. 어떻게 이토록 능숙하게 자를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감탄했다. 그리고 그는 유리컵에 맥주를 따랐다.
"고마워요, 딕." 하고 아메는 말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요."
"외팔이 시인을 대상으로 한 요리 콩쿠르가 있으면, 나는 절대로 1등을 할 겁니다." 하고 시인은 한쪽 눈을 감으며 내게 말했다.
아메는 내게 하나 먹어 봐요, 하고 말했다. 나는 한 개를 집어 먹어 보았다. 확실히 아주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어딘지 모르게 시적인 운치가 감돌고 있었다. 재료가 신선하고, 다루는 방식이 세련되어 있으며, 음운이 정확했다. 맛있다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빵을 자르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론 그러한 것을 물을 수가 없다.
딕 노스는 부지런한 인물인 듯했다. 그는 아메가 그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동안에, 또 부엌으로 가서 모두를 위해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아주 맛있는 커피였다.
"이봐요." 하고 아메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유키와 둘이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무슨 의미이냐고 나는 질문해 보았다.
"물론 음악 얘기에요. 그 로큰롤 음악. 당신은 그게 고통스럽지 않아요?"
"별로 고통스럽진 않은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걸 듣고 있으면, 난 머리가 아파와요. 30초도 참을 수 없어요. 도저히. 유키와 함께 있는 건 좋지만, 그 음악만은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녀는 말하고, 집게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무척 한정되어 있어요. 바로크 음악이나 어떤 종류의 재즈 따위. 민족 음악이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음악 따위. 그러한 걸 좋아해요. 시도 좋아하죠. 조화와 조용함."
그녀는 또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아마 그대로 담배 피우는 일을 잊어버리는가 보다고 나는 상상했는데, 정말 그랬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그녀와 지냄으로써 인생과 재능을 소모해 버렸다고 한 말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주위의 사람에게 무엇을 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조정하기 위해, 주위로부터 조금씩 무엇인가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재능이라는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화와 조용함. 그녀가 그것을 얻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다리나 팔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관련이 없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가 우연히 휴가 중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휴가가 끝나면, 나는 다시 '눈 치우는 작업'으로, 즉 일상적인 일로 돌아간다. 이처럼 기묘한 상황은 곧 아주 자연스럽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의 빛나는 재능 앞에 내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자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운명의 흐름이 작은 흐트러짐에 의해 여기에, 이 이유도 알 수 없고 기묘한 장소에 일시적으로 밀려나 있을 뿐이다. 할 수 있다면, 나는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말 따위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확대 가족' 속에서는 나는 아직 목소리도 없는 2등 시민인 셈이다.
구름은 아직 똑같은 형태로 수평선 바로 위에 떠 있었다. 거기에 배를 띄우고 막대기를 쳐들면 닿을 듯한 거리였다. 거대한 원인의 거대한 두 개골. 어느 역사의 단층으로부터 이 호놀룰루의 상공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우리는 아마 동류일 거라고 나는 구름을 향해 말해 보았다.
아메는 샌드위치를 먹어버리고는 다시 유키가 있는 데로 가서 머리칼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유키는 무표정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있는 머리칼." 하고 아메는 말했다.
"이러한 머리를 나도 갖고 싶었는데. 언제나 윤기가 나고 반듯해. 내 머리는 금방 헝클어져 버려. 손을 쓸 수가 없어. 그렇지, 아가씨?" 그리고 그녀는 또 유키의 관자놀이에 코를 비볐다.
딕 노스는 빈 맥주병과 쟁반을 치웠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실내악을 틀었다.
"맥주 들겠어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만 마시겠다고 나는 말했다.
"이봐요, 난 여기서 유키와 둘이 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하고 아메가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안 이야기.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 그러니까 딕, 그를 해안에 안내해 드리면 어떨까요? 한 시간쯤."
"좋습니다. 물론." 하고 시인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일어섰다. 시인은 아메의 이마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 투박한 삼베로 만들어진 흰 모자를 쓰고는 녹색의 색안경을 끼었다.
"우리는 한 시간쯤 산책을 하고 오겠어요. 천천히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내 팔꿈치를 잡고 "자, 갑시다. 멋진 해변이 있어요." 하고 말했다.
유키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메는 세가치 째의 샐럼을 담배갑에서 꺼내었다. 그녀들을 뒤에 남겨두고, 나와 외팔이 시인은 방문을 열고, 숨이 콱콱 막힐 듯한 오후의 햇빛 속으로 나왔다.
내가 차를 운전하여 해안까지 나갔다. 의수를 달면 운전하긴 쉽지만, 되도록이면 달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하고 그는 설명했다.
"그걸 달면 아무래도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요. 편리하긴 해도 위화감이 있지요. 자신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되도록 팔 하나로 하는 생활에 스스로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모자랄지라도, 자신의 몸만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빵은 어떻게 자릅니까?" 하고 나는 결심을 하고 물어보았다.
'빵' 하고 잠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겨우 질문의 취지를 이해하였다.
"아, 빵을 자를 때 말이죠. 당연한 질문이에요. 보통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간단합니다. 한 손으로 잘라요. 보통으로 나이프를 쥐면, 그야 자를 수 없죠. 요령 있게 쥐어야 합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칼을 가지고 말예요, 이렇게 싹둑싹둑 자르는 거예요."
그는 자르는 시늉을 하며 실연해 보여주었지만, 나로서는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납득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빵은 여느 사람이 양 손을 사용하여 자르는 경우보다 훨씬 우아하게 잘려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잘 됩니다." 하고 그는 나를 바라보고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웬만한 건 한 손으로 해낼 수 있어요. 박수치는 건 안 되지만, 엎드려 팔굽혀 펴기나 철봉도 할 수 있어요. 훈련하면 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어떻게 빵을 자르리라고 생각했습니까?"
"발 따위를 사용하는 줄 알았어요..."
그는 즐거운 듯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재미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시로 만들고 싶군요. 발을 사용하여 샌드위치를 만드는 외팔이 시인에 대한 시. 재미있는 시가 될 겁니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나 찬성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해변에 연해 있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차를 세우고, 차가운 맥주 여섯 개를 사가지고, 그가 억지로 돈을 치렀다.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해변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누워 맥주를 마셨다. 너무 더워서 아무리 맥주를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별로 하와이답지 않은 해변이었다. 키가 작고 볼품없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모래사장도 균일하지 않고 울퉁불퉁해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관광지의 요란스러움은 없었다. 부근에는 몇 대의 픽업트럭이 세워져 있고, 가족들끼리 나온 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앞바다에서는 10여 명의 로코가 서핑을 하고 있었다. 두 개골 모양의 구름은 아직 같은 곳에 같은 모양으로 두둥실 떠 있고, 갈매기 떼가 세탁기의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우리는 멍하니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고, 맥주를 마시고, 조금씩 이야기를 하였다.
딕 노스는 자신이 아메를 굉장히 존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라고 그는 말했다. 아메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일본어로부터 천천히 영어로 전환하여 갔다. 일본어로는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난 후로 나의 내부에서의 시에 대한 생각 자체가 변했어요. 그녀의 사진은 뭐라고 할까, 시라는 것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언어를 고르고 골라 뼈를 깎듯이 자아낸 것이, 그녀의 사진에서는 일순에 구현되어 있는 겁니다. 구현. 그녀는 공기 속에서, 빛 속에서, 시간의 틈 사이에서 그것을 날쌔게 캐치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심적 정경을 구현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대체로,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따금 두려워지는 때가 있어요. 자신의 존재가 위태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압도적이에요, 그녀는 의견을 달리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천재예요. 나하고도 다르고 당신과도 달라요. 실례했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천재는 매우 희귀한 존재입니다. 일류 재능이라는 건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니에요. 이와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이를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 해야겠죠. 그러나-." 하고 그는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는 것처럼 오른팔을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혹독한 체험이기도 합니다. 이는 때로는 나의 자아를 바늘처럼 찌릅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수평선과 그 위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부근의 해변은 물결이 거칠었다. 그 물결은 해안에 격렬히 내동댕이쳐지듯이 부서졌다. 나는 더운 모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모래를 들어 올렸다간 바닥에 떨구었다. 이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서퍼들은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것을 포착하여 해안에 이르고, 다시 노를 움직여 앞바다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나의 자아와 관련해서 말하는 이상으로 그녀의 재능에 끌려들고 있고, 또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마치 커다란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가는 것처럼. 내게는 아내가 있어요. 일본인이에요. 어린애도 있습니다. 아내 역시 사랑하고 있어요. 정말 사랑하고 있어요, 지금도. 하지만 아메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녀에게 어쩔 수 없이 빠져버린 거예요. 소용돌이처럼 말예요. 나는 알게 되었어요. 이는 일생에 한 번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이러한 만남은 일생에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예요. 그런 건 알 수 있어요, 확실히. 그리고 나는 생각했어요. 이 사람과 결합이 되면 아마 나는 언젠가는 후회하게 되리라, 하지만 결합되지 않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리라고 말예요. 당신은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까?
"없을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이상한 일이에요." 하고 딕 노스는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아주 힘겹게 노력하여 조용하고 안정된 생활을 손에 넣었어요. 아내와 어린애와 작은 집, 그리고 작가. 수입이 대단치는 않지만, 보람이 있는 직업이에요. 시를 쓰고, 번역도 했습니다. 나로서는 이만하면 훌륭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었지만, 그래도 이를 보완하고도 남을 만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를 손에 넣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노력도 했어요. 마음의 평온. 손에 넣기가 매우 어려운 거예요. 나는 그것을 손에 넣었어요. 하지만-." 하고 그는 말하고, 손바닥을 허공에 들어 올려 수평으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상실해요. 눈 깜짝 할 사이에요. 내게는 이미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일본에 있는 집에도 돌아갈 수 없어요. 미국에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나는 너무 오래 고국을 떠나 있었어요."
나는 무슨 말이든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모래를 집어 들었다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딕 노스는 일어나 5, 6미터쯤 떨어진 곳의 엉성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데로 가서 소변을 보고, 다시 천천히 되돌아왔다.
"고백담." 하고 그는 말하며 웃었다.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는 가고 물어도, 나로서도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모두 서른이 넘은 어른인 것이다. 누구하고 자느냐는 것쯤은 스스로 선택하는 수밖에 없고, 소용돌이든 맹렬한 회오리든 폭풍우든 간에 스스로 선택한 이상은 어떻게든 그 길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딕 노스라는 사나이로부터 어딘지 모르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가 여러 가지의 어려운 일을 한 손으로 해내고 있는 데 대해 경의마저 느꼈다. 그러나 대체 그러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우선 첫째로 나는 예술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 그처럼 예술적으로 영감을 주는 관계라는 것은 잘 알 수 없습니다. 나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는 약간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려 했지만, 깊이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아마 맥주를 마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깨어보니, 나무 그림자가 이동하여 내 얼굴 위에 걸려 있었다. 더위 때문에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시계 바늘은 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딕 노스는 물가에서 누군가의 개와 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를 내버려둔 채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이야기였는데. 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았을까?
나는 또 모래를 집어 올리면서, 개하고 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인은 개의 머리를 껴안고 있었다. 파도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또 기운차게 물러갔다. 희고 가느다란 물보라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너무 냉정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팔이 하나밖에 없든, 둘 다 온전하게 갖고 있든, 시인이든 시인이 아니든 간에, 여기는 거칠고 딱딱한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기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른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적어도 처음으로 대면하는 상대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너무 냉정하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랜서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딕이 초인종을 누르자, 유키가 별로 아무런 재미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아메는 담배를 입에 물고 소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좌선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딕 노스는 그녀가 있는 데로 가서 또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야기는 끝났어요?" 하고 그는 물었다.
"응." 하고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긍정하는 의미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해변에서 한가로이 세계의 변경을 바라보면서 기분 좋게 일광욕을 하고 있었어요." 하고 딕 노스는 말했다.
"이제 돌아가요." 하고 유키가 아주 평면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시끄럽고 현실적이며 관광지다운 호놀룰루로 슬슬 되돌아가고 싶었다. 아메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또 놀러 와요. 당신을 만나고 싶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딸에게로 가서, 딸의 볼에 손을 가져가 살며시 어루만졌다. 나는 딕 노스에게 공손한 대접을 받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생긋 미소 지으며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랜서의 조수 자리에 유키를 태우자, 아메가 내 팔꿈치를 잡아 당겼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둘이서 나란히, 앞에 보이는 작은 공원 같은 데로 걸어갔다. 그는 공원 안의 간단하게 만들어진 정글짐에 기대어,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귀찮은 듯이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난 그걸 알 수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요. 저 아이를 되도록 이면 이리로 데리고 와요. 난 저 아이를 좋아해요. 저 아이를 만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친구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나 딸이기 이전에 말예요. 그래서 여기 있는 동안에 둘이서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메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할 만한 말을 하나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당신과 유키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유키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면, 물론 데리고 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혹은 당신이 부모로서 그녀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데리고 옵니다. 그 두 경우 이외에는 나로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친구라는 것은 제3자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내 기억이 틀림이 없다면."
아메는 이에 대해 약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은 유키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그건 좋은 일이에요, 물론. 하지만 아시겠어요. 당신은 그녀에게 있어 친구이기 전에 먼저 어머니예요." 하고 나는 말했다.
"좋든 싫든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아직 열세 살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머니를 필요로 하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나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이니까 이러한 말을 하는 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중간한 친구가 아니라, 우선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세계입니다. 우선 그것을 분명히 알아 둬야 해요."
"당신은 알지 못하고 있어요." 하고 아메는 말했다.
"맞아요, 나는 알지 못하고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아시겠어요, 그녀는 아직 어린애이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어요. 누군가가 지켜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력을 요하는 일이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는 책임이에요. 아시겠어요?" 하지만 물론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매일 데려와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녜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 애가 와도 좋다고 할 때에 데려와 주면 돼요. 나도 이따금 전화는 걸어볼 테니까요. 이봐요, 난 저애를 잃고 싶지 않아요. 이대로 있으면 저애가 점점 성장하여 내게서 떨어져 나갈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이어지는 일이에요, 유대. 나는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머니이기 전에, 내게는 할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건 저 애도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니 딸이니 하는 그 이상의 관계예요. 말하자면 피로 이어진 친구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우리는 잠자코 라디오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지만, 그 이외에는 그저 침묵이 계속되었다. 유키는 외면하듯이 가만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나도 특별히 할 말은 없었다. 15분쯤 나는 그대로 운전을 계속 하였다. 하지만 작은 예감이 들었다. 머릿속을 소리 없는 총알처럼 그 예감은 재빨리 가로질러 갔다. 예감에는 작은 글자로 "차를 어디엔가 세우는 게 좋겠다."고 씌어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예감에 따라 눈에 들어온 해변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유키에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가고 물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무얼 마시겠어?" 유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암시적인 침묵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암시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암시의 암시성이라는 것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암시성이 현실의 형태를 취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일을 익히게 된다. 페인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모양의 작은 검정색 수영복을 입은 두 아가씨가 나란히 야자수 아래를 천천히 걸어갔다. 울타리 위를 걸어가는 고양이와 같은 걸음걸이였다. 그녀들은 맨발이고, 수영복은 몇 개의 작은 손수건을 이어붙인 것처럼 와일드한 것이었다. 강한 바람이 불면 날려가 버릴 것처럼 보인다. 두 아가씨는 억압된 꿈처럼 묘하게 사실적인 비현실성을 드러내면서, 나의 시야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가로질러 사라져 갔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헝그리 하트>를 불렀다. 좋은 노래다. 시계도 아직 전혀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디스크자키도 이는 좋은 노래라고 말했다. 나는 가벼이 손톱을 씹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두 개골 모양의 구름은 마치 숙명처럼 거기에 있었다. 하와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세계의 끝 같다. 어머니가 딸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있다. 딸은 친구보다는 어머니를 구하고 있다. 엇갈리고 있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보이 프랜드가 있다. 되돌아갈 곳이 없는 외팔이 시인이다. 아버지에게도 보이 프랜드가 있다. 동성연애자이며 비서인 프라이데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10여 분 후에 유키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그리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 손을 제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내 어깨에 코를 기대며 울었다.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라도 네 입장이었다면 울 거야. 당연한 일이야. 나는 그녀의 어깨를 안고, 실컷 울게 하였다. 내 셔츠의 소매는 이윽고 흠뻑 젖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 어깨를 격렬히 흔들면서 그녀는 울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번쩍이는 회전 권총을 찬 2인조 경관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갔다. 독일 세퍼드가 괴로운 듯이 혓바닥을 드러낸 채 주위를 배회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야자수 잎이 바스락거리며 흔들렸다. 픽업트럭이 부근에 멈춰 서자, 몸집이 큰 사모아 사람이 거기서 내려 예쁜 아가씨를 데리고 해변으로 걸어가 버렸다. 라디오에서는 J.가일즈 밴드가 그리운 <댄스 천국>을 부르고 있었다. 한 차례 울고 나더니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은 듯했다.
"나를 두 번 다시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아요." 하고 유키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말했다.
"그렇게 불렀나?" 하고 나는 물었다.
"불렀어요."
"기억이 나지 않아."
"불당에서 돌아왔을 때요. 그날 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무튼 두 번 다시 부르지 말아요."
"부르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약속해. 보이 조지와 듀란듀란에 맹세코 약속해. 두 번 다시 그렇게 부르지 않겠어."
"언제나 엄마가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요, 나를 아가씨라고 말예요."
"그렇게 부르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분은 언제나 내게 마음의 상처를 입혀요. 하지만 그 분은 그걸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를 좋아해요. 그렇죠?"
"맞아."
"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성장하고 싶지 않아."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싫어도 모두들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문제를 안은 채 나이를 먹고 모두들 싫어도 죽어 가는 거야. 옛날부터 죽 그랬고, 앞으로도 죽 그러 거야. 너만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냐."
그녀는 눈물 자국이 난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사람을 위로해줄 줄도 몰라요?"
"위로해 주고 있는 셈인데." 하고 나는 말했다.
"절대로 빗나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어깨에 놓인 내 손을 밀어내고, 백 속의 화장지를 꺼내어 코를 풀었다.
"자." 하고 나는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부터 차를 몰고 나왔다.
"집에 돌아가 한 차례 수영을 하고,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 사이좋게 먹자구."
우리는 한 시간쯤 수영을 하였다. 유키는 수영이 꽤 능숙했다. 앞바다까지 헤엄쳐 가거나, 잠수하여 서로 발을 잡아당기곤 하며 놀았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슈퍼에 가서 스테이크 고기와 야채를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양파와 간장을 사용하여 산뜻한 스테이크와 야채샐러드를 만들었다. 두부와 파를 넣어 된장국도 만들었다. 기분 좋은 저녁 식사였다. 나는 캘리포니아 와인을 마시고, 유키도 그것을 컵에 절반쯤 따라 마셨다.
"아저씨는 요리 솜씨가 좋군요." 하고 유키가 감탄하여 말했다.
"솜씨가 좋은 게 아냐. 단지 애정을 기울여 정성스레 만들고 있을 뿐이야. 그러기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자세의 문제야. 여러 가지 사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어.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되겠군요?"
"그 이상은 운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아저씨는 의외로 사람을 낮게 평가하는군요. 의젓한 어른인 주제에." 하고 유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둘이서 설거지를 한 다음, 우리는 밖에 나가 불이 켜지기 시작한 번화한 카라카와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하였다. 엉성해 보이는 여러 종류의 상점들을 들여다보며 물품을 비평하고, 길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로얄 하와이안 호텔의 비치 바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는 또 피나 코라다를 마시고, 그녀는 후르츠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딕 노스는 이렇게 소란스러운 밤거리를 굉장히 싫어하리라고 상상하였다. 나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엄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어요?" 하고 유키가 내게 물었다.
"처음으로 대면한 사람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난 잘 알 수가 없어."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생각을 정리하거나 판단하는데 비교적 시간이 걸리거든. 머리가 좋지 않아서."
"하지만 아저씨는 약간 화를 내고 있었죠? 아녜요?"
"그래?"
"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하고 나는 인정했다.
그리고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피나 코라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약간 화를 내고 있었는지도 몰라."
"무엇에 대해?"
"네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누구 하나 진지하게 책임을 지려고 하고 있지 않은 데 대해. 하지만 쓸모없는 짓이야. 나는 화를 낼 자격도 없고, 내가 화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유키는 쟁반에 담겨진 프리첼을 집어 먹었다.
"틀림없이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겠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저씨는 알고 있어요?"
"암시성이 구체적인 형태를 취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이에 대처하면 되리라고 생각해, 요컨대."
유키는 티셔츠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기다리면 된다는 말이야." 하고 나는 설명했다.
"천천히 그러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그리고 공평한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모두들 너무 분주해. 재능이 넘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공평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흥미가 너무 많거든."
유키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핑크색의 테이블 보 위에 떨어져 있는 프리첼 조각을 손으로 밀쳐내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똑같은 무늬의 알로하와 무무를 입은 늙은 미국인 부부가 앉아 있는데, 이들은 거대한 잔에 담겨진 많은 양의 트로피칼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호텔의 안마당에서는 똑같은 무늬의 무무를 입은 아가씨가 전자 피아노를 치면서 <송 포 유>를 부르고 있었다. 별로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송 포 유>인 것만은 분명했다. 마당에는 사방에 횃불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스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두세 명이 산발적으로 손뼉을 쳤다. 유키는 나의 코라다를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맛있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동의지지." 하고 나는 말했다. '맛있어.'에 두 표.
유키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대체 어떠한 사람인지, 나로선 잘 이해할 수가 없어요. 굉장히 성실하고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근본적으로 빗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굉장히 정상적이라는 것은, 동시에 빗나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그러한 일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요." 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리고 꽤 다정해 보이는 웨이트리스에게 피나 코라다를 다시 주문했다. 그녀는 허리를 흔들면서 재빨리 음료를 날라 와서 전표에 사인을 하고는, 체샤 고양이처럼 폭이 넓은 미소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럼,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죠?" 하고 유키가 말했다.
"어머니는 너를 만나고 싶어 하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자세한 것은 나도 잘 알 수 없어. 남의 집안일이고, 약간 독특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지금까지 여러 가지 알력을 낳아온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를 넘어, 너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있어."
"사람과 사람이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찬성." 하고 나는 말했다. '어려운'에 두 표.
유키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멍한 눈으로 내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한 엄마의 생각에 대해."
"내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게 문제야, 말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그거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고려할 만한 건설적인 자세'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것은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어. 서두를 건 없어요. 천천히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면 돼."
유키는 팔꿈치를 세우고 손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아가씨가 되돌아와, 피아노를 치면서 블루 하와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밤이 갓 시작되었다. 우리는 젊다. 자, 나오라, 달이 바다 위에 떠 있을 동안에."
"우리는 아주 지독한 상태였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삿포로로 가기 전에는 정말 지독했어요. 학교에 다닐 것이냐의 여부를 둘러싸고 옥신각신 한 끝에 아주 험악해졌어요. 서로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제대로 얼굴도 마주 보지 않았어요. 그러한 상태가 죽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제대로 무슨 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수시로 생각이 떠오르면 무슨 말을 하고, 그대로 잊어버려요. 말하고 있을 때는 진지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한 주제에 이따금 변덕스레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눈뜨는 거예요. 난 그러한 걸 보면 화가 울컥 치밀어요."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접속사적 존재.
"하지만, 그 분에게는 확실히 뭔가 보통 이상의 뛰어난 점이 있어요. 어머니로서는 엉망이며 최악이고, 그 때문에 내가 마음의 상처를 상당히 입어 왔지만, 그와는 달리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끌려드는 면은 있어요. 그 점은 아빠하고는 전혀 달라요. 잘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지금 갑자기 친구가 되자고 해도, 그 분과 나와는 힘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나는 아직 어린애이고, 그 분은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어른이에요. 누가 생각하든 그것쯤은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엄마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엄마가 나와 친구가 되려고 해도 본인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셈이지만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자꾸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삿포로에서의 일도 그래요. 엄마는 때로는 내게 접근하려고 해요. 그래서 나도 엄마에게 접근하려고 해요. 나도 노력하는 거예요, 열심히.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엄마는 이미 어딘가 다른 데로 눈을 돌리고 있어요. 이미 다른 일에 열중하여, 나에 관한 건 잊어버리고 있어요. 모두 일시적인 생각이에요." 유키는 이렇게 말하고, 절반쯤 먹다 남은 프리첼을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튕겨 버렸다.
"나를 함께 삿포로로 데리고 갔어요. 하지만 결국은 그 모양이에요. 나를 데리고 온 건 잊어버리고, 훌쩍 카트만두로 가버렸잖아요. 그리고 자신이 나를 내버려 두고 가버린 걸 사흘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하는 거예요. 너무 심하잖아요.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엄마를 좋아해요. 아마 좋아하리라고 생각해요.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 다루어지고 싶지 않아요. 일시적인 생각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게 이젠 지겨워요."
"네 말은 모두 옳아." 하고 나는 말했다.
"논지도 명확해.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엄마는 알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한 걸 제대로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한 느낌도 들어."
"그러니까 초조해요."
"그것도 잘 이해할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한 때에 우리 어른들은 술을 마셔요."
유키는 나의 피나 코라다를 절반쯤 주욱 들이켰다. 어항처럼 거대한 잔이어서, 양이 꽤 많았다. 다 마시고 나서, 잠시 후에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한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 이상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몸이 따스하고 졸리는 것 같아요."
"그럼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요. 좋은 기분이에요."
"좋아. 긴 하루였어. 열세 살이든 서른네 살이든 간에 마지막으로 약간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권리는 있어."
나는 돈을 치르고, 유키의 팔을 잡고 해변을 따라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의 자물쇠를 따주었다.
"이봐요." 하고 유키가 말했다.
"뭐야?" 하고 나는 물었다.
"잘 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튿날도 완전히 하와이적인 하루였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는 이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나갔다. 서핑을 해보고 싶다고 유키가 말하기에, 나는 대여하는 보드 두 개를 빌려, 그녀와 함께 쉐라톤의 앞바다로 나갔다. 나는 이전에 친구로부터 초보적인 기술을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파도를 타는 방식이나 발을 딛는 방식 정도의 초보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유키는 썩 잘 익혔다. 몸도 부드러웠고 타이밍을 잘 포착하였다. 30여 분 만에 그녀는 나보다 파도를 훨씬 더 잘 타게 되었다. "재미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점심 식사를 한 다음에, 나는 그녀를 데리고 알라모아나 부근에 있는 서프 상점으로 가서, 중고품인 중고 보드 두 개를 샀다. 점원은 나와 유키의 체중을 물어보고, 각기 적합한 보드를 골라 주었다. "당신들은 남매인가요?" 하고 점원이 내게 물었다. 귀찮아서 "그렇다."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와 딸처럼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어서 나는 약간 안심했다.
두 시에 우리는 또 해변으로 나가, 모래사장에서 뒹굴며 일광욕을 했다. 수영을 좀 하고, 잠을 잤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그저 멍하니 지냈다. 라디오를 듣고, 책을 대충 읽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야자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양이 조금씩 그 정해진 궤도를 이동하여 갔다. 해가 기울자,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먹은 다음,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을 나와 잠시 거리를 산책하고, 할레크라닌 호텔의 우아한 풀 사이드 바로 갔다. 그리고 나는 또 피나 코라다를 마시고, 그녀는 후루츠 주스를 주문했다.
"이봐요, 그걸 또 조금 마셔도 괜찮을까요?" 하고 유키는 나의 피나 코라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 하고 나는 말하고, 잔을 바꾸었다.
유키는 빨대로 2센티미터 가량의 피나 코라다를 마셨다.
"맛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제 들렀던 바와는 약간 맛이 다른 것 같아여."
나는 웨이터를 불러 피나 코라다를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째로 유키에게 주었다.
"모두 마셔도 돼." 하고 나는 말했다.
저녁때마다 나와 함께 지내고 있으면, 일주일 만에 너는 일본에서 피나 코라다에 제일 밝은 중학생이 될 거야."
풀장 한편에서는 풀 사이즈의 댄스 밴드가 <프레네시>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클라리넷 연주자가 도중에 긴 독주를 하였다. 아트 쇼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솔로였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정장을 한 10여 쌍의 늙은 부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풀의 밑바닥으로부터 떠오르는 조명이, 그들의 얼굴을 환상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는 노인들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온갖 세월을 보낸 끝에, 이 하와이에 겨우 당도한 것이다. 그들은 우아하게 발을 움직이며, 제대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사내들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 반듯한 자세로 움직이고, 여자들은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롱스커트 자락을 부드럽게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왠지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마 노인들이 흡족한 듯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곡이 <문 그로우>로 바뀌자, 그들은 서로 살며시 볼을 접근시켰다.
"또 졸리는군." 하고 유키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혼자서 똑바로 걸어갈 수 있었다. 진보하고 있다.
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와인과 잔을 거실로 가져와서, TV를 켜고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놈들을 높이 매달아라>를 보았다. 또 크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리고 여전히 미소 짓지도 않는다. 나는 와인 석 잔을 마실 동안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도중에 점점 졸려 와서 그만 TV를 끄고, 욕실로 가서 이를 닦았다. 이로써 하루가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보람이 있는 하루였을까? 그렇지도 않다. 그저 보통이다. 아침에 유키에게 서핑을 가르쳐 주고, 또 서프보드를 사 주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E.T>를 관람했다. 그리고 할레크라니의 바에서 둘이서 피나 코라다를 마시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노인들을 구경했다. 유키가 술에 잔뜩 취하고, 나는 그녀를 호텔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저 보통의, 좋든 싫든 하와이적인 하루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로써 하루가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그처럼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다.
내가 티셔츠와 팬티만 입고 침대로 들어가, 전기를 끄고 5분도 지나기 전에 문 앞의 초인종이 울렸다. 원, 또 무슨 일이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시계는 열두 시 조금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바지를 입고 방문 쪽으로 나갔다. 내가 그리로 갈 때까지 벨이 두 번 더 울렸다. 유키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밖에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찾아온 이는 유키가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젊은 여자였다.
"하아이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아이." 하고 나도 반사적으로 말했다.
얼핏 보기에 여자는 동남 아시아계인 듯했다. 타일랜드나 필리핀이나 베트남... 나는 미묘한 인종적 차이를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쪽이다. 예쁜 여자였다. 몸집이 작고, 피부색이 까무잡잡하며, 눈이 크다. 그리고 윤기가 나는 핑크색의 매끄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백이나 구두도 모두 핑크색이었다. 왼손의 손목에 팔찌처럼 커다란 핑크색의 리본을 감고 있었다. 마치 무슨 선물처럼. 도대체 왜 손목에 리본 따위를 감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문에 손을 대고,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준이라고 해요." 하고 그녀는 약간 사투리가 섞인 영어로 말했다.
"네, 준." 하고 나는 말했다.
"안에 들어가도 돼요?" 하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잠깐 기다려." 하고 나는 당황하여 말했다.
"아가씨는 아마 방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요. 아가씨는 누구를 찾아 온 겁니까?"
"저어, 기다려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백 속의 메모를 꺼내어 읽었다.
"미스터... 을요." 나였다.
"나야, 그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잘못 찾아온 게 아니잖아요."
"잠깐 기다려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름은 확실히 맞아요. 하지만 난 어떻게 된 건지 통 이해할 수 없어. 아가씨는 누구요, 대체?"
"아무튼 좀 안에 들어가게 해주지 않겠어요? 여기에 서서 이야기를 하면 모양이 좋지 않아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안에 들어가 손 들엇, 꼼짝 마하고 위협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확실히 방의 입구에서 이러니 저러니 승강이를 하고 있는 동안에, 옆방의 유키가 깨어나 나오기라도 하면 일일이 번거로울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안에 들어오도록 했다. 될 대로 되라지.
준은 안에 들어오자, 내가 권하기도 전에 곧 소파에 편히 앉았다. 무엇을 마시겠는가고 나는 물었다. 당신과 같은 거면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진 토닉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대담하게 포개고 맛있는 듯이 진 토닉을 마셨다. 예쁜 다리였다.
"이봐요, 준, 아가씨는 왜 나를 찾아왔지?"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오라고 해서요." 하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익명의 신사가요. 그분이 돈을 치렀어요. 일본에서. 당신을 위해. 아시겠죠, 어떻게 된 건지?"
마키무라 히라쿠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게 그가 말하고 있던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손목에 핑크색의 리본을 감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는 내게 여자를 안겨주면 유키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으리라. 실리적이다. 실로 실리적이다.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유순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묘한 세상이다, 모두들 나에게 여자를 안겨주고...
"아침까지의 몫은 이미 다 받았어요. 그러니까 둘이서 실컷 즐겨요. 내 몸은 썩 좋아요."
준은 다리를 들어 핑크색의 하이힐 샌들을 벗고는, 바닥에 섹시하게 휙 던졌다.
"이봐요, 미안하지만 그건 할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왜요, 당신은 동성연애자예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 게 아니라, 그 돈을 치른 신사와 나 사이에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어. 그래서 너하고는 잘 수가 없어. 사리의 문제야."
"하지만 돈은 이미 지불돼 있고, 되돌려 받을 수는 없어요. 게다가 당신이 나하고 퍼크하든 말든, 그러한 걸 상대방은 알 수 없어요. 내가 국제 전화로 그 사람에게 보고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분명히 그와 세 번 퍼크했습니다.' 하고 말예요. 그러니까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예요, 그건. 사리고 뭐고 없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진 토닉을 마셨다.
"해요." 하고 준은 단순히 말했다.
"기분 좋아요, 그거."
나로선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설명하곤 하는 일이 점점 귀찮아졌다. 그런대로 평범한 하루가 겨우 끝나고 침대에 들어가, 불을 끄고 막 잠이 들려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여자가 갑자기 찾아와 그걸 하자고 한다. 지독한 세상이다.
"이봐요, 진 토닉을 한 잔씩 더 마시지 않겠어요?"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엌으로 가서 2인분의 진 토닉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있었다. 하드 로큰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이코." 하고 준은 일본어로 말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내게 기대면서 진 토닉을 훌쩍훌쩍 마셨다.
"어렵게 생각하면 안 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프로예요. 이 일에는 당신보다 내가 더 밝아요. 거기엔 사리고 뭐고 없어요. 그러니까 내게 모든 걸 맡겨요. 이건 그 일본인 신사와는 이미 관계가 없는 문제예요. 이 일은 그로부터 이미 떠나 버렸어요. 이미 나하고 당신 두 사람의 문제예요."
그리고 준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정말 모든 게 귀찮아졌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만일 내가 창부를 데리고 자면서 안심할 수 있다면, 그건 그런대로 상관없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렇게 승강이를 하고 있을 바엔 차라리 해버리는 게 낫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섹스인 걸. 발기하여 삽입하고, 사정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오케이, 하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야죠." 하고 준은 말했다.
그리고 진 토닉을 다 마시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난 오늘은 몹시 피곤해. 그러니까 지나친 일은 하나도 할 수 없어."
"맡겨줘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해드릴 테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돼요. 다만 처음에 두 가지 일만은 해주셔야겠어요."
"뭐지?"
"방의 불을 끄는 일과, 리본을 풀어주는 일."
나는 불을 끄고, 손목의 리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침실로 갔다. 불을 끄자, 창밖의 방송용 안테나 탑이 보였다. 탑의 꼭대기에선 붉은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하드 로큰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현실이다.
준은 간단히 원피스를 벗고, 이어 내 옷을 벗겼다. 메이만은 못할지라도, 그녀 역시 기교적인 창부이며, 그 기교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손가락이나 혀 따위를 사용하여 나를 적절하게 발기시키고, 포리너의 곡에 맞추어 온전하게 사정으로 이끌었다.
밤이 갓 시작되어, 달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어때요? 좋았죠?"
"좋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진 토닉을 한 잔씩 마셨다.
"준." 하고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넌 어쩌면 지난달엔 메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준은 즐거운 듯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재미있군요. 난 조크를 좋아해요. 다음 달엔 줄리라고 부르나요. 8월엔 오지."
농담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지난달에는 메이라는 아가씨를 데리고 잤었다고. 하지만 물론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녀는 또 프로페셔널하게 나를 발기시켰다. 두 번째. 나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기에 그냥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모든 걸 해 주었다. 솜씨 좋은 가솔린 스탠드 같았다. 차를 세우고 키를 건네주면, 급유로부터 세차나 공기압 체크, 오일 점검, 유리창 닦기, 재떨이 청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해준다. 이러한 걸 과연 섹스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어쨌든 모든 게 끝난 것은, 두 시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윽고 우리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여섯 시 가까이 되어 깨어났다. 라디오는 아침까지 켜진 채로 있었다. 밖은 이미 환하게 밝고, 일찍 일어난 서퍼가 이미 해안에 픽업트럭을 내다놓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서는 벌거벗은 준이 몸을 오그리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바닥에는 핑크색의 옷과 핑크색의 구두와 핑크색의 리본이 놓여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일어나요." 하고 나는 말했다.
"사람이 와요. 어린 소녀가 아침 식사를 하러 온다구. 미안하지만 네가 있으면 곤란해."
"오케이, 오케이." 하고 그녀는 말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백을 집어 들고 욕실로 가서 이를 닦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옷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나, 좋았죠?" 하고 그녀는 입술연지를 백에 집어넣고는 물림쇠를 잠갔다.
"그래, 다음번은 언제로 해요?"
"다음 번?"
"3회분을 지불받았어요. 그러니까 아직 두 번 더 남아 있어요. 언제가 좋아요? 아니면 기분이 바뀌도록 나 아닌 다른 아가씨로 하겠어요? 그래도 좋아요. 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테니까. 남자들은 여러 종류의 아가씨와 자고 싶어 하죠?"
"아냐, 물론 네가 좋아." 하고 나는 말했다.
달리 말할 방법도 없다. 3회분. 틀림없이 마키무라 히라쿠는 내 몸으로부터 정액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뽑아내려는 것이겠지.
"고마워요. 그럼 또 봐요, 바이바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유키가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러 올 때까지 컵들을 모두 깨끗이 씻어 치우고, 재떨이를 씻고, 시트가 구겨진 것을 펴놓고, 핑크색의 리본을 휴지통에 버렸다. 이만하면 됐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유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약간 이마를 찌푸렸다. 방안의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굉장히 눈치가 빠르다. 무엇인가를 추측하고 있다. 나는 모르는 체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커피를 만들고, 토스트를 굽고 과일을 깎았다. 그리고 식탁으로 날랐다. 유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힐끗힐끗 둘러보면서 차가운 우유를 마시며 빵을 먹고 있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통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북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방안에 진지하다 못해 냉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긴장된 아침 식사가 끝나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양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주 진지한 눈이었다.
"이봐요, 여기에 어젯밤 여자가 왔었죠?" 하고 유키는 말했다.
"잘 알아맞히는데." 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선뜻 말했다.
"누구예요, 대체. 이 근방에서 아가씨를 낚아왔어요?"
"설마.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난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은 걸. 상대방이 제 멋대로 찾아왔어."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잖아요."
"거짓말이 아냐. 나는 네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 정말로 상대방이 제멋대로 찾아온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모든 걸 분명히 설명했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내게 아가씨를 주선해 주었다는 것. 내 성욕을 충족시켜 두면 유키의 몸이 안전하리라고 마키무라 히라쿠가 생각했으리라는 것.
"이거야 원." 하고 말하며 유키는 깊이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왜 그 분은 언제나 그 따위 쓸모없는 생각만 할까. 왜 그처럼 엉뚱한 짓만 하고 있을까. 정말로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주제에, 그처럼 소용없는 일에는 생각이 잘 미쳐요, 엄마도 엄마지만 아빠도 그와는 다른 면에서 머리가 돈 사람 같아. 언제나 엉뚱한 짓을 하여 일을 망가뜨려버려요."
"확실히 네 말이 맞아. 정말 엉뚱해." 하고 나는 동의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는 왜 방 안에 들어오게 했어요? 방안에 들어오게 했죠, 그 여자를?"
"들어오게 했어. 사정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녀와 이야기 할 필요가 있었어."
"하지만 설마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겠죠?"
"그게 그처럼 단순하지도 않아."
"설마." 하고 말하기 시작하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적당한 표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볼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 사정을 설명하면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아무튼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양 손으로 볼을 감쌌다.
"믿어지지 않아." 하고 아주 차고 메마른 목소리로 유키는 말했다.
"아저씨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처음에는 물론 거절할 작정이었어."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것저것 생각하기가 귀찮아졌어.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네 부모는 확실히 일종의 강인함을 갖고 있어.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요. 그것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떠난 스타일이라는 걸 갖고 있어. 존경은 할 수 없어도 무시할 수는 없어. 말하자면 그렇게 해야 네 아버지의 마음이 놓인다면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나빠 보이지 않는 아가씨였어."
"하지만 그건 너무 심해요." 하고 유키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아저씨에게 여자를 안겨 준 거예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건 옳지 않은 일이에요. 그릇되고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랬다.
"확실히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에요." 하고 유키는 되풀이했다.
"그래." 하고 나는 인정했다.
아침 식사를 한 다음에, 우리는 보드를 가지고 해변으로 나갔다. 그리고 또 쉐라톤의 앞바다로 나가, 점심때까지 서핑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제 뭍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자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가서 무엇을 만들어 먹겠는가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밖에서 가볍게 먹자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는 포트 데라시의 잔디밭에 앉아 핫도그를 먹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유키는 콜라를 마셨다. 그녀는 아직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미 세 시간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에는 거절할 거야." 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마치 허공의 틈이라도 바라보듯이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30초쯤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햇볕에 깨끗이 그을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다음에?" 하고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음이란 무슨 뜻이에요?"
나는 마키무라 히라쿠가 2회분을 더 선불해 놓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레 밤이라고. 그녀는 주먹으로 잔디를 몇 번 두드렸다.
"믿어지지 않아요. 정말 바보짓들이야."
"특별히 감싸려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말하자면 내가 남자고, 네가 여자니까." 하고 나는 설명했다.
"알겠어?"
"정말로, 정말로 바보짓들이야." 하고 그녀는 울먹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 저녁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낮잠을 자고, 부근의 슈퍼마켓에서 사온 <플레이보이>를 읽으면서 베란다에서 일광욕을 했다. 네 시경부터 구름이 모습을 나타내며 서서히 하늘을 뒤덮다가, 다섯 시가 지나면서부터는 격렬하고 본격적인 스콜이 들이닥쳤다. 이 기세로 한 시간쯤 더 퍼부으면, 섬이 몽땅 남극까지 떠내려가 버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격렬한 비였다. 이토록 격렬히 퍼붓는 비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5미터 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해변의 야자나무 이파리들은 미친 듯이 요동을 치고, 아스팔트 도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강물처럼 되어 버렸다. 몇 명의 서퍼가 우산 대신 보드를 머리위에 받쳐 들고 창문 밑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이윽고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다. 알로하 타워 부근의 바다 위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나는 창문을 닫고, 부엌에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오늘 밤에는 저녁 식사로 무엇을 만들까 하고 생각했다. 한 번 더 천둥이 울렸을 때에 유키가 살며시 방으로 들어와, 부엌구석 쪽의 벽에 기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커피 컵을 집어 들고, 그녀를 데리고 거실로 가서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키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마 천둥치는 소리를 싫어하는가 보다. 왜 아가씨들은 모두 천둥치는 소리나 거미 따위를 싫어할까? 천둥은 약간 시끄러운 공중의 방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미도 특수한 것 말고는 해롭지 않은 작은 벌레다. 한 번 더 창백한 섬광이 번쩍였을 때. 유키는 내 오른팔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10여 분쯤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스콜과 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오른팔을 잡고, 나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천둥소리는 멀어져 가고, 비가 멎었다. 구름이 흩어지면서, 해질녘의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중에는 사방에 연못 같은 웅덩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야자나무 잎에 묻은 물방울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흰 물결을 일으키고, 비를 피하고 있던 관광객들도 다시 슬슬 해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고 돌려보냈어야 했어. 하지만 그때는 피로해 있었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어. 나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야. 불완전하고, 노상 실패하거든. 하지만 배워. 두 번 다시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그래도 똑같은 과오를 두 번씩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왜 그럴까? 간단해.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고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러한 때에는 역시 약간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돼. 그리고 똑 같은 과오를 세 번은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 조금씩 향상되어가.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향상은 향상이야."
유키는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는 내 팔로부터 손을 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밖의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한 말을 그녀가 듣고 있었느냐의 여부도 알 수 없었다. 해가 지고 해변에 나란히 늘어 선 가로등에 하얀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비가 멎은 다음의 해질녘은 공기가 신선하고 빛이 선명했다. 검푸른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방송국의 높은 안테나가 솟아 있고, 그 꼭대기의 붉은 불빛이 심장의 고동처럼 규칙적으로 천천히 명멸하고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리고 몇 개의 크래커를 먹으면서 나는 정말로 조금씩이나마 향상되어가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별로 자신은 없었다. 잘 생각해 보면 전혀 자신이 없었다. 열여섯 번쯤 계속해서 똑같은 과오를 저지를 일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세로서는 그녀에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거실로 돌아오자 유키는 아직도 똑같은 모습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오그리고 양 손으로 껴안는 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고집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문득 결혼 생활을 생각해 내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있을 때에는 이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몇 번이고 아내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러한 때에는 아내 역시 내가 말을 걸어도 몇 시간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토록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일까 하고 나는 곧잘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닌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한 때에는 참을성 있게 사과하고 설명하면서 그 상처가 아물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향상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마 향상되지는 않았었나보다. 그녀가 내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일은 한 번밖에 없었다. 단 한번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어울려 집을 나가 버렸다. 그때뿐이다. 결혼 생활 그건 아주 기묘한 것이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소용돌이와도 같은 거야, 딕 노스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옆에 앉자 잠시 후에 유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용서한 건 아니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우선 화해하는 것뿐이에요. 그건 정말로 그릇된 일이었고 나는 큰 쇼크를 받았어요. 알겠어요?"
"알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 식사를 했다. 나는 새우와 강낭콩을 사용하여 필라프를 만들고, 삶은 계란과 올리브와 토마토를 사용하여 샐러드를 만들었다. 나는 와인을 마시고 그녀도 와인을 약간 마셨다.
"너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아내가 생각나." 하고 나는 말했다.
"아저씨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다른 남자와 어울려 집을 나간 부인 말예요?" 하고 유키가 말했다.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30
하와이.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낙원 같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대로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나는 준이 찾아왔을 때 정중히 거절하였다. 감기가 들었는지 열이 있고 기침도 난다. 콜록콜록, 얼마 동안은 도저히 그런 것을 할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택시비라고 말하면서 또 1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안됐군요. 건강이 회복되면 이리로 전화를 줘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백 속의 샤프 펜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적었다. 바이, 하고 그녀는 말하고 허리를 흔들면서 돌아갔다.
나는 유키를 어머니에게 몇 차례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는 외팔이 시인 딕 노스와 둘이서 해변을 산책하거나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곤했다. 그는 헤엄을 썩 잘 쳤다. 유키와 어머니는 그 동안에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유키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특별히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렌터카로 그녀를 마카하까지 보내주고, 딕 노스와 잡담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서퍼를 바라보거나 맥주를 마시고 소변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그녀를 호놀룰루로 데리고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딕 노스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낭독하는 것을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시의 내용까지는 물론 알 수 없었지만, 꽤 능숙한 낭독이었다. 리듬이 아름답고 정감이 깃들어 있었다. 갓 현상하여 아직 젖어 있는 아메의 사진을 본 적도 있다. 하와이 사람들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보통의 포트레이트지만, 그녀가 찍으면 어느 얼굴이나 모두 생기가 돌며, 생명의 핵 같은 것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남국의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우아함이나 비천함, 섬뜩한 느낌을 주는 혹독함이나 삶의 기쁨 따위가 사진으로부터 직접 전달되어 왔다. 강한 힘이 느껴지면서도 조용한 사진이었다. 재능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도 다르고 당신과도 다르다."고 딕 노스는 말했다. 옳은 말이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내가 유키를 돌보아 주고 있는 것처럼, 딕 노스는 아메를 돌보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가 훨씬 더 본격적이었다. 그가 청소를 하고, 세탁을 하고, 요리를 만들고, 물품을 구입하고, 시를 낭독하고, 농담을 하고, 따라다니며 담뱃불을 꺼주고, 이를 닦았는가 하고 물어보고, 탠팍스를 보충하고, 나는 그가 물품을 구입할 때 한 번 동행한 적이 있다. 사진을 파일하며 타이프 타자기를 사용하여 정확한 그녀의 작품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는 이를 모두 외팔로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하고도 자신의 창작에 돌리기 위한 시간이 그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엾은 사나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를 동정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았다. 유키를 돌보아 주는 대가로, 아버지는 내게 비행기 요금과 호텔 값을 치러주고, 또 여자까지 안겨 주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엇비슷하다.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 날에는, 우리는 서핑 연습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별로 하는 일 없이 해변에서 뒹굴거나, 쇼핑을 하거나, 렌터카로 섬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고, 할레크라니나 로열 하와이안의 가든 바에서 피나 코라다를 마셨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휴식을 취하면서 손가락 끝까지 곱게 햇볕에 그을렸다. 유키는 힐튼의 부티크에서 열대의 정열적인 꽃무늬의 새로운 비키니를 샀는데, 이를 몸에 걸치면 하와이에서 태어나 성장한 소녀처럼 보였다.
서핑 기량도 상당히 향상되어, 나로선 도저히 포착할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파도를 능숙하게 탔다. 또한 스톤즈의 테이프를 몇 개 사가지고, 매일 되풀이해 듣고 있었다. 내가 음료수 따위를 사러 갈 때에 유키를 혼자 해변에 남겨두고 가면, 온갖 사내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유키는 영어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러한 사내들을 100퍼센트 무시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면, 그들은 모두 "실례했다." 고 말하며, 혹은 더 지독한 말을 하고 가버렸다. 그녀는 까무잡잡하고, 아름답고, 건강했다. 그리고 긴장을 풀고 쉬면서 매일을 즐기고 있었다.
"이봐요, 남자는 그토록 강하게 여자를 갖고 싶어지나요?" 하고 어느 날 해변에 누워 있을 때 갑자기 유키가 내게 물었다.
"그래. 그 강도에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원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남자라는 것은 여자를 갖고 싶어 하게 되어 있어. 섹스에 대해서는 대개 알고 있겠지?"
"대개 알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성욕이라는 게 있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여자하고 자고 싶어 하는 거지. 자연스러운 일이야. 종족 보존을 위해-."
"종족 보존 따위에 대해 묻고 있지 않아요. '보건' 시간의 강의 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요. 그 '성욕'에 대해 묻고 있어요. 그게 어떤 것인가를."
"이를테면 네가 새라고 하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일을, 굉장히 기분이 좋으므로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주 날을 수가 없어. 날씨나 풍향이나 계절에 따라 날을 수도 있고 날을 수 없을 때도 있거든. 하지만 날을 수 없는 날이 계속되면, 힘도 남아돌고 초조해져요. 자신이 부당하게 깎아내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날을 수 없을까 하고 화도 나고 말야. 이러한 느낌을 알 수 있겠어?"
"알 수 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럼 얘기는 간단해. 그게 성욕이야."
"전번에는 언제 하늘을 날았어요?" 지난번에 아빠가 안겨준 여자를 만나기 이전에는?"
"지난 달 말경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즐거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언제나 즐거워요?"
"반드시 그렇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불완전한 생물이 둘이 모여 하는 일이니까, 언제나 잘 될 수만은 없지. 실망하는 때도 있어. 기분 좋게 날고 있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치는 수도 있어."
"음."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새가 하늘을 날면서 한눈을 팔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치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는가 보다.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그렇게 설명해도 되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소녀에게 그릇된 얘기를 해준 게 아닐까? 하지만 괜찮겠지, 어차피 성장하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니까.
"하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점점 잘 되어갈 확률이 향상되지." 하고 나는 계속 설명했다.
"요령을 알게 돼. 그러나 대체로 이에 비례해서 성욕 자체는 서서히 감소되어 가지. 그러한 거야."
"비참해." 하고 유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하와이.
도대체 지금까지 며칠 동안이나 나는 이 섬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날짜의 관념이라는 게 머릿속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있었다. 어제 다음이 오늘이고, 오늘 다음이 내일이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가며 되풀이되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어 달력의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여기에 온지 이미 열흘이 되어 있었다.
4월도 점차 하순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내가 우선 휴가로 정한 1개월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어찌 된 셈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려져 있다. 완전히 풀려져 있다. 서핑과 피나 코라다로 보낸 나날. 그건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원래 키키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연줄을 따라, 흐름을 추적하여 왔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틈엔지 이 모양이 되어 버렸다. 기묘한 사람들이 잇따라 나타나, 사물의 흐름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 이렇게 야자나무 그늘에서 열대음료를 마시면서 카라파나를 듣고 있다.
어디서든 흐름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에가 죽었다. 피살되었다. 경찰이 왔다. 그렇지, 메이의 사건은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고혼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몹시 피로하여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모든 게 어중간한 채로 방치되어 있다. 그렇게 방치된 채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슬슬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떠날 수가 없었다. 이는 유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있어서도 오랜만에 긴장으로부터 해방된 나날이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살결을 햇볕에 태우고 헤엄을 치고, 맥주를 마시고, 스톤즈나 블루스 스프링스틴을 들으면서 섬 안을 드라이브하였다. 달빛어린 해변을 산책하고, 호텔의 바에서 술을 마셨다. 물론 그러한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턱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단순히 거기서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여유롭고, 유키도 마냥 여유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내가 스스로 "자, 이제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그것이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했다.
2주일이 지났다.
나는 유키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해질녘의 다운타운이었다. 도로의 교통이 정체되어 있었지만, 특별히 급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면서 길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르노 전문의 영화관이나 슬리프트 숍, 아오자이 옷감을 팔고 있는 베트남인의 양복점, 중국 식품점, 헌책방, 중고 레코드가게 따위가 쭉 이어져 있었다. 어느 가게 앞에서는 두 노인이 테이블과 의자를 내다놓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언제 나와 같은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이었다. 길모퉁이에는 여기저기 멍한 표정의 사나이들이 할 일 없이 서 있었다. 재미있는 거리다.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가게도 있다. 하지만 여자가 혼자 걸어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다운타운을 벗어나 항구로 다가가면, 무역 회사의 창고나 사무실 등이 많다. 거리의 모습도 휑뎅그렁하여 서먹서먹한 느낌을 준다. 회사 일을 끝내고 귀가를 서두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커피숍은 군데군데 글자가 떨어진 채로 네온을 켜고 있다.
<E.T>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유키가 말했다.
"좋아, 저녁 식사를 한 다음에 보러 가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E.T>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E.T 같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집게손가락 끝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건드렸다.
"안 돼, 그렇게 해보아도 거긴 치유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때였다. 그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의 상념에 일격을 가했다. 머릿속에서 쾅 소리를 내면서 무엇인가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순간에는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쪽의 카마로가 몇 번이고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다가, 옆을 통과할 때에 창문을 통해 내게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그렇다, 나는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지금 거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이봐요, 왜 그래요, 갑자기? 위험하잖아요." 하고 유키가 말했다.
아마 그렇게 말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았다.
키키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틀림없다, 나는 지금 거기서 키키를 목격한 것이다. 이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에서. 왜 이런 데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키키였다. 그녀는 나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내 차의 옆쪽을 손을 뻗치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그녀는 지나간 것이다.
"유키야, 창문을 모두 닫고 문을 잠가라. 밖에 나오면 안 돼. 누가 말을 걸든 열지 마라. 곧 돌아올 테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잠깐 기다려요. 싫어요, 혼자 이런데-."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한길을 달렸다. 도중에 사람들과 부딪쳤지만, 그러한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키키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붙잡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2블록이나 3블록쯤 달렸다. 달려가면서 나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생각해 내었다. 푸른색의 원피스와 하얀 숄더백이 보였다. 해질녘의 거리 속에서 하얀 숄더백이 그녀의 보조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운타운의 번화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로 쪽으로 나가자 갑자기 통행인들이 불어나, 나는 잘 달릴 수 없게 되었다. 체중이 어떻게든 조금씩 나는 키키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그녀는 그저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였다. 뒤를 돌아다보거나 한눈을 팔지도 않고, 버스를 타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곧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상하게도 거리는 별로 좁혀지지 않았다. 신호는 한 번도 그녀를 정지키시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신호는 계속 푸른색이었다. 나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차에 치일 뻔하면서 한 번은 붉은 신호가 커져 있는데도 한길을 급히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그녀와의 거리를 20미터 정도로 좁혀갔을 무렵에, 그녀는 갑자기 길을 왼쪽으로 꺾었다. 나도 물론 뒤따라 왼쪽으로 꺾었다. 인기척이 없는 좁은 길이었다. 별로 시원치 않은 낡은 사무실 빌딩이 양쪽에 늘어서고, 도로에는 더럽혀진 라이트밴이나 픽업트럭 따위가 주차해 있었다. 길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거기에 멈춰선 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봐, 어찌 된 거야, 넌 또 사라져 버렸나? 하지만 키키는 사라져 버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형 트럭에 가려져 일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보도 위를 똑같은 걸음걸이로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점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하얀 숄더백이 허리께에서 흔들이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키키!" 하고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도달한 듯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키키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우리 사이의 거리는 떨어져 있고, 해질녘이어서 가로등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길이었다. 그래도 그게 키키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틀림없다. 그리고 그녀는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미소까지 지어 보인 것이다.
하지만 키키는 멈춰 서지 않았다. 그녀는 힐끗 돌아다보았을 뿐이었다. 보조도 늦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계속 걸어가다가, 길가에 늘어선 사무실 건물 중의 한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20초쯤 늦게 그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은 이미 닫혀져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그 바늘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늘은 안타까우리만큼 천천히 돌아가다가, 8이라는 번호의 자리에 흔들리면서 뚝 멎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가 이윽고 생각을 바꾸어 가까이에 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도중에 양동이를 손에 들고 있는 빌딩의 관리인처럼 보이는 백발의 사모아 사람과 마주쳤다. 나는 하마터면 그를 밀쳐 쓰러뜨릴 뻔했다.
"이봐요, 어딜 가요?" 하고는 그는 내게 물었지만, "나중에." 하고 나는 말하고, 그대로 계단을 뛰어 놀라갔다. 먼지 냄새가 나고, 인기척이 없는 빌딩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내 구두소리만이 무척 크게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사람이 있을 듯한 기미가 통 보이지 않았다. 8층의 복도에 이르러, 나는 우선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따라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사무적인 7,8개의 방문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방문들에는 각기 번호와 사무실의 이름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나는 방문에 부착된 명찰을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내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무역 회사나 법률 사무소, 치과 의사의 치료실 따위이며, 어느 명패나 모두 낡아 빠지고 더럽혀져 있었다. 명패에 쓰인 이름마저 낡아빠지고 더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무실들은 모두 번창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시원치 않은 거리에 있는 시원치 않은 건물의, 시원치 않은 층에 늘어서 있는, 시원치 않은 사무실들로 여겨졌다. 나는 한 번 더 천천히 차례로 명패들의 이름을 살펴보았지만, 키키와 결부될 만한 명패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가만히 거기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빌딩은 폐허처럼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윽고 무슨 소리가 들렸다. 하이힐의 뒤축이 딱딱한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그 구두소리는 천장이 높고 인기척이 없는 복도에, 기기하게 느껴지리만큼 커다랗게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태고의 기억과도 같은 무겁고 메마른 음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음향은 나의 '지금의' 존재를 약간 뒤흔들어 놓았다. 갑자기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해서 바짝 말라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연유로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린 것이다.
구두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서, 그것이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를 나는 잠시 동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른쪽의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나는 신발소리를 죽이고, 빠른 걸음으로 그쪽으로 가 보았다. 구두소리는 제일 끝에 있는 방문의 안쪽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굉장히 멀리서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소리 나는 곳이 방문의 안쪽임은 분명했다. 방문에는 명패가 붙어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까 내가 방문들을 모두 살펴보았을 때에는, 확실히 여기에 명패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사무실이었는지 생각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거기에 어떤 명패가 붙어 있었다. 틀림없다. 명패가 없는 방문이 있다면, 절대로 기억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꿈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꿈일 턱이 없다. 모든 일이 분명히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하나하나 차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는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에 있다가 키키를 뒤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약간 뭔가 빗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은 든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나는 아무튼 그 방문을 노트해 보았다. 내가 노크하자, 구두소리가 멎었다. 마지막 울림소리가 공중에 흡수되어 버리자, 주위는 다시 본래의 완전한 침묵에 뒤덮였다. 나는 30초쯤 그대로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구두소리도 멎은 채로. 나는 손잡이를 잡고 마음껏 살며시 돌려보았다. 잠겨 있지는 않았다. 손잡이가 가볍게 돌아가고, 희미한 삐걱 소리를 내며 방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안은 어둡고 바닥 청소용 세제 냄새가 약간 풍겼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가구도 없고 조명기구도 없었다. 황혼 무렵의 희미한 빛이 방안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는 몇 장의 변색된 신문지가 떨어져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또 구두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네 발짝, 그리고 또 침묵.
소리는 오른편 위쪽으로부터 들려온 듯했다. 나는 방의 제일 안쪽으로 가서, 창가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계단이 나타났다. 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난간을 꼭 잡고, 천천히 발밑을 확인하면서 캄캄한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급경사진 계단이었다. 아마 여느 때는 사용하지 않는 비상용 계단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계단의 위쪽에서 소리가 들린 것만은 분명했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거기에 또 문이 있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보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데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손으로 더듬어 손잡이를 찾아내고, 그것을 돌려 문을 열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엇이 있는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당히 넓은 공간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옥상 주택이거나 지붕 밑의 창고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상상하였다. 창문은 하나도 없거나 혹은 있어도 닫혀져 있는 것 같았다. 높은 천장의 한가운데에, 몇 개의 작은 채광용 창문 같은 게 보였다. 그러나 달이 아직 높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지는 않았다. 어슴푸레한 가로등의 불빛이 굴절에 굴절을 거듭한 끝에 아주 약간만이 그 들창으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시력에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이처럼 기묘한 어둠 속에 얼굴을 내밀 듯이 하면서 "키키!" 하고 한번 불러보았다. 한참 기다렸지만, 반응은 없었다. 어떡하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둡다.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나는 그대로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눈이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새로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얼마 동안이나 거기에 가만히 서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왠지 알 수 없지만 방에 스며드는 빛이 희미하나마 약간 더 밝아졌다. 달이 떠오른 것일까? 혹은 거리의 등불이 밝게 켜지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방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방의 중앙을 향해 발밑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나가 보았다. 내 운동화 바닥이 퍼석퍼석하고 무거운 소리를 냈다. 내가 아까 들었던 구두소리와 같은 깊이와 넓이가 혼탁된 기묘하게 비현실적인 음향이었다. "키키!" 하고 나는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대답은 없다. 처음의 직감대로, 이는 굉장히 넓은 방이었다. 텅 빈 채 공기가 정지되어 있었다. 한가운데에 서서 빙 둘러보니, 구석 쪽에 가구 같아 보이는 것들이 더러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회색의 윤곽으로 미루어 보아 소파나 의자나 테이블이나 체스트 따위인 것 같았다. 이는 아무튼 기묘한 광경이었다. 가구가 전혀 가구 같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는 점이었다. 방이 너무 넓은 데 비해 가구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은 것이다. 원심적으로 확대된 비현실적 생활공간.
나는 어딘가에 키키의 하얀 숄더백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색의 원피스는 아마 이 방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 숄더백은 보이지 않았다. 소파나 의자 위에는 하얀 옷감 같은 것이 구겨진 채로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마 삼베로 만들어진 커버 따위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다가가 보니, 그건 옷감 따위가 아니었다. 뼈였다. 소파 위에는 두 개의 인골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완전히 제대로 갖추어진 인골이었다. 무엇 하나 결여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몸집이 작았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의 자세대로 거기에 걸터앉아 있었다. 큰 쪽의 인골은 한쪽 팔을 소파의 등받이에 걸치고 있었다. 작은 쪽은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에 죽어 버린 채, 그대로 육체를 잃고 뼈만 남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희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모든 게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머무른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 형사가 말한 것처럼, 뼈는 깨끗하고 조용한 것이다. 그들은 아주 완전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무서울 건 하나도 없다.
나는 방안을 한 바퀴 돌아다녀 보았다. 여러 의자 위에는 각기 인골이 앉아 있었다. 뼈는 모두 여섯 구였다.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완전한 인골이며, 죽은 지 오랜 시간이 경과해 있었다. 모두 죽은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런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인골은 텔레비전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물론 꺼진 채로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크기로 미루어 보아 아마 남자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 브라운관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곧바로 그리고 이어져 있었다. 허무의 영상에 못 박혀진 허무의 시선. 테이블 앞에 앉은 채로 죽어버린 자도 있었다. 테이블에는 아직 식기가 놓여 진 채로 있었다. 식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이전에 무엇이었든 간에, 하얀 먼지로 변해 있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죽어 있는 자도 있었다. 그 인골만이 불완전했다. 왼팔이 어깨 부분부터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건 대체 무엇인가? 너는 대체 내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고 있는가.
또 구두소리가 울렸다. 구두소리는 다른 공간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아닌 방향으로부터, 어느 곳도 아닌 장소로부터 그것이 들려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이 방이 막다른 곳이었다. 이 방에서는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한참 계속되다가 사라졌다. 이에 이어지는 침묵은 숨이 막히리 만큼 농밀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키키는 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들어온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니, 푸른 어둠 속에 여섯 구의 뼈가 어렴풋이 하얗게 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이제 곧 쓰윽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할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곳을 나가 버리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곳을 나가 버리면, 이내 텔레비전 스위치가 켜지고, 쟁반 속에는 따뜻한 요리가 되돌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방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와, 휑뎅그렁한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사무실은 아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바닥의 똑같은 장소에 헌 신문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이 하얗게 빛나고, 보도 옆에 라이트밴과 픽업트럭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차해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먼지투성이의 창틀 위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명함만한 크기의 종이쪽지인데, 거기에는 전화번호로 여겨지는 7개의 숫자가 볼펜으로 씌어져 있었다. 종이나 잉크도 변색하지 않은 정도로 새것이었다. 번호는 통 기억에 없다. 뒤집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았다. 그냥 백지다.
나는 그 종이를 포켓에 집어넣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복도에 서서 또 한참 동안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사멸되어 있었다. 선이 끊어져 버린 전화기와도 같은 완전한 침묵이었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침묵이었다. 나는 단념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홀로 나와, 아까 만났던 관리인을 찾아보았다. 거기가 대체 무슨 사무실인가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잠시 거기서 기다려 보았으나,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점점 유키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대체 나는 얼마 동안이나 그녀를 방치해 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20분쯤일까? 혹은 한 시간쯤일까? 어스름이 이미 밤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별로 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에 그녀를 방치해두고 왔던 것이다. 아무튼 돌아가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그 거리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급히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유키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좌석에 비스듬히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내가 노크를 하자, 고개를 들어 창문의 잠금 장치를 젖혔다.
"미안해." 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왔었어요. 뭐라고 호통을 치거나 유리창을 두드리고, 차를 흔들곤 했어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라디오의 스위치를 껐다.
"굉장히 무서웠어요."
"미안해."
그리고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일순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가 갑자기 그 색깔을 잃고, 조용한 수면에 나뭇잎이 떨어졌을 때처럼 표정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형성하면서 천천히 약간 움직였다.
"아니, 아저씨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어요?"
"알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는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장소로부터 들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발걸음 소리의 음향과 마찬가지로 깊이와 넓이가 혼탁 되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천천히 땀을 닦았다. 내 얼굴 위의 땀이, 차갑고 단단한 막처럼 되어 있었다.
"잘 알 수 없어.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며시 손을 뻗쳐 내 볼에 가져왔다. 그 손가락 끝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내 볼에 손가락을 댄 채, 냄새를 맡을 때처럼 숨소리를 내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작은 코가 약간 부풀었다가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1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보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일. 설명하려 해도, 누구에게도 잘 설명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요." 그녀는 몸을 기대듯이 하면서 내 볼에 살며시 볼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10초나 15초쯤 그대로의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가엾어라." 하고 그녀는 말했다.
"왜 그럴까?" 하고 나는 말하며 웃었다.
별로 웃고 싶지는 않았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사로운 보통 인간이야. 어느 편이냐 하면, 실제적인 인간이야. 그런데 왜 언제나 이토록 기묘한 일에 끌려들어 버리는 것일까?"
"틀림없어."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어요."
"난 잘 알 수 없어."
"무력감."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휘둘려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와 같은 기분."
"그럴지도 몰라."
"그러한 때에는 어른은 술을 마셔요."
"정론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할레크라니의 바로 갔다. 풀장 쪽의 바가 아닌 실내 쪽의 바였다. 나는 마티니를 마시고, 유키는 레몬 소다를 마셨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머리숱 적은 중년의 피아니스트가, 그랜드 피아노를 향해 묵묵히 스탠다드 넘버를 치고 있었다. 손님은 아직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그는 <스타 더스트>를 치고, <밧 낫 포미>를 치고, <버몬트의 달>을 쳤다.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별로 재미있는 연주는 아니었다. 그는 그 무대의 마지막에 쇼팽의 <프렐류드>를 쳤다. 이는 꽤 멋진 연주였다. 유키가 박수를 치자, 그는 2밀리미터쯤 미소 짓고 이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 바에서 마티니를 석 잔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방안의 광경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이는 사실적인 꿈처럼 느껴졌다. 흠뻑 땀에 젖어 깨어나서, 아아 역시 꿈이었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꿈은 아니다. 나도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고 있고, 유키도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본' 것을. 풍화한 여섯 구의 백골.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왼팔이 없는 백골은 딕 노스의 것일까? 그러면 나머지 다섯 구는 누구의 것인가?
키키는 내게 대체 무엇을 전달하려 하고 있는가?
나는 문득 생각이 나, 아까 창틀 위에서 발견한 종이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전화박스로 가서 그 번호를 돌려 보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신호소리가 허무의 심연에 추를 드리우듯이 언제까지나 울리고 있었다. 나는 바의 의자로 돌아와 한숨을 쉬었다.
"비행기의 좌석이 예약이 되면, 나는 내일 일본으로 돌아가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어. 즐거운 휴가였지만,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일본에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말야."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꺼내기 전부터 그녀는 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좋아요, 내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아저씨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면 돼요."
"넌 어떡하겠어? 여기에 남겠어? 아니면 나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겠어?"
유키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얼마 동안 엄마가 있는 데서 묵도록 하겠어요. 아직 별로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묵게 해달라고 하면 거절하진 않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유리잔 바닥에 남아 있던 마티니를 홀짝 다 들이켰다.
"그럼 내일 마카하까지 자동차로 바래다주겠어. 그리고 나도 마지막으로 너의 어머니를 한 번 더 만나두는 편이 나을 것 같고."
그리고 우리는 알로하 타뤄 부근에 있는 씨푸드 레스토랑으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그녀는 러브스터를 먹고, 나는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 프라이드 오이스터를 먹었다. 그녀와 나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아주 멍한 상태였다. 굴을 먹으면서 그대로 잠이 들어, 백골이 되어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키는 이따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아저씨는 이제 돌아가 잠을 자는 게 좋겠어요.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하고 내게 말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고, 잠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양키즈와 오리온즈의 시합이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시합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쩐지 텔레비전을 켜두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 현실적인 것과 이어져 있다는 표지로. 나는 졸음이 올 때까지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종이쪽지에 씌어져 있던 전화번호를 돌려 보았다.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열다섯 번이나 벨이 울리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또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을 응시했다. 윈필드가 배터박스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머리에 걸려 있음을 알아챘다. 무엇인가, 있다.
나는 텔레비전을 응시하면서 잠시 그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과 무엇이 유사하다. 무엇과 무엇이 이어져 있다. 설마,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나는 그 종이쪽지를 집어 들고 방문 쪽으로 가서, 준이 거기에 적어둔 전화번호와 이 종이쪽지의 전화번호를 대조해 보았다. 똑같았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나만이 그 이음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날 아침에 나는 오후의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가방을 챙기고, 자동차를 몰아 유키를 마카하에 있는 어머니의 작은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아침에 아메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용무가 생겨서 오늘 일본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유키를 재울만한 장소는 있으므로, 이리로 데려다 줘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드물게 아침부터 흐려져 있었다. 언데 또 스콜이 쏟아질지 알 수 없는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해변에 연한 고속도로를 120킬로로 달렸다.
"패크맨 같아요." 하고 유키가 말했다.
"뭐 같애?" 나는 되물었다.
"아저씨의 심장 속에 패크맨이 있는 것 같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패크맨이 아저씨의 심장을 먹고 있어요. 피피피픽 하고..."
"비유를 잘 이해할 수 없어."
"무엇인가가 침식해 들어가고 있어요."
나는 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참 동안 운전을 계속하였다.
"이따금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아주 진한 그림자야. 죽음이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팔을 쑥 뻗쳐, 당장이라도 내 발목을 잡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거야. 하지만 무섭지는 않아. 왜냐 하면, 그것은 '언제나' 나의 죽음이 아니지 때문이야. 그 손이 잡는 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발목이야. 하지만 누군가가 죽어갈 때마다 나의 존재가 조금씩 빗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그럴까?"
유키는 잠자코 어깨를 움츠렸다.
"왠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언제나 죽음이라는 게 내 옆에 있어. 그리고 기회가 오면, 그것이 어느 틈사이로부터 문득 모습을 나타내거든."
"그게 당신의 열쇠가 아닐까요? 당신은 죽음을 통해 세계와 이어져 있는 거예요, 틀림없이."
나는 또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너는 나를 무척 낙담시키는구나." 하고 나는 말했다.
딕 노스는 내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정말 섭섭해 하였다. 우리 사이에는 별로 공통점은 없었지만, 그런 만큼 일종의 홀가분함은 있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시적인 현실성에 대한 존경심 같은 걸 품고 있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악수할 때 문득 그 백골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정말로 딕 노스였을까?
"이봐요, 당신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하고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미소 지으며 약간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곧잘 생각했어요. 거기에는 죽음의 방식이 정말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까다로운 일을 생각할 틈이 없어요. 전쟁할 때보다 평화로울 때가 훨씬 더 분주해요." 그는 웃었다.
"하지만 왜 그런 걸 묻지요?"
별로 이유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저 잠깐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라고.
"생각해 두겠어요. 이다음에 당신을 만날 때까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아메가 나에게 함께 산책을 나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나란히 조깅 코스를 천천히 걸어갔다.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하고 아메가 말했다.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요. 난 그런 걸 아무래도 잘 표현할 수 없지만. 하지만, 응, 그래요. 당신이 있어준 덕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잘 되어간 듯한 느낌이 들어요. 당신이 중간에 있어 주면, 왠지 일들이 원활히 풀려가요. 유키하고도 둘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조금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 듯하고, 이렇게 묵으러 와주게도 되었고요."
"다행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다행이군요.' 라는 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그밖에는 무엇 하나 긍정적인 언어 표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고, 또 침묵이 부적당하다는 위기적 상황일 경우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물론 아메는 그러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과 만난 이후로 그 애도 정신적으로 꽤 안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초조한 빛도 이전보다는 줄어들었고. 분명히 당신과 그 애는 성격이 맞는가 봐요. 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당신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생각해요?"
난 잘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학교에 다니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본인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지 않으면 안 보내도 되지 않느냐고 나는 말했다.
"아주 다루기 어려운 아이고 상처입기 쉬운 아이므로, 무리하게 억지로 무슨 일을 시키려 해도 소용없으리라고 여겨져요. 그보다는 온전한 가정교사를 두고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을 가르쳐 주는 편이 낫습니다. 주입식의 수험공부나 쓸모없는 클럽활동, 무의미한 경쟁이나 집단의 억압, 위선적인 규칙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애의 성격에는 맞지 않아요. 학교 따위에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되는 거예요. 혼자서 해야만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보다는 그 애만이 지니고 있는 재능을 발견하여 실컷 뻗어나가게 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 애에게는 뭔가 좋은 방향으로 잘 뻗어 나갈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혹은 그러다가 스스로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물론 보내면 됩니다. 아무튼 그건 그 애가 스스로 결정토록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아메는 잠시 잠자코 생각하고 있다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신이 말하는 대로일지도 몰라요. 나도 전혀 단체적인 인간이 아니고, 변변히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그걸 잘 이해할 수 있으면, 별로 생각해 볼 필요가 없잖아요. 대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별로 무슨 문제 따위는 없어요. 다만 내가 그 애에 대해 어머니로서의 확고한 자신을 가질 수 없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깨끗이 단념할 수 없었어요. 상대가 뭐라고 말하든, 학교 따위에는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예요. 자신이 없으니까 무기력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역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말예요."
사회적으로,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결론이냐의 여부는 알 수 없어요. 아무도 앞일은 알 수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잘 되어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 애에 대해 어머니로서든 친구로서든 간에 확실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생활환경에서 근실하게 나타내줄 수 있다면,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의 같은 것을 표시해 줄 수 있다면, 눈치가 빠른 아이니까, 그 다음에는 스스로 어떻게든 잘 해나갈 것입니다."
그녀는 짧은 반바지의 포켓에 손을 집어넣은 채 한참 동안 잠자코 걸어갔다.
"당신은 그 애의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군요. 어째서일까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물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유키를 돌보아준데 대한 어떤 보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답은 마키무라 히라쿠 씨로부터 이미 충분히 받았으므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나는 말했다. 지금도 과분할 정도라고.
"하지만 보답해 두고 싶어요. 그이는 그이고 나는 나예요. 나는 나로서 당신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지금 해두지 않으면 나는 금방 잊어버리니까."
"그러한 건 잊어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길가의 벤치에 걸터앉아, 셔츠의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웠다. 푸른 색깔의 샐럼 담배 갑은 땀에 젖어 납작해져 있었다. 언제나 볼 수 있는 새들이 언제나처럼 복잡한 음계로 울고 있었다.
아메는 그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긴 실제로 연기를 빨아들인 건 두세 모금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어 잔디밭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는 내게 시간의 사해 같은 것을 상기시켰다. 그녀의 손 안에서 시간이 잇따라 죽어가며 불태워져 하얀 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나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아래쪽 길 위를 덜거덕거리며 달려가는 카트 위에 앉아 있는 정원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마카하에 도착할 무렵부터 날씨가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딘가 멀리서 희미한 천둥소리가 한 번 들려왔을 뿐이었다. 압도적인 힘에 밀려나는 것처럼 두꺼운 회색의 구름이 잇따라 갈라지고, 다시 언제나처럼 왕성한 빛과 열기가 지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반소매인 당가리 셔츠를 입고, 일을 하고 있을 때에 그녀는 대개 이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슴께의 포켓에는 볼펜과 펠트펜, 라이터, 담배 따위가 들어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은 채 강한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부심이나 더위도 특별히 마음에 걸리지 않는 듯했다. 아마 더우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 증거로, 목덜미에 땀이 흘러내리고, 셔츠는 땀에 젖어 여기 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더위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정신을 집중시킨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확산된 때문인지 나로선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러한 상태로 10분이 지났다. 순간적인 시공간 이동과도 같은, 실체가 없는 10분간이었다. 그녀는 시간의 경과라는 현상에 통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들 속에는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지위가 매우 낮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비행기를 예약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가 보겠어요." 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돌려주고 요금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되도록 이면 조금 일찍 도착하고 싶어요."
그녀는 한 번 더 초점을 다시 맞추려는 듯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는 이따금 유키가 보여 주는 표정과 아주 흡사했다. 현실과 타협해야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 모녀 사이에는 확실히 공통된 기질이나 성향이 있다고 나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아아, 그렇군요, 시간이 없군요. 미안해요. 알아채지 못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번씩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고."
우리는 벤치에서 일어나, 왔던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출발할 때, 세 사람은 밖에 나와 배웅해 주었다. 나는 유키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이것저것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딕 노스가 곁에 있으니, 그점은 안심해도 되겠지.
백미러에 나란히 비치는 세 사람의 모습은 아주 기묘했다. 딕 노스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흔들고, 아메는 팔짱을 낀 채 멍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고, 유키는 옆쪽을 향해 샌들 끝으로 돌을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불완전한 우주의 가장자리에 남겨진 어중이떠중이의 일가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나 자신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커브에서 왼쪽으로 핸들을 꺾자, 그들의 모습은 이내 미러로부터 휙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혼자 있게 되는 것은 좋은 기분이었다. 물론 유키와 둘이서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와는 관계없이, 혼자 있게 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누구와 상의할 필요도 없고, 실패해도 누구에게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 있으면 혼자 농담을 하고 혼자 킥킥거리며 웃고 있으면 되었다. 아무도 "그러한 농담은 시시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지루하면 재떨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되었다. 내가 가만히 재떨이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도 "왜 재떨이 따위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고 묻지 않았다. 좋든 싫든 나는 혼자 보내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혼자 있게 되자, 내 주위는 빛의 색깔이나 바람 냄새마저도 약간, 그러나 확실히 변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 몸 안의 공간이 다소간 넓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재즈 FM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 콜만 호킨즈나 리 모건 따위를 들으면서 공항까지 유유히 운전하였다.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구름은, 억지로 찢겨진 것처럼 흐트러져, 지금은 구석 쪽에 약간씩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역풍이 야자나무 잎들을 흔들면서, 그러한 구름 조각들을 천천히 서쪽으로 흘려보내었다. 747이 은빛의 쐐기처럼 격렬한 각도로 하늘에 빠져 들어 가는 게 보였다.
혼자 있게 되자,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머릿속에서 급속하게 중력이 변화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사고는 그러한 중력의 변화에 잘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도 멋있는 일이었다. 좋지 않은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는 하와이다, 제기랄, 무엇 때문에 생각에 잠겨야 한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비우고 운전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스타피>나 <사이드 와인더>에 맞추어 휘파람과 외풍의 중간쯤 되는 음색의 휘파람을 불었다. 시속 160킬로의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자, 주위의 바람이 요란하게 윙윙거렸다. 언덕길의 각도가 바뀌자, 태평양이 선명한 남빛으로 물든 채 시계에 가득 퍼졌다. 이제,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로써 휴가는 끝났다. 아무튼 끝나게끔 되어서 끝난 것이다.
공항 부근에 있는 렌터카 사무실에 차를 돌려주고, 카운터에서 탑승수속을 마친 다음에,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공항의 전화박스에서 그 수수께끼의 전화번호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신호소리가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박스 안에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념하고, 퍼스트 클라스의 대합실로 가서 진 토닉을 마셨다.
도쿄,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도쿄를 잘 생각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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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의 아파트로 돌아와, 집을 비운 동안에 배달된 우편물들을 대충 살펴보고, 녹음된 전화를 플레이백 해보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자질구레한 용건들뿐이었다. 다음 달치 원고에 대한 문의나, 내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데 대한 불평, 새로운 주문 따위였다. 하지만 번거로워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일일이 변명을 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어 버릴 듯했고 그럴 바엔 차라리 변명할 것 없이 재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 버리는 편이 손쉽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러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 밖의 일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일체 무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다소의 도리는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고맙게도 현재는 돈 걱정은 없고, 나중의 일은 그런대로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대체로 나는 지금까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상대가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일해 온 것이다. 조금쯤은 내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대로 살아가자, 내게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다.
그리고 나는 마키무라 히라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프라이데이가 나와, 곧 마키무라 히라쿠에게 연결해 주었다. 나는 대체적인 경과를 그에게 설명하였다. 유키는 하와이에서 상당히 여유롭게 지내왔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좋아요."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에게 정말 감사하네. 내일이라도 아메에게 전화를 하겠어요. 그런데 돈은 충분했나?"
"충분해요. 남았어요."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해요. 신경 쓰지 말아요."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여자 얘깁니다."
"아, 그것 말이군." 하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건 대체 어떤 조직입니까?"
"콜걸의 조직이야. 그런 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잖은가. 자네도 그 여자와 하룻밤 동안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도쿄에서 호놀룰루의 여자를 불러 줄 수 있어요? 그 구조를 알고 싶은 거예요. 그냥 호기심으로."
마키무라 히라쿠는 잠깐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내 호기심의 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말하자면 국제적 속달 우편 같은 거지. 도쿄의 조직에 전화를 걸어 호놀룰루의 어느 곳에 어느 날 몇 시경에 여자를 보내 달라고 부탁해요. 그러면 그 도쿄의 조직은 계약이 되어 있는 호놀룰루의 조직에 연락해서 그 시간에 여자를 보내 주거든. 나는 도쿄에서 돈을 치르지. 도쿄는 커미션을 제하고 나머지 돈을 여자에게 건네줘요. 편리하잖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다구."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온 세계의 어디서나 좋은 여자를 데리고 잘 수 있어. 도쿄에서 예약할 수도 있다구. 그쪽에 가서 힘들여 찾을 필요도 없거든, 안전해요. 도중에 정부가 나타는 일도 없어. 게다가 경비로 처리돼."
"하지만 그 조직의 전화번호는 가르쳐줄 수 없겠죠?"
"그건 안 돼요. 절대 비밀이야. 회원에게만 중개해 주는데, 회원이 되려면 굉장히 엄격한 자격 심사를 받아야 애요. 돈과 지위와 신용이 필요해요. 자네에게는 무리한 얘기야. 단념해. 내가 이 시스템에 관한 것을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만 해도, 이미 나는 외부의 사람에게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규약을 깨뜨리고 있는 셈이야. 내가 이를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건 단지 순수한 호의 때문일세."
나는 그 순수한 호의에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하지만 좋은 여자였겠지?"
"그래요, 확실히."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았어. 좋은 여자를 보내도록 말해 두었거든." 하고 마키무라 히라쿠는 말했다.
"무슨 이름이었나?"
"준." 하고 나는 말했다.
"6월이라는 준."
"6월이라는 준." 하고 그는 되풀이했다.
"백인이었나?"
"백?"
"백인."
"아뇨, 동남 아시아계예요."
"이 다음에 호놀룰루에 갈 일이 있으면 시험해 봐야겠군." 하고 그는 말했다.
그밖에 특별히 할 얘기는 없었으므로, 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나는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의 전화는 언제나처럼 '녹음 전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일본에 돌아왔으니 전화를 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해가 저물어, 나는 스바루를 몰고 아오야마 가로 물건을 사러 갔다. 그리고 또 기노쿠니야에서 잘 재배된 야채를 샀다. 어쩌면 나가노의 산 속 부근에 기노쿠니야 출하 전용의 야채밭이 있을지도 모른다. 넓은 밭의 주위에는 아마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을 것이다. '대탈주'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철조망이다. 기관총이 딸린 감시탑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추나 샐러리에 대한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비야채적인 훈련이.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야채를 사고, 고기와 생선과 두부와 김치를 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혼다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던킨 도너츠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도서관에 가서 보름치의 신문을 살펴보았다. 물론 메이의 사건에 대한 수사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아사히와 마이니치, 요미우리 등의 3개지를 꼼꼼히 읽어 보았지만, 그녀의 사건은 단 한 줄도 보도되어 있지 않았다. 선거 결과와 레프첸코의 발언과 중학생의 비행 문제가 크게 다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비치 보이즈가 음악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화이트 하우스에서의 콘서트가 취소되었다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그릇된 일이다. 비치 보이즈가 음악적으로 온당치 않아 화이트 하우스에서 몰려난다면, 믹 재거는 화형을 세 번 당한대도 이상한 일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신문에는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한 여자가 스타킹에 목이 졸려 살해된 사건에 대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이어 묵은 호의 잡지를 죽 읽어 보았다. 그 중의 하나에 메이의 피살에 대한 한 페이지짜리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아카사카의 Q호텔 미녀 전나 교살 사건' 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지독한 타이틀이다. 사진 대신, 전문 화가가 사체를 보고 그린 듯한 얼굴 모습이 나와 있었다. 사체의 사진을 잡지에 실을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가만히 자세히 보면 그 그려진 여자는 메이를 닮았지만, 이는 내가 처음부터 그게 메이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그 그림을 보았다면 아마 그게 메이인 줄 알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확실히 얼굴의 세밀한 부분은 비슷하게 잘 그려져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이 유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그녀의 표정의 근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던 것을 전달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죽은 메이인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희망하고, 환상을 품고, 사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아하고 숙련되고 화려하고 멋진 관능적 생활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침에 깨끗이 "좋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 속의 메이는 실제보다 훨씬 궁상맞고 더러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메이가 죽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었다. 아주 완전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미 되돌아오지는 않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암흑의 허무 속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가슴 속에 딱딱하고 메마른 슬픔이 이는 것을 느꼈다. 기사도 그 그림과 마찬가지로 궁상맞고 더러운 문장으로 씌어져 있었다. 아카사카의 일류 호텔인 Q에서 20대 전반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가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죽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여자는 나체이며, 신원을 나타낼 만한 것은 무엇 하나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프런트에 알린 이름은 가명이며... 운운하고 쓰인 기사의 내용은 경찰이 내게 가르쳐준 것과 대체로 동일했다. 다만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일도 약간은 씌어져 있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매춘 조직에 관련지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기사의 말미에 씌어져 있었다. 나는 묵은 잡지들을 보관소에 되돌려 주고, 로비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왜 그들은 매춘 쪽에 수사를 좁히기로 한 것일까? 무슨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경찰에 전화를 걸어서 어부나 문학을 불러내어, 그런데 그 일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을 수도 없다. 나는 도서관을 나와, 부근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고는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하였다.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봄의 공기는 막연하게 무거운 느낌을 주고, 또 피부를 근질근질하게 만들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메이지 신궁까지 걸어가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매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국제 속달 우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쿄에서 주문을 하고 호놀룰루에서 여자를 데리고 잔다. 조직적이다. 솜씨가 좋으며, 복잡 미묘하게 되어 있다. 더러워 보이지 않는다. 매우 사무적이다. 아무리 의심스러운 것이라도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단순한 선악의 척도로는 잴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거기에 그것의 독자적이며 독립된 환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환상이 생겨나면, 이는 순수한 상품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고도 자본주의는 모든 틈새로부터 상품을 발굴한다. '환상' 이것이 키워드다. 매춘이든, 인신매매든, 계층간의 차별이든, 개인 공격이든, 도착적 성욕이든, 무엇이든 간에 예쁘게 포장하여 예쁜 이름을 붙이면 훌륭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세이부 백화점에서 카탈로그를 보고 콜걸을 주문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멍한 봄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자와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되도록 이면 삿보로의 그 유미요시와 자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자신이 그녀의 아파트의 방문 틈새에 신발을 끼워 넣어 그 음울한 형사처럼 닫히지 않게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였다. "너는 나하고 자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해야 해." 그리고 나는 그녀와 잘 것이다. 나는 우아하게 선물의 리본을 푸는 것처럼 그녀의 옷을 벗긴다. 코트를 벗기고, 안경을 벗기고, 스웨터를 벗긴다. 옷을 벗기자, 그는 메이가 되었다.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내 몸 멋있죠?"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날이 밝았다. 그리고 옆에는 키키가 있었다. 고혼다의 손가락이 키키의 등을 우아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유키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키키가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고혼다가 아니라 나였다. 손가락은 고혼다의 것이었다. 하지만 키키와 성교를 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믿어지지 않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왜 그래요?" 하고 키키가 되풀이해 말했다.
백일몽.
와일드하고 혼잡하고 무의미한 백일몽.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자고 싶은 상대는 유미요시야.' 하지만 소용없었다. 혼란되어 있었다. 연결이 뒤얽혀져 있는 것이다. 우선 그 뒤얽혀진 것을 어떻게든 해소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
나는 메이지 신궁을 나와, 하라주쿠의 뒷골목에 있는, 맛있는 커피를 끓여주는 찻집에서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유유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때가 가까워질 무렵에 고혼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은 별로 시간이 없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오늘 밤에 자네와 만날 수 있겠지? 여덟 시나 아홉 시에, 그 무렵에."
"만날 수 있어. 한가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자구. 맞으러 가겠어."
나는 가방을 정리하여 여행 중에 받은 영수증을 한데 모으고, 마키무라 히라쿠에게 청구할 것과 내가 스스로 지불할 두 종류로 나누었다. 식비의 절반과 렌터카 요금은 그가 치르도록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유키의 몫으로 구입한 물품 서프 보드, 라디오 카세트, 수영복 따위 값도. 나는 메모에 그 명세를 적고 봉투에 넣은 다음, 쓰고 남은 여행자 수표를 은행에서 현금화하여 그것과 함께 이내 보낼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다. 나는 그러한 사무적 처리를 아주 재빠르고 정확하게 하고 있다. 특별히 사무적인 작업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돈과 관련하여 번거로워지는 걸 싫어할 뿐이다.
정산을 끝내고는, 데친 시금치와 뱅어포를 무쳐서 살짝 식초를 치고 이를 안주 삼아 기린표 흑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사토오 하루오의 단편소설을 오랜만에 천천히 다시 읽어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봄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해질녘의 푸른빛이 투명한 브러시로 거듭 칠해져 가는 것처럼 점차 진해지면서, 밤의 어둠으로 변해갔다. 책을 읽는 게 피로해지자, 스턴 로즈 이스트민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작품 100의 트리오를 들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봄이 되면 이 레코드를 곧잘 듣곤 했다. 봄밤이 포함하고 있는 일종의 슬픔이, 이 곡의 톤에 호응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느끼고 있었다. 가슴 속까지 푸르고 부드러운 어둠에 물들어 버릴 듯한 봄밤. 그리고 눈을 감으면, 그 어둠 속의 깊은 곳에 하얀 인골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삶은 깊은 허무 속으로 침잠하고, 뼈는 기억처럼 딱딱하게 내 앞에 놓여 있었다.
32
고혼다는 여덟 시 사십 분에 그 마세라티를 타고 찾아왔다. 내 아파트 앞에 멈춰 서자, 마세라티는 장소에 통 어울리지 않게 보였다. 이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어떤 종류의 것은 어떤 종류의 것과 숙명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거대한 메르세데스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마세라티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각기 생활의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고혼다는 일반적인 회색의 브이네크 스웨터와, 푸른색의 남방, 그리고 평범한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두드러져 보였다. 엘튼 존이 보라색 윗도리에 오렌지색의 남방을 입고 하이 점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내 방문을 노크하고, 내가 문을 열자 빙긋 웃었다.
"괜찮으면 방에 들렀다 가지 않겠어?" 하고 나는 권해보았다.
그가 내 방을 들여다보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하고 그는 어쩐지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괜찮으면 그대로 일주일쯤 묵어가도 좋다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좋은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좁은 방이었지만, 그 좁음이 그에게 어떤 감명을 준 듯했다.
"그리워." 하고 그는 말했다.
"예전에는 이러한 방에서 살고 있었던 적이 있어.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으면 언짢게 들렸을 테지만, 그가 말을 하니까 순진하게 칭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내 아파트의 방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부엌과 욕실, 거실, 침실 등이다. 모두 상당히 좁다. 부엌은 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약간 널찍한 복도라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기다란 찬장과 2인용 식탁을 내놓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들여놓을 수 없다. 침실도 마찬가지여서, 침대와 양복장과 작업용 책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거실은 가까스로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책꽂이와 레코드 함, 작은 스테레오 세트 따위뿐이다. 의자도 없고 책상도 없다. 커다란 마리메코 방석 두 장이 있는데, 이를 대고 벽에 기대면 무척 기분이 좋다. 책상이 필요할 때는, 접게 되어 있는 책상을 벽장에서 꺼내어 사용한다.
나는 고혼다에게 방석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책상을 펴놓고 흑맥주와 잔과 안주인 시금치를 내놓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슈베르트의 트리오를 틀었다.
"근사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안주를 더 만들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귀찮지 않아?"
"귀찮지 않아. 간단해. 눈 깜짝 할 사이야. 대단한 건 없지만, 술안주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옆에서 보고 있어도 되나."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파. 매실 무침을 만들고 가다랭이포를 뿌리고, 미역과 새우에 식초를 친 요리를 만들고, 고추냉이의 잎. 뿌리를 잘게 썰어서 술지게미에 절인 식품과 무즙에 반달 모양으로 쪄서 굳힌 식품을 곁들이고, 올리브 오일과 마늘과 소량의 이탈리아식 소시지를 사용하여 채친 감자를 볶았다. 오이를 잘게 썰어 즉석 김치를 만들었다. 어제 녹미 채를 삶아 조리해둔 것도 남아 있었고, 두부도 있었다. 양념으로는 생강을 듬뿍 사용하였다.
"근사해." 하고 고혼다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천재적이야."
"간단해. 모두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냐. 익숙해지면 금방 할 수 있어. 요리는 집에 있는 재료로 얼마만큼 만들 수 있느냐는 거지."
"천재적이야.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
"나는 치과의사 흉내는 도저히 낼 수 없어. 사람마다 각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어."
"맞아." 하고 그는 말했다.
"이봐,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서 쉬고 싶군. 괜찮은가."
"난 괜찮아."
우리는 흑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만든 안주를 먹었다. 맥주가 없어지자 카티 서크를 마셨다. 그리고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레코드를 들었다. 도어즈나 스톤즈, 핑크 프로이드 따위도 들었다. 비치 보이즈의 <서프즈 업>도 들었다. 60년대적인 밤이었다. 라빈 스푼플과 스리 독 나이트도 들었다. 만일 진지한 우주인이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시간 왜곡 현상이 일어난 줄 알았으리라고 여겨진다. 우주인은 오지 않았지만, 열 시가 지나면서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조용한 비였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로 겨우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그런 형태의 비였다. 사자처럼 조용한 비.
밤이 깊어지자, 나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 내 아파트는 벽이 튼튼한 고혼다의 맨션과는 다르다. 열한 시가 넘어 음악을 틀고 있으면, 이웃에서 불평들을 한다. 음악이 사라지자, 우리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면서 사자의 이야기를 했다. 메이의 사건 수사는 그 이후로 별로 진척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고 나는 말했다. 그건 알고 있다고 그도 말했다. 그 역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수사의 진전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두 병째로 카티 서크를 따고, 그 첫잔을 마실 때에 메이를 위해 건배를 하였다.
"경찰은 콜걸 조직에 수사의 대상을 좁히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에 관해 아마 무엇을 포착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그쪽에서 자네한테 손을 뻗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가능성은 있어." 하고 고혼다는 약간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아마 괜찮으리라고 생각해. 나도 좀 신경이 쓰여 사무소에 있는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보았거든. 그 조직은 비밀을 절대로 지킨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 확실한 얘긴 가고 말야. 그런데 아무래도 정치인이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야. 거물급 정치가가 몇 명 관련되어 있어. 그러니까 만일 경찰에 의해 그 조직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내부에까지는 손이 미치지 못하리라는 거야. 손을 댈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리 사무소에도 약간의 정치력은 있어. 몇 명의 거물 탤런트를 포용하고 있으니까, 그만한 힘은 갖고 있지. 위태로운 방면과도 일단은 연결이 되어 있어. 그러니까 어쨌든 잘 막아낼 거야. 사무실 쪽에서도 나는 돈줄이니까, 그 정도의 일은 당연히 할 걸세. 내가 스캔들에 말려들어 상품으로서 통용되지 않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사무소거든. 사무소는 내게 상당한 자본을 투입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 시점에 자네가 내 이름을 댔으면, 그러한 일과는 관계없이 나는 틀림없이 끌려갔겠지만 말야. 아무튼 자네는 유일한 직접적인 관련자이니까. 그렇게 되면 정치력이 나올 틈도 없어. 하지만 이미 그렇게 될 걱정도 없어. 이제는 조직과 조직의 힘과 관련된 문제가 되어 버렸어."
"더러운 세계야."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정말 더러워."
"더러워에 두 표."
"뭐라고?" 하고 그는 되물었다.
"더러워에 두 표, 동의 채택."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래, 더러워에 두 표. 아무도 살해된 여자의 일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해. 물론 나도 포함해서 말야."
나는 부엌으로 가서 얼음을 보충하고, 크래커와 치즈를 갖고 왔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조직에 전화를 걸어 한 가지 물어보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귓불을 쥐었다.
"무엇을 알고 싶나?" 사건과 관련된 일이면 소용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사건과는 관계없는 일이야. 호놀룰루의 콜걸에 관해 알고 싶은 게 있어. 분명히 그 조직을 통해 외국의 콜걸을 부를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누구에게서 들었어?"
"이름이 없는, 어떤 사람이야. 그 사나이가 이야기하고 있던 조직과 자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조직은 아마 똑같은 것이리라고 나는 상상하고 있는데 말야. 지위와 신용과 돈이 없으면 그 클럽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더군. 나 따위는 어림도 없다는 거야." 고혼다는 미소지었다.
"확실히 전화 한 통화로 외국에서 창녀를 데리고 놀 수 있는 조직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네. 시험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똑같은 조직일 거야. 그래 호놀룰루의 콜걸의 무엇을 알고 싶은가?"
"준이라는 이름의 동남 아시아계 아가씨가 있는지 알고 싶어."
고혼다는 약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이상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수첩을 꺼내어, 여자의 이름을 거기에 적었다.
"준. 성은?"
"무슨 소리야, 콜걸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냥 준. 6월이라는 준."
"알았어. 내일 열락을 해보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
"고맙네." 하고 나는 말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나를 위해 자네가 해준 일에 비하면, 이런 건 정말 사소한 일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끝을 붙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하와이에는 혼자 갔었나?"
"하와이에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라구. 물론 아가씨와 둘이서 갔지. 굉장히 예쁜 아이야. 아직 열세 살이지만."
"열 세 살짜리 아이하고 잤어?"
"설마. 아직 가슴도 변변히 나오지 않은 아이야."
"그럼 대체 하와이까지 가서 둘이서 뭘 하고 있었나?"
"테이블 매너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성욕의 구조를 해설하기도 하고, 보이 조지에 대한 욕을 하기도 하고, E.T를 관람하기도 하고... 여러가지야."
고혼다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약간 비켜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별나군." 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가 하는 일은 언제나 정말 별나거든. 왜 그럴까?"
"왜 그럴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나 역시 특별히 그러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건 아냐. 사태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야. 메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야. 그 일도 누구의 탓도 아냐. 하지만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야."
"음."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하와이에선 즐거웠나?"
"물론."
"잘 그을렸군."
"물론."
고혼다는 위스키를 마시고, 크래커를 먹었다.
"자네가 없는 동안에 또 이전의 아내와 몇 번 만났어." 하고 그는 말했다.
"잘 되어가고 있어. 이상한 얘기지만, 아내와 잔다는 건 좋은 거야."
"기분은 알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도 헤어진 아내와 만나보지 그래?"
"안 돼. 다른 누군가와 곧 결혼해. 그 말은 하지 않았었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못 들었어. 하지만 그건 유감스러운데."
"아니, 그 편이 낫지. 유감스럽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 편이 낫다.
"그런데 자네는 부인과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는 또 고개를 저었다.
"절망적이야. 절망적. 그 이외의 형용은 생각해 낼 수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우리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잘 해나가고 있어. 몰래 만나서, 얼굴이 탄로 나지 않을 모텔에 가서 자거든. 우리는 둘이 있으면 서로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돼. 그녀와 자는 게 멋있어, 아까도 말한 것처럼 말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시원스레 마음이 통해. 서로의 일을 서로 이해하고 있어. 결혼하고 있던 때보다 더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어. '사랑하고' 있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하지만 이러한 일을 언제까지나 죽 계속해 갈 수는 없어. 모텔에서 몰래 만난다는 건 정말 소모라구. 언젠가는 매스컴에 발각돼. 탄로가 나면 스캔들이 돼. 그렇게 되면 그자들은 우리의 뼈까지 빨아 먹으려 할 거야. 아니, 뼈마저 남겨두지 않을지도 몰라. 우리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있는 거야. 무척 피곤해. 그럴 게 아니라, 나는 밝은 데로 나가 그녀와 둘이서 제대로 떳떳한 생활을 하고 싶은 거야. 그게 내 소망이야. 함께 유유히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고 싶어. 어린애도 갖고 싶어. 하지만 이는 무리한 얘기야. 그녀의 가족과 나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어. 그자들도 지독한 말을 했고, 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 이미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녀가 가족과 인연을 끊을 수 있으면 얘기는 제일 간단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 지독한 가족이고, 그녀를 철저히 이용하고 있는 거야. 이는 그녀도 알고 있어. 하지만 끊을 수 없어. 아내와 그녀의 가족은, 가슴 아래쪽이 붙어 있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착 달라붙어 있거든. 떨어질 수 없어. 출구가 없어."
고혼다는 유리잔을 흔들어, 속의 얼음 조각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고 그는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손에 넣으려고 하면 웬만한 건 다 손에 들어오는데, 정말로 갖고 싶은 건 손에 들어오지 않거든."
"그런 거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긴 내 경우는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대수로운 말은 할 수 없겠지만 말야."
"아니, 그건 틀려."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자네의 경우는 원래 별로 물건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뿐이잖아. 이를테면 말야, 마세라티라든지 아자부의 그 맨션 따위를 자네는 갖고 싶은가?"
"그다지 갖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현재로선 필요가 없으니까. 스바루와 이 좁은 아파트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레 지내고 있어. 만족스럽다는 건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분수에 맞고 마음이 편하고 불만도 없어. 하지만 앞으로 만일 그러한 필요성이 생겨난다면 그야 갖고 싶어지겠지."
"아니, 틀려. 필요라는 건 그런 게 아냐. 자연스레 생겨나는 게 아니거든. 그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말야, 나는 집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 이다바시든 가메도든 나카노쿠 시립 가세이든 간에 정말로 어디든 좋아. 지붕이 딸려 있고, 만족스레 지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 하지만 사무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거든. 당신은 스타니까 미나토쿠에서 살라는 거야. 그리고 아자부의 맨션을 제멋대로 마련한 거야. 쓸모없는 짓이야. 미나토쿠에 대체 무엇이 있나? 양복점 주인이 경영하는 비싸고 맛이 없는 레스토랑과 보기 흉한 도쿄 타워, 아침까지 자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얼간이 같은 여자 따위 정도지. 마세라티만 해도 그래. 난 스바루가 좋아. 충분해. 잘 달리거든. 도쿄의 도로에서 마세라티가 무슨 소용이 있나? 어이가 없어. 하지만 그것도 사무소 녀석이 구해 왔다구. 스타는 스바루나 블룹너드나 코로나를 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마세라티야. 새 차는 아니지만 말야. 그래도 꽤 비쌌어. 내가 사용하기 전에는 어느 유행가 가수가 타고 있었어."
그는 얼음이 녹은 컵에 위스키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 그러한 세계야. 미나토쿠와 유럽 자동차와 롤렉스를 손에 넣으면 일류로 여겨지지. 쓸모없는 짓이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요컨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필요라는 것은 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야. 자연히 생겨나는 게 아냐. '날조되는 거야.'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서의 환상을 부여받는 거야. 간단해. 정보를 자꾸 만들어 가면 돼. 주거지라면 미나토쿠입니다. 승용차라면 BMW입니다. 시계는 롤렉스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정보를 부여하는 거야. 그러면 모두들 전적으로 믿어 버려요. 주거지라면 미나토쿠, 승용차는 BMW, 시계는 롤렉스라고 말야. 어떤 종류의 인간은, 그러한 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차별화가 달성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모든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들과 똑같아지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거야. 상상력이 부족해. 그 따위는 인위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아. 단순한 환상이야. 난 그러한 일들이 정말 지긋지긋해. 좀 더 착실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안 돼. 나는 사무소에 얽매어져 있어. 옷을 바꿔 입히는 인형이나 마찬가지야. 빚을 지고 있으니까, 불평 한 마디 할 수 없어. 내가 이러고 싶다고 말해도, 내 말 따위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구. 미나토쿠의 산뜻한 맨션에서 살며, 마세라티를 타고, 필립스 시계를 차고, 고급 콜걸과 자고, 어떤 종류의 인간은 이를 부러워하겠지. 하지만 이는 내가 구하고 있는 게 아냐. 내가 구하고 있는 건,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한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거야."
"이를테면 사랑."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이를테면 사랑. 그리고 평온. 건전한 가정. 단순한 인생."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그리고 얼굴 앞으로 두 손을 가져다 손바닥을 합쳤다.
"이봐, 알겠어? 난 손에 넣으려고 마음먹으면 그러한 건 손에 넣을 수 있었어.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말야."
"알고 있어. 자네는 전혀 자만하고 있는 게 아냐. 옳은 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난 하려고만 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나는 온갖 가능성을 다 갖고 있었네. 내게는 기회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어. 하지만 나는 단순히 인형이 되었지. 밤중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간단히 데리고 잘 수 있어. 거짓말이 아냐. 정말로 할 수 있어. 하지만 정말 원하는 여자와는 합쳐질 수 없어."
고혼다는 상당히 술에 취해 있는 듯했다.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여느 때보다 약간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술에 잔뜩 취하고 싶어 하는 기분을 알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시계는 열두 시가 넘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직 시간은 괜찮은 가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내일은 점심때까지 일이 없어, 그러니까 서둘지 않아도 돼. 자네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
"난 괜찮아. 여전히 할 일이 없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함께 어울려 미안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자네밖에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 정말이야.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 내가 마세라티보다는 스바루를 타고 싶다고 말하면, 모두들 내가 머리가 돈 모양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정신 병원에 끌려가지. 유행이라구, 정신 병원에 가는 게. 지겨워. 예능인 전문 정신과 의사란 토해낸 걸 청소하는 일의 전문가 같은 거야."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 와서 또 죽 푸념만 늘어놓고 있는 것 같은데."
"지겹다고 스무 번쯤 말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랬나?"
"흡족하지 않으면 더 말해도 좋아."
"이제 충분해. 고맙네. 푸념만 늘어놓아 미안하네. 하지만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건 모두, 모두, 모두가 얼간이 같은 자들이야. 완전히 구역질이 나, 순수하고 절망적인 구역질이 목구멍까지 치밀고 있어."
"토하면 돼."
"쓸모없는 놈들이 주위에 우글거리고 있어." 하고 고혼다는 토해내듯이 말했다.
"도시의 욕망을 빨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흡혈귀 같은 자들이야. 물론 모두 다 지독한 건 아냐. 착실한 사람도 약간은 있어. 하지만 지독한 놈들이 너무 많거든.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요령이 어중이떠중이들 세계의 욕망의 우물을 마시며 통통하게 살이 찌고 있는 건 그러한 세계야. 자네는 알지 못하겠지만, 정말로 지독한 놈들 투성이야. 이따금 그러한 놈들과 술을 마셔야 할 때도 있어. 그런 때는 죽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어야 한다구. 속이 울컥 치밀어도 목을 졸라 죽이진 말자, 이런 놈들을 죽이는 건 에너지의 소모니까 라고 말야."
"금속 배트로 쳐 죽이면 어때? 목을 졸라 죽이는 데는 시간이 걸려."
"정론이야."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하지만 되도록 이면 목을 졸라 죽이고 싶어. 순간적으로 죽이긴 아까워."
"정론이야." 하고 나는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정론을 말하고 있어."
"정말로." 하고 말하기 시작하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또 얼굴 앞으로 두 손을 가져가 손바닥을 합쳤다.
"꽤 후련해졌어."
"잘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의 귀 같군. 구멍을 파고 외치는 거야. 입 밖에 내면 후련해져."
"맞아." 하고 그는 말했다.
"밤참이라도 먹지 않겠어?"
"고맙네."
나는 물을 끓이고, 김과 매실장아찌와 고추냉이를 사용하여 간단히 밤참을 만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잠자코 그것을 먹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군."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잠시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느 부분에선 그래. 나름대로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결코 행복한 건 아냐. 자네에게 어떤 종류의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어떤 종류의 것이 결여되어 있어.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보낼 수 없어. 그저 댄스의 스텝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계속 춤을 출 수는 있거든. 개중에는 감탄해 주는 사람도 있지.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나는 완전한 제로야. 서른넷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있고, 변변한 직업도 갖고 있지 않아. 하루살이야. 공단 주택도 임대받지 못해. 지금은 데리고 잘 상대도 없구. 앞으로 3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으리라고 행각해?"
"어떻게 되겠지."
"하긴." 하고 나는 말했다.
"될지도 몰라. 안 될지도 몰라. 아무도 알 수 없다구. 모두 똑같애."
"하지만 나는 현재 '부분적으로나마' 즐기고 있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네는 썩 잘하고 있네." 고혼다는 고개를 저었다.
"잘하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한없이 푸념을 늘어놓고, 또 자네를 귀찮게 만들고 있겠나?"
"그러한 때도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등비수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냐."
한 시 반에 고혼다는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묵고 가도 돼. 손님이 사용할 이불쯤은 있고, 날이 밝으면 맛있는 아침 식사도 만들어 주겠네." 하고 나는 말했다.
"아냐,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술도 깨었고, 집으로 돌아가겠네." 하고 고혼다는 머리를 몇 번이고 흔들면서 말했다. 확실히 술은 깬 듯했다.
"그런데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이상한 부탁이지만."
"좋아. 말해 봐."
"미안하지만, 괜찮다면 자네의 스바루를 얼마 동안 빌려 주지 않겠나? 대신 마세라티를 두고 갈 테니까. 실은 아내와 몰래 만나는데 마세라티를 타고 가면 남의 눈에 띄거든. 어디를 가나, 그 차가 있으면 내가 타고 간 걸 금방 알아 버려요."
"스바루는 얼마든지 빌려 주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마음대로 사용해.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차를 그다지 사용하지 않아. 그러니까 자네에게 빌려 주는 건 전혀 상관없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패셔너블한 슈퍼 카를 대신 두고 가면 아주 곤란해. 나는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주차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밤사이에 누가 장난을 할지도 몰라. 게다가 운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 차에 상처라도 입히면, 난 도저히 그런 걸 변상할 수 없어. 책임을 질 수 없어."
"상관없어. 그러한 건 모두 사무소에서 돌봐줄 거야. 확실하게 보험이 기능을 해. 자네가 상처를 입혀도 정확히 보험금이 나온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음이 내키면 바다에 집어넣어도 좋아. 정말 좋다구, 그러면 다음에는 패럴리를 사는 거야. 패럴리를 팔고 싶어 하는 애로 소설가가 있거든."
"해럴리."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어." 하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체념하라구. 자네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우리의 세계에서는 취미가 좋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거기서는 '취미가 좋은 사람'이란 '성격이 비뚤어진 가난뱅이' 하는 말과 같은 뜻이야. 동정 받을 뿐이지.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아."
결국 고혼다는 스바루를 타고 돌아갔다. 나는 그의 마세라티를 주차장에 넣었다. 민감하고 진취적인 차였다. 반응이 예민하고 힘찬 느낌이 절로 왔다. 액셀레이터를 조금 밟으니까 달까지 날아가 버릴 듯이 바른 속도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강경하게 나가지 않아도 돼. 마음 편하게 하자구." 하고 나는 대시 보드를 툭툭 두드리면서, 밝은 목소리로 마세라티에게 타일렀다. 하자만 마세라티는 내 말 따위는 변변히 듣고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 자동차도 상대의 얼굴을 보는 거야,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마세라티도...
33
이튿날 아침에 나는 주차장으로 마세라티의 모습을 보러 가 보았다. 밤사이에 누가 못된 장난을 하거나 훔쳐가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는 무사했다. 언제나 스바루가 있는 장소를 마세라티가 차지하고 있어,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차 속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보았지만, 역시 아무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옆에 본 적도 없는 여자가 누워 있더라는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멋있는 여자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어쩐지 긴장된다. 나는 어떤 경우나 사물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성격이다.
결국 나는 그날 한 번도 차를 타지 않았다. 낮 동안에 거리를 산책하고, 영화를 보고, 몇 권의 책을 샀다. 저녁때에 고혼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어제는 고마웠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일이 못 된다고 말했다.
"그 호놀룰루에 관한 얘긴데." 하고 그는 말했다.
"조직에 문의해 보았네. 확실히 여기서 호놀룰루의 여자를 예약할 수는 있어. 편리한 세상이야. 마치 녹색의 창구 같아. 스모킹입니까, 논스모킹입니까? 하고 묻고 말야."
"맞아."
"그래서 준이라는 아가씨에 관해서도 물어보았어. 잘 아는 사람이 이전에 당신네들로부터 준이라는 아이를 소개받은 적이 있는데, 꽤 좋았더라고 시험해 보라고 말하던데, 그 아가씨를 예약할 수 있겠는가고 말야. 준이라는 이름의 동남 아시아계의 아가씨. 조사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어. 사실은 일일이 그러한 일을 해주지 않지만 나한테는 해주지.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단골이니까. 무리한 부탁을 받아주고, 확실하게 조사해 주었어. 준이라는 아가씨는 분명히 있었어. 필리피노야. 하지만 그녀는 3개월 전에 없어져 버렸어. 이미 일하고 있지 않아."
"없어져 버렸어?" 하고 나는 되물었다.
"그만뒀다는 말인가?"
"무슨 소리야. 아무리 단골이라도 거기까지는 조사해 주지 않아. 콜걸들은 노상 드나들고 있어. 일일이 추적 조사를 하고 있을 수도 없잖겠어. 그녀는 그만뒀다, 이미 여기에는 있지 않다, 그뿐이야, 유감스럽게도."
"3개월 전?"
"그래, 3개월 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론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또 거리를 산책하였다. 준은 3개월 전에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확실히 2주일 전에, 나는 그녀를 데리고 잤다. 그리고 전화번호까지 적어두고 갔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 전화번호를.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콜걸이 3명이 되었다. 키키와 메이와 준. 모두 사라졌다. 하나는 살해되고, 두 명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모두들 마치 벽에 흡수되는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그리고 모두들 각기 나와 관련되어 있다. 그녀들과 나 사이에는 고혼다와 마키무라 히라쿠가 존재하고 있다.
나는 다방으로 들어가, 수첩에 볼펜으로 내 주위의 인간관계를 그림으로 그려 보았다. 꽤 복잡한 관계였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열강 관계도 같다. 나는 절반쯤은 감탄하고 절반쯤은 지긋지긋해하면서 잠시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3명의 사라진 창부와, 한 명의 배우와, 3명의 예술가와, 한명의 예쁜 소녀와, 호텔의 프런트를 담당하고 있는 신경증적인 아가씨.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건전한 교유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같았다.
"알았다. 집사가 범인이다." 하고 나는 말해 보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재미없는 농담이다.
솔직히 말해 이 이상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실을 끌어당겨 보아도 오히려 더 뒤얽힐 뿐이다. 통 분명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키키와 메이와 고혼다의 연결선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키무라 히라쿠와 준의 연결선까지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키키와 준은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 준이 남겨둔 전화번호와 키키가 남겨둔 전화번호는 동일한 것이었다. 관계가 한 바퀴 빙그르르 원을 그리고 있다.
"이건 어려운데, 왓슨 군." 하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재떨이를 향해 말했다.
물론 재떨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떨이는 머리가 좋으니까, 이러한 일에는 일체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재떨이나 커피 컵, 슈거 포트, 전표 따위도 모두 머리가 좋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못들은 체하고 있다. 어리석은 건 나 한 사람뿐이다. 언제나 이상한 일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언제나 몹시 지쳐 있다. 기분 좋은 봄날의 초저녁에 데이트 할 상대도 없다.
나는 아파트로 돌아와 유미요시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유미요시는 없었다. 오늘은 일찍 근무하는 차례라서 퇴근했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수영학교에 가는 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처럼 수영학교에 질투를 느꼈다. 고혼다처럼 호감을 주는 잘생긴 교사가 유미요시의 손을 잡고 헤엄치는 법을 부드럽게 가르쳐 주고 있는 광경에 질투를 느꼈다. 나는 유미요시 한 사람 때문에, 삿포로로부터 카이로에 이르는 온 세계의 수영 학교들을 증오하였다. 빌어먹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지겨워. 거지 같애. 순수하게 구역질이 나." 나는 고혼다를 흉내 내며 이렇게 목소리를 내어 말해 보았다. 전혀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었지만, 실제로 목소리를 내어 말해 보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고혼다는 종교가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침과 저녁때에 그가 "모든 게 지겨워. 거지 같애. 순수하게 구역질이 나." 하고 외치며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인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는 달이, 유미요시를 몹시 만나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약간 신경증적인 말투나 민첩한 몸의 움직임이 그리웠다. 손가락 끝으로 안경테를 잡는 행위나, 미끄러지듯이 슬쩍 방안으로 들어올 때의 진지한 표정, 블레이저코트를 벗고 내 옆에 앉을 때의 모습 등이 좋았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자, 나는 약간 따스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녀 속에 있는 솔직한 면에 아주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우리는 둘이서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그녀는 호텔의 프런트에서 일하는 데 기쁨을 발견하고 있었고, 일주일에 며칠은 저녁에 수영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생업에 종사하고, 스바루와 오래 된 레코드를 좋아하며, 정확한 식사를 하는 일들 속에서 아주 작은 기쁨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한 두 사람. 잘 되어갈지도 모르고, 안 되어갈지도 모른다. 데이터가 너무 부족하여, 통 예측을 할 수가 없다.
그녀가 나와 결합되면, 역시 언젠가는 상처를 입게 될까? 헤어진 아내가 예언한 것처럼, 나는 관련을 맺게 되는 모든 여성에게 결국은 상처를 입혀 가게 될 것인가? 나는 자신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타인을 좋아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유미요시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이제부터 곧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로 날아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고, 데이터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튼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 그 전에 분명히 매듭을 지어 두어야 한다. 엉거주춤 하게 일을 방치해 둘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하면, 그 엉거주춤한 모양이 다음 단계까지 질질 끌고 가게 된다. 아무리 나아가도 모든 사물이 엉거주춤한 모양의 어두컴컴한 그림자에 물들게 된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상으로 삼는 세계의 모습이 아니다.
문제는 키키다. 그렇다. 키키가 모든 일의 중심에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내개 지시를 내리려 하고 있다. 삿포로의 영화관으로부터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그림자처럼 내 앞을 휙 가로질러 간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고 있다. 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너무 암시적이어서,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키키는 대체 내게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지만 어떠해 하면 좋은지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튼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어떤 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수가 막혔을 때에는, 당황하여 움직일 필요는 없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 무슨 일이 다가온다. 가만히 응시하면서, 어스름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이를 배웠다. 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움직인다. '만일 이것이 필요한 것이면 이는 반드시 움직인다.' 좋아, 천천히 기다리자.
나는 며칠 만에 한 번씩 고혼다와 만나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곤 했다. 나중에는 그와 만나는 일이 내 습관의 일부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그는 스바루를 계속 빌려 쓰고 있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문제없어, 신경 쓰지 말게, 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마세라티는 바다에 집어넣지 않았나?" 하고 그는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바다에 갈 틈이 없어서." 하고 나는 말했다.
나와 고혼다는 바의 카운터 앞에 나란히 앉아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마시는 속도가 약간 빨랐다.
"하지만 정말로 집어넣으면 기분 좋을 거야." 하고 그는 잔 가장자리에 입술을 가벼이 댄 채로 말했다.
"확실히 가슴이 후련할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마세라티가 없어져도 곧 페럴리가 나오지."
"하는 김에 그것도 집어넣자구."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페럴리 다음엔 무엇일까?"
"무엇일까. 하지만 그렇게 잔뜩 처넣으면, 틀림없이 보험회사에서 시비를 걸어올 거야."
"보험회사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더 대범해 지자구. 어차피 이건 모두 공상이야. 둘이서 술을 마시며 공상하고 있을 뿐이야. 자네가 곧 잘 나오는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와는 달라. 공상에는 예산이라는 게 없거든. 중산 계급적인 지금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 자질구레한 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멋지게 하자구. 람보르기니든 포르셰든 자가든 무엇이든 상관없어. 모조리 처넣으면 돼. 사양할 필요 없다구. 바다는 깊고 넓으니까. 수천 대라도 받아들여 줘. 상상력을 구사하는 거야."
그는 웃었다.
"자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가슴이 후련해져."
"나도 후련해지네. 남의 자동차고 남의 상상력이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요즘 부인하고는 잘 되어가고 있나?"
그는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가게는 비어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이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바텐더는 할 일이 없어 술병을 닦고 있었다.
"잘 되어가고 있어."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네. 우리의 사랑은 이혼에 의해 확인되고 심화되었어. 어때, 로맨틱하지 않아?"
"로맨틱해. 실신할 것 같아."
그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정말이야." 하고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와 고혼다는 만나면 대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늘어놓으면서 꽤 진진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이는 끊임없는 농담을 필요로 할 만큼 진지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이 신통찮은 농담이었지만, 이는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농담이면 되었던 것이다. 이는 농담을 위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농담이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농담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얼마만큼 진지한가는, 우리 자신밖에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서른네 살인데, 이는 열세 살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아주 어려운 연령이었다. 둘 다 나이를 먹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비하여 무엇인가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닥쳐올 겨울 동안에 몸을 따스하게 해줄 만한 것을 확보해 두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간결한 말로 표현하였다.
"사랑." 하고 그는 말했다.
"내게 필요한 건 그거야."
"감동적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게도 그것은 필요했던 것이다.
고혼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유미요시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눈이 내리는 날 밤에, 브라디 마리를 다섯 잔인가 여섯 잔을 마신 것을 문득 생각해 내었다. 그녀는 브라디 마리를 좋아한다.
"싫증이 나리만큼 많은 여자를 데리고 잤어. 이제 필요 없어. 몇 명하고 자든 마찬가지야. 하는 게 똑같은 걸." 하고 고혼다는 잠시 후에 말했다.
"사랑을 원해. 이봐, 굉장한 걸 자네한테 털어놓고 이야기하겠네. 내가 자고 싶은 건 아내뿐이야."
나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굉장하군. 마치 신의 말 같아. 찬란히 빛나고 있어. 기자 회견을 해야겠어. 그리고 제가 자고 싶은 상대는 아내뿐입니다. 라고 선언하는 거야. 모두들 감동할 거야. 총리대신의 표창을 받을지도 몰라."
"아니, 노벨 평화상을 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자고 싶은 상대는 아내뿐입니다. 하고 세계를 향해 선언하는 거야. 보통사람은 좀처럼 해낼 수 없는 일이지."
"그러나 노벨상을 받으면 프록코트가 필요해지겠는데."
"뭐든 사면 돼. 모두 경비로 처리돼요."
"훌륭해. 바로 신의 말이야."
"스웨덴 왕 앞에서 수상 인사를 하는 거야."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자고 싶은 상대는 아내뿐입니다. 하고 말야. 감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눈을 머금은 구름이 갈라지며,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얼음이 녹고, 바이킹이 항복하며, 인어의 노래가 들려오고."
"감동적이야."
우리는 또 입을 다물고, 잠시 제각기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야 할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미요시를 집에 초대할 때에는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와 리 앤 페린 소스와 레몬을 준비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자네는 상 따위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을지도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변질자로 여겨질 뿐일지도 몰라."
고혼다는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성적 반혁명이야. 격앙된 군중의 발에 채여 죽을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나는 성적 순교자가 되지."
"성적 순교자가 된 최초의 배우가 될 수 있지."
"하지만 죽으면 두 번 다시 아내와 잘 수 없어."
"정론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잠자코 잠시 술을 마셨다. 그러한 식으로 우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였다.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모두 농담인줄 알았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던 것이다.
그는 틈이 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러면 어느 바로 가거나, 내 아파트로 찾아와 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그의 아파트로 가곤 했다. 그렇게 나날이 흘러갔다. 나는 작정을 하고, 일체 일을 하지 않았다. 일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게 되어 버렸다. 내가 없더라도 세상은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마키무라 히라쿠에게 남은 돈과 여행 중에 사용한 몫의 영수증을 우송하였다. 이내 프라이데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돈을 더 받아 달라고 그는 말했다.
"선생님도 이러면 미안하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저도 곤란하거든요." 하고 프라이데는 말했다.
"이 일은 제게 맡겨주지 않겠습니까? 결코 이 일로 당신에게 부담이 되게 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실갱이를 하기도 귀찮아져서,
"알았어요, 이번 일은 아무튼 그쪽 마음에 들도록 해줘요." 하고 나는 말했다.
마키무라 히라쿠는 이내 30만 원짜리 수표를 액자에 넣어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연휴가 왔다가 지나갔다. 나는 유미요시와 몇 차례 전화로 이야기를 하였다. 얼마 동안이나 이야기를 하는가는 그녀가 결정했다. 오랫동안 이야기할 때도 있었고, "바쁘다."고 말하며 간단히 끊어버리는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수도 있고, 갑자기 뚝 끊어버리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전화를 통해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조금씩 데이터를 교환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자기 집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이는 확실한 진보였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수영학교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내 마음은 순진한 고교생처럼 떨리거나 상처를 입거나 어두워지곤 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수영교사에 관해 질문해 보려 했다. 어떤 교사인가, 몇 살쯤 되었는가, 잘생겼는가, 그녀에게 너무 친절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잘 물어볼 수 없었다. 그녀가 나의 질투를 간파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봐요, 당신은 수영학교에 질투를 느끼고 있는 거죠? 아아 싫어요, 그러한 사람은 제일 싫어요. 수영학교에 질투를 느끼는 사람 따위는 남자로서 제일 볼품없는 위인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정말 제일 볼품없는 위인이에요. 당신하고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영 학교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잠자코 있으면, 나의 내부에 일고 있는 수영학교 망상이 점점 확대되어 갔다. 레슨이 끝난 뒤에, 교사가 그녀만을 남게 하여 특별 레슨을 하는 것이다. 교사는 물론 고혼다였다. 그는 유미요시의 가슴과 배에 손을 가져가 크로울 수영법을 연습시켰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다리 윗부분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자고 싶은 상대는 아내뿐이야."
그리고 그는 유미요시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발기한 페니스를 잡게 하였다. 물속의 발기한 페니스. 마치 산호 같다. 유미요시는 아주 황홀해하고 있다.
"괜찮아."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내가 자고 싶은 건 아내뿐이니까."
수영장 망상.
어이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머리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유미요시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잠시 그 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망상이 점점 복잡해지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키키나 메이, 유키 등이 나왔다. 유미요시의 몸을 어루만지는 고혼다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어느 틈이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유미요시가 키키로 변하곤 했다.
"난 아주 평범하고 흔해빠진 인간이에요." 하고 어느 날 유미요시는 말했다.
그날의 그녀는 몹시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남들과 다른 건 이름뿐이에요.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이렇게 호텔의 카운터에서 매일매일 일하며 인생을 헛되이 소모시켜 갈 뿐이에요, 이제 나한테 전화하지 말아요. 난 장거리 전화요금에 걸 맞는 인간이 못 돼요."
"하지만 넌 호텔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잖아?"
"네, 그건 좋아해요. 일하는 것 자체는 고통스럽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따금 호텔에 삼켜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따금. 그러한 때면 나는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죠. 나 따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호텔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요. 하지만 나는 거기에 없어요. 내게는 내가 보이지 않아요. 난 간과되고 있어요."
"호텔의 일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보군." 하고 나는 말했다.
"호텔은 호텔이고, 너는 너야. 나는 곧잘 너에 관해 생각하고, 이따금 호텔의 일도 생각해. 하지만 한꺼번에 생각하지는 않아. 너는 너고, 호텔은 호텔이야."
"알고 있어요, 그것쯤은. 하지만 이따금 혼란에 빠져요."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되지. 너뿐만이 아냐. 나도 마찬가지야." 하고 나는 말했다.
"마찬가지가 아녜요, 전혀."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그래, 전혀 마찬가지가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네 기분을 잘 알 수 있고, 너를 좋아해. 네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겨."
유미요시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전화의 침묵 속에 있었다.
"난 그 어둠이 아주 무서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한 번 더 그 일이 닥쳐올 듯한 느낌이 들어요."
수화기에서 유미요시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훌쩍이며 울고 있는 소리였다.
"이봐요, 유미요시." 하고 나는 말했다.
"왜 그래? 괜찮아?"
"괜찮지 않구요.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에요. 울면 안 돼요?"
"아니, 안 될 건 없어. 걱정했을 뿐이야."
"좀 잠자코 있어요."
나는 시키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유미요시는 한차례 울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5월 7일에 유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왔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부터 어디로 놀러 가지 않겠어요?"
나는 마세라티를 타고 아카사카의 맨션까지 유키를 맞으러 갔다. 유키는 마세라티를 보자 이마를 찌푸렸다.
"이 차는 어떻게 된 거죠?"
"훔친 건 아냐. 샘 속에 자동차를 빠뜨렸더니 이자벨 아지나 같은 샘의 요정이 나와서 '지금 빠뜨린 건 금으로 만들어진 마세라티입니까, 아니면 은으로 만들어진 BMW입니까' 하고 묻길래 아뇨, 내 차는 동으로 만들어진 중고 스바루입니다. 하고 대답했지. 그러자-."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 해요." 하고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예요. 정말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친구하고 일시적으로 교환한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내 스바루를 꼭 타고 싶다고 하기에 바꾸었어. 그 친구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친구요?"
"그래.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도 한 명쯤은 친구가 있어."
그녀는 자동차의 조수 자리에 올라 자동차 안을 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또 이마를 찌푸렸다."
"이상한 차예요." 하고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얼간이 같애."
"그러고 보니 소유주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더군." 하고 나는 말했다.
"표현은 약간 달랐지만."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또 소오낭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유키는 한참 달리고 있어도 죽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스틸리 댄의 테이프를 작은 소리로 켜면서, 주의 깊게 마세라티를 운전하였다. 매우 좋은 날씨였다. 나는 알로하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엷은 면바지에 핑크색의 랄프로렌표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색깔이 햇볕에 그을은 피부에 썩 잘 어울렸다. 마치 하와이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앞에는 가축을 운반하는 트럭이 달리고 있는데, 돼지들이 판자로 만들어진 울짱 틈사이로, 우리가 타고 있는 마세라티를 붉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돼지는 스바루와 마세라티의 차이 따위는 알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돼지는 차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기린도 알지 못하고, 뱀장어도 알지 못한다.
"하와이는 어땠어?"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다.
"어머니하고 잘 지냈어?"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다.
"굉장히 건강해 보이는데. 햇볕에 그을은 게 무척 매력적이야. 마치 카페오레의 요정처럼 보이는군. 등에 보기 좋은 날개를 달고, 스푼을 어깨에 둘러메면 어울릴 것 같아. 카페오레의 요정. 네가 까페오레 편이 되면, 모카와 브라질리아와 콜롬비아와 킬리만자로가 몽땅 달려들어도 절대로 당할 수 없어. 온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카페오레를 마시지. 온 세계가 카페오레의 요정에 매혹돼. 햇볕에 그을은 네 모습은 그토록 매력적이야."
힘껏 순수하게 칭찬해 주었는데, 통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찔 할 뿐이었다. 혹은 역 효과가 난 것일까? 내 순수함이 어디선가 일그러져 버린 것일까?
"생리 현상이야?"
그녀는 역시 어깨를 움찔했다. 나도 어깨를 움찔했다.
"돌아가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되돌아서 도쿄로 돌아가요."
"여기는 토오메이 고속도로야. 여기서 되돌아 갈 수는 없어."
"다른 길로 빠져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녹초가 된 것처럼 보였다. 눈에 생기가 없고, 시선이 흐려져 있었다. 아마 창백해져 있을 테지만, 햇볕에 그을은 까닭에 안색의 변화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어디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쉬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빨리 도쿄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요코하마의 출구로 빠져나와, 곧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잠시밖에 앉아 있고 싶다고 유키가 말하여, 그녀의 맨션 부근에 있는 주차장에 마세라티를 세워두고, 노기 신사의 벤치에 둘이서 나란히 앉았다.
"미안해요." 하고 유키는 여느 때와는 달리 순진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별로 그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죽 참고 있었지만요."
"참을 필요 없어. 신경 쓰지 말아요. 여자에겐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나는 익숙해져 있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하고 유키는 외쳤다.
"그런 게 아네요. 그와는 달라요. 내가 질려 버린 건 저 차 때문이에요. 저 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 마세라티의 대체 어디가 글렀단 말야?" 하고 나는 물었다.
"결코 나쁜 차가 아냐. 성능도 좋고, 타 보면 쾌적한 느낌을 주잖아. 확실히 자신이 돈을 내고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야."
"마세라티."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차종이 문제가 아녜요. 차종을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녜요. 문제는 저 차예요, 저 차에는 뭔가 언짢은 분위기가 있어요. 그게 뭐라고 할까 나를 압박해요, 기분이 나빠져요. 가슴이 죄어들고, 위 속에 이상한 게 처넣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요. 마치 솜 부스러기가 처넣어진 듯한 느낌이에요. 당신은 저 차에 타고 있으면서 그렇게 느껴진 적이 없어요?"
"없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확실히 저 차에는 친숙해질 수 없는 점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이는 내가 스바루에 너무 익숙해진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갑자기 다른 차를 타면, 잘 순응할 수가 없어. 감정적인 거야. 하지만 이는 네가 말하는 압박감과는 또 다른 거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녜요. 아주 '특수한' 느낌이에요."
"그것 말야? 언제나 네가 느끼고 있다고 말하던-."
나는 '영감'이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틀리군,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정신적 감응력? 아무튼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추잡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요, '그것.' 느껴져요." 하고 유키는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느껴지나? 저 차가." 하고 나는 물었다.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걸 분명히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간단하지만요. 하지만 안 돼요.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아니니까. 나는 몽롱하고 불투명한 공기의 덩어리 같은 걸 느낄 뿐이에요. 무겁고 몹시 역겨운 느낌이 들어요. 그게 나를 압박해요. 뭔가 아주 '그릇된 것이.' 유키는 무릎 위에 양 손을 내려놓고, 알맞은 말을 찾고 있었다.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릇된 것, 잘못된 것, 왜곡된 것이에요. 그 속에 있으면 굉장히 답답해요. 굉장히 공기가 무거워요. 마치 납상자 속에 처넣어져 바다 속으로 침강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처음에는 지나친 생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참고 있었죠. 단지 내가 여행을 하고 갓 돌아와 피로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점점 더 지독해져요. 저 차에는 두 번 다시 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스바루를 되돌려 받아요."
"저주받은 마세라티." 하고 나는 말했다.
"이건 농담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녜요. 아저씨도 저 차에는 너무 타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아요." 하고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길한 마세라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알았어. 네가 농담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님은 잘 알고 있어. 저 차에는 되도록 타지 않도록 하겠어. 아니면 차라리 바다에 집어넣는 편이 나을까?"
"할 수 있다면." 하고 유키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유키가 쇼크로부터 회복되기까지의 한 시간여 동아, 우리는 신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유키는 팔꿈치를 세워 손으로 턱을 괴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난 무렵에 신사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노인들이나 어린애를 데리고 온 어머니들, 목에 카메라를 드리운 외국인 관광객 따위였다. 모두 수는 많지 않다. 이따금 외부의 일을 보는 영업 담당으로 보이는 회사원이 찾아와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들은 검은 수트를 입고, 플라스틱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초점이 맞지 않는 멍한 눈으로 10분이나 15분쯤 몸을 쉬고는 정처도 없이 떠나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각에는 정상적인 인간들은 모두 착실히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어?" 하고 나는 물었다.
"너하고 함께 돌아 오셨어?"
"응." 하고 유키는 말했다.
"지금은 하꼬네의 집에 있어요. 그 외팔이 사나이와 함께. 카트만두와 하와이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어요."
"넌 하꼬네로 돌아가지 않아?"
"나중에 마음이 내키면. 하지만 얼마 동안은 여기에 있겠어요. 하꼬네에 돌아가도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까."
"순수한 호기심으로 네게 한 가지 물어보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하꼬네에 돌아가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 혼자 도쿄에 있겠다는 거지. 그러나 여기서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저씨하고 놀고 있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허공에 매달려진 듯한 침묵이었다.
"멋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신의 말 같아. 단순하면서도 계시로 충만해 있어. 죽 둘이서 놀며 지낸다. 마치 낙원에 있는 것 같아. 나와 너는 가지각색의 장미꽃을 꺾거나, 황금의 연못에 보트를 띄우고 물놀이를 하거나, 밤색의 복슬 강아지를 씻어주면서 나날을 보내지. 배가 고프면 위에서 파파야가 떨어지고, 음악이 듣고 싶어지면, 천상에서 보이 조지가 두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말할 나위도 없이 멋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나도 슬슬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언제까지나 너하고 놀면서 지낼 수는 없어. 그리고 너의 아빠로부터 돈을 받을 수도 없어."
유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아빠나 엄마로부터 돈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처럼 표현은 하지 말아요. 나 역시 이렇게 아저씨를 불러내곤 하는 일이 때로는 무척 괴로워져요. 어쩐지 아저씨의 일을 방해하며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만일 아저씨가-."
"돈을 받으란 말인가?"
"그렇게 해주면, 적어도 나는 마음이 편해질 수 있죠."
"너는 알지 못하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직업적으로 너와 만나고 싶진 않아. 개인적인 친구로서 만나고 싶어. 네 결혼식 때에 사회자로부터 '이 분은 신부가 열세 살 때에 신부의 직업적인 남성 유모 노릇을 하던 분입니다' 하고 소개 받고 싶지 않아.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직업적인 남성 유모란 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고 질문할 것임에 틀림없어. 그보다는 '이 분은 신부의 열세 살 때의 보이 프렌드였습니다.' 하고 소개받고 싶어. 그편이 훨씬 모양이 좋아."
"어이가 없어." 하고 유키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난 결혼식 따위는 올리지 않아요."
"좋아. 나도 결혼식 따위에는 나가고 싶지 않아. 시시한 연설을 듣고, 잘못 만들어진 벽돌 같은 케이크를 선물로 받는 일 따위는 정말 싫어. 시간의 소모야. 내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는 어디까지나 비유해서 한 이야기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친구는 돈으로는 살 수 없다. 경비로는 더더욱 살 수 없다'는 거야."
"그러한 테마로 동화라도 써 보면."
"멋있어." 하고 나는 말하고 웃었다.
"정말 멋있어, 너는 점점 대화의 요령을 익혀 왔어. 좀 더 능숙해지면 나하고 둘이서 익살스러운 재담을 훌륭히 해낼 수 있어."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봐요." 하고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진지하게 이야기 하자구.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매일 놀고 싶다면, 매일 놀아도 좋아요. 특별히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시시한 일인 걸. 그런 건 어찌 됐든 상관없어.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해. '돈을 받고 너와 어울려 놀지는 않아.' 하와이의 경우는 예외야. 그건 특별한 행사야. 여비도 내주고, 여자도 안겨주었지. 하지만 덕분에 너의 신용마저 잃어가고 있지. 내 자신이 싫어졌어. 이제 그러한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어. '종결이야.' 앞으로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아무도 쓸데없는 참견은 할 수 없어. 돈도 내놓을 수 없어. 나는 딕 노스와도 다르고, 비서인 프라이데이와도 달라. 나는 나이지, 누구에게 고용되어 있지도 않거든. 만나고 싶으니까 너하고 만나. 네가 나하고 놀고 싶다면, 나는 너하고 놀 거야. 너는 돈 문제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
"정말 나하고 놀아줄 거예요?" 하고 유키는 발톱의 매니큐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상관없어. 나나 너도 세상으로부터 스르륵 흘러내리고 있는 거야. 새삼스레 우려할 필요도 없겠지. 유유히 놀면서 지내면 돼요."
"왜 그토록 친절해요?"
"친절한 게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시작한 일을 도중에 그만둘 수 없는 성격이야. 네가 나하고 놀고 싶다면, 흡족할 때까지 놀면 돼. 내가 너와 삿포로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이야. 어울릴 바엔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어울려."
유키는 잠시 샌들 끝으로 지면에 작은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네모진 소용돌이 꼴의 도형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저씨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나는 이에 대해 약간 생각해 보았다.
"끼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네가 염려할 게 못 돼. 그리고 결국 나 역시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함께 있는 거야. 의무적으로 어울리고 있는 게 아냐. 왜 그럴까? 왜 나는 너하고 있는 것을 좋아할까? 나이 차이도 이토록 많고, 공통된 화제도 별로 없는데 말야. 이는 아마 네가 내게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기 때문일 거야. 내 속에 죽 묻혀 있던 감정을 상기시키는 거야. 내가 열세 살이나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쯤 되었을 무렵에 품고 있던 감정이야. 만일 내가 열다섯 살이었다면, 너와 숙명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을 거야. 이는 이전에 말했었지?"
"말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구." 하고 나는 말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이따금 그러한 감정이 되돌아오는 수가 있어. 그리고 옛날의 빗소리나 바람 냄새를 한 번 더 느낄 수가 있어. 바로 가까이에 느끼는 거야. 그러한 건 나쁘지 않아. 그게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는, 너도 머지않아 알 수 있을 거야."
"지금도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그래?"
"나도 지금까지 많은 걸 상실해 왔는걸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럼 이야기는 간단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10분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또 신사 안의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아저씨밖에는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거의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딕 노스는 어땠어?"
유키는 혀를 내밀며 점잖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형편없는 얼간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아. 결코 나쁜 사나이가 아냐. 너도 그건 이해해야 될 거야. 외팔인데도 그 주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해 나가고 있고, 잘해 나가고 있으면서도 강요하는 듯한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러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그야 너의 어머니에 비하면 스케일이 작을지도 몰라. 재능도 별로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너의 어머니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마 사랑하고 있을 거야.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야. 요리 솜씨도 좋아. 친절해."
"그럴지도 모르지만, 얼간이에요."
나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키에게는 유키의 입장이 있고 감정이 있는 것이다. 딕 노스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이게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하와이의 그 청정한 태양이나 파도, 바람, 피나 코라다 따위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였다. 약간 시장하다고 유키가 말하여, 부근에 있는 후르츠 팔러에 들어가 후루츠 파르페와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 다음 주에 딕 노스가 죽었다.
34
딕 노스는 월요일 저녁때에 하꼬네의 거리로 물품을 사러나가, 슈퍼마켓의 쇼핑백을 껴안고 밖으로 나오다 트럭에 치여 죽었다. 길에 나서자마자 일어난 사고였다. 트럭 운전수도 왜 내리막길의 그토록 시야가 분명치 않은 곳에서 속도를 낮추지 않고 내달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마가 들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긴 딕 노스 쪽에도 약간의 과실은 있었다. 도로의 왼쪽 방향을 약간 뒤늦게 확인한 것이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일본에 돌아오면, 곧잘 그러한 순간적 과오를 범한다. 자동차의 좌측통행에 신경이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만 좌우 확인을 반대로 해버린다. 대부분의 경우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끝나지만, 때로는 커다란 사고에 말려드는 수도 있다. 딕 노스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그 트럭에 걷어차인 다음,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라이트 밴에 치였다. 즉사였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우선 나는 마카하의 슈퍼에서 물품을 사고 있던 딕 노스의 모습을 생각해 내었다. 솜씨 좋게 물건을 고르고, 과일을 진지한 눈으로 살펴보며, 탄팩스 상자를 살며시 쇼핑 카트에 집어넣고 있던 그의 모습을. 가엾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마지막까지 불운한 사나이였다. 옆의 병사가 밟은 지뢰가 폭발하여 왼팔을 잃은 사나이.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아메가 피우다 재떨이에 내려놓은 담뱃불을 끄고 다녔던 사나이. 그리고 슈퍼마켓의 쇼핑백을 껴안은 채 트럭에 치여 죽은 사나이.
그의 장례는 부인과 어린애가 있는 집에서 치러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메나 유키나 나도 거기에는 가지 않는다. 나는 고혼다로부터 돌려받은 스바루에 유키를 태우고, 화요일 오후에 하
꼬네까지 갔다. 엄마를 혼자 있게 해둘 수는 없으니까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 분은 혼자서는 정말 아무 일도 못해요. 거들어 주는 아줌마는 있지만, 나이가 많아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잘 미치지 못하고, 또 그이는 밤이 되면 돌아가 버리니까, 혼자 있게 해둘 수는 없어요."
"얼마 동안은 엄마하고 함께 있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길 안내지도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기고 있었다.
"내가 지난번에 그에 관해 심한 말을 했죠?"
"딕 노스 말야?"
"네."
"형편없는 얼간이라고 말했지." 하고 나는 말했다.
유키는 지도책을 문에 부착된 포켓에 되 넣어 놓고, 창틀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는 가만히 전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게도 친절했고, 아주 잘해 주었어요. 서핑도 가르쳐 주었어요. 외팔인데도 양팔이 있는 사람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엄마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죠."
"알고 있어. 나쁜 사나이가 아니었어."
"하지만 나는 심한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어. 네가 나쁜 게 아냐."
그녀는 죽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한 번도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열어젖혀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초여름의 바람이, 그녀의 반듯한 앞 머리칼을 풀잎처럼 흔들고 있었다.
"가엾지만, 그는 그러한 타입의 사람이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쁜 사나이가 아냐.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할 만도 해. 하지만 이따금 품질이 좋은 휴지통처럼 다루어져, 온갖 사람들이 온갖 물건들을 거기에 집어던지고 가거든. 집어던지기 쉬운 거야. 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경향이 갖추어져 있는가 봐. 너의 어머니가 잠자코 있어도 모두들 특별히 보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야."
범용함이란 흰 옷에 묻은 숙명적인 얼룩과 같은 것이다. 한번 묻은 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불공평하군요."
"원리적으로 인생이라는 건 불공평한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심한 짓을 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딕 노스에 대해서?"
"네."
나는 한숨을 쉬며 차를 길가에 세우고, 키를 돌려 엔진을 껐다. 그리고 핸들로부터 손을 떼고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생각은 정말 쓸모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하고 나는 말했다.
"후회할 정도면 너는 처음부터 제대로 공평하게 그를 대하고 있었어야 했어. 적어도 공평해지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했다구. 하지만 넌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네게는 후회할 자격이 없어. 전혀 없어."
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말이 좀 지나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은 어떻든 간에, 너만은 그처럼 쓸모없는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알겠어, 어떤 종류의 일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거야. 입 밖에 내면 그건 거기서 끝나버려. 다시 몸에 깃들지 않아. 너는 딕 노스에게 한 일을 후회해. 그리고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정말로 후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돼. 하지만 만일 내가 딕 노스였다면 나는 네가 그처럼 간단히 후회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 입 밖에 내어 심한 짓을 했다고 타인에게 말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이는 예의의 문제이며, 절도의 문제야. 너는 그걸 배워야 해."
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는,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잠들어 버린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따금 속눈썹이 희미하게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입술이 약간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몸 안에서 울고 있는가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리를 내거나 눈물도 흘리지 않고 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열세 살짜리 소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훌륭해 보이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인간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상대가 몇 살이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나는 어떤 종류의 일은 적당히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쓸모없는 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유키는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살며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네가 나쁜 게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너무 편협한가 봐. 공평하게 보면 너는 썩 잘하고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한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은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훌륭하다.
"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되죠?" 하고 잠시 후에 유키는 말했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돼." 하고 나는 말했다.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걸 소중히 하면 돼요. 그게 사자에 대한 예의야.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를 알 수가 있어. 남아야 할 것은 남고, 남지 않을 것은 남지 않거든 시간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줘.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네가 해결하는 거야. 내 말이 너무 어려운가?"
"약간." 하고 유키는 말하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어렵군." 하고 나도 웃으며 인정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우선 이해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지. 사람이라는 건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거야. 사람의 생명이라는 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한 거야. 그러니까 사람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이면 성실하게.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유키는 문에 기대는 듯한 자세로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어려운 일처럼 생각되는 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려운 일이야, 아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마한 가치는 있어. 보이 조지처럼 노래가 서투른 뚱뚱보도 스타가 될 수 있었거든. 노력하기에 달렸어."
그녀는 약간 웃고,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하는 말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이해가 빠르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엔진을 걸었다.
"하지만 왜 그토록 보이 조지만을 누에가시로 여길까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왜 그럴까."
"사실은 좋아하는 게 아녜요?"
"이 다음에 천천히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볼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메의 집은 큰 부동산 회사가 개발한 별장 지역 안에 있었다. 커다란 문이 있고, 문 가까이에 풀과 커피 하우스가 있었다. 커피 하우스 옆에는, 잡다한 인스턴트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미니 슈퍼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딕 노스 간은 인간은 그러한 임시변통의 간이 상점에서 물품을 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데서 물건을 사고 싶지는 않다. 길이 죽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어서, 내가 자만하는 스바루도 약간 숨이 거칠어 졌다. 아메의 집은 그 언덕의 중턱에 있었다. 모녀 둘이서 살기에는 꽤 큰 집이었다. 나는 차를 세운 다음, 유키의 짐을 집어 들고 돌담 옆의 계단을 올라갔다. 경사면에 늘어선 삼나무들 사이로 오다와라의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공기가 몽롱해 보이고, 바다는 봄날의 둔한 색채를 띠며 빛나고 있었다.
"아메는 양지바르고 넓은 거실 안을, 불이 붙여진 담배를 손에 든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커다란 크리스털 유리 재떨이는, 꺾이거나 구부러진 샐럼의 잔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마음껏 숨을 내쉰 것처럼, 테이블 위에는 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피우던 샐럼을 재떨이에 던지고 유키에게로 가서, 그녀의 머리칼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녀는 현상용 약품의 얼룩이 진 오렌지색의 특대 사이즈 트레이너 셔츠와, 색이 바랜 블루진을 입고 있었다. 아마 죽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나 보다.
"굉장했어요." 하고 아메는 말했다.
"정말 지독해. 왜 이토록 지독한 일만 일어날까?"
정말 지독한 일이라고 나도 말했다. 그녀는 어제 일어난 사고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혼란에 빠져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게다가 거들어 주는 아줌마가 오늘은 열이 나서 못 오겠다는 거예요. 하필 이러한 때에. 왜 이런 때에 열이 날까? 어쩐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아요. 경찰에서 찾아오지 않나, 딕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지 않나, 난 정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딕의 부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런데 무슨 소린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하고 아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에요. 이따금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소근 거릴 뿐예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요. 나 역시 이런 때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고... 안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집에 남아 있는 그의 짐을 되도록 빨리 그쪽으로 보내도록 하겠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 사람은 죽 울고 있을 뿐예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소파에 기대었다.
"무얼 마시겠어요?" 하고 나는 물었다.
될 수 있으면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우선 재떨이를 비우고,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재를 걸레로 닦고, 코코아 찌꺼기가 달라붙은 컵을 내다놓았다. 그리고 부엌을 대충 정리하고, 물을 끓여 진한 커피를 만들었다. 부엌은 딕 노스가 일하기 쉽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죽은 지 하루도 못 되어 거기에는 뚜렷한 붕괴의 양상이 엿보였다. 싱크대 속에는 무질서하게 식기들이 처넣어져 있고, 슈가 포트의 뚜껑은 열려진 채로 있었다. 스테인레스 레인지에는 코코아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식칼은 치즈 따위를 자른 채의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가엾은 사나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그 나름의 질서를 열심히 만들어 가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러한 것은 하루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다. 사람이라는 건 자신과 제일 어울리는 장소에 그 그림자를 남기고 간다. 딕 노스의 그것은 부엌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가까스로 남겨진 그 불안정한 그림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되어 버린다.
가엾게도,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 이외의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내가 커피를 갖고 가자, 아메와 유키는 바싹 달라붙듯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메는 물기가 어린 충혈된 눈으로, 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약물의 작용으로, 정신이 후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키는 무표정했지만, 어머니가 허탈한 상태로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것을 특별히 불쾌히 여기거나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묘한 분위기가 생겨난다. 아메만이 있을 때와도 다르고, 유키만이 있을 때와도 다른 분위기다. 거기에는 뭔가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대체 무엇일까? 아메는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들고, 아주 중요한 것을 마시는 것처럼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맛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나자, 아메는 약간 마음이 안정된 듯했다. 눈에 약간이나마 밝은 빛이 돌아왔다.
"너는 뭘 마시겠어?" 하고 나는 유키에게 물었다.
유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 처리할 일들은 이제 끝났습니까? 사무적인 일이나 법률적인 일 따위의 자질구레한 수속들 말예요." 하고 나는 아메에게 물었다.
"네, 이미 끝났어요. 구체적인 사고 처리에 관한 건 특별히 까다로운 일은 없었어요. 보통의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사고니까. 집에 경관이 와서, 알려주었을 뿐예요. 그래서 난 그 사람에게, 딕의 부인에게 연락하도록 했어요. 부인은 금방 경찰에 나왔나 봐요. 그녀가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끝냈어요. 법률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나는 딕과는 무관계한 사람이니까. 그 후에 그녀가 집에 전화를 걸어왔어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고 있을 뿐예요. 비난하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의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사고,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3주일쯤 지나면 아마 이 여자는 딕 노스가 있었던 일 따위는 거의 잊어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잊어버리기 쉬운 타입의 여자이고, 잊혀 지기 쉬운 타입이 남자인 것이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하고 나는 아메에게 물었다.
아메는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깊이가 없는 단조로운 시선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눈빛이 둔해지고, 이어 또 조금씩 거기에 밝은 빛이 되살아났다. 멀리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가, 문득 생각이 바뀌어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딕의 짐' 하고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부인에게 보내주겠다고 한 것 말예요. 아까 당신에게 그 얘기를 했죠?"
"네, 얘기 들었습니다."
"그걸 어젯밤에 정리했어요. 원고와 타이프라이터, 책, 의복 따위를 챙겨, 그의 수트케이스 속에 넣어 두었어요. 그다지 많지 않아요. 물건들을 별로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중간 정도 크기의 수트케이스 하나예요. 미안하지만 그걸 그의 집에 갖다 줄 수 있겠어요?"
"좋아요. 갖다 주죠.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오또구지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자세한 주소는 알 수 없어요. 찾아봐 주시겠어요? 수트케이스의 어디엔가 씌어져 있는 것 같던데."
그 수트케이스는 2층 복도의 맨 끝 방에 놓여 있었다. 수트케이스의 이름표에는, 꼼꼼해 보이는 글씨로 딕 노스라는 이름과 고오또구지의 주소가 씌어져 있었다. 유키가 그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다락방처럼 좁고 기다란 방이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예전에 입주하여 가사를 거드는 아줌마가 있을 때에, 이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유키는 말했다. 딕 노스는 그 방을 깔끔히 정리해 두고 있었다. 조그마한 집필 책상 위에는, 가느다랗게 잘 깎여진 다섯 자루의 연필이 지우개와 함께 정물화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작은 글씨의 메모가 기입되고 있었다. 유키는 방문에 기대어, 잠자코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는 잠잠했다. 새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마카하 교외의 아담한 집을 생각해 내었다. 거기도 조용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수트케이스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 수트케이스 속에는 원고나 책 따위가 잔뜩 들어 있는 모양이어서, 보기보다는 훨씬 무거웠다. 그 무게는 내게 딕 노스의 죽음의 무게를 상상케 하였다.
"지금 갖다 주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는 아메게게 말했다.
"이러한 일은 빨리 할수록 좋으니까요. 그밖에 또 내가 할 일은 없습니까?"
아메는 망설이는 것처럼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키는 어깨를 움칫했다.
"실은 식료품이 별로 없어요." 하고 아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사러 나갔다가, 그렇게 돼서, 그러니까..."
"좋습니다. 적당히 사오겠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냉장고 속에 있는 걸 점검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메모하였다. 그리고 아래쪽 거리로 내려가 딕 노스가 그 앞에서 죽은 슈퍼마켓에서 식료품들을 구입했다. 4,5일은 가겠지. 나는 사온 식품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랩에 싸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아메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수로운 일이 아녜요, 하고 나는 말했다. 실제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딕 노스가 하려다가 남겨두고 죽어버린 것을, 내가 이어받아 끝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돌담 위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마카하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은, 딕 노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두 여자는 돌담 위에 나란히 서서, 거의 움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화적인 느낌을 주는 정경이었다. 나는 그 회색의 플라스틱 수트케이스를 스바루의 뒷좌석에 집어넣은 다음 운전석에 올랐다. 그녀들은 내가 커브를 돌 때까지 죽 거기에 서 있었다. 해질녘이어서, 서쪽 바다가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앞으로 여기서 대체 어떠한 밤을 보낼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호놀룰루 다운타운의 그 기묘하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본 외팔이 백골을 생각해 내었다. 그건 역시 딕 노스의 뼈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는 죽음이 모아져 있었던 것이다. 6구의 백골, 6개의 죽음. 나머지 5개는 누구의 죽음일까? 하나는 네스미일지도 모른다. 네스미, 죽어버린 내 친구.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 메이일 것이다. 나머지 3개.
나머지 3개.
하지만 왜 키키가 그러한 곳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왜 키키가 내게 그 6개의 죽음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나는 오다와라까지 내려가서, 도오메이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미노끼짜야에서 수도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길안내 지도에 표시된 대로 세다다니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 돌아 겨우 딕 노스의 집에 도착하였다. 집 자체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보통 집장수가 장사 속으로 집을 지어서 파는 종류의 주택이었다. 자그마하고 아담한 2층 집으로 문이나 창문, 우편함, 대문에 달아놓은 등 따위가 모두 몹시 작아보였다. 문 옆에 개집이 있고, 줄에 매어진 잡종견이 자신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그 주위를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온 집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좁은 현관에는 대여섯 켤레의 검은 가죽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문하여 배달이 된 김밥 상자도 보였다. 딕 노스의 유해가 여기에 안치되어 밤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죽은 후에 돌아갈 장소가 있었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수트케이스를 차에서 꺼내어 현관까지 운반하였다. 벨을 누르자 중년의 사나이가 나왔기에, 이 짐을 여기까지 운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나이는 수트케이스의 이름표를 보고, 이내 사정을 이해한 듯했다.
"친절히 갖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였다.
나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을 안은 채 시부야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머지 3개 하고 나는 생각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방에서 혼자 위스키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나의 퍼즐에 생겨난 몇 개의 공백에는, 그 생각의 실마리들이 전혀 합치되지 않았다. 뒤집거나 옆으로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틀리는 범주에 속하는 생각인가 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더라도, 상황에 뭔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딕 노스는 본질적으로 선의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연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소멸되어 버렸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 아마 상황은 이전보다 더 경색되어 가리라.
이를테면?
이를테면 나는 아메와 있을 때의 유키의 무표정한 눈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유키와 함께 있을 때 아메의 멍하고 단조로운 눈도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는 뭔가 불길한 게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나는 유키가 좋았다. 머리가 좋은 아이다. 이따금 몹시 완고해지지만, 근본은 순진하다. 또 나는 아메에게도 호의 같은 걸 품고 있었다. 단 둘이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역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재능이 넘치고, 무방비 상태였다. 유키보다 훨씬 어린애다운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둘이 함께 있게 되면, 그 분위기가 나를 몹시 피로하게 만들었다. 마키무라 히라쿠가 저 두 사람 덕분에 내 재능은 소멸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의미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거기에 직접적인 힘 같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두 사람 사이에 딕 노스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금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도 내가 두 사람과 직접 대면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러한 셈이다.
나는 유미요시에게 몇 번인가 전화를 하고, 고혼다와 몇 번인가 만났다. 유미요시의 태도는 전체적으로 보아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조로 미루어 보아 내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다소는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그다지 귀찮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 학교에 다니고, 휴일에는 남자 친구와 이따금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에 그와 어떤 호수로 드라이브를 갔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친구예요. 고등학교 때 한 반이었어요. 삿포로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뿐이에요."
별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그러한 일은 어떻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내가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수영학교에 관한 일뿐이다. 보이프랜드와 어느 호수로 가든, 어느 산에 오르든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말해 두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무엇을 숨겨두는 걸 나는 싫어하니까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나는 한 번 더 삿포로로 가서 너를 만나 이야기를 하겠어. 그것만이 문제야. 너는 내키는 대로 누구하고나 데이트를 하면 돼. 그러한 건 나와 너 사이의 일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나는 죽 너에 관해 생각하고 있어. 전에도 말한 것처럼 우리 사이에는 뭔가 서로 통하는 게 있어."
"이를테면?"
"이를테면 호텔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거기는 네 장소이고, 또 내 장소이기도 하거든. 거기는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장소인 셈이야."
"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도 아닌,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흠' 이었다.
"나는 너와 헤어진 후로 여러 사람들을 만났어. 여러 가지 일들을 겪기도 했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죽 네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노상 너와 만나고 싶어 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 갈 수가 없어. 하는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진심은 깃들어 있지만 비논리적인 설명이었다. 나답다. 과히 짧지도 길지도 않은 간격의 침묵이 이어졌다. 중립으로부터 약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운 듯한 느낌을 주는 침묵이었다. 하지만 결국 침묵은 단순한 침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물을 너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 작업이 진전되고 있나요?" 하고 그녀는 질문했다.
"그러하리라고 생각해.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년 봄까지 마무리 지어지면 좋겠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고혼다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 일의 스케줄이 꽉 짜여 있는 데다, 그 틈을 이용하여 헤어진 아내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어. 이것만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 하고 고혼다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원래 이러한 기교적인 생활에는 맞지 않아.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가정적인 인간이거든. 그래서 날마다 무척 피곤해. 신경이 잔뜩 늘어뜨려진 듯한 느낌이 들어."
그는 고무줄을 늘어뜨리는 것처럼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그녀와 둘이서 휴가를 얻어 하와이로 가야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럴 수 있으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며칠 동안 둘이서 해변에서 뒹굴며 지내는 거야. 닷새면 돼. 아니 사치스런 말은 하지 않겠어. 사흘이라도 좋아. 사흘이면 피로가 꽤 풀릴 텐데."
그날 밤에 나는 그와 함께 아지부에 있는 그의 맨션으로 가서, 멋진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그가 출연한 TV 광고를 모은 비디오를 보았다. 위장약의 광고, 그 광고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사무실의 엘리베이터, 벽이나 문이나 칸막이도 없이 개방된 네 기의 엘리베이터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오르내리고 있다. 고혼다는 다크수트를 입고, 가죽가방을 안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마치 엘리트 샐러리맨 같은 풍모다. 그는 그 엘리베이터로부터 엘리베이터로 날쌔게 뛰어 옮아 탄다. 저쪽 엘리베이터에 상사가 타고 있으며, 그쪽으로 가서 업무를 상의하고, 이쪽 엘리베이터에 예쁜 여직원이 타고 있으면 데이트 약속을 하고, 또 다른 쪽 엘리베이터에 하다 남은 업무가 놓여 있으면 그쪽으로 가서 급히 마무리 짓고 하는 것이다. 두 대 너머 저쪽의 엘리베이터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는 수도 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다른 엘리베이터로부터 엘리베이터로 뛰어 옮아가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혼다는 시원스런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자못 필사적으로 뛰어 옮아가고 있다. 그리고 코멘트가 나온다.
"피로한 나날, 피로가 위에 쌓입니다. 분주한 당신에게 부드러운 위장약..." 나는 웃었다.
"재미있군, 이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쓸모없는 광고야. 광고 따위는 근본적으로 모두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거야. 하지만 이건 상당히 잘 촬영이 되어 있어. 비참한 얘기지만, 내가 주연한 대부분의 영화들보다 훨씬 질이 높아. 이건 돈도 꽤 들인 거라구. 세트나 특수 촬영에 말야. 광고하는 이들은 세밀한 데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거든. 설정도 재미있어."
"그리고 자네의 지금 상황을 시사하고 있어."
"정말." 하고 말하고 그는 웃었다.
"자네 말대로야. 정말 아주 비슷해. 틈을 내어 이리저리 잽싸게 뛰어다니고 있어. 하고 있는 사람은 결사적이야. 피로가 위에 쌓여. 하지만 이 약은 효험이 없어. 한 다스 주길 래 시험해 봤는데, 통 효험이 없더군."
"하지만 동작이 썩 좋아." 하고 나는 리모콘으로 한 번 더 그 광고를 플레이백해 보면서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바스터 키턴적인 우스꽝스러움이 있어. 자네는 의외로 이러한 종류의 연기에 어울리는지도 몰라."
고혼다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희극을 좋아해. 흥미가 있어. 가능성을 느껴. 뭐라고 할까, 나처럼 직선적인 타입의 배우는 직선적이기 때문에 우스워 보이는 점을 잘 표출하면 재미있으리라 생각해. 이 비뚤어지고 까다로운 세계에서 올바로 직선적이게 살아가려고 하지. 하지만 그러한 삶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측면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알아." 하고 나는 말했다.
"특별히 우스꽝스런 짓을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보통으로 있으면 되는 거야. 그것만으로 충분히 우습거든. 그러한 연기에는 흥미가 있네. 그러한 타입의 사람들이 오버 액션을 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와 반대되는 거야. 아무런 연기도 하지 않은 거야."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그러한 역할을 주지 않아. 가져오는 것이라곤 노상 의사나 교사, 변호사 따위의 역할뿐이야. 이젠 싫증이 나요. 거절하고 싶지만, 난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돼. 피로가 위에 쌓인다구."
그 광고는 상당히 평판이 좋아 몇 개의 속편이 만들어졌다. 형식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단정한 얼굴을 한 고혼다가 비즈니스 수트를 입고, 전철이나 버스, 비행기 등에 간발의 시간차로 아슬아슬하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혹은 그는 서류를 살짝 겨드랑이에 끼고 고층 빌딩의 벽에 달라붙거나 로프를 타고 저쪽 방으로부터 이쪽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모두 잘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혼다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점이 좋았다.
"처음에는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지으라는 거야, 감독이. 기진맥진한 채 녹초가 되어 쓰러질 것 같은 느낌으로 하라는 거야. 하지만 난 싫다고 했어. 그렇지 않다, 이건 시원스럽게 하니까 재미있는 거다. 라고 말했지. 물론 그치들은 돌대가리들이어서 내 말을 통 믿지 않더군, 하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았어. 나는 이게 좋아서 이러한 광고에 나오고 있는 게 아냐.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하고 있어.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이건 틀림없이 재미있는 게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철저히 불평을 했지. 결국 두 종류의 필름을 만들어 모두에게 보여 주었어. 물론 내가 주장한 방식의 필름 쪽이 훨씬 인기가 있었지. 하지만 광고가 성공하자, 공로는 모두 그 감독들에게로 돌아갔어. 무슨 상을 탔다더군. 그 따위는 어떻든 상관없지. 하지만 나는 그치들이 아주 당연한 거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뽐내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치들은 지금은 그 광고의 아이디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스스로 생각해낸 걸로 믿고 있어. 그러한 자들이야. 상상력이 없는 자들일수록 자기 합리화하는 일이 재빠르거든. 그리고 나는 불평하기 좋아하고 그저 잘 생겼을 뿐인 서투른 배우로 여겨지고 있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닐세, 자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 하고 나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자네와 실제로 만나 이야기해 보기 전에는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 자네가 나온 몇 편의 영화를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형편없는 영화였어. 그러한 데 나오면, 자네까지 형편없이 보였어."
고혼다는 비디오 데크의 스위치를 끄고, 새 술을 만들고, 빌 에반스의 레코드를 틀었다. 그리고 소파로 돌아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한 일련의 동작은 여전히 참으로 우아했다.
"맞아. 옳은 말이야. 그러한 쓸모없는 영화에 나가고 있으면, 자신이 점점 쓸모없게 되어가는 걸 알 수 있어. 자신이 몹시 초라하게 느껴져. 하지만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는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아.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어. 자신이 매는 넥타이의 무늬마저 제대로 선택할 수 없어.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얼간이들과 자신의 취미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속물들이 제멋대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저리로 가라, 이리로 와라, 저 일을 하라, 이 일을 하라, 이 차를 타라, 이 여자와 자라고 말야. 쓸모없는 영화와 같은 쓸모없는 인생이야. 언제까지나 한없이 계속되고 있어. 언제까지 계속될까? 스스로도 짐작이 가지 않아. 이미 서른넷인데 말야. 한 달 후면 서른다섯이 돼."
"결단을 내려 모든 걸 버리고 제로가 되면 될 거야. 자네 같으면 제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사무소를 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가면 돼."
"맞아. 나도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했어. 그리고 나 혼자라면, 틀림없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을 거야. 제로가 되어, 어느 극단에라도 들어가서 좋아하는 연극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없어. 돈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하지만 말야, 내가 제로가 되면 그녀는 틀림없이 나를 버릴 거야. 그러한 여자야. 이러한 세계가 아니면 호흡해갈 수가 없어. 제로가 된 나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호흡 곤란 상태에 빠져버릴 거야. 좋은 일이냐의 여부를 떠나, 그러한 체질이야. 그녀는 스타 조직이라는 조직 속의 그러한 기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상대에게도 이와 같은 기압을 요구해. 그리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어. 그것만은 안 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사방이 꽉 막혀 있어." 하고 고혼다는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자구. 이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면 아침까지 끌고 가도 제자리걸음일 테니까."
우리는 키키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가 키키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키키가 우리를 끌어당긴 셈인데, 생각해 보면 자네로부터는 그녀의 이야기를 거의 들어보지 못한 느낌이 들어. 그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종류의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아니, 이야기하기 어려운 건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키키와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우연한 일로 우리는 서로 알게 되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마치 공백 속에 어떤 기체가 소리도 없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처럼, 그녀는 내 인생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잘 설명할 수가 없군. 모든 게 그저 자연스레 이루어진 거야. 그래서 그때는 특별히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비현실적이며 조리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말로 나타내 보면 어이없는 일로 여겨져, 정말,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나는 술을 마시고, 컵 속의 깨끗한 얼음 조각을 흔들었다.
"키키는 당시 귀 모델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그 귀의 사진을 보고 키키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어. 그건 말야, 뭐라고 할까, 정말로 완벽한 귀였어. 나는 그때 그 귀의 사진을 사용하여 광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지. 그 사진에 문안을 첨가하는 거야. 무슨 광고였던가, 잊어버렸다. 하지만 아무튼 그 귀의 사진이 내게 보내져 왔어. 굉장히 크게 확대된 키키의 귀의 사진이야. 솜털까지 보일 정도야. 나는 그걸 사무소의 벽에 걸어 두고 매일 바라보며 지내고 있었어. 처음에는 광고 문안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나중에는 그 사진을 보는 일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어. 광고 일이 끝난 후에도, 나는 죽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네, 그건 정말 멋진 귀였어.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실물을 보여주지 않으면 설명이고 뭐고 안 될 테니까.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한 완벽한 귀였어."
"그러고 보니, 자네는 키키의 귀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었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응 그래,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그 귀의 소유자를 만나고 싶어졌어.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인생이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들더군. 어째서일까? 하지만 그러한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키키에게 전화를 걸었지. 그녀는 나와 만나 주었어. 그리고 만난 첫날에 키키는 내게 개인적으로 귀를 보여 주었어. '개인적인 귀를 보여준 거야. 영업용이 아닌 개인적인 귀를.' 그건 사진보다 훨씬 멋진 귀였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멋진 귀였어.' 그녀는 영업용으로 귀를 사용할 때에는 즉 모델을 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귀를 폐쇄하는 거야. 그러니까 개인적인 귀는, 이와는 전혀 달라. 알겠어, 그녀가 귀를 보여주면, 그것만으로 거기에 있던 공간이 변화되어 버리는 거야. '세계의 모습이 일변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아마 허황된 얘기로 들릴 테지만 말야. 하지만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어."
고혼다는 이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귀를 폐쇄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귀와 의식을 분리하는 거야. 간단히 말하면."
"흠" 하고 그는 말했다.
"콘센트를 제거하는 거야, 귀의."
"흠."
"우습게 들리지, 하지만 정말이야."
"물론 믿고 있네, 자네 말은. 제대로 이해하려 하고 있을 뿐이야.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냐."
나는 소파에 기대어,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는 특수한 힘을 갖고 있어. 무슨 소리를 알아듣고, 사람을 적절한 장소로 이끄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고혼다는 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하고 그는 말했다.
"그때 키키는 자네를 어디로 이끌고 갔군? 적절한 장소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고혼다도 그 이상은 특별히 질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또 나를 어디론가 이끌려고 하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걸 분명히 느껴. 지난 수개월 동안 죽 그걸 느껴왔어. 그리고 나는 그 실을 조금씩 끌어당겨 왔어. 가느다란 실이어서, 몇 번이고 끊어질 뻔했어. 하지만 어떻게든 여기까지 도달했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과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지. 자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야. 중심적인 한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의도하는 바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도중에 사람이 둘이 죽었어. 하나는 메이고, 또 하나는 외팔이 시인이야. 움직임은 있어. 하지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있어."
유리잔 속의 얼음이 녹아 버리자, 고혼다는 부엌에서 아이스펠에 가득 차 있는 얼음을 가져와, 2인분의 새 언덕 락스를 만들어 주었다.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그가 빈 잔에 얼음을 집어넣자, 딸그락하는 아주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일이 막혀 버렸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와 마찬가지야."
"아니, 그렇지 않아. 자네와 나는 틀려."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그건 전혀 출구가 없는 애정이야. 하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아. 적어도 자네는 무엇엔가 이끌리고 있어. 지금은 혼란되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끌려 들어가고 있는 이 감정의 미로에 비하면 자네가 훨씬 낫고, 희망도 가질 수 있어. 적어도 출구가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있지. 내 경우는 전혀 없거든. 이 두 상황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돼."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키키의 라인에 꼭 달라붙어 있는 일이야. 그밖에는 지금으로선 할 일도 없네. 그녀는 내게 어떤 신호나 메시지를 보내려 하고 있어. 나는 이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이봐, 어떤가?" 고혼다가 말했다.
"키키가 살해되어 버렸을 가능성은 없을까?"
"메이와 마찬가지로?"
"응, 하지만 사라지는 방식이 너무 당돌해, 메이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내 키키의 일을 생각해 냈어. 그녀도 똑같은 처지에 빠진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별로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없진 않잖아?"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난 것이다.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에서, 그 연한 회색으로 물든 일몰의 시각에, 정말로 나는 그녀와 만났다. 그리고 유키도 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가능성이야, 의미는 없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은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게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어. 나는 그걸 분명히 느낄 수 있어. 그녀는 모든 의미에서 특별하다구."
고혼다는 오랫동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그대로 피로하여 잠들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론 잠들어 버린 건 아니었다. 이따금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거나 풀곤 하였다. 손가락밖에는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밤의 어둠이 어디선가 방안으로 스며 들어와서, 모래집물처럼 그의 말끔한 몸을 온통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나는 잔속의 얼음을 한 번 휙 돌린 다음에,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때 문득 방 안에 제3자가 있음을 느꼈다.
나와 고혼다 외의 누군가가 이 방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 나는 그 체온이나 술집, 희미한 냄새 등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인간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동물이 불러일으키는 공기의 흐트러짐 같은 것이었다. '동물'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미가 내 등줄기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방을 휙 둘러보았다. 하지만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것이라곤 낌새뿐이었다. 공간 속에 무엇인가가 잠복해 있는 듯한 딱딱한 그 무엇,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내가 있고, 고혼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동물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동물 역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어느 공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낌새가 사라졌다. 동물은 없어져 버렸다.
나는 어깨의 힘을 빼고, 술을 또 한 모금 마셨다. 2~3분 후에 고혼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향해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좋지 않군. 어쩐지 따분한 밤이 되어 버렸어." 하고 그는 말했다.
"그건 아마 우리가 둘 다 본질적으로 따분한 인간이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고혼다도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둘이서 음악을 들으면서 취기가 깨도록 한 다음, 나는 스바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 속에 들어가, 그 동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35
5월 말에 우연히, 우연일 것이다. 아마, 나는 '문학'을 만났다. 메이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나를 심문한 두 형사 중의 하나이다. 시부야의 도뀨헌즈에서 납땜인두를 사가지고 밖으로 나오려다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여름을 연상시키는 더운 날인데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직 두꺼운 트위드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경찰관은 어쩌면 기온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도뀨 헌즈의 쇼핑백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체하고 그대로 지나가려 했지만, '문학'이 내게 즉각 말을 걸었다.
"쌀쌀하군요." 하고 문학은 농담조로 말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려는 거요?"
"바쁩니다." 하고 나는 간단히 말했다.
"아." 하고 문학은 말했다.
내가 바쁘다는 게 전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하고, 여러 가지 할 일들이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럴 테죠, 그야."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잠깐인데 괜찮겠죠? 10분쯤. 어때요, 차라도 마시지 않겠어요? 내 업무상의 일을 떠나서 당신과 한 번 이야기 해 보고 싶었어요. 정말 10분이면 되니까요."
나는 그와 함께 혼잡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 했는지를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나는 거절하고 그대로 돌아와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 그가 권유하는 대로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젊은 커플이나 학생 그룹뿐이었다. 커피는 지독하게 맛이 없었고 공기도 나빴다. 문학은 담배를 꺼내 피웠다.
"담배를 끊고 싶지만요." 하고 그는 말했다.
"이 일을 하고 있는 한 끊을 수가 없더군요. 절대로 안 돼요. 피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신경을 쓰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신경을 쓰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혐오를 당하니까. 형사 노릇을 몇 해고 하고 있으면, 정말로 혐오당합니다. 눈매도 나빠지고, 피부도 지저분해져요. 왜 피부가 지저분해지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말예요. 아무튼 지저분해요. 그리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게 돼요. 말투도 달라지고,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커피에 설탕 세 스푼과 크림을 타고 정중히 저은 다음, 천천히 맛있는 듯이 마셨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 그렇지, 시간이" 하고 문학은 말했다.
"아직 5분쯤 남았죠? 충분해요. 그렇게 시간을 빼앗진 않을 테니까요. 그 살해된 아가씨 얘기예요. 메이라는 이름의 아가씨."
"메이?" 하고 나는 되물었다. 그렇게 간단히 걸려들지는 않는다.
그는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요. 그 아이는 메이라고 해요. 이름을 알아냈어요. 물론 본명이 아니지만 말예요. 겐지 메이에요. 역시 매춘부였어요. 내 육감대로, 일반 가정의 보통 여자는 아니었어요. 얼핏 보기에는 분명히 보통 여자인데요, 하지만 보통 여자가 아녜요. 요즘은 분간하기가 어려워요. 예전에는 좋았어요. 한눈에 매춘부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었죠. 입고 있는 옷이나 화장이나 표정 따위를 보고 말예요. 요즘엔 안 돼요. 도저히 그러한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아이가 매춘을 하거든요. 돈을 만들기 위해서라든지 호기심 때문이에요. 좋지 않은 일이죠. 그리고 위험해요. 안 그래요? 늘 알지 못하는 남자와 만나 밀실에 틀어박히는 거예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있어요. 변태자도 있고 이상자도 있어요. 위험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젊은 아가씨는 그러한 걸 알 수 없거든요. 그녀들은 세상의 행운이 모두 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할 수 없는 일이지만요. 그게 젊다는 표시니까. 젊을 때에는 무엇이든 잘 되어 갈 것처럼 여겨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이미 늦어요. 그때에는 이미 스타킹이 목에 감겨져 있는 거예요. 가엾게도."
"그래 범인은 알아냈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문학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마를 찌푸렸다.
"유감스럽지만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세밀한 사실은 알아냈어요. 하지만 신문에는 발표하고 있지 않아요. 아직 수사하는 도중이니까. 이를테면 그녀의 이름이 메이이고, 직업은 매춘부입니다. 본명은... 뭐 별로 본명은 필요 없어요. 대수로운 문제가 아녜요. 출생지는 구마모토예요. 아버지는 공무원입니다. 별로 큰 도시는 아니지만, 부시장까지 하고 있어요. 착실한 집안이에요. 금전 면에서도 쪼들리지가 않아요. 생활비도 충분히 보내오고 있어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어머니가 올라와 옷가지를 사주고 있구요. 아마 패션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가족에게는 말하고 있었던가 봐요. 형제는 언니가 하나, 남동생이 하나. 언니는 의사와 결혼했고 남동생은 규슈 대학의 법학부에 다니고 있어요. 훌륭한 가정이죠. 왜 매춘 행위를 할까요? 가족들은 모두 쇼크를 받고 있어요. 매춘을 한 일은 딱한 생각이 들어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호텔에서 남자에게 목이 졸려 죽었으니 쇼크를 받은 거죠. 당연한 일이에요. 조용한 가정이니까."
그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가 속해 있던 콜걸 조직도 우리는 알아냈어요. 꽤 힘겨웠지만, 어떻게든 거기까지는 도달했어요.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시내의 고급 호텔들의 로비를 감시하고 있다가, 매춘을 하고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두세 명의 여자를 경찰에 끌고 갔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보인 것과 같은 사진을 보이며 추궁한 겁니다. 한 명씩이 자백했어요. 모두가 당신처럼 비협조적인 건 아녜요. 그리고 그쪽에서도 약점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가 속해 있던 조직을 알아냈어요. 고급 매춘 조직이에요. 엄청나게 비싸게 먹히는 회원제예요. 나나 당신 따위와는 유감스럽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데에요. 안 그래요? 그것 한 번 하는 데 당신은 7만 엔이나 지불할 수 있어요? 난 지불할 수 없어요. 농담이 아녜요. 그 정도라면 나는 단념하고 마누라하고 하고, 어린애에게 새 자전거를 사 주겠어요. 뭐라고 할까, 궁상스러운 얘기지만 말예요." 그는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령 7만 엔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 하더라도, 나 따위는 절대로 받아주질 않아요. 신원을 조사하거든요. 철저히 조사합니다. 안전제일이에요. 위험한 손님은 받지 않아요. 형사 따위는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아요. 경관이라서 안 된다는 것도 아녜요. 경관이라도 훨씬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은 됩니다. 훨씬 높은 자리. 그러한 사람은 만일의 경우에 도움이 되니까. 나 같은 말단은 안 돼요."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래서 윗분에게 클럽을 강제로 수사하도록 해달라고 신청했습니다. 3일 만에 허가가 나왔어요. 우리가 수사 영장을 갖고 클럽에 뛰어 들었을 때에는, 사무소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정보가 누설되어 있었던 거예요. 어디서 누설되었을까? 어디라고 생각해요?"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물론 경찰의 내부예요. 윗분이 관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정보를 흘린 거예요.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우리 현장의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어디서 누설되었는가를, 부끄러운 일이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에요. 클럽 쪽도 그러한 일에는 익숙해져 있으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데로 옮아가 버리죠. 한 시간 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무소를 빌려, 몇 대의 다른 전화를 사들이고는 똑같은 장사를 시작하는 겁니다. 간단해요. 고객 리스트가 있고, 아가씨들만 확실히 갖추고 있으면, 어디서든 장사는 할 수 있어요. 우리로선 알아낼 길이 없어요. 그것으로 아웃이에요. 실이 툭 끊어져 버렸어요. 그녀가 어떤 손님을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으면, 이야기가 좀 더 진전되어 있었을 텐데. 이래 가지고는 현재로서는 손을 쓸 길이 없어요."
"알 수 없는 일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알 수 없습니까?"
"그녀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회원제의 고급 콜걸이었다면 말예요, 왜 그 손님이 그녀를 죽었을까요? 그런 짓을 하면 누가 죽였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 아녜요?"
"맞아요." 하고 문학은 말했다.
"그러니까 죽인 사람은 고객 리스트에 실려 있지 않은 인물이에요. 그녀의 개인적인 연인이거나 혹은 클럽을 통하지 않고 수수료를 가로채고 있었겠죠.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녀의 아파트를 수색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힌트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두 손 들고 말았어요."
"내가 죽인 건 아녜요"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녜요." 하고 문학은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당신이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고, 당신은 사람을 죽일 타입이 아녜요.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람을 죽이지 않을 타입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요. 이는 육감으로 알 수 있어요. 우리는 프로니까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가르쳐 주면, 그것으로 좋아요. 그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귀찮은 말은 하지 않겠어요. 약속합니다. 정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문학은 말했다.
"글렀군. 실은 윗분도 수사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거예요. 호텔에서 매춘부가 살해되었을 뿐인 사건이니까요.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예요. 그들은, 매춘부 따위는 살해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예요. 그들은. 사체 따위는 거의 본 적도 없습니다. 예쁜 아가씨가 벌거벗겨진 채로 목이 졸려 죽은 것이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를,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매춘 클럽에는 경찰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정치가들도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에요. 이따금 어둠 속에서 금배지가 번쩍입니다. 경찰관이란 이러한 번쩍임에 민감하죠. 이게 잠깐 번쩍이면 거북처럼 목을 움츠려 버려요. 특히 윗분이 말예요. 그래서 아무래도 메이양은 잘못 죽임을 당한 꼴이 되어버릴 것 같군요. 가엾게도."
웨이트리스가 문학의 커피 컵을 치웠다. 나는 절반밖에 마시지 않았다.
"나는 말예요, 그 메이라는 아가씨에게 왠지 친근감이 느꼈어요." 하고 문학은 말했다.
"왜 그럴까요. 스스로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애가 호텔의 침대에 벌겨 벗겨진 채로 목이 졸려 죽어있는 걸 보았을 때,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꼭 이 범인을 붙잡아주겠다고 말예요. 물론 그러한 사체 따위를 우리는 싫증이 나리만큼 많이 보아왔어요. 새삼스레 사체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도 않아요. 토막 난 거나 불타 버린 것 따위를 숱하게 보아왔어요. 그러나 그 사체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했어요. 기묘하게 아름다웠어요.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비쳐들고 있는데, 그 애가 얼어붙은 것처럼 누워 있었어요. 눈을 크게 뜨고, 입 속의 혀가 꼬부라지고 목에는 스타킹이 감겨져 있었어요. 넥타이처럼요. 그리고 다리를 벌려 오줌을 싸고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는 느꼈어요. 그 애는 내게 해결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예요. 그리고 내가 해결해 주기 전에는, 죽 그 아침의 공간 속에서, 그 기묘한 자세로 가만히 얼어붙어 있으리라고, 그래요. 아직 얼어붙어 있는 거예요. 거기서 범인이 잡혀 사건이 해결되기 전에는, 그 애는 해방되지 않아요. 이러한 느낌이 드는 건 별난 일인가요?"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얼마동안 없었는데, 여행이라도 하고 있었습니까? 햇볕에 꽤 그을었군요" 하고 형사는 말했다.
용무가 있어 하와이에 가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좋군요. 부러운데. 나도 그처럼 우아한 쪽으로 직업을 옮기고 싶군요. 밤낮 사체만 보고 있으면 사람이 어두워져요. 사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낭비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소매가 서로 스치는 것도 전생의 인연이라고 하니까요. 체념해 줘요. 나도 때로는 누구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져요. 그런데 그 무엇을 샀습니까, 도뀨 헌즈에서?"
납땜인두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배수관의 청소용품을 샀어요. 집안의 하수구가 막힌 모양이에요."
그가 찻값을 치렀다. 나는 내 자신의 몫을 치르겠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아무리 해도 받지 않았다.
"괜찮아요. 내가 청했어요. 게다가 고작 커피 값이에요. 신경 쓸 것 없잖아요."
다방을 나올 때에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그에게 질문해 보았다. 이러한 창부의 살인사건이 흔히 있는 일인가고.
"글쎄요. 어느 편이냐 하면 흔히 있는 사건이죠." 하고 그는 말했다.
눈매가 약간 날카로워졌다.
"매일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도 아녜요. 매춘부 살인 사건에 무슨 흥미라도 갖고 있습니까?"
별로 흥미 따위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저 잠깐 물어보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가 가 버리자, 위 속에 언짢은 감촉이 남았다. 그 감촉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36
천천히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5월이 창밖을 지나가 버렸다.
내가 일을 하지 않은 지도 벌써 2개월 반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내 일과 관련된 전화가 걸려오는 빈도도 이전보다는 꽤 줄어들었다. 내 존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잊혀 가고 있는가 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은행의 구좌에도 돈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구좌에는 아직 돈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다지 돈이 드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 식사도 스스로 만들고, 세탁도 스스로 한다.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다. 빚도 없고, 멋진 의복이나 자동차를 마련하려고 애쓰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아직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계산기를 사용하여 1개월분의 생활비를 산출하고, 예금 잔고를 그것으로 나누어 보니, 앞으로 5개월쯤은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5개월 내에는 어떻게 될 테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되지 않으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된다. 게다가 책상 위에는 마키무라 히라쿠가 보내준 30만 엔짜리 수표가 아직 그대로 있다. 우선은 굶어 죽지는 않으리라.
나는 생활의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가만히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계속 기다렸다. 일주일에 몇 번씩 풀에 나가 녹초가 되도록 수영을 하고, 식료품을 사갖고 와서 제대로 식사 준비를 하고, 밤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나는 신문을 뒤적이며, 지난 몇 개월 동안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물론 여자가 살해된 사건만을 찾아보았다. 그러한 시점에서 세계를 내다보니, 세상의 꽤 많은 수의 여자들이 살해되어 있었다. 찔려 죽거나 맞아 죽거나 목이 졸려 죽어 있었다. 하지만 키키처럼 보이는 여자가 살해된 흔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시체는 발견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사체가 발견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발에 무거운 돌 따위를 매달아 바다에 집어넣으면 된다. 혹은 산으로 운반하여 묻어버리면 된다. 내가 정어리를 묻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혹은 사고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딕 노스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자동차에 걷어차여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고로 죽은 것도 살펴보았다. 여자가 죽은 사고, 세상에는 많은 사고가 있고, 많은 여자들이 사망하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있고, 불타 죽은 사람이 있고, 가스 중독이 있었다. 하지만 그 피해자들 가운데 키키 같아 보이는 여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자살도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심장 발작을 일으켜 푹 죽어버리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일까지 신문에 실리지는 않는다. 세계에는 온갖 종류의 죽음이 가득해 있으며, 그러한 죽음들이 일일이 친절하게 신문에 보도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보도되는 죽음 쪽이 압도적으로 예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죽어간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있다. 키키는 살해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고에 말려들어 죽었는지도 모른다. 자살했는지도 모른다. 심장 발작을 일으켜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확증도 없다. 죽었다는 확증도 없고 살아 있다는 확증도 없다.
나는 이따금 마음이 내키면 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강한가고 내가 물으면 그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언제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듯한, 초점이 맞지 않고 멍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조가 아무래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보통이에요. 보통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어머니는?"
"멍하니 계세요. 일도 별로 하지 않아요. 종일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어요. 맥이 빠져버린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식료품 구입이라든지?"
"식료품 구입은 아줌마가 해주니까 괜찮아요. 배달도 해주고요. 우리 두 사람은 둘이서 멍한 상태로 있을 뿐예요. 이봐요... 여기 있으면 어쩐지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나요?"
"유감스럽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지. 시간은 자꾸 지나가지. 과거가 불어나고 미래가 적어져 가거든. 가능성이 줄어들고, 회한이 불어나는 거야."
유키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목소리에 별로 기운이 없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뭐에요 그게?"
"뭐에요 그게?"
"흉내 내지 말아요."
"흉내 내는 게 아냐. 그건 너 자신의 마음의 메아리야. 커뮤니케이션의 결여를 증명하기 위해 비에른 보그가 격렬하게 되돌아오는 거야. 스매시!"
"여전히 별난 사람이야." 하고 유키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린애들하고 똑같은 짓이에요."
"틀려. 똑같지 않아. 내 경우는 깊은 내성과 실증의 정신에 의해 확고히 뒷받침되어 있어. 이는 비유에서의 메아리야. 메시지로서의 게임이야. 단순한 어린애들의 흉내 내기와는 질이 달라."
"흥, 어이가 없어."
"흥, 어이가 없어."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그만해요. 그건, 이제!" 하고 유키가 외쳤다.
"그만 하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목소리에 별로 기운이 없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응, 그럴지도 몰라요" 하고 말했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엄마의 기분에 끌려들어가 버려요.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은 강한 사람이니까. 영향력이 있어요. 틀림없이. 그 분은 주위의 사람들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거든요. 자신의 일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강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말려들어 버려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녀가 블루이면, 나도 블루가 되는 거예요. 건강할 때는 나도 그 영향으로 건강해지지만 말예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때로는 거기서 나와서 나하고 둘이서 노는 편이 낫겠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내일 그리로 맞으러 갈까?"
"응, 좋아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당신과 얘기를 하니까 약간 기운이 나는 것 같아요."
"좋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았어." 하고 유키가 흉내를 내었다.
"관 둬."
"관 둬."
"내일 만나" 하고 나는 말하고, 흉내를 내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아메는 확실히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예쁘게 다리를 포개고, 깊이가 없는 단조로운 눈으로 무릎 위에 놓인 사진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인상파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창문은 열려져 있었지만, 바람이 없는 날이어서 커튼이나 책의 낱장조차도 산들거리지 않았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그녀는 약간 고개를 들어 의지할 곳이 없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공기가 흔들리는 듯한 어렴풋한 미소였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5센티미터쯤 들어 올려 맞은편 의자에 나를 앉게 하였다. 일을 거드는 여성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짐은 딕 노스의 집에 운반해 두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부인을 만났어요?" 하고 아메가 물었다.
"아뇨, 만나지 않았어요. 현관에 나온 사람에게 짐을 건네주었을 뿐이에요."
아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무튼."
"괜찮아요. 대수로운 일도 아닌 걸요."
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 앞으로 두 손을 가져가 손바닥을 합쳤다. 이어 눈을 뜨고 방안을 휙 둘러보았다. 방에는 나와 그녀밖에 없었다. 나는 커피 잔을 집어 들고 마셨다.
아메는 언제나처럼 댕거리 셔츠와 잔뜩 구겨진 면바지를 입고 있지는 않았다. 오늘은 우아한 레이스가 달린 흰 블라우스와 연한 초록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칼을 단정하게 꾸미하고, 입술연지도 발랐다.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평소의 넘칠 듯한 생명력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위태로우리만큼 섬세한 매력이 그녀의 주위를 희미하게 증기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증기는 금방이라도 흔들리며 사라져 버릴 듯이 보이지만, 그저 그렇게 보일 뿐, 이는 언제까지나 그녀의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유키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서로 반대되는 양 극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는 세월과 경험에 의해 육성되고 갈고 닦여진 아름다움이었다. 이는 그녀의 독자성을 말해 줄 만한 아름다움이고 개성이었다. 이 아름다움은 말하자면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이 아름다움을 제대로 파악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유효히 사용할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유키의 아름다움은 대부분의 경우 무목적이었고, 때로는 그녀 자신이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생각하곤 하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중년의 여성을 보는 일은, 인생에서 커다란 기쁨 가운데 하나다.
"왜 이럴까?" 하고 아메는 말했다.
공중에 무엇인가를 오똑하니 띄워 놓고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졌을까?"
"사람이 하나 죽었기 때문이겠죠.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커다란 사건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하고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아메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어리석지 않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겠죠?"
"이럴 줄은 몰랐다는 건가요?"
"그래요. 그런 셈이죠."
"대수로운 사나이는 아니었어요. 별다른 재능도 없었어요. 하지만 성실한 사나이였죠. 훌륭히 맡은 일을 다 했어요. 오랜 세월에 걸쳐 손에 넣은 것을 위해 버리고, 그리고 죽어 갔어요."
"죽은 후에 그의 좋은 점을 알게 되었어요." 하고 나는 말할까 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말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이럴까?" 하고 그녀는 그 공간에 띄워놓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 나와 어울리는 남자들은 모두 못 쓰게 되어 갈까? 왜 모두들 이상한 쪽으로만 가버릴까? 왜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까? 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이는 질문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블라우스의 옷깃에 달린 레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우아한 동물의 청결한 내장의 주름처럼 보였다. 재떨이 속에서 그녀의 샐럼이 조용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연기는 훨씬 위쪽으로 올라가 분해되고, 침묵의 먼지와 동화되었다.
유키가 옷을 갈아입고 찾아와, 내게 이제 가요. 하고 말했다. 나는 일어나 이제 가보겠습니다. 하고 아메에게 말했다. 아메는 아무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유키가 "엄마, 우리 다녀오겠어요." 하고 외쳤다. 아메는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그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잠시 드라이브하고 오겠어요. 저녁 식사는 필요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우리는 소파에 앉은 채 움쩍도 하지 않는 아메를 남겨두고 집을 나왔다. 그 집 안에는 아직 딕 노스의 기척이 남아 있는 듯했다.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빵을 자를 때에 발을 사용하는 가고 내가 물었을 때에 그가 보여준 정말로 우스운 듯한 표정을. 정말 이상한 사나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죽은 다음에 존재감이 더 뚜렷해진다.
37
그러한 식으로 나는 몇 번인가 유키와 만났다. 세 번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하꼬네의 산 속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내는 데 대한 특별한 감홍을 품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한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싫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남자친구가 죽어 외돌토리가 된 어머니가 의기소침해져 있으므로, 어떻게든 돌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특별히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바람에 날려가듯이 그저 그곳으로 운반되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의 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해 그녀는 무감동했다.
나를 만나면 유키는 그 동안만 약간 기운을 되찾았다. 농담을 하면 조금씩 반응이 되돌아오고 목소리도 이전의 시원스런 긴장감을 되찾았다. 그러나 하꼬네의 집으로 돌아가면 또 돌아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없어지고 눈은 무감동해졌다. 마치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자전을 중지해 가고 있는 행성처럼.
"이봐, 한 번 또 도쿄에서 지내보는 편이 낫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말야. 그다지 오랫동안이 아니라도 돼. 사흘이나 나흘이면 돼요. 잠시 환경을 바꿔 보아도 나쁘지 않아. 하꼬네에 있으면 점점 기운이 없어져 가는 것 같아서 말야. 하와이에 있던 때에 비하면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
"할 수 없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아저씨의 말은 잘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시기예요. 지금은 어디에 있든 마찬가지예요."
"딕 노스가 죽고, 어머니가 저런 상태니까?"
"그래요, 그러한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엄마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그게 해결되는 것도 아녜요. 내 힘으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어요. 뭐라고 할까, 결국 그러한 흐름이에요. 운명이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마찬가지예요. 몸과 머리가 잘 연결되지 않아요."
우리는 해안에 드러누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모래사장에 자라고 있는 풀잎을 흔들고 있었다.
"운명." 하고 나는 말했다.
"운명." 하고 유키는 연약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이에요. 나빠지고 있어요. 나와 엄마는 그러한 주파수가 공통되어 있는가 봐요. 지난번에도 말한 것처럼 엄마가 활기가 있으면 나도 활발해지고, 엄마가 움츠러들면 나도 점점 기력을 잃어가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 잘 알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즉 엄마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지, 혹은 내가 엄마를 끌어당기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무튼 그녀와 나는 무엇에 의해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달라붙어 있든 떨어져 있든 마찬가지에요."
"이어져 있어?"
"그래요, 정신적으로 이어져 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어떤 때는 그러한 게 싫어서 반발하고, 어떤 때는 어찌 됐든 상관없다고 체념하여 녹초가 되어 버려요. 단념하는 거예요. 이따금, 뭐라고 해야 할까,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수가 있어요. 뭔가 외부의 커다란 힘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신이 아닌지를 알 수 없게 돼요. 그래서 체념해 버려요. 모든 걸 내팽개쳐 버리고 싶어져요. 혐오감이 들어요. 나는 아직 어린애예요. 하고 외치고 방의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고 싶어져요."
나는 저녁때에 그녀를 하꼬네의 집으로 데려다 주고 나서 도쿄로 돌아왔다.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는가고 아메가 권했지만, 언제 나처럼 거절하였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녀들 모녀와 식탁을 함께 하는 일을, 나로선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멍한 눈을 한 어머니와 무감동한 딸. 사자의 기억. 무거운 공기. 영향을 주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 침묵,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밤. 그러한 정경을 상상하기만 해도, 위가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 나오는 미치광이 모자 장수의 다화회가 훨씬 나을 것이다.
거기에는 부조리한 대로 일단은 움직임이라는 게 있다.
나는 카 스테레오로 옛 로큰롤을 들으면서 도쿄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면서 저녁 식사를 만들고, 그것을 혼자서 조용히 즐겁게 먹었다.
유키와 만나 둘이서 특별히 무슨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드라이브하고, 해안에 드러누워 멍하니 구름을 쳐다보거나, 후지야 호텔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아이노꼬에 가서 보트를 타곤 했다. 그리고 둘이서 소곤거리듯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마치 연금 생활자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날, 유키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오다와라까지 내려가 신문을 사서 살펴보았지만 대단한 영화는 상영되고 있지 않았다. 재개봉관에서 고혼다가 나오는 "짝사랑" 을 상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혼다는 내가 중학교 때의 한 반 친구이고 지금도 이따금 만나고 있다고 말하자, 유키는 그 영화에 흥미를 갖는 듯했다.
"아저씬 그 영화 보았어요?"
"보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물론 여러 번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러 번 보았다고 하면, 그 이유를 새삼스레 설명해야 하니까.
"재미있었어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재미없어." 하고 나는 이내 말했다.
"시시한 영화야. 아주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필름의 낭비야."
"친구는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 영화에 대해?"
"시시한 영화이고, 필름의 낭비라고 말하고 있어."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출현하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틀림없는 말이야."
"하지만 그걸 보고 싶어요."
"좋아, 그걸 지금부터 보러 가자구."
"아저씬 괜찮아요? 두 번 보아도?"
"괜찮겠지. 달리 할 일도 없고, 게다가 특별히 해독을 주는 영화도 아니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해독조차 주지 않는다구."
나는 영화관에 전화를 걸어 "짝사랑"이 시작되는 시간을 알아보고 그때까지 성안의 동물원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성안에 동물원이 있는 도시는 오다와라 밖에는 없을 것이다. 별난 도시다. 우리는 주로 원숭이를 보고 있었다. 원숭이를 보고 있으면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 광경이 어떤 종류의 사회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리라.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는 게 있다. 남의 일에 참견하고 있는 게 있다. 경쟁심이 강한 게 있다. 뚱뚱하고 살이 찌고 추악한 원숭이가 산 위에서 주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태도가 고압적인 데 비해 그 눈은 두려움과 시기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더러웠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잔뜩 살이 찌고 추악하며 음산해질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물론 원숭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평일의 점심때였으므로 영화관은 말할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의자가 딱딱하고 벽장 속에 있는 듯한 냄새가 났다. 나는 휴식 시간에 초코렛을 사서 유키에게 주었다. 나도 뭔가 사 먹으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식욕을 돋을 만한 게 매점에는 하나도 놓여 있지 않았다. 판매하는 아가씨도 적극적으로 무엇을 팔려고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키의 초코렛을 먹었는데 초코렛을 먹은 것은 거의 1년 만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키는 "음" 하고 말했다.
"초코렛을 좋아하지 않아요?"
"흥미를 가질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아. 단지 흥미를 가질 수가 없어"
"이상한 사람이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초코렛에 흥미를 가질 수 없다니, 정신에 이상이 있어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 그러한 경우가 있다구. 너는 달라이 라마를 좋아하니?"
"뭐예요, 그건?"
"티베트의 가장 훌륭한 승려야."
"몰라요, 그런 건."
"그럼 넌 파나마 운하를 좋아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요."
"혹은 넌 일부 변경선을 좋아하니 싫어하니? 원주율은 어때? 독점 금지법은 좋아해? 쥬라기는 좋아해 싫어해? 세네갈 국가는 어때? 1987년 11월 8일은 좋아해 싫어해?"
"시끄러워요, 원. 정말 어이가 없어. 잇따라 잘도 생각해내는 군요." 하고 유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어요, 잘. 아저씬 초코렛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고, 단지 흥미를 가질 수 없을 뿐이란 말이죠. 알았어요."
"알아주면 됐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줄거리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변히 영화 따위는 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키도 이 영화가 지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 한숨을 쉬거나 코를 킁킁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었다.
"지겨워" 하고 그녀는 견딜 수 없는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느 바보가 일부러 이 따위 지독한 영화를 만들까요?"
"당연한 의문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어느 바보가 일부러 이 따위 지독한 영화를 만들까?"
스크린 위에서는 잘생긴 고혼다가 수업을 하고 있었다. 연기이긴 하지만, 그의 가르치는 방식은 훌륭했다. 대합이 호흡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알기 쉽고 친절하며 유머로 충만해 있었다. 나는 그의 수업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주역인 소녀도, 손으로 턱을 괴고 교단 위의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보았는데도, 그 장면을 주의해 바라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게 당신의 친구예요?"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쩐지 얼간이같이 보이는데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확실히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실물 쪽이 훨씬 단정해. 실물은 그처럼 지독하지 않아. 머리도 좋고 재미있는 사나이야. 영화가 엉터리야."
"엉터리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게 좋은데."
"맞아. 하지만 거기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어. 이야기하려면 길어져서 이야기하지 않지만 말야."
영화는 너무 당연하리만큼 당연한 줄거리를 거쳐 평범하게 진전되어 갔다. 대사도 평범할 뿐만 아니라 음악도 평범했다. 타임캡슐에 넣어서 '평범'이라는 딱지를 붙여 땅에 묻어버리고 싶어질 정도의 영화였다. 이윽고 키키가 나오는 그 장면에 이르렀다. 이 영화 속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다. 고혼다가 키키와 자고 있다. 일요일 아침의 장면이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스크린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블라인드로부터 비쳐드는 아침 햇살. 거기에 있는 건 언제나 똑같은 빛이다. 똑같은 색깔, 똑같은 각도, 똑같은 밝기. 나는 그 방의 모든 일에 정통해 있다. 그 방의 공기를 들여 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혼다가 보인다. 그의 손이 키키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아주 우아하게, 마치 기억 속의 섬세한 도랑을 더듬어 가듯이 키키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키키의 몸이 민감하게 이에 반응한다. 그녀의 몸이 희미하게 떨린다. 피부에는 느껴지지 않으리만큼 미묘한 공기의 흐름에 촛불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그 떨림을 보면 나는 숨이 막힐 것 같다. 고혼다의 손가락과 키키의 등이 클로즈업 된다. 이윽고 카메라가 이동하여 간다. 키키의 얼굴이 보인다. 주인고인 소녀가 다가온다. 그녀는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가 문을 똑똑 노크하고 문을 연다. 왜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새삼스레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이는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이다. 더욱이 평범한 영화인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고혼다와 키키가 침대 위에서 껴안고 있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이며 쿠키 따위가 들어 있는 상자를 떨 군 채 달아나 버린다. 고혼다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키키가 "이봐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고 말한다. 마찬가지다. 언제나 마찬가지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일요일 아침의 햇빛과 고혼다의 손가락과 키키의 등을 한 번 더 머리에 떠올렸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그러한 세계가 가공의 시공간 속에 오똑하니 떠돌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 유키는 앞으로 상반신을 구부리고, 이마를 앞좌석의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다. 양팔은 추위를 막으려는 것처럼 가슴 앞에 꼭 포개어져 있었다. 그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움쩍도 하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치 거기에 얼어붙어 죽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하고 나는 물었다.
"별로 괜찮지 않아요." 하고 유키는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무튼 밖으로 나가자. 어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애?"
유키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딱딱하게 굳어진 팔을 잡고 영화관을 나왔다. 객석의 통로를 걸어가는 우리의 뒤쪽 화면에서는, 고혼다가 또 교단에 서서 생물수업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이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지,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나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몸을 부축하면서, 차를 세워둔 장소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유키는 입술을 꼭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영화관으로부터 차를 세워둔 곳까지는 겨우 200미터 정도의 거리였지만, 무척 긴 거리로 느껴졌다. 이대로 영원히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38
나는 유키를 조수 자리에 앉히고, 창문을 열었다. 비는 조용히 계속 내리고 있었다. 눈에 또렷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비였지만, 이 비는 아스팔트의 노면을 조금씩 연한 검정색으로 물들여 갔다. 비에 젖어 흙먼지 냄새도 났다. 우산을 펴드는 사람도 있고, 개의치 않고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의 비다. 별로 바람이 부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조용히 곧바로 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험 삼아 손바닥을 창밖에 내밀어 보았지만, 약간 습기 찬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유키는 창틀에 팔을 대고 그 위로 턱을 가져가 고개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으로 얼굴의 절반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한 채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호흡함에 따라 등이 규칙적으로 흔들릴 뿐이었다. 그것은 아주 희미한 흔들림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것은 호흡이었다. 그러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약간의 힘을 가하기만 해도 팔꿈치나 고개가 툭 부러져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토록 취약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보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는 내가 어른이 된 때문일까? 내가 불완전하긴 해도 내 나름대로 세계를 살아갈 방법을 터득하고 있고, 이 아이가 그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돼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유키는 말하고, 엎드린 자세로 침을 삼켰다. 삼킬 때에 부자연스러우리만큼 큰 소리가 났다.
"어디든 사람이 없고 조용한 데로 데려다 줘요.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
"바다도 괜찮아?"
"어디든 좋아요. 하지만 차를 천천히 몰아요. 너무 흔들리면 토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머리를 깨지기 쉬운 달걀을 다루듯이 살며시 손으로 받쳐 차안으로 들여놓고, 머리 받침대에 기대게 하고는 창문을 절반쯤 닫았다. 그리고 교통사정이 허용하는 한 천천히 차를 운전하여, 고꾸후쓰 해안까지 나갔다. 해안에 차를 세우고 모래사장까지 데리고 가자, 토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토하였다. 위 속에는 대수로운 게 들어 있지는 않았다. 토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물렁물렁한 갈색의 초코렛 액체를 토해 버리자, 다음에는 위액이나 공기 따위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장 괴로운 방식으로 토하고 있다. 몸이 경련을 일으킬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몸이 쥐어 짜여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위가 주먹만한 크기로 오므라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문질렀다. 여전히 안개 같은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유키는 비가 내리고 있는 일 따위는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위의 뒤쪽 부근을 가벼이 눌러보았다. 근육이 마치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면으로 된 여름 스웨터와 색이 바랜 블루진 차림에, 컨버스의 붉은 농구화를 신은 채 모래사장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오므려 뒤쪽으로 돌려놓고, 등을 천천히 위아래로 계속 쓰다듬었다.
"괴로워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잘 알고 있어."
"이상한 사람이야." 하고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도 이전에 그러한 식으로 토한 적이 있거든. 아주 괴로웠어. 그래서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곧 가라앉아. 조금 더 견디면 끝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 10여 분 만에 경련은 멎었다. 나는 그녀의 입 언저리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토사물 위에 발로 모래를 모아 덮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잡고 그녀의 몸을 부축하여, 서로 기대어 앉을 수 있는 제방 쪽으로 데리고 갔다.
나와 유키는 비를 맞으면서 그대로 죽 거기에 앉아 있었다. 니시소오 바이패스를 달리는 자동차의 타이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다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슬비이긴 해도 내리기 시작할 무렵보다는 그 기세가 약간 거세져 있었다. 해안에는 두세 명의 낚시꾼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회색의 레인 햇을 쓰고, 우의를 단단히 몸에 걸치고는, 커다란 낚싯대를 기치처럼 물가에 세우고 가만히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밖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키는 머리를 내 어깨에 푹 기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멀리서 바라보았다면, 틀림없이 우리를 사이가 좋은 연인들인 줄 알았으리라.
유키는 눈을 감고, 여전히 아주 조용하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습기를 띤 앞 머리칼 하나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호흡함에 따라 비강이 희미하게 떨렸다. 얼굴에는 한 달 전의 햇볕에 그을은 자취가 아직 희미한 기억처럼 남아 있었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는 그것이 어쩐지 건강하지 못한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비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닦고, 눈물 자국을 지워주었다. 가로막는 것도 없는 바다 위로, 비는 소리도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잠자리의 애벌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자위대의 대잠 초계기가 둔한 소리를 내면서 몇 번이고 머리 위를 통과하여 갔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들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힘없는 시선을 내게 돌렸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버지니아 슬림을 꺼내어, 성냥을 그었다. 좀처럼 불이 켜지지 않았다. 성냥을 그을 힘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버려 두었다. "지금 담배를 피우면 좋지 않다." 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까스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성냥개비를 손가락으로 튕겨 내버렸다. 그리고 두 모금 빨고 이마를 찌푸리고는, 담배도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튕겨 내버렸다. 담배는 콘크리트 위에서 잠시 타들어가다 이윽고 비에 젖어 껴졌다.
"위는 아직도 아픈가?" 하고 나는 물었다.
"아직 조금."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럼 좀 더 여기에 가만히 있자구. 춥지는 않아?"
"괜찮아요. 비에 젖는 편이 더 기분이 좋아요."
낚시꾼들은 여전히 태평양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낚시는 대체 어떤 점이 재미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고작 물고기를 낚는 일뿐이잖은가? 왜 그 정도의 일 때문에 비 내리는 날에 온종일 물가에 서서 바다를 노려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는 취미라는 것이다. 신경증적인 열세 살짜리 소녀와 해안에 나란히 앉아 비에 젖어 있는 것도 취미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저, 아저씨의 친구 말에요." 하고 유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묘하게 딱딱하게 굳어진 목소리였다.
"친구?"
"응, 아까 그 영화에 나왔던 사람."
"본명은 고혼다라고 해." 하고 나는 말했다.
"야마데선의 역 이름과 똑같애, 매구로 다음, 오오자키 못미처에 있는 역말야."
"그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어깨가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마치 물에 빠졌다 갓 구출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죽였어? 누구를?"
"그 여자, 일요일 아침에 그와 함께 자고 있던 사람 말예요."
나는 그래도 아직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머리는 어쩔 수 없이 혼란되어 있었다. 상황의 어딘가에 틀린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본래의 흐름이 손상되어 있다. 그러나 그 틀린 힘이 어디서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절반쯤 무의식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 영화에선 아무도 죽지 않아 넌 뭔가 착각하고 있군."
"영화 얘기가 아녜요. 실제로 이 세계에서, 정말로 죽인 거예요. 난 분명히 알 수 있어요." 유키는 이렇게 말하고 내 팔을 꼭 잡았다.
"무서웠어요. 위 속에 뭔가 무거운 게 꾹 처넣어진 것 같았어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웠어요. 무서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바로 그게 나타난 거예요. 알 수 있어요. 분명히. 아저씨 친구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거짓말이 아녜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나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졌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슬비를 맞으며 몸이 궂어진 채로 가만히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치명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모든 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미안해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내 팔을 꼭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솔직히 말해, 난 알 수 없어요. 나는 그걸 사실이라고 느끼지만,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어요. 게다가 그런 말을 하면, 당신도 다른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내게는 그게 분명히 보이고, 나 한 사람 속에 그걸 가두어 둘 수는 없으니까요. 두려워요. 굉장히, 자신이 혼자서 그걸 떠맡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내게 화를 내지 마세요. 너무 책망을 당하면 나는 무너져 버려요."
"아냐, 책망하고 있지 않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혀 이야기해 봐." 하고 나는 유키의 손을 살며시 잡고 말하였다.
"네게는 그게 보여?"
"그래요, 분명히 그게 보여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그 사람이 죽었어요. 영화 속의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였어요. 그리고 그 승용차로 사체를 운반했어요. 아주 먼 곳으로, 그 차, 당신이 한 번 나를 태워준 이탈리아 차 말예요. 그건 그의 승용차죠?"
"그래. 그의 차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밖에 무엇을 알 수 있지?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해 봐. 아무리 세밀한 일이라도 좋아. 알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가르쳐 주지 않겠어?"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는, 두세 번 시험하듯이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밖의 일은 별로 알 수 없어요. 흙냄새, 삽, 밤, 새 소리... 그 정도예요. 그 여자를 목 졸라 죽이고, 그 차로 어디론가 운반하여 땅에 묻었어요. 그뿐예요. 하지만 말예요, 이상한 얘기지만 악의가 통 느껴지지 않아요. 범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마치 의식 같아요. 아주 조용해요. 죽이는 쪽이나 죽임을 당하는 쪽도 무척 조용해요. 이상한 조용함. 나로선 잘 표현할 수가 없어요.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처럼 조용해요."
나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 고요한 어둠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안 되었다. 어떻게든 참고 견디며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했지만, 그것도 안 되었다. 머릿속에 기록된 온 세계의 산물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나 흩뜨려져 버렸다. 나는 유키가 한 말을 그저 단순히 받아들였다. 그대로 믿은 것도 아니고, 믿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마음속에 그녀의 말을 자연히 스며들게 했을 뿐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포함하고 있는 힘은 압도적이며 치명적이었다. 그저 그녀가 입에 올린 그 가능성이, 지난 몇 개월 동안에 내 속에 막연히 형성되어 있던 어떤 종류의 체제를 분쇄해 버렸다. 그 체제는 막연하고 잠정적이며, 엄밀히 말하면 실증성이 결여되어 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확고한 존재감과 균형을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감이나 균형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무엇인가가 끝난 듯이 느낌이 들었다. 아주 미묘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무엇인가는 끝나버린 것이다. 무엇인가는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하자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또 고독해졌다. 비 내리는 모래사장에 열세 살짜리 소녀와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는 나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고독했다.
유키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꽤 오랫동안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있어 주었다. 작고 따스한 손이었지만, 어쩐지 현실의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따스하고 작은 감촉은 과거 기억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따스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돌아가요." 하고 나는 말했다.
"집까지 데려다 주겠어."
나는 그녀를 하꼬네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와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 눈에 띄는 테이프를 카 스테레오에 넣고 틀었다. 무슨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그게 무슨 음악인지 통 알 수 없었다. 나는 운전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나는 손과 발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세밀하게 기어를 바꾸고, 주의 깊게 핸들을 잡았다. 와이퍼가 뚝 뚝 하고 단조로운 소리를 냈다.
나는 아메를 만나고 싶지 않아, 집의 계단 아래서 유키와 헤어졌다.
"이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녀는 운전석의 창 밖에 추운 듯이 팔짱을 꼭 끼고 서 있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덮어놓고 받아들이지 말아요. 내게는 단지 그게 보였을 뿐이에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어요.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하진 말아요. 당신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난 무너져 버리니까."
"미워하지 않아." 하고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말을 덮어놓고 받아들이지도 않아. 하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사실이 타가나요. 안개가 걷히듯이 그것은 나타난다구. 나는 그걸 알 수 있어. 네가 한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우연히 너를 통해 그 진실이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야. 네 탓이 아냐. 네 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 아무튼 나는 스스로 그것을 확인해 보겠어. 그러지 않고는 아무것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아."
"그를 만날 거예요?"
"물론 만나, 그리고 직접 물어보겠어. 그 길밖에 없어."
유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녜요?"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아,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네게 화를 낼 까닭이 없잖아. 너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고 있지 않아."
"당신은 광장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왜 과거형으로 이야기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에요."
"나도 너 같은 아가씨를 만난 건 처음이야."
"안녕"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덧붙여 말하거나, 내 손을 잡거나, 또는 볼에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론 그러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차 속에는 그녀의 그러한 머뭇거림의 가능성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음악을 듣고, 전방에 분명히 신경을 기울이면서 차를 운전하여, 도쿄로 돌아왔다. 도메이 고속도로를 벗어날 무렵에 비가 멎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시부야의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까지, 와이퍼를 정지시키는 일을 잊고 있었다. 비가 멎은 건 알아챘지만, 와이퍼를 정지시키는 일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머리가 혼란되어 있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 나는 주차한 스바루 속에서 핸들을 잡은 채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핸들로부터 손을 떼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39
혼란을 정리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제일 먼저 유키가 한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가능성의 문제로서 분석해 보았다. 생각이 미치는 한도의 범위로부터, 감정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는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내 감정은 처음부터 벌에 쏘인 것처럼 멍하니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가능성은 내 속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고 증식하여 어떤 확실성을 띠어 갔다. 그 흐름에는 거역할 수 없으리만큼 확고한 힘이 있었다. 나는 부엌에 서서 물을 끓이고, 커피의 원두를 갈고, 오랫동안 꼼꼼하게 커피를 내렸다. 찬장에서 컵을 꺼내 커피를 따르고,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것을 다 마셔갈 무렵에는, 가능성이 거의 확신에 가까운 것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 '그대로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유키는 정확한 이미지를 본 것이다. 고혼다가 키키를 죽이고 어디로 사체를 운반하여 땅에 묻은 것이 확실하다.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확증도 없는 것이다. 단지 감수성이 예민한 열세 살짜리 소녀가 영화를 보고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나는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쇼크는 받았다. 하지만 나는 유키가 본 이미지를 거의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째서일까? 왜 그처럼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대로 어쨌든 나는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다음 문제. 메이를 죽인 것도 그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 까닭은? 왜 고혼다가 메이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역시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혼다가 키키를, 혹은 키키와 메이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한 가지도 생각해 낼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결국, 유키에게도 말한 것처럼 내가 고혼다를 만나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까? 나는 자신이 그를 향해 "자네가 키키를 죽였나?" 하고 질문하는 정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건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짓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추잡스럽다.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는 자신을 상상하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리만큼 추잡스레 느껴졌다. 거기에는 분명히 뭔가 그릇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적당히 사실을 호도한 채 되어가는 모양을 살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 괴기스럽든 그릇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든 간에,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어 보려 했다. 하지만 안 되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고 무릎 위에 놓인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까지 그 번호를 다 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단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혼다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와 그는 친구였다. 그가 만일 키키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는 내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상실하여 왔다. 안 된다. 아무래도 전화를 할 수 없다.
나는 녹음 전화 장치의 스위치를 꽂고, 전화벨이 울려도 절대로 수화기를 집어 들지 않았다. 만일 고혼다로부터 지금 전화가 걸려 와도, 지금의 상태로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몇 번씩 전화벨은 울렸다.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는 알 수 없다. 유키인지도 모른다. 유미요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벨 소리에 응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에게 걸려온 것이든 간에, 지금의 나로서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일곱 번이나 여덟 번쯤 벨이 울리고는 끊어졌다. 나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화국에 근무하고 있던 여자친구를 생각해 냈다. "달나라로 돌아가요, 당신은" 하고 그녀는 내게 말하였다. 정말이야, 네 말이 옳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확실히 달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공기가 내게는 너무 진하다. 이곳의 중력이 내게는 너무 무겁다.
4,5월쯤 나는 가만히 생각해 잠겨 있었다. 무슨 까닭일까 하고, 나는 그 동안 약간만 식사를 하고, 약간만 잠을 자고,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몸의 기능을 잘 파악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어,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가 상실되어 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속 상실하여 가고 있다.' 언제나 혼자 뒤에 남겨져 버린다. 이런 식으로,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나 고혼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상황도 다르다. 생각하거나 느끼는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서로를 상실하려 하고 있다.
나는 키키의 일을 생각하였다. 나는 키키의 얼굴을 생각해 내었다.
"왜 그러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죽어 땅 속에 묻혔다. 죽은 '정어리'와 마찬가지로, 결국 키키는 당연히 죽어야 했기에 죽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체념이었다. 광대한 해면에 내리쏟아지는 비처럼 조용한 체념이었다. 나는 슬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영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면, 산뜻하고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든 게 소리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모래 위에 그려진 표지를 바람이 날려 버리듯이, 이는 그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리하여 또 사체 하나가 불어났다. 네스미, 메이, 딕 노스, 그리고 키키. 이로써 넷이다. 나머지는 둘. 더 이상 누가 죽는단 말인가?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모두들 죽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조만간, 그리고 백골이 되어 그 방으로 운반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기묘한 방들이 내 세계와 결부되어 있었다. 호놀룰루 다운타운의 그 사체를 모아둔 방, 삿포로 호텔의 어둡고 차가운 '양사나이'의 방. 그리고 고혼다가 키키를 껴안고 있던 그 일요일 아침의 방.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머리가 돌아버린 것일까? 나는 정신이 온전할까 하고, 모든 사건이 비현실의 방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철저히 데포르메 되어 현실 속으로 도입된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무엇이 진정한 현실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실이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그 3월의 삿포로는 현실이었을까? 그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딕 노스와 둘이서 마카하의 해안에 앉아 있던 일은 현실일까? 그것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오로지 진정한 현실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외팔이 사나이가 어떻게 그토록 깨끗이 빵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왜 호놀룰루의 콜걸이, 키키가 안내한 죽음의 방의 전화번호를 내게 적어두고 간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게 되면, 나의 세계 인식 자체가 뒤흔들려 버린다.
내 정신의 광기를 띠고, 병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이 광기를 띠고, 그리고 병들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어쨌든, 어느 쪽이 광기를 띠고 어느 쪽이 병들어 있든 간에, 나는 이 엉거주춤한 채로 방치된 혼란의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슬픔이든 노여움이든 간에, 나는 어쨌든 거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역할이다. 그것이 모든 사물이 내게 시사 하여 온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 기묘한 장소에까지 운반되어 온 것이다.
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번 더 댄스의 스텝을 되찾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리만큼 춤을 잘 추지 않으면 안 된다. 스텝,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것은 분명히 결정되어 있는 일이다.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이는 내 머릿속에 1000퍼센트의 현실로서 새겨져 있다. 춤을 추는 것이다. 아주 능숙하게,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봐, 자네가 키키를 죽였나?"
하지만 안 되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전화기 앞에 앉기만 해도,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떨리며 혼란에 빠졌다. 옆으로 불어 닥치는 강한 바람을 받은 때처럼 내 몸이 흔들리고, 숨을 쉬기는 어려워졌다. 나는 고혼다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고,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고혼다는 나라는 존재의 일부였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다이얼을 틀리게 돌렸다. 몇 번 시도해 봐도, 정확한 숫자의 배열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섯 번인가 여섯 번째에 나는 수화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안 된다. 나로선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스텝을 잘 밟을 수가 없다.
방안의 조용함이 내 마음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전화 벨 소리를 듣기도 싫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쏘다녔다. 마치 회복기의 환자처럼 발을 움직이는 방식이나 도로를 횡단하는 방식 따위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리고 붐비는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가거나, 공원에 앉아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견딜 수 없으리만큼 고독했다. 나는 무엇을 꽉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붙잡을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매끄러워 포착할 길이 없는 얼음의 미궁 속에 나는 있었다. 어둠은 희고, 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 고혼다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잃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고혼다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전화가 걸리기 전에 고혼다가 내 아파트를 찾아온 것이다. 그건 또 비 내리는 날의 밤이었다. 고혼다는 둘이서 요꼬하마에 갔던 때와 마찬가지로 흰 레인코트를 입고, 안경을 끼고, 코트와 같은 색깔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비가 꽤 새 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은 받고 있지 않았다. 모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자 생긋 미소 지었다. 나도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군." 하고 그는 말했다.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아 직접 와본 거야. 몸이 안 좋았니?"
"별로 좋지는 않았네." 하고 나는 천천히 말을 골라 대답하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내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럼 갔다 다음에 올까? 어쩐지 그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직접 찾아오는 건 좋지 않았어. 자네가 건강해지면 또 만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찾았다.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지만, 고혼다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니, 몸이 특별히 나쁜 건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별로 잠을 못 자고, 별로 식사를 하지 못해 피로한 것처럼 보일 뿐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고, 자네에게 할 이야기도 있어. 밖으로 나가자구.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하고 싶군."
나와 그는 마세라티를 타고 거리로 나갔다. 마세라티는 나를 긴장시켰다. 비에 젖은 가지각색의 네온 속을, 그는 한참동안 목표도 없이 차를 몰았다. 고혼다의 기어 체인지는 부드럽고 정확했다. 차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가속이 부드럽고, 브레이크는 조용했다. 거리의 소음이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처럼 우리 주위에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업계의 사람들을 만날 우려가 없고,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고,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하고 그는 말하고,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깥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30분쯤 거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그는 단념했다.
"아이고 맙소사. 어찌 된 셈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군" 하고 고혼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는 어때? 어디 알고 있는 데 있나?"
"아니, 나도 통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직 현실과 잘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오케이,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볼까?" 하고 고혼다는 쩌렁쩌렁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
"철저히 시끄러운 데로 가자구. 그러면 도리어 단 둘이서 마음을 가라앉혀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나쁘지 않지만 이를테면 어디?"
"세이키즈."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피자라도 먹을까?"
"나는 별로 상관없어. 피자는 싫어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데 가면 모두들 자네 얼굴을 알아보지 않을까?"
고혼다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여름날의 해질녘의 마지막 햇빛과도 같은 미소였다.
"자네는 지금까지 세이키즈에서 유명 인사를 본 적이 있나?"
주말이어서 세이키즈는 사람들로 붐비고 시끄러웠다. 똑같은 줄무늬 셔츠를 입은 딕시랜드 재즈밴드가 밴드 스탠드에서 <타이거레그>를 연주하고, 맥주를 너무 마신 듯한 학생 단체가 이에 질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아무도 우리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피자를 굽는 향기로운 냄새가 가게 안에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피자를 주문하고, 생맥주를 사가지고 제일 안쪽의 화려한 티파니 램프가 드리워진 테이블에 앉았다.
"이봐, 내 말대로지? 홀가분하고 도리어 마음이 안정이 돼" 하고 고혼다가 말했다.
"그렇군." 하고 나는 인정했다.
확실히 이야기하기가 쉬울 듯했다. 우리는 맥주를 몇 잔 마시고, 그리고 구워진 뜨거운 피자를 먹었다. 나는 오랜만에 시장기를 느꼈다. 피자가 먹고 싶어지는 일이 별로 없는데, 한 입 먹어보니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마 굉장히 시장했었나 보다. 고혼다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어서, 우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먹었다. 피자가 없어져 버리자, 맥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맛있군." 하고 그는 말했다.
"사흘 전부터 죽 피자가 먹고 싶었어. 피자 꿈까지 꾸었어. 오븐 속에서 말야.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피자가 구워지고 있는 거야. 꿈속에서 내가 그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꿈. 처음도 없고 끝도 없어. 융 같으면 어떻게 해석할까? 나 같으면 '나는 피자가 먹고 싶다' 는 뜻으로 해석하겠는데, 그런데 내게 할 이야기가 뭔가?"
자, 지금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잘 꺼낼 수가 없었다. 고혼다는 긴장을 풀고, 밤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순진하게 미소 짓는 걸 보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안 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은 도저히 꺼낼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자네는 어때?" 하고 나는 말했다.
'이런 식으로 죽 뒤로 미루어 갈 수는 없는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되었다. 꺼낼 수가 없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고 있는 일이나, 부인과의 일 따위 말야."
"하고 있는 일은 여전하지" 하고 고혼다는 입술을 일그러뜨려 웃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마찬가지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오지 않아. 하기 싫은 일은 잔뜩 온다구. 눈사태가 나듯이 잔뜩 와요. 눈사태를 향해 고함을 쳐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아. 목이 아파질 뿐이야. 아내와의 일은, 그러나 이상하군, 이미 헤어졌는데 죽 아내라고 부르고 있으니, 아내와는 그 후 딱 한 번 만났어. 이봐, 자네는 모텔이나 러브호텔 같은 데서 여자와 자본 적이 있나?"
"별로 없어. 거의 없어." 고혼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상해. 그게 계속되면 피로해져요. 방안은 아주 어두워. 창문이 밀폐돼 있거든. '하기 위한' 방이니까, 창문 따위는 필요 없는 거야. 햇빛 따위는 들어오지 않아도 되거든. 간단히 말하면 목욕탕과 침대만 있어도 되는 거야. 그밖에 음악과 TV와 냉장고가 있으면 돼. 즉물적이야. 필요한 것밖에는 놓여 있지 않아. 물론 하기에는 편리한 곳이야. 나는 그러한 데서 아내와 하고 있어. 바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응, 그녀와 하는 건 멋있어. 마음이 가라앉고 즐거워. 온화한 기분이 돼. 끝난 후에 부드럽게 죽 껴안아 주고 싶은 기분이 돼. 하지만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요. 밀폐되어 있는 거야. 모든 게 인공적이야. 나는 그러한 곳을 통 좋아할 수가 없어. 하지만 거기서밖에는 아내와 만날 수가 없어."
고혼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종이 냅킨으로 입언저리를 닦았다.
"내 맨션의 방에 그녀를 데리고 올 수는 없어. 그런 짓을 하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주간지에 폭로돼 버려. 정말이야. 그치들은 그러한 것을 금방 냄새 맡는다구. 어떻게 알아내는지 알 수 없지만, 알아 낸다구. 둘이서 어디로 여행을 갈 수도 없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거든. 첫째로 어디엘 가든 금방 얼굴이 탄로 나거든.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대로 조금씩 잘라내어 판매하고 있는 셈이니까. 결국 어느 싸구려 모텔로 가는 수밖에 없어. 이건 정말... " 고혼다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또 푸념이군."
"상관없어. 푸념이든 뭐든 실컷 이야기하면 돼. 나는 죽 듣고 있네. 오늘은 나는 이야기하기보다는 듣고 있는 편이 편하니까."
"아니, 오늘뿐이 아냐. 자네는 언제나 내가 늘어놓는 푸념을 듣고 있어. 나는 자네가 푸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 남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모두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거든. 변변한 이야기 거리도 없는 주제에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지만 말야."
딕시랜드 밴드는 <헬로 도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와 고혼다는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봐, 피자를 더 먹지 않겠어?" 하고 고혼다가 내게 물었다.
"절반씩은 더 먹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웬일인지 몹시 시장하군."
"좋아, 나도 아직 시장해."
그가 카운터로 가서 앤초비 피자를 주문하고 왔다. 그리고 피자가 구워지자 우리는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앤초비 피자를 절반씩 먹었다. 학생 단체는 아직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이윽고 밴드가 마지막 연주를 끝냈다. 밴조나 트럼펫, 트롬본 따위가 각기 케이스에 집어넣어지고, 연주자들은 무대로부터 사라져 갔다. 나중에는 업라이프 피아노 한 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피자를 먹고 난 후에도,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텅 빈 무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기묘하게 딱딱한 음향을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막연한 딱딱함이었다. 실제가 부드러운데, 존재의 상황이 딱딱한 것이다. 옆으로 다가올 때까지는 아주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몸에 부딪치면 부드럽게 부서져 버린다. 그것은 파도처럼 내 의식을 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와 의식을 때리고 그리고 물러갔다. 그게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의식은 나 자신으로부터 유리되어 굉장히 먼 곳에 있었다. 먼 파도가 먼 의식을 때리고 있었다.
"왜 키키를 죽였어?" 하고 나는 고혼다에게 물어보았다.
물으려고 생각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그저 문득 입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는 훨씬 먼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떠들썩한 소음이 내 머릿속에서 커졌다 작아지곤 했다. 마치 현실과의 접촉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곤 하는 것처럼 그의 단정한 열 개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깍지 끼워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촉이 멀어지자, 그것은 정교한 세공품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었다. 아주 조용한 미소였다.
"내가 키키를 죽였나?" 하고 그는 천천히 말을 한 자 한 자 명확히 짚어 말했다.
"농담이야." 하고 나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저 무심코 그렇게 말해 보았을 뿐이야. 잠깐 말해보고 싶었어."
고혼다는 시선을 테이블로 떨어뜨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농담 따위가 아냐.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야. 내가 키키를 죽였나? 진지하게 생각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언저리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진지했다. 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자네가 키키를 죽여?" 하고 나는 질문했다.
"왜 내가 키키를 죽이나? 무슨 까닭일까? 나도 그것은 알 수 없어. 왜 죽였을까?"
"이봐, 잘 알 수 없는 걸."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키키를 죽였나, 아니면 죽이지 않았나?"
"그래서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키키를 죽였나, 아니면 키키를 죽이지 않았나?"
고혼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도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정말이야. 확신을 가질 수 없어. 내가 키키의 목을 졸라 죽인 듯한 느낌이 드는 거야. 그 내 방에서 나는 키키의 목을 졸라 죽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야. 그 내 방에서 나는 키키의 목을 졸랐다.- 그러한 느낌이 들어. 왜 그럴까? 왜 나는 그 방에서 키키와 단 둘이 있었을까? 나는 그녀와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았는데 말야. 하지만 안 돼, 생각해낼 수 없어. 아무튼 나는 키키와 둘이서 내 방에 있었어.- 나는 그녀의 사체를 자동차로 운반하여 어딘가에 묻었어. 어느 산 속에.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느낌이 든다는 것뿐이야. 증명할 수 없어. 이에 대해 나는 죽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알 수가 없어. 중요한 점이 공백 속에 삼켜져 버렸어. 어떤 구체적 증거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거든. 이를테면 삽, 나는 그녀를 묻을 때 삽을 사용했을 거야. 그게 발견되면 현실임을 알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발견되지 않아. 흐트러진 기억을 더듬어 보지. 나는 어느 가게에서 삽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구멍을 파고 그녀를 묻었다. 삽은 어디엔가 버렸다.- 그러한 느낌이 들어. 하지만 세밀한 점을 생각해낼 수 없어. 어디서 삽을 사고, 어디에 그것을 버렸을까? 증거가 없는 거야. 그저 산 속이라고밖에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 이는 꿈처럼 토막토막으로 단절되어 있어. 이야기가 저리로 갔는가 하면 이리로 오는 등 혼란되어 있어. 차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어. 기억은 있어. 하지만 그게 진정한 기억일까? 혹은 그게 나중에 내가 상황에 맞추어 적당히 만들어 놓은 것일까? 나는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이야. 아내와 헤어진 후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졌어. 피곤해. 그리고 절망하고 있어. 절망적으로 절망하고 있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에 고혼다가 말을 계속하였다.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망상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연기일까?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이렇게 자네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그걸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어. 자네가 내게 키키의 일을 처음으로 물었을 때부터 나는 죽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자네가 나의 이 혼란을 해소시켜 주지 않을까 하고 말야. 마치 창문을 열어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것처럼 말야."
그는 또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키키를 죽였다면, 어째서일까? 내게 키키를 죽일 어떤 이유가 있을까? 나는 그녀를 좋아했어. 그녀와 자는 것을 좋아했어.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그녀와 메이는 긴장을 풀고 잠시 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어. 그런데 왜 죽일까?"
"자네는 메이도 죽였나?" 고혼다는 오랫동안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자신의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메이를 죽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 그날 밤의 내게는 고맙게도 분명한 알리바이가 있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저녁때부터 한밤중까지 번역 대사의 녹음을 하고, 이어 매니저와 함께 자동차로 미즈도까지 갔어. 그러니까 틀림없어.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만일 누군가가 그날 밤에 죽 내가 방송국에 있었음을 증명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자신이 메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괴로워하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말야, 그래도 어쩐지 나는 메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견딜 수 없으리만큼 책임감을 느껴. 왜 그럴까? 뚜렷한 알리바이가 있는데도, 왠지 마치 나 자신이 이 손으로 그녀를 죽인 듯한 느낌이 들어. 나 때문에 그녀가 죽은 듯한 느낌이 들어."
또 조용해졌다. 침묵이 오래 계속 되었다. 그는 죽 자신의 열 개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피로해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뿐이야. 자네는 아마 아마도 죽이지 않았을 거야. 키키는 그저 어디로 사라졌을 뿐이야. 그 애는 나하고 있던 때도 그런 식으로 휙 사라져 버렸어. 처음이 야냐. 자네는 스스로를 책망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 있을 뿐이야. 그래서 모든 걸 자신을 책망하는 방향으로 결부시켜 버리는 거야."
"아니, 틀려. 그뿐만이 아냐.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나는 아마 키키를 죽였을 거야. 메이는 죽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키키는 죽인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의 목을 조른 감촉이 아직 이 양손에 남아 있어. 삽질을 하던 때의 손의 반응도 기억하고 있어. 나는 그녀를 죽였어. 정말로."
"하지만 왜 자네가 키키를 죽이나? 의미가 없지 않아?"
"알 수 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아마 일종의 자기 파괴 본능일 거야. 내게는 예전부터 그러한 게 있어. 일종의 스트레스야. 내 자신과, 내가 연출하고 있는 내 자신과의 격차가 어느 부분까지 벌어지면 그러한 일이 곧잘 일어난다구. 나는 그 격차를 이 눈으로 실제로 볼 수 있어. 마치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진 것처럼, 그게 딱 벌어져 있는 거야. 깊고 어두운 구멍이야. 현기증이 나리만큼 길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를 무의식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거야. 정신을 차려 보면 무엇인가를 부수고 있어. 그러한 일이 어린 시절부터 흔히 있었지. 무엇인가를 부수고 있어. 연필을 부러뜨리고, 유리잔을 내동댕이 친다구. 플라스틱으로 만든 자동차. 비행기 따위의 모델을 짓밟고. 하지만 국민학교에 다닐 때 친구의 등을 밀쳐 벼랑에서 떨어뜨린 적이 있어. 왜 그러한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다지 높지 않은 벼랑이어서 그때는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뿐이야. 밀려 떨어진 친구도 사고라고 생각했어. 우연히 몸이 부딪친 걸로 여기고 있었어. 아무도 내가 일부러 그러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거든. 하지만 틀려, 나는 내 자신이 스스로 알고 있어. 나는 이 손으로 그 친구를 일부러 밀쳐 떨어뜨린 거야. 그 밖에도 그러한 일은 얼마든지 있어.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우체통을 몇 번인가 불태웠지. 불을 붙인 천 조각을 우체통 속에 집어넣는 거야. 비열하고 의미가 없는 짓이지. 하지만 해버리는 거야. 정신을 차려 보면,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거야. 그럼으로써, 그처럼 무의미하고 비열한 짓을 함으로써 겨우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어. 무의식적인 행위야. 하지만 그 감촉만은 기억하고 있어. 그러한 감촉의 하나하나가 내 양손에 단단히 물들어 있어.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아. 지독한 인생이야. 난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고혼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게는 확인할 길이 없어." 하고 고혼다는 말했다.
"내가 죽였다는 확증이 없는 거야. 시체도 없어. 삽도 없어. 바지에 흙도 묻어 있지 않아. 손에 물집이 생기지도 않았어. 하긴 사람을 묻을 구멍을 파는데 물집까지 생기지는 않겠지만 말야. 어디에 묻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지 않아. 설령 경찰에 가서 자백한다 하더라도, 누가 믿겠어? 사체가 없으면 그건 살인도 아니거든. 나는 보상할 수도 없어. 그녀는 사라져 버렸어. 분명히 알고 있는 건 그것뿐이야. 나는 자네에게 그걸 몇 번이고 탁 털어놓고 이야기하려 했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어. 만일 내가 그러한 말을 입에 올리면, 우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사라져 버리리라는 느낌이 들었어. 이봐, 나는 자네하고 있을 때는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네. 그러한 차이나 격차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어. 그러한 일은 내게는 아주 귀중한 일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러한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조금씩 뒤로 미루어가고 있었지. 이 다음으로 미루자, 나중으로 더 미루어도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네. 사실은 내가 분명히 털어놓고 이야기해야 했을 거야."
"하지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자네가 말한 것처럼 확증이 없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확증이 있느냐의 여부 문제가 아냐. 나는 내 입으로 자네에게 이야기를 해야 했어. 나는 그걸 감추고 있었던 거야. 그게 문제지."
"하지만 만일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자네가 키키를 죽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자네에게는 죽일 의향이 없었어."
그는 양손의 손바닥을 펴고 가만히 응시하였다.
"없었어. 있을 턱이 없어. 왜 내가 키키를 죽여야 하나. 나는 그녀를 좋아했어. 나와 그녀는 매우 안정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였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 나는 그녀에게 아내 이야기를 했어. 키키는 잘 들어 주었어. 왜 내가 그녀를 죽여야 해? 하지만 죽인 거야, 이 손으로. 살의 따위는 없었어. 나는 자신의 그림자를 죽이는 것처럼 그녀를 목 졸라 죽였어.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이건 내 그림자가 아니었어. 키키였어. 하지만 이는 어둠의 세계에서 일어난 거야. 여기와는 다른 세계야. 알겠어? 여기가 아냐. 그리고 권유한 건 키키야. 내 목을 조르라고 키키가 말했어. 좋아요. 목을 졸라 죽여요, 하고 말했어. 그녀는 나를 유혹하고 나를 용서한 거야. 거짓말이 아냐, 정말로 그랬어요. 나는 알 수 없어.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모든 게 꿈처럼 여겨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실이 용해되어 가는 거야. 왜 키키가 나를 유혹하나, 왜 내게 자신을 죽이라는 따위의 말을 하나?"
나는 유리잔에 남은 뜨뜻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셨다. 담배 연기가 위쪽에 엉겨 있다가 공기의 흐름에 따라 어떤 심령 현상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내 등에 부딪치고는 "미안합니다." 하고 말했다. 가게 안의 안내가 구워진 피자의 번호를 부르고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더 안 마시겠어?" 하고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마시고 싶군."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맥주 두 잔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것을 마셨다. 가게는 러시아워의 아끼바라하 역처럼 붐비며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우리의 테이블 옆을 사람들이 연방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 따위는 듣고 있지 않았고, 아무도 고혼다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말했지" 하고 고혼다는 호감을 주는 미소를 입언저리에 띠우며 말했다.
"여기는 안성맞춤이야. 세이키즈에선 유명인사 따위는 바라보지 않거든."
고혼다는 맥주가 3분의 1쯤 남은 유리잔을 시험관이라도 흔들 듯이 흔들고 있었다.
"잊어." 하고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잊을 수 있어. 자네도 잊어."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입으로 말하기는 간단해. 자네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인 건 아니니까."
"이봐, 알겠어. 자네가 키키를 죽였다는 확증은 아무것도 없어. 확증이 없는 걸 가지고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지는 말라구. 자네는 자네 자신의 죄악감을 그녀의 실종과 결부시켜 무의식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잖아. 그러할 가능성은 있지?"
"그럼 가능성 이야기를 하자구" 하고 고혼다는 말하고, 테이블 위로 두 손바닥을 가져갔다.
"나는 요즘 가능성에 대해 곧잘 생각하고 있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 이를테면 내가 아내를 죽일 가능성도 있어. 그렇지? 만일 그녀가 키키와 마찬가지로 나를 용서한다고 말하면, 나는 역시 목 졸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나는 요즘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가능성이 내 속에서 확대되어 가거든. 막을 길이 없어 자신이 통제할 수 없게 되어가요. 우체통을 불태웠을 뿐만이 아냐. 나는 고양이도 몇 마리를 죽였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였지. 중지할 수가 없어. 밤중에 부근에 있는 집의 창문을 고무줄 새총으로 돌을 쏘아 깨뜨리기도 했어.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네에게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야. 말해 버리니 후련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일이 멈춰지는 건 아냐. 멈춰지지 않아. 연기를 하는 나와, 근원적인 나 사이의 벌어진 틈이 메워지지 않는 한 그러한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돼. 나는 스스로도 알고 있어. 내가 프로 연기자가 된 이후로 그 틈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어. 연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 반동도 커져 간다구.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아내를 죽일지도 몰라. 통제할 수가 없어. 이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 거야. 분명히."
"자네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고 나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전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미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하고 있는 일을 쉬는 편이 낫겠군. 일을 쉬고, 잠시 그녀와 만나지 않도록 해. 그러는 수밖에 없어. 모든 걸 내던지는 거야. 나와 함께 하와이로 가자구. 매일 해변에서 뒹굴며 피나 코라다를 마시자구. 거기는 좋은 곳이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돼.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수영을 하고, 둘이서 아가씨를 데리고 자는 거야. 무스탕을 빌려, 토아즈나 슬라이&더 패밀리 스톤, 비치 보이즈 따위를 들으면서 15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드라이브를 하세. 기분이 해방돼. 만일 무엇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 다음에 다시 생각하는 거야."
"나쁘지 않군."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눈 가장자리에 약간의 주름이 지도록 웃었다.
"또 두 명의 아가씨를 불러, 넷이서 아침까지 놀자구. 그때는 즐거웠어."
"좋아." 하고 나는 말했다. 관능적인 일상의 작업.
"나는 언제든 갈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는 어때? 일의 끝매듭을 짓는 데 얼마나 걸려?"
고혼다는 이상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아무리 시일이 흘러도 일을 끝매듭 지을 수는 없네. 모두 내팽개치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짓을 하면, 나는 우선 틀림없이 이 세계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지. '영구히' 그리고 동시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아내를 잃게 돼. 영구히."
그는 유리잔에 남아 있는 맥주를 다 마셨다.
"하지만 좋아. 모든 걸 잃어버려도 이제 상관없어. 체념해도 돼. 자네 말이 맞아. 나는 지쳐 있어. 하와이로 가서 머리를 비워야 할 시기야. 오케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자네와 함께 하와이로 가겠어. 그 다음의 일은, 일단 머리를 말끔히 비운 다음에 생각하겠어. 나는 그래, 착실한 인간이 되고 싶어. 이제 글렀는지도 몰라. 하지만 확실히 한 번 더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어. 자네에게 맡기겠네. 나는 자네를 신뢰하고 있어. 정말이야. 자네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어째서일까. 자네에게는 아주 성실한 데가 있어. 그리고 그건 내가 죽 추구하고 있던 것이었어."
"나는 성실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저 제대로 스텝을 지키고 있을 뿐이야. 그저 춤을 추고 있을 뿐이야. 의미 따위는 없어."
고혼다는 테이블 위에 50센티미터 정도의 사이가 벌어지도록 양손을 펼쳤다.
"어디에 의미가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의미가 대체 어디에 있어?" 그리고 웃었다.
"하지만 좋아, 특별히. 그건 이제 어떻든 상관없어. 체념하고 있어. 나도 자네를 본받기로 하지. 엘리베이터로부터 엘리베이터로 뛰어 옮아가며 밀고 나가자구.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야냐. 하려고만 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나는 머리가 좋고 잘 생기고 호감을 주는 고혼다니까. 좋아 하와이로 가세. 내일 비행기표를 예약해 줘. 퍼스트 클래스로 두 장. 퍼스트 클래스가 아니면 안 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자동차는 메르세데스, 시계는 롤렉스, 맨션은 미나토꾸,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야. 모레 짐을 챙겨 날아가는 거야. 당일에 호놀룰루에 도착. 나는 알로하셔츠가 어울리거든."
"자네에게는 무엇이든 어울려."
"고마워. 희미하게 남겨진 자아가 들썩거리는군."
"우선 해변의 바로 나가서 피나 코라다를 마셔야지. 차갑게 냉각된 걸."
"나쁘지 않아."
고혼다는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봐, 자네는 내가 키키를 죽인 걸 정말로 잊을 수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언젠가 나는 유치장에 처넣어져 2주일 동안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말했잖아?"
"말했어."
"그건 거짓말이야. 나는 모든 걸 마구 지껄이고 금방 나왔어. 무서웠기 때문이 아냐. 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었기 때문이야. 자신을 깎아내리고 싶었기 때문이야. 비열한 짓이야. 그래서 자네가 나를 위해 죽 입을 다물고 있어준 게 내게는 정말 기뻤어. 자신의 비열함마저 구제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 별난 느낌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그러한 느낌이 들었어. 별난 느낌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자네가 나의 비열한 부분을 씻어낸 듯한 느낌 말야. 그러나 오늘은 꽤 많이 털어 놓고 이야기를 했군. 총 복습이야. 하지만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어. 마음이 놓이는군. 자네는 불쾌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에게 이전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말해야 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를 좀 더 뒤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그때는 그러는 편이 나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한 말이 더욱 힘을 지닐 기회가 가까운 장래에 다가올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한 번 더 되풀이했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진 모자를 집어 들어 젖은 상태를 살펴보고, 다시 제자리에 걸쳐 놓았다.
"친구의 정의로서, 한 가지 부탁을 하겠어." 하고 그는 말했다.
"맥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싶네. 하지만 지금은 일어서서 저기까지 나갈 기운이 없어."
"좋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서, 또 맥주 두 잔을 샀다. 카운터가 혼잡하여 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유리잔을 양손에 들고, 안쪽의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 맞은 모자도 사라져 버렸다. 주차장의 마세라티도 사라져 버렸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40
마세라티가 시바우라의 바다에서 인양된 것은, 이튿날의 점심때가 지날 무렵이었다. 예상했던 대로였기 때문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사라진 때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체가 또 하나 불어났다. 네스미, 키키, 메이, 딕 노스, 그리고 고혼다. 모두 다섯이다. 나머지는 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짢은 방식의 전개였다.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 다음에 누가 죽을 것인가? 나는 유미요시의 일을 문득 생각했다. 아니, 그녀일 턱이 없다. 그건 너무 가혹하다. 유미요시는 죽거나 사라져서는 안 된다. 유미요시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유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애는 겨우 열세 살이다. 그녀를 죽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머릿속에, 사자로 화할 지도 모를 사람들의 리스트를 늘어놓아 보았다. 그러한 일을 하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내 자신이 사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사자의 순위를 고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카사카 경찰서로 가서 문학을 만나, 어젯밤에 고혼다와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어쩐지 그에게 얘기해 두는 편이 나을 듯한 느낌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가 키키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다. 사체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죽기 직전까지 고혼다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몹시 지쳐 있고 노이로제 상태였다고 말하였다. 빚이 많아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했고, 이혼한 일로 마음을 썩이고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간단히 조서로 만들었다. 이전과는 달리 아주 간단한 조서였다. 나는 거기에 서명했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조서를 다 만들고 나서, 그는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낀 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주위에서는 정말 사람이 잘 죽는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한 인생을 보내고 있으면 친구를 만들 수 없어요. 모두들 싫어해요.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면, 눈매가 나빠지고 피부가 거칠어져요. 좋을 것 없어요." 그리고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건 자살이에요. 이는 분명해. 목격자도 있어요. 그러나 아까워요. 아무리 영화 스타라 해도, 마세라티를 바다에 처넣을 게 뭐요. 시비크나 카로라면 충분했는데."
"보험에 들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자살일 경우는 안 될 거요. 아무리 그래도 보험금은 나오지 않을 거요." 하고 문학은 말했다.
"하지만 아무튼 어이가 없어. 나는 돈이 없으니까 그만 어린애 자전거 생각을 하게 돼요. 어린애가 셋이에요. 셋이나 되면 돈이 많이 들어요. 모두 제 자전거를 갖고 싶어 하거든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좋아요. 이제 돌아가요. 친구는 가엾게 됐어요. 일부러 이야기하러 와주어서 고마워요."
그는 출구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메이 양 사건은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매듭지어질 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자신이 고혼다를 죽여 버린 듯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짓눌리는 듯한 기분을 아무래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세이키즈에서의 그와의 대화를 하나하나 회상해 보았다. 그때 나는 더 능숙하게 대답하여 그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랬으면 지금쯤은 둘이서 마우이의 해변에서 뒹굴며 맥주를 마시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 되기 어려웠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죽 마세라티를 바다에 처넣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출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출구의 문의 손잡이를 죽 잡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 몇 번이고 마세라티가 바다 속에 가라앉는 광경을 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의 틈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어가는 그 광경을. 그러한 자기 파괴의 가능성을 가지고 유희함으로써 가까스로 자신을 현실의 세계와 결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는 없었다. 언젠가는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의 죽음이 내게 가져온 것은 오래된 꿈의 죽음 및 그 상실감이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내게 어떤 체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혼다의 죽음이 가져온 것은, 출구가 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와 같은 절망이었다. 고혼다의 죽음에는 구원이라는 게 없었다. 고혼다는 자신 속의 충동을, 자기 자신에 잘 동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힘이 그를 극한적인 장소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의식의 영역의 제일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어둠의 세계까지.
얼마동안 주간지나 TV, 스포츠 신문 등이 그의 죽음을 들쑤시어 먹고 있었다. 그들은 투구벌레처럼 부육을 아주 맛있는 듯이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한 타이틀을 보고 있기만 해도 나는 구역질이 났다. 그들이 뭐라고 쓰고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읽지 않고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자들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금속 배트로 때려죽이면 돼, 하고 고혼다가 말했다. 그 편이 간단하고 빠르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빨리 죽이면 아까워. 천천히 목을 졸라 죽이겠어. 그리고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세계를 증오했다. 마음속으로부터 격렬히, 근원적으로 세계를 증오했다. 세계는 뒷맛이 나쁜 부조리한 죽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나는 무력하고, 그리고 삶의 세계의 오물 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갔다. 나간 인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바닥에는 역시 죽음의 냄새가 배어들어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그건 지워지지 않는다, 고 고혼다가 말했다. 이 봐 양사나이, 이것이 내 세계의 연결 방식인가? 나는 끝날 줄 모르는 죽음에 의해 세계에 결부되어 있는가?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상실하려 하고 있는가? 자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이제 행복해질 수 없을지도 몰라. 그건 그런대로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해.
나는 문득 어린 시절에 읽은 과학책을 생각해 내었다. 거기에는 "만일 마찰이 없으면,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 책에는 "만일 마찰이 없으면, 자전의 원심력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것이 우주로 날려가 버릴 것" 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정말 그러한 기분이었다.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41
고혼다가 마세라티를 바다에 처넣은 지 3일 후에, 나는 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키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력하고 외돌토리인 것이다. 어린애인 것이다. 그녀를 감쌀 수 있는 인간은 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내게는 그녀가 계속 살아가도록 할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유키는 하꼬네의 집에는 없었다. 아메가 전화를 받고, 딸은 그저께 아카사카의 아파트로 가버렸다고 말했다. 아메는 잠이 들려다 깬 것처럼 꽤 느슨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와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 편이 내게도 편했다. 나는 아카사카로 전화를 걸었다. 유키는 전화기 옆에 있었는지, 금방 수화기를 들었다.
"이제 하꼬네에는 있지 않아도 돼?" 하고 나는 물었다.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잠시 혼자 있고 싶었어요. 뭐니 뭐니 해도 엄마는 어른이잖아요? 내가 없어도 제대로 해나갈 수 있어요. 나는 자신의 일을 좀 생각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슬슬 그러한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럴지도 몰라" 하고 나는 동의했다.
"신문에 난 걸 보았어요. 아저씨의 친구가 죽었더군요."
"그래, 저주받은 마세라티야. 네 말대로였어."
유키는 잠자코 있었어. 침묵이 물처럼 내 귀를 적셨다. 나는 수화기를 오른쪽 귀로부터 왼쪽 귀로 옮겼다.
"식사라도 하러 가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차피 변변치 않은 걸 먹고 있겠지? 둘이서 좀 나은 걸 먹자꾸나. 나도 실은 지난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했어. 혼자 있으면 식욕이 나지 않아."
"두 시에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그 이전이면 좋아요."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열한 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좋아. 지금부터 준비하고 맞으러 가지. 30분에 그쪽에 도착할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어 마시고, 자동차의 키와 지갑을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 잊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면도하는 걸 잊고 있었군. 나는 세면실로 가서 꼼꼼히 면도를 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아직 20대라고 해도 통용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통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20대로 보이든 않든 간에, 그러한 일에는 아마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떻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이를 닦았다.
바깥은 좋은 날씨였다. 여름이 이미 거기까지 와 있었다. 비만 내리지 않으면, 아주 기분 좋은 계절이다. 나는 반소매 셔츠에 얇은 면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유키의 맨션으로 스바루를 몰았다. 휘파람까지 불었다. 멋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름이다.
나는 차를 운전하면서 임간학교 때의 일을 생각해 내었다. 임간학교에서는 세 시에 낮잠 자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낮잠을 잘 수 없었다. 자, 잠을 자라고 해서 잠이 올 리가 없지 않은 가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죽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장이 독립된 세계처럼 여겨진다. 거기로 가면, 여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든다. 가치가 전도된 상하가 거꾸로 된 세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나는 죽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임간학교 때의 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천장뿐이다. 멋있다.
뒤쪽의 세딜락이 경적음을 세 번 울렸다.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었다. 침착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서두른다고 그렇게 훌륭한 장소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나는 천천히 차를 물었다. 아무튼 여름이다.
내가 맨션 현관의 벨을 누르자, 유키는 금방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우아하게 날염한 옷감으로 만들어진 반소매 원피스 차림에 샌들을 신고, 진한 청색의 가죽으로 만든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오늘은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두 시부터 누구를 만난다고 말했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썩 잘 어울려. 우아해." 하고 나는 말했다.
"어른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부근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스프와 스파게티, 상어 소스, 농어, 샐러드 따위로 이루어진 점심을 먹었다. 아직 열두 시가 되기 전이어서 가게가 비어 있었고 제대로의 맛이 났다. 열두 시가 지나 샐러리맨이 거리로 우르르 몰려나올 무렵에 우리는 가게를 나와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겠어?" 하고 나는 물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그냥 이 근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어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반사회적 행위야. 가솔린의 낭비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음, 좋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원래 지독한 거리인 걸. 좀 더 공기가 더러워졌다고 해서, 좀 더 교통이 혼잡해졌다고 해서, 그러한 일에 누가 신경을 쓰겠는가?
유키는 카 스테레오의 버튼을 눌렀다. 속에는 토킹 헤즈의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아마 <페어 오브 뮤직>일 것이다. 대체 언제 집어넣었을까?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나, 가정교사에게 공부하기로 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 그 사람을 만나요. 여자예요. 아빠가 주선해 주었어요.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고 아빠에게 말했더니, 그분이 다음날에 제대로 구해 주었어요. 깔끔하고 좋은 사람이라는데요. 이상한 애기지만, 그 영화를 보고 왠지 공부를 하고 싶어졌어요."
"그 영화?" 하고 나는 되물었다.
"짝사랑 말야?"
"그래요. 그거예요." 하고 말하고, 유키는 약간 붉어졌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도. 하지만 어쨌든 그 영화를 본 다음에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어졌어요. 아마 아저씨의 친구가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 사람을 보고 있을 때는 얼간이처럼 느껴졌는데, 그래도 무엇을 호소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래. 어떤 종류의 재능이 있었어. 그건 분명해."
"음."
"하지만 물론 그건 연기이고 허구야. 현실과는 달라. 그건 알 수 있지?"
"알고 있어요."
"치과의사 역할도 잘 해. 아주 솜씨가 좋아. 하지만 그건 연기야. 솜씨 좋아 보일 뿐이고 이미지야. 정말로 무슨 일을 한다는 건 비참하게 혼란에 빠지고 힘겨운 일이야. 의미가 없는 부분이 너무 많고, 하지만 무엇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러한 게 없으면 잘 살아갈 수 없어. 고혼다도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할 거야."
"그를 만났어요?"
"만났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만나 이야기를 했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지.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그대로 죽어 버렸어. 나와 이야기하고 나서 곧 바다에 마세라티를 처넣은 거야."
"내 탓이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탓이 아냐. 누구의 탓도 아냐. 사람이 죽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어.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아. 뿌리와 마찬가지야. 위에 나와 있는 부분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기고 있으면, 질질 딸려 나와. 인간의 의식이라는 건 깊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뒤얽혀 있고 복합적이며...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 진정한 이유는 본인밖에 알 수 없어. 본인도 알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는 그 출구의 문의 손잡이를 죽 잡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때문에 나를 틀림없이 미워할 거예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미워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미워하고 있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나중에 미워할 거예요."
"나중에도 미워하지 않아.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다구."
"설령 미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사라져 버릴 거예요." 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너도 고혼다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
"그래요?"
"그래. 그도 무엇이 사라질까봐 죽 신경을 쓰고 있었어. 하지만 뭘 그렇게 걱정해? 무엇이든 언젠가는 사라지는 거야. 우리는 모두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어.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물은 우리가 이동함에 따라 모두 언젠가는 사라져 버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라질 때가 오면 사라진다구. 그리고 사라질 때가 올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아. 이를테면 너는 성장해가지. 앞으로 2년이 지나면 그 멋진 원피스도 몸에 맞지 않게 돼. 토킹 헤즈도 낡아빠진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몰라. 그리고 나와 드라이브 따위를 하고 싶지도 않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해.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나는 죽 당신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해요. 그건 시간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주는 건 기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공평하게 말하면, 너는 시간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어. 모든 걸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지 않는 게 좋아. 시간이라는 건 부패와 같은 거야. 뜻하지 않은 일이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변해 버려.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테이프의 A면이 끝나고, 자동으로 B면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여름이다. 거리의 어디를 내다보아도 여름이 눈에 띄었다. 경관이나 고교생이나 버스 운전사도 모두 반소매 차림을 하고 있었다. 소매 없는 어깨걸이 차림으로 걸어가고 있는 아가씨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고 있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서 그녀와 둘이서 <헬프 미 론다>를 부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겨우 두 달 반밖에 경과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미워하지 않아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미워하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그것만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
"절대로?"
"절대로. 2500퍼센트 미워할 리가 없어."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혼다를 좋아했었죠?" 하고 유키가 물었다.
"좋아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눈 속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이를 억눌렀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였다.
"만날 때마다 좋아져갔어. 그러한 일은 별로 없는데, 특히 나 정도의 나이가 되어서는 말야."
"그가 그 사람을 죽였어요?"
나는 잠시 선글라스 너머로 초여름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어."
그는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유키는 창틀에 턱을 괴고 토킹 헤즈를 들으면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약간 어른스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아직 두 달 반밖에 경과하지 않은 것이다.
여름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어요?" 하고 유키가 물었다.
"어떡할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것도 정해 두지 않았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하지만 어쨌든 한 번 더 삿포로로 돌아가겠어. 내일이나 모레라도. 삿포로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나는 유미요시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양사나이. 거기에는 나를 위한 장소가 있다.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그리로 돌아가 풀려진 테를 메워야 한다.
요요기야하다 역이 가까이 오자, 그녀는 거기서 내리겠다고 말했다.
"오다큐 선을 타고 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목적지까지 차로 바래다주겠어. 어차피 오늘 오후는 한가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좋아요. 꽤 멀어서 전철이 빨라요."
"이상하군." 하고 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고 말했어.
"말해도 괜찮잖아요?"
"물론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10초나 15초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표정다운 표정은 띠고 있지 않았다. 기묘하게 표정이 없는 아이다. 눈빛과 입술의 모양이 조금씩 변할 뿐이다. 입술이 약간 오므라들고, 날카로운 눈에는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 눈은 내게 여름 햇빛을 연상시켰다. 날카롭게 물속으로 비쳐들어 굴절하며 흩어지는 여름날의 그 햇빛.
"단지 감동하고 있을 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이상한 사람" 하고 유키는 말했다.
그리고 차를 내려 쾅 문을 닫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 버렸다. 나는 유키의 훌쭉한 뒷모습이 사람들의 발걸음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아주 슬픈 기분이 되었다. 마치 실연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라빈 스픈훌의 <서머 인 더 시티>를 불면서 오메산도를 거쳐 아오야마가까지 가서 기노쿠니야에서 식료품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려다가, 내일이나 모레는 삿포로로 간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만들 필요도 없고, 식품을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 따분해졌다. 우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나는 한 번 더 목표도 없이 거리를 빙글 돌고, 그리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의 방은 휑뎅그렁해 보였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러한 일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상실감 하고 나는 입에 올려 말해 보았다. 별로 좋은 느낌을 주는 말은 아니었다.
좋아요 하고 메이가 말했다. 그 소리가 휑뎅그렁한 방안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42
키키의 꿈
나는 키키의 꿈을 꾸었다. 이는 아마 꿈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꿈과 유사한 행위다. '꿈과 유사한 행위' 란 대체 무엇일까?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게 있다. 우리의 의식의 변경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간단히 나는 그것을 꿈이라 부르기로 한다. 역시 그 표현이 가장 실체에 가까우리라고 여겨지므로.
나는 새벽녘에 키키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시간은 새벽녘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고 있었다. 국제전화. 나는 그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에 있는 방의 창틀에, 키키 같아 보이는 여자가 남겨두고 간 전화번호를 돌리고 있었다. 드륵드륵 하고 회선이 이어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하나의 변화가 차례로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수화기를 단단히 귀에 대고, 그 흐린소리를 세어 보고 있었다.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하고 나는 세고 있었다. 열두 번째에 누가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 방에 있었다. 호놀룰루의 다운타운의 휑뎅그렁한 그 '죽음의 방'에. 시각은 점심때인 빛은 몇 개의 굵은 기둥이 되어 바닥으로부터 직립하고, 그 속에 작은 티끌이 떠돌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빛의 기둥은 칼로 잘라내어진 것처럼 선명하면서도 예각적으로, 남국의 태양의 격렬함을 방안에 전달하고 있었다. 빛이 없는 부분은 어둡고 차가웠다. 그 차이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마치 해저에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방의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전화 코드가 길게 바닥을 가로질러 뻗어가고 있었다. 코드는 어두운 부분을 가로질러, 빛 속을 빠져나가고, 그리고 멍하고 희미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굉장히 긴 코드다. 이렇게 긴 코드는 본 적이 없다. 나는 전화기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의 가구 배치는 이전에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침대, 테이블, 소파, 의자, 텔레비전, 플로어 스탠드, 그러한 것들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다. 방의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밀폐된 채로 있던 방의 냄새다. 공기가 탁하고 곰팡이 냄새가 난다. 하지만 6개의 백골은 없어져 버렸다. 침대 위나 소파, 텔레비전 앞의 의자, 식탁 위에 있던 먹고 있는 중이던 식기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전화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하지만 머리가 약간 아팠다. 굉장히 높은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얼얼한 느낌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거기에 주저앉았다.
제일 먼 곳의 희미한 어둠 속에 있는 의자 위에서 무엇이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쑥 일어나 구두소리를 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키키였다. 그녀는 천천히 어둠 속에서 나타나서 빛 속을 가로질러 식탁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색의 원피스에 하얀 숄더백. 키키는 거기에 앉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녀는 빛의 영역이나 그림자의 영역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거기까지 가보려다가 어쩐지 기가 죽어 그만두었다. 게다가 관자놀이에는 아직 희미한 아픔이 남아 있었다.
"백골은 어디로 갔나?" 하고 나는 물었다.
"글쎄요" 하고 키키는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없어졌겠죠."
"네가 없앴어?"
"아뇨, 그냥 없어졌어요. 당신이 없애지 않았나요?"
나는 옆에 놓아둔 전화기를 문득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가벼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건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을까? 여섯 구의 백골."
"당신 자신이에요." 하고 키키는 말했다.
"여기는 당신의 방인걸요. 여기에 있는 건 모두 당신 자신이에요."
"내 방"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돌핀 호텔은? 거기는 뭔가?"
"거기도 당신의 방이에요. 물론. 거기에는 양사나이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있고."
빛의 기둥은 흔들리지 않는다. 딱딱하고, 질이 고르다. 그 속의 공기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흔들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곳에 내 방이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이봐, 나는 죽 꿈을 꾸고 있었다구. 돌핀 호텔의 꿈이야. 거기서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었어. 매일처럼 그와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어. 돌핀 호텔이 굉장히 기다란 모양을 하고 있고, 거기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있었다구. 나는 그게 너인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아무래도 너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느낌이 들었어."
"누구나 당신을 위해 울고 있어요." 하고 키키가 말했다. 아주 조용하고, 신경을 위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당신을 위한 장소인 걸요. 거기서는 누구나 당신을 위해 울어요."
"하지만 너는 나를 부르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돌핀 호텔까지 갔어. 그리고 거기서... 여러 가지 일이 시작되었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야. 여러 사람을 만났어. 여러 사람이 죽었어. 이봐, 네가 나를 부르고 있었지? 그리고 네가 나를 이끌었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을 부르고 있던 것은 당신 자신이에요. 나는 당신 자신의 투영에 지나지 않아요. 나를 통해 당신 자신이 당신을 부르며, 당신을 이끌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를 파트너 삼아 춤을 추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당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이것은 자신의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혼다는 말했다. 이 그림자를 죽이면 잘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모두들 나를 위해 울까?"
그녀는 이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며시 일어서서 구두소리를 내면서 다가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쳐, 손가락 끝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매끄럽고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이어 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당신이 울 수 없는 것을 위해 우리가 우는 거예요." 하고 키키는 조용히 말했다.
마치 타이르듯이 천천히.
"당신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을 위해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당신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을 위해 우리가 소리 내어 우는 거예요."
"네 귀는 아직 그대로인가?" 하고 나는 물었다.
"내 귀는-" 하고 말하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아직 그대로예요. 이전과 똑같아요."
"한 번 더 내게 귀를 보여 주지 않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한 번 더 그 기분을 음미하고 싶어. 네가 언젠가 레스토랑에서 내게 귀를 보여주었을 때의, 세계가 다시 태어나는 듯한 그 기분을, 나는 죽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그건 언제나 볼 수 있는 게 아녜요. 그건 정말로, 보기에 적합한 때에만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때는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언제든 또 보여 드리죠.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을 때에."
그녀는 다시 일어나, 천창으로 곧바로 비쳐드는 빛의 기둥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한 빛의 티끌 속에서 그녀의 몸은 당장이라도 분해되어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이봐, 키키, 넌 죽었니?" 하고 나는 물었다.
빛 속에서 그녀는 빙글 몸을 회전시켜 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고혼다 말예요?"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고혼다는 자신이 나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고 키키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나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그에게 있어서는 그래요. 그에게 있어서는, 그가 나를 죽였어요. 그건 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는 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일을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나를 죽일 필요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그러지 않고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어요.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하고 키키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어요. 그저 사라졌을 뿐. 사라지는 거예요.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는 전철에 옮아 타는 것처럼. 그게 사라진다는 것이에요. 알겠어요?"
알 수 없다고 나는 말했다.
"간단해요. 보고 있어요."
키키는 이렇게 말하고, 바닥 위를 가로질러, 벽을 향해 자꾸 걸어갔다. 벽 앞에 이르러서도 보조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벽 속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구두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죽 그녀가 흡수된 벽의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벽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빗속의 티끌만이 여전히 천천히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또 약간 아팠다. 나는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가만히 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도, 호놀룰루에서 내가 이끌려 갔던 그때도, 그녀는 마찬가지로 벽에 흡수되어 갔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요? 간단하죠?" 하고 말하는 키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해 봐요."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간단하다고 했잖아요? 해 보세요. 곧바로 그대로 걸어가면 돼요. 그러면 이쪽으로 올 수 있어요. 무서워하면 안 돼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나는 수화기를 손에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 코드를 질질 끌면서 그녀가 흡수된 부근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벽이 가까워지자 나는 약간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보조는 늦추지 않고 그대로 벽에 부딪쳐 갔다. 하지만 몸이 벽에 부딪쳐도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내 몸은 불투명한 공기의 층을 빠져 나갔을 뿐이었다. 공기의 질이 약간 변화한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그 층을 빠져나오고, 그리고 내 방의 침대로 돌아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간단해" 하고 나는 말했다.
"굉장히 간단해."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대어 보았지만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이는 꿈일까? 아마 꿈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러한 걸 알 수 있겠는가?
43
내가 돌핀 호텔에 도착했을 때, 프런트의 카운터에는 세 명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블레이저코트에 새하얀 블라우스 차림으로 나를 상냥하게 맞아 주었는데, 그 속에 유미요시의 모습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몹시 실망했다. 아니, 절망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나는 여기에 오면 당연히 유미요시와 곧 재회할 수 있으리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잘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자신의 이름조차 잘 발음할 수 없었고, 그 결과로 나를 상대해준 아가씨의 미소는 활력소가 떨어진 것처럼 약간 굳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내 크레디트 카드를 의심스러운 듯이 바라보고는 컴퓨터에 집어넣어, 그것이 도난품이 아님을 확인했다.
나는 17층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세면장에서 세면을 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푹신푹신한 고급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는 체하면서 프런트를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요시는 어쩌면 잠시 쉬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40분이 지나도 유미요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여 분간하기 어려운 세 아가씨가 언제까지나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꼭 한 시간을 기다린 다음에 나는 체념했다. 유미요시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리고 나가 석간신문을 샀다. 그리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혹시 내게 흥미 있는 기사가 나와 있지 않을까 싶어 구석구석을 샅샅이 읽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고혼다에 관한 일이나 메이에 관한 일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른 살인이나 다른 자살 따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신문을 읽으면서, 호텔에 돌아가면 아마 유미요시가 프런트에 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후에도 여전히 유미요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떤 이유로 세계로부터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를테면 벽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몹시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화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유미요시가 있는 가고 물어보았다. "유미요시 어제부터 휴가 중이에요." 하고 다른 아가씨가 가르쳐 주었다. 모레부터 출근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 미리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두지 않았을까? 왜 전화를 거는 일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하지만 나는 어쨌든 비행기를 타고 즉시 삿포로로 날아오는 일밖에는 염두를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삿포로에 오면 이내 유미요시를 만날 수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없는 얘기다.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언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나? 고혼다가 죽은 후로 한 번도 걸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도 걸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유키가 해안에서 토하고 나서, 내게 고혼다가 키키를 죽였다고 말한 때부터 죽 걸지 않았다. 꽤 오랜 기간이다. 나는 죽 유미요시를 방치해둔 것이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간단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혼다가 키키를 죽였다고 키키가 말했다. 그리고 고혼다는 마세라티를 몰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는 유키에게 "괜찮아, 네 탓이 아냐." 하고 말했다. 키키가 내게 당신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우선 유미요시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안했다. 유미요시가 이미 벽에 흡수되어 버려, 나는 이제 영원히 그녀를 만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래, 그 백골은 모두 여섯이었다. 다섯까지는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만은 남아 있다. 이는 누구의 것일까? 이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분이 되었다. 답답하리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자꾸만 부풀어 올라 늑골을 뚫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난생 처음으로 그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유미요시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다. 만나 얼굴을 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손가락이 아파질 만큼 몇 번이나 유미요시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격렬한 불안감이 내 잠을 몇 번이고 중단시켰다. 나는 땀을 흘리며 깨어나, 불을 켜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두 시이고, 다음에는 세 시 십오 분이고, 그 다음에는 네 시 이십 분이었다. 그리고 네 시 이십 분 이후에는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거리가 밝아져 가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유미요시, 나를 더 이상 외돌토리로 만들지 말아 다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는 네가 필요해. 나는 외돌토리가 되고 싶지 않다구. 네가 없으면 나는 원심력에 의해 우주 가장자리로 날려가 버릴 듯한 느낌이 들어. 제발 내게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어딘가에 연결시켜 다오. 현실의 세계에 연결시켜 주기 바란다. 나는 요괴에 흘리고 싶지 않아. 나는 보통의 서른네 살이 된 사나이야. 내게는 네가 필요하단 말야.
나는 아침 여섯시 반부터 죽 그녀의 방에 전화번호를 계속 돌렸다. 30분마다 나는 전화 앞에 앉아 다이얼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삿포로의 6월은 멋진 계절이었다. 오래 전에 눈이 녹아, 불과 몇 개월 전에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대지가 지금은 새까만 모습으로 부드러운 생명의 숨결을 띠고 있었다. 나무들 마다엔 푸른 잎이 무성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그 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투명하며, 구름은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한 풍경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죽 호텔의 방에 머물며 그녀집의 전화번호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녀가 돌아온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는가, 하고 나는 10분마다 자신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나는 내일이 오는 걸 기다릴 수 없었다. 내일이 오는 걸 누가 보증할 수 있는가? 나는 전화기 옆에 앉아 다이얼을 계속 돌렸다. 그리고 전화를 걸고 있지 않을 때는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며 의미도 없이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여기에 돌핀 호텔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한 호텔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이나 시간의 찌꺼기가, 그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들에, 벽의 얼룩들에 남아 있었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 발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감고 돌핀 호텔의 광경을 회상해 보았다. 그 입구 문의 형태로부터 닳아 떨어진 카펫, 색이 바랜 놋쇠로 만들어진 열쇠, 구석에 먼지가 쌓여 있는 창틀 따위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복도를 걸어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갈 수 있다.
돌핀 호텔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그림자와 낌새는 아직 여기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돌핀 호텔은 새롭고 거대한 '돌핀 호텔'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나는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늙은 개가 기침을 하는 것처럼 킁킁거리며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 있다. 이 장소가 내 이음매이다. 괜찮아,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이다, 하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녀는 반드시 되돌아온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 하고.
나는 룸서비스로 나오는 저녁식사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어 마셨다. 그리고 여덟 시 반에 한 번 더 유미요시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TV를 켜고, 아홉 시까지 야구 중계를 보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하고, 화면만을 보고 있었다. 시시한 시합이었고, 특별히 야구 시합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살아 있는 인간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고 싶었다. 배드민턴 시합이든 수구 시합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시합의 흐름을 좇아가지 않고, 그저 사람이 볼을 던지거나, 치거나, 달려가곤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누군가의 삶의 단편으로서. 마치 멀리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홉 시가 되어 나는 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번에는 벨이 단 한 번 울리자 그녀가 나왔다. 나는 잠시 동안 그녀가 전화를 받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거대한 일격을 받아, 나를 세계에 연결하고 있던 밧줄이 끊어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의 힘이 빠지면서 단단한 공기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유미요시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
"여행을 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에요." 하고 유미요시는 아주 시원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휴가 중에 도쿄에 가 있었어요. 친척집에. 당신의 집에 전화를 두 번 걸었어요. 아무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삿포로로 와서, 네게 죽 전화를 걸고 있었어."
"엇갈렸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엇갈렸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꼭 잡고는 TV의 소리 없는 화면을 잠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에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봐요. 왜 그래요. 여보세요?" 하고 유미요시가 말했다.
"여기 있어."
"당신 목소리가 이상한 것 같아요."
"긴장하고 있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직접 너를 만나 이야기하기 전에는 잘 말할 수 없어. 죽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전화로 말하면 그 긴장이 풀리지 않아."
"내일 밤에는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하고 그녀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마 안경테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했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기대었다.
"이봐, 내일은 늦을 것 같아. 오늘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
그녀는 부정적인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 부정적인 공기는 제대로 전달되어 왔다.
"지금은 아주 피곤해요. 녹초가 되었어요. 방금 돌아왔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만나기는 곤란해요. 내일은 아침부터 출근해야 하고, 지금은 그저 잠을 자고 싶어요. 내일 퇴근 후에 만나요. 그러면 되죠? 아니면, 내일은 여기에 있지 않을 건가요?"
"아니, 나는 얼마 동안 죽 여기에 있을 거야. 네가 피곤한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어쩐지 걱정이 돼. 내일이 되면, 네가 이미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사라져요?"
"이 세계로부터 사라질까 봐, 소멸될까 봐."
유미요시는 웃었다.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안심해요."
"이봐, 그렇지 않아. 너는 알지 못하고 있어. 우리는 자꾸 이동해 가고 있어. 그리고 이동해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우리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가 사라져 간다구.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무엇 하나 머물러 있지 않아. 의식 속에는 머물러 있지. 하지만 이 현실의 세계로부터 사라져 가는 거야. 나는 그게 걱정이야. 유미요시, 나는 너를 구하고 있어. 내가 무엇을 이토록 구하는 건 없었던 일이야. 그러니까 내게 사라지기를 원치 않아."
유미요시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우스운 사람이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약속해요. 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내일 당신을 만날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줘요."
"알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체념했다. 체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좋았다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잘 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잠시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26층의 바로 가서, 보드카 소다를 마셨다. 내가 처음으로 유키를 만난 곳이다. 바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운터에서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둘 다 멋진 옷을 입고 있었다. 한 명은 다리가 예뻤다. 나는 테이블 앞의 좌석에 앉아, 그녀들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바라보면서 보드카 소다를 마셨다. 그리고 야경도 바라보았다. 나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별로 아프지 않다. 그리고 나는 손가락으로 두개골의 모양을 더듬어 갔다. 내 두개골, 천천히 한참 동안 내 두개골의 모양을 확인하고 나서, 이번에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자들의 뼈의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두개골과, 척추, 늑골, 골반, 팔과 다리, 관절, 아주 예쁜 다리 속의 예쁜 백골, 눈처럼 새하얗고 청결하며 무표정한 뼈, 다리가 예쁜 쪽의 여자가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 내 시선을 느꼈었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네 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뼈의 모양을 상상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물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보드카 소다 석 잔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유미요시의 존재를 확인한 때문인지,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새벽 세 시에 유미요시가 왔다. 새벽 세 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침대 사이드의 작은 불을 켜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내복을 입고, 아무 생각도 없이 문을 열었다. 몹시 졸려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일어나 걸어가서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문을 열자 거기에 유미요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연한 청색의 제복인 블레이저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문틈으로 슬쩍 방에 들어왔다. 나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방의 한가운데 서서 커다랗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블레이저코트를 소리도 없이 벗고, 구겨지지 않도록 그것을 반듯이 의자의 등받이에 걸쳤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때요, 사라지지 않았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사라지지 않았어." 하고 나는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아직 잘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놀랄 수도 없었다.
"그처럼 간단히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하고 유미요시는 잘 알아듣게 하려는 듯이 말했다.
"너는 알지 못하고 있어. 이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무슨 일이든."
"하지만 아무튼 나는 여기 있어요.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건 인정하죠?"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심호흡을 한 다음, 유미요시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실이었다.
"인정한다." 하고 나는 말했다.
"너는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밤중의 세 시에 왜 네가 내 방에 왔을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곧 잠이 들었지만, 한 시가 지나 깨어버리고는 통 잘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한 말에 신경이 쓰였어요. 어쩌면 이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하고 말예요. 그래서 택시를 타고 이리로 오기로 했어요."
"하지만 밤중의 세 시에 네가 출근을 하면,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이 시간에는 모두 자고 있어요. 24시간 풀 서비스라고는 하지만, 한밤의 세 시인 걸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요. 제대로 일어나 대기하고 있는 건 프런트와 룸서비스 담당자들뿐이에요. 지하의 주차장으로부터 종업원용 문을 통해 올라오면 알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발견돼도 여기는 종업원이 많으므로 근무중인지 비번인지 일일이 알 수 없고, 알고 있다 해도 휴게실에 잠을 자러 왔다고 말하면 전혀 문제없어요. 이러한 일은 전에도 몇 번 한 적이 있거든요."
"전에도 있어?"
"응, 잠이 오지 않으면 몰래 밤중에 호텔로 나와요. 그리고 혼자 어슬렁거려요.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아요. 우스워요? 하지만 그런 게 좋아요. 호텔 안에 있으면 무척 마음이 놓여요. 한 번도 발견된 적은 없어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발견되지 않고, 발견돼도 어떻게든 발뺌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 방에 들어와 있는 걸 알게 되면 그건 좀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괜찮아요. 여기에 아침까지 있다가, 출근 시간이 되면 살며시 나가겠어요. 괜찮죠?"
"난 괜찮아. 출근 시간은 몇 시야?"
"여덟 시"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섯 시간 남았어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목의 시계를 끌러, 툭 하고 작은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스커트 자락을 당겨 죽 펴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조금씩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당신은 나를 갈구하고 있는 거군요?"
"아주 격렬히" 하고 나는 말했다.
"모든 게 한 바퀴 빙그르르 회전을 했어. 그리고 나는 너를 갈구하고 있어."
"격렬히"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스커트 자락을 또 당겼다.
"그래, 아주 격렬히."
"한 바퀴 돌아 어디로 돌아왔어요?"
"현실로" 하고 나는 말했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현실로 돌아왔어. 여러 가지의 기묘한 것들 속을 통과해 왔어. 여러 사람들이 죽었어. 여러 가지가 상실되었어. 굉장히 혼란되어 있었는데, 그 혼란이 해소된 건 아냐. 아마 혼란은 혼란스러운 대로 존속되어 가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느껴. 나는 이로써 한 바퀴 돌았다는 걸. 그리고 여기는 현실이야. 나는 한 바퀴 도는 동안 기진맥진하여 녹초가 되어 있었어. 하지만 어떻게든 계속 춤을 추었지. 제대로 스텝을 밟았어. 그래서 이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밀한 걸 지금은 도저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나를 신용해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갈구하고 있고, 이는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리고 네게도 중요한 일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그럼 나는 어떡하면 좋죠?" 하고 유미요시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했다.
"감동하여 당신과 자면 돼요? 멋있어, 그토록 구해지고 있다니 최고야! 하는 식으로"
"틀려,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적당한 말을 찾았다. 하지만 적당한 말 따위는 물론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건 정해져 있는 일이야. 나는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어. 너는 나하고 자는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처음에는 그럴 수 없었어. 그러는 게 부적당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 때까지 기다렸지. 한 바퀴 돌았어. 지금은 부적당하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 나는 당신과 자야 한다는 말이에요?"
"논리적으로는 확실히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해. 설득의 방법으로서는 가장 나쁘리라고 생각해. 그건 인정해. 하지만 정직히 말하려면 이렇게 되어 버린다고, 그렇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어. 이봐, 나도 보통의 상황이면 제대로 순서를 밟아 너를 설득해. 나도 그 정도의 방식은 알고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 방법적으로는 남들만큼 제대로 설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그렇지 않아. 이는 더 단순한 일이야. 그러니까 이는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어. 능숙하게 해내느냐의 여부의 문제가 아냐. 너하고 나는 자는 거야. 정해져 있어. 정해져 있는 것을 나는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아. 그러한 짓을 하면, 거기에 있는 중요한 게 깨져 버리기 때문이야.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유미요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시계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보지 말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의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어 갔다. 옷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옷 하나를 벗으면, 그것을 어디에 제대로 개어 두고 있는 듯했다. 안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도 들렸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아주 섹시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머리맡의 조명을 끄고, 내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아주 조용히 그녀는 내 옆으로 슬쩍 기어들어왔다. 방문의 틈사이로 이 방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나는 손을 뻗쳐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녀의 살과 내 살이 닿았다. 아주 매끄럽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뭔가 무게가 있었다. 현실이다. 메이와는 다르다. 그녀의 몸은 꿈처럼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환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의 환상과, 그녀를 포옹하고 있는 환상 속의 환상, 이중의 환상 속에. 멋지다. 하지만 유미요시의 몸은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따스함이나 무게나 떨림은 정말로 현실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키키를 애무하는 고혼다의 손가락도 환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기이고, 화면 위의 빛의 이동이며, 한 세계로부터의 또 하나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는 다르다. 이는 현실이다. 멋지다. 내 현실의 손가락이 유미요시의 현실의 살갗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다." 하고 나는 말했다.
유미요시는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코끝의 감촉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의 몸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확인하여 갔다. 어깨로부터 팔꿈치, 손목, 손바닥, 그리고 열 개의 손가락 끝까지. 나는 아주 세밀한 부분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거기에 봉인하는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젖가슴과 배, 옆구리, 등, 다리 등의 모양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그리고 봉인을 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음모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거기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성기에까지도.
현실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저 조용히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나를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이에 맞추어 미묘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모두 확인한 다음에는, 한 번 더 그녀를 팔로 꼭 껴안았다. 그녀의 팔도 내 몸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가 내쉬는 숨결은 따스하고 촉촉함이 있었다. 그것은 말이 될 수 없는 말을 공중에 띄워 올리고 있었다. 그때에 나는 그녀 속으로 들어갔다. 내 페니스는 아주 딱딱해 졌고 몹시 뜨거웠다. 그만큼 격렬하게 나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독하게 목이 말라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미요시는 내 팔을 피가 나리만큼 세게 물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게 현실이다. 아픔과 피, 나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천천히 사정하였다. 순번을 확인하는 것처럼.
"굉장해요." 하고 조금 후에 유미요시가 말했다.
"그러니까 정해져 있었던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유미요시는 그대로 내 팔 속에서 잠들었다. 아주 조용한 잠이었다. 나는 잠들지 않았다. 통 잠이 오지 않았고, 잠들어 있는 그녀를 껴안고 있는 게 멋있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지면서, 아침 햇빛이 방안에 조금씩 희미하게 비쳐들기 시작하였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손목시계와 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안경을 벗은 유미요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은 그녀도 멋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나는 다시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한 번 더 그녀의 저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기분 좋은 듯이 푹 잠들어 있기 때문에 차마 그 잠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껴안은 채, 빛의 영역이 방의 구석구석까지 퍼져가며 어둠이 후퇴하여 사라져 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 위에는 그녀의 개어둔 옷이 놓여 있었다. 스커트와 블라우스와 스타킹과 속옷, 그리고 의자 밑에는 검은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곱 시에 나는 그녀를 깨웠다.
"유미요시, 일어날 시간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목에 또 코를 가져왔다.
"굉장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물고기처럼 침대를 쑥 나가 벌거벗은 채로 아침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마치 충전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베개에 한쪽 팔을 괴고, 그녀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몇 시간 전에 확인하고 봉인한 그 몸을.
유미요시는 샤워를 하고, 내 헤어 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간결하고 깔끔하게 이를 닦았다. 그리고 꼼꼼히 옷을 입었다. 나는 그녀가 옷을 입는 걸 바라보았다. 그녀는 흰 블라우스의 버튼을 주의 깊게 하나하나 잠그고, 블레이저코트를 입고는, 온 몸이 비치는 거울 앞에 나가 구겨지지도 않고 먼지도 묻어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유미요시는 그러한 일을 하는 데는 아주 진지했다. 그러한 그녀의 몸짓을 바라보고 있는 게 즐거웠다. 아침이라는 느낌이 전달되어 왔다. "화장도구는 휴게실의 사물함에 넣어 두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대로도 예뻐" 하고 나는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화장을 하지 않으면 야단맞아요. 화장을 하는 것도 근무하는 일의 일부예요."
나는 선 채로 방의 한가운데에서 유미요시를 한 번 더 껴안았다. 연한 청색의 제복을 입고 안경을 끼고 있는 유미요시를 껴안는 것도 멋있는 일이었다.
"날이 밝았는데도 아직 나를 원하고 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굉장히" 하고 나는 말했다.
"어제보다 더 격렬히."
"이봐요. 이렇게 격렬히 원함을 받긴 처음 있는 일이에요."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그러한 건 분명히 느껴져요. 그런 걸 처음부터 느꼈어요."
"지금까지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았어?"
"당신처럼은요, 아무도."
"원하여지면 어떤 느낌이 들어?"
"굉장히 느슨해지는 느낌이에요"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이렇게 느슨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에요. 마치 따스하고 쾌적한 방에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죽 거기에 있으면 돼." 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나는 너밖에 없어."
"거기에 머무는 거예요?"
"그래, 머무는 거야."
유미요시는 약간 얼굴을 뒤로 젖히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봐요, 오늘 밤에도 또 이리로 묵으러 와도 괜찮을까요?"
"이리로 네가 묵으러 오는 건 내게는 괜찮아 하지만 네게는 위험이 너무 크지 않을까? 탄로 나면 너는 해고당할지도 몰라. 그보다는 네 아파트나, 아니면 다른 호텔에 묵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편이 마음이 편할 거야."
유미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가 좋아요. 나는 이 장소가 좋아요. 여기는 당신의 장소인 동시에 내 장소이기도 하거든요.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껴안기고 싶어요. 당신만 좋다면."
"나는 어디든 상관없어. 네가 좋아하는 대로 하면 돼."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요, 여기서."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문을 약간 열고, 바깥 분위기를 살펴보고는 몸을 구부리듯이 하며 쓱 사라져 버렸다.
나는 면도와 샤워를 하고 밖에 나가 아침의 거리를 산책하고 그리고 던킨 도너치에 들어가 도너츠를 먹고, 커피를 두 잔 마셨다.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나도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키가 공부를 시작한 것처럼, 나도 일을 시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되는 것이다. 삿포로에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다. 거의 3년 동안 계속 눈 치우는 작업, 곧 생업에 종사해온 끝에, 나는 뭔가 사진을 위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문장. 시나 소설이나 자서전, 편지 따위도 아닌, 자신을 위한 단순한 문장.
나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유미요시의 몸을 생각해 내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확인하고 봉인한 것이다. 나는 행복스런 기분으로 초여름의 거리를 거닐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신 후 호텔의 로비에 있는 화분의 큰 나무 밑에 앉아, 프런트에서 유미요시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44
유미요시는 해질녘의 여섯 시 반에 찾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제복차림이었지만, 다른 모양의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갈아입을 옷이나 세면도구, 화장품 따위가 담겨진 작은 비닐 백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언젠가 탄로나." 하고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빈틈이 없는걸요." 하고 유미요시는 말하고, 싱긋 웃으며 블레이저코트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 걸쳤다.
그리고 우리는 소파 위에서 서로 껴안았다.
"이봐요, 오늘은 죽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매일 낮에는 이 호텔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이렇게 당신의 방에 몰래 찾아와 둘이서 서로 껴안고 잠을 자고,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 그대도 일하러 나갈 수 있었으면 멋있겠다고 말예요."
"직장과 주거지가 가까워지게?"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언제까지나 여기에 계속 묵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고, 또 그러한 일을 매일 하고 있으면 아무리 빈틈이 없어도 언젠가는 탄로 나게 돼."
유미요시는 불만스러운 듯이 무릎 위의 손가락을 튕겨 몇 번이고 소리를 냈다.
"세상 일이 잘 되어가지 않는군요."
"정말"
"하지만 앞으로 며칠 동안은 여기에 묵고 있을 거죠?"
"그래. 아마 그렇게 될 거야."
"그럼 그 며칠만으로 족해요. 둘이서 이 호텔 안에서 지내요."
그리고 그녀는 옷을 벗고, 또 하나하나 제대로 개었다. 버릇이다. 손목시계를 끄르고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약 한 시간 동안에 걸쳐 사랑을 나누었다. 나와 그녀는 녹초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건 아주 상쾌한 피로감이었다.
"굉장해요" 하고 유미요시는 감탄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또 내 팔속에서 꾸벅꾸벅 잠들어 버렸다. 최대로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어 혼자 마셨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유미요시가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상쾌한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여덟 시 가까이 되어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시장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룸서비스의 메뉴를 점검하여, 마카로니 그라탕과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녀는 옷과 구두를 침대 시트 밑에 감추고, 보이가 문을 노크하면 재빨리 욕실로 피하곤 하였다. 보이가 테이블 위에 요리를 차려놓고 나가면, 나는 욕실의 문을 살며시 노크했다. 우리는 그라탕과 샌드위치를 절반씩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도쿄로부터 삿포로로 옮겨오겠다고 말했다.
"도쿄에 있어도 별 수 없어. 이제 있을 의미도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오늘 낮에는 죽 그걸 생각하고 있었지. 여기에 자리 잡기로 하겠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어. 여기에 있으면 너를 만날 수 있으니까."
"머무르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 머무르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이사할 짐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 레코드와 책과 부엌 용품 정도다. 스바루에 실어 페리 편으로 운반할 수 있으리라. 큰 것은 팔거나 버리고 다시 사면된다. 침대나 냉장고도 이제 새 것으로 갈아도 될 무렵이었다. 대체로 나는 물건을 오랫동안 너무 소중히 사용한다.
"삿포로에서 아파트 셋방을 얻겠어. 그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너는 오고 싶을 때에 거기에 와서 묵고 가면 돼. 얼마 동안 그러한 식으로 지내보자구. 우리는 아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현실을 되찾고, 너는 편안해지는 거야. 그리고 둘이서 거기에 머무는 거야."
유미요시는 미소 지으며 내게 입을 맞추었다.
"멋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다음 일은 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좋은 예감이 들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앞일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척 멋있어요. 아주 최고로 멋있어요."
나는 한 번 더 룸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아이스펠 한 잔 분의 얼음을 주문하였다. 그녀는 또 욕실에 숨었다. 얼음이 오자, 나는 낮에 거리에서 사가지고 온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를 꺼내어 브라디 마리 두 개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것으로 가벼이 건배하였다. 배경 음악이 필요했으므로, 머리맡의 유선 방송 스위치를 넣어, 채널을 '대중음악'에 맞추었다. 만토바니 오케스트라가 <매혹의 저녁>을 멋진 선율로 연주하고 있었다. 분위기로는 말할 나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은 눈치가 빠르군요." 하고 유미요시가 감탄하여 말했다.
"실은 아까부터 브라디 마리를 마셨으면 좋겠다고 죽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제대로 알아냈죠?"
"귀를 기울이면 구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뚫어지게 바라보면 구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여."
"표어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표어가 아냐. 살아가는 자세를 언어로 나타냈을 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표어를 만드는 전문가가 되면 좋을 거예요." 하고 킥킥거리면서 유미요시는 말했다.
우리는 브라디 마리를 석 잔씩 미시고, 그리고 또 벌거벗고 서로 껴안고 부드럽게 서로의 몸을 나눴다. 우리는 아주 충족해 있었다. 그녀를 껴안고 있을 때에 한 번, 돌핀 호텔의 구식 엘리베이터가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여기가 내 연결 지점이다. 괜찮아, 나는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나는 확고히 이어져 있다. 나는 이음매를 회복하고, 그리고 현실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구하고, 양사나이가 그것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열두 시가 되어 우리는 잠이 들었다.
유미요시가 내 몸을 흔들어 일으켰다.
"이봐요, 일어나요." 하고 그녀는 내 귓전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틈에 단정히 제복을 입고 있었다. 주위는 아직 어둡고, 내 머리의 절반은 아직 따스한 진흙 같은 무의식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침실 옆 조명이 켜져 있었다. 머리맡의 시계는 세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난처한 일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나는 우선 생각했다. 아마 그녀가 여기에 와 있는 게 상사에게 탄로 난 모양이라고, 유미요시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아 깨우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거기서 앞으로 더 나가지 않았다.
"일어나요. 제발 일어나요." 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났어."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괜찮으니까 빨리 일어나 옷을 입어요."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재빨리 옷을 입었다. 머리 위로 티셔츠를 입고, 블루진과 스니커를 신고,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지퍼를 목 위까지 끌어올렸다.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옷을 다 입고 나자 유미요시는 내 손을 이끌고 문 앞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작은 틈이 생기도록 문을 열었다. 겨우 2센티미터나 3센티미터쯤.
"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는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젤리처럼 진하고 차가운 어둠이다. 손을 내밀면 그대로 흡수되어 버릴 것처럼 여겨질 만큼 어둠은 깊고 진했다. 그리고 으레 수반되는 그 냄새가 났다. 곰팡내 나는 낡은 종이의 냄새. 낡은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
"또 그 어둠이 왔어요." 하고 그녀는 내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허리로 손을 돌려 살며시 끌어당겼다.
"괜찮아. 두려워할 것 없어. 여기는 나를 위한 세계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아. 처음에 네가 나에게 이 어둠의 이야기를 했지.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되었어." 하지만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이는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이는 내 유전자에 새겨지고, 태고의 시대로부터 면면히 전달되어 온 공포였다. 어둠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이는 사람을 몽땅 삼켜 버리거나, 그 존재를 일그러뜨리고 파괴하거나, 소멸시켜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대체 누가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어둠의 존재 이유. 대체 누가 그러한 것을 믿겠는가?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게 용이하게 일그러뜨려지고, 전환되며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의 논리인 허무가 모든 걸 뒤덮어 버리는 것이다.
"괜찮아. 하나도 두려워할 것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는 자신에게 타이르기 위한 말이었다.
"어떡하죠?" 하고 유미요시가 말했다.
"둘이서 앞으로 나가보자구"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두 인물을 만날 목적으로 이 호텔에 돌아온 거야. 한 명은 너이고, 또 하나는 그 상대야. 그는 이 어둠 속 깊은 곳에 있어. 그리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 방에 있던 사람?"
"그래. 그 사람이야."
"하지만 무서워요. 정말 굉장히 무서워요."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며 날카로워져 있었다. 할 수 없다, 나도 무서운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꺼풀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갔다.
"무섭지 않아. 이번에는 내가 함께 있어. 서로 손을 잡고 있자구. 손을 떼지 않으면 괜찮아. 어떤 일이 있어도 손을 떼면 안 돼. 가만히 붙어 있는 거야."
나는 방 안으로 돌아와, 백 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펜라이트와 비크라이터를 꺼내어, 윈드브레이커의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어 유미요시의 손을 잡고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어디로 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오른쪽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언제나 오른쪽이야. 정해져 있어." 나는 펜라이트로 발밑을 비추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이전에 느꼈던 대로, 이는 돌핀 호텔의 복도는 아니었다. 훨씬 낡아빠진 건물의 복도였다. 붉은 카펫이 닳아 떨어지고, 복도는 군데군데 움푹 패어져 있었다. 회반죽을 한 벽에는 노인의 피부에 나는 검버섯과 같은 숙명적인 얼룩이 져 있었다. 돌핀 호텔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확히 그대로의 돌핀 호텔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는 돌핀 호텔 비슷한 무엇이다. 돌핀 호텔적인 무엇이다. 한참 곧바로 나가자 복도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역시 오른쪽으로 꺾어져 있었다. 나는 복도를 돌아갔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무엇인가 달랐다.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멀리 있는 문의 틈새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던 그 촛불의 희미한 빛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좀 더 확인하기 위해 라이트를 꺼 보았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는 빛이 없었다. 완벽한 어둠이 교활한 물처럼 소리도 없이 우리를 둘러쌌다.
유미요시는 내 손을 힘주어 꽉 쥐고 있었다.
"빛이 보이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이는 전혀 내 목소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저쪽 문에서 빛이 보였었어, 지난번에는."
"내가 겪을 때도 그랬어요. 저쪽에 보였어요."
나는 그 모퉁이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양사나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잠들어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는 언제나 저기에 불을 켜두고 있을 것이다. 등대처럼. 그게 그의 역할이다. 설령 잠들어 있다 해도, 빛은 언제나 거기에 있어야 한다.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언짢은 예감이 들었다.
"이봐요. 이대로 돌아가요." 하고 유미요시가 말했다.
"이건 너무 어두워요. 돌아가서 다음 기회를 기다려요. 그 편이 낫겠어요. 무리를 하지 말고."
그녀는 조리에 닿는 말만 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 어둡다. 그리고 뭔가 난처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나는 걱정이 돼. 저리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그는 어떤 이유로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또 우리를 이 세계로 연결시킨 거야." 나는 다시 펜라이트를 켰다.
가늘고 노란 빛 줄기가 어둠 속으로 휙 뻗어나갔다.
"가자구. 가만히 손을 잡고 있어요. 나는 너를 갈구하고 있어. 너는 나를 갈구하고 있고.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머물러 있는 거야. 어디에도 가지 않아. 분명히 돌아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천천히 발밑을 확인하면서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유미요시의 헤어린스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냄새는 나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은 작고 따스하나 딱딱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이어져 있었다.
양사나이가 있던 방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거기만이 문이 열려 있고, 그 틈 사이로 섬뜩하고 곰팡내 나는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문을 살며시 노크해 보았다. 그 소리는 처음으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러우리만큼 크게 울렸다. 마치 귀 속의 거대한 증폭 기관을 두드린 것처럼. 나는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리고, 그리고 기다렸다. 20초나 30초쯤 기다렸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양사나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어쩌면 죽어버린 것일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는 몹시 피로하고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죽어버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굉장히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늙어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만일 그가 죽어 버렸다면, 누가 이 세계와 나를 결부시켜 줄 것인가? 누가 나를 연결시켜줄 것인가. 나는 문을 열어 그녀의 손을 잡고 살며시 방안으로 들어가, 펜라이트로 바닥을 비춰 보았다. 방 안의 모양은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헌 책들이 온 바닥에 잔뜩 쌓여져 있고, 작은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촛대 대용으로 쓰이는 볼품없는 쟁반이 놓여 있었다. 초를 5센티미터쯤 남겨두고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포켓에서 라이타를 꺼내어 거기에 불을 붙이고, 펜라이트를 끄고는 윈드브레이커의 포켓에 집어넣었다.
방 안의 어디에도 양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버렸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양사나이" 하고 나는 대답했다.
"양사나이가 이 세계를 관리하고 있는 거야. 여기가 이어지는 곳인데, 그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를 이어 주고 있어. 전화의 배전대와 마찬가지로 말야. 그는 야의 모피를 입고 예전부터 살아오고 있어. 그리고 여기에 자리 잡고 있어. 숨어 있는 거야."
"무엇으로부터 숨어 있어요?"
"무엇으로부터일까? 전쟁으로부터, 문명으로부터, 법률로부터, 조직으로부터... 양사나이적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하지만 그가 없어져 버린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벽 위의 확대된 그림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그래, 없어져 버렸어. 어째서일까. 없어서는 안 되는데"
나는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대인이 생각한 세계의 가장자리. 모든 게 폭포처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듯한 세계의 가장자리다. 그 끝 부분에 우리는 서 있다. 단 둘이서, 우리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암흑의 허무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방의 공기는 뼈에 스며드는 것처럼 차가웠다.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을 통해 겨우 따스함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어두운 데서 나쁜 일을 생각하면 안 돼요. 더 밝게 생각해요."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어디로 물건을 사러 나갔을 뿐인지도 모르잖아요? 초가 다 떨어져서 사러 갔는지도 몰라요" 하고 유미요시는 말했다.
"혹은 소득세를 되돌려 받으려고 나갔는지도 몰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라이트로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입언저리가 약간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라이트를 끄고, 어두컴컴한 불빛 속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봐, 휴일에는 둘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자."
"물론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 스바루를 가져오겠어. 중고품이고 구식이지만 좋은 차야. 마음에 들어. 나는 마세라티도 타보았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 스바루가 훨씬 낫다구."
"물론."
"에어컨이나 카스테레오도 설치되어 있어."
"말할 것까지는 없어요."
"말할 것까지는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것을 타고 여러 곳에 가보자구. 그리고 둘이서 많은 걸 구경하고 싶군."
"당연한 생각이에요."
우리는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몸을 떼고, 나는 또 라이트를 켰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바닥 위의 얇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요크셔 종 양의 품종 개량 연구"라는 팸플릿이었다. 표지는 갈색으로 변색되고, 그 위에 흰 먼지가 우유의 지방이 굳어져 생긴 막처럼 쌓여 있었다.
"거기에 있는 건 모두 양에 대한 책들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예전의 돌핀 호텔의 일부는 양에 관한 자료실로 되어 있었어. 지배인의 아버지가 양의 연구가였거든. 그게 여기에 모여져 있어. 양사나이가 그 뒤를 이어받아 관리하고 있었지. 이제 아무 쓸모도 없어. 아무도 이러한 걸 새삼스레 읽지 않아. 하지만 양사나이는 맡아둔 거야. 아마 그게 이 장소에는 중요한 것이었을 거야."
유미요시는 내 라이트를 가져가 그 팸플릿을 펴고, 벽에 개대어 그것을 읽었다. 나는 벽 위의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양사나이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하고. 그리고 갑자기 몹시 언짢은 예감이 들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무엇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퍼뜩 생각이 들었다. 안 된다. 안 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 유미요시는 어느 틈엔지 손을 떼고 있다. 손을 떼면 안 된다. 절대로. 순간적으로 몸 안의 모공으로부터 땀이 솟아났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유미요시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내가 손을 뻗치는 순간에, 그녀의 몸은 벽에 흡수되어 버렸다. 키키가 그 죽음의 방 벽에 흡수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미요시의 몸은 마치 물에 밀리어 흐르는 모래에 삼켜지듯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펜라이트의 불빛도 꺼졌다.
"유미요시!" 하고 나는 큰 소리로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과 냉기가 한데 어우러져 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둠이 한층 더 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유미요시!" 하고 나는 한 번 더 외쳤다.
"이봐요, 간단해요" 하고 벽 너머에서 유미요시의 흐린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간단해요. 벽을 빠져 나오면 금방 이쪽으로 올 수 있어요."
"틀려!" 하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간단한 것처럼 보여. 하지만 그 쪽으로 가버리면 이미 돌아올 수 없어. 너는 그걸 알지 못하고 있어. 거기는 틀려. 거기는 현실이 아니라구. 그건 그쪽의 세계야. 이쪽의 세계와는 다른 곳이라구."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또 깊은 침묵이 방에 가득 찼다. 마치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침묵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유미요시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그녀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저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너무 가혹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력감, 너무 가혹하다. 나와 유미요시는 이쪽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걸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나는 그걸 위해 복잡한 스텝을 밟으면서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틈이 없다. 나는 유미요시를 쫓아 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미요시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키키가 흡수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벽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불투명한 공기의 층. 매끄럽고 딱딱한 감촉. 물과도 같은 차가움. 시간이 흔들리고, 연속성이 일그러뜨려지고, 중력이 뒤흔들렸다. 태고의 기억이 시간의 심연 속에서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 유전자다. 나는 자신의 육체 속에서 진화가 고양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복잡하게 뒤얽힌 그 거대한 자기 자신의 DNA를 초월하였다. 지구가 팽창하고, 그리고 냉각되어 오므라들었다. 동굴 속에 양이 숨어 있었다. 바다는 거대한 사념인데, 그 표면에 소리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 파도가 밀어닥치는 물가에 서서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끝이 없는 시간이 거대한 실덩어리가 되어 하늘에 떠 있는 게 보였다. 허무가 사람들을 삼키고, 보다 거대한 허무가 그 허무를 삼켰다. 사람들의 살이 녹아 백골이 나타나고, 그것도 티끌이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아주 완전하게 죽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멋지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내 살은 분해되어 날려가고, 그리고 또 하나로 응결되었다.
그 혼란과 카오스의 공기층을 빠져 나가자, 나는 벌거벗은 채 침대 속에 있었다. 주위는 캄캄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손을 뻗쳤지만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고독했다. 나는 또 외돌토리가 되어 세계의 가장자리에 남겨진 것이다.
"유미요시!" 하고 나는 힘껏 외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친 숨이 새어나왔을 뿐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외치려 했는데, 그때 툭 하는 소리가 들리며 플로어 스탠드가 켜졌다. 방이 이내 밝아졌다.
그리고 유미요시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흰 블라우스와 스커트에 감은 구두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 연결된 의자의 등받이에는 연한 청색의 블레이저코트가 그녀의 분신처럼 걸쳐져 있었다. 내 몸을 굳어지게 하고 있던 힘이, 나사가 풀리듯이 천천히 조금씩 그 힘을 이완시켜 갔다. 나는 내 자신이 오른손으로 시트를 꽉 붙잡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나는 시트로부터 손을 떼고 얼굴의 땀을 닦았다. 여기는 이쪽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빛은 진짜 빛일까.
"이봐, 유미요시." 하고 나는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지?"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간단히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꿈을 꾸고 있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알고 있어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당신이 자면서 꿈을 꾸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걸 보고 있었어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봐요. 무엇을 진지하게 보려고 하면, 어둠 속에서도 제대로 보이는 거죠."
나는 시계를 보았다. 네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벽녘의 짧은 시간. 생각이 깊어지며 굴곡 되는 시간. 내 몸은 차가워지고, 다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건 정말로 꿈이었을까? 그 어둠 속에서 양사나이가 사라지고 그리고 유미요시도 사라졌다. 나는 그때의 갈 데 없는 절망적인 고독감을 또렷이 생각해낼 수 있었다. 유미요시의 손의 감촉을 생각해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아직 내 속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현실 이상으로 생생했다. 현실은 아직 충분한 사실성을 되찾고 있지 않았다.
"이봐, 유미요시." 하고 나는 말했다.
"왜요?"
"왜 옷을 입고 있어?"
"옷을 입고 당신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쩐지."
"한 번 더 벗어주지 않겠어?" 하고 나는 물었다.
나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게 이쪽 세계라는 것을.
"물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구두를 벗어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고, 스타킹을 벗고, 스커트를 벗고, 그것을 제대로 개었다. 안경을 벗어 언제나처럼 툭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맨발로 소리도 없이 바닥을 가로질러, 모포를 살며시 쳐들고는 내 옆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는 꼭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은 따스하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분명한 현실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말했잖아요, 그렇게 간단히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그럴까 하고 나는 그녀는 껴안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는 취약하고 그리고 위태로운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간단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백골은 아직 하나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사나이의 뼈였을까? 아니 어쩌면 그 백골이 나 자신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멀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내 죽음을 가만히 들었다. 마치 멀리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밤기차의 소리처럼.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면서 올라가고, 그리고 멎었다. 누군가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방문을 닫았다. 돌핀 호텔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게 삐걱거리고, 모든 게 낡아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울 수 없는 것을 위해,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유미요시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유미요시는 내 팔속에서 푹 잠이 들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 몸 속에는 한 조각의 잠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말라붙은 샘처럼 나는 깨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포옹하듯이 살며시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 이따금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나는 상실된 자를 위해 울고, 아직 상실되지 않은 자를 위해 울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간 울었을 뿐이었다. 유미요시의 몸은 부드럽고, 그리고 내 팔속에서 따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현실을 그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조용히 날이 밝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머리맡의 자명종의 바늘이 현실의 시간에 맞추어 천천히 회전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것은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 팔의 안쪽에 유미요시의 숨이 내쉬어져, 그 부분만이 따스하게 젖어 있었다. 현실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에 머무는 것이다.
이윽고 시계 바늘이 일곱 시를 가리키고, 여름의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비춰들어 방바닥에 약간 일그러지고 네모진 도형을 그렸다. 유미요시는 푹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칼을 젖혀 귀가 드러나게 하고, 거기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갔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하고 나는 그대로 3분이나 4분쯤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의 말하는 방식이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고 표현이 있다. 목소리가 잘 나올까? 내 메시지가 현실의 공기를 잘 흔들 수 있을까? 몇 가지 문구를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명료한 것을 골랐다.
"유미요시, 아침이야." 하고 나는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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