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착각은 자유라지만

chocohuh 2022. 7. 20. 08:01

나는 실수도 자주 저지르지만 착각도 자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극히 최근까지 일본의 모텔이라고 하는 것은 차를 탄 채 방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숙박시설인 줄로만 굳게 믿고 있었다. 요컨대 말이 마구간에 들어가듯이 부들부들 떨면서 차가 방안에 들어가고, 젊은 남녀가(반드시 꼭 젊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면 바로 그 앞에 침대가 있다는 식이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버렸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모텔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려니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2,3년 전에 영화에서 진짜 모텔을 보았을 때엔 깜짝 놀랐다. 모텔이란, 이름뿐이고 실제로는 흔해빠진 러브호텔과-이것 역시 상세하게는 모르지만-다름없었던 것이다. 차도 방안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고, 차에 관련된 어떤 특수 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어째서 차가 일부러 방 안에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지?"하고 거꾸로 질문을 받았다.
"그런 식으로 돼 있다간 방 안에 배기가스가 가득 차게 될 거고, 8톤 트럭으로 모텔에 들어오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방을 달라고 부탁해야 되겠는지 한번 상상해보게."

그 말을 들으니 과연 그럴 것 같다.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이 훨씬 이치에 맞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모텔이라고 하면 남녀가 껴안고 있는 바로 그 옆에 자동차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런 목가적인(그렇지도 않은가?) 광경을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리곤 해버린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나는 죽 '기자회견'이라는 것을 '기차회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일어로는 이 두말의 음이 똑같이 '기샤'임). 그래서 가령 라디오나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어제 기자회견에서..."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그 일행이 덜커덩거리며 흔들리는 기차안에서 이야기하는 광경을 상상하고는 '정치가란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이동이 잦은 직업인이구나'하고 감탄했었다.

물론 이런 것도 잘 생각하면 '왜 정치가가 이야기를 하는지 언제나 한결같이 기차안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될까?'하는 의문이 당연히 떠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중학생이 된 후 신문의 정치 기사를 읽고 '기자회견'이라는 활자를 내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나는 기자회견이 기차회견이라는 데에 한 가닥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그런 착각이 비주얼한 요소를 내포한 착각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즉 모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을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정경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요즘도 라디오 뉴스에서 '기자회견'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태운 밤 기차가(나의 상상 속에서 기차회견의 기차는 언제나 밤 기차였다) 광활한 미국의 평원을 횡단해서 가는 1950년대의 풍경을 한순간에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이 오해가 풀린 지 약 4반세기란 세월이 지나버렸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 든 두 가지 예와는 달라도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착각이지만, 나는 오랫동안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큰 실례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오해가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늘 가급적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런 오해는 결국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어떤 사람에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아"라는 충고를 들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으면, 어딘가 켕기는 데가 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상대방에게 갖게 하는 것이 되고, 또 실례가 되기도 해"라고. 하지만 이런 말을 남에게 듣는다고 해서 가치관이 당장 180도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바로 어제까지 상대방이 눈을 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던 인간이 아무런 저항 없이 오늘 당장 상대방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론상으로는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상대방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마음 속속들이까지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래도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일부러 과장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제까지 내내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생활해온 사람이 갑자기 눈을 보게 되면,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 보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원래대로 상대방의 눈에서 시선을 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쳤기에 나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본다.'는 일에 대해서 매우 고민을 많이 했다. 별로 강하게 의식하지 않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스물다섯을 넘기고 나서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속 어디에선가는 '사실은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 더 예의바른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비교적 집요한 성격의 인간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이런 수많은 착각이, 착각으로서가 아니라 정당한 행위, 정당한 상황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지구상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하는 수가 있다. 거기에는 침대 바로 옆까지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있는 모텔이 있고, 정치가는 밤기차를 타고 정치를 논하며, 사람들은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차를 운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텔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건 아무 관계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