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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하루키

오페라의 밤

chocohuh 2020. 12. 28. 10:27

'오페라'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울림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결코 오페라 광이나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페라라는 말은 묘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지금부터 오페라를 보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뿐만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의 객석의 그 웅성거리는 독특한 술렁임이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박스에 들어와 드디어 서곡이 시작될 때의 그 분위기도 너무 좋다.

 

굳이 오페라 하우스에 가지 않더라도 집 안에서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싸구려 포도주를 홀짝거리면서, 마당의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레코드로 오페라를 한가로이 듣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 게다가 요즘에는 비디오로도 오페라를 볼 수 있게 되어 참 고맙다. 한 손에 리모컨을 들고 우리 집 소파에 누워 뒹굴면서 마젤이 지휘하는 <돈 지오반니>나 아바도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을 수 있다는 건 역시 더없는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페라란 참 이상하다, 그처럼 완벽하게 18세기, 19세기적이고 장황하며 전통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일상적인 것이, 어떻게 이처럼 극히 단기간 동안 다양한 스타일이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바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일까? 물론 18세기, 19세기적이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또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도, 가부키(역주: 에도 시대에 발달한 일본의 전통적 미중 연극의 하나)도 지금까지 여전히 공연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령 가부키를 예로 들어 보아도, 유럽의 오페라처럼 일본 어느 지방 자그마한 도시엘 가도 반드시 가부키 가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며 가부키를 즐기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말하자면 이미 가부키는 일종의 서민적인 전통 예술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극도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오페라라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페라는 여전히 현존하는 정열적인 엔터테인먼트인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의 값싼 좌석은 젊은이들로 넘치고 있고, 인기 있는 공연이라면 관람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매진돼 버린다. 이상한 일이다. 대체 오페라라는 음악의 형태 속에 무엇이 그다지도 현대인들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나는 음악 평론가도 풍속 현상 평론가도 아니므로 그런 의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할 책임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맙게도).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이,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잖아? 그냥 그런 거라고. 하이오!' 하고 그냥 맘 편하게 생각하며 오페라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인데, 우리가 오페라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은 '낭비'가 아닌가 한다. 시간의 낭비, 노력의 낭비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시대착오를 가능케 하는 '비 일상성으로의 매몰'이라는 감성의 낭비. 우리는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초로 오페라라는 형태의 음악을 접한 것은 아마 중학생 때쯤으로, 텔레비전에서 마리오 델 모나코가 열창하는 전설적인 <어릿광대>를 보았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어랫광대>였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해도 좋을 정도로 박력이 넘치는 공연이었다. 비치보이스의 팬이었던 열두세 살의 소년이 어떻게 텔레비전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공연을 볼 마음이 생겼는지는, 여하튼 오래 전 일이라 불명확하다(아아, 나이를 먹으면 어찌하여 이다지도 많은 일의 동기가 불명확이라는 희미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드르륵드르륵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호기심이라는 위대한 촉매에 의해 그렇게 맺어졌는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겠지. 좌우지간 그게 처음이었다. 마리오 델 모나코의 <어릿광대>.

 

최초로 극장에 가서 본 오페라는 <오르페우스>였다.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밀라노 실내 가극단의 공연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장소는 오사카 페스티벌 홀. 다만 그게 누가 작곡한 <오르페우스>였는지가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누구였던가 하고 계속 생각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훌륭한 공연이었다. 세세한 것은 잊어버렸지만 굉장히 좋았던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좋았느냐고 물어본다면 거기에 대해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여하튼 좋았던 것이다(하이오!). 그 후 몹시 감동하여 기분이 들떠서는 전철을 타고 고베의 집으로 돌아왔던 게 기억난다.

 

그 뒤로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으로 조금씩 오페라를 계속 들었다. 그래도 나는 오페라 마니아는 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오페라의 존재 이유는 그 낭비성 속에 있고, 나에게는 그 같은 낭비성에 익숙해져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0여 년 동안 오페라와는 실질적으로 인연이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생 때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오페라를 보러 다니거나 석 장 짜리 오페라 레코드를 살 여유는 도저히는 아니더라도, 하여튼 없었다. 나는 학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학을 나와서도 우선 생활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무지하게 바빴고, 무지하게 가난했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몇 장인가의 오페라 레코드도 돈에 쪼들려 중고 가게에 팔아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빚을 갚을 수 없어 쩔쩔맬 때는 어지간해선 그럼 어디 오페라를 들어 볼까 하는 기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절망적이던 우리의 경제 상태도 몇 년 후엔 회복이 되어 생활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렇긴 해도 우리는 갓 서른이 넘을 때까지 여전히 일과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쫓겨야만 했다. 바빴던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주위에는 항상 뭔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렵사리 짬을 내서 콘서트에 갈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페라는 아직 아득한 저 멀리에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직 사치였던 것이다. 저 제이 캐츠비가 바라보던 해협 너머의 녹색 등불처럼, 그것은 늘 멀리 있었다.

 

겨우 오페라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때까지의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간간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우선 독일에서 <방랑하는 네덜란드 인><마적>을 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나는 또다시 오페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후에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틈만 나면 오페라를 보러 다녔다. 다양한 도시에서 다양한 오페라를 보았다. 베르디, 로시니, 푸치니, 모차르트..... 휴식시간에는 싸구려 샴페인을 조금씩 마셨다. 달랑 한 벌뿐인 정장 차림으로 로비에 서서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오페라의 밤다운 감정의 전율을 되찾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