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이오지마(Iwo Jima) 섬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 간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군은 벙커와 숨겨진 포대, 18km에 달하는 땅굴로 이오지마를 요새화하였다. 미군은 해군과 공군의 지원 하에 일본군 지역에 어마어마한 양의 화력을 퍼부었다.
이 전투는 미국이 일본의 본거지를 공격한 첫 전투이며 일본군은 이에 완강하게 맞섰다. 미군의 공격은 이오지마에 있는 2개 비행장을 점령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전투 시작부터 일본의 패배는 자명한 것이었다. 미국은 화력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 일본을 압도하였으며, 일본은 퇴각이나 병력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미국이 질 수 없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5명의 해병과 1명의 해군 병사가 166미터 높이의 수리바치 산(Mount Suribachi)에 미국 깃발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 담긴 조 로젠탈(Joe Rosenthal)의 사진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이 사진 기록은 사실 두 번째 깃발을 세우는 장면이었는데, 35일간에 걸친 전투 중 5일째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이 사진은 이 전투의 상징이 되어 여러 차례 재인용되었다.
미국은 마셜 제도(Marshall Islands)를 점령하고 1944년 2월 캐롤라인 제도(Caroline Islands)의 트룩(Truk)에 엄청난 규모의 공습을 가함으로써 일본 군 지도부의 상황 재평가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미국이 마리아나(Marianas)와 캐롤라인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징후는 자명하였다. 미군의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캐롤라인 북부부터 마리아나를 거쳐 오가사와라 제도(Ogasawara Islands)까지 내부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였다.
1944년 3월 오바타 히데요시(Obata Hideyoshi)가 지휘하는 제31군(Thirty-First Army)은 이 방어선 주둔을 위해 파병되었다. 치치지마(Chichi Jima) 주둔군의 지휘관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모든 육군 및 해군 통수권을 겸하게 되었다.
1944년 2월 미국이 콰잘레인(Kwajalein)과 에니웨톡(Eniwetok)에서의 전투로 마셜 제도의 기지들을 점령하자 일본은 육군과 해군 지원 병력을 모두 이오지마로 보냈다. 요코스카(Yokosuka) 해군기지에서 5백 명의 병력과, 치치지마에서 5백 명의 병력이 이오지마에 도착한 것은 1944년 3월에서 4월 사이였다. 본토와 치치지마에서 지원병력이 도착하자 이오지마의 주둔 병력 규모는 5천명에 달하였으며 화포는 13문, 경기관총 및 중기관총 도합 200정, 소총은 4,552정에 달하였다. 이오지마에는 또한 125mm 구경 해안포 여러 문과 12문의 중대공포, 30문의 25mm 대공포가 있었다.
1944년 여름 마리아나를 잃은 일본에게 있어서 오가사와라는 이제 더욱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만일 이곳이 미군의 손에 넘어간다면 미군이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게 되며, 군수 제조 공장과 민간의 사기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오가사와라 방어 계획 최종 본은 일본 제국 해군(Imperial Japanese Navy)이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여 미군의 상륙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에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더구나 1944년 항공기 손실이 너무나 컸기에 항공기 제조가 미군 공습에 타격을 입지 않는다고 가정하여도 1945년 3월 또는 4월까지 보유대수 3천 대를 채울 수가 없었다. 만일 일본이 항공기 보유 대수를 채운다고 한들 900km 거리에 있는 이오지마를 지원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의 항공기로는 타이완(Taiwan) 정도 거리가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캐빈저 작전(Operation Scavenger)이 개시되고, 마리아나를 출발한 미국 폭격기들이 매일 일본 본토를 타격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폭격기들이 뜨면 이오지마는 이를 감지해 본국에 연락을 취해 일본 요격기들이 준비할 수 있게 하였다.
필리핀에서 레이테 전투(Battle of Leyte)를 치른 연합군은 오키나와(Okinawa) 침공에 앞서 2개월간 준비에 들어갔다. 오키나와 침공에 있어서 이오지마가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막대한 것이었다. 이오지마는 B-29 장거리 폭격기를 요격할 수 있는 일본 전투기들의 비행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본 해군의 도피처 역할도 겸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본토 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오지마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B-29가 비행해야 하는 거리는 절반으로 줄어들기에 P-51 머스탱(Mustang)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정보부는 이오지마가 일주일 정도면 함락될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이곳에 일본군이 복잡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예측이었다. 일본의 이러한 방어 노력을 미군이 인지하게 된 것은 수백 톤의 폭탄과 수천발의 함포 사격이 끝난 뒤에도 일본군의 방어 진지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였다. 미국은 정보부의 긍정적인 보고서에 희망을 걸고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하였으며 이를 파견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라고 이름 지었다.
1944년 6월까지 타다미치 구리바야시(Tadamichi Kuribayashi) 중장은 이오지마 주둔군을 지휘하였다. 펠레리우 전투(Battle of Peleliu)때의 방어 전략에 영감을 얻은 구리바야시는 일본군의 원칙을 뒤집는 방어 전략을 고안하였다. 상륙군에 맞서서 해변 가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는 기존 교범 대신 구리바야시는 중화기를 중심으로 깊숙이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남작 다케이치 니시(Takeichi Nishi) 대령의 전차대를 위장포대로 활용하였다.
주력군까지 연계되는 터널 구축을 완성하지 못한 구리바야시는 수리바치 산 주변의 주둔군에게 독립성을 부여하고 북부 주력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토치카와 벙커에는 터널을 연결하여 미군에 의해 주둔 병력이 전멸하는 경우 터널을 통해 곧바로 일본군이 재 점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섬 전체에 지뢰가 매설되었으며 숨겨진 포대와 박격포 진지가 구축되었다.
일본군의 무기 중에는 수도꼭지 박격포라는 의미의 스피갓 모타(Spigot Mortar)라는 것이 있었는데, 빈 튜브를 통해 상당한 로켓이 발사되는 것이었다. 구리바야시는 저격수들의 배치도 잊지 않았으며, 방어 위치를 설계하여 섬 전역에 타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는 미국 함대에 대항하기 위한 카미카제(kamikaze) 자살공격 조종사들을 지원받았는데, 이들은 훗날 미국의 함대에 돌진하여 미군 3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본국은 구리바야시에게 해변 방어 거점도 구축하도록 압력을 넣었는데, 이때 해변가에 구축된 방어진지들은 미군의 상륙 전 폭격에 파괴된 유일한 방어진지가 되었다. 구리바야시는 일본이 승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목표는 오로지 미군 사상자들을 많이 발생시켜 미국이 일본 본토 침공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군의 공격 계획은 직접적이었다.
제4, 제5 해병 사단이 남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수리바치 산과 남부 비행장, 서안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임무를 완수하면 제3 해병 사단이 추가 투입되어 북동부로 진군할 것이었다. 침공에 앞서서 마리아나를 출발한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폭격기들이 이오지마를 74일간 타격하였지만 정보부 조사 결과 일본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으며 방어는 더욱 견고해져갔다.
공군의 노력과 달리 미 해군은 단지 3일간의 포격만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해병대가 요구한 10일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해군은 오키나와 공격을 위해 포탄을 아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해병대는 해군이 태스크 포스 58(Task Force 58)을 보내 일본 본토 폭격에 대한 일본군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며 비난하였다. 이오지마 포격에 참가한 것은 태스크 포스 54 소속 함선들뿐이었는데, 6척의 전함 아칸사스(Arkansas), 뉴욕(New York), 텍사스(Texas), 네바다(Nevada), 아이다호(Idaho), 테네시(Tennessee)와 5척의 순양함 펜사콜라(Pensacola), 솔트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 체스터(Chester), 투스카루사(Tuscaloosa), 빅스버그(Vicksburg) 그리고 구축함들 뿐이었다.
2월 17일, 상륙일 이틀전 이오지마 수비군은 정찰중인 미국 수중폭파팀(Underwater Demolition Team, UDT)을 엄호하던 12척의 LCI 포함에 포격을 시작하였고, 위치가 노출된 포대들은 미 해군의 포격을 받았다.
2월 18일 구축 호위함 블레스맨(USS Blessman)이 중심부에 250kg 폭탄을 맞고 40명의 인원을 잃었는데, 이중 15명은 UDT 대원이었다.
1945년 2월 19일 오전 2시경 노스 캐롤라이나(USS North Carolina) 호와 워싱턴(USS Washington) 호, 그리고 뒤늦게 가세한 웨스트 버지니아(USS West Virginia) 호의 16인치 주포가 불을 뿜으며 침공의 시작을 알렸다.
미국 함선들은 주포부터 대공포, 로켓까지 섬을 타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포격 직후 100대의 폭격기들이 섬에 폭탄을 뿌렸고, 다시 해군 포격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깊숙이 진지를 만든 일본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일본군은 심지어 산에 굴을 파서 화포를 숨기고 강철 문을 덧달기도 하였다.
오전 8시 59분, 당초 계획보다 1분 앞서서 제5 수륙양용 군단 소속 제3, 4, 5 해병 사단 3만 병력이 해안에 상륙하였다. 미 해병대 병력이 해변에 첫발을 디디기까지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는데, 해변이 미 해병대 병력과 장비들로 가득 찰 때까지 포격을 하지 말라는 구리바야시의 명령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잠잠하자 해병들은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섬의 모든 일본군이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까지 하였다. 일본군이 너무 조용한 것을 의심한 미군은 정찰조를 조직해 내륙 방면으로 경계하며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미군 선발대는 어느덧 일본군 벙커 지역에 도달하여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일본군 벙커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 사격을 개시하여 미군 선발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수리바치 산에서도 포탄이 날아와 해변에 작렬하기 시작하였다. 미 해병대는 진군에 난항을 겪게 되었는데, 화산재로 이루어진 환경 때문이었다. 화산재는 안전지역을 확보하기도 어렵고 참호를 팔수도 없었지만 그나마 일본군 포탄 파편을 흡수해주는 장점도 있었다.
수리바치 산의 중포 진지들은 강철문을 열고 포격한 후 도로 문을 닫아 미군의 응사를 막아냈다. 때문에 미군은 일본군 포대 제거에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미 해병대는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가져다 벙커를 공격하여 수비병들을 제거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은 터널을 통해 곧바로 벙커를 채우고 다시 사격해왔다. 벙커 수비병들을 제거하였다고 생각한 미군이 무방비로 곁을 지날 때 비었던 벙커에서 날아오는 총탄은 수많은 사상자를 야기하였다. 해병대는 일본군 포화를 받으며 어렵사리 진군하였고 이후 기갑 전력이 상륙하면서 마침내 해변을 벗어날 수 있었다.
760명의 미 해병대가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감행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상당한 진격 성과를 이루었다. 저녁 무렵 수리바치 산은 포위되었으며 3만 명의 해병대가 상륙을 마쳤고, 4만 명이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 다음날 며칠 동안 미 해병대 병사들은 야간에 이루어지는 일본군의 만세 돌격을 우려하였다. 이는 사이판 전투(Battle of Saipan)에서와 같이 태평양에서 이루어진 지상전에서 일본군이 적을 상대로 사용하는 최후의 표준 방어 전술이었다. 보통 이 공격을 시도하는 일본군 병사는 죽음을 맞게 되어 일본군의 심각한 전력 손실을 야기하지만, 구리바야시는 이런 무모한 돌격 행위를 금지하였다.
전투는 지극히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미군이 진격하려고 하면 매복한 일본군 화포가 이를 저지하였다. 밤이 되면 어둠을 틈탄 일본군들이 미국 참호를 공격해왔기에 미국 함대는 계속 조명탄을 발사해 주위를 밝혀야 했다.
영어를 아는 일본 병사들은 미군을 위장해 해군 병사들을 부르고, 다가온 병사들을 쏘아버렸다. 일반 총기나 화포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미군은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터널 안의 일본군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기술적 혁신중 하나는 해군의 마크 1(Mark I)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8대의 셔먼(Sherman) M4A3R3 중전차였다. 론슨(Ronson) 또는 지포(Zippo) 전차로고 불린 이 전차들은 일본군 진지 타격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셔먼 전차는 저지하기에도 만만치 않았으며, 전차를 향해 돌격하던 일본군 병사들은 수적으로 우월한 해병대 전력에 희생되었다.
호위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의 공중지원도 이루어졌다. 제15 전투기 그룹 소속 머스탱 전투기들은 3월 6일 이오지마에 도착하였다. 함포로 쏘아 올리던 조명탄도 육상 포병에게 인계되었으며, 미군 통신대 소속 나바호(Navajo) 부족 암호병들도 휴대용 통신기와 SCR-610 배낭식 무선세트를 가지고 전투에 동참하였다. 식수와 식량, 물자가 떨어진 일본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하였고 전투에는 끝이 다가왔다. 초기에 만세 돌격을 금지하던 구리바야시는 패배가 분명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를 허용하였고, 미군은 뒤늦게 야간 만세 돌격에 시달려야 했지만 기관총과 포병 지원으로 이를 막아냈으며 때로는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상륙지점의 안전이 확보되자 섬 북부를 점거하고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한 병력과 중화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일본군 병사들은 싸우다 죽는 쪽을 택했다.
전투 5일차인 2월 23일 아침 수리바치 산은 포위되었다. 일본군이 지하 터널 망을 구축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된 미군은 지상에서 포위를 하여도 지하를 차단하지 않는 한 고립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4인으로 구성된 정찰조 2개가 편성되어 산으로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일본군들이 터널 속에 머문 덕에 별다른 매복에 걸리지 않고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과정 중 몇몇 일본군의 공격이 이루어지긴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챈들러 존슨(Chandler Johnson) 대령에게 적과 거의 조우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존슨은 해병대 1개 분대를 소집해 수리바치 산을 오를 것을 지시하고 작은 성조기 하나를 건네 정상에 도착하면 흔들도록 하였다. 병사들은 일본군의 저항 없이 다시 정상에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찾은 파이프들을 이용해 깃대를 만들고 정상에 성조기를 세웠는데, 이는 일본 영토에 휘날린 첫 외국 깃발이 되었다.
이 첫 성조기 계양은 사진사 루이스 로워리(Louis R. Lowery)의 사진으로 남았다.
깃대가 세워졌을 무렵 해군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상륙을 마치고 수리바치 산 아래 와 있었다. 그는 이 첫 깃발을 자신의 전리품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존슨 대령 역시 이 깃발을 탐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존슨은 이 깃발은 이 지역을 점령한 제28 해병 소속 제2 대대 소유라고 믿었다. 그는 마이클 스트랜크 병장을 보내 조금 더 큰 성조기로 처음 깃발을 교체하도록 하였다. 깃발은 무사히 교체되었고, 로젠탈은 이 두번째 성조기를 세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 되었다. 이후 깃발은 다시 새 깃발로 교체되었다.
일본군은 수리바치 산을 잃었음에도 저항을 계속하였다. 북부의 암석지대로 이루어진 지형은 수리바치 산 이상으로 방어에 유리하였다. 덕분에 구리바야시가 이 지대에 구축한 방어진지는 남쪽의 것들에 비하여 더욱 효율적이었다. 이 시점에 그에게 남은 것은 8개 보병 대대와 1개 기갑 연대, 2개 포병, 그리고 3개 중박격포 대대에 추가로 5천명의 사수와 해군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 미군에게 남은 가장 어려운 일은 382 고지와 터키 놉(Turkey knob)을 포함하는 모토야마 고원(Motoyama Plateau), 그리고 원형극장(Amphitheater)이라고 부르는 그 중간지대를 점령하는 일이었다. 이 지역은 훗날 ‘고기 가는 곳(Meatgrinder)’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섬 중앙에 위치하는 2번 비행장이었다. 그러나 깊숙이 진입하는 것은 재앙으로 연결되었으며, 전차는 교차사격의 제물이 되거나 지뢰를 밟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점령했다고 생각했던 지역에서도 터널을 통해 일본군이 출현하였다. 미군은 사상자를 딛고 진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미군은 현 상황을 타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잡았다. 폭격 중에 관측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화포와 병력을 동굴에 숨긴 채 미군이 진격을 시도하려고 할때만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은 보병이 진격하기 전에 강력한 폭격을 실시하는 미군의 기본 전술을 배웠던 것이다. 미군은 일본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폭격을 실시하지 않고 야음을 틈타 공격해 들어갔고, 덕분에 수면중이던 일본군들을 상당수 제거할 수 있었으며, 362 고지 점령을 이루어냈다.
다음날 일본은 보복에 나섰다. 구리바야시가 금지시켰음에도 일본군의 지역 지휘관이 수리바치 산 탈환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만세 돌격을 결정한 것이었다. 사마지 이노우에(Samaji Inouye) 대령이 지휘하는 천여 명의 일본 병사가 미군에게 돌격을 감행하여 미군 347명을 사상(사망 90)하였으나 다음날 날이 밝은 후 미군이 센 일본군의 시체는 784구나 되었다.
2월 21일에는 카미카제 전투기가 미국 함대에 자살 돌격을 실시하여 호위 항공모함 비스마르크해(USS Bismarck Sea)를 격침시켰으며, 사라토가(USS Saratoga)에 심각한 피해를, 렁가 포인트(USS Lunga Point)와 상륙함 한척, 수송선 한척에 경미한 피해를 입혔다.
침공 개시 25일 만인 3월 16일 18:00 시경 이오지마는 공식으로 확보되었다고 보고되었지만 제5 해병 사단은 여전히 섬 북동부 끝부분에서 구리바야시와 대치중이었다. 3월 21일 미군은 4톤에 육박하는 폭약을 동원하여 일본군 지휘소를 파괴하였고, 24일에는 남아있는 동굴들을 막아버렸다.
3월 25일 일본군은 300명의 병력으로 2번 비행장에 대한 마지막 반격을 개시하였다. 비행사들, 제5 개척 대대 소속 해병들은 이들에 맞서서 90분간 교전하였으나 53명이 죽고 120명이 다쳤다. 부대원이 모두 흑인으로 구성된 제36 창고 중대 소속 해병 두명이 동성 훈장(Bronze Star)을 수여받았다.
제5 개척 대대의 해리 마틴(Harry Martin) 중위는 이 전투에서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받은 마지막 해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본의 마지막 반격이 구리바야시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일본측 포로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번 공격의 경우 요란한 함성과 함께 이루어지던 보통의 만세 돌격과 다르게 조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리바야시가 공격을 주도했다는 의견도 있다. 만약 그가 주도한 것이 맞는다면 그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에서 공격을 진두지휘한 최고 계급의 장교가 된다. 다른 전투에서의 경우 병사들이 돌격하는 동안 지휘관은 후방에서 할복 자결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오지마에서 농성한 22,785명의 일본 병력 중 21,570명이 전사하거나 자살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맞았으며 단지 216명이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의 사상자는 26,038명에 달하였는데, 이중 6,821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생한 미국 사상자의 수는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개시 당일의 미국 사상자 수를 압도하였다. 비록 사망자의 수만으로 계산하면 일본측이 세 배나 많지만, 이오지마 전투는 부상자를 포함한 미국 해병대 사상자의 수가 일본 사상자의 수를 넘어선 유일한 전투였다. 2월 21일 침몰한 비스마르크해 호는 한번에 318명의 수병의 목숨과 함께 가라앉았으며, 2차 대전 사상 마지막 침몰한 항공모함으로 기록되었다.
이오지마에서는 민간인들이 퇴거되었기에 민간인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오지마의 확보가 공식 선언된 이후 미국은 300명 미만의 일본군이 동굴과 터널에 숨어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지만 실제로는 3천명에 달하였다. 일본 전통의 무사도, 그리고 미군을 귀축으로 묘사한 선전 덕분에 일본군은 항복을 꺼렸다. 자결하지 못한 일본군들은 낮 동안 동굴에 숨어 지내고 밤에 몰래 나와 식료품을 찾아다녔다. 이중 일부는 결국 항복하여 미군으로부터 물이나 담배, 커피 등을 제공받으며 이들도 자신들과 같이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고 놀랐다. 이들 중 마지막 생존자는 오노 도시히코(Ohno Toshihiko) 중위의 부하였던 야마카제 구푸쿠(Yamakage Kufuku)와 마쓰도 린소키(Matsudo Linsoki) 였는데, 잡히지 않고 6년을 숨어 지내다가 1951년 항복하였다(기록에 따라서는 1949년 1월 6일이라고도 한다).
막대한 사상자의 수, 전투의 필요성, 점령에 걸린 긴 기간은 이오지마의 점령이 가져온 결과물에 대조되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전투 이후 미국 해군은 여러 척의 함선에 이오지마(USS Iwo Jima)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5년 2월 19일 개최된 이오지마 상륙 40주기 기념식에서는 ‘명예의 재회’라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양측 생존자들이 참여한 이 행사는 미군이 상륙한 해변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날 양측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해변 쪽과 수리바치 산 쪽에 양국의 언어로 각각 세워졌다. 기념비가 공개된 이후에는 헌화가 이루어졌으며, 양측은 악수를 나누었다. 일부는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1995년 2월에는 50주년 행사가 열렸으며, 60주년 행사도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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