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트(U-boat), 독일어로 우보트(U-boot)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이 운용한 잠수함으로 유명해졌으며, 바다 밑의 선박을 뜻하는 “Unterseeboot”란 독일어의 약자이다. 19세기 중반에 독일 제국 해군이 개발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기술 문제로 인하여, 잠수함대 사령관이었던 칼 되니츠 제독이 그의 회고록에서 얘기했듯이 “필요한 때에 잠수할 수 있는 배”(가잠함)이란 말이 더 어울렸다. 그렇지만 유보트로 인한 연합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주로 미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호송 선단 공격에 투입되었다. 물론 대서양 호송 선단 전투에서 유보트의 피해도 컸으며, 당시 독일 해군이 사용 가능했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전력이 유보트 함대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대표적인 U-Boat 7형을 보면 800t이며 속도 12노트, 수중 4노트, 어뢰발사관 전방 4기 후방 1기(어뢰는 14기 탑재)였다. 그 중에 VII C형은 균형 잡힌 성능으로 가장 많이 생산되었고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40년 6월~1943년 5월까지 최고의 전성기였던 시절에는, 연합군 수송선단을 발견하면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근해에 있는 U-Boat 잠수함에게 연락을 해서 3척~15척이 집단으로 공격한다. 외각에서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잠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서 중앙에서 연합군 수상함을 공격했다.
U-Boat 잠수함의 퀸터 프린(U-47, 30척 격침), 요아힘 쉐프케(U-100, 97척 격침), 오토 크레치머(U-99, 46척 격침)는 에이스였다. 반면 연합군 수송 선단의 최고 사령관 도널드 매킨타이어(U-Boat 잠수함 7척 격침)는 연합군의 에이스였다.
결국 기간 중 753척의 U-보트가 침몰당했고(해상에서 적의 공격 및 기타 원인으로 630척, 항구 내에서 기뢰 및 기타 원인으로 123척) 이와는 별도로 전쟁 끝 무렵 해외기지 철수 시 그들 승조원에 의해 자침 또는 폭파 215척, 그리고 종전 시 영국 또는 연합군 측에 빼앗긴 U-보트도 무려 153척에 달했다.
제1, 2차세계대전시 U-보트는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전쟁을 통하여 잠수함은 무기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세계 각국에서 잠수함 확보에 열을 올렸다.
1차대전(1914.7~1918.11) 중의 잠수함전은 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U-보트 작전이었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 해군은 거함. 거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쟁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독일의 U-보트(U-21)가 3,000톤급 영국 순양함 "패스파인더(Pathfinder)"를 어뢰로 공격하여 최초로 전투함을 침몰시켰고, 약 보름 후 U-보트(U-9)는 1시간 만에 12,000톤급 영국 순양함 3척을 침몰시켰다.
1차대전 발발직후 독일 U-보트의 작전 목적은 북해에서 독일을 봉쇄하고 있는 영국 전함을 공격하는 것이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영국에 물자를 수송하는 상선을 공격함으로서 영국을 고립화 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되었다.
1차대전 개전 시 독일 U-보트는 수상에서 수중보다 속도가 빨랐으며, 어뢰뿐 아니라 소형함을 침몰시키기 위해 함포도 탑재하였다. 개전초기 독일은 잠수함에 의한 '해상교통로 파괴 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여 군함과 상선을 가리지 않고 영국의 전쟁 물자를 수송한다고 판단되는 선박은 전부 공격하였다.
당시 영국은 U-보트에 대한 대항책으로 수중에 그물망을 가설하기도 하고, 그물망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접촉 시 폭발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또는 지그재그(ZIGZAG) 항법으로 잠수함을 회피하기도 하였고, 유인함(일명 Q-Ship)을 이용하여 위장상태에서 잠수함을 사정거리 내로 유인한 뒤 일제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1917년부터 영국은 상선단에 호송함을 배치하여 물자를 수송하는 호송선단을 구성하였고, 아스딕(ASDIC = 소나)이 발명되어 수중 잠수함 탐지수단으로 등장하였다. 아스딕은 속수무책이었던 잠수함을 접촉하여 공격을 가능케 함으로써 U-보트의 '해상교통로 파괴작전'에 제동을 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독일의 'U-보트에 의한 침몰선박 수는 극에 달했으며, 아스딕으로 잠수함을 탐지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전쟁후반기인 1917년 독일해군은 U- 보트 수를 증가시켜 무자비한 '해상교통로 파괴 작전'을 실시하였고, 해상교통로가 차단된 영국은 대외 무역과 대륙의 전선에 증원병과 군수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어 항복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1918년에 미국이 참전하여 강력한 호송단대의 구성과 함정. 항공기를 비롯한 방대한 대잠 전력이 투입됨으로써 아사 직전의 영국은 겨우 기사회생하였다.
U-보트는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2,5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영국 선박의 90%가 잠수함에 의해 침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독일의 잠수함은 승전국에 의하여 압류 당하며 독인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거 잠수함을 보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약의 제약으로 독일은 수상함대의 척수와 톤수에 큰 제약을 받았지만 잠수함에 대해서는 총톤수(크기)의 설정 외에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독일 해군전력은 잠수함에 치중되는 형태였고 전함이나 순양함과 같은 대형군함이 아닌 잠수함으로 해군력을 종결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잠수함 전대 사령관이었던 칼 되니츠(Karl Dönitz) 제독은 예산보다 더 많은 U보트가 있어야 독일 해군력이 증강될 것으로 판단하여 약 600척 이상의 U보트 의 생산을 히틀러에게 건의 하였지만. 히틀러는 U보트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을 하여 이 요청을 보류하게 된다.
1935년 7월 영.독은 양국이 똑같은 수의 잠수함을 보유한다는 협정이 체결되어 독일은 다시금 잠수함 함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39년 2차대전(1939.9~1945.8)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56척의 U-보트 및 매달 한두 척의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되니츠제독은 U보트의 중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U보트 함장 중 엘리트로 손꼽히는 귄터 프린 소령에게 U보트를 통한 특수작전의 임무를 맡기게 되는데 그 임무는 바로 영국함대의 근거지인 영국 스캐파플로에 몰래 잠입을 하여 군항을 공격하는 대담한 작전 이였다. 귄터 프린이 지휘하는 U보트 U-47함은 어둠을 틈타 스캐파플로에서 잠입을 하여 어뢰로 3만 톤에 가까운 영국전함 로얄오크와 그 승무원 883명을 그 자리에서 수장시켜 버린다.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왔으며 영국입장에서는 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상황이었다. 스캐파 플로 공격작전의 성공으로 U보트는 히틀러에게 큰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본격적인 대량 생산에 돌입하게 되어 대서양을 공포로 몰아넣게 된다.
독일은 1941년부터 ⅦC형이라는 강력한 U-보트를 대량 건조하였고, 이는 수중에서 수상보다 속도가 빨랐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군함이 물자수송용 상선을 호위하는 호송선단 체제를 도입하였으며, 독일은 호송선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늑대 떼 전술(Wolf Pack)'을 개발하였다. 이 전술은 U-보트나 항공기가 호위함을 발견하면 그 해역근처에 있는 다른 U-보트에 연락하여 지정된 위치로 이동 후, 호위함에 대하여 야간 집중공격을 하는 전술이다.
영국은 늑대 떼 전술 대응책으로 1941년 표면탐색 레이더를 개발하였고, 또 호위함에 탑재할 수 있는 방향탐지기도 개발해 냄으로써 U-보트가 수상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500미터 이내의 정확도로 탐지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U-보트는 탐지 당하지 않기 위해서 주로 수중항해를 해야만 했다.
1940년 10월 영국해군에 역부족 이었던 독일은 방대한 잠수함을 건조하여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시작하였고, 영국은 1차대전과 유사하게 또다시 무역이 차단되어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할 정도까지 되었으나, 이번에도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가까스로 회생하였다.
2차대전 후반기에 영국에서는 비행기탑재용 단파레이더를 개발하였다. 이것은 기존 U-보트의 레이더 전파탐지기에는 탐지되지 않기 때문에 U-보트에 대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2차대전 중인 1942년 항공기로부터 공격받는 U-보트가 늘어남에 따라 독일에서는 계속 수중에서 체류하기 위하여 스노켈 장치를 도입하여 비행기로부터 공격을 감소시켰으며, 새로운 U-보트 U-ⅩⅩΙ형을 설계하였다. 이러한 스노켈을 장착한 신형 U-보트는 연합국 측에서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전쟁은 곧 끝나고 말았다.
제2차 대전을 통해서 독일의 잠수함 건조비와 연합국의 대잠 세력과 상실된 상선의 건조비는 1:15이었으며, U-보트 1척을 공격하기 위하여 25척의 대잠함과 1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결과를 가져왔다.
XXI는 U-23 형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잠수함으로서 U-21형이라고 불리었다. 모두 118척이 취역했다. 하지만 패전 당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1척에 불과했고,12척이 취역준비를 끝마치고 있는 상태였으며 나머지는 건조되어 해상에서 승무원 훈련과 시험운전 중이었다.
U-21형에는 기존의 디젤 엔진을 향상시킨 성능 좋은 디젤엔진이 탑재되었고, 슈노켈 장비가 갖추어졌으며 헬무트 발터가 개발한 유선형 함체로 설계되었다. 수상속력과 수중속력은 똑같이 16노트(약 시속 29Km)였으며 어뢰발사관은 함수에 6기가 집중되어 있고 18기의 어뢰를 탑재한다. 전투용 U보트 중에서 가장 커서 승선인원은 57명이었다. 이 신형 잠수함은 수중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저속으로 항해할 수 있었으며, 항속거리 또한 월등해(대서양을 건너 케이프타운까지 가서 그곳에서 3~4주일 작전 후 연료 재수급 없이 기지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 공격이나 방어에 있어서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독일 병기국이 만들어낸 세계최초의 혁신적인 무기들 가운데 U-21형에도 장착될 예정이었다. 그것은 '울슈라' 라는 미사일로 이것이 바로 전후 미국과 소련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수대공 또는 수대지 미사일이 된다. 독일 U보트 부대의 작전계획에 따르면 U-21형은 거의 대부분 수중에서 항해하며 수면 근처에서 수평으로 어뢰를 발사하는 것은 물론 깊은 바다 속에서 수상의 선박에 대해 수직으로 미사일을 쏘아 올릴 수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1월 처음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패전 직전인 4월에는 U-2511호가 노르웨이에서 출격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함은 1945년 4월 30일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작전출항을 했고 우수했던 쉬네 함장과 경험많은 기관장 수렌 소령에게 맡겨졌었다. 5월 4일 되니츠가 모든 적대행위를 금지시킨다는 조치 하나로 작전 중이던 모든 U보트에게 공격중지를 명령했다. 함장 쉬네는 짧은 지휘기간 동안의 항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XXI의 이상적인 성능에 대해 얘기했다.
“북해에서 적의 대잠그룹을 처음 접촉했다. 수중 고속이어서 우리 배가 그 대잠그룹의 위험권 안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약간 30도 정도 변침하고 수중 항진해서 간단히 대잠그룹을 피했다. 5월 4일 공격중지 명령을 받고 출항했던 베르겐으로 향했다. 몇 시간 후 영국 순양함과 구축함 몇 척을 접촉했다. 나는 수중 모의 공격을 하면서 안전하게 순양함 500야드까지 접근했다. 후에 베르겐에서 영국측 질문에 응하면서 그때 내가 완전히 접촉당하지 않고 통과했다는 걸 알았다. 경험상으로 보건대 그 배는 공격과 방어에 있어 최상이었다. 어떤 잠수함도 못 미칠 최신형이었다.”
2차대전 동안에 독일이 소유하고 있던 유보트는 총 2,603척이다.
이들은 13,500,000톤의 연합국 상선들과 175척의 군함들을 바닷 속에 수장시켰다.
1위. Otto Kretschmer(오토 크레치머 중령)
격침 함선수: 44척, 격침 톤수: 266,629톤, 함명: U99
전과: 16회의 출격으로 전과를 늘려나갔고, 1941년 영국의 도널드 매킨타이어 대령에게 피격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음.
2위. Wolfgang Lüth(볼프강 뤼츠 대령)
격침 함선수: 43척, 격침 톤수: 255,712톤, 함명: U181
전과: 총 17회의 출격. 1944년 유보트 전대 지휘관 승진, 독일 항복 직후, 독일 초병에게 암호를 잘못대서 종전 후 아군에게 사망한 유일한 유보트 에이스.
3위. Erich Topp(에리히 토프 중령)
격침 함선수: 34척, 격침 톤수: 193,684톤, 함명: U552
전과: 총 13회 출격. 1944년 유보트 훈련소장 승진. 종전 후에 서독에서 장군으로 승진
4위. Karl-Friedrich Merten(칼 프리드리히 메르텐 대령)
격침 함선수: 29척, 격침 톤수: 186,064톤, 함명: U68
전과: 총 5회 출격. U보트 함장으로 전출되기 전에 경순 쾨니히스버그에서 병기장교 였음. 종전 후 스위스로 이주해서 조용한 여생을 보냄.
5위. Viktor Schütze(빅토르 쉬체 대령)
격침 함선수: 34척, 격침 톤수: 171,164톤, 함명: U103
전과: 총 7회의 출격. 항상 모든 전술을 연구했던 학구파. 1950년 종전을 맞은 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종적을 감춤.
6위. Herbert Schultze(헤르베르트 슐체 소령)
격침 함선수: 26척, 격침 톤수: 171,122톤, 함명: U48
전과: 오직 U48에서만 근무하며 총 8회 출격. 1944년에는 해군훈련소에서 후진양성에 힘씀
7위. Georg Lassen(게오르그 라센 소령)
격침 함선수: 28척, 격침 톤수: 167,601톤, 함명: U160
전과: 총 4회 출격 뿐이지만 아메리카까지의 장거리 항해로써 놀라운 전과로 명성을 떨침.
8위. Heinrich Lehmann Willenbrock(하인리히 레만 빌렌브로크 중령)
격침 함선수: 22척, 격침 톤수: 166,596톤, 함명: U96
전과 : 총 8회 출격. 통상적인 수상항주에서 어뢰를 쏘는 것과 달리 잠항해서 은밀히 기습하는 독특한 전술로 명성이 높음. 노르웨이에서 유보트 전대장으로 근무하다 종전을 맞이함.
9위. Heinrich Liebe(하인리히 리베 중령)
격침 함선수: 30척, 격침 톤수: 162,333톤, 함명: U38
전과: 총 9회 출격. 가능한 한 격침된 적국 승무원들을 구조하려했던 신사적인 함장. 유보트의 크기와 당시의 전례에 비교해, 이는 매우 드문 일.
10위. Günther Prien(귄터 프린 소령)
격침 함선수: 28척, 격침 톤수: 160,939톤, 함명: U47
전과: 1939년 칼 되니츠 제독의 특명으로 영국 스캐퍼 플로우에 침입해서 전함 로열요크를 격침, 리펄즈를 대파하는 무공을 세움으로써 단숨에 영웅이 됨. 1941년 영국 구축함 울버린(도널드 매킨타이어 대령 지휘 하)에 피격해서 승무원 전원과 함께 전사.
종전 이전에 죽은 에이스는 단 한명. 귄터 프린으로써, 엄중한 영국 대잠전술에 대항하여 종전까지 맞서 싸운 이들을 생각한다면, 전쟁에도 천재가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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