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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_秘事

진주만 공습(Attack on Pearl Harbor)

chocohuh 2013. 2. 18. 16:29

일본 제국은 만주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년 11월 26일의 헐 통지문을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 미국과 영국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

• 유류 부족이 군사력 약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는 것.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을 선택하였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이었다.

 

11월 26일은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1. 진주만을 향하여

 

1941년 1월, 야마모토는 비밀리에 일본해군의 최고 엘리트들을 불러모아 비밀그룹을 만든 뒤 진주만 기습에 대한 작전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 비밀그룹은 해군 항공전문가인 오니시 제독이 이끌고 있었으며 야마모토의 참모장인 구사까 류노스께 소장과 영국무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던 겐다 미노루 소령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 소령 겐다 미노루는 전술의 귀재로 소문이 나있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영국함대의 타란토 항 공습작전을 면밀히 분석하여 공격 계획의 영감을 얻었다.

 

겐다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박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하는 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각 폭격기 조종사들은 최우선 목표인 미해군의 항공모함과 전함에 정확하게 철갑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도록 숙련되어야 했으며, 뇌격기 조종사들은 정확하게 전함의 중심부 홀수선을 강타할 수 있도록 어뢰를 저공으로 정확하게 투하할 수 있는 고도의 기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예상되는 미군 전투기들의 반격에 맞서 공격기 부대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최신 제로전투기가 100대 이상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1941년 여름부터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인 공격 훈련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여름햇살이 내려쬐는 가운데 일본 해군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가고시마만의 얕은 바다 쪽으로 훈련비행을 시행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매일 새벽부터 이 지역에는 함재기들의 저공비행 훈련이 계속되었다. 연일 시끄러운 폭음이 끊이지 않았고 각 항공기의 조종사들은 후에 자신들이 훈련받는 이곳 가고시마만이 진주만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연일 뇌격과 폭격연습이 계속되고 항공기들이 일으키는 요란한 소음 때문에 가고시마만 일대의 고기들이 자취를 감추어 어민들은 고기를 잡을 수 없었고, 집에서 기르는 닭이 스트레스를 받아 알을 낳지 못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해군 조종사들은 부대로 돌아오면 밤마다 모여서 2X2m 로 제작된 진주만의 지형모형을 보면서 눈에 익숙해지도록 했으며 미군 전함들의 사진을 보면서 식별 연습을 했고, 결국은 멀리서 실루엣만 보고도 미국 전함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 숙달되었다.

 

각 조종사들에게는 하와이의 일본군 첩보원이 보내온 진주만의 풍경이 나타난 그림엽서가 한 장씩 지급되어 항상 공격목표를 상기하도록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구체적인 공격목표가 설정되기 시작했다. 우선 호놀룰루 시에서 동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한 진주만에 정박하는 전함과 항공모함 등의 주요 전투함들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요목표는 진주만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포드 섬이었는데 여기에는 해군 항공대의 중앙정비시설로 사용되는 거대한 해군항공기지가 있었다. 그리고 진주만을 중심으로 위치한 육해군의 항공기지들도 주요 목표로 선정되었다.

 

항만의 입구 서쪽에 위치한 이와 해병항공기지, 동쪽의 버로 기지, 중앙의 휠러 기지와 그 옆에 위치한 힉캄 기지가 주요 항공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외에 북쪽에 멀리 떨어진 할레이와 기지, 섬 동쪽에 위치한 카타오헤 해군항공대 기지도 가능하면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 훈련과정에서 작전을 수행하는데 큰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어뢰 때문이었다. 몇 개월 동안 훈련을 했지만 800kg에 달하는 어뢰들이 너무 높거나 낮은 고도에서 투하되어 물에 떨어진 후 바닥에 충돌하면서 처박히거나 충격으로 고장을 일으켜 작동을 멈추거나 튀어 오르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주행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사실상 그동안의 어뢰는 투하되어 물에 착수하면 30m이상을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면서 주행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진주만의 수심은 대개 15m 정도로 매우 낮아서 어뢰 공격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겐다 소령은 야마모토에게 어뢰 공격을 포기하고 폭탄만으로 공습을 시행하는 것을 건의했지만 야마모토는 어뢰가 없이는 전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어뢰공격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이 난점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된 끝에 어뢰에 나무로 제작된 안정장치를 부착하고 고도 30m 정도에서 투하하면 진주만의 얕은 수심에서도 주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정장치를 부착한 신형어뢰를 급히 제작하도록 긴급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편 하와이의 일본총영사관에서는 수개월 동안 매주 미태평양 함대의 동정을 분석하여 보고했다. 몇 달간의 분석이 끝나자 미국 함대가 거의 예외 없이 매주 토요일마다 항내로 입항하여 정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격일자는 가장 방어가 허술할 것으로 생각되는 하와이 날짜로 일요일 새벽에 감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진주만을 공격하려던 일본해군은 암호명 'Z'작전으로 명명된 진주만 기습을 애초에 1941년 11월 17일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형어뢰의 제작이 늦어져 어쩔 수 없이 20일 뒤인 12월 7일 (일본시간으로는 12월 8일)이 최종 작전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어뢰 100발이 함대의 출발 시일에 맞추어 인도되었다. 이 어뢰들이 모두 무사히 작동할 것인지가 매우 불안한 것이었으나 더 이상 작전 연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야마모토는 연합함대의 최정예부대인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한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Z'작전을 시작했다. 철저한 무선 침묵 속에 11월 22일까지 일본해군의 최정예 항공모함 아까기, 가가, 히류, 소류에 더불어 건조된 지 얼마 안 된 신형항모 즈이가꾸, 쇼가꾸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전함 기리시마, 히에이 그리고 중순양함 도네, 지쿠마, 아부가마 등의 주력함선 31척이 북쪽의 일본령 쿠릴열도의 히도카프만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주요 해군기지가 대부분 미국 첩보원들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북방의 조그만 항구를 발진기지로 사용한 것이다.

 

기동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찌 제독으로부터 모든 승조원들에게는 무선연락을 일체 금지하며 섬광신호만을 사용하라는 엄중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11월 26일 새벽이 되자 어둠속에서 모든 함선의 닻이 일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동부대의 기함인 항모 아까끼를 선두로 모든 함선들이 한 대씩 은밀하게 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승조원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진주만을 공격하러 간다는 소문이 함내에 떠돌고 있었고,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모여서 수근거렸다.

 

일본 기동함대는 민간 상선들이 많이 다니는 일본과 하와이간의 직항로를 피해서 북쪽으로 우회하는 먼 거리를 선택했다. 이 항로는 미드웨이와 알류션 열도의 더치하버 사이를 통과하는 경로로서 바다가 험하고 추워서 대부분의 민간선박이 다니지 않는 곳이었으며 미군 초계기의 활동범위 바깥쪽이었다.

 

그리고 12월 2일이 되자 연합함대 사령부로부터 '니다카 산에 오르라!'는 암호전문이 날아왔다. 이것은 그동안 진행되고 있었던 미국과의 협상이 별 소득이 없으니 예정대로 진주만을 공격하라는 최종명령이었다. 곧 함대의 후미에 따라오던 유조선으로부터 각 함정에 최종 연료보급이 실시되었다. 연료보급이 끝나자 유조선은 일본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함대는 전속력으로 하와이를 향해서 항진하기 시작했다. 곧 기동부대의 사령관 나구모 주이찌 제독이 전 승조원에게 훈시를 내렸다.

 

"우리의 공격목표는 진주만이다. 이 일전이야말로 우리 황국의 흥폐가 달린 것이다.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작전 당일 날 오전에는 36년 전 토고제독이 러시아함대를 격파할 때 올렸던 Z기를 올릴 것이다. 모두들 천황폐하를 위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이상이다."

 

나구모 제독의 훈시가 끝나자마자 공격목표가 진주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전 승조원들은 환호성을 울리면서 반자이를 연호했다. 특히 이순간은 진주만 공습의 일본 항공대를 총지휘 할 항공대 지휘관으로 내정되어 있던 후지다 미쭈오 중령에게는 감격에 겨운 순간이었다.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어 의지를 다졌다.

 

"나는 군인으로서 내 임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틀림없다."

 

 

2. 공격기부대 이륙하라!

 

거친 겨울바다를 고속으로 항진하면서 일본을 떠난 지 12일째가 되는 하와이 시간으로 1940년 12월 7일 새벽 5시, 기동부대는 예정된 시각에 드디어 하와이로부터 북쪽 370km의 해상에 도달했다. 새벽의 여명과 쌀쌀한 날씨속에 항공모함의 비행갑판과 격납고에서는 정비사들이 항공기를 최종 점검하고 무장사들이 폭탄, 어뢰, 기총탄을 장착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순양함에 탑재된 정찰용 수상기가 먼저 이륙하여 주변에 미해군 함선의 위협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이어서 무장과 연료보급을 끝낸 함재기들이 갑판으로 올려져 발진 대기상태로 도열한 후 엔진 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갑판위에는 요란한 프로펠러 회전음이 울려 퍼졌다.

 

선봉에 설 항공대장 후지다는 비행갑판에서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날 새벽 바다는 약간 거칠기는 했으나 내게는 비교적 잔잔하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안개가 옅게 끼어 있어서 우리 함대를 숨기고 공격기들을 발진시키는 데는 정말 이상적인 날씨였다. 왠지 그날 나는 우리의 작전이 성공할 것 이라는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구모 제독은 하와이에 정박 중인 미함대에 대한 최신 정보를 수령했다. 이 정보의 내용은 8척의 모든 전함은 정박지에 있었지만, 또 하나의 주요 목표인 미항공모함들이 자리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4척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항공모함을 공격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나구모가 정말로 궁금해 한 것은 혹시나 항공모함들이 근처에 있다가 자신의 기동부대에게 역습을 가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나구모는 마음 한구석에 이점에 대한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사실 나구모는 진주만 기습이 너무 위험하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가 그렇다면 함대 사령관에서 물러나라면서 윽박지르자 할 수 없이 작전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때 일본해군이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믿고 있던 미해군의 항모중에서 요크타운은 대서양에서 작전 중이었고, 사라토가는 센디에고 해군기지에서 수리 중이었다. 그리고 렉싱턴은 미드웨이섬의 미해병대에게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금요일에 진주만을 떠나 항진 중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도에 주둔중인 미해병대에게 항공기를 공급한 후 다시 진주만으로 회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엔터프라이즈는 일본 함대보다 약간 늦게 진주만으로 향하고 있었고 토요일에는 진주만 서쪽 약 370km 지점에 다다르면서 함재기들의 일부를 먼저 진주만으로 보냈고 공습 당일에는 진주만 서쪽 근해로 접근하고 있었다. 결국 이 두척의 항모는 일요일까지는 진주만에 입항하지 못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미항모를 찾을 때까지 작전을 연기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새벽 6시 정각에 나구모는 즉시 모든 공격기들을 발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기함 아까기에 Z기가 올라갔다. 그러자 엔진에 시동을 걸어놓은 채로 기다리던 함재기의 고정발판이 치워졌다. 선도기의 후지다 소령은 갑판에 늘어서서 목이 터져라 반자이를 연호하는 승조원들에게 경례를 한 후 엔진출력을 최대로 열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막 떠오르려는 붉은 태평양의 바다를 향해서 후지다가 탑승한 97식 함상폭격기가 폭음을 울리면서 날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항공모함 6척에서 총 183대의 항공기들이 차례로 이함하기 시작했다. 차례로 날아오른 함재기들은 편대를 구성하기 시작했고 총 183대의 공격기부대 1파가 모두 이륙한 후 구름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자 나구모는 진주만쪽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부터는 우리 조종사들이 얼마나 잘해내는가에 달렸다."

 

제1파 공격대가 모두 이륙하자마자 다시 모든 항공모함의 정비사들과 무장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시마사키 소령이 이끌게 될 제 2파 공격 부대의 총 170기의 함재기들이 한 시간 후에 이륙할 예정이었으므로 전 항공모함 내에 모든 승조원들이 긴박하게 다음 공격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다시 항공모함의 갑판은 함상 폭격기들과 전투기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제1기동부대로부터 공격기부대 제1파가 발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야마모토는 아무 말 없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부관에게 미국의 일본대사가 선전포고문을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기 30분전에 전달하기로 된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참모는 이미 암호문을 미국의 일본대사관으로 보냈으며 일본 대사는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에 미국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고 했다. 야마모토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격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는 선전포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의 일본대사관에서는 야마모토의 믿음과 달리 암호해독 작업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러 갔을 때는 이미 진주만 기습이 시작된 지 30분이 경과한 후였던 것이다. 후에 일본대사는 암호해독과정에서의 실수라고 변명을 했으나 분노한 백악관은 일본의 교활한 술책이라고 믿었으며 바로 이점이 진주만 기습 후에 미국민들을 더 크게 분노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었다.

 

한편, 제1파 공격대 지휘관 후지다는 모든 공격기들을 구름 바로 위 고도 6,750피트로 비행하도록 했다. 공격기들을 구름에 가리도록해서 만일 해상에 미국의 선박들이 있더라도 보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1시간 50분이 소요될 비행시간을 계산하면서 편대를 구성했다.

 

공격부대는 후지다가 탑승한 것과 같은 800kg 철갑탄을 장비한 97식 함상공격기(B5N) 수평폭격대의 49기를 선두로 우측에 800kg 특수 어뢰를 탑재한 40기의 97식 함상폭격기(B5N) 뇌격대가 이를 따르고 있었으며, 좌측 뒤쪽에는 250kg 폭탄을 장비한 99식 함상공격기(D3A) 51기가 급강하 폭격을 위해서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위쪽에는 43기의 0식 함상전투기(A6M2 제로)들이 편대를 이루어 이들을 엄호하고 있었다. 공격기부대에 이렇게 많은 수의 엄호전투기가 따라나선 것은 중국에서의 실전경험에 의한 것으로 목표지역 상공에서 미군 전투기들의 반격이 있는 경우 제공권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하면 방어력이 취약한 일본함재기들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분석에 의한 것이었다.

 

 

3. 폭풍 전야

 

일본이 전쟁을 곧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미정부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장소가 문제였다. 미국은 감히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 주둔 미군이 일본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찜찜한 것은 동남아시아 방면의 일본군은 침공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매우 활발한 무선교신을 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일본 해군의 정예부대인 제1항공함대 소속의 항공모함들이 11월 6일 이후 전혀 무선교신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미군 정보부는 제1항공함대의 위치를 놓쳤으며 이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추측이 무성했다. 몇몇 정보장교는 그들이 진주만을 향해 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개진했지만 대부분의 장교들은 제1항공함대가 필리핀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미군은 더 이상 심각하게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일본 공격기대가 발진한지 30분정도 경과한 하와이 시간 오전 6시 30분경 미해군의 초계 구축함 워드가 3시간 전에 진주만 근해에서 정체불명의 잠수함을 목격했다는 소해정의 보고를 받고 순찰 중이었다. 이런 오인보고가 그동안 여러 번 있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승무원들은 이번에도 허위 보고려니 하면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전방을 응시하던 조타수가 수면에 약간 돌출된 물체를 발견했고, 이것이 잠망경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즉시 구축함장 오터브리지 대위가 이를 확인하고 90m 전방까지 추격하여 함포를 2발 발사했다. 이중 제2탄이 잠수함에 명중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잠수함이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워드는 폭뢰 4발을 발사하여 확실하게 끝장내고자 했다.

 

흥분한 워드의 무전수가 진주만에 미확인 잠수함을 발견하여 공격하고 파괴했다는 내용의 무전을 쳤다. 그러나 미해군의 당직 장교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고 늘 있는 오인 보고려니 하면서 전화로 책임자인 얼 대령에게 보고했다. 얼 대령은 다시 블로크 제독에게 이를 전했으나 그는 '아마도 오인일 것이니, 그 신출내기 구축함장에게 잘 확인하고 다시 보고하라는 무심한 명령을 내렸다.

 

사실 이때 격침된 것은 잠수함이 아니라 진주만 근해에 포진하고 있던 일본 잠수함에서 발진한 5척의 소형 잠수정중의 하나였다. 이 잠수정은 어뢰 2발을 탑재하고 은밀하게 진주만의 내항으로 숨어들어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면 동시에 어뢰를 발사하고는 도주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미해군은 이 첫 번째 침공 징후를 무시한 셈이 되 버렸다.

 

15분 뒤 두 번째 침공 징후가 포착되었다. 얼마 전 하와이에 배치되어 있던 이동식 레이더 기지 중 북쪽에 배치된 곳에서 2명의 병사가 레이더의 오전 작동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오전 4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작동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일요일이었으므로 오전 7시까지만 작동하기로 한 상태였다. 이중 신병이었던 조지 엘리엇은 레이더 조작이 미숙해서 고참에게 조작법을 배우면서 레이더 스크린을 살피고 있었다. 오전 6시 45분, 하나의 작은 점이 스크린에 나타났고 병사들은 즉시 사프터 기지에 보고했다. 그러나 기지에서는 알았다는 대답만 있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실 이것은 일본군의 선도 정찰기였다.

 

오전 7시 2분, 레이더 작동을 멈추려는 찰나 이번에는 스크린에 커다란 광점이 나타났다. 화면을 보고 놀란 엘리엇은 고참인 조셉 로커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로커드도 이런 큰 광점은 본적이 없었으므로 혹시 고장인가 싶어서 레이더를 껐다가 다시 켜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광점이 더 커지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북쪽 220km 지점이었다. 그들은 즉시 이것을 보고 했지만 정보센터의 당직장교 타일러 중위가 이 보고를 듣고는 '별 것 아닐 것이다'라는 대답을 했다. 그는 아마도 해상에 나가있는 미해군의 항모에서 함재기들을 먼저 진주만으로 날려 보낸 것이거나 미 본토에서 출발하여 그날 도착하기로 예정 되어있는 B-17의 편대가 조금 일찍 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레이더기지의 로커드가 다시 보고했다.

 

"지금까지 레이더 화면에 이렇게 많은 비행기들이 나타난 것은 처음입니다. 이제 150km 지점까지 접근했고,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타일러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봐! 걱정할 것 없다고.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별일 아니니깐 신경 쓰지 말게!"

 

결국 레이더 기지의 두 병사는 레이더를 끄고는 아침식사를 위해서 캠프로 향했다. 그리고 한시간 후 그들이 아침 식사를 먹고 있을 때, 진주만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방송을 듣게 되고, 놀란 눈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이 보았던 것이 바로 진주만에 나타난 일본기들이었던 것이다.

 

 

4. 진주만 기습 성공함! (도라 도라 도라)

 

오전 7시가 되자 드디어 선두의 일본기 조종사들에게 하와이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지다는 가슴이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고, 망원경으로 하와이를 보면서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후지다가 라디오를 켜자 하와이 전통리듬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주파수를 정확하게 맞추자 하와이의 호놀룰루 방송이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는데 마침 일기예보 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호놀룰루 KGMB 방송입니다. 화창한 일요일입니다. 산간지대는 약간 흐린 곳도 있겠지만 오늘의 시계는 양호하며 바다도 잔잔합니다. 바람은 북풍이 10노트로 불고 있습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하와이입니다."

이 방송을 들은 후지다는 기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구먼, 좋아! 날씨도 우리편이다."

 

섬이 가까워 지면서 공격기부대는 2 갈래로 나뉘어져 진주만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폭격기들은 저공으로 섬을 가로질러 진주만쪽으로 향했고, 뇌격기들은 남쪽으로부터 공격하기 위해 섬의 서해안 쪽으로 우회했다.

 

드디어 후지다의 눈에 진주만이 들어왔다. 후지다는 즉시 망원경을 들고 전함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부터 확인했다. 진주만 중앙의 포드섬에 정박하고 있는 7척의 전함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외에도 9척의 순양함, 29척의 구축함들을 비롯한 94척의 함선들이 진주만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기가막힌 장면이었다.

 

"이거 봐라...정말 모두 모여 있군! 좋았어. 만족할 만 하다."

이때 상공의 전투기 부대 지휘관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소령님 이상합니다. 미군의 비행기가 한 대도 보이지 않는데요, 미국놈들 일요일이라고 초계비행도 하지 않고 있나 봅니다. 이거 너무 심한데요, 우리 해군이었다면 이건 군법회의 감입니다."

마침 후지다도 그들의 대편대가 날아오는 동안 단 한 대의 미군기도 만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아해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완전하게 목표가 노출되어 있다니 천우신조가 우리에게 있다. 우린 해낸 거야! 자 이제 공격을 개시한다. 지금 시각 오전 7시 49분, 전원 공격 대형으로 전개하고 각자의 목표물을 향해서 돌격하라! 그리고 사령부에 즉시 암호 무전을 쳐라! 진주만 기습 성공함! (도라 도라 도라)"

 

후지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 편대를 이루고 있던 뇌격기와 수평폭격기들이 진입순서대로 차례차례 편대를 풀고 저공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99식 함상 폭격기들은 급강하 폭격을 하기 위해서 목표물 위로 상승했다.

각 조종사들은 자기들에게 할당된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한 경로를 찾아 소형 편대 단위로 산개했다. 일본 공격기들이 진주만을 사방에서 에워싼 채로 점점 접근해 오면서 드디어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었다

 

 

5. 진주만 공습 중, 이건 훈련이 아니다.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 진주만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요일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항내는 새벽의 안개에 쌓여 있다가 점차로 화창한 햇살을 맞이하면서 화창하게 개어가고 있었다. 많은 수병들이 주말 상륙허가를 받아 대부분의 함내는 당직이었던 수병들이 오전 식사를 마친 후 서로 담소를 주고받으면서 함내를 오가고 있었다. 오전 8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고, 일요일 8시의 국기 계양식을 앞두고 정렬해있는 해군 군악대가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저공으로 엔진 폭음을 울리며 날아든 몇대의 항공기가 이들의 머리 위를 지나 포드섬 쪽으로 향했다. 국기계양을 하다가 시끄러운 소음에 놀란 한 수병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죽겠네, 아니 아침부터 웬 곡예비행이람...."

 

이때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군기들이 오전 비행훈련을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한 대가 포드섬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아군기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수병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저놈이 폭탄을 떨어뜨렸어! 도대체 어쩌자고 저런 짓을...."

"저건 군법회의 감이야! 미친놈!"

이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어떤 육군 대령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기도 했다.

"야! 이거 정말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 연습이로구만, 그런데 시간이 좀 이르군... 부지런한 해군놈들..."

 

대부분의 수병들은 이때까지도 곡예비행을 하던 해군기가 실수로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이들의 머리위로 더 많은 항공기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탄이 또 떨어졌다. 놀란 장교 한명이 고개를 쳐들어 항공기들을 쳐다보았다. 이 장교는 항공기들의 동체와 주익에 그려진 붉은 원을 보고는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일본놈 들이다! 놈들이 폭격을 하고 있다. 이건 훈련이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혼란에 빠진 미해군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미 진주만은 일본기들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폭탄이 터졌다. 99식 함상 폭격기들이 감행한 최초의 공격은 포드섬의 해군항공기지를 포함한 진주만 근처의 비행장들이 목표였다. 마침 이때 미군은 일본기들의 공습은 꿈도 꾸지 않았고, 오히려 현지 일본인들이 파괴공작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공기들을 격납고에서 끌어내어 비행장 한가운데에 밀집해서 모아놓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결국 하늘에서 바라본 미군기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앉아있는 오리떼와 같았다.

 

결국 폭탄 한발로도 십 여대의 항공기들이 불덩어리가 되 버렸고 대항하는 적기가 없어서 임의의 목표에 대해서 기총소사를 가하던 제로 전투기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공습이 시작되자 숙소에서 뛰쳐나온 미군 조종사들은 필사적으로 한 대의 전투기라도 이륙시켜 보고자 했지만 이미 비행장 상공을 장악한 일본기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비행기들이 조직적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결국 포드섬과 힉캄 비행장, 휠러 기지의 항공기들은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최초의 폭탄이 떨어진지 2분이 경과한 7시 57분, 이번에는 97식 뇌격기들의 제1파가 저공으로 진주만을 향해 남쪽에서 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포드섬의 전함열(Battle Ship Row)을 향해서 3~4기 편대 단위로 직선으로 날아오다가 고도 30~40m에서 어뢰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어뢰들은 애초의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모두 성공적으로 흰 항적을 그리면서 전함을 향해 질주했다.

 

최초의 어뢰는 전함 오클라호마에 명중되었다. 전함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강타한 어뢰가 폭발하면서 오클라호마가 크게 흔들렸다. 이때까지도 밖의 상황을 모른 채 함내에 있던 수병들은 잠을 자고 있거나 식사를 막 마친 상태였다. 이들은 큰 충격에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함내에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이 계속 울려 퍼졌다. 이 순간 또 한발의 어뢰가 오클라호마에 명중되었다. 그리고는 곧 전함이 비틀거리면서 왼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함내 등은 꺼져 버렸고, 놀란 수병들이 갑판으로 뛰어 나왔을 때 이미 진주만은 화염과 연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오클라호마는 최초의 공격이 있은 지 20분 만에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완전히 누워 버렸다. 수심이 얕아 완전히 가라않지는 않았지만 주위에는 이 전함에서 흘러나온 시꺼먼 중유가 뒤덮여 마치 고래가 피를 뿜으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함을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든 수병들은 중유를 뒤집어 쓴 채로 기울어가는 전함에서 벗어나고자 죽기 살기로 수영을 해야 했다. 진주만 공습이 끝날 때까지 오클라호마에는 무려 12발이나 되는 어뢰와 폭탄이 명중되었으며, 완전히 뒤집혀 버린 오클라호마의 내부에는 415명의 수병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갇혀 버렸고 공습이 끝난 후 구조작업이 진행되기 전에 연기에 질식하거나 함내에 차오른 물 때문에 모두 사망했다.

 

일본 뇌격기들이 어뢰 공격을 시작한지 8분후, 8시 5분이 되면서 이번에는 97식 수평폭격기들이 항의 상공에 진입하여 폭탄을 전함들에게 명중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이 떨어뜨리는 폭탄은 전함의 40mm 포탄을 개조한 800kg 철갑폭탄으로 관통력이 기존의 것보다 높아 15cm의 철판을 뚫고 들어가서 폭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곧 진주만의 모든 전함들에게 1발 이상의 철갑폭탄이 명중했다. 이제는 어떤 편대의 차례라고 할 필요도 없이 셀 수 없이 많은 일본기들이 진주만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뇌격과 급강하 폭격, 그리고 수평폭격이 숨 돌릴 틈없이 계속되었다. 순식간에 진주만 항내는 온통 불길에 휩싸였으며 함선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다.

 

오클라호마의 바로 뒤에 있었던 전함 웨스트버지니아는 불길에 뒤덮여 침몰하고 있었지만 수병들은 퇴함하지 않고 장교들의 인솔 하에 용감하게 대공포로 일본기들을 향해 맹렬하게 응사하고 있었다. 이 전함은 홀수선 아래쪽에 어뢰를 맞고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함장의 명령에 따라 수병들이 신속하게 모두 반대쪽으로 이동하여 배의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함내의 불길은 소화기를 들고 불길에 맞선 수병들과 옆에서 물을 뿌려주는 소화선 1척의 활약으로 간신히 잡았지만 이 전함도 결국은 그대로 진주만의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수심 15m의 얕은 바다에 바른 자세로 주저앉아 버렸으므로 이 전함은 상부구조물의 침수를 면하여 공습이 끝날 때까지 대공포 사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6. 네바다의 분전과 아리조나의 최후

 

처절한 공습하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전함 네바다의 분전이었다. 네바다는 뱃머리에 어뢰를 한발 맞았으나 전방 구획을 닫아 버려 침수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조치한 후에 곧장 진주만을 벗어나기 위해서 엔진을 가동했다. 네바다는 항의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대공포로 맹렬하게 반격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기들로 우글거리는 상황에서는 절망적인 몸부림과도 같았다. 진주만 상공에서 네바다가 이동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후지다 중령은 즉시 네바다를 집중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99식 급강하 폭격기들이 파리떼처럼 달라붙기 시작했다.

 

일본기들이 격렬한 대공포화를 헤집고 들어가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면서 네바다에는 2발의 폭탄이 더 명중되었다. 전함은 점차로 기울어가고 있었으며 옆구리에서는 검은 중유를 마치 동맥혈과도 같이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수로를 향해 전진하면서 대공포로 격렬하게 반격해서 일본기 2기를 격추시켰다. 정말로 장렬하기까지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네바다가 만일 수로의 가운데서 침몰한다면 좁은 수로를 가로막아 모든 함정이 꼼짝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네바다의 함장은 즉시 해안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명령했으며, 예인선 2척의 도움으로 간신히 네바다는 수로를 벗어나 와이피오 곶으로 우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네바다는 폭탄 6발을 맞았으며 함내는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네바다의 승무원들은 결사적으로 불과 싸웠으며 네바다는 간신히 불길을 잡고 침몰을 면했다.

 

다른 전함들에서도 상황은 어려웠다. 전함 테네시과 메릴랜드는 폭탄과 어뢰에 맞아 불길에 휩싸여 있었으며 전함 버지니아는 9발의 직격탄을 맞고 대파되었다. 전함 캘리포니아도 어뢰 3발을 맞아 가라앉기 시작했고 함장은 함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했다. 연습 표적함으로 개조된 전함 유타는 몇 발의 어뢰를 맞고는 서서히 전복되어 버렸다. 이외에 순양함 헬레나가 어뢰 5발을 온몸으로 맞아 대파되었고, 그 옆에 있던 기뢰부설함 오글라라는 헬레나의 폭발에 휘말려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잠시 후 구축함 쇼가 탄약고에 철갑폭탄을 얻어맞아 대폭발과 함께 버섯구름을 피워 올렸다. 쇼의 파편은 1,000m가 넘는 곳까지 튀어 날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참화는 전함 아리조나에서 일어났다. 아리조나는 어뢰 7발을 연달아 맞아 이미 대파된 상태로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97식 수평폭격기 한 대가 떨어뜨린 철갑폭탄 한발이 결정타를 먹이고 말았다. 이 폭탄은 전방 포탑을 뚫고 들어와 함포의 포탄이 가득 쌓여있는 탄약고에서 폭발해 버린 것이다. 곧 포탄의 동시유폭으로 엄청난 대 폭발이 발생했고 불기둥이 수백m까지 솟구쳐 올랐다. 이 엄청난 폭발과 함께 거대한 전함이 마치 나뭇잎처럼 팔랑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침몰해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아리조나 함내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1,177명의 수병들이 죽음의 불길에 휘말려 타죽거나 아리조나와 함께 수장되어 버렸다. 후지다의 회상에 의하면 아리조나의 대폭발은 800m 정도 떨어져 있던 후지다의 비행기에까지 충격을 주어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한편, 제1파 공격부대의 공습이 한창일 때 미본토에서 하와이를 향해 14시간에 걸친 장거리 비행을 해오던 B-17 폭격기 12대가 진주만 상공에 도착했다. 이들은 진주만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구름을 보면서 대규모 훈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몇대의 제로 전투기가 이들에게 접근해서 기총사격을 했으며 날아오는 총탄을 보고나서야 편대장은 진주만이 공습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목적지였던 힉캄 비행장에 착륙가능여부를 무전으로 물었다. 그러자 힉캄 비행장의 관제 탐으로부터 현재 일본기들의 공습을 받고 있으나 일단 착륙을 시도해보라는 교신이 있었다.

 

B-17 편대가 힉캄 비행장에 도달하니 상황은 정말 가관이었다. 어지럽게 날고 있는 일본기들이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활주로에는 불타는 미군기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게다가 미군의 대공포화가 빗발치듯 발사되고 있었으며 일부는 B-17 폭격기들을 일본기로 오인하고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장거리 비행으로 연료가 거의 없었던 대부분의 B-17은 이런 악조건에서도 착륙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용감하게 착륙을 시도한 B-17의 대부분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1대를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지상에 내릴 수 있었다.

 

제1파 공격대의 공습이 거의 끝나갈 무렵 후지다는 상공에서 진주만을 둘러보고 있었다. 항내는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온전한 전함은 한척도 없었다. 계속 폭발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미군기들은 단 한 대도 반격해 오지 않고 있었다. 전황에 만족하고 있던 후지다는 자신의 편대를 이끌고 비교적 피해가 가볍다고 판단된 전함 메릴랜드를 목표로 폭격을 가했다. 격렬한 대공포화 사이를 날아서 메릴랜드의 상공에 진입한 후지다의 편대에서 투하된 4발의 폭탄이 메릴랜드를 향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중 2발이 정확하게 명중했다. 후지다의 비행기도 대공포화에 피탄되어 큰 구멍이 나고 조종석이 손상 받았지만 비행이 가능했으므로 그는 공격이 끝날 때까지 진주만 상공에 남아있었다.

 

후지다는 공격을 마친 기체들에게 즉시 귀함을 명령했고, 8시 30분을 넘어서면서 제1파 공격기들이 차례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제1파 공격기들이 공격을 시작한지 채 한 시간이 안되는 8시 52분, 시마사키 소령이 이끄는 제2파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제2파 공격부대는 54대의 97식 함상공격기와 80대의 99식 급강하 폭격기 그리고 엄호를 맡은 36대의 제로전투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파의 97식 함상공격기들에게는 250kg 폭탄 2발이 장착되었으며 또는 250kg 폭탄 1발과 60kg 폭탄 6발이 장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들의 목표가 미군의 항공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80대의 급강하 폭격기들에게는 250kg 폭탄 1발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애초에 이들의 공격 목표는 미해군의 항모였지만 항모가 진주만에 한 대도 없었으므로 결국 1차 공격에서 피해를 적게 입은 함선들에 대해서 공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진주만 상공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구름과 반격태세를 정비한 미군의 거센 대공포화 때문에 예정된 목표물을 포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시마사키 중령은 공격이 가능한 임의의 목표물에 대해서 공격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진주만의 함선들에는 또다시 불꽃세례가 퍼부어졌다.

 

이때까지도 포드섬과 힉캄, 휠러 등의 주요 미군 항공기지들에서는 전투기를 발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공격대 제1파와 제2파는 진주만의 함선공격과 동시에 조직적으로 이 비행장들을 내습해 왔던 것이다. 활주로는 온통 부서진 비행기들과 파편들로 어지러울 정도였으며 미군 조종사들은 날개가 붙어있는 비행기를 찾기 위해 광분했지만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온전해 보이는 비행기를 발견했다 싶으면 곧 일본기의 집요한 공격으로 파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가장 늦게 공습을 받은 카네오헤 해군항공기지도 공격을 받을 때까지 대부분의 병사들이 공습을 받는 줄을 모르고 취침 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군기들이 전혀 이륙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북쪽에 위치한 작은 비행장인 할레이와에서 P-40 4대와 P-36 4대가 이륙하여 일본기들과 공중전에 돌입했으며 총 7기의 일본기를 격추시켰다고 한다.

 

한편, 총 1시간 45분여에 걸친 공습이 모두 끝나자 일본기들이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전황을 지켜보던 후지다는 불타는 진주만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하면서 피해상황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진주만을 뒤덮은 검은 연기구름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후지다는 그들의 기습공격이 분명히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항공모함이 기다리는 수역을 향해서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귀환하는 도중 후지다는 한 번 더 공습을 가하여 확실하게 진주만의 전투능력을 상실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고 한다.

 

 

7.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한편, 나구모의 기동부대는 돌아오는 함재기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격을 끝내고 돌아온 함재기 조종사들은 반자이를 외치며 열광하는 승조원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종석에서 내리고 서로 악수를 하면서 기뻐했다. 이무렵 기상이 나빠져서 함재기들은 15도 가까이 롤링을 하는 상태에서 착함해야 했으나 함대 상공에 도달한 함재기들은 50여대가 착륙과정에서 가벼운 파손을 입는 정도에 그쳤을 뿐 모두 무사히 착륙했다. 돌아오지 못한 함재기는 제로 전투기 9기, 뇌격기 5기, 급강하 폭격기 15기로서 총 29기에 불과했으며 탑승하고 있었던 조종사 55명 전원이 전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총 출격기 353기의 10%에도 못미치는 가벼운 손실이었다.

 

후지다의 기체를 포함해서 함대상공에 다다른 함재기들이 모두 무사히 귀함하자, 기함 아까기의 사령탑에서는 나구모 제독과 참모들이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다시 한 번 출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들뜬 상태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순간 잠시 불확실한 한때가 흘러갔다.

 

참모들 사이에 더 공격을 해야 한다는 쪽과 이제는 귀환해야 한다는 쪽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항공대장 후지다는 3차 공격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당연히 그런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제2항공전대(항모 히류, 소류)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공격적인 성향의 야마구찌 다몽 소장은 당연히 3차 공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승무원들에게 공격준비 명령을 내린 후 자신의 의견을 나구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나구모는 매우 신중했다. 그는 우선 하와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미 항모들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제일 먼저 걱정했다. 3차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부관들에게 나구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히 아직까지는 우리 일본해군에게 운이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공격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우리 정보부나 정찰기는 단 한척의 미 항모의 위치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진주만 근해에 미 항모나 잠수함이 있다면 더 이상 우리가 현 위치에 머무르다가는 반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이제는 미군이 공습에 대비하고 있을 것이므로 더 이상 우리에게 기습의 이점은 없다. 미군의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함재기들의 피해가 커질지도 모른다. 조종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진주만에는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더 이상 공격을 했을 때 손실에 비해서 얻는 것이 적을 것이다. 나에게는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 이상으로 우리 함대의 안전도 중요하다. 자! 이제는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때이다."

 

사실 나구모는 애초부터 2차 공습까지만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야마모토의 참모장이던 구사까 소장도 이에 동의했다. 나구모에게는 미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이상으로 기동함대의 안전도 중요했다. 결국 신중한 나구모는 더 이상 공습은 중단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후지다를 포함한 많은 조종사들의 탄식을 뒤로한 채 기함 아까기의 마스트에는 철수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한편, 본토의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이런 나구모의 결정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령부의 참모들은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격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제독은 상황판단은 실제 참전하고 있는 야전 사령관인 나구모 제독이 가장 잘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나구모에게 진주만 공습의 전권을 일임한 상태였으므로 나구모의 판단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결국 최초의 함재기가 발함한지 7시간이 경과한 하와이 시간으로 오후 1시 30분, 미태평양 함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일본의 기동함대는 성공의 기쁨과 아쉬움을 태평양에 남긴 채 일제히 일본 열도를 향해서 귀로에 올랐다.

 

 

8. 폭풍이 지나간 후...

 

약 2시간여에 걸친 일본군의 공습이 끝난 후 진주만은 그야말로 처참한 지옥과도 같았다. 일요일의 화창한 아침에 벌어진 참극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들을 구조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과 싸워야 했다. 이런 상황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공황 상태였다.

 

게다가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이런 불안감은 온갖 루머와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일본 낙하산 부대가 곧 공수작전을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상당수의 일본 상륙정이 근해에서 발견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도 입을 타고 퍼졌다.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밝혀지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본해군이 선보인 각종 신무기에 대해서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특히 얕은 수심에서 사용된 어뢰는 진주만이 어뢰공격에서 안전지역이라고 믿었던 미군의 의표를 완벽하게 찔렀다.

 

사용된 어뢰 40발 중 36발이 정확하게 명중했으며 파괴력도 대단했다. 게다가 미군이 생각하던 바와 달리 일본해군의 항공기들은 모두 미군의 항공기들보다 오히려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뢰와 폭탄이 모두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투하되었으며, 특히 제로전투기는 어떻게 그토록 먼 거리에서 날아와 오랜 시간동안 진주만 상공을 완전히 장악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었는가 의문투성이였다. 일본의 항공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았는가...

 

여하간 장군들부터 수병들까지 모두가 통감하고 있던 것은 그들의 방어태세가 온통 허점 투성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이 공습이 꿈이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미군 최고의 요새가 이토록 허무하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은 두 눈으로 실상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생생하게 보고 있었던 공습후의 참상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진주만의 포드섬에 정박하고 있던 전함들은 모두 치명타를 입었다. 아리조나,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 웨스트버지니아가 침몰했으며 네바다, 펜실바니아, 메릴랜드, 테네시는 침몰은 면했지만 대파되었다. 그 외에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와 표적함 유타가 침몰했으며 순양함 헬레나, 호놀루루, 래리가 대파되었다. 구축함 캐신, 다운즈가 침몰했으며 쇼는 대파되었다. 이외에 수상기모함 커티스와 수리공작함 베스탈도 화를 면하지 못했다. 미 태평양 함대는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해군과 육군 항공대 기지도 큰 피해를 입어 육군항공대는 완파 96기, 대파 128기의 손실을 입었으며 해군은 완파 92기 대파 31기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로서 하와이의 항공전력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가 되었다. 인명 손실도 경악할 수준이었다. 해군 병사 2,008명이 전사했으며 육군은 228명이, 해병대가 109명이 전사했다. 민간인도 68명이 공습 와중에서 사망했다. 여기에 부상자수가 1,000여명을 넘어서서 하와이는 전체가 거대한 시체안치소와 병원으로 변해 버렸다.

 

이처럼 진주만 공습은 미국인들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지만 일본군에게는 전술적으로 굉장한 성공이었다. 역사상 해군이 투입된 전투에서 적에게 이토록 궤멸적인 타격을 단 한번의 기습 공격으로 입힌 선례는 없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로부터 이 공격작전은 신무기와 항공모함 집단운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한 공대지 전투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애초에 일본군이 의도했던 단기결전에서의 확실한 승리를 위한 방법으로서 진주만 기습은 실로 훌륭한 전략이며 또한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9. 진주만을 기억하라!

 

공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폐허가 된 진주만과 항공기지를 복구해야하는 엄청난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하는지조차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 모두들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양이 가능한 함선과 불가능한 함선을 분류해서 가능하면 수리를 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전함중에서는 굉침한 아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을 인양하여 수리하도록 했다. 진주만의 수심이 15m 정도로 낮았으므로 이 작업은 애초의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다. 하와이 섬 전체는 등화관제가 실시되었지만 진주만의 수리시설에서는 등화관제의 예외지역으로 대낮같이 밝은 조명하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파손된 선박들의 복구와 수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주만 공습에서 전략적인 큰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진주만 항내의 선박들에게만 공격이 집중되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류 저장탱크들과 수리시설들을 놓치고 말았던 점이다. 사실 이 유류탱크는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모여 있었으며 항공 공격에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여서 제로 전투기의 기관포 몇 발만 맞아도 엄청난 연쇄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었다. 여기에는 미 태평양 함대를 운영하기 위한 연료가 무려 1년 치 이상 저장되어 있었는데 만일 이 유류 탱크들이 파괴되었다면 미군은 연료보급을 할 수 없어 모든 전투함을 샌디에고로 철수시켜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그 가치는 높았다. 이 중요한 목표물이 왜 공격을 받지 않았는지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여하간 천만다행으로 이 유류 탱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미군은 진주만을 계속 해군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수리시설들도 공습을 모면하여 공습이 끝나자마자 곧 피해를 입은 함선들을 수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이 저지른 더 큰 실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아들, 남편,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이 전혀 싸울 의사가 없었던 일본군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없이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모두들 치를 떨면서 크게 분노했다. 사실 이점은 야마모토도 우려했던 것으로 애초의 계획은 공격개시 30분전에 일본대사가 미정부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대사는 암호해독 작업이 늦어져서 공습이 시작된 후에나 미정부에 포고문을 가지고 출석할 수 있었다고 변명을 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주만 공습 사실을 알게 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날'이라고 했으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일본이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농락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인들은 2차대전이 시작된 지 2년 넘게 고집해온 고립주의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이글거리는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었으며 전쟁에서 완전히 이길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게는 피의 복수를 다짐하도록 만드는 '진주만을 기억하라 (Remember Pearl harbor)'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져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진주만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았다.

 

 

10. 일본의 정치적 배경

 

1837년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 존 어설리반<John L. Osullivan>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미국은 세계를 미국의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계속 팽창되어져야 하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1898년 미서전쟁<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 뿐 아니라 앞으로 미국 외교를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사상적 밑받침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제도, 종교, 인종 등의 우월감은 그들의 종교적 선교 개념과 어울려 거의 모든 경우에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윌슨 대통령은 "세계민주주의의 안전을 위하여"라는 이유를 들어 참전하였고, 2차 대전에도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거의 같은 이유를 들어 참전하였다. 이런 "명백한 운명" 주의에는 숨길 수 없는 경제적 동기와 인종 차별적 편견이 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의 이런 주의에 대해 1930년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은 미국을 충분히 자극 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고 1938년 미국의 루즈벨트는 재정신용, 비행기와 항공모함 부품, 고옥탄가의 항공 연료, 고철, 그리고 공작 기계들의 수출을 제한하는 대일경제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1940년에는 대서양 전쟁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과 미해군이 두 대양에서의 중대한 재난에 대처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대통령은 일본을 전쟁 참여의 위기로 몰고 가는 것을 피하고자 하여 일본이 자국의 노선을 계속 추구한다면 경제압력을 적용하고 더 커다란 응징을 가하겠다고 위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41년 7월 일본의 동남아시아로의 행군이 가속화되자, 중대하고 즉각적인 군사적 함축을 결한 효과적인 경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 이런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노력 속에서 1941년 7월26 루즈벨트는 미국 내의 모든 일본인의 자산을 동결시켰고 육군성과 해군성 장관들이 촉구했듯이 일본으로의 석유수송을 차단하였다. 이런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중단할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팽창 지향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일본 군부의 지도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41년 12월7일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였다.

 

일본의 팽창정책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인들 중 하나는 황국사관<皇國史觀>의 뿌리를 들 수가 있다. 황국사관이란?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을 중심에 놓고 역사를 보는 관점으로서 이런 관점으로 인해 침략적 이데올로기가 파생되었다. 그래서 1889년 반포된 ‘명치헌법<대일본제국헌법>’은 서양의 사상과 일본의 전통과의 결합체였다. 통치철학에 있어서 특히 주권의 문제 및 천황과 정부, 천황과 국민과의 관계 설정에는 일본이 명치유신 후 국체<國體>라고 여겨왔던 원칙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1조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국가원수로서 일본을 통치한다."고 하였으며, 제11조에서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라고 명시하였다.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격화하여 "현인신" 즉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 위치시키고 신도의 국교화로 모든 국민은 천황의 자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국민 사상통일을 획책하였다.

 

이런 일본은 국내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의식을 고취하고, 천황의 군대를 내세워 인접 국가를 침략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대만 및 펑후도를 중국으로부터 분할하여 처음으로 식민지를 획득하였으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사할린의 일부지역과 관동 및 남만주 철도 부속지를 식민화하였다. 이어 1910년에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두 번째 요인은 일본의 민족의식을 들 수 있다. 일본의 민족의식을 보면 전통적으로 나<내가 속한 집단>와 남<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을 구분하는 집단 식별법에 따라 그 언어표현이나 행동양식이 달라진다. 즉 나의 가족이 내<來>라면, 나의 가족 이외에는 외<外>가 된다. 이와 같은 집단의식이 외부로 잘못 표출되면 맹목적인 침략전쟁과 같은 사건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팽창정책을 추진한 일본제국주의의 주체세력은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 천황의 군대였고, 해외진출의 당위성으로 생명선과 이익선을 내세웠다.

 

민족주의의 태동은 18세기말 러시아와의 접촉에서 시작되어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한 일본의 개국과 유신체제 이후까지 계속된 일본의 대외적인 위기의식은 일본에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정립, 발전시켰고 이런 러시아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세적인 정책이 아닌 적극적인 정책을 취해야 하며 국방력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만이 일본의 국가이익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에서는 서구 제국의 근대화된 군사과학에 위압을 느껴 서구식 군사기술의 도입 및 서구식 군대로의 개편론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계속된 민족주의 운동은 19세기말에 아시아주의와 탈 아시아 주의로 탈바꿈하여 계승발전 하였다. 탈 이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팽창론을 옹호하였다. 이런 팽창주의적 민족주의 운동은 기독교의 배척운동과 현양사의 대륙 팽창정책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1894년 조선의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국의 조선파병 결정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에게 팽창주의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호기를 제공하여, 일본은 동년7월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일본의 팽창주의적 욕구가 최초의 무력행사에서 성공함으로써 국민에게 자신감과 우월감을 주어 민족주의에 입각한 침략적 의지는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에는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 확립에 노력하는 한편, 종래의 민족주의 개념을 한층 발전시켜 독자적인 일본도와 침략사상을 결부시킨 ‘일본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주의 운동은 국가체제 강화와 군대를 존중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이룩하고 인류애 사상을 추진하는데 국민이 모두 진력해야 한다고 하여 민족의식을 더욱 고취시켰고 한반도 강점부터 태평양 전쟁<1941년> 개시까지는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결국 이것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 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국제체제도 대외적인 팽창주의에 유리한 체제를 만들어 내려는 데 집중되어 평시부터 모든 전쟁이나 개혁 또는 구상이 대외팽창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미화되었다.

 

세 번째 요인은 일본의 국수주의 운동으로써 일부 국학자에 의해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으로 전파된 애국주의 사상과 타민족 보다 우수하다는 일본민족주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국수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주장은 대체로 황실중심, 경신숭조, 충성지순, 대화민족의 해외발전, 동아해방과 위험사상의 배제 박멸 등이었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1930년대에 들어 초국가주의 사상에 연결되고 반의회주의, 반자본주의, 제국주의 사상과 연결되어 극단의 과격주의와 팽창주의자 들에게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여 군내부의 젊은 장교들에게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등 많은 영향을 미쳤다.

 

네 번째 요인은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근대국가로 변신은 하였으나 부존자원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원료와 시장확보는 물론 식량 공급기지까지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일본은 팽창 이데올로기인 ‘동아신질서’ 의 창설을 주창하였고 다시 1940년 7월26일 일본정부에 의해 결정된 ‘기본국책요강’ 중에서 신체재 확립방안의 하나로 ‘대동아공영권’ 을 건설하는 방침이 수립되었다. 이것은 종래의 ‘동아신질서’ 와는 달리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권의 새로운 블록 구상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초기에 북진정책을 추진했으며, 북진정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남진정책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정책은 구미열강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가져오게 하였고 태평양전쟁 이르러서 일본은 이를 아시아 침략에 대한 목표라고 선전하기도 하였다.

 

이런 요인들로 인하여 일본은 먼저 중국의 희생을 발판으로 팽창하였다. 중국을 상대로 한 잔혹한 전쟁은 중국을 지원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을 초래했다. 1940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 베트남 및 캄보디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를 차지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팽창주의자들에게는 세 가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하나는 소련을 겨냥해 서쪽으로 진군하는 것이고 두 번째 선택은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비록 일본은 이미 동남아의 프랑스 식민지를 획득했지만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석유가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였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세 번째 선택은 미국을 향해 동쪽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선택하였으며 1941년 12월7일 일본은 미국에 대항해 동쪽으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겨냥하여 남쪽으로 공격을 하여 태평양 전쟁은 시작이 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 함대가 일시적인 타격을 입고 그 결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호놀룰루 서쪽 10㎞ 지점, 오아후 섬의 남쪽 해안에 있는 진주만은 클로버 모양으로 인공 개조한 항만이다. 이 항만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주위에는 에바, 와이파후, 펄시티, 아이에아, 호놀룰루 등의 도시가 있다. 가항(可航) 수역이 26㎢이고, 수백 개의 정박지가 있으며, 육지 면적은 4,000㏊가 넘는다. 와이피오 반도와 펄시티 반도, 그리고 포드 섬으로 인해 4개의 호수가 생겼다. 진주만 수로는 본래의 내륙 만을 태평양과 연결시킨다.

 

한때 이곳에서 진주조개들이 자랐기 때문에 하와이 사람들은 진주만을 와이모미('진주 바다'라는 뜻)라고 불렀다. 1840년에 미국 해군 대위 찰스 윌크스가 처음 측지측량을 했고, 이 만까지 산호 사주 수로의 준설작업을 연장할 것을 주장했다. 약 30년 후 존 매캘리스터 스코필드 대령은 미국이 이 항만에 대한 권리를 획득할 것을 제의했다. 그뒤 1887년에 체결된 조약으로 미국은 이곳을 급탄항과 수리항으로 독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때 태평양 기지로서 이 항만이 갖는 전략적 가치가 입증되면서부터였다. 1908년 해군기지가 세워졌고, 1919년에 건선거(乾船渠)가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