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2차세계대전_秘事

노르망디 상륙 작전(Invasion of Normandy)

chocohuh 2013. 2. 14. 17:25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의 세부 상륙작전격인 넵튠(Neptune) 작전으로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5개의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별로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이었다. 셀부르 항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으로부터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 명명되었다(이런 이름의 해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암호명으로 붙여진 것이다). 각 해변 별로 담당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유타 - 미국 제4보병 사단, 미국 제2레인저 대대, 미국 제5레인저 대대

• 오마하 - 미국 제1보병 사단, 미국 제29보병 사단, 미국 제2레인저 대대(예하 8개 중대)

• 골드 - 영국 제50사단, 제8기갑 여단

• 주노 - 캐나다 제3보병 사단, 제2기갑 여단, 제48코만도 대대

• 소드 - 영국 제3보병 사단, 제27기갑 여단

• 영국군의 상륙 지점 후방에는 영국 제6공수 사단(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새벽에 강하하였다.

• 유타 해안 후방에는 미국 제101공수사단과 미국 제82공수사단이 강하하기로 되었다.

 

연합군의 공격 계획은 상륙할 해안의 지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1944년 5월 6일 제31사진정찰 비행대대 소속 비무장 P-38 라이트닝을 이용해 10m 상공으로 비행하는 초 저공비행을 통해 해안의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이 노르망디 해안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와 나폴레옹 시대의 오래된 자료들을 제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BIGOT 지도이다.

 

상륙에 앞서 타이거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 작전은 모의상륙훈련으로서 1944년 4월에 있었다. 슬랩튼 샌즈에서 실시된 이 작전에는 300여 척의 함선과 3만여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4월 27일의 훈련은 절정에 달했는데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상륙정이 상륙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수륙양용 탱크들이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또한 공군이 보병을 엄호하는 것에 실패했다. 게다가 4월 28일 새벽 2시 독일군의 고속 어뢰정인 슈넬부트 9척이 LST 여덟 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공격하여 LST-531이 침몰하고 LST-289는 선미가 뚫렸다. LST-507은 연료탱크가 폭발해 불탔다. 이 사건으로 749명이 전사했다.

 

B 집단군 사령관 겸,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인 에르빈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1943년 말, 서부전선에 부임하면서 연합군 상륙부대를 저지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지뢰지대와 해안 장애물, 벙커, 포진지 및 공수부대의 강하와 공수를 방해하는 장비들을 설치했다.

 

B 집단군 공병사령관 마이제 장군의 1944년 3월 17일자 편지에서 프랑스 해안 등지에 설치하게 될 지뢰는 약 2천 만 개 정도가 될 것이며, 프랑스 내 여러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매설할 양이 2억 개가 넘는다는 내용을 적었다. B 집단군 전사일지에 기록된 지뢰매설 현황을 살펴보면, 1944년 5월 20일까지 해안에 설치한 지뢰의 수가 4,193,167개 이며, 이중 2,672,000개가 롬멜의 지휘하에 매설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지뢰는 공수부대를 우려해 후방에 매설했다.

 

해안 장애물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주정들을 파괴시키는 목적이며, 썰물 시에는 상륙하는 적의 전차를 저지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해물들 중에는 기뢰나 폭탄이 장착되어 강한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설치하기도 했다. 마이제 장군의 편지는 계속되어, 해안 장애물의 설치는 모두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4개 구역 중 2개 구역만 상륙 개시일까지 완료되었고, 나머지 공사 중이던 구간도 상륙 당일 날 상륙부대보다 앞서 출발한 코만도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B 집단군 전사일지에는 5월 13일까지 총 517,000개의 수중 장애물이 프랑스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그 중 31,00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외에도 공수부대를 막을 목적으로 롬멜은 공수부대의 글라이더가 착지할 만한 지점에 30m간격으로 높이 3m의 말뚝을 세웠다. 그러나 말뚝만으로 글라이더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뚝과 말뚝에 전기가 통하는 선을 설치해 글라이더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말뚝 위에 달아놓아 글라이더를 폭파시킬 포탄 100만 개를 준비했지만, 정작 상륙 당일까지 말뚝 설치가 완료된 곳은 거의 드물었다.

 

이런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실상 독일군 방어 계획의 핵심은 해안에 적군이 상륙하면 후방에 대기하던 기갑부대로 다시 바다로 쓸어내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쓸어버린다는 개념만 공감대를 형성했지 실제 배치문제에서 독일군 수뇌부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OKW의 알프레드 요들, 서부전역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기갑집단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B 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의 견해가 모두 달랐거나, 애매했다. 이 중에서 특히 갈등이 심했던 것은 슈베펜부르크와 롬멜이었다. 이전부터 슈베펜부르크를 비롯한 정통파 참모장교 출신들은 롬멜을 경원시하고 있었고, 그의 기갑부대 배치 전략에 반대하고 있었다. 거기에 롬멜의 B 집단군 예하인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 또한 롬멜의 견해에 반대 입장이어서 문제는 복잡했다. 롬멜과 나머지 지휘관들의 견해가 정면충돌하고 있었지만, 이를 조정해야 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알프레드 요들, 아돌프 히틀러는 애매한 태도만을 취하고 있었다.

 

롬멜은 안치오 상륙작전과 디에프 기습의 예를 들어 기갑부대를 가능한 한 해안가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베펜부르크도 살레르노 전투의 예를 들어 연합군의 공수사단, 항공력, 그리고 해군의 함포 사격에 기갑부대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괴멸할 것이라면서 롬멜의 주장을 반박했다. 두 주장 모두 실제 전투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어느 쪽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이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정권자는 히틀러와 룬트슈테트였지만 두 사람 모두 명확한 입장을 갖지 못했다. 룬트슈테트는 기갑병력 운용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으로 스스로 입장표명을 자제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롬멜의 위신과 사기를 고려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 상황은 당시 서부 전선 독일군의 이상한 지휘체계에 기인한 탓도 있었다.

 

결국 타협책이 나왔지만, 이 타협책은 미봉책에 가까웠고, 5월에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정작 상륙 당일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파드 칼레로 상륙할 것을 예상한 어정쩡한 배치와 반년 가까이 계속된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반목으로 인한 지휘 체계의 혼란 탓에 신속한 투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D-day 노르망디 급습 진로.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이다.”

미국 제1보병 사단 16연대장 조지 테일러 대령이 오마하 해변의 상황을 보고 남긴 말.

 

연합군은 1942년부터 프랑스에 상륙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몇 달간의 구상 끝에 1943년에 마침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병력을 수송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을 위해 연합군은 독일군을 속일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이것을 포티튜드 작전이라 명명했다.

 

연합군측은 당시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라는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은 넵튠(Neptune) 작전이었다. 오버로드는 대군주(大君主)를 뜻하고 넵튠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해신(海神)의 이름이다. 이 작전을 위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연합군 장성들이 오버로드(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였었다. 독일 측의 방어사령관은 프랑스 주둔 독일 집단군의 총 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 장군이 아이젠아워와 같은 격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대서양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장군은 북 아프리카에서 용맹을 떨친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다. 둘 다 원수(元帥)였지만 롬멜이 훨씬 후배였다.

 

1944년 6월 5일로 결정된 작전은 그 전날, 갑작스럽게 도버 해협에 태풍이 불면서 상황이 매우 심각해졌다. 그러나 6월 5일,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결단으로 상륙 작전이 강행되었고, 마침내 연합군은 6월 6일 새벽에 먼저 공수부대가 노르망디 일대에 공수 및 강하해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 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했다.

 

상륙작전 개시일인 6월 6일은 D-day라는 음어로서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사용했었는데 이 암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한 명칭이 되었다. D-day의 D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Day의 약자라고 한다. 세계 각 군마다 이 D-day에 해당하는 고유의 단어가 있는데 우리에게 역시 낯익은 Zero-hour와 비슷한 말이다.

 

이어 6월 6일 새벽, 작전이 개시되었다. 소드 해변, 주노 해변, 골드 해변의 영국군은 밀물 때인 오전 7시에, 오마하 해변과 유타 해변의 미군은 아직 썰물인 오전 6시에 상륙했다.

두 나라의 상륙 시간이 다른 것은 밀물과 썰물에 대한 양국 지휘관들의 서로 다른 생각 때문이었고, 장단점이 있었다. 독일은 상륙주정의 접안을 막고자 바다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한 상태였다.

 

미군은 이 장애물들이 드러나는 썰물 때에 상륙하여 상륙 주정의 피해를 막아 최대한 백사장에 많은 병력을 올리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도저 부대를 상륙시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으나 불도저는 기초적인 장갑조차 없어서 대다수의 불도저는, 파괴되어 임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불도저 운전수가 총 혹은 파편에 맞아 사망하게 되어 임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가 더 많았다.

 

썰물 때 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은 필연적으로 상륙한 보병들이 달려야 하는 거리가 길어져 벙커와 참호로부터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보병들이 벙커까지 달려야 했던 거리는 약 450M 였다. 이에 반해 영국은 상륙주정들이 장애물에 걸려 뒤집히는 경우가 발생해도 최대한 해안 가까이에 접안하여 보병들이 달리는 거리를 줄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두 방법 중에 어떤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결국 영국군과 미군은 상륙 작전 개시 시간이 1시간 정도 차이 나게 되었다.

 

공군과 해군의 강력한 엄호 아래 오마하 해변을 제외한 모든 상륙 지점의 상륙부대는 순조롭게 상륙에 성공하고, 상륙 도중 장교 토머스 미헌 3세가 전사하기도 했으며 오마하 해변의 상륙부대도 이후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 작전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다.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자정 경에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 작전이 있었고 이어서 날이 밝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오마하 해변 해안으로부터 1km 떨어진 곳에는 구축함이 자리 잡아 보병들을 엄호했다. 일부는 5.5~7km 떨어진 해상에서 120mm포로 지원사격을 했다. 5.5~11km 구간에는 사거리가 20km정도인 350mm포를 장착한 전함들이 정박하여 해안을 향해 연신 포격을 퍼부었다. 상륙 직전 30분간 집중포격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포격은 상륙하는 병력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4일과 5일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된 포격을 실시하지 못했고 6일에는 안개로 인해 해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함대는 아군 병력이 자신들의 포에 희생될 것을 우려해 목표지점보다 더 먼 거리로 포탄을 발사하여 독일군의 피해는 매우 미미했다. 특히 '피의 오마하'라 불리는 오마하 해변의 병력들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까지 함대 포격이 '해변의 모래를 두 번 뒤엎어 놓았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폭스 그린과 이지 레드 구역에 상륙한 이들은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오마하에 상륙하는 병사들은 모두 함대가 함포사격으로 인한 해변에 모래구덩이(간이참호)가 있는 곳으로 돌격할 것으로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에 불과했다.

 

먼저 노르망디 침공 작전의 시작이 되는 공수 작전을 소개해본다. 24,000명이나 되는 공수 부대원의 공수작전이 상륙 작전 전야(前夜)인 6월 5일과 6일 사이 자정 조금 후에 실시되었다. 공수 작전에 참가한 공수 부대는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와 자유 프랑스 군의 부대들이었다.

 

해안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 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그 날 아침 6시 30분이다. 해상의 일기가 아주 황천(荒天)상황이어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다. 상륙작전이 아주 힘든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내린 작전 감행의 결단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기습은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날씨의 덕도 보았지만 연합군측이 독일군에게 전개했었던 기만 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기만 작전은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기만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Calais)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 제1군이 패턴 장군의 지휘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동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았다.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사블’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 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 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 레이더를 교란하는 것이었다. 칼레 해안에 곧 상륙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매월 10일간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가능하였다. 그 중에 만월(滿月)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이었다. 밝기는 공중 침투하는 항공기 조종사나 글라이더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의 식별에 필수였었고 조류는 상륙정들이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상륙 저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었기 때문이었다.

 

6월 5일이 바로 그런 만월이 뜨는 날이었다.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6사이 야간을 작전 개시일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5월에는 아주 쾌청했던 일기가 6월에 들어와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 수가 없게 했고 낮은 시계(視界)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었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구를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 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다. 상식으로 본다면 6월 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했고 함선들은 항구로 돌아오고 병사들은 원래 머무르던 기지 생활관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미 상륙 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모두 바다에 떠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다.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 JM 스태그 대령은 6월 6일에는 기상이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다.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Sir Trafford Leigh-Mallory)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Sir Bertram H Ramsay) 제독은 중도적인 입장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Juno)의 해안 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한편 영불 해협 방면보다도 더 험한 북부 프랑스의 악천후는 독일군을 안심하고 경계를 풀게 하였다. 이들은 그간 미영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계속적으로 경고 받고 있어서 높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끔찍한 악천후는 적어도 며칠간은 마음을 놓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일부 부대는 비상 경계령을 일시 해제하기도 하였고 많은 고위 지휘관들은 주말을 맞아 위치를 떠나거나 했다. 해안선 방어를 책임진 에르빈 롬멜 원수는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해 며칠간 독일의 집으로 귀가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수 십 명의 사단장이나 연대장 그리고 대대장들이 침공 대비를 위한 워 게임(war game) 연습을 위해서 임지를 떠나 있었다.

 

6월 14일 연합군의 함포 사격으로 독일 SS소장 프리츠 비트가 전사했다.

8월 2일에는 노르망디 생로 남방 지구 부근에서 디트리히 크라이스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8월 8일에는 프랑스 생트 부근에서 교전 중 타이거 전차 007호가 격파당해 제2중대장 미하엘 비트만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