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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_秘事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chocohuh 2013. 2. 20. 08:10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일본측 작전명 MI 작전)은 1942년 6월 5일부터 7일간에 걸쳐 이루어진 태평양 중부의 미드웨이섬 근해에서 벌어진 일본과 미국의 해전이다.

 

이 전투는 레이테 해전과 함께 해전 역사상 가장 복잡한 전개를 보이면서도 승패의 갈림이 너무나 명확한 것으로 유명하다. 날짜변경선 부근에서 사흘에 걸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함재기들이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측 전함의 함포 전투는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항공모함 함재기들의 어뢰 공격과 급강하 폭격, 전투기들의 어지러운 공중전만으로 승패가 갈렸다.

이 해전의 결과 미군은 항공모함 1척을 잃었고,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게 되어 태평양에서 일본이 누리던 항모 우위는 완벽하게 상실되었다.

 

 

1. 미해군의 중추인 항공모함 부대를 없애라.

 

일본해군은 대미작전의 기본방침으로 수비격퇴작전을 채용하고 있었지만 연합함대의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은 이전부터 이 방침에 회의를 가져 독자적인 대미작전의 구상으로서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생각했다. 야마모토 대장은 우선적으로 국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인 일본이 수비책을 펼치더라도 시기와 방면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나올 미국에겐 승산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단기간에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상대국의 전의를 상실시키는 방법이야말로 승기를 바랄 수 있다고 판단한 야마모토는 태평양전쟁의 개전 초기부터 미군의 항모부대가 일본을 항공 공격할 경우 국내에 물질적인 타격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타격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던 점도 생각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미국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선 적극적인 공세가 필요하다고 보았었다.

 

야마모토 대장의 생각대로, 1942년부터 미군 항공모함 부대가 하와이를 출격하자 이번엔 일본군이 미군의 기습과 대처에 고민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마셜제도, 웨이크 섬, 일본 본토 모두 경계태세에 들어가게 되어 전력의 추가에 여유가 없어 초계도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미군의 기습은 기량이 낮았기 때문에 피해는 적었지만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작전실시에 상당한 애로를 안게 되었다. 또 연합함대는 실론 섬 공략작전 안이 채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함대 참모들은 제2단계 작전의 수행까지 남겨진 4주간에 대체작전 계획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했다.

 

연합함대 참모들과 지휘부는 전쟁의 조기종결에 공헌할만한 작전이 떠오르지 않았으며, 또 당시 내려진 해군의 작전 안이 육군부대를 이용함에 있어 반발에 부딪친 전력도 있었고 덧붙여 수비적 전술채택도 곤란함을 느꼈기에 해상전력만으로 공세작전을 펴는 응급작전을 추진해버려 쿠로시마 카메토(黑島龜人) 연합함대 선임참모를 중심으로 작전이 입안되었다.

 

이 때 채택되어진 작전이 바로 <미드웨이 작전>으로, 이 작전은 미군 항공모함의 포착괴멸을 주안점으로 두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미드웨이 섬을 공략해 미군함대, 특히 항공모함 부대를 유인해 낼 필요가 있었다. 일본군이 미군의 요새인 미드웨이 섬을 점령할 경우 군사적이나 정치적으로도 미군이 이를 전력으로 탈취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미군 항모부대도 출격할 확률이 높다고 일본해군은 계산했다. 하지만 일본해군은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더라도 지키기엔 매우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연합함대의 목표는 미군 항모부대의 격파가 우선이어서, 미드웨이 섬의 점령 후엔 다른 방면으로 공세를 걸어 미군에게 미드웨이를 탈환할 여유를 주지만 않는다면 10월에 하와이를 공략하기 전까지 미드웨이 섬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미드웨이 섬의 점령은 직접적인 하와이 공략작전의 준비가 아니라, 항공모함의 포착궤멸이란 제1의 목표를 우선시했기에 하와이 공략작전에 있어서는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역할로 한정된 작전이었다. 하지만 대본영과 연합함대 사령부는 이 작전을 놓고 격렬히 대립했다.

 

쿠로시마 참모는 야마모토 사령관의 진주만 공략당시처럼 사령관직 사임이라는 각오로 군령부와 절충했지만 이 논법은 이미 효과가 다해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야마모토 사령관은 공업력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인 일본이 미국과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이라도 미드웨이의 공략 후, 하와이를 점령해 미국 국민들의 전의 상실을 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진주만 공습당시 놓쳐버린 미군 항모부대를 유인한 뒤 결전을 벌여 이를 궤멸하는 것이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것이어서 군령부와의 협상은 어렵다고 판단한 와타나베 참모는 이토 차장에게 직접 연합함대의 미드웨이 작전 안을 설명하고 야마모토 장관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하여 이토 차장은 논의를 주최하여 FS작전에 수정을 가해, 연합함대의 작전 안을 채용하는 것을 4월 5일로 내정한 후 미드웨이 제도의 점령 및 미군 항모부대의 포착궤멸을 노리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후에 알류산 열도 서부의 요새지 공략작전을 미드웨이 작전에 추가할 것을 해군부가 제안하여 연합함대도 이에 동의해 미드웨이 작전의 전체면모가 구축되었다.

 

알류산 열도가 포함된 것은 이전의 도상연습에서 미군의 대형폭격기가 알류산 제도에서 날아와 도쿄를 폭격하는 기습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어서 해군부와 연함함대가 이 방면에 관심이 높았던 것도 계획이 추가된 이유였었다.

 

1942년 5월 5일에 해군부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육군과 협력해 AF 및 AO 서부요새를 공략한다.>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의해 하와이 공략의 전초전으로서, 야마모토 사령관, 우가키 마토메 참모장의 지휘 하에 함정 약 350척, 항공기 약 1천기, 총 병력 10만이라는 대함대가 편성되게 되었다. 당초 산호해 해전의 보고를 전해들은 시점에서 해군 수뇌부는 별 탈이 없던 즈이가쿠(瑞鶴)를 미드웨이에, 대파된 쇼가쿠(翔鶴)를 수리 후 알류산 작전에 투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쇼가쿠(翔鶴)의 수리에는 3개월을 소요했고, 즈이가쿠도 조종사들의 소모가 극심하여 트랙 섬에 정박한 후 보충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어 미드웨이 작전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의해 일본측의 항공모함 숫자는 줄어들게 되었지만 그래도 숫자상으로는 미군보다 우세였다.

 

그런 와중에 미군이 두리틀 공습작전을 4월 18일에 실시하자 일본군부는 일본의 수도상공이 미군에게 뚫렸다는 큰 충격에 빠졌다.

두리틀 공습의 피해는 적었지만 미군이 항속거리가 긴 B-25로 폭격시 대응책이 전무했던 것에 대해 일본국민들 사이에선 불안감이 높아져갔고 육해군의 군부엔 적기가 오는 것도 몰랐다는 비난의 투서가 쇄도했다.

 

야마모토 사령관도 항의서한을 받고난 후, 미해군에 의한 공습의 위험성에 대해 이전부터 인식해오던 차라, 두리틀 공습의 효과는 미드웨이 작전의 필요성을 한층 더 통감하고 예정대로 추진하기 위한 박차를 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항공모함 <호넷>에서 발진하는 두리틀 폭격대의 B-25 폭격기, 미군의 항공모함 전력은 일본해군의 작전에 있어 매우 성가신 존재였다.

 

 

2. 미군의 암호해독과 니미츠 대장의 대비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습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미드웨이 작전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2년 3월 4일에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는 오아후 섬에 일본군의 대형항공기(비행정) 2기가 폭격을 실시하고 11일에 미드웨이에 신형비행정 1기가 접근하여 격추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군의 공세징후가 보인다고 판단했다.

 

일본해군의 주력부대는 남방전선에서 일본본토로 돌아가던 중이어서 다음 공격목표는 태평양이 되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들이 하와이, 미드웨이, 미국 본토 서해안 중 어디로 향할지 몰랐기에 미군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었다. 진주만 공습직전에 변경된 일본군의 암호는 미국이 첩보부에 의해 JN-25라 불리웠다.

 

4월에 미군 정보대는 일본군의 암호를 단편적으로 해독하여 일본군이 태평양 정면에서 새로운 작전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당시 시점에서 시간, 장소는 불분명했다. 5월에 접어들자 암호해독을 추진하기 위한 자료들이 늘어나면서 검토를 반복한 결과, 작전계획의 전체적인 모습이 명확해지자 해독문 속에 나오는 <AF>라는 지역이 주 공격대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AF가 어디인지는 여전히 불명이었다. 그렇지만 미군은 A, AO, AOB가 알류산 방면이란 것을 명확히 판단했다.

 

워싱턴은 공격목표를 하와이, 육군항공부대에선 샌프란시스코를 생각했으며 또 알래스카, 미국본토 서해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정적인 정보가 없고, 5월 중순이 다되어가도 미군은 일본군의 공격목표 및 시기를 여전히 알지 못했지만 니미츠 대장은 미드웨이 방면이 목표가 되리란 것을 각종 정보와 전력적인 관점에서 예상했다.

 

하와이의 정보관계자들도 다음엔 미드웨이가 목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5월 11일에 첩보부의 청년장교이던 재스퍼 홈즈의 제안에 의해 결정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한가지 계략이 추진되었다. 홈즈는 미드웨이 섬의 기지사령관에게 하와이 쪽을 향하여 <해수여과장치의 고장으로 마실 물이 부족해졌다>라는 긴급전문을 영어로 송신하라고 제안했다.

 

그 결과, 일본의 웨이크 섬 수비대가 발신한 암호문에 <AF는 식수부족이란 문제가 있어 공격계획에선 이를 고려하라>라는 내용이 포착되었다. 미드웨이 섬 및 알류산 방면에서 일본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 확신한 미군은 5월 26일에 하와이의 정보부가 암호해독에 성공하여 각 부대의 병력, 지휘관, 예정항로, 공격시기 등을 확실히 알아냈다.

 

니미츠 대장은 이 결과를 미드웨이의 부대에 전했지만 워싱턴에선 이 정보를 아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혹 이것이 일본군의 위장정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자도 있었다. 일본군이 샌프란시스코를 공격하려면 육상전력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다고 니미츠 대장은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계속 이어졌지만 니미츠 대장은 자신의 주장에 근거하여 작전계획을 추진했다. 5월 26일 이후엔 일본군이 암호를 변경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해독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하와이 제도는 미국에게 있어 태평양 방면의 방위 및 진공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는데 특히 미드웨이는 하와이 제도의 전초기지로 중요한 전략거점이었다.

 

니미츠 대장은 일본군의 공격 위험성이 높은 미드웨이를 5월 3일에 시찰하고는 미드웨이 섬의 지휘관인 시메드 해군중령과 방어의 강화에 대해 논의했다. 시메드 중령은 병기와 인원을 확충한다면 방어는 가능하다는 의견을 표시해 니미츠 대장은 요청대로 보강을 실시해 섬의 방비를 강화하기로 했다.

 

미드웨이에는 항공기가 약 120기, 인원은 3,027명이 체류하고 있었다. 육상부대는 사기가 높았지만 항공부대는 급히 소집되어 온 부대가 많고 정비병의 증원이 없었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스스로 기체를 정비하고 연료보급을 실시했기 때문에 완전하게 보충된 부대라곤 볼 수 없었다.

 

일본해군의 미드웨이 공격은 6월 3일에서 5일까지 실시되어질 예정이라는 것을 하와이의 정보대는 사전에 탐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양동작전으로서 항공모함 류조(龍駿), 준요(準鷹)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알류산 방면으로 향하게 하여 앳튜 섬, 키스카 섬 등을 점령하고 더치하버 등을 공습폭격 할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사전에 미군에겐 양동작전이란 것이 파악되어 있었다.

 

니미츠 대장은 이 정보에 근거하여 요격작전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병력이 많아 니미츠 대장이 사용가능한 전력을 모두 투입해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알류산, 알래스카 방면엔 최소한의 전력만 보내고, 주력부대를 미드웨이로 집중했다.

 

이 작전계획은 5월 28일에 <태평양함대사령관 작전계획 제29-42호>로 발령되었다. 작전에선 먼저 적을 원거리에서 발견 포착해 기습을 저지하고 두 번째로 적 항공모함을 격파한 후 미드웨이 공습을 방지, 세 번째로 잠수함을 이용해 초계와 공격을 실시한 후 네 번째로 미드웨이 수비대가 이 섬을 사수하는 것으로 짜였다. 하지만 본 작전에서 니미츠 대장은 2척의 항공모함 밖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17 임무부대의 플래처 소장은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의 포트 모레스비 공략을 막고 일본항공모함에게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자신도 주력항모인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도 중파되는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요크타운>은 명중탄이 1발 뿐이었지만 배연통로를 파괴당하는 중대한 피해를 입어 제대로 된 속력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2발의 근접탄에 의해 연료탱크의 용접이 벌어져 연료가 계속 새어나왔다. 특히 산호해에서 유조함인 <네오쇼>를 잃었기 때문에 동료함의 예인과 인근 선박으로부터 기름동냥이 없었다면 이 연료누출로 인해 <요크타운>은 하마터면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이 될 뻔했다.

 

니미츠 대장은 기습에 대비해 태평양 서부에서 플래처 소장의 제17 임무부대를 하와이로 불러들였다. 도중에 몇 번이나 연료를 구걸한 <요크타운>은 5월 27일에 진주만에 도착하여 바로 도크에 올려져 경이적인 수리가 진행되었다. 연료탱크의 파손은 미본토의 브래머튼 항에 보내어 장기적인 수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이 많았지만 하와이에서는 72시간 동안 불철주야로 작업이 진행되어 다시 전투함으로의 기능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5월 28일에 제16 임무부대의 <엔터프라이즈>, <호넷>이 진주만을 출격했다. 그리고 <요크타운>은 5월 30일에 도크에서 내려졌다.

출항시 <요크타운>엔 정비병이 계속 올라타 항해 중에도 수리를 이어나갔다. 또 산호해에서 피해를 입었던 <요크타운>의 비행대는 <사라토가>의 비행대를 대체하는 형식으로 실었다.

 

니미츠 대장은 이 전력이라면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것은 3척의 항공모함을 합류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니미츠 대장이 준비했던 항공모함이 스플런스 소장의 제16임무부대의 <엔터프라이즈>, <호넷>의 2척만이었을 경우 싸움의 형세는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6월 2일에 플래처 소장의 제17 임무부대와 스플런스 소장의 제16 임무부대가 미드웨이 섬 북동쪽에서 합류했다. 이 때 합류한 기동부대의 지휘는 플래처 소장이 맡게 되었다.

 

진주만의 도크에서 수리가 진행되고 있는 <요크타운>은, 사실 3개월을 요하는 큰 손상을 입은 요크타운이었지만 진주만의 정비병들이 3일간 불철주야로 작업한 탓에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다.

 

 

3. 미드웨이 해전, 드디어 시작되다.

 

미드웨이 작전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력은 제1항모기동부대(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의 항공모함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및 전함 하루나(棒名), 키리시마(霧島),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 급유함 5척이 중추가 되었다.

 

동시에 알류산 열도를 공략하는 제5함대(사령관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도 항모 류조(龍駿), 준요(準鷹) 2척과 순양함 3척, 구축함 5척으로 꾸려졌다. 그리고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의 주력함대와 상륙부대까지 포함하면 약150척의 함선에 상륙병력 5,800명이라는 대규모의 동원이 이루어졌다.

 

1942년 5월 27일 오전 5시에 일본해군의 나구모 중장이 이끄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 2 항공전대(히류, 소류)를 중심으로 한 나구모 기동부대(제1기동함대)는 히로시마의 하시라지마(柱島)를 출발하였는데, 야마모토 사령관의 주력부대도 이틀 후 이 섬에서 출격했다.

 

나구모 기동부대는 6월 5일 1시에 작전해역에 도착했다. 1시 30분에 미드웨이를 향하여 제 1차 공격대가 항모 각4척에서 호위의 제로센 9기, 99식 함상폭격기가 아카기, 카가에서 18기씩, 97식 함상공격기가 히류, 소류에서 각 18기씩 하여 총 108기가 출격했다.

 

그리고 아카기, 카가, 중순양함 도네(利根)、치쿠마(筑摩)에서 2기, 전함 하루나(榛名)에서 1기씩 수색기가 발진했다. 그 중 도네의 수색기는 발진이 30분 정도 지연되었다. 제 1차 공격대의 출격에서 얼마 되지않아 미해군 함대의 출현에 대비하여 급강하 폭격기에는 일반적인 폭탄, 공격기에는 어뢰를 탑재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제 2차 공격대의 출격준비가 시작되었다.

 

나구모 기동부대에서 발진한 제1차 공격대의 폭격으로 미드웨이 섬의 미해군 기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군측이 암호해독에 의해 반격태세를 갖추고 정찰기와 레이더로 나구모 기동부대와 기지로 내습하는 공격대를 포착하여 기습을 방지하는 것에 성공하여 F2A 버팔로 전투기 20기, F4F 와일드캣 전투기 7기 등의 반격기가 날아올랐다.

 

그 외의 항공기는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였는데 미드웨이 기지의 전투기 부대 대부분은 제1차 공격대의 제로센에 막혀 격추되어 요격엔 실패했다. 하지만 이같은 미군의 대처로 인해 제1차 공격대는 미드웨이 기지에 주둔 중이던 미군 항공기의 격파에는 실패했다.

 

공격의 성과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한 제1차 공격대의 편대장인 토모나가 죠이치(友永丈市)대위는 나구모 기동부대의 기함인 아카기에 대해 카와 - 카와 -카와 - (제2차 공격대를 요한다)라는 전문을 타전하여 제1차공격대의 공격이 충분하지 못했음을 알렸다. 이에 아카기의 사령부는 정찰기로부터 적함 발견의 보고가 없자 다시 미드웨이 섬으로의 공격 필요성을 느꼈다.

 

4시 15분에 사령부는 제2차공격대의 급강하폭격기, 공격기에 모두 육상공격용 폭탄을 달도록 지시하고는 미드웨이 섬을 향한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4시 40분에는 미드웨이 기지에서 미군의 공격기가 차례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미육군의 B-26 폭격기 4기(어뢰장착)와 해군의 TBF 어밴저 뇌격기 6기, 해병대의 SBD 돈틀레스 급강하폭격기 16기와 SB2U 빈디케이터 폭격기 11기, 육군의 B-17E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16기도 각각 나구모 기동부대를 향해 반격을 실시했다.

 

하지만 제로센의 요격과 일본함대의 회피운동으로 인해 미군 항공기들은 직접적인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나구모 기동부대에 대해 판단에 혼란을 주는 효과를 냈다. 같은 시각에 미해군 기동부대의 지휘관이던 플래처 소장은 미드웨이 기지항공대의 활약으로 일본보다 앞서 나구모 기동부대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공격타이밍을 노려 스플런스 소장은 4시가 지나자 지휘하의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에서 F4F 와일드캣 전투기 10기, SBD 돈틀레스 폭격기 33기, TBD 디바스테이터 뇌격기 14기를 발진시키고 이어서 <호넷>에서 F4F 전투기 10기, SBD 폭격기 35기, TBD 뇌격기 15기를 포함해 합계 117기의 거의 모든 기체를 발진시켰다.

 

그러나 5시 40분쯤에 일본군의 정찰기가 함대상공에 나타났다. 아직 일본측이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하지 못한 이상, 발진한 비행대를 조금씩 내 보내는 것은 전술적으로 맞지 않다고 스플런스 소장은 생각하여 발진을 끝낸 비행대에 대해 바로 공격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또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4척의 소재를 확인한 플래처 소장도 경계를 위해 내 보낸 정찰기의 수요을 마친 후, 6시 경에 항모 <요크타운>에서 F4F 전투기 6기, SBD 폭격기 17기, TBD 뇌격기 12기를 포함한 총 35기를 발진시켰다. 결과적으로 이 스플런스 소장의 결단은 미군 승리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요크타운 공격대만으로는 전투기와 폭격기의 숫자가 적었다. 이것은 한달전에 산호해 해전의 교훈으로 모함을 지키는 전투기의 숫자를 늘렸기 때문에 SBD를 장비한 정찰기대를 호위를 위해 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4. 일본해군 정규항공모함, 미드웨이의 바다 속으로 사라지다.

 

한편 중순양함 도네(利根)에서 뒤늦게 발진한 4호 정찰기에서 <적으로 보이는 10척 출현, 미드웨이에서 방위 10도 240리 지점> 이라는 타전을 해왔다. 그리고 부근의 기상정보까지 재차 타전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나구모 기동부대는 <함종을 알려달라>라고 다시 되물었다.

 

5시가 되자 도네 4호 정찰기에서는 <적 병력은 순양함 5척, 구축함 5척임>이라는 보고를 해와 위급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5시 반에 다시 <적 후방에 항공모함으로 보이는 1척이 대동>이라는 타전이 오자 나구모 중장 등 기동부대의 수뇌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정찰기의 보고에 의하면 적까지의 거리는 아직 멀었다고(실제론 가까이 와 있었다)생각한 나구모 중장은 공격무장을 전환하기로 하여 급강하폭격기, 공격기에 모두 육상용 폭탄으로 탑재중이던 제2차공격대에게 다시 급강하 폭격기는 통상 폭탄, 공격기엔 어뢰로 재전환을 명령했다. 이에 제2차공격대의 정비병들은 다시 무장을 전환하느라 소란이 벌어졌다.

 

제2항공전대를 이끌었던 야마구치 다몬(山口多聞) 소장은 이 혼란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일초일각이 급하다고 생각한 야마구치 소장은 지상 폭격용의 폭탄이라도 미해군 항공모함의 갑판을 파괴시킬 수 있어 적기가 뜨지 못하게 만든 후 아군기를 발진시켜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야마구치 소장은 신호를 보내 <바로 항공기를 출격시키길 바람>이라는 진언을 나구모 중장에게 알렸지만 이것은 각하당하고 말았다. 이 때 갑판 위에는 무장전환이 끝난 제2차공격대가 늘어서 있었지만 다시 격납고에 집어넣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욱이 5시 30분에 이르자 토모나가 편대장이 이끌던 제 1차 공격대가 기동부대 상공으로 돌아왔다.

 

제1차 공격대의 기체들은 연료가 거의 바닥나 있었고 조종사 및 기체가 피탄으로 인해 격추된 기체도 있었다. 하지만 제2차공격대가 아직 갑판 위에 있고 무장전환으로 소란스럽던터라 나구모 기동부대의 항공모함에는 제1차공격대의 수용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격납고 내부는 더욱 혼란스러워 내부엔 폭탄과 어뢰가 난잡하게 나뒹구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6시 20분에 <호넷>,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미군 공격대의 뇌격기 29기가 나구모 기동부대의 상공에 출현했다. 하지만 대공포화와 상공에 떠 있던 제1차공격대에 의해 25기가 격추되었다. 또 7시 10분경엔 <요크타운>의 뇌격기 12기가 왔지만 역시 10기가 격추당했다. 앞서 출격한 <엔터프라이즈>의 폭격기 편대는 일본의 기동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여 예상해역 주변을 수색했다.

 

그 때 일본구축함인 아라시(嵐)가 눈에 띄였는데, 이 구축함이 일본 항모부대로 향한다고 판단한 미군은 아라시의 진로를 수색한 결과 일본의 기동부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호넷>의 전투기대, 폭격기대는 기동부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는데 일부는 연료부족으로 해상에 추락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대도 연료부족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폭격기대도 되돌아오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7시 23분에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클라렌스 맥클러스키가 이끄는 <요크타운>의 SBD 돈틀레스 폭격기대는 전장에 도착해 <엔터프라이즈>의 폭격기대와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일본해군은 앞서 뇌격기 편대에 맞서느라 전투기들이 대부분 저공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습격해 온 뇌격기의 반격과 무장전환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급강하해오는 적기를 발견하긴 했지만 이미 한 발 늦고 말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폭격기 편대는 카가(加賀)에 4발, 나구모 중장의 기함인 아카기(赤城)에 2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

 

그리고 <요크타운>폭격대는 소류(蒼龍)에 3발의 폭탄을 명중시켰다. 순식간에 일본해군의 항공모함 3척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작 6분밖에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된 6분간이기도 했다. 카가는 첫 명중탄에 의해 함교 옆에 있던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함교에 있던 함장인 오카다 지사쿠 대좌이하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했다.

 

10시 30분경에 함장을 대신하여 진화작업을 지시하던 카가의 비행장(飛行長)은 총 퇴함명령을 내려 피난한 직후 15시 26분에 카가는 800명의 사망자를 낸 후 침몰하고 말았다. 소류와 아카기는 폭탄의 피해는 복구가능한 것이었지만 피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가 무장전환중이던 격납고 내부에 난잡하게 널려있던 폭탄, 어뢰, 항공연료 등에 인화되어 차례로 폭발을 일으켜 대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데미지 컨트롤이 나빴던 두 항공모함은 결국 화재진화에 실패하면서 복구가 불가능해져버리고 말았다. 소류는 16시 10분에 퇴함명령이 내려졌는데 야나기모토 류사쿠 함장은 불타는 함교에서 <소류 만세!>를 외치며 718명의 수병들과 함께 침몰하는 소류와 운명을 같이했다.

 

아카기는 당시 폭탄 2발이 명중해 1발이 근접탄으로 터지고 또 1발은 중부 엘리베이터 부근에 명중하면서 비행갑판을 뚫고 들어가 격납고내에서 폭발해 후부갑판이 파열되고 키도 파괴되었다. 아카기의 격납고 내에는 함상공격기, 함상폭격기 모두가 공격준비로 인해 연료가 가득한 태세로 어뢰, 폭탄장착이 끝난 상태였는데 중앙부에 명중한 폭탄에 의해 이들의 연쇄폭발은 아카기에게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원래가 순양전함이었던 아카기라 금방 침몰하지 않고 잠시동안 타면서 원을 그리며 12시간을 넘겨서야 기관부의 화재로 인해 전소했다. 오후 7시 20분에 아카기의 함장인 아오키 신지로(靑木秦二郞)대좌는 퇴함명령을 지시한 후 자침처분을 내리고 경순양함 나가라(長良)로 나구모 중장과 함께 피신했다. 아카기는 수병 221명이 사망했다.

 

아카기는 더 이상 함으로서의 운용이 어렵다고 보여졌지만 기함 야마토(大和)에 탑승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에게서 <아카기의 처분은 기다려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야마모토 사령관이 아카기의 함장시절 근무했던 추억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수리 후 적 공습의 대응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파된 아카기를 예인해 가는 것은 적기에 노출된 아군함대의 피해확대를 초래하기 때문에 도로 포획될 것을 우려한 야마모토 사령관은 결국 폐함처분 명령을 내렸다. 결국 진주만 공습의 주역이던 아카기는 제4구축대의 아라시(嵐), 하기카제(萩風), 노와키(野分), 마이카제(舞風)에서 각1발씩 발사된 4기의 어뢰 중 2, 3발이 명중해 1942년 6월 6일 오전 2시에 자침처분 되었다.

 

나구모 기동함대의 기함이기도 했던 아카기, 아카기의 상실로 나구모 중장은 기함에서 달아난 장군이라 하여 후에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것은 다른 세 척의 항공모함(카가, 소류, 히류)의 사령관들이 함과 함께 운명을 달리한 것이 비해 나구모 중장은 이들을 모두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살아남은 것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카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항공모함들 중 가장 많은 폭탄을 맞았다. 소류의 야나기모토 함장은 끝까지 퇴함을 거부하고 살아남은 부하들만 대피시킨 후 자신은 함과 운명을 달리했다.

 

 

5. 히류(飛龍)의 분전과 미드웨이 해전의 결말

 

스콜하의 구름아래 뇌격기의 회피를 위해 다른 세 척의 항공모함들과 약간 떨어져 있던 일본해군 항공모함 히류(飛龍)는 재액을 피했다. 7시 50분에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나구모 중장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즉시 공격을 결의해 모든 기체의 발진을 명령했다.

 

그리고 제1차공격대로서 제로센 6기, 99식 함상폭격기 18기의 합계 24기를 출격시켰다.(급강하 폭격기대) 도중에 이 급강하폭격기대는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던 미군기 편대를 발견하고는 미해군함대 상공까지 추적했다. 급강하폭격기대는 9시부터 공격을 개시했는데 도중에 고바야시 편대장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9시 10분에 250kg 폭탄 3발을 미군항모 <요크타운>에 명중시켜 항해불능 상태에 빠트렸다. 하지만 <요크타운>은 11시가 경과하자 폭격에 의한 화재를 진압하여 항해가능 상태로 복구되었다. 이어서 히류는 10시 반에 제로센 6기, 97식 함상공격기 10기를 토모나가 대위에게 주어 제2차공격대(뇌격기대) 16기를 출격시켰다.

 

제1차공격대를 수용하기 직전에 항공모함 소류(蒼龍)에서 날아올랐던 스이세이(彗星-이 기체는 폭탄고에 카메라를 단 시제 정찰기 타입이었다)가 8시 30분경에 미군 기동부대를 발견했지만 무선기의 고장으로 인해 보고되지 못했다. 소류 상공에 돌아왔을 땐 이미 모함은 화염에 휩싸인 상태여서 이 정찰기는 10시 45분에 히류에 착함해 야마구치 소장에게 미해군항모 3척의 위치를 보고했다.

 

11시 30분에 뇌격기대는 미해군 함대를 발견했지만 이것은 복구작업 중이던 <요크타운>이었다. 불길을 진압하고 전투항해중인 미군항모를 발견한 토모나가 대위는 <요크타운>을 손상되지 아니한 다른 항공모함으로 판단하여 공격했다. 뇌격기대는 약 절반이 격추당하면서도 어뢰 2발을 명중시켜 <요크타운>을 대파시켰다.

 

야마구치 소장은 앞선 공격을 합해 합계 2척의 미군 항공모함을 대파시켰다고 판단하여 같은 항공모함을 두 번 공격했으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 플래처 소장은 <요크타운>이 공격을 받기 이전에 정찰기에서 히류발견의 보고를 받았었다. 하지만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어서 발견되지 못한 상태였다.

 

야마구치 소장은 귀환한 공격대의 피해가 심한 것을 보고는 주간 공격을 단념하고 12시 30분경에 나구모 중장에게 박모(薄暮-땅거미가 지는 어둑해지는 저녁)공격으로 적 항모를 괴멸시키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제3차공격대(14기)가 박모공격을 기다리는 사이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대가 기습을 해왔다.

 

14시 30분에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SBD 돈틀레스 폭격기가 날아들면서 히류는 3발의 폭탄을 맞고는 불타올라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항해불능이 된 히류는 인근의 구축함에 의해 진화작업이 진행되었지만 폭발로 대파되어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야마구치 소장은 나구모 중장에게 총 퇴함의 보고를 했다.

 

결국 야마구치 소장은 퇴함을 권유하는 이토 참모장에게 소장 군기를 건네고는 가쿠 토메오(加來止男)함장과 함께 아군 구축함의 어뢰에 의해 자침처분되는 히류와 운명을 같이 했다. 히류의 공격대에 의해 <요크타운>은 심각한 피해를 두 번이나 입었다. 응급수리로 침몰은 면했지만 <요크타운>의 전투불능을 판단한 플래처 소장은 철수를 결정하여 <요크타운>을 예인하면서 진주만으로 향했다.

 

결국 일본항모들 중 가장 용맹스러웠던 이 항공모함은 태평양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지휘권을 이어받은 스플런스 소장의 제16임무부대도 일본함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동쪽으로 후퇴했다. 다음날인 7일 새벽에 제 16 임무부대는 미드웨이의 방위와 일본함대의 추격을 위해 서쪽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오전 3시경에 함재기가 후퇴 중이던 일본해군 중순양함 미쿠마(三猥)와 모가미(最上)를 발견했다.

 

이것은 일본해군 지원대의 제7전대(중순양함 미쿠마, 모가미, 스즈야, 쿠마노)로, 상륙을 위한 수송선단의 호위함으로서 경계임무에 종사중이다가 나구모 기동부대의 괴멸에 의해 새로이 미드웨이 기지포격의 명령을 받고는 전속력으로 전진 중이었다.

 

그 후 제7전대가 미드웨이까지 거리가 있음을 알고는 야전(夜戰)중지에 앞서 야마모토 사령관은 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7전대는 돌아가기 앞서 미해군 잠수함 <탠버>를 발견하고는 긴급회피를 하다가 서로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미쿠마와 충돌한 모가미는 포탑 앞부분의 함수가 절단되어 속력이 10노트로 추락했다. 제7전대 사령관인 쿠리타 타케오(栗田健男) 중장은 파손된 모가미의 호위에 미쿠마와 구축함 2척을 붙인 후 잔존함을 거느리고 주력부대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다. 뒤에 남겨진 모가미, 미쿠마, 구축함 2척은 오전 6시 40분에 <엔터프라이즈>, <호넷>의 공격대가 기습해왔다. 모가미를 호위하던 미쿠마는 집중공격을 받아 대파염상(大破炎上)하면서 10시 30분경에 침몰하고 말았다. 또 모가미 및 구축함 아사시오(朝潮), 아라시오(荒潮)도 피해를 입었다.

 

다음날인 8시를 경과하여 모가미는 응급수리 후 속력 20노트를 회복하여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면서 전장을 이탈했다. 전함 야마토(大和)를 비롯한 일본해군 주력부대는 야전(夜戰)을 기획하여 동쪽으로 전진했지만 히류의 상실로 인해 작전을 재고하여 21시에 야전을 중지하고 0시에 작전 전체의 중지를 결정했다. 나구모 기동부대의 잔존함과 제 7전대를 포함한 제 2함대는 결국 미드웨이 해역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미쿠마는 미군기의 집중공격을 받고는 대파되어 침몰하고 말았다. 다른 설로는 아군어뢰로 자침시켰다는 말도 있다.

 

한편 <요크타운>을 예인하면서 진주만으로 향하던 미군함대에 <요크타운>의 격침임무를 부여받고 접근중이던 일본해군의 잠수함 伊-168은 <요크타운>을 향해 어뢰 4발을 발사했다. 이에 2발의 어뢰가 명중하면서 일본해군의 침공을 저지한 <요크타운>도 태평양의 바닷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요크타운>과 동행중이던 미군 구축함 <해먼>도 어뢰 1발을 맞고는 같이 침몰하고 말았다. 6월 13일에 제16임무부대의 <엔터프라이즈>, <호넷>은 함재기의 손실이 있었지만 무사히 진주만으로 돌아왔다.

 

 

6. 미드웨이 해전 후 일본과 미국의 대응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은 미드웨이 해전 전에 <일본은 개전으로부터 반년, 아님 1년은 우세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 이후엔 아메리카의 국력이 일본을 압도할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국력에 압도당하기 이전에 전략, 전술, 용병에 의해 약 2배의 전력을 가졌으면서도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모기동부대가 괴멸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미드웨이의 패전 후, 일본에선 작전에 관한 연구회는 열리지 않았으며 패전의 책임자가 처벌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군령부는 이 패배에 대해 국민은 물론 참모본부와 도조 히데키 수상겸 육군상에게 까지 은폐했다. 수상부대의 전력에선 우위를 확보했다고 말하면서도 연합함대의 핵심전력을 일거에 상실한 것에 대해 고급 지휘관들은 곤혹해 마지않았다.

 

항공기지의 위대한 위력이란 교훈에서 라바울에서 1,000km나 떨어진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만들고 기자탈환 작전이 이루어졌는데, 개전에서 6개월에 해당하는 미드웨이의 피해 이후, 이 해에 벌어진 제1차 솔로몬 해전과 남태평양 해전, 이듬 해 초에 벌어진 렌넬 섬 해전 등 몇 가지 국지적인 전투에선 일본이 승리했지만 과달카날, 뉴기니아, 마킨, 타라와를 둘러 싼 전쟁에 열세의 그림자가 스며들면서 1년이 채 경과하지 못한 시점에서 일본은 서서히 밀리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1943년 말에 일본군의 세력은 추락하기 시작하여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고도 역사가들은 말한다.

 

일본해군 기동부대의 주력이었던 제1, 제2항공전대가 괴멸되었기 때문에 새로이 쇼가쿠(翔鶴), 즈이가쿠(瑞鶴)를 중심으로 기동부대의 재건이 꾀해졌지만 중일전쟁 이래의 베테랑이던 1, 2항공전대의 공백을 경험부족에다 미숙한 병력으로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드웨이에서 각 항공모함의 베테랑 조종사의 상실은 반격을 실시한 히류(飛龍)를 비롯해 거의 파멸적인 수준이어서 정규항모 4척을 잃고 숙련된 항공전력의 공백으로 인해 일본은 이후 미군 항모기동부대에 대해 숫적 열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어 본토의 2선급 전력이던 경항모와 개장항모들까지 주력으로 투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또 미드웨이 해전에서 상실한 항공전력을 메꾸기 위해 건조중이던 야마토(大和)형 전함의 3번함을 급히 장갑항공모함으로 개장하기로 결정되어 항공모함 시나노(信濃)로 만들었다. 전함 이세(伊勢), 휴가(日向)는 항공전함으로 개장되었다. 그리고 상선을 개조하여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히류를 토대로 한 운류(雲龍)형 항공모함 15척의 추가건조가 계획되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서 과달카날 섬을 둘러 싼 소모전 등으로 인해 숙련된 조종사들을 잃으면서 신참 조종사의 훈련, 보충은 제대로 추가되지 못해 이후 일본기동부대는 규모적으로는 미드웨이 해전때보다 상회하게 되었지만 질적으로는 하락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미군의 전력은 양과 질에서도 건실히 보충되어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은 실질적인 태평양에서의 승리 기회를 날린 셈이었다.

 

작전의 혼란에 의해 단기결전의 조기화평파는 발언력을 잃고 말아 군령부, 대본영은 장기전을 주체로 하여 전략을 새로 짤 수밖에 없었다. 또 대본영은 미드웨이 해전의 전과를 <항모 호넷, 엔터프라이즈가 격침, 아군 피해는 항모 한 척, 중순양함 1척 침몰, 항모 1척 대파>라고 국민들에게 발표하여 사기의 하락을 막으려 했는데, 이것이 후에는 국민(천황에게도)에 대해 왜곡보도를 실시하는 계기가 되어 종전까지 이런 허위보도가 계속되었다.

 

이것은 전과를 정확히 기록했던 개전 초기에 비해 조종사들의 경험부족에 의해 해군 상부의 냉정한 판단력의 결여, 그리고 기대감과 동정에서 조종사들의 과대한 전과보고를 그대로 믿은 점이 크다. 하지만 이런 과대전과보고는 일본 뿐만이 아니라 미군에게서도 종종 벌어졌었다.

 

한편 미군은, 숫자가 적고 혼자서 작전활동을 하던 항공모함을 보충하기 위해 개전 전부터 추진해 온 <에섹스>급 항공모함의 정비에 나서 항모기동부대로서 집중운용하는데 매달렸다. 이에 전쟁말기에 미군은 마리아나 해전 및 레이테 해전 등에선 20척이 넘는 항공모함을 거느린 대함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에서 승리하고 하와이를 점령했어도 국력의 차가 확실한 바탕때문에 결국 전쟁 전체의 상황을 역전시키기엔 무리였다는 주장이 현재의 대세이다. 태평양전선에서 여유를 가지게 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막 장비가 끝난 M4 셔먼 중전차 300량을 회수하여 다른 무기와 함께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보내 9월 3일에 수에즈에 도달케 했다.

 

10월 23일에 영국군은 엘 알라메인에서 반격을 개시하여 롬멜 전차군단을 격파했다. 롬멜군의 패주로 인해 일본군이 기획한 서아작전(西亞作戰-2개 사단으로 인도양의 북서부 요충지를 점령 후 독일군과 연대하는 작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드웨이 해전의 최대요인으로 드는 항공전에서, 시시각각 정세가 변화하는 전장에서 즉각적인 대응의 지휘체계가 필요함에 미군은 현장의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항모부대 지휘경험이 있는 플래처 소장이 작전 전체를 지휘했다. 그는 전투 중에 자신의 항공모함을 잃고는 즉석에 지휘권을 스플런스 소장에게 넘겨 스플런스 소장의 항공모함으로 일본의 항공모함을 잡는데 성공했다.

 

한편 일본의 기동부대 사령관이던 나구모 중장은 도네 4호 정찰기의 미해군 발견보고 당시,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즉각적인 공격요청을 각하하고 다시 무장전환의 명령밖에 내리지 않았다. 사령관 자리에 항모부대 지휘운용의 불안요소를 가진 나구모 중장이었던 점에서 미군 항모부대와 미드웨이 기지 공격의 두 방면에서 진공작전을 추진하던 일본해군도 일본 기동부대만을 포착해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군의 전략과 근본적인 다름이 있었던 것도 패인의 원인으로 추측한다.

 

나구모 중장이 기함 아카기를 잃고 후퇴시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단독 지휘권을 행사하여 히류의 함재기를 출동해 <요크타운>을 잡은 것을 떠 올리면 야마구치 소장의 즉각적인 출진제안에 의해 일본군 공격대가 미군 기동부대를 먼저 발견하여 타격했으면 전쟁의 양상은 아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7. 일본해군의 패배원인 분석

 

일본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함대의 구성을 본다. 일본해군은 전함을 주력으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항모부대를 편성했다. 항공모함은 넓은 공격범위를 지닌 비행부대를 가지고 있기에 전력집중이 간단하고 각 함의 거리를 전함의 10배 이상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전함과 나란한 거리에서 4척이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미해군기의 동시공격으로 일본항모 3척은 괴멸했다.

항공모

함의 집중운용은 각 함과 연락을 취하기 쉽고, 지휘관의 의사전달을 분명히 하여 함대의 모든 항공전력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쉬운 반면에 항모 자체의 방어 빈약성도 있어서 공격을 받는다면 일거에 큰 피해를 입을 위험도 컸다.

 

또, 항공모함의 함장, 각 항공전대의 사령관도 자신의 비행대를 자유로이 부릴 권한이 없었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유연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미군함대는 항공모함을 분산 운용하여 결과적으로 피해를 <요크타운> 하나로 끝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항공운용은 미숙했다.

 

미군의 각 항모비행대는 서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병법에 따르면 하책에 해당하는 전력의 분산과 순차적 투입이라는 상황을 야기했다. 이것은 항공모함의 분산운용의 최대결점이 드러난 형태였다. 현실적으로 전투기대와 연대하지 않고 단순하게 돌격한 뇌격기대는 유효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모두 격추되었다.

 

미군에게 있어서 행운이었던 점은, 병력의 분산이 우연하게도 파상공격이 된 것과, 일본함대의 방어가 저공에 머무른 것을 노려 때린 것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해군의 항모집결의 최대결점이 드러난 해전으로, 미군측은 반대로 분산운용이 결점이 잇점으로 변한 해전이기도 했다.

 

나구모 기동부대는 항공모함인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4척에 키리시마(霧島), 하루나(棒名)의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2척, 급유함 8척으로 항공모함 4척의 방위함으로는 방어가 빈약했다.

 

나구모 기동부대의 300리(약 550km) 후방에 야마토(大和), 무사시(武藏), 나가토(長門), 무츠(陸奧)의 전함 3척과 호쇼(鳳翔), 치요다(千代田)의 항모 2척, 수상기모함, 경순양함 각 1척, 구축함 22척의 주력부대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뒤따라 이세(伊勢), 휴가(日向), 후소(扶桑), 야마시로(山城)의 전함 4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2척의 경계부대에 이어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이 이끄는 콘고(金剛), 히에이(比叡)의 전함 2척과 즈이호(瑞鳳), 치토세(千歲)의 항모 2척, 수상기모함 1척, 중순양함 8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1척, 수송함 12척의 공략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편성은 당초 예정대로 미드웨이 공략작전을 실시했지만 기동함대만으로 싸우게 되어, 후위의 주력함대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약 대형전함을 항공모함 앞에 포진시켰으면 항공모함을 보호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리라는 지적도 있다.

 

또 나구모 기동부대에는 원래만큼의 항공전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미드웨이 공략작전의 양동작전으로서 주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알류산 공략작전에 귀중한 항공모함 2척인 준요(準鷹)와 류조(龍駿)를 투입시키는 바람에 항공전력에 공백이 생겼다.

 

산호해 해전에서 쇼가쿠(翔鶴)가 중파되긴 했지만 다른 한 척의 무사한 즈이가쿠(瑞鶴)을 놀린 점도 비판대상이다.

미군이 파손된 <요크타운>에 철야로 작업하여 3일 만에 출진시킨 것을 보면 쇼가쿠의 수리와 더불어 그냥 놀려버린 자매함 즈이가쿠와 그 조종사들을 배치하지 않은 일본해군의 태만함은 비판을 면키 어렵다.

 

당시 야마모토 사령관의 기함이던 전함 야마토. 일본해군의 뿌리깊은 대함거포주의도 항공력 경시라는 풍조를 더했다.

 

일본해군의 미드웨이 해전 패배원인의 제공자로 기동부대의 사령관이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전에서 나구모 중장은 무장전환에 의한 헛된 시간낭비를 유발한 점에서 비판이 큰데, 여기엔 당시 배경과 상황, 부하들의 조언,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나구모 중장의 지휘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원래 수뢰전대를 이끄는 것이 전문이어서 항공전을 잘 이해하지 못해 적을 발견하지 못한 싸움은 필요 없다 하여 훈련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이벌로 여긴 야마모토 사령관의 항공우선주의에 비판적이며 고집이 센 리더쉽도 결여된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항공대의 지휘관이던 후치다 미츠오는 후에 저서에서 나구모의 방침에 대해 때때로 곤혹스러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부적절한 인물을 연공서열로 사령관에 앉힌 해군의 인사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원인을 나구모 중장 혼자에게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허나 적을 발견한 즉시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폭탄에서 어뢰로 바꾸는 명령을 내려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 패배의 최대원인이란 점에선 반론이 없다. 일반적인 폭탄이라도, 특히 항공모함이라면 비행갑판을 파괴시키는 것만으로도 굳이 격침시키지 않아도 전투기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포함이라 해도 폭격으로 노출된 대공장비 및 갑판의 전투요원 상실은 전력저하를 유발할 수 있었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측 항공모함은 미군의 어뢰보다는 폭탄에 의한 화재가 원인이 되어 그 피해로 상실한 것이 많았다. 조기에 출격하여 공격기회를 잡았더라면 전환도중이던 항공기의 폭탄과 어뢰가 오폭으로 인한 연쇄폭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나구모의 지휘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반론도 만만찮은데, 당시 공격대를 출진시키려 해도 연료가 바닥나 되돌아 온 1차 공격대의 수납과 미군 뇌격기의 기습으로 인해 제대로 출격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만약 공격대의 전투기없이 그냥 뇌격기대만 출격시켰으면 미군 뇌격기대와 같은 모양으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폭탄으로 함선을 수평폭격하는 것은 명중률이 극히 낮은 점도 있었다.

 

또 미군항모의 발견보고 시각이 미드웨이 공격에서 제1차공격대가 돌아온 시점이어서 당시 항공모함이 착륙과 발진을 동시에 시킬 수 없는 것을 감안하면 공격대가 발진하려해도 제1차공격대의 착함이 우선이라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도네 4호기가 알린 미군이 위치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는 것도 1차 공격대의 수용이 먼저라고 나구모는 생각한 것이다.

 

나구모 중장이 수색활동을 경시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발진이 늦은 도네 4호기의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공격목표를 그냥 미드웨이로 해야 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적함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라 그다지 주목할 필요가 없다

 

나구모 중장은 작전실시에 앞서 각 순양함과 항공모함에서 정찰기를 띄워 미군함대를 찾았다. 허나 당시에 레이더도 없는 정찰기의 조종사가 구름 위에서 육안으로 적함을 식별하고 판단하여 알리는 것은 오보로 인해 허탕을 친 경우가 많았고, 당시 큰 작전에서 정확한 판단을 요하는 함대 사령관의 사고에선 정찰기의 단순보고를 그냥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구모 중장은 단독으로 판단해 지시를 내리지 않고 참모들과 상의하면서 진위여부를 판단해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실책을 나구모 중장 혼자에게 전가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 기동부대의 사령관이던 나구모 주이치 중장. 미드웨이 해전의 실책은 나구모 만의 오판이라 보긴 힘들다.

 

또 다른 일본의 패인으로는 장비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군함대는 레이더가 있던 반면에 일본 항공모함은 레이더가 없다는 장비상의 큰 차이가 있었다. 미군은 레이더를 이용해 접근하는 항공기와 함선에 대해 유효하게 대응한 반면, 기습은 거의 당하지 않았다.

 

또 공격기의 공중퇴피, 전투기의 요격, 함대자체의 후퇴에도 레이더의 관제로 인해 일본보다 열세였던 미군 전투기도 항공모함 근처에선 방공전을 펼쳤다. 만약 일본에게 대공 레이더가 있었다면 기습을 받았던 항공모함들이 전멸당할 우려는 없었다고 여겨졌기에 후에 항공모함 쇼가쿠(翔鶴)를 최초로 21호 레이터 장비가 장착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가 장비한 무선전화기는 근거리에서도 제대로 교신되지 못하는 열악한 성능인데다가, 만약 레이더를 장비했어도 조직적인 방공체제를 정비하지 못한 일본해군은 상황을 바꾸기 어려웠을 것이라 본다. 전함 이세(伊勢)와 휴가(日向)는 후에 일본최초로 시제 수상 레이더와 대공수상 겸용 레이더가 장착되어졌다.

 

한편, 미해군이 일본해군의 암호해독에 성공하여 작전 전체를 거의 완벽히 파악한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일본군은 미군의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여 주로 통신상황, 방위측정, 소문 등의 정보를 모아 상황판단과 분석에 나섰기에 정확도가 낮았다.

 

일본의 <해군암호서 D>계통은 전략상 무용 일반암호서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난수표를 이용한 2중의 암호화한 복잡한 암호여서 여기에 특정지점 표시표, 특정지점 약어표, 역일전환표를 병용한 것을 개전 전부터 사용했기 때문에 수명이 길었다.

하와이의 미군 정보대에게 이 암호가 해석된 것도 개전에 앞서 암호체계를 개정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이 때문에 훗날, 해군 갑사건이라 불린 야마모토 사령관이 탑승한 기체의 피격사건 당시에도 일본군은 계속 오래 된 난수표를 사용했다는 것이 훗날 드러나기도 했다. 덧붙여 산호해 해전, 5월 15일에 미셜제도 남쪽에서 적 항공모함을 발견한 것에 의해 적 항공모함의 소재파악 판단에 오판을 내린 것도 작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한 본대에서, 야마토는 고성능의 수신설비와 정보수집반이 배치되어 미드웨이 근해의 적 상황을 어느 정도 관측했다. 하지만 나구모 기동부대의 통신설비는 열악했으며 제대로 된 정보조차 얻기 곤란했다. 본대에서 정보제공이 필요했지만 끝까지 확정적인 정보는 제공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보전달의 부족이 패인으로도 지적되는데, 미태평양함대 사령관이던 니미츠 제독은 하와이에서 지휘를 하면서 항모부대에 수차에 걸쳐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연합함대 사령관이던 야마모토 제독은 무선봉쇄중이던 야마토에서 지휘를 실시하여 정보를 하나도 발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일본군의 복잡한 암호체계로 인해 소통 자체에도 시간이 걸렸다.

 

작전계획 당시, 일본측이 상정한 미군 항공모함 숫자는 2척으로, 일본측의 4척에 비하면 전력차가 있어서 이에 미군의 항공모함은 결전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보전에 있어 패배한 것은 전투 후에 우가키 마토메 연합함대 참모장도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의도가 적에게 노출된 의혹이 있다>, <적 정찰은 불충분>이라고 패인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전은 앞서 필리핀에서 상대한 미군과 인도차이나의 허약한 연합군의 대패로 인해 평소 미군을 얕보고 있었던 점도 있었지만 일본해군의 조직, 특히 연합함대에 제대로 된 정보전문 참모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도 그 원인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레이더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또 다른 일본의 패인으로는 작전과 초계를 들 수 있다. 미드웨이 해전 이전에 실시된 도상 훈련에서 통제관이던 연합함대 사령부의 우가키 마토메 참모장은 미해군의 급강하폭격과 뇌격의 명중률을 과도하게 낮게 설정하는 오판을 저질러 참모들에게 <3분의 1>로 함세를 줄인 도상 연습을 지시했다.

 

하와이와 미드웨이 사이에서 잠수함에 의한 미군 항공모함 부대의 정찰을 충분히 실시하지 않아 이 때문에 진주만에서 미군 항모부대가 미드웨이 섬 동부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연합함대는 놓치고 말았다. 우가키 참모장은 나구모 사령관의 항모기동부대에 대해 제1의 공격목표가 적 함대라는 것을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았다.

 

이에 나구모 사령관은 미드웨이의 미군기지에 제2차 공격을 실시하기 위해 함대공격용의 어뢰를 육상용 폭탄으로 바꾸라는 전환명령을 현장에서 비교적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다가 다시 적 함대 발견의 보고가 들어오자 제대로 된 상부의 정보 및 지시가 없는 마당에 나구모 사령관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해군은 순양함에 탑재된 수상정찰기를 주력으로 수색을 실시했다. 항공모함의 공격력을 중시한 다른 함정과의 역할분담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항공모함에는 정찰기를 탑재하지 않고 공격기 및 폭격기 등의 함재기에 의한 수색에도 소극적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수색은 주로 순양함의 수상기가 동원되어 항공모함의 수색기는 97식 함상공격기 2기 뿐이었다.

 

또 후에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한 도네 4호기의 지각출격에 대해 나구모 사령관은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치쿠마(筑摩)에서 발진한 정찰기는 미군 항모부대 상공을 통과하면서도 구름 위를 비행하는 바람에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더우기 미군의 돈틀레스 함상폭격기와 마주치면서 보고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일본기동부대는 직선거리 약 240km 지점에서 미군 항모부대와 대치했지만 이를 발견하는데 늦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장병들이 미군 항모의 미드웨이 출발은 자신들의 미드웨이 공격이 이루어 진 후에 이루어 질 것이라는 선입관도 컸었다. 이 선입관에 대한 착오는 도네 4호 정찰기가 실제로 적을 발견했을 시 나구모 기동부대의 수뇌부가 혼란에 빠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만약 도네 4호기가 정각에 출발했더라면 미군 항모부대의 발견이 빨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설도 있다. 정각에 출발한 경우, 미군 함대가 도네 정찰기의 수색망 앞을 통과하게 되어 일본해군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을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함재기들을 적극적으로 수색에 투입하여 미군처럼 집중적으로 수색망을 폈다면 조기발견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 기의 기체가 아쉬운 상황에서 기존의 수색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점에서 도네 4호기의 늑장 출발은 아쉬운 점이었다. 당시 일본해군은 공격력 보존을 위해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수색에 내보내지 않고 수상기에 의존했다.

 

이 때문에 일본해군은 이전부터 타국에 비해 수상정찰기를 운용한 작전이 발달했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의 해군이 일본의 수준을 능가하는 수상정찰기를 보유하지 못했던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때문에 당시 일본 기동부대를 발견한 것도 정찰기가 아닌 전투용 기체였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 후에 일본해군은 기존의 수색방법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지하여 훗날 남태평양 해전에서는 2단 수색 및 항공모함 탑재용의 고속정찰기인 사이운(彩雲)을 개발하게 되었다.

 

일본해군은 함선피탄 시를 대비한 소화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화재에 대비한 훈련도 실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항공모함들이 잇따른 피탄으로 화재가 발생했어도 진화에 실패하여 침몰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아카기는 고작 폭탄 2발에 의해서만 침몰하였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격침한 정규 항공모함들 중 가장 적은 피탄 숫자이다.

 

반면에 미군의 <요크타운>은 제1차공격대의 급강하 폭격당시 피탄을 당했어도 즉각적으로 진화와 복구에 들어가 제2차 공격대가 이를 다른 항공모함으로 착각할 정도로 회복력이 빨랐다. 그리고 제2차 공격대의 폭탄 3발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력항해가 가능한 상태로 복구될 정도였다. 이러한 함선피해의 대처능력도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해군이 이렇게 부실하게 대처한 것은 일본해군의 정예들이 중일전쟁 이래의 전과에 취하여 크게 자만하고 실전경험이 미군보다 많아 진주만 공격성공 후에 <완승을 거두었다>며 들뜬 탓도 있었다. 이 때문에 산호해 해전에서 항공모함끼리의 전투를 처음으로 조우하고 훈련된 적군 항모부대와 교전해 피해를 입었어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의 비행대)의 조종사들도 <산호해에서 적들을 상대하는 건 (하수인)제5전대면 충분했다>라고 자신했다. 더욱이 후치다 중좌조차도 미드웨이에서 미군의 초기공격에 베테랑인 제1항공전대를 쓰는 것은 아깝다고 여길 정도였다. 당시 미군 항모부대의 조종사에 비해 확실히 경험, 실력, 사기 면에서 당시 나구모 기동함대의 조종사들은 뛰어났다.

 

그러나 일본해군은 이러한 과신에 취하여 자군이 위협받는 가능성의 정보와 징후에 눈을 돌려 희망적인 관측만으로 작전을 진행하고 말았다. 그 결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4척의 정규항모를 잃어버리고 우수한 베테랑 조종사들을 대거 상실한 채 패배하고 만 것이었다.

 

 

8. 일본은 미드웨이해전에서 왜 졌나?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군이 왜 패배했는지 밝히는 문제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먼저 미군이 승리한 요건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 암호해독

• 전력을 집중하여 대반격전을 구상한 니미츠 제독의 과감하고 대담한 결단

• 플레처 제독과 스플런스 소장의 뛰어난 현장 지휘

• 항공기 조종사와 승무원을 비롯한 장병들의 뛰어난 기량과 용기 및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

• 레이더를 비롯한 기술상의 우위 및 뛰어난 보수능력

• 행운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일본군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요건을 갖추었어도 일본군의 실수가 없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런 커다란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무엇을 잘못했을까?

 

먼저 일본군 자신들의 평가를 보자.

 

제1기동부대 참모장이었던 구사카 류노스케 제독은 미군이 일본암호를 해독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6월 2일에 짙은 안개 속에서 변침을 위하여 무전으로 변침명령을 내린 것 때문에 제1기동부대의 존재를 들켰다고 생각했으며, 4일 아침에 정찰기들이 더 빨리 정찰을 개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사카 제독은 미드웨이 공습에 항모 4척의 함재기가 모두 동원된 것이 미국함대를 발견했을 때 혼란을 발생시킨 이유라고 생각했으며, 단일 진형 내에 항모 4척이 모두 몰려있다가 단 1번의 공습으로 3척이 피격된 사실에 한탄했다.

 

그는 미국함대를 향하여 공격대를 발진시키려 할 때 호위를 담당할 제로기가 모자랐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의 기록을 잘 들여다보면 이 주장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연합함대 참모장이었던 우가키 마토메 제독은 자신의 일기에서 단일 진형 내에 여러 척의 항모들을 몰아넣는 것이 위험하다는 구사카 제독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도 정찰 실패를 문제 삼았으나 구사카 제독과 달리 전술 수준이 아니라 진주만 정찰계획인 K작전이 실패하면서 미국항모들이 진주만을 떠났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더 큰 문제로 생각했으며, 미드웨이가 자신들의 예상보다 훨씬 높은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를 과소평가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AL 작전까지 포함하여 작전규모가 지나치게 커졌으며 이에 따라 병력이 분산되어 실제로 엄청난 규모의 함대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기동부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주변에 지원해 줄 수 있는 함정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가키 제독도 미군이 자신들의 의도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설마 미군이 자신들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따라서 사이판에서 출발한 미드웨이 점령부대가 발각되었든지, 북방부대가 소련 선박에게 발각되었든지 아니면 무전통신의 실수로 자신들의 의도를 미군이 알아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우가키 제독은 일본해군이 잇따른 승리에 따른 자만심에 빠져 미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제1기동부대의 측면에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고 지적했으며, 이 부분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아카기의 항공대장으로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으며, 전후에 Midway: The Battle that Doomed the Japan 을 저술한 후치다 미츠오는 잇단 승리에 취하여 자만심에 빠진 나머지 적을 무시하는 경향을 '승리병' 이라고 이름붙이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이 저지른 실수의 많은 부분을 이 승리병과 연관하여 설명했다.

 

승리병 때문에 일본군은 전략적으로 미군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실패했고, K작전과 전투 당일의 정찰에도 실패했다. 또한 승리병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작전목표인 미군함대 격멸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드웨이 상륙이니 알류샨 열도 공격까지 포함시켜 병력 분산을 초래하고 우선 순위의 혼동을 가져왔다.

 

후치다는 이외에도 레이더 기술의 열세와 전함 중심의 사고방식, 또한 야마모토 제독이 통신 중추인 구레에 머물지 않고 야마토를 타고 해상에 나와 지휘하겠다고 고집한 사실이 전체적인 작전 지휘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나구모 제독의 정찰 문제에 관해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야 채택된 2단 수색법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해군대학에서는 일본해군의 패배 원인에 대하여 기술적 분석을 실시했다. 미해군의 분석가들 역시 일본해군의 자만심을 지적했으며, 야마모토 제독이 작전수립 과정에서 기습이라는 요소에 지나치게 집착했다고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야마모토 제독이 미해군의 능력에 맞추어 작전을 구상하지 않고 자신이 상상한 미해군의 의도를 중심으로 작전계획을 만들었다는 점을 근본적인 실수로 보았다. 이런 태도 때문에 야마모토 제독은 미해군이 자신과 예상과는 달리 대규모 전투를 갈망하고 있으며, 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하여 미드웨이 근해에 미리 진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외에 고든 프랜지나 월터 로드 등의 역사가들이 일본군의 패인을 분석했으나 대체로 일본군의 시각과 비슷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패인을 분석할 때 후치다가 만들어낸 '승리병' 이라는 용어는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 확실히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해군은 오만했다.

 

그들은 미국의 항모기동부대가 결코 만만찮은 상대라는 산호해 해전의 교훈을 무시했고, 당연히 일본해군과 맞서 싸우려는 미해군의 의지와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사실 태평양전쟁 초기 6개월 동안 일본군이 이루어온 놀라운 승리의 원동력 또한 이런 자만심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자신감과 할 수 있다는 의지였다. 따라서 승리병은 미드웨이에서의 패전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전투 패배의 원인을 고찰할 때 어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은 편리하지만 많은 진실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치쿠마의 5번 정찰기는 아침 6시에서 6시 15분 사이에 미군함대 상공을 통과하고서도 미군함대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이 정찰실패는 사실 치쿠마 5번 정찰기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겐다 중좌의 정찰계획이 너무 넓은 영역에 너무 적은 숫자의 정찰기를 투입함으로써 생겨난 확률상의 실패에 더 가깝다.

 

나구모 제독은 대함장비를 갖추고 대기하던 함재기들을 지상공격무기로 바꾸다가 참화를 초래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병력을 분산시키고, 지나치게 빠듯한 시간표를 강요하여 현장 지휘관의 재량을 크게 제약하는 잘못된 작전계획을 작성했다.

 

이 사람들에게 미드웨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버리면 일은 간단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서는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정한 몇몇 개인에게 패전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수 있는 경우는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패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적어도 실제 역사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으리라는 상당한 근거가 있을 때에 한정된다.

 

과연 그랬을까?

 

연합함대 사령관이 야마모토 제독이 아니었다면, 제1기동부대 사령관이 나구모 제독이 아니었으면, 제1기동부대의 항공참모가 겐다 중좌가 아니었다면 일본해군은 전혀 다르게 행동해서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었을까?

 

이 문제는 미드웨이 해전을 일본해군이라는 조직의 패배로 볼 것이냐 아니면 야마모토 제독, 나구모 제독 또는 겐다 중좌라는 개인의 패배로 볼 것이냐는 문제와 직결되며 여기에 대해 고찰하려면 1905년에 동해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 일본해군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해군의 연합함대는 1905년 5월 말에 동해에서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키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쓰시마 해전의 결과는 전 세계의 해군관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무엇보다 이 해전의 승리자인 일본해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해군이 쓰시마 해전의 승리에서 얻은 교훈은 크게 보아 3가지 정도였으며 이 교훈들은 40년 후 강력한 미국의 해군력에 의하여 일본해군이 완전히 괴멸될 때까지 그들의 사상, 교리 및 훈련 과정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쓰시마 해전의 첫 번째 교훈은 해전에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두고 많은 연구와 준비를 한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이었으나 태평양전쟁에서는 적용하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일본해군은 적절한 장소와 시간을 정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서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했으나 이후로는 드넓은 태평양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싸울 수가 없었으며 이것은 미국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교훈은 결정적인 해전 한번으로 전쟁을 아예 끝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의 특수상황 때문에 쓰시마 해전이 러일 전쟁 종식의 계기가 됨으로써 일본해군이 가지게 된 착각으로 완전히 잘못된 교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같은 대규모의 국가총력전에서는 아무리 크고 성공적인 해전이라도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실제로 제2차 대전 참전국 중에 단지 해전에서 한번 졌다는 이유로 항복하거나 평화회담을 구걸한 나라는 없다.

 

일본해군은 전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소위 '결전' 을 찾아 미드웨이로 나중에는 다른 곳으로 헤매고 다녔으나 애당초 그런 결전이란 없었다.

돌이켜보면 일본 자신도 미드웨이 해전 뿐 아니라 미증유의 대해전인 필리핀해 해전과 레이테만 해전에서 불과 4개월 사이에 2번이나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하거나 평화회담을 구걸하지 않았다.

 

하물며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산업력과 고도의 동원 능력을 가진 세계 제일의 강대국인 미국을 단 한번의 해전으로 굴복시킨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성공적인 해전이라도 단 한번의 해전으로는 미국의 항복을 받아내기는 커녕 평화협상 테이블에 끌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세 번째 교훈은 화력의 집중을 통한 공격우위사상이었다. 쓰시마 해전을 통하여 일본해군은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 교훈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민족 특유의 허세와 맞물려 야마토 정신을 가진 일본군은 주요 목표에 제대로 화력을 집중시킬 수만 있으면 수적으로 아무리 우세한 적도 무찌를 수 있다는 집단최면에 가까운 형태로 변질되었다.

 

쓰시마 해전에서 얻은 완전히 잘못되었거나 적어도 태평양전쟁에서는 적용하기 곤란한 교훈들은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해군에게 무거운 정신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해군은 개전 이래 계속된 승전에 기고만장해지면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는데 심각한 장애를 보였다.

일본해군이 진주만 기습과 인도양 원정에서 달성한 혁혁한 전과는 일차적으로 많은 함재기와 충분한 숫자의 항공모함이라는 수적인 우위에 의한 결과였지 결코 야마토 정신의 승리가 아니었다.

 

제5항공전대만이 참가한 산호해 해전에서 수적인 우위가 없는 상황에서는 일본의 항모기동부대가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를 압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에 즈이가쿠를 투입하여 수적인 우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제1기동부대의 항공모함이 5척이어서 6월 4일 오전에 히류만이 아니라 즈이가쿠도 살아남아 공습 과정에서 커다란 함재기 손실을 입은 미국항모 3척을 상대했다면 적어도 실제 역사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산호해 해전에서 이미 일본식 전투초계의 한계가 뚜렷이 나타났었다. 물론 시간 여유가 별로 없기는 했지만 산호해 해전의 교훈을 재빨리 받아들였더라면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최소한 전투초계 시 소대마다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할 특정 공역과 고도를 지정해 두는 등 전술적인 개선을 꾀할 시간 여유는 충분했다.

미해군은 산호해 해전 이후 한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에 태치 소령의 이론에 지나지 않던 태치위브를 실전 적용이 가능한 수준으로 다듬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선보이는 노력과 기민성을 보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야마모토 제독과 제1기동부대 수뇌부의 행동을 보면 쓰시마 해전의 잘못된 교훈을 답습하고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데다가 승리병이 결합된 장면이 많이 나타난다.

야마모토 제독은 잘못된 교훈에 따라 미국을 평화협상 테이블에 끌어낼 '결전' 의 장소를 찾아 헤매던 끝에 미드웨이를 낙점한다.

 

그는 진주만 기습 이후 이때까지의 승리가 함대항공력의 수적 우위에 의한 것이라는 산호해 해전의 교훈을 무시하고 즈이가쿠를 제1기동부대에 참가시켜 수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다. 또한 승리병에 취해 미군이 자신의 의도를 모른 채 기습을 당해 당황한 끝에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예단하고 이것저것 욕심을 부려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병력을 분산한다.

 

제1기동부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는 공격제일주의에 함몰되어 6월 4일 아침에 광대한 해역을 정찰하는데 턱없이 적은 정찰기만을 투입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항공모함의 함재기 중 일부만 동원해도 충분한 정찰이 가능했지만 최대한 공격에 집중하려는 의도로 함재기를 정찰에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을 보여줌으로써 정찰 실패를 자초한다.

 

제1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중장은 미국함대를 발견했을 때 쓰시마 해전의 교훈에 근거한 교리를 벗어나는 비상대책을 강구해서라도 최대한 공격대를 빨리 이함시켜 위험을 최소화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단지 화력 집중의 원칙만을 고집하며 시간을 끌다가 참화를 초래한다.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제독 또한 히류 1척만이 살아남았을 때 재빨리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하기보다는 공격 일변도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강력한 미국함대에 접근함으로써 결국 히류마저 상실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미드웨이 해전은 쓰시마 해전의 잘못된 교훈, 학습능력의 결여 그리고 승리병이 복합된 결과로 보이며 이것은 단지 지휘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해군이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던 문제가 나타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만 확실히 개인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야마토 함상에서 벌어진 모의전투 문제이다.

현대화된 군에서 모의전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아군의 전략을 평가해보고 미비점을 찾아내는 중요한 절차로서 상대방의 능력에 기초하는 한 대항군의 사고는 자유롭게 허용해야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승리병의 한 증상이기도 하지만 야마모토 개인의 성향과도 직결된 문제로서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좀 더 진지하게 모의 전투를 실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의 전투를 진지하게 수행했다고 해서 과연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막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일본해군에게 있어서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는 단순한 개인의 실수나 불운같은 간단한 원인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중첩되어 일어난 사건이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쓰시마 해전부터, 아니 일본해군의 탄생 당시부터 일본해군 내에 존재해 왔던 문제점이 터져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종전 당시 연합함대의 참모였던 치하야 마사다케 중좌가 전후에 미군 심문관에게 털어놓은 내용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미드웨이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재앙을 용케 피했을지라도 아마 1942년 내에 태평양 어디에선가 그런 운명에 맞닥뜨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