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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_秘事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

chocohuh 2013. 2. 13. 11:43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연합군의 빠른 진격은 1944년 가을부터 속도가 꺾이게 된다. 마켓가든 작전이 구상된 것은 1944년 9월 10일 아이젠하워 총사령관과 몽고메리 장군 간의 회담에서 시작된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연합군 수뇌부는 조기종전의 단꿈에 빠져 있었고,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에서 독일군이 벨기에를 포기하고 네덜란드에 집결해 있으니 네덜란드로 병력을 집중해서 독일군을 빨리 패퇴시키자며 내놓은 작전이다.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 1944.9.17~1944.9.25)은 2차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와 알자스-로렌 지역까지 진격한 연합군이 보급 문제로 진격이 정체되자, 약체인 것으로 판단되던 북쪽의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을 격파하고 바로 라인 강을 건너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자는 욕심으로 벌인 작전이다.

 

독일 본토로 진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라인강을 돌파하기 위하여 작전 목표를 독일이 점령 중인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벤, 네이메헌, 아른헴을 연결하는 도로상의 교량으로 설정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이 교량들과 거점 도시들을 점령하며 연결된 도로를 통해 기갑 부대를 신속히 독일 본토로 진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작전의 진행은 9월 20일 발 강에 위치한 네이메헌 다리 확보와 함께 초기에는 순조로웠지만 라인 강에 위치한 아른헴 다리 확보에 실패하고 영국 1공수사단이 독일군의 반격으로 괴멸하면서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독일이 거둔 최후의 승리로 평가된다.

 

표면적으론 이런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작전구상이었지만 실상은 몽고메리 개인의 영예와 영국의 명예를 위해 프랑스에서 쾌진격을 하던 패튼을 앞질러 보겠다는 공명심에서 비롯된 작전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연합군의 들뜬 전승분위기와 낙관론에 밀려 결국 작전은 채택되고 1944년 9월 17일 작전이 결행 된다. '마켓'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공수부대 3개사단(미국 제82공수사단, 101공수사단, 영국 제1공수사단)이 영국을 출발해 네덜란드에 백주대낮에 강행 공수작전을 벌이고 2시 15분엔 '가든'으로 불린 영국 제30군단이 도로를 따라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도로는 대부분 둑길위에 작은 길이어서 둑길위의 전차는 좋은 표적이 되었고 한대가 피격당하면 치울 때까지 전체 부대가 멈춰야만 할 정도였으니 진격속도는 느렸고, 몇몇 교량을 확보하는데 실패함에 따라 30군단의 진격속도는 더욱 느려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연합군에서는 네덜란드에 있는 독일군의 전력을 보병사단 위주의 2선급 부대로 평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예 제2SS기갑 군단 예하 9SS기갑 사단과 10기갑 사단이 재편성을 하며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진격예정 시간표는 모두 어긋나고 미군 101공수사단과 82공수사단만 30군단과 예정보다 늦게 합류할 수 있었지만 아른헴을 10km 남겨둔 지점에서 작전개시 5일째인 9월 21일 30군단의 진격은 저지당하게 된다.

 

아른헴에는 영국 제1공수사단이 강하해 아른헴대교를 장악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다리에 도착한 것은 1개 대대였고(프로스트 대대) 그 외는 독일군의 전차부대와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며 다리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전중인 제1공수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폴란드 제1공수여단이 강하했지만 이 역시 영국공수부대와 같이 죽기위해 들어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결국 제1공수사단은 30군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9월 24일 전달된 '작전중단, 전원철수' 명령에 따라 9월 25일 밤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 후퇴한다. 결국 프로스트대대는 독일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작전이 종료된 9월 25일까지 투하됐던 영, 미 공수부대의 병력손실은 17,000여명에 달했고 특히 영국 제1공수사단은 10,005명을 강하시켜 7,842명을 잃었다. 예정에서는 공수부대들은 최대 4일간만 버티면 되는 작전이었지만 영국 제1공수사단의 경우 8일간 방어전을 치르고 있었고 이 부대는 대전말까지 전선에 다시 투입되지 못 할 정도로 타격을 받고 말았다.

 

제대로 성공했다면 네덜란드를 해방시키고 독일본토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전황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얻은 것은 80km의 둑길과 병력손실뿐이었던 실패한 작전이다. 몽고메리장군은 '대부분의 주요 목적을 달성한 90%이상 성공한 작전'이라고 자평했다지만 2차대전 서부전선에서의 연합군 작전 중 최악의 작전이었다.

 

1944년 7월 이후, 독일군은 노르망디에서의 격렬한 전투 끝에 결국 패배하여 8월 말까지 프랑스 동부 지역을 지나 독일 국경까지 후퇴했다.

 

북부 전선에서는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원수가 이끄는 영국 제21군이 앤트워프(Antwerp)에서 벨기에 북부 국경지대로 진격하였으며, 중부에서는 오마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의 미국 제12군이 아헨(Aachen)으로 압박해 들어갔고, 남부에는 제이콥 데버스(Jacob L. Devers) 장군의 제6군이 남프랑스로부터 독일 국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944년 8월 말에 보급 문제가 연합군 공세의 발목을 잡았다. 얕은 수심의 노르망디 해변에 설치된 임시 부두나, 진격 로에서 멀리 떨어진 코탕탱(Cotentin) 반도의 셰르부르(Cherbourg) 항구만으로는 보급 물자 하역에 한계가 있었다. 앤트워프가 영국의 점령 하에 있었지만 앤트워프와 연합군 위치의 사이에 놓인 지역에는 여전히 독일군이 존재했다. 또한 덩케르크(Dunkirk)와 같은 다른 주요 항구들은 1945년 5월까지 독일의 수중에 있었다.

 

초기 보급 수송은 기대보다 나은 실적을 보여주었으며 작전을 지원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지만, 연합군이 동부로 진군하면서 보급물자를 전방으로 실어 나르는 수송수단이 부족해진데다 병목 현상까지 발생하였다. 9월 초의 경우, 셰르부르에 도착한 7만 톤의 보급물자가 수송수단이 없어 그대로 쌓인 채 방치되기도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이루어진 공습들이 워낙 꼼꼼했던 탓에 철도 노선들도 모두 파괴되어, 복구가 완료된 8월 30일까지는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에서 공수한 1,400여대의 3톤 트럭들은 엔진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고, 하루에 겨우 두개 사단을 지원할 수 있는 분량인 800톤 밖에는 수송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전선에 도착한 미국 제26, 95 그리고 104보병 사단은 자신들의 군용 트럭을 수송에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 제12군의 중포병대는 대포를 견인해야할 트럭조차 수송에 동원하는 실정이다보니 전선으로 배치할 수가 없었다.

 

수송 문제 해결을 위하여 레드볼 익스프레스(Red Ball Express)와 같은 임기응변식의 수송 조직이 운용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연합군은 진격을 미루고 일단 보급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보급 문제를 감수하고 독일군을 공격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대부분의 연합군 지휘관들은 후자를 지지하였지만 브래들리와 몽고메리는 전자를 주장하였다.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은 전선을 넓게 압박하며 보급선을 확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브래들리와 몽고메리는 일단 라인강을 넘어 적진을 깊숙이 찌르며 보급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브래들리와 조지 패튼(George Patton) 장군은 동부로 공격하여 메츠(Metz)를 함락시키고 자를란트(Saarland) 공업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몽고메리는 당초 제한적인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영국 제30군단 동부를 공략한다는 내용의 코멧 작전(Operation Comet)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작전을 입안하였다.

 

아른헴(Arnhem)을 점령하여 지그프리드 방어선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통해 라인강으로 진격, 독일 제15군을 아른헴과 에이셸미어(IJsselmeer) 사이에 포위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런던(London)과 앤트워프를 공격하고 있는 V-2 미사일 발사기지도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작전에 영국 제2군을 동원한다는 내용은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입안자들로부터 거부되었다. 해당 지역에 장애물이 많아 진격에 애로가 있으며, 미군 제1군과도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네덜란드의 간척지를 따라서 뚫린 낮은 길을 통해 기갑부대가 이동하는 방안으로 결정되었으나, 이것은 보급선 유지와 전력 효율성 면에서 많은 제약이 있는 방법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의 확정은 여러 가지 원인에 근거한 것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재정비를 위해 영국에 돌아가 있던 연합군 공수부대들은 미국의 3개 공수사단과 영국의 2개 공수사단, 그리고 1개 폴란드 여단으로 구성된 제1연합 공수군으로 새롭게 편성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8회에 걸쳐서 공수부대 투입이 계획되었지만 전선의 사정 변화로 취소가 반복된 탓에, 아이젠하워는 공수부대 전력을 최대한 빨리 투입하라는 워싱턴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브래들리 장군은 공수부대들을 전선에 낙하산으로 투입하려 했는데, 이것이 육로 수송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은 브라우닝(Browning) 장군의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브레리튼(Lewis H. Brereton) 장군 지휘하의 공수부대가 진격로 상의 교량과 주요 목표물을 점거하는 '마켓'과, 브리안 홀록스(Brian Horrocks) 중장 지휘하의 제30군단이 확보한 진격로를 따라 영국 제2군이 북부로 진군하는 '가든'으로 구성되었다.

 

 

제30군단이 작전 시작 위치에서 라인강 북쪽의 최종 목표까지 이동하려면 라인강과 3개의 운하를 포함한 총 8개의 자연 장애물을 돌파해야만 했다. 연합군은 이 8개의 장애물에 놓인 교량들을 거의 동시에 점령해야 했으며, 만약 점령이 실패했을 경우에는 공병대를 동원하여 가교를 건설해야 했다. 그러나 네이메헌(Nijmegen)의 발(Waal)이나 아른헴의 라인강과 같은 폭이 넓은 곳에는 가교 부설도 불가능했다.

 

훗날 지옥의 도로라는 별명이 붙은 2차선 너비의 69번 고속도로는 도로 양편의 지형 때문에 전술 차량 이동에는 부적합하였다. 그 외에도 제82공수 사단의 낙하지점에는 100미터 높이의 그뢰스비크(Groesbeek) 언덕이 있었다. 이 지점 점령과 방어는 교량 사수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마켓작전의 목표는 공수 부대를 투입하여 주요 교량들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제1연합 공수군의 3개 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휘관인 브레리턴 장군은 공수부대를 운용해본 적이 없었고 최근에 제9공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테일러(Maxwell D. Taylor)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101공수사단은 제30군단이 아인트호벤(Eindhoven)과 베젤(Veghel) 근교의 다리를 접수하는 동안 그 북쪽 지대에 강하하며, 개빈(James M. Gavin) 준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82공수사단은 이들보다 더 북쪽으로 강하하여 흐라버(Grave)와 네이메헌의 교량을 점거하기로 하였다. 영국 제 1공수사단은 우크하트(Roy Urquhart) 중장 지휘 하에 폴란드 제1독립공수 여단과 함께 작전 경로의 최북단에서 강하하여 아른헴의 교량과 우스터비크(Oosterbeek)의 철교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마켓은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으로서 3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구성된 총 34,876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병력들을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수송기 전력이 없었기 때문에, 강하는 여러 번에 걸쳐 며칠간 나뉘어 이루어져야했다. 보이(Boy) 브라우닝 장군은 첫 번째 강하에 참여하여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기로 했다.

 

13,781명은 글라이더를 사용하고, 20,190명은 낙하산으로 강하하며, 나머지 905명은 비행기의 착륙을 통하여 투입되도록 계획이 짜여졌다. 글라이더는 병사들 외에 1,689대의 차량과 290문의 곡사포, 그리고 1,259 톤의 탄약과 보급물자를 함께 수송하게 되었다.

 

가든 작전은 제30군단을 주축으로 영국의 정예 기갑사단이 최전방을 담당할 예정이었으며, 제43 웨섹스(Wessex), 제50 노섬브리안(Northumbrian) 보병사단이 예비전력으로 배정되었다. 이들은 작전 당일 101공수사단의 강하 지점 남쪽까지 점령해야 했으며, 둘째 날에는 82공수사단 지점, 그 이후 이틀간은 제1공수 사단의 강하지점 부근까지 진격해야 했다. 보병들은 이들을 따라 진격하여 공수사단의 임무를 넘겨받도록 계획되었다.

 

사실 나흘이라는 시간은 공수부대들이 지원 병력 없이 전투를 치르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대전차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연합군측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현지의 독일군 전력은 캐나다 군과의 교전으로 취약해진 상태이며 기갑전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지휘부는 69번 고속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제30군단을 상대할 허약한 독일군의 전력은 그다지 걱정할 바가 못 되며, 또한 이들은 100km에 걸쳐 사방으로 엷게 퍼져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 독일군의 전력은 연합군의 정보와는 달랐다. 영국 제21군이 후퇴하는 독일군을 제대로 추격하지 못한 탓에 독일 제15군 86,000명의 병력과 600문의 대포는 네덜란드 본토로 무사히 퇴각하였으며, 국방군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는 이 패잔병들을 재빠르게 수습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발터 모델(Walter Model) 원수의 후임 이였던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는 그다지 신임 받지 못한 반면 병사들에게는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연합군의 60개 사단이 공격해올 것을 상정하고 수주간에 걸쳐 견고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독일 국방군 공수부대의 선구자인 쿠르트 슈투덴트(Kurt Student) 대령은 3,000명의 공수부대원들을 규합하여 알베르트(Albert) 만 주위를 점거하고 있었으며, 쿠르트 칠(Kurt Chill) 중장은 제85사단을 지휘하여 네덜란드의 교량들을 방어하였고, 제719보병 사단도 이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정적으로 10월 4일, 독일군 기갑부대가 아른헴으로 진입하였다. 연합군 사령부는 자체 정찰과 네덜란드 저항조직을 통해 이 사실을 알아내어 작전 지휘부에 통보하였지만 지휘부는 이들의 힘을 과소평가하였다.

 

룬트슈테트와 모델은 결국 아이젠하워가 패튼(George Patton)을 앞세워 총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때를 대비하여 빌헬름 비트리히(Wilhelm Bittrich) 중장 지휘하의 제9, 10 무장친위대(Waffen-SS) 기갑사단을 아른헴으로 보내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으며, 전차의 수량도 부족하고 2개 사단의 병력을 합해도 7,000명이 되지 못했다. 작전 실행 전날까지만 해도 제9기갑사단은 전차가 아예 없었으며, 제9포병 연대는 대포가 없었고 제19, 20 무장친위대 장갑척탄병(Panzer Grenadier) 연대는 중화기가 아예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직접적인 적의 공격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 이 후방 지역에 적 공수부대를 격퇴하기 위한 특수훈련을 받은 3,000명의 병력이 대기 중이었다.

 

9월 10일, 네덜란드 저항조직에서 넘어온 독일군의 정확한 전차 전력이 지휘부에 전달되었다. 이 시점은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이었지만 참모부의 월터 베델(Walter Bedell)은 직접 제21군으로 방문하여 작전의 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찰기가 영국 공수부대 강하지역에서 불과 1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한 독일 전차의 사진을 찍어 보내왔지만 몽고메리는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였다.

 

미국 제9수송 사령부는 한번에 1개 사단 병력의 절반을 나를 수 있는 1,545대의 수송기와 478대의 글라이더를 제공하였다. 각 사단의 모든 지휘관들은 하루에 두 번 씩의 강하를 요구하였지만 경험 없는 브레리턴은 항공기 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하루에 한 번의 강하만을 허용하였다. 이 조치 때문에 공수사단들은 지원포격 없이 하루에서 이틀 동안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했다. 또한 초기 투입 병력이 적은 관계로 강하지역 사수를 위한 인원을 작전 참가병력에서 더 차출해야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공세의 전력 약화로 귀결되었다.

 

강하 지점의 선정도 문제가 많았다. 특히 아른헴의 경우 강하 지점이 교량에서 무려 1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만일 계획대로 하루 만에 교량을 점령하여도, 강하 지점을 방어하는 병력과 교량을 사수하는 병력이 15킬로미터라는 먼 간격을 두고 24시간을 버텨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대공포가 염려스러웠던 수송대 지휘관은 그 이상으로 교량에 접근하기를 거부하였다. 교량 남쪽 지역에 다른 강하 지점이 제안되었지만 중장비를 실은 글라이더가 착륙하기에는 너무 습지대가 많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공수부대는 궁여지책으로 기관총을 탑재한 지프를 이용하여 빠르게 교량을 습격하는 동안 3개 대대가 뒤따라 도보로 공격하고, 1개 대대는 강하 지점을 사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 수립은 일주일 만에 완료되었다. 시실리(Sicily)나 노르망디에서의 작전 준비에 한 달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 조급했다. 당연히 준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10월 17일에 단 한차례의 강하만을 실시하기로 한 결정은 미국 육군의 역사에 재난(disastrous)이라는 용어로 기록되었다. 통신 대책도 미비하여 제1공수 사단의 경우에는 전투 기간 대부분 동안 연락이 두절된 채로 작전을 수행했다. 근접 항공 지원 계획도 전무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느린 주력군의 진격과 연계된 강하는 기습이라는 이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제82공수 사단의 지휘관 케빈은 "너무나 서투르다. 만일 성공한다면 나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라는 일기를 남겨 작전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하였다.

 

 

 

Day 1

 

1944년 9월 17일 일요일, 마켓 가든 작전은 성공적으로 스타트했다. 강하가 낮에 이루어진 덕분에 공수부대원들은 별다른 사고 없이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낙하하였다. 제82공수 사단의 경우 병력 전체의 89%, 글라이더의 84%가 강하 지점 1,000 야드 내에 낙하하였다. 강하가 밤에 이루어져 전력이 목표지점 20km 내에 이리저리 흩어졌던 노르망디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독일군의 전투기와 대공포에 대한 피해도 경미했다. 특히 대공포에 대해서는 요란하기만 했지 맞지는 않더라는 보고가 올라갔다.

 

남쪽의 101공수사단은 별다른 저항 없이 목표한 5개 교량 중 4개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손(Son)의 교량은 독일군에 의해 폭파되었으며, 2문의 독일군 대전차포를 만나 시간이 다소 지연되기도 하였다. 독일 제59보병 사단의 몇 차례에 걸친 반격도 모두 격퇴되었고, 병력 일부는 손 남쪽으로 이동하는데 성공하였다.

 

북쪽의 제82공수 사단은 흐라버 부근에 강하하였으며, 서둘러 요충지인 발 교량과 호이멘(Heumen) 교량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 전차와 포병이 도착하기 전에 그뢰스비크의 언덕을 점거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곳이 독일군에 넘어가게 된다면 공수사단은 낮은 곳에서 포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508연대가 이 임무를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통신 문제로 이날 늦게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먼저 산마루에 다녀온 정찰부대는 이 지점의 방어 병력이 소수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출발한 본대는 이동중에 이 지점의 중요성을 깨닫고 아른헴에서 서둘러 달려온 독일 제9정찰대대와 맞닥뜨려 시간을 허비하였고, 결국 네이메헌의 교량을 점령하는데 실패하였다.

 

다른 얕은 지점의 교량들은 공병의 가교로도 충분히 대체될 수 있지만,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네이메헌의 경우 교량을 점령하는 것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목표였다. 네이메헌과 아른헴의 교량을 점거하지 못한다면 제30군단의 진군은 불가능해지며 마켓 가든 작전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제1공수사단도 별다른 문제없이 강하에는 성공하였으나, 계획상의 문제점은 즉각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 날의 강하로 사단병력의 절반만이 투입되었고, 강하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교량의 위치 때문에 강하 지점 수비를 위한 병력과 교량 점령을 위한 병력이 양분되어 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교량 점령에 나선 병력 규모는 한개 대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먼저 선발대가 지프에 올라타고 교량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지프의 일부는 강하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렸고, 일부는 글라이더에서 끌어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교량에 도착한 선발대는 이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고 있는 독일 수비대를 발견하였고, 독일 제9정찰대대가 아른헴 교량을 지나 82공수사단이 강하한 네이메헌으로 이동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아른헴으로 이동하던 제1공수 여단 소속 2개대대는 독일군 훈련대대 병력과 맞닥뜨려 진격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존 프로스트(John Frost) 중령의 제 2 대대는 독일군의 수비가 없는 남쪽으로 우회하여 저녁에 교량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교량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3대대는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목표지점의 절반 거리에서 밤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제각기 다른 위치로 쪼개지게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밤에도 이동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매복 때문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이미 목표 위치에 도착한 부대는 2차례에 걸쳐 교량 점령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에게 주어진 22식 무전기는 5마일 반경의 통신거리를 가졌는데 실제 이들은 8마일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서로 간에 교신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극히 일부만이 교신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마켓 가든 작전 이전에 계획되고 취소된 일련의 강하 작전들 때문에 많은 시간을 끈 결과 무전기의 배터리에도 문제가 생겼다. 미군의 무전기는 장거리 고주파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영국군의 무전기는 단거리 저주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마저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작동되던 무전기들도 독일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박살나버렸다. 공군은 이들과 연결이 끊어지자 아군의 피해를 우려하여 폭격을 하지 못했다.

 

제30군단은 14시 35분까지도 출발을 하지 못했고, 도로에 들어선 뒤에도 지독한 교통 정체에 시달렸다. 전차와 차량 몇 대의 고장으로 행렬 전체가 멈췄고 17시가 되도록 이들은 아인트호벤 남쪽 15km 지점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했다. 전차를 사용한 야간 이동이나 공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밤이 되면 전차를 이동하지 않는 것이 정석이었고 이 작전의 경우에도 동일하였다.

 

독일군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던 발터 모델(Walter Model)은 당초 영국의 공수부대 강하는 자신을 납치하기 위해 파견된 특공 작전인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제2무장친위대 기갑군단의 비트리히는 즉각 제9기갑 사단 병력으로 구성된 정찰대대를 네이메헌으로 파견하여 교량 수비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상황을 눈치챈 모델은 아른헴의 사수를 명령하였다.

이제 강하작전의 장점인 적군의 혼란 야기와 기습 효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Day 2

 

새벽에 시도된 영국 제1공수 사단 소속 제1, 3대대의 진격은 대체로 무난하게 진행되었지만, 몇 차례의 매복 공격에 시간이 지체되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이동 대열이 길어진 탓에 독일군은 대열의 중간을 공격하여 이들을 분할하고, 고립된 공수부대원들을 소탕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괴롭힐 수 있었다.

 

전날 남쪽으로 떠났던 제9무장친위대 정찰대대는 더 이상 네이메헌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아른헴으로 돌아왔다. 교량에 있던 독일군 수비대는 다리를 건너 반대편의 영국군을 격퇴하려 하였으나 심각한 피해만을 입은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지휘관인 무장친위대 대령 파울 그라브너(SS-Hauptsturmfuhrer Paul Grabner)를 잃었다.

 

이날 늦게서야 제1, 3 대대가 아른헴에 도착하였다. 교량에서 1마일 부근까지 접근한 이들의 전력은 출발 당시의 1/6 으로 줄어들었으며, 장교와 하사관들 대부분도 전사한 상태였다. 이 날 강하하기로 했던 존 하켓(Sir John Hackett) 장군의 제4공수여단은 안개 때문에 늦게서야 강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흐라버의 수비는 견고하였으며 독일군은 계속하여 그뢰스베크 산마루의 미군들을 압박했다. 505연대는 세 방면에서 이루어진 독일군의 공격을 방어해냈다. 이날 오전 독일군은 오후 1시로 예정된 연합군 강하 지역 중 하나를 점령하였고, 오후 3시 10분 공격을 개시한 508 연대는 오후 4시경 이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6문의 대공포와 149명의 독일군 포로를 잡았다. 당초 1시로 계획되었던 강하는 연기되었으며, 3시 30분경에야 두개 포병대대와 한개 공수대대, 그리고 의무대가 도착하였고, 20분이 지나서 135대의 B-24 폭격기들이 보급물자를 투하하였다. 이 보급물자 중 80%가 회수되었다.

 

손의 교량을 잃어버린 101 연대는 둘로 나뉘었다. 일군은 수킬로미터를 이동하여 베스트(Best) 부근에서 유사한 교량을 점령하고자 하였지만 가로막혔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인트호벤 북부에 당도하였다. 정오가 되어 제 30 군단의 정찰대와 조우한 이들은 무전기를 받아 4시경 손 교량의 손실을 보고하고 가교를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30군단은 아인트호벤에 도착하여 영국 공병부대가 가교를 놓을 때까지 대기하며 밤을 보냈다. 작전 개시 2일이 지난 이 시점에서, 진전된 내역은 당초 예정보다 36시간이나 뒤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 교량은 여전히 독일의 수중에 놓여있었다.

 

 

 

Day 3

 

이른 아침 제1대대를 선두로 세운 제 1공수여단은 아른헴 공격을 다시 시작하였다. 제3대대와 제2사우스 스태포드샤이어(South Staffordshires) 부대가 선두의 좌측을, 제11대대가 후미를 맡았다. 날이 밝아오며 접근이 발각된 제1대대는 독일군 주 방어진지로부터 포화세례를 받았다. 엄폐물도 없는 곳에서 세 방향으로부터 날아오는 포화에 휩싸인 제1대대는 붕괴되었고, 제3대대는 퇴각하였으며, 제2사우스 스태포드샤이어 부대는 허리가 잘려 150명의 인원만 퇴각에 성공하였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11대대는 북쪽의 고지대로 이동하려 했지만 위치가 드러나면서 독일군의 포화에 제압되어버렸다. 이 날 공격에 참가한 4개 대대 병력 중에 단 500명만이 살아남아 우스터비크에서 3마일 떨어진 아군 지역까지 퇴각할 수 있었다.

 

제2대대 600명의 인원은 여전히 아른헴의 교량 근처에서 발이 묶여있었다. 전날 보병만으로 이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격퇴된 독일군은 2대대 위치에 박격포와 야포 공격을 퍼부었으며, 보병 공격이 용이하게끔 인근 건물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제2대대는 위치를 끝까지 사수하였다.

 

우스터비크의 북쪽에서는 제4공수여단을 선두로 제1공수사단이 독일 방어선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통신 장애와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심각한 손실만을 남겼다. 넓게 산개한 사단병력은 모든 방향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전력의 상당부분을 손실당했다. 잔존 병력들은 제2대대에 접근하는 것을 포기하고 우스터비크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라인강 북부 쪽의 다리에 가까운 귀퉁이를 점령했다.

 

한편 이 날 강하가 예정되어 있었던 폴란드 공수 여단은 짙은 안개로 인하여 영국에 남은 채 대기하였고 대전차포와 차량이 실린 글라이더만 강하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강하 지점에 도착하였을 때 제4공수여단이 그곳을 지나 퇴각하고 있었고, 이들을 추격 중이던 독일군으로부터 강하와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었다.

 

오전 8시 20분, 504 공수연대는 제30군단과 흐라버에서 조우하여 군단 내 예비 병력으로 교체되었다. 이날 오후에야 제30군단의 전위가 네이메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이들은 벌써 아른헴에 도착해있어야 하였다. 영국 기갑사단의 2개 중대와 505공수연대의 제2대대가 네이메헌 교량 접수를 위하여 공격에 나섰지만, 교량을 400 야드 앞에 두고 독일군의 저항에 발이 묶였으며 밤이 될 때까지 독일군의 매복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제3대대가 다리 남부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는 동안 504공수연대가 보트로 강을 건너 북부를 공략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요청한 보트는 이 날 도착하지 않았다. 제30군단은 다리를 앞에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콜드스트림 근위대(Coldstream Guards)의 제1, 5 대대가 사단에 도착하여 공격을 돕게 되었다. 30대의 C-47 수송기들이 이들에게 보급물자를 투하할 예정이었지만, 너무 높은 고도에서 투하가 이루어져 보급품들은 회수되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전날 베스트 부근의 다리를 점거하려다 실패한 101 공수사단 병력의 일부가 아침부터 다시 공격에 나섰다. 오후에 영국군 전차들이 도착해서야 이들은 독일군을 밀어낼 수 있었다. 손 부근 강둑에 몇 대의 판터(Panther)가 나타나 영국 공병대가 부설한 가교에 대한 포격을 시작하였고, 마침 도착한 대전차포 덕분에 연합군은 다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Day 4

 

1944년 9월 20일에도 존 프로스트의 제2대대 병력은 여전히 다리에 묶여있었다. 정오쯤 되어 공중전화 회선을 사용한 통신이 가능해진 이들은 제 30 군단이 여전히 네이메헌에 있으며 자신들을 구원할 어떤 부대도 도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른헴 부근의 영국군들은 계속된 포격으로 사상자들이 속출하여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탄약과 식량, 의약품이 떨어지고 대전차 무기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된 이들은 독일측과 두 시간의 휴전을 맺고 부상자들을 내보내 독일측에 항복하게끔 하였다. 여기에는 존 프로스트도 포함되어 있었고, 프레드릭 고우(Frederick Gough)가 프로스트를 대신하여 남아있는 인원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짧은 휴전이 끝난 후 독일군은 남아있는 연합군을 제압하고 교량을 완전히 수중에 넣은 후 네이메헌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남아있던 영국군들은 탄약도 없이 백병전을 감수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이날 오전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의 마지막 교신 내용은 "탄약이 떨어졌음, 신이여 폐하를 보호하소서.No more ammo, God save the King"'이었으며, 이 내용은 독일측의 무전 청취병들에게만 전달되었다.

 

제1공수사단 병력은 10,000명 규모였으나, 나흘간에 걸친 작전동안 실제 아른헴 교량에 도착하여 강력한 반격을 버티며 임무를 수행한 인원은 제 2 대대의 740명뿐이었다. 이중 81명이 전사하였고, 독일측의 정확한 사상자 숫자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독일군의 피해 규모는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아른헴의 독일 부대들 중 11개의 부대가 절반가량의 전사자를 냈다고 보고하였다.

후일 이곳에서 싸운 제2대대의 업적을 기려 이 교량은 '존 프로스트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82공수사단의 개빈 장군은 제2대대의 전투를 '독립 공수대대 전투 역사상 최고의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제1공수사단의 잔존 병력은 서쪽으로 퇴각하였으며 우스터비크에 집결하여 이곳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지만, 다행히도 독일군의 공격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마을 동쪽에 방어진을 구축한 제1, 제3, 그리고 제11공수 대대는 이들을 고립시키려는 독일군의 공격에 격렬히 응전하였다. 마을 서쪽의 숲에는 제4공수 여단이 자리 잡고 격렬하게 싸웠지만, 박격포와 야포, 전차,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독일군의 공격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제10대대가 오후에 도착하였을 때는 단 60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후미의 156공수대대는 이보다 더욱 강력한 공격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단히 치열하게 싸웠으며 독일군은 자신들과 맞서 싸우는 적이 전날 패퇴한 부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150명 규모로 줄어든 대대 병력은 소총에 대검을 착검하고 돌격하여 숲 내부의 고지를 점거하고 8시간 동안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결국 독일군의 포위망을 허문 이들은 우스터비크의 아군 진영에 합류할 수 있었으며, 잔여 인원은 75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네이메헌에서는 전날 요청한 보트가 이날 오후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트 없이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3대대의 1,500명이 전면을 공격하는 동안 504공수연대 병력이 고무보트에 나눠 타고 도하를 시도하였다. 이들은 이 영국제 보트를 구경해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노도 부족하여 소총의 개머리판을 이용하여 배를 움직여야 했다. 독일군의 포화를 뚫고 도하에 성공한 인원은 절반뿐이었다. 생존자들은 기관포화를 뚫고 200미터에 달하는 개활지를 달려 교량의 북부를 점거하였다. 남북 양측에서 독일군이 물러나자 영국 기갑부대와 미국 공수부대원들이 다리를 건넜고, 네이메헌에서의 4일간에 걸친 전투를 끝냈다.

이 전투는 '리틀 오마하(Little Omaha)'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격렬했던 오마하 전투를 빗댄 의미이다.

 

동쪽에서 아른헴을 완전히 수중에 넣은 독일군은 한때 미국 공수부대와 콜드스트림 근위대의 공격으로 잠시 물러났지만, 곧바로 전차를 동원하여 아른헴 교량을 재탈환하였다. 독일군은 고속도로를 완전히 분리하여 북쪽의 연합군 공수부대들을 제30군단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킨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쪽에서 101공수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고, 몇 차례의 교전 끝에 팬져 전차 몇 대가 일단 고속도로를 점거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탄약 부족으로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제2군의 뎀프시(Dempsey) 장군은 네이메헌에서의 일을 전해 듣고 제82공수사단의 개빈 장군을 만난 자리에서 '오늘 세계 최고의 사단을 지휘하시는 분을 뵈어 영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Day 5

 

제1공수사단의 3,600명 정도의 잔존 병력은 우스터비크 주위의 건물과 숲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채 교량을 사수하며 제30군단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들을 모든 방위에서 공격하였다. 남동쪽에서는 제1, 제 3, 제11대대와 제2사우스 스태포드샤이어 부대가 독일군의 사단 규모 포격을 견디며 버텼고, 북쪽에서는 제7왕립 스코틀랜드 국경수비대(King's Own Scottish Borderers)가 거의 제압당할 지경에 이르렀었지만 백병전으로 겨우 위치를 지켜냈다. 그러나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에 있던 제1국경수비대의 B중대는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독일 기갑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다.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생존자들은 다른 부대에 흡수되어 계속하여 방어전을 수행하였다.

 

날씨로 이틀이나 강하가 지연된 폴란드 공수여단은 이날 오후에 제1공수사단이 점거하고 있는 지역 강 건너에 있는 새 강하 목표로 강하하였다. 그러나 보급물자는 영국 공군과의 연계 실수로 반대편 15킬로미터 부근에 투하되었다. 선박을 이용해 제1공수사단과 합류하려던 이들은 이미 반대편 고지대를 점거한 독일군의 포격으로 선박을 잃어버렸으며, 이 선박은 훗날 하류에서 심하게 손상된 채 발견되었다. 영국군과 합류하지 못한 폴란드 공수여단은 결국 이날 밤에 철군하였다.

 

그러나 제30군단 하에 있는 제64포병 연대에 교신이 닿은 제1공수사단은 가까스로 지원포격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다른 곳에서와 달리 교신이 원활히 이루어진 덕에 제 1 공수사단은 귀중한 화력지원을 얻게 되었다.

 

전날 네이메헌 교량과 인근 마을을 접수한 영국 기갑부대는 이후 18시간 동안 진군하지 않았다. 홀록스 장군은 네이메헌 전투로 혼란에 빠진 부대를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후에도 82공수사단을 원조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 절반은 네이메헌 전투로 지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았다. 전진과 보급 등의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고속도로에 달려있었다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되었다. 한 부대가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다면 다른 부대는 고속도로가 이용가능해질 때까지 대기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아른헴 교량을 완전히 손에 넣고 있었던 독일군은 아른헴 남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축축한 길로 어렵사리 진군한 영국 기갑부대는 견고한 방어선과 마주하게 되었다. 방어선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이들은 제43사단을 불러 합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43사단은 교통체증으로 20마일 밖 도로에 발이 묶여 있었다. 결국 43사단은 이날 도착하지 못하였다.

 

이제 독일의 우위는 분명해졌다. 이들은 30 군단의 진격로 곳곳에서 나타나 연합군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였다. 영국군과 101공수사단은 이들의 공격을 감당하며 진군해야만 했다.

 

400대 이상의 C-47 수송기가 포함된 1,500 여대의 항공기가 82 공수사단을 위한 보급물자를 투하하였고, 네덜란드 시민들의 협조 하에 60%가 82공수사단에 의해 회수되었다. 이동안 고속도로 출구에서는 연합군과 독일군의 밀고 당기는 교전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Day 6

 

독일군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전날의 전과를 만회하고자 제1공수사단에 줄기차게 포격을 실시하는 동시에 직접 공격을 가하였다. 독일군은 개개의 건물까지 포격 대상으로 삼아 압박해 들어갔지만 잘 설치된 대전차포의 위력에 힘입어 제 1 공수사단은 이 공격을 잘 방어해냈다.

 

그러나 이제 독일군과의 병력 비율은 4:1까지 떨어졌다. 폴란드 공수연대는 비록 라인강을 도하하지는 못했지만 존재만으로도 독일군을 자극하였고, 독일군은 이들이 아른헴 교량을 점령하거나 혹은 도로를 점거해 제10무장친위대 기갑사단을 고립시킬까 염려하여 2,400명의 병력을 우스터비크에서 빼내 폴란드 공수연대를 공격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날 아침 일군의 30군단 정찰대가 안개를 뚫고 폴란드 공수연대와 접촉에 성공하였다. 이 접촉은 당초 사흘 전인 19일 15시에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전날의 교통체증을 뚫고 진군한 제 43 사단은 안개가 걷히면서 위치가 노출되어 독일군의 포격을 받으며 저녁 무렵에야 폴란드군과 합류하였다. 폴란드 공수사단은 강 건너 영국 공수사단과 합류하기 위하여 강 위에 케이블을 걸고, 작은 보트에 올라타 케이블을 잡고 도하하고자 하였지만 케이블이 계속하여 끊어지는 바람에 노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이동은 독일군의 관측과 포격 하에 이루어졌으며, 새벽녘에 도하가 중단되기 전까지 52명의 폴란드군 공수부대원만이 살아남아 강을 건너갔다.

지루한 전투 끝에 고속도로 출구는 연합군의 수중에 완전히 넘어왔지만, 독일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Day 7

 

이제 폴란드 공수연대의 의중을 알아챈 독일군은 영국 공수사단이 강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영국은 강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버텼고, 양측은 많은 사상자들을 낳았다.

 

독일군은 폴란드군이 도하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강 건너편에도 공격을 가하였지만 때마침 도착한 30 군단의 전차들은 폴란드군을 도와 공격자들을 물리쳤다. 이날 보트와 영국군 공병부대, 그리고 캐나다군 공병부대가 도착하였고, 이날 밤 150여명의 폴란드군이 추가로 강을 건넜다.

 

도로를 이동하는 연합군에 대한 독일군의 공격이 잦아들자 제 30 군단은 도로를 다시 확보하고 보병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이곳은 아른헴으로부터 불과 수 킬로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Day 8

 

도로에 대한 독일군의 공격이 다시 재개되고, 이들은 밤사이에 방어진지까지 구축하였다. 연합군이 이로 인한 위협을 깨달았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작전은 중지되고, 연합군은 네이메헌의 자리 굳히기에 들어갔다.

 

이날 밤 제1공수사단을 원조하기 위하여 도르셋샤이어(Dorsetshire) 연대의 제4대대 소속 2개중대가 도하를 시도하였지만, 지리를 잘못 파악하여 독일군 지역으로 상륙하였다.

상륙과 동시에 독일군의 공격에 붕괴된 이들은 총원 315명 중 75명만이 우스터비크의 제1공수사단과 합류할 수 있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이 실패로 인하여 작전 지휘부는 제1공수사단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Day 9

 

제1공수사단이 라인강을 건너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새벽이었다. 밤 동안에는 철수가 어렵다고 판단한 제1공수사단은 때가 오기까지 위치를 고수하였다. 한때 2개의 독일 무장친위대 전투단이 동쪽 구역 방어선을 뚫고 깊숙이 찔러 들어와 사단을 위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지만 제64포병연대의 포격으로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제1공수사단은 이날 22시경 영국과 캐나다군 공병의 지원과 폴란드 연대의 엄호 속에서 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2,398명이 철수에 성공하였으며, 독일군의 방해 속에 남겨진 북쪽의 300 명은 포로가 되었다. 제1공수사단과 라인강 북부의 연합군은 총원 10,600여 명 중 1,485명이 전사하고 6,414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전체의 1/3이 부상을 당했다.

 

남쪽에는 새로 도착한 제 50 사단이 도로상의 독일군들과 교전을 벌여 다음날까지 이들을 격퇴하였다. 네이메헌의 교량은 10월까지 공수부대원들에 의하여 방어되었으며, 1944년 11월 캐나다군에 인계되었다. 캐나다군은 1945년 2월 독일 본토 공격 시 북부 아른헴 대신 동부 독일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총 9일간의 전투로 독일군은 2천명의 전사자와 8천명의 부상자를 냈다. 미국은 3,664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폴란드군은 전사 102명에 276명의 부상자를 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영국은 '마켓' 1,130명과 '가든' 5,354명, 도합 6,484 명의 전사자에 851 명의 실종자, 6,450 명의 포로까지 도합 13,785 명의 손실을 입었다. 연합군 전체의 손실은 독일측이 입은 손실의 두 배가 넘는다.

 

양측 병사들 외에도 이 전투로 많은 네덜란드인 시민들과 저항 운동가들이 죽었다. 영국군을 위해 일한 네덜란드인들의 피해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목숨을 잃었다. 현재 교량 옆의 녹지대는 당시 사망한 한 네덜란드인 장교의 이름을 따서 야콥 그뢰네부트(Jacob Groenewoud)라고 부른다.

 

마켓 가든 작전은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그 많은 교량을 모두 점령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지형 조건은 제30군단의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일부 강하 지점은 목표 교량에서 너무 멀었다. 흐라베에서의 경우 기습의 효과가 빛을 발하여 총 몇 발 쏘지도 않고 교량 점령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강하 지점과 교량과의 거리는 중요한 전술적 요인이 된다. 특히 제82공수 사단의 강하지점은 네이메헌 교량으로부터 너무나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리턴의 명령은 '번개 같은 기습' 이었으니, 지휘부의 안이함을 알만하다. 결국 기습의 요건은 사라지고, 독일군의 방어 구축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제30군단의 행보도 의문투성이다. 이들은 첫날 출발도 늦었던 데다가 가교를 놓는다는 이유로 또다시 지체되었고, 네이메헌의 82공수사단을 지원하러 갈 때도 늦게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네이메헌을 도하한 이후에도 이들은 또 다른 18시간을 허송세월하였다. 504연대의 로이벤 터커(Reuben Tucker) 대령은 그들이 차를 마시느라 정지해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은 아니겠지만 이것은 당시 영국군 기갑부대를 바라보는 미군 공수부대원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릿지웨이(Ridgway)도 영국군에게 적극성이 부족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사실상 아른헴의 교량도 라인을 건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아니었으며, 선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제 30 군단의 사령관 또한 아른헴 대신 25킬로미터 서쪽의 레흐넨(Rhenen) 교량을 점령하자고 제안한 바가 있으며, 당시 독일군의 공세가 우스터비크에 집중된 관계로 레흐넨은 거의 방어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 공수사단이 네덜란드 저항운동의 도움을 받았던 데 비하여 영국은 이를 무시하였다. 여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는데, 영국 첩보부가 예전에 네덜란드 저항세력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네덜란드 저항세력 가운데 독일의 끄나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 때문에 영국 정보부는 네덜란드 민간인들에 대한 접촉을 최소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픈 과거가 없는 미국은 이들을 잘 활용하였다. 라인강에 선박이 있다는 정보라든지, 연합군의 고장난 무전기 대신 쓸 수 있는 지하 통신망이 있다는 등의 정보들은 잘만 활용되었다면 전투의 흐름을 바꿔놓았을지 모른다.

 

아이젠하워는 죽는 날까지 마켓 가든 작전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던 작전이라고 생각하였다. 코넬리우스 라이언(Cornelius Ryan)은 그의 책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신이 영국에서 뭘 들었는지 모르지만 영국은 절대 미국의 지휘 체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나는 영국이 금빛으로 빛나는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것을 들어본 바 없고, 당신 또한 그러할 것이오. 특히나 몽고메리 같은 사람으로부터는 말이지' 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사실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몽고메리의 경우 마켓가든을 90% 성공한 작전이라고 하였다. 항공기와 지상군, 그리고 필요 물자만 제때 도착했더라면 날씨탓이나 독일 기갑사단, 또는 자신의 전술적 실수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에 대하여 네덜란드 왕자 베른하르트(Prince Bernhard)는 코넬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 나라는 결코 다시는 몽고메리의 성공담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른헴은 1945년 4월 14일 제1캐나다 군단의 이틀간에 걸친 공격으로 해방되었다. 아른헴의 다리는 전쟁 중 결국 무너졌으며, 전후 유사한 모습으로 다시 세워져 1978년 9월 '존 프로스트 다리' 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른헴 근처의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To the People of Gelderland; 50 years ago British and Polish Airborne soldiers fought here against overwhelming odds to open the way into Germany and bring the war to an early end. Instead we brought death and destruction for which you have never blamed us. This stone marks our admiration for your great courage remembering especially the women who tended our wounded. In the long winter that followed your families risked death by hiding Allied soldiers and Airmen while members of the resistance led many to saf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