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임박한 연합군의 유럽 재진입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전략적으로 그에게 가장 불리한 점은 독일군 점령지역이 프랑스 서해안에서 그리스 동해안까지 너무 길게 뻗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의 다음 공격 지점이 어디인지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연합군의 가장 큰 전략적 이점은 선택할 수 있는 목표물의 범위가 넓다는 점과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독일군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이었다.
추축국은 튀니지에서 병력을 구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1943년 한여름에 시칠리아 섬에 배치할 수 있었던 병력은 온갖 잡다한 병과의 이탈리아군 10개 사단과 독일군 2개 기갑부대뿐이었다. 한편 연합군은 약 50만 명의 병력을 시칠리아 섬에 투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무렵 지중해 일대에서 연합국의 공군력은 추축국보다 훨씬 우세했기 때문에(독일과 이탈리아는 약 1,500대의 항공기를 갖고 있었지만, 연합국의 비행기는 4,000대가 넘었음) 추축국의 폭격기는 6월에 시칠리아 섬에서 이탈리아 중북부의 기지로 철수했다.
7월 10일 연합국 병력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주로 시칠리아인들이 지키고 있던 해안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시칠리아인들은 고향 땅이 독일군을 위한 전쟁터로 바뀐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을 애써 막으려 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섬에 상륙한 지 3일 만에 섬의 남동부를 평정했다. 추축국이 아프리카에서 잇따라 재난을 당한 뒤, 이탈리아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맺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은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둘러 행동을 취했다.
1943년 7월 24~25일 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대평의회는 무솔리니 탄핵안을 다수의 찬성으로 의결했고, 무솔리니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7월 25일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새 정부는 상당히 많은 수의 독일군이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는데도 연합국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무솔리니가 몰락한 지 며칠 뒤, 독일은 시칠리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연합군은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기 위해 약 2만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추축국은 약 16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가운데 독일군은 3만 명 정도였다.
연합국이 시칠리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무솔리니가 몰락하자, 미국의 군부 및 정치 지도자들은 이탈리아 전투를 지지하게 되었다. 시칠리아를 확보한 연합군은 다음에 공격할 방향을 고르기 시작했지만, 선택의 폭이 너무 넓었다. 이탈리아의 '발가락'인 칼라브리아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명백한 목적지였다. '정강이'도 취약지점이었고, '뒤꿈치'도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몽고메리가 지휘하는 2개 군단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1943년 9월 3일에 이탈리아의 '발가락'에 상륙했다. 초기의 저항은 사실상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험준한 지형이 대군의 병력 배치를 방해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천천히 진격했다. 연합군이 '발가락'에 상륙한 날, 이탈리아 정부는 연합국이 항복 조건으로 제시한 비밀조항에 동의했다. 이탈리아는 되도록 빨리 독일에 대항한 전쟁에 참여하여 그 정도에 따라 관대한 대우를 받기로 양해되었다. 항복이 발표된 것은 9월 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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