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은 300만 명으로 이루어진 150개 사단을 이 원정에 할당했다. 이 가운데에는 기갑사단도 19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원정군은 탱크 3,000여 대와 각종 야포 7,000문 및 항공기 2,5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최강의 침략군이었다.
소련은 독일보다 2~3배나 많은 탱크와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소련 항공기는 대부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었다. 그러나 소련 탱크는 독일 탱크와 거의 대등했다. 히틀러가 승리할 가능성을 줄인 더 큰 장애물은 스탈린이 깊숙한 후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예비 병력을 독일 정보부가 과소 평가한 것이었다. 그결과 독일군이 처음 만난 소련군을 뛰어난 기술로 분쇄하고 나자, 다시 새로운 부대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초기에 승리를 거둔 뒤 어느 쪽으로 진격할 것인가를 놓고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이 논란을 벌이면서 8월의 대부분을 허송했기 때문에, 정보부의 계산 착오가 낳은 결과는 훨씬 더 확대되었다. 독일의 계산에는 순전히 정치적인 요인도 작용했지만, 이 정치적 계산도 군사적 계산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었다. 독일은 그들이 침략한 지 3~6개월 안에 소련 정권이 국내의 지지를 얻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영국의 상황은 당장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영국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보기에 영국의 장래는 절망적이었다. 영국정부는 프랑스가 함락된 뒤에도 히틀러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계속 싸우리라고 결정했지만, 미국이나 소련이 구원하러 오지 않을 경우 이 결정은 서서히 자멸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다. 그런데 영국을 구해준 것은 엉뚱하게도 히틀러였다. 영국이 견디기 어려운 중압을 느끼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히틀러는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소련을 공격한 것이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루스벨트는 소련을 돕기로 결심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 대중의 의혹 때문에 소련도 미국의 무기 대여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을 1941년 11월까지 미루었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선언이 이루어진 직후에 항공기와 탱크를 비롯한 보급품을 소련에 인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기습 공격에 소련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독일군은 초기에는 순조로운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고립된 소련군은 프랑스군과는 달리 완강하게 버티며 싸웠고, 독일군이 물밀듯이 휩쓸고 지나간 지 한참 뒤에도 주요도로를 계속 봉쇄함으로써 독일군을 견제했다. 후퇴하는 소련군이 채택한 초토화 정책도 독일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에 직면하면 재빨리 농작물을 불태우고 다리를 파괴하고 공장을 비우면서 후퇴했다. 소련인들은 서쪽 끝에 있는 철강공장과 군수품공장의 생산 설비를 모조리 제거하여 철도를 통해 동부로 운반했고, 동부에서 다시 조립하여 강철과 군수품을 생산했다.
소련인들은 또한 철도 차량을 대부분 파괴하거나 철수시켰다. 또한 소련의 철도 궤도는 독일의 궤도와는 서로 간격이 달랐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의 철도망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7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640km를 진격하여, 모스크바에서 3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이르렀다.
독일군은 오랫동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지만, 곧 초겨울 날씨와 소련군의 반격에 부딪혀 공세를 잠시 늦출 수밖에 없었다. 10월과 11월에는 겨울옷을 아직 지급받지 못한 독일군의 상당수가 동상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얼어붙을 듯한 추위는 독일군의 기계화된 수송 기관과 탱크, 야포 및 항공기를 마비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두툼한 옷을 입었고, 겨울에는 독일군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력을 과시했다. 이 무렵 독일군 사상자 수는 이미 프랑스 전투와 발칸 전투에서 생긴 사상자 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11월까지 독일군은 약 7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침략군은 장군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비참한 모스크바 철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 히틀러는 지역에 따라 잠시 물러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걸음도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의 결정으로 독일군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2차세계대전_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반기 (0) | 2013.02.12 |
---|---|
태평양 전쟁 (0) | 2013.02.12 |
영국과 독일의 전략 (0) | 2013.02.12 |
미국의 세계대전 가담 (0) | 2013.02.12 |
그밖의 전선 (0) | 2013.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