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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_歷史

중반기

chocohuh 2013. 2. 12. 13:01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들은 194011월 이래 '유럽 우선원칙'을 바탕으로 전략계획을 수립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참전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공세를 펴고 있는 동안 태평양에서는 방어작전만 수행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참전으로 미국의 비교전(非交戰) 입장은 끝났다.

 

루스벨트와 처칠 및 그 참모들은 19411222일 워싱턴에서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의 3주간 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미국측은 유럽 우선원칙의 유지를 재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2가지 계획안을 제시했다. '슬레지해머'라는 암호명을 가진 첫번째 시안은 영국이 프랑스에 상륙하기로 결정할 경우 영국의 공격력을 증강하기 위한 계획안이었고, '슈퍼짐내스트'라는 암호명을 가진 2번째 안은 영국이 리비아의 독일군 후방에 상륙하는 작전(이 상륙 작전은 '짐내스트'라는 암호명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었음)과 미국이 모로코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카사블랑카에 상륙하는 작전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다.

 

한편 처칠은 소련의 용기를 북돋아줄 만한 일을 찾기에 골몰하고 었었다. 1942717일에 이미 그는 독일군이 북극해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 때문에 러시아 북부로 보급품을 보내는 것을 당분간 중지해야겠다고 스탈린에게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43년 이전에는 유럽에 제2전선이 형성되지 않으리라고 스탈린에게 알리는 것은 더욱 난처한 일이었다.

 

1942년 내내 스탈린은 유럽 제2전선을 형성하라고 계속 압력을 넣었고, 다른 연합국의 공산당과 친소주의자들도 스탈린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미국의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은 1943년에 제2전선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4211월초에 처칠과 루스벨트는 영국 해협 건너편의 영국이 아닌 지중해 건너편의 북아프리카가 다음 대규모 작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427월 내내 계속된 제1차 엘알라메인 전투는 이집트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독일군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너무 먼 거리를 너무 빨리 진격해 온 롬멜 부대는 기진맥진해 있었고, 그들의 첫번째 공격은 클로드 오킨렉 경(웨이벌의 후임으로 중동 지역을 맡게 된 영국군 최고사령관)이 끌어모은 수비대를 분쇄하지 못했다.

 

영국군은 기진맥진한 나머지 반격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지만 롬멜도 부하들에게 휴식을 주어야 했고, 덕분에 오킨렉 장군은 증원군을 투입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7월말에 이르자, 로멜은 이제 오킨렉이 아니라 자신이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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