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410

스파게티의 해에

1971년은 스파게티의 해였다. 1971년에, 나는 살아가기 위해 스파게티를 계속 삶았고, 스파게티를 삶기 위해 계속 살아갔다. 알루미늄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증기야말로 나의 자랑이고, 소스 팬 속에서 부글거리는 토마토소스야말로 나의 희망이었다. 나는 주방 용품 전문점에 들러 독일 셰퍼드를 목욕시키는 데라도 사용될 법한 거대한 알루미늄 냄비를 손에 넣고, 쿠킹 타이머를 사고, 외국인용 슈퍼마켓을 돌며 기묘한 이름의 조미료들을 사고, 양서(洋書)를 파는 책방에서 스파게티를 전문으로 다룬 책을 발견하고, 한 박스 단위로 토마토를 샀다. 나는 모든 종류의 파스타를 사들여 온갖 종류의 소스를 만들었다. 마늘이나 양파, 올리브 오링 따위의 냄새를 미세한 입자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서, 혼연 일체가 되어 내가 살고 ..

도넛화

도넛화(1) 3년 동안 교제하고 나서 결혼하기로 약속한 애인이 도넛화(化)해 버리고 그래서 우리들 사이가 거북했을 때쯤 -도대체 어느 누가 도넛화 해 버린 애인과 잘 지낼 수 있겠는가? 나는 매일 밤마다 고주망태가 되어 에 나오는 험프리 보가트 처럼 비쩍 마르고 초췌해져 있었다. "오빠, 제발 부탁이니깐 그녀 일은 단념해요. 이러다간 몸을 망치고 말겠어요." 누이동생이 충고해 주었다. "오빠 마음은 잘 알지만, 한번 도넛화해 버린 것은 다신 원상 복귀되지 않아요. 이젠 분명히 결단을 내려야한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그녀 말 대로이다. 여동생이 말하듯, 한번 도넛화한 것은 영원히 도넛화된 채인 것이다. 나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고 작별을 고했다. "너하고 헤어지는 것은 괴롭지만, 결국 이렇게 될 운..

만년필

만년필 가게는 큰 길에서 두어 골목 안으로 들어간, 허름한 상점가의 한 가운데쯤 있었다. 출입구에는 유리문 두 짝 만한 간판이 나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문패 옆에 '만년필 맞춤'이라고 조그만 글씨로 씌어 있을 뿐이다. 유리문은 끔직하게도 아귀가 뒤틀려 있어 열었다가 반듯하게 닫기까지 일주일은 걸릴 상 싶은 낡은 것이었다. 물론 소개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시간도 걸리고, 돈도 든다. '하지만 말이야, 꿈처럼 제 맘에 쏙 드는 만년필을 만들어 준다구.' 하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온 것이다. 주인은 예순 살 정도, 숲 속 깊은 곳에 사는 거대한 새 같은 풍채이다. "손을 내놔 봐요." 하고 그 새는 말했다. 그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 그 길이와 굵기를 재고, 피부에 껴있는 기름기를 확인하고, ..

마을과 그녀의 면양

삿포로 거리에는 올해 들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비가 눈으로 바뀌고, 눈이 다시 비로 바뀐다. 삿포로에 내리는 눈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다. 마치 소문 나쁜 친척 같다. 10월 23일 금요일. 도쿄를 떠날 때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하네다에서 747을 타고 워크맨으로 90분 테이프를 한 개 들을까 말까 하는데, 나는 이미 눈 속에 서 있다. "다 그런 거지 뭐." 친구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이쯤이 되면 첫눈이 내리지. 그리고 겨울이 시작돼." "굉장히 춥구먼." "이건 약과야. 진짜 겨울은 무진장 춥지." 우리는 고베 근처의 작고 따사로운 거리에서 자랐다. 우리는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줄곧 같이 다녔다. 함께 여행도 했고, 더블데이트도 즐겼다. ..

침묵

나는 오사와 씨에게 지금까지 싸우다 누군가를 친 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오사와 씨는 눈부신 무엇이라도 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 라고 그는 말했다. 그 눈초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거기에는 번뜩 빛을 발하는 어떤 섬뜩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었다. 그는 그 빛을 금방 안으로 숨기고 예전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딱히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이렇다 할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 -어쩌면 불필요할 질문을- 하게 한 것이다. 그 후 나는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오사와 씨는 내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

비오는 날의 여인 #241. #242

검정 플라스틱 손가방을 든 중년여인이 우리 집 현관에 서서 벨을 누르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찐 여자로 시각은 오후 4시 전이었다. 그녀가 벨을 누르자, 휑뎅그렁한 집 안에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하고 텅 빈 위장 바닥에 앉아 누군가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중년 여성이 검은 손가방을 들고 있다는 그 조합도 왠지 이상하고, 사실 그 가방은 그녀에게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블라인드 사이로 살그머니 여인을 관찰했다. 연령은 40세에서 45세 사이이며 어디에나 있는, 아무 데서고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키는 크지 않다. 핑크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고, 엷은 갈색 장화를 신고 있었다. 우산은 녹색 비닐우산이다. 지나치게 색이 짙은 드롭..

개똥벌레

옛날이라고 하지만 따져 보면 14~15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어느 학생 기숙사에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열여덟 살로, 대학에 갓 들어간 참이었다. 도쿄의 지리는 어느 곳 하나 아는 데가 없었고,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혼자 살아 본 경험도 없었다. 해서 부모님이 염려하며 그 기숙사의 방을 얻어 주었다. 물론 비용 문제도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독신 생활의 그것에 비해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지만 입학금이며, 수업료며 다달이 보내오는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런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기숙사는 전망이 좋은 분쿄구의 높은 지대에 있었다. 택지는 넓고, 주위는 높다란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기숙사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솟구쳐 있었다. 수령은 150년, 혹은 좀 더 나이를..

강오리

좁은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서자 기다란 복도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천장이 높아서 그런지 복도는 고갈된 배수관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형광등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 빛은 가는 망을 빠져나온 듯 불균일했다. 게다가 세 개 중에 하나는 전구가 빠져 있었다. 앞을 내다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어둠침침했다. 주위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다만 운동화 고무 밑창이 콘크리트를 밟는 평평한 음만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흐릿한 복도에서 울렸다. 2맥 미터인가, 3백 미터인가, 아니 족히 1킬로는 걸은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걸었다. 거리도 없고, 시간도 없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감각조차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T자로가 나타났다 T자로? 나는 윗옷 주머..

거울

아까부터 자네들의 체험담을 듣고 있자니까 말이지, 그런 경우의 이야기엔 몇 가지의 패턴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거든. 우선 한 가지는, 이쪽에 삶의 세계가 있고, 저쪽에 죽음의 세계가 있어서, 그것이 그 어떤 힘에 의해 어디선가 교차한다는 형식의 이야기란 말이지. 예를 들면 유령이라든가 하는거. 그리고 또한가지는, 3차원적인 상실을 넘어선 어떤 종류의 현상이나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예지라든가 예감이라든가 하는 거 말이야. 크게 나누면 그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말일세, 모두가 어느 쪽인가 한쪽 분야만을 집중해서 경험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결국 말일세,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은 흔히 유령은 보지만 예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일곱 번째 남자

"그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려 한 것은 내가 열 살이던 해의 9월, 어느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는 그날 얘기하기로 되어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창 밖 깊은 어둠 속에서 서쪽으로 부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은 정원수들의 잎을 살랑살랑 흔들고 유리창을 달그락 달그락 흔들고, 그리고 조그만 호루라기를 불듯 뾰족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불어갔다. "그것은 특수한 종류의,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파도는, 간발의 차로 나를 집어 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신 내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삼키고서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