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chocohuh 2023. 8. 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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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극적이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랑보다 슬픈 사랑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이별의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꿈꾸지만 그런 사랑은 아주 드물다.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사랑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 고통은 너무나 지독하기 때문에 좀처럼 감당하기 힘들다. 때로는 영혼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사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떠한 보상을 받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인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어떠한 미덕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마침내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이다음에 다가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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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에 대하여, 정직하게 말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내가 정직하게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말은 어둠의 밑바닥으로 빠져든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수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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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식물의 종자가 변덕스러운 바람의 손길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운반되듯이 우리 또한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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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일에서 시작된다. 아니, 거기에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하찮은 일이 소중한 것으로 바뀌고 마침내 생명까지도 걸 만큼이나 진지하게 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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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마치 반딧불과 같은 것이 아닐까?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 존재를 확인하기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밤이 깊을수록 반딧불은 환하게 빛나고 새벽이 밝아오면서 어디론가 사라진다. 반딧불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희미한 빛의 궤적은 나의 가슴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작고 희미한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어버린 넋인 양 언제까지나 헤매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어둠 속으로 살며시 손을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내 손가락보다 아주 조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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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창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서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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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정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였다. 내가 쓰는 소설의 간명한 주제는 바로 사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보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와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적인 사회의 무게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맞서 싸우다가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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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은 거칠고 험하다. 냉정한 사랑이란 결국 따뜻한 사랑이 뿌리 깊게 진행되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의해, 마침내 사랑은 수증기처럼 기화해서 천국의 입구까지 도달한다. 태양의 따뜻한 온기에 의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버린, 그러나 여전히 영원한 사랑을 잡기 위해 애타게 손을 내미는 눈사람들을, 어쩌면 가슴이 메마른 사람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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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앞 유리창으로 비쳐 들어와 나를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는 순간 그 빛이 나의 눈꺼풀을 따뜻하게 내리쬐는 것이 느껴졌다. 햇빛이 그 멀고 먼 길을 더듬어 이 작은 혹성에 도착해서 그 힘의 한 자락을 통해 내 눈꺼풀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야릇한 감동이 나를 감쌌다. 우주의 섭리는 나의 눈꺼풀 하나조차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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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건에 집착이 많은 편도 아니고 수집벽 같은 것도 없는 편이다. 그런데 치우지 않고 그냥 놔두면 사방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점점 더 쌓인다. 음반이나 책, 팸플릿, 포스터, 서류, 사진, 우산, 볼펜 등의 물건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에 의해 늘어나고 어떤 것들은 필연성도 없이 늘어난다. 그러나 필연성이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그 물건들은 자동적으로 증가하고 우리의 한정된 힘으로 그 흐름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까지 한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잡동사니들을 버린 후에야 비로소 넉넉한 나의 공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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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과 미움과 욕망이 없다는 것은 그 반대의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애정이다. 절망이 있고 환멸이 있고 비애가 있음으로 해서 기쁨도 생기는 것이다. 증오가 있기에 사랑도 있다. 절망이 없는 행복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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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다시 한 번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처럼 똑 같은 인생을 더듬어가면서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나 자신이 되는 것 말고는 또 다른 길이란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고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버리고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된다고 해도 나는 나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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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라. 그대는 죄수가 아니다. 그대는 꿈을 찾아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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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아주 조용했다. 모든 소리를 책이 전부 흡수해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책에 흡수된 소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소리가 사라진 게 아니고 공기의 진동에 흡수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책에 흡수된 공기의 진동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몰론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진동은 다만 단순히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영원한 운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운동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만 해도 영원한 운동이 아니다. 지난 주일이 없는 이번 주일은 있을 수 없고, 이번 주일이 없는 다음 주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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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별을 강요한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마을에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이었고 소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다지 잘 생긴 소년도 아니었고 그다지 아름다운 소녀도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하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이 세상 어딘가에 100% 자신과 똑같은 소년과 소녀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기적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확실히 일어났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거리 모퉁이에서 딱 마주치게 된다.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언제까지나 실컷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이미 고독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 100%의 상대자를 원하며, 자신이 그 상대자의 100%가 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얼마 안 되는, 극히 얼마 안 되는 의구심이 파고든다. 이처럼 간단하게 꿈이 실현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대화가 문득 끊어졌을 때 소년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 다시 한 번만 시도해 보자. 가령 우리 두 사람이 진정한 100%의 연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이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100%의 연인이라면 바로 결혼하자고."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어느 해 겨울 두 사람은 악성 독감에 걸려서 며칠 동안이나 사경을 헤맨 끝에 과거의 기억들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이 깨어났을 때 그들의 머릿속은 마치 D.H 로렌스의 소년시절 저금통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서른두 살이 되었고 소녀는 서른 살이 되었다. 시간은 놀라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해맑은 날 아침에 소년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똑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마주친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 순간 비춘다. 그들의 가슴이 마구 떨린다. 그리고 그들은 안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100%의 남자 아이야.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나 연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 만큼 맑지도 않다. 두 사람은 그냥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 엇갈린 채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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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없는 사람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따뜻한 마음만이 우리를 진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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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희망. 나는 같은 시간,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러한 나의 희망을 방해하고 있다. 나의 희망은 무척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다는 것뿐이다. 세 개나 네 개도 아닌 '단지 두 개'인 것이다. 나는 콘서트홀에서 관현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롤러스케이트를 타보고 싶다. 나는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경하는 동안 맥도널드애서 햄버거를 먹고 싶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당신과 함께 잠을 자고 싶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 싶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없다면 사랑의 꽃은 만개하지 않는다.

사랑의 가치는 두 사람이 품고 있는 믿음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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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새로운 것과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새롭고 낯선 것들과 만나게 되는 과정이 몇 년 동안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질 수도 있고 하루아침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강물이 흐르고 푸른 숲이 있던 마을이 개발되면서 고층 빌딩과 아스팔트 도로, 자동차의 물결로 변모할 수도 있다. 혹은 머나먼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서 낯선 환경과 문화를 접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 새롭고 낯선 세계에 대해 조금씩 익숙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조금씩 나는 살과 뼈를 이 무겁고 습한 우주의 단층 속에 잠입시켜 나갈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느 상황 속으로도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어떤 선명한 꿈도 결국은 선명하지 않은 현실 속에 삼켜지고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그런 꿈이 존재했던 것조차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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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비는 내리는지 혹은 내리지 않는지조차도 모를 만큼의 가는 이슬비. 그러나 분명히 비는 지상으로 내려와서 달팽이를 적시고 울타리를 적시고 꽃잎을 적신다. 그 누구도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또한 그 누구도 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비는 언제나 공정하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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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달팽이가 신화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껍질은 어두운 암흑세계를 의미하고 달팽이가 껍질에서 나오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팽이를 보면 본능적으로 껍질을 깨서 달팽이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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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을 보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그것도 수많은 별똥별들이 무리를 지어서 일제히 떨어지는 광경은 정말 아름답다. 나는 어느 겨울밤에 우연히 별똥별들이 떨어지는 것을 관찰했던 적이 있었다. 아름답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사랑하는 그녀와 나는 해변 근처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아파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섹스를 한다거나 포테이토칩을 먹거나 하는 것이 하루 종일 우리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 당시에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우리는 겨울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별똥별들이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겨울밤에 별똥별들이 추는 춤.

"멋있어요. 우리는 운이 좋아요."

10분 후에 별똥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폭죽을 터뜨린 것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더니 잠시 후에는 이따금씩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별똥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화부스가 너무 멀어서 우리 둘만 즐기기로 했다. 그 당시의 무수한 별똥별들, 마치 밤하늘을 태우는 듯한 풍경을 지금도 확실히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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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소파를 선택하는 일에는 그 사람의 품위가 배어나온다고 확신했다. 내 생각이 편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파라는 것은 침범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소파에 앉아서 성장한 자만이 알 수 있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성장하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성장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좋은 소파는 또 하나의 좋은 소파를 낳고 하나의 나쁜 소파는 또 하나의 나쁜 소파를 낳는다. 정말로 그런 것이다. 나는 고급 자동차를 굴리면서도 집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소파를 두고 사는 사람을 몇 명인가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자들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비싼 자동차일 뿐이다.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소파를 사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식견과 경험과 철학이 필요하다. 돈이 들기는 하지만 돈만 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자신의 확고한 이미지가 없다면 훌륭한 소파를 손에 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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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너무나도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흔적을 다시 더듬을 수 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을 더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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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법칙은 아주 간단하다. 수많은 공을 들여서 쌓아올리는 일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파괴하는 일에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빛이 반짝하는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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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 몸이 소멸되고 난 후에 영혼만이 남는다면, 나는 훨씬 행복할 것이다. 만약 내 영혼이 배의 상처나 위궤양이나 치질 같은 것을 영원히 짊어져야 한다면 도대체 구원은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영혼이 육체에서 철저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면 영혼이란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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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두 제각기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행위, 진보도 없는 노력, 그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 여행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닌가?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아무도 앞질러 가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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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희극이 공연되는 무대. 그리고 우리 모두는 희극에 출현하는 광대. 누가 여기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강한 빛에 노출된 방속국의 스튜디오로부터 계곡 사이에 숨어있는 은둔자의 암자에 이르기까지. 희극의 무대는 모두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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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시나 공원, , 야구장, , 영화관, 식물원 등에는 모두 이름이 붙어있는 것일까? 그것들은 지상에 고정되어 있는 대가로 이름을 부여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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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종착역. 신이 나에게 부여한 의무를 모두 끝내고 나면 나는 다시 태어나기 이전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죽음이다. 내 생명이 모두 끝난 후에 과연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 인생의 장밋빛 광채가 35년 동안에 이미 98%나 사용해서 닳아 없어졌다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다만 나머지 7%만이라도 소중하게 가슴에 품은 채, 이 세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책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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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디깊은 슬픔에는 눈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깊은 슬픔이 눈물마저도 빼앗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 지지 않고, 다만 한 줄기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슬프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지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전할 수 없어서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언어를 폐쇄시키고 나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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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도 꿈을 꾼다. 가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바로 꿈이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두 개의 철길 사이에 끼여 있는 초라한 집에서 두 해를 보냈다.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굉장히 시끄러웠으며 따라서 집세도 쌌다. 조잡하게 대충 지은 집이었기 때문에 틈새로 바람이 도처에서 들어왔다. 덕분에 여름은 쾌적했지만 그 대신에 겨울은 지옥이었다. 석유난로를 살 돈도 없었기에 해가 저물면 나와 그녀와 고양이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서 글자 그대로 서로 끌어안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의 설거지통이 얼어붙는 일 같은 것도 늘상 있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왔다. 봄은 멋진 계절이었다. 봄이 오면 나도 그녀도 고양이도 한숨을 돌렸다. 날씨가 따뜻했기 때문에 적어도 추위에 떠는 일 만큼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4월에는 철도청에서 며칠 동안 파업을 했다. 파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철길은 햇빛이 잘 드는 양지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철길로 내려가 뒹굴면서 한가롭게 햇살을 쬐었다. 마치 호수 바닥에 앉아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철길 가에는 들풀이 자라고 있었고 색깔이 알록달록한 꽃들도 피어 있었다.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재잘거리고 사방은 노아의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적막했다. 이대로 그냥 신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겠는데 하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우리는 젊었고 막 결혼했고 햇살은 공짜였다. 나는 지금도 가난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삼각형의 가늘고 긴 집을 떠올린다. 지금 그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그 사람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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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다. 이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들은 도너츠의 구멍과 도너츠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 들이냐 아니면 존재로 받아 들이냐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도너츠의 구멍 때문에 도너츠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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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의 소설 중에는 '그 어떤 면도기에도 철학이 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날마다 계속 반복하다 보면 거기에는 저절로 철학이 새겨난다는 뜻이다. 여자의 경우라면 '립스틱에도 철학이 있다.'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서머셋 모옴의 이 문장을 읽고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하고 꽤나 순진하게 감동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즈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언더록에도 철학이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8년 동안 매일매일 언더록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 언더록에도 철학이 있을까? 그렇다 분명히 있다. 그까짓 언더록, 얼음에다 위스키를 갖다 붓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얼음을 깨는 각도 하나에 따라 언더록의 품위나 맛이 영 달라진다. 큰 얼음과 작은 얼음의 차이, 미세한 각도의 차이, 온도의 차이에 따라서 그 녹는 양태가 다르다. 큰 얼음만 사용하면 투박해서 멋이 없다. 작은 얼음이 너무 많으면 금방 녹아서 물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대중소의 얼음을 조화롭게 섞어서 거기에다가 위스키를 따른다. 그러면 위스키가 잔속에서 호박색의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소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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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시대가 바뀌면 많은 것들이 바뀌는 법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걸로 된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들이 뒤바뀌는 것이니까. 혼돈이 그 모양을 바꾸었을 뿐이다. 기린과 곰이 모자를 맞바꾸고 곰과 얼룩말이 목도리를 서로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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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따라 난 길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었다. 물줄기와 함께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강의 숨결을 느낀다.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들이야말로 강의 숨결을 느낀다.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들이야말로 이 거리를 만든 장본인이다. 몇 만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들은 산을 허물고 흙을 실어 나르고 바다를 메워서 그곳에 나무들이 우거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거리는 그들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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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많다. 조금씩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떤 러시아 작가가 '성격은 조금씩 변하지만 평범함이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은 가끔씩 아주 재치있는 말을 한다. 긴 겨울 동안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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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비오는 날은 꿈꾸기 좋다. 어떤 경우에는 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순수한 차원에서 개인적인 체험이 된다. 즉 비를 중심으로 의식이 회전함과 동시에 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비가 회전한다. 아주 막연한 표현이지만 그런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 머리는 지독히 혼란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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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의 법칙. 나쁜 일이란 종종 겹치는 법이다. 이 말은 물론 일반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쁜 일이 몇 번인가 겹치게 되면 이 말은 더 이상 일반론이 아니게 된다. 만나기로 한 여자와는 길이 엇갈리고 양복의 단추가 떨어져 버리고 지하철 안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충치가 아프기 시작하는데다가 비까지 내리고 택시를 타니까 교통사고로 도로가 막혀 버리는 형편이다. 이런 순간에 만약 나쁜 일이란 겹치는 법이라고 말하는 녀석이 있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 놈을 때려눕힐 것이다. 일반론 따위란 결국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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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우연히 서로 알게 된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으나 적어도 그것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을 수는 있었다. 그렇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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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계속 가지고 있는 한, 나이를 먹는 것도 그다지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일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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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을 맞이하는 마음.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고 마치 다리를 건너듯이 소리를 내며 내 몸 위를 통과하고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이십대의 마지막 남은 한 해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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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어 있지 않고 말을 마치는 시점에도 사태는 여전히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결국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기 요양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조촐한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연히 다가온 사랑이 삶의 전부를 빼앗아간다. 사랑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과 비교할 때 사랑하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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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문장을 쓰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한 적이 있는가 하면, 사흘 밤낮을 계속 썼지만 그 결과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느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것은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비해 거기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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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노트의 가운데에 한 줄의 선을 긋고 왼쪽에는 그 동안 얻게 된 것들을 쓰고, 오른쪽에는 잃어버린 것들을 썼다. 잃어버린 것, 짓밟은 것, 특히 내버려둔 채 돌보지 않은 것, 희생시킨 것, 배반한 것. 나는 그 작업을 끝까지 계속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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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우리가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실제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아무리 긴 자를 가지고도 그 깊이를 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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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뿌리. 고통이란 가장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나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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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꺼림직 한 일이다. 거짓말과 침묵은 현대 인간 사회에 만연한 두 가지의 커다란 죄악이라고 말해도 좋다. 실제로 우리는 자주 거짓말을 하고 부단히 침묵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지껄이고, 그것도 진실 밖에 지껄이지 않는다면 진실의 가치 같은 것은 잃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어둠으로 인해 빛이 그 가치를 얻게 되듯이 거짓이 있기 때문에 진실의 광채가 눈부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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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나의 머리는 매우 단순한 일 때문에 혼란해진다. 예를 들자면 사람의 몸이 아픈 이유도 너무나 궁금하다. 어째서 우리의 몸이 질병이나 혹은 상처로 인해 고통받게 되는 것일까? 아주 약간 뼈가 어긋나는 것, 귀 속에 들어있는 어떤 기관에 이상이 생겨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것, 어떤 종류의 기억이 불규칙하게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사람이 병드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돌이 신경 사이로 들어가 살을 녹이고 뼈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녀의 파자마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하나의 싸구려 볼펜. 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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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가는 길목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언제인가 나는 한 번 부엌 바닥에 드러누워서 죽은 시늉을 해 보았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계속 죽어있는 훈련을 한 것이다. 나는 위를 보면서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외면적으로는 누가 보더라도 나는 죽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텅 비워 보았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죽음이 아니었다. 단지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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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듭을 상상해 본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어두운 복도에 조용히 드러누워 있는 내 의식의 매듭.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일들이, 여러 가지 것들이 조금씩 그리워진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나와 나 자신을 잇는 매듭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언제인가, 나는 먼 세계에 있는 기묘한 장소에서 나 자신을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따뜻한 장소가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거기에 차가운 맥주가 몇 병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주체는 객체이고 객체는 주체이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틈도 없다. 아무런 빈틈도 없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그런 기묘한 장소가 반드시 이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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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라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가능성의 선택이 이런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에게 어느 정도 위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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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얻어서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다. 몸의 절반이 투명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12년 전에 나는 <거리>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고 신간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햄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 아침 시각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거리>에 도착하는 것은 언제나 정오 전이다. 태양은 아직 중천에 뜨지 않았고 <거리>구석구석에는 아직 아침의 술렁거림이 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는 슈트케이스를 끌어안은 채로 커피숍에 들어가 모닝 서비스의 커피를 마시고, 그런 다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시각에 만나게 되는 <거리>의 모습이 나는 좋았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 향기로운 커피, 사람들의 졸린 눈, 아직 손상되지 않은 하루, 내 손가락이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 지금 시간은 320. 시간은 마치 낡은 뉴스 영화의 릴처럼 달그락거리며 돌아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렇지만 내 머리 속에는 아직 시간이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다. 마침내 그것은 신간센의 나른한 진동과 하나로 섞여간다. <거리>에 돌아가도 나에게는 이제 만나야 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전화를 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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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텔의 훨씬 앞에서 택시를 내린 후에 썰렁한 아침 대로를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나에게는 이제 만나야 할 상대도 없으며, 전화를 걸 상대도 없는 거라고. 여기는 이제 나의 거리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했던 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렸고, 지금은 모든 것들이 전부 변해 버렸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은 이제, 여러 가지 일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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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는 한 해에도 몇 차례나 익사체가 떠올랐다. 대개는 자살자들이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바다에 뛰어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양복을 입고 주머니에 아무런 소지품도 없는 자살자들이었다. 신문 지방판에 그들의 죽음을 알리는 작은 기사가 실릴 뿐이었다. 신원불명, 여성, 스무 살 전후, 폐 속에 바닷물을 가득히 들이키고 물거품 같이 팽창된 피부를 드러낸 젊은 여자. 시간의 흐름에 잘못 끼어든 유실물처럼 죽음은 천천히 파도에 실려 어느 날 조용한 주택지 해안에 떠밀려온다. 그 중에 한 명은 내 친구였다. 훨씬 전, 그러니까 여섯 살 때쯤의 일이다. 그 아이는 집중호우로 물이 불어난 강에 휩쓸려 죽었다. 봄날 오후에 그 아이의 시체는 탁류와 함께 단숨에 앞바다로 떠내려가 사흘 후에 유수와 함께 해안에 떠올랐다. 죽음의 냄새. 여섯 살 난 소년의 시체가 고열의 가마에서 타는 냄새. 4월의 흐린 하늘에 우뚝 솟은 화장터의 굴뚝. 그리고 회색 연기. 존재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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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언한다. 5월의 태양 아래. 두 손에 운동화를 들고 낡은 방파제 위를 걸으며 나는 예언한다. 당신들은 무너져 버릴 거라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리고,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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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사용할 길이 없는 채로 내 안에 쌓인다. 그것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저 조용히 쌓여갈 뿐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공통되는 괴로움이다. 가톨릭의 교회사는 사람들의 고백을 천상이라는 대조직에 넘겨 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편리한 상대도 없다. 자기 자신 속에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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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으면 자주, 지금이라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비가 내리는 오후는 특히 그랬다. 내 방을 찾아오는 인물은 그 때마다 바뀌었다. 어떤 때에는 고교시절에 딱 한 번 데이트한 적이 있는 다리가 날씬한 여자였고, 어떤 때에는 몇 년 전의 나 자신이었고, 또 어떤 때에는 제니퍼 존스를 데리고 온 윌리엄 홀덴이기도 했다. 윌리엄 홀덴?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연 기억의 자투리답게 방문 근처를 어슬렁거릴 뿐, 결국은 노크를 하는 일도 없이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창밖은 비다. 비가 내린다. , 여름, 가을 하고 나는 스파게티를 삶았다. 그건 마치 무엇인가에 대한 복수 같기도 했다. 배신한 애인이 보냈던 오래된 연애편지 뭉치를 난로 속에 살며시 집어넣는 고독한 여인처럼, 나는 스파게티를 언제까지나 묵묵히 삶았다. 나는 짓밟혔을 때의 그림자를 독일 셰퍼드와 같은 모양으로 반죽해서 끓는 물속에 집어넣고 소금을 뿌렸다. 그리고 긴 젓가락을 잡고 알루미늄 냄비 앞에 서서, 키친 타이머가 찡 하는 비통한 소리를 낼 때까지 한 발자국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파게티는 몹시 교활해서 나는 잠시도 그들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냄비의 가장자리를 슬쩍 넘어서 밤의 어둠 속으로 뒤섞여 들어갈 것만 같다. 열대의 정글이 원색의 나비를 영겁의 시간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삼켜 버리듯이. 밤도 또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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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슨 맥컬러스의 소설 속에는 조용한 벙어리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친절하게 귀를 기울이고 어떤 때에는 동정을 하고 어떤 때에는 함께 기뻐한다. 사람들은 마치 끌려들 듯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서 이런저런 고백과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마지막에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갖 고민을 헤아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그 벙어리 청년과 동일시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며 게다가 글로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어떤 '앙금' 같은 것이 나의 몸속에 확실히 쌓여가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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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운행 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 시스템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회전목마와 흡사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앞지르지도 않고 누구에게 앞지름 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 히트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를 읽는 것은 지혜의 상자에 보석을 입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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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려고 할 때 나는 모든 현실적인 재료를 끌어 모아서 커다란 냄비 속에 집어넣고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용해한 후에 그것을 적당한 모양으로 잘라내어 사용한다. 소설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런 것이다. 리얼리티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빵을 파는 가게의 리얼리티는 빵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밀가루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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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자기표현이 정신의 해방에 기여한다는 것은 미신이며, 호의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신화이다. 적어도 문장에 의한 자기표현은 어느 누구의 정신도 해방시키지 못한다. 만약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기표현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일찌감치 단념하는 게 좋다. 자기표현은 정신을 세분화시킬 뿐이며, 그것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무엇인가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은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쓰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효용도 없고 그에 따른 구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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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대한 단상.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개성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세 사람 혹은 열 사람이 모이더라도 역시 각자 나름대로의 특징과 개성을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더 이상 각자의 개성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사회'라고 하는 무리를 구성하면서 한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활동하게 된다. 개인으로서의 특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집단으로서의 변별력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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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변함없이 여느 때의 거리였다. 온통 뒤섞여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나 어디로부터랄 것도 없이 점차로 나타나서 귀청을 울리는 짤막한 음악이나 끊임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신호등과 그것을 부추기는 자동차의 배기음.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늘로부터 넘쳐흘러 떨어지는 한없는 잉크와 같이 밤거리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거리를 걷고 있으면 그와 같은 웅성거림이나 빛이나 냄새, 흥분의 몇 분의 일인가는 사실 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들은 어제나 그제나 지난주나 저번 달로부터 울려온 먼 메아리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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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동의 대부분은 자기가 앞으로 계속 살아간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전제를 없애버리고 나면 뒤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랑은 바람이다. 분명히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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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비애. 나이를 먹으면서 청춘을 상실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게다가 늙음은 무척이나 힘이 세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늙고 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사람은 늙어가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충치와 마차가지라고 할 수 있다. 노력을 하면 그 진행을 어느 정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아무리 진행을 늦추더라도 늙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나이를 먹는 만큼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미리 프로그램이 되어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쓰인 노력의 양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의 양은 적어지고 그리고 점차 제로가 된다. 늙음의 신이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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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모순의 연속이다.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또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 손쉽게 획득한다. 이러한 사실은 삶이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는 것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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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풍요롭다면 그 어디를 가더라도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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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일생 동안 최소한 반년이나 일 년 정도 '주부'구실을 해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비록 단기간이나마 주부적인 경향을 습득해서 주부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 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통념의 대부분이 얼마나 불확실한 기반 위에 성립되어 있는가를 잘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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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 만큼 겁나는 것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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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 문득 카페의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 눈길이 닿았다.

그 달력의 아래에는 이런 격언이 적혀 있었다.

"아낌없이 내주는 것은 언제나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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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스물한 살의 나이는 아직까지도 충분히 젊지만 이전만큼 젊지는 않다. 스무 살이 젊음의 기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일요일 아침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옥상 위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대공황을 다룬 옛날 영화를 보다가 이런 조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봐. 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언제나 우산을 쓴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에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후드득 떨어질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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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냉정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나는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의 절반 이상은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지 말기로 결심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만 말을 하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 착상을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착실하게 실행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나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의 절반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냉정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모른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사랑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싶다. 그래서 배가 터질 정도로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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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아무도 그것을 붙들 수 없다. 황금을 선사하거나 보기 드문 보석을 주거나 심지어 귀중한 생명을 바치더라도 시간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녁을 향해 날아간 화살이 시간을 거슬러 다시 활시위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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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혼자였다. 혼자서 침대에 엎드린 채로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창 밖에 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새가 항상 보던 새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매우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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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앞의 것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대던 그 바로 앞에 막연하지만 공기의 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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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크다. 하지만 때로는 지극히 작고 좁아지기도 한다. 평범한 여자는 무엇이 사회적으로 공평하고 불공평한 것인지 구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해야 자신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자신이 행복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것을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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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안경이 없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꽤 무료해지는 법이다.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거나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본다고 해서 그 시간이 갑자기 흥미로운 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거의 의미 없는 사소한 동작의 축적으로 성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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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연필로 인생을 그릴 수 있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내 인생의 그림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만약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색연필이나 무슨 그런 것으로 하나하나 색칠하면서 구분한다면 '어떻게 하다 보니' 라는 부분을 칠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색연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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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당장 일어나지 못해? 난 아직도 여기 있어. 일어나! 일어나서 한 번 생각을 해 봐! 왜 내가 아직도 여기 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아픔은 없다. 아픔은 전혀 없다. 걷어찰 때마다 공허한 소리가 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언제인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결국 사라지고 말았던 것처럼. 존재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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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단번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내 몸을 떠나 영혼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차갑게 식어있는 나의 육신을 바라보고는 비로소 죽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내가 두려운 건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이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생명의 영역을 침식한다. 정신이 들면 어둠침침해서 아무것도 안보이고 주위의 사람들도 나를 두고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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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봄을 격렬하게 미워했다. 봄이 나의 공간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두터운 커튼을 드리운 채 방 안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나는 봄이 나에게 가져온 것을 미워하고, 그것이 내 몸 깊은 곳에서 일으키고 있는 듯한 아픔 같은 것까지도 미워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강렬하게 무엇인가를 미워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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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5월은 4월보다 더욱 가혹했다. 5월이 되자 나는 깊어가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가늘게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떨림은 대개 해질 무렵에 찾아들었다. 목련꽃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어 오르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긴 시간이 걸려서 그것은 지나갔고, 그 뒤에 둔탁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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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온갖 형태의 계시들이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계시를 보면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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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마음을 버린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러나 나는 냉혹한 겨울의 숲으로 가고 싶다. 아직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그늘이 있고, 사랑이 깃들만한 언덕이 남아있는 그 숲에서 살고 싶다. 사랑이여! 내 몸을 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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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것은 여자를 택시에 태워 집에 돌려보낸 후가 아닐까 한다. 그녀와 헤어진 후 한 시간 동안은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몸을 떤다. 침대에는 아직까지도 그녀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녀의 체온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마셨던 커피잔이 놓여 있다. 거기에도 같은 느낌이다. 마치 물을 다 빼낸 수족관의 수조 밑바닥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의 한 시간이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영화를 보아도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그녀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조금씩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밥에다 콩자반을 얹어서 식사를 하게 된다. 때로는 계란을 풀어먹기도 한다. 무가 약간 남아 있어서 그걸로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훈제를 해서 보관한 식품도 생각난다. 친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통조림도 생각난다. 이렇게 되면 백중날에 선물로 받았던 말린 김도 썩 어울린다. 이런 것들을 다 먹고 나면, 어쩐지 허전했던 기분은 싹 가시게 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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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란 무척 재미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생각하는 방식도 저마다 많이 다르다. 그 중에는 과연 그럴듯하다고 감탄하게 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무맹랑한 생각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하고 허무맹랑한 생각이라고 해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기준 위에 성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먼저 한 걸음 물러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는 태도를 보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적 정직하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는다. 그 당시에는 내가 소설을 쓰게 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체험은 훗날 소설을 쓰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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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마음은 바람과도 같아서 당신은 그 움직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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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에 대하여.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가출을 꿈꾼다. 하지만 가출에 성공하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 가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가출'하는 일에 대한 자각부터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아프리카에 가도, 남극에 가도 그저 단순한 여행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자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서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가출하더라도 당신의 가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반대로 이미 가출에 성공한 타인이 당신에게 '권리를 양도 한다'라고 말해도 성립되지 않는다. 가출을 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는 한 당신이 모처럼 가출을 했다고 해도 정말로 한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가출을 하기 위해서는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가출에 필요한 요소는 거리도 빼놓을 수가 없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다면 가출에 성공했다고 해도 이내 발각되어서 다시 집으로 끌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가출을 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가출의 소지품에 대해서도 특별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중에서 코를 푼다거나 변을 보거나 할 때 종이가 없으면 곤란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휴지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우산이나 도시락 그리고 물통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도 별 지장은 없다. 또한 현금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싫지 않으면 소지품 리스트에 끼워놓는 것이 좋다. 가출과 자살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한번 자살을 시도하면 다음 가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런 것은 그만두는 게 좋다. 더구나 자살은 집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손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귀찮게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가출에 성공했다고 해서 외박이라도 하면 집에 있는 사람이 걱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박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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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마음을 갖고서는 어두운 꿈 밖에 꿀 수 없어. 아주 어두운 마음으로는 꿈조차도 꿀 수 없지"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팔을 뻗어서 할머니의 눈꺼풀을 가만히 감겨 준 것이었다. 내가 눈꺼풀을 내리는 동시에 그녀가 79년 동안이나 계속 품고 있었던 꿈은 마치 길바닥에 떨어지는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고요히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그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죽음의 실체를 실감했다. 너무나도 가벼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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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운수나 징크스 같은 미신에도 흥미가 없다. 그런 것은 한 번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줄곧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고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면 그 영역이 점점 확대되기 시작한다. 나는 성격상 그런 부담이 커져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지라, 운이 안 좋은 일이라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격이 강하냐 약하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혼을 할 때 점쟁이로부터 두 사람은 인연이 정말 한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결혼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정말 한심한 인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셈이지만 그대로 체념하고 함께 산다. 정말 한심한 인연은 의외로 효율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점을 믿느냐 안 믿느냐, 길흉을 가릴 것이냐 가리지 않을 것이냐 하는 선택은 사람들 저마다의 기호에 속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굳이 흉하다고 하는 날에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흉한 날이든 어쨌든 간에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잘 헤쳐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념의 힘은 운수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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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조금씩 흐려진다. 망각의 물을 마시면서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이다. 가끔씩 불에 데인 화상처럼 강렬해서 잊혀 지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기억은 확실히 희미하게 퇴색되는 것이며,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 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이따금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창고라고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은 모두 거기에 쌓인 채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용기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상념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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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란 항상 그렇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며,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것이 상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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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은 이미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겨우 한 부분이 끝났을 따름이다.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거기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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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란 제법 귀여운 필기도구. 최근에는 샤프펜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학용품계에서 연필이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간 저하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는 적어도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 단순하다면 실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 수많은 수수께끼와 예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초로 연필을 만든 사람은 꽤나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원고를 쓰다가도 꼼꼼하게 수정할 부분이 생기면 대개 연필을 사용한다. 샤프펜슬도 편리하니까 곧잘 사용하기는 하지만 감촉이나 쓰는 맛으로 치자면 평범한 연필 쪽이 훨씬 더 낫다. 아침나절에 한 다스 정도의 연필을 깨끗이 깎아서 투명하고 긴 유리잔에 담아 놓고는 차례차례 꺼내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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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속력을 내어도 따분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반대로 속력을 내면 낼수록 우리는 따분함의 한복판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따분함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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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란 매우 미묘해서 때로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손상시켜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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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다. 물론 운이 좋은 자도 있고 운이 나쁜 자도 있다. 건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다. 그리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제 잃을지 몰라서 겁내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강한 인간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 강한 척 할 수 있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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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언제나 존재한다.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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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사람의 실수로 우연히 탄생했다. 아이스크림을 담고 있는 콘은 크림을 아주 차갑게 해 주고 혀를 부드럽게 만든다. 하얀색 바닐라, 갈색 초콜릿, 붉은 색 스트로베리 세 종류가 있으며 세 종류 중에서 두 가지는 서로 섞어 팔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골고루 돌아가면서 먹지 않고 한쪽 끝부터 먹으면 나중에는 아이스크림이 허물어지면서 손을 더럽히거나 바닥에 떨어뜨린다. 그래서 탑처럼 부풀어 있는 부분은 좀 더 빨리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맛없는 것은 언제까지나 혀가 기억한다, 또한 맛이 좋은 것은 바로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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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입구는 있으면서 출구가 없는 감동도 있고 출구는 있으면서 입구가 없는 감동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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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줄기를 쭉 펴고 눈을 감으면 바람 냄새가 난다. 마치 과실 같은 풍만함을 가진 바람. 거기에는 꺼끌꺼끌한 껍질이 있고 속살의 미끈함이 있으며 종자의 알맹이가 있다. 달콤한 과육이 공기 중에서 부서지면 종자는 부드러운 산탄이 되어 나의 노출된 팔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렴풋한 아픔이 남았다. 바람에 대해서 그렇게 느낀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장기간 도쿄에 있는 동안 나는 5월의 바람이 가지는 기묘한 싱싱함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아픔의 감촉조차도 잊어버리고 만다. 살갗 속으로 파고 들어온 그 무엇이 뼈를 적시는 그 차가움조차 모두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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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가? 누군가 이렇게 물으면 그렇겠지,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꿈이란 결국 그런 것이니까. 울고 싶다고 생각 할 때에는 으레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인생이란 다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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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과 마음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친절함이란 독립된 기능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표층적인 기능이다. 그것은 단순한 습관으로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훨씬 깊고 훨씬 강하다. 그리고 훨씬 모순된 것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상실감도 없고 실망도 없다. 갈 곳 없는 사랑도 없다. 순전히 생활만이 남는다. 조용하고 은밀한 생활만이 남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때때로 마음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아니, 잃어버리지 않고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때가 더 적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제인가는 마음이 되돌아온다는 확신이 있다. 그 확신이 나라는 존재를 하나로 묶어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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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 받는 자로 만드는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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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조깅을 하고 나면 야채 주스를 한 잔 마시고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서 비틀즈의 <데이 트리퍼>를 듣는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열차의 시트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신주와 역, 터널, 철교, , , 굴뚝을 비롯한 온갖 것들이 빠르게 뒤쪽으로 지나가 버린다. 아무리 달려도 별다른 경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열여덟 살의 여자였다. 나는 창가에 그녀는 통로 쪽에 앉아 있었다.

"자리를 바꿔줄까?"

"고마워요, 친절하시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친절한 게 아니란다. 나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너보다는 훨씬 따분함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지. 그저 그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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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바로잡을 수 없다. 인간의 성향은 대략 스물다섯 살까지 결정되어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본질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외부세계가 그 인간의 성향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 하는 것으로 압출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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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잊혀지는 것이다.

그대의 가슴에 아무리 큰 상처가 남아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잊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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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는 올바르지 못한 선택이 있는가 하면 올바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올바른 선택도 있다. 이러한 부조리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으며 대체로 나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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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이론과 분석은 이른바 짧은 바늘 끝으로 수박을 쪼개려고 하는 행동과 같다. 그들은 껍질에 흠집을 낼 수는 있지만 영원히 달콤한 과육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껍질과 과육을 명확히 분리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껍질만 핥고서 기뻐하는 괴상한 무리들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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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에는 윈톤 켈리의 피아노가 흘렀다. 웨이트리스가 하얀 커피잔을 내 앞에 갖다 놓았다. 그 두툼하고 묵직한 커피잔이 탁자위에 놓일 때 딸랑거리는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마치 수영장 밑바닥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처럼. 그 여운은 내 귀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창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항구를 끼고 있는 아담한 소도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늘 바다 냄새가 풍겼다. 하루에 몇 번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았다. 나는 그 유람선을 타고 갑판 위에서 대형 여객선과 도크의 풍경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다. 설사 비가 내리는 날이라고 해도 나는 비에 흠뻑 젖어가면서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 근처에는 탁자가 딱 하나 밖에 없는 조촐한 카페가 있었다. 그 카페의 천장에 붙어있는 스피커에서는 항상 재즈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으면 어두운 방에 갇힌 어린 아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친숙한 커피잔의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보드라운 향내가 있었다.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커피맛 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내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주는 따뜻한 온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작은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그것은 또한 아담한 소도시에서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가기 위한 은밀한 기념사진이기도 했다. , 커피잔을 가볍게 오른손에 쥐고 턱을 당기고 자연스럽게 웃어요. 좋았어.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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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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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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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나는 정말 여러 가지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자세히 적는다면 대학노트 한 권 분량쯤은 될 것이다. 잃어버렸을 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겼는데 나중에 가서야 몹시 아쉬웠던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특히 온갖 사물들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계속 상실한 것 같다. 나의 존재를 상징하는 외투 주머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숙명적인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떠한 바늘과 실로도 그것을 꿰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누군가 내 방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안으로 불쑥 들이밀고는 '너의 인생은 제로야!' 라고 내게 소리친다고 해도 그것을 부정할 근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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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사를 무척 좋아한다. 짐을 꾸려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면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사의 미덕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의 만남, 사회적인 관계.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상생활에서의 잡다한 일, 그런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럴 때 맛보는 쾌감은 한 번 익히고 나면 평생 잊어버릴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꽤 여러 번이나 이사를 했으며 수많은 동네에서 살았고 다양한 사람들과도 사귀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모든 것들을 원점으로 돌려버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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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인가를 달성하려고 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의 세 가지를 파악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가? 지금 자신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이제부터는 어느 정도의 일을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를 박탈당하고 나면, 그 뒤에는 공포와 불신과 피로감 밖에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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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사랑을 받고 싶다. 하지만 그대는 내 마음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그 사랑의 한 조각도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 한 줌의 보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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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란 마치 연어와 같다. 사나운 폭풍우 속에서도 다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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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때로는 어둡다고 하더라도 어떤 때에는 새처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영원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아코디언의 울림 속에도 나는 내 마음을 잠입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억지로 기억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다만 지워져서 사라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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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미 나를 버렸다. 나는 이미 상실된 사람이었다. 설사 그녀가 아직도 아주 조금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우리는 서로의 역할에 대해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나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구원할 길은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슬립 몇 장과 함께 내 앞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떤 사람은 잊혀지고 어떤 사람을 모습을 감추며 어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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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색 소파 위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푹신푹신한 민들레 종자처럼 기분 좋은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전기시계의 바늘을 바라보았다.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한 적어도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세상은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한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시계 바늘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한 일이다. 세상에는 또 다른 확인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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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쪽을 훨씬 좋아한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재미를 찾아내는 재능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상 대개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나 자신의 이야기 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것도 특수한 사람의 특수한 이야기 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가 훨씬 흥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