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동시 상영이 좋아요

chocohuh 2021. 11. 2. 08:31

나는 새 영화를 보고 싶을 때는 전철을 타고 극장에 가서 내 돈으로 티켓을 사서 본다. 시사회에 가는 일은 전혀 없다.

 

이전 어떤 잡지에서 영화평 같은 것을 쓴 일이 있는데, 그때는 가끔씩 시사회에도 발길을 하였다. 그러나 10여 년 전, 모 영화 배급회사에 얽힌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사건이 있었고, 그때 다시는 시사회에 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하였다. 나는 성격적으로 참을성이 많은 편이라서 화를 잘 내지 않지만, 일단 화가 난 일은 좀처럼 잊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신경쇠약에 걸린 등대지기처럼 철저하게 지킨다. 그런 사연으로 나는 지금까지 시사회와는 인연이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또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자세한 얘기는 쓰지 않지만.

 

시사회에 걸음을 하였던 시절, 시사회장에서 다나카 코미마사 씨를 종종 뵙곤 하였다. 요즈음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다나카 씨는 여름이면 반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회장 안은 냉방장치가 되어 있어 반바지 차림이면 몸이 좀 서늘하다. 그래서 회장에 들어설 때는 어디선가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긴 바지를 벗고 다시 반바지 차림으로 우아하게 거리로 나섰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다 싶어 이후 나도 열심히 흉내 내고 있다. 여름에는 항상 반바지 차림으로 행동하다가 필요에 따라 가방에서 청바지를 꺼내 슬쩍 껴입었다. 실제로 해보니 아주 편리했다. 일본의 여름은 역시 반바지가 최고죠.

 

한 번은 모 출판사의 초대로 긴자에 있는 고급 요리점 '길조'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도 나는 평소처럼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그랬더니 요리점 입구에서 "죄송하지만 반바지 차림의 손님은 사양하고 있습니다."라고 웨이트리스가 정중하게 가로막았다. ', 긴 바지 차림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훌륭한 요리를 내놓는단 말이지' 하고 큰 소리를 질러 볼까 하다가 '그래요, 손님 말이 맞습니다.'라고 맞받으면 다시 되받을 말이 없어 기가 죽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그 자리에서 긴 바지를 꺼내 반바지 위에 껴입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죠?"라고 말했더니, 숨을 삼키면서 ", 어서 오세요" 하는 것이었다. 거의 1백 퍼센트의 확률로 단언할 수 있건대, '길조'의 현관 앞에서 가방을 열고 긴 바지를 꺼내 입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워낙 세상 물정을 몰랐던 터라.

 

각설하고,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면 신이 난다. 객석이 비어 있으면 한층 더 신난다. 퇴락한 극장이면 더욱 좋다. 동시 상영을 좋아한다. 영화와 영화 사이의 휴게시간, 그 불안정한 따분함이 좋다. 학생 시절에는 휴게시간에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온 빵을 혼자 뜯어먹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다.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도저히 명작이랄 수 없는 두 편의 영화를 다 본 다음 거리로 나섰을 때의 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따분함이, 그 찌뿌드드함이 좋았다.

 

반대로 요즈음의 아트 시어터계 극장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장소에 따라 너무 빳빳하게 풀을 먹인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휴게시간에 부라이언 이노의 노래가 흐르거나 하면, 별 이유도 없이 식욕이 감퇴한다. 딱히 이노 씨한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그런 극장에서는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물끄러미 크레디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피곤하다. 나는 본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흐르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곤 한다. 촬영 조감독이 누구고 조수가 누구고, 캐스팅 어드바이스 보좌가 누구고 하는 따위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지만, 관객이 앤드 크레디트를 이토록 열심히 보는 나라는 거의 일본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극장에서는 앤드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문을 잠그고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너무하다.

 

대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이렇듯 격식을 차려서 앤드 크레디트까지 관람하는 예절이 세상을 석권하게 되었는지-아니면 일반화가 되었는지-알 수 없지만(냉전의 종결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런 연구회 모임적인 분위기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이 세계가 내 마음을 위로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