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란 이름은 펜네임이 아니라 본명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작가로 데뷔했을 무렵에는(지금도 거의 비슷하지만) '무라카미 하면 류, 하루키 하면 가도카와'가 각기 빅 네임으로 통하고 있었다. 3번은 왕, 4번은 나가지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펜네임 치고는 좀 너무하지 않느냐'란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는데, 무엇을 숨기랴, 이는 본명이다. 펜네임을 생각하기가 성가셔서 그냥 본명을 내밀었을 뿐이다.
그런데 소설가로 밥벌이를 하게 된 후 '아차, 이럴 줄 알았으면 펜네임을 지어두는 건데' 하고 후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만약 여러분 중에 앞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펜네임이 없으므로 하여 가장 곤란한 것은, 여러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이름이 큰 소리로 불릴 때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 창구가 그렇다. 일본의 은행에서는 차례가 되면 '무라카미 씨, 무라카미 하루키 씨이이이!' 하고 큰 소리로 부르는 일이 많다. 소설을 쓰면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자, 그때마다 정말 부끄러웠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내 쪽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최근에는 내가 직접 은행에 가는 일은 없다. 대신 마누라나 어시스턴트가 가준다. 그러나 암만 타인이라 해도 '창구에서 이름을 부르면 역시 부끄럽다. 무슨 수를 좀 써주었으면 싶다. 대기번호표가 있으니 그 번호를 부른다든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은행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동네 '교통안전협회'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갔다. 창구에 두 명의 여직원이 있었는데, 내 면허증을 보고 내 얼굴을 보더니 "그러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씨, 주소는 가나가와 현......" 이라면서 둘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동성동명인가 봐"라고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요 동성동명이죠.'란 표정으로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있으면 아주 신난다. 하루 종일 행복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내 뜻 같지만은 않다.
몇 년 전 여름, 얼굴에 뭐가 두툴두툴 났다. 약국에서 연고제를 사 발라 보았지만 거의 효과가 없어서 요코하마에 있는 피부과에 갔다. 그 병원을 소개해 준 동네 아줌마는 "좋은 병원인데, 분위기가 좀......" 이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왜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는지, 현지에 가서 보니 잘 알 수 있었다. 그 병원은 피부과와 성병과를 겸하고 있어, 양쪽 환자가 소금과 후추처럼 한 군데 뒤섞여 대합실을 꽉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외견만 봐서는 누가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합실 바로 옆이 진료실이라서, 의사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의사의 목소리가 유난히 큰데다 문까지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검사는 커튼으로 나뉘어진 별실에서 하지만, 목소리는 역시 들린다.
"부인, 이거 트리코모나스로군요. 남편께서 묻혀 오신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두들겨 패주세요." 라든가, "~씨 아주 깨끗하게 나았군요. 이렇게 완치되는 사람, 별로 많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 일로 큰 경험을 하였으니, 앞으로는 벌거벗은 여자의 반경 2미터 이내로 접근할 때는 반드시 콘돔을 하도록 하세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묵묵히 대합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시간 정도는 기다렸을 것이다.
"무라카미 씨, 무라카미 하루키 씨이이이이!" 하고 간호사가 불렀다. 나는 갑자기 당황하여, 빨리 앞으로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사람들이 워낙 붐비는 터라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그만 서두르는 바람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무라카미 씨, 무라카미 씨이이이이이! 안 계세요? 무라카미 씨이이, 무라카미 씨이이이이이이이이!"
그 간호사의 목소리 또한 무지막지하게 컸다. 거의 괴성에 가까웠다. 이 병원은 목소리 크기로 간호사를 고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모두들 내 얼굴을 힐금힐금 보질 않나, 정말 창피했다.
그런데 막상 의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아주 별 볼일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 얼굴의 두툴두툴은 면도날 때문이었던 것이다. 진료실을 나오려는데 "지금 막 강력한 무좀균이 파먹은 피부를 떼어냈는데, 한 번 보렵니까."라고 하기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다. 정말 끔찍했는데 그건 그렇고, 그 병원 상당히 이상했어.
앞으로 혹 성병과에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작가 지망생 여러분(많겠죠, 아마), 펜네임 하나쯤 있는 편이 여러 가지로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파심이지만.
후일담
나는 펜네임은 없지만 '리얼 라이프 네임'은 갖고 있다. 즉 적당히 지은 이름을 실제 인생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라톤 경기에 출전할 때 사용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골에 들어서는 순간 취재진이 몰려들지도 모르니, 성가신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역시 펜네임이 있었으면 하는 경우가 많다. 여관을 예약할 때도 정말이지, 싫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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