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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하루키

일기와 일지와 기록과

chocohuh 2021. 9. 23. 08:11

일기라고 하면, 새해부터 써야 한다는 인식이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게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금년 정월부터 '자아, 금년에야말로 꼭 일기를 써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사람도 많이 있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왠지 재를 뿌리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지만,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정월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라는 것은 우선 오래 계속되지를 못한다. 그것보다는 613일에 갑자기 생각나서 쓰기 시작한 일기가 의외로 오래 계속 되거나 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정월부터 일기를 쓰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정월' 이라는 이벤트성에 의존하는 안이함이 있어서, 그 때문에 오래 계속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글쓰기를 싫어하는 편이어서, 대학을 졸업한 후 스물아홉 살이 되어 쓰기 시작할 때까지 문장 같은 것은 거의 쓴 일이 없었지만, 일기만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단속적으로 썼다. 보름쯤 쓰다가 4개월 쉬고, 3개월을 쓰다가 2개월 쉬는 식으로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일기'가 아니라 '일지' 이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남, 날씨, 무얼 먹었음, 누구하고 만났음, 어느 정도 일을 했음, 이라는 식으로 사실을 메모하는 것뿐으로, 그 이상의 것은 전혀 쓰지 않는다. 심리 묘사라든가 창작을 위한 노트라든가, 사회적 사건에 대한 성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후에 일기가 발견되어서 출판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어쨌든

 

아침 6시 기상, 맑음

한 시간 조깅

아침 식사-붕장어 덮밥

오전 중에 소설 7

메밀국수-점심 식사

오후 소설 4, [주간 아사히]의 HH 씨로부터 전화(3)

저녁 식사-새우 고로케, 야채 샐러드, 맥주 2

오후 10시 취침, 평화로운 하루

 

이런 식의 기술이 계속 반복되는 평화롭고 따분한 일지를, 누군가가 즐겨 읽어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나도,

 

1216(맑음)

점심-미우라 모모에 여사의 자택에 초대받아, 손수 만든 튀김 덮밥을 대접받았다.

오후-옥중의 미우라 가즈요시 씨로부터 전화 옴.

저녁식사, [길조]에서 야쿠시마루 히로코 씨(동경 태생의 여배우)와 회식. 그 뒤 둘이서 니시아자부에서 술을 마심.

집으로 돌아와 원고 250매를 쓰다.

고단샤로부터 인세 26,500만 엔의 송금 통지가 있었다.

 

이런 식의 일기를 하루라도 좋으니까 한 번 써보고 싶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소설가의 하루란 정말로 평범하고 따분한 것이다. 이런 원고를 야금야금 쓰면서 '존슨'표 면봉으로 귀 청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 덧 하루가 끝나버리고 만다.

 

내가 이런 기록을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건 [라이프]라는 문방구 메이커에서 팔고 있는 '업무 일지' 라는 매우 즉물적인 타이틀의 노트이다. 이것은 단순하고 튼튼하고, 정서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물건이어서, '과연 일기장'이라는' 식의 치덕 치덕스러운 구석이 없어서, 나의 사용 목적에는 딱 들어맞는다.

 

띠지에는 '업무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나타내는 영업 성적의 필연적 향상. 조기 발견할 수 있는 과거의 결점'이라는 선전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전체적인 문장의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효용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조기 발견할 수 있는 과거의 결점' 같은 문구를 발견하면, 내 마음은 저도 모르게 쑤물거리는 것이다.

 

확실히 옛날에 쓴 일기를 보면, 과거의 결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XX, 108(맑음)

M양과 식사, 가볍게 술을 마시고 집까지 바래다주다. 하는 식의 메모를 읽으면 그때의 일을 생각해내고, '그때 하려고만 했다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반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의 결점'을 지금 와서 발견해 보았자, 도저히 '조기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다지 효용이 있다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집사람은 내가 쓰고 있는 '일기'보다 5배가량 농밀한 일기를 매일 녹색 잉크로 빼곡하게 쓰고 있다. 상당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고 있다.

 

"소송을 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식으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매일 기록해두면요"라고, 아내는 그 일기를 쓰고 있는 이유를 나에게 설명한다.

 

"소송? 소송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송?" 하고 나는 질문을-극히 당연한 질문을-한다.

"특별히 무슨 소송이 아니고요, 혹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하고 아내는 대답한다.

 

이따금 가정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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