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서 모기향을 빼앗긴 뒤, 우리에게는 바다거북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지킬 만한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전화나 우편으로 통신판매 회사에 새 모기향을 주문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짐작했던 대로 전화선은 끊겨 있었고, 우편배달도 보름 전부터 끊긴 상태였다. 생각해 보면 저 교활한 바다거북이 그런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녀석은 여태까지 우리들이 갖고 있던 모기향 때문에 실컷 쓴맛을 보았다.
지금쯤 틀림없이 푸른 바다 밑바닥에서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밤을 위해서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린 이제 끝장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밤이 되면 둘 다 바다거북에게 잡아먹힐 거예요"
"희망을 버려선 안 돼" 내가 말했다.
"지혜를 짜내면 절대로 바다거북 따위한테 먹히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모기향은 바다거북이 몽땅 훔쳐가 버렸잖아요."
"원리적 사고를 하도록 노력해야지. 바다거북이 모기향을 싫어한다면, 그밖에도 틀림없이 녀석이 싫어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이를테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라든가"
"왜 하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예요?"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어. 지금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어. 뭐 일종의 육감 같은 거지."
나는 육감이 이끄는 대로 스테레오 턴테이블 위에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비긴 더 비긴>을 맞춰놓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면 틀림없이 바다거북은 우리를 습격하러 올 것이다. 그때 모든 일이 결정 난다.. 우리가 먹히느냐, 바다거북이 우느냐, 이다.
한밤중이 되기 조금 전에, 문 근처에서 철퍼덕 철퍼덕 하는 습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잽싸게 레코드에 바늘을 올려놓았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가 설탕물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비긴 더 비긴>을 노래하기 시작하자, 그 발걸음 소리는 딱 멈추었고, 대신에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바다거북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우리가 바다거북한테 이긴 것이다.
그날 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비긴 더 비긴>을 126번이나 노래했다. 나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다행이도 바다거북만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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