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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와 헤어져 반 년 정도 흘렀을 때,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잡지에서 발견했다.
그 사진 속의 쌍둥이는 예의-나와 함께 지낼 때 늘상 입고 있던-<208>과 <209>라는 번호가 붙은 같은 모양의 싸구려 트레이닝 셔츠가 아니라, 한결 말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니트 원피스를 입었고, 또 한 명은 성글게 짠 코트 재킷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머리는 이전보다 부쩍 길게 자라 있었고, 눈 주위에는 엷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 쌍둥이라는 걸 곧바로 알았다. 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고 있었고 또 한 사람도 옆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 페이지를 펼친 순간 이미 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백 번이나 듣고 철저하게 주입된 레코드의 처음 한 음을 들었을 때처럼 나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여기에 있는 것임을.
그것은 록본기 변두리에 최근 막 개점한 디스코테크의 실내 사진이었다. 잡지에는 여섯 페이지에 걸쳐서 <도쿄 풍속 최전선>이란 특집 기사가 짜여져 있었는데, 그 가장 첫 페이지에 쌍둥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카메라는 어느 정도 위쪽에서 넓은 실내를 광각 렌즈로 포착하고 있었지만, 그 장소는 설명이 없으면 디스코테크라기 보다는 교묘히 만들어진 온실이나 수족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전체가 유리로 만들어진 탓이었다. 마루와 천장을 빼면 테이블도 벽도 장식품도 모두 유리 제품이었다. 그리고 도처에 거대한 관엽 식물이 높여 있었다.
유리 칸막이로 구분된 블록 안에서 사람들은 칵테일 잔을 기울였고, 어떤 블록 안에서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정밀하고도 투명한 인체 모형 같은 걸 연상시켰다. 하나하나의 부분이 각각의 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그 사진의 오른쪽에 원형의 큰 유리 테이블이 있는데, 쌍둥이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트로피컬 드링크의 좀 과장되게 큰 컵이 두 개, 간단한 스낵을 담은 접시가 몇 개인가 놓여 있었다. 쌍둥이 중 하나는 의자 뒤에 양 손을 걸친 것처럼 해서 홱 뒤를 향해 유리벽 건너편의 댄스 플로어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고, 또 한쪽은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만약 거기에 찍혀 있는 것이 그 쌍둥이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는 어디에라도 있는 평범한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디스코테크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디스코테크의 이름은 <더 글라스 게이지>였다.
내가 그 잡지를 손에 넣은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일 관계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들어간 다방에서 때마침 시간이 남아 버렸다. 그래서 가게의 잡지꽂이에 있던 잡지를 집어 훌훌 책장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1개월 지난 사진 잡지를 일부러 읽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쌍둥이가 찍힌 컬러 사진 밑에는 꽤나 흔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더글라스 게이지>는 지금 도쿄에서 가장 새로운 음악을 유행시키고, 가장 첨예한 사람들이 모이는 디스코테크라고 그 기사는 말하고 있었다. 그 이름대로 가게 안은 온통 유리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것은 투명한 미로를 생각나게끔 했다. 거기에서는 온갖 종류의 칵테일이 제고되고 음향 효과에도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입장객이 체크되어 <말끔한 복장>을 하지 않은 손님이나, 남자들만의 그룹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두 잔째의 커피를 주문하고 잡지의 이 페이지를 잘라서 갖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지금 책임자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걸 잘라내더라도 아무도 그다지 기분 나빠하진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플라스틱 메뉴대를 사용해서 그 페이지를 깨끗하게 자르고 네 번 접어서 상의 포켓에 넣어 두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문은 열린 채이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고, 설거지통에는 컵이나 접시가 오물이 달라붙은 채 쌓여 있었다. 또 재떨이는 담배꽁초로 가득했는데, 사무실 여직원이 감기로 3일째 쉬고 있는 탓이었다.
이거 참, 하고 나는 생각했다. 3일 전까지는 먼지 하나 없는 청결한 오피스였는데, 이건 마치 고교 시절의 농구부 라커룸(탈의실) 같군.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컵을 한 개만 씻어서 인스턴트 커피를 넣고, 스푼이 보이지 않아 비교적 깨끗한 볼펜으로 휘저어 마셨다. 결코 맛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단지 뜨거운 물만을 마시고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내가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방인 치과 의원에서 접수부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있는 여자 아이가 출입구로부터 얼굴을 들이밀었다. 머리가 긴 작은 체구의 여자로 꽤나 미인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자메이카인이나 어떤 다른 피가 섞여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피부색이 검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훗카이도의 낙농 농가 출신이었다.
그녀는 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자 아이와 같은 나이여서 한가할 땐 가끔 이곳에 놀러와 둘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우리 방 여직원이 쉴 때는 부재중의 전화를 받아 용건을 듣고 메모도 해 주었다. 벨이 울리면 옆방에서 듣고 달려와서 수화기를 받아 용건을 적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실을 비울 때는 언제나 문을 열어 둔 채로 놔둔다. 도둑이 들어와도 훔쳐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와타나베 씨는 약을 사러간다고 하고 나갔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와타나베는 내 동업자의 이름이다. 나와 그는 그 때 둘이서 작은 번역 사무실을 경영하고 있었다.
"약?" 하고 나는 조금 놀라서 반문했다. "무슨 약?"
"부인의 약이래요. 위 상태가 안 좋아서 뭐라던가 특별한 한방약이 있대요. 그래서 고한다의 한방 약국까지 갔어요. 조금 늦을지도 모르니까 먼저 귀가하시라던데요."
"흠,"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 걸려온 전화는 거기에 메모해 놨어요."라고 말하고 그녀는 전화기 아래 끼워 놓은 하얀 편지지를 가리켰다.
"고마워."하고 나는 말했다. "네가 있어 줘서 도움이 돼."
"부재중 응답 장치를 사면 어떨까, 하고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시던데요."
"그런 건 싫어."하고 나는 말했다. "인간적인 따뜻함이란 게 없거든."
"그래요. 나도 복도를 뛰어오다 보면 몸이 따뜻해지는 걸요."
그녀가 고양이처럼 웃는 얼굴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자, 난 그 메모를 들고 필요한 전화를 몇 통인가 걸었다. 인쇄소의 배송 일시를 지정했고, 하청을 준 번역 아르바이트와 내용을 상의하기도 했다. 또 리스회사에 복사기의 수리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 전화를 대충 끝마치자, 나에게는 이제 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설거지통 속에 쌓여 올라간 식기를 씻어 정돈했다. 재떨이의 담뱃재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멈춰진 시계의 추를 맞추고, 일력식의 캘린더도 말끔하게 뜯어냈다. 책상 위의 연필은 필통에 넣고, 서류는 항목별로 정리하고, 손톱깍이는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그 덕분에 방 안은 겨우 사람 사는 곳처럼 되었다.
나는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방 안을 한 번 빙 둘러보고 "나쁘지 않군."하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창 밖에는 1974년 4월의 어렴풋이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은 평평하니 이음새 하나 없어서 마치 하늘에 회색의 덮개를 푹 씌운 듯이 보였다. 해질 무렵의 엷은 빛이 물속의 먼지처럼 유유히 공중을 떠돌며 콘크리트와 철근과 유리로 만든 해저의 골짜기에 소리도 없이 쌓이고 있었다.
하늘도 거리도, 그리고 방 안도 모두 똑같은 색조의 눅눅한 잿빛에 물들어 있었다. 어디에도 이음새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물을 끓여서 다시 커피를 넣고 이번엔 진짜 스푼으로 저어 마셨다. 카세트 덱의 스위치를 넣자, 천장에 달려 있던 작은 스피커에서 바흐의 류트곡이 흘러나왔다. 스피커도 덱도 테이프도 모두 와타나베가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나쁘지 않군, 하고 이번엔 속으로 중얼거렸다. 4월의 덮지도 춥지도 않은 흐린 저녁 무렵에 바흐의 류트곡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런 뒤에 나는 똑바로 의자에 앉아 상의 포켓에서 쌍둥이가 찍혀 있는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리고 밝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오랫동안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책상 서랍 속에 사진을 확대해서 보기 위한 돋보기가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대고 부분 부분을 하나하나 확대해서 세심하게 점검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뭔가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달리 할 만한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젊은 남자의 귀에 대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쪽의 한 명-누가 누구인지 나로서는 영원히 분간할 수 없다-은 입 가장자리에 무심코 지나치면 못 보고 넘어가 버릴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왼팔은 유리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 쌍둥이의 팔이었다. 매끄럽게 가늘었고 손목시계도 반지도 끼고 있지 않았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상대인 남자 쪽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늘씬하게 키가 큰 핸섬한 남자로, 깔끔하고 센스 있는 다크 블루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오른쪽 손목에 가는 은색 팔찌를 끼고 잇었다. 그는 양 손을 테이블 위에 얹고 앞에 놓인 가늘고 긴 글라스를 꼼짝 않고 응시하고 잇었다. 마치 그 음료가 그의 인생을 바꿔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존재이고, 또한 거기에 관해 뭔가의 결정을 지금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라스 옆에 놓여진 재떨이에서는 뭔가 주술을 부린 것 같은 모양의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쌍둥이는 나의 아파트에 있을 때보다 조금 마른 것 같아 보였지만 정확한 것은 나도 알 수 없었다. 사진의 각도나 조명 탓으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에 죽 들이켜고 서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도대체 왜 쌍둥이가 록본기의 디스코테크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쌍둥이는 속물 냄새 나는 디스코테크에 출입하거나, 눈 주위에 화장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고 지내는 것일까? 그리고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러나 손으로 볼펜 자루를 350회 정도 빙빙 돌리며 가만히 그 사진을 주시한 후에, 나는 어쩌면 이 남자가 쌍둥이의 현재의 숙주일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쌍둥이는 전에 나에 대해 그러했듯이 뭔가를 계기로 이 남자의 생활 속에 눌러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에게 말하고 있는 쪽의 쌍둥이의 입에 떠오른 미소를 가만히 보고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미소는 넓은 초원에 내린 부드러운 비처럼 너무도 잘 그녀 자신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장소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 세 명의 공동 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쌍둥이는 가는 곳곳마다 흐르는 구름같이 그 모양을 변화시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내부에서 그 존재를 특징짓고 있는 것 몇 개인가는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잇었다. 그녀들은 지금도 역시 커피 크림 비스킷을 베어먹고, 지금도 역시 긴 산책을 계속하고, 욕실 바닥에서 바지런히 세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쌍둥이인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있어도 이상하게 그 남자에 대해 질투를 느낄 수 없었다. 질투뿐만이 아니라 나는 어떤 종류의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거기에 상황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다른 시대의 다른 세계로부터 잘라내어져 온 단편적인 정경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쌍둥이를 잃었고, 어떻게 애를 써 보더라도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남자가 몹시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어두운 얼굴을 할 이유라는 게 아무것도 없을게 분명하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쌍둥이가 있고 내게는 없다. 나는 그들을 잃었지만 그는 아직 잃지 않았다. 언젠가 그도 역시 쌍둥이를 잃게 되겠지만, 그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그녀들을 잃을지 모른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잇을 것이다. 아니, 그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구라도 항상 혼란스러워한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 맛보고 있는 혼란은 치명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자신도 그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생각해 본댔자, 그 남자에게 뭔가를 전하는 따위는 할 수 없다. 그들은 먼 시대의 먼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부유하는 대륙과 같이 내가 알 수 없는 어두운 우주를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5시가 되어도 와타나베가 돌아오지 않자, 연락 사항을 몇 개 메모해 두었다. 그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옆방 아가씨가 다시 들어와서 화장실을 써도 좋으냐고 물었다.
"얼마든지."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 화장실의 형광등이 나가서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화장 백을 움켜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헤어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나서 입술 연지를 발랐다. 그녀가 화장실 문을 계속 열어 둔 채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 뒷모습을 별로 볼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흰 가운을 벗은 그녀는 꽤 예쁜 다리를 하고 있었다. 짧고 푸른 울 스커트 아래 무릎 뒤쪽에 조금 움푹 패인 것이 보였다.
"뭘 보고 계셔요?"하고 입술 연지를 티슈 페이퍼로 정리하면서, 그녀는 거울을 향해 물었다.
"다리."하고 나는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나쁘지 않은데."라고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입술연지를 백에 넣고 화장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하얀 블라우스 위에 엷은 블루 카디건을 걸쳐 입었다. 카디건은 마치 구름의 한 자락인 양 나풀거려서 가벼운 것 같았다. 나는 트위드 상의 포켓에 양 손을 찔러 넣고 또 잠시 그 카디건을 바라보았다.
"저어, 나를 보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건가요?"라고 그녀는 물었다.
"좋은 카디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랬군요. 비싼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만큼 비싸진 않아요. 왜냐하면 여기에 근무하기 전엔 부티크에서 점원을 했었기에 뭐든지 점원 할인으로 싸게 살 수 있었거든요."
"왜 부티크를 그만두고 치과 의원에서 근무하는 거지?"
"월급이 적은데다가 양복만 팔았기 때문이에요. 그것보다는 치과 의사 선생님과 근무하는 쪽이 좋아요. 무료나 다름없이 충치도 고치구요."
"과연."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의 복장 취미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하고 말하고, 나는 입고 있는 옷에 눈을 주었다. 나는 자신이 아침에 어떤 옷을 입고 나왔나조차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대학생 때 구입한 베이지색의 코튼 팬츠에 3개월이나 빨지 않은 감색 스니커, 하얀 폴로 셔츠에 회색 트위드 상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폴로셔츠는 새것이었지만 상의는 항상 포켓에 손을 찔러넣고 다니는 통에 치명적으로 모양이 망가져 있었다.
"심한 모양이지."
"그래도 당신에게 잘 어울려요."
"하지만 어울린다는 것만으로 그걸 좋은 복장 취미라고 할 순 없지."
"새로운 슈트를 사 입고, 상의 포켓에 손을 찔러 넣는 버릇을 고친다면? 그 버릇 말예요. 모처럼의 좋은 상의인데 모양이 망가져 버리잖아요."
"이미 망가져 버렸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일이 끝난 거라면 역까지 함께 가지 않을래?"
"좋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카세트 덱과 앰프의 스위치를 내리고 전등을 껐다. 그리고 문에 열쇠를 채우고 긴 비탈길을 걸어 역을 향해 내려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물건을 들지 않기 때문에 양 손을 여전히 상의 포켓에 찔러넣고 있었다. 몇 번인가 그녀의 충고에 따라 양 손을 바지 포켓으로 옮기려고 시도는 해 보았지만, 결국은 잘 되지 않았다. 바지 포켓에 양 손을 넣고 있으면 아무래도 안정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숄더백의 가죽 끈을 쥐고 마치 리듬을 타는 것처럼 내 옆에서 왼손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등줄기를 곧게 펴고 걷는 탓으로, 그녀는 실제 이상으로 키가 커 보였고 걷는 템포도 나보다 훨씬 빨랐다.
바람이 없기 때문일까, 거리는 잠잠했다. 옆을 지나쳐 가는 트럭의 배기음이나 공사중인 빌딩의 소음도 마치 몇 겹이나 겹쳐진 베일을 거쳐서 당도하는 소리처럼 선명하지 않게 들려왔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만이 아련한 봄날 저녁 무렵의 대기에 규칙적으로 거침없이 쐐기를 박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소리에 주의를 집중시켜 걷고 있었는데, 조금 후 모퉁이를 뛰쳐나온 국민학생이 탄 자전거에 부딪힐 뻔했다. 그녀가 왼손으로 내 팔꿈치를 잡아 힘껏 끌어당겨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정면으로 부딪혔을 것이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걸으세요."라고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뭘 생각하며 걷고 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하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했다. "단지 멍하니 걸었을 뿐이지."
"곤란한 사람이군요. 도대체 몇 살이시죠?"
"스물다섯." 하고 나는 말했다. 연말엔 스물여섯이 된다. 그녀가 겨우 내 팔꿈치에서 손을 떼었고, 우리는 다시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도 정확히 걷도록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나는 네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잇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요?"
"듣지 못했어."
"메이."하고 그녀는 말했다. "가사하라 메이."
"메이?"하고 나는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5월의 메이(May)예요."
"5월생인가?"
"아뇨."하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8월 21일생이에요."
"그럼 어째서 메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알고 싶으세요?"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웃지 않을 거죠?"
"웃지 않을게."
"집에서 산양을 기르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산양?" 하고 나는 좀 놀라서 반문했다.
"산양, 아시죠?"
"알고 있지."
"그게 무척 머리가 좋은 산양이라서, 식구들은 그 산양을 한 가족처럼 귀여워했어요."
"산양인 메이."라고 나는 복창하듯이 말했다.
"더욱이 농가의 딸로만 여섯 중의 막내라, 이름 따윈 아마 아무래도 좋았었나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기억하기 쉽죠? 산양인 메이."
"과연."하고 나는 말했다.
역에 도착해서 나는 전화를 받아 준 답례로 가사하라 메이에게 저녁을 함께 들자고 권했지만, 그녀는 이제부터 약혼자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럼 요 다음에 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즐겁게 지내세요."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의 엷은 블루 카디건이 귀가하는 사람들 틈 속에 빨려들 듯이 사라져 버려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나는 상의 포켓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적당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사하라 메이가 사라지자, 내 몸은 다시 저 이음새 하나 없는 밋밋한 회색 구름의 그림자에 가려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구름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어렴풋한 잿빛에 밤의 푸름이 섞여서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거기에 구름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것은 여전히 꼼짝 않고 몸을 숨긴 눈먼 거대한 짐승같이 하늘을 덮고 있었고 달이나 별의 모습을 배후에 감추고 있었다.
마치 해저를 걷고 있는 것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앞도 뒤도 좌우도 모두 똑같아 보였다. 기압도 호흡법도 아직 몸에 잘 맞지 않는다.
혼자 남겨지자 식욕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아파트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따로 갈 만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도리 없이 뭔가가 문득 떠오를 때까지 나는 거리를 걸어 보기로 했다.
때로는 멈춰 서서 쿵푸 영화의 간판을 보기도 하고 악기점의 쇼윈도를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었다. 몇 천이란 수의 사람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갔다. 그들은 한쪽 의식의 변경에서 다른 쪽 의식의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거리는 변함없는 여느 때의 거리였다. 섞여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나, 어디로부터랄 것도 없이 점차로 나타나서 귀를 빠져나가는 짤막한 음악이나, 끊임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신호와 그것을 부추기는 자동차의 배기음,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늘로부터 넘쳐 흘러 떨어지는 한없는 잉크와 같이 밤거리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거리를 걷고 있으면 그와 같은 웅성거림이나 빛이나 냄새, 흥분의 몇 분의 일인가는 사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제나 저번 주나 저
번 달로 부터의 먼 메아리인 것이라고.
그러나 나에게는 그 메아리 속에서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그 어떤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다지도 멀고, 그다지도 막연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얼마만큼의 거리를 걸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몇 천의 사람들을 스쳐 지났다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훗날 70년 내지는 80년이 경과하면 그런 몇 천이라고 하는 수의 사람들은 우선 틀림없이 모두가 이 세계로부터 소멸한 상태일 거라는 점이었다. 70년이나, 80년이라는 것은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도 지치자-아마도 나는 그 중에 쌍둥이의 얼굴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밖에는 내가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볼 이유 따윈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기척 없는 좁은 골목길로 꺽어 들어가서 가끔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갔던 작은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운터에 앉아서 언제나와 똑같이 버번위스키 온더락을 주문하고 치즈 샌드위치를 몇 조각인가 먹었다. 가게 안엔 손님의 모습은 거의 없었고 잠잠한 공기가 오랜 시간을 경과한 목재나 회반죽칠에 잘 융합되어 잇었다. 몇 십 년인가 전에 유행했던 것 같은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음악이 천장의 스피커에서 작게 흐르고, 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나 얼음을 자르는 소리가 이따금 거기에 섞였다.
모든 것은 상실되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려 나는 애썼다. 모든 것은 상실된 것이고, 계속해서 상실될 만한 처지인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지구는 그 때문에 태양의 둘레를 계속해서 돌고 있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결국은 리얼리티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타입의 리얼리티 말이다.
만약에-라고 나는 가정했다-내가 어딘가에서 쌍둥이와 딱 마주쳤다고 하자. 하지만 그런 뒤에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다시한번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그들에게 말을 꺼내 보면 좋을까? 그러나 그런 제안이 무의미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미 나를 통과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에-라고 나는 제2의 가정을 했다-쌍둥이가 내게로 돌아오기로 동의를 했다고 하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가정해 보자. 그런 뒤엔 어떻게 하나?
나는 샌드위치 옆에 붙은 피클을 베어먹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무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몇 주 몇 개월 혹은 몇 년을 그들이 내 아파트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날 그들은 또 모습을 감춰 버릴 것이다. 이전처럼 어떤 언질도 없이, 어떤 설명도 없이. 바람에 날려 버리는 봉화처럼 어딘가로 사라져갈 것이다. 똑같은 일이 똑같이 반복될 뿐이다. 무의미하다.
그것이 리얼리티라는 것이다. 나는 쌍둥이가 없는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종이 냅킨으로 카운터 위의 물방울을 훔쳐내고, 상의 안 포켓에서 쌍둥이의 사진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두 잔째의 위스키를 마시면서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옆의 이 남자를 향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계속해서 사진을 주시하고 있자니, 그녀는 마치 남자의 귀에 공기 혹은 눈엔 뵈지 않는 가느다란 안개 상태의 것을 들여다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 이 남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고 있지 못할 거라고 나는 추측했다. 마치 내가 그 무렵에 무엇 하나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처럼.
조금은 어긋나 버린 기억의 단편을 머릿속에서 빙빙 돌려대고 있는 사이에-그런 행위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로써-나는 양쪽 관자놀이의 내부에 어렴풋한 나른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내 머릿속에 감금당해 있는 한 쌍의 뭔가가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마도 이런 사진은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할 만한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만약 내게 그것을 불태워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막다른 골목으로 빠져들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두 잔째의 위스키를 마저 마셔 버리고 수첩과 잔돈을 가지고 핑크색 전화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신호음이 네 번 울렸을 때, 생각을 고치고 수화기를 내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수첩을 손에 쥐고 잠시 전화기를 노려보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카운터로 돌아가 세 잔째의 위스키를 주문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를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어딘가에 다다를 리는 없는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머리를 텅 비우고서, 그 공간 속에 몇 잔인지 모를 위스키를 쏟아 부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귀를 씻었다. 그 때 견딜 수 없이 여자를 안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누구를 안으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누구라도 좋지만, 그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을 섹스 상대로서 구체적으로 상정할 순 없었다. 누구라도 좋지만 누군가는 곤란한 것이다.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잇는 여자가 전부 모여서 하나로 섞여진 육체라면 관계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리 수첩을 넘기더라도 그런 상대의 전화번호가 발견될 리는 만무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몇 잔째인지 알 수 업슨 온더락의 남은 분량을 한입에 비워내고, 돈을 지불한 뒤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거리의 신호등 앞에 서서<이번에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그저 이번에인 것이다. 5분 후에, 10분 후에, 15분 후에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어디에 가면 좋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어디에 가고 싶은 걸까? 무엇을 하게 될까? 어디에 가게 될까?
그러나 나는 단번에 그 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2
"언제나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거야." 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여자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미묘한 밸런스를 취하면서 불안정한 공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부드러운 침대 위에 알몸으로 드러누워 있는 탓일 게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나는 오드콜로뉴(향수 비슷한 화장수)의 강한 냄새 탓도 있을지 모른다. 그 냄새는 마치 미묘한 벌레와 같이 나의 어둠 속으로 잠입해 들어와서 나의 세포를 확장시키거나 축소시키고 있었다.
"그 꿈을 꾸는 시간은 언제나 대체로 정해져 있어. 새벽 4시나 5시-동이 트기 좀 전이지. 흠뻑 땀을 적시고 벌떡 일어나면 아직 주변은 어두워. 그렇다고 아주 어둡다고는 할 수 없지. 그런 시간이야. 물론 어느 꿈이나 아주 똑같다는 건 아니야. 세부적인 것은 그 때 그때의 따라서 하나하나 달라. 상황도 다르고 역할도 달라. 하지만 기본적인 패턴은 똑같은 거야. 등장인물도 똑같고 결말도 똑같아. 시리즈물의 싸구려 영화처럼 마리야."
"나도 가끔은 기분 나쁜 꿈을 꿔요." 하고 여자는 말하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돌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담배 연기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나서 손바닥으로 뭔가를 가볍게 두세 번 털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에 꾼 꿈에는 죽 유리를 끼운 빌딩이 나왔어."하고 나는 여자의 얘기엔 상대하지 않고 계속했다. "굉장히 큰 빌딩이었어. 신주쿠의 니시구치에 세워질 법한 높이였어. 벽이 전부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지. 꿈속에서 길을 걷다가 나는 때마침 그 빌딩을 발견했지. 그런데 그것은 완벽하게 완성한 빌딩이라곤 할 수 없었어. 대체적인 건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직 공사 중이었거든. 유리벽 속에서는 사람이 바쁜 듯이 움직이고 있었지. 빌딩 내부는 칸막이만 되어 있을 뿐, 아직 거의 텅 비어 있었어."
여자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연기를 뱉어내고 나서 기침을 했다. "저어, 내가 뭔가 질문 같은 걸 하는 게 좋을까요?"
"무리하게 질문할 거 없어. 그냥 듣고 있어 주면 그걸로도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라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한가했기 때문에 그 큰 유리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안의 작업을 보기로 했지. 내가 엿보고 있는 방 안에서는 헬멧을 쓴 작업원이 장식용 벽돌을 쌓고 있는 중이었어. 그는 내내 등을 보이고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몸매나 몸동작을 보아서는 젊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마르고 키가 컸지. 거기에 있는 건 그 남자 한 사람뿐이었어. 그 밖에는 아무도 없었지."
"꿈속에선 공기가 몹시도 흐릿해 있었어. 마치 어딘가로부터 화톳불의 연기가 뒤섞여 들어오고 있는 것같이 뿌옇게 흐려 있었어. 때문에 먼 쪽은 잘 볼 수가 없었어. 그런데 계속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자니, 공기는 조금씩 투명하게 되어갔어. 정말로 투명하게 되었는지, 혹은 내 눈이 거기에 길들여졌는지, 그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어. 그렇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방의 구석구석을 전보다 확실히 둘러볼 수 있게 되었어. 젊은 남자는 마치 로봇처럼 아주 똑같은 동작으로 벽돌을 하나 하나 쌓아올리고 있었어. 그것은 꽤 넓은 방이었지만, 남자가 굉장히 손이 빠르고 요령 있게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은 한두 시간 후면 완성될 것 같았어."
나는 거기서 잠깐 멈추고 눈을 뜬 뒤, 침대 머리맡에 놓여진 글라스에 맥주를 따라 마셨다. 여자는 나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지그시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쌓고 있는 벽돌 뒤에는 본래의 빌딩 벽이 있었어. 예의 흔해 빠진 콘크리트 벽이지. 결국 남자는 그 본래의 벽 앞에 새로운 장식용 벽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어?"
"알겠어요. 이중의 벽을 만들고 있더란 거죠?"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이중의 벽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잘 보니, 그 본래의 벽과 새로운 벽 사이에는 약 40센티 정도의 공간이 벌어져 있었지. 왜 그런 공간을 일부러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어. 그렇게 하면 방이 훨씬 좁게 될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상해서 더욱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작업을 지켜보았지. 그러자, 그러는 동안에 점점 사람의 모습 같은 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마치 현상액 속에 넣은 사진에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 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 인영은 새로운 벽과 옛벽 사이에 끼워 넣어지고 있었던 거야."
"그것은 쌍둥이였어."라며 나는 계속했다.
"쌍둥이 여자애들이었지. 열아홉이든가, 스물이든가, 스물하나든가, 그 정도의 나이였지. 두 사람은 내 옷을 입고 있었지. 한 사람은 트위드 상의를 입었고, 한 사람은 감색 윈드 브레이커를 입고 있었어. 모두 내 옷이었지. 그들은 그 40센티 정도의 틈새에 부자유스런 모습으로 감금당해 있었지만, 자신들이 벽 사이에 넣어져 메워지려고 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듯 둘이서 언제나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었어. 작업원도 자신이 그 쌍둥이를 메워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 다만 묵묵히 벽돌을 쌓고 있을 뿐이었지. 거기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어."
"어째서 그 작업원이 쌍둥이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나요?"라고 여자가 물었다.
"그냥 알 수 있는 거지."라고 나는 말했다. "꿈속에서는 여러 가지의 것을 그냥 알 수가 있는 거라구.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작업을 중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양 주먹으로 그 유리 벽을 있는 힘껏 꽝꽝 두드렸지. 팔이 저릴 정도로 강하게 두드렸어. 그런데 강하게 두드려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거야. 왠지는 알 수 없지만 소리가 죽어 버리고 마는 거였어. 그래서 작업원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는 똑같은 스피드로 한 개 한 개 기계적으로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었지. 왼손으로 맞춤새를 칠하고 오른손으로 그 위에 벽돌을 쌓아가는 것이었지. 벽돌은 쌍둥이의 무릎 주변까지 쌓아 올려져 있었어."
"그래서 나는 유리벽을 두드리는 것을 단념하고, 빌딩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작업을 중지시키기로 했지. 그렇지만 입구를 발견할 수가 없었어. 굉장히 큰 빌딩이었는데, 거기에는 입구라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어. 나는 있는 힘껏 뛰어서 몇 번이나 그 빌딩 둘레를 둘러보았지. 하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였어. 거기에는 역시 입구라고 할 만한 게 없었어. 마치 거대한 어항처럼 말이야."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여자는 아직도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몸의 방향을 바꾸자, 내 팔에 유방을 꽉 눌린 듯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여자는 물었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거야. 아무리 찾아도 입구는 없고, 소리는 죽고 마는 거였지. 나는 유리에 양 손을 대고 계속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벽은 점점 높아져 갔지. 그것은 쌍둥이의 허리 높이까지 올라가고, 가슴까지 올라가고, 머리까지 올라가더니 드디어는 전부를 덮어 버리며 천장에까지 다다랐어. 그것은 앗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 나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어. 작업원은 마지막 한 개의 벽돌을 끼워넣어 버리고는 짐을 정리해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어. 그 뒤에는 나와 유리벽만이 남겨졌지. 나는 정말이지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항상 똑같아."하고 나는 마치 좋은 말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세부는 변하고, 설정도 변하고, 역할도 변하지-하지만 결말은 항상 똑같은 거야. 거기에는 유리벽이 있고,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하는 것이 불가능해. 항상 똑같다구. 눈을 뜨면, 내 손바닥에는 항상 섬뜩한 유리의 감촉이 남게 돼. 그것은 몇 날이고 몇 날이고 손바닥에 남게 되는 거야."
그녀는 내가 얘기를 끝마친 후에도 계속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피곤해서 그럴 거예요."라고 여자는 말했다. "나도 그래요. 피곤하면 늘 기분 나쁜 꿈을 꾸게 되죠. 그래도 그것은 실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단지 몸이나 머리가 피곤해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내 손을 잡고는 그녀의 음부로 가져갔다. 그녀의 그곳은 따뜻하게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내 기분을 돋구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그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꿈 이야기를 들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며 돈을 조금 건넸다.
"얘기를 들어 드른 것쯤이야 무료인데."하고 여자는 말했다.
"주고 싶어서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수긍하고서 돈을 받아 검은 백에 넣은 뒤, 탁 하고 기분 좋은 쇠붙이 소리를 내며 백을 닫았다. 마치 나의 꿈 그 자체가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 마무리지어져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침대를 빠져나가 속옷을 입고, 스타킹을 신고, 스커트와 블라우스와 스웨터를 껴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었다. 거울앞에 서서 머리를 빗고 있을 때의 여자는 누구나 모두 똑같아 보인다. 나는 알몸인 채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건 반드시 그냥 꿈일 뿐이에요."라고 여자는 나가려다가 말했다. 그리고 문 손잡이에 손을 댄 채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마음을 써야 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녀는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찰카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나서도,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서 오랫동안 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라도 있는 싸구려 호텔, 어디에라도 있는 싸구려 천장이었다.
창문 커튼 틈새로부터 축축한 색조의 가로등이 보였다. 이따금 강한 바람이 11월의 차가운 빗방울을 아무렇게나 유리창에 내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머리맡의 손목시계를 잡으려고 하다가, 결국은 귀찮아져 그만두었다. 지금이 몇 시인가는 큰 문제가 아니고, 생각해 보니 나는 우산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바다에 가라앉아 버린 고대의 전설적인 대륙을 생각했다. 왜 그런 걸 생각해 냈는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11월의 차가운 비가 내리는 밤에 우산을 갖고 잇지 않은 탓이리라. 혹은, 새벽녘 꿈의 섬뜩함이 묻어 있는 손으로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몸을-어떤 몸이었는지도 생각해 낼 수 없는-안았던 탓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먼 옛날에 바다 깊이 가라앉은 전설적인 대륙을 상상했을 것이다. 빛은 엷게 스미고, 소리는 흐려 분명치 않고, 공기는 무겁게 젖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실된 후 도대체 몇 년이 흐른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상실된 햇수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것은 필시 쌍둥이가 나를 떠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상실되었을 것이다. 쌍둥이는 나에게 그것을 알게 해 주엇을 뿐인 것이다. 상실 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상실한 일시(日時)가 아니고, 상실한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된 일시일 뿐이다.
그래 좋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3년이다.
3년이라는 세월이 나를 이 11월의 비오는 밤으로 옮겨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갈 것이다. 시간은 걸릴지도 모르지만, 조금씩 나는 살과 뼈를 이 무겁고 습한 우주의 단층 속에 잠입시켜 갈 것이다. 결국 사람은 어느 상황 속으로도 자신을 동화시켜 가는 것이다. 어느 선명한 꿈도 결국은 선명치 않은 현실 속에 삼켜지고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꿈이 존재했던 것조차 나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나는 머리맡의 라이트를 끄고, 눈을 감고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뻗었다. 그리고 꿈이 없는 잠 속으로 의식을 침전시켜 갔다. 비가 창문을 때렸고 어두운 해류가 잊혀진 산맥을 씻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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