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로마제국의 붕괴

chocohuh 2017. 4. 26. 01:34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 느낀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 2 7분이다.

그때 나는 여느 때처럼-, 언제나 일요일 오후면 그렇듯이-부엌의 식탁 앞에 앉아서 괜찮은 음악을 들으면서 일주일분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메모해 뒀다가 일요일에 그것들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정리하고 한다.

화요일까지의 사흘 분 일기를 다 쓰고 났을 때 나는 창밖을 휩쓸고 가는 거센 바람 소리를 느꼈다. 나는 일기 쓰던 일을 중단하고, 펜 뚜껑을 덮은 다음, 베란다로 나가서 빨래를 걷어 들였다. 빨래는 마치 떨어져 나가려는

혜성의 꼬리처럼 퍼덕퍼덕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조금씩 기세를 더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아침에-정확히 말하면 오전 10 48분에-빨래를 베란다에 널었을 때에는, 바람 같은 건 살짝도 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는 용광로의 뚜껑만큼이나 완강하고도 확실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바람이 없는 날엔 빨래를 집게로 집어 놓을 필요도 없겠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바람 같은 건 결코 한 줄기로 불지 않았었단 말이야.‘

나는 빨래를 솜씨 있게 착착 개어서 쌓아 놓고, 아파트의 창문을 전부 꼭꼭 닫았다. 창문을 전부 닫아 버리자, 바람 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나무들-히말라야 삼목과 밤나무-이 소리는 없이 꼭 가려움증에 못 견디는 개처럼 몸을 배배 꼬고, 구름 조각이 눈초리가 언짢은 밀사처럼 황급히 하늘을 달려가고, 맞은편 아파트의 베란다에선 몇 벌의 셔츠가 버림받은 고아처럼 빨랫줄에 둘둘 감긴 채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꼭 폭풍 같은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을 펴고 일기도를 들여다보아도, 어디에도 태풍의 징후 같은 건 없었다. 비가 올 확률은 완전히 제로였다. 일기도에 의하는 한, 그날은 전성기의 로마제국처럼 평화로운 일요일이어야 했다.

나는 30퍼센트 가량의 가벼운 한숨을 쉬고, 신문을 접은 후, 빨래를 장롱 속에 정리해 넣고, 괜찮은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일기를 계속 썼다.

목요일에 나는 여자 친구와 잤다. 그녀는 섹스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비행기의 오버-나이트 백에 들어있는 헝겊 눈가리개를 가지고 다녔다

나는 그런 취미를 특별히 가졌던 건 아니지만, 눈가리개를 한 그녀가 굉장히 귀여웠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선 아무런 이의를 갖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이란, 모두 다 조금씩 어딘가 다르게 마련이니까.

나는 일기의 목요일 치에 그런 것을 대강 썼다. 80퍼센트의 사실과 20퍼센트의 성찰이 일기 기술의 요건이다.

금요일에 나는 긴자의 서점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그는 몹시 야릇한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줄무늬 바탕에 무수한 전화번호가...

여기까지 썼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1881년의 인디언 봉기

 

전화벨이 울렸을 때, 시계는 2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십중팔구 그녀일 거라고-, 눈가리개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여자친구일거라고-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요일에 나에게 놀러 오기로 돼 있었으며, 나한테 올 땐 언제나 미리 전화를 거는 게 그녀의 습관이었다. 그녀가 저녁 식사 거리를 사오기로 했었다. 그날 우리는 굴 모듬 요리를 해먹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아무튼 전화벨이 울린 건 오후 2 36분이었다. 자명종 시계가 전화 옆에 놓여 있어서, 나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시계를 보곤 했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서도 내 기억은 완벽하다.

그러나 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 거기서 들려온 것은 강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고오오오오오우"하는 바람 소리만이, 1881년의 인디언 봉기처럼 수화기 속에서 광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척 가옥을 불태우고, 통신선을 끊고, 캔디스 바겐을 침범했었다.

"여보세요"하고 나는 말해 보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압도적인 역사의 성난 물결 속으로 흔적 없이 빨려 들어갔다.

 

"여보세요

 

나는 큰 소리로 외쳐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바람의 틈새로부터 아주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 비슷한 것이 언뜻 들린 것 같았으나, 그것은 어쩌면 나의 착각일 지도 몰랐다. 아무튼 바람의 기세는 너무 강했다. 그리고 아마도 버팔로의 수효가 너무나 줄어들었을 것이다.

나는 얼마간 아무 말도 않고 수화기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었다. 귀가 수화기에 달라붙어서 떼어낼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할 만큼 찰싹대고서.

하지만 15초 내지 20초 정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마치 발작이 고조된 궁극에서, 생명의 실오라기가 끊어지기나 하듯, 그 전화는 뚝 끊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나치게 표백된 속옷 같은, 따스함이 없는 휑뎅그렁한 침묵만이 남았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아아"하고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일기를 계속 써나갔다. 서둘러 써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토요일에는 히틀러의 기갑사단이 폴란드에 침입하고 있었다. 급강하 폭격기 바르샤바 거리에...아니지, 틀리다. 그렇지 않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은 1939 9 1일의 사건이다.

어제 일은 아니다. 어제 나는 저녁 식사 후에 영화관에 가서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온 <소피의 선택>을 보았던 것이다. 히틀러가 폴란드에 침입한 건 그 영화 속의 사건이다.

메릴 스트립은 그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과 이혼하는데, 통근 열차 안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분장한 중년의 토목기사와 알게 되어 재혼을 한다. 무척 재미있는 영화였다.

나의 옆자리에는 고교생 커플이 있었는데, 서로의 배 부분을 줄곧 더듬고 있었다. 고교생의 배부분이란,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만해도 옛날엔 고교생의 배 부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풍 세계

 

나는 지난주분 일기를 전부 쓰고 나서 전축 앞에 앉아, 강풍이 휘몰아치는 일요일 오후에 듣기 알맞을 성싶은 음악을 골라 보았다.

결국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콘체르토와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레코드가 그런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울릴 것 같아서 나는 그 두 장의 레코드를 계속해서 들었다.

창밖으로 가끔씩 갖가지 물체가 날아 지나갔다. 하얀 시트가, 풀뿌리를 삶고 있는 마술사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가늘고 길다란 새 양철 간판은 항문 성애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그 연약한 척추를 발랑 젖뜨리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콘체르토를 들으면서 그런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옆의 자명종 시계는 3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저 보잉 747의 제트 엔진 같은 바람 소리를 예상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바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여보세요."하고 나도 말했다.

"지금 굴 요리 재료를 갖고 그쪽으로 가고 싶은데, 괜찮겠어요?"하고 나의 여자 친구가 말했다. 그녀는 굴 요리 재료와 눈가리개를 가지고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하지만..."

"뚝배기 갖고 있어요?"

"갖고 있어."

"하지만, 왠일이지? 바람 소리가 안 들리는군."

"그래요, 이제 바람은 그친걸요. 나카노에선 3 25분에 그쳤으니까, 이제 슬슬 그쪽에서도 그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전화를 끊고, 부엌 찬장에서 뚝배기를 꺼내 싱크대에서 씻었다.

그녀가 예고한 것처럼 바람은 4 5분전에 뚝 그쳤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 밑에서는 커다란 검정개가, 킁킁거리며 흙냄새를 열심히 맡으며 돌아다녔다. 개는 15분 내지 20분가량이나 싫증도 안 나는지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개가 어째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나로선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별도로 하고, 세상의 모습과 그 역할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기 전과 어느 한가지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히말라야 삼목과 밤나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하게 빈터에 서 있었고, 빨래는 빨랫줄에 축 늘어져 있었으며, 까마귀는 전봇대 꼭대기에 앉아서 크레디트 카드처럼 미끌미끌한 날개를 위아래로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여자 친구가 와서 굴 냄비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엌에서 굴을 씻고 사각사각 배추를 썰고, 두부를 나란히 놓고, 국물을 만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2 36분에 이쪽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걸었어요.“

그녀는 쌀을 씻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말도 들리지 않더군."하고 나는 말했다.

", 그래요? 바람이 굉장했거든요."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식탁 모서리에 걸터 앉아서 그걸 마셨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그런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것이 갑자기 뚝 그쳐 버렸을까?"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요."하고 그녀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손톱 끝으로 새우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바람에 대해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게 아주 많다구요. 고대사랑, 암이랑, 바다 밑이랑, 우주랑, 섹스에 대해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게 잔뜩 있는 것처럼요."

"흐응."

그런 대답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관해 그녀가 이야기해도 그 이상의 발전은 바랄수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단념하고 굴 냄비 요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 잠깐 아랫배를 만져도 될까?"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나중에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굴 냄비 요리가 완성되기까지, 나는 다음주에 몰아서 쓰게 될 일기를 위해, 오늘 하루 동안 생긴 일들을 간단히 메모로 정리해 놓았다.

 

1. 로마제국의 붕괴

2. 1881년의 인디언 봉기

3.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이런 메모다.

이렇게 해두면 다음주가 되어도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정확히 기억해 낼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용의주도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나는 요 22년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림 없이 일기를 계속 써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온갖 의미 있는 행위는 그 나름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불든 불지 않든,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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