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사정이 있어 등장 인물의 이름은 바꾸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사실이다.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 2년 정도 산 일이 있다. 그때 한 건축가와 알 게 되었다. 그는 쉰 살을 막 넘긴 핸섬한 남자였다. 머리칼은 반백이고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수영을 좋아하여 매일 수영장에 다니는 덕분에 탄력 있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은 테니스도 쳤다. 이름은 케이시라고 해두자. 독신인 그는 보스턴의 교외, 렉싱턴이란 곳에 오래된 저택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말이 없고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피아노 조율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조율사의 이름은 제레미 -대충 30대 중반에 버드나무처럼 홀쭉하고 큰 키에 머리가 슬슬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조율은 물론이고 피아노도 무척 잘 쳤다. 내 단편이 몇 편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 잡지에 게재 되었다. 케이시는 그것을 읽고 편집부를 통하여 내게 편지를 써 보냈다. 당신 작품과 당신에게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당신만 괜찮다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평소 그런식으로 사람을 만나지는 않는데(경험적으로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다) 이 케이시만은 만나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편지가 아주 지성적이고 유머 감각에 넘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외국에 나와 있는 편안함에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사는 곳도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케이시라는 인물에 개인적인 관심을 품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오래된 재즈 레코드를 상당량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온 미국을 다 뒤져도 개인이 이만큼 충실하게 재즈 레코드를 수집해 놓은 경우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재즈를 좋아한다고 하니 어쩌면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옳은 말씀. 나는 물론 흥미를 느꼈다. 그 편지를 읽고서 그의 컬렉션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오래된 재즈 레코드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말이 어떤 특별한 나무 냄새에 이끌리듯 정신적인 저항력을 잃고 만다.
케이시의 집은 렉싱턴에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케임브리지의 집에서 자동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전화를 걸자 그는 자세하게 지도를 그려 팩스로 보내주었다. 나는 4월의 어느 오후에 녹색 폭스바겐을 타고 혼자 그 집을 찾아갔다. 집은 금방 알 수 있었다. 3층짜리 웅장한 옛 저택이었다. 지은지 적어도 백 년은 넘을 성 싶었다. 보스턴 교외의 고급 주택지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지역에 있는 그 저택은 금세 눈에 띌 만큼 훌륭했다. 그림 엽서에 담아도 좋을 정도였다.
정원은 마치 넓은 숲 같았다. 네 마리 파란 언치새가 화려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울면서 이 가지 저 가지로 날아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드라이브 웨이에는 신형 BMW 왜건이 주차되어 있었다. 내가 BMW 뒤에다 차를 세우자 현관 매트 위에 드러누워 있던 대형 마스티프 견이 천천히 일어나 거의 의무적으로 두 세 번 짖었다. '짖고 싶어서 짖는 것을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어서'란 식으로.
케이시가 현관으로 나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굳은 악수였다. 악수를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것은 케이시의 버릇이었다.
"아아, 잘 오셨습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 참 기쁩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케이시가 입고 있는 이태리풍의 세련된 셔츠는 제일 윗단추까지 단정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위로는 엷은 갈색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쳤고 바지는 부드러운 감의 면이었다. 그리고 조르주 알마니풍의 조그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상당히 스마트했다. 케이시는 나를 안으로 안내하여 거실 소파를 권하고는 막 끓인 맛있는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케이시는 부담없는 성격의 인간이었다. 품위도 있고 교양도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말솜씨도 상당했다. 나는 그와 친해져서 한 달에 한 번은 그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훌륭한 레코드 컬렉션의 은총을 마음껏 누렸다. 거기에 있으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귀중한 음악을 내 마음대로 듣고 싶은 만큼 들을 수 있었다. 레코드 컬렉션에 비하면 오디오 장치는 그리 좋은 것은 못되었지만 구식 대형 진공관 앰프가 따스하고 정겨운 음을 재현해 주었다.
케이시의 일터는 자택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케이시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건축 설계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마치 변명을 하듯 말했다. 나는 그가 어떤 건축물을 설계하는지 모른다. 또 그가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케이시는 늘 거실 소파에 앉아 포도주 잔을 우아하게 기울이며 책을 일거나 제레미의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혹은 정원 의자에 앉아 개와 장난을 하였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었지만, 케이시는 그다지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은 그의 아버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책도 대여섯 권 썼는데 지금 그 저작물들은 거의 고전이 되었다. 또 열렬한 재즈 팬이기도 하였다. 프레스티지 레코드의 창시자이며 프로듀서인 보브 와인스톡과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 사연에 194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친 재즈 레코드가 케이시가 편지에 썼듯이,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하게 수집되어 있었다. 양적으로도 상당하지만 질적으로도 불평의 여지가 없었다. 레코드 대부분이 초판 오리지널이었고 상태도 양호했다. 판에는 흠집 하나 없고 재킷에도 손상이 없었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 장 한 장을 마치 갓난아기를 욕조에 집어넣듯 조심조심 소중하게 보관하고 관리하였을 것이다.
케이시는 형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후로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15년 전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시자 온 재산과 함께 레코드도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었다. 케이시는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때문에 레코드를 한 장도 처분하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케이시도 즐겨 재즈를 들었지만 아버지만큼 열광적인 팬은 아니었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하여 오자키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의 콘서트가 있을 경우에는 빠지지 않고 제레미와 들으러 갔다.
알고 지낸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집을 좀 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로서는 흔치 않은 일인데 일 때문에 일주일 정도 런던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케이시가 여행을 떠날 때에는 항상 제레미가 빈 집을 지켰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웨스트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제레미의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그가 얼마 전부터 그쪽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이시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자네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이라고 케이시는 말했다. "마일스(개의 이름이다)한테 하루에 두 번 먹이만 주면 그 외에는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니까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걸세. 레코드도 마음껏 들을 수 있고. 술도 식료품도 충분히 준비해두었으니까. 자네 편할 대로 그냥 지내주기만 하면 되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는 그때 사정이 있어서 일시적이나마 혼자 생활하고 있었고, 빌려 살고 있는 케임브리지의 아파트 옆집이 마침 개축 공사를 시작하여 매일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갈아입을 옷과 매킨토시 파워북과 책을 몇 권 가지고 금요일 오후에 케이시의 집으로 갔다. 케이시는 짐을 다 꾸리고 택시를 부르려는 참이었다.
나는, 런던을 즐기고 오라고 말했다.
"아아, 물론"이라고 케이시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내 집과 레코드를 즐겨 주게나. 나쁘지 않은 집이니까."
케이시가 떠나고 난 후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거실 옆 테이블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케이시의 아버지가 남긴 레코드를 들으면서 한 시간 정도 일을 하였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시험해본 것이다.
책상은 양쪽에 서랍이 달린 고풍스런 마호가니 제품이었다. 묵직하고 상당히 오래돼 보였다. 하기야 그 방에 놓여 있는 것 중에서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내가 들고 온 매킨토시 정도일 것이다. 눈에 띄는 사물이 하나같이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먼 옛날부터 지금과 똑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케이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음악실에는 -마치 신전이나 성유물 안치소처럼- 전혀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이 정체될 듯한, 집인데, 특히 이 음악실 안에서는 얼마 전부터 시계가 그 움직임을 뚝 멈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책꽂이에는 먼지 하나 없고 책상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마일스가 다가와 내 발치에 벌렁 누웠다. 나는 그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어 주었다. 외로움을 몹시 잘 타는 개였다. 오랜 시간 혼자 있지 못한다. 잘 때만은 부엌 옆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자도록 습관이 들어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옆에서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상대방에게 슬며시 대고 있다.
거실과 음악실은 문이 없는 높은 문틀로 나뉘어 있다. 거실에는 벽돌로 쌓은 거대한 벽난로가 있고, 푹신한 3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다. 하나하나 모양이 다른 커피 테이블이 세 개. 바닥에는 품위 있게 퇴색한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고 높은 천장에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법한 고풍스런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빙그르르 사방을 돌아보았다. 벽난로 위의 탁상시계가 토닥토닥 손톱으로 창문이라도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때를 새기고 있었다.
벽 쪽의 높은 책꽂이에는 미술 서적과 각종 전문 서적이 꽂혀 있었다. 나머지 세 벽에는 어딘가의 해변을 그린 크고 작은 유화가 뒤섞여 걸려 있었다. 그림은 대개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그림에는 사람의 모습은 전혀 없고 그저 쓸쓸한 해변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귀를 갖다 대면 서늘한 바람소리와 거친 파도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거기에 놓여 있는 모든 것에서 그야말로 뉴 잉글랜드풍의 절도 있고 그러나 지나치게 소탈한 올드 머니의 냄새가 났다.
음악실의 넓은 벽 한 면이 온통 레코드 선반이었다. 오래된 LP레코드가 연주가의 이름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케이시도 그 정확한 숫자를 몰랐다. 그는 6천 장이나 7천 장쯤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것에 버금가는 숫자의 레코드가 카툰 박스에 담겨 다락방에 방치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이 집도 옛날 레코드 무게 때문에 어셔가처럼 뿌지직뿌지직 땅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르겠네."
리 코니츠의 오래된 10인치 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책상을 향하여 문장을 쓰고 있자니, 시간은 내 주위를 기분 좋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마치 사이즈가 딱 맞는 주형에 자신을 끼워 맞춘 듯한,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껏 가꾸어진 특별한 친밀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방의 온 구석구석, 벽에 난 조그만 돌기와 커튼 주름에까지 음악의 울림이 푸근하게 배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케이시가 준비해둔 몽테플치아노 적포도주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크리스털 포도주 잔에 따라 몇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오는 길에 산 신간 소설을 읽었다. 케이시가 자신 있게 권한 만큼이나 맛있는 포도주였다. 냉장고에서 브리에 치즈를 꺼내 크래커와 함께 4분의 1쯤 먹었다. 그러는 동안 사방은 잠잠했다. 예의 토닥토닥하는 시계 소리를 제외하면 때로 집 앞을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래봐야 집 앞 도로는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는 '드라이브 웨이'였다. 오가는 차량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차로 한정되어 있다. 밤이 깊어지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네에 학생들이 많아 시끌벅적한 케임브리지의 아파트에 비하면 어째 바닷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자 슬슬 잠이 왔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부엌 싱크대에 잔을 갖다놓고 마일스에게 잘 자라고 말했다. 개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낡은 모포 위에 몸을 웅크리고 끙끙 신음하더니 눈을 깜박깜박 거렸다. 나는 불을 끄고 2층에 있는 손님용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 금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공백 속에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데쳐놓은 채소처럼 무감각했다. 야채 박스 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는 채소처럼. 그리고 나는 간신히 지금 케이시의 집을 지키고 있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렇다, 나는 렉싱턴에 있는 것이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두었던 손목시계를 찾았다. 버튼을 눌러 파란 글로가 들어오게 하였다. 한 시 15분이었다.
침대 위에서 살며시 몸을 일으키고 조그만 독서용 램프를 켰다.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떠올리는 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나리꽃 모양을 한 뽀얀 우윳빛 유리에 노란 빛이 퍼졌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게 비비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밝아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을 점검하고 커튼을 바라보고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콩이라도 주워 모으듯 의식을 하나하나 주워 담고 몸을 현실에 적응시켰다. 그런 후에야 그것을 알았다. 소리다. 해안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같은 자글거림, 그 소리가 나를 깊은 잠에서 끌어올린 것이다.
밑에 누군가가 있다.
살금살금 문까지 다가가 숨을 죽였다. 귀 바로 옆에서 자신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마른 소리가 들렸다. 나 이외에 이 집 안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다. 음악소리 같은 것도 희미하게 들린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대체 이 집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잘 꾸며진 프래티컬 조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케이시는 런던에 가는 척했지만 실은 이 집 근처에 남아 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한밤의 파티를 준비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시는 그런 시시한 장난을 꾸밀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유머 감각은 훨씬 섬세하고 차분하다.
아니면 -나는 문에 기댄 채 생각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내가 모르는 케이시의 친구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케이시가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그리고 내가 빈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이때다 하고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찌되었건 적어도 도둑은 아니다. 도둑은 남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이렇게 큰 소리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나는 잠옷을 벗고 바지를 입었다. 스니커를 신고 T셔츠 위에다 스웨터를 껴입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라는 것도 있다. 손이 허전했다. 방안을 돌아보았지만 적당한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야구 방망이도 없었고 부젓가락도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서랍장과 침대와 조그만 책꽂이와 액자에 들어 있는 풍경화뿐이었다.
복도로 나오자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계단 아래서 흥겨운 옛날 음악이 증기처럼 복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에 익은 유명한 곡인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말소리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로 뒤섞여 있어, 이야기의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때로 웃는 소리도 들렸다. 기품 있고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아무래도 아래층에서는 파티가 진행 중이고 그것도 한참 절정에 있는 듯하였다. 흥을 돋우듯 샴페인 잔이 포도주 잔과 부딪치는 소리가 짜랑짜랑 영롱하게 울렸다. 아마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구두창이 바닥을 이동하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찌익 찌익 들렸다.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어두운 복도를 걸어 계단 층계참에 섰다. 그리고 난간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길쭉한 현관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이 장엄한 분위기의 넓은 현관홀을 희뿌옇게 비추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없다. 홀에서 거실로 통하는 쌍바라지 문은 반듯하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은 내가 자러 갈 때는 분명 열려 있었다. 틀림없다. 그러니까 내가 2층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든 후에 누군가가 그 문을 닫았다는 얘기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2층 방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침대에 파고들어…….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계단 위에 서서. 아래층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소리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맨 처음 느꼈던 충격은 연못에 인 파문이 가라앉듯 점차 진정되었다. 분위기로 보아 그들이 이상한 종류의 인간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계단을 내려가 현관홀까지 갔다. 스니커의 고무바닥이 낡은 나무판을 한 단 한 단 조용히 밟았다. 홀에 도착하자 그대로 왼쪽으로 돌아 부엌에 들어갔다. 불을 켜고 서랍을 열어 묵직한 육류용 칼을 손에 잡았다. 케이시는 요리가 취미라서 독일제 고급 식칼 세트를 갖고 있었다. 손질도 잘되어 있었다. 잘 벼려진 스테인리스 칼은 손 안에서 요염하고 리얼하게 빛났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커다란 칼을 손에 꽉 쥐고 시끌한 파티 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돗물을 한 컵 마시고 칼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개는 어떻게 된 거지?
그때서야 비로소 마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마일스는 자신의 잠자리에 있지 않았다. 대체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만약 한밤중에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면 적어도 짖든지 어떻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바닥에 쭈그리고 털투성이 모포의 움푹한 자리에 손을 대어 보았지만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개는 아무래도 한참 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나와 현관 홀로 가서는 거기에 놓여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음악소리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파도처럼 높이 올랐다가 가라앉곤 하였다.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 적어도 열다섯 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스무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넓은 거실도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어렵고 또 기묘한 선택이었다. 나는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니 관리에도 그 나름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파티에는 초대받지 않았다.
나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말소리의 단편이나마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말소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단어 하나 구별할 수 없었다. 언어며 대화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두껍게 덧칠한 벽처럼 내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파고들어갈 여지 따위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동전을 하나 꺼내 이렇다 할 의미도 없이 손 안에서 몇 번 돌려 보았다. 그 은색 동전은 나에게 솔리드한 현실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그것은 유령이다.
거실에 모여 음악을 듣고 담소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양팔에 싸하게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감촉이 있었다. 마치 주변의 위상이 어긋나는 것처럼 기압이 변화하여 귓속에서 부우우웅하는 이명이 가볍게 울렸다. 침을 삼키려는데 목이 카랑카랑 말라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나는 동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심장이 또 경직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런 얼토당토않은 시간에 대체 어디에 사는 누가 파티를 연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웅성웅성 현관을 통해 집으로 들어왔다면 암만 그래도 그 시점에서 나는 눈을 떴을 것이다. 개도 짖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즉, 그들은 어디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일스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굵직한 개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 냄새를 맡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개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현관 홀 의자 위에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론 무서웠다. 그러나 무서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깊고 막막한 것이었다.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어 폐 속의 공기를 조용히 교환하였다. 조금씩 정상적인 감각이 되돌아왔다.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카드가 몇 장 살며시 뒤집어지는 듯한, 그런 감각이 있었다.
나는 일어나 내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그 뒤에도 음악소리와 말소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 가깝도록 그 소리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을 켜둔 채 침대의 헤드보드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은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늘고 차분하게 내리는 비였다. 오로지 지면을 적실 목적으로 내리는 봄비였다. 처마 밑에서 파란 언치새가 울었다. 시계 바늘은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홀에서 거실로 통하는 문은 어젯밤 내가 자러 가기 전과 똑같이 열려 있었다. 거실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가 읽던 책은 소파 위에 엎어져 있었다. 크래커 부스러기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널려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파티가 열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엌 바닥에서는 마일스가 둥그렇게 몸을 말고 아직 자고 있었다. 개를 깨워 도그 푸드를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개는 귀를 쫑긋거리며 우적우적 신나게 먹이를 먹었다.
케이시의 집 거실에서 이 불가사의한 한밤중의 파티가 열린 것은 첫 날 밤뿐이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하고 은밀한 렉싱턴의 밤이 이렇다 할 특징 없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다만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매일 밤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언제나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였다. 남의 집에서 혼자 자자니 잠자리가 뒤숭숭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내 마음이 저 기묘한 한밤의 파티와 다시 한 번 조우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숨을 죽이고 암흑 속에서 귀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정원의 나무들을 소슬 거려 놓을 뿐이었다. 그런 때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물을 마셨다. 마일스는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내가 모습을 보이면 반갑다는 듯이 깨어나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내 다리에 비벼댔다.
나는 개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방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여느 때와 똑같은 위치에서 밤의 어둠에 녹아 있을 뿐이었다. 뉴잉글랜드의 해안 풍경을 그린 멋대가리 없는 유화도 변함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10분이나 15분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이 방안에서 무슨 실마리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교외의 비밀스럽고 깊은 밤이 있을 뿐이었다. 화단에 면한 창문을 열자 봄꽃의 풍요로운 향내가 풍겼다. 커튼이 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깊은 숲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나는 일주일 후 케이시가 런던에서 돌아오더라도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정했다. 왜인지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시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지내기가 어땠는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나?"
케이시는 현관에서 내게 그렇게 물었다.
"아니, 특별한 일은 없었네. 아주 조용하고, 일도 잘 되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 정말 다행이로군."
케이시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값비싼 몰트위스키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 길로 악수를 하고 헤어져, 폭스바겐을 몰고 케임브리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반년 가까이 케이시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가 몇 번 걸려와 얘기를 나누기는 하였다. 제레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과묵한 피아노 조율사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긴 소설의 막바지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라서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를 만난다든가 외출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책상 앞에서 일을 하였고, 집 둘레 1킬로미터 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케이시를 만난 것은 찰스 강의 보트 하우스 근처에 있는 카페 테라스였다. 산책을 하는데 거기서 우연히 그를 만나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케이시는 지난번 만났을 때에 비해 깜짝 놀랄 만큼 늙어 있었다. 몰라 볼 정도였다. 열 살이나 나이 먹어 보였다. 흰머리가 늘어난 머리카락은 귀 위로 길게 자라 있고, 눈 아래는 거무죽죽한 주머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손등의 주름까지 더 자글자글해 보였다. 외모에 꼼꼼하게 신경을 쓰는 스마트한 케이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무슨 병을 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케이시가 그 점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나도 묻지 않았다.
제레미는 이제 렉싱턴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라고 케이시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으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끔 전화로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그와 얘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어째 사람이 변해버린 것 같다네. 옛날의 제레미와는 달라. 거의 별자리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네. 처음부터 끝까지 별 볼일 없는 별자리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네. 처음부터 끝까지 별 볼일 없는 별자리 얘기뿐이지. 오늘은 별자리의 위치가 어떻고,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하면 좋고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느니, 그런 얘기들뿐이네. 렉싱턴에 있을 때는 별자리 얘기 따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안됐군(I'm really sorry)."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대체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난 겨우 열 살이었네"라고 케이시는 커피 잔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형제가 없어서, 아버지와 나 단둘이 남았지. 어머니는 어느 해 가을 초엽에, 요트 사고로 돌아가셨네. 우리는 그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정신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네. 그녀는 아직 젊고 건강하셨지. 아버지보다 열 살 이상이나 연하셨으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언젠가는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버지나 나나 전혀 하지 못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휑하니, 연기나 뭐 그런 것처럼 말일세. 어머니는 아름답고 총명하신 분이라,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지. 산책을 좋아하시고, 아주 품위 있게 걷는 분이였다네. 등을 곧바로 펴고, 턱을 조금 앞으로 내민 채, 뒷짐을 지시고, 즐겁게 걸으셨어. 걸으면서도 곧잘 노래도 부르시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산책하기를 좋아했다네. 늘 떠오르는 것은, 여름날 아침의 상쾌한 빛을 받으며 뉴포트 해변 길을 걷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네. 그녀의 긴 섬머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시원스럽게 팔락이곤 했지. 자잘한 꽃무늬 면 원피스였네. 그 광경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어. 아마 아들인 나보다 어머니를 훨씬 더 사랑하셨을 거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지. 자기 손으로 획득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그에게 나란 존재는,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이었어. 그는 물론 나도 사랑해 주셨어. 딱 하나뿐인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었지. 그렇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으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3주일 동안, 아버지는 내내 잠만 자셨어. 과장이 아니라네. 말 그대로 내내 주무셨지. 어쩌다 생각났다는 듯 침대에서 훌쩍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물을 마시고, 무슨 징표처럼 음식을 조금 드셨어. 몽유병자나 유령처럼 말일세. 덧문까지 완전히 꼭꼭 닫은 캄캄한 방안에서 마치 주술에 걸린 잠자는 미녀처럼, 끝없이 주무셨다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어. 몸을 뒤척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으셨어. 나는 불안해서 아버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확인했었지. 혹 자는 게 아니라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일세. 나는 머리맡에 서서, 빨려들어 갈 듯 아버지의 얼굴을 지켜보곤 했다네.
하지만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어. 그는 땅 속에 묻힌 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지. 아마 꿈도 꾸지 않으셨을 거네. 어둡고 조용한 방안으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 그렇게 깊고, 그렇게 긴 잠을 나는 그때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네.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가버린 사람처럼 보였어.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네. 나는 그 넓은 저택 안에서, 그야말로 외톨이였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었다네.
1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물론 슬프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리 놀리지 않았다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깊이 잠들어 있는 아버지 모습하고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지. 그때의 아버지 모습하고 너무 비슷했어. 그건 데자뷰였다네. 온몸의 심지가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데자뷰였지. 나는 30년이란 세월을 사이에 두고, 과거를 고스란히 더듬고 있었던 걸세. 다만 이번에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네. 온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어. 존경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린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어. 그래서 이상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침대에 들어가 끝없는 잠에 빠졌다네. 마치 특별한 혈통의 의식이라도 계승하는 것처럼 말일세.
아마 한 3주일은 잤을 걸세. 나는 그동안 자고 또 자고, 시간이 썩어 문드러져 없어질 때까지 잤다네. 한 없이 한 없이 잘 수 있었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라는 거야. 그때의 나한테는 잠의 세계가 진정한 세계고, 현실 세계는 허망하고 덧없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것은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어.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느꼈을 무상함을,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요컨대 그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형태를 위해. 다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지."
케이시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메밀 잣 밤나무 열매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마른 소리가 이따금 탁, 하고 들렸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케이시는 얼굴을 들고 여느 때의 온화하고 세련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말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네."
가끔 렉싱턴의 유령을 떠올린다.
케이시의 고풍스런 저택 거실에서, 한밤중에 시끌시끌한 파티를 열었던 정체 모를 유령들을. 그리고 덧문까지 꼭꼭 닫은 2층 침실에서 예비적인 사자(死者)처럼 끝없는 잠에 빠져 있는 케이시의 모습과, 그의 아버지를. 붙임성 좋은 개 마일스와, 숨이 삼켜질 만큼 완벽한 레코드 컬렉션을. 제레미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와, 현관 앞에 세워져 있는 파란 BMW 왜건을. 하지만 그런 것들 모두가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장소에서 있었던 일들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바로 얼마 전에 경험한 일인데도.
나는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기묘한 이야기인데도, 필경은 그 아득함 때문에, 내게는 조금도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무라카미하루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부터 라면의 노래 (0) | 2013.03.22 |
---|---|
잉카의 바닥없는 우물 (0) | 2013.03.21 |
치즈케이크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나의 가난 (0) | 2013.03.20 |
FUN FUN FUN (0) | 2013.03.20 |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 (0) | 2013.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