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을 하는 쪽은 너무 많고 말을 들어 주는 쪽은 너무 적다.
그 위에 말은 죽는다.
1초 마다 말은 죽어 간다. 도로에서, 지붕 아래서, 황야에서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 그리고 역의 대합실에서, 코트의 깃을 세운 채 말은 죽어 간다.
"손님 여러분! 열차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말은 죽어 있다.
가엾게도 말은 묘비조차도 없다. 말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위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인과응보야"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당연한 거지, 녀석은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이용했어. 마치 시체를 먹는 것처럼 말이지."
그러나 원래 그런 것이 말이다. 누가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사자의 대열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시체냄새는 언제까지나 내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체냄새
대학시절 수영수업 때 처음으로 온수풀에 들어가 봤다. 난생 처음 온수풀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한 물,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자아를 상실했던 물이 나를 희미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뭔가 겉과 속이 역전된 우주 한 가운데 삼켜져 버린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주 긴 시간을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이! 거기 학생 우두커니 서 있지 마! 이곳은 목욕탕이 아니야!"
교관이 나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그렇다. 이곳은 목욕탕이 아니다. 나는 자아에게 돌아왔다.
내 안에서 과거와 미래가 상념(想念)에 의해서 다시 한 번 결합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말로 그 시체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시체냄새에 익숙할 수 있는 인간 따위는 구제불능이다. 피부가 터지고 살이 녹아내리고 내장이 썩은 그곳에 구더기가 우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시체냄새다.
도대체 누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것에 익숙할 수 있을까? 나는 역 대합실에서 스토브를 쬐면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은 여전히 코트의 깃을 세운 채였다.
"당신의 몸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요." 라고 말은 말한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소용없어요. 그 냄새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요. 이제 누구도 당신의 일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모두가 당신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자신이 스스로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우리는 그런 경우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아왔어요. 당신만이 예외가 될 이유는 없어요. 확실히 당신의 몸에서는 냄새가 나요."
말.
너는 오래전에 죽었다. 나는 네가 마지막 숨을 쉬는 것을 정확히 보고난 뒤, 땅에 아주 깊은 구멍을 파고 그곳에 너를 묻었다. 그리고 작업화의 바닥으로 지면을 단단히 밟았다. 그러나 10년의 세월 뒤에 말은 살아났다. 마치 귀신처럼 말은 무덤을 열고 어둠과 함께 그 모습을 내 앞에 나타냈다.
"무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 이라고 말은 내게 말한다.
"당신에게 그 이유를 알려 줄 필요는 없겠죠? 깊은 땅속에서 나를 불러 일으켰던 것은 당신자신 속의 위선 이예요."
"저 기다려 줘" 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무엇 하나 이용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확실히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위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외에 나에게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누구도 신앙에서 기적만을 잘라 내어 얻을 수는 없다. 그렇지?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손님여러분! 열차가 왔습니다."
그리고 말은 죽는다.
2
너는 나에게 거리를 가르쳐 주었다. 18세 여름의 석양, 우리들은 풀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면서 냇물의 상류로 걷고 있었다. 목적지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류로 걸어갈 뿐이었다. 급류를 몇 번이나 건너며 맑은 웅덩이의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둘 다 맨발이었다.
맑고 차가운 물이 둘의 발목을 적셨고 냇물 바닥의 모래는 마치 새로 짠 실처럼 부드럽게 발에 다았다. 너는 비닐 쇼울더 백에 힐이 붙은 노란색의 샌들을 넣은 채 나보다 몇 걸음인가 앞을 계속 걷고 있었다.
너의 젖은 다리에는 풀의 가느다란 싹이 빛의 가루처럼 덧붙여져서 오후의 마지막 햇살의 그림자를 수면에 흔들고 있었다. 너는 걷다가 지쳤고 여름 풀 속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침묵 속에 짙은 어둠이 둘의 몸을 덮어오기 시작 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수천 가닥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는 듯 했다. 너의 눈언저리의 움직임이나 입술의 미묘한 떨림조차도 내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흔들었다.
우리에게 이름은 없다. 18세의 여름 풀밭위의 추억 그것 뿐 이였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은 없다. 냇물도 이름은 없다. 그것이 우리의 룰이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 희미한 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에도 이름은 없었다.
우리는 그런 이름 없는 세계의 풀밭 위로 침전해 가고 있었다.
"거리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어" 라고 너는 말했다.
"넓은 거리는 아니지만 숨 막힐 만큼 좁지도 않아"
이렇게 하여 거리는 벽을 갖게 되었다. 네가 계속 말했던 거리는 한줄기의 강과 3개의 다리를 갖고 망루와 도서관을, 그리고 버려진 주물공장과 가난한 공동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의 석양은 뜨거운 빛 속에서 나와 너는 어깨를 움츠리듯 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그 벽에 쌓인 거리의 가운데야" 라고 너는 말했다.
"그러나 18년이 걸렸어, 그 거리를 찾는데……. 그리고 진실한 나를 바라보는데"
"그 거리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라고 나는 물었다.
"도서관에서 일하지" 너는 당당하게 말했다.
"일은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그곳에 가면 정말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응, 물론 네가 그 거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약.........."
너는 그 부분에서 입을 다물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나는 말 못한 너의 이야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네가 정말로 나를 바란다면 그것이 너의 말위였다. 나는 너를 안았다. 그러나 그 여름 황혼 속에 내가 안았던 것은 그저 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너는 벽에 둘러싸였던 거리 속에 있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사과나무가 자라고 짐승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오래된 공동주택에 살며 검은 빵과 사과를 먹으며 살고 있었다. 짐승들은 나뭇잎과 나무 열매를 먹고 긴 겨울에는 그 반수가 굶주림으로 죽었다. 어째서나는 그 거리에 들어가고 싶다고 바라게 되었을까
"거리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야" 라고 너는 말했다.
"그리고 나오는 일도"
"어떻게 하면 되지?"
"바램을 가져 지금보다도 더욱 강하게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거리에 살 수 있게 돼. 얼마만큼 긴 시간이 걸려도 체념하지 말고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곳에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라도……. 너를 위한 장소도 계속 놓아둘게"
"나를 위한 장소"
"그래 하나정도 빈 곳이 있어, 너는 그 거리에서 예언자야."
"예언자?" 나는 웃었다. "나는 예언 따위는 할 수 없어"
"아무 예언도 하지 않아도 좋아, 손님을 얻을 필요도 없으니까. 예언자는 도서관의 서고에서 오랜 꿈의 정리를 하는 일만하면 돼. 나도 그 일을 도와주지"
"오랜 꿈"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팔 속에서 너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 만약 그 곳에서 내가 너를 만난다하여도 나는 너와의 일은 무엇 하나 기억할 수 없으니까"
"왜" 라고 나는 물었다.
왜라니? 너는 모르겠어. 지금 네가 안고 있는 것은 그저 나의 그림자일 뿐 이라는 것을, 너 자신의 따뜻함이라는 것을…….
너는 그 벽에 둘러싸인 상상의 거리의 속에서 죽었다.
네가 죽은 것은 아침 6시, 거리에는 조의(弔意)의 종이 울리고 사람도 짐승도 그 머리를 숙였다. 너의 뼈는 하얀 천에 쌓여 벽 바깥의 묘지에 묻혀 졌다. 묘지는 언덕위에 있고 그 주위를 사과나무들이 둘러져 있었다. 사과나무는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이 피고 묘지는 바람에 흔들려 그 꽃잎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른 것은 너의 그림자 일뿐, 너는 어두운 도서관에 계속 살고 있었다. 오랜 꿈이 있는 거리로 돌아가자……. 그곳만이 나의 장소이다.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3
가을 짐승들의 몸은 빛나는 금색의 털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외뿔은 하얀 색이였다.
그들은 차가운 냇가의 흐름에 말굽을 씻고 가을의 붉은 나무의 열매를 찾아다녔다.
멋진 계절이었다.
나는 서쪽 벽에 덧붙여 세워진 오래된 망루에 서서 오후 5시의 뿔피리소리를 기다린다. 뿔피리소리는 길게 1번, 짧게 3번, 그리고 끝이 난다. 부드러운 피리 소리가 거리모퉁이로 오래된 추억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소리는 미세한 물방울이 되어, 푸름을 더해가는 대기(大氣) 속으로 녹아들거나 혹은 낡은 보도블록에 빨려 들어갔다. 뿔피리를 부는 것은 수천 년 사이를 쉬지 않고 반복되어 온 것이리라. 집집마다 석벽의 틈틈에도, 공원의 담장에 덧 붙여 만든 작은 돌상에도 그 소리는 스며들어 있었다. 시간은 거리에 모퉁이마다 평온하게 고여 있었다. 나의 손끝은 그들의 그 같은 평온함을 부드럽게 더듬었다.
오후 5시 마치 끝이 없는 책의 페이지를 반복하듯 뿔피리가 시간을 알리고 짐승들은 태고의 기억을 향해서 머리를 들었다. 어느 것은 금작화(金雀華)를 씹는 것을 멈추며, 어느 것은 자리에 앉은 채 말굽을 툭툭 보도를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어느 것은 마지막 햇살 속의 낮잠을 깨며, 그렇게들 머리를 들었다.
모두는 한순간 조각처럼 정지한다.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바람에 날리는 그들의 부드러운 금색의 털,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각자의 생각하는 쪽으로 머리를 굽히고 가만히 우주를 바라보는 체, 짐승들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다. 그리고 뿔피리의 소리가 귀를 울린다. 뿔피리의 마지막 소리가 없어진 석양 속에 사라질 때, 그들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주문(呪文)은 풀리고, 그러고 나서 잠시 뒤면 거리에 짐승들의 말굽소리가 울린다. 강물처럼 짐승들의 행렬은 하얀 보도블록 위를 흘렀다. 누군가 선두에 서는 일도 없다. 누군가 대열을 이끄는 것도 아니다. 짐승들은 눈을 내리고 어깨를 조금씩 좌우로 흔들며 그 침묵의 강물을 따라 내려갈 뿐 이였다. 그래도 하나하나의 사이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친밀함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석양이 그들의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망루에서 내려 보면 짐승들의 진행은 마치 전설의 황금의 강물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의 길에서부터 한 마리, 두 마리 씩 나타나서 무리를 이루어 그 수를 늘리는 것처럼 수량(水量)을 증가시키며 거리를 횡단하여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몇 번인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 나는 짐승들의 걸음걸이와 빠르기가 엄밀하게 정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공원을 나오면 부자연하리만큼 좁은 첨탑을 가진 시계탑까지 걷고, 남으로 향해서 옛 다리를 건너고 그대로 남으로 향한 운하를 건너 공장 거리를 통과하여, 동쪽 숲으로 나무의 열매를 찾고 있던 일군(一群)을 주워 담는다. 다음에 방향을 서쪽으로 향하고 주물공장의 지하도를 지나서, 서쪽의 언덕의 여백에 그 대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늙은 짐승들과 어린 짐승들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북으로 향해 방향을 바꿔 서쪽 다리를 건너 문에 다다른다.
문은 정확하게 5분간만 문지기의 손으로 열린다. 두꺼운 철판으로 종횡으로 두드려져 만든 무거운 문이다. 문지기는 자신의 일에 굉장히 충실한 남자다. 뿔피리를 부는 것도 또한 그의 일이다. 그는 문지기의 집의 앞에서 약 2미터 정도의 높은 전망대에 올라 하늘을 향해서 뿔피리를 불었다. 이상한 광경이다. 이 남자의 도대체 어디에서 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이 만들어져 나올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짐승들을 전부 통과시키면 그는 전망대에서 내려가 가볍게 문을 닫는다.
문밖에는 짐승들을 위한 장소이다. 짐승들은 그곳에서 자고 교미를 하고 자식을 낳는다.
넓은 땅이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조그마한 강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정말 벽에 둘러싸여져 있다. 1미터 정도의 낮은 벽이 있지만 짐승들이 그것을 넘을 수는 없다.
그 낮은 벽을 싸고 있는 것은 사과나무뿐이다. 나무들의 기묘한 생명감이 서쪽 지역에 머물었고 벽이 그 파도를 막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벽을 나와서 숲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문지기 혼자뿐이었다.
서쪽 벽에는 20미터정도의 높이의 망루가 지어져 있다. 망루는 후세에 벽에 덧붙여 진 것 같았다. 벽돌의 구조는 벽에 비하면 훨씬 약했고 나선형 계단은 여기저기 무너지고 떨어져 있었다. 상부(上部)에는 비를 막기 위한 나무로 된 지붕이 있고 벽의 외부로 내밀어진 창문부터는 화살을 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창에는 철로 된 열쇠가 잠겨 있었지만 그것이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가 탈출을 막기 위한 것인가는 난 알 수 없었다.
봄이 시작하는 1주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곳에는 오를 수 없어 라고 문지기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누구도 짐승들에게 흥미를 갖고 있지는 않으니까.
봄이 시작하는 1주간만 짐승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기위해 사람들은 망루에 올랐다.
짐승들은 그때에는 상상할 수 없이 난폭해지고 생명이 위험할 만큼 싸우고 피투성이가 된 가운데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
짐승들은 이처럼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들 자신만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질서는 피로서 얻어진다. 그리고 부드러운 4월의 비가 그 피를 대지에서 씻어 낼 때 쯤 다시 온화한 존재로 돌아간다.
가을의 짐승들은 그렇게 결정지어진 장소에서 조용히 웅크린 체, 금색의 털을 빛내고 있었다. 어둠이 주위를 덮을 때까지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했다. 마치 참선하는 승려와 같았다.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과나무 속에 태양이 저물어가기를 기다렸다.
그 수는 무려 1000마리를 밑돌았다. 나는 부족할 것이 없는 1000의 명상과 1000의 휘황함을 계속 바라보았다.
곧 해가 지고, 최초의 푸른 어둠이 흐를 때 짐승들은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해서 거리의 하루도 끝난다. 그리고 계절이 끝나고, 한해가 가고 시절이 끝난다.
나도 망루의 난간에 기대 눈을 감고 그 거리감이 없는 암흑을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여러 상념에 몸을 맡겼다. 다시 한 번 눈을 떴을 때 밤의 어둠은 이미 천 마리의 짐승들을 그 안에 감추고 있었다.
4
시계탑은 다리의 정면의 광장의 중앙에서 높은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의 기념비(moment)같은 긴 석조 탑이었다. 내부는 비어있었지만 어디에도 입구는 없었다.
필시 그것은 지하에 있겠지…….
그 탑의 높이는 이상할 정도로 높아 문자판을 보기위해서는 강을 향한 언덕까지 가지 않으면 안됐다. 반원형으로 된 광장을 둘러싼 석조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대체로 단층건물 이였지만 낮은 삼각지붕이 눌린 것 같은 지붕이 붙어있는 것도 몇 개 있었다.
도서관도 그런 건물의 한 모퉁이에 있었다. 그곳이 도서관이라고 푯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게시판의 안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곡물창고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두텁고 음산한 석벽, 좁은 처마, 천정에 닿을 만큼 위에 있는 조그만 창.
문지기가 상세한 지도를 그려주지 않았다면 도서관을 찾는 데만도 100년은 걸릴 것 같았다.
광장 주위에 강가를 따라서 그런 비슷한 모양의 까닭모를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그 건물들의 하나하나 속에서 도대체 뭐를 하고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혹은 우편물을 잃어버린 우체국이고 시체를 읽어버린 시체안치소이고 광부를 잃어버린 광산사무소이고 그 어떤 것일지는 몰랐다. 입구는 닫혀있었고 빗장 위에 두터운 먼지가 쌓여있었다.
강변의 길은 아름다운 길이였다. 높고 곧은 가로등이 20보를 두고 늘어서 있고 그 아래에 강은 동에서 서로 거리를 둘로 나누면서 노래처럼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삼면(三面)을 불어 건너오는 바람은 모래섬의 버드나무가지를 흔들고 서쪽언덕으로 밀려갔다.
강은 동(東)에서 서(西)로 거리를 두개로 나누면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똑바로 흐르고 있었다. 강바닥에는 동쪽의 끄트머리부터 옮겨져 온 미세한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여백을 소용돌이치는 물은, 지금은 닫혀버린 동문(東門)의 옆으로 부터 거리에 흘러왔고 옛 다리의 중심부의 주위에 몇 개의 아름다운 모양을 한 모래섬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옛 다리를 빠져나가 좀 더 똑바로 나아간 뒤, 서쪽언덕의 기슭에서 급하게 남쪽으로 나눠져서 깊은 소용들이를 만들면서 흩어져가고 남쪽의 벽의 앞에서 깊은 웅덩이로 흘렀다. 강은 이곳에서 끝나고 있다. 웅덩이의 바닥에서는 몇 개의 지하터널이 입구를 열고 있고 강은 그곳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남쪽에 넓은 광장이 있는 석회암의 황야의 지하를 지나서 이처럼 흘러서 이 어둠의 강이 다음에 어느 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내가 도서관의 문을 연 것은 거리에 온지 3일째였다. 무거운 나무문은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안에는 복도가 곧 바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높은 천정에는 노란색 전구가 몇 개 달려 있을 뿐 이였다. 말라버린 땀 냄새 같은 향기가 났다. 왠지 모르게 나의 몸조차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버릴 정도로 얇은 빛이 복도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런 복도가 몇 번이나 꺾여 어디까지인가 이어져 있었다. 전구의 빛이 더해져 변색 돼 버린 듯 보이는 벽, 이런 복도가 몇 번이나 갈라지고 구부러지면서 어딘가까지 이어졌다. 입구에 비해서 건물 안의 복도는 꽤 길었다. 마치 땅 밑으로 내려가는 듯 한 기분이었다.
계속 걷다가, 이미 어딘가에 이르는 것도 돌아가는 것조차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입구가 나타났다. 세공한 유리가 들어간 화려한 문리였다. 나는 낡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내부는 사방 5미터의 정사각형 방리였다. 창문도 없고 장식도 없었다. 나무의자 한 개가 중앙에, 붉게 열이 오른 스토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주전자가 하얀 수증기를 내고 있다. 주위에는 대출을 위한 카운터, 그 쪽을 향해 서고로 통하여 있는 듯 한 문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이 도서관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나무의자에 앉아 불을 쬐며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네가 방안 내부의 문으로 모습을 나타냈던 것은 30분이 지난 뒤였다.
"죄송합니다." 너는 말했다.
"누군가 보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미소를 지었다.
"책을 잃어버리게 된 후로는 이곳에 오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에요"
주전자가 탁탁 소리를 내면서 고양이처럼 조금씩 몸을 흔들고 있다.
"그런데 용건은" 너는 물었다.
내가 찾는 것은 오래된 꿈이었다.
"오래된 꿈입니다." 너는 불안한 미소를 보이며 나의 얼굴을 보았다.
물론 너는 나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와 너를 이어주고 있던 것은 그림자 나라에서 오래전에 일어났음직한 몇 개의 불확실한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요 오래된 꿈입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을 뿐이었다.
"기분이 상하시겠지만 오래된 꿈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예언자뿐입니다."
너는 미소를 띤 채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고 나는 그만 두기로 했다. "당신에게 많이 닮은 자매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너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도서관의 천정은 높았다. 그리고 심연(深淵)처럼 고요했다
5
벽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며 존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초월하며 계속 존재하리라. 처음 한주간 거리를 둘러싼 벽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그것뿐이다. 명쾌했다. 얇은 얼음 위에 떨어진 우유처럼 명쾌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벽이다." 라고 문지기는 내게 말했다
"누구라도 이 벽을 넘는 일은 할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무너뜨리는 일도 할 수 없지."
벽은 어찌 보면 그저 오랜 벽돌담처럼 보였다. 다음에 큰비가 온다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문지기는 불유쾌한 얼굴로 나를 벽으로 안내했다.
"잘 봐 벽돌과 벽돌의 사이 틈이 없어.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모양도 각각 다르지"
정말 그러했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견고히 결합되어 있어" 말 그대로였다.
"이 칼로 벽돌을 찔러 봐" 문지기는 주머니에서 큰칼을 꺼내어 내게 주었다. "흠집하나 나지 않지"
그의 말대로 칼끝은 탁탁 소리를 낼 뿐이었고 벽돌은 이상이 없었다.
내가 칼을 돌려주자 그는 칼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알겠지? 벽은 완전해 바위도 지진도 대포도 이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
그는 마치 기념사진의 포즈처럼 벽에 한쪽 팔을 기댄 채 나를 만족스럽게 보았다.
"누가 벽을 만들었지요?" 나는 끝으로 하나만 더 질문해봤다.
"누구도 만들지 않았어. 벽은 시작부터 있었으니까" 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6
문지기가 말하던 데로, 벽은 시작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비가 대지에 강물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지금에는 나도 그것을 믿을 수 있다. 가을 황혼녘 망루에 올라보면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어떤 포인트, 다시 말해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와의 사이에 인간이 받게 되는 어떤 위험한 점을 멀리 떨쳐버린 것이었다.
이처럼 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알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순간 벽의 존재를 피부로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압박감 같은 것은 아니었고 마음 좋다고 조차 말할 정도의 것이었다. 얇고 투명한 무엇인가가 부드럽게
나를 안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나를 규정하고 동시에 나를 해방시키고 있었다. 이런 식의 말이 누군가를 납득시킬 수 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외에 벽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벽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마치 축제의 대열처럼 거리를 안고 있었다.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있다면" 이라고 문지기는 말했다.
모든 것은 가정(假定)이다. 가정조차도 벽이 안은 채 응고되어 있었다.
마치 공원의 울타리를 따라서 늘어서 있는 작은 동물의 조각처럼…….
7
처음 1주간이 지나갈 때까지, 나는 네가 샘플이라고 선택해준 한 타스 정도의 오래된 꿈을 조사했다. 그러나 오래된 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도서관의 서고에는 몇 천 개의 오래된 꿈이 누구 한 사람 손대보지 않은 채 끝없는 잠을 자고 있었다. 이것의 크기는 테니스공 크기의 것부터 축구공까지 색깔도 다양했다. 형태는 계란형이고 손에 놓고 자세히 보면 아래 부분이 윗부분에 비해 부풀어있었다. 표면의 재질은 알 수 없었지만 대리석 같은 감촉 이였다.
도서관에는 한권의 책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래된 꿈뿐이었다. 그리고 너의 일은 그런 오래된 꿈을 관리하고 관람자를 위해 커피를 끓이는 일이였다. 그러나 관람자는 나 이외는 없었다........
나는 준비한 천 조각으로 오래된 꿈에 묻은 두터운 먼지를 닦고 나서 표면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5분정도 오래된 꿈이 떠올랐고 나의 손은 기분 좋은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오래된 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소리는 너무 낮고 나는 그것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명확히 말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는 듯 했다. 마치 오랜 동안 돌보지 않고 있었던 노인처럼 갑작스런 햇살에 당혹해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기억은 불확실했고 그 발산하는 빛은 약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다시 잠속으로 떨어져 가버렸다.
나는 네가 앉아있던 카운터에, 잠들어 버린 오래된 꿈을 조용히 돌려주었다. 시각은 10시 반, 그럭저럭 도서관이 마칠 시간이다.
"읽고 싶은 것을 읽으셨습니까?"
너는 미소 지으며 내게 그렇게 물었다.
"고맙습니다. 조금은요. 만약 괜찮으시다면 어디 가서 커피라도 마시지 않겠습니까?"
너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혔다.
"죄송하지만 너무 늦어서 집에서 걱정합니다."
"제가 데려다 드리지요. 견딜 수 없을 만큼 말을 하고 싶어요. 이 거리에 온 이후로 친구가 한명도 없었어요." 너는 조금 망설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래는 안 됩니다만"
우리들은 30분 후에 커피하우스에서 만났다. 커피하우스는 특징 없는 석조건물 중의 하나였다. 그곳도 도서관처럼 바깥에서 보면 절대로 커피하우스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창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긴 복도에 무거운 문이 있고 그 안에는 어두운 얼굴을 한 젊은 남자가 혼자서 커피를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 외에는 한사람의 손님도 없었다. 남자가 말없이 나의 테이블에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드세요!"
그래도 커피는 맛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너를 계속 기다렸다.
8
15분쯤 늦게, 너는 이곳을 찾아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정돈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고…….아무튼 혼자하는 일이기 때문에요."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이런 커피의 따뜻함이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라고 나는 말했다.
"왜죠?" 라고 너는 물었다.
"네가 이 거리에서 나의 최초의 친구이니까"
"친구" 너는 미소 지었다. "좋아요 그렇게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리고 너는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몰락한 공장지역의 좁은 공동주택에서 부모님과 2명의 동생과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가난했다. 부친은 직함은 직공장이였지만 직공을 갖고 있지 않는 직공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주에 이틀 밖에 가동하지 않는 공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는 학교를 나와서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몇 달 뒤에 여기저기 이력서를 낸 끝에 도서관의 일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많은 수입은 아니지만 세 자매의 가난한 식사를 보장하기엔 충분했다.
너는 군대 모포처럼 거칠거칠한 오래된 푸른 코트, 깃 없는 검은 스웨터와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전에는 너의 어머니가 입었던 것이고 결국은 동생들에게 넘겨줄 것이었다. 그래서 너는 스커트에 커피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컵을 기울였다.
"어디에서 왔어요?" 라고 너는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대답할 차례였다.
"훨씬 동쪽의 거리에서, 네가 알지 못할 만큼 먼 곳"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 거리 이외의 일은"
네 목소리는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의 말은 저 10미터의 벽에 튼튼히 지켜지고 있었다.
"왜 이 거리에 왔지요? 이 거리를 찾아온 사람을 만나건 처음이에요"
"정말?"
"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뿐이에요. 왜 왔죠?"
"왜 일까? 벽이 없는 거리에서 사는 것이 괴로웠던 것도 있고 너를 만나고 싶기도 했고"
"나를?" 너는 어깨를 움츠리고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텅 빈 커피하우스를 나와, 맑은 밤공기를 마시면서 강변을 걸어 옛 다리의 한가운데 있는 돌계단으로 내려갔다.
강 가운데 섬에 늘어선 벤치중 하나에 앉아서 수면에 떠있는 밤새의 소리에 귀를 맑게 했다. 너는 내가 살고 있었던 거리의 일을 몹시 알고 싶어 했다.
"어떤 거리였지요?"
어떤 거리였을까 내가 일 주전까지 살던 그 거리는? 나는 도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곳에는 마치 파도처럼 셀 수 없을 정도의 말들이 밀려오고 셀 수 없을 정도의 생각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파도가 쓸려간 뒤에는 여기저기 조금씩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그녀에게 무엇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잘 기억나지 않아 몇 만 년도 더 된 듯 한 기분이야. 바로 일주전일인데도" 라고 나는 말했다.
"무엇인가 하나라도 좋아요. 기억해 봐요"
"우리들은 그림자를 끌며 걷고 있었어."
9
그렇다. 우리들은 모두 그림자를 끌며 걷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는 나는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림자를 버렸을 때 우리들은 처음으로 그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중력에 대한 것처럼 그림자의 무게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어버렸음이 틀림없다.
물론 그림자를 버리는 것은 그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만약 어떤 것이든 긴 세월을 가깝게 지냈던 것과 헤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괴로운 일이다. 이 거리에 찾아왔을 때, 나는 문지기에게 그림자를 맡기지 않았다.
"그것을 가진 채 거리에 들어갈 수 없어" 문지기는 말했다.
"그림자를 버리던 가 거리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던 가 어떻게 할래."
나는 그림자를 버렸다.
문지기는 나를 햇빛을 향해 세우고 나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괜찮아, 아프지도 않고 금방 끝나" 그림자는 조금 저항했지만 힘센 문지기에게는 문제없는 일이였고 곧 그림자는 떨어져 힘을 잃고 벤치에 앉았다. 나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초라하게 보였다. 피곤한 것 같았다. 뭐랄까 떨어져 버린 낡은 구두처럼, 그것은 나와는 관계없는 존재같이 되었다. 혹은 뽑아버린 충치처럼
"어때, 때어버리니까 이상하지 그림자라는 게"
"그렇군요."
"이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저게 나쁜 건지, 이것이 좋은 것인지, 그림자가 이제까지 한번이라도 쓸모가 있었던 적 있어"
"아니요"
"그렇겠지" 라고 문지기는 말했다
"너도 반드시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요"
"자, 너의 그림자는 정확히 맡아두지 나쁜 짓을 하지 않아"
"질문하나해도 좋아요?"
"좋아"
"내가 없는 사이 그림자는 뭘 하죠"
"평소와 똑같아 걷기도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하루 한번은 운동도 시켜주지. 그래야 겨울이 되면 일도 할 수 있으니까. 도움을 받는 거야 짐승의 시작과 끝을 위해"
"짐승의 시작과 끝?"
"응, 너도 겨울이 되면 알게 돼."
"그런데 내가 돌아가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지요?"
문지기는 질문의 뜻을 잘 모르겠다는 듯 한 모습이었다.
"그림자를?"
"그래요"
문지기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림자를 돌려받고 싶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림자는 결국은 약하고 어두운 마음이야. 누가 그런 것을 바라겠어?"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여러 가지가 그 약하고 어두운 마음에 포함되있지 증오, 괴로움, 약함, 허영심, 노여움……."
"슬픔도요" 나는 덧붙였다.
"슬픔도 물론" 그도 반복했다. "누가 그런 것을 바라겠어?"
"우리들은 모두 그림자를 끌며 걷고 있어" 라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빛이 있을 때는 그림자가 우리를 둘러쌓고 암흑 속에서는 꿈이 졸음을 덮쳐온다.
"왜 모두 그림자를 버리지 않지요?"
"버리는 것을 모르니까 그러나 만약 알고 있다하여도 버릴 수는 없어"
"왜요?"
"우리들은 그 무게에 눌리고 있으니까요"
"우리들은 무엇에라도 계속 눌리고 있었어. 그런 거리였어요."
강 가운데 섬에 무성한 버드나무 중 하나에는 오래된 보트가 로프에 묶여있고 물의 흐름이 그 주위에 마치 여름의 잔재처럼 구슬픈 가락을 만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림자는 어디에 갔지?"
"잊어버렸어요. 이 거리에서는 모두 어릴 때 그림자를 때어버려요 이가 날 때쯤에요. 그리고 벽 밖으로 보내 버려요"
"그러면 그림자만이 살아가는 건가?"
"예, 그럴 거예요. 나의 그림자는 5년 전에 죽었어요. 문지기가 벽 바깥에서 죽어있는 그림자를 보고 데려왔어요. 3일 뒤에는 죽었지요. 문지기가 사과나무 숲속의 묘지에 묻어주었어요"
"너도 못 만났어?"
"나의 그림자를요?"
"그래"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해요" 라고 너는 웃었다.
밤새는 이미 돌아가고 차가운 10월의 바람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어두운 마음은 영원히 죽었군." 우리들은 일어나 돌계단을 올라가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리를 향한 언덕으로 건넜다.
"당신의 그림자도 곧 죽어요. 그림자가 죽으면 어두운 마음도 죽고 평온함이 찾아오죠."
라고 너는 말했다.
"그리고 벽이 그것을 지켜주겠지?"
"그래요, 그 때문에 당신도 이 거리에 온 것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저 파도 뒤에 남은 물의 자취처럼 갈 곳 없는 생각이 문득 나를 스쳤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다리를 건널 때까지 뿐 이였다.
10
공장지역은 옛 다리의 남쪽에 넓게 펼쳐진 장소였다. 그리고 일찍이 아름다운 물을 가득 담고 있던 운하도 지금은 수문을 닫은 채 돌처럼 굳게 말라버린 진흙이 그 바닥을 두텁게 덮고 있을 뿐 이였다. 이런 인기 없는 공장지역을 가까이 둔 곳에 직공들을 위한 5층 건물의 공동주택이 죽 늘어서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이 불가사의 할 정도의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직공(職工)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실제에 그들이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그저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공장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그 이후 직장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거리에서 지급되는 약간의 식량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지역도 영광의 날들의 기억을 갖고 있다. 계속되는 전쟁 시기에는 주물공장이 불야성을 이뤘고 사람들을 재촉하고 거리는 그 불빛의 물거품에 들끓고 있었다. 30개의 굴뚝이 하늘을 향해 서있고 밤낮 구별 없이 머리 위는 검은 연기가 계속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을음은 공동주택의 빨래터에 서리처럼 내리고 그곳에 있는 것 모든 것을 회색으로 바꿨다. 회색바지, 회색타올, 회색속옷…….
거리는 이처럼 망치소리로 가득했고 화로(火爐) 열기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어찌되었건 오래전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그림자를 잃어버렸을 때, 공장도 버려졌다. 전쟁도 사라지고 회색바지도 사라졌다. 지금에는 공장은 거의 한구석에서 조잡한 괭이나 솥을 만들 뿐 이였다.
공장가를 지나는 길의 양옆은 붕괴된 석벽이나 오래된 목재가 어느 곳인가로 이어져있고 굴뚝은 풍화된 봉우리처럼 어둠속에 검게 높이 솟아있었다. 나와 너는 머리를 돌려 그런 침묵의 계곡을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 운하에 이르러 난간도 없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자 그곳에는 공동주택이 늘어서 있었다. 슬픈 풍경이었다. 평평한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몸을 맞대고 한없이 이어져있었다. 건물의 사이를 둘러싼 오래된 보도블록에는, 몇 세대에 걸쳐서 사람들의 생활의 색깔이 배어있었다. 그것은 아마 보도블록의 중심에까지 배어있겠지…….
돌의 위를 걸으면서 나의 구두밑창은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오래된 우물의 바닥을 걷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시간은 한밤으로, 모든 집은 잠들고 몇 개의 불빛이 여기저기의 창을 노란 색으로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 너는 공동주택의 사이의 미로 같은 보도(步道)를, 나의 손을 이끌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마치 하늘의 암흑에 뒤섞여서 사람들을 노리는 거대한 새의 눈을 피하려는 것처럼…….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너는 미로의 한 가운데서 갑자기 멈춰서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와 말해보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다음에도 대화상대가 되어주지 않을래?"라고 나는 말했다.
"예, 좋아요."
"내일도 도서관에 갈께"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오래된 꿈과 말할 수 있어요?"
"아니 아직은 잘 안 돼, 알아듣기가 어렵거든"
"괜찮아요.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잘 될 거예요"
낡은 보도위로, 우리들의 소리는 각자에게 다른 사람의 소리처럼 울려왔다. 마치 주위에 어둠이 우리들의 소리를 불균일하게 빨아 들이기도하고 내뱉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만 오래된 꿈과 말할 수 있지?" 나는 결심하고 그렇게 물어봤다.
"나도 잘 몰라요"
"누구에게 물어보면 좋을까?"
"오래된 꿈에게" 라고 너는 말했다.
"잘 자"
"잘 자요" 그리고 너는 내가 구별할 수도 없는, 늘어선 건물의 하나에 빨려 들어갔고 나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이 거리 속에…….
11
네가 사는 직공지역이 과거에 이미 빛을 어둠속으로 잃어버린 곳이라고 한다면 거리의 남서부에 펼쳐진 관사 지역은 건조한 빛 속으로 끊임없이 그 빛을 잃어가는 곳 이였다.
봄이 가져온 윤기를 여름의 태양이 치장시키고 겨울의 계절풍이 풍화시켜버렸던 그런 상태였다. "서편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평온한 넓은 여백을 따라서 2층 건물의 하얀 관사가 쭉 늘어서 있었다. 원래 하나의 건물에는 세가구가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한가운데의 튀어나온 현관만이 공유부분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안은 온통 하얀색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하얀 색이였다. 서편언덕의 여백에는 여러 종류의 흰색이 있었다. 덧칠해야 할 만큼 부자연한 백색, 태양의 빛을 받아와서 누렇게 된 백색, 비바람에 모든 것을 빼앗긴 듯 한 허무의 백색, 그런 여러 가지 백색이 언덕을 둘러싼 자갈길 어딘가까지 이어져있었다. 관사에는 담장은 없고 벽돌로 만든 좁고 긴 화단이 있을 뿐 이였다. 봄이 오면 그곳에도 하얀 꽃이 필지 모른다. 과거 한때는 무척 맑고 산뜻하였다라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리였으리라.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피아노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저녁식사의 향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관사는 이름에 맞게 옛날에는 공무원들이 그 곳에 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림자를 잃어버렸을 때 살던 공무원도 그 직장을 잃었다. 서기, 세무사, 경찰관, 우편배달부…….
그들은 이 거리를 떠나 남쪽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관사의 새로운 주인은 퇴역군인들이였다. 그들의 인생은 대부분을 이미 써버렸기 때문에 그 이상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었겠지? 그래서 그들은 후회 없이 자신들의 그림자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햇볕 좋은 벽에 붙은 벌레의 빈껍데기처럼 강한 계절풍이 부는 언덕의 여백에서 그 영원한 생을 보내고 있었다. 한 집에는 6인부터 9인의 노 군인들이 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눈 것도 아니다.
그들은 생활용품을 큰 주머니에 담아가지고 언덕의 여백을 찾아 와서는 아무 방으로나 들어갔다. 처음 두 사람이 2층에 있는 침실을 가지고 뒤이어 온 한사람이 1층의 거실을 가지고…….
내가 문지기에게 지시받은 집도 그런 관사의 하나였다. "1145"라는 것이 내 집에 지정된 번호였다. 내 집에는 대위와 소위가 한명씩 중사와 군소(일본군대의 계급)가 둘씩 살고 있었다. 전쟁의 준비나 전쟁의 수행이나 전쟁의 뒤처리나 혁명, 반혁명에 끌려 다니는 사이에 가정을 가질 기회를 잃어버린 고독한 노인들이였다.
그런 노인들의 마음을 묶어주고 그 단조로운 생활을 규정하고 있던 것은 지금까지도 군대였다. 그림자를 갖지 않은 여원의 군대. 어쩌면 그들 노인들이 그림자를 잃어버린 생활에 가장 적격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아침 일찍 눈을 뜨면 급히 아침식사를 먹고 누구에게 명령받은 적도 없는 각자의 일에 매달려 있었다. 어떤 이는 오래된 관사의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어떤 이는 화단의 잡초를 뽑고 어떤 이는 식량배급을 얻으러 관청(그곳도 반드시 강변에 늘어서 있는 정체불명의 건물 어딘가에 있겠지)에 갔다. 노인들은 아침의 노동을 마치면 다음은 관사의 정면의 양지에 앉아 연금을 계산하거나 옛 전우를 회상했다.
내가 있게 된 곳은 서쪽을 향한 2층의 방 이였다. 종횡이 6보정도, 그러나 가구가 없는 생활이라서 텅 빈 인상이었다. 천정이 높은 탓일지도 모른다. 벽의 여기저기는 얼룩이 져 있었다. 오래된 철제침대와 조그만 책상과 의자만이 내 방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내 이웃에는 나이 많은 대위가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곧 친해져 하루에 몇 번이나 둘이서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너 같은 젊은이가 왜 이런 어둔 방에 살고 있지" 라고 그는 말했다. "밖은 화창하게 맑은 날씨야"
"눈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대위님"
이라고 나는 수백 번이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밝은 빛에 약해요. 저녁 무렵이나 흐린 날 외에는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예언자의 눈인가?"
"그렇습니다." 노인은 커피 잔을 손에 든 채 방을 왔다 갔다 했다. 닫혀있던 블라인드를 손가락으로 열어 그사이로 밖의 밝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햇살만큼 멋진 것은 세상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왜 예언자가 되었지? 선택한 것인가?"
"그것밖에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대위님, 그 자리 밖에요. 이 거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 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빛을 읽어 버린 다해도?" 나는 긍정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거리에 들어오고 싶었습니다. 그것뿐이에요." 노인은 창가의 낡은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난 잘 모르겠어. 이 거리가 너에게 있어서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러나 결국은 네가 결정할 것이지만……."
"예, 알고 있습니다."
"커피 한잔 더 마실래?"
"감사합니다."
노인은 포트를 손에 잡고 두개의 컵에 커피를 충분히 따랐다.
"그래도 옛날엔 좋은 거리였어. 좁은 거리였지만 구석구석까지 활기가 가득했지……. 그러나 거리가 그림자를 잃어버린 날부터 반수이상의 사람들이 거리를 나갔어. 거리에 남은 것은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이나, 늘 잃어버려온 인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뿐이었어"
"당신은 후회한 적 없습니까"
"이 거리에 남은 일 말인가?"
"예"
"설마" 라고 노인은 웃었다.
"이 거리에서는 누구도 후회 따위 하지 않아, 그 때문에 이 거리에 있는 것이지"
우리는 어둠속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내가 너의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라고 노인은 계속 말했다.
"우리 노인은 많건 적건 예언자이니까"
"예"
"너희들과는 방법이 다를 뿐이야"
"그렇군요."
"우린 시간을 잃었고 너희들은 빛을 잃었지 뒤에 생각하나 먼저 생각하나 다를 바 없지"
"아무차이 없지요."
"좋아, 태양빛 없이 사물을 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 전쟁과 같아,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거야 "
"예"
"과거와 미래의 구별조차도……. 시간을 주의해, 이 거리에서는 시간이란 것이 무게를 갖고 있지 않아. 시간을 믿지 말아. 미로의 속에서 헤매게 될 뿐이야. 특히 너처럼 완전히 그림자를 버리고 온 것이 아닌 인간은"
"모르겠군요."
"곧 알거야" 노인은 말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12
시간이 무게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실로 이상한 느낌이었다.
물론 하루하루 지나고 계절은 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마음속에 투영된 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조각들로 교묘하게 조합된 조립완구처럼 시간은 흐르고 머물고 혹은 역행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노인이 말했듯이 확실히 미로(迷路)였다.
우선 시간이라는 개념을 떠나서 말이 존재할 수 없었다.
계속 말을 하기위해서는 나에게 시간이란 것이 어쨌든 필요했다.
이처럼 세월이 흘렀다.
나는 낮 동안에 눈을 뜨고 오후를 노인과 보냈고 저녁이 되면 도서관에 가서 오래된 꿈에 귀를 기울였다. 도서관이 닫으면 너를 "직공"지역의 공동주택까지 바래다주었다. 3일에 1번은 도서관에 가기 전에 서쪽 벽의 망루에 올라 짐승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흐린 오후에는 바깥에 나가서 짐승들에게 빵을 줄 수도 있었다.
짐승들은 언제나 배가 굶주려 있었지만 그들의 프라이드는 그래도 강했다. 공원의 벤치에서 내가 던진 빵을 그들은 몇 번이나 망설이고 나서 멀리 가져가 먹었다. 나는 그들이 음식을 서로 빼앗는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힘이 센 놈들은 늙은 짐승과 어린 짐승들을 위해 빵의 반 정도를 남겨두는 것이 보통이였다.
겨울이 오면, 그들의 깊은 호수 같은 푸른 눈은 그 슬픔의 색을 조금씩 더해갔다.
나무들은 그 잎을 지면에 떨어뜨리고 풀은 말라버리고 굶주림의 계절이 가까이 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하얀 죽음의 계절을…….
그러던 어느 날 안개처럼 가늘고, 얼음처럼 차가운 가을비 아래에서 나는 너를 안았다. 눈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물방울이, 너의 앞 머리카락을 그 넓은 이마에 부드럽게 달라붙게 하고 있었다.
너는 눈을 감았다. 너의 부드러운 입술은 나의 입술아래에서 가늘게 떨고 있었다.
비雨.
가을의 비는 우리의 주위를 언제까지라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작이 없었다면 끝도 없었다. 달도 없고 별도 없고 밤새소리도 없었다. 강변에 늘어서있던 수양버들이 그 가는 나뭇가지의 끝에서부터 천천히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 이였다.
네가 입었던 레인코트는 두텁고, 사이즈는 네 몸에 두 배는 됨직했다.
나는 그 위에서 너의 어깨를 안고 너의 등을 안았다. 너의 몸에서는 비의 냄새가 났다.
너의 머리카락에도 눈꺼풀에도 귀 뒤에서도 비의 냄새가 났다.
"지금까지 몇 천 번이나 이 다리를 건넜어요." 라고 너는 말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언제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라는 인간이 새로운 나로 바뀌어 가지 않을까 마치 칠판에 썼던 글자가 칠판지우개로 지워져가는 것처럼요."
"착각이야……."
"예……. 그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저 이런 느낌이 들어요. 이유 따위는 몰라요"
"시험해봐"
우리들은 말없이 다리의 나머지를 걷고 반대편 보도위에 섰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너를 안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어떻지?"
"모르겠어요." 너는 불안한 듯 한 미소를 짓고 한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만졌다.
"몰라요"
낡은 다리는 마치 긴 복도처럼 반대편의 어둠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을비가 그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13
오랜 꿈을 정리하는 이외의 시간을 나는 거리의 지도를 만드는 데 소비했다.
처음은 어둠속에서 무료한 시간을 이겨내려고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곧 나는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다. 최초의 작업은 거리의 윤곽을 그리는 일이였다. 우선 벽의 형태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곤란한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누구하나 그 정확한 형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옆방의 노인도, 너도, 그리고 문지기도…….
어쨌든 나는 자신의 다리로 그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약시라는 나의 배경에 있는 핸디캡 때문에 그 작업은 가을이 끝날 때까지 걸렸다. 흐린 날과 저녁밖에 내가 나가서 걷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케치북을 한손에 들고 벽을 따라 걷는 사이에 나는 벽이 가진 힘에 점점 끌려가는 것 같았다.
"이 벽은 살아있다." 라고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벽은 마치 탄력 있는 생물처럼 어느 때는 구불구불하고, 어느 때는 높이 솟고, 어느 때는 휴식하고 그리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바퀴 속에서 거리를 삼키고 있었다.
벽의 표면은 미끈미끈했다. 건조하기 쉬운 곳에는 아랫부분에 물이 둘러싸여 있었고 반대로 습기 많은 곳에서는 유채기름을 가득채운 도랑이 패여 있어 그 벽이 언제까지라도 보존되도록 만들어져있었다. 꾸미려는 장식은 어느 한군데 없었지만 지형을 이용하면서, 한없이 이어진 그 곡선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거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벽을 받들고 있었다. 석양이나, 달, 별, 비, 나무들 그리고 꽃, 그것들 모두가 벽을 위해 만들어진 장신구인 것처럼 벽을 채색하고 있었다. 이 벽을 앞에 하면 아마 어떤 화가라도 미칠 듯이 기뻐하고 다음 순간 절망해 버리겠지…….
이 거리에서는 벽을 포함한다면 어떤 공간도 예술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 그곳에 더하여 주는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벽 앞의 사람, 벽 위의 구름, 벽 아래의 풀, 풀을 먹는 짐승의 무리, 벽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고 있었다.
벽 앞의 나.
나는 걷다 지쳐 벽의 아래 풀 위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구름사이로 햇빛이 거리의 지붕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등으로 싸늘한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훨씬 옛날에 어딘가에서 경험했던 무엇인가의 감각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무엇인가가 나에게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벽돌의 이상할 정도의 미끈함은 다른 어떤 소재와도 감촉이 달랐다. 마치 유리처럼 단단하고 암반처럼 두터웠다. 그리고 물고기의 배처럼 차가웠다. 나는 내 자신의 등을 지구중심에까지 직접 연결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벽 아래의 오래된 풀을 몇 묶음 잡아 입에 물었다.
벽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길게 늘어지고, 들판을 넘어서 숲을 덮고 공동주택의 담을 넘어서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한 밤의 어둠과 일체화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누가 이 벽을 이해할 수 있을까? 벽은 어떤 때는 무자비하게 그리고 어떤 때는 자비롭게 우리 앞에 서있다.
그러나 누가 무자비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자비를?
형태가 있는 것에는 영원이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벽은 사람들에게 묻는다.
만약 형태가 없는 것에 영원히 있다고 하여 도대체 누가 그것을 확인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원래 그것이 너희들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얇은 어둠이 벽을 덮었다. 뿔피리가 울었다. 짐승들의 발굽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그리고 정적(靜寂). 이미 도서관에 가 있어야 할 시각이다. 그러나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벽이 나를 붙잡고 그 태고의 생각은 계속 이야기했다.
이 거리에는 네가 구하는 것은 뭐라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도 없다. 네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구하는 것은 뭔가? 너의 입술, 평온한 마음, 오래된 빛........
잊어버리는 쪽이 좋아. 네가 이곳으로 부터 얻는 것은 절망뿐이야. 당신은 이 거리에 올 것이 아니었어. 바깥 세계에 살 인간이야.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나지. 꿈도 고통도 무엇이라도…….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라고 나는 말했다. 無로 돌아가는 것도 잊혀져가는 것도 내가 두려운 것은 모두가 시간이라는 위선의 옷에 분주해져가는 것이다.
말 이구만……. 이라고 벽은 웃었다.
네가 말하고 있는 것도 단지 말뿐이야
별이 하늘에 아로새겨졌다.
두터운 구름은 이미 어딘가로 지워져가고 차가운 바람이 별을 깜박이게 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어. 모든 것이…….
14
그날 밤 고열이 나를 덮쳤다. 그것은 일주일도 더 계속되었다. 열은 나의 피부를 수포로 가득하게 했고 나의 잠을 어두운 꿈으로 채웠다. 꿈의 태반이 성교의 꿈이었다.
여러 여자와 나는 성교했다. 얼굴을 아는 여자가 있었다면 전혀 본적 없는 여자도 있었다.
벽 속의 거리에서는 다양한 여자와 성교가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이라도 구토를 했다. 부드러운 유방, 뜨거운 입김, 미끈미끈한 협복(脇腹), 젖은 성기, 정액의 냄새……. 그리고 성교에 연이어 덮쳐 오는 열과 오한.
그 사이 나를 간호해 준 것은 옆방의 노인이었다. 그는 차가운 타월을 적셔주고 죽같은 따뜻한 식사를 아침과 저녁에 가져다주었다. 비가 내리는 금요일, 내가 조금 의식을 차리기 시작하던 그 오후, 노인은 창가의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옛 추억을 말했다.
"훨씬 옛날, 아직 사람들이 그림자를 가지고 전쟁을 반복하고 있었던 때 내가 젊은 중사였을 때 이야기야. 나는 그 당시 한 여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일이 잘되지 않았어. 나는 젊었지만 가난했었고, 유행에 빠져있었지. 결국 절망과 슬픔 이외 나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았어. 여자를 죽이고 내 자신도 죽는 일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봤어. 그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랐지. 그러나 전쟁이 시작됐어. 정말 잘된 일이였지. 전쟁은 조금씩 나의 마음의 상처를 지워가게 해 주었어.
그리고 석 달 뒤 다리에 유탄을 맞고 후방으로 이송될 때에는 나도 다시 안정감을 얻어가고 있었지. 이송 첫날 밤, 나는 어떤 마을의 점령된 호텔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됐어.
훌륭한 방이었어. 넓고 기분 좋은 방으로 유리벽으로 된 베란다까지 갖춰져 있었어. 내가 젊은 여자의 유령을 본 것은 그 베란다에 있던 등나무의자 위에서야?"
"유령이요?"
"아…….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지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어. 완벽한 미, 완벽한 젊음, 완벽한 품위. 너는 그런 것을 본적이 있니?"
"아니요."
"나는 베란다의 등나무의자 위에서 그것을 봤어" 노인은 잠시 침묵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정말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지."
"유령이라고 믿지 않았군요."
"아니 그건 첫눈에 보아도 유령 이였어." 그리고 노인은 웃었다. "그 정도로 완벽한 것을 만들어 낼 만큼 나의 상상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풍부하지 않아"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아무것도 못한 채, 꼼짝할 수 없었어. 마치 무언가에 맞은 듯 나는 멍하니 그곳에 선 채,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한 번도 눈을 땔 수 없었어. 날이 샐 때까지…….닭이 한번 울고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쯤 그녀는 휙 사라졌지 촛불을 불어 끄듯이……."
노인은 다시 한 번 침묵하고 잠시 창밖의 비를 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어.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열정이란 것을 갖지 못하게 됐지. 어떤 매력적인 여자와 잘 때도 언제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어. 한 달 뒤에 귀환했던 전쟁터도 나의 광적인 기분을 맑게 해주진 못 했지."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알았어. 내 자신이 그녀의 얼굴의 옆얼굴의 한쪽밖에 보지 못한 것을……. 왼편 얼굴이 였어 여자는 밤새 그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쪽 뺨을 만져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떻게도 그녀의 오른 쪽 옆얼굴을 보고 싶었어. 나는 무리하게 휴가를 얻었고 같은 마을로 돌아가 같은 방을 얻었지. 그녀는 정확히 전과 같은 시각에 나타났어. 같은 등나무의자, 같은 자세, 같은 옆얼굴"
오랜 동안 맑은 빗소리만이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요?" 나는 물어보았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자의 반대편 얼굴을 봤어요?"
"봤지"라고 대령은 말했다. "보지 않는 편이 좋았었어."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 무야 완벽한 무" 노인은 일어서서 커피 잔을 탁자위의 접시에 두었다.
"넌 이해할 수 없겠지. 완벽한 무라는 것을……."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조만간 알게 될 거야. 결국은 그것이 시작이고 그것이 끝이니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언젠가 우리들이 그림자를 버리고 걷기를 멈출 때에 무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우리를 맞이하러 올 테니까. 그리고 암흑 속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지. 그녀의 망령처럼……."
비雨,
두터운 모포도, 따뜻한 스프도 나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조용하고 편안한 잠도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지 못했다. 얼마만큼의 여자와 성교를 한 뒤에야 저 어두운 꿈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줄 것인가?
오후5시의 뿔피리가 새로운 어둠이 올 것을 알렸다. 그리고 하얀 죽음의 계절이 강철로 만든 바퀴처럼 짐승들의 머리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15
비는 그쳤지만 그 후 며칠 동안 태양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처럼 흐린 날씨는 나의 약한 눈에 있어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나는 집밖의 공기를 마시고 가벼운 산책을 하고는 스케치북의 지도에 세세하게 그려 넣기를 계속했다.
1주일 만에 도서관 입구 문을 열었을 때 건물속의 공기는 이전과 달랐다. 긴 복도도 보통 때보다 어둡고 마치 긴 세월 버려져 있던 길처럼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도서대출 실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카운터는 잘 정리되어 있고 스토브의 불도 꺼지고 방은 구석구석까지 깊은 밤의 암흑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누구 없습니까?" 라고 나는 소리쳐 봤다. 반응이 없다. 스토브 위의 쇠주전자도 차가워져 있고 먼지까지 내려 있었다. 그 안에 커피는 변색되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15분이 지나고 30분이, 1시간이 지나고, 어둠만이 한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물건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밖의 소리도 석벽에 막혀 방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어떤 상자에 들어간 채 땅속깊이 묻혀버린 듯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를 그곳에 남겨둔 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그림자조차도 없다.
지금까지 맛봤던 적이 없을 만큼 황량한 생각이 나를 덮쳤다. 그 정도까지의 고독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마치 상반되는 두개의 흐름이 나의 몸을 한가운데서부터 나눠버리는 듯 했다.
이렇게 말하면 훨씬 옛날, 이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아직 작은 꼬마였고 그 때도 열이 나서 학교를 쉬고 집에서 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어머니의 모습은 없고 나는 혼자서 집안에 남겨져 있었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정원나무의 그림자를 나의 베갯머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천정의 구석은 이미 어둠에 덮여있었다. 전등이 꺼진 집안에서 기묘한 그림자와 기묘한 침묵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네가 살아가는 진실의 세계야." 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누구하나 나를 구해주지 않았고 누구하나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이것이 네가 살고 있는 진실의 세계야"
나는 머리를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견딜 수 없이 너를 만나고 싶었다. 너를 안고 그리고 너와 잠들고 싶었다.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네가 있었다. 너는 처음으로 만났을 때와 같은 스웨터를 입고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이 세밀한 입자처럼 너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없구나라고 생각했어." 나는 말했다.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귀가 아플 만큼의 침묵이었다.
"계속 열이 심했어. 일어날 수가 없었지."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만졌다.
열이 있는 뺨의 감촉은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듯 했다.
"이곳에 앉아있으면서 이제 다시 영원히 너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너는 머리를 몇 번인가 흔들었다.
"당신이 무엇인가 진심으로 찾고 있는 한, 누구라도 그것을 빼앗는 일은 할 수 없어요." 라고 너는 말했다.
"누구라도 말이죠."
"너는 무엇을 구하고 있지?"
"모르겠어요." 너의 몸은 그곳에 선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의 말과 함께 너의 아름다운 입술이 떨릴 뿐이었다.
"이제까지 무엇인가를 찾은 적이 없었어?" 너는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무엇인가를 찾으러 문을 열어보기도 하죠. 그러면 그 쪽에도 지금과 같은 방이 있어요. 그 방을 지나 또 문을 열면 그곳에도 또 같은 방이 있고……. 그 반복 이예요. 언제까지라도……. 이러는 사이에 내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가.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 하게 돼 버리죠. 방에는 창도 없고 가구도 없고 그림도 실내장식도 없어요. 그저 문뿐 이예요. 이렇게 방이 무한이 이어져 있어요."
"그러나 네가 이 거리를 원했잖아. 그리고 나 역시도"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둠이 가늘게 흔들렸다.
"후회는 하지 않아요. 어디까지 가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것을 알고 있어요. 이제 확실해 보여요. 소설의 마지막페이지를 도중에 열어보는 것처럼요." 너는 얼굴을 들고 웃었다.
"밖으로 나가죠. 걷고 싶어요."
우리들은 강을 따라 걸었다. 긴 비 때문에 강은 이제까지 본적이 없을 만큼 그 수량이 늘어나 있었다. 많은 중주(中洲)는 강의 흐름에 덮여 버리고 강가의 버드나무의 가는 잎사귀만이 여자의 젖은 머리카락처럼 수면에 흔들리고 있다. 마치 누군가 죽은 여자가 강의 수면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젖은 보도(步道)는 우리들의 발아래에서 조용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신이 만났다는 나의 그림자의 이야기를 해줘요." 라고 너는 말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산과 어떤 것에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우리는 낡은 다리를 건너고 서편 다리의 외등이 밝아올 때까지 말없이 강변의 보도를 계속 걸었다. 강의 물결에 밤새의 소리가 어우러졌다.
"말하기가 왠지 두려워" 라고 나는 말했다.
"말을 해버리면 왠지 평범하게 들려 버리는 것 같아."
너는 나의 손을 잡고 그리고 그 손으로 자신의 뺨에 눌렀다.
"무엇이든 평범해요." 라고 너는 말했다.
"당신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죠. 무엇이든 슬프리 만큼 평범하죠. 그것을 바꿀 수는 없어요."
서쪽다리에 왔을 쯤에 달빛아래에 검은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다리의 난간에 앉아 긴 시간 가만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의 그림자를 사랑하고 있었어."
"알고 있어요." 라고 너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죠."
그렇다 그녀는 죽었다.
"당신은 자신의 방,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지나가는 군대의 행진을 보고 있었지요. 선두에 부대가 우측창가에서 나타나 최후의 한사람이 좌측의 창가로 사라져갈 뿐이었어요. 사라져버린 뒤 실체 따위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부대가 정말로 지나갔는가. 조차도 당신으로써는 알 수 없었어요."
"만약 그것이 환각이였다하여도?" 라고 나는 말했다.
"그 환각을 선택하고 있는 내 자신의 의식은 실체라고"
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그래도 무엇 하나 남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라고 나는 계속했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 왔으니……."
"왔다는 것이 아니죠."
"그래 네가 불러드렸지."
너는 가만히 보도블록을 바라보았다. 다리의 외등이 우리들의 머리위에서 노란색 빛을 주위에 내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발아래 우리의 그림자는 없었다.
"당신이 나를 찾고 있는 한 나는 당신의 것이에요. 그러나 나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알아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일도?"
너는 침묵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나에게는 당신에게 줄 것이 무엇 하나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 어깨를 안았다. 너는 울었지만 너의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너는 눈물조차 줄 수 없었다. 북녘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우리들의 주위에 불어왔다. 그리고 어두운 벽만이 우리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16
셔터를 내린 내 방의 어둠 속에서조차 우리들은 벽의 시선을 계속 느꼈다. 모포 속의 너의 몸은 아름답고 따뜻했다. 나는 너의 부드러운 목을 사랑했고 미끈한 등을 사랑했고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했다. 나는 마치 무너져가는 옅은 꿈을 안듯이 너를 품었다.
그리고 그런 꿈의 향기가 우리들을 감싸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벽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원했고 그리고 네가 나의 꿈과 일체가 되어 주기를 원했다.
그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들은 긴 시간을 걸쳐서 도서관의 서고에서 산처럼 쌓인 오래된 꿈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통을 극복하는 작업이었다. 어느 정도를 선별하고 제대로 다시 늘어세우고 거기에 계통의 흐름을 만드는 일 등 나에게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오랜 꿈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난과 자기모순 속에 잠들어 있다. 500의 오랜 꿈이 있으면 그곳에는 500의 계통이 있고 1000의 오랜 꿈이 있으면 거기에는 1000의 계통이 있었다. 1주간 정도의 작업을 계속한 뒤 나는 무엇인가를 방출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반드시" 라고 너는 말했다.
"아마 그렇겠지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이렇게 꿈을 하나하나 맞춰 가면 10년은 걸리겠어."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어요." 확실하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나를 재촉하고 있는 듯 했다. 예감 같은 것이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 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들은 스토브 앞으로 돌아가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오랜 꿈은 자연에서 태어나온 것이에요. 너는 말했다.
"누구도 그것을 구분할 수는 없죠."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없어.
그러나 그들은 이해하기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원칙이 필요해"
"무슨 원칙이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까하는?"
"그것은 무리예요 작은 것이라도 당신에 겐요. 만약 당신이 최초의 하나를 얻으면 결국 전부를 얻는 것이고 만약 최초의 하나를 잃으면 결국은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죠."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나는 오랜 꿈의 하나하나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랜 꿈의 하나를 테이블에 가지고 와서 천으로 표면을 깨끗이 닦고 양손바닥으로 표면을 덮어서 데웠다. 5분정도에 오랜 꿈은 나의 체온에 반응하듯이 희미한 열을 내며 작은 진동을 시작했다.
불투명한 구형(球形)의 중심부터 마치 먼별의 빛처럼 희미한 빛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듣지 못할 정도의 낮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말은 듣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그것의 따뜻함이 나에게 전해주는 꿈의 세계를 보았다. 그 꿈은 슬픈 꿈이었다. 그것은 모든 싹이 죽고, 뿌리는 단단한 암반에 가로막힌 어둠속의 나무들이였다. 너의 말이 맞다. 나에게 있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는 일을 할 수 있을까?
10분정도 지난 쯤 오랜 꿈의 빛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사그라지고 오랜 꿈은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잠들었다. 나는 그것을 원래의 장소에 돌려주고 다른 오랜 꿈을 가져왔다.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오랜 꿈의 수는 전부 다섯 개이다. 그것으로도 방의 시계가 11시를 알릴 때에는 나는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지쳐있기가 보통이다.
11시15분에 너는 방의 전등을 끄고 우리들은 도서관을 나온다. 북녘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은 매일 그 강도와 차가움을 더해갔다. 우리들은 손을 잡고 껴안듯이 하고 밤의 거리를 걸었다.
"왜, 오랜 꿈이 말하는 세계는 모두 어둡지?" 라고 나는 너에게 물었다. 그러나 너는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서로의 소리조차도 잘 들이지 않을 만큼 강한 바람이 우리들의 주위에 불어왔다. 바람은 공장가를 지나 잘려진 낡은 전선을 스쳐 검은 어둠에 우뚝 솟은 높은 굴뚝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가 사는 공동주택 앞에서 우리들은 꼭 껴안은 뒤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 나는 그녀를 생각했고 도서관의 어두운 서고에 잠든 오랜 꿈을 생각했다.
17
짐승들은 이미 몇 마리가 사라져 있었다. 처음 눈이 내렸던 아침,
나이든 몇 마리가 5cm정도 눈 속에 겨울의 흰 빛이 더해진 그 금색의 몸을 가로누워 있었다. 나는 벽의 망루에 서서 짐승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의 태양이 그 한 편에서 냉정한 광경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수천마리의 숨 쉬는 하얀 입김이 주위에 넘치고 있었다.
7시의 뿔피리와 함께 문지기가 문을 열자 짐승들은 거리에 들어왔다. 짐승들이 지나간 뒤에는 마치 대지에 만들어진 가시 같은 모양의 뼈가 얼마인가 남겨져 있었다. 나는 아침 햇살이 나의 눈을 아프게 할 때까지 가만히 그 가시를 바라보았다.
벽을 내려와, 방으로 돌아가 보면 아침의 빛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나의 눈을 아프게 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르고 나의 뺨과 셔츠를 적셨다. 몇 시간이나 나는 눈을 감은 채 거리감 없는 어둠 속에 떠서는 사라져 갈 여러 색의 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차가운 타월을 나의 눈에 대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게 해 주었다.
"아침의 빛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해. 특히 눈 내린 아침은……. 도대체 무엇을 하러 밖에 나갔지?"
"짐승들을 보러 갔었어요. 죽지나 않았을까 생각했죠."
"어째 서지?"
"몇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더 많이 죽어"
"왜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버립니까"
나는 타월로 얼굴 위를 덮은 채 노인에게 물어봤다.
"약한 탓이지, 추위와 굶주림으로……. 옛날부터 계속 그랬지"
"죽음은 그치지 않습니까?" 노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놈들은 몇 만 년이나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네. 봄이 오면 놈들은 자식을 낳고 새로운 생명으로 바꿔가며 사는 거야. 그것뿐이지……."
"사체(死體)는 어떻게 됩니까?"
"태우지, 문지기가" 노인은 차가워진 손을 커피 잔으로 데우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모아서 유채기름을 뿌려 태우지. 해질 녘에는 그 연기가 이곳까지도 보이네. 겨울동안은
그것이 매일 계속되지, 눈과 연기……."
눈과 연기
어느 정도 높은 벽도, 그 연기를 나로 부터 감추는 일은 할 수 없다.
18
연기는 노인의 말대로 매일 한결같이 솟아올랐다. 오후 3시 반 언제나 같은 시각이었다. 겨울은 나날이 깊어갔고 강한 바람과 눈이 짐승들을 감싸고 있었다. 눈이 내려와 옅게 흐린 오후, 나는 오랜만에 문지기의 집을 방문해 봤다. 문지기는 큰 철제스토브의 앞에 앉아 구두를 벋고 발을 데우고 있었다. 스토브 위에 놓인 주전자의 수증기와 값싼 파이프담배의 향기가 방안의 공기를 뿌옇게 만들고 있다. 큰 나무탁자위에는 숫돌과 함께 몇 개 인가의 손도끼가 늘어서 있었다.
"야아" 라고 문지기는 말했다. 문지기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의 그림자는 건강하게 있어 매일 1시간은 산책도 하고 있고 식욕에 있어서도 좋은 편이야 한번 만나보겠어?"
"만나고 싶어요."
그림자가 살고 있는 곳은 거리와 밖의 세계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나는 밖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고 그림자는 거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림자의 광장"은 그림자를 잃었던 사람과 사람을 잃었던 그림자가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다. 문지기의 집의 뒷문으로 빠져나오면 그림자의 광장이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모양은 정확히 정방형이고 뒷면은 벽을 이용했고 양측에는 높은 판자를 세웠다.
한 쪽에는 오래된 느릅나무가 있고 나의 그림자는 그 옆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에는 지하실에 내려가서 잔다." 라고 문지기는 나에게 말했다.
"지하실에는 제대로 된 침대도 있고 변소도 있지 보여줄까?"
"아니요 나중에 보죠." 라고 나는 말했다.
"우선 그림자와 말해보고 싶어요."
"좋을 대로, 좋을 대로, 그러나 달라붙는 것은 안 돼 달라붙으면 또 떼야 되니까."
나는 긍정하고 포켓에 손을 넣은 채, 혼자서 그림자가 앉은 벤치에 가까이 갔다.
"이봐" 라고 나는 말했다.
"응" 이라고 그림자는 힘없이 대답했다.
"건강은?"
"덕분에 괜찮아" 라고 그림자는 말했지만 그 소리에 살결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의 자세로 멍하니 그림자의 앞에 서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와 말한다. 라는 것은 뭔가 기묘한 일이다.
"하루를 이곳에서 보내니?"
"보통 밖에 나와 있어"
"무슨 운동이라도 하나?"
"운동? 설마, 문지기가 짐승을 태우는 것을 도와주지" 그림자는 뒷문에 앉아 파이프를 닦고 있는 문지기의 쪽을 가리켰다.
"짐승도 가엾지 점점 죽어가니"
"몇 마리 태웠지"
"이제까지 전부? 셀 수 없을 정도야"
"오늘은?"
"세 마리" 그림자는 벽을 향해서 아직 연기가 나고 있는 검은 재를 바라보고 나서 손가락을 3개 들어보였다.
"나이든 것이 2마리, 젊은 것이 1마리"
"괴로운 일이군"
"그렇지" 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야" 나는 긍정했다.
"다른 그림자도 살고 있니?"
"이곳에?"
"응" 그림자는 아무도 없는 공터를 가리키며
"나 혼자뿐이야"
"모두 어떻게 됐지?"
"모두 죽어버렸어. 내가 남아 있을 뿐이야." 그림자는 무릎위에 손을 모으면서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도 곧 죽어"
"죽어? 왜?"
"이유쯤이야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고 그림자는 목소리를 낮췄다.
"너와 내가 다시 하나가 되어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야,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래?"
차가운 계절풍이 느릅나무 위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몸의 골수까지 들어와 버리는 듯 할 정도의 습기를 가득 담은 바람이었다. 몇 달인가 뒤의 완연한 겨울에 어느 정도의 추위가 찾아올까 나는 예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 마지막 찬스야, 나에게 있어 너와 떨어진 이후 점점 몸이 약해져 가고 있어. 이곳의 공기는 나에게는 맞지 않거든, 겁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너도 일생동안 이 거리를 나갈 수 없어 알고 있겠지?"
나는 침묵한 채 긍정했다.
"일생이야. 이 거리에서의 일생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한번 잘 생각해봐"
"생각해 볼게" 라고 나는 말했다.
"너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이 거리에서 어째선지 아직 남은 일이 있어"
그림자는 다시 한 번 지면(地面)까지 긴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만나러 와주어서 고마워. 왠지 다시 너의 몸속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그의 몸을 코트의 옷자락에 매달아둔 채 공터를 빠져나와 나는 문지기의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밤도 눈이 올 거야"
문지기는 스토브 앞에 앉은 채, 나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눈이 내리기 전에는 손바닥이 가렵고 는 하지. 10cm는 내리겠어. 또 짐승이 많이 죽겠군." 나는 테이블의 옆에 앉았다. 손도끼는 내가 없는 사이에 갈아서 기분 나쁜 하얀 빛을 내고 있었다.
"조심해. 닿기만 해도 잘리니까" 문지기는 거만하게 말했다.
"그 옛날은 이 거리도 칼 제품 등으로 유명했지 알고 있어?"
"아니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좋은 돌도 캤었지. 그러나 모두 옛날이야기야"
"짐승을 태우는 것은 어떤 기분이지요?"
"기분따위, 특별히 어느 쪽인가 규정할 수 없어. 아무 것도 아닌 것의 반복이니까, 봄에는 새끼들이 태어난다. 겨울에 약한 것이나 나이든 것이 죽는다. 그것이 계속 이어져가는 것이지. 도대체 내가 어떤 기분이 들면 좋겠어?" 문지기는 탁탁 소리를 내며 튀는 스토브의 불꽃에 손을 데웠다.
"육체는 혼이 사는 신전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나처럼 죽은 것만 보고 있으면 혼조차도 기름을 뿌려 불을 붙이면 육체와 함께 타버리는 듯 한 기분이 들거든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고방식이 벽에 대해서는 반역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모르겠군요."
"제대로 말해본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말아줘" 문지기는 이렇게 말하고 웃으며 언제나처럼 나이프를 꺼내고 손톱 끝을 자르기 시작했다.
"나는 벽을 비판할 뜻은 없어. 그럴 이유도 없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니까. 문을 지키는 것이 내 일이지.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밖이던 내겐 관계없는 일이야. 아마 너에게도"
나는 침묵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거야. 너의 그림자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나는 알아, 그러나 괴로운 일은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아. 내가 살아있는 한 이 문에서 누구하나 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생각해 보죠"
내가 작은 방을 나왔을 때도 덩치 큰 문지기는 스토브 앞에서 몸을 굽히듯 한 채 손톱을 깎고 있었다. 문이 있는 벽에는 오래된 뿔피리가 걸려 있었다.
동쪽 하늘에는 문지기가 말했듯이 눈을 담은 어두운 구름이 지평선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10cm의 눈, 짐승을 위해 준비된 두터운 죽음의 담요
19
동쪽의 끝을 내려오는 강은 지금은 색이 칠해진 동문의 가장자리에서 벽의 아래를 지나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들어내고 거리의 중앙을 남과 북으로 나누듯이 일직선으로 흘러 나의 관사 앞 부근, 서쪽다리를 넘어서 급히 방향을 좌로 바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남쪽 벽의 조금 앞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수저(水底)의 석회동굴로 거대한 소리를 내며 흘러들어갔다.
벽 너머로 석회암의 황무지 아래에는, 그런 무수한 지하수맥이 펼쳐져 있다는 말이 있다. 이 같은 암흑의 수맥에서 나온 듯 한 이상한 모습의 거대한 물고기가 강변에 올라오는 일도 있다. 이런 물고기들은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태양아래서 정말 지독한 썩는 냄새를 냈다.
그것을 제외하면 강의 흐름은 아름답고 깨끗했다. 원형으로 둘러싸인 긴 벽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강은 아름다운 대비를 이루며 거리를 규정하고 있었다. 강변에서 다양한 계절의 꽃이 피고 길에서 듣기 좋은 물소리를 들으며 웅덩이는 어디까지라도 비칠 듯 한 맑은 물이 깊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리에 있어서 귀중한 수원(水原)이였다. 실제 강물은 내가 이제까지 마셨던 물보다 맛있었다. 어느 정도의 건조한 여름에도 그 흐름은 끊이지 않았고 "동쪽숲"을 끼고 공장지대의 동쪽에 풍부한 용수를 제공하고 있었다.
숲은 그 흐름에 아름다운 풍경을 더해 주고 있었지만 그 안에도 옛 다리의 아래를 지나치듯 동서(東西)에 펼쳐진 작은 중주(中洲)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나는 중주(中洲)의 벤치에 앉아 짐승들이 늘어서서 물을 먹는 모습을 하루 종일 바라보곤 했다.
남쪽 벽의 가까이에 있는 웅덩이를 어떻게 해서든 보고 싶었지만 나는 계속 바람만 품고 있었다. 어느 흐린 오후 너를 산책에 끌어 들였을 때, 나는 그곳에 가려했다.
"웅덩이의 가까이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라고 너는 말했다.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에요. 많은 사람이 그곳에 빨려 들어갔어요."
"주의 하면 조금도 위험하지 않아"
너는 머리를 저었다.
"당신은 모르는군요. 물이라는 것은 사람을 불러들여요."
"그러면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볼게. 어떻게든 보고 싶어"
우리들은 남쪽 벽으로 걸었다. 얼어붙은 눈은 둘의 발아래에서 바싹바싹 소리를 냈다. 짐승들 몇 마리인가가 하얀 입김을 내면서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들은 한 걸음마다 그 여윈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무 잎과 몸을 쉴 수 있는 검은 대지를 찾아 걷고 있었다. 그들의 황금색의 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눈에 물들듯이 하얗게 변해갔다. 남쪽언덕을 오를 때에는 이미 짐승의 모습은 없고 길도 거기서 끝나있었다. 우리들이 인적 없는 마른 들판이나 발옥(發屋)의 집락(集落)을 가로지르며 나가는 사이에 웅덩이의 물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어떤 소리와도 달랐다. 소용돌이의 소리도 아니었고 땅의 울림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목구멍에서 뱉어놓는 한숨과 비슷했다. 그 소리는 어떤 때는 낮게 되고 어떤 때는 높게 되고 또 단속적으로 끊어져 무언가에 숨이 막힌 듯 혼란스러웠다.
"마치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
너는 외면할 뿐 아무 말 하지 않고 장갑을 낀 양손으로 수풀을 걷으며 계속 걸었다.
"옛날보다 훨씬 길이 나빠졌어요. 돌아가는 편이 좋을지 몰라요"
"그러나 모처럼 왔는데 이제 조금 더 가보자"
기복이 심한 수없는 수풀 속을 물소리에 이끌리듯 10분정도 걸어가자 갑자기 앞이 열렸다. 긴 수풀은 그곳에서 끝나고 평탄한 초원이 강을 따라 우리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 강은, 내가 거리 속에서 보고 있던 것과 같은 강으로는 어쩐지 생각되지 않았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던 아름다운 흐름은 이곳에 없었다. 마지막 커브를 돌아서 강은 왠지 급히 꺾이고 그 색을 짙은 푸른색으로 바뀌면서 마치 작은 동물을 삼킨 뱀처럼 이곳에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 가지 말죠." 라고는 너는 나의 팔을 잡았다.
"표면은 물결하나 없지만 아래쪽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한번 끌려 들어가면 마지막이에요. 두 번 다시 올라올 수는 없어요."
"어느 정도 깊을까?"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야기에 의하면 아주 옛날 이교도(異敎徒)를 이곳에 던졌다지만 ……."
"던지면 어떻게 됐지?"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웅덩이의 아래에는 몇 개나 되는 구멍이 뚫려있어 그곳에 빨려 들어가 버리니까요" 그녀는 몸을 떠는 듯 어깨를 치켜세웠다 "나에게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화염을 선택하겠어요."
거대한 웅덩이의 숨결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땅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고민의 신음소리 같았다. 너는 손바닥만큼의 크기의 나무 조각을 바라보고 웅덩이 한가운데를 향해 던졌다. 나무 조각은 5초정도 잔잔한 수면에 떠서 있었지만 갑자기 몇 번인가 작은 조각으로 나눠지고 나서 마치 무엇인가에 끌려가 버리듯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 다시 떠올라 오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바닥 쪽은 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그것을 알겠죠."
우리들은 웅덩이에서 20m정도 떨어진 초원에 앉아서 주머니에 넣어온 빵을 꺼냈다.
멀리서 떨어져서 보는 한, 주위의 풍경은 평화로운 것이었다.
여기저기 눈덩어리를 남겨놓은 들판이 넓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물결 하나 없는 거울 같은 수면의 웅덩이가 있었다. 강 쪽에는 석회암의 절벽이 서있고 남쪽에는 벽이 검게 높이 솟아 있었다.
웅덩이의 숨결을 제외하면 주위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곳에 오는 것 같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 외에는 누구도 없어요?" 라고 너는 말했다.
"이제 만족해요?"
나는 위를 향해 침전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녹은 눈 때문에 지면은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래도 대지의 향기는 마음에 들었다. 몇 마리인가의 겨울새가 수풀에서 날아올라 벽을 넘어, 남쪽하늘로 사라져갔다.
20
옆방 노인이 나에게, 나의 그림자의 상태가 나쁜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얼핏 귀에 들은 것이야" 라고 노인은 말했다.
"산보하러 문지기 집까지 가봤어. 너의 그림자도 만났지"
"어떤 상태였어요?"
"건강이 좋지 않았어, 먹은 것은 다 토해버렸데 지하의 침대에서 3일이나 잠들어 있는 듯 했어. 너를 만나고 싶어 하고 있어"
나는 저녁까지 기다려 벽 밖으로 짐승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나서 문지기의 작은 집에 갔다.
안내판은 부재중이라고 되어있어서 나는 쉽게 방에 들어갔고 안에서 빗장을 걸고 지하실의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실은 차가웠고 주위에는 환자가 있는 방 특유의 냄새를 띠고 있었다. 천정은 금속의 덮개를 단 전구가 하나 달려있을 뿐 이였다.
나는 침대의 곁에 작은 의자에 않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천정을 바라보는 듯 천천히 호흡을 이어가고 있었다. 호흡을 쉬는 사이에 열로 건조해진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어떻게 된 거지?"
"길지는 않을 거야. 기껏 해봐야 앞으로 10일 정도" 그림자는 말했다.
"무슨 병이지?"
"뭐래도 상관없어. 병명 따위 네가 쉽게 붙여도 좋아. 이제 나는 사과나무아래에서 기분 좋게 잠들겠지"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었다
" 일주일만 기다릴 거야"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기침을 했다. "일주일 동안 너는 해야 할 일은 빨리 정리해. 그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아마 나는 타 버릴 거야"
"이 곳을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나는 말했다.
"일반적으로는 방법이 없지……. 그러나 나에게는 생각이 있어.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어 반드시 해낼 거야. 나와 네가 다시 하나가 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할 계획이지"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그러나 안심해 나를 도와줘"
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했다. "결심이 서지 않아"
"여자 때문인가?"
"그것도 있고" 라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어느 쪽이 옳을지 나는 모르겠어."
"나는 밖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어디를 가도 여기보다는 나아. 이곳은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이 세계보다도……."
그림자는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약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좋아 그것은 네가 결정할 일이야, 죽음의 공포는 없어. 너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러나 네가 결정했을 때는 너무 늦어, 내가 죽어버린 뒤지"
"생각해 볼게"
"이 거리에는 실체란 것이 없어 알겠어? 무엇인가가 캔버스 위를 선으로 갈라놓은 것뿐이야, 해가 저물면 유원지는 문을 닫지 그것뿐이야"
"너의 말은 알겠어. 그러나 확증이 없어"
"확증? 너도 특이한 남자야" 라고 말하며 그림자는 힘주어 웃었다.
"어쨌든 생각해 볼게" 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그림자는 가만히 천정을 향한 채
"좋아, 그러나 일주일뿐이야, 결심이 되면 오늘과 같은 시간에 이곳으로 와줘"
작은 방을 나와서 석양이 가까워지는 강변길을 나는 걸었다. 서쪽다리위에 나는 몇 마리인가의 짐승의 무리와 스쳐 지났다. 그들이 뒤로 사라져 버린 뒤에도 보도에 그들이 두드렸던 발자국소리는 언제까지라도 나의 귀를 떠나지 않았다.
21
방대한 양의 오랜 꿈을 정리하고 닦아서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 도대체 거리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분류카드를 작성할 이유가 없다면 꿈의 내용을 기록할 이유도 없다. 그 "꿈"의 하나하나가 나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축적되어 갈 뿐이었다. "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경주처럼 무섭게 우리들의 말은 영원토록 그 꿈의 세계를 따라잡는 일은 할 수 없겠지,
그곳에서는 시간의 관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연속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이미지는 역행하고 어떤 이미지는 하나의 장소에 매여 있고 어떤 이미지는 결국 폭발하여 사라진다. 어떤 이미지는 이상하리만큼 선명하였고 어떤 이미지는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것들의 이미지는 만화경속에 코끼리처럼 실체화되고 빛과 함께 날아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인가의 의미나 방향성을 읽어낼 수 없었다.
내가 이것으로 부터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한없는 슬픔과 그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만큼 슬프고 무엇이 그만큼 어두운 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여러 모습과 여러 색을 한 오랜 꿈을 손바닥으로 데우며 그 꿈의 세계를 계속 쫓아갔다.
그리고 몇 달 인가의 그런 작업 끝에, 나는 간신히 그들의 떨림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들은 확실히 무엇인가의 메시지를 내게 계속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날이 갈수록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귓가에 느끼게 되었다. 마치 알 수 없는 어둠의 지옥에서 닫혀버린 영혼의 부름처럼, 그 울음소리는 나의 마음을 계속 흔들어 왔다.
그러나 나에게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그 말의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게?
"그림자가 죽어 가고 있어." 나는 그런 오랜 꿈의 하나를 서고의 책장에 돌려놓으면서 너에게 그렇게 말해봤다.
"조금 쉬세요." 라고 너는 말했다.
우리들은 스토브의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너는 카운터의 찬장에서 사과과자를 꺼내어 둘로 나누었다.
"그렇게 상황이 나빠요?"
"열흘을 못 넘길 것 같아."
우리들은 스토브를 향해 마주 보고 있었다.
스토브의 불꽃이 너의 얼굴을 붉게 비치고 있었다.
"어두운 마음은 늦던 빠르던 언젠가는 죽어요."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기분도 알아요. 20년 이상 계속 함께 살아온 친구이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죽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 알아요."
나는 사과과자를 하나 먹고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털었다.
"그러나 체념하는 쪽이 좋아요. 조금 지나보면 반드시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될 거예요. 왜 지금까지 그런 일로 열심히 고민했을까 라고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때까지 나도 가능한 한 도울게요."
나는 커피 잔을 손에 든 채 가만히 스토브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한 나는 언제까지라도 당신의 곁에 있어요."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서고로 들어가 한손으로 문을 닫고 불을 껐다.
"어두워요"
"곧 밝게 돼"
나는 더듬어 책장 위의 오래된 꿈 하나를 손에 쥐고, 먼지를 털어내고 양손으로 안은 채, 마음을 집중하여 그것을 데웠다. 오래된 꿈이 열을 받기시작하자 그 중심부터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책장위에 돌려놓았다. 너와 둘이 이 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의 손안에서 너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밝은 오렌지색의 빛은 간신히 깜빡거리면서 책장으로 부터 넘쳐흐르고 있었고, 누구하나 들을 수 없는 그 오랜 꿈을 계속 말했다. 충분하리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시간의 지남에 따라 빛은 약해졌고 결국에는 불확실한 흔들림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방은 암흑이 돌아왔다.
"아주 아름다웠어요."라고 너는 말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나는 암흑 속에서 너의 어깨를 단단히 안은 채, 너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아름답다." 라고 나도 생각했다. 마치 옛날 크리스마스트리의 추억처럼…….
암흑 속에서 나는 말을 잃고 있었다. 너의 입술에는 사과과자의 향기가 났다. 너의 부드러운 앞머리는 이마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너의 따뜻한 숨결이 나의 얼굴에 느껴졌다. 너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말은 마치 손에 쥔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부터 흐를 뿐인데…….
암흑 속에서 나는 너를 생각했고, 그림자를 생각했다. 조잡한 스웨터와 조잡한 스커트에 둘러싸인 너를 생각하고 차가운 지하실의 침대에 누워있을 내 그림자를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방은 이상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방속의 수천의 오랜 꿈이 서로 호응하듯이 깊은 잠에서 깨어, 무수한 빛으로 우리를 향해 그 영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22
모든 오랜 꿈은 깨어나고 있었다.
"있을 수 없어요. 이런 일은……." 너는 방심했었던 듯 이렇게 말했다. 그대로였다. 오랜 꿈은 모든 것을 빼앗긴 존재였다. 그들은 소리를 빼앗겼던 말이고 빛을 빼앗겼던 눈이고 꿈을 빼앗겼던 잠 이였다.
"있을 수 없어요."
어쩌면 우리들은 서고의 깊은 어둠속에서 같은 환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러나 만약 환상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방속의 오랜 꿈들이 마지막 힘을 모아 우리 앞에 보여 준 환상이었다.
그들과 함께 나는 지표에 난 깊은 구멍을 내려갔다. 그곳은 뭔가 빼먹어버린, 잃어버린 장소였다. 강물은 마르고 언덕은 무너지고 빛은 약했다.
그곳에는 별도 달도 없고, 지하로 부터 희미한 빛이 주위의 풍경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속을 수천의 오랜 꿈이 앞서서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나는 좁은 길을 발을 헛딛지 않도록 천천히 계속 걸었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언덕길을 끝없는 군대의 대열이, 내가 나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계속 진행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머리가 없었다. 그리고 검은 구멍사이 어깨의 한가운데부터 그들은 호흡을 하는 것처럼 하얀 입김이 단속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오랜 꿈은 똑바로 길의 위로 계속 나아갔다. 나가는 사이에 계절은 변하고 해가 바뀌었다.
언제까지라도 어둠만이 균등했다. 군인 중 몇몇이 나를 불렀다. 그들은 몸의 구멍에서 콜록콜록 소리를 내며 나를 불렀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너를 잃고 말았다. 나는 걸으면서 큰 소리로 너의 이름을 부를 뿐 대답은 없었다. 군인들의 콜록거리는 소리가 비웃듯이 반복해서 들려올 뿐이었다. 오랜 꿈은 계속 나아갔다.
"기다려줘" 나는 불렀다.
"그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돼"
오랜 꿈들은 내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없는 그 깜박거림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들의 나라였다. 나의 발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오랜 꿈의 뒤를 계속 쫓았다. 길가에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늘어서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이었다. 죽은 10마리의 고양이들은 그 털빛을 그대로 단단히 굳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서진 색 바랜 완구는 흙속에 묻힌 채 그 팔을 허공에 내놓고 있었다. 오랜 스포츠셔츠는 언젠가 담배의 불에 탄 자국을 한 채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길을 나아감에 따라 시간은 바뀌었다. 갑자기 나의 눈은 움푹 패이고 머리는 빠지고 이빨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몸에는 주름이 나타났고 호흡을 한번 하기위해서 나는 온몸을 흔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만해줘" 라고 나는 외쳤다.
"부탁이야 이제 그만해"
그래도 오랜 꿈은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길은 갑자기 끝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텅 빈 바위 위에 서있었다. 주위에는 이미 물은 없고 부대들의 모습도 없었다.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 떨어진 듯 했다. 천정은 무한히 높고 그 안의 암흑 속에 핀으로 뚫을 정도의 하얀 구멍이 열려 있었다. 그것은 태양의 빛이었다.
세상 속에서 태양빛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소금의 결정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바위의 위에 쌓였다. 그 때 오랜 꿈은 하나씩 하나씩 다 타버린 듯 빛을 잃어 갔다. 그들은 빛을 잃자마자 깃털처럼 지면에 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의 빛이 숨쉬기 힘든 듯 허공으로 사라졌을 때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다. 천정의 하얀빛도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23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최후의 빛이 사라져 간 서고에 다시 암흑이 돌아왔을 때 우리들은 말없이 서고를 빠져 나왔다. 도서관의 불을 끄고 긴 복도를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밤이 되어 계절풍이 멈추고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기묘하리만큼 깨끗하고 조용한 별이 하늘에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우리들은 말없이 길을 걷고 언제나처럼 다리의 한가운데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너를, 너의 그림자를 만났던 때는 내가 16세 였어."
나는 어두운 수면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 해는 뭔가 이상한 해 였어. 뭔가 점점 뒤로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 뭔가가 나를 골목길로 빠지게 해버리는 듯했어.……. 내가 너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어떤 파티석이 였어. 누구의 생일파티였던가 그럴 거야 내가 너와 말을 나눈 것은 두 마디인가 세 마디인가 뿐이지만 그때 갑자기 나의 눈앞에 세계가 쫙 펼쳐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지"
너는 나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나와 같은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나 나는 너를 생각했던 것 같아. 너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날 때까지는 몇 달이던가, 매일 아주 괴로웠어. 어떤 때는 바라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듯했고 어떤 때는 영원히 어딘가 에서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너와 자고 싶었고, 어떤 때는 멀리서 너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만족했어.……. 그리고 그것이 몇 달인가 계속되는 사이에 나의 의식 속에서 너는 나에게 있어 살아가는 의미로 변해가고 있었어. 혹은 삶을 지속하도록 하는 것으로……. 나는 그런 꿈속에서 살고 있었지. 꿈을 부르고 꿈을 먹고 꿈과 함께 잤어. 이런 기분을 알 수 있을까?"
너는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 이런 것은 모두 사소한 일에 불과하니까, 혹은 아무의미도 없을지 몰라, 단지 그뿐이야. 너에게만은 어떻게 해서든 말해 주고 싶었어. 어떠한 꿈이라도 결국은 모두 어두운 꿈 이였지. 만약 네가 그것을 어두운 마음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어두운 마음일거야,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금가루처럼 빛나지만 실제는 진흙일 뿐. 이런 꿈은 사람을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만들지. 그 웅덩이를 흐르던 물처럼 갈 방향 없는 지하의 어두운 수맥을 영원히 방황할지도 몰라"
나는 말을 잃고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수면에 시선을 둔 채 물의 흐름이 중주(中洲)의 바위에 부딪쳐 내는 소리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채 꽤 오랫동안 살아왔어. 괴로운 말뿐인 것 같은 기분도 들어. 그러나 이런 생각을 지우기에는 나는 나이를 너무 먹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나가고 있는 긴 복도가 출구가 없는 복도라 하여도 정말 내 자신은 그곳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나의 어두운 꿈은 그것이 아무리 어두운 것이라도 그곳에 내버려두고 떠나서 살아갈 수는 없어. 그것을 끊어버린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야"
"이 거리에서 너와 이렇게 해서 함께 사는 한 나는 다른 것을 바랄 것은 없어.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어떤 불안도 없고 어떤 어둠도 없어 아마 영원히 그럴 거야. 그러나 거리 밖에서는 지금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어 짐승들도 죽고 그림자도 죽어. 셔츠에 묻었던 소스의 얼룩처럼 나의 마음에서 그것이 떠나지 않아"
강물이 손에서 계속 넘쳐흘렀다. 그래도 나는 말을 멈출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림자와 함께 이 거리를 나간다. 너와 헤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너와 둘이서 영원히 이 거리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16세의 나는 그렇게 아름다웠어요?" 너는 얼굴을 들어 나에게 물었다.
"아름다웠어, 마치 꿈처럼."
그리고 나는 너를 안았다. 나는 너의 볼 위에 뜨거운 눈물을 느꼈다.
"당신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할게요." 라고 너는 말했다.
"언제까지라도……. 제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안녕" 나는 말했다.
"안녕"
그녀가 옛 다리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간 뒤에도 나는 계속 어두운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태양이 동쪽의 하늘에서 하얀 색을 살짝 들어내 놓을 무렵, 나는 언덕위의 "관사"에 돌아가서 텅 빈 침대에 묻혔다.
24
"벽을 조심해"라고 노인은 말했다.
"벽은 너의 결심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뜨거운 스프를 조금씩 마시면서 수긍했다.
"왜 나에게 털어놓죠?"
"대위님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요. 말없이 갈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내가 떠나게 된다면 아쉬워."
우리들은 말없이 남은 스프를 마셨다.
"어떻게 나갈 계획이지?"
"모르겠어요." 라고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림자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어?"
"꽤 결점도 많은 친구지만 헛소리는 하지 않아요. 오래 사귄 친구이니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노인은 말없이 접시를 싱크대에 넣고 나서 테이블을 향해 앉았다.
"그녀와 떨어지는 것은 아주 괴로울 텐 대?"
나는 미소 지을 뿐, 그것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너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그렇게 결단을 내렸지. 그러나 너의 결단이 옳을지 어떨지는 나는 몰라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야. 벽의 어느 쪽이 밖이고 어느 쪽이 내부인지……."
"예"
"밖에 나간 뒤에 나간 것을 후회하기 시작할 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성공을 빌어"
"고맙습니다."
4시에는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곧바로, 소리도 없이 거리에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언덕을 내려와 서쪽다리를 건너, 강변에 문지기의 작은 집까지 걸었다. 길을 가는 짐승들은 지친 듯 등의 털에 눈을 얹은 채 말굽의 소리를 길에 울리고 있었다. 벽 쪽에서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검은 연기가 하늘로 향해 일직선으로 올랐고 그 다음은 희미하게 하늘에 빨려들 듯 사라져 갔다. 아마 사체(死體)의 수는 10이상이 될듯했다. 그것은 나를 어두운 기분에 들게 했지만 적잖이 시간이 걸릴 것은 분명했다.
문지기는 없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문지기의 작은 집에 들어갔다. 방안은 언제 나와 같았다.
스토브는 따뜻하고 주전자는 입에서 소리를 내며 하얀 수증기를 뱉어 내고 있었다. 문의 벽에는 뿔피리,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손도끼와 숫돌이, 손도끼의 날 끝은 하얀 광채가 나며 나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가슴 속에서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지하실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실의 냄새는 5일전 보다 한층 심해 있었다. 그런 속에 나의 그림자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어깨를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다시는 안 올 꺼라 생각했어." 그림자는 머리만을 내 쪽으로 향해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형편없는 얼굴이지? 그 동안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일어날까"
"좀 일으켜줘"
나는 그의 여윈 몸에 손을 둘러 침대에서 일으켰다. 그림자는 혼자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업듯이 해서 계단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지?"
"아무튼 뿔피리를 가져가" 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나는 벽에서 뿔피리를 떼어내어 포켓에 넣었다.
"지금부터 한 시간도 안 남았어." 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게다가 나는 달릴 수 없으니까. 가능한 5시가 될 때까지 남쪽 벽까지 도착했으면 해."
"모두에게 들킬 텐데"
"방법이 없어, 각오해야지. 서둘러야 해, 다섯 시가 되면 문지기는 뿔피리를 가지러 올 것이고 내가 없는 것을 곧 알 거야, 네가 나를 데리고 남쪽으로 간 것을 모두가 볼 것이고 놈은 반드시 우리를 쫓아오겠지. 그러니 5시까지는 어쨌든 남쪽 벽에 도착해 줘"
"남쪽 벽부터는 어떻게 나갈 거지"
"생각하는 것은 나야, 달리는 것은 너이고, 너는 달리기만 하면 돼. 자, 시간이 없어"
나는 체념하고 그림자를 업은 채 작은 집을 나왔다. 눈은 하늘로 부터 하얀 베일처럼 우리들의 앞에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달렸다.
25
나는 결국 왔던 같은 길을 반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강변을 달리고 서쪽다리를 건너 나는 달렸다. 5, 6걸음 달리는 사이에 눈 조각이 나의 눈에 날아 들어왔고, 몇 번이나 짐승들과 부딪쳤다. 내가 부딪칠 때마다 그들은 성대를 절단당한 개처럼, 신음소리 같은, 새의 울음 같은 그런 슬픈 소리를 냈다. 짐승들의 소리를 들었던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사람과도 부딪쳤다. 눈 때문에 인도는 한산했지만 통행인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들은 몇 사람에게 확실히 목격되었다.
"달릴 수 없어서 미안해." 라고 그림자는 등 뒤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빨리 약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나는 대구를 하는 일도 할 수 없었고, 그저 하얀 숨을 내쉬면서 눈 속을 계속 달렸다.
우리들이 남쪽언덕의 기슭에 도착했을 때, 광장의 시계는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라고 그림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연기가 가늘어졌어."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의 말처럼 내리는 눈 사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서쪽 벽 가까이의 연기는 전보다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눈으로 불이 꺼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림자는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때쯤 문지기는 기름을 가지러 오두막에 돌아올 거야"
그림자를 짊어지고 언덕의 여백을 오르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였지만 여기서 체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숨이 막히고 땀에 흠뻑 젖으면서 언덕길을 올랐지만 가까스로 언덕을 올랐을 무렵, 나의 다리는 돌처럼 딱딱해지고 결국 한걸음도 달릴 수 없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나 5분만 쉬게 해줘" 나는 지면에 쭈그린 채 그림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치명적인 5분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의 피로는 극한에 도달해 있었다.
"알겠어. 내가 달리지 못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니까……. 뿔피리를 내게 주지 않을래?"
그림자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영문도 모른 채 주머니에서 뿔피리를 내어 주자 그림자는 그것을 입에 대고 눈 아래 펼쳐진 거리를 향해 불었다. 길게 한번 짧게 3번 언제나의 뿔피리 소리였다.
"무엇을 하는 거야?"
"보고 있듯이 뿔피리를 불었어. 이것으로 15분은 버는 거야" 그림자는 웃으며 언덕의 여백에 피리를 던졌다.
"뿔피리를 불면 짐승은 문으로 향하지. 그 때 문을 열어 두는 것이 문지기의 일이고 그것이 거리의 규칙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지켜야 되지"
"왜?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지?" 그림자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봐, 너는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지. 여자이외에……." 나는 침묵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언젠가 너에게 해가 지면 유원지는 닫는다고 말했었어. 그것과 마찬가지야. 이 거리는 완전하지 않아. 벽도 완전하지 않아. 약점은 반드시 있어. 나는 그것을 봤던 거야. 완전한 것 따위 세상에 무엇 하나 없어 이 거리의 약점은 짐승이야 짐승이 이 거리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저 뿔리리 없이 이 거리는 성립하지 않아"
"안전장치?" 라고 나는 그림자에게 물었다.
"그것에 대해 나중에 설명할게" 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반드시 너는 그 때가 되면 설명을 구할 테니까"
나는 언덕의 여백에 던져진 뿔피리를 보았다. 눈이 뿔피리를 이미 덮어 버리고 있었다.
"걱정하는구나, 놈들은 반드시 피리를 찾아낼 거야. 그리고 이 거리는 영원히 존속되지. 그러면 만족하겠지?"
"응" 이라고 나는 말했다.
"너도 정말 특이한 사람이야"
나는 다시 그림자를 업고 계속 달렸다. 쉬었던 덕분에 나의 다리는 회복되어 있었다.
"이제 곧 벽이 보일 거야." 라고 그림자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벽이 보이면 곧 서쪽으로 내려가 줘, 좋지? 절대로 벽에 근접해서는 안 돼"
그리고 그때 남쪽의 벽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26
벽은 어떤 예측도 못할, 일순간에 우리 앞에 서있었다.
놀랄 것은 없어 라고 벽은 말했다. 벽은 나를 향해서 말하고 있었다. 너의 지도 어느 곳에도 없지. 그런 것은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아.
"듣지 마! 달려!" 라고 그림자가 뒤에서 외쳤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너에게는 이전에도 충고했잖아, 너 같은 하찮은 존재는 이 우주에서 정말 자신의 그림자를 때어내는 일조차도 할 수 없어. 예리한 나이프가 내 몸에 상처하나 내지 못하는 것처럼
"달려" 그림자가 외쳤다.
그렇다면 원하는 만큼 달려도 좋아, 원하는 만큼. 웃음소리를 남기고 벽은 사라졌다.
"서쪽으로 달려." 그림자는 계속 외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달렸다. 언덕의 서쪽 면은 완만한 경사를 내려가자 수풀과 맞부딪쳤다.
"숲을 헤쳐나 가자, 이곳에 들어가면 문지기는 걱정 없어" 나는 등에서 그림자를 내려 어깨로 부축하고, 점점 어두워져가는 깊은 수풀 속을 나아갔다. 눈은 쉬지 않고 계속 내렸고 나와 그림자가 입고 있는 코트 위에 하얗게 쌓였다.
"벽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 저것은 모두 허세에 지나지 않으니까"
"허세?"
"환상이야. 우리들의 앞에서 있었던 것은 진정한 벽이 아니야. 벽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따라서 우리들에게 손끝하나 댈 수 없어. 그저 위협할 뿐이야?"
"그러나, 실제의 벽은 환상이 아니지."
"그렇군. 그래서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절대 벽에는 근접하지 않았군."
"하지만 벽에 근접하지 않고 벽을 넘을 수는 없지" 그림자는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우리들은 얼굴에 상처를 입으며 전속력으로 수풀을 뚫고 나갔다. 수풀을 지나자,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스로 숲을 지나고 웅덩이가 있는 초원으로 나아갔을 때, 우리들은 숨을 돌리기 위해서 앉았다.
"잘했어, 너는 정말 잘했어. 누구도 절대 쫓아올 수 없으니까 이제 우리들의 승리야"
암흑 속으로 이제까지 본 적 없을 정도의 많은 눈이 지면에 내려있었다. 여전히 바람은 없었다. 웅덩이의 이상하리만큼 푸른 수면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헤엄쳐 나가는 거야"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저 웅덩이에서"
나는 망연자실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뛰어들어서 헤엄치는 거야. 조금 춥지만 감기가 걸리는 정도는 참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계획이야?"
"그렇지"
"정말 들어갈 거야?"
"나의 상상이 틀리지 않으면"
"상상?"
"이론이지" 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바꿔 말해도 좋고, 결국은 같은 거니까"
"확신할 수 없는 점은 무엇이지?"
"어차피 확신 따위는 이 거리에도 없어. 나가자마자 나는 생각할 거야. 그것뿐이야.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이야. 따라서 너 자신이 결정해. 나는 강요하진 않아 너에게도 프라이드는 있고 너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난 하고 싶진 않아"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일어서서 코트의 눈을 손으로 털었다.
"자, 천천히 생각해 어두운 지하의 수맥 속을 영원히 방황하고 기분 나쁜 물고기에게 시체를 갉아 먹힌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너의 이론을 들려주지 않을래?"
"내가 이 거리에 와서 우선 최초로 느낀 것은 이곳은 너무 완벽한 것이었어. 적어도 처음 봤던 내 눈에는……. 무언가가 그림 맞추기처럼 너무나 정확하게 만들어져 있었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 이 거리는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무언인가의 의지에 의해 무리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만약 정말 이거리가 무엇인가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면 반드시 어딘가에 허점이 있기 마련이야. 나는 의지로 하는 일 따위는 신용하지 않으니까."
그림자는 말을 멈추자마자 녹초가 된 듯 손가락 끝으로 눈을 비볐다.
"벽의 목적은 속에 있는 것을 둘러싸서 외계와 단절시키는 것이지. 그렇겠지?"
"그래"
"그러나 벽은 완벽하지 않아. 벽의 안과 밖을 잇는 지점은 3개가 있어. 우선 서쪽문 그리고 강의 출구와 입구야. 서쪽문은 문지기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어. 그것을 돌파하는 것은 우선 무리야 가장 형벌이 엄한 곳이니까. 다음에는 강의 입구를 생각해 봤어.
그것도 안 돼. 두꺼운 철격자로 단단히 잠겨있어. 남은 하나가 웅덩이에서 통하는 지하 동굴이야"
"그러면 왜 이 웅덩이를 울타리로 둘러싸지 않지?"
"그쪽이 효과적이지 벽도 울타리도 없어. 그러면 그 대용물로 공포에 의해 웅덩이를 둘러싸는 것이지. 그래서 누구도 이 웅덩이에는 접근하지 않아. 좋은 방법이지"
"아니면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지"
"물론 그것도 생각해봤어" 라고 그림자는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러나 너도 매일 강을 보고 있었겠지? 나도 몇 번인가 봤어.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 이 강에는, 혹은 물에는 마치 악의가 없는 것 같았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나는 말했다.
"이 거리에서 정말로 태어나고 있는 것은 짐승과 강뿐이야. 나는 이 강을 믿고 싶다고 생각해"
나는 잠시 침묵했고 주위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수면에 눈이 소리도 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의 말에 꽤 설득력이 있어" 라고 나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고마워, 그러나 다 너의 덕분이지" 그림자는 웃었다.
"자, 슬슬 들어가지 않을래? 수영하기에는 조금 지난 계절이지만"
"업혀"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전에 벽과 연결을 끊자"
"좋아" 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27
벽은 다시 우리의 앞에 서 있었다. 그 반들반들한 벽돌은 석양의 엷은 어둠속에서 불가사의한 빛을 내고 있었다.
뛰어들고 싶다면 뛰어들어도 좋아 라고 벽은 말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저 말일뿐이야. 너는 그런 세계를 피해서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나는 말했다.
"말은 불확실해, 말은 도망치지. 말은 배신하고 그리고 말은 죽어버려. 그러나 결국 그것 역시 내 자신이야. 바꿀 수는 없어."
그런 식의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런 말의 어디에 의미가 있어?
"그래 그렇다면 이 거리는 어디에 의미가 있어. 삶이 두개로 분리되고 어두운 마음이 도서관 서고에 있어. 그런 영원의 어디에 의미가 있지?"
사람이 무언가를 구할 때 그곳에는 어두운 마음이 자라나지 어서 뛰어들어 버려! 그리고 어두운 마음과 함께 살아라, 결국 어두운 마음과 함께 죽어버리란 말이다. 그것이 너에겐 어울리겠어. 만약 이 웅덩이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리고 벽은 사라졌다.
"끝났구나." 라고 나는 말했다.
"그만 갈까?"
"좋아" 우리들은 눈 속에서 코트와 구두를 벗고 둘의 벨트를 꽉 묶었다.
"떨어지면 안 돼, 절대로……." 라고 그림자가 말했다.
"떨어지면 끝장이야"
나는 수긍했다. 눈 위에 놓인 두벌의 검은 코트와 검은 구두는 왠지 어색해 보였다.
"문득 나는 잘못하고 있는지도 몰라" 라고 그림자는 혼자서 그렇게 말했다.
"내 사정만 생각하고 너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그래?"
"너와 벽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갑자기 그렇게 생각했어."
"네 마음이 약해진 것뿐이야" 라고 나는 말했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어"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만약 지상으로 다시 나가게 되면 잘 할께"
우리들은 벨트로 이은 채 굳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동시에 얼음처럼 차가운 웅덩이 속에 머리부터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의식을 잃어갔다. 최후에…….
말은 죽는다.
일초마다 말은 죽어간다. 도로에서, 지붕아래에서, 황야에서 그리고 역의 대합실에서 코트의 깃을 세운 채 말은 죽어간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까? 전등의 스위치를 끈 것처럼 모든 것은 사라졌다.
빠직―OFF 그래서 끝이다. 나는 이제까지 아주 많은 것을 계속 묻어왔다. 나는 양을 묻었고 소를 묻었고 냉장고를 묻었고 슈퍼마켓을 묻었고 말을 묻었다. 나는 그 이상 더 묻고 싶은 것은 없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계속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룰이다.
나는 일찍이 그 벽에 둘러싸여진 거리를 선택하고, 결국은 그 거리를 버렸다. 그것이 옳았던가. 어쨌던가, 지금에 이르러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살아남았고 그렇게 해서 지금 글을 계속 쓰고 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진정 그 시체냄새다. 나는 어두운 꿈과 함께 잠들고 어두운 생각과 함께 눈을 뜬다. 내가 걷는 길은 어둡고 그리고 걸어 갈수록 그 어둠은 더해가는 듯하다. 무엇인가를 잃어간다. 계속 잃어간다. 일찍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노래도 지금은 없다. 일찍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던 풍경도 이젠 없다. 달콤한 말이 수없이 침전의 어둠속에 덮여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어두운 긴 밤, 방의 벽에 길게 펼쳐진(그리고 지금 더 이상 말이 없는) 내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그 벽에 둘러싸여진 거리를 생각한다. 높은 벽을 생각하고 도서관의 희미한 전등 아래의 너를 생각하며 거리에 발굽소리를 울리던 짐승들을 생각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한물간 공장가(工場街)를 두드리는 차가운 계절풍을 생각한다.
그 이상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을 내가 원했다. 마치 16세에 느꼈던 바람처럼, 지금 모든 것은 나의 몸을 부딪치며 지나간다. 나는 그 거리를 잃은 것뿐이지만 나의 추억은 저 거리의 어딘가에 남아있으리라.
언제까지라도……. 라고 너는 말했다. 언제까지라도 네가 나를 잊지 않는 것처럼 나도 너를 잊지는 않는다. 여름 강변의 추억을 그리고 계절풍이 불던 다리 위의 추억을.
언제까지라도…….
흐린 가을의 황혼, 나는 문득 저 뿔피리의 울림을 듣는다. 그 소리는 필시 저 불확실한 벽의 어딘가의 빈틈에서 나의 귀에 도달한 것이리라.
북쪽 끝에서 불어 내려오는 조금은 차가운 계절풍에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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