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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_秘事

101공수사단(101st AirBorne Division)

chocohuh 2013. 2. 13. 11:21

101공수사단은 1942년 루이지애나의 Claiborne캠프에서 창설되었다. 101공수사단의 전신인 101보병사단은 원래 1918년 7월 23일에 창설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었다. 급조된 보병사단이라, 무기나 장비, 병력 등이 충분하게 가동되지 못했었다. 전시를 위한 임시편성의 부대였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단은 해체되었다.

 

1921년 지역방위 개념의 대두로 101보병사단이 재창설되었고 사단 사령부는 밀워키에 위치했다. 예비군 개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실제병력이 없는 Paper Army였다. 서류상으로만 부대원이 등록되어 있고 전시에 예비군을 소집하는 형식의 지금의 주 방위군이나 예비군 사단의 개념이었다.

 

당시에는 비행기의 항공능력도 떨어지고, 항공기당 병력수송도 10~20여명 정도에 불과하여, 후방 침투 후 교란작전을 기초로 하는 특수전의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2차 대전 당시 공수사단들은 현재의 특전사와 같은 특수부대와는 개념이 다른 정규전 부대였다. 즉 부대이동을 비행기를 이용하여 낙하산으로 이동하는 것 이외에는 전형적인 공격, 방어 등의 정규보병 사단의 임무를 수행했었다.

 

미군의 공수사단은 1940년 미육군 내에서 최초로 낙하산병들에 대해 일련의 시험을 거치면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포트베닝에서의 성공적인 테스트에 고무된 미육군은 대규모 부대의 공수작전이 가능한 병력의 창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는 팔슈름야거와 같은 공수사단이, 영국에는 레드데블스와 같은 공수사단들이 전장에서 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특수부대인 영국의 SAS와 코만도가 창설된 것도 2차 대전 때이다.

 

다른 나라의 공수부대를 기초로 미 육군은 2차 대전 발발과 동시에 2개의 공수사단을 창설했다. 81보병사단을 공수사단으로 임무를 변경하여 제81공수사단으로 재편성 하였고, 역시 101보병사단도 101공수사단으로 재편성 하였다. 후에 11, 13, 17, 18, 21의 5개 공수사단이 창설되었으나 대부분 2차 대전 말에 투입되어 일반 보병사단으로 후방을 지키다가 2차 대전 이후 해체되었다.

 

101공수사단의 창설시 주력이 된 부대는 502공수보병 연대였다. 327, 401글라이더 보병연대가 후에 합류하였고, 377, 321, 907포병연대가 사단의 포대로 합류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 때에는 유타비치에 상륙예정인 제4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적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이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독일군 포병부대를 와해시키기 위해서 후방에 공수 작전을 감행하였다.

 

1944년 6월 5일 오후 10시 15분 6,600명의 101공수사단 병력들은 1,432대의 C-47 수송기를 탑승하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머지않아 유타비치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적의 맹렬한 대공포화가 시작되었다. 적의 포화 때문에 대부분의 비행기가 원래 목표지점을 찾기가 어려워 원 목표지점을 벗어난 지점에서 대부분의 병력들이 낙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여, 조종사들은 더욱더 목표지점을 찾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선발대가 1시간 전에 미리 낙하를 했지만 제시간에 맞추어서 낙하지점을 지상에 표시하는 임무에 실패를 했다. 이날 지상에 착륙한 공수부대원들 중에 약 1,500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대략 60%의 장비들이 늪에 빠지거나 적의 수중에 들어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지상에 무사히 착륙한 병력들은 각자의 지휘관을 찾아서 부대를 재정비 하였다.

 

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의 낙하지점이 뒤엉켜서 제대로 부대를 정비하기 어려워 사단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적의 포진지를 급습하거나, 참호를 파서 노르망디를 상륙한 후 전방에서 전진해오고 있는 제4보병사단과의 조우를 기다렸다.

 

유타비치에서 고전분투 끝에 상륙에 성공한 제4보병사단과 그날 오후에 조우를 하는데 성공하여 그날 밤 유타비치와 인근지역이 미국의 수중에 들어왔다. 병력들은 참호를 파고 다음날 있을 또 다른 전투를 위해 그날 밤은 참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101공수사단은 또 다른 명령을 하달 받게 된다. 오마하비치와 유타비치 사이에 위치한 Caraten(카라텐)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상륙병력 중에 오마하비치에 상륙하던 병력들이 가장 치열한 저항을 받은데다가 병력의 피해가 막심하였고, 인근에는 독일군의 정예보병 사단인 SS사단이 진주해 있었다. 오마하비치로의 적의 증원 병력이 증파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Caraten을 공격하는 것이 101공수사단의 새로운 임무였다. 더욱이 독일의 최정예 팬져기갑사단과 독일공수사단 등이 지원군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Caraten을 점령하여 이들의 지원경로를 차단하는 게 시급했다.

 

1944년 6월 8일 이른 아침에 Caraten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오마하비치에 상륙했던 병력 중의 하나인 제29보병사단이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했었는데, 101공수사단의 Caraten 점령으로 오마하비치에 상륙한 병력들이 조금씩 전진할 수 있었고, 101공수사단의 활약으로 제29보병사단도 포위망을 풀고 역습에 가담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Caraten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약 101공수사단의 Caraten 공격이 무산되었다면 상륙작전에 참가한 병력들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을 것이고, 증원된 독일군 기갑, 보병 사단들에 의해 연합군의 진격에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Caraten을 되찾기 위해 독일군은 최정예 팬져기갑사단과 독일공수사단을 동원해서 역습을 시도하고, 보병만으로 구성되어 대전차 전력이 약했던 101공수사단이 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마침 제3보병사단과 82공수사단의 기갑전력을 지원해 주던 제2기갑사단의 신속한 기동지원으로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6월 14일에야 비로서 유타비치와 오마하비치 모두 미군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1공수사단 병력 중 502연대는 82공수사단과 제4보병사단과 전선을 형성했으며, 327글라이더 보병연대는 오마하비치에 있던 제29보병사단과 제1보병사단과 전선을 구축하였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인접부대와 전선을 형성하고, 형성된 전선을 조금씩 밀고 올라가는 방식의 전쟁이 보편적이었다. 현대전같이 헬기나 차량이 보편화되어 신속한 기동성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접부대와의 전선구축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보병사단으로 전선을 구축하고 기갑부대로 지원을 하는 방식의 전선형 전투에 익숙한 세계 최강의 미육군이 월남전에서 패배한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101공수사단은 약 3주간의 걸친 소규모 전투 끝에 북부 프랑스 인접지역까지 진군하였다.

 

1944년 12월 16일 패퇴하기만 하던 독일군이 아르덴에 대규모 역습을 감했했고, 이로 인해 101공수사단은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바스통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101공수사단은 머지않아 독일군 5개 사단 규모의 병력에 의해 포위를 당했고 항복을 종용 받았으나 끝내 항복을 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을 했다.

 

마침내 패튼장군 휘하의 제4기갑사단이 101공수사단을 구하기 위해 진격해 왔고 이를 이어 제3보병사단이 증원 병력으로 증파되어 왔고, 이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역습을 가했다. 바스통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임무로 미육군에서 유일하게 101공수사단에게 최강의 육군 사단이라는 칭호와 함께 ‘Distinguished Unit Citation' 이라는 기장을 수여받았다. 그 이후에는 다른 보병사단들과 함께 전선을 구축하여,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대규모 작전은 수행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항복을 하였고,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독일로 진격을 했다.

 

2차 대전 중 최종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1945년 5월 1일~8일까지 Berchtesgaden(베르히테스가덴)에 위치한 히틀러의 별장을 기습하는 임무였다. 101공수사단은 제3보병사단과 함께 Berchtesgaden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여기서 독일군 SS사단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냈다.

 

101공수사단은 한국전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 월남전 등의 전쟁에서 미군의 신속 기동 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101공수사단(101st AirBorne Division)에서 101고정사단(101st Heliborne Division)으로 명칭과 임무가 변경되었고, 공수투하가 아닌 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 기동부대로 변경되었다. 506연대 1대대는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주한미군으로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