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chocohuh 2012. 12. 27. 16:04

햇볕에 그을리고 날씬하며

앳되고 예쁜 이파네마 아가씨가

걸어간다.

걸음걸이는 삼바 리듬

경쾌하게 흔들며

부드럽게 움직인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지만

내 마음을 주고 싶지만

그녀는 내가 있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뿐

 

 

1963년에 이파네마 아가씨는 이런 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역시 마찬가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그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지 속에 갇힌 채, 시간의 바닷속을 조용히 떠돌도 있다. 만일 나이를 먹었다면, 그녀는 이제 그럭저럭 마흔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날씬하지도 않을 테고, 그다지 햇볕에 그을려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어린애가 셋이나 있고, 햇볕에 그을리면 피부가 상할 것이다. 물론 아직 조금은 예쁠지도 모르지만, 20년 전만큼 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레코드 속에서는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스텐 게츠의 벨벳 같은 테너 색소폰의 선율 속에서는, 그녀는 언제나 열여덟이며, 활달하고 부드러운 이파네마 아가씨다.

내가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걸고, 바늘을 내리면 그녀는 곧 모습을 나타낸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지만

내 마음을 주고 싶지만......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등학교의 복도를 떠올린다. 어둡고 약간 습기 찬, 고등학교의 복도다. 천장이 높고, 콘크리트 바닥을 걸어가면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들린다.

북쪽으로 몇 개의 창문이 있지만, 바로 옆에 산이 있어서 복도는 언제나 어둡다. 그리고 대개는 조용하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복도는 언제나 조용하다.

왜 <이파네마 아가씨>를 들을 때마다 고등학교의 복도를 생각하게 되는지,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연관성이 전혀 없다. 도대체 1963년의 이파네마 아가씨는, 내 의식의 '우물' 속에 '어떤 돌멩이'를 집어넣고 간 것일까?

고등학교의 복도라고 하면, 나는 콤비네이션 샐러드를 떠올리다. 양상추와 토마토와 오이 그리고 피망과 아스파라거스, 가로로 둥글게 썬 양파, 그리고 핑크색의 서든 아일랜드 드레싱. 물론 고등학교 복도의 막다른 곳에 샐러드 전문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복도의 막다른 곳에는 문이 있고, 문밖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25미터짜리 풀이 있을 뿐이다. 어째서 고등학교의 복도가 나에게 콤비네이션 샐러드를 연상시키는 것일까? 이 경우도 역시 연관성은 없다. 그 두 가지가 우연히 어떤 영향을 받아 결부되어 버린 것이다. 갓 페인트 칠을 한 벤치인 줄 모르고, 거기에 앉아 버린 불행한 부인처럼. 콤비네이션 샐러드는 예전에 좀 알고 지내던 아가씨를 연상시킨다. 이 연상은 아주 논리 정연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언제나 야채샐러드만 먹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삭아삭)...... 영어 리포트...... (아삭아삭)...... 끝냈어요?"

"...... (아삭아삭)...... 아니 아직...... (아삭아삭)...... 약간...... (아삭아삭)...... 남아 있는데."

 

나도 야채를 그런대로 좋아하는 편이라, 그녀를 만나면 그런 식으로 야채만 먹었다. 그녀는 이른 바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야채를 균형 있게 먹기만 하면 모든 게 잘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야채를 계속 먹는 한,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사랑으로 충만할 거라고 말이다. 왠지 <딸기백서(白書)>같은 이야기다.

"옛날 옛적에 물질과 기억이 형이상학적 심연에 의해 분리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라고 어느 철학자가 썼다.

1963년.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는 형이상학적인 뜨거운 모래사장을 소리도 없이 계속 걷고 있다. 아주 기다란 모래사장이며, 거기에는 잔잔하고 하얀 파도가 밀려들고 있다. 바람은 거의 없다. 수평선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 냄새가 난다. 햇볕이 뜨겁다.

나는 비치파라솔 밑에 드러누워, 아이스박스에서 캔 맥주를 꺼낸 다음 딴다. 그녀는 아직 걷고 있다. 햇볕에 그을린 늘씬한 그녀의 몸에는 원색의 비키니가 딱 달라붙어 있다.

 

"이봐요" 하고 나는 과감히 말을 걸어 본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녀는 말한다.

"맥주라도 마시지 않겠어요?" 하고 나는 권해 본다.

그녀는 약간 망설인다. 하지만 그녀도 모래사장을 거니느라 목이 마르고 지쳐 있다.

"좋아요."

그리고 우리는 비치파라솔 밑에서 함께 맥주를 마신다.

"그런데"하고 나는 말을 꺼낸다.

"확실히 1963년에도 아가씨를 보았어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꽤 오래된 이야기 아녜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요. 확실히 꽤 오래된 이야기예요."

그녀는 단숨에 맥주를 절반쯤 마시고, 캔에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본다. 그것은 보통의 캔 맥주 구멍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온 세계가 그리로 쑥 들어가 버릴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만났을지도 몰라요. 1963년이죠? 1963년...... 그래, 만났을지도 몰라요."

"아가씨는 나이를 먹지 않는군요?"

"나는 형이상학적인 여자인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무렵에 아가씨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어요. 아가씨는 언제나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을지도 몰라요. 바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을지도"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웃는 얼굴이 멋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약간 슬퍼 보였다.

나는 맥주를 마시려고 캔 맥주를 따서 그녀에게도 권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맥주를 그다지 많이 마실 수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부터 또 계속 걸어가야만 하거든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계속 걸으면, 발바닥이 뜨겁지 않아요?"

"괜찮아요. 내 발바닥은 아주 형이상학적이거든요. 한번 보시겠어요?"

"네."

그녀는 날씬한 다리를 뻗어, 발바닥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확실히 멋있고 형이상학적인 발바닥이었다. 나는 거기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 보았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녀의 발바닥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파도 소리까지 굉장히 형이상학적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차가워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태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마저 정지되어 있었다. 마치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고등학교의 복도를 연상하곤 합니다. 왜일까요?" 하고 나는 과감하게 물었다.

"인간의 본질은 복합성에 있어요. 인간 과학의 대상은 객체가 아니라, 신체 속에 받아들여진 주체에 있죠."

"음."

"아무튼 살아가세요. 살아가요, 살아가요. 그뿐이에요. 계속 살아가는 게 중요해요. 나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어요. 정말로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어요. 나는 단지 형이상학적인 발바닥을 가진 여자에 불과해요."

그리고 1963년.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는 넓적다리에 묻은 모래를 털고 일어선다.

 

"맥주, 정말 고마워요."

"천만에요."

 

이따금 어쩌다가 지하철 안에서 그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고, 그녀도 나를 알고 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때는 맥주를 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라고 말하는 듯 한 미소를 내게 보내온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말을 주고받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든다. 어디서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틀림없이 어딘가 먼 세계의 기묘한 장소에 그 매듭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매듭을 상상해 본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복도에 조용히 가로놓여 있는 나의 의식의 매듭.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여러 가지 일들이 조금씩 그리워진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나와 나 자신을 잇는 매듭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언젠가는, 나는 먼 세계의 기묘한 장소에서 나 자신을 만날 것 같다. 그리고 그 곳이 될 수 있으면 따스한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거기에 차가운 맥주 몇 병이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거기서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주체는 객체고, 객체는 주체다. 그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완전히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틀림없이 세계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1963년.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는 지금도 뜨거운 모래사장을 계속 걷는다. 마지막 한 장의 레코드가 다 닳아 버릴 때까지,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걷는다.

'무라카미하루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킬로미터를 뛰고 난 뒤에 마시는 맥주  (0) 2012.12.27
런어웨이  (0) 2012.12.27
스파게티 공장의 비밀  (0) 2012.12.27
캥거루 통신  (0) 2012.12.27
거울 속의 저녁노을  (0) 201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