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42킬로미터를 뛰고 난 뒤에 마시는 맥주

chocohuh 2012. 12. 27. 16:20

봄이 가까워 오면 왠지 모르게 장거리 경주에 참가하고 싶어져서, 몇 일전 '아스카 히나마쓰리 고대 마라톤'에 출전했다. 스타트 지점은 아스카의 이시부타이 앞으로, 오니노마나이타와 아스카 절, 타카마쓰 고분 같은 곳을 바라보며 42킬로미터를 주파하는 꽤 즐거운 코스였다. 날씨도 좋았고, 따뜻해서 이시부타이 옆에 벌렁 누워 필립 로스의 <해부학 강의>를 읽으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몸과 마음이 노곤하게 풀려 왔다. 이제 봄이다.

 

풀 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은 이것으로 세 번째지만, 지난 대회가 1983 년의 호놀룰루였으므로 대략 2년 만에 42킬로미터를 뛰는 셈이다. 호놀룰루 전해에는 아테네에서 역시 완주했고 10킬로미터, 20킬로미터의 경주에도 별일이 없으면 이따금 참가했지만, 호놀룰루 대회가 끝난 뒤에는 좀 생각한 바가 있어서 얼마 동안 레이스에 출전하는 건 삼가고 혼자서 느긋하게 뛰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완주를 했어도 세 시간 반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 '극히 평범한' 아마추어 주자이므로 그렇게 잘난 척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도 굳이 개인적인 감상을 묻는다면, 이름 있는 시민 마라톤 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거대해 지고 있고, 어떤 종류의 대회는 좀 지나치다 싶게 소란스럽다.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이 마구 설쳐 대는(실제로 이런 표현이 딱 어울린다) 호놀룰루 대회는 제쳐 두고라도, 좀 이름 있는 대회다 싶으면 참가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상품이 있거나, 기념 티셔츠를 선물로 주기도 하고, '달리기 동호회'에서 똑같이 맞춘 옷을 입고 노보리(역주: 좁고 긴 천의 한 끝을 장대에 매달아 세운 것)까지 치켜들고 우르르 몰려들거나, 그럴싸한 '완주증'을 발급하기도 하고, 길기만 할 뿐이지 별 의미도 없는 개회식, 폐회식을 거행하는 등, 아무래도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아진 듯하다. 물론 그저 놀이에 불과하다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그런 점들이 퍽 성가셔서 그런데 그런 세세한 모습들이 문학상 파티랑 어쩌면 이다지도 비슷한 걸까? 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당분간 삼가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회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달렸던 이름도 없는 10킬로미터 대회다. 이 대회는 주말 아침에 포트맥 강가의 출발 지점에 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참가할 수 있는 지극히 부담 없는 대회로, 물론 권위도 없다. 참가자들은 50~60명 정도로, 나이도 천차만별, 모두들 자기 멋대로 입고 나와 삼삼오오 모여 있다. 안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참가비 2달러(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를 내면 "네, 저쪽에 있는 오렌지 주스는 마음껏 드십시오. 이쪽에 있는 롤빵도 마음대로 드시고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참가비를 냈다는 증거로 손에 스탬프를 찍고는 노트에 주소와 성명을 적는다. 출전번호니 표장이니 하는 건 일절 없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자, 준비……. 땅" 하고 10킬로미터를 달릴 뿐이다. 달리기가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 몇 분 몇 초입니다"라고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는 꿀꺽꿀꺽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롤빵을 먹으면서 마지막까지 앞뒤를 다투었던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물론 호놀룰루나 오메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호놀룰루는 나름대로 즐거웠고, 오메는 가능하면 한 번쯤 달려 보고 싶다. 그래도 나는 워싱턴 D.C. 대회처럼 심플하고 꾸밈없는 대회에서 뛰는 것이 아마추어 주자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원점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일본 각지에서 미니 호놀룰루 마라톤을 출현시켜야 할 필요성 따위는 전혀 없는 것이다. 제대로 된 코스와 정확한 시계, 물의 적당한 공급과 주최자의 따뜻한 배려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대회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스카 마라톤'은 실제로 달려 보니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려운 코스였다. 아스카를 걸어서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근방은 꽤 굴곡이 심해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다음 고개가 시작되어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차이가 약 100미터 정 도나 된다. 그러니까 평지에서 달릴 때의 감각으로 뛰다 보면, 후반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게 된다. 나는 원래 언덕길에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니지만, 요사이 진구 가이엔이나 쇼난의 자전거 도로 같이 평탄한 코스만 달려서 35킬로미터를 넘었을 무렵부터는 언덕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결국 오르막길에서는 걸어 올라가고 말았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부터 다시 착실하게 크로스컨트리로 단련해서 가능하다면 다시 한 번 이 코스에 도전해 보고 싶다.

 

기록이야 어찌 되었든, 42킬로미터를 다 뛰고 난 뒤에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시는 맥주 맛이란 그야말로 최고다. 이 맛을 능가할 만큼 맛있는 것을 나는 달리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개 마지막 5킬로미터 정도는 "맥주, 맥주"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달리게 된다. 이렇게 가슴속까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42킬로미터라는 아득한 거리를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어떨 때는 너무나 잔인한 조건인 듯싶게도 느껴지고, 어떨 때는 지극히 정당한 거래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요즘 필립 로스의 소설이 갑자기 재미있어졌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 하나뿐일까? 그렇게 재미있다는 평판도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무라카미하루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K  (0) 2012.12.28
인터뷰  (0) 2012.12.28
런어웨이  (0) 2012.12.27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0) 2012.12.27
스파게티 공장의 비밀  (0) 201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