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WEGIAN WOOD – written by John Lennon
노르웨이의 숲 - 존 레논 작사
예전에 나는 한 여자를 소유했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소유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녀는 내게 자기 방을 보여 줬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길 권했고
어디 좀 앉으라고 말했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 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며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밤 두 시까지 이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러는 거야
"잠잘 시간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흥분한다고 말했어.
그러곤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지.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목욕탕으로 들어가 잠들어 버렸어.
눈을 떴을 때,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 소설의 원제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의 원색적인 욕망과 절망적인 상실의 갈등을 노래한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 <노르웨이의 숲>을 상징적으로 쓴 것임.
제 1 장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들,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 BMW의 광고판 등 이런저런 것들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의 배경처럼 보였다. 아, 또 독일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 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언제나처럼 나를 어지럽혔다. 아니, 다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며 뒤흔들었다.
나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몸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독일인 스튜어디스가 내 앞으로 오더니 어디가 불편하냐고 영어로 물었다. 괜찮다, 좀 현기증이 났을 뿐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생긋 웃으며 가버렸고, 음악은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의 상공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기억들을.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사람들이 좌석 벨트를 풀고 가방과 옷가지 등을 선반에서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줄곧 그 초원 속에 있었다. 나는 풀 냄새를 맡았고,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을 느꼈으며, 새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1996년 가을이었고, 내가 곧 스무 살이 될 무렵이었다.
아까의 스튜어디스가 다시 와서 내 옆에 걸터앉더니 이제 좀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쩐지 좀 외로워졌을 뿐이에요(It's all right now, thank you. I only felt lonely, you know)."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요,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Well, I feel same way, same thing, once in a while. I know what you mean)."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좌석에서 일어나 매우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히(I hope you'll have a nice trip. Auf Wiedersehen)!"
"안녕히(Auf Wiedersehen)!" 하고 나도 말했다.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린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며칠인가 계속된 부드러운 비로, 여름 동안 쌓였던 먼지가 말끔히 씻겨 내려진 산은 깊고 선연한 푸르름을 머금고 있었고, 10월의 바람은 억새 잎을 한들한들 흔들고 있었으며, 기다란 구름이 얼음장처럼 투명한 창공에 떠 있었다. 하늘이 너무나 높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바람은 초원을 건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잔잔히 흔들고는 잡목 숲으로 빠져 나갔다.
나뭇잎들이 사각거리고,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로부터 들려오는 것만 같은, 희미하고 어렴풋한 울음 소리였다. 그밖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우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과도 마주치질 않았다. 다만 빨간 새 두 마리가 초원 속에서 무엇인가 겁먹은 듯 날아올라, 잡목 숲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걸어가면서 나오코는 내게 우물 이야기를 해 주었다.
기억이란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 내가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는 느낌도 없었고, 더구나 18년 후에 그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에겐 그런 풍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건 아름다운 한 여인에 대해 생각했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역주:갈고리 모양의 장난감으로, 던지면 되돌아온다)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몹시 복잡한 곳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에 마음을 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의 뇌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초원의 풍경이 아닌가. 풀 냄새, 차가움을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우선 먼저 떠오른다. 너무도 선명하게. 그것들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그 하나하나가 손가락으로 만져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그녀도 나도 없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해 보이던 그때의 그녀와 나, 그리고 나의 세계는 모두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지금의 나로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이다.
물론 시간만 들이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는 있다. 조그맣고 차가운 손, 산뜻하고 곧은 머리 결, 부드럽고 동그란 귓불, 그 바로 밑에 있는 조그마한 검은 점, 겨울이면 자주 걸치고 다니던 우아한 카멜 코트, 언제나 상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질문하는 버릇, 이따금 무슨 영문인지 떨리는 듯하던 목소리(마치 강풍이 부는 언덕 위에서 재잘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미지를 하나하나 쌓아 가면 문득 자연스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먼저 옆얼굴이 떠오른다. 그건 아마도 나와 그녀가 언제나 나란히 걸어 다녔던 탓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언제나 그녀의 옆얼굴이다.
그 다음에 그녀는 나를 보며 생긋 웃고, 갸웃이 고개를 기울여 말을 걸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마치 맑은 샘물을 번뜩 헤치며 가는 작은 물고기의 그림자라도 찾아내려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내 머리 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기까지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거기에 필요한 시간은 점점 길어지게 된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처음엔 한 5초면 떠올랐는데, 그것이 10초가 되고 30초가 되고 1분이 된다. 마치 저녁 무렵의 그림자처럼 그것은 자꾸만 길어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땅거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의 기억은 확실히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마치 내가 그 옛날 나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풍경만이, 그 10월의 초원 풍경만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풀이 되풀이되어 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나의 머리 어느 한 부분을 집요하게 걷어차고 있다.
이봐, 일어나지 못해? 난 아직도 여기 있어. 일어나! 일어나서 생각해 봐! 왜 내가 아직도 여기 있는가 하는 그 이유를. 아픔은 없다. 아픔은 전혀 없다. 걷어찰 때마다 공허한 소리만 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그러나 함부르크 공항의 루프트한자 비행기 안에서 그것은 여느 때 보다도 오래, 여느 때보다도 세차게 내 머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일어나라, 생각해 보라, 하고.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 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무슨 이야길 했던가?
그렇다. 그녀는 내게 들판에 있는 우물 이야길 했다. 그런 우물이 정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 안에밖엔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그 어두운 나날에 그녀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실을 뽑듯 자아낸 다른 수많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녀가 그 우물 이야기를 해준 다음부터, 나는 그 우물 모습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실제로 내 눈으로 본 것도 아닌 우물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선 분리할 수 없는 일부로 그 풍경 속에 뚜렷하게 붙박혀 있다.
나는 그 우물의 모습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땅 밑으로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 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돌들은 비바람을 맞아 희끄무레하게 변색됐고, 여기저기 틈이 벌어지고 무너져 내려 있다. 작은 녹색 도마뱀이 그런 돌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몸을 기울여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아도 그밖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나로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그 우물이 아무튼 지독하게 깊다는 사실뿐이다. 어림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깊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암흑이-이 세상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암흑이-가득 차 있다.
"그건 정말-정말 깊단 말예요" 하고 그녀는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 가면서 말했다.
그녀는 가끔씩 그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어휘를 골라 찾으면서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깊어요.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 진 아무도 알지 못해요. 이 들판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내 얼굴을 보면서 정말예요, 하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잖아.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는 진 아무도 모른다.....그럼 거기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겠죠. 쉬익-풍덩. 그걸로 끝장이죠, 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가끔 일어나요. 2년 또는 3년에 한 번쯤.....어떤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서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근처 사람들은 말하죠. 들판의 우물에 빠진 거라고요."
"별로 좋은 죽음은 못되는 것 같군."
"끔찍한 죽음이죠."라고 말하고, 그녀는 외투에 붙은 풀잎들을 털었다. "그냥 목뼈라도 부러져 깨끗이 죽어 버리면 좋겠지만, 어쩌다가 발을 삔 정도로 끝난다면 정말 난처하거든요. 소리소리 질러 보아도 누구 하나 듣는 사람도 없고, 누군가 발견해 줄 가망도 없고요. 사방엔 지네나 거미가 우글우글하고, 거기서 죽어 간 사람들의 해골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어둡고 침침하고.....그리고 저 높이 머리 위엔 빛의 동그라미가 마치 겨울 달처럼 조그맣게 떠 있겠죠. 그런 곳에서 혼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누군가가 찾아내어 울타리를 만들어야겠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우물은 발견되지 않아요. 그러니 제대로 난 길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그래야겠지"
그녀는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더니 내 손을 쥐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당신은 아무 염려 말아요. 당신은 어두운 밤에 이 주변을 무작정 걸어 다닌다 해도, 절대로 그 우물에 빠지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과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 그걸 알지?"
"난 알 수 있어요. 그냥 알아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난 잘 알아요. 이유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느끼는 거예요.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당신과 꼭 붙어 있으면 말예요, 난 전혀 무섭지 않아요. 어떤 나쁜 일이든 어두운 일이든, 나를 유혹하려 하질 않는 거예요."
"그럼 문제는 간단하군. 줄곧 이렇게 하고만 있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거-진심이에요?"
"물론 진심이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은 채,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묵직한 액체가 이상한 모양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발돋움 하더니 내 볼에다 살며시 볼을 대었다. 그것은 한순간 가슴이 막혀 버릴 만큼 뜨겁고 멋진 동작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기쁘지 뭐예요, 정말" 하고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어째서?"
"그건 안 될 일이니까요. 잔혹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말을 하다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대로 걷기만 했다. 갖가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역시 말없이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건.....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도, 또 내게도."
"왜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 하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누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킨다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가령 내가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회사에 다니겠지요. 그럼 당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엔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 줄까요? 당신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엔 또 누가 나를 지켜 주지요?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붙어 다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것은 좋지 못해요. 그런 것은 인간관계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내게 싫증을 느끼고 말 할 거예요. '내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여자를 돌보는 일뿐이란 말인가' 하고. 난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일생 동안 계속되는 건 아냐. 언젠가는 끝나. 그것이 끝나는 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때는 어쩌면 나오코가 나를 도와주게 될지도 모르지. 우리는 손익 계산표에 맞추어 살고 있는 건 아냐. 만약 나오코가 지금 당장 나를 필요로 하면 나를 쓰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어째서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에서 힘을 좀 빼면 몸이 가볍게 돼."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죠?" 하고 그녀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뭔가 아주 잘못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죠?" 하고 그녀는 꼼짝도 않고 발밑의 땅을 보면서 말했다. "어깨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그건 말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산산 조각이 난단 말이에요. 나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한 번 힘을 빼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고요.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려가 버릴 거예요. 어째서 그걸 모르는 거죠?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 준다는 말을 할 수가 있죠?"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난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혼란에 빠져 있어요. 어둡고 차갑고 혼란스럽고.....어째서 그때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 거죠? 왜 나를 내버려두지 못했지요?"
우리는 너무나도 조용한 소나무 숲속을 걷고 있었다. 길에는 늦여름에 죽은 매미가 바삭바삭하게 말라 흩어져 있어서, 그것이 구두 밑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듯이 땅을 보면서 천천히 소나무 숲 속을 걸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미안해요. 난 다만 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니까요."
"난 아직은 정말로 나오코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진 않아.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무엇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 하지만 만일 시간만 있다면 나는 나오코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나오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거기에 멈춰 서서 정적 속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구두 끝으로 죽은 매미나 솔방울을 굴리기도 했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우러러 보기도 했다. 그녀는 외투 주머니에다 두 손을 집어넣은 채, 무엇을 눈여겨보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었다.
"이봐요, 와타나베. 날 좋아해요?"
"물론이지."
"그럼 내 부탁을 두 가지만 들어줄래요?"
"세 가지라도 들어주지"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그만이에요. 두 가지면 충분해요. 하나는 당신이 이렇게 날 만나러 와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정말 기쁘고, 정말 구제받은 거 같아요.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해도 말이에요."
"또 만나러 올 거야. 다른 하나는 뭐지?"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요?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었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은 언덕 같은 곳으로 오르더니 소나무 숲에서 나와, 비스듬한 비탈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두세 걸음 뒤에서 걸어갔다.
"이쪽으로 와, 주위에 우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방긋이 웃으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걸어갔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거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고말고. 내가 나오코를 잊을 까닭이 없지."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멀어져 가는 것이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미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어쩌면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아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싸여 부드러운 먼지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것이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미 엷어져 버렸고, 지금도 시시각각 엷어져 가는 그 불완전한 기억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뼈라도 핥는 심정으로 나는 이 글을 써 나가고 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이러는 수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결국에는 -하고 나는 생각한다.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나는 보다 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녀가 나를 향해 '나를 잊지 말아요' 하고 당부했는지 그 이유도 나는 지금 알 것 같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녀는 나를 향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요. 내가 존재했다는 걸 기억해 줘요."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글프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2 장 죽음이 찾아왔던 열일곱 살의 봄날
옛날 일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도쿄에 대해 무엇 하나 아는 게 없었고 혼자서 사는 것도 처음이어서, 부모님이 그 기숙사를 구해 주었다. 거기라면 식사도 해결되고 갖가지 시설도 갖춰져 있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열여덟 살 소년일지라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기숙사의 생활비는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어떻든 이불과 전기스탠드만 있으면 무엇 하나 사들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되도록 아파트를 빌려 혼자 마음 편히 살고 싶었지만, 사립대학의 입학금이며 수업료며 다달이 드는 생활비를 생각하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도 결국은, 사는 곳쯤 어딘들 어떠냐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 기숙사는 전망이 좋은 높은 지대에 있었다. 대지는 넓었고, 주위는 높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싸여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솟구쳐 있었는데, 수령이 적어도 150년은 된다고 했다. 나무 밑에 서서 위를 쳐다보면, 하늘은 온통 그 푸른 잎들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포장길은 그 느티나무를 우회하듯 구부러져, 거기서 다시 기다란 직선으로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마당 양쪽에는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 두 동이 나란히 서 있다. 창이 많이 달린 커다란 건물인데, 아파트로 개조한 교도소거나 교도소를 개조한 아파트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결코 불결하진 않으며 어두운 인상도 없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 쪽에선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창문의 커튼 어느 방이나 똑같은 크림색으로 빛이 바래더라도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무난한 색깔이다.
포장길을 곧바로 걸어가면 2층으로 된 본관 건물이 있다. 12층에는 식당과 커다란 목욕탕, 2층에는 강당과 몇 개의 집회실, 그리고 무엇에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귀빈실까지 있다. 본관 건물 옆에는 3층으로 된 제 3기숙사 건물이 있다.
초록빛 잔디로 뒤덮인 드넓은 마당에는 스프링클러가 햇볕을 반사하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분관 건물 뒤편에는 야구와 축구 겸용 운동장이 있고, 테니스 코트도 여섯 개나 있다. 있을 건 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수상한 냄새가 있었다. 기숙사는 지극히 우익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체불명의 재단 법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그 운영 방침은-물론 내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만-매우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기숙사 안내 팸플릿과 기숙사 생활 규칙을 읽어보면 그 대충을 알 수 있다. '교육의 근간을 추구하여, 국가에 있어서 유용한 인재의 육성에 힘쓴다.'라는 것이 이 기숙사의 창설정신이며, 그래서 '그 정신에 찬성 여러 재계 인사들이 사재를 털어.....' 라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얼굴인 셈인데, 그 이면의 일은 하나같이 확실하지 않다.
정확한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단순히 세금을 조금 내기 위한 수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름을 파는 행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기숙사 설립이란 명목으로 이 일등지를 사기나 다름없는 수법으로 손에 넣은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더욱 더 깊은 속셈이 있을 거라는 사람도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이 기숙사 출신자로 정재계에 지하 세력을 만들고자 하는 게 설립자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기숙사에는 학생들 중의 톱 엘리트들을 모아 놓은 특권적인 클럽 같은 게 있어서, 나도 자세한 건 잘 알지 못하지만 한 달에 몇 번씩 그 설립자를 참석시켜 연구회 같은걸 열고 있으며, 그 클럽에 들어가 있는 한 취직 걱정은 없다고들 했다.
그런 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나로선 판단할 길이 없지만, 그러한 설들은 '어쨌든 여기는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 곳이다'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튼 1968년 봄부터 1970년 봄까지 2년 동안 나는 그 수상쩍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어째서 그런 수상쩍은 곳에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그건 그다지 대수로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국가도 울린다. 스포츠 뉴스에서 행진곡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국기 게양에서 국가를 떼놓을 수는 없다. 국기 게양대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어서 어느 동의 창문에서도 보이게끔 되어있다.
국기 게양은 동쪽 동-내가 들어 있는 기숙사다-사감의 임무다.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예순 살 안팎의 남자였다. 사뭇 뻣뻣해 보이는 머리에는 간간이 흰머리가 섞여 있고, 볕에 탄 목 줄기에는 기다란 상처 자국이 있다.
그 사감이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역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의 곁에는 국기 게양을 도와주는 조수 같은 학생이 늘 따랐는데, 그 학생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다. 짧게 깎은 머리에다 늘 학생복을 입고 있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어느 방에서 생활하는지도 모른다.
식당에서든 목욕탕에서든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다. 진짜 학생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학생복을 입고 있으니 역시 학생일 것이다.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조수는 문제의 '나카노 학교'와는 반대로 키가 작고 오동통하며 피부가 희다. 이 음산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이 매일 아침 여섯 시에 기숙사 마당에서 국기를 게양하는 셈이다.
기숙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호기심에서 일부러 여섯 시에 일어나 이 애국적 의식을 곧잘 구경하곤 했다.
아침 여섯 시면 라디오의 시보가 울림과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마당에 나타난다. '학생복'은 물론 학생복 차림에 검정 가죽구두, '나카노 학교'는 잠바에다 흰색 운동화 차림이다. '학생복'은 얇은 오동나무 상자를 들고 있다. '나카노 학교'는 소니 제품인 휴대용 녹음기를 들고 있다. '나카노 학교'가 녹음기를 게양대의 발밑에 놓고, '학생복'이 오동나무 상자를 연다. 상자 속에는 반듯하게 개어 넣은 국기가 들어 있다. 그리고 '학생복'이 '나카노 학교'에게 정중하게 국기를 내민다. '나카노 학교'가 도르래 줄에 국기를 매고, '학생복'이 녹음기의 스위치를 누른다.
기미가요(일본 국가)가 울리는 동안, 국기는 매끄럽게 깃봉을 따라 올라간다.
"사사레 이시노오-"하는 대목에서 깃발은 깃봉의 바로 중간에 이르고, "마아데-"하는 대목에 이르면 정상에 닿는다. 그러면 두 사람은 등을 꼿꼿이 펴고는 '차려' 자세로 국기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하늘이 맑게 개고 바람이 알맞게 분다면 이거야말로 굉장한 광경이다.
저녁 무렵 국기 하강 식 때도 대체로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데, 단지 그 순서만 아침과 정반대일 뿐이다. 국기는 매끄럽게 미끄러져 내려와 오동나무 상자 속에 간직된다. 때문에 밤에는 국기가 펄럭이지 않는다.
밤에는 어째서 국기가 내려지는지, 나는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밤사이에도 국가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선로 공사장 인부들이며 택시 기사, 그리고 바의 호스티스, 야근하는 소방대원, 빌딩의 야간 경비원들..... 그처럼 밤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래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사실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아마 누구도 그런 일엔 관심조차 없을 테니까. 관심을 가진다 해도 아마 나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나 역시 어쩌다 문득 이렇게 생각했을 뿐, 그것을 깊이 파고들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기숙사의 방 배치는 원칙적으로, 1,2학년은 한 방에 두 명씩, 3,4학년은 독방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두 명이 거처하는 방은 다다미 6장짜리 방을 길게 한 정도의 넓이로서, 안쪽 벽에는 알루미늄 틀 창문이 달려 있었고, 창문 앞에는 서로 등을 대고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입구 왼쪽에는 철제 2단 침대가 있었는데, 가구들은 모두 단순하고 탄탄하며 묵중한 것들이었다.
책상과 침대 이외에는 사물함이 두 개, 자그마한 커피 테이블이 하나, 그리고 붙박이 선반이 있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 해도 시적인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대체로 선반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헤어 드라이어, 전기 포트, 그리고 전열기와 인스턴트 커피 혹은 홍차, 각설탕, 라면을 끓이기 위한 냄비와 간단한 식기가 몇 개 갖추어져 있는 게 보통이었다.
회칠을 한 벽에는 대중 잡지 '헤이본 펀치'의 핀업(인기 있는 미인 사진)이나 어디선가 뜯어 온 포르노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개중에는 장난으로 돼지가 교미하는 사진을 붙여 놓은 학생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예외 중의 예외며, 벽에 붙어 있는 것은 거의가 벌거벗은 여자나 젊은 여가수, 여배우의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책꽂이에는 교과서며 사전, 소설책 따위가 꽂혀 있었다.
남자들만 있는 방이라서 대체로 몹시 지저분했다. 휴지통 밑바닥에는 곰팡이 핀 귤껍질들이 들러붙어 있고, 재떨이로 쓰는 빈 깡통에는 담배꽁초가 10센티미터나 쌓여 있어서, 그것이 타오르면 커피나 맥주를 끼얹어 끄기 때문에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식기들은 어느 것이나 덕지덕지 때 투성이에다 뭔지 모를 것들이 달라붙어 있고, 방바닥에는 라면 봉지하며 빈 맥주병, 그리고 무슨 뚜껑 같은 이런 저런 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빗자루로 쓸어 휴지통에 버린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않는 일이다.
바람이 불면 바닥에서 먼지가 보얗게 피어오른다. 어떤 방에서건 고약한 냄새가 떠돈다. 방에 따라 그 냄새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냄새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모두가 같은 땀 냄새와 먼지다.
세탁물은 모두가 하나같이 침대 밑에 쑤셔 넣어 둔다. 정기적으로 이불을 볕에 말리는 학생도 전혀 없어서, 이불은 언제나 땀에 흠뻑 절어 구제 불능의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그런 카오스(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이나 무질서) 속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나는 지금도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내 방은 시체 안치소만큼이나 청결했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고 창문 유리에도 티 하나 없으며, 이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볕을 쪼였고, 연필은 연필꽂이에 질서 정연하게 꽂혀 있었으며, 커튼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빨았다. 내 동거인의, 병적일 정도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저 녀석은 커튼까지 빤다고"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커튼은 이따금씩 빨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커튼이란 반영구적으로 창문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만 그들은 믿고 있었다.
"저 녀석은 성격이 이상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모두들 '나치'나 '돌격대'로 부르게끔 되었다.
내 방에는 핀업 걸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암스테르담 운하 사진에 붙어 있었다. 내가 누드 사진을 붙이니까, 그가 "이봐, 와타나베. 나, 난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그것을 떼어 버리고 그 대신 운하 사진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나도 뭐 특별히 누드 사진을 붙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별다른 이의는 제기 하지 않았다. 내 방에 놀러 온 친구들은 다들 그 운하 사진을 보고는, "아니 이건 뭐야?"하고 물었다.
"돌격대는 이걸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한다고."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모두들 정말로 그 말을 믿어 버렸다. 그리고 모두들 너무나 쉽사리 그걸 믿어 버리는 바람에 나까지도 정말 그럴지 모르겠다고 믿어 버리게끔 되었다.
그들은 '돌격대'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나를 동정했지만, 나 자신은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내 주변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한 그는 나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나로선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
청소는 그가 도맡아 했고, 이불도 그가 내다 널었으며 쓰레기도 그가 처리해 주었다. 내가 바빠서 사흘쯤 목욕을 거르면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보고는 목욕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고, 이발소에 갈 때가 되었다느니, 수염을 깎아야 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해주곤 했다.
난처한 것은 벌레라도 한 마리 발견하면 온 방안에 살충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일인데, 그럴 때면 나는 옆방의 '카오스'속으로 대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격대'는 어느 국립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난 말이야,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하니?" 하고 내가 물었다.
"그래, 대학을 나오면 국토 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이지, 지, 지도를 만들 거야."
과연 세상엔 여러 가지 희망이 있고 인생의 목적이 있구나 싶어, 나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그것은 도쿄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감탄한 일 중의 하나였다. 하긴 지도 만들기에 흥미와 열의를 가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없다면-너무 많이 있을 필요도 없겠지만-그건 좀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도'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더듬거리는 사람이 국토 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쩐지 좀 안 어울렸다. 그는 경우에 따라 말을 더듬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지도'라는 말만 나오면 백 퍼센트 더듬거렸다.
"너, 넌 뭘 전공하고 있지?" 하고 그가 물었다.
"연극"
"연극이라니, 신파극 같은 거?"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말이지, 희곡을 읽거나 하면서 연구를 하는 셈이지. 라신이라든가 이오네스코라든가 셰익스피어라든가....."
"셰익스피어 이외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하고 그는 말했다. 나 역시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만 강의 요강에 그렇게 적혀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별로 좋아하는 건 아냐."
그 대답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 듯 했다. 혼란에 빠지면 그는 더듬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던 거지"하고 나는 설명했다. "민족학이든 동양사든 무엇이든 상관없었어. 다만 어쩌다 마음이 내킨 것이 연극이었다, 그것뿐이야."
하지만 그 설명도 물론 그를 이해시키지는 못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는 정말로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 내 경우는 지, 지도가 좋아서 지, 지, 지도를 공부하거든. 그 때문에 일부러 도쿄의 대학에 들어왔고, 하, 학비 송금을 받고 있는 거야. 그런데 너는 그렇지가 않다니....."
그가 한 말이 타당한 논리였다. 나는 설명하기를 단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냥개비로 제비를 뽑아 2단으로 된 침대의 아래위를 결정했다. 그가 위고 내가 아래였다.
그는 늘 흰 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감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키가 컸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학교에 갈 때는 언제나 학생복을 입었다. 구두도 가방도 하나같이 까만색이었다. 보기만 해도 우익 학생의 모양새였고, 그렇기 때문에 주위 친구들이 그를 돌격대로 불렀던 것이지만, 사실 그는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옷을 선택하는 게 귀찮아 늘 그런 차림으로 다닐 뿐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해안선의 변화라든가, 새로운 철도터널의 완성이라든가 하는 그런 종류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 일이 화제에 오르면 그는 더듬거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쪽에서 달아나거나 잠들어 버릴 때 까지 계속 떠들어 댔다.
매일 아침 여섯 시면 그는 '기미가요'를 자명종 시계 삼아 일어났다. 이거 보란 듯이 수선을 떠는 저 국기 게양식도 전혀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옷을 입은 다음에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다. 세수하는 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빨을 하나하나 뽑아서 닦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방으로 돌아오면 탁탁 소리를 내면서 구겨진 수건을 팽팽하게 펴서는 스팀위에 널어 말리고, 칫솔과 비누를 선반 위의 제자리에 정리한다. 그러고 나서 라디오를 켜고는 라디오 체조를 시작한다.
나는 대개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아침에는 여덟 시경까지 푹 자기 때문에, 그가 일어나서 부스럭거리거나 라디오를 켜놓고 체조를 시작해도 정신없이 잠을 잔다. 하지만 그럴 때도 라디오 체조가 도약 부분에 다다를 때엔 반드시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뛸 때마다-그것도 참 높이도 뛰었다-
그 진동으로 해서 침대가 삐걱삐걱 오르락내리락했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을 나는 꾹 참았다.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안하지만 라디오 체조는 옥상이나 어느 다른 곳에서 하는 게 좋겠어."하고 나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거 시작하면 잠이 다 깨 버린다고."
"하지만 벌써 여섯 시 반이야"하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알고 있어, 그건. 여섯 시 반이란 말이지? 여섯 시 반은 내게는 아직도 잠을 자는 시간이야. 왜 그렇다는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돼 있다고."
"곤란해. 옥상에서 하면 3층애들이 불평할 거야. 여긴 아래층이 창고여서 아무도 불평할 사람이 없지만."
"그럼 마당에 나가 하라고, 잔디 위에서."
"그것도 안 돼. 내, 내 라디오는 트랜지스터가 아니거든. 저, 전원 없이는 사용할 수 없고, 또 라디오 음악 없이 체조를 할 수는 없잖아?"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라디오는 아주 낡은 전원 식이었고, 내 것은 트랜지스터였지만 FM만을 들을 수 있는 음악 전용이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럼 우리 타협을 하자고"하고 나는 말했다. "라디오 체조는 해도 좋아. 그 대신 그 뛰는 대목은 빼줘. 그건 너무 시끄러우니까. 그럼 됐지?"
"뛰, 뛰다니?"하고 그는 깜짝 놀란 듯 물었다. "그게 뭐니?"
"뛰는 게 뛰는 거지. 그 쿵쿵 뛰는 것 말이야."
"그런 것 없는데....."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꺼낸 말은 확실하게 해둬야겠다 싶어서, 나는 실제로 NHK 라디오 체조 첫 부분의 멜로디를 부르며 방바닥 위에서 쿵쿵 뛰어 보였다.
"보라고, 이거야. 분명히 있잖아?"
"그, 그래. 정말 있어. 미, 미처 몰랐어."
"그러니 그 부분만은 빼놓고 지나가는 것이 어때? 다른 대목은 다 참아 줄 테니까, 뛰는 부분만 빼서 내가 푹 자도록 해줄래?"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그건 안 돼. 하나만 뺀다는 건 말도 안 돼. 10년을 두고 하루같이 해왔기 때문이야. 시작만 했다 하면 무, 무의식중에 전부 하게 되거든. 한 대목을 빼면 저, 전, 전부 못하게 돼."
그는 참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손쉬운 것은 그 보기 싫은 라디오를 그가 없는 사이에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이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지옥의 뚜껑을 열어 놓은 것 같은 소동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돌격대'는 자기의 소지품이라면 끔찍이도 소중히 생각하는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잃고 멍청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자니까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와,와타나베. 함께 일어나서 체조를 하면 좋을 텐데"하고 말하더니 그는 그래도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가 버렸다.
내가 '돌격대'와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자 나오코는 킥킥 웃어댔다. 우스갯소리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은-그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지만-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와 나오코는 요쓰야 역에서 전철을 내려, 선로 옆 둑을 따라 이치가야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5월 중순경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침나절에 후드득후드득 오락가락하던 비도 낮이 되자 완전히 개고, 나직이 덮여 있던 음산한 비구름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쫓기듯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산뜻한 벚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었다.
햇살은 이미 초여름이나 다름없었다. 스쳐 가는 사람들은 스웨터며 외투며 벗어, 어깨에 둘러메거나 팔에 걸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는 누구나 모두 행복해 보였다. 둑 저편에 보이는 테니스 코트에서는 젊은 남자가 셔츠를 벗고 반바지 바람으로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수녀만이 까만 겨울 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어서, 그녀들 주위에만은 여름 햇살이 아직도 미치지 않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듯 두 수녀는 만족스런 얼굴로 햇볕 아래서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15분쯤 걸으니 등에 땀이 배었다. 나는 두터운 면 셔츠를 벗고 티셔츠 바람이 되었다. 나오코는 엷은 회색빛 트레이닝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에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세탁을 해서 잘 손질한 듯 무척 느낌이 좋게 색깔이 바래 있었다.
훨씬 전에 그와 똑같은 셔츠를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러나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녀에 대해서 당시,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공동생활은 어때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즐거워요?"
"잘 모르겠어. 이제 한 달이 좀 지났을 뿐이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아. 적어도 견디지 못할 일은 없으니까."
그녀는 음료수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 모금의 물을 마시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았다. 그리고 몸을 굽혀 주의 깊게 구두끈을 고쳐 맸다.
"어때요, 나도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동생활?"
"그래요."
"글쎄, 어떨까. 그런 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거북스런 일이 어느 정도 있다면 있지. 규칙이 귀찮고, 돼먹지 않은 녀석이 으스대고, 동거인은 아침 여섯 시 반에 라디오 체조를 시작하고. 뭐 그런 일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특별히 신경 쓰일 건 없어. 여기밖에 지낼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런대로 지낼 수도 있지. 그저 그런 거야."
"그렇겠죠."하고 그녀는 수긍하더니,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는 뭔가 신기한 것이라도 들여다보듯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유심히 보니 그녀의 눈은 놀라우리 만큼 깊고 맑아 보였다. 그녀가 그처럼 맑은 눈을 갖고 있는 줄은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 볼 그런 기회도 없었다. 둘이서 걷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오래도록 이야기 한 것도 처음이었다.
"기숙사 같은 데 들어갈 생각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냥 좀 생각해 본 거예요. 공동생활을 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요. 그리고 그건 말하자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적당한 말이나 표현을 찾고 있었지만, 결국 그걸 찾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만 됐어요."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그녀는 다시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뒤에서 걸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거의 1년만의 일이었다. 1년 동안에 그녀는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다. 탐스럽던 볼은 살이 거의 빠졌고, 목덜미도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야위었다고는 하지만 뼈가 앙상하다든가 건강이 안 좋다든가 하는 그런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야윈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차분해 보였다. 마치 어딘가 비좁은 장소에다 살짝 몸을 숨기고 있는 사이에, 몸이 멋대로 가늘어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그 점에 대해 그녀에게 뭔가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다. 나와 나오코는 중앙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혼자서 영화라도 볼까 해서 나왔던 것이고, 나는 간다의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둘 다 특별히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녀가 내리자고 해서 우리는 전철에서 내렸다. 그것이 우연찮게 요쓰야 역이었을 뿐이다.
하긴 둘이서만 있게 되자 우리는 특별히 할 이야기도 별로 없었다. 왜 나오코가 전철에서 내리자는 말을 꺼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제란 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역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 걸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항상 1미터 정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물론 그 거리를 좁히려고 마음만 먹는 다면 좁힐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어색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나오코의 1미터쯤 뒤에서 그녀의 등과 곧고 검은 머리를 보면서 걸었다. 그녀는 커다란 갈색 머리핀을 꽂고 있어서 옆으로 향할 때마다 작고 하얀 귀가 보였다.
가끔 그녀는 뒤돌아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얼른 대답을 할 수 있는 말도 있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갈피가 안 잡히는 말도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들리던 들리지 않던 그런 것은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다 해버리고는 다시금 앞을 향해 계속 걸었다. 아무려면 어때,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체념했다.
하지만 산책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걸음걸이가 좀 지나치게 빠른 것 같았다. 그녀는 이이다 다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오호리바타로 나갔고, 다시 진보초의 교차점을 넘어서 오차노미즈 고개를 올라 그대로 혼고로 빠졌다. 그리고 전철 선로를 끼고 고마고메까지 걸었다. 상당한 거리였다. 고마고메에 이르렀을 때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평온한 봄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나오코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고마고메. 몰랐어? 우린 빙 돌아온 거야."
"왜 이런 데까지 왔죠?"
"나오코가 온 거야. 난 그저 뒤따라 왔을 뿐이고."
우리는 역 근처의 국수집에 들어가 가벼운 식사를 했다.
갈증이 나 있던 나는 혼자서 맥주를 마셨다. 주문하고부터 다 먹을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걷느라고 피곤해서 약간 힘이 빠져 있었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다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또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일요일인 오늘은 어떤 행락지든지 모두 인파로 차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요쓰야부터 고마고메까지 걸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매우 건강한 편인데." 하고 나는 국수를 다 먹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놀랐어?"
"응."
"이래봬도 중학교 시절엔 장거리 선수로 10킬로미터나 15킬로미터도 뛰었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등산을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일요일이면 등산을 했죠. 그리고 집 뒤가 바로 산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다리도 허리도 튼튼할 수밖에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래요. 다들 나를 연약한 여자로만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은 겉보기와는 다른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덧붙이듯 살짝 웃었다.
"미안하지만 난 꽤 지쳤어."
"미안해요, 온종일 끌고 다녀서."
"하지만 나오코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단 둘이서 이야기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 내려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어, 혹 괜찮다면-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란 뜻이지만-우리 또 만날 수 있을 까요? 물론 이런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처지?"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처지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내 놀람이 좀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잘 설명할 수는 없어요."하고 나오코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트레이닝셔츠 소매를 팔꿈치 까지 걷어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전등불이 그녀의 솜털을 고운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처지라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좀 더 다른 표현으로 말하려 했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서, 잠시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서 뭔가 적당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보는 것처럼. 하지만 물론 그런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고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상관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오코가 말하려는 그 뜻은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니까. 나 역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잘 설명할 수가 없어요." 하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늘 이런 게 계속되고 있어요. 빗나가거나 전혀 반대되는 말을 하거나 하죠. 그렇게 되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돼버려요.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쫓고 쫓기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한복판에 굉장히 굵은 기둥이 서 있어서 그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는 거예요. 꼭 알맞은 말이란 늘 또 다른 내가 품고 있어서, 이쪽의 나는 절대로 그걸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나오코는 얼굴을 들어 내 눈을 응시 했다.
"그런 느낌을 알 수 있어요?"
"많든 적든 그런 느낌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가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니까 초조해지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약간 실망한 것 같았다.
"그것과는 또 달라요." 하고 그녀는 말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만나는 건 아무 상관없어. 어차피 일요일에 늘 하릴없이 뒹굴고 있을 바에야 걷는 것도 건강에 좋고."
우리는 함께 야마노테선을 탄 후, 나오코는 신주쿠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탔다. 그녀는 고쿠분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어때요. 내 말투가 예전과 좀 달라졌어요?"하고 헤어질 무렵에 나오코가 물었다.
"좀 달라진 것도 같군. 하지만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자주 얼굴을 대했지만 그다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으니까."
"그래요." 하고 그녀도 그것을 인정했다.
"이번 토요일에 전화해도 괜찮아요?"
"좋아, 기다리고 있겠어."
처음으로 나오코를 만난 것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 해 봄이었다. 그녀도 역시 2학년으로, 미션 계통의 전통이 오랜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면 오히려 '품위 없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의 기풍 있는 학교였다.
내겐 기즈키라고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친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오코는 그의 애인이었다. 기즈키와 그녀는 거의 세상에 나올 때부터 소꿉친구로서 서로의 집도 200미터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여러 다른 소꿉친구 커플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관계도 매우 개방적이어서, 두 사람만 있고 싶다는 욕망은 그다지 강한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의 집을 방문해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도 하고 마작을 하기도 했다.
나와 더블데이트를 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나오코가 클래스메이트인 여자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 네 사람이 동물원에도 가고, 풀장에 가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오코가 데리고 오는 여자 아이들은 귀엽긴 했지만 내게는 좀 과분한 것 같았다. 나로선 다소 덜렁대더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립 고교의 클래스메이트인 여자 아이들이 성미에 맞았다.
나오코가 데리고 나오는 여자 아이들은, 그 귀여운 머릿속에서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녀들로서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기즈키는 나를 데이트에 끌어내기를 단념했고, 결국은 우리들 셋이서만 어딘가로 가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기즈키와 나오코와 나, 세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고 또 잘 어울려졌다. 다른 아이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어쩐지 어색해지곤 했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건 마치 내가 초대 손님이고, 기즈키가 유능한 진행자고, 나오코가 보조역할을 하는 텔레비전의 토크 프로그램 같기도 했다. 언제나 기즈키가 그 자리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는 그러는 것에 능숙했다.
기즈키는 확실히 냉소적인 경향이 있어서 남에게 교만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본성은 친절하고 공평한 사나이였다.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는 나오코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이야기를 해오고, 농담을 하고, 어느 한 사람이 따분한 느낌을 갖지 않도록 신경을 쓰곤 했다. 그리고 어느 쪽인가 오래도록 잠자코 있으면, 그쪽에게 말을 걸어서 상대의 이야기를 곧잘 끌어내곤 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참 힘들겠구나 싶었지만, 사실 그에겐 생각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에겐 그 자리의 분위기를 순간순간 포착하여 거기에 잘 대응해가는 능력이 있었다. 또 거기에 덧붙여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상대의 이야기에서 재미난 부분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좀 얻기 어려운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나는 나 자신이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고, 재미있는 인생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그는 나 외에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토록 머리가 명석하고 좌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어째서 그 능력을 좀 더 넓은 세계로 돌리지 않고 우리 세 사람만의 작은 세계로 집중을 하는 데 만족하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가 나를 친구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이를테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어서 기즈키가 일부러 주목해서 이야기를 걸어 올만한, 남보다 빼어난 그 무엇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내 마음이 맞아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치과 의사였는데, 훌륭한 수완과 비싼 치료비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 일요일에 더블 데이트하지 않겠니? 내 여자 친구가 여고생인데 예쁜 여자 애를 데리고 온다니까" 하고 알게 되자마자 이내 기즈키가 말했다.
"좋아"하고 난 대답했고, 그렇게 해서 나와 나오코는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와 기즈키와 나오코는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기즈키가 자리를 뜨는 바람에 두 사람만 남게 되면, 나와 나오코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나와 나오코 사이에 공통된 화제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마셔도 보고 탁자 위의 것을 만지작거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기즈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즈키가 돌아오면 그제야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오코도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나도 내가 이야기하기보단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단 둘이 있게 되면 나로선 어지간히 불편한 게 아니었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이야깃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기즈키의 장례식이 있은 지 2주일 쯤 뒤에, 나와 나오코는 딱 한 번 얼굴을 마주했다. 볼일이 좀 있어서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용건이 끝나고 나자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나는 몇 가지 화제를 찾아내 그녀에게 이야기를 걸어 보았지만, 이야기는 번번이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의 어조에는 어딘지 모가 나 있었다. 나오코는 나에 대해 어쩐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와 나오코는 헤어졌고, 그로부터 1년 후 중앙선 전철에서 딱 마주치기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나오코가 나에 대해 화를 냈던 건, 기즈키와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한 것이 그녀가 아니고 나였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나도 기즈키가 만난 마지막 상대가 그녀였더라면 하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며, 어떻게 생각한들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다.
그 5월의 기분 좋은 오후, 점심을 먹고 나자 기즈키는 내게 오후 수업을 빼먹고 당구나 치러 가자고 했다. 나도 특별히 오후 수업에 흥미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학교를 나서서 어슬렁어슬렁 고개를 내려가 항구 쪽까지 가서 네 게임을 쳤다.
처음 게임을 내가 가볍게 이기자, 그가 갑자기 진지해지는 바람에 남은 세 게임은 전부 내가 지고 말했다. 약속대로 내가 게임 비용을 지불했다. 게임을 하는 동안 그는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게임이 끝나자 우리는 차 한 잔씩을 마신 후 담배를 피웠다.
"오늘은 이상하게 진지하던데?"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오늘은 지고 싶지 않았어." 하고 기즈키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는 그날 밤, 자기 집 차고 안에서 죽었다. N360의 배기 파이프에 고무 호수를 잇고, 창문 틈을 테이프로 땜질을 한 채 엔진을 가동 시켰던 것이다.
그가 죽기 전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친척 병문안을 갔던 그의 부모가 돌아와서 차를 넣으려고 차고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라디오는 켜놓은 채였고, 와이퍼에는 주유소 영수증이 끼워져 있었다.
유서도 없었거니와 짐작되는 동기도 없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유로, 나는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라는 걸 당했다.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여느 때나 똑같았습니다, 하고 나는 조사하는 경찰관에게 말했다.
경찰관은 나에 대해서나 기즈키에 대해서나 그다지 좋은 인상은 갖지 못했던 것 같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당구나 치러 가는 그런 고교생들이라면, 자살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문에 자그마하게 기사가 실리고, 그걸로 사건은 끝났다. 빨간색의 그 N360은 처분되었다. 그리고 교실 그의 책상 위에는 얼마 동안 흰 꽃이 장식돼 있었다.
기즈키가 죽고 나서 고교를 졸업하기까지 한 10개월 동안, 나는 주위의 세계 속에 나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설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여자 아이와 사이가 좋아져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결국 반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것 하나 바라는 게 없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 싶은 도쿄의 사립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한 기쁨도 없이 입학했다. 그 여자아이는 내게 도쿄로 가지 말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튼 고베거리를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넌 나와 이미 자버렸으니,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라고 말하며 그녀는 울었다.
"그런 게 아냐."하고 나는 대꾸했다.
나는 그저 그곳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 기차 안에서, 나는 그녀의 좋은 부분이나 뛰어난 부분을 떠올리고 내가 참으로 몹쓸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하고 뉘우쳤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도쿄에 도착해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녹색 테이프를 발라 붙인 당구대나 새빨간 N360, 책상 위의 흰 꽃 같은 것들은 모두 깨끗하게 잊어버리려 했다. 화장터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경찰서의 취조실에 놓여 있던 펑퍼짐한 모양의 문진 같은 그런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그렇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내 안에는 무언가 뿌옇게 흐린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된 네 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 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그리고 삶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 막히는 배반성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 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 3 장 비와 눈물이 섞인 하룻밤
그 다음 토요일에 나오코는 내게 전화를 걸었고, 일요일에 우린 데이트를 했다. 그냥 데이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밖에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전과 같이 거리를 걸었고, 어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또 걸었으며, 저녁 무렵에 식사를 하고 안녕,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드문드문 그렇게밖에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고, 나도 특별히 그걸 의식해서 이야기하진 않았다. 마음 내키면 서로의 생활이며 대학 이야기를 했지만, 어느 것이나 다 단편적인 이야기여서 그것이 무엇인가로 이어져 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우린 과거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체로 거리를 걸어가는 데에만 열중해 있었다. 고맙게도 도쿄 거리는 넓어서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선 그런 식으로 걸어 다녔다. 그녀가 앞장을 서고, 내가 그 조금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모양의 머리핀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오른쪽 귀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던 탓으로 지금도 그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끄러워할 때 그녀는 곧잘 머리핀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리곤 늘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손수건으로 입을 닦는 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의 버릇이었다. 그런 걸 보고 있는 중에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무사시노의 변두리에 있는 여자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영어 교육으로 유명한 작고 아담한 대학이었다. 그녀의 아파트 가까이의 개울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 우리는 그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나를 초대해서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방안에서 나와 단 둘이 있게 되어도, 그녀는 그런 건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깨끗한 방이었는데, 창문이 있는 구석에 스타킹이 널려 있지만 않았어도 여자의 방이라곤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매우 검소하고 간결하게 살고 있었으며, 친구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여고 시절의 그녀에게서는 상상 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녀는 언제나 화사한 옷을 입고,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방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대학에 입학해 고향을 떠나서, 알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학교를 택한 건, 우리 고등학교에서는 아무도 이 학교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고 나오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입학한 거예요. 우리들은 모두 좀 더 멋진 대학으로 가길 원하니까요. 그렇지요?"
그러나 나와 나오코의 관계에 전혀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녀는 내게 익숙해졌고, 나도 나오코에게 익숙해져 갔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내 곁에 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그녀가 나를 한 사람의 친구로서 인정해 준 증표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름다운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니는 건 정말 싫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둘이서 도쿄 거리를 정처 없이 마냥 걷고 또 걸었다. 고개를 오르고, 냇물을 건너고, 선로를 넘고, 어디까지라도 걸어갔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목적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걷기만 하면 좋았다. 마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종교 의식처럼 우리는 한눈팔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들고 걸었다.
가을이 와서 기숙사 마당이 느티나무 잎으로 뒤덮였다. 스웨터를 입으니 가을 냄새가 났다. 나는 다 떨어진 구두 한 켤레를 버리고 새 스웨이드 구두를 샀다.
그 무렵,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아마도 대수로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기즈키라는 이름은 우리의 화제엔 거의 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그 무렵에는 둘이서 잠자코 찻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일에도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돌격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서 나는 곧잘 그 이야기를 했다. '돌격대'는 클래스의 여자(물론 지리학과의 여자)와 한 번 데이트를 했는데 저녁때가 다 되어서 아주 낙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이 6월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내게, "저, 저 말이야, 와타나베. 여, 여자애하고 말이야, 무슨 얘길 하지?" 하고 물어 보았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떻든 그는 질문의 상대를 완전히 헛짚었던 것이다.
7월에 그가 없는 동안, 누군가 암스테르담의 운하 사진을 떼어내고, 그 대산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브리지 사진을 붙여 놓고 갔다. 골든 브리지를 쳐다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알고 싶다는 그저 그 뿐의 이유에서였다. "아주 좋아하면서 하고 있던데"하고 내가 적당히 둘러 붙여 얘기해 주자, 누군가가 이번엔 그것을 빙산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진이 달라질 때마다 '돌격대'는 심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누가, 이, 이, 이런 짓을 한 거지?" 하고 그는 고함을 쳤다.
"글쎄, 하지만 좋잖아. 어느 거나 아름다운 사진이잖아. 누가 그러든 고마운 일이지, 뭐" 하고 나는 그를 위로했다.
"그야 뭐 그렇지만 아무튼 기분이 나빠."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었기에 나도 곧잘 그의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다지 넉넉하다곤 할 수 없는 가정의, 너무 고지식한 셋째 아들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도를 작성하는 것만이 그의 인생의 자그마한 꿈인 것이다. 누가 그것을 우스개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는 하나 '돌격대 조크'는 이미 기숙사 내에선 없어선 안 될 화제 중의 하나가 돼 있었고, 이제 와서 내가 거두려 한다고 해서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오코의 웃는 얼굴을 눈으로 보는 건 나로서도 그런 대로 기뿐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두에게 '돌격대' 이야기를 계속 제공하게 되었다.
나오코는 내게 꼭 한 번, 좋아하는 여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헤어진 여자 이야기를 했다. 좋은 아이였고, 그녀와 자는 건 좋았고, 지금도 가끔씩 그립긴 하지만 왜 그런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고 나는 말했다. 아마 내 마음 속에는 딱딱한 껍질 같은 게 있어서, 거기를 뚫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돼 있는 것같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없나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없어."
그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고 찬바람이 거리를 휘몰아치자, 그녀는 가끔씩 내 팔에 몸을 기대었다. 더플 코(역주: 모자가 달린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 나는 나오코의 숨결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팔에 자기의 팔을 감기도 하고,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기도 하고, 정말 추울 때에는 내 팔에 매달려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여느 때나 다름없이 걸어갔다. 나도 그녀도 바닥이 고무로 된 구두를 신고 있어서 두 사람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도로에 떨어진 커다란 플라타너스 낙엽을 밝을 때에만 바삭거리는 마른 소리가 났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나오코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데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겨울이 깊어 갈수록 그녀의 눈은 전보다 더 투명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투명함이었다. 가끔 그녀는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쓸쓸한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도 그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아니,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자기 안에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머리핀을 만지작거리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기도 하고, 내 눈을 물끄러미 의미도 없이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나오코를 끌어안아 주고 싶기도 했지만, 언제나 망설임 끝에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런 일로 해서 그녀가 상처라도 입지 않을 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도쿄 거리를 계속 걸어 다녔으며, 그녀는 허공 속에서 계속 말을 찾고 있었다.
기숙사 동료들은 나오코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거나, 일요일 아침에 외출을 하거나 하면 언제나 나를 놀려댔다.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게 분명 애인이 생긴 것이라고들 생각했던 모양이다.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었기에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저녁에 헤어져 돌아오면, 누군가가 어떤 체위로 했느냐, 그녀의 그곳은 어떤 모양이었느냐, 속옷은 무슨 색이었느냐, 하고 이런저런 너절한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 때마다 적당히 가감을 해서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열여덟 살에서 열아홉 살이 되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국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죽은 친구의 애인과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클로델을 읽고 라신을 읽고 에이젠슈테인을 읽었지만 내게 그러한 책들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유발시키지 못했다.
나는 대학 클래스에선 단 한 명의 친구도 만들지 않았으며, 기숙사에서의 교제도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숙사 동료들은 내가 언제나 혼자 책을 읽고 있어서 작가가 되려는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별로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무엇도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나오코에게 몇 번인가 이야기 하려 했다. 그녀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어휘가 찾아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건 마치 그녀의 '말 찾기 병'이 내 쪽으로 옮아 버린 게 아닌가 싶어서.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기가 있는 현관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나오코의 전화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이면 대부분은 밖으로 놀러나가, 로비는 여느 때보다 사람도 적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늘 그런 침묵의 공간에 반짝반짝 떠 있는 빛의 입자를 응시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해답다운 해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가끔 공중에 떠도는 빛의 입자를 행해 손을 내밀어 보았으나, 그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나는 곧잘 책을 읽었지만, '많은 책을 읽는' 독서가는 아니었고, 그저 마음에 드는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가 당시 좋아했던 것은 트루먼 카포티, 존 업다이크, 스코트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등등의 작가들이었는데, 클래스에서도 기숙사에서도 그러한 종류의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읽는 것은 다카하시 가즈미나 오에 겐자부로나 미시마 유키오, 또는 현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 많았다.
그러니 당연히 대화도 서로 맞지 않았으며,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다음, 가끔씩 눈을 감은 채 책의 향기를 가슴 속에 담곤 했다. 그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갈피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최고의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는데, 몇 번 되풀이해 읽은 중에 그것은 처음의 광채를 약간씩 잃게 되었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게 베스트 원의 자리를 양보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 줄곧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소설로 지속되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을 한바탕 읽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이 또 있을까 싶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 멋지단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위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으며, 읽어도 좋겠지 싶은 사람조차도 없었다. 1968년에 스코트 피츠제럴드를 읽는 다는 것은 반동이라고 까지 할 수 없었으나, 결코 권장할 만한 행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내 주위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은 단 한사람 밖에 없었으며, 나와 그가 친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가사와라는 이름을 가진 도쿄대학 법학부의 학생으로서, 나보다 두 학년 위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자연 서로가 얼굴만 알고 있는 그런 사이였는데,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느냐고 물어 왔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말했더니 재미있냐고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 번째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10월의 일이었다.
나가사와라는 사람은 잘 알면 알수록 묘한 사나이였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묘한 사람과 만나고, 서로 알고 스쳐 지나 왔지만, 그처럼 기묘한 사람을 만난 적은 아직 없다. 그는 나 같은 건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 외에는 신용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나가사와 선배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지요?"
"발자크, 단테, 조셉 콘래드, 디킨스" 하고 그는 막힘없이 잘도 대답했다.
"그렇게 연대적 성향이 강한 작가라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는 거야. 남과 같은 걸 읽고 있으면, 남과 같은 생각밖엔 못하게 돼. 그런 촌놈, 속물의 세계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짓을 안 하는 법이지. 어때, 알겠어, 와타나베? 이 기숙사에서 제대로 된 건 나와 너뿐이야. 나머지는 죄다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거든."
"어떻게 해서 그걸 압니까?" 하고 나는 어리벙벙해서 물었다.
"난 알아. 이마에 딱지가 붙어 있는 것처럼 척 보면 다 알아. 보기만 해도 안단 말이야. 게다가 우리는 둘 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잖아?"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죽은 지 아직 28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상관없어, 2년쯤은"하고 그는 말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 정도의 훌륭한 작가라면 언더파(역주: 골프 용어로, 정해진 타수 이내)로도 충분해"
하기야 나가사와가 고전 소설의 숨은 독서가임은 기숙사 안에선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설령 알려졌다 해도 거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첫째로 머리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무런 고생도 없이 도쿄 대학에 입학했고, 흠잡을 데 없는 성적을 받았으며, 공무원 시험을 쳐서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나고야에서 큰 병원을 경영했고, 형 역시 도쿄 대학의 의학부를 나와 그 뒤를 잇기로 되어 있었다.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가정인 것 같았다. 용돈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풍채도 좋았다. 그래서 누구나가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기숙사 사감마저 나가사와에게만은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그가 누구에겐가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요구받은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가사와라는 인간 속에는 아주 자연스레 사람을 끌어당기고 따르게 하는 그 무엇이, 천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 위에 서서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들에게 솜씨 있게 정확한 지시를 내려 주며, 사람들을 순순히 따르게 하는 능력 말이다.
그의 머리 위에는 그러한 힘이 갖춰져 있음을 보여 주는 영기가 천사의 고리처럼 두둥실 떠 있어서, 누구나 얼핏 보기만 해도 '이 사나이는 특별한 존재야' 하고 황송해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자가 나가사와의 개인적인 친구로 선택된 데 대해 모두들 몹시 놀라워했으며, 그런 탓으로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존경조차 받기도 했다. 그들은 알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나가사와가 나를 좋아한 것은, 내가 그에 대해 조금의 경의도 복종도 감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인간성의 매우 기묘한 부분, 굴절된 부분에 대해 흥미를 갖긴 했지만, 성적의 우수함이라든가 영묘한 기운이라든가 남자다운 풍채라든가에 대해선 한 가닥의 관심도 갖지 않았다. 나가사와로서는 나의 그런 태도가 아주 신기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가사와는 몇 가지의 상반되는 특질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써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나조차 감동하고 말 정도로 친절했지만, 그와 동시에 더럽게 심술궂은 데가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별 수 없는 속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울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이율 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러한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나이는 이 사나이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나는 그에 대해 호의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최대 미덕은 정직함이었다. 그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잘못이나 결점은 언제든 딱 잘라 인정했다.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것을 숨기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 대해선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했으며,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었다. 그가 그래 주지 않았던들, 기숙사에서의 나의 생활은 훨씬 더 불편하고 불쾌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으며, 그런 면에서 나와 그와의 관계는, 나와 기즈키와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나가사와가 술에 취한 채 어떤 여자에게 지독히도 심술궂게 대하는 걸 목격한 후로, 이 사나이에게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허용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가사와는 기숙사 안에서 몇 가지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한 가지는 그가 괄태충(역주: 달팽이같이 생긴 것으로 야채류를 먹고 산다.)을 세 마리나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가 매우 큰 페니스를 갖고 있어서 지금까지 백 명 이상의 여자와 잤다는 것이었다.
괄태충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내가 물었더니 그는 "아, 사실이지 그거" 하고 말했다. "커다란 놈을 세 마리나 삼켰지."
"어째서 그런 것을 먹었습니까?"
"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이 기숙사에 들어왔던 해에, 신입생과 상급생 사이에 좀 성가신 일이 생겼었지. 9월이었던가, 아마. 그래서 신입생 대표격으로 상급생들에게 결판을 내러 갔었어. 상대는 우익이라, 목도 따위를 갖고 있었는데, 도저히 결판이 날 분위기가 아니었어. 그래서 난 '알겠습니다, 내 선에서 끝날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걸로 결판을 내주시오' 했지. 그랬더니 '그럼 너 괄태충을 삼켜봐!' 그러지 않겠나. '좋습니다, 삼키지요' 그랬지. 그래서 삼킨 거야. 자식들, 커다란 놈을 세 마리나 들고 왔지 뭔가."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어떤 기분이고 뭐고, 그놈을 삼킬 때의 기분이라니, 그놈을 먹어 본 인간밖에 알 수가 없지. 괄태충이 미끄덩미끄덩 목구멍을 통과해서, 쪼르르 뱃속으로 내려가는 그 기분이란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지. 차갑고, 입안에 뒷맛이 남거든. 생각만 해도 섬뜩하지 뭔가. 웩웩 토하고 싶은 걸 죽는 셈치고 참았지. 암, 토하기라도 하면 다시 삼켜야 했거든. 그래서 난 마침내 세 마리 전부를 삼킨 거야."
"삼키고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내 방에 돌아와 소금물을 벌컥벌컥 마셨지. 그러지 않고는 달리 어쩔 도리가 있나."
"하긴 그렇군요."
"하지만 그 후론, 누구도 나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게 됐어. 상급생까지 포함해서 그 누구도 말이야. 그런 괄태충을 세 마리나 삼킬 수 있는 인간은 나말곤 아무도 없으니까."
"없겠지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니스의 크기를 확인하는 건 간단했다. 함께 욕탕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니까. 분명 그것은 꽤나 훌륭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 명이 넘는 여자와 잤다는 건 과장이었다. 일흔 댓 명가량 될까, 하고 그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잘 기억하진 못하지만 일흔 명은 될 거라고 말했다. 내가 한 여자하고밖엔 자보지 못했다고 하니,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음에 나와 같이 하러 가자고. 걱정하지 마, 쉽게 되니까."
나는 그때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해보니 참으로 간단했다. 너무나 간단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와 함께 시부야나 신주쿠의 바라든가 스낵에 들어가(가게는 대개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여자 둘이 와 있는 패를 찾아내 이야기를 하곤(세상은 짝지은 여자들로 충만해 있었다.), 술을 마시고, 그리고 호텔에 들어가 섹스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화술에 능했다. 무슨 대수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여자들은 대개 다들 멍청해져서 감탄을 하고, 그 이야기에 끌려들어가 그만 술을 과음하여 취해 버렸고, 그래서 그와 자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잘생기고, 친절하고, 재치와 눈치가 빨라서, 여자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로선 참으로 불가사의한 노릇이지만,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마저 어쩐지 매력적인 남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의 독촉을 받고 무슨 말인가 하면, 여자들은 그에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에 대해 몹시 감탄도 하고 웃기도 해주는 것이다. 모두가 그의 마력 탓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재능이구나, 그럴 때마다 나는 감탄했다.
이런 것에 비하면, 기즈키의 화술 재능 따위는 어린아이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나가사와의 그런 능력에 휘말려 들면서도 나는 기즈키를 몹시 그리워했다. 기즈키는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음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대수롭지 않은 재능이나마 나와 나오코를 위해 따로 남겨 놓아 주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나가사와는 그 압도적인 재능을 게임이라도 하듯 주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대체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여자들과 진정으로 자고 싶어 하는 건 결코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순한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잔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성욕을 처리하는 방법으로선 마음이 편했고, 여자와 서로 포옹하거나 서로 몸을 접촉하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내가 싫은 건 다음날 아침 헤어질 무렵이다. 눈을 뜨면 옆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쿨쿨 자고 있고, 온 방안에 술 냄새가 풍기고, 침대고 조명이고 커튼이고 무엇이든 간에 모두 러브호텔 특유의 요란한 색채 투성이고, 내 머리는 숙취로 인해서 흐리멍덩해 있다. 얼마 후 여자가 눈을 뜨고, 주섬주섬 속옷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스타킹을 신으면서 "봐요, 어젯밤 제대로 그거 썼어? 나, 정통으로 위험한 날이었거든" 하고 내뱉는다. 그리곤 거울을 향해 골치가 아프다, 화장이 잘 안 받는다 하고 투덜대면서, 루즈를 바르고 속눈썹을 붙이곤 한다.
나는 그런 것이 싫었다. 그래서 사실은 아침까지 있지 않는 게 좋았는데, 기숙사의 폐문 시간인 열두 시에 신경 쓰면서 여자를 설득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그런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외박 허가를 얻어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렇게 되면 아침까지 거기에 있어야만 되고, 자기혐오와 환멸을 느끼면서 기숙사로 돌아오게 되는 셈이다. 햇살이 눈부시고, 입안이 깔깔하고, 머리통은 어쩐지 다른 누군가의 머리통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는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그런 식으로 여자와 자고 난 후에 나가사와에게 물어 보았다. 이런 짓을 일흔 번이나 계속하고도 허무해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네가 이런 걸 허무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네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증거고 아주 바람직한 일이야.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다녀 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지. 피곤하고, 자신이 싫어지게 될 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겁니까?"
"그걸 설명하기란 어려워.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해서 쓴 것 있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즉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간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 그걸 알겠어?"
"웬만큼....." 하고 나는 우물거렸다.
"날이 저문다. 여자 아이가 거리에 나와 주변을 어정거리면서 술을 홀짝거리고 있다. 그녀들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데, 나는 그 무엇인가를 그녀들에게 줄 수 있는 거야. 그건 참으로 간단한 일이지.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마시는 것과 꼭 같은 간단한 일이야. 그런 상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함락시킬 수 있고, 상대방도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것이 가능성이라는 거야. 그러한 가능성이 눈앞에 뒹굴고 있는데, 그걸 그저 보고만 지나칠 셈인가?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발휘할 장소가 있는데, 자넨 잠자코 지나치겠단 말인가?"
"그러한 입장에 닥쳐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짐작도 안 가는데요." 하고 웃으면서 나는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행복이라는 거야, 그건" 하고 나가사와는 말했다.
집안이 넉넉하면서도 나가사와는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의 여성 편력이 원인이었다. 도쿄에 나가 독신 생활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여자와 놀아나지 않겠느냐고 걱정한 그의 부친이, 4년간 기숙사 생활을 강요했던 것이다.
하기야 나가사와로서는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었고, 그는 기숙사의 규칙 같은 것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좋을 대로 지내고 있었다. 마음이 내키면 외박 허가를 얻어 '여자사냥'을 나갔고, 애인의 아파트로 묵으러 가기도 했다. 외박 허가를 얻는 일은 어지간히 성가신 일이었지만, 그의 경우는 거의 프리 페스였고, 그가 말을 거들어 주는 한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가사와에겐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사귀고 있는 어엿한 애인이 있었다. 하쓰미라고 하는 그와 같은 나이의 여자로, 나도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인상이 좋았다.
앗, 하고 눈을 끄는 그런 미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하다고 할 외모였으므로, 어째서 나가사와 같은 사나이가 이 정도의 여자와.....하고 처음엔 생각하게 되었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누구나 그녀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러한 타입의 여성이었다. 조용하고 이지적이고 유머가 있고 동정심이 있고, 언제나 멋지고 고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썩 좋았고 내게 가령 이런 연인이 있다면 다른 시시한 여자와 자거나 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내가 마음에 든다며, 내게 그녀 클럽의 후배를 소개해 줄 테니 넷이서 테이트를 하자고 열심히 권유했지만, 나는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핑계를 대며 번번이 회피하고 있었다. 히쓰미가 다니는 학교는 특급 간부의 딸들이 모여드는 것으로 유명한 여자 대학이라서, 그런 여자들과 내가 말이 통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가사와가 노상 다른 여자와 자고 다닌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 일로 그에게 불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나가사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내겐 분에 넘치는 여자야."
나가사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 그대로라고 나도 생각했다.
겨울에 나는 신주쿠의 조그마한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급료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하는 일은 편했으며, 한 주일에 세 번, 밤 당번만 서면된다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레코드도 값싸게 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나는 나오코가 아주 좋아하는, 디어헌터가 들어 있는 헨리 맨시니의 레코드를 사서 선물했다. 포장까지도 내손으로 직접 하고 빨간 리본까지 매었다. 나오코는 자기 손으로 뜬 털실 장갑을 주었다. 엄지손가락 부분이 약간 짧았지만 따뜻했다.
"미안해요. 난 너무나 손재주가 없어요." 하고 나오코는 낯을 붉히면서 부끄러운 듯 말했다.
"괜찮아. 보라고, 제대로 맞는 걸"하고 나는 장갑을 끼어 보였다.
"그래도 이거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지 않아도 되겠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오코는 그해 겨울엔 고배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도 연말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결국 그럭저럭 그대로 도쿄에 눌러앉아 버렸다. 고베로 돌아간댔자 무슨 재미난 일도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만나고 싶은 상대도 없었다.
정월 설 동안은 기숙사 식당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나는 나오코의 아파트에서 식사를 했다. 둘이서 떡을 구워서 간단한 떡국을 해먹었다.
1969년의 1월에서 2월까지는 제법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1월말에 돌격대가 40도 가까이나 열이 올라 드러누웠다. 덕분에 나는 나오코와의 데이트를 허탕 쳐 버리고 말았다. 나는 어느 콘서트의 초대권 두 장을 고심 끝에 입수해서 나오코와 함께 가기로 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나오코가 매우 좋아하는 브람스의 심포니 4번을 연주하기로 돼 있어서, 그녀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격대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고통스런 모습이어서, 그냥 두고 외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나 대신에 그를 간호해 줄 만한 마음 좋은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얼음을 사다가 비닐 주머니를 몇 장 겹쳐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이마에 얹어주고, 수건을 차갑게 해서 땀을 닦아 주고, 한 시간마다 열을 재고, 셔츠까지 갈아입혔다.
그러나 열은 꼬박 하루 동안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째 아침이 되자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체조를 시작했다. 체온을 재어 보니 36도 2분이었다. 인간 같지가 않았다.
"이상하군, 지금껏 열 같은 건 나 본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하면서 돌격대는 그게 마치 내 술수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열이 났잖아." 하고 나는 화가 나서 대꾸를 했다. 그리고 그가 열이 난 탓에 쓸모없게 된 두 장의 초대권을 내보였다.
"하지만 초대권이니 괜찮잖아." 하고 돌격대는 말했다. 나는 그의 라디오를 창문으로 내던질까 했으나 머리가 지끈거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다.
2월에는 몇 번인가 눈이 내렸다.
2월 말 무렵에 나는 하찮은 일로 싸움질을 벌였다. 기숙사의 같은 층에 있는 상급생을 때렸는데, 상대방은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다행이 큰 부상은 없었으며, 나가사와가 일을 잘 수습해 주었지만 나는 사감 실에 불려가 주의를 받았고, 그 후로 기숙사 생활도 자연 마음이 편치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한 학년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나는 몇 과목에서 학점을 따지 못했다. 나머지 성적도 그저 그런 편이었다. 태반이 C나 D였고, B가 약간 있을 뿐이었다. 나오코 쪽은 한 과목도 빠뜨리지 않고 학점을 따서 2학년이 되었다. 계절이 어느덧 한 바퀴 돈 것이다.
4월 중순에 나오코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내가 11월생이니까 그녀가 약 7개월 연상인 셈이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된다는 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든 그녀든 실상은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 사이를 오가는 편이 옳지 않을 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열여덟 살 다음에 열아홉 살이고, 열아홉 살 다음에 열여덟 살-그렇다면 좋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엔 나도 스무 살이 되는 것이다. 이미 죽어 버린 기즈키만이 언제까지나 열일곱 살이었다.
나오코의 생일에는 비가 내렸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 근처에서 케이크를 사가지고 전철을 타고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어떻든 스무 살이 된 셈이니 무슨 축하 행위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말을 꺼냈던 것이다. 가령 반대로 내 입장이었다면 나 역시 그런 걸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외돌토리로 스무 살의 생일을 지낸다는 건 분명 괴로운 노릇일 게다.
전철은 붐볐고, 더구나 너무 흔들렸다. 덕분에 나오코의 방에 당도했을 때엔, 케이크는 로마의 콜로세움 유적과 같은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대로 준비한 조그마한 양초를 20개 꽂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후, 커튼을 닫고 전깃불을 끄니 그럭저럭 생일 축하 분위기가 났다. 나오코가 양주를 땄다. 우리는 양주를 마시고, 케이크를 조금 먹은 후 간단한 식사를 했다.
"스무 살이 되다니 어쩐지 바보스러운걸요. 난 스무 살이 되는 준비 같은 거, 전혀 돼 있지 않아요. 묘한 기분이 드는 게, 어쩐지 뒤로부터 무리하게 떠밀려 온 것만 같아요."
"나는 아직도 7개월이나 남았으니까 서서히 준비하겠어."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좋겠네요, 아직도 열아홉 살이라니" 하고 나오코는 부러운 듯 말했다.
식사하는 동안 나는 돌격대가 새 스웨터를 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때까지 스웨터를 한 벌밖에 갖지 못했는데(고등학교 때의 감색 교복 스웨터), 이제야 가까스로 두 벌이 된 것이다. 새 스웨터는 사슴 모양의 손뜨개로 떠 넣은, 빨강과 까망이 섞인 귀여운 것으로, 스웨터 자체는 멋진 것이지만 그가 그걸 걸치고 다니면 모두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로선 어째서 모두가 웃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와타나베, 어, 어디 우스운 데라도 있니?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하고 그는 식당에서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묻은 것도 없고, 우습지도 않아. 아무튼 좋은 스웨터구나, 그거" 하고 나는 표정을 억제하면서 말했다.
"고마워" 하고 돌격대는 사뭇 기쁜 듯 벙긋 웃었다.
나오코는 그의 이야기를 하면 기뻐했다.
"그 사람 만나보고 싶어요, 한 번 이라도 좋으니."
"안 되겠는데, 나오코는 분명 웃음보를 터뜨릴 테니까."
"정말 웃음보를 터뜨릴 거라고 생각해요?"
"내길 해도 좋아. 난 매일 함께 있어도 가끔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으니까."
식사가 끝나자 둘이서 그릇을 치우고, 방바닥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나머지 양주를 마셨다. 내가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 그녀는 두 잔을 마셨다.
나오코는 그날 드물게 잘도 떠들었다. 어릴 적 일이며, 학교 일이며, 집안에 대한 일을 이야기했다. 어느 것이나 긴 이야기로, 마치 세밀화처럼 분명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한 기억력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인가가 차츰 의식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무엇인가가 부자연스럽고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옳고 제법 줄거리도 일관해 있는데, 그 연관성이 아무래도 기묘했다. A의 이야기가 어느 틈엔가 그것에 포함되는 B의 이야기가 되고, 이윽고 B에 포함되는 C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다. 끝남이라는 게 없었다.
나는 처음 한동안은 맞장구를 쳤지만 그러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나는 레코드를 걸고 그것이 끝나면 바늘을 올려 다음 레코드를 걸었다. 한 바퀴 전부 걸고 나자 다시 처음의 레코드를 걸었다. 레코드는 전부라야 여섯 장밖에 없었고, 사이클의 시작은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즈 론리 하츠 클럽 밴드'고, 끝은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였다.
창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나오코는 혼자서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오코 이야기의 부자연스러움은, 그녀가 몇 개의 포인트에 언급을 회피하듯 조심조심 이야기하는 데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기즈키에 관한 것도 그 포인트 중의 하나였는데, 나에겐 그녀가 회피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을 여럿 품고 있으면서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연의 세세한 부분에 관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골똘하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어서, 나는 그녀가 줄곧 떠드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자 나는 아닌 게 아니라 불안해졌다. 그녀는 이미 네 시간 이상이나 쉬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갈 마지막 전철도 걱정되었고, 기숙사 폐문 시간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적당한 틈을 찾아 그녀의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슬슬 가야겠어. 전철 시간도 있으니." 하고 나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귀에는 들렸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순간엔 입을 다물었으나 이내 또 이야기의 뒤를 이어 갔다.
나는 다 단념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두병 째 양주를 마저 마셨다. 이렇게 된 바엔 그녀에게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 전철이고 폐문이고, 모두 다 되가는 대로 내맡겨 두리라, 그렇게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오코의 이야기도 길게는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야기의 말끝이 잡아 뜯긴 듯한 꼴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디선가 훌쩍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거기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인가가 손상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손상시킨 것은 나인지도 몰랐다. 내가 한 말이 마침내 그녀의 귀에 들어가고, 시간을 들여 이해시키고, 그 때문에 그녀를 떠들게 했던 에너지 같은 것이 손상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나오코는 입술을 빠끔히 연 채, 내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작동하고 있는 도중에 전원이 끊겨 버린 기계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은 마치 불투명한 엷은 막을 덮어 놓은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그저 시간이 꽤 늦었고,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적시더니, 커다란 소리를 내며 레코드 재킷위로 떨어졌다. 맨 처음의 눈물이 흘러내리자, 다음은 더 막을 길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방바닥에 짚고 앞으로 몸을 구부린 채 마치 토하는 듯한 자세로 울었다. 나는 누군가가 그토록 처절하게 우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녀의 어깨는 부들부들 잔 물결치듯 떨리고 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나의 팔 안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과 뜨거운 입김으로 나의 셔츠는 눅눅해졌고, 그리고 촉촉이 젖었다. 그녀의 열 손가락은 마치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듯 나의 등덜미 위를 더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곧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세 그대로, 그녀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러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것은 역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이외에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격앙되어 있었고, 혼란스러웠으며, 내가 그 감정을 진정 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전등을 끄고 천천히 조심조심 그녀의 옷을 벗기고, 나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끌어안았다. 비오는 훈훈한 밤이어서, 우리는 알몸인 채였지만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나와 나오코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덮치고 두 손으로 부드럽게 젖가슴을 감쌌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어진 나의 페니스를 잡았다. 그녀의 그것은 촉촉하고 따뜻하게 젖어서 나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몹시 아파했다. 처음이냐고 물었더니,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여태껏 기즈키와 나오코가 같이 잤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페니스를 아주 깊숙이 밀어 놓은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녀를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되자, 천천히 움직여 오랜 시간을 두고 사정했다. 마지막에는 나오코가 나의 몸을 힘껏 껴안으면서 소리를 내었다. 내가 그때까지 들었던 오르가즘 소리 중에서 가장 애절한 그런 소리였다.
다 끝나고 나서 나는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건 묻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내 몸에서 손을 떼더니, 또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벽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내어 그녀를 눕혔다. 그리곤 창 밖에 쏟아지는 4월의 비를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아침이 되자 날은 개어 있었다. 나오코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한숨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깨어 있었든 잠들어 있었든, 그녀의 입술은 언어를 모두를 잃었고, 그 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져 있었다. 여러 차례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고, 꼼짝도 하질 않았다. 나는 얼마 동안 알몸인 그녀의 어깨를 지켜보고 있다가, 단념하고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방바닥에는 레코드 재킷과 글라스, 양주병과 재떨이, 그런 것들이 어젯밤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형체가 일그러진 생일 케이크가 절반쯤 남아 있었다. 마치 거기서 갑자기 시간이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 모아 치우고, 수돗가에서 물을 두 컵 들이켰다.
책상 위에는 사전과 프랑스어 동사표가 놓여 있었다. 책상 앞 벽에는 달력이 붙어 있었다. 사진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는 숫자뿐인 달력이었다. 달력은 깨끗했다. 특별히 적어 넣은 메모도 없었고, 표시한 것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었다. 셔츠의 가슴 부분은 아직도 차고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니 나오코의 냄새가 났다. 나는 책상 위 메모지에,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면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싶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전화를 주면 좋겠다, 생일을 축하한다,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밖을 나와 가만가만 문을 닫았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나오코의 아파트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나는 일요일 아침에 고쿠분지의 아파트까지 갔다. 그러나 그녀는 없었고, 문에 붙어 있던 문패도 떼어지고 없었다. 그리고 창문은 덧문까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이미 사흘 전에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글쎄, 어디로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요." 하고 관리인은 말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그녀의 고베 주소로 긴 편지를 썼다. 나오코가 어디로 이사를 했든, 그 편지는 그녀 앞으로 배달될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썼다. 나로선 여러 일들이 아직 잘 이해되지 않으며, 진정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지나가버린 다음에 나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가 있을지는, 지금의 나로선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나오코에게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고, 무엇을 요구한다거나 그럴 듯한 말들을 나열할 형편도 못 된다. 첫째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만약 나오코가 내게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우리는 좀 더 서로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나오코가 내게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우리는 좀 더 서로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나오코와 만나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기즈키를 잃어버리고 나서부터 나는 내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상대를 잃었고, 그것은 아마 나오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서로를 원하고 있었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어지간히도 먼 길을 우회하게 되어 버렸고,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돼 버린 셈이다. 나는 다분히 그런 식으로는 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는 수밖엔 없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때 나오코에 대해서 느꼈던 친밀하고 따스한 감정은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답장을 받고 싶다. 어떤 식의 답장이라도 좋으니 꼭 보내 주기를 바란다-그녀에게 쓴 편지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몸속의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메워 줄 아무것도 없는 채, 그것은 순수한 공동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몸은 부자연스럽게 가벼웠고, 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나는 평일에는 이전보다 한층 더 충실하게 대학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지루하고, 클래스 녀석들과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교실 맨 앞줄 끝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식사를 했으며, 담배는 이제 피우지 않기로 했다.
5월 말 대학은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그들은 대학해체를 외치고 있었다. 좋아, 해체할 테면 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해체해서 산산조각을 내어 발로 짓밟아 가루로 만들어 버리라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나도 홀가분할 것이고, 뒷일이야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것이 아닌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어. 재빨리 해치우라고.
대학 문이 봉쇄되고 강의가 중단되었으므로, 나는 화물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화물 트럭 조수석에 앉아서 짐짝을 싣고 부리고 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고되어서 처음에는 아침에 일어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쑤셔댔지만, 그 대신 그만큼 보수가 좋은 편이었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나 자신 속의 동공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일주일에 닷새는 낮에 화물 센터에서 일하고, 사흘은 밤에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일이 없는 밤에는 방에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돌격대는 술을 한 방울도 못해서 알코올 냄새에 아주 민감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위스키를 마시면, 그는 냄새가 역겨워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가서 마실 수 없겠냐고 투덜거렸다.
"네가 나가" 라고 나는 말했다.
"아니, 기숙사 안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건 규, 규, 규칙이잖아." 하고 그는 이의를 제기 했다.
"네가 나가."
나는 되풀이해서 반박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니꼬운 기분이 들어 옥상으로 올라가 혼자서 위스키를 마셨다.
6월에 들어서자 나는 나오코에게 다시 한 번 긴 편지를 써서, 역시 고베 주소로 띄웠다. 내용은 대체로 전과 같았다. 그리고 편지 끝에다, 답장을 기다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내가 나오코에게 상처를 입힌 것인지 어떤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니 내 마음 속의 공동이 좀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6월중 나는 두 번이나 나가사와와 함께 시내로 나가 여자와 잤다. 어느 쪽도 아주 간단했다. 한 여자는 내가 호텔 침대로 데리고 가 옷을 벗기려 하자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내가 귀찮아져 침대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더니, 잠시 뒤에는 그녀 스스로 파고 들어왔다. 또 한 여자는 섹스를 끝내고 나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하고 잤느냐, 어디 출신이냐,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느냐, 외국 여행을 한다면 어딜 가보고 싶으냐, 내 젖꼭지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둥, 아무튼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 자버렸다. 잠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함께 아침식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카페로 들어가, 모닝 서비스로 주는 맛없는 토스트와 맛없는 계란을 먹고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줄곧 나에게 질문을 해댔다. 아버지 직업이 뭐냐, 고교 시절엔 성적이 좋았느냐, 생일이 언제냐, 개구리를 먹어 본 일이 있느냐 등등. 나는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에 식사를 끝내자, 이제부터 슬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봐요, 다시는 만날 수 없나요?" 하고 그녀는 섭섭한 듯이 추근대며 말했다.
"살다 보면 어디선가 또 만날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그냥 갈라섰다. 그리고 혼자가 되자 '아, 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지겨운 생각에 빠졌다.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몸은 굶주리고 메말라 있어서 여자와 잘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과 자면서도 줄곧 나오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 희뿌옇게 떠올라 있던 나오코의 알몸이며, 그 한숨 소리며, 빗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몸은 더욱더 허기가 지고 메말라 갔다. 나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위스키를 마시며,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7월 초에 나오코로부터 편지가 왔다. 길지 않은 편지였다.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해해 줘요. 글을 쓸 수 있게끔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그리고 이 편지도 벌써 열 번이나 다시 썼는걸요.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선 아주 고역이에요.
결론부터 쓰겠어요. 하는 수 없이 대학을 1년간 휴학하기로 했어요. 하는 수 없다고는 했지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휴학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일이니까요.
갑작스런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훨씬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이야기하려 마음먹었지만, 끝내 말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어요. 입 밖에 내는 일이 몹시 두려웠거든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또 설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돼 있지 않을까 해요. 어쩌면 이런 말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그렇다면 사과하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일로 해서 당신이 자신을 책망 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정말이지 나 자신이 깨끗하게 모두 짊어져야 할 일이니까요. 요 일 년 남짓한 동안 나는 그것을 미루고 미루어 왔으며, 그 때문에 당신한테도 많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 한계겠지요.
고쿠분지의 아파트를 떠난 다음, 나는 고베의 집으로 돌아와 잠시 병원에 다녔어요. 의사 선생님 이야기로는 교토의 산 속에 나에게 적당한 요양소가 있다고 하니, 잠시 거기 들어가 볼까 해요. 엄격한 의미에서의 병원이 아니고 훨씬 자유로운, 요양을 위한 시설이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하겠어요. 지금은 아직 제대로 쓸 수가 없으니까요. 현재의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깥 세계와 차단된,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신경을 절대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에요.
당신이 1년 동안 내 곁에 있어 준데 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나 자신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나는 아직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만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만약 준비가 됐다 싶을 때, 나는 즉시 당신에게 편지를 쓰겠어요.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좀 더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하겠지요. 안녕히.
나는 몇 백 번이고 이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되풀이해 읽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서글퍼졌다. 그것은 마치 나오코가 말끄러미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낀 것과 같은 서글픔이었다.
나는 그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어디로 가져갈 수도, 어디다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몸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그것은 몸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걸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느릿느릿 지나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전혀 내 귀에 와 닿지를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자, 나는 여전히 로비의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 올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늘 텔레비전의 야구 중계를 켜놓은 채 그것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둘로 구분하고, 그 쪼개진 공간을 또 둘로 구분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일을 계속하여,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놓일 만큼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열 시가 되자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을 잤다.
그달 하순께에 돌격대가 나에게 반딧불을 주었다.
반딧불은 인스턴트커피 병에 들어 있었다. 병 속에는 풀잎과 물이 약간 들어 있었고, 뚜껑에는 자잘한 공기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주위가 아직 밝아서 그것은 별다를 것도 없는 냇가의 검은 벌레로밖엔 보이지 않았지만, 돌격대는 그것이 틀림없는 반딧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반딧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고, 나는 특별히 그것을 부정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그래, 반딧불이야. 반딧불은 왠지 졸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미끌미끌한 유리벽을 오르려고 계속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그만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당에 있었어."
"여기 마당에?"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이 근처의 호텔에서 여름이 되면, 손님을 끌기 위해 반딧불을 풀어 놓잖아. 그것이 이리로 흘러 들어온 거라고."
그는 검은 보스턴 가방에다 옷가지며 노트를 쑤셔 넣으면서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여름 방학에 들어선 지도 이미 몇 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아직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건 우리 정도였다. 나는 별로 고베로 가고 싶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고 있었고, 그에겐 실습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실습도 끝나서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돌격대의 집은 야마나시에 있었다.
"이거 말이지, 여자한테 주면 좋을 거야. 틀림없이 좋아할 테니까" 하고 그가 말했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휑뎅그렁한 게 마치 폐허처럼 느껴졌다. 국기가 게양대에서 내려지고, 식당 창문에는 전등이 켜졌다. 학생 수가 줄어든 탓으로 식당 전등은 늘 절반밖에 켜 있지 않았다. 오른쪽 절반은 꺼지고 왼쪽 절반만 켜져 있었다. 그런대로 은은하게 저녁 냄새가 풍겨 왔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나는 반딧불이 들어 있는 인스턴트커피 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누군가 걷어 들이는 것을 잊은 흰 셔츠만 빨랫줄에 널려 있어서, 무슨 속 빈 껍데기처럼 해질녘의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 구석에 있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급수탑 위로 올라갔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낮 동안에 듬뿍 빨아들인 열로 해서 아직도 따스했다. 좁다란 공간에 앉아 난간에 기대니 약간 이지러진 하얀 달이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거리의 불빛이, 그리고 왼쪽에는 이케부쿠로 거리의 불빛이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하게 빛의 물결을 이루며 거리에서 거리로 흐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서로 어울린 부드러운 음향이 마치 구름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 빛깔은 너무나 희미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반딧불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는데, 그 기억 속에서 반딧불은 훨씬 뚜렷하고 선명한 빛을 여름밤의 어둠 속에서 발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반딧불이란 그처럼 선명하게 타오르는 듯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딧불은 지쳐서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병 주둥이를 붙잡고 몇 번인가 가볍게 흔들어 봤다. 반딧불은 유리벽에다 몸을 부딪치며 아주 조금 날았다. 하지만 그 빛은 여전히 희미했다.
반딧불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거기가 도대체 어디였던가.....? 나는 그 광경을 생각해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장소와 시간은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에 물소리가 들렸다. 벽돌로 만든 구식 수문도 있었다. 핸들을 빙빙 돌려서 열고 닫는 그런 수문이다. 큰 강은 아니었다. 강변의 수초가 수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작은 냇물이었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워 회중전등을 꺼버리면 자신의 발밑조차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수문의 괸 물웅덩이 위를 몇 백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수면에 비쳐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기억의 어둠 속에 잠시 몸을 담갔다. 바람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다지 심한 바람도 아닌데 그것은 이상하게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나의 몸 주의를 빠져 나갔다. 눈을 떠보니 여름밤의 어둠은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나는 병뚜껑을 열고 반딧불을 집어내어 3센티미터쯤 튀어나온 급수탑 가장자리 위에다 놓았다. 반딧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반딧불은 볼트 주위를 비틀거리면서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부스럼 딱지처럼 보풀어진 페인트에다 다리를 걸쳐 보기도 했다. 오른쪽으로 한참을 가더니 거기가 막다른 곳이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다시 왼쪽으로 돌아 왔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들여 볼트의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거기에서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 있었다. 반딧불은 마치 숨이 끊어진 것처럼 그래도 꼼짝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기댄 채 그런 반딧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반딧불도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그곳에 있었다. 바람만이 우리의 주의를 스쳐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수한 느티나무 잎사귀가 서로 비벼댔다.
나는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반딧불이 날아간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반딧불은 뭔가 생각난 듯이 문득 날개를 펼치더니, 그 다음 순간 난간을 넘어서 희미한 어둠 속에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급수탑 옆에서 재빨리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이 바람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동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반딧불이 사라져 버린 뒤에도 그 빛의 흔적은 내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가녀린 엷은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나 방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어둠속에 몇 번이고 손을 뻗쳐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빛은 언제나 나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안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제 4 장 부드럽고 평온한 입맞춤
여름 방학 동안 대학에는 기동대의 출동을 요청하였고, 기동대는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안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 전원을 체포했다.
그 당시는 어느 대학에서나 그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새삼스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대학은 해체는커녕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대학에는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난동을 좀 부렸다고 해서 '예, 그렇습니까' 하고 덩치 큰 학교가 얌전하게 해체될 턱이 없었다.
그리고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던 측들도 사실상 대학을 해체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대학 기구의 주도권 변경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었고, 나로서는 주도권이 어찌되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동맹 휴학이 좌절됐다고 해서 특별한 감회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9월에 들어서서 대학이 거의 폐허가 돼 있으리라 예상하면서, 가 보았으나. 대학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멀쩡했다. 도서관의 책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교수 연구실도 멀쩡했으며, 학생과가 있는 건물도 그대로였다. 이 녀석들 도대체 한 것이 뭐냐 싶어서,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동맹 휴학이 철회되고 기동대의 점령 하에서 강의가 재개되자, 맨 먼저 출석한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선동, 주도했던 패거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의실에 나와 강의를 들었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동맹 휴학 결의는 아직도 유효했고, 아무도 동맹 휴학 종결을 선언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측이 기동대를 끌어들여 바리케이드를 파괴했을 뿐, 원칙적으로 동맹 휴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맹 휴학 결의 때에는 하고 싶은 만큼 큰소리를 치면서, 동맹 휴학에 반대하는 혹은 의혹을 표명하는 학생을 매도하고, 혹은 규탄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을 찾아가 왜 동맹 휴학을 계속하지 않고 강의에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못했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출석 일수가 모자라 학점을 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패거리들이 대학 해체를 외쳐댔구나, 하고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비열한 패거리들은 바람의 방향 하나로 큰소리를 쳤다, 움츠러들었다 하는 것이다.
이봐, 기즈키, 여긴 정말 형편없는 세계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작자들이 버젓하게 대학에서 학점을 따고, 사회에 나가 부지런히 비열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얼마 동안은 강의에 나가되 출석을 부를 때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기분이 나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클래스 안에서의 내 입장은 한층 더 고립되어 갔다. 이름을 부르는데도 내가 잠자코 있으니까 강의실 안에는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9월의 둘째 주에 이르러, 나는 대학 교육이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대학 생활을 무료함을 견디는 훈련기간으로 삼기로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대학을 그만두고 사회에 나가 뭔가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매일 학교에 나가 강의에 출석을 하고, 필기를 하고, 빈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자료 조사를 했다.
9월 둘째 주가 되었는데도, 돌격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상하다기보다는 천지개벽할 사건이었다. 대학에서는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돌격대가 수업을 빼먹다니,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책상이며 라디오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선반 위에는 플라스틱 컵과 칫솔, 차병과 살충 스프레이 그런 것들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돌격대가 없는 동안에는 내가 청소를 했다. 지난 1년 동안에 방을 청결하게 한다는 것은 내 습성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돌격대가 없을 때에는 내가 그 청결함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같이 방바닥을 쓸고, 사흘에 한 번쯤은 창문을 닦았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이불을 내다 널었다. 그리고 돌격대가 돌아와서 '와타나베! 어찌된 일이지? 이거 굉장히 깨끗하잖아.' 하고 칭찬해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그가 돌아오기는커녕 그의 짐이 몽땅 없어졌다. 방문 앞의 명찰도 없어지고 내 것만 남아 있었다. 나는 사감실로 가서 도대체 그가 어찌 된 거냐고 물었다.
"기숙사에서 나갔네." 하고 사감은 아주 간단히 말했다. "당분간 혼자 지내게."
나는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사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자기 혼자서 사물을 관리하는 데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그런 타입의 속물이었다.
방 벽에는 빙산 사진이 한 동안 붙어 있었지만, 얼마 후 나는 그것마저 떼버리고, 그 대신 짐 모리슨과 마일즈 데이비스의 사진을 붙였다. 그래서 내 방안이 조금은 내 방다워졌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스테레오 플레이어를 샀다. 그리고 밤이면 혼자서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다. 이따금 돌격대 생각이 떠오르곤 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지낸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월요일 열시부터 연극사2의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그 강의는 열한 시 반에 끝났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교에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까지 걸어가 오믈렛과 샐러드를 먹었다.
번화가에서 떨어져 있는 그 레스토랑의 음식 값은 학생 식당 보다는 약간 비쌌지만 조용하고 안정감이 있었으며, 매우 맛있는 오믈렛을 먹을 수 있었다. 무뚝뚝한 부부와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아이, 그렇게 셋이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창가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산뜻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남자가 둘, 여자가 둘이었다. 그들은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이모저모 검토하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주문을 모아 아르바이트 여자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그때 나는 문득 그들 중 여학생 하나가 내 쪽을 흘끔흘끔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가 굉장히 짧은 여자였는데,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면으로 된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전혀 생소해서 나는 그대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끝에 다 한쪽 손을 짚고 내 이름을 불렀다.
"와타나베 씨, 맞죠?"
나는 얼굴을 들어 다시 한 번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주 눈에 띠는 여자여서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면 곧 생각이 났을 타입이었다. 더구나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대학에 그리 흔하지 않을 터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아니면 누구 올 사람이 있나요, 여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앉아요."
그녀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어당겨 내 맞은편에 앉더니, 선글라스 안쪽에서 나를 빤히 보고는, 그 다음엔 내 접시 위로 시선을 옮겼다.
"맛있어 보이네요, 그거."
"맛있어요. 송이버섯 오믈렛과 완두콩 샐러드죠."
"으음, 다음엔 그걸 먹어야지. 오늘은 이미 다른 걸 주문했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뭘 주문했는데요?"
"마카로니 그라탱."
"마카로니 그라탱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더라?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에우리피데스" 하고 그녀는 간단하게 말했다.
"엘렉트라. '아니오, 신께서도 불행한 자가 하는 말에는 귀 기울이려 하시지 않는답니다.', 조금 전에 수업이 막 끝났잖아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자, 그제야 겨우 생각이 났다. 연극사2 클래스에서 본적이 있는 1학년 여자였다. 다만 머리 스타일이 너무나 엉뚱하게 달라져 있어서 누군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여름 방학 전엔 머리가 여기까지 이만큼 길었잖아?" 하고 나는 어깨 밑 10센티미터쯤 위치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래요, 여름에 파마를 해버렸어요. 그런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형편없지 뭐예요. 이게 글쎄, 한 번은 죽어 버릴까 생각했을 정도예요. 꼭 미역이 머리에 엉켜 붙은 물귀신 같았어요. 죽어 버릴까 생각하다가 자포자기 끝에 짧게 잘라 버렸어요. 시원하긴 하지 뭐예요, 이거."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길이 4센티미터나 5센티미터 정도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쓱쓱 어루만졌다. 그리곤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하지만 전혀 나쁘지 않은데, 그거" 하고 나는 남은 오믈렛을 먹으면서 말했다. "어디 좀 머리를 옆으로 돌려보라고."
그녀는 옆을 향한 채 5초가량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음,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분명 머리 모양이 잘생겼나봐, 귀도 단정해 보이고."
"그래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르고 보니까 아 이것 역시 나쁘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남자들이란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거든요. 국민 학생 같다느니, 강제 수용소의 죄수 같다느니, 그런 소리만 하지 뭐예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를 좋아하죠? 그건 꼭 파시스트 같아요. 정말 시시하다고요.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가 우아하며 마음이 상냥하고 여성답다, 그러는 걸까? 난 말예요, 머리가 긴 야비한 여자를 2백 50명쯤은 알고 있어요. 정말."
"난 지금 그 머리가 좋은 걸."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길던 때의 그녀는, 내 기억 같아선 그저 아주 평범한 귀여운 여자애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봄을 맞아 바깥 세계로 막 뛰어나온 새끼 동물처럼 싱그러운 생명감을 분출시키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독립된 생명체처럼, 즐겁게 요동치고 웃고 화내고, 어이없어 하고 체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싱싱한 표정을 목격한 것이 오랜만이라서, 한 동안 감탄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내 얼굴을 보았다.
"봐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그래, 되도록 정직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편이니까."
"흐음." 하고 그녀는 콧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그런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갑작스레 머리가 짧아지니까 지독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요. 마치 알몸으로 붐비는 사람들 속에 내던져진 것만 같아 전혀 안정감이 없어서,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는 거예요."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오믈렛을 마저 먹었다. 그녀는 내가 먹는 걸 흥미진진해 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쪽 자리로 가지 않아도 되나?" 하고 나는 그녀의 동행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요. 요리가 나오면 가죠.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으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될까요?"
"방해는 무슨 방해, 벌써 다 먹었는걸."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테이블로 되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기에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 주인이 접시를 거둬 가고, 다시 그 자리에 설탕과 크림을 놓고 갔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수업에 출석 체크를 해도 대답을 안했죠? 와타나베가 선배 이름이죠? 와타나베 도오루, 그렇죠?"
"그래, 맞아."
"그럼 왜 대답하지 않았죠?"
"오늘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그녀는 다시 한 번 선글라스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놓더니, 마치 희귀 동물이 들어 있는 울 속이라도 들여다보는 그런 눈으로 말끄러미 나를 보았다.
"오늘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하고 그녀는 내 말을 되풀이 했다. "봐요, 선배 말투는 꼭 험프리 보가트 같아요. 냉소적이고 터프하고."
"설마. 난 지극히 보통 사람이야. 저만치 어디에나 있는"
여자 주인이 커피를 날라다가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고 그걸 가만히 마셨다.
"그것 봐요, 역시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았잖아요."
"그저 단순히 단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무슨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냐?" 하고 나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어째서 그렇게 햇볕에 탔죠?"
"2주일 정도 줄곧 걸어서 여행을 했거든. 여기저기. 배낭과 침낭을 짊어지고 말이야. 그래서 볕에 탄 거야."
"어떤 곳?"
"가나자와에서 노토 반도를 한 바퀴 빙 돌았어. 니이가타까지 갔었지."
"혼자서요?"
"그래. 여기저기서 어쩌다가 동행이 생기는 수도 있었지만."
"로맨스는 없었나요? 여행길에서 어쩌다가 여자와 알게 됐다든지."
"로맨스?"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이봐, 역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침낭을 짊어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로맨스 같은 것과 해후한단 말이야?"
"언제나 그렇게 혼자서 여행을 해요?"
"그래"
"고독을 좋아해요?" 하고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 말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떨어져 앉아 강의를 듣는 게 좋아
요?"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는 법이야.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지. 그런 짓을 해봤자 실망할 뿐이거든."
그녀는 선글라스의 안경다리를 입에 물더니 나직나직한 소리로,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다. 그저 실망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 가령 선배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그땐 대사를 그 대사를 쓸 수 있겠네요." 하고 말했다.
"고마워"
"초록색을 좋아해요?"
"그건 왜 묻지?"
"초록색 폴로셔츠를 입고 있어서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면 어때?"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면 어때?" 하고 그녀는 내 말을 되풀이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난 그런 말투가 굉장히 좋아요. 산뜻하게 벽을 회로 바르는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없어."
"내 이름은 미도리라고 해요. 그런데도 전혀 초록색이 안 어울려요. 이상하죠?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꼭 저주 받은 인생 같잖아요. 그리고 우리 언니는 모모코라고 해요. 우습지 않아요?"
"그럼 언니는 핑크가 어울리나?"
"그게 글쎄, 굉장히 잘 어울리거든요. 핑크를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치, 정말 불공평하지 뭐예요."
그녀의 테이블에 요리가 놓이자, 마드라스 체크(역주 : 인도 마드라스 산 체크
무늬 섬유) 윗도리를 걸친 남자가
"이봐, 미도리! 음식 나왔어" 하고 불렀다. 그녀는 그쪽을 향해 마치 '알았어' 라고 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와타나베 선배, 강의를 필기하고 있어요? 연극사 2?"
"물론"
"미안하지만 빌려 주지 않을래요? 난 두 번이나 강의를 빼먹었거든요. 그 클래스엔 아는 사람도 없고."
"물론이지, 좋아"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무슨 쓸데없는 거나 써놓지 않았는가를 확인하고 미도리에게 넘겨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와타나베 선배, 모래 학교에 나와요?"
"응."
"그럼 열두 시에 이리로 올래요? 노트를 돌려줄 겸 점심을 살 테니까요. 뭐 혼자서 밥 먹지 않음 소화 불량을 일으킨다든가 그렇지 않겠지요?"
"설마, 하지만 답례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노트쯤 빌려 준 것 가지고 뭐."
"괜찮아요. 난 답례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괜찮을까요, 수첩에 안 적어도 잊어버리지 않겠어요?"
"잊어버리긴, 모래 열두 시에 미도리와 여기서 만난다."
저편에서
"야 미도리, 빨리 안 오면 식어버린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있잖아요, 예전부터 그런 말투였어요?"
"그랬던 것 같아. 별로 의식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 말투가 색다르단 소리는 정말 그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얼마 후 생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기 테이블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 테이블 곁을 지나갈 때, 미도리는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은 흘끗 내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수요일, 약속한 열두 시가 다 되어도, 미도리는 그 레스토랑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맥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을 작정이었으나, 레스토랑이 붐비기 시작하기에 할 수 없이 음식을 주문하여 혼자서 먹었다.
다 먹은 건 열두시 삼십오 분이었는데, 그래도 미도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음식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와 레스토랑 맞은편에 있는 자그마한 신사의 돌층계에 앉아, 맥주의 취기를 가라앉히면서 한 시까지 그녀를 기다렸으나 그때까지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두 시부터 있는 독일어 수업에 들어갔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생과에 가서 강의 등록부를 찾아, 연극사2 클래스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냈다. 다행이도 미도리라는 고바야시 미도리 한 명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카드식으로 된 학생 명부를 뒤적여 1969년도 입학생 중에서 고바야시 미도리를 찾아내어, 주소와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주소는 도요시마 구였고 집은 자택이었다. 나는 전화 부스로 들어가 그 번호를 천천히 돌렸다.
"여보세요, 고바야시 서점입니다." 하고 남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미도리 양을 찾습니다만."
"예, 미도리는 지금 없는데요."
"학교에 갔습니까?"
"아, 저어 병원에 간 것 같은데요. 댁의 이름은?"
나는 이름을 대지 않고, 고맙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병원이라고? 그녀가 무슨 부상을 당했거나 병에라도 걸려 병원에 갔단 말인가? 그러나 그 남자의 목소리에선 그런 종류의 비일상적인 긴박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 저어 병원에 간 것 같은데요" 그것은 마치 병원이 생활의 일부이기라도 하다는 그런 어투였다. 생선가게에 생선을 사러 갔다든가 하는 그런 정도의 가벼운 어조였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지만 귀찮아져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뒹굴면서 나가사와에게 빌려 왔던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의 나머지를 읽어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책을 돌려주러 갔다.
나가사와는 막 식사를 하러 가려던 참이어서, 함께 가서 저녁을 먹었다.
"외무성 시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외무성의 상급 제 2차 시험이 이미 8월에 있었던 것이다.
나가사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통이지. 그런 건 보통만 되도 합격이야. 집단 토론이니 면접이니 그런 거니까. 여자앨 꼬이는 거나 다름없어."
"그럼 말하자면 간단했다, 그 말이군요. 발표는 언젭니까?"
"10월 초순께. 만약 합격한다면 멋지게 한턱 쓰지."
"그런데 외무성의 상급 제2차 시험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선배님 같은 사람들만 시험을 치러 옵니까?"
"천만에. 대개는 얼간이들이지. 얼간이 아니면 변태자고. 관료 나부랭이나 되려고 하는 인간의 95퍼센트 정도는 쓰레기거든.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그 작자들 글자조차 똑바로 읽지 못한다고."
"그럼 어째서 선배님은 외무성에 들어가려고 하지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외국 근무를 선호한다든지 해서지.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내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다는 거야. 어차피 테스트한다면 제일 커다란 그릇 속에서 테스트해 보고 싶다, 그거지. 말하자면 국가 말일세. 이 거창한 관료 기구 속에서 어디까지 자기가 올라갈 수 있느냐, 어디까지 자신이 힘을 낼 수 있느냐, 그런 걸 시험해 보고 싶다 그거야, 알겠나?"
"어째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게임 같은 거야. 나에겐 권력욕이랄까 금전욕이랄까 그런 건 거의 없어. 정말이야, 난 하찮은 고집스런 사내일지 모르지만, 그런 욕심은 놀랄 만큼 없는 놈이야. 이를테면 무사무욕, 그런 인간이거든, 다만 호기심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넓고 억센 세계에서 자기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을 뿐이지."
"그럼 이상이랄까, 그런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말입니까?"
"물론 없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인생엔 그런 건 필요 없어. 필요한 건 이상이 아니라 바로 행동 규범, 그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생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나 같은 인생은 싫다, 그 말인가?"
"농담은 그만두세요. 싫고 좋고 가 있을 수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도쿄 대학에 입학할 수도 없고, 나 좋을 때에 좋아하는 여자와 잘 수도 없고, 제법 말솜씨가 유창하달 것도 없습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2류 사립대학의 문학부를 나온댔자 뭐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 인생이 부러운가?"
"부럽진 않습니다. 난 너무나 내 자신에 익숙해 있으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도쿄 대학에도 외무성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그저 한 가지 부러운 건, 하쓰미 같은 멋진 애인을 가졌다는 그 점이지요."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이봐, 와타나베" 하고 식사가 끝나자 나가사와는 나에게 말했다. "나와 너는 이 학교를 나와 10년 또는 20년이 지나서도, 또 어딘 가에서 만나게 될 건만 같아.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서로 관련을 가질 것만 같고."
"꼭 디킨스의 소설 같은 이야기로군요." 하고 말하곤 나는 웃었다.
"그렇군. 하지만 내 예감은 잘 맞아떨어지지" 하고 그 또한 웃었다.
"식사 후에 둘이서 근처 스낵 바로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는 거기서 아홉 시가 지나도록 마셨다.
"그런데 선배님, 대체 선배님의 그 인생의 행동 규범이란 어떤 것입니까?"
"넌 분명히 웃을 거야."
"웃긴 왜 웃어요!"
"신사일 것, 그거지!"
"그럼, 신사일 것이란 어떤 의미지요? 만약 정의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선배님은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색다른 사람입니다."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돈으로 술값을 치렀다.
다음 주 월요일 연극사 2강의 시간에도 고바야시 미도리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교실을 죽 둘러보고 그녀가 출석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여느 때처럼 맨 앞 줄 좌석에 앉아 교수가 나타날 때까지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나는 여름 방학에 했던 여행에 대해 썼다. 걸어 다닌 길이며, 지나간 거리거리며, 만난 사람들에 대해 썼다.
나는 밤이면 나오코 생각을 한다. 나오코와 만나지 못하면서 부터,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나오코를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학은 따분하기 짝이 없지만, 자기 훈련 삼아 꼭꼭 출석해서 공부하고 있다. 나오코가 내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무슨 일을 해도 시시하게만 느껴진다. 한 번 나오코를 만나 차분히 이야기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나오코가 들어갔다는 요양소를 방문하고, 몇 시간만이라도 면회하고 싶은데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전과 같이, 나오코와 둘이서 나란히 걸어 보고 싶다.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짧은 편지라도 좋으니 꼭 답장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만 쓰고 나서 나는 그 네 장의 편지지를 곱게 접어 준비한 봉투에 넣고, 나오코의 주소를 썼다.
얼마 후, 울적한 듯한 얼굴을 한 작달만한 교수가 들어와서 출석 체크를 하더니,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다리가 약해서인지 노상 금속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연극사2는 재미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들을 만한 내실 있는 강의였다.
"여전히 덥군요." 하고 말한 다음,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 있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역주: 기계 장치로 된 신이라는 뜻)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에 있어서의 신이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에 관해서도 말했다.
15분쯤 지났을 즈음에 강의 실 문이 열리고 미도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짙은 블루의 스포츠 셔츠에다 크림 빛 면바지를 입고, 전과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교수를 향해 지각해서 죄송스럽다는 그런 미소를 띠고 나서,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곤 숄더백에서 노트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노트 속에는 '수요일, 미안했어요. 화났어요?' 그렇게 적힌 메모가 들어 있었다.
강의가 반쯤 진행되어 교수가 흑판에 희랍극의 무대 장치 그림을 그리고 있는 데, 다시 문이 열리고 헬멧을 뒤집어쓴 학생 두 명이 들어왔다. 마치 만담을 하는 콤비 같은 2인조였다. 한 명은 훤칠한 키에 얼굴이 희고, 또 한 명은 키가 작고 둥근 얼굴에 피부 빛이 검고, 어울리지도 않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쪽이 선동 전단을 안고 있었다. 키가 작은 쪽이 교수에게 다가가더니, 수업의 후반을 토론에 할당하고 싶으니 양해해 달라, 희랍 비극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가 오늘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요구가 아니라 단순한 통고일 뿐이었다. 나로선 희랍 비극보다도 심각한 문제가 현재 세계에 존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뭐라고 해도 통하지 않을 테니 좋을 대로하라고 교수는 말했다. 그리곤 강단 모서리를 잡고 다리를 아래로 내리더니, 금속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질질 끌며 강의실에서 나가 버렸다.
키가 훤칠한 녀석이 전단을 나누어 주는 동안, 얼굴이 둥근 녀석이 단상에 올라 연설을 했다. 전단에는 저 모든 사상을 단순화하는 특유의 간결 서체로, '기만적인 총장 선거 분쇄하고, 새로운 전학 동맹휴학에 전력을 결집하며, 일제 산학 협동 노선에 철퇴를 가한다.' 라고 씌어 있었다.
내세우는 바는 제법 훌륭했고, 내용에도 특별한 이의는 없었으나, 문장에 설득력이 없었다. 또한 신뢰성도 없었거니와 마음을 사로잡는 힘도 없었다. 둥근 얼굴이 한 연설도 피장파장이었었다. 그 타령이 그 타령이었다. 똑같은 멜로디에 가사의 토씨만 틀릴 뿐이었다. 이 녀석들의 진짜 적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나가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그러자며 일어나서 미도리와 같이 교실을 나섰다. 그때 둥근 얼굴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했는데, 무엇이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미도리는 "그럼 안녕" 하고는 그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거, 우리가 반 혁명분자일까요?" 하고 교실을 빠져나온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혁명이 성취된다면 우린 전봇대에 나란히 매달리겠지요?"
"매달리기 전에 가급적이면 점심을 먹어 두고 싶군." 하고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좀 멀긴 하지만 선배를 데리고 가고픈 가게가 있어요. 좀 시간이 걸려도 괜찮겠지요?"
"괜찮지, 두 시부터 수없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 어차피 뺑소니 칠 참이었으니까."
미도리는 나를 데리고 버스로 요쓰야까지 갔다 그녀가 데리고 간 가게는 요쓰야 뒷골목의 좀 으슥한 곳에 있는 도시락 집이었다.
우리가 탁자 앞에 앉자, 무슨 말도 하기 전에 주홍칠기의 사각형 용기에 담긴, 그날그날 내용물이 바뀌는 도시락과 국물 그릇이 놓여졌다. 과연 일부러 버스를 타고 찾아올 만한 값어치는 분명 있는 식당이었다.
"맛있는데."
"응. 게다가 값도 아주 싸요. 그래서 고교 시절부터 가끔씩 여기로 점심을 먹으러 왔죠. 내가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근처에 있었어요. 어찌나 까다로운 학교였던지, 우린 몰래 먹으로 왔지 뭐예요. 어쨌든 외식하는 걸 들키기만 하면, 당장 정학 처분을 당하는 학교였거든요."
선글라스를 벗은 미도리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약간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왼쪽 손목에 낀 가느다란 은팔찌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새끼손가락 끝으로 눈언저리를 갉작갉작 긁기도 했다.
"졸려?" 하고 내가 물었다.
"약간. 수면 부족인가 봐요. 어제 좀 바빠서요. 하지만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지난번엔 미안했어요. 아무래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중요한 볼일이 생겼거든요. 그것도 아침에 갑자기,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레스토랑에 전화할까 했지만 가게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선배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많이 기다렸죠?"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많아 죽을 지경이니까."
"그렇게 한가해요?"
"내 시간을 좀 줘서, 그 속에 미도리를 잠자게 해줬으면 싶을 정도지."
미도리는 턱을 고인 채 생긋 웃고는 내 얼굴을 보았다.
"선배, 참 친절한 사람이에요."
"친절할 것까진 없고,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거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미도리는 병원에 갔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 집에? 어떻게 집 전화번호를 알았지요?"
"학생과에서 알아냈지. 물론 누구든 다 알아낼 수 있는 일이야."
알겠다는 듯이 그녀는 두세 번 구개를 끄덕거리더니 또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랬군요. 그런 건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요. 선배 전화번호도 그렇게 하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 병원 말인데요, 다음번에 얘기하죠. 지금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괜찮아, 어째 좀 쓸데없는 걸 물어봤나 보군."
"으응, 그렇진 않아요. 지금 난 좀 지쳐 있을 뿐이에요. 비 맞은 원숭이처럼 지쳤거든요."
"집에 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아직 자고 싶진 않아요. 좀 걸을까요?" 하고 미도리는 내 표정을 살폈다.
미도리는 요쓰야 역에서 부터 얼마쯤 걸어간 곳에 있는, 그녀가 다녔다는 여고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요쓰야 역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문득 나오코와의 그 끝없는 보행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이 장소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만약 저 5월의 일요일에 중앙선 전철 안에서 공교롭게도 나오코와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결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다. 아마도 나와 나오코는 그때 만나야 했기 때문에 만난 것이고, 만약에 그때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고, 어딘가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와 미도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학교 건물에는 담쟁이덩굴이 얽혀 있고, 난간에는 몇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서 날개를 쉬고 있었다. 제법 정취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정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곁으로는 하얀 연기가 하늘로 꼿꼿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여름날의 남은 햇살이 연기를 더욱 아련히 보이게 했다.
"와타나베, 저 연기, 무엇인지 알겠어요?"
갑자기 미도리가 물었다.
"모르겠어."
"저거, 생리대를 태우고 있는 거예요."
"어휴." 나는 그런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그밖에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화장실 휴지통에 그런 걸 버리잖아요, 여학교니까. 그걸 청소부 아저씨가 모아 소각장에서 태우거든요. 그게 저 연기라고요."
"그런 줄 알고 보니 어딘지 처절하군 그래."
"응, 나도 교실 창문으로 저 연기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처절하구나 하고. 우리학교는 중. 고교 합치면 천 명 가까이 여자 애들이 있었어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애도 있으니까 9백 명이라 치고, 그 중 5분의 1이 생리중이라 치면, 대충 180명이겠죠. 그러면 하루에 180명분의 생리대가 휴지통에 버려진다는 계산이 나오죠?"
"대충 그렇겠군, 자세한 계산에는 흥미가 없지만."
"꽤 상당한 양이잖아요? 180명분이니까. 그걸 모아서 태운다는 거, 어떤 기분일까요?"
"글쎄, 상상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걸 내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한 참 동안 둘이서 그 하얀 연기를 바라보았다.
"사실 난 저 학교엔 가고 싶지 않았어요." 하고 미도리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보통의 공립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 가는 아주 보통의 학교에. 그리고 즐겁고 한가하게 청춘을 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허영 때문에 저기 들어가고 말았지요. 왜 국민학교 때 성적이 좋으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잖아요? 선생님이 이 아이 성적이라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렇게 되는 거요.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예요. 6년 동안 다녔지만 아무리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하루빨리 거기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6년을 다녔죠. 글쎄, 난 무지각, 무결석으로 표창까지 받았어요. 그토록 학교가 싫었는데도, 어째서 그랬는지 알겠어요?"
"모르겠는데."
"학교가 죽고 싶도록 싫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이를 악물고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한 번 지고 나면 끝장이란 생각, 한 번 지고 나면 그냥 줄줄 끌려가게 되자 않나 싶어서 겁이 났어요. 39도까지 열이 올랐을 때도 기어가다시피 해서 학교엘 갔어요. 선생님이 '이봐, 미도리, 너 몸이 별로 좋지 못한 것 같은데.' 하면, 나는 '괜찮아요' 하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버텼어요. 그래서 무지각. 무결석 표창장과 프랑스 어 사전을 받았던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난, 대학에서 독일어를 택했죠. 그래, 이놈의 학교 은혜 따윌 뭣 때
문에 입는담, 하고.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학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싫었지?"
"선배는 학교를 좋아했어요?"
"좋아하지도 또 특별히 싫어하지도 않았어. 난 아주 보통의 공립 고교에 다녔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았나 봐."
"저 학교 말이에요." 하고 미도리는 새끼손가락으로 눈가를 갉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엘리트 여자 애들이 모이는 학교예요. 좋은 집안에 성적도 좋다는 여자 애들이 한 천 명 모여드는 거죠. 말하자면 갑부의 딸들 만이라 그거예요. 안 그러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요. 수업료는 비싸겠다, 기부금도 노상 받아들이겠다. 수학여행이라도 가면 교토의 여관을 전세내 가지고, 칠기 소반에 가이세키 요리(역주: 만드는 대로 한 가지씩 손님에게 내놓는 고급 요리)를 먹겠다. 일 년에 한 번씩 오쿠라 호텔에서 테이블 매너 강습을 하겠다. 아무튼 보통이 아니란 말이예요. 알고 있어요? 우리 학년 160명중 도요시마 구에 살고 있는 학생은 나뿐이었다고. 난 언젠가 학생 명부를 전부 살펴보았어요. 다들 도대체 어떤 곳에 살고 있을까 하고요. 굉장하지도 않지 뭐예요. 지요다 구 3번가, 미나토 구모토아자부, 오오타 구 덴엔초후, 세타가야 구 세이조. 아오, 죽 그런 곳뿐이겠죠. 꼭 하나, 지바 현에 사는 가시와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난 그 애하고는 좀 사이가 좋았죠. 착한 애였어요. '우리 집에 놀러와, 먼데라서 미안하지만' 하기에 '그래 좋아, 그러자' 하고 가 보았지요. 놀라 자빠졌지 뭐예요. 아무튼 정원을 다 돌아보는 데 15분이나 걸렸으니까. 굉장한 정원에서, 소형 차만한 커다란 개 두 마리가 글쎄, 쇠고기 덩어릴 우적우적 먹고 있잖아요, 클래스에서 말예요. 지각할 염려가 있으면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학교 가까이까지 오는 아이가 말예요. 차는 운전사가 딸린 차였는데, 그 운전사 또 그린 호네트 에서 나오는 운전사처럼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끼고 있지 뭐예요. 그런데도 그앤 글쎄,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죠? 그래, 믿을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요시마 구 기타오쓰카 같은 거, 학교 전체를 찾아봐도 나 정도밖엔 없었어요. 더구나 부모의 직업란에는 이렇게 돼 있죠, '서점 경영'이라고. 덕분에 클래스 전원이 나를 두고 몹시 신기해했어요. 읽고 싶은 책을 얼마든지 읽어서 좋겠다고. 어처구니없지 뭐야. 모두가 생각하는 건 기노쿠니야 같은 대형 서점이란 말예요. 그 애들은 서점이라면 그런 대형 서점밖엔 상상치 못하는가 봐요. 하지만 그 실물로 말하자면 참담하기 그지없죠. 고바야시 서점, 가엾은 고바야시 서점. 드르륵 문을 열면 눈앞에 즐비하게 잡지가 줄지어 있어요. 제일 착실하게 팔리는 것이 여성 잡지, 새로운 성의 기교, 그림과 해설을 곁들인 마흔여덟 가지 방법의 부록이 달린 그거예요. 동네 주부가 그런 걸 사갖고 가서 주방 탁자 앞에 앉아서 숙독을 하곤, 남편이 들어오면 당장 시험해 보는 거지요. 그게 제법 볼 만하지 뭐예요. 정말이지 세상 부인네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지 몰라요. 그리고 또 만화, 이것 역시 잘 팔린다고요. '매거진', '선데이', '점프' 등등 그리고 물론 주간지들. 아무튼 거의 전부가 잡지죠. 얼마쯤 문고본도 있지만 대단한 건 없어요. 미스테리라든지, 역사물, 풍속물, 그런 것밖엔 팔리지 않거든요. 그리고 실용 서적 같은 것, 바둑 두는 법, 분재 가꾸기, 결혼식 주례법, 이것만은 알아야 할 성 생활, 담배는 곧 끊을 수 있다. 등등. 그리고 우리 집에선 문방구까지 팔고 있거든요. 계산대 옆에 볼펜이라든지 연필이라든지 노트라든지 그런 걸 진열해 놓고 말예요. 그것뿐이에요. '전쟁과 평화'도 없고, '성적 인간'도 없고, '호밀밭의 파수꾼'도 없어요. 그것이 고바야시 서점이지요. 그런 것들의 도대체 어디가 부럽다는 거예요? 선배도 부러워요?"
"그 전경이 눈앞에 떠오르는데."
"말하자면 그런 가게예요. 동네 사람들이 다들 우리 집으로 책을 사러 오겠다, 배달도 해주겠다, 단골손님도 많겠다, 그래서 한 가족 네 사람은 충분히 먹고 살지요. 빚도 없고요. 딸 둘을 대학에 보낼 순 있어요. 하지만 그것뿐, 그 이상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할 만한 여유는 집엔 없어요. 그러니까 저런 학교에 날 넣어선 안 될 일이었다고요. 그런, 참담해질 뿐인 걸. 무슨 기부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은 투덜투덜 불평을 하고, 클래스 친구들과 어딘가 놀러 가더라도, 식사 때가 되면 비싼 가게에 들어가 모자라지 않을까 겁을 먹어야 하고. 그런 인생이란 어둡지 뭐예요. 와타나베 선배네는 부자예요?"
"우리 집? 우리 아버진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야. 특별한 부자도 아니고 특별히 가난뱅이도 아니지. 자식을 도쿄의 사립대학에 보내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로 생각되지만, 자식은 나 하나뿐이니 그런대로 별 문제는 없지. 보내 주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라고. 자그마한 뜰이 있고 도요타 카롤러가 있고."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요?"
"한 주에 세 번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에서 밤일을 하고 있어. 쉬운 일이야. 가만히 앉아서 가게만 지키면 되니까."
"흐음"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난 말이죠, 선배는 돈 고생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쩐지, 겉보기로는 그래요."
"고생한 적은 없지, 별로. 그다지 많은 돈을 가진 게 아니라는 것뿐이야. 세상 사람들 대개는 다 그렇지."
"내가 다닌 학교에선 대개의 사람들이 부자였다고요." 하고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양쪽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며 말했다.
"그것이 문제였어요."
"그럼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은 세계를 실컷 보면 되잖아."
"부자의 최대 이점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령 내가 클래스 친구한테 뭐 좀 하자꾸나. 그랬다고 해요. 그러면 상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 지금 돈 없어서 안 돼'라고. 반대 입장이 된다면, 나는 절대 그런 소리를 못해요. 내가 가령 지금 돈이 없어 그런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요. 비참할 뿐이지요. 예쁜 여자가 '나 오늘은 얼굴이 지저분하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같거든요.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릴 해봐요. 웃음거리만 될 뿐이지. 그런 것이 내 세계였던 거예요. 지난해까지 6년간이나."
"이렇게 지내다 보면 잊어진다고."
"어서 잊어버리고 싶어요. 난 대학에 들어와서 정말 마음이 놓였어요. 보통 사람들이 아주 잔뜩 있어서."
그녀는 아주 조금 입술을 비쭉이 하고 웃고는, 짧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미도리는 무슨 아르바이트라도 하니?"
"응, 지도의 해설 쓰기요. 지도를 사면 팸플릿 비슷한 게 붙어 있지요? 도시 설명이라든지, 인구라든지, 명소라든지에 대해 여러 가지로 씌어져 있는 거. 이곳에 이러이러한 하이킹 코스가 있고, 이러한 전설이 있으며, 이러한 꽃이 피고, 이러한 새가 있다든지 하는 거 말이에요. 그 원고를 쓰는 일이죠. 그런 건 참 간단해요. 히비야 도서관에 가서 하루 동안만 책을 뒤지면 한 권은 쓸 수 있거든요. 조금만 비결을 터득하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들어오고."
"비결이라니, 어떤 비결이지?"
"이를테면 말예요, 남이 쓸 수 없는 그런 걸 조그만 끼워 놓으면 되거든요. 그러면 지금 회사의 담당자는 '저애는 제법 글을 쓴다.'고 생각한단 말예요. 몹시 감탄해 주기도 하고. 아주 대수로운 게 아니라도 좋아요. 아주 간단한 거면 돼요. 가령 말이에요. '댐을 만들기 위해 마을 하나가 여기에 수몰됐는데, 철새들은 지금도 그 마을에 대해 기억하고 있어서, 계절이 돌아오면 새들이 그 호수 위를 언제까지나 날아다니는 광경을 언제까지나 볼 수 있다.'라든지 하는 에피소드를 한 가지 끼워 놓으면, 다들 굉장히 좋아하죠. 어때요, 서정적이고 낭만적이잖아요? 아르바이트하는 다른 보통의 아이들은 그런 궁리는 안하거든요, 그다지. 그래서 난 제법 좋은 돈벌이를 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 원고 작업 덕분에."
"하지만 어떻게 그런 에피소드를 그렇게 잘 찾아내지?"
"그래요." 하고 미도리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찾아내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어떻게 찾아지는 것이고, 찾아지지 않으면 해롭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내면 되죠, 뭐."
"옳아" 하고 나는 감탄했다.
"피이스(평화)" 하고 미도리는 외쳤다.
그녀는 내가 있는 기숙사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국기 게양' 이야기며 '돌격대'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 등을 했다. 미도리도 '돌격대'이야기엔 배꼽을 잡았다. '돌격대'는 온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 같았다. 미도리는 재미있어 보이니 한 번 꼭 좀 그 기숙사를 보고 싶다고 했다.
"보았자 별 재미도 없어. 남자 녀석들이 몇 백 명 지저분한 방안에서 술도 마시고, 마스터베이션도 하고 있을 뿐이니까."
"선배도 해요 그 짓?"
"안하는 인간은 없지." 하고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자에게 생리가 있는 것처럼, 남자는 마스터베이션을 하거든. 모두가 하지, 누구나 다.
"애인이 있는 사람도 할까요? 즉 섹스 상대가 있는 사람도?"
"그런 문제가 아냐. 내 옆방의 게이오에 다니는 녀석만 해도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나서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그러는 편이 안정이 된다나."
"난 이해하기 힘든데요? 줄곧 여학교에만 다녔으니까."
"여성 잡지 부록에도 씌어 있지 않고 말이지."
"정말" 하고 미도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와타나베 선배, 이번 일요일에 한가해요? 시간 있어요?"
"어느 일요일이든 한가하지. 여섯시부터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하긴 하지만."
"좋다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오지 않을래요? 고바야시 서점에. 가게는 닫혔겠지만, 난 저녁때까지 집을 봐야 해요. 좀 중요한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르니까요. 어때,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요? 내가 지어 줄게요."
"고맙군." 하고 나는 동의했다.
그녀는 노트를 찢어서 집까지의 약도를 자세하게 그려 주었다. 그리고 빨강 볼펜을 꺼내어 집이 있는 곳에 크게 X표를 쳤다.
"싫더라도 저절로 알게 돼요.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간판이 나붙었으니깐. 열두 시쯤 해서 와줄래요? 점심을 준비해 두겠어요."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 약도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슬슬 대학에 돌아가 두 시부터 시작되는 독일어 강의에 출석하겠다고 했다. 그녀도 갈 데가 있다면서 요쓰야에서 전철을 탔다.
일요일 아침, 나는 아홉시에 일어나 수염을 깎고, 빨래를 해서 옥상에 널었다. 상쾌한 날씨였다. 제법 가을 냄새가 났다. 고추잠자리 떼가 안마당을 빙빙 날아다니고, 동네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가지고 쫓아다녔다. 바람은 없고 국기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깨끗이 다림질을 한 셔츠를 입고 기숙사를 나와 전철역까지 걸었다. 일요일의 학생 구역은 마치 쥐 죽은 듯이 휑뎅그렁하여 사람 그림자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상점들은 닫혀 있었다.
거리의 갖가지 소음은 여느 때보다 한층 또렷 또렷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재 힐이 달린 사보를 신은 여자가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지르고, 전철 차고 옆에서는 네댓 명의 아이들이 빈 깡통을 나란히 세워 놓고 그걸 겨누어 돌을 던지고 있었다.
꽃집 하나가 열려 있기에, 나는 거기서 수선화 몇 송이를 샀다. 가을에 수선화를 산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예전부터 수선화를 좋아했다.
일요일 아침 전철에는 일행인 듯한 할머니 세 분만 타고 있었다. 내가 차에 오르자 할머니들은 내 얼굴과 내 손에 들고 있는 수선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나의 얼굴을 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나도 빙그레 웃어 주고는 맨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스쳐 가는 낡은 집들을 바라보았다. 전철은 그 집들의 추녀 끝에 닿을락 말락하며 달렸다.
어느 집의 베란다에는 토마토의 모종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마당에서 어린아이가 비눗방울을 날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이시다 아유미의 노래가 들려 왔다. 그리고 어디선지 카레 냄새도 풍겨왔다.
전철은 그러한 인정어린 뒷골목을 누비듯 스르르 달리고 있었다. 도중 역에서 몇몇 승객이 올라탔다. 할머니 일행은 싫증도 안 나는 지 뭔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쓰카 역에서 내린 나는 그녀가 약도에 그려 준 대로 별 볼품없는 길을 걸었다. 길을 따라 즐비하게 서 있는 상점들은 하나같이 그저 그렇게 보였다. 어느 상점이나 낡은 건물에다 상점 안은 침침해 보였다. 간판 글씨가 거의 지워진 것도 있었다.
건물이 낡은 정도나 스타일로 보아서, 이 근처는 전쟁 때 폭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같은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싶었다. 물론 새로 개축한 집도 있었고, 어느 집이나 거의가 증축을 했거나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긴 했지만, 그런 것은 숫제 허름한 옛집보다도 한층 지저분해 보일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동차의 포화 상태와 대기 오염, 지독한 소음과 비싼 집세에 견디다 못해 교외로 옮겨가 버렸고, 뒤에 남은 것은 싸구려 아파트나 사택, 이사하기 어려운 상점, 또는 오랫동안 이곳 토지에 매달려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뿐이라는 분위기를 주는 거리였다.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마치 안개가 덮인 듯이 모두가 희뿌옇고 구질구질했다.
그런 길을 10분쯤 걸어가다 주유소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조그마한 상점가가 있었고, 한 중간쯤에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분명 큰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미도리의 말을 듣고 상상했던 만큼 작지도 않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흔히 있는 보통의 서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발매 일을 기다리다 못해 소년 잡지를 사러 달려갔던 그런 책방이었다. 고바야시 서점 앞에 서 있자니까, 어쩐지 옛날이 그리워졌다. 어느 거리에나 이런 서점은 있게 마련이다.
서점은 아주 셔터를 내렸고 셔터엔 '주간 문춘 매주 목요일 발매' 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열두 시가 되려면 아직도 15분쯤 남아 있었다. 수선화를 들고 상점가를 거닐면서 시간을 때우자니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나는 셔터 옆에 있는 벨을 누르고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15초쯤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벨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데, 위쪽에서 드르륵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셔터 열고 들어와요."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시간이 좀 이른데 괜찮아?"
나도 되받아 소리쳤다.
"괜찮고말고요. 2층으로 올라와요. 난 지금 잠시도 손을 뗄 수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는 다시 드르륵 창문이 닫혔다.
나는 터무니없이 큰소리를 내면서 셔터를 1미터쯤 밀어 올리고, 몸을 구부려 안으로 들어가 셔터를 다시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가게 안은 아주 캄캄했다. 나는 끈으로 묶어 놓은 반품용 잡지 꾸러미에 걸려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하면서, 간신히 안쪽으로 들어가 손으로 더듬더듬 구두를 벗고 위로 올라갔다.
집 안은 어둡고 침침했다. 디딤돌에 올라서자 응접실처럼 되어 있는 곳에 소박한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방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고, 창문에는 한 10년 전의 폴란드 영화 장면 같은 어둑한 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왼쪽에는 창고 같기도 하고 다용도실 같기도 한 공간이 있었고, 화장실 문도 보였다. 오른쪽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니 2층이 나타났다. 2층은 아래층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아 나는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쪽이에요." 하고 어디선가 미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에 올라서니 오른쪽에 식당 같은 방이 있었고, 그 안쪽에는 주방이 있었다. 집 자체는 낡았지만 주방은 아주 최근에 보수한 듯, 싱크대도 수도꼭지도 찬장도 모두가 반짝거리는 새것이었다. 그리고 미도리가 거기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냄비에서는 뭔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고, 생선 굽는 냄새도 났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으니 거기 앉아서 마시고 있을래요?" 하고 미도리가 이쪽을 흘끗 보면서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마셨다. 맥주는 한 반년쯤 그 속에 들어 있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냉장이 잘 돼 있었다. 테이플 위에는 조그만 재떨이와 신문과 간장병이 놓여 있었다. 메모 용지며 볼펜도 있었는데, 메모 용지에는 전화번호며 시장을 본 계산을 한 듯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한 10분쯤이면 다 될 것 같은데, 거기서 기다릴래요? 기다릴 수 있어요?"
"물론 기다릴 수 있지."
"기다리면서 뱃속을 좀 비워 둬요. 양은 충분하니까."
나는 찬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정신없이 요리를 만드는 미도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잽싸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한꺼번에 네 가지 정도의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쪽에서 끓는 것의 맛을 보는가 하면, 뭔가를 도마 위에서 재빨리 썰고,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어 담아 놓는가 하면, 다 사용한 냄비를 물에다 깨끗이 씻기도 했다.
뒤에서 보는 그녀의 그 모습은 마치 인도의 타악기 연주자를 연상케 했다. 저쪽 종을 울리는가 하면 이쪽 판자를 두드리고, 그리곤 물소 뼈를 두드리기도 하는 그런 식이었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민첩하고 낭비가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나는 감탄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좀 도울 일이 없을까?" 하고 나는 말을 걸어 보았다.
"아니에요, 나 혼자 하는 데 익숙하니까요."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살짝 이쪽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통이 좁은 블루진 바지에 네이비블루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등판에 애플 레코드의 사과 마크가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뒤에서 보니 그녀의 허리는 놀라우리만큼 가늘었다. 마치 허리를 튼튼하게 굳히기 위한 성장의 한 과정을, 어떤 사정으로 뛰어 넘어 버렸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날씬한 허리였다. 그래서 보통 여자가 슬림진을 입었을 때의 모습보다 훨씬 중성적인 인상을 주었다.
싱크대 위의 창문으로 비쳐 드는 밝은 빛살이 그녀 몸매의 윤곽에다 어렴풋이 테두리 장식 같은 것을 달아 놓고 있었다.
"그렇게 근사한 식사를 만들 것까지는 없는데."
"전혀 근사하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를 했다.
"어제는 바빠서 시장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냉장고에 있는 걸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었을 뿐인 걸요. 그러니 전혀 신경 쓸 것 없어요, 정말. 그리고 손님 접대하기 좋아하는 건 우리 집 가풍이에요. 우리 가족은 말이죠, 어떻게 된 셈인지 손님 접대를 무척 좋아해요, 근본적으로 어째 좀 병적인 것 같아요. 별로 남달리 친절한 가정이랄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인망이 높은 것도 아니면서요. 어쨌든 손님만 왔다하면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접대를 하거든요. 가족 모두가 그런 성격이에요.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우리 아버진 거의 술도 못하면서 집안엔 온통 술투성이라니까요. 왜 그런지 알아요?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실컷 맥주를 들어요, 사양 말고."
"고마워."
나는 문득 수선화를 아래층에 놓아두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구두를 벗을 때 옆에 놓고는 깜빡 잊은 채 올라온 것이다.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어두컴컴한 데서 열 송이의 하얀 수선화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찬장 속에서 홀쭉한 유리컵을 꺼내더니 거기다 수선화를 꽂았다.
"난 수선화를 참 좋아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옛날 고등학교 다닐 때 문화제에서, '일곱 송이 수선화'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 노래 알아요, '일곱 송이 수선화'?"
"알지, 물론 알고말고."
"전에 포크 그룹을 했죠, 기타 치면서."
그녀는 '일곱 송이 수선화'를 흥얼거리면서 요리를 접시에 담았다.
만들어진 요리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 넘어선 훌륭한 솜씨였다. 생선회 식초 무침에다, 산뜻한 국물, 계란말이, 손수 만든 삼치 절임, 가지 조림, 순채 장국, 버섯밥, 거기다 단무지를 잘게 썰어 깨소금을 뿌린 것을 듬뿍 곁들여 내놓았다. 양념 솜씨는 산뜻한 간사이 식이었다.
"아주 맛있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어때요, 와타나베 선배.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내 요리 솜씨를 기대하진 않았겠죠?"
"글쎄" 하고 나는 어정쩡하게 대꾸했다.
"와타나베 선배는 간사이 사람이니까 이런 양념을 좋아하죠?"
"나 때문에 일부러 간사이 식으로 만들었어?"
"설마, 아무리 그렇기로 그런 까다로운 짓을 누가 해요. 우리 집은 늘 이런 식이에요."
"그럼 부모님이 간사이 분이신가?"
"아니, 아버진 내내 이 고장에 계셨고, 어머닌 후쿠시마 분이에요. 우리 친척 중엔 아무리 찾아도 간사이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고요. 우린 도쿄, 북간도계 일가니까요."
"잘 모르겠는데, 그럼 어떻게 이처럼 완벽한 정통 간사이식 요리를 만들 수 있지? 누구에게 배웠어?"
"뭐 이야기하자면 길어져요." 하고 그녀는 계란말이를 먹으면서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도대체가 집안일이라고 이름 붙은 일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요리 같은 거는 아예 만들지도 않았거든요. 더구나 보다시피 우리는 장사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은 뭐 사다 먹자라든가, 식육점에서 만들어 파는 고로케를 사다가 그걸로 때워 버린다든가, 그런 식이 상당히 많았다고요.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식이 정말 싫었거든요. 정말 죽도록 싫었죠. 카레 3인분을 한꺼번에 만들어 놓고 매일 같이 그걸 먹는다든가 하니. 그래서 어느 날, 중 3때의 일이지만, 식사만은 꼬박꼬박 제때에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그
리고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가장 훌륭해 보이는 요리책을 사들고 돌아와 거기 적혀 있는 걸 몽땅 마스터 했죠. 칼과 도마 선택하는 법, 칼 가는 법, 생선 다루는 법, 가쓰오부시 깎는 법, 모두 다요. 그런데 그 책을 쓴 사람이 간사이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만드는 요리도 전부 간사이 식이 돼버린 거예요."
"그럼 이걸 모두 책으로 공부했어?"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나중엔 돈을 모아 가지고 제대로 된 가이세키 요리를 먹으러 가기도 했죠. 그래서 제법 맛들인 거야. 난 제법 감을 잘 잡거든요. 논리적 사고라든가 하는 건 틀려먹었지만."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이만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니, 이건 정말 대단해."
"나, 정말 혼났다니까요." 하고 그녀는 한숨까지 쉬며 말했다. "어쨌든 요리엔 전혀 이해도 관심도 없는 집안이었어요. 제대로 된 칼이며 냄비를 사고 싶다해도 누가 돈을 줘야지요.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였죠. 참 엉터리지. 저런 얄팍한 칼로 생선을 어떻게 다루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말이죠, 생선을 발라내긴 뭘 발라내느냐는 거죠. 그러니 말 다했죠. 하는 수 없이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식칼이라든가 냄비라든가 소쿠리 같은 것을 샀어요. 어때, 믿을 수 있어요? 열대여섯 살짜리 여자 애가 손톱에 불이 붙은 듯 열심히 돈을 모아 소쿠리, 숫돌, 튀김 냄비 등등을 사들였다는 걸요. 내 친구들은 용돈을 듬뿍 타가지고 멋진 드레스며 구두를 사는 데 말이죠. 어때요, 불쌍하지 않아요?"
나는 순채 장국을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 1때, 난 아무래도 계란 굽는 기구가 사고 싶었어요. 국물 계란말이를 만들기 위한 가늘고 길쭉한 동제품이었죠. 그래서 난 새 브래지어 살 돈으로 그것을 사버렸어요. 덕분에 혼이 났죠. 한 3개월쯤을 브래지어 한 개로 견뎌야 했으니까요. 믿을 수 있어요? 밤이면 빨아서 열심히 말려 아침에 그걸 하고 나갔죠. 가끔 마르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또 없었죠. 세상에 축축한 브래지어를 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거예요. 더구나 그것이 국물 계란말이 기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말예요."
"정말 그랬겠군, 알만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하긴 어머니한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약간은 다행이다 싶었죠. 생활비를 맘대로 쓰고, 사고 싶은 것도 맘대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요리 기구가 상당히 갖추어졌어요. 우리 아버진 생활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전혀 알지 못하니까."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는데?"
"2년 전" 하고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암이었죠, 뇌종양. 1년 반을 입원해 있으면서 갖은 고생 끝에, 나중엔 약에 절은 것처럼 돼 버렸어요.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거의 안락사나 다를 바 없이 그렇게 돌아가셨죠. 뭐라고 할까, 그건 정말 최악의 죽음이었어요. 본인도 고통스럽고 주위 사람들도 고생이고. 그 때문에 집에는 돈이 바닥이 나다시피 했어요. 한 대에 2만 엔이나 하는 주사를 계속 맞아야 하죠, 간호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그러니 이래저래 그렇게 됐죠. 간호하느라고 나는 휴학을 해야 했고, 뭐 엉망진창이었어요. 더구나....."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생각을 바꿨는지 그만두고, 젓가락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가 뜻하지 않게 침울해졌네요. 어째서 이런 이야길 하게 됐죠?"
"젖은 브래지어 이야기부터였지."
"바로 그 국물 계란말이예요. 정성을 들인 거라고요."
그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몫을 다 먹고 나니 배가 가득 찼다. 그녀는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요리를 만들면 그 만드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고요." 하면서 그녀는 일찍 젓가락을 놓았다.
식사를 끝내자 그녀는 그릇을 거두고 테이블 위를 닦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말보로 담뱃갑을 들고 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더니 성냥불로 그어댔다. 그녀는 수선화가 꽂혀 있는 유리컵을 손에 들고 잠시 바라보았다.
"이대로가 좋을 것 같아요. 꽃병에 옮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막 가까운 물가에서 수선화를 꺾어다 우선 손에 닿는 대로 컵에 꽂아 놓았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오쓰카 역 앞 물가에서 꺾어 왔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와타나베 선배는 참 이상해요. 농담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농담을 하거든요."
그녀는 턱을 괴고 담배를 절반쯤 피우더니, 재떨이에 힘껏 눌러 비벼 껐다. 그리고 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손가락으로 눈을 마냥 비볐다.
"여자는 좀 더 품위 있게 담배를 끄는 법이야."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야 꼭 천박한 여자 같잖아. 무리하게 끄려고 애쓰지 말고 서서히 주위부터 꺼 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짓누르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좀 너무하잖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코로 담배 연기를 내뿜지 말아야 해. 남자와 둘이서 식사할 때는, 석 달 동안을 브래지어 하나로 견뎠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지,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난 그런 여자야." 하고 그녀는 콧등을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조신하게 굴 수 없는 걸요 뭐. 이따금 장난삼아 피워보지만 아무래도 몸에 배지 않아요. 달리 또 뭐 할 말이 있나요?"
"말보로는 여자가 피우는 담배가 아니야."
"어때요, 뭐. 어차피 뭘 피우건 맛없기는 마찬가진데."
그녀는 손 안에서 말보로의 딱딱한 빨간 패키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지난달부터 피우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사실은 특별히 피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저 호기심에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라기보다, 선배는 담배 안 피워요?"
"6월에 끊었어."
"왜 끊었죠?"
"귀찮아 서지. 밤중에 담배가 떨어졌을 때의 그 괴로움, 그런 것 말이야. 그래서 끊었지.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속박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보기보단 만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성격이군요. 그렇죠?"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 그런 성격 탓으로 사람들에게 별로 호감을 못 주는지도 모르고. 옛날부터 그랬어."
"그건요, 선배가 남이 좋아하지 않아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선배를 못마땅해 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녀는 턱을 괴면서 어정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선배와 이야기하는 게 정말 좋아요, 말투도 아주 특이하고. '무엇에든지 속박당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는 말 같은 거."
나는 그릇 씻는 것을 도왔다. 그녀 옆에 서서 그녀가 씻어 놓은 그릇을 행주로 닦아 조리대 위에 쌓으며 물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모두 어딜 간 거지, 오늘?"
"엄마는 무덤 속에요. 2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건 아까 들었어."
"언니는 약혼자와 데이트하고 있어요. 어딘가 드라이브라도 갔겠죠. 언니 그이는 자동차 회사에 다녀요. 그래서 자동차를 무척 좋아해요. 난 자동차가 그렇게 좋지 않지만."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다시 접시를 씻었고, 나도 말없이 그것을 닦았다.
"다음은 아버지인데" 하고 잠시 후 그녀는 말했다.
"아버진 작년 6월 우루과이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루과이?"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우루과이는 왜?"
"아버진 우루과이로 이민 갈 생각이었죠,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군대 있을 때 사귄 사람이 우루과이에 농장을 가지고 있으니, 거길 가면 어떻게든 될 것 아니냐고 했나 봐요. 갑자기 그 말을 꺼내더니 혼자서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가버린 거죠. 우린 한사코 말렸어요. 그런 곳에 가보았자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도 통하지 않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도쿄 밖으론 나가 본 일이 별로 없지 않느냐고요. 하지만 헛일이었어요. 아버지는 분명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로 해서 굉장한 쇼크를 받았던 거예요. 그래서 머리의 나사가 빠져 버렸던 모양이에요. 그만큼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었죠. 정말이에요."
나는 뭐라고 맞장구를 칠 수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우리 자매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이렇게 말했어요. '난 몹시 억울하다. 너의 어머니를 잃기보단 너희들 자매를 잃는 편이 훨씬 낳았겠다.' 우린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어때요, 그렇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렇기로 어떻게 그런 말을, 물론 가장 사랑하는 반려자를 잃은 괴로움과 슬픔과 고통, 그건 이해해요. 안 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친딸을 보고 너희들이 대신 죽었더라면 하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안그래요? 그건 좀 너무했다 싶지 않아요?"
"그건 그렇군."
"우리라고 뭐 속이 편할 순 없잖아요. 아무튼 우리 가족은 모두 좀 이상해요. 어딘가 좀 어긋나 있는 거죠." 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군." 하고 나도 인정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딸들에게 너희들이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할 만큼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글쎄, 그렇게 말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곤 우루과이로 가버린 거예요. 우리를 그냥 버려두고."
나는 말없이 접시를 닦았다. 접시를 다 닦자 그녀는 내가 닦아 놓은 그릇들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래, 아버님은 연락이 없어?"
"꼭 한 번 그림엽서가 왔어요. 지난 3월에. 하지만 자세한 이야긴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어요. 이쪽은 덥다는 둥, 생각보다는 과일 맛이 좋지 않다는 둥 그런 말뿐이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그것도 신통치 않은 당나귀사진이 담긴 엽서에다 말예요. 머리가 좀 이상해요, 우리 아버진. 그 친군지 친진지를 만났는지 못 만났는지 조차도 적혀 있지 않았다니까요. 끝에다 좀 더 안정이 되면 나와 언니를 데려가겠다고 씌어 있긴 했지만요. 그리곤 그만 소식불통. 제가 편지를 보냈는데도 답장이 안 오지 뭐예요."
"그런데 혹 아버님이 우루과이로 오라고 하면 미도린 어쩔 거야?"
"난 가볼 생각이에요. 재미있지 않아요? 언닌 절대로 안 간대요. 우리 언닌 불결한 물건이나 불결한 장소, 그런 것은 아주 딱 질색이거든요."
"우루과이가 그렇게 불결한가?"
"몰라요, 하지만 언니는 그렇게 믿고 있거든요. 길에는 당나귀 똥이 널렸고, 거기엔 파리가 윙윙거리고, 수세식 변소라는 곳에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도마뱀이나 전갈 따위가 우글거리고, 그런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겠죠. 우리 언닌 벌레라면 질색을 해요. 언니가 좋아하는 건 번쩍번쩍하는 차를 타고 쇼난 같은 델 드라이브 하는 거죠."
"으음."
"우루과이, 좋지 않아요? 난 가도 좋아요."
"그럼 이 서점은 현재 누가 하고 있지?"
"언니가 그럭저럭하고 있죠. 근처에 살고 있는 친척 아저씨가 매일 도와줘요. 배달도 해주고. 나도 틈나는 대로 돕고. 책방이란 게 그렇게 중노동은 아니니까 우물쭈물 해나가는 거죠. 도저히 안 된다면 가겔 팔아 버릴 작정이지만."
"아버님은 좋아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좋아한단 것도 없어요."
"그럼 어째서 우루과이까지 가겠다는 거지?"
"믿기 때문이죠."
"믿는다고?"
"그래요.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믿기는 하죠, 아버지를 말이에요. 어머니를 잃어버린 쇼크로 가정도 자식도 일도 다 포기하고 훌쩍 우루과이로 가버린 그런 분이시지만, 난 믿는다 그거예요. 알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우습다는 듯이 웃고는, 내 잔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으니까."
그 일요일 오후에는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이상한 하루였다. 미도리네 집 바로 근처에서 불이 나 우리는 3층 옥상으로 올라가 불구경을 하고, 그리곤 얼떨결에 키스를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바보스럽기도 하지만, 어떻든 일이 바로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우리가 대학 이야기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이렌 소리가 차츰 커지는 것으로 보아, 그 숫자도 점점 증가하는 것 같았다. 창문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고, 몇 사람인가는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미도리는 한길이 보이는 방으로 가서 창문을 열고 아래를 보더니,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통통통 하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우루과이란 대체 어디에 있었더라?'하고 생각 했다. 브라질이 거기고, 베네수엘라가 거기고, 이 언저리가 콜롬비아고 하면서 한참을 생각했으나, 우루과이가 어느 부근에 있는지는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미도리가 아래로 내려와서, "이봐요, 어서 이라 와요!" 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 끝에 있는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널찍한 옥상으로 나섰다. 그곳은 주위의 다른 집들의 지붕보다도 한결 높아서, 동네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서너 집 저편에서 뭉게뭉게 검은 연기가 치솟아 미풍을 타고 한 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 타는 퀴퀴한 냄새도 함께 풍겼다.
미도리는 난간에서 몸을 내밀듯이 하고 말했다.
"저거 사카모토 씨네 집이에요. 사카모토 씨는 전에 건구점을 했어요. 지금은 가게를 닫았지만."
나도 난간에서 몸을 내밀 듯이 하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3층짜리 빌딩 그늘이 져 있어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소방차가 세 대인지 네 대인지 모여서 진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길거리가 비좁은 탓으로 겨우 두 대밖엔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나머지 차들은 큰길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길에는 여느 때처럼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챙겨서 이곳을 뜨는 게 좋겠는데" 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은 바람이 반대로 부니까 괜찮지만 언제 바뀔지도 모르고, 바로 옆이 주유소잖아. 내가 도울 테니 짐을 꾸리라고."
"중요한 물건 같은 건 없는 걸요."
"그래도 무언가 있을 테지. 예금 통장이라든가 인감도장이라든가 무슨 증서라든가 그런 것. 우선 무엇보다도 돈이 없으면 곤란할 테니까."
"걱정 없어요. 난 도망 안 갈 거니까."
"여기가 불에 타도?"
"그래요 죽어도 상관없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도 내 눈을 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본심이고, 어디서부터 농담인지 나로선 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한참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뭐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심정이 되었다.
"좋아, 알았어. 나도 너랑 같이 있겠어."
"같이 죽어 줄래요?" 하고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설마. 위험해지면 난 도망칠 거야. 죽고 싶거든 너 혼자서 죽으면 되잖아."
"냉정하네요."
"점심 대접쯤 받았대서 같이 죽을 순 없잖아. 저녁 식사라면 또 몰라도."
"흐응, 그래 좋아요, 아무튼 여기서 잠깐 어떻게 되나 바라보면서 우리 노래라도 불러요. 사태가 위험해지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노래를?"
그녀는 아래에서 방석 두 개와 캔 맥주 네 개, 그리고 기타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런 짓을 해서 동네 사람들의 빈축을 사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동네에 불이 난 것을 구경하며 옥상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는 게, 그다지 떳떳한 행동이라곤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어요, 뭐, 그런 거. 우리는 동네일에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
미도리는 가볍게 대꾸하고 나서 옛날에 유행했던 포크 송을 불렀다. 한 수 접어놓고 봐준대도 노래나 기타 솜씨나 좋다곤 할 수 없었지만, 본인은 아주 즐거운 듯했다. 그녀는 '레몬트리'니 '팝'이니 '500마일', '꽃들은 어디로 갔나', '노 저어라 마이클' 등을 닥치는 대로 불러댔다.
처음엔 미도리는 내게 저음 파트를 가르쳐 둘이서 합창을 하려고 했으나, 내 노래가 워낙 시원치 않자 그녀는 단념하고 혼자서 기분나는 대로 불러댔다.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불타는 상황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는 갑자기 기세를 부리는 가 싶더니 조금 잠잠해지는 그런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무어라 외치고 명령했다. 타타타 타타타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신문사 헬리콥터가 날아와서, 시진을 찍고 돌아갔다. 우리 모습이 찍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경찰관이 확성기로 구경꾼들을 향해, 좀 더 뒤로 물러나라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어린애가 우는 소리로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바람이 어수선하게 춤추듯 불어대고, 타다 남은 흰 부스러기 따위가 우리 주위에까지 희끗희끗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미도리는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기분 좋은 듯 노래를 계속 불러대고 있었다. 알고 있는 노래를 한바탕 부르고 나더니, 이번엔 자신이 작사 작곡했다는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을 위해 스튜를 만들고 싶은데
내게는 냄비가 없어
당신을 위해 머플러를 뜨고 싶은데
내게는 털실이 없어
당신을 위해 시를 쓰고 싶은데
내게는 펜이 없어
"아무것도 없어 라는 노래예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가사도 형편없고, 곡도 형편없었다.
나는 그런 엉터리 노래를 들으면서 '만약 불이 주유소에 옮겨 붙는다면 이 집도 날아가 버리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노래 부르기에 지쳤는지 기타를 놓고, 양지쪽의 고양이처럼 달랑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만든 노래, 어땠어?"
"특이하고 독창적이고, 네 성격이 잘 나타나 있어."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없다는 게 테마라구요."
"알 것도 같아."
"으음. 우리 어머니가 죽었을 때 이야긴데 말이에요."
미도리는 내 쪽을 향하며 말했다.
"응"
"나, 하나도 슬프지 않았어요."
"응."
"그리고 아버지가 없어졌을 때도 전혀 슬프지 않았어요."
"그래?"
"그래요. 이거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지 않냐구요?"
"하지만 여러 가지로 사정이 있을 테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렇죠, 뭐, 여러 가지로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나름대로 복잡했죠, 우리 집. 하지만 난 줄곧 이렇게 생각해 왔어요. 뭐니 뭐니 해도 친아버지. 친어머니인 만큼, 죽어 이별이건, 살아 이별이건 슬픈 건 사실일 거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쓸쓸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거의 생각도 나지 않고. 가끔 꿈에 나타날 뿐. 어머니가 나타나서 말이죠,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고 이렇게 비난하지 않겠어요, '너 내가 죽어서 기쁘지?' 하고. 별로 기쁠 것도 없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저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는 것뿐이죠. 솔직히 말해서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온 건 사실이었어.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을 땐 하룻밤 내내 울었는데도."
이째서 이토록 심하게 연기가 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불도 보이지 않고, 더 번져 나갈 상황 같지도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오랫동안 무엇이 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탓만은 아니에요. 그야 나도 야속한 데가 있긴 해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가령 그 분들-아버지와 어머니-이 좀 더 날 사랑해 주었다면, 나도 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더욱 더 슬픈 기분이 들게 된다든지 하는."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충분하지 않다'와 '아주 부족하다'의 중간 정도예요. 늘 굶주려 있었어요, 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랑을 듬뿍 받아보고 싶었죠. 이젠 됐어요,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잘 먹었어요, 그럴 정도로. 한 번이면 돼요, 단 한 번이면.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걸 주어 본 적이 없었어요. 응석을 떨면 내동댕이를 치고, 돈이 든다고 꾸중만 하고, 줄곧 그래 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에 대해 일 년 내내 백 퍼센트 생각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내 힘으로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국민학교 5학년이던가 6학년 때에 그렇게 결심
했죠."
"대단하군!"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그래, 성과는 있었어?"
"어려운 일이지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그리고 연기를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너무나 오래 기다린 탓일지도 몰라요. 난 굉장히 완벽한 것을 원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완벽한 사랑을?"
"아니, 아무리 내가 욕심쟁이라곤 하지만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에요.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선배에게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예요, 그러면 선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 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죠. 그러면 나는 '흥, 이따위 것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것예요.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예요."
"그런 건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나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관계가 있어요. 선배가 알지 못할 뿐이에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여자에겐 말이에요 그런 것이 굉장히 소중할 때가 있는 거예요."
"딸기 쇼트 케이크를 창문으로 내던지는 그것이?"
"그래요,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 주면 좋겠어요.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지 않아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난 당나귀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지한 것 같아.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다른 걸 사다 주지. 무엇이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나로선 그게 사랑이에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쩐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서 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요."
"너처럼 생각하는 여자는 처음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꽤 많아요."
그녀는 손톱을 갉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진짜 그런 사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저 정직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별로 남과 다른 생각을 한다곤 생각지도 않고, 그런 걸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정직하게 말하면, 다들 농담 아니면 연기인 줄로 알아요. 그래서 가끔 모든 것이 다 귀찮아져 버리지만."
"그래서 불이 나니까 죽어 버리자, 그렇게 생각했나?"
"어머,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말이야, 단순한 호기심이에요."
"불에 타 죽는 것이?"
"그게 아니고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 자체는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그건 정말이에요. 연기에 휩싸여 실신한 채 그대로 죽어 버리면 그뿐이잖아요. 눈 깜짝할 사인데요, 뭘. 전혀 두렵지 않아요. 내가 보아 온 어머니나 다른 친척들의 죽음에 비하면 말이에요. 글쎄, 우리 친척들은 모두 큰 병을 앓다가 고생고생 끝에 죽었다고요. 우리 가계는 아무래도 그런 혈통인가 봐요. 죽기까지 굉장히 시간이 걸린다니까요. 마지막에는 살아 있는지 죽은 건지조차 모를 정도였어요. 남은 의식이라고는 아픔과 괴로움뿐이지 뭐예요."
그녀는 말보로를 입에 물더니 불을 댕겼다.
"내가 두려운 건 그런 죽음이에요. 서서히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생명의 영역을 침식하여, 정신이 들면 어둠침침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주위 사람들도 나를 두고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 말예요. 그런 건 싫어요. 절대로 견딜 수가 없어요, 난."
그로부터 약 30분 만에 결국 불은 꺼졌다. 큰 불로 번지지도 않았고 부상자도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방차도 한 대만 남겨 놓고 다 되돌아갔으며, 사람들도 왁자지껄 이야기를 하면서 상점가에서 물러나 돌아갔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차가 남아 노상에서 라이트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 두 마리가 전신주 꼭대기에 앉아서 지상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재가 수습되고 나자, 미도리는 어쩐지 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몸의 힘을 빼고 멍청하니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지쳤어?"
"그렇진 않아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힘을 빼본 것뿐이에요. 멍하니."
내가 그녀의 눈을 보자, 그녀도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아주 약간만 으쓱 어깨를 움직였으나, 이내 다시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5초 아니면 6초, 우리는 가만히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초가을의 햇살이 그녀의 뺨 위에 속눈썹 그림자를 드리워 그것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부드럽고 평온하고, 그리고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는 입맞춤이었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옥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불구경을 하고 있지만 않았던들, 나는 그날 그녀에게 입맞춤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기분은 그녀 쪽도 같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옥상에서 반짝거리는 집집의 지붕이며 연기며 고추잠자리며, 그런 것들을 줄곧 바라보다가 따스하고 친밀한 기분이 들어, 그것을 무슨 형태로나 남겨 놓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입맞춤은 그러한 타입의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물론 온갖 입맞춤이 그러하듯, 어느 정도의 위험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도리였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어쩐지 말하기 거북한 듯이 자신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배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있지."
"그런데 왜 일요일엔 언제나 한가하죠?"
"매우 복잡해."
그리고 나는 초가을 오후의 잠깐 동안의 마력이,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
다섯 시에 나는 아르바이트 하러 가야겠다고 말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함께 밖으로 나가 가볍게 식사나 하지 않겠냐고 권유해 보았으나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른다면서 그녀는 거절했다.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 정말 질색이에요. 혼자서만 있으면 말이에요, 몸뚱이가 조금씩 조금씩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점점 썩고 녹아서 마지막엔 초록빛의 걸쭉한 액체만 남아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지요. 그래서 나중엔 옷만 남고요. 그런 기분이 들어요,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자면."
"만일 또 전화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함께 있어 주겠어, 점심을 대접받는 조건으로."
"좋아요, 어김없이 식후의 불구경도 준비해 둘 테니까요."
다음날의 연극사2 강의에 미도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생 식당에 들어가 혼자서 맛없는 점심을 먹고, 그리고 양지쪽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는 여학생 둘이서 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어린아이라도 보듬어 안은 듯이 테니스 라켓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책 몇 권과 레너드 번스타인의 LP를 들고 서 있었다.
매우 예쁘게 생긴 그들은 무척 즐거운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클 회관 쪽에서는 누군가 베이스의 음계 연습을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데군데 네댓 명씩 학생들이 모여 앉자 이런저런 일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표명하거나, 아니면 웃거나 소리치고 있는 게 보였다.
주차장에는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무리가 있었고, 가죽 가방을 옆에 낀 교수가 스케이트보드를 피하듯이 그곳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교정 안쪽에서는 헬멧을 쓴 여학생이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대자보를 쓰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학의 점심시간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새삼스럽게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그렇게 보일 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떻든 그 9월 하순의 기분 놓은 한나절에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고, 그 덕분에 나는 여느 때보다 적적한 기분을 느꼈다. 나 혼자만이 그 풍경에 익숙해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도대체 나는 어떤 풍경이 익숙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친숙한 광경은, 기즈키와 둘이서 당구를 친 항구 근처의 그 당구장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즈키는 죽어 버렸고, 그 이후로 나와 세상 사이에는 뭔가 모르게 서로 어색하고 썰렁한 공기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내게 있어서 기즈키라는 사내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해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하여 나의 어도어센스(Adore Sense, 사모의 정)라고나 할 수 있는 기능의 일부분이 완전히, 영원히 손상돼 버린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는 전혀 나의 이해 밖의 일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거기에 앉아서, 캠퍼스의 풍경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나는 도서실에 가서 독일어 예습을 했다.
그 주 토요일 오후에 나가사와가 내 방에 와서, 괜찮다면 놀러가지 않겠느냐, 외박 허가는 받아줄 테니, 하고 말했다. 좋다고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내 머리는 몹시 어수선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자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저녁 무렵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고, 폴로셔츠 위에 면으로 된 윗도리를 입었다. 그리고 나가사와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신주쿠 거리로 나갔다.
신주쿠 3가의 소란 속에서 버스를 내려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늘 가는 근처의 바에 들어가, 적당한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여자 손님이 많다는 게 그 술집의 특징이었는데, 그날따라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우리 주위에 접근해 오지 않았다.
우리는 취하지 않을 만큼 위스키소다를 홀짝거리면서, 두 시간 가까이 거기에 있었다. 상냥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카운터에 앉아서 김렌과 마르가리타를 주문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사와가 수작을 붙이러 갔지만 그녀들은 남자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와 잠시 친근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기다리던 상대가 오자 둘은 그쪽으로 가버렸다.
장소를 옮기자면서 나가사와는 나를 다른 바로 데리고 갔다. 좀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는데, 손님이 거의 들어차서 시끌시끌했다.
안쪽 테이블에 세 명의 여자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리로 다가가 다섯이서 이야기했다.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가게로 옮겨서 좀 더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더니, 그녀들은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해요, 거의 문 닫을 시간이니까 하고 말했다.
세 여자가 다 어느 여자 대학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재수 없는 하루였다. 그런 다음에 또 장소를 옮겨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오늘은 여자들이 접근해 오는 일이 전혀 없었다.
열한 시 반이 되어서, 오늘은 허탕을 치는가 보다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미안한데, 끌고 다녀서."
"상관없습니다, 난. 선배에게도 이런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 해도 즐겁습니다." 하고 말하며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1년에 한 번쯤은 이럴 때도 있지."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더 이상 섹스 따위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기분이었다.
토요일, 신주쿠의 밤의 소란 속을 세 시간 반이나 어슬렁거렸으며, 성욕이나 알코올 따위가 뒤섞인, 영문도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또 그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나 자신의 성욕 같은 것은 보잘 것 없는, 천하고 하찮은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와타나베." 하고 나가사와가 내게 물었다.
"올 나이트 영화라도 보지요. 한동안 영화도 못 보았으니까요."
"그럼 난 하쓰미나 찾아가겠어. 괜찮지?"
"나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일 괜찮다면 재워 줄 여자 하나쯤 소개할 용의가 있는데 어떤가?"
"아닙니다. 오늘은 영화가 보고 싶습니다."
"미안한데, 언젠가 보충해 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붐비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햄버거 집에 들어가, 치즈버거를 먹고 따끈한 커피를 마셔 취기를 가라앉히고 나서, 근처의 재개봉관에 들어가 영화 '졸업'을 보았다.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대로 또 한 번 되풀이해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나와, 새벽 네 시 전의 썰렁한 신주쿠 거리를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정처 없이 어슬렁거렸다.
걷는데 지쳤으므로 나는 심야 영업을 하는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첫 전철을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 있으니까 다방은 역사 나처럼 첫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웨이터가 내게로 오더니, 죄송하지만 다른 손님과 동석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응했다. 어차피 나는 책을 읽고 있을 뿐이고, 옆자리에 누가 와서 앉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내 앞에 동석한 사람은 두 여자애였다. 둘 다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인 듯싶었고, 미인이랄 수는 없었지만 괜찮은 아이들이었다.
화장도 옷차림도 수수했고, 아침 다섯 시 전에 가부키초를 방황하는 그런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슨 사정으로 막차를 놓치고 말았거나 어쨌거나 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들은 동석한 상대가 나라는 데서 약간은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말쑥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저녁때 수염도 깎았으며, 게다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열심히 읽고 있었으니까.
한 여자는 덩치가 큰 편이었는데, 회색요트 파카에다 하얀 진을 입고, 커다란 비닐 레저 가방을 들었으며, 조개 모양의 커다란 귀걸이를 양쪽 귀에 달고 있었다. 또 한 여자는 몸집이 작은 편이었는데, 안경을 쓰고 격자무늬의 셔츠 위에 파랑색 카디건을 입었으며, 손가락에는 터키석 파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쪽 여자는 가끔씩 안경을 벗고 손가락 끝으로 눈을 누르곤 하는 게 버릇인 것 같았다.
그녀들은 똑 같이 카페오레와 케이크를 주문하고는, 뭔가 조용조용 의논을 하면서 천천히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했다. 덩치 큰 여자는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고, 작은 여자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마빈 게이며 비지스며, 그런 음악이 크게 울리고 있어서 이야기의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작은 여자가 고민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해서, 큰 여자가 그것을 애써 달래고 있는 모양 같았다.
나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그녀들을 관찰하는 일을 번갈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작은 여자애가 숄더백을 끌어안듯이 하고 화장실로 가버리자, 덩치 큰 여자 아이가 나를 향해 '미안합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이 근처에 아직도 술을 마실 만한 가게가 있는지 혹은 알고 계세요?"
"새벽 다섯 시가 지났는데 말입니까?"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아니,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이라면 대개는 사람들은 술이 깨서 잠을 자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닙니까?"
"예, 그건 잘 알고 있긴 하지만." 하고 그녀는 몹시 부끄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저 친구가 굳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거예요.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고 해서."
"집에 돌아가 둘이서 마실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전 아침 일곱 시 반경 전철로 나가노에 가야 하거든요."
"그럼 자동판매기에서 술을 사가지고, 거기 아무데나 앉아서 마시는 수밖에 없겠네요."
미안하지만 함께 가주지 않겠냐고 그녀가 말했다. 여자 둘이서 그럴 수가 없다면서. 나는 그 당시의 신주쿠 거리에서 여러 가지 이상한 체험을 해보았지만, 아침 다섯 시 이십 분에 전혀 낯선 여자들로 부터 술친구를 해달라는 유혹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거절하기도 귀찮았고 또 시간도 있었기에, 나는 가까이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정종 몇 병과 간단한 안주를 적당히 사 가지고, 그녀들과 함께 서쪽 출입구 광장으로 가서 즉석 파티를 벌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두 사람은 같은 여행사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둘 다 올해에 단과 대학을 나와 곧바로 근무하기 시작한 친한 친구 사이였다.
작은 여자에게는 애인이 있어, 한 1년쯤 잘 교제해 왔는데, 최근에 와서 남자가 또 다른 여자와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상심해 있다는 것이 대강의 사연이었다.
덩치 큰 여자는, 오늘 오빠의 결혼식이 있어서 어제 저녁에 나가노 고향집에 갔어야 할 형편이지만, 친구와 같이 있어 주느라고 온밤을 신주쿠에서 지새우고, 일요일 아침 첫차인 특급을 타고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다른 여자와 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요?"
나는 작은 여자에게 물어 보았다.
작은 여자는 정종을 홀짝거리면서 발밑의 잡초를 괜스레 잡아 뜯고 있었다.
"그의 방문을 열었더니, 바로 눈앞에서 그 짓을 하고 있지 뭐예요. 그러니 알고 모르고 할 것도 없잖아요."
"그게 언제 일이지요?"
"그저께 밤."
"흐음. 그래, 문을 잠그지도 않았던가요?"
"그래요."
"어째서 잠그지도 않았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누가 알겠어요, 그걸. 알 턱이 없잖아요."
"하지만, 그건 정말 충격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건 너무 지독하잖아요. 그러니 이 애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하고 어수룩해 보이는 큰 여자가 말했다.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한 번 서로 잘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결국 용서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겠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누구도 내 기분을 모를 거예요." 하고 작은 여자가 여전히 잡초를 팍팍 잡아 뜯으면서 뱉어 버리듯 말했다.
까마귀 떼가 서쪽에서 몰려와 오다큐 백화점 상공을 넘어갔다. 날은 완전히 밝았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큰 여자의 전철 시간이 다가왔기에, 우리는 나머지 술을 서쪽 출입구 지하에 있는 부랑자에게 주고, 입장권을 사서 그녀를 전송했다.
그녀가 탄 전철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와 작은 여자는 어느 쪽이 먼저 유인한 것도 아니면서 호텔로 들어갔다. 나도 그녀도 특별하게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만 자지 않고서는 매듭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호텔로 들어서자 나는 먼저 옷을 벗도 욕탕에 들어가, 욕조에 푹 잠겨서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맥주를 마셨다.
여자도 이내 뒤따라 들어왔으므로, 둘은 욕조 속에 비스듬히 눕게 되었다. 그 여자와 나는 맥주를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피부는 희고 매끌매끌했으며, 다리 모양이 무척 예뻤다. 내가 다리를 칭찬했더니, 그녀는 무뚝뚝한 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침대에 들어가자,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의 손놀림에 맞추어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했고,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녀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내 등에다 힘껏 손톱을 세우고, 오르가슴에 가까워지자 열여섯 번이나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사정을 늦추기 위해, 열심히 그 횟수를 헤아렸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열두 시 반에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편지도 메시지도 없었다. 뜻하지 않은 시간에 술을 마셨기에, 한쪽 머리가 야릇하게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샤워를 하며 졸음을 쫓고, 수염을 깎고 알몸인 채 의자에 앉아 냉장고의 주스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 돌이켜 보았다. 생각나는 일마다 어느 것이나 유리판을 두세 장 사이에 끼워 넣은 것 같은, 이상하고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일들로 느껴졌지만, 틀림없이 나의 신상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를 마신 컵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목욕탕에는 사용한 칫솔도 있었다.
나는 신주쿠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전화 부스에 들어가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도 또 혼자서 전화 당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다섯 번이나 벨이 울렸는데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20분후에 다시 걸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입구의 우편함에는 내 앞으로 온 속달 봉투가 들어 있었다. 나오코로부터 온 편지였다.
제 5 장 아미료에서 날아온 편지
"편지 줘서 고마웠어요." 라고 나오코는 쓰고 있었다. 편지는 나오코의 집에서 이곳으로 바로 전송되어 왔다. 내 편지를 받은 것이 난처하다기 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무척 기뻤다, 사실은 자기 쪽에서 편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그 편지에는 쓰여 있었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창문을 열고 윗도리를 벗은 다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처의 비둘기 집에서는 구구구 비둘기 우는 수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나는 나오코가 보내 온 일곱 장의 편지를 손에 든 채, 걷잡을 수 없는 상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맨 앞의 몇 줄을 읽었을 뿐인데,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온통 그 색채를 잃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긴 시간 동안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 뒤를 계속해서 읽었다.
이곳에 온지도 벌써 4개월 가까이 됩니다. 나는 지난 4개월 동안 당신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당신에 대해 공정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답니다. 나는 당신에게 좀 더 정확한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행동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그다지 올바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대개 공정 따위의 말은 쓰지 않기 때문이죠. 보통의 여자로서는 사물이 공정한가 어떤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극히 평범한 여자는 무엇이 공정하냐 아니냐 보다는, 무엇이 아름답다든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것을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법이죠. '공정'이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사용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 공정이란 말이 너무나 딱 들어맞는 말같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무엇이 아름답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아주 번거롭고 까다로운 명제여서, 그만 다른 기준에 매달려버리게 되는가 봅니다. 예를 든다면 공정이라든가 정직이라든가 보편적이라든가 그런 것에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나 자신이 당신에 대해 공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매우 어지럽게 했고, 상처받게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해서 나 역시 나 자신을 휘둘렀으며, 상처를 입혔어요. 변명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변호를 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그런 겁니다. 만일 내가 당신 속에다 어떤 상처를 남겨 놓았다면, 그것은 당신만의 상처가 아니고 저의 상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로 해서 나를 미워하진 말아 주세요.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에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면, 정말 나는 산산 조각이 나 버릴 겁니다. 나는 당신처럼 자기의 껍질 속으로 쏙 들어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수 없어요.
나는 사실상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나에겐 어쩐지 그렇게 보일 때가 있답니다. 그래서 때론 당신이 몹시 부럽기도 했으며, 당신을 필요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부러움 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물을 보는 이러한 견해가 어쩌면 지나치게 분석적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이곳의 치료 방법이 결코 지나치게 분석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 같은 입장에 놓여서 몇 달이고 치료를 받다 보면 어차피 많건 적건 분석적이 되어 버리는 법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러한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다, 하고 말예요. 이러한 분석이 세계를 단순화 하려는 것인지, 세분화 하려는 것인지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그때에 비하면 상당히 회복되었다고 자신도 느끼고 있고, 주위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차분하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것도 참 오랜만입니다. 7월에 당신한테 보낸 편지는 몸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으로 쓴 것이지만(솔직히 무슨 말을 썼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아요. 좀 심한 편지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제법 차분한 심정으로 쓰고 있답니다.
맑은 공기, 밖으로부터 차단된 조용한 세계, 규칙적인 생활, 매일하는 운동, 역시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에겐가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예요. 누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자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물론 글로 써놓고 보면,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의 아주 일부분밖엔 표현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 싶어요. 누구에게 뭔가를 적어보고 싶다는 그 기분이 든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로서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답니다.
지금은 저녁 일곱 시 반입니다. 저녁 식사도 했고, 목욕도 끝낸 시간입니다. 주위는 조용하고, 창밖은 캄캄합니다. 빛 하나 보이지 않아요. 여느 때는 별이 참 아름다웠는데 오늘은 흐려서 보이지 않는 군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들 별에 대해 잘 알아서, 저것이 처녀자리다라든가 저것이 사수자리라든가 하고 내게 가르쳐 준답니다. 아마 날이 저물면 아무 할 일이 없으니, 별수 없이 별에 대해 잘 알게 돼버리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 새랑 꽃이랑 벌레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자면, 내 자신이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던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런 식으로나마 깨닫는 게 무척 기분이 좋답니다.
이곳에는 모두 70명쯤 되는 사람들이 들어와 생활하고 있어요. 그 밖에 스태프(의사, 간호사, 사무원, 기타 등등)가 20명 남짓 있답니다. 무척 넓은 곳이라서, 이 정도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산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군요.
드넓게 사방으로 자연이 충만해 있고, 사람들은 다들 조용하게 살고 있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때때로 여기가 진짜 옳은 세계가 아닐까 하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진 않아요. 우리들은 어떤 종류의 전제하에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 이런 식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나는 테니스와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농구 팀은 환자와 스테프를 섞어서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누가 환자고 누가 스태프인지 갈수록 알쏭달쏭해져요.
이건 어쩐지 이상한 일이에요. 이상한 일이란, 게임을 하면서 주위를 보고 있자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일그러져 보이는 겁니다.
어느 날 담당 의사에게 그 말을 했더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고 하더군요. 그는 우리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은.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우리들 문제점의 하나는 그 비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각기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이 있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사고방식, 사물에 대한 견해에도 버릇이 있고, 그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고치려 들면 다른 데가 이상해진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것은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말하려는 그 뜻을 어슴푸레나마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들은 확실히 자시의 비뚤어짐에 잘 순응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비뚤어짐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통을 적절하게 자기 속에 자리 잡게 할 수 없어서, 또 그러한 것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이곳에 있는 한 우리들은 타인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며,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른 점입니다. 바깥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뚤어짐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들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뚤어짐이야말로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디언이 머리에다 그 부족을 나타내는 깃털을 꽂고 있듯이,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지요. 그리고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조용히 살고 있는 겁니다.
운동을 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는 야채를 가꾸고 있습니다. 토마토, 가지, 오이, 수박, 딸기, 파, 양배추, 무, 그 밖의 여러 가지. 왠만한 건 다 가꾸고 있답니다. 온실도 사용하고 있고요.
이곳 사람들은 야채 가꾸는 일에 아주 익숙하고 또 열심입니다. 책도 보고 전문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이침부터 저녁까지 비료는 어떤 것이 좋다는 둥 토질이 어떻다는 둥, 그런 이야기만 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나도 야채 가꾸기를 좋아하게 됐답니다. 갖가지 과일이며 야채가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흐뭇한 일입니다. 당신은 수박을 재배해 본 일이 있나요? 수박이란, 마치 작은 동물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법이지요.
우리는 날마다 그런 싱싱한 야채며 과일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어요. 고기며 생선도 물론 식탁에 나오지만, 여기 있으면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차츰 덜해 집니다. 아무튼 야채가 너무 싱싱하고 맛있기 때문이죠.
밖에 나가 산나물이며 버섯을 딸 때도 있어요. 그런 것에도 전문가가 있어서 이건 좋다, 저건 안된다 하고 가르쳐 준답니다. 덕분에 나는 여기 와서 체중이 3킬로그램이나 늘었는걸요. 꼭 알맞은 체중인 셈이지요. 이게 다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 덕분입니다.
그 밖의 시간에 우리들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합니다. 텔레비전이라든가 라디오 같은 것은 없지만 그 대신 아주 놓은 도서실도 있고, 레코드 라이브러리도 있지요. 레코드 라이브러리에는 말러의 교향곡 전집에서부터 비틀즈가지 갖추어져 있어서, 나는 늘 거기서 레코드를 빌려다가 방에서 듣곤 합니다.
이 시설의 문제점이라면, 한 번 이곳에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아지거나 혹은 무서워진다는 그런 점입니다. 우리들은 이곳에 있는 한, 평화롭고 평온한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자신의 비뚤어짐에 대해서도 자연스런 마음으로 대할 수 있고, 자신이 회복된 것도 느끼게 되지요. 하지만 바깥세상이 과연 우리들을 이와 같이 수용해 줄 것인지 어떨지, 나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답니다.
담당 의사는 내가 이제는 차츰 외부 사람과 접촉을 갖기 시작해도 좋을 시기라고 합니다. '외부사람이란 즉 정상적인 세계의 정상적인 사람이란 뜻인데, 그런 말을 들어도 내게는 당신의 얼굴밖엔 떠오르지 않는 군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모님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분들은 나로 인해 몹시 혼란을 겪고 있어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나는 어쩐지 참담한 심정이 될 뿐일 거예요.
더구나 나로서는 당신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몇 가지 있어요.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회피해 지나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를 짐스럽게 생각진 말아요. 나는 누군가의 무거운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나는 나에 대한 당신의 호의를 느꼈으며, 그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심정을 솔직하게 당신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에요.
지금의 나는 다분히 그러한 호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내가 한 말 중에 어느 것이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면 사과하겠어요. 용서하세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불완전한 인간이랍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지요. 만약에 나와 당신이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상황에서 만나 서로가 호의를 가졌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고요. 내가 정상이고 당신도 정상이고(처음부터 정상이었겠지만), 기즈키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고요. 하지만 우리에게 이 '만약'은 너무나 크군요.
적어도 나는 공정하고 정직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겁니다.
이곳 시설은 보통 병원하고는 달라서 면회는 원칙적으로 자유예요. 하루 전에만 전화 연락을 한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죠. 식사도 함께 할 수 있고, 숙박 시설도 있어요. 당신의 형편이 허용 될 때, 한 번 와 주기를 바라겠어요. 지도를 함께 보냅니다. 편지가 길어져서 미안해요.
나는 끝까지 읽고 나서 또다시 되풀이해 읽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돌아와, 그것을 마시면서 또 한 번 되풀이해 읽었다. 그리고 그 일곱 장의 편지를 봉투에 도로 넣어 책상 위에 놓았다.
핑크색 봉투에는, 여자치고는 좀 지나치게 차분하다 싶을 만큼 또박또박 작은 글씨로 내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잠시 그 봉투를 바라보았다. 봉투 뒷면의 주소에는 아미료라고 쓰여 있었다.
묘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에 대해 5, 6분 동안 두루두루 생각해 본 끝에, 이건 아마 프랑스 어의 아미(역주: 친구라는 말로 표기는 ami)로부터 따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편지를 책상 서랍에다 넣고 나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 편지 가까이에 있다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되풀이해 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나오코와 둘이서 늘 그렇게 했듯이, 일요일 도쿄의 거리를 정처 없이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그녀의 편지 한 줄 한 줄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시내 거리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와, 나오코가 있는 '아미료'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보았다.
교환이 나와 용건을 물었다. 나는 나오코의 이름을 대고 될 수 있으면 내일 오후에 면회하러 가고 싶은데, 가능할지 어떨지를 물었다. 교환은 나의 이름을 묻더니, 30분후에 다시 한 번 걸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식사를 끝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같은 여성이 나와 "면회가 가능하니 꼭 오세요." 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배낭에다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겼다. 그리고 잠이 올 때까지 브랜디를 마시면서, 읽다가 만 '마의산'을 마저 읽었다. 그리도 가까스로 잠이 든 것은 새벽 한 시가 지나서였다.
제 6 장 정상적인 세계와 비정상적인 세계
월요일 아침 일곱 시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깍은 다음,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사감을 찾아가 이틀 정도 등산을 다녀오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며칠씩 자주 여행을 다녀온 때문이어서인지 사감은 그저 그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혼잡한 통근 전철을 타고 도쿄 역으로 가서 교토까지 가는 신칸선의 자유석 표를 산 다음, 제일 빠른 히키리(역주: 신칸선의 한 종류)에 말 그대로 뛰어올라, 뜨거운 커피에다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신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선잠을 잤다.
교토 역에 도착한 것은 열한 시 조금 전이었다. 나는 나오코가 일러준 대로 버스를 타고 산초까지 가서, 그 근처에 있는 사철 버스 터미널로 걸어가 16번 버스가 어느 승차구에서 몇 시에 출발하는 가를 물었다. 열한 시 삼십오 분에 정류소의 저쪽 제일 끝에서 출발하며, 목적지까지는 대충 한 시간이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구입한 후 서점에 들어가 지도를 사서, 대합실 벤치에 앉아 아미료 요양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았다. 지도를 보니 요양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깊은 산 속에 있었다. 버스는 산을 몇 개씩 넘으면서 북상을 하다, 더 이상은 못 가지 않을까 싶은 지점까지 가서야 시내로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내릴 정류장은 종점 거의 다 간 곳에 있었다. 정류장으로부터는 등산길이 나 있고, 20분 정도 걸어가면 요양원에 다다른다고 나오코는 편지에 썼었다. '이 정도까지 깊은 산속이라면 굉장히 조용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20명 남짓한 승객을 태우자 버스는 곧 출발했고, 가무가와를 따라서 교토 시내로부터 북으로 달렸다. 북으로 가면 갈수록 거리의 집들이 뜸해지면서 밭들과 공지가 눈에 띄었고, 검은 기와지붕과 비닐하우스들이 초가을 햇살을 받으며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마 후 버스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꼬불꼬불 굽이진 길이어서 운전기사는 쉼 없이 계속 핸들을 꺾었고, 나는 약간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아침에 마신 커피 냄새가 위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다 커브도 차차 뜸해져 겨우 한숨을 돌릴 무렵, 버스는 갑자기 서늘한 삼나무 숲 속으로 들어섰다. 삼나무는 마치 원시림처럼 높이 뻗어 올라 온통 햇빛을 가렸고, 그 어두운 그림자로 만물을 덮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지고, 바람에 실려 온 습기가 피부에 따갑게 느껴졌다. 계곡 하천을 따라 버스는 그 삼나무 숲 속을 무척 오랜 시간동안 달렸다.
온 세계가 끝없이 삼나무 숲으로 뒤덮여 버린 게 아닌가 하고 느껴질 무렵에야 겨우 숲이 끝나고, 우리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같은 곳에 다다랐다. 분지에는 푸른 밭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맑은 강이 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하얀 연기는 한 가닥이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이곳저곳 빨랫줄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으며, 몇 마리인지 개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집 앞에는 장작이 처마 밑까지 쌓여 있었고, 그 위에서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한참 동안 그런 인가가 계속되었지만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풍경이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버스는 삼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숲을 빠져 나와선 마을로 들어가고, 마을을 벗어나선 또 삼나무 숲으로 접어들었다.
마을에서 버스가 멎을 때마다 몇 사람씩 승객이 내렸지만 타는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시내를 출발한 지 40분쯤 되어 전망이 탁 트인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운전기사는 차를 세우고 5, 6분 동안 기다려야 할 테니까 내리고 싶은 사람은 내렸다 타도된다고 승객들에게 말했다.
손님은 이제 나를 비롯해서 네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눈이 아래로 펼쳐져 있는 교토의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길가에 서서 소변을 보았다. 끈으로 묶은 큰 골판지 상자를 차 안으로 들고 들어왔던 쉰 살 전후의 햇빛에 잘 그을은 남자가 등산을 할 거냐고 내게 물어왔다. 귀찮아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반대 방향으로부터 버스가 올라와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옆에 정차하더니 운전기사가 내렸다. 두 운전기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각자의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도 좌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대의 버스는 각각의 방향으로 또 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우리 버스가 고개 무렵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려야했는지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고개를 조금 내려온 데서부터 길 폭이 갑자기 좁아져, 대형 버스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가기란 전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버스는 몇 대의 경화물차나 일반 승용차와 엇갈리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어느 한쪽이 후진해서 커브길 가장자리에 차를 바싹 붙여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곡을 따라 줄지어 있던 마을도 아까보다는 훨씬 적어지고, 경작된 농지도 협소해졌다. 산세가 점점 험해지면서 바로 눈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개가 많은 것만은 어디든 한결 같았는데, 버스가 오면 서로 겨루듯이 짖어댔다.
내가 내려선 정류장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가도 없고, 밭도 없었다. 정류장 표지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옆에 작은 냇물이 흘렀고, 저만치 등산로의 입구가 보일 뿐이었다.
나는 배낭을 걸머지고 계곡을 따라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길의 왼쪽엔 냇물이 흘렀고, 오른쪽에는 잡목 숲이 이어졌다. 그렇게 완만한 비탈길을 15분쯤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겨우 차 한대가 지나 갈만한 갈림길이 하나 나오고, 그 입구에는 '아미료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사절합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잡목 숲 사이로 지나가는 그 샛길에는 자동차 바퀴자국이 뚜렷하게 나 있었다. 주변의 숲 속에서 간혹 푸드덕 하는 새의 날갯짓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분적으로 확대된 것처럼 이상하게 선명한 소리였다. 딱 한 번 총소리 같은, 탕 하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지만, 이쪽에선 필터 몇 장쯤 거쳐서 온 듯 작고 억눌린 것 같은 소리로 들렸다.
잡목 숲을 벗어나자 흰 돌담이 보였다. 돌담이라고 해도 내 키만큼의 높이인 데다 위에 철책이나 망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넘어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담이었다. 검은 칠을 한 철제 대문은 튼튼해 보였지만 그것 역시 열린 채였다.
수위실에도 수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문 옆엔 조금 전에 본 것과 같은 '아미료 관계자 이외에 출입을 사절합니다.'라는 푯말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수위실에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세 개 있었고, 찻잔에는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차가 남아 있었으며, 선반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시계가 똑딱똑딱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시간을 좇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수위를 기다려 보았지만 돌아올 갓 같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벨 같은 것을 두어 번 눌러 보았다. 대문 바로 안쪽은 주차장으로 되어 있어, 미니버스와 4WD의 지프, 그리고 검푸른 색 볼보가 세워져 있었다. 30대 정도는 주차 시킬 만한 공간이었지만 서있는 차는 그 세 대뿐이었다.
2, 3분을 기다리니 감색 제복을 입은 수위가 노란색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따라 이쪽으로 왔다. 예순 살 가량의 키가 크고 머리가 벗겨진 남자였다. 그는 노란색 자전거를 수위실 벽에 기댄 후 나를 향하더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라고 그다지 죄송한 것 같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자전거 바퀴 덮개에는 흰 페인트로 32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이름을 대니까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내 이름을 두 번 되풀이 하여 말했다. 상대가 뭔가 말을 하자 그는 "네, 네에, 알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본관으로 가서 말씀입니다, 이시다 선생님을 찾으세요." 라고 수위가 말했다. "저 숲길을 따라 가면 로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두 번째, 아시겠어요? 왼쪽으로 두 번째 길로 가십시오. 그러면 낡은 건물이 나올 테니 거기서 오른 편으로 꺾어 다시 숲 속을 지나면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있어요. 그게 본관입니다. 곳곳에 팻말이 붙어 있으니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일러주는 대로 로터리에서 왼쪽으로, 두 번째 길에 접어드니, 맞은편에는 얼핏 보기에 몇 십 년 전에는 별장이었으리라고 짐작이 되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뜰에는 모양새 좋은 바윗돌과 석등 같은 게 놓여 있었고, 나무들은 잘 손질이 되어 있었다. 원래는 틀림없이 누군가의 별장이었던 것 같았다.
거기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들어 숲을 지나가니, 눈앞에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이 보였다. 3층 건물이긴 해도 땅을 파낸 듯이 내려앉은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렇다 할 위압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건물 설계가 간결하고 청결하게 느껴졌다.
현관은 2층에 있었다. 몇 계단인가 되는 층계를 걸어올라 큰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안내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을 대며 이시다 선생님을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왔다고 했다.
방긋 미소를 띠우며 그녀는 로비에 있는 다갈색 소파를 가리키며 "저기 앉아 기다려 주세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 후에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나는 어깨에서 배낭을 내리고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결하고 느낌이 좋은 로비였다. 관옆식물 화분이 몇 개 있었고, 벽에는 고상한 추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마루는 윤이 나도록 잘 닦여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줄곧 그 마루에 비춰진 내 그 구두를 굽어보고 있었다.
도중에 한 번 안내실의 여자가 "곧 오실 거예요." 라고 말을 건네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조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서는 도대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왠지 낮잠 자는 시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동물도, 벌레도, 초목도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은 고요한 오후였다.
하지만 곧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무척 뻣뻣하게 느껴지는 단발머리의 중년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냉큼 내 옆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나와 악수를 교환했다. 그녀는 악수를 하면서 내 손등과 손바닥을 번갈아 찬찬히 관찰했다.
"당신 악기라곤 적어도 요즘 몇 년 동안 손에 대본 일이 없지요" 라고 그녀는 첫마디를 던졌다.
"네" 하고 나는 놀라며 대답했다.
"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얼굴에는 제법 많은 '주름'이 있어서 그것이 먼저 눈이 띄었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이를 초월한 젊음 같은 것이 그 '주름'에 의해 강조되고 있었다.
그 '주름'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잘 어울렸다. 그녀가 웃으면 '주름'도 함께 웃고, 그녀가 언짢은 얼굴을 하면 '주름'도 함께 언짢은 얼굴을 했다.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는 얼굴을 할 때에는 '주름'은 어딘지 모르게 짓궂게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얼굴 가득히 퍼져 있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호감이 갈 뿐만 아니라 왠지 마음이 끌리는 여성이었다. 나는 첫눈에 대번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머리는 몹시 어수선하게 잘려 군데군데 뻗친 데가 있었고, 앞머리도 가지런하지 못한 채 이마를 덮고 있었지만, 헤어스타일 전체가 그녀에게 매우 어울려 보였다. 흰 티셔츠에 청색 작업 셔츠를 걸치고, 크림색의 느슨한 면바지에 테니스 화를 신고 있었다.
가냘프게 여윈 몸에는 젖가슴이란 것이 거의 없었고, 줄곧 짓궂게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어져 있었으며, 눈꼬리의 주름이 가늘게 움직였다. 얼마만큼은 세상일에 불만이 있는, 친절하고 기술이 좋은 여자 목공처럼 보였다.
그녀는 턱을 약간 아래로 당기고 입술은 비튼 채,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장 호주머니에서 자라도 꺼내어 내 몸 이곳저곳의 치수를 재기라도 할 것처럼.
"악기는 다룰 줄 알아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거 유감인데요. 뭘 할 줄 안다면 좋을 텐데."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지만, 왜 악기 이야기만 되풀이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앞주머니에서 세븐 스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더니, 라이터로 불을 댕기고 맛있게 한 모금 연기를 뿜어냈다.
"그런데 참, 와타나베라고 했죠? 학생이 나오코를 만나기 전에 내가 이곳을 설명해 두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하고 먼저 이렇게 이야길 나누게 된 거예요. 여긴 딴 곳과 좀 다르니까, 아무 예비지식이 없으면 약간 당황도 될 거예요. 그렇죠? 학생은 아직 여길 잘 모르죠?"
"네, 거의 여길 잘 모르죠?"
"그럼,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하다가 말고,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딱 하고 손가락을 꺾었다. "학생, 점심 먹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고픕니다."
"그럼 같이 가요.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길 나누도록 해요. 점심시간은 끝났지만, 지금 가도 아직 뭐가 좀 있을 테니까."
그녀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더니 1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엔 2백 명 가량이 식사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쓰고 있는 것은 절반뿐이고, 나머지 절반은 칸막이로 가려져 있었다. 마치 철 지난 휴양지의 식당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 메뉴는 국수를 넣은 포테이토 스튜와 야채샐러드, 그리고 주스와 빵이었다. 나오코의 편지에도 씌어 있었지만 이곳 야채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나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정말 맛있게 식사하는군요." 하고 그녀는 몹시 감탄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게다가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했거든요."
"괜찮다면 내 것도 드실래요? 난 벌써 배가 부르니까....."
"네, 좋습니다."
"난 위가 작아서 조금밖에 못 먹어요. 그래서 식사를 조금 하는 만큼 담배를 피워 채우고 있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세븐 스타를 빼어 물고 불을 댕겼다.
"참, 날 레이코라고 불러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조금밖에 손을 대지 않은 포테이토 스튜와 빵을 먹성 좋게 먹고 있는 나를, 그녀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나오코의 담당 의사십니까?" 하고 나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내가 의사?" 하고 그녀는 놀란 것처럼 얼굴이 굳어지면서 반문했다. "왜 내가 의사라는 거죠?"
"이시다 선생님을 만나라는 말을 들었기에....."
"아아, 그렇군요. 나는 여기서 음악 선생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사실은 나도 환자예요. 그런데 7년이나 여기 있으면서 음악도 가르치고 사무실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니까 환자인지 직원인지 분간이 안 되게 되어 버렸어요. 요즘은. 나오코가 내 얘길 학생에게 안했나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아무튼 나오코와 나는 한 방을 쓰고 있어요. 말하자면 룸메이트죠. 그 애와 같이 생활하는 건 아주 재미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학생 이야기도 자주 해요."
"내 어떤 이야기를 하죠?" 하고 나는 물었다.
"참, 그렇지. 그전에 이곳을 설명해 줘야지" 하며 그녀는 나의 질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먼저 이해해 줘야 할 것은, 여기는 일반적인 '병원'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한 마디로 말해서 여긴 치료하는 데가 아니라 요양하는 곳이거든요. 물론 의사도 몇 명은 있으니까 매일 한 시간 정도 면담을 하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체온을 재는 것처럼 어느 정도인가 체크하는 정도지 다른 병원에서와 같은 적극적인 치료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엔 철창도 없고 여기에 들어오고 자발적으로 여길 떠나가요. 그리고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요양에 적합한 사람들뿐이에요. 아무나 다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그 증상에 따라서 전문 병원으로 보내지요. 여기까진 알겠죠?"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요양이라는 것.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겁니까?"
"여기 생활 그 자체가 요양이죠. 규칙적인 생활, 운동, 외부로부터의 격리, 조용함, 맑은 공기. 여긴 밭도 있으니까 거의 자급자족하는 생활이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도 없어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코뮌 같다고나 할까요. 하기야 여기에 들어오려면 돈이 꽤 드니까 그 점은 코뮌과 다르지만요."
"그렇게 많이 듭니까?"
"엄청나게 비싸진 않지만 싸다곤 못해요. 설치한 설비만 봐도 그렇지 않겠어요? 장소는 넓은 데다 환자는 적고, 직원은 많고. 나 같은 경우엔 들어온 지가 오래고 반쯤은 직원 같으니까, 실질적으로 입원비를 면제받고 있어서 별문제가 없지만요. 어때요, 커피 안 마실래요?"
마시고 싶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 있는 커피 워머에서 컵 두 개에 커피를 따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휘젓더니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것을 마셨다.
"이 요양소는 말이죠, 영리 기업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직은 입원비를 그다지 비싸게 받지 않아도 지탱해 나가는 거예요. 여기 땅도 어떤 사람이 기부한 거죠. 옛날엔 이 부근 일대가 그 사람 별장이었대요. 20년쯤 전까지만 해도, 오다가 낡은 저택을 보았지요?"
보았다고 나는 대답했다.
"예전엔 건물도 그것뿐이어서, 거기다 환자를 모아놓고 그룹 요양을 시켰대요. 어째서 그런 일을 시작했는가 하면 그 사람 아들 역시 정신병적인 성향이 있어서, 어떤 전문의가 그 사람에게 그룹 요양을 권했기 때문이래요.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두가 상부상조하며 육체노동을 하면서 생활하고 거기에 의사가 끼여 조언도 하고 상태를 체크도 해주면, 어떤 종류의 병은 치유될 수도 있다는 게 그 의사의 이론이었던 거죠. 그런 식으로 해서 이곳이 시작됐어요. 그것이 차차 켜져서 법인체가 되었고, 농장도 확장이 되었으며, 본관도 5년 전에 세워졌지요."
"치료의 효과가 있었나 보군요."
"그래요, 하지만 만병통치일 수는 없고, 낫지 않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도 딴 데서 못 고친 사람도 여기서 꽤 많이 회복되어 나간걸요.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모두가 서로서로 돕는다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서로 도우려고 하죠. 다른 곳에선 그렇지가 못해요, 유감스럽지만. 다른 곳에선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고,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이죠.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서로가 도와요. 우린 서로의 거울이고, 의사도 우리와 같은 동료죠. 곁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필요하구나, 하고 느껴지면 어느새 다가와서 도와주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도 해요. 그렇다는 건 경우에 따라선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거죠.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의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또 다른 환자는 간호사에게 불어를 가르치거든요.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에요. 우리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엔 전문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꽤 많은가 봐요. 그래서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하지요. 환자도, 직원도, 그리고 학생도. 학생도 여기에 있는 동안은 우리의 한 동료니까 나는 학생을 돕고, 학생도 나를 돕는 거예요."
그녀는 온 얼굴의 주름을 부드럽게 펴면서 웃었다.
"학생은 나오코를 도와주고, 나오코는 학생을 돕는 거구요."
"구체적으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우선 첫째로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자기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 둘째는 정직할 것.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대거나, 형편이 좋지 않다고 얼버무리거나 하지 말 것. 그러면 되는 거예요."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레이코 여사님은 어째서 7년 동안이나 여기에 계셨던 거죠? 전 지금껏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낄 수가 없었는데요."
"낮에는 그렇지" 하고 그녀는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밤에는 형편없이 돼요. 밤이 되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온 마룻바닥을 뒹굴어요."
"정말이세요?"
"아니야, 농담이었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다 회복됐어요, 현재로선 그래요. 그저 여기 남아 여러 사람들의 회복을 도와주는 게 좋아서 그래요. 음악도 가르치고, 야채도 기르고. 난 여기가 좋아요. 다들 친구 같거든. 거기 비하면 밖의 세상엔 뭐가 있어요? 내 나이 지금 서른여덟이니까 금방 마흔이에요. 나오코하곤 달라요. 내가 여길 나간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받아 줄 가정도 없고, 이렇다 할 직장이 있나, 친구가 있나, 게다가 7년씩이나 여기 있다 보니 세상일은 아무것도 몰라요. 물론 가끔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긴 하지만, 7년 동안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 본 일이 없는 걸. 이제 와서 나간댔자 어떻게 하면 좋을 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 누가 압니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면서 그녀는 잠시 손아귀에서 라이터를 빙빙 돌렸다. "그렇지만 와타나베 군, 내게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요. 괜찮다면 다음에 시간이 더 있을 때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오코는 좀 좋아지고 있는 겁니까?"
"글쎄, 우린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엔 퍽 혼란스런 상태여서 우리도 어떻게 하나 하고 다소 걱정스러웠지요. 하지만 지금은 차분해지고 말하는 것도 훨씬 나아져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표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그렇지만 나오코는 좀 더 일찍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나오코의 경우는 그 기즈키라는 남자 친구가 죽은 시점부터 이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렇다는 가족들도 알고 있었을 테고, 나오코 자신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가정적인 배경도 있고 하니까....."
"가정적인 배경이라니요?" 하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머, 학생은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라고 이번엔 오히려 그녀가 더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그 이야긴 나오코에게 직접 들어요. 그쪽이 더 나을 테니까. 나오코도 학생한텐 여러 가지 얘기를 정직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스푼을 들고 또 커피를 휘저은 다음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규칙상 그렇게 돼 있으니까 처음에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학생과 나오코가 단둘이만 있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이건 규칙이에요. 방문자가 면회 상대하고 둘이만 있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항상 거기엔 관찰자가-현실적으로 내가 되지만요-배석하게 돼 있어요.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참아 줄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아요. 괜찮죠?"
"괜찮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주저할 것 없이 아무 이야기나 다 해요. 내가 곁에 있다는 것엔 신경 쓰지 말고. 난 학생과 나오코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대부분을 다 알고 있으니까."
"다요?"
"거의 다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린 그룹 진료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린 웬만큼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어요. 게다가 나와 나오코하곤 무엇이든 서로 숨김없이 말하니까. 여기선 그렇게 비밀이 많지 않아요."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전 잘 모르겠습니다. 도쿄에 있을 때 제가 나오코에게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그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나 역시 몰라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나오코도 모르니까. 그건 둘이 서로 잘 이야기해 보고 앞으로 결정지을 일이죠. 그렇잖아요?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일이 옳았는지 어쨌는지는 그 뒤에 다시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셋은 서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생과 나오코와 나. 정직하게 서로를 돕고자 마음만 먹으면 말예요. 셋이서 그렇게 하면 경우에 따라선 상당한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학생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있지요?"
"모레 저녁때까지는 도쿄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르바이트 가야 할 일이 있고, 목요일엔 독일어 시험이 있으니까요."
"알았어요. 그럼 우리 방에서 자요. 그렇게 하면 돈도 안 들고, 시간에 구애받을 것도 없이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 방이라니, 누구 방입니까?"
"나와 나오코의 방이지 누구 방이겠어요? 방이 둘로 나누어져 있고, 소파 침대가 하나 있으니까 자는 데도 지장이 없어요, 걱정 말아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말하자면 남자 방문객이 여자 방에 묵는다는 게....."
"왜요, 설마 한밤중에 우리 침실로 들어와서 번갈아 강간할 것도 아니잖아?"
"물론입니다."
"그렇담 문제될 게 없지요. 우리 방에 묵으면서 차분히 여러 가지 이야길 나눠요. 그게 좋아요. 그래야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내가 기타를 치는 것도 들을 수 있고, 꽤 잘 쳐요, 나."
"그렇지만 정말 폐가 안 되겠습니까?"
레이코 여사는 세 개째의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입 끝을 힘주어 모으더니 불을 붙였다.
"우리 둘은 이미 그 문제를 놓고 의논을 마쳤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들을 대표해서 내가 학생을 초대하고 있는 거예요, 사적인 것이지만. 그쯤이면 예의바르게 승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기꺼이."
그녀는 눈꼬리에 주름을 깊게 짓고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참 이상한 말투를 쓰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호밀 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설마요" 라고 말하면서 내가 웃었더니, 그녀도 담배를 입에 문 채 웃었다.
"그렇지만 학생은 솔직한 사람인 것 같군요. 난 보면 알아요. 여기에 7년 간 있으면서 온갖 사람이 오가는 걸 봐왔으니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 말예요. 학생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쪽이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열려고 마음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사람."
"열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즐거운 듯이 테이블 위에 손은 모았다.
"회복되죠." 라고 그녀는 말했다. 담뱃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본부 건물에서 나온 우리는 조그만 언덕을 넘어, 풀장과 테니스 코트와 농구 코트 옆을 지나갔다. 테니스 코트에선 두 남자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깡마른 중년의 남자와 살찐 젊은이였다.
두 사람 다 잘 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테니스가 아닌 전혀 다른 경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게임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볼의 탄성에 흥미가 있어서 그것을 연구하는 중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생각에 잠긴 듯 하면서 열심히 볼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흥건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젊은이가 레이코 여사를 보자 게임을 중단하고 걸어와서는, 벙실벙실 웃으면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테니스 코트 옆에서는 커다란 잔디 깎는 기계를 든 남자가 무표정하게 잔디를 깎고 있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니까 숲이 나타났고, 숲 속에는 아담한 양옥들이 거리를 두고 열다섯이나 스무 채 가량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 앞에는 수위가 타고 있었던 것과 같은 노란색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여긴 직원들이 살고 있다고 레이코 여사가 가르쳐 주었다. "시내에 나가지 않아도, 여기서 뭐든지 구할 수 있어요" 라고 그녀는 걸어가면서 설명했다. "식료품은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거의 자급자족해요. 양계장이 있으니까 계란도 먹을 수 있고, 책이랑 레코드도 다 있어요. 운동 시설도 있고 조그만 슈퍼마켓 같은 것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이발사도 다녀가고, 주말엔 영화도 상영해요. 특별한 물건은 시내에 다녀오는 직원에게 부탁할 수 있고, 양복 같은 것은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하면 되고, 그런대로 불편을 느끼지 않아요."
"시내엔 나가지 못합니까?"
"그건 안 돼요. 가령 치과에 가야 한다든가, 그런 특별한 경우엔 예외지만 원칙적으론 허가되지 않아요. 여길 떠난다는 것은 완전히 그 사람의 자유의사에 달렸지만, 한 번 떠나면 다신 여기로 돌아오지 못하죠. 나무다리를 불살라 버리는 것과 같아요. 이삼일 시내에 나갔다 돌아온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걸 허락해 버리면 들락날락하는 사람 천지가 되어 버릴 테니까."
숲에서 벗어나니 완만한 경사지였다. 그곳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 불규칙하게 줄지어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잘 성명하진 못하겠지만, 아무튼 처음 느낌이 어딘가 이들 건물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비현실적인 것을 분위기 있게 그리려고 한 그림에서 흔히 느끼는 정감과 흡사했다. 월트 디즈니가 뭉크의 그림을 기초로 만화 영화를 만든다면 혹시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건물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다 같은 모양에다 다 같은 색깔이었다. 모양은 대체적으로 입방체에 가까웠고, 좌우 대칭인 데다 출입구가 넓었으며, 창문이 많이 달려 있었다. 그 건물들 사이사이로, 마치 자동차 운전 교습소 코스 같은 꾸불꾸불한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어느 건물 앞에나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잘 가꾸어져 있었다. 인적이 없었고, 어느 창문에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길 C지구라고 하는데 여자들만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곳이에요. 이런 건물이 열 동 있고, 각 동마다 넷으로 나누어져 하나에 두 사람씩 살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80명은 수용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인원은 32명뿐이에요."
"아주 조용하군요."
"지금 이 시간엔 아무도 없어요. 나는 특별 취급이니까 이러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요. 운동하는 사람, 뜰을 손질하는 사람, 그룹 요법을 받고 있는 사람, 밖에 나가 산나물을 캐는 사람.....각자가 스스로 정해서 스케줄을 짜요. 나오코는 지금 뭘 하고 있더라? 벽지를 새로 바르는 일이나 페인트칠을 다시 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저런 일이 대충 다섯 시까지 몇 가지가 있어요."
'C-7'이라는 번호가 붙은 건물로 들어간 그녀는, 맨 끝에 있는 층계로 올라가 오른쪽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가 집안을 아내하며 보여 주었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부엌과 욕실 등 네 공간으로 나누어진, 간소하고 좋은 인상을 주는 주거지였다. 불필요한 장식도 없고, 별다른 가구도 없으면서 그리 허전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꼬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방안에 있으려니까 그녀를 앞에 놓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거실에는 소파 하나에다 테이블, 그리고 흔들의자가 있었다. 부엌에도 식탁이 있었는데, 양쪽 테이블 위에는 큼지막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침실에는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와 벽장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작은 탁자와 독서용 전등이 있었고, 문고본이 뒤집어진 채로 놓여있었다. 부엌에는 소형 전기 레인지와 냉장고 하나가 세트로 놓여 있어서, 간단한 요리 정도는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욕조가 없어 샤워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훌륭하죠?" 라고 그녀는 말했다. "욕탕과 세탁 시설은 공동으로 쓰게 되어 있어요."
"지나칠 정도로 잘 돼 있습니다. 제가 있는 기숙사는 천장과 창문뿐인 걸요."
"학생은 이곳 겨울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요."
그녀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소파에 앉힌 다음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길고 고생스러운 게 여기 겨울이죠. 어딜 봐도 눈 눈 눈, 눈 천지고, 음습하게 습기가 차서 뼈 속까지 얼어붙어요. 겨울이 되면, 우린 날이면 날마다 눈을 치우며 하루를 보내죠. 그런 계절엔 방을 따뜻하게 해놓고,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지내요. 그러니까 이 정도의 공간이 없으면 숨이 막혀서 모든 일이 잘 안 되지. 학생도 겨울에 와보면 알게 될 거야."
그녀는 긴 겨울 생각을 떠올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릎 위에 손을 모두였다.
"이걸 옆으로 눕혀서 침대로 만들어 줄게요." 하며 그녀는 둘이 앉아 있는 소파를 탕탕 두드렸다. "우린 침대에서 자니까 학생은 여기서 자요. 그래도 되겠죠?"
"전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정해요. 그리고 우린 아마 다섯 시경이나 돼야 돌아올 거예요. 그때 까진 나오코나 나는 할일이 있으니까, 학생은 여기서 기다려 주면 좋겠어요, 괜찮지요?"
"좋습니다,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나간 뒤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요 속에 별 생각 없이 얼마 동안 몸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불현듯 기즈키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드라이브 나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가을이었더라? 4년 전이다. 나는 기즈키의 가죽 잠바 냄새와 그 소리가 굉장히 시끄러운 야마하의 125cc짜리 오토바이를 떠올렸다. 우린 굉장히 먼 해안까지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몹시 지쳐서 돌아왔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때의 드라이브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가을바람이 귓전에서 날카롭게 소리를 냈고, 기즈키의 잠바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내 몸이 허공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랜 시간 나는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있으면서, 그 당시의 일을 잇 따라 떠올리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옛날 일과 정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에 떠올랐다. 어떤 것은 즐거웠고, 어떤 것은 조금 슬펐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기억의 홍수(그것은 참으로 샘물처럼 바위틈으로부터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속에 깊이 잠겨 있었기에, 나오코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였다.
얼핏 보니 나오코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걸터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 모습이 내가 빚어낸 이미지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나오코였다.
"자고 있었어요?"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뭘 좀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잘 있었어?"
"음, 그래요."
나오코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는 옅은 색깔의 먼 풍경처럼 보였다.
"금방 가야 해요. 사실은 여기 와선 안 되는데, 잠깐 틈이 나서 왔어요. 그러니까 오래 있진 못해요. 내 머리 모양이 형편없지요?"
"아니, 아주 예뻐."
그녀는 국민학교 여학생 같은 산뜻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쪽은 옛날과 다름없이 단정하게 핀을 꽂고 있었다. 그 헤어스타일은 정말로 그녀에게 잘 어울렸고 그녀다웠다. 그녀는 중세의 목판화에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소녀처럼 보였다.
"귀찮아서 레이코 언니에게 매번 자르고 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뻐요?"
"정말이야."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엉망이라고 하던데."
나오코는 머리핀을 풀어 머리를 내리고, 몇 차례 손가락으로 빗어 올리고 다시 묶었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나, 셋이서 만나기 전에 꼭 당신과 단 둘이서 만나고 싶었어요.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더라도, 당신 얼굴을 보고 먼저 익혀 두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서먹할 것 같아서요. 난 숫기가 없거든요."
"여기 생활에는 익숙해졌어?"
"그래요, 조금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머리핀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젠 더 시간이 없어요. 나, 가봐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타나베,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 지금 몹시 기뻐요. 그렇지만 여기 있는 게 부담스러워지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 줘요. 여긴 조금 특수한 장소인 데다 규칙도 특수하니까, 더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만일 그렇게 느껴지면 솔직하게 말해 줘요. 그렇다고 내가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우린 여기선 모두 정직해요. 다들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그래, 나도 솔직하게 말할 께."
나오코가 내 옆에 앉더니 몸을 기대어 왔다. 어깨를 안으니까 그녀는 머리를 내 어깨에 얹고, 코끝을 목에 대었다. 그리고 내 체온을 확인이나 하려는 듯이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부드럽게 안고 있자니까 가슴이 약간 뜨거워졌다.
얼마 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가버린 후,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잠들 생각은 없었는데도 나는 나오코의 존재감 속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부엌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그릇이 있고, 욕실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칫솔이 있으며, 침실에는 그녀가 잠자는 침대가 있었다. 그런 방에서 나는 세포의 구석구석으로부터 한 방울씩 피로를 짜듯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스름 어둠 속에서 춤추는 나비 꿈을 꿨다.
잠이 깨었을 때 시계는 네 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바람은 자고, 구름의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자면서 땀을 흘렸기 때문에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고, 셔츠를 새것으로 갈아있었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시고 싱크대 앞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동의 창문이 보였다. 그 창문 안쪽에는 두꺼운 종이를 오려 만든 장식물이 몇 가닥 실에 매달려 있었다. 새라든가 구름, 소와 고양이 같은 모양이 정성들여 오려진 모빌 같은 거였다.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 인기척도 없었고, 무슨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어쩐지 손질이 잘 된 폐허 속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C지구'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다섯 시가 조금 지나서부터였다. 부엌 창엣 내다보니 두세 명의 여자가 바로 밑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셋 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나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음성에서 받은 느낌으로는 그렇게 젊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 조금 있자니까, 또 같은 방향으로부터 여자 넷이 걸어오고, 마찬가지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주위에는 해질녘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거실의 창문으로 숲과 산 능선이 보였다. 능선 위에는 그 외형을 장식하는 듯 희미한 빛이 떠 있었다.
다섯 시 반에,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가 함께 돌아왔다. 나오코와 나는 오랜만에 처음 만났을 때 하는 것처럼 인사를 했다. 나오코는 정말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레이코 여사는 내가 읽던 책이 눈에 띄자 뭘 일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어쩌면.....왜 이런 곳까지 그런 책을 들고 와요"
라고 레이코 여사는 기가 차다는 투로 말을 했다.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레이코 여사가 끓여온 커피를 셋이서 마셨다. 나는 나오코에게 '돌격대'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만났던 날에 그가 나에게 준 반딧불 이야기를 했다.
"정말 서운하네, 그 사람이 사라졌다니까. 그 사람 이야기는 좀 많이 듣고 싶었는데."
나오코는 몹시 섭섭한 듯이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돌격대'가 뭔지 알고 싶어 하기에 나는 또 그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녀도 한바탕 크게 웃었다. '돌격대' 이야기를 하는 한 세계는 평화롭고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섯 시가 되자 우리 셋은 본관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나오코와 나는 생선 구이에다 야채샐러드, 조림, 그리고 밥과 된장국을 먹고, 레이코 여사는 마카로니 샐러드와 커피만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또 담배를 피웠다.
"나이가 들면 말이죠,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아도 괜찮도록 몸이 달라져요" 하며 그녀는 사뭇 설명조로 말했다.
식당에서 약 20여명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동안에도, 몇 사람씩 들어오고 또 나갔다. 식당의 광경은 연령의 편차가 크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숙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 다르다면 누구나가 일정한 음량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게 떠드는 사람도 없거니와 소곤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소리 내어 웃거나 놀라거나, 손을 치켜들고 누굴 부른다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가 같은 음량으로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몇 개의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 세 사람, 많아야 다섯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며 응, 응, 하면서 수긍을 하고, 그 사람의 말이 끝나면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얼마 동안 말을 하곤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내가 낮에 본 그 기묘한 테니스 게임을 떠올리게 했다. 나오코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지 의아스러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순간 질투 섞인 외로움을 느꼈다.
내 뒤쪽 테이블에서는 흰옷을 입은, 어느 모로 보나 의사인 듯한 분위기가 풍기는 머리숱이 적은 남자가, 안경을 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다람쥐 같은 얼굴의 중년 여성을 향해, 무중력 상태일 때 위액이 분비가 어떻게 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청년과 중년 여성은 '네'라든가 '그래요?'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을 듣다 보니, 머리숱이 적은 흰옷의 남자가 정말 의사인지 차츰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식당에서는 아무도 내게 이렇다 하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지 않았고, 내가 거기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자리에 끼여 있는 것도 그들에겐 늘 있는 일의 하나인 것 같았다.
단 한 번, 흰옷을 입은 남자가 갑자기 뒤돌아보면서 "언제까지 여기 계실 예정이죠?" 하고 내게 물었다.
"이틀 묵고, 수요일에 떠날까 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계절적으로 요즘이 제일 좋아요, 여긴. 그러나 겨울에도 와 봐요, 온갖 것이 흰색으로 덮인 것도 볼 만하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오코는 눈이 오기 전에 여길 떠날지도 몰라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겨울은 좋아" 하고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되풀이 했다. 그 남자가 정말 의사인지 나는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레이코 여사에게 물었다. 그녀는 질문의 취지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라니, 보통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죠, 하루에 있었던 일, 읽었던 책, 내일의 날씨, 그런저런 이야기요. 설마 학생은 누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은 북극곰이 별을 먹었으니까 내일은 비가 올 거야!' 같은 말을 외칠 거리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죠,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다들, 너무 조용하게 이야길 하고 있으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하는 궁금증이 언뜻 들었을 뿐입니다."
"여긴 환경이 조용하니까 자연히 모두들 환경에 맞게 조용히 이야길 하게 돼요."
나오코는 생선뼈를 가려서 접시 한 귀퉁이에 깨끗하게 치워 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게다가 큰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요. 누굴 설득할 일도 없고, 남의 주목을 끌 필요도 없고."
"그렇군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그리워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무의미한 외침, 과장된 표현 등이 그리웠다. 물론 나는 그러한 웅성거림엔 진저리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생선을 먹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차분할 수가 없었다.
그 식당의 분위기는 특수한 기계 공구의 견본 전시장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한정된 분야에 대한 강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한정된 장소에 모여서, 자기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서,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C지구' 안에 있는 공동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샤워만이라도 좋다면 욕실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들이 나가고 나서 나는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책장에 꽂혀 있는 레코드 중에서 빌 에반스의 것을 꺼내려다 말고, 그게 나오코의 생일날 그녀의 방에서 내가 몇 번인가 들었던 것과 같은 레코드임을 깨달았다. 나오코가 울었고, 내가 그녀를 안았던 그 밤이었다.
반년밖에 안 된 일이었지만 그게 아득한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그 일을 두고두고 몇 번씩이나 생각해 왔던 탓이 아닐까. 너무나 자주 생각하였기 때문에 시간 감각이 늘어나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달빛이 매우 밝았기 때문에, 나는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워서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이 온갖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마치 연한 먹물을 칠한 듯 그윽하게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브랜디를 담은 얇은 금속제의 물통을 꺼내어, 한 모금 입에 넣고 천천히 마셨다. 따뜻한 감촉이 목구멍으로부터 위장으로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위로부터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다시 한 모금 브랜디를 마시고 나서 물통의 마개를 막고 그것을 배낭 속에 도로 넣었다. 달빛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20분쯤 지나서 돌아왔다.
"밖에서 보니 방에 전깃불이 꺼져 있어서 놀랐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짐을 챙겨 도쿄로 돌아가 버린 줄 알았다고요."
"설마 그러려고요. 이렇게 밝은 달빛을 본 지가 오래 돼서 그저 전등을 꺼본 겁니다."
"그러고 보니 멋있다, 이렇게 하니까"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저, 레이코 언니, 요전에 정전 때 쓰다 남은 초 있지요?"
"부엌 서랍에 있을 걸, 아마."
나오코가 부엌으로 가더니 서랍 속에서 하얀 초를 꺼내 들고 왔다. 나는 불을 붙이고 촛불을 재떨이에 떨어뜨려, 거기에 초를 세웠다. 레이코 여사가 그 불에 담뱃불을 댕겼다.
주위는 여전히 괴괴했다. 셋이 촛불 주위에 둘러앉아 가만히 있으려니까, 마치 우리 셋만이 세계의 끝에 떠밀려 와 있는 것 같았다.
호젓한 달빛 그림자와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가 하얀 벽에서 겹치고 또 엉키고 있었다. 나오코와 나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고, 레이코 여사는 맞은편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때요, 포도주 안 마실래요?"
레이코 여사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술을 마셔도 됩니까?"
나는 약간 놀라서 물었다.
"정말은 그래선 안 되는데" 라고 레이코 여사는 귀를 만지면서 멋 적은 듯이 말했다. "대개는, 봐도 못 본 척해요, 포도주나 맥주 정도라면.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거예요. 난 친한 직원에게 부탁해서 조금씩 사달라고 하죠."
"가끔 둘이서 술 파티를 벌이는 걸요, 우린."
나오코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겠군" 하고 내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냉장고에서 백포도주를 꺼내어 따개로 코르크 마개를 뽑은 다음, 유리잔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정말 뒤뜰에서 만든 것처럼 개운하고 맛좋은 포도주였다.
레코드판이 다 돌아가자, 레이코 여사는 침대 밑에서 기타를 들고 나와 귀여운 듯이 조율을 하고선, 천천히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가끔 손놀림이 막히는 곳은 있었지만 정성이 깃든, 흐트러짐이 없는 바흐 곡이었다. 따스하고 친밀하고, 거기엔 연주하는 기쁨 같은 것이 충만해 있었다.
"기타는 여기 와서 시작했어요. 방에 피아노가 없으니까. 혼자 배우는 데다, 손가락이 기타에 적합하지 않아서 좀처럼 숙달이 안 돼요. 그렇지만, 난 기타가 좋아요. 조그맣고, 간결하고, 부드럽고, 이를테면 작고 따스한 방 같아요."
그녀는 바흐의 소품을 한 곡 더 연주했다. 조곡 중의 뭔가였다. 촛불을 바라보고 포도주를 마시며 레이코 여사가 연주하는 바흐의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바흐가 끝나자 나오코가 레이코 여사에게, 비틀즈의 것을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
"희망곡 시간" 이라고 레이코 여사가 한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에게 말했다.
"나오코가 온 뒤로는 날이면 날마다 비틀즈 노래만 쳐달라고 성화거든요. 마치 가엾은 음악의 노예처럼."
그녀는 그러면서도 <미셜>을 매우 능숙하게 연주했다.
"좋은 곡이야. 나, 이 곡이 정말 좋아" 하고 레이코 여사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넓은 초원에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것 같은 곡이야."
그리고서 그녀는 <노웨어 맨>과 <줄리아>를 쳤다. 이따금 기타를 치면서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또 포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노르웨이의 숲>을 부탁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부엌에서, 고양이 모양의 저금통을 들고 오자, 나오코가 지갑에서 1백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거기에 넣었다.
"뭡니까, 그거?" 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땐 여기에 1백 엔씩 넣게 돼 있어요.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그렇게 정했어요. 정성을 담아 신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돈이 내 담배 값이 되는 거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덧붙이고 나서 손가락을 주물러 풀고는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했다.
그녀가 치는 곡엔 정성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이 지나치게 흐르는 적은 없었다. 나도 주머니에서 1백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그 저금통에 넣었다.
"고마워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방긋이 웃었다.
"이 곡을 들으면 난 가끔 무척 슬퍼질 때가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감정에 휩싸여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혼자서 외롭고 춥고, 그리고 어둡고, 아무도 구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내가 신청하지 않으면 레이코 언니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요."
"무슨 <카사블랑카> 같은 이야기죠?" 하고 레이코 여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뒤에 레이코 여사는 보사노바를 몇 곡 더 연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오코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편지에서도 스스로 말했듯이 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았고, 햇빛에 까뭇하게 그을려 있었으며, 운동과 옥외작업 덕택으로 몸매도 탄탄해 보였다.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과 수줍은 듯 흔들리는 작은 입술만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숙한 여자의 그것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지난날 그녀의 아름다움의 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상대방을 문득 서늘하게 만들곤 하던 그 얇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은 멀리 뒤로 물러서 있었고, 그 대신 부드럽게 감싸 주는 듯한 독특한 차분함이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내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불과 6개월 동안에 한 여성이 이렇게도 많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새로운 아름다움은 이전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를 매혹시켰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사라진 면을 생각하니 아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의 독특한, 그 자체가 성큼성큼 혼자서 걸어가는 듯한 자신감 있는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것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오코는 나의 생활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대학에서의 동맹 휴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나가사와 이야기를 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묘한 인간성과 독자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편견에 치우친 도덕성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마지막엔 그녀도 대체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와 함께 여자를 낚으러 갔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유일한 남자가 이런 별난 인물이라고 설명했을 뿐이다.
그 동안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안고 다시 한 번 아까의 그 푸가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짬짬이 포도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했다.
"그 사람 좀 이상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이상한 남자지."
"그래도 그 사람이 좋아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좋아한다고는 아마 못할 것 같아. 그 사람은 좋아진다거나 어쩐다거나 하는 그러한 범주의 존재가 아니니까. 그리고 본인 역시 그런 걸 원하지도 않아. 그런 점에선 그 사람 꽤 정직해. 거짓이 없고,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야."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잔다면서 금욕적이라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하고 나오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몇 여자와 잤다고 그랬지요?"
"거의 8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 상대한 여자의 수가 늘면 느는 만큼 그 하나하나의 행위가 갖는 뜻도 급속도로 희박해져. 그런데 그게 또 그가 원하는 거야."
"그런 게 금욕적이다는 거예요?"
"그에겐 그래."
나오코는 잠시 내가 한 말을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사람 나보다 훨씬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 같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만 그 사람의 경우는 자기 마음속에 비틀려 있는 것을 모두 정연하게 계통을 세워서 이론화 시키고 있거든.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여기에 데려와 봐, 이틀이면 나가 버릴 거야.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이젠 알았고, 이젠 다 알았다고 하면서 말이지.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세상에선 존경을 받는다고."
"난 정말 머리가 나쁜가 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여기 일을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요. 나 자신을 아직 잘 모르는 것처럼 말이에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게 보통이야.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 그런 게 보통 인간이지."
나오코는 두 다리를 소파에 올려 무릎을 세우고는, 그 위에 턱을 고였다.
"나 말이지,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저 보통 사람이야. 보통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으로 자랐고, 보통 얼굴을 하고 있는 데다 성적도 보통이고,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그렇지만요,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고 그러는 인간을 믿어선 안 된다는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 좋아하는 스코트 피츠제럴드가 아니었나요? 나 그 책, 당신한테 빌려 읽었거든요."
나오코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하고 나는 인정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그렇다고 나 자신을 몰아가고 있는 건 아니야. 정말로 마음속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나오코는 내게 뭔가 보통이 아닌 게 있다고 생각해?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하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것도 물어 봐야 알아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과 잤겠어요? 술에 취해 누구면 어떠냐고 당신과 잔 줄 알아요?"
"물론 그렇겐 생각 안 해" 하고 내가 말했다.
나오코는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암담해서 포도주를 마셨다.
"당신과 잔 여자는 몇 사람쯤 되나요?' 하고 나오코는 불현 듯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여덟이나 아홉 명쯤" 하고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레이코 여사가 연습을 그치고 기타를 소리 나게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학생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잖아?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기에 그래요?"
나오코는 아무 말 없이 그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레이코 여사에게 최초의 여자와 자고 그녀와 헤어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가사와에게 이끌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여자 저 여자와 자게 된 사정도 이야기했다.
"변명 같지만 난 괴로웠던 거야" 하고 나오코에게 말했다. "너와 매주 같이 만나 이야기하는 건 난데, 네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기즈키뿐이라는 사실이 말이야. 그걸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어.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잔 것 같아."
나오코는 몇 차례 고개를 가볍게 흔들다가, 얼굴을 들고 또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때 왜 기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었지요? 아직도 그게 알고 싶어요?"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죽은 사람은 그대로 죽은 채지만 우린 앞으로 더 살아야 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코 여사는 어려운 악절을 몇 번씩 되풀이하며 다시 연습하고 있었다.
"난 기즈키와 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고 말하면서 나오코는 머리핀을 풀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나비 모양의 그 핀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물론 그도 나와 자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우리 둘은 몇 번이나 그러려고 해 봤어요. 하지만 안 됐어요. 못한 거예요. 왜 안 되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몰라요. 나는 기즈키를 사랑하고 있었고, 처녀성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에도 별로 구애받지 않았거든요. 그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난 뭐든지 해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못했어요."
나오코는 또다시 머리칼을 올리고 핀을 꽂았다.
"전혀 몸이 따라가질 않았어요." 하고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열리지가 않았어요, 전혀. 그래서 몹시 아팠어요. 말라 있어서 아팠던 거예요. 이런저런 방법을 우린 다해 봤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안 되었어요. 뭘 가지고 적셔 봐도 역시 아픈 거예요. 그래서 난 줄곧 기즈키 것을 손이나 입으로.....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까보다도 한층 크고 밝아진 것 같았다.
"와타나베, 나도 이런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았어요. 되도록이면 나 혼자 가슴속에 조용히 간직해 두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할 수 없어요.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로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으니까요. 그렇잖아요, 당신과 잤을 땐 나 금방 젖어왔지요? 그렇지요?"
"응."
"나, 그 스무 살 되던 생일날 저녁, 당신과 잔 이후부터 줄곧 젖어 있었어요. 그리고 쭉 당신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안겨서, 알몸이 되고, 몸에 당신의 손길을 받고..... 그런 생각을 한 건 난생 처음이었어요.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생각이 나는 거지요? 기즈키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사랑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라는 뜻인가?"
"미안해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당신에게 상처 주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만은 이해해 줘요. 나와 기즈키는 정말 특별한 관계였어요. 우리는 세 살 때인가부터 함께 놀았어요. 우린 언제나 함께였고, 그렇게 자랐어요. 처음 키스를 한 게 국민학교 6학년 때였죠. 정말 멋졌어요. 내가 처음 생리가 있었을 땐 그 사람한테 달려가서 엉엉 울었지요. 우린 어떻든 그런 관계였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죽은 뒤로는 어떻게 사람들과 접촉해야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떠한 것인지조차도."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포도주 잔을 집으려고 했지만, 잘 잡혀지지 않아 잔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카펫 위로 포도주가 쏟아졌다. 내가 몸을 굽혀 잔을 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나오코에게 포도주를 좀 더 마시겠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갑자기 몸을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몸을 둘로 접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예전처럼 숨이 끊어질 듯이 격렬하게 울었다.
레이코 여사가 기타를 내려놓고 다가와 나오코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나오코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는 갓난아기처럼 머리를 레이코 여사의 가슴에 파묻었다.
"저, 와타나베 학생"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20분 정도 밖에 나가 산책하고 오지 않을래요. 여긴 내가 수습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셔츠 위에 스웨터를 입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라고 레이코 여사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학생 탓이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말아요. 돌아올 무렵엔 진정돼 있을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한 눈을 나에게 찡긋 감아 보였다.
나는 묘하도록 비현실적인 달빛이 밝혀 주는 길을 따라서, 잡목 숲으로 접어들어 하염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 아래서는 온갖 소리가 야릇한 울림을 내고 있었다. 나의 발걸음 소리가 흡사 바다 밑바닥을 걷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처럼, 어딘지 전혀 방향이 다른 곳에서부터 둔하게 들려 왔다.
가끔 뒤쪽에서 바삭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밤 짐승들이 숨을 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숲 속에 서려 있었다.
잡목 숲을 벗어나 야트막한 언덕의 경사면에 앉아서, 나는 나오코가 살고 있는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나오코의 방을 찾기는 쉬웠다. 전등이 켜 있지 않은 창문 중에 안쪽에서 작은 불빛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곳을 찾으면 되었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작은 불빛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불빛은 나에게 타다 남은 영혼의 마지막 명멸과 같은 것을 연상시켰다. 나는 그 불빛을 두 손으로 감싸 단단하게 지켜 주고 싶었다. 나는 개츠비가 강 건너편의 작은 불빛을 매일 밤 지켜보던 것처럼, 가늘게 흔들리는 그 불빛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숙소 앞에까지 오니까 레이코 여사가 기타 연습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계단을 올라가 노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오코는 보이지 않고, 레이코 여사 혼자 카펫 위에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레이코 여사는 손가락으로 침실 문을 가리켰다. 나오코는 안에 있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녀는 기타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더니, 나보고 옆에 와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병에 남아 있는 포도주를 유리잔 두 개에 나누어 따랐다.
"나오코는 괜찮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내 무릎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잠깐 혼자 누워 있으면 진정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조금 흥분했을 뿐이니까. 어때요, 그 사이에 우리 둘이서 밖을 거닐지 않을래요?"
"그러지요."
레이코 여사와 나는 가로등이 밝혀 주는 길을 천천히 걸어, 테니스 코트와 농구 코트가 있는 곳까지 가서, 거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벤치 밑에서 오렌지색 농구공을 꺼내어 잠시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테니스 할 줄 아니냐고 물었다. 아주 서툴지만 못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농구는?"
"잘하는 편은 못 됩니다."
"그럼, 학생이 잘하는 건 뭐가 있어요?" 하고 그녀는 눈꼬리에 주름살을 모으듯이 하고 웃으며 말했다. "여자와 자는 것 말고?"
"꼭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닙니다."
나는 조금 마음이 상하여 대꾸했다.
"화내진 말아요, 농담으로 그런 거니까. 그런데 사실은 어때요? 진짜 잘하는 게 뭐예요?"
"잘하는 게 없습니다. 좋아하는 건 있어도."
"어떤 걸 좋아하죠?"
"걸어서 여행하는 것, 수영, 책 읽는 것."
"혼자서 하는 일을 좋아하는군요?"
"그렇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남들과 같이 하는 게임 같은 거엔 옛날부터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건 뭘 해도 제대로 심취할 수가 없어요.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라는 기분이 들곤 하죠."
"그럼 겨울에 여기로 와요. 겨울이면 우리는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하곤 해요. 학생도 틀림없이 재미있어 할 거야. 눈 위를 하루 종일 허둥지둥 달리고, 땀도 흠뻑 흘리고....."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에 가로등 불 밑에서 낡은 악기라도 점검하듯, 골똘히 자기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오코는 자주 저런 상태에 빠집니까?"
"그래요, 가끔은" 하고 그녀는 이번엔 왼손을 보며 말했다. "가끔 저렇게 돼요. 흥분하고, 울고. 그래도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야. 감정을 밖으로 노출시켜 보이니까. 무서운 건 노출이 안 될 때거든. 그렇게 되면 감정이 몸속에 쌓이고 점점 굳어 가요. 온갖 감정이 뭉쳐 몸속에서 죽어 가는 거예요. 그 지경이 되면 큰일이죠."
"제가 아까 무슨 잘못 말한 거라도 있습니까?"
"천만에, 염려 말아요. 잘못한 말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 놓아요. 무엇이든 정직하게 말해요. 그게 가장 좋아요. 혹 그 말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더라도, 혹은 아까처럼 남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결과가 되더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최상의 방법이에요. 학생이 진심으로 나오코를 회복시켜야겠다고 바란다면, 그렇게 해요. 처음에도 말했지만 나오코를 돕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나오코를 회복시킴으로써 자기도 회복되기를 바라야 해요. 그게 이곳의 방법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학생도 여러 가지 일을 정직하게 말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여기서는. 밖에선 모은 것을 다 정직하게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알았습니다."
"나는 여기에 7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걸 지켜봤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아마 너무 많이 봐왔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그 사람이 회복될 거라거나 안 될 거라는 게 비교적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나오코의 경우는 나도 전혀 짐작이 안 돼요. 다음 달이 되면 깨끗이 치료될지도 모르겠고, 몇 년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될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짐작이 안 가요. 그러니까 그 점에 관해선 학생에게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요. 그저 정직하게 대하라거나, 도와주라는 일반적인 조언밖에 할 수 없어요."
"어째서 나오코의 경우에만 짐작이 안 가는 거죠?"
"아마 내가 나오코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잘 가늠이 안 되는 게 아닐까, 감정에 치우쳐서. 나, 나오코를 참 좋아하거든. 그리고 그것과는 별도로 나오코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다소 복잡하게, 줄이 엉킨 것처럼 얽혀 있어서, 그걸 하나하나 풀어 나가자면 힘이 들어요. 그걸 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어떠한 기획에 확 다 풀릴지도 모르겠고, 그래요. 그래서 나도 판단이 안서는 거죠."
그녀는 다시 한 번 농구공을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번엔 땅에다 튀겼다.
"제일 중요한 점은 서둘지 않는 것이에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내게 말했다. "이게 또 하나의 나의 충고라면 충고예요. 서둘지 말아야 해요.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일이 얽히고 설켜 있어도, 절망적인 기분에 빠지거나 짜증을 부려서 무리하게 잡아당기거나 하면 안 돼요.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서서히 풀어 나가지 않으면요. 할 수 있겠어요?"
"해보겠습니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또 시간을 들여도 완전하게 고쳐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학생, 그 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린다는 거 쉽지 않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공을 튀기면서 말했다. "특히 학생 또래의 사람에게는 그래요. 오로지 그녀가 낫기만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고 거기에 기한이 있거나 보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학생이 할 수 있겠어요? 그럴 만큼 나오코를 사랑해요?"
"모르겠습니다."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저로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정말 잘 모릅니다. 나오코가 하던 말과는 다른 뜻에서입니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는 한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어쨌든 레이코 여사가 아까 말한 것처럼 나와 나오코는 서로 도와야 하겠고, 그 방법밖에 서로에 대한 구제의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다가다 만나는 여자와 잘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마스터베이션이나 하면서 줄곧 기다려야만 합니까? 저로선 수습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 일은."
"레이코 여사는 공을 땅 위에 내려놓더니 내 무릎을 가볍게 쳤다.
"여자들하고 자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학생이 그래도 좋다면 그걸로 좋은 거죠. 학생의 인생이니까 학생 스스로가 정하면 되는 거예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자기를 마모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얼마나 아까워요. 열아홉, 스무 살이라면 인격이 완성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기잖아요. 그러한 시기에 부질없이 옆길로 쏠리면 나이 들어서 고생하게 돼요. 정말이에요, 이건.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행동해요. 나오코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자기 자신도 소중하게 여겨야죠."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게도 스무 살 시절이 있었어요, 아득한 옛날이지만. 믿어져요?"
"믿지요, 물론."
"진짜로?"
"진짜 믿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오코 만큼은 못 돼도 나 역시 나름대로 예뻤어, 그 무렵엔. 지금처럼 주름살도 없었고."
그 주름살이 나에겐 몹시 좋아 보인다고 말하자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론 여자에게 '당신의 주름살은 매력적입니다' 하는 말을 하면 못 써요. 나야 물론 그 말이 기쁘지만."
"조심하겠습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전철 정기권을 넣는 자리에 들어 있던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줬다. 열 살 안팎의 예쁘장한 여자 아이의 칼라 사진이었다. 여자 아이는 화려한 스키복을 입고, 스키를 신은 모습으로 눈 위에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아주 예쁘죠? 내 딸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올해 초에 보내 온 거죠. 지금 국민학교 4학년이던가....."
"웃는 모습이 닮았습니다."
나는 사진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지갑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작은 소리로 콧소리를 내더니 담배를 물고 불을 댕겼다.
"난 젊었을 때 전문적인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어요. 재능도 그런대로 있었고, 주위에서도 인정을 했지요. 제법 귀여움도 받고 자랐어요. 콩쿠르에서 우승한 적도 있고, 음대에선 줄곧 일등, 졸업 후의 독일 유학도 대략 결정이 나 있었어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청춘이었죠. 뭘 해도 순조로웠고, 순조롭지 못해도 주변에서 먼저 손을 써서 잘 되게 해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어요. 음대 4학년 때죠. 비교적 중
요한 콩쿠르가 있어서 쭉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마사지도 하고, 뜨거운 물에 담그기도 하고, 이삼 일 연습도 쉬어 보았지만 그래도 전혀 안 움직였어요. 새파랗게 질려서 병원으로 갔지요. 그래서 온갖 검사를 받아 봤지만 병원에서도 잘 모른다는 거예요. 손가락엔 아무 이상이 없고, 신경도 정상이니까 안 움직일 까닭이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신경성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와서 정신과에도 가보았어요. 하지만 거기에서도 확실한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콩쿠르를 앞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정도밖엔. 그래서 아무튼 당분간은 피아노를 떠나서 살라는 말을 들었지요."
레이코 여사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내뿜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인가 흔들었다.
"그래서 이즈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서 당분간 요양하기로 했어요. 콩쿠르 일은 잊어버리고 당분간 편히 쉬었다 오자, 보름쯤 피아노도 만지지 말고 하고 싶었던 일이나 하며 놀다 오자고 마음먹었던 거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안 되더군요. 뭘 해도 머리에 피아노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어요. 일생 동안 새끼손가락이 이대로 굳어 버리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자꾸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빙빙 도는 거예요. 하기야 그럴 수밖에. 그때까지 내 인생은 피아노가 전부였으니까. 나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그것만을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 밖의 것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손을 다쳐선 안 된다고 하기에 부엌일 한 번 거든 일이 없는 데다, 주위에선 피아노 잘 친다는 것만은 칭찬해 주었는데, 그렇게 자라온 아이한테서 피아노를 빼 봐요, 뭐가 남겠어요? 그것으로 펑! 머리나사가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어요. 머릿속은 뒤엉키고 캄캄해지고."
"그녀는 담배를 땅에다 밟아서 꺼버리고는 또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은 깨졌어요. 두 달 동안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지요. 입원하고 좀 있으니까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음대에 복학하고 겨우 졸업은 했어요. 하지만 말예요, 이미 뭔가가 꺼져 버렸던 거예요. 뭐랄까, 에너지 덩어리 같은 것이 내 몸에서 빠져 나갔던 거죠. 병원 의사도 전문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너무 신경이 약하다며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그러고. 그래서 졸업한 뒤로는 집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어요. 그러나 그게 처량하기 그지없었죠. 내 인생이 거기서 끝난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거죠.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부분이 스물 갓 넘어 끝나 버린 거지 뭐예요.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온갖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은 거예요. 아무도 박수치는 사람이 없고, 떠받쳐 주거나 칭찬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데다, 허구한 날 동네 아이들에게 바이엘이나 소나타를 가르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너무 비참해서 매일 울고만 지냈어요. 억울하기 짝이 없고, 나보다 못하던 사람들이 어느 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했다든가, 어느 음악당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든가, 그런 얘기를 들을 적마다 분해서 눈물을 흘렸어요. 부모님은 나를 무슨 깨지기 쉬운 그릇 다루듯 조심스러워 했어요. 하지만 전 알아요. 그분들 역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에게 딸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이젠 정신 병원을 드나드는 딸이 돼버렸으니까. 혼인길도 막히고..... 그분들의 그러한 고민들은, 함께 살고 있는 동안 무거운 공기처럼 전달되어 왔어요. 지겹기 이를 데 없었죠. 밖에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죄다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겁을 먹고 아예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또 펑! 하고 터지고, 나사가 빠지고, 실타래가 엉키고, 캄캄해지고, 그게 스물넷 되던 해였어요. 그때는 7개월 동안이나 요양소에 있었죠. 여기도 아닌, 격식대로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고 문도 잠겨 있는 곳이었어요. 더럽고, 피아노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말 한심했어요. 그렇지만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버텼지요. 7개월-참 길었어요. 그렇게 해서 주름살도 하나하나 늘어갔고."
레이코 여사는 입을 옆으로 당기듯 하고 웃었다.
"퇴원해서 얼마 후에 애기 아빠를 만나 결혼했어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죠. 비행기 만드는 회사의 기술자였는데, 내 피아노 제자였어요. 좋은 사람이죠. 말수가 적긴 하지만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그런데 반년 정도 레슨을 받은 후에 갑자기 나더러 결혼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냈던 거예요. 어느 날 레슨이 끝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데 갑자기 말이에요. 믿어져요? 그때까지 우린 데이트를 한 적도 없거니와 손을 잡은 일도 없었거든요.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나는 결혼은 안 된다고 했죠.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고 호의도 품고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결혼은 할 수 없다고요. 그 사정이라는 게 뭐냐고 묻기에 정직하게 털어놓았죠. 두 번이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입원한 적이 있다고 말이죠. 조그마한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주었어요. 뭐가 원인이었고, 지금은 어떻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조금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기에 천천히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죠. 나는 전혀 급하지 않으니까, 하고. 그런데 다음 주 그가 와서 말하길, 역시 결혼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랬죠. 3개월만 기다려 보자고. 3개월 동안 둘이 교제해 보고도 당신에게 여전히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3개월 동안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데이트를 했어요.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죠. 그러는 동안 나도 그가 몹시 좋아졌어요. 그와 함께 있으면 비로소 내 인생이 나에게 돌아온 느낌이 들었죠. 둘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싫은 일도 다 잊을 수 있었어요. 피아니스트가 못 되었어도, 정신병원에 입원 경력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다, 인생에는 내가 모르는 좋은 일이 아직도 가득 채워져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이가 고마웠어요. 3개월이 지나고 나서도 역시 그이가 결혼하고 싶다고 했죠. 그래서 저와 자고 싶다면 자도 좋다고 나는 말해 줬어요. '전 아직 그런 경험은 없지만, 당신을 좋아하니까 안고 싶으면 안아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 그러나 저하고 결혼한다는 것과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죠. 당신은 저와 결혼함으로써 저의 문제가지 떠맡게 되는 거예요. 이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문젯거리죠. 그래도 괜찮은가요?'라고, 괜찮다고 그이는 말했어요. 자기는 그저 나와 자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결혼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갖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건 그이의 진심이었어요. 정말 마음에 품고 있는 말밖에 안하고, 말한 것은 어김없이 실천하는 사람이거든요. '좋아요, 결혼해요' 하고 대답을 했죠. 그럴 수박에 없었어요. 결혼은 그 4개월 후였던가.....? 그이는 그 일로 부모와 다투고 인연마저 끊었어요. 그이 집안은 시코쿠의 시골 토박이 명문이어서 부모가 철저하게 나에 대해 뒷조사를 하는 바람에, 입원 경력이 두 번 된다는 게 들통 났지 뭐예요. 그래서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싸움이 벌어졌죠.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요. 결국 우린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죠.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를 하고 2박 3일 동안 하코네로 여행만 갔을 뿐이죠. 그렇지만 행복했어요, 모든 것이. 나는 결혼할 때까지 처녀였거든요. 스물다섯 살까지. 거짓말 같죠?"
레이코 여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또 농구공을 손에 들었다.
"이 사람하고 함께 사는 한 나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나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에요. 우리 같은 병자에겐 그런 신뢰감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이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이상해지면, 말하자면 나사가 풀리기 시작한다면 금방 그걸 알아차리고 주의 깊게, 인내심을 갖고 고쳐 줄 것이다. '나사를 조여 주고, 엉킨 실을 풀어 주겠지' 하는 신뢰감만 있으면 우리 같은 병은 재발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신뢰감이 있는 한 그 '펑!'은 일어나지 않아요. 난 무척 행복했어요. 인생이란 이렇게도 멋진 것인가 하고 생각했죠. 이를테면 황망하고 차디찬 바닷물에서 구출되어, 담요에 싸여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이를 낳고, 그때부터는 아이를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죠. 내 병 같은 건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였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일을 하고, 아이의 시중을 들고, 그이가 돌아오면 저녁상을 차리고.....매일 매일이 같은 일의 되풀이였어요. 하지만 행복했어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아요. 그게 몇 년 지속되었을까? 서른하나가 될 때까지는 그런 상태였어요. 그러다 또 '펑!'
이 왔어요. 폭발한 거죠."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람은 이미 자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곧게 피어오르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언뜻 보니까 하늘엔 무수한 별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몹시 기막힌 일이 생겼어요. 꼭 무슨 덫이나 함정이 나를 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난 지금도 소름이 끼쳐요."
그녀는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미안한데요, 내 이야기만 해서. 모처럼 나오코를 만나러 왔는데....."
"듣고 싶습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괜찮다면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우리 애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난 조금씩 또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했어요." 하고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거예요. 바흐라든가 모차르트, 칼라티..... 그러한 사람들의 소품부터 치기 시작했죠. 물론 너무 오랜 공백이 있었으니까 쉽게 감각이 돌아오진 않았어요. 손놀림도 예전 같지 않았고. 그래도 기쁜 건 말할 수가 없었죠. 또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앞서서 말이에요. 그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으려니까, 내가 얼마만큼 음악을 좋아하는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리고 얼마나 거기에 굶주리고 있었던가 하는 것도 어울러서. 참 좋았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난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는데, 생각해보니 나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거나, 과목의 지정곡이라서, 아니면 남을 감탄시키기 위해서 등등, 그저 그런 일로만 계속 피아노를 쳐왔던 거예요. 물론 그건 그것대로 중요한 일이긴 해요, 한 가지 악기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말이죠.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음악이란 그런 것
이지요. 나는 엘리트 코스에서 탈락된 후 그것도 서른하나나 둘이 되어서 비로소 그것을 깨달은 거예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안일을 대강대강 해치우곤,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내가 좋아하는 곡을 쳤어요. 거기 까진 아무 탈이 없었어요. 그렇지요?"
나는 수긍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얼굴만 알고 지내는, 길에서 만나 그저 인사만 할 정도인 부인이 날 찾아와서, 사실은 자기 딸이 내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느냐 하는 거예요. 동네 사람이긴 해도 그리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집 딸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 부인 이야기론 그 애가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내 피아노 소리를 자주 들었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거예요. 게다가 내 얼굴도 이미 알고 있어서 존경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중학교 2학년인데, 지금까지 몇 사람에겐가 피아노를 배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잘 되지 않아, 지금은 그만두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요.
난 거절했어요. 몇 해씩이나 공백이 있었고,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몇 년 동안 레슨을 받아 온 아이를 도중에서 가르치는 건 무리라고 했죠. 우선 우리 집 아이 시중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바빠서도 안 되겠다고 했어요. 게다가, 물론 이건 상대방에게 말은 안했지만, 걸핏하면 선생을 바꾸는 아이란 누가 가르쳐도 잘 안 될 게 뻔 하죠. 그런데 그 부인은 자기 딸을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제법 밀어붙이는 성격인 것 같아서 막무가내로 거절하면 뒤가 시끄러울 것 같았고, 만나고 싶다는데 그것마저 거절하기가 뭣해서, 만나기만 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자고 그랬죠. 사흘 후에 그 애 혼자서 날 찾아왔더군요. 천사처럼 예쁜 애였어요. 정말 빛이 날 정도로 예뻤죠. 그렇게 예쁜 아이를 본 건 예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없었으니까요. 머리 결이 막 갈아 놓은 먹물같이 까맣고 길었어요. 팔다리는 늘씬하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술은 갓 만들어진 듯이 부드럽고 작았지요. 처음 그 애를 만났을 때 난 할 말을 잃고 말았어요. 잠시 동안. 그만큼 예뻤죠. 그 애가 앉아 있으니까 우리 집 응접실은 꼭 다른 집이 된 것처럼 호화롭게 보였어요. 그 애를 보고 있자니까 눈이 부셔서, 이렇게 가느다랗게 감고 싶어지더군요. 그런 애였어요.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녀는 정말로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듯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커피를 마시면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여러 가지 화제로 말이에요. 음악이라든가 학교 이야기 같은 것. 겉보기에도 머리가 좋은 것 같았어요. 이야기 솜씨도 좋고, 의견도 날카롭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천부적인 소질도 있어 보였지요. 무서울 정도로요. 하지만 그 무서움이 뭐였는지 그때는 나도 잘 몰랐어요. 그저 겁날 정도로 영리한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 갔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 애를 앞에 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려니까 차츰 정상적인 판단을 잃어 가게 되더군요. 결국 상대가 너무 싱싱하고 예쁘니까, 거기에 압도돼 버린 거예요. 자신이 그 애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하고 못난 사람으로 느껴졌던 거지요. 게다가 그 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어쩌다 떠올랐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비뚤어지고 못난 생각이라는 반성을 하게 만들더군요."
그녀는 몇 번인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만약 그 애만큼 예쁘고 머리가 좋았다면, 아마 좀 더 성실한 인간이 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머리가 좋고 예쁜데 뭘 더 바라겠어요? 그만큼 남들에게 소중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왜 자기보다 못나고 약한 사람을 못 살게 굴고 짓밟아야 하지요? 그래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데....."
"무슨 지독한 일이라도 당했습니까?"
"순서에 따라 이야기하자면, 그 앤 병적인 거짓말쟁이였어요. 완전히 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꾸며댔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도 그걸 정말이라고 믿어 버렸죠. 그리곤 이야기의 앞뒤를 맞추기 위해 주변 상황을 거침없이 각색해 버리는 거였어요. 보통 그 정도면 이거 이상하다, 우습다 하고 느껴질 텐데도, 워낙 그 애는 머리 회전이 빠르니까 남을 앞질러서 손을 썼어요. 그러니까 상대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거죠,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우선 그렇게 예쁜 아이가 아무 일도 아닌 것 갖고 거짓말을 한다곤 아무도 생각을 못한 거예요. 나도 그랬지요. 그 애가 꾸며대는 이야길 6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이 들으면서도 손톱만큼의 의심도 품지 않았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거짓말이었는데도 말이죠. 바보 같았어요, 정말."
"어떤 거짓말을 했는데요?"
"온갖 거짓말이요" 라고 그녀는 비꼬임이 잔뜩 서린 어조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말했잖아요? 사람은 뭐 한 가지를 거짓말하기 시작하면 거기에 맞춰서 한없이 거짓말을 더 하게 된다고. 그게 바로 허언증이죠. 하지만 허언 증을 않는 사람의 거짓말이란 대체적으로 순진한 것이고, 주변 사람도 대략 눈치 채게 마련이거든요. 그렇지만 그 애의 경우는 달랐어요. 그 애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아무 거리낌 없이 남을 해치는 거짓말도 했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써먹으려고 했어요. 게다가 상대에 따라 거짓말하는 정도도 자유자재지 뭐예요. 엄마라든가 친한 친구처럼 거짓말하면 금방 탄로가 날 것 같은 상대에겐 그다지 거짓말을 안했어요. 한다고 해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죠. 그리고 절대로 탄로 나지 않을 만한 거짓말만 했고요. 그러다가도 어쩌다 탄로가 나면, 그 예쁜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애원하듯이. 그러면 누구도 그 이상 화를 내지 못했죠.
그 애가 왜 나를 택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그 애의 희생자로서 나를 선택했는지, 아니면 어떤 구원을 얻으려고 나를 선택했는지, 그건 지금도 모르겠어요, 전연. 하긴 지금 와선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요. 이젠 모든 것이 끝장나 버렸고, 그리고 결국은 이런 몰골이 되어 버렸으니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애 어머니가 하던 말을 그 애도 다시 되풀이하더군요.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내 피아노 소릴 듣고 감동했다. 나를 밖에서 몇 번인가 볼 기회가 있었고, 동경해 왔다는 둥.....'동경해 왔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면서 얼굴이 빨개졌어요, 난. 인형같이 예쁜 아이한테 동경을 받는다는데 안 그랬겠어요.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다 거짓말은 아니지 않았을까 생각도 돼요. 나야 물론 서른을 넘어 있었고, 그 애만큼 미인도 아니고, 머리도 좋지 않고, 눈에 띄게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애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 애에게 결핍되어 있는 거라거나 뭐 그런 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애가 내게 흥미를 가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요. 그렇다고 지금 내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요."
"압니다, 그 뜻은"
"그 애는 '악보를 가지고 온 게 있는데 쳐봐도 될까요.' 하고 물었어요. '좋아, 쳐봐'하고 허락했지요. 그래서 그 애가 친 게 바흐의 <인벤션>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뭐랄까, 아주 흥미로운 연주였어요. 흥미롭다고는 했지만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보통과는 좀 달랐지요. 물론 그렇게 잘 치지는 못했어요. 전문적인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레슨도 다녔다 안 다녔다 자기 멋대로였으니까. 정확하게 훈련받은 소리는 못 되었어요. 만약 음악 학교 입시 실기에서 그런 연주를 했다간 단번에 낙제죠. 그런데도 그게 들을 만하더라고요. 말하자면 전체의 90퍼센트는 엉망이었는데, 나머지 10퍼센트인 요점을 제대로 해내는 거였어요. 그것도 바흐의 <인벤션>을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 애에게 흥미를 느꼈어요.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애일까 하고.
물론 세상엔 더 멋지게 바흐의 곡을 치는 애들이 많아요. 그 애보다 몇 십 배 더 잘 치는 애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연주치고 속이 차 있는 경우는 드물죠. 텅 비어 있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애는 서툴지만 사람을, 적어도 나를 매료시키는 점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이애 같으면 가르쳐 볼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물론 그때부터 다시 훈련을 시켜서 프로를 만든다는 건 무리였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나처럼-지금도 그렇지만-즐기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행복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그게 다 헛된 꿈이 되고 말았어요. 그 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은밀하게 뭘 한다든가 그런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 애 남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써가며, 세밀한 계산을 하는 애였거든요. 그 애 어떻게 하면 남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는가를 빈틈없이 알고 있었어요. 어떤 식으로 연주를 하면 나를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전부 정확하게 계산돼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곡의 요점만을 열심히 연습했겠죠. 눈에 선해요.
하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알게 된 지금도, 역시 그 연주는 멋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한 번 지금 그 연주를 듣게 된다 해도 역시 내 가슴은 두근거릴 것 같아요. 그 애의 교활함이나 거짓, 결점을 다 감안하더라도 말이에요. 세상엔 그런 일도 있어요."
그녀는 쉰 목소리로 기침을 하더니 이야기를 그치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그 여학생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까?"
"그래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오전에. 그 애가 다니는 학교는 토요일에 수업이 없었으니까. 거르는 일도 한 번 없었고, 지각도 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제자였어요. 연습도 잘해 오고. 레슨이 끝나면 우린 케이크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녀는 언뜻 생각이 난 듯 손목시계를 보았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나오코가 좀 걱정스러워지는데. 학생도 설마 나오코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잊어버리긴요"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기에 빨려 들었을 뿐입니다."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내일 해줄게요. 이야기가 기니까 한꺼번에는 다 못해요."
"마치 <셰에라자드(역주: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음악> 같군요."
"음, 도쿄에 못 돌아가게 될 거예요" 하고 그녀도 웃었다.
우린 왔던 길을 되돌아서 잡목 숲을 걸어 나가 방으로 돌아왔다.
촛불은 꺼진 채였고, 거실의 불도 꺼져 있었다. 그저 침실 문이 열려 있어 그 사이로, 침대 옆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이 거실까지 새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슴푸레한 어둠에 싸인 소파에 나오코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운 같은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그 옷깃을 목 언저리까지 단단히 여민 채,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제 괜찮니?"
"네, 괜찮아요. 미안해요" 하고 나오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부끄러운 듯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놀랐죠?"
"조금."
방긋이 웃으면서 내가 대답했다.
"이리로 와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내가 곁에 앉으니까 나오코는 귀엣말을 하듯이 내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오더니, 귀 옆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미안해요" 하고 나오코는 다시 한 번 내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몸을 떼었다.
"이따금 나 자신도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런 일이라면 나도 늘 그래."
나오코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다면 나오코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의 생활 같은 것-매일 뭘 하고 지내고, 여긴 어떤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에 대해 듣고 싶다고 말했다.
나오코는 자신의 하루하루의 생활에 대해서 조심조심,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침 여섯 시에 기상, 식사를 하고 새집을 청소하고 나서 보통은 대부분 농장에서 일한다. 채소밭 손질 같은 것. 점심 전 아니면 그 후에 한 시간 정도는 담당 의사와 개별 면담, 아니면 그룹 토론이 있다. 오후에는 자기가 선택한 스케줄에 따라 마음에 드는 강의를 듣거나 야외 작업에 나가거나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오코는 프랑스 어, 뜨개질, 피아노, 고대사 등 몇 가지 강좌에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피아노는 레이코 언니한테 배워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레이코 언니는 그 밖에도 기타를 가르치지요. 우린 모두 선생이 됐다 학생이 됐다 그래요. 프랑스 어를 잘하는 사람은 프랑스 어를 가르치고, 사회 과목 선생을 하던 사람은 역사를, 뜨개질에 능한 사람은 뜨개질을 가르쳐요. 그만한 것만 가지고도 웬만한 학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유감스럽게도 난 남을 가르칠 만한 아무런 소질도 없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튼 난 대학에 다닐 때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여기선. 공부하는 게 아주 즐거워요."
"저녁 식사 후엔 늘 뭘 하고 지내지?"
"레이코 언니와 이야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다른 방에 가서 게임도 하고.....그러죠."
"난 기타 연습을 하거나, 자서전을 쓰기도 하지"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자서전?"
"그건 농담!"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었다. "그리고 우린 열 시쯤이면 자요. 어때요. 건전한 생활이죠? 잠을 푹 잘 수 있다고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조금 전이었다.
"그럼 슬슬 잠을 잘 시간이잖아?"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좀 늦어도"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오랜만이니까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무슨 이야기든 해줘요."
"아까 나 혼자 여기 있을 때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어." 하고 내가 말했다. "옛날 기즈키와 둘이서 너에게 문병 갔을 때 생각나니? 바닷가에 있던 병원에 말이야. 고등하교 2학년 때 여름이었지. 아마."
"가슴 수술을 했을 때 말이군요." 하며 나오코는 방긋이 웃었다. "그래, 생각나요. 당신과 기즈키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었지요. 녹아서 짓이겨진 초콜릿을 가지고. 그거 먹느라고 혼났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게 굉장히 옛날일 같군요."
"그래. 그때 나오코는 긴 시를 쓰고 있었지, 아마."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란 모두 시를 쓰는 거예요" 하며 나오코는 깔깔 웃었다. "왜 그 일을 갑자기 생각해 냈지요?"
"모르겠어, 그저 생각이 났어. 바닷바람 냄새라든가, 협죽도라든가, 그런 것들이 문득 떠오른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때 기즈키는 병문안을 자주 왔었어?"
"병문안이라니, 거의 오지 않았어요. 그걸 가지고 우린 다투었으니까.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처음에 한 번 혼자 오고, 그리고 당신과 온 것뿐이었어요. 너무했지요? 처음 왔을 때도 안절부절못하더니 10분 정도 있다가 그냥 가버렸어요. 오렌지를 들고 왔지요. 뭔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중얼 거리더니 굳이 오렌지 껍질을 벗겨 먹여 주고, 또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다 휑하니 돌아가 버렸어요. 난 정말 병원은 질색이라든가 하는 말을 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오코는 웃었다.
"그런 면에서 그 사람은 어린 티를 못 벗어나고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병원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환자를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을 가는 거 아녜요. 기운을 내라고 말이에요. 그런 거 그 사람은 잘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나와 둘이서 병원에 갔을 적엔 그렇게 심하게 굴진 않았는데.....지극히 보통이었잖아?"
"그건, 당신 앞이었기 때문이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그 사람 당신과 있을 땐 언제나 그랬어요. 자기의 약한 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요. 당신을 퍽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 그래서 자신의 좋은 면만을 보이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좀 어깨의 힘을 빼는 거예요. 사실은 성격이 변덕스러운 편이었죠. 가령 혼자서 한참을 주절거린다 싶은데 다음 순간엔 울적해 하고,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어릴 적부터 그랬는걸요. 하지만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향상이 되도록 노력했어요."
나오코는 소파 위에서 꼬았던 다리를 바꿔 꼬았다.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향상이 되도록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요. 자기도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바꿔 봐야지 하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생각해 보면 불쌍해요, 그 사람."
"하지만 그 친구가 내게 좋은 면만 보이려고 애를 썼다면, 그 노력은 성공한 것 같은데. 내겐 그 친구의 좋은 면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오코는 내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들으면 그 사람도 좋아할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기즈키 또한 내게 유일한 친구였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내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난 당신과 기즈키 셋이서 함께 있는 것이 좋았던 거예요. 그러면 나도 기즈키의 좋은 면만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럴 때면 꽤 즐거웠어요. 마음이 편안했지요. 그래서 셋이 있는 게 좋았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나오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기에만 마음이 쓰였던 것 같아" 라고 말하면서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일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리가 없다는 데 있었어요. 그런 작은 고리 같은 것이 영원히 유지될 까닭이 없지요. 그건 기즈키도 알고 있었고, 나도 알고 있었고,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안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난 그 사람의 약한 면도 무척 좋아했어요. 좋은 면 못지않게 좋아했으니까요. 그에겐 교활하거나 심술궂은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저 약했을 뿐이죠. 그런데도 내가 그런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전혀 믿어 주질 않았어요. 한결같은 대꾸가 이랬어요. '나오코, 그건 너와 내가 세 살적부터 늘 함께 있었으니까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뭐가 결점이고 뭐가 장점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온갖 것을 범벅으로 만들고 있어, 넌' 그는 항상 그랬어요. 그렇지만 그가 뭐라고 하던 난 그 사람이 좋았고, 그 이 외의 사람에겐 거의 관심조차 가질 수가 없었지요."
나오코는 나를 보며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우리 사인 보통의 남녀 관계하곤 상당한 거리가 있었어요. 뭔가 어느 부분에선가 육체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러한 관계였어요. 어쩌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특수한 인력에 의해 되돌아와, 또 이전처럼 밀착되고 마는 것 같은. 그러나 나와 기즈키가 연인 같은 관계로 발전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고려해 본다거나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일이었지요. 우린 열두 살 때 키스를 하고 열세 살 때 벌써 페팅을 했어요. 내가 그 사람 방에 거거나 그 사람이 내 방으로 놀러 와서 그의 것을 손으로 처리해 주고.....그래도 우린 우리가 조숙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이 내 가슴이나 성기를 만지고 싶어 하면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 사람이 정액을 쏟고 싶다면 그걸 거들어 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 일로 우릴 비난했다면 난 놀라거나 화를 내거나 그랬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잘못된 일을 한 게 아니었거든요. 당연히 하게 될 일을 한 데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우린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까지 보여 줬고, 마치 상대의 몸을 공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린 당분간은 그 이상은 가지 않기로 했지요. 임신이 될까 봐 겁이 났고, 그땐 피임 방법 같은 것도 잘 몰랐으니까.....어떻든 우린 그런 식으로 자랐어요. 둘이 손을 붙잡고 한 짝이 되어서 말이에요. 다른 성장기의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성의 중압감이라든가 에고의 팽창 같은 고통은 거의 모르고 지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성에 관해서 일관성 있게 열려 있었고, 자아라는 것도 서로가 흡수하거나 나누어 가지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그것만이 특별히 강하게 의식되는 일도 없었지요. 내 말 알아듣겠어요?"
"알 것 같아"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 둘은 헤어질 수가 없는 관계였어요. 그러니까 만일 기즈키가 살아 있다면, 아마 우린 함께 있으면서 사랑을 나누다가, 그리고 조금씩 불행해져 갔을 거라고 생각돼요."
"어째서?"
나오코는 손가락으로 몇 차례 머리를 빗었다. 이제는 핀을 풀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면 머리가 내려와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아마 우린, 세상에 진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까."
나오코는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치러야 할 때에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바람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기즈키는 그렇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여기 있는 거고. 우린 무인도에서 자란 헐벗을 아이 같은 존재였어요.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따먹고, 외로워지면 서로 품에 안고 잠든 거지요. 하지만 그런 게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어요? 우린 자꾸만 자라고, 사회로 진출도 해야 하고.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우리 둘을 바깥세상과 이어 주는 고리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엔 잘 안 되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신을 이용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줘요. 기즈키는 정말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 최초의 타인과의 접촉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지속되고 있어요. 물론 기즈키는 죽고 이 세상에 없지만, 당신은 나와 밖의 세상을 이어 주는 유일한 고리예요, 지금도. 그리고 기즈키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처럼 나도 당신이 좋아요. 그리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도, 결과적으로 우린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나오코는 또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어때, 코코아라도 마시지 않을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입을 열었다.
"네, 그래요. 마시고 싶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전 가지고 온 브랜디를 마시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그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럼 나도 한잔 줄래요?"
"물론 좋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잔을 두 개 들고 왔고, 나와 그녀는 그걸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 레이코 여사는 부엌으로 나가 코코아를 탔다.
"좀 더 밝은 이야기 안할래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러나 나에겐 밝은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돌격대'가 계속 함께 있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만 있으면 연달아 에피소드가 생기고, 다 함께 그 얘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나가 기분이 즐거워지는데, 하고.
하는 수 없이 나는 기숙사에서 다들 얼마나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다. 너무 불결해서 이야기만으로도 나는 짜증스러웠지만, 둘은 그런 이야기가 신기한 듯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그 다음은 레이코 여사가 여러 정신병 환자의 제스처를 흉내 내 보였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열한 시가 되어 나오코가 졸리는 눈을 하자, 레이코 여사는 소파의 등받이를 눕혀 침대로 만들고, 내가 쓸 시트와 담요, 베개를 갖추어 주었다.
"한밤중에 강간하러 오는 건 좋지만 상대를 바꿔치진 말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왼쪽 침대에 자고 있는, 주름살 없는 몸이 나오코니까."
"거짓말이에요, 난 오른쪽이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내일은 말이야, 오후의 스케줄을 몇 시간 안 나가도 되게 해놓았으니까, 우리 함께 피크닉 가요. 가까이에 아주 좋은 데가 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녀들이 번갈아 세면대에서 이를 닦고 침실로 들어가 버리자, 나는 브랜디를 조금 마신 후, 소파 침대에 누워 오늘 일어난 일을 아침부터 차례로 더듬어 갔다.
어쩐지 굉장히 길었던 하루처럼 느껴졌다. 방안엔 여전히 달빛이 희뿌옇게 비치고 있었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가 자고 있는 침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가끔 침대가 삐걱거리는 작은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을 감자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 미세한 도형이 춤을 추었고, 귓가에도 레이코 여사가 치던 기타의 잔향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잠이 밀려와 따뜻한 진흙 속으로 나를 실어 갔다. 그리고 나는 버드나무 꿈을 꾸었다.
산길 양옆으로 버드나무가 줄줄이 서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버드나무들이었다. 제법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도 버들가지들은 꼼짝도 하지 앓았다. 왜 그럴까 하고 자세히 보니까 버들가지 하나하나마다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그 무게로 버들가지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막대기를 들고 가까이에 있는 가지를 두들겨 보았다. 새를 쫓아 버들가지가 흔들리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날아가는 대신에 새들은 새 모양을 한 금속이 되어, 텅텅 소리를 내면서 땅 위로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마치 그 꿈의 계속되는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방안은 달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새 모양의 금속을 찾았지만, 물론 그러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오코가 내 침대 발치에 호젓이 앉아 창밖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굶주린 고아처럼 그 위에 턱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려고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찾았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달빛으로 보아 아마도 두 시나 세 시쯤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심한 갈증을 느꼈지만, 나는 그대로 가만히 그녀의 동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는 아까와 같은 하늘색 가운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예의 그 나비 모양 핀을 꽂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운 이마가 선명하게 달빛을 받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아까 자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머리핀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같은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러고 있었다. 마치 달빛에 이끌린 밤의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달빛의 각도 탓으로 입술의 그림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그 상처 입기 쉬울 것 같은 그림자가, 그녀의 심장 고동이나 아니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가늘게 실룩실룩 떨리고 있었다. 마치 밤의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나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 침을 삼켰다. 그 꿀꺽하는 소리가, 밤의 적막 속에서 엄청나게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훌쩍 일어서더니, 조용히 옷 스치는 소리를 내며 내 머리맡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을 보았지만, 그녀의 눈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맑아 저쪽 사계가 비쳐 보일 정도였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속에서 뭘 찾아낼 수는 없었다. 우리의 얼굴은 서로 30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몇 광년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녀 쪽으로 손을 뻗자 그녀는 흠칫 몸을 뺐다. 입술이 조금 떨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두 손을 올려 천천히 가운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단추는 모두 일곱 개였다.
나는 그녀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그것을 순서대로 끄르는 것을, 마치 꿈의 연속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일곱 개의 흰 단추가 전부 끌러지자, 그녀는 벌레가 허물을 벗듯 가운을 허리 쪽으로 스르르 미끄러뜨려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나비 모양의 머리핀뿐이었다. 가운을 벗어 던진 그녀는 마루에 무릎을 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그녀의 알몸은, 갓 태어난 아기의 새로운 육체처럼 윤기 있고 애처로웠다.
그녀가 몸을 조금 움직이며-그것은 지극히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달빛을 받은 부분이 미묘하게 이동하여, 몸을 물들이는 그늘의 모양이 달라졌다. 둥글게 솟은 젖가슴과 작은 젖꼭지, 움푹한 배꼽과 허리선, 그리고 음모가 빚어내는 거친 입자의 그늘이, 마치 조용한 호수의 수면을 움직이는 파문처럼 그 모양을 바꿔 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완전한 육체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오코가 어느 사이에 이처럼 완전한 육체를 갖게 된 것일까? 그 봄날 밤에 내가 품었던 그녀의 육체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날 밤 울고만 있는 나오코의 옷을 천천히 부드럽게 벗겨 갔을 때, 나는 그녀의 몸이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한 것만 같은 인상을 받았었다. 젖가슴도 딱딱하고, 젖꼭지는 엉뚱한 곳에 솟은 돌기처럼 느껴졌고, 허리는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였고, 그 육체는 매력적이었다. 그것이 나를 성적으로 흥분시켰고, 거대한 힘으로 나를 휩쓸어 가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알몸을 안아, 애무하고, 거기에 입술을 대면서도, 육체의 불완전함에 대해, 아직 미숙함에 대해 언뜻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나오코를 안으면서 그녀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성교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다만 이건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물론 그런 것들은 말로써 잘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세차게 그녀를 끌어안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 나는 그 속에 뭔지 잘 어울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물과도 같은 거칠거칠한 감촉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감촉은 나를 사랑하는 기분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발기시켰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의 육체는 그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몇 번의 변천을 겪은 끝에, 지금 이렇게 완전한 육체가 되어 달빛 속에 태어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먼저 말랑말랑하게 부풀었던 소녀의 육체는 기즈키의 죽음을 전후해서 사라지고, 그로부터 성숙이라는 육체를 갖게 된 것이다. 나오코의 육체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완성되어 있어서 나는 성적인 흥분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망연히 그 아름다운 허리의 선과 둥글게 윤이 나는 젖가슴, 숨 쉴 때마다 조용히 오르내리는 유연한 배와 그 밑의 부드럽고 까만 음모의 그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자기 알몸을 내 눈앞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마 5분이나 6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가운을 입고, 위에서부터 차례로 단추를 채워 갔다. 단추를 다 채우자 그녀는 훌쩍 일어서서 조용히 침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 침대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생각을 바꿔 침대에서 나와, 마루에 떨어져 있던 시계를 주워 달빛 쪽으로 비춰 보았다. 세 시 삼십 분이었다.
나는 주방으로 나가 몇 컵인가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누웠지만, 결국 날이 밝아 햇살이 방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던 창백한 달빛의 얼룩을 완전히 지워 버릴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내가 겨우 잠이 들락말락할 참에 레이코 여사가 다가와서는 내 뺨을 살살 때리면서 "아침이에요, 아침" 하고 소리쳤다.
레이코 여사가 내 침대를 치우는 동안 나오코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했다. 나오코가 나를 보고 방긋이 웃으면서 "굿 모닝" 하고 인사했다. 나도 같이 "굿 모닝" 이라고 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물을 끓이고 빵을 썰고 있는 나오코의 모습을 곁에 서서 잠시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젯밤 내 앞에서 알몸이 되었었다는 기색은 전혀 엿볼 수가 없었다.
"어머, 눈에 핏발이 섰어요. 왜 그래요?" 하고 나오코가 커피를 따르면서 나에게 물었다.
"밤중에 깨어서.....그리곤 자지 못했어."
"우리, 코를 골지 않던가요?" 하고 레이코가 물었다.
"전혀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다행이야"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건 인사치레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처음엔 나오코가 레이코 여사 앞이라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미고 있거나,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코 여사가 잠시 방을 비운 뒤에도 그녀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 눈은 언제나처럼 맑았다.
"잘 잤어?" 하고 나는 나오코에게 물었다.
"응, 푹 잤어요." 하고 나오코는 태연스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심플한 머리핀을 한쪽에 꽂고 있었다.
나의 그 개운치 않은 기분은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빵에 버터를 바르거나, 삶은 계란의 껍질을 벗기는 동안에도, 나는 무슨 표시 같은 것을 찾아 맞은편에 앉은 나오코의 얼굴을 이따금 흘끔거렸다.
"그런데 와타나베, 왜 오늘 아침엔 내 얼굴만 보고 있지요?" 하고 나오코가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누굴 사랑하고 있는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와타나베 누굴 사랑하고 있어요?" 하고 나오코가 나에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나도 웃었다. 그리고 두 여자가 그 이야길 두고 나를 미끼삼아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두 사람은 지금부터 새장에 가서 모이를 줘야 한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작업용 청바지와 셔츠로 갈아입고, 흰 장화를 신었다. 새집은 테니스 코트 뒤쪽 조금한 공원 같은 곳에 있었는데, 닭이랑 비둘기에서부터 공작새, 앵무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새가 살고 있었다.
둘레의 화단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벤치가 있었다. 그리고 환자같이 보이는 남자 둘이서 통로에 흩어진 낙엽을 쓸어 모으고 있었다. 양쪽 모두 마흔에서 쉰 살 사이의 나이로 보였다.
레이코 여사와 나오코는 그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아침 인사를 했다. 레이코 여사가 또 무슨 우스갯소리를 하는지 두 남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화단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고, 나무들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레이코 여사의 모습을 보자 새들이 짹짹거리며 새장 안을 이리저리 날았다.
그녀들은 새장 옆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가 먹이 자루와 고무호스를 들고 나왔다. 나오코가 호스를 수도꼭지에 연결하고 물을 튼 다음, 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조심스레 새장 안으로 들어가서 오물을 씻어 내렸다. 그리고 레이코 여사는 큰 솔로 바닥을 북북 문질렀다.
물보라가 햇빛에 눈부시게 빛났고, 공작새들은 물 튀기는 것을 피해 새장 안을 파다닥파다닥 뛰며 도망쳤다. 칠면조는 심술궂은 노인 같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앵무새는 옆으로 고정된 가로대 위에서 불쾌한 듯 큰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했다.
레이코 여사가 앵무새를 노려보며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니까, 앵무새는 구석에 박혀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조금 후에 "고마워, 미친놈, 빌어먹고" 하고 외쳤다.
"누가 저런 걸 다 가르쳤지?" 하고 나오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아니야. 난 그런 상스런 말 같은 건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또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 앵무새는 이번엔 잠자코 있었다.
"이 앵무새, 고양이한테 한번 혼이 나더니 고양이를 무척 무서워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청소를 마치자 두 사람은 청소 도구를 치우고 여러 개의 모이통에 모이만 넣었다. 칠면조는 바닥에 고인 물을 튀기면서 철벅철벅 달려와 모이통에 머리를 박고는, 나오코가 조용히 궁둥이를 두들겨도 정신없이 모이만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이 일을 하는 거야?" 하고 나는 나오코에게 물었다.
"그래요, 새로 들어온 여자는 대개 이 일을 해요. 간단하니까. 토끼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고 나는 대답했다.
토끼장은 새장 뒤쪽에 있었는데, 열 마리 가량의 토끼가 볏짚 위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빗자루로 토끼 똥을 쓸어 담고, 모이통에 모이를 넣고는 새끼를 품에 안고 볼을 비벼댔다.
"예쁘지요?" 하고 나오코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토끼를 안겨 주었다. 그 따뜻하고 작은 덩어리가 내 품안에서 몸을 움츠린 채 움칠움칠 귀를 떨고 있었다.
"괜찮아, 이 사람 무서운 사람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토끼의 머리를 쓸어 주고, 내 얼굴을 보며 방긋이 웃었다. 구김살 없는 눈부신 웃음이었기 때문에 나도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의 나오코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틀림없는 진짜 나오코였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그녀는 확실히 내 앞에 옷을 벗고 알몸이 되었다, 하는.
레이코 여사는 <프라우드 메리>를 휘파람으로 멋지게 불면서 쓰레기를 모아 비닐 주머니에 담고는 그 끝을 묶었다. 나도 청소 도구와 모이 자루를 창고에 챙기는 일을 거들었다.
"난 아침이 제일 좋아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새로 시작되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점심때가 되면 슬퍼져요. 저녁이 제일 싫고. 매일매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 거야. 아침이 되고 밤이 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말이에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금방이라고, 그렇게 되는 건."
"하지만 레이코 언니는 즐기면서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나이 드는 게 즐겁지는 않지만, 다시 한 번 젊어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하고 레이코 여사는 대답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귀찮으니까. 뻔하잖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대답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프라우드 메리>를 휘파람으로 불며 빗자루를 창고 속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들은 고무장화를 벗고 일반 운동화로 갈아 신으면서, 지금부터 농장에 간다고 말했다. 구경해 봤자 재미있는 일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작업이니까, 나는 남아서 책이라도 보고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세면실에, 우리가 벗어 놓은 때 묻은 속옷들이 잔뜩 있으니까 좀 빨아 줄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농담이지요?"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물론이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었다. "농담인 게 뻔하잖아요. 학생도 참 순진해. 그렇게 생각 안 해, 나오코?"
"그래요" 하고 나오코도 동의했다.
"독일어나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하고 나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착한 학생이군요. 점심때가 되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깔깔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소리와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세면실로 가서 세수를 다시 하고, 거기 있는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았다. 두 여자가 살고 있는 것치고는 아주 간소한 세면실이었다. 영양 크림이라든가 립크림, 햇볕에 타는 것을 막는 크림, 로션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뿐, 화장품다운 화장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톱을 깎고 나서 나는 부엌에 들어가 커피를 타고, 테이블에 앉아 그걸 마시면서 독일어 교과서를 펼쳤다. 부엌의 양지바른 곳에서 티셔츠 바람으로 독일어 문법 표를 모조리 암기하고 있으려니 언뜻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독일어의 불규칙 동사와 이 부엌의 테이블하고는, 거의 상상도 못할 만큼의 먼 거리에 의해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한 시 반에 농장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번갈아 샤워를 하고 산뜻한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셋은 식당으로 가 점심을 먹은 후에 정문까지 걸어 나갔다. 이번엔 수위실의 수위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식당에서 날라다 주었는지 책상에 앉아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니까 그는 여어, 하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지금 셋이서 산책하러 간다, 세 시간 정도면 돌아올 거다, 라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아 그러세요, 다녀오세요. 날씨도 좋으니까. 계곡 길은 지난번 내린 비 때문에 무너져서 위험하지만, 거기만 아니면 괜찮아요, 문제없을 겁니다." 하고 수위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외출자 명단 용지에 나오코와 자기 이름, 그리고 외출 시간을 기입했다.
"살펴서 잘 다녀오세요." 하고 수위가 말했다.
"친절한 사람이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저 사람 좀 여기가 이상해" 하고 레이코 여사는 손가락 끝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수위가 말한 대로 참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여러 갈래로 빗어진 구름은 마치 시험 삼아 한 번 붓질을 해본 페인트칠처럼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우린 잠시 '아미료'의 낮은 돌담을 끼고 걷다가, 돌담에서 벗어나 폭이 좁은 가파른 언덕길을 차례로 올라갔다. 선두가 레이코 여사, 중간이 나오코, 내가 맨 끝에서 따라갔다.
레이코 여사는 이 부근 산이라면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는 듯한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그 좁은 산길을 올라갔다. 나는 거의 입을 다문 채 기를 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오코는 청바지에 흰 셔츠 바람이었으며, 윗도리는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곧게 뻗은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걸었다. 나오코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언덕길은 아득하리만큼 길게 이어졌지만 레이코 여사의 발걸음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나오코도 가끔씩 땀을 닦으면서 쳐지지 않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등산 같은 것을 한동안 하지 않은 탓에 몹시 숨이 가빴다.
"언제나 이처럼 등산을 하나?" 하고 나오코에게 물었다.
"2주일에 한 번쯤 될까"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힘들지요, 제법?"
"응, 조금."
"3분의 2는 왔으니까, 이제 조금만 가면 돼요. 학생은 남자잖아. 기운을 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운동 부족입니다."
"여자들과 놀기만 하니까 그래요" 하고 나오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 되받아 주려고 했지만 숨이 차올라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가끔 머리에 붉은 깃털 같은 게 달린 새가 눈앞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는 그 새들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했다. 주위의 초원에는 하얗고 노란 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었고, 벌의 날갯짓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주위의 그러한 풍경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떼어 갔다.
거기서 10분쯤 더 올라가니 비탈길이 끝나고, 고원과 같은 평탄한 곳이 나왔다. 우린 거기서 잠깐 쉬며 땀을 닦고 숨을 돌리면서, 물통의 물을 마셨다. 레이코 여사는 무슨 풀인지 풀잎을 찾아,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길이 완전한 내리막길이 되면서 양쪽엔 갈대가 무성하게 돋아 있었다. 15분쯤 걸어 작은 마을을 지났지만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열 두세 채 되는 집은 모조리 폐허가 된 채였다.
집 주변에는 허리까지 오는 잡초가 무성했고, 벽에 뚫린 구멍에는 비둘기 똥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어떤 집은 기둥만 남고 무너져 내려 있었지만, 그 중에는 덧문만 열면 지금이라도 금방 사람이 들어 살 수 있을 것 같은 집도 있었다. 우리는 죽어 버린 무언의 집들 사이로 난 길을 벗어났다.
"불과 7, 8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사람들이 몇 살고 있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가르쳐 주었다. "주위는 다 밭이었고 말예요. 하지만 이젠 모두 떠나가 버렸어요. 생활하기에 너무 어렵거든요. 겨울엔 눈이 쌓여 꼼짝도 못하지, 그렇다고 땅이 비옥한 거도 아니고요. 도시에 나가서 일하는 편이 돈을 더 버니까요."
"아까운데요. 아직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집도 있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한때 히피가 산적도 있지만, 겨울이 되자 그들마저 손을 털고 떠나 버렸어요."
작은 마을을 빠져나가 조금 더 가니까 울타리에 둘러싸인 넓은 목장 같은 것이 나왔고, 멀리 몇 마리의 말이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였다.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니 큰 개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달려와, 레이코 여사를 밀어젖히다시피 하면서 얼굴의 냄새를 맡더니, 다음에는 나오코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내가 휘파람을 불자 이번엔 내게로 달려와, 긴 혓바닥으로 내 손을 날름날름 핥았다.
"목장의 개예요" 하고 나오코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스무 살 정도는 된 게 아닐까? 이빨이 약해져서 딱딱한 음식은 거의 먹지를 못해요. 언제나 가게 앞에서 자고 있다가,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뛰어와서 놀자고 그래요."
레이코 여사가 배낭에서 치즈 조작을 꺼내자, 개는 그 냄새를 맡고 그쪽으로 뛰어가 기쁜 듯이 치즈를 받아먹었다.
"이 개와 만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개의 머리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10월 중순이 넘으면 말과 소를 트럭에 싣고, 아래쪽의 축사로 데리고 가요. 여름 동안만 여기다 방목해서 풀을 뜯게 하고, 관광객 상대로 조그만 커피 하우스 같은 걸 열고 있어요. 관광객이라 해봤자 택시 타고 하루에 20명 정도나 올까 말까하지만. 학생, 뭐 마시지 않을래요?"
"좋습니다."
개가 앞장서서 우리를 그 커피 하우스로 안내했다. 정면으로 베란다가 나 있는, 흰 페인트를 칠한 작은 건물이었는데 커피 잔 모양의 낡은 간판이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개가 먼저 베란다에 올라가 털썩 눕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가 베란다 테이블에 앉자, 안에서 트레이닝셔츠와 흰색 진 바지 차림에 말꼬리 모양의 머리를 한 아가씨가 나와서, 레이코 여사와 나오코에게 친숙하게 인사를 했다.
"이분은 나오코의 친구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 아가씨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도 인사를 건넸다.
세 여자가 얼마간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테이블 아래 엎드려 있는 개의 목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개의 목덜미는 확실히 늙어서 그런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 굳은 곳을 긁어 주자 개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스르르 감고 하아 하아 숨을 내쉬었다.
"개 이름이 뭐지요?" 하고 나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페페"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페페" 하고 내가 불러 봤지만, 개는 꿈쩍도 않으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귀가 멀어서, 더 큰소리로 불러야지 잘 안 들려요" 하고 아가씨가 교토 사투리로 말했다.
"페펫!" 하고 내가 큰소리로 부르니까, 그제서야 개가 눈을 뜨더니 발딱 일어서서 멍! 하고 짖었다.
"됐어, 됐어. 이젠 됐으니 푹 자고, 오래 살아라." 하고 아가씨가 말하니까, 페페는 다시 내 발 밑에 슬며시 누웠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아이스밀크를 주문했고 나는 맥주를 시켰다. 레이코 여사가 아가씨에게 "FM을 틀어 줘요" 하고 부탁하자, 아가씨는 앰프의 스위치를 눌러 FM방송을 틀었다.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즈가 <스피닝 휠>을 노래하는 것이 들려 왔다.
"난 사실대로 말하면, FM을 들으러 여기 오는 거예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사는 덴 라디오도 없으니까, 가끔 여기라도 와서 듣지 않으면 어떤 음악이 지금 세상에 나돌고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되거든."
"종일 여기서 지내나요?" 하고 나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하고 아가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밤에 이런 곳에 있다간 외로워서 죽고 말 거예요. 저녁이 되면 목장 사람에게 부탁해서 저걸 타고 시내로 가요. 그리고 다시 아침이면 이리로 출근하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륜 구동차를 가리켰다.
"이젠 손님도 뜸하지 않아?" 하고 레이코 여사가 물었다.
"그래요, 슬슬 끝나 가요" 하고 아가씨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가 담배를 권하고 그녀들은 둘이서 담배를 피웠다.
"아가씨가 떠나면 외로워지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내년 5월이면 다시 오는데요, 뭐" 하고 아가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크림의 <화이트 룸>이 흐르고, 광고가 있은 뒤 사이몬과 가펑클의 <스카브로 페어>나 흘러 나왔다. 노래가 끝나자 레이코 여사는 내게 그 노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 봤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누가 나오죠?"
"더스틴 호프만."
"그 사람 모르는데" 하고 레이코 여사가 애처롭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상이 막 변하는 거예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레이코 여사는 아가씨에게 기타를 빌려 달라고 했다. 아가씨는 라디오를 끄고, 집안에서 낡은 기타를 들고 나왔다. 개가 고개를 들더니 기타 냄새를 킁킁 맡았다. "먹을 것이 아냐, 이건" 하고 레이코 여사는 개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풀 냄새가 실린 바람이 베란다를 스쳐 갔다. 산의 능선이 선명하게 우리들의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꼭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 같습니다." 하고 나는 조율을 하고 있는 레이코 여사에게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스카브로 페어> 첫 부분의 코드를 잡았다. 악보 없이는 처음인 것 같았다. 처음엔 정확한 코드를 찾느라 망설이고 있었지만 몇 번인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동안에 그녀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포착하여, 곡 전체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군데군데에 효과음까지 넣어 가며 거의 막힘없이 쳤다.
"감각이 좋거든" 하고 레이코 여사는 내게 윙크를 하며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세 번만 들으면 악보 없이도 대개 무슨 곡이든 칠 수 있어요."
그녀는 멜로디를 작은 소리로 허밍하면서 <스카브로 페어>를 마지막까지 완전하게 연주해 보였다. 우리 셋은 박수를 보냈고, 레이코 여사는 얌전하게 답례를 했다.
"옛날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했을 땐 박수 소리가 더 컸는데" 하고 그녀는 말했다.
가게의 아가씨가 비틀즈의 <히어 컴즈 더 선>을 들려주면 아이스밀크 값을 안 받겠다고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엄지를 치켜들고 OK 사인을 했다. 그리고 가사를 붙여 가며 <히어 컴즈 더 선>을 연주했다. 성량이 크지 못하고, 아마도 담배를 많이 피우는 탓에 목소리가 쉬어 있었지만 존재감이 있는 멋진 음성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산을 바라보고, 그러면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까 정말로 거기에서 태양이 다시 얼굴을 내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따사롭고 부드러운 기분이었다.
<히어 컴즈 더 선>의 노래가 끝나자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아가씨에게 돌려주고, 다시 FM을 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오코와 둘이서 한 시간쯤 부근을 산책하고 오라고 말했다.
"난 여기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 아가씨와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까, 세 시까지 여기로 돌아오면 돼요."
"그렇게 오래 우리 단 둘이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사실은 안 되자만 뭐 괜찮아요. 나도 감시 할멈이 아니니까 혼자서 좀 편해 봐야겠어. 그리고 모처럼 먼데서 왔는데 이야기할 것도 많지 않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럼 가요" 하고 나오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자리를 털고 뒤를 따라오다가 그만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린 목장의 울타리를 끼고 나 있는 평탄한 길을 조용히 걸었다.
가끔 나오코는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했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까 옛날로 돌아간 것 같지 않아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게 뭐 옛날이야. 고작 올 봄의 일인데" 하고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올 봄까지 이랬어. 그게 옛날이라면 10년 전은 고대사가 된다고."
"고대사나 다름없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하지만 어젠 참 미안했어요. 왠지 신경이 예민해지고 말았거든요. 모처럼 당신이 와 있었는데, 잘못했어요."
"괜찮아. 아마 여러 가지 감정들을 더 많이 밖으로 쏟아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오코도 나도. 그러니까 만일 누구에겐가 감정을 퍼붓고 싶거든 내게 그 감정을 퍼부어. 그러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
"나를 이해해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죠?"
"나오코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이건. 세상엔 기차 시간표를 조사하는 게 좋아서 온종일 발착 시간표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냥개비를 이어서 길이 1미터나 되는 배 모형을 만들고 있는 사람도 있지. 그런 것처럼 세상에 나오코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취미 같은 거란 말인가요?" 하고 나오코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취미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일반적으로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그걸 애정이라든가 호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오코가 취미라고 부르고 싶으면 취미라고 해도 좋아."
"저 말이야, 와타나베"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당신은 기즈키도 좋아했지요?"
"물론" 하고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 언니는 어때요?"
"그 사람도 매우 좋아해.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왜 당신은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지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리 모두 어딘가 휘어지고, 비뚤어지고,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만 하는 인간들이에요.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언니도, 모두 그래요. 어째서 좀 더 정상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거죠?"
"그건,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오코나 기즈키, 레이코 여사가 어딘지 비뚤어져 있다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거든. 어딘가 비뚤어졌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힘차게 바깥세상을 활보하고 있어."
"하지만 우린 비뚤어져 있어요. 난 알고 있다고."
우린 잠시 말없이 걸었다. 길은 목장 울타리에서 멀어져, 작은 호수처럼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원형 모양의 초원으로 접어들었다.
"가끔 밤중에 잠이 깨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질 때가 있어요."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이렇게 비뚤어진 채로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이대로 여기서 늙어 죽어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예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몸서리가 쳐져요. 고통스럽고 몸이 차가워지고."
나는 나오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지긋이 힘을 주었다.
"꼭 기즈키가 어두운 곳에서 손을 뻗어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봐, 나오코, 우린 떨어질 수 없는 사이야, 하고. 그럴 때마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럴 땐 어떻게 하지?"
"응, 와타나베,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이상하게 생각지 않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 언니에게 안아 달라고 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언니를 깨우고 그녀 침대로 기어 들어가 안겨요. 그리고 우는 거예요. 언니가 내 몸을 어루만져 줘요. 얼었던 몸이 따뜻해 질 때까지. 이런 거 좀 이상하죠?"
"이상하진 않아. 레이코 여사 대신 내가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 안아 줘요, 여기서"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린 초원의 마른 풀밭에 앉아 포옹했다. 앉으니까 풀들이 우리키를 넘어, 하늘과 구름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오코의 몸을 서서히 풀 위에 넘어뜨리고 꼭 껴안았다. 나오코의 육체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그 손은 내 몸을 원하고 있었다.
나오코와 나는 마음이 담긴 입맞춤을 했다.
"저 말이야, 와타나베" 하고 내 귓가에 대고 나오코가 말했다.
"응?"
"나와 자고 싶어요?"
"물론" 하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있어요?"
"물론 기다리지."
"그러지 전에 나, 좀 더 나를 정리해 두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당신 취미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 줄래요?"
"물론 기다리지."
"지금 꼿꼿해 졌어요?"
"발바닥 말이야?"
"바보" 하고 나오코가 깔깔댔다.
"발기했느냐는 말이라면 돼 있지, 물론."
"음, 그 물론이란 말 좀 그만해 줄래요?"
"좋아, 안 할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거 고통스러워요?"
"뭐가?"
"그게 꼿꼿하게 서는 것."
"고통스러우냐고?" 하고 내가 되물었다.
"말하자면 저.....괴로운가 그 말이에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제가 잠재워 줄까요?"
"손으로?"
"그래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아까부터 그게 불쑥불쑥 내 몸에 닿아서 아팠다고요."
나는 몸을 뒤로 조금 움츠렸다.
"이러면 괜찮아?"
"됐어요."
"이봐, 나오코."
"네?"
"해줘."
"좋아요" 하고 나오코는 생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내 바지 지퍼를 내리고, 단단해진 페니스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나는 나오코가 손을 움직이려 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푼 다음 등으로 손을 돌려 브래지어의 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핑크색 젖가슴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나오코는 눈을 감고,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우 능숙하군." 하고 내가 말했다.
"착한 아이는 잠자코 있는 거예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사정이 끝나자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또 키스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브래지어와 블라우스의 매무새를 고치고 나는 바지의 지퍼를 올렸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나오코가 나를 향해 물었다.
"덕분에"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럼 조금 더 걷지 않을래요?"
"좋아."
우리는 초원을 지나고, 잡목림을 지나고, 또 초원을 지나갔다. 그렇게 걷는 동안 나오코는 죽은 언니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긴 거의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지만, 당신에겐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린 터울이 여섯 살이나 되었고, 성격도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퍽 사이가 좋았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다툰 일 한 번 없었어요, 정말. 하기야 싸움이 안 될 만큼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언니는 뭘 해도 1등을 차지하는 그런 타입이었다고 나오코는 말했다. 공부도 1등, 운동도 1등, 인기가 있는가 하면 지도력도 있고, 친절한 데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남학생들이 좋아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표창장도 수없이 많이 받은 여자였다.
어떤 공립학교에도 그런 여학생은 하나쯤 있다. 그렇지만, 자기 언니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런 걸로 성격이 못돼지거나 콧대가 높아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뭘 해도 저절로 1등이 되는 것뿐이었다, 하고.
"그래서 나, 어릴 적부터 귀여운 애가 되자고 결심했지요."
나오코는 갈대 잎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언제나 주위의 사람들이 언니를 칭찬하고, 머리가 좋다, 운동을 잘한다, 인기가 있다는 등의 이야길 하는 것만 듣고 자랐거든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언니한텐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얼굴만큼은 내가 좀 예쁜 편이었으니까 부모님도 나를 귀엽게 키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국민학교 때부터 그런 학교엘 보냈던 거예요. 벨벳 원피스라든가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라든가 에나멜 신발, 게다가 피아노다 발레다 하면서. 그래도 언닌 무척 나를 사랑해 줬어요. 귀여운 내 작은 동생이란 식으로.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다가 선물로 주었고, 데리고 놀러 다니기도 하였고, 공부도 봐줬어요. 남자 친구하고 데이트할 적에 날 데리고 간 일도 있었고. 정말 멋진 언니였어. 그 언니가 왜 자살했는지 누구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지요. 기즈키의 경우와 마찬가지예요. 나이도 열일곱밖에 안 되었고, 그 직전까지도 자살할 것 같은 낌새도 전혀 없었고, 유서도 없었고.....같지요?"
"그렇군."
"다들 그 애는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느니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느니 하고들 말했어요. 책은 사실 많이 읽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책이 많았어요. 나도 언니가 죽은 뒤 그 중에서 꽤 많이 골라 읽었는데, 참 사람 슬프게 만들더군요. 메모 적어 놓은 것, 꽃을 눌러 놓은 것들이 나오니까.....남자 친구의 편지가 끼워져 있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 정말 숱하게 울었어요."
나오코는 잠시 말없이 갈대 잎을 돌렸다.
"대개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해 버리는 사람이었어요. 누구에게 의논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따로 특별히 프라이드가 높아서가 아니에요. 그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마. 그리고 부모들도 거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애는 내버려둬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난 언니에게 자주 자주 상담했고, 언니는 언니대로 매우 친절하게 많은 걸 내게 가르쳐 주었지만 자기는 누구에게도 의논을 안했어요. 혼자서 처리했죠. 화내는 일도 없고 기분 나빠하는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야, 이거 과장이 아니에요. 여자란, 가령 생리 같은 걸 할 땐, 공연히 짜증스럽고 심술을 부리기도 하잖아요? 조심씩 말이에요. 그러는 일은 없었어요. 언니의 경우엔 짜증을 내는 대신에 혼자 틀어박혀 버리곤 했지요. 두세 달에 한 번씩 그럴 때가 오면 이틀 정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잠을 잤어요. 학교도 쉬고,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방을 캄캄하게 해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있었지요. 하지만 기분이 상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불러다 곁에 앉히고는, 그날 있었던 일을 듣는 거예요.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친구와 뭘 하고 놀았다든가,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든가, 시험 결과가 어땠다든가 그런 것이었지요. 그런 이야기인데도 열심히 듣고, 감상을 말해 주거나 충고를 해줬어요. 하지만 내가 집을 비우면-가령 친구네 놀러 갔다든가 발레 연습을 갔다든가 하면-또 혼자서 멍해 있는 거예요. 그러다 이틀 정도 지나면 그게 확 자연스럽게 풀고, 다시 쾌활하게 학교엘 다녔어요. 그런 상태가 그렇지, 한 4년쯤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부모님도 걱정하고 병원 의사에게 의논도 했던 것 같은데, 이틀 후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하니까, 내버려둬도 그럭저럭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머리가 좋고 똑똑한 애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가 죽은 뒤에 작은아버지 이야기였죠. 작은아버지도 머리가 상당히 좋았던가 봐요. 그런데 열일곱에서 스물한 살 때까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결국 어느 날 갑자기 가출을 하고, 전철에 투신자살했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무래도 내 쪽의 내력인 것 같아'하고 말했어요."
나오코는 이야길 하면서 무의식중에 갈대 잎을 하나하나 손으로 뜯어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다 뜯어내자 이번엔 끈처럼 그 줄기를 손가락에 칭칭 감았다.
"언니가 죽어 있는 걸 발견한 건 나였어요." 하고 나오코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국민 하교 6학년 때의 가을이었어요. 11월이었죠. 비가 오고, 음산한 하루였어요. 그때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내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집에 오니까 여섯 시 반,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하면서 식사를 할 테니까 언니를 불러오라고 하는 거예요. 2층에 올라가서 언니 방을 노크하곤 밥 먹어, 하고 큰소리로 불렀죠. 그런데 대답은 없고 조용하기만 하잖아요. 어쩐지 이상한 것 같아서 또 한 번 노크를 하고, 살며시 문을 열고 들여다봤어요. 잠이 들었나. 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는 자고 있지 않았어요. 창가에 서서, 목을 이렇게 옆으로 수그리고는 밖을 골똘히 내다보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는 것 같았어요. 방은 어두운데 불도 켜 있지 않아서 모든 게 어슴푸레하고 잘 보이질 않았어요.
난 '뭘 하고 있어, 언니? 밥 먹으래' 하고 말을 걸었어요. 그러면서 보니까 언니가 여느 때보다 키가 커 있지 뭐예요. 왜 이러지? 하이힐을 신고 있나, 아니면 어디에 올라서 있는 건가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말을 하려는 순간, 난 그걸 봤어요. 목에 줄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천장에서 줄이 일직선으로 내려와 있었어요-그게 글쎄 놀라울 만큼 곧은 거예요. 꼭 자를 대고 허공에다 일직선을 그어 놓은 것 같았어요. 언니는 흰 블라우스에다-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런 심플한 거였어요-회색 스커트를 입었고, 발끝을 마치 발레를 하고 있는 것처럼 쭉 뻗고 있었어요. 그래서 마루와 발가락 끝 사이에 20센티미터 정도 빈 공간이 나 있었지요. 그런 세밀한 것까지 나 다 봤어요. 얼굴도 봐 버렸어요. 안 볼 수가 없었어요.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어머니한테 알려야지, 고함을 질러야지, 하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 내 의식과는 별도로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어요. 내 의식은 빨리 어머니한테 가야 하는데, 몸은 어느새 언니를 끈에서 풀어 주려고 허둥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내 힘으로 그게 될 리가 없었고, 5, 6분 동안 나는 거기서 멍하니 있었나 봐요. 방심 상태로. 뭐가 뭔지 갈피가 안 잡히고, 내 몸 속의 뭔가가 죽어 있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가 '뭘 하고 있니?' 하면서 올라올 때까지 난 줄곧 거기에 있었어요. 언니와 함께 그 어둡고 차가운 곳에....."
나오코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난 말을 못했어요. 죽은 것처럼 침대에서 눈만 뜨고 꼼짝을 못했어요. 뭐가 뭔지 정신이 들지 않았어요."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댔다.
"편지에도 내가 그랬지요? 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내 병은 더 무겁고, 그 뿌리도 깊어요. 그러니 당신이 앞서서 갈 수 있다면 당신 혼자서 앞서가 주길 바라요. 날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와 자고 싶으면 자고. 나를 생각해서 주춤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당당히 해나가요.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에 당신이 말려들지도 모르겠고.....하지만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만들고 싶지 않아요. 결코 당신의 인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좀 전에도 말했지만 가끔은 나를 만나러 와주고, 그리고 언제까지나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나와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당신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낭비하고 있지 않아"
"하지만 나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날 기다리겠어요? 10년이고 20년이고 날 기다릴 수 있어요?"
"나오코는 너무 겁을 먹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둠이라든가, 고통스러운 꿈이라든가, 죽은 사람의 힘 같은 것에 말이야. 나오코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잊는 일이야. 그걸 잊게 되면 나오코는 거뜬히 회복될 수 있어."
"잊을 수만 있다면야" 하고 나오코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길 나가게 되면 함께 살지 않을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나오코를 어둠과 악몽에서 지켜 줄 수가 있고, 레이코 여사가 없이도 고통스러워지면 내가 나오코를 안아 줄 테니까."
나오코는 내 팔에 찰싹 몸을 붙여 왔다.
"그렇게 되면 정말 멋질 거예요."
우리가 커피 하우스로 돌아온 것은 세 시 조금 전이었다. 레이코 여사는 책을 읽으면서 FM방송으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있었다. 어딜 보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초원의 한끝에서 FM방송의 브람스 곡이 들려온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었다. 3악장의 첫 첼로 부분의 곡을 그녀는 휘파람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박하우스와 뵘이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옛날엔 레코드판이 닳도록 이 곡을 들었지. 정말 닳아 버렸댔어. 구석에서 구석까지 들었어요. 핥아 버리듯이 말예요."
나오코와 나는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이야기가 잘 됐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에게 물었다.
"네, 아주 많이."
"나중에 다 이야기 해줘. 그의 것이 어떠했는지."
"그런 거 아무것도 안했어요." 하고 나오코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했어요?" 하고 레이고 여사가 내게 물었다.
"안했습니다."
"시시하군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시들하게 말했다.
"그러게나. 말예요" 하고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대답했다.
저녁 식사 모습은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분위기도, 이야기 소리도, 사람들의 표정도 어제 그대로였고, 단지 메뉴만 달라져 있을 뿐이었다.
어제, 무중력 상태에서의 위액의 분비에 대해 이야기하던 하얀 옷을 입은 그 남자가 이번엔 우리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와서는, 뇌의 크기와 그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줄곧 이야기해댔다.
우리들은 대두 햄버그 스테이크라는 걸 먹으면서, 비스마르크며 나폴레옹의 뇌 용량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접시를 밀어내고, 메모 용지에 볼펜으로 뇌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아, 이게 아니지, 좀 틀렸군, 이거" 하고는 고쳐 그리곤 했다.
그리고 그림을 다 그리고 나자 소중스레 메모 용지를 하얀 옷의 주머니에 넣고는 볼펜을 앞주머니에 꽂았다. 앞주머니에는 볼펜 세 자루와 연필, 그리고 삼각자가 들어 있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그는, "이곳 겨울은 참 좋습니다. 다음엔 꼭 겨울에 오십시오." 하고 어제와 똑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저 사람 의사 선생입니까, 아니면 환잡니까?" 하고 나는 레이코 여사에게 물었다.
"어느 편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편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정상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예요, 미야타 선생이라고 하지"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하지만 저분은 이곳에서 가장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기를 걸어도 좋다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수위실의 오무라 씨 역시 아주 이상해요, 그렇죠?"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응, 그 사람도 돌았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야채 요리를 포크로 찍어 먹으면서 말했다.
"글쎄, 아침마다 뭔지 모를 말을 소리소리 지르면서 엉망으로 체조를 한다니까요. 그리고 나오코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기노시타라고 경리를 맡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노이로제 증세로 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쳤어요. 도쿠시마라는 간호사는 작년에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서 쫓겨났고요."
"환자, 스태프 할 것 없이 전부 바꿔치기 해도 좋을 정도군요" 하고 나는 놀라며 말했다.
"그 말이 맞아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포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다. "와타나베 군도 세상 구조가 어떻게 돼 있는지를 차츰 알아가는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에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방으로 돌아와서 나와 나오코는 트럼프 놀이를 했고, 그러는 동안에 레이코 여사는 다시 기타로 바흐의 곡을 연습했다.
"내일 몇 시에 떠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손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댕기면서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한 후에 바로 떠날 겁니다. 아홉 시 좀 지나서 버스가 오니까 그걸 타면 저녁 아르바이트를 빼먹지 않아도 될 거예요."
"섭섭하네요, 좀 더 있다가 천천히 가면 좋을 텐데."
"그랬다간 나도 이대로 이곳에 주저앉게 될 것만 같습니다."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그렇군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그리고 나오코에게, "참, 오카 씨한테 가서 포도를 가져와야지!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하고 말했다.
"함께 가 드릴까요?" 하고 내가 말했다.
"어때, 와타나베 군을 좀 빌려 가도 되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또 둘이서 밤 산책을 해볼까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어제는 조금만 더 하라는 데서 그쳤으니까, 오늘밤은 완전히 끝까지 해버리자고요."
"좋아요, 부디 좋으실 대로" 하고 나오코가 깔깔거리면서 말했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레이코 여사는 셔츠 위에다 엷은 청색 카디건을 입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다 찔러 넣었다.
그녀는 걸으면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강아지처럼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비 냄새가 나네요." 하고 말했다. 나도 그런 식으로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과연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덮였고, 달도 그 구름 뒤에 숨어 버렸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공기 냄새로 대개 날씨를 알게 돼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직원들 주택이 있는 잡목 숲으로 들어서자, 레이코 여사는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어느 집 앞의 벨을 눌렀다. 안주인인 듯한 여성이 나와 레이코 여사와 깔깔대며 이야기를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레이코 여사는 그녀에게 "고마워요, 안녕" 하고는 내게로 돌아왔다.
"봐요, 포도를 얻어 왔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비닐봉지 속을 보여 주었다. 봉지 속에는 꽤 많은 포도송이가 들어 있었다.
"포도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맨 위의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내 손에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거 씻은 거니까, 그냥 먹어도 돼요."
나는 걸으면서 포도를 먹으며, 껍질과 씨는 땅에다 버렸다. 아주 싱싱했다. 레이코 여사도 자기 몫을 먹었다.
"저 집 아들에게 피아노를 조금씩 가르쳐 주고 있거든요. 그 답례 삼아 별걸 다 준다고요, 저 사람들. 요전 번 양주만 해도 그렇고요, 시내에 가서 간단한 장도 봐다 주구요."
"어제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이렇게 밤마다 늦게 돌아가면 나오코가 우리 사이를 의심하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뒷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
"OK, 그럼 지붕이나 있는 데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오늘은 좀 쌀쌀하니까."
그녀는 테니스 코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더니 좁다란 계단을 내려가서, 자그마한 창고가 연립 주택처럼 몇 채인가 줄지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작은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켰다.
"들어와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창고 속에는 크로스컨트리용 스키판과 스틱과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제설 도구며 약품 따위가 쌓여 있었다.
"옛날엔 여기 와서 기타 연습을 했어요. 혼자 있고 싶을 때면 말예요. 아늑해서 좋지요?"
레이코 여사는 약품 푸대 위에 걸터앉더니, 나도 옆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연기가 좀 차겠지만, 담배를 피워도 될까?"
"좋습니다."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은 끊을 수가 없단 말이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리고 맛있다는 듯이 담배를 피웠다. 이처럼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드물 것 같았다. 나는 한 알 한 알 소중하게 포도를 먹고, 껍질과 씨는 쓰레기통 대용으로 사용하는 깡통 속에 버렸다.
"어제는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바위제비의 둥우리를 뒤지러 가파른 벼랑을 기어오르는 대목까지요"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농담을 하니까 정말 우스워요."
레이코 여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그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대목까지 말했지, 아마?"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남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나 없나로 구분해 본다면, 나는 대개 앞에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땐 그렇게 생각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도 있었겠죠.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철이 들면서부터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난 남을 가르치는 일에 능숙하다고 말이죠. 나, 정말 능숙했다고요."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고 나도 동의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보단 남을 대할 때 훨씬 참을성이 있고, 무슨 일에서나 좋은 면을 잘 이끌어낼 수가 있나 봐요. 난 그런 타입의 사람인 것 같아요. 왜 그 성냥갑 옆구리에 붙어 있는 깔깔한 빨간 딱지 같은 존재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요. 별로 나쁠 건 없잖아요? 아무튼 난 성냥개비보단 일류 성냥갑 쪽이 더 좋아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렇죠, 그 아이를 가르치게 되면서부터예요. 좀 더 젊었던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몇 사람 가르쳐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별로 그런 생각은 안했었죠. 그 애를 가르치면서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머, 내가 이렇게 남을 가르치는 데에 재주가 있었던가 하고. 그만큼 그 애에 대한 피아노 레슨은 아주 잘 돼 나갔어요.
어제도 말했듯이 테크닉 면에 있어서 그 아이의 피아노 솜씨는 보잘 것 없었고, 또 그 애가 전문적이 음악가가 되려는 것도 아니고 해서, 나는 별 부담 없이 가르칠 수 있었죠. 더구나 그 애가 다니는 학교는, 적당한 성적만 유지해 주면 대학까지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여자 학교였어요. 악착같이 공부할 필요도 없고 해서, 그 애 어머니 입장도 '쉬엄쉬엄 그저 취미삼아 하라'는 거였죠. 그러니까 나 역시 그 아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진 않았어요. 억지로 강요당하는 걸 싫어하는 아이라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알았거든요. 입으로는 고분고분 네 네 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건 절대로 안하는 아이였지요. 그래서 자기가 치고 싶어 하는 대로 치게 그냥 내버려두었어요. 그 다음에 내가 그것과 똑 같은 곡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쳐 보이는 거죠. 그리고 둘이서 어는 방법이 좋은지 나쁜지 토론을 하는 거였지요.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그 아이를 시켜 보죠. 그럼 앞서보다 몇 단계 연주가 좋아지는 거였어요. 좋은 법을 꿰뚫어보고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였어요."
레이코 여사가 숨을 돌리고 담뱃불을 바라는 동안, 나는 잠자코 포도만 먹어댔다.
"나도 상당히 음악적 센스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아이는 나 이상이었어요. 아깝다 싶었지요. 어려서부터 좋은 선생을 만나 규칙적인 훈련을 받았더라면, 상당한 수준까지 가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 아인 그런 규칙적인 훈련을 견뎌내지 못할 아이였거든요.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어요.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 재능을 무산시켜 버리고 마는 그런 사람들이요. 난 그런 사람을 여럿 보아 왔지요. 예컨대 굉장히 까다로운 곡도 악보를 한번 보고는 거침없이 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요. 보고 있는 사람은 그만 압도돼 버리는 거죠. 나 같은 건 도저히 당할 수 없고 말예요. 하지만 그뿐인 거예요. 그들은 거기에서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니까. 그럼 왜 그럴까?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이에요. 노력하는 훈련이 다져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로 자기 재능을 망치는 거라고요. 섣부른 재주는 있어서 어릴 때부터 노력 없이도 꽤 잘 해내고, 다들 잘한다 잘한다 추켜세우니까, 노력 따위는 그까짓 것하고 우습게 여기거든요. 다른 아이가 3주일 걸리는 곡을 절반 동안에 해치우니, 선생도 이 아인 재능이 뛰어나다 싶어, 다음 단계로 그냥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것 역시 남들보다 절반 동안에 해 치우고, 또 앞으로 나가고..... 그래서 노력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인간 형성에 필요한 어떤 요소를 빠뜨리고 지나쳐 버리는 거죠. 이건 비극이에요. 따지고 보면 나에게도 다소 그런 면은 있었지만, 다행이도 우리 선생님은 굉장히 엄격한 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나 된 거죠.
하지만 그 아이에게 레슨 하는 일은 정말 즐거웠어요. 고성능의 스포츠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꼭 그런 기분이었으니까요. 손가락을 아주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그 애는 짜릿짜릿 재빠르게 반응을 하는 거예요. 좀 너무 빠르다 싶을 때도 있긴 있지만요. 그런 아이를 가르칠 때의 요령은, 우선 지나친 칭찬은 삼가는 거죠.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칭찬을 받는 일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고까짓 것하고 기뻐하지도 않거든요. 이따금 적절한 칭찬을 해주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무슨 일이나 강요하지 말 것. 제 스스로 선택하게 할 것. 앞으로 나가게만 하지 말고, 멈춰 서서 생각해 보게 할 것. 그것뿐이죠. 그렇게만 하면 아주 잘 돼 나가는 거예요."
레이코 여사는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밟아서 껐다. 그리고 감정을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레슨이 끝나면 말이에요, 차를 마시면서 서로 이야길 했죠. 가끔씩 내가 재즈 피아노 흉내를 내면서 가르쳐 주기도 하구요. 이런 것이 버드 파우엘, 이런 것이 셀로니어스 몽크 하고 말예요. 하지만 대개는 그 아이 혼자 떠들어댔죠.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그만 저절로 빠져들 정도였어요. 글쎄, 어제도 말했듯이 대부분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미가 있었어요. 정말 관찰력이 날카롭고 표현이 정확한가 하면, 독설과 유머가 있어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거예요. 아무튼 남의 감정을 자극하고 동요시키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제 스스로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되도록 교묘하고 적당히 그것을 사용하려고 했죠. 남을 화나게 하고, 슬퍼하게도 하고, 동정하게도 하고, 또 낙담하게도, 기뻐하게도 하고,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자극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저 자기 능력을 시험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의미하게 타인의 감정을 마구 주물러 놓는 거죠. 그런 일도 물론 나중에서야 그래 그랬었구나 싶었지, 그 당시엔 전혀 알지 못했어요."
레이코 여사는 고개를 젓고 나서 포도 몇 알을 따먹었다.
"병이었어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병들어 있었던 거죠, 그것도 말이지, 썩은 사과가 주위의 다른 것까지 병들게 하듯 그런 꼴로 병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런 그 애의 병은 이미 누구도 고칠 수가 없었지요. 죽을 때까지 그런 꼴로 앓아야만 하는 병이거든요. 그러니 한편 생각하면 불쌍한 아이지요. 나만 해도 만일 피해자가 되지 않았던들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 아이도 희생자의 하나구나 하고요."
그리고 또 그녀는 포도를 먹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갈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대로 반년 동안은 꽤 즐겁게 지냈어요. 때로는 아차 싶을 때도 있었고, 뭔지 좀 이상하다고 느낀 일도 있었죠. 그리고 이야기하는 중에, 그 애가 누군가에 대해, 아무래도 이치에 닿지 않는 무의미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곤, 소름이 끼친 적도 있었고요. 너무 눈치가 빨라 도대체 이 아이의 속셈이 무엇일까 싶을 때도 있었고..... 하지만 사람이란 누구나 결점이란 게 있잖아요? 게다가 나는 일개 피아노 교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 아이의 인간성이 어떻건 성격이 어떻건 그런 거야 상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고요. 연습만 착실하게 해주면 나로선 더 바랄 것이 없었지요. 게다가 사실 나는 그 아이를 퍽 좋아했으니까요.
다만 그 애한테는 개인적인 일은 함부로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죠. 글쎄, 난 어쩐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애가 내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해도-끈질기게 알고 싶어 했지만-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그런 말밖엔 해주지 않았어요.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느 학교에 다녔다는 그저 그런 이야기만요. '선생님에 대해 좀 더 얘기해 주세요.' 하고 그 아이는 성화를 부렸지만, 난 알아서 뭘 해, 별 볼일 없는 인생인데, 평범한 남편에 아이가 있고, 집안 살림에 쫓기고..... 그렇게만 말했죠. 그래도 전 선생님이 좋아요, 그러니까 얘기해 주세요 하면서 그 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매달리다시피 하고서 말예요. 그런 식으로 그 애가 매달리니까 나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요. 그래도 필요 이상의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그게 한 5월께였던가 봐. 레슨을 하고 있는 도중에, 그 애가 갑자기 기분이 안 좋다지 않겠어요. 얼굴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창백해진 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래, 집으로 갈래?' 하고 물었더니 '잠깐만 눕게 해주세요, 그러면 나아질 거예요' 하기에, '그럼 이리 와서 내 침대에 누워라' 하고 그 애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 가지고 침실로 데려갔지요. 우리 집 소파는 아주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침실의 침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미안해요, 걱정을 끼쳐 드려서', 그 애가 그러 길래 '뭐 괜찮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어때, 물이라도 마시겠니?' 하고 물었더니 '괜찮아요, 제 옆에서 잠깐 지켜 봐 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 애가 그러 길래, '알았어, 옆에서 봐주는 것쯤 못해 주겠니.' 하고 난 그대로 앉아 있었지요.
그렇게 얼마 동안 있는데, '죄송하지만 제 등 좀 쓰다듬어 주세요.'하고 그 애가 괴로운 얼굴로 부탁하는 거예요. 보니까 몹시 땀을 흘리고 있기에 난 부지런히 그 애의 등을 문질러 줬어요. 그랬더니 다시 '미안해요, 브래지어 좀 벗겨 주세요.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러질 않겠어요. 별 수 없어서 벗겨 줬지요. 몸에 딱 붙는 셔츠를 입고 있기에, 그 단추를 풀고 브래지어를 벗겨 줬어요. 열세 살짜리로선 젖가슴이 큰 이아였어요. 브래지어도 주니어용이 아니고 어엿한 성인용인 데다, 그것도 꽤 고급품이었죠. 글쎄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요. 아무튼
난 그 애의 등을 계속 문질러 줬어요. '바보처럼 굴다니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그 애는 연신 그 말만 되풀이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를 되풀이했지요."
레이코 여사는 발밑에다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그때쯤 해서는 나도 포도 먹던 손을 멈추고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그 애가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니 웬일이지?' 하고 물었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자, 탁 털어놓고 말해봐.' '가끔 이렇게 돼요.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어요. 외롭고, 슬프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도 없고요. 그래서 난 이렇게 되고 마는 거예요. 밤에도 제대로 잠이 오지 않고, 식욕도 거의 없어요. 그저 선생님한테 오는 것만이 즐거워요, 전.'
'음,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집안이 편치 않다고 말하더군요. 부모를 사랑할 수 없으며, 부모 쪽에서도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따로 여자가 있어서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그 일로 해서 반은 미친 사람이 돼 가지고 그 애한테만 신경질을 부려서 매일처럼 얻어맞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집으로 가기가 무섭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곤 엉엉 울지 뭐예요. 귀여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요. 그걸 보면 아마 하느님이라도 가슴이 뭉클해질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렇게 집에 가는 게 무섭다면 레슨 때말고도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좋다고요. 그러자 그 애는 나한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난 어떡해야 좋을지 몰랐을 거예요. 제발 날 버리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마저 날 버리면, 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걸요' 그러는 거였어요.
별수 없어서 난 그 애의 머리를 끌어안고 어루만져 줬지요. '그래, 알겠다.' 하면서. 그때쯤 해서 그 애는 이미 내 등에 이렇게 손을 돌려 대고는 더듬고 있었지요. 그러는 사이에, 난 차츰 차츰 묘한 기분이 들지 뭐예요. 몸이 어째 마구 뜨거워지는 것처럼 되면서 말예요. 글쎄, 안 그렇겠어요? 그림에서 오려낸 것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하고 단 둘이 침대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데다, 그 애가 내 잔등을 더듬고 있는 그 솜씨가 글쎄 이만저만 관능적이 아니더란 말이에요. 남편의 솜씨 따위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지 뭐예요. 그 애 손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내 몸의 태엽이 조금씩 조금씩 풀려 가는 것만 같더라고요. 그렇게 기막힐 수가 없었어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 애는 내 블라우스를 벗기고, 내 브래지어까지 풀고는 내 젖무덤을 만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난 그제야 깨달았지요. 이에는 레즈비언이구나 하고요. 난 전에도 한 번 당한 적이 있거든요. 고교 시절에 상급생 아이한테. 그래서 난 '안 돼, 그만둬' 하고 말했지요. '부탁이에요, 조금이면 돼요. 전 진짜 외로워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 외롭다니깐요. 선생님밖엔 없어요. 절 버리지 마세요.' 그러면서 그 애는 내 손을 잡더니, 자기 가슴으로 가져가지 않겠어요? 굉장히 예쁜 젖무덤이었어요. 그 젖무덤에 손이 닿자, 어쩐지 내 가슴이 꾸욱 조여드는 것만 같았어요. 여자인 나마저도 말예요. 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안 돼, 그러면 안 돼' 하고 바보처럼 그 말만 되뇌고 있을 뿐이었지요. 웬일인지 몸이 통 움직이질 않았던 거예요. 고교 땐 제대로 뿌리칠 수가 있었는데도, 그땐 통 그렇게 안 되더군요.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 애는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다 눌러대고는, 입술로는 내 젖꼭지를 상냥하게 깨물고 빨고 하면서, 오론 손으로는 내 등이랑 옆구리랑 엉덩이랑 애무하는 거였어요. 커튼이 내려진 침실에서,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한테 알몸이나 다름없이 옷을 벗기 운채-그때쯤 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한 가지 한 가지씩 옷을 벗기우고 있지 뭐예요-그런 애한테 애무를 받고 몸부림치고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믿어지지가 않아요. 바보스럽지 뭐예요. 하지만 그땐 말이죠, 어쩐지 글쎄 마술에나 걸린 것만 같았어요. 그 애는 내 젖꼭지를 빨아 대면서 '외로워요, 선생님밖엔 없다니 까요. 버리지 마세요. 진짜 외롭다니 까요' 그렇게만 계속 속삭여 댔고, 나는 또 '안 돼, 안 돼'라고만 계속 말하고 있었단 말예요."
레이코 여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실, 나, 남자에게 이 이야길 하는 건 처음이에요."
레이코 여사는 내 얼굴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와타나베 군에게는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얘기하고 있지만 나로서도 이런 걸 말한다는 건 굉장히 창피하다고요."
"미안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밖에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얼마 동안 계속하더니, 그 다음부턴 점점 오른손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리곤 속옷 위로 그곳을 만지지 않겠어요. 그때쯤 해서 난 벌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거기가.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젖어 버린 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한 번도 없었어요. 어느 쪽이냐면, 난 그때까지도 나 자신이 성적으로 담백한 편일 줄 알고 있었죠. 그런데도 그 모양이 되고 보고, 나로서도 사뭇 어안이 벙벙해 버렸지 뭐예요. 그리곤 속옷 속으로 그 애의 가늘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들어오더니, 그 손가락으로..... 네 알겠죠, 대충? 그런 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요. 도저히..... 그 느낌이 말이죠, 남자의 두툴두툴한 손가락으로 당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요, 정말. 마치 깃털로 간지럼 태우듯 하지 뭐예요. 난 그만 머릿속의 퓨즈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말예요, 난 멍해진 머리로도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한번 이런 짓을 하면 꼬리를 이어 이걸 계속하게 될 것이고, 그런 비밀까지 가지게 되면, 내 머리는 또 뒤범벅이 될 것이 틀림없었거든요. 그리고 아이 생각을 했지요. 만약 아이에게 이런 장면을 들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요. 아이는 토요일에는 늘 세 시경까지 외가에서 놀다 오게 돼 있었지만, 만일 무슨 일이 있어서 갑작스레 집에 돌아오거나 하면 어떻게 하랴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 온몸의 힘을 다 짜가지고 일어나 앉아서는 '그만둬, 부탁이야!'하고 외쳤지요.
하지만 그 앤 그만두지 않았어요. 그 앤 그때 내 속옷을 벗기곤 그곳을 입으로..... 난 부끄러워서 남편한테도 그런 짓은 거의 하지 못하게 했었는데, 글쎄 열세 살짜리 여자 얘가..... 질렸지 뭐예요. 그런 게 그게 또 하늘에라도 날아오른 것처럼 기가 막힐 정도였어요. '그만두라니까!' 하고 다시 한 범 호통치고는, 그 애 뺨을 후려쳤어요, 있는 힘껏. 그제야 그 앤 가까스로 그만두더군요. 그리곤 몸을 일으키더니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았어요. 우리는 그때 둘 다 알몸뚱이 상태로 침대 위에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서로를 말똥말똥 쳐다본 셈이지요. 그 애는 열세 살이고, 난 서른한 살이고..... 하지만 그 애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까, 난 어쩐지 압도당했어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게 열세 살짜리 여자 애의 육체라곤 나로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걸요. 그 애 앞에서면 이 내 몸뚱이 같은 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왜 이러세요.' 하고 그 애가 말했어요. '선생님도 이런 거 좋아하시죠?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좋아하죠? 난 다 안다고요, 그런 거. 남자하고 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요? 글쎄, 이렇게 젖어 있잖아요. 난 더욱더 기분 좋게 해드릴 수가 있다고요. 정말이에요.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기분 좋게 해드릴 수가 있다니까요. 좋지요, 네?' 하지만 글쎄, 정말 그 애가 하는 말이 맞았어요, 정말. 그 애하고 그러는 게 남편이랑 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좀 더 그래 줬으면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었어요. '우리, 일주일에 한번 씩 이거 해요. 한 번이면 돼요. 아무도 알지 못해요. 선생님하고 나하고 만의 비밀로 해요, 네?' 그렇게 그 앤 말했어요.
하지만 난 일어서서 실내복을 걸치고, '이제 돌아가! 이제 다신 오지 말아 줘!' 그렇게 말했지요. 그런데 그 눈이 말이죠, 여느 때와는 달리 굉장히 평평한 거예요. 마치 마분지에 물감을 칠해서 그런 것처럼 평평하게 느껴졌어요. 깊이도 없는 것 같고. 한참이나 말끄러미 내 쪽을 노려보다가 잠자코 자기 옷가지를 주워 모으더니, 마치 이것 보라는 듯이 그 애는 천천해 하나하나 그걸 몸에 걸치고, 그런 다음 피아노가 있는 거실로 가서는, 백에서 헤어 브러시를 꺼내 머리를 빗고, 손수건으로 입술의 피를 닦고는, 구두를 신고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레즈비언이야. 정말이야, 제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하고요."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레이코 여사는 입술을 삐죽이 하고 한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남편보다 그 애와 그러는 편이 더 흥분됐으니까. 이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한땐 나 스스로도 정말 레즈비언이 아닐까 하고 역시 진지하게 고민했죠. 이제껏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 아니겠느냐고요. 하지만 요즘은 그렇겐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그런 경향이 내 안에 없다고 하지는 않겠어요. 다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확한 의미로는 난 레즈비언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쪽에서 여자 애를 보고 적극적으로 욕정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니까요,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어떤 종류의 여자애가 나한테 감정을 보내면 그 감응이 나한테 전달될 뿐이에요. 그런 경우에만 난 그렇게 되고 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가령 나오코를 껴안는다 해도, 난 특별히 무엇을 느끼거나 하진 않아요. 우리는 더울 때면 방안에서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고, 목욕탕에도 함께 들어가고, 때때로 한 이불 속에서 자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요. 나오코의 몸뚱이도 기막히게 예쁘지만요, 그저 그것 뿐이죠. 하긴, 우린 꼭 한 번 레즈비언 놀이를 한 적은 있어요. 나오코하고 나하고. 이런 얘기 듣고 싶어요?"
"얘기해 주세요."
"내가 이 얘길 나오코에게 했을 때-우린 아무 이야기나 다 하니까요-나오코가 시험 삼아 내 몸뚱이의 이곳저곳을 애무해 줬어요. 둘이서 알몸뚱이가 돼가지고. 하지만 전연 흥분이 안 되더라고요. 간지럽고 그저 간지럽기만 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지금 그 장면을 떠올려 봐도 근질거리기만 해요. 그런 일에 나오코는 정말 서투르니까요. 어때요, 조금은 안심했어요?"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하고 나는 대답했다.
"뭐, 그런 일이었어요, 대충" 하고 레이코 여사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눈썹 언저리를 갉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여자애가 나가 버리자, 난 한동안 의자에 멍청히 앉아 있었어요.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서요. 몸뚱이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장 고동이 덜컥덜컥 둔탁한 소리를 내고, 손발이 몹시 무겁고, 입안은 나방이라도 집어삼킨 것처럼 서걱서걱하고. 하지만 우리 아이가 곧 돌아올 것 같아서, 아무튼 목욕을 할 생각으로 욕탕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애가 더듬고 혀를 대고 핥기도 한 몸뚱이를 어떻든 깨끗이 씻어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비누로 싹싹 닦아도, 그런 미끈미끈한 점액 비슷한 건 잘 떨어지질 않았어요. 그런 건 다분히 생각 탓일 거라고 자위했지만, 역시 잘 안 됐어요. 그리고 그날 밤, 남편에게 안겼지요. 그 뒤끝 같은 느낌으로요. 물론 남편에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말 할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안아 달라고 했고, 여느 때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해달라고 했죠. 남편은 몹시 정성을 들였어요. 난 나도 모르게 줄곧 가쁜 숨을 내쉬었어요. 그렇게 근사한 건 결혼하고 처음이었으니까요. 왜 그랬을 것 같아요? 그 아이의 손가락 감촉이 내 몸에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뿐이에요. 부끄럽군요. 이런 이야기. 땀이 다 나네요."
레이코 여사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말예요, 그래도 소용없었어요. 글쎄,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남아 있는 거예요, 그 애의 감촉이 말이에요. 그리고 그 애가 마지막으로 던지고 간 말이 내 머리 속에서 산울림처럼 계속 윙윙거리는 거예요.
토요일, 그 애는 오지 않았어요. 만일 오면 어떡하지 하고, 나는 잔뜩 겁을 먹고 집에 있었어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청하니 앉아서 말이죠. 하지만 오지 않았어요. 그래, 오지 않는 게 당연했지요. 자존심이 강한 아이겠다, 또 그 모양으로 갈라졌으니까요. 그리고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 오지 않은 채, 한 달이 지난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도 잊어버리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난 어째 잊어버릴 수가 없지 뭐예요. 혼자서 집에 있노라면, 어쩐지 그 애의 인기척이 주위에 문득문득 느껴지면서 안정감을 잃는 거예요. 피아노도 쳐지지 않고, 뭘 좀 생각해 보려 해도 생각이 집중되지 않았어요. 무엇을 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가 않고. 그런 식으로 한 달 정도 지나서야,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어요. 바깥을 걷고 있자니까 뭔가 좀 이상한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어요. 나를 보는 눈들이 어쩐지 야릇한 느낌을 주면서 서먹서먹했단 말예요. 물론 인사말 정도는 건넸지만, 그 말투나 대하는 태도가 지금까지와는 다르지 않겠어요? 가끔씩 집으로 놀러 오던 이웃집 부인조차, 어쩐지 나를 피하는 것 같고. 하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기로 했죠. 그런 걸 신경 쓰기 시작하면 바로 그게 병의 초기 증세니까.
하루는 나와 친하게 지내는 부인이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나와는 같은 연배고, 우리 어머니 친지의 따님이기도 하고, 또 아이들의 유치원이 같기도 해서 그녀하곤 비교적 친한 편이었죠. 그 부인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당신에 관해 몹쓸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그걸 알고 있느냐고 그러지 않겠어요? 나는 고개를 젓고 물었지요.
‘무슨 소문이죠?’
‘그렇게 정색을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운 걸요.’
‘대답하기 어렵다지만, 이미 거기까지 말해 버렸잖아요. 이왕이면 전부 말해 줘요.’
그래도 그녀는 몹시 말하기를 꺼렸지만, 나는 끝까지 추궁했어요. 하긴 그 부인도 처음부터 말하고 싶어서 온 셈이었으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말을 돌리다가 끝내는 말하고 말았어요. 그래,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그 소문이란, 내가 정신병원에 수차 들락거린 적이 있는 소문난 동성연애자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니던 아이를 발가벗겨 가지고 희롱하려 하다가, 그 애가 반항을 하자 얼굴이 부어오르도록 때렸다, 그런 이야기였어요. 이야기의 날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떻게 내가 입원한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는지 그 부인도 깜짝 놀랐다더군요.
‘나는 당신에 대해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데, 결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남들에게 강조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지요.’..... 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그렇게 딱 믿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죄다 그런 말을 퍼뜨리고 있는 걸요. 자기네 딸이 희롱을 당했다고 하기에, 당신 뒤를 들춰 보았더니 정신병 경력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면서요.’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즉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이죠-그 애가 울어서 부어오른 얼굴로 돌아 왔기에, 대관절 어떻게 된 셈이냐고 아이 어머니가 추궁을 했대요. 얼굴이 부었을 뿐만 아니라, 입술은 터져서 피가 나고, 블라우스의 단추가 떨어지고, 속옷도 좀 찢어져 있었대요. 그게 글쎄 믿어져요? 물론 이야기를 꾸며내기 위해 그 애 자신이 전부 그렇게 했겠지요. 블라우스에 일부러 피를 묻히고 단추를 떼고 브래지어의 레이스도 찢어 놓고, 눈을 빨갛게 하고 엉엉 울면서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리고, 그래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세 양동이도 넘는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게 눈에 선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애 이야기를 믿어 버린 여러 사람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가령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나라도 믿어 버렸을 테니까요. 인형처럼 예쁘장하고 악마처럼 말재간이 능란한 여자애가 훌쩍거리면서 ‘싫어,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아이 참, 창피해!’ 해가면서 실토를 하는 척한다면 누구나 다 그만 믿어 버리고 말겠지요. 게다가 재수 없게도, 나한테 정신 병원 입원경력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잖아요. 그 애 얼굴을 때렸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 봤자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어요? 믿어줄 사람은 내 남편 정도밖엔 없겠지요.
며칠 동안 꽤나 망설인 끝에 마음먹고 남편에게 이야기해 보았어요. 물론 그는 내 말을 믿어 주었지요. 난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남편에게 이야기했어요. 레즈비언들이나 하는 짓을 그 애한테 당했다고요, 그래서 따귀를 때렸다고. 물론‘흥분했다’는 것까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집에 가서 담판을 내고 오겠어. 하고 남편은 노발대발하면서 말했어요. ‘당신과 나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잖아. 어째서 레즈비언 소리를 들어야 하지? 그 따위 말 같지 않은 소리가 어디 있어!’
하지만 난 그를 말렸어요. 가지 말라고요. 그만두세요, 그렇게 해보았자 우리의 상처만 깊어질 뿐이라고요. 그래요, 난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 애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요. 나도 그렇게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여럿 보아온 터라 잘 알고 있었지요. 그 애는 몸속까지 속속들이 썩어 있는 거예요. 그 예쁜 피부를 한 꺼풀 벗기면, 속은 전부 썩은 살덩이다 그거지요. 이렇게 말하면 좀 심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단 말예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한, 아무리 해도 우린 승산이 없는 거예요. 그 애는 어른들의 감정을 조작하는 데 능숙하지만, 우리들 손에는 아무런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요. 도대체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서른 살 넘은 여자에게 동성연애를 걸려고 했다면 대체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어요? 무슨 소리를 하건 세상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말밖엔 믿지 않는 법이에요.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우리들의 입장만 더욱더 악화돼 갈 뿐인 걸요.
이사를 가자고 남편에게 말했지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더 이상 여기 있다간 너무 너무 긴장해서, 내 머리의 태엽이 또다시 날아갈 거예요. 지금도 내 머리 속은 혼란해져 있는 걸요. 아무튼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옮겨가자고요.’ 그랬지요. 하지만 남편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이는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하는 일에 제법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집장사가 지은 건물이긴 했지만 자그마한 집도 겨우 한 채 마련했고, 딸아이도 유치원에 익숙해졌던 때고 해서..... 아, 좀 기다리자, 그렇게 갑작스레 움직일 순 없잖느냐, 하고 그는 말했지요. 직장도 새로 구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고, 집도 모두 팔아야 하고, 아이의 유치원도 새로 물색해야 하니, 아무리 급히 서둔다 해도 두 달은 걸리지 않겠느냐고요.
‘안 돼요, 그렇게 하다간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다치게 된다고요’하고 난 말했지요. 당신을 겁주려는 게 아니고, 이건 정말이라니까요. 그건 자명한 일이었어요. 난 그 무렵엔 벌써 이명과 환청과 불면증 그런 증세들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거든요. ‘그럼 당신 혼자 먼저 어디엔가 가 있으라고, 난 내 일을 다 보고 나서 갈 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싫어요. 나 혼자선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아요. 이제 당신하고 떨어지면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게 돼요.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요. 날 혼자 있게 하지 말아요.’ 하고
그는 나를 꼭 안아 주었어요. 그리고 잠시 동안만 참으면 되니까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 달라고 그랬어요. 한 달 동안만 우선 참아 보라고요. 그러는 동안에 내가 모든 걸 손을 써서 처리하겠다, 직장도 정리하고, 집도 팔고, 아이의 유치원도 해결하고, 새 직업도 찾아보겠다, 잘하면 오스트레일리아에 일자리가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한 달 동안만 기다려 줘.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지도 몰라, 하고요. 그렇게 말하는 데는, 나도 그 이상 더 할 말이 없더군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나만 더 고독해지고 말 것만 같았으니까요.
레이코 여사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쉰 후, 천장의 전등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못 가서 어느 날 머리통 속의 태엽이 끊겨져 버리고, 또 펑! 이지 뭐예요. 이번엔 좀 심했지요. 수면제를 먹고 가스 밸브를 열어 놓았거든요. 하지만 죽지도 못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의 침대 위더라 그거예요. 그걸로 끝장난 셈이죠. 몇 달인가 지나서 좀 안정을 되찾아 생각을 가다듬게 됐을 즈음해서, 이혼해 달라고 남편한테 말했어요. 그러는 게 당신을 위해서나 아이를 위해서나 가장 좋은 길이라고요. 이혼할 생각은 없다고 남편이 잘라 거듭 말했어요.
'다시 한 번 새 출발을 할 수 있어. 새로운 곳에 가서 우리 셋이서 새 출발을 하자고.' 남편은 그렇게 나를 설득했지요.
'이젠 늦었어요, 그때 이미 모든 게 끝난 거예요. 한 달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당신이 말했던 그때 말예요. 만약에 진짜로 새 출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당신은 그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어디로 가건, 아무리 먼데로 옮겨가건 또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 거예요. 그리고 난 또 같은 걸 요구해서 당신을 괴롭히겠죠. 난 더 이상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혼한 거죠. 내 쪽에서 무리하게 이혼을 해버린 거지만. 그는 2년 전에 재혼을 했는데, 난 퍽 잘 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정말이에요. 그 무렵엔 내 인생이 줄곧 이런 식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일에 다른 누구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또 언제 다시 머리통 속의 태엽이 끊어질지, 잔뜩 겁을 먹고 지내는 그런 생활을 누구한테도 강요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는 내게 정말 잘해 주었어요. 신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힘이 세고 참을성이 있었으며, 나한테는 아주 이상적인 남편이었어요. 그는 내 병을 고치려고 노력했어요. 그를 위해서나 아이를 위해서나요.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젠 고쳐진 걸로 알고 있었지요. 결혼해서 6년, 행복했었죠. 그는 99퍼센트까지 완벽하게 해줬어요. 하지만 1퍼센트, 단 1퍼센트 때문에 모든 게 빗나갔던 거예요. 그래서 펑! 했던 거지요. 우리가 쌓아 올려 왔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완전히 제로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 몹쓸 여자 아이 하나 때문에 말이죠."
레이코 여사는 발밑에 밟아 끈 담배꽁초를 주워 모아 깡통 속에 넣었다.
"한심한 이야기지 뭐예요, 글쎄. 우리가 그토록 고생고생하면서, 이것저것을 조금씩 쌓아 올렸는데도 말이죠, 무너진다 싶으니, 정말 눈 깜짝할 새가 아니겠어요. 눈 깜짝할 새에 무너져 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란 말이에요."
레이코 여사는 일어나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방으로 돌아가요. 시간도 늦었고요."
하늘은 아까보다도 더욱 어둡게 구름에 덮여 있었고, 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빗방울 냄새가 나에게도 느껴져 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비닐 주머니 속의 싱그러운 포도송이 냄새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좀처럼 나갈 수가 없어요.....이곳에서 나가 바깥세상과 관련을 갖는 게 몹시 겁이 나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생각을 한다는 게 두렵단 말예요."
"그 심정, 잘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레이코 여사는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바깥 세상에 나가 제대로 착착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내가 말하자, 레이코 여사는 생긋이 웃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코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리를 포개고 손가락으로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어휘들을 손가락으로 눌러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등 불빛이 자잘한 가루처럼 그녀의 몸 주위에 반짝반짝 떠돌고 있었다. 레이코 여사와 줄곧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나오코를 보니, 그녀가 얼마나 젊은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해" 하고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둘이서 즐거웠어요?" 하고 나오코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
"물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대답했다.
"무슨 일을 했는데 둘이서?" 하고 나오코가 내게 물었다.
"입으론 말할 수 없는 그런 거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오코는 깔깔 웃고 나서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포도를 먹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니까, 마치 이 세상에 우리 세 사람밖에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줄곧 비가 내린다면, 우리 세 사람은 줄곧 이러고 있을 수 있을 텐데"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 둘이 서로 껴안고 있는 동안, 난 눈치코치 없는 흑인 노예처럼,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부채로 펄럭펄럭 부채질도 하고, 기타로 BGM도 반주하고 그러겠지? 싫어, 그런 거" 하고 레이코 여사가 대꾸했다.
"어머, 가끔 빌려 줄게요" 하고 나오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쁘지도 않군."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으며 말했다.
"비여, 계속 내리소서."
비는 계속 내렸다. 이따금 천둥마저 쳤다. 포도를 다 먹고 나자 레이코 여사는 여느 때처럼 담배에 불을 댕겨 물고, 침대 밑에서 기타를 꺼내어 치기 시작했다. <데사피나도>와 <이파네마의 처녀>를 치고, 그리고 바카락의 곡이며 레논과 매카트니의 곡을 연주했다.
나와 레이코 여사는 또 와인을 마시고, 와인이 바닥나자 수통에 남아 있던 브랜디를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매우 좋은 기분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줄곧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고 나도 생각했다.
"또 언젠가 만나러 와주겠어요?" 하고 나오코가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물론 오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편지도 보내 줄래요?'
"음, 매주 보낼게."
"나한테도 좀 보내 줄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보내죠, 기꺼이" 하고 나는 말했다.
열한 시가 되자 레이코 여사는 나를 위해, 어젯밤처럼 소파를 넘어뜨려 침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인사를 한 후,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배낭에서 회중전등과 <마의 산>을 꺼내어 줄곧 읽고 있었다.
열두 시가 되기 조금 전에 침실의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나오코가 다가와 내 옆으로 기어들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나오코는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나오코였다. 눈도 흐릿하지 않고 거동도 제법 활달했다.
그녀는 내 귀에 입을 대고 "잠이 오질 않아요, 왠지....."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는 책을 놓고 회중전등을 끈 다음, 나오코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어둠과 빗소리가 부드럽게 우리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레이코 여사는?"
"괜찮아요, 푹 잠들어 있으니까. 그 사람은 잠이 들면 좀처럼 깨질 않아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정말 또 만나러 와주겠어요?"
"오고말고."
"당신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데도?"
나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오코의 젖무덤이 똑똑히 내 가슴에 감촉 되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가운을 걸친 채인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어깨로부터 등으로, 그리고 허리께로, 나는 천천히 몇 번이고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몸의 윤곽이며 부드러움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얼마 동안 그 모양으로 다정하게 서로 포옹하고 난 다음, 나오코는 내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사르르 침대에서 빠져나갔다. 나오코의 엷은 블루 가운이 어둠 속에서 마치 물고기처럼 잽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안녕-" 하고 나오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용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는 아침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는 가을비였다. 물웅덩이의 물무늬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릴 정도였다.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우윳빛 안개가 자욱이 드리워 있었지만, 해가 솟아오를수록 안개는 바람에 밀려나고, 잡목 숲이며 산의 능선이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제 아침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셋이서 아침 식사를 하고 새집으로 새들을 돌보러 갔다.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는 모자가 달린 비닐 비옷을 입었고, 나는 스웨터 위의 방수가 되는 윈드브레이커를 입었다.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 썰렁했다. 새들도 비를 피하려는 듯 새집 안쪽으로 깊숙이 몰려서 몸을 서로 바싹 붙여 의지하고 있었다.
"춥군요. 비가 내리니까 하고 레이코 여사에게 말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조금씩 추워지다가 어느 틈엔가 그것이 마침내 눈으로 변해 버리는 게 이곳 날씨예요. 일본해로부터 밀려온 구름이 이 언저리에 듬뿍 눈을 떨어뜨리곤 저쪽으로 빠져 나가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새들은 겨울철엔 어떻게 합니까?"
"물론 실내로 옮겨요. 글쎄, 안 그래요? 봄이 되면 얼어붙은 새들을 눈 밑에서 파내어 해동시켜 살려 놓고는, '자, 다들 밥 먹어라' 그럴 순 없잖아요?"
내가 손가락으로 철망을 톡톡 두드리자 앵무새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개새끼" "고마워" "미친놈" 하고 소리쳤다.
"저걸 그대로 냉동해 버리고 싶어요." 하고 나오코가 우울한 소리로 말했다.
"매일 아침 저 소릴 듣고 있으면,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고 말 것만 같아."
새집 청소를 끝낸 후 우리들은 방으로 돌아왔고 나는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농장으로 갈 채비를 했다. 우리들은 함께 밖으로 나와 테니스 코트 조금 앞에서 헤어졌다.
그녀들은 오른쪽으로 꺾어지고 나는 곧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안녕" 하고 그녀들은 말했고, 나도 "안녕" 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또 만나러 올 거야" 하고 말했다.
나오코는 미소를 짓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갔다.
정문에 다다르기까지 여러 사람들과 스쳐 지났는데, 누구나 하나같이 나오코가 걸쳤던 것과 같은 노란색 비옷을 걸치고, 머리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비가 내린 탓으로 모든 사물의 빛깔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면은 거무칙칙하고, 소나무는 선명한 초록색이었으며, 노란 비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들은, 비 오는 아침에만 땅 위를 방황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특수한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은 농기구며 바구니며 무슨 자루 등을 든 채, 소리도 없이 조용히 땅 위를 이동하고 있었다.
수위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나갈 때에 방문자 명부에 적힌 내 이름이 있는 곳에 표시를 했다.
"도쿄에서 오셨나 보군요." 하고 그 노인은 내 주소를 보고 말했다.
"나도 딱 한 번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은 돼지고기 맛이 좋은 곳이더군요."
"그렇습니까?" 하고 나는 잘 모르는 대로 적당하게 대답했다. "도쿄에서 먹은 음식들 대부분이 맛이 별로 좋질 않았는데, 돼지고기만은 맛이 있었어요. 그건 저어, 무슨 특별한 사육법 같은 거라도 있나 보지요?'
그 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나는 말했다. 도쿄의 돼지고기 맛이 좋다는 말을 들은 거도 처음이었다.
"그게 언제쯤 이야기지요? 도쿄를 가보셨다는 게?" 하고 나는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언제였더라.....황태자 전하께서 결혼하셨을 때였나 봅니다. 아들놈이 도쿄에 있었는데,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 하기에 가보았지요, 그때."
"그럼 그 시절엔 분명 도쿄의 돼지고기가 맛있었던가 보죠, 뭐" 하고 나는 말했다.
"요즘은 어때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평판은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좀 낙담한 것 같았다. 노인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버스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을 맺고, 나는 도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냇가의 길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안개 조각들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바람에 날려서 산비탈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나는 도중에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별 의미 없이 한숨을 쉬어 보기도 했다. 어쩐지 마치 어딘가 중력이 다른 혹성에라도 와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렇지, 이것이 바로 바깥 세계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는 네 시 반이었다. 나는 방에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이내 옷을 갈아입고, 아르바이트 일터인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로 갔다. 그리고 여섯 시부터 열 시 반까지 가게를 보면서 레코드를 팔았다.
그러는 동안, 가게밖에 잡다한 부류의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 동반이나 커플, 주정뱅이나 건달패, 짧은 스커트를 입은 팔팔한 여자나, 히피풍의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 클럽의 호스티스, 그 밖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한길을 오가고 있었다.
하드록을 틀었더니 히피며 후유텐(역주:거지꼴을 한 부랑자) 몇 녀석이 가게 앞에 모여들어 춤도 추고 신나 냄새를 맡는가 하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토니베네트의 코드를 걸었더니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웃에는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가게가 있어서, 졸린 듯한 눈을 한 중년 사내가 묘한 성기구를 팔고 있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원하는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 않는 물건들뿐이었지만, 그런대로 가게는 제법 성업 중인 것 같았다.
가게의 엇비슷한 맞은편 골목에서는 술을 과음한 학생이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의 오락실에서는 근처 음식점의 요리사가 현금을 걸고 빙고 게임을 하면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거무튀튀한 얼굴을 한 부랑자가 닫힌 가게의 처마 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엷은 핑크색 루즈를 바른, 아무리 보아도 중학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여자 아이가 가게로 들어와서, 롤링 스톤즈의 <점핀 잭 프래쉬>를 틀어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가 핀을 찾아 걸어 주었더니, 그녀는 손가락을 퉁겨 딱 딱 소리를 내어 리듬을 잡으며, 허리를 흔들며 춤을 췄다. 그리곤 담배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배인이 놓고 간 라크 한 개비를 빼주었다. 여자아이는 맛있다는 듯이 그것을 피우더니, 레코드가 끝나자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이 나가 버렸다.
15분 간격을 두고 구급차인지 패트롤카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가 비슷한 정도로 술에 취한 세 사람의 샐러리맨이,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머리칼이 기다란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향해, 몇 번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고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까, 나는 차츰 머리가 혼란해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들 광경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지배인이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는 "야, 와타나베, 엊그저께 저기 부티크 여자와 한탕 했다고" 하고 말했다.
그는 근처의 부티크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에게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종종 가게의 레코드를 선물로 주고 있었다. "거, 잘 됐네요." 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자초지종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여자와 자고 싶거든 말이야" 하고 그는 득의양양해서 가르쳐 주었다.
"좌우지간 물건을 선물하고, 그런 다음에 마구 술을 마시게 해서 취하게 만드는 거야, 마구마구. 그렇게 하면 다음은 그저 자는 일 뿐이야. 간단하지?"
나는 혼란스런 머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전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의 커튼을 닫고 전등을 끄고 침대에 드러눕자, 지금이라도 나오코가 내 옆으로 기어들어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그 젖무덤의 부드러움과 풍만함이 가슴에 느껴지고, 속삭임이 들려왔으며, 두 손에 그 몸의 윤곽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나오코의 그 작은 세계로 돌아갔다. 나는 초원의 냄새를 맡고, 밤의 빗소리를 들었다. 저 달빛 아래서 보았던 알몸의 나오코를 생각하고,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육체가 노란 비옷으로 감사인 채 새집 청소도 하고, 야채를 가꾸기도 하는 광경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발기한 페니스를 잡고, 나오코를 생각하면서 사정을 했다. 사정을 하고 나니 내 머리 속의 혼란도 조금은 수습된 것 같았으나, 그래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몹시 피곤해서 한없이 졸린 데도 여간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나 창가에 서서, 안마당의 국기 게양대를 잠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깃발이 달려 있지 않은 흰 막대가, 마치 밤의 어둠 속에 나타난 거대한 백골처럼 보였다. 나오코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잠들어 있을 게다. 저 작은 불가사의한 세계의 어둠에 감싸여 푸욱 잠들어 있을 게다. 그녀가 괴로운 꿈을 꾸지 않도록 나는 빌었다.
제 7 장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아미료'에서 돌아온 이튿날인 목요일 오전엔 체육 수업이 있었다. 길이가 50미터인 풀을 몇 차례 나는 왕복했다.
격렬한 운동을 한 덕택에 기분도 조금은 상쾌해지고 식욕도 났다. 식당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은 나는, 자료를 살펴보려고 문학부의 도서실로 걸어가던 차에 미도리와 딱 마주쳤다.
그녀는 작은 몸집에 안경을 낀 여자아이와 함께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자 혼자서 내게로 다가왔다.
"어딜 가요?"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도서실."
"거기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점심 먹으로 가지 않겠어?"
"조금 전에 먹었어."
"어때, 한 번 더 먹어요."
결국 나와 미도리는 부근의 카페로 들어가, 그녀는 카레를 먹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긴소매가 달린 하얀 셔츠 위에 물고기 그림이 아로새겨진, 노란 털실로 짠 조끼를 입고, 금빛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고, 디즈니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맛있다는 듯이 정신없이 카레를 먹고는 물을 세 컵이나 마셔댔다.
"요즘 계속 여기 없었죠?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고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왜, 무슨 볼일이 있었어?"
"무슨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그저 전화를 걸어 보았을 뿐이에요."
"음."
"음, 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죠?"
"뭐 아무것도 아냐. 그저 맞장구를 친 거지. 어때, 요즘엔 화재가 나지 않았나?" 하고 나는 말했다.
"응, 지난번 그거 정말 재미있던데요. 피해는 별로 없으면서도 연기가 잔뜩 피어올라서 리얼리티도 있고요. 난 그런 게 좋아."
미도리는 이렇게 말하고 또 물을 마셨다. 그리고 한숨 돌린 다음,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봐 와타나베, 어떻게 된 거예요? 왠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눈의 초점도 흐리고."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약간 피로할 뿐이야."
"유령이라도 보고 온 듯한 얼굴인데요."
"음."
"와타나베, 오후에 수업 있어요?"
"독일어와 종교학."
"그거 빼먹을 수 없어요?"
"독일어는 무리야. 오늘 테스트가 있거든."
"그게 몇 시에 끝나죠?"
"두시."
"그럼 그 뒤에 시내로 나가 함께 술 마시지 않겠어요?"
"대낮 두 시부터?" 하고 나는 말했다.
"때로는 괜찮지 않아요? 자기 지금 굉장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술이라도 마시면서 기운을 내야 할 것 같아요. 나도 자기와 술 마시면서 기운을 내고 싶으니까. 좋지요?"
"좋아, 그럼 마시러 가자"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두 시에 문학부 안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독일어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주쿠 거리로 나가, 기노쿠니야 출판사 뒤쪽 지하에 있는 DUG에 들어가 보드카 토닉을 두 잔씩 마셨다.
"이따금 난 여기에 와요. 낮에 술을 마셔도 전혀 꺼림칙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요."
"이렇게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구?"
"이따금" 하고 말을 잠시 끊고 그녀는 글라스에 남은 얼음 조각들이 달그락거리도록 흔들었다.
"가끔 삶이 고달 퍼지면 여기 와서 보드카 토닉을 마시곤 해요."
"삶이 고달퍼?"
"때로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내게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이를테면 어떤 일?"
"집안 일, 애인에 관한 일, 생리 불순 따위, 여러 가지요."
"한 잔 더 마실 거야?"
"물론이에요."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 보드카 토닉 두 잔을 더 주문했다.
"지난 일요일에 내게 키스해 줬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지만, 그때 좋았어, 굉장히."
"그랬다니 괜찮군."
"그랬다니 괜찮군." 하고 또 그녀가 내 말을 되풀이했다.
"와타나베는 정말 별난 말투를 쓰는군요."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나는 그때 생각했어. 이게 난생 처음 해보는 남자와의 키스였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만일 내가 인생 순번을 바꿔 놓을 수만 있다면, 그걸 퍼스트 키스로 삼을 거예요, 반드시.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지낼 거예요. 빨래를 널어 말리는 옥상에서, 내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키스를 나눈 와타나베라는 남자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쉰여덟 살이 된 지금은..... 하고 말이에요. 어때,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멋있을 거야" 하고 나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와타나베, 한 번 더 물어보겠는데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아마 세상에 아직 정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쩐지 이곳이 진짜 세계가 아닌 것처럼 여겨져."
그녀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로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 모리슨의 노래에 분명히 그런 게 있었어요."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a stranger."
"피스(peace)" 하고 그녀가 말했다.
"피스" 하고 나도 따라했다.
"나와 함께 우루과이로 가 버리는 게 어때요" 하고 그녀는 계속 한쪽 팔꿈치를 괸 채로 말했다.
"애인이나 가족이나 대학 따위는 모두 버리고 말예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게 멋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난 이따금 그러고 싶어져요, 굉장히. 그러니까 만일 자기가 나를 불시에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다 준다면, 난 자기를 위해 소처럼 튼튼한 아기를 잔뜩 낳아 줄 거야. 그리고 모두들 즐겁게 지내는 거야. 마룻바닥을 뛰어다니면서 말예요."
나는 웃으면서 세 잔째의 보드카 토닉을 주욱 들이켰다.
"소처럼 튼튼한 아기는 아직 그다지 갖고 싶지 않은가 보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굉장히 흥미는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도 싶고."
"괜찮아요, 갖고 싶지 않아도" 하고 그녀는 피스타치오를 먹으면서 말했다.
"나 역시 낮술을 마신 김에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 봤을 뿐이니까요. 모든 걸 내팽개치고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다고 말예요. 어차피 우루과이 같은 델 가 봐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럴지도 몰라."
"어디엘 가나 마찬가질 거야. 여기에 있든 저리로 가든. 세계는 온통 마찬가질 거야. 이 딱딱한 거 줄까요?"
미도리는 내게 껍질이 딱딱한 피스타치오를 건네주었다. 나는 힘들게 그 껍질을 벗겼다.
"하지만 지난 일요일엔 난 정말 마음이 편했어요. 둘이서 옥상으로 올라가 불구경을 하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그렇게 마음이 편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왜냐하면 모두들 내게 여러 가지를 강요하거든요. 얼굴을 마주치기만 하면 이러쿵저러쿵하면서 말예요. 적어도 자기만은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잖아요."
"무엇을 강요할 만큼 미도리를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럼 나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면, 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여러 가지를 강요할 거예요?"
"그럴 가능성은 있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 가지를 강요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육감으로 알 수 있어요. 강요하거나 강요당하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상당한 권위자니까. 자기는 그런 타입이 아냐. 그래서 난 자기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돼요. 알고 있겠지? 세상에는 여러 가지를 강요하거나 강요당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리고 강요했다느니 강요당했다느니 하면서 소란을 떨지요. 그런 걸 좋아하는 거예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일 뿐."
"미도리는 어떠한 것들을 강요하고 또 강요당하고 있지?"
그녀는 얼음 조각을 입에 넣고 잠시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흥미는 있어, 약간."
"나는 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하고 질문했어요. 그건 좀 빗나간 대답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더 알고 싶어, 미도리에 대해"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고개를 돌리고 싶어져도?"
"그렇게 심해?"
"어떤 의미에서는"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한 잔 더 마실래요."
나는 웨이터를 불러 네 잔째의 보드카 토닉을 주문했다. 술이 올 때까지도 그녀는 테이블에 손을 얹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셀로니어스 몽크가 연주하는 허니 서클로즈를 듣고 있었다. 카페에는 우리 외에5, 6명의 손님이 더 있었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커피의 향기로운 냄새가 카페 안 가득 오후의 친밀한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번 일요일에 시간 낼 수 있어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일요일에는 언제나 시간이 있어. 여섯 시부터 시작되는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그럼 이번 일요일에 날 만나 주겠어요?"
"좋아."
"일요일 아침에 자기 기숙사로 갈게요.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괜찮아요?"
"상관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봐, 와타나베. 내가 지금 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알겠어요?"
"글쎄, 짐작도 할 수 없는데."
"넓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드러눕고 싶어요, 우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굉장히 좋은 기분으로, 잔뜩 술에 취한 채 주위에 개똥 따위는 전혀 없고 옆에는 자기가 누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씩 내 옷을 벗기는 거야. 굉장히 부드럽게. 어머니가 어린애의 옷을 벗길 때처럼 살며시."
"음" 하고 나는 말했다.
"난 계속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멍한 상태로 있다가 그만 문득 제정신이 들어 안 돼, 와타나베 하고 외치는 거예요. 난 와타나베를 좋아하지만 내게는 애인이 따로 있으니 이런 짓은 할 수 없어요. 난 그런 건 굳게 지킨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둬요! 하고 말예요. 하지만 자기는 그만 두질 않고....."
"그만 둔다고, 나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환상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이대로 좋은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내게 드러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을. 발기한 것을. 나는 이내 눈을 돌리지만 그래도 흘끗 보고 말아요. 그리고 안 돼 정말 안 돼! 그렇게 크고 딱딱한 건 안 들어가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크지 않아, 보통이야."
"상관없어요, 이건 환상이니까. 그러면 자기는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는 거예요. 그리고 난 그게 가엾어서 위로해 주지요. ‘아유, 가엾어라’, 하고."
"그게 바로 미도리가 지금 하고 싶은 거야?"
"그래요."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실소했다.
보드카 토닉을 다섯 잔씩 마시고 나서야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내가 돈을 내려고 하자 미도리는 내 손을 툭 치면서 밀어내더니, 지갑에서 빳빳한 만 엔짜리 지폐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괜찮아요, 아르바이트한 돈도 있겠다, 또 내가 자기를 불러냈잖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자기가 굳건한 신념이 있는 파시스트여서 여자가 내는 술 따위는 얻어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아."
"게다가 그걸 해주지도 않았고."
"딱딱하고 크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하고 그녀가 되풀이했다.
"딱딱하고 크니까."
그녀가 술에 취해 계단을 헛디딘 탓에, 우리는 하마터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카페 밖으로 나가자, 하늘을 엷게 뒤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거리에는 해질녘의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나와 미도리는 그러한 거리를 얼마 동안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그녀는 나무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지만, 신주쿠에는 공교롭게도 그러한 나무가 없었고, 신주쿠 교엔은 이미 문 닫을 시간이었다.
"유감스러워, 난 나무 오르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와 둘이서 윈도우 쇼핑을 하며 걷고 있으려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자연스럽던 거리의 광경이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도리를 만난 덕분에 이 세계에 약간 정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멈춰 선 채로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눈의 초점도 꽤 확실해진 것 같아요. 나와 어울리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기지요?"
"맞아!"하고 나는 말했다.
다섯 시 반이 되자, 그녀는 식사 준비 때문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나서, 그녀를 신주쿠 역까지 바래다주고 거기서 헤어졌다.
"봐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어요?" 하고 헤어질 무렵 그녀는 또 내게 물었다.
"짐작도 할 수 없어, 미도리가 생각하고 있는 건" 하고 나는 대답했다.
"자기와 둘이서 해적에게 붙들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는 마주 보도록 몸을 밀착시킨 채 밧줄에 꽁꽁 묶이는 거예요."
"왜 그런 짓을 하지?"
"변태적인 해적이라서 그래요."
"미도리가 오히려 더 변태적인 것 같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바다에 집어던질 테니까 그때까지 그 모양으로 실컷 즐기라고 말하면서 배 안의 창고에 버려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실컷 즐겨요. 데굴데굴 구르거나 몸을 비틀거나 하면서."
"그게 미도리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이야?"
"그래요."
"아이고 맙소사" 하고 말하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도리는 일요일 아침 아홉 시 반에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갓 깨어난 참이어서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군가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리면서, "와타나베, 여자가 찾아왔어!" 하고 외치길래 현관으로 내려가 보니, 미도리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짧은 진 스커트를 입고 로비의 의자에 다리를 포개어 앉은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학생들이 모두 그녀의 매끄러운 다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확실히 돋보이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봐"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와타나베,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죠?"
"지금부터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올 테니 15분 즘 기다려 주겠어?" 하고 말했다.
"기다리는 건 좋지만, 아까부터 모두들 내 다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요."
"당연하잖아. 남자 기숙사에 그렇게 짧은 스커트를 입고 오니까 모두들 바라보지."
"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아주 예쁜 속옷을 입고 있으니까. 핑크 색인데 물결 모양의 멋진 레이서로 장식되어 있다고요."
"그런 게 더 나쁘다고"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서둘러 세수를 하고 면도했다. 그리고 푸른 버튼다운 셔츠 위에 회색 모직물의 윗도리를 걸치고 아래로 내려가, 그녀를 기숙사 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봐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거예요?"
미도리는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렇겠지."
"남자는 여자 생각을 하면서 그걸 하는 거예요?"
"그럴 테지" 하고 나는 말했다. "주식 시세나 동사의 활용이나 수에즈 운하 따위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 대체로 여자 생각을 하면서 하지 않을까....."
"수에즈 운하?"
"이를테면 말이야."
"즉 특정한 여자 생각을 하는 거군요?"
"아, 그런 건 미도리 애인에게 물어 보면 되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왜 내가 일요일 아침부터 미도리에게 일일이 그런 걸 설명해야 하지?"
"난,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걸 물어 보면 금방 화를 내거든요. 여자는 그런 걸 일일이 물어 보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야."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난 알고 싶어요. 이건 순수한 호기심이야. 저, 와타나베는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 특정한 여자를 생각해요?"
"생각해, 적어도 난 말이야. 남의 일 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대답했다.
"와타나베는 혹시 나를 생각하면서 한 적은 없어요? 정직하게 대답해줘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한 적 없어, 정말"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왜? 내가 매력적이 아니어서?"
"아니, 너는 매력적이면서 귀엽고, 도발적인 자세가 잘 어울려."
"그럼 왜 나를 생각하지 않아요?"
"우선 첫째로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러한 성적 환상에 말이야. 둘째로는....."
"머리에 떠올릴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그런 셈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는 그럼 면에서도 예의가 바르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자기의 그런 점을 좋아해. 그렇지만 한 번쯤 나를 잠깐 출연시켜 주지 않겠어? 그 성적인 환상인가 망상인가 하는 것에 말예요. 나, 그런데 참가해 보고 싶어. 아는 친구이기 때문에 부탁하는 거예요.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는 부탁 할 수 없으니까. 오늘 밤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에는 나를 좀 생각해 달라고 누구에게나 말할 순 없잖아요. 자기를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탁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떠했는지도 나중에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일을 했다든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진짜로 하는 건 안돼요. 우린 친구니까. 알았지요? 진짜로 하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 무슨 생각을 하든."
"글쎄, 그러한 제약이 딸린 걸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해보지."
"와타나베, 나를 음란하다든지 욕구 불만이라든지 도발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진 말아요. 나는 다만 그러한 일에 굉장히 흥미가 있어서 몹시 알고 싶을 뿐이니까. 난 여자 학교에서 여학생들 사이에서만 자라왔잖아? 그래서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몸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몹시 알고 싶어요. 그것도 여성 잡지에서 다루는 식이 아니라, 말하자면 케이스 스터디로써."
"케이스 스터디라..... 하고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 하거나 하고 싶어 하면, 내 애인은 언짢아하거나 화를 내요. 음란하다고 말하면서 내 머리가 돌았다는 거예요. 펠라티오도 여간해선 못하게 해요 난 그걸 몹시 연구해 보고 싶은데."
"음"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도 펠라티오 하는 거 싫어해?"
"별로 싫어하진 않아."
"그럼 좋아하는 편?"
"좋아하는 편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고.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이니까, 마스터베이션이나 펠라티오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미도리 애인은 우리 대학에 다니나?"
"아니, 다른 대학이에요, 물론.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클럽 활동을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어요. 나는 여학교에 다니고 그는 남자 학교, 흔히 있잖아? 합동 콘서트 따위 말예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 한 뒤의 일이지만, 저, 와타나베?"
"응?"
"정말 한 번이라도 나를 생각해 줘요."
"그렇게 해보지, 다음엔" 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역에서 전철을 타고 오차노미즈까지 갔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주쿠 역에서 갈아 탈 때 역의 스탠드에서 형편없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신문의 잉크를 끓인 듯, 역겨운 맛이 나는 커피를 마셨다.
일요일 아침 전철은, 나들이하려는 가족들이나 커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남학생들이 야구 방망이를 손에 든 채, 전철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철 안에도 짧은 스커트를 입은 몇 명의 여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미도리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미도리는 이따금씩 스커트 자락을 끌어 내렸다. 몇 명의 남자들이 그녀의 다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아무래도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지만, 그년 그런 것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저,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하고 이치가야 부근에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작도 할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제발 전철 안에서는 그 얘길 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난처하니까."
"유감스러운데요. 아주 굉장한 건데, 이번엔" 하고 그녀는 정말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오차노미즈엔 무엇이 있지?"
"따라오기만 해요, 가보면 알 테니."
일요일의 오차노미지는 모의 테스트인지 예비 학교에서의 강습인지를 받으러 가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숄더백의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 그러한 학생들의 잡담 속을 빠져 나갔다.
"와타나베,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요?" 하고 갑자기 미도리가 나에게 질문했다.
"설명 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물어 보겠는데, 그러한 게 일상생활에서 무슨 도움이 되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도움이 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 다기 보다는, 그러한 게 사물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그녀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자기 참 훌륭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걸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 가정법이니 미분이나 화학 기호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죽 무시해 온 거예요, 그런 까다로운 것들은. 내가 살아 온 방식이 잘못된 걸까?"
"무시해 왔다고?"
"그래, 그런 건 없는 것으로 간주해 왔어요. 난 사인이나 코사인도 전혀 몰라요."
"그런데도 용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엘 들어갈 수 있었군" 하고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와타나베는 바보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눈치만 빠르면 아무 것도 몰라도 대학 시험 같은 건 치를 수 있어요. 난 육감으로 알 수 있으니까. 다음 세 가지 중 옳은 것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대뜸 알아내거든."
"나는 너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으니까 어느 정도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익힐 필요가 있지. 까마귀가 나무 구멍에 유리 조각을 저장해 두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글쎄"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떤 종류의 일은 하기 쉬어지겠지."
"이를테면 어떤 일?"
"형이상학적 사고나 몇 나라의 국어를 습득하는 일 따위, 이를테면 말이야."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데요?"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 쓸모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쓸모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쓸모가 있느냐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야. 처음에도 말한 것처럼 말이야."
"그래요" 하고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하고는 내 손을 잡고 언덕길을 계속 내려갔다.
"자기는 어떤 일을 남에게 설명하는 데 아주 능숙해요."
"그런가?"
"그래요. 나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영어의 가정법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영어 선생님조차도 모두들 내가 그러한 질문을 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화를 내거나 바보 취급을 했어요.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런 때에 자기 같은 사람이 나타나 올바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나도 가정법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응"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 자본론 읽어 본 적 있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읽어 봤어. 물론 전부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해할 수 있는 데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데도 있었어. 자본론을 정확히 읽으려면, 먼저 그걸 이해하기 위한 사고 시스템의 습득이 필요해. 물론 총체적으로는 마르크시즘을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방면의 책을 별로 읽어본 적이 없는 대학의 신입생이 자본론을 읽고 이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건 무리가 아닐까?" 하고 나는 말했다.
"저, 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포크송 클럽에 들어갔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엉터리 같은 놈들의 소굴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오싹 소름이 끼치는 일이에요. 거기에 들어갔더니 우선 마르크스를 읽으라고 하더군요.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읽어 오라는 거예요. 포크 송이란 사회와 기본적으로 관련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연설을 하고 나서 말예요.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열심히 마르크스를 읽었어요, 집에 돌아와서. 하지만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없더군요. 가정법 이상으로 말이에요. 겨우 세 페이진가 읽다가 내던져 버렸어요. 그리고 다음 주 모임에 가서, 읽어보았지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완전히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 거예요. 문제의식이 없다느니,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느니 하면서 말예요. 결코 농담이 아니었어요. 나는 단지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응" 하고 나는 대답했다.
"토의라는 건 왜 그렇게 또 지겨운지. 모두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거예요.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그때마다 질문을 했어요. 그 제국주의적 착취란 무슨 뜻입니까? 동인도 회사에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는 산학 협동체 분쇄란, 대학을 나온 다음에도 회사에 취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정색을 하면서 화를 내는 거야. 이런 얘기 믿을 수 있겠어요?"
"믿을 수 있어."
"그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하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미도리는? 녀석들은 고작 이 정도였어요. 물론 난 그다지 머리가 좋지는 않아요. 서민이구요. 하지만 세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게 서민이고, 착취당하고 있는 게 서민이잖아요. 서민이 알지 못하는 말이나 휘둘러대면서 무슨 혁명을 하고, 무슨 놈의 사회변혁을 하겠다는 거야. 나 역시 세상이 좋아지도록 하고 싶어요. 만일 누군가가 정말 착취당하고 있다면 착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그래."
"그때 난 생각했어요. 이들은 모두 엉터리 같은 가짜들이라고 말예요. 적당히 그럴 듯한 말을 지껄여대면서 우쭐해져 가지고, 새로 입학한 여학생을 감탄시키고는 스커트 속에 손을 집어넣는 일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요, 그자들은. 그리고 4학년이 되면 머리를 짧게 깎고 미쓰비시 상사나 TBS, IBM, 후지은행 같은 데에 재빨리 취직해서, 마르크스 따위는 읽어 본 적도 없는 귀여운 신부를 맞아들이고 어린애를 낳으면 제법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 주는 거예요. 산한 협동체 분쇄는 무슨 놈의 산학 협동체 분쇄야.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다른 신입생들도 웃겨요. 모두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는 체 하며 우쭐거리는 거예요. 그러고는 나중에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넌 바보구나, 알지 못하더라도 네, 네, 그렇군요. 하고 말하고 있으면 되잖아 하고. 저, 와타나베 속이 더 울컥울컥 치밀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얘기도 마저 들어주시겠어요?"
"그러지."
"어느 날 우리 모두 야간의 정치 집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여학생들은 모두 각기 밤참용 김밥을 스무 개 씩 만들어 오라는 지시가 내려졌었어요. 농담이 아네요. 이건 완전한 성 차별이었어요. 하지만 항상 소란을 피우는 것도 이상할 거 같아서 나는 잠자코 김밥 스무 개를 만들어 갔지요. 매실 장아찌를 넣고 김으로 말아서요. 그랬더니 나중에 뭐라고 말 한줄 알아요? 미도리의 김밥은 속에 매실 장아찌 밖에 들어있지 않고 반찬도 딸려 있지 않더라는 거예요. 다른 여학생의 김밥 속에는 연어나 명란젓이 들어 있고 달걀부침도 딸려 있더라는 거였죠.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혁명 운운하며 떠들고 있는 자들이 왜 겨우 밤참용 김밥 따위를 가지고 소란을 피우는 걸까, 일일이 속에다 매실 장아찌를 넣고 김으로 말았으면 고급이잖아요. 인도의 어린애들을 생각해 봐요."
나는 웃었다.
"그래, 그 클럽 일은 어떻게 됐어?"
"6월에 그만뒀어요. 화가 울컥 치밀어서. 아무튼 이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엉터리 같은 애들이야. 모두들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걸 남들이 알아챌까 봐 잔뜩 두려워하면서 지내고 있다고요. 그래서 모두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말을 지껄이며, 존 콜트레인을 듣거나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한 척하고 있는 거죠. 그런 게 혁명이에요?"
"글쎄, 나는 실제로 혁명을 목격하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말 할 수가 없군."
"그런 게 혁명이라면, 난 혁명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난 틀림없이 주먹밥에 매실 장아찌밖에 넣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해 버릴 거예요. 자기도 틀림없이 총살당해 버릴 거고. 가정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는 따위의 이유로."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와타나베, 난 알고 있어요. 난 서민이니까. 혁명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던 간에 서민이라는 것은 변변찮은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걸요. 혁명이라는 게 뭐야? 기껏해야 관청의 이름이 바뀔 뿐이잖아요. 하지만 그 아이들은 그러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쓸모없는 말이나 지껄여대고 있는 아이들 말예요. 자기 세무서 직원 본적 있어요?"
"없는데."
"난 여러 번 봤어요. 그들은 집안으로 함부로 들어와서 으시대곤 하죠. 장부가 뭐 이래? 당신들 엉터리로 장사를 하고 있고만. 이게 경비요, 정말? 영수증을 보여줘요, 영수증! 우리는 한쪽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식사 때가 되면 특별히 주문한 초밥을 대접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세금을 내면서 속임수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고요, 정말. 아버진 그러한 분이에요. 옛날 기질이 있는 분이라서. 그런데 세무서에서 나온 직원들은 계속 지근덕거리는 거예요. 이건 수입이 너무 적지 않느냐 해가면서 말예요. 농담이 아니에요. 수입이 적은 건 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일 텐데 말예요. 그러한 소릴 듣고 있으면 난 분해서, 좀 더 부유한 사람한테나 가서 그러한 짓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죠. 만일 혁명이 일어나면 그런 세무서 직원의 태도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해요?"
"매우 의심스러워."
"그럼 난 혁명 따위는 믿지 않겠어요. 나는 애정밖에 믿지 않아요."
"피스" 하고 나는 말했다.
"피스" 하고 그녀도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고 내가 물었다.
"병원.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데, 오늘 하루는 내가 돌보아 드려야 해요. 내 차례니까."
"아버지?"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에 가시지 않았나?"
"거짓말이었어, 그건."
미도리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예전부터 우루과이에 가겠다고 말해 왔지만, 갈 수가 없는 몸이에요. 도쿄 시외에도 제대로 나갈 수 없는데."
"병세는 어때?"
"분명히 말해 시간문제예요."
우리는 한참 동안 잠자코 걸어갔다.
"어머니가 앓던 병이라 잘 알 수 있어요. 뇌종양. 믿을 수 있어요? 불과 2년 전에 어머니가 그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그 뇌종양에 걸리셨어요."
대학 병원 안은 일요일이어서 인지, 문병 온 사람들과 가벼운 증세의 환자들로만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특유의 병원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소독약과 문병용 꽃다발, 소변, 이불 등에서 나는 냄새가 어우러져 병원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고, 간호사가 신발굽 소리를 내며 그 속을 바삐 걸어 다녔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2인용 병실이 문 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누워 있는 모습은 깊은 상처를 입은 작은 동물을 연상시켰다.
그는 옆으로 느른하게 누워 링거 주삿바늘이 꽂힌 왼팔을 축 늘어뜨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위고 몸집이 작은 남자였지만, 앞으로 더 여위고 더 작아질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고, 창백한 팔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그는 반쯤 뜬눈으로 공간의 한 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미도리와 내가 들어서자 그 밝게 충혈된 눈을 움직여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10초쯤 바라보다가 다시 공간의 한 점으로 그 연약한 시선을 옮겼다.
그 눈을 보자, 이 남자는 이제 곧 죽으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생명력이란 걸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저 한 생명의 연약하고 희미한 흔적뿐이었다. 마치 가재도구를 모두 끌어낸 후에 해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낡아빠진 가옥 같은 느낌이었다.
바싹 마른 입술 주위에는 그래도 수염이 잡초처럼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이토록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수염만은 제대로 자라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미도리는 창문 쪽의 침대에 누워 있는 뚱뚱한 중년 남자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상대는 말을 잘 할 수 없는 지 빙긋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두세 번 기침을 하고 나서 머리맡에 놓여 있는 물을 마신 다음, 몸을 겨우 움직여 옆으로 눕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는 전신주와 전선만이 보였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조차 없었다.
"어떠세요, 아버지, 기운은?" 하고 미도리가 아버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마치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어떠세요, 오늘은?"
아버지는 겨우 입술을 움직여서, 좋지 않다고 말했다. 말을 한 다기 보다는, 목구멍 속에 있는 메마른 공기로써 우선 말을 끌어내는 것처럼 들렸다. 머리하고 그는 말했다.
"머리가 아프세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래"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4음절 이상의 말은 잘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죠. 수술을 받은 직후니까 아프시겠죠. 괴롭지만 좀 더 참으세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이 사람은 제 친구인 와타나베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절반쯤 입술을 벌렸다간 곧 닫았다.
"거기에 앉아요." 하고 미도리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둥근 비닐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시키는 대로 거기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물주전자에서 물을 조금 따라 아버지에게 먹이고, 과일이나 프루츠 젤리를 먹고 싶지 않은가를 물었다. 안 먹겠다고 그녀의 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조금 이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미도리가 말하자, 먹었다고 그는 대답했다.
침대의 머리맡에는 작은 테이블 모양의 찬장 같은 게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물주전자와 컵, 쟁반, 작은 시계 등 일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미도리는 그 밑에 놓여 있는 커다란 자루 속에서 갈아입을 잠옷이나 속옷 등을 꺼내어 정리한 다음, 문 옆에 있는 사물함 속에 집어넣었다. 자루의 바닥 쪽에는 환자가 먹을 음식이 들어 있었다. 그레이프 프루츠 두 개와 프루츠 젤리, 그리고 오이 세 개.
"오이?" 하고 미도리가 깜짝 놀라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또 오이 같은 게 여기 있을까? 정말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짐작도 할 수 없다고요. 이러이러한 것들을 사다 달라고 전화로 일러두었는데도. 난 오이를 사다 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키위라고 한 걸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참견해 보았다.
미도리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확실히 나는 키위라고 말했어요. 그래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환자가 왜 오이를 날로 먹겠어요? 아버지 오이 드시고 싶으세요?"
"안 먹는다"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미도리는 머리맡에 앉아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였다. 텔레비전이 잘 나오지 않아 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느니, 다카이도에 있는 아줌마가 2, 3일 사이에 한 번 문병을 오겠다고 말했다느니, 약국의 미야와키 씨가 자전거를 타다가 굴로 떨어졌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응, 응, 하고 대답한 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잡수고 싶지 않으세요, 아버지?"
"먹고 싶지 않아" 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대답했다.
"와타나베, 그레이프 프루츠라도 먹을래요?"
"아니" 하고 나도 대답했다.
잠시 후에 미도리는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휴게실에는 파자마 차림의 환자 세 명이 역시 담배를 피우면서 정치 토론회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저, 저기 목발을 갖고 있는 아저씨 있잖아, 내 다리를 아까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있어요. 안경을 끼고 푸른 파자마를 입은 아저씨 말예요" 하고 그녀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야 바라볼 밖에. 그런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누구나 다 바라본다고."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모두들 지루할 테니까, 때로는 젊은 아가씨의 다리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고요. 흥분해서 회복이 빨라지지 않을까요?"
"그 반대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곧바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긴데"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나쁜 분은 아니에요. 이따금 심한 소리를 해서 화가 울컥 치밀긴 하지만, 적어도 근본은 정직한 분이고,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었어요. 그리고 당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신 분이에요. 성격도 좀 약한 데가 있고 장사하는 데도 서투르고 덕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거짓말만 하면서 요령껏 돌아다니고 있는 주위의 약아빠진 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분이셨어요. 나도 말을 꺼내면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어서 노상 아버지와 다투긴 했지만, 아무튼 나쁜 분은 아니라고요."
미도리는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기라도 하듯이 내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가져갔다. 내 손바닥의 절반은 스커트 위에, 나머지 절반은 허벅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와타나베, 이런 곳이라 미안한 부탁이지만, 좀 더 나하고 함께 있어 주겠어요?"
"다섯 시까지는 괜찮으니까 같이 있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와 함께 있는 게 즐겁기도 하고, 또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일요일엔 주로 무슨 일을 해요?"
"빨래. 그리고 다리미질."
"와타나베, 내게 그 여자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겠죠? 사귀고 있는 사람 말예요."
"그래.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복잡하고 또 잘 설명할 수 도 없을 거 같고."
"괜찮아요, 설명하지 않아도"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고 있는 걸 조금 얘기해 봐도 되겠어요?"
"좋아. 미도리가 상상하고 있는 건 뭔가 재미있을 것 같아. 꼭 들어보고 싶은데."
"나는 와타나베가 사귀고 있는 상대가 유부녀라고 생각해요."
"그래?"
"서른 두세 살쯤 되는 부유한 집의 예쁜 부인요. 모피 코트나 찰스 주르당의 구두, 실크 속옷을 입는 타입인 데다 굉장히 섹스에 굶주려 있어요. 그리고 지독하게 역겨운 짓을 하죠. 평일에는 대낮 무렵부터 와타나베와 둘이서 탐욕스레 섹스에 열중해요. 하지만 일요일에는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와타나베와 만날 수 없는 거야. 어때요, 내 말 틀려요?"
"굉장히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틀림없이 몸을 결박하고 눈을 가린 다음,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실컷 빨게 하는 거야. 그리고 이상한 걸 집어넣게 하거나, 곡예사 같은 흉내를 내게 하면서, 그러한 장면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곤 하는 거죠."
"재미있겠는데."
"섹스에 굉장히 굶주려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해보는 거예요. 그녀는 매일 그런 궁리만 하고 있다고. 남아도는 시간이 많으니까. 이번에 와타나베가 오면 이런 걸 해야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침대에 들어가면 탐욕스레 여러 체위로 바꿔 가며 세 번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와타나베에게 이렇게 말하죠. 어때 내 몸 굉장하지? 넌 이제 젊은 아가씨한테는 만족 할 수 없어. 젊은 아가씨가 이런 걸 제대로 해 줄 수 있겠어? 어때? 절정을 느껴? 하지만 아직 사정을 하면 안 돼, 하고."
"미도리는 포르노 영화를 너무 많이 보고 있는 모양이야"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그럴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난 포르노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다음에 함께 보러 가지 않겠어요?"
"좋아, 미도리가 시간이 나면 함께 가자고."
"정말? 굉장히 재미있어요. SM(Sadism and Masochism)을 보러 가요. 채찍질을 하거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여자에게 오줌을 싸게 한다고. 난 그런 종류를 굉장히 좋아해요."
"좋아."
"저, 와타나베, 포르노 영화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요?"
"글쎄 모르겠는데."
"섹스 장면이 나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그 꿀꺽 하는 소리를 굉장히 좋아해요. 몹시 귀여워."
병실로 돌아가자, 미도리는 또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고, 아버지는 그래, 응, 하며 맞장구를 치거나 아니면 아무 말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열한 시 경에 옆에 누워 있는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남편의 잠옷을 갈아입히고, 과일 껍질을 벗겨 주기고 했다. 갸름한 얼굴의 호탕하게 보이는 부인이었는데, 미도리와 둘이서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였다.
간호사가 들어와 링거 주사용 병을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는, 미도리와 그 부인과 이야기를 잠깐 나눈 후 곧 돌아갔다. 그 동안 나는 허락 없이 방안을 멍하니 둘러보거나 창밖의 전깃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참새가 날아와 전선에 앉았다. 미도리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땀을 닦아주고 가래를 받아 주고, 옆쪽 부인이나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거나, 내게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링거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열한 시 반에는 의사의 회진이 있기 때문에, 나와 미도리는 복도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가 나오자 미도리는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됐고 통증이 진정되도록 조치해 두었으니까" 하고 의사는 말했다. "수술 결과는 앞으로 2, 3일이 경과해야만 알 수 있어요. 잘 되면 좋은 것이고, 잘 안 되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또, 수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건 그때 가봐야 할지" 하고 의사는 말했다. "오늘은 꽤나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군."
"멋있죠?"
"하지만 계단을 올라갈 때엔 어떡하지. 그걸?" 하고 의사가 질문했다.
"그냥 놔둬요. 다 보여 주죠." 하고 미도리가 말하자, 뒤에 있는 간호사가 빙긋 웃었다.
"아가씨도 조만 간에 한 번 입원해서 머리를 열어 보고 진찰 좀 해봐야겠는 걸"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이 병원 안에서는 되도록 엘리베이터를 사용해 줘요. 더 이상 환자가 불어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요즘엔 그렇잖아도 바빠요."
회진이 끝나고 나자 이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간호사가 손수레로 식사를 실어와 각 병실에 날라다 주었다.
미도리 아버지의 식사는 포타즈 수프와 프루츠, 조려서 가시를 제거한 연한 생선, 야채를 으깨어 젤리처럼 만든 것 등이었다. 미도리는 아버지를 반듯이 눕게 하고, 아래쪽의 핸들을 돌려 침대를 일으켜 세워놓고는, 아버지에게 수프를 떠 먹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 여섯 번 받아먹고는 도리질하면서 그만, 하고 말했다.
"더 잡수셔야 해요 아버지"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아버지는 나중에, 하고 말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기운지 나지 않는다고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소변은 아직 안 보셔도 돼요?"
"음" 하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와타나베, 식사하러 가지 않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좋아" 하고 나는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식당은 의사나 간호사, 문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지하의 휑뎅그렁한 홀에 의자와 테이블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모두들 식사를 하면서 제각기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 아마 질병에 대한 이야기겠지만 - 그 이야기 소리가 마치 지하도 속에서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그러한 소리들을 압도하듯이 의사나 간호사를 불러내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내가 자리를 잡는 동안에, 미도리가 2인분의 정식을 알루미늄 쟁반에 담아 왔다. 크림 크로켓과 포테이토 샐러드, 양배추를 채 썰어 하얀 플라스틱 식기에 각기 담겨져 있었다. 나는 절반쯤 먹고 나머지는 남겼다. 그러나 그녀는 맛있게도 모두 먹어 치웠다.
"와타나베,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가 봐" 하고 미도리가 더운 엽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응, 별로."
"병원이라서 그래요" 하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그래요. 냄새나 소리, 탁한 공기, 환자의 얼굴, 긴장감, 초조함, 실망, 고통, 피로, 이러한 것들 때문이에요. 이러한 것들이 억눌러서 식욕이 나지 않게 만들지만 익숙해지면 이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요. 그리고 밥을 든든히 먹어 두지 않으면 환자를 간호할 수도 없고. 정말이지,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까지 네 분을 간호해 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서 제때 식사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먹을 수 있을 때에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돼요."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친척 분들이 문병을 오면 여기서 함께 식사를 해요. 그러면 모두들 와타나베처럼 절반쯤 남기죠. 그래서 내가 모두 먹어 버리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아. 난 가슴이 답답해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는데 말이야. 하고 말해요. 하지만 간호를 하고 있는 건 바로 저예요. 다 웃기는 소리죠. 다름 사람은 이따금 찾아와 동정만 하다 갈 뿐, 대소변을 받아내고, 가래를 받고, 몸을 닦아주는 건 저라고요. 동정만으로 대소변을 받는 일이 해결 된다면 난 남들의 50배 정도는 동정할 거예요. 그런데 네가 밥을 다 먹으면 모두들 나를 비난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다는 거예요. 모두들 내가 무슨 수레라도 끌고 있는 당나귀 정도로 여겨지나 봐요. 나이도 지긋한 사람들이 왜 모두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을까? 입으로야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요. 중요한 건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 에요. 나라고 뭐 마음의 상처를 받지 말란 법 있어요? 나도 기진맥진할 때도 있고, 마냥 울고 싶을 때도 있어요. 쾌유될 가망도 없는데 의사들이 달려들어 머리에 메스를 대고 만지작거리는 그러한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 할 때마다 악화되어 머리가 점점 이상해져 가는 광경을 줄
곧 목격하고 있어 봐요, 견딜 수가 없지요. 게다가 저축해 둔 돈은 점점 줄어들어 가지, 더구나 앞으로 대학에 3년 반이나 더 다닐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언니도 이러한 상태로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잖아요.
"미도리는 일주일에 며칠쯤 여기에 와 있지?" 하고 나는 나직하게 물어 보았다.
"나흘쯤"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여기선 일단 완전 간호를 해주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 간호사만으로는 모두 감당할 수가 없어요. 간호사들은 정말 잘 해주고 있지만 그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데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가족이 돌보지 않을 수 없어요. 어느 정도는 말이에요. 언니는 가게 일을 봐야 하니까, 수업을 받으면서 틈틈이 내가 와 봐야 해요. 언니가 그래도 일주일에 사흘은 와보고, 내가 나흘 정도 에요. 그리고 그러한 틈을 이용해서 우린 데이트를 하고 있는 거라고요. 너무 빡빡한 스케줄이죠."
"그렇게 분주한데, 왜 나를 자주 만나지?"
"와타나베와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 하고 미도리는 플라스틱으로 된 빈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두어 시간쯤 혼자서 바깥공기도 쐴 겸 이 부근을 산책하고 와"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잠시 아버지를 돌봐 드리고 있을 테니까."
"왜?"
"좀 병원을 벗어나서, 혼자 한가로이 있다가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누구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머리를 텅 비울 수 있게 말이야."
그녀는 잠깐 생각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괜찮을까?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대충 알 만해. 링거를 체크하고 땀은 닦아주고, 가래를 받고, 요강은 침대 밑에 놓여 있고, 배가 고프시다면 점심 식사를 먹여 드리고 그 밖에 알 수 없는 건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만큼 알고 있으면 너무나 충분해요" 하고 미도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만 아버지가 머리가 좀 이상해지기 시작한 상태니까 이따금 이상한 소리를 하실 거예요, 엉뚱한 소리 말예요. 그런 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했다.
병실로 돌아와서 미도리는 아버지에게 자신은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그 동안 이 사람이 돌보아 드릴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혹은 그녀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반듯이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깜박이지 않으면, 죽어 있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눈은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붉게 충혈 되어 있고, 깊이 호흡을 하면 코가 약간 벌렁거렸다. 그는 이미 움쭉도 않은 채 미도리가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그 혼탁한 의식의 밑바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도리가 나가 버린 후에 나는 그에게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결국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자 그는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나는 머리맡의 의자에 앉아, 그가 이대로 죽어 버리지 않도록 기원하면서, 코가 이따금 벌렁거리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옆에서 시중들고 있을 때에 이 남자가 숨을 거둬 버리면, 정말 묘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남자를 조금 전에 처음으로 만났을 뿐이고, 이 남자와 나를 결부시키고 있는 건 미도리뿐이며, 그녀와 나 역시도 그저 연극사2 강의를 함께 받고 있는 사이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죽어가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귀를 얼굴 가까이 가져가면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옆쪽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미도리의 애인인줄 알았는지, 내게 쭉 미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아가씨는 정말 좋은 아가씨예요" 하고 부인이 말했다.
"아버지를 썩 잘 돌봐 주고 있죠, 친절하고, 유순하며, 민감하고 다부진 데다 얼굴도 예뻐요. 그 아가씨를 소중히 해야 해요. 놓치지 말아요. 그런 아가씨는 좀처럼 없으니까."
"소중히 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우리 집에는 스물한 살 난 딸과 열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지만 병원엔 오지도 않아요. 휴가 때는 서핑이니 데이트니 하면서 어디론가 놀러가 버리고요. 용돈이나 많이 얻어내면 그만이지요."
한 시 반이 되자 부인은 잠시 물건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며 병실을 나갔다. 환자는 둘 다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방안에 환히 비쳐 들고 있어서, 나도 둥근 의자 위에 앉아 그만 졸음에 빠질 것만 같았다.
창가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꽃병에는 희고 노란 국화꽃이 꽂혀 있어서, 지금이 가을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병실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점심으로 나온 생선 조림의 달콤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여전히 구두 굽 소리를 내면서 복도를 돌아다니며,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녀들은 이따금 병실로 찾아와, 환자가 둘 다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내게 빙긋이 미소 짓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읽을 만한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병실에는 책이나 잡지 신문 같은 것도 없었다. 달력이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오코의 일을 생각했다. 머리핀 밖에 꽂지 않은 나오코의 나체를 생각했다. 잘룩한 허리와 그늘진 음모를 생각했다. 왜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나체가 되었을까? 그때 나오코는 몽유 상태에 빠져 있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시간이 경과하여 그 작은 세계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그날 밤의 사건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환상인지의 여부를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그러한 듯한 느낌이 들고,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환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환상이라고 보기에는 세밀한 부분까지 너무 뚜렷하게 기억났고, 정말로 있었던 일로 보기에는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나오코의 몸이나 달빛마저도.
미도리의 아버지가 갑자기 깨어나 기침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나는 화장지로 가래를 받아 주고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물드시겠어요?" 하고 내가 묻자 그는 4밀리쯤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물병으로 조금씩 천천히 먹여 주자, 마른 입술이 떨리면서 목줄기가 약간씩 움직였다. 그는 물병 속의 미지근한 물을 모두 마셨다.
"더 드시겠어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해서 나는 귀를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됐어" 하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메마르고 더 작아져 있었다.
"무엇 좀 드시겠어요? 배가 고프시죠?" 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또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도리가 했던 것처럼 핸들을 돌려 침대를 일으켜 세우고, 야채 젤리와 생선 조림을 번갈아 가며 스푼으로 한 입씩 떠 먹였다.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절반쯤을 먹고 나서, 이제 됐다는 듯이 그는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많이 움직이면 아픈지,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과일도 드시겠냐고 묻자, 그는 안 먹는다고 말했다. 나는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고, 침대를 수평으로 되돌려 놓고는 식기를 복도에 내 놓았다.
"맛있었어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맛없어" 하고 그는 말했다.
"네, 확실히 별로 맛있는 음식은 아니죠."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듯한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어쩐지 미도리와 있을 때보다는 나와 둘이서 있는 걸 더 편하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다면 나로선 그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깥 날씨가 굉장히 좋아요" 하고 나는 둥근 의자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포개며 말했다.
"가을에다 일요일이고 날씨도 좋아서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빕니다. 이러한 날에는 이렇게 방안에 편안히 있는 게 제일 좋지요. 피로해지지도 않고요. 사람들로 붐비는 델 가봐야 피곤하기만 하고 공기도 나쁘니까요. 저는 일요일에는 대게 빨래를 합니다. 아침에 빨아서 기숙사 옥상에 널어 말리고, 해가 지기 전에 거둬들여 열심히 다리미질을 하지요. 전 다리미질하는 일을 그리 싫어하진 않습니다. 구겨진 게 반듯하게 펴지는 게 정말 좋으니까요. 저는 다리미질을 비교적 잘합니다. 처음에는 물론 잘하지 못했습니다. 주름투성이가 되곤 했지요. 하지만
1개월쯤 하는 동안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빨래하고 다리미질하는 날이 된 거예요. 오늘은 못했지만요. 유감입니다. 빨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니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도 될 테니까요. 별로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일요일이라도 그 밖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편이죠. 내일 아침에 빨래를 해서 널어 두고, 10시에 강의를 들을 겁니다. 그 강의는 미도리와 함께 듣고 있지요. 연극사2 인데, 지금은 에우리피데스를 다루고 있습니다. 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십니까? 옛 그리스인인데,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비극의 빅 스리라고 불리고 있어요. 마지막에는 마케도니아에서 개에 물려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견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에우리피데스죠. 저는 소포클레스를 좋아합니다만, 이건 취향의 문제니까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연극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엉망으로 혼란에 빠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점입니다. 아시겠어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각기 제 나름의 사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또 모두들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마는 거죠. 그건 그래요. 모든 사람이 정의가 통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카오스가 닥쳐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또 실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예요. 너는 저리로 가라, 너는 이리로 와라, 너는 저자와 손을 잡아라, 너는 거기서 잠시 가만히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개인 같은 거죠. 그리하여 모든 일이 제대로 해결됩니다. 이걸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르고 있어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는 노상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잘라지고 있어요.
그러나 만일 현실 세계에 이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일은 편할 겁니다. 곤란하게 됐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됐다고 생각되면, 하느님이 위로부터 스르르 내려와서 모두 처리해 줄 테니까요. 정말 편할 겁니다. 아무튼 이것이 연극사2 입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대체로 이러한 것을 배우고 있지요."
내가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 미도리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그가 약간이나마 이해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그 눈을 보고는 판단할 수 없었다.
"피스"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 만큼 떠들고 나자 나는 몹시 배가 고파졌다. 아침을 거의 안 먹은 데다 점심도 반이나 남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후회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먹을 게 뭐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뒤져보았지만, 김이 든 통과 빅스 사탕, 그리고 간장이 있을 뿐이었다. 종이 봉지에는 오이와 그레이프 프루츠가 있었다.
"배가 고픈데요, 오이를 먹어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실에서 오이 세 개를 씻어 왔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맛있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간단하고, 신선하고, 생명의 내음이 물씬 납니다, 좋은 오인데요. 키위보다는 훨씬 좋은 음식인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를 먹어치우고 두 개째에 손을 댔다. 아작아작하는 상쾌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오이를 송두리째 두 개를 먹고 나서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가스풍로에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 마셨다.
"물이나 주스를 드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오이"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세요. 김을 말아 드릴까요?"
"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침대를 올려 세우고, 과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오이에가 김을 만 다음, 간장을 찍고, 이쑤시개를 꽂아서 그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거의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씹은 후에 삼켰다.
"어떠세요? 맛이 좋지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맛있어" 하고 그는 말했다.
먹는 것이 맛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결국 그는 오이 하나를 다 먹었다. 오이를 먹고 나자 물을 원했기에 나는 또 물을 마시게 해 주었다. 물을 마시고 조금 있으려니 소변을 보고 싶다고 해서, 나는 침대 밑에서 병을 꺼내 페니스 끝에 대 주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버리고 병을 물로 씻었다. 그리고 병실로 돌아와 먹다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기분이 어떠세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조금" 하고 그가 말했다. "머리가."
"머리가 좀 아프세요?"
그렇다는 듯이 그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수술 뒤니까 그럴 겁니다. 전 수술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요."
"차표" 하고 그가 말했다.
"차표? 무슨 차표 말입니까?"
"미도리. 차표."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부탁해, 하고 말했다. 내게 부탁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내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에노, 미도리" 하고 그가 말했다.
"우에노 역 말입니까?"
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표, 미도리, 부탁, 우에노 역, 하고 나는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의미는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의식이 혼란해져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오히려 눈망울은 좀 전에 비해 꽤 뚜렷해진 것 같았다.
그는 링거 주삿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쪽의 팔을 들어 내게로 내밀었다. 그러기에 퍽 힘이 드는 듯, 손을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는 힘없이 내 손을 되잡으며 부탁해, 하고 되풀이했다.
"차표도 미도리도 제가 잘 할 테니까 염려 마세요." 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손을 떨어뜨리고 맥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병실 밖으로 나와 물을 끓이고 또 차를 마셨다. 그리고 내가 이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작은 몸집의 사나이에게 호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걸 깨달았다.
조금 뒤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그리고 괜찮았어요? 하고 나에게 물었다. "네, 별일 없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의 남편도 쿨쿨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미도리는 세 시가 지나서 돌아왔다.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자기가 일러준 대로 혼자서 아무 말도 안하고, 머릿속을 텅 비운 채로."
"그래, 어땠어?"
"고마워요. 한결 개운해 진 것 같아요. 아직도 조금은 피곤하지만 아까에 비하면 몸이 아주 가벼워졌어요. 아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육신은 몹시 피곤해 있었나 봐요."
미도리의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가지고 휴게실에 가서 마셨다.
그리고 나는 미도리에게 그녀가 없는 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보고했다. 푹 한숨 자고 일어나 먹다 남은 점심의 절반을 먹고, 내가 오이를 먹는 것을 보더니 먹고 싶다면서 하나를 먹고, 오줌을 누고 또 잠이 들었다고.
"자기 참 굉장해요" 하고 미도리는 감탄한 듯 말했다.
"아무것도 안 드셔서 다들 애를 먹고 있었는데, 오이까지 드시게 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정말."
"잘은 모르지만 내가 맛있게 먹었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신나하며 말했다.
"아니면 자기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 같은 게 있는지도 몰라요."
"설마" 하고 말하며 나는 웃었다. "그 반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편이야."
"우리 아버지 어떻게 생각해?"
"난 좋아. 별로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누어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좋으신 분인 것 같아."
"말썽은 없었어요?"
"아니, 전혀."
"하지만, 일주일 전엔 정말 지독했다고요" 하고 미도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좀 머리가 이상해져서 큰 소동이 있었어요. 내게 컵을 다 내던지면서, 미친놈 너 같은 건 주거 버려! 하고 고함을 지르지 뭐예요. 이 병은 때때로 그래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때는 턱없이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어머니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날 보고 뭐랬는지 알아요? 넌 내 딸이 아니야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다고 그랬어요. 난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런 게 이 병의 특징이에요. 뭔가가 뇌를 압박해서 사람을 짜증스럽게 만들고는, 있는 일 없는 일 마구 지껄이게 하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길 들으면 속이 상해요, 아무래도. 이렇게 열심히 돌봐 드리고 있는데 왜 그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나 해서 정이 뚝 떨어져요."
"그 기분 알 만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차표? 우에노 역?"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일까?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부탁해, 미도리, 라고도 하셨어."
"그건 나를 부탁한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혹은 내게 우에노 역에 가서 전철 표를 사 가지고 와 달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든 그 네 낱말 순번이 뒤죽박죽이어서 통 알아듣질 못했어. 우에노 역하면 뭔가 생각나는 게 없어?"
"우에노 역....." 하고 말하고서 미도리는 생각에 잠기었다.
"우에노 역하면 생각나는 건 내가 두 번 가출했던 일이에요. 국민학교 3학년 때와 5학년 때. 두 번 다 우에노에서 전철을 타고 후쿠시마까지 갔었어요. 계산대에서 돈을 꺼내 갖고. 무엇 때문인지 화가 나서 한 일이에요. 후쿠시마엔 고모네 집이 있었는데, 난 그 고모를 비교적 좋아했기 때문에 거기로 갔던 거죠. 그러면 아버지가 찾아와서 날 데리고 돌아가곤 했어요. 후쿠시마까지 찾아와서. 아버지와 전철을 타고 도시락을 사먹으며 우에노 역까지 돌아왔어요. 그럴 때 우리 아버진 심하게 더듬거리긴 했지만 나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관동대지진 때의 이야기라든가 전쟁 때에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내가 태어날 무렵의 이야기 같은 것 등등, 평소에는 하지 않던 그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와 내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눈 것은 아마 그때뿐이었던 것 같아요. 자기 이런 이야기 믿을 수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관동대지진 때 도쿄 한복판에 있었으면서도 지진이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설마" 하고 나는 아연해져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때 아버진 자전거에 리어커를 달고 고이시가와 부근을 달리고 있었는데, 글쎄 아무것도 몰랐대요. 집에 돌아와 보니 사방에 기왓장이 떨어져 있고, 가족들은 기둥을 부여잡고 달달 떨고 있더라나요. 그래서 아버진 영문을 몰라 뭘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하고 물었대요. 그게 아버지의 관동대지진 때의 추억담이에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웃었다.
"아버지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란 모두가 그랬어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거예요 모두가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지난 오륙십 년 동안 일본엔 하찮은 사건들밖에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에요. 2.26 사건이든 태평양 전쟁이든,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식이죠. 우습지요? 후쿠시마에서 우에노로 돌아오는 동안에. 그런 이야기를 더듬더듬 해 주고는 마지막으로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미도리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어린 마음에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우에노 역의 추억담?"
"그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자기는 가출해 본적 있어요?"
"없어."
"어째서요?"
"생각을 안 해 본 거야. 가출 같은 건."
"자긴 참 이상해요" 하고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감탄했다.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떻든 아버지는 자기한테 날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그럼요. 난 그걸 잘 알 수가 있어요, 직감으로. 그런데 자긴 뭐라고 대답했어요?"
"잘 모르겠으니까 아무튼 걱정 말아요, 잘 될 겁니다. 미도리도 차표도 잘 알아서 할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럼, 우리 아버지에게 그렇게 약속한 거군요? 날 돌봐 준다고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나는 당황해서 변명을 했다. "무엇이 무엇인지 그땐 잘 몰라서....."
"걱정 마, 농담이니까. 좀 놀려준 것뿐이에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자긴 그럴 때가 가장 사랑스러워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미도리와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아직도 푹 잠들어 있었다. 귀를 갖다 대니까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오후 해가 기울어 감에 따라, 창밖의 햇살은 가을다운 부드럽고 조용한 빛깔로 바뀌어 갔다. 새들이 떼 지어 와서 전선에 앉았다간 어디론가 날아갔다. 우리는 방 한 귀퉁이에 나란히 앉아 작은 소리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내 손금을 보더니 105세 까지 살겠고, 세 번 결혼하며,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예언했다. 과히 나쁘지 않은 인생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네 시가 넘어서 아버지가 눈을 뜨자 미도리는 머리맡에 앉아서 땀도 닦아주고, 물도 먹이고, 두통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와서 열을 재고, 소변 횟수를 점검하고, 링거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나는 휴게실의 소파에 앉아 잠시 텔레비전에서 하는 축구 중계를 보았다.
"슬슬 가봐야겠어" 하고 다섯 시에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도리 아버지에게, 지금부터 아르바이트를 가야 됩니다, 하고 말했다.
"여섯 시에서 열시 반까지 신주쿠의 가게에서 레코드를 파는 일이거든요."
그는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 표현은 잘 못하지만,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하고 현관로비에서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럴 만한 일 한 게 없어"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도움이 된다면 다음 주에 또 올께. 너의 아버지도 다시 한 번 뵙고 싶고."
"정말?"
"기숙사에 있어 봐야 대수로운 일도 없고, 여길 오면 오이도 먹을 수 있잖아."
미도리는 팔짱을 낀 채, 구두 뒤축으로 리놀륨 바닥을 통통 차고 있었다.
"또 한 번 둘이서 술 마시러 가고 싶은데....."하고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포르노 영화는?"
"포르노를 보고 술을 마셔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둘이서 지저분한 이야기를 잔뜩 하는 거예요."
"난 안했어, 네가 했지" 하고 나는 항의했다.
"어느 쪽이든 좋아요. 어떻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잔뜩 마시고 곤드레가 돼 가지고, 둘이서 끌어안고 자는 거예요."
"그 다음은 대체로 상상이 돼"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널 원하면 넌 거부하겠지?"
"흐응" 하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처럼 아침에 기숙사로 데리러 와, 다음 주 일요일에 함께 이쪽으로 오게."
"좀 더 긴 스커트를 입고?"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 다음 주 일요일에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도리의 부친이 금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여섯 시 반에 미도리가 전화로 그걸 알려 왔다.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버저가 울려, 나는 파자마만 걸친 채 로비로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
차가운 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좀 전에 돌아가셨어요." 하고 미도리가 작고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내가 도울 게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우린 장례식에 익숙해 있어요. 그저 자기한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미도리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장례식엔 오지 마세요. 나, 그런 거 싫어하니까. 그런 데서 자기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포르노 영화를 구경 시켜 줄 거예요?"
"물론."
"지독하게 지저분한 것으로."
"알았어. 물색해 둘게, 그런 것으로."
"그럼 내가 다시 연락할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 뒤 일주일 동안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강의실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올 적마다 내게 무슨 메모라도 없나 하고 신경을 쓰고 찾아보았지만, 내게 걸려온 전화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나는 어느 날 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도리를 떠올리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잘 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도중에 나오코로 바꿔 보았지만, 나오코의 이미지도 이번에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쩐지 바보스런 기분이 되어 집어치우고 말았다. 결국 위스키로 마음을 달랜 후 이를 닦고 잤다.
일요일 아침,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편지에다 미도리 부친의 이야기를 썼다.
나는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하는 여학생 부친의 병문안을 갔다가 오이를 먹었다. 그랬더니 그도 그걸 먹고 싶어 해서 드렸더니 아작아작 베어 드셨다. 하지만 결국 5일 뒤의 아침에 세상을 떴다.
나는 그가 아작아작 오이를 씹고 있던 소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작고도 묘한 추억들을 뒤에 남기고 가는 모양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너와 레이코 여사와 새집을 생각한다. 공작새나 비둘기, 앵무새와 칠면조, 그리고 토끼 생각을. 또한 비 내리는 아침에 너와 거기 사람들이 입고 있던, 모자가 달린 노란 비옷도 기억하고 있다.
따뜻한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하다 보면 참으로 기분이 흐뭇해진다. 마치 내 곁에서, 네가 새우등을 한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정말이라면 얼마나 근사한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때때로 지독히 외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대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네가 메일 아침 새들을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내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36회 정도 빠득빠득 태엽을 감는다. 너를 만날 수 없어 괴롭긴 하지만, 그나마 네가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 도쿄에서의 생활을 그럭저럭 견디게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속에서 널 생각함으로써, 자, 태엽을 감고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살자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요즘 자주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 아마 태엽을 감으면서 불쑥불쑥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다. 빨래를 끝내고 지금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를 다 쓰고는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버리면, 저녁 때가지 아무런 할 일이 없다. 일요일엔 공부도 하지 않는다. 나는 평일의 강의 시간 짬짬이 도서실에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일요일이라고 해서 달리 공부할 것도 없다.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그리고 고독하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네가 도쿄에 있었을 무렵의 일요일에 너와 둘이서 거닐었던 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볼 때도 있다. 네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도 매우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일요일 오후엔 나는 정말로 여러 가지 기억들을 되살리곤 한다.
레이코 여사에게도 안부 전해 주기 바란다. 밤이 되면 그녀의 기타 소리가 한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는 편지를 다 써서, 2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우체통에 넣었다. 그리곤 동네 제과점에서 계란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들고, 공원 벤치에 가서 그걸로 점심을 대신했다.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하늘은 점점 푸르고 드높아져, 언뜻 우러러보니 비행기가 남기고 간 구름이 전철의 궤도처럼 두 줄기 평행선을 긋고 서쪽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내 가까이로 굴러 온 소프트볼을 던져 주니까 아이들이 모자를 벗어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 야구가 그렇듯 포볼과 도루가 많은 게임이었다.
오후가 되자 나는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고,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되면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도리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부친은 정말로 나에게 미도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물론 그가 정말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그는 어쩌면 나를 다른 누구와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는 찬비 내리는 금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 할 방법은 없게 되었다. 아마도 숨을 거둘 때의 그는 한층 더 작게 오므라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리고 소각로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그가 그 뒤에 남긴 것이란 우중충한 상점가에 있는 구석진 책방과 두 명의 - 적어도 그 중의 하나는 약간 별스러운 - 딸뿐이었다. 그의 인생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병원의 침대 위에서 절개되어 혼탁해진 머리를 안고, 도대체 어떠한 생각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미도리 부친의 일을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차츰 처량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둘러 옥상의 빨래를 거둬들이고 신주쿠로 나가 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붐비는 일요일의 거리는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나는 통근 전철처럼 혼잡한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들고, 가급적 소리가 클 듯싶은 재즈 다방으로 찾아 들어가 오네트 콜만 이라든가 베드 파웰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진하나 맛이 없는 커피를 마셨고, 방금 산 책을 읽었다.
다섯 시 반에 나는 책을 덮고 다방을 나와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일요일을 앞으로 몇 십번, 몇 백번 겪게 될 것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일요일에는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제 8 장 하지만 쥐는 연애를 하지 않아요
그 주중에 나는 유리 끝에 손바닥을 깊이 찔리고 말았다. 레코드 선반의 칸막이 유리가 깨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엄청난 피가 흘러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지배인이 수건을 몇 장 들고 나와 그것을 붕대 대신 감아 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야간에도 환자를 받는 응급 병원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변변치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런 처리만큼은 빨랐다. 다행히도 병원은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거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건은 이미 벌건 피로 흥건히 젖었고, 스며 나온 피는 아스팔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은 무슨 싸움이라도 벌어져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심한 통증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쉼 없이 피가 흐를 뿐이었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피투성이가 된 수건을 벗겨 내고 손목을 단단히 죄어 묶어서 지혈을 한 뒤, 소독을 하고 꿰맸다. 그리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레코드 가게로 들어가자 지배인은 출근한 것으로 해줄 테니까 퇴근하라고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가사와 방으로 갔다. 상처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누구와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고, 그와는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방에 있었고, 텔레비전의 스페인 어 강좌를 들으면서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붕대로 칭칭 동여맨 손을 보더니 어찌된 거냐고 물었다. 조금 다쳤을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맥주를 들겠느냐고 그가 묻기에 나는 사양했다.
"이거 금방 끝나니까 좀 기다려" 하고 나가사와는 말하고 스페인어 발음을 연습했다. 나는 내 손으로 물을 끓여 티백으로 홍차를 만들어 마셨다. 스페인 여자가 예문을 읽었다.
"이렇게 많은 비는 처음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다리가 몇 개나 떠내려갔습니다."
나가사와는 자기도 그 예문을 읽어 발음을 한 뒤 "형편없는 예문이군." 하고 말했다. "외국어 강좌의 예문이라는 게 대개 이래, 한심하다니까."
스페인 어 강좌가 끝나자 나가사와는 텔레비전을 끄고, 소형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더 꺼내 마셨다.
"혹시 방해한 건 아닙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내게? 전혀 아니야. 따분했던 참이라고. 정말 맥주 안 마실래?"
안마시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참, 얼마 전에 시험 발표가 있었지. 합격했어?"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외무성 시험 말입니까?"
"그래, 정식 이름은 외무 공무원 채용 1종 시험이라고 하는데, 어딘가 바보스럽지?"
"축하합니다." 하면서 나는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
"하긴 합격은 당연한 일 아니었습니까?"
"뭐, 그렇긴 했지만" 하고 나가사와는 웃었다. "하지만 확실히 인정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야, 어떻든."
"외국으로 나갑니까, 외무성에 들어가면?"
"아니, 처음 일 년 동안은 국내 연수야. 그 뒤에는 당분간 외국 근무를 하게 될 거야."
나는 홍차를 들고, 그는 맛있게 맥주를 들이켰다.
"이 냉장고 말인데, 만일 좋다면 여기서 나갈 때 네게 줄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갖고 싶지? 이게 있으면 냉맥주를 마실 수도 있잖아."
"그거야 준다면 좋지요. 하지만 선배님도 필요하신 거 아닙니까? 어차피 아파트 생활을 할 테니까요."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여길 나가면 난 더 큰 냉장고를 사서 그럴 듯하게 해놓고 살 거야. 이런 구질구질한 데서 4년간이나 참고 살았어. 여기서 쓰던 건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어 필요한 건 뭐든지 다 줄게. 텔레비전이건 보온병이건 라디오건."
"뭐든지 좋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스페인 어 텍스트북을 손에 들었다.
"스페인 어를 시작했습니까?"
"응. 어학은 하나라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원래 난 어학에 선천적인 소질이 있어. 불어도 독학이었지만, 거의 완벽하거든. 게임과 마찬가지지. 룰을 하나만 제대로 알면 나머진 몇 개라도 다 같아. 여자와 마찬가지지."
"상당히 치밀한 생활방식이군요" 하고 나는 빈정거렸다.
"그런데 언제 한 번 함께 식사하러 안 가겠나?"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또 여자 사냥은 아니겠지요?"
"그래. 그게 아니고 그저 순수한 식사야. 하쓰미와 셋이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회식하는 거야. 내 합격 축하 파티지. 되도록 비싼 데로 가자고. 어차피 지불은 아버지가 할 거니까."
"그런 식사라면 하쓰미 씨와 둘이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네가 가주는 게 편해. 내게도 하쓰미에게도"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세상에, 이건 기즈키, 나오코의 경우와 똑같지 않은가.
"식사 후에 난 하쓰미한테 가서 잘 테니까, 식사만큼은 셋이서 함께 하자고."
"두분이 다 그렇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선배님은 어쩔 작정입니까, 하쓰미씨 말입니다. 연수가 끝나고 해외 근무를 하게 되면 몇 년씩 못 돌아오는 게 아닙니까? 그럼 하쓰미 씨는 어떻게 되죠?"
"그건 하쓰미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는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채 맥주를 마셨고, 하품을 했다.
"말하자면 난 누구와도 결혼할 의사가 없고, 그 점은 하쓰미에게도 확실히 말해 두고 있어. 그러니 하쓰미는 누구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면 되는 거야. 난 말리지 않아.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날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면 되는 거고, 그런 뜻이야."
"하아" 하고 나는 감탄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날?"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란 것은 원리적으로 불공평한 거야. 그건 내 탓이 아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거라고. 나는 하쓰미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런 쪽에서라면 난 지독한 인간이니까, 그게 싫다면 헤어지자고 확실히 말해 두었다고."
나가사와는 맥주를 다 마시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선배님은 인생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없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이봐,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하고 그가 말했다. "물론 인생에 대한 공포를 느낄 때가 있어. 그건 당연하잖아. 다만 나는 그런 걸 전제 조건으로 인정할 수는 없어. 자기의 힘을 백 퍼센트 발휘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는 거야. 원하는 건 취하고, 원치 않는 건 취하질 않아.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막히면 막힌 곳에서 다시 생각해. 불공평한 사회란 역으로 생각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하지."
"야전인수적인 이야기 같은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난 하늘을 올려다보고 과일이 떨어지기나 기다리고 있는 건 아냐. 나는 나대로 무척 노력하고 있어. 너보다 열 배는 더 노력하고 있을 거야."
"그럴 겁니다." 하고 나는 인정했다.
"그래서 말이야,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한심해져,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할까?, 왜 노력을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나가사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뿐이야" 하고 나가사와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 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이를테면 다들 취직이 결정되어 한숨 놓고 있을 때 스페인 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그런 겁니까?"
"그래 그런 거야. 난 봄까진 스페인 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거야. 영어, 독일어, 불어는 이미 되었고, 이탈리아 어도 대충 돼가고 있어. 이런 게 노력 없이 되는 줄 알아?"
그는 담배를 피웠고, 나는 미도리의 부친을 생각했다. 그리고 미도리의 부친은 텔레비전으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노력과 노동이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도 생각조차 안 해 봤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그는 아마 너무 바빴을 것이다, 일도 바빴고 후쿠시마까지 가출한 딸을 데리러 가기도 해야 했으니까.
"그 회식 이야기인데, 이번 토요일이면 어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좋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가사와가 택한 곳은 아자부의 뒤쪽에 있는, 조용하고 고급스런 프랑스 요리점이었다. 나가사와가 그의 이름을 대자 우리를 안쪽 방으로 안내하였다.
작은 방 벽에는 판화가 열다섯 점쯤 걸려 있었다. 하쓰미가 도착할 때까지 그와 나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맛 좋은 포도주를 마셨다. 나가사와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그레이 양복을 입고 있었고, 나는 극히 평범한 네이비블루의 블레이저코트를 입고 있었다.
15분쯤 기다리자 하쓰미가 왔다. 그녀는 매우 깔끔하게 화장을 하고 금으로 된 귀고리를 달고, 짙은 하늘색의 멋스러운 원피스에다 우아한 스타일의 빨간 무용 신발 같은 것을 신고 있었다. 내가 원피스 빛깔을 칭찬하니까 이런 걸 미드나이트 블루라고 해요, 하고 하쓰미가 가르쳐 주었다.
"요긴 분위기가 퍽 근사한데"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도쿄에 오면 꼭 여기서 식사를 하지. 전에도 한 번 온 적이 있어. 난 이런 비싼 요리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어머, 가끔씩 이라면 이런 것도 좋잖아요. 그렇지요, 와타나베?"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돈을 자기가 내는 것만 아니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대개 여자와 같이 오지"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도쿄에 여자가 있으니까."
"그래?"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와인을 마셨다
이윽고 웨이터가 왔고 우리는 요리를 주문했다. 우리는 전채 요리로 수프를 선택하였고, 메인 디시로는 나가사와가 오리 요리를, 나와 하쓰미는 농어를 주문했다.
요리는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나가사와가 외무성의 시험 이야기를 꺼냈다. 수험자의 대부분이 바닥 모를 늪 속에 처박아 넣고 싶을 정도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몇몇 올바로 된 사람들로 있더라고 말했다. 그 비율이 일반 사회와 비교해서 낮은지 높은지를 내가 물어 보았다.
"같아, 물론" 하고 나가사와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건 어디든 마찬가지야. 고정 불변한 거라고."
와인 한 병이 비자 나가사와는 다시 한 병을 주문했고, 자기 몫으론 스카치위스키를 더블로 부탁했다.
그 뒤 하쓰미가 다시 나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여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것은 하쓰미와 나 사이의 영원한 화제였다. 그녀는 내게 클럽 하급생 중에 매우 예쁜 애를 소개하고 싶어 했고, 나는 언제나 피하고만 있었다.
"정말 좋은 애예요, 미인이고. 다음에 데리고 나올 테니까 한 번 만나 봐요.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야."
"아닙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쓰미 씨네 대학 여자들과 사귀기엔 나는 너무 가난합니다. 돈도 없고 화제도 맞지 않을 거고."
"어머, 그렇지 않아요. 그 앤 수수하고 매우 좋은 애예요. 그런 콧대 높은 애가 전혀 아니라니 까요."
"한번 만나 보면 되잖아, 와타나베" 하고 나가사와가 거들었다.
"꼭 그걸 하라는 건 아니니까."
"당연해요. 그런 일 하면 큰일 나요. 틀림없는 숫처녀인데"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전에 네가 그랬듯이."
"그래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고 하쓰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와타나베 씨, 가난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물론 학급에서도 몇몇은 굉장한 새침데기고 콧대 높은 애들도 있지만, 나머지 애들은 다 보통이에요. 점심땐 구내식당에서 2백5십 엔짜리 정식을 먹고....."
"저, 하쓰미 씨. 우리 학교엔 점심도 ABC가 있어, A가 120엔, B는 100엔, C는 80엔 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내가 A라도 시키면 모두가 언짢은 눈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C도 먹을 형편이 못되면 60엔짜리 라면을 먹어요. 그런 학교지요. 화제가 어울릴 것 같습니까?"
하쓰미는 크게 웃었다.
"그거 정말 싸군요. 나, 한 번 먹으러 가볼까. 그렇지만 와타나베 씨, 당신은 사람이 좋으니까 그 애와 틀림없이 이야기가 맞을 거예요. 혹시 알아요, 그 애도 120엔짜리 점심을 좋아할지."
"설마"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 없으니까 먹는 거죠."
"하지만 먹는 걸 가지고 우릴 판단하지는 말아요. 물론 내로라하는 양가집 딸들이 많은 학교긴 하지만, 진지하게 인생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착실한 애들도 많아요. 모두가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남자와 교제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고요."
"그건 물론 나도 압니다."
"와타나베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에 대해선, 이 사나이는 한마디도 말하진 않는 거야. 지독하게 입이 무겁지. 모든 게 수수께끼야."
"정말?" 하고 하쓰미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수수께끼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사정이 몹시 얽혀 있어서 말하기가 언짢을 뿐이죠."
"험난한 사랑 같은 거? 내게 상담해 봐요."
나는 와인을 마시며 그 순간을 얼버무렸다.
"저것 봐, 입이 무겁지?" 위스키를 마시며 나가사와가 말했다.
"이 사나이는 한 번 말 않기로 작정하면 절대로 말 안 해."
"유감인데요." 하고 하쓰미는 테리느를 잘게 썰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내 후배와 와타나베 씨가 잘 되었다면, 우린 오늘 더블데이트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술에 취하면 바꿔치기도 할 수 있고 말이지."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못하는 소리가 아냐, 와타나베는 널 좋아하니까."
"좋아한다는 것과 그건 다르잖아요." 하고 하쓰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타나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지요. 난 그걸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여자를 소개해 주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와타나베와 나는 여자를 바꿔치기 한 적이 있었어, 전에. 그렇지, 안 그래?"
나가사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위스키 잔을 비우더니 다시 한 잔을 주문했다.
하쓰미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살며시 입을 닦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와타나베 씨, 정말 그런 짓을 했나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정직하게 이야기해, 괜찮으니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난처하게 됐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가사와에게는 때때로 술이 들어가면 심술궂게 구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밤의 그의 심술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쓰미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만큼 나로서도 덩달아 심기가 불편했다.
"그 이야길 듣고 싶네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고 하쓰미가 내게 말했다.
"술에 취해 있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저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에요."
"시부야의 바에서 선배님과 술을 마시다, 둘이 놀러 온 여자 애들과 친해진 겁니다. 어딘가의 전문대 여학생들이었는데 여자 애들도 꽤 취해 있었고, 그래서 뭐, 결국 가까운 호텔로 가서 잤습니다. 둘이서 서로 옆방을 잡고. 그런데 밤중에 선배님이 내 방을 노크하더니, 우리 여자를 서로 바꿔 보자고 하기에 나는 선배님 방으로 가고, 선배님은 내 방으로 들어갔지요."
"그 여자 애들은 화내지 않았나요?"
"그 애들도 취해 있었고, 게다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던 겁니다, 결국 그 애들도요."
"그렇게 한 덴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어떤 이유?"
"걔네 둘 말인데, 좀 차이가 심하더라고. 한 애는 예뻤지만 다른 한 애는 형편없었지. 그래서 이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거야. 즉 내가 미녀를 차지했으니까, 와타나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그래서 교환한 거야. 그렇지 와타나베?"
"그래요"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미인이 아닌 쪽의 여자가 한결 마음에 들었었다.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성격도 좋은 애였다. 그녀도 나도 섹스를 한 후 침대 속에서 비교적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가사와가 교환하자고 제안해 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겠냐고 묻자 뭐, 좋아요, 당신들이 그러고 싶다면, 하고 동의해 준 것이다. 그녀는 아마 내가 그 미인 쪽의 여자아이와 자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즐거웠어요?" 하고 하쓰미가 내게 물었다.
"교환 말입니까?"
"그런 일 저런 일 모두."
"따로 특별히 즐거웠던 것은 없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자와 자보았자 특별히 즐거운 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그럼 왜 그런 짓을 하죠?"
"내가 유혹하니까"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나, 와타나베 씨에게 묻고 있어요." 하고 하쓰미가 단호하게 나무라듯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해요?"
"이따금 못 견디게 여자와 자고 싶어집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그 사람과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하고 하쓰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하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요리가 들어왔다. 나가사와 앞에는 오리 고기 로스가 놓여졌고, 하쓰미와 내 앞에는 농어 요기 접시가 놓여졌다. 접시에 데친 야채가 나뉘어 담아지고, 소스가 뿌려졌다. 그리고 종업원이 나가자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다.
나가사와는 나이프로 오리 고기를 썰어 입맛 당기게 먹으며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시금치를 먹어 보았다. 하쓰미는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저, 와타나베 씨.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짓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고, 당신답지도 않다고 보는데 어때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렇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저 자신도 때때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만두지 못하죠?"
"때때로 체온이 그리워지거든요"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따스한 살갗의 온기 같은 게 없으면 때때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런 거라고 생각해" 하고 나가사와가 끼어들었다.
"와타나베에겐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섹스가 불가능하지. 그래서 섹스는 섹스로 잘라서 이해하고, 다른 데서 처리를 하는 거야. 그것으로 좋은 거 아냐? 이야기로선 이치에 닿는다고. 방안에 틀어박혀 마스터베이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그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참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와타나베 씨?"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크림소스가 뿌려진 농어의 몸통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는 남자의 성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고 나가사와는 하쓰미에게 말했다. "예를 들어 난 너하고 3년간이나 교제하고 있으면서, 그 사이에 이런저런 딴 여자들하고도 자고 있어. 그렇지만 난 그런 여자들을 누구 하나 기억에 남겨 놓고 있지는 않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 못해. 누구하고도 한 번 밖에 자지 않거든. 만나고, 자고, 헤어지고, 그것뿐이야. 그게 어디가 나쁘다는 거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당신의 그런 오만이에요" 하고 하쓰미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른 여자와 자고 안 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 지금껏 당신의 여자 놀이에 대해 정말로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그런 건 여자 놀이라고도 못해.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아. 누구도 다치지 않으니까."
"내게 상처를 줬어"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어째서 나만으론 모자라는 거죠?"
잠시 나가사와는 말없이 위스키 잔을 흔들고 있었다.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내 몸속엔 뭔가 그런 것을 원하는 갈증 같은 게 있지. 그것이 네게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해. 결코 너 하나만으로 부족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야. 그러나 나는 그런 갈증 속에서 살수밖에 없는 남자고, 그게 바로 나야. 어쩔 수 없잖아."
하쓰미는 마침내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들었고, 농어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기에 와타나베 씨를 끌어들이진 말아요."
"나와 와타나베는 닮은 데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는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기에게밖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야. 오만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야.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자기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밖에는 흥미를 못 가져. 그러니까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야. 다만 이 사나이의 경우는 스스로 확실하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헤매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거야."
"헤매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아니면 당신은 헤매거나 상처받은 적이 없다는 말인가요?"
"물론 나도 헤매고 상처도 입어. 그러나 그것은 훈련으로 경감시킬 수 있지. 쥐도 전기 쇼크를 주면 상처를 덜 받는 길을 찾게 된다고."
"하지만 쥐는 연애를 하지 않아요."
"쥐는 연애를 하지 않는다" 하고 나가사와는 되뇌고 나서 나를 보았다. "멋져! 백 그라운드 뮤직이 아쉽군. 오케스트라에 하프 두 대가 낀."
"농담하지 말아요. 난, 지금 진지해요."
"지금은 식사중이야"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게다가 와타나베가 있어. 진지하게 할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제가 자리를 비울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대로 있어요. 그 편이 좋아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큰맘 먹고 왔는데 여유롭게 디저트도 먹고 가자고"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 뒤, 우리는 잠시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농어를 깨끗이 먹어치웠고, 하쓰미는 절반쯤 남겼다. 나가사와는 일찌감치 오리 로스를 다 먹어치우고 계속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농어가 정말 맛있군요." 하고 내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흡사 깊은 굴에 작은 돌을 던진 것 같았다.
식탁이 치워지고 레몬 샤베트와 에스프레소 커피가 나왔다. 나가사와는 어느 쪽에도 조금씩 손만 댔을 뿐, 금방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쓰미는 레몬 샤베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참 할 수 없군, 하고 나는 샤베트를 말끔히 먹은 다음 커피를 마셨다
하쓰미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쓰미가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손도 세련되고 품위 있었으며 고급스럽게 보였다.
나는 나오코나 레이코 여사를 생각했다. 그녀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나오코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레이코 여사는 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속에서, 그들이 있는 그 작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격한 그리움이 소용돌이 쳤다.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와타나베와 내가 닮은 점은, 자기의 일을 타인이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게 다른 녀석들과 다른 점이야. 다른 녀석들은 모두 자기의 일을 주위의 인간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안달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와타나베도 그렇지 않아. 이해를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자기는 자기고 타인은 타인이라고."
"그래요?" 하고 하쓰미가 내게 물었다.
"설마"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만큼 강한 인간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습니다. 다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 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분입니다. 체념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배님 말대로 남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도 거의 같은 뜻이야" 하고 나가사와가 커피스푼을 잡으려 말했다. "정말 같은 거야. 늦은 아침 식사와 이른 점심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고. 먹는 것도 같고 먹는 시간도 같은데, 다만 부르는 방식이 다를 뿐이야."
"나가사와, 당신은 내게도 별로 이해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하고 하쓰미가 물었다.
"넌 아무래도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될 만한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그럼 내가 어떤 사람한테 올바른 이해를 받기 바라는 건 잘못된 일인가요? 이를테면 당신에게?"
"아냐, 별로 잘못된 일은 아니야" 하고 나가사와가 대답했다. "성실한 인간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만일 네가 나를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하지만, 내 시스템은 다른 인간이 살아가는 시스템과는 매우 다른 거야."
"하지만, 날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 거죠?"
"그러니까 너는 내 시스템을....."
"시스템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하쓰미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본 것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는 그 때가 딱 한 번뿐이었다.
나가사와가 테이블 옆의 벨을 누르자 종업원이 계산서를 들고 왔다. 나가사와는 종업원에게 크레디트 카드를 건네주었다.
"와타나베, 오늘은 미안하게 됐어" 하고 그가 말했다. "난 하쓰미를 바래다 줄 테니까, 그 다음은 너 혼자서 알아서 하도록 해."
"괜찮습니다, 저는. 식사도 훌륭했고" 하고 나는 말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카드와 계산서를 가져오자 나가사와는 금액을 확인하고 펜으로 사인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가사와는 도로로 나가 택시를 세우려고 했지만 하쓰미가 그걸 제지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 식사 고마웠어요."
"좋도록"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와타나베 씨에게 바래다 달랠 거예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좋도록"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렇지만 와타나베 역시 나와 거의 같아.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나이지만 마음의 밑바닥으로부터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언제나 어딘가가 깨져 있고, 그리곤 다만 갈증이 있을 뿐이야. 난 그걸 알 수 있어."
나는 택시를 세우고 먼저 하쓰미를 태우면서, "저, 아무튼 바래다주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사와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하고 그는 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로 가지요? 에비스로 돌아갈 겁니까?" 하고 나는 하쓰미에게 물었다. 그녀의 아파트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쓰미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럼, 저 어디서 한잔하겠습니까?"
"응" 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부야" 하고 나는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하쓰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택시 좌석 한 귀퉁이에 기대고 있었다. 작은 금귀고리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여린 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미드나이트 블루의 원피스는 마치 택시 한구석의 어둠에 맞춰 만들어진 것 같았다. 옅은 색조로 칠해진 그녀의 모양 좋은 입술이 독백을 하다 만 것처럼 이따금 삐죽거렸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나가사와가 왜 그녀를 특별한 상대로 택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하쓰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가사와라면 그런 여자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쓰미라는 여성 속에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녀 스스로가 강한 힘을 내어 상대를 뒤흔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힘은 작았지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택시가 시부야에 이를 때까지 나는 줄곧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가 내 마음속을 일렁이게 하는 이 감정이 흔들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은 12년이나 13년 뒤의 일이었다.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의 산타페 거리에 있었는데, 해거름에 근처의 파지 하우스에 들러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손과 접시, 테이블에 이르기까지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끝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통 선홍색 일색이었다.
그러한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킨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이었던 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타오르는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놓고 잊어버려 왔기에, 그러한 것이 한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가 뒤흔들어 놓은 것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 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가사와도 나도 그녀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하쓰미는-내가 아는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자,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스스로의 생명을 끊었다. 그녀는 나가사와가 독일로 가버린 2년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그 2년 후에 면도칼로 손목을 잘랐다.
그녀의 죽음을 나에게 전해 준 사람은 물론 나가사와였다. 그는 서독의 수도 본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 왔다.
"하쓰미의 죽음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꺼져 버렸고, 그것은 못 견디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나는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두 번 다시 그에게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바에 들어가서 몇 잔씩인가 술을 마셨다. 나도 하쓰미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권태기의 부부처럼 마주보고 앉아 묵묵히 술을 들고 땅콩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가게가 붐비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하쓰미는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말을 꺼낸 거니까, 하고 내가 지불했다.
밖으로 나오니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하쓰미는 옅은 회색 카디건을 걸친 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걸었다.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었지만, 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밤거리를 걸었다. 꼭 나오코와 거닐던 때 같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와타나베 씨, 어디 이 부근 당구칠 데 없을까?"
하쓰미가 돌연 그렇게 말했다.
"당구?" 하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하쓰미 씨가 당구를 다 치세요?"
"응, 나, 제법 잘 쳐요. 와타나베는 어때요?"
"치긴 합니다. 잘 하진 못하지만."
"그럼 가요."
우린 가까운 당구장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길 막다른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멋진 원피스를 입은 하쓰미와 네이비블루의 블레이저코트에 레지멘털 타이를 맨 나와의 한 쌍은 당구장 내에서도 유난스럽게 보였지만, 그런 데에 하쓰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큐를 고른 후 큐 끝에다 초크를 문질러댔다. 그리고 백에서 머리핀을 꺼내 이마 끝에 찔러서, 공을 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우리는 두 게임을 쳤지만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하쓰미는 매우 솜씨가 좋았고, 나는 손에 두텁게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잘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게임 모두 그녀가 압승했다.
"잘 치는군요."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보기와는 다르죠?" 하고 하쓰미는 신중하게 공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방긋 웃었다.
"도대체 어디서 배웠습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워낙 노시기를 좋아하는 분이라 당구대를 집에 두고 있었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거기에 가면 오빠와 둘이서 당구를 치면서 놀았어요. 좀 성장하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정식으로 가르쳐 주셨고. 참 좋은 분이었어요. 스마트하고 잘생기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요. 옛날 뉴욕에서 다이애나 더빈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게 그분의 자랑거리였지요."
그녀는 세 번을 계속 해서 득점하고 네 번째는 실패했다. 나는 간신히 한 번만 득점을 하고 다음은 쉬운 공도 제대로 치질 못했다.
"붕대를 감고 있어서 그래요" 하고 하쓰미가 위로해 주었다.
"오래 안 쳐서 그렇습니다. 벌써 2년 5개월째 큐를 잡지 않았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요?"
"친구하고 당구를 친 그날 밤 그 친구가 죽었거든요, 그래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엔 당구와 손을 끊었어요?"
"아닙니다. 특별히 그런 각오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고 나는 조금 생각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그저 이럭저럭 당구를 칠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그것뿐입니다."
"친구는 어떻게 해서 죽었어요?"
"교통 사고였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몇 번인가 계속 해서 공을 맞혔다. 공의 길을 보고 있을 때의 그녀의 눈빛은 꽤 진지했고, 공을 칠 때의 힘을 주는 요령도 정확했다.
그녀가 깨끗하게 세트한 머리칼을 훌쩍 뒤로 넘기고, 금귀고리를 반짝이며, 무용 신발처럼 생긴 구두를 신은 발의 위치를 정하고, 갸름하게 예쁜 손가락을 당구대의 펠트 위에 받친 채 공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그 우중충한 당구장의 그곳만은 어느 훌륭한 사교장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그녀와 단 둘이 있어 보긴 처음이었지만, 그것은 나에게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 인생이 한 단계 끌어 올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 게임이 끝날 무렵-물론 세 번째도 그녀가 이겼다. -내 손의 상처가 조금 아파 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린 당구를 끝내기로 했다.
"미안해요. 당구를 치자고 하는 게 아닌데....." 하고 하쓰미가 정말 민망스러워 하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니까. 그리고 매우 즐거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올 때 당구장 주인 같은 깡마른 중년 부인이, "아가씨, 소질이 있네요." 하고 말했다.
"고마워요" 하고 방긋 웃으며 하쓰미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계산을 했다.
"아파요?" 하고 밖으로 나오자 하쓰미가 말했다.
"대단치는 않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상처가 벌어졌을지도 몰라요."
"괜찮을 겁니다, 아마."
"그래요, 내 아파트로 가요. 내가 상처를 봐줄게요. 붕대도 갈아야 할 테니까"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집에는 붕대도 소독약도 있어요. 여기서 멀지도 않고."
그렇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상처가 벌어졌는지를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
"아니면 나와 같이 있는 게 싫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하고 하쓰미가 농담처럼 말했다.
"천만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사양 말고 우리 집으로 가요, 걸어서 금방이니까."
하쓰미의 아파트는 시부야에서 에비스 쪽으로 15분 쯤 걸어간 데에 있었다. 호화롭다고는 못해도 제법 훌륭한 아파트였는데, 작은 로비에다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하쓰미는 주방 테이블에 나를 앉혀 놓고, 옆방으로 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프린스턴 유니버시티라는 글자가 영문으로 박힌 요트 파카와 면바지 차림으로, 조금 전 귀엽게 반짝이던 금귀고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선가 구급함을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서 내 붕대를 풀더니, 상처가 터지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일단 그곳을 소독한 후, 다시 새 붕대를 감아 주었다. 손놀림이 매우 훌륭했다.
"어쩌면 그렇게 여러 가지 일에 능숙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옛날에 자원봉사로 이런 일을 해 본적이 있어요. 간호사 흉내 같은 것, 거기서 배웠어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붕대를 다 감고 나자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 왔다. 그녀가 반 캔을 마시고, 내가 한 개 반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하쓰미는 클럽의 하급생 여자 애들의 사진을 내게 보여 주었다. 거기엔 확실히 몇몇 귀여운 애들이 있었다.
"만일 걸프랜드가 필요하면 내게 말만 해요. 당장 소개해 줄 테니까요."
"그렇게 하죠."
"와타나베 씨는 날 중매쟁이 같다고 행각하고 있죠, 정직하게 말해서?"
"조금은" 하고 나는 정직하게 대답하고 웃었다. 하쓰미도 웃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와타나베 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와 나가사와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다니, 뭘 말입니까?"
"난 어쩌면 좋지요, 지금부터?"
"내가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나는 마시기 딱 좋게 차가워진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괜찮아요. 뭐든지 생각하고 있는 대로 말해 봐요."
"내가 당신이라면 난 그 남자와는 해어집니다. 그리고 좀 더 성실한 사고방식을 지닌 상대를 찾아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그 사람과 교제해서 행복해질 까닭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행복해 지겠다거나 남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함께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집니다. 내가 보기엔 하쓰미 씨가 그 사람과 3년 동안이나 교제하고 있다는 게 이미 기적입니다. 물론 나도 내 나름으로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사람이고 훌륭한 점도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나 같은 건 따라갈 수조차 없는 능력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라든가 살아가는 방법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때때로 나 자신은 같은 곳을 계속 허우적거리며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는 나와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도 착착 위로 오르고 있는데, 나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몹시 허무해집니다. 이를테면 시스템 그 자체가 다른 거지요. 제 말 알아듣겠습니까?
"잘 알겠어요." 하고 하쓰미는 말하고 냉장고에서 다시 새 맥주를 꺼내다 주었다.
"게다가 그 사람, 외무성에 들어가 일 년 동안의 국내 연수가 끝나면 상당한 기간 동안은 해외로 나가게 돼 있지 않습니까? 하쓰미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마냥 기다리겠습니까? 그 사람, 누구하고도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없어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럼, 내가 더 해야 할 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이상."
"음" 하고 하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리잔에 천천히 맥주를 따라 마셨다.
"아까 하쓰미 씨와 당구를 치다 얼핏 생각이 났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난 형제가 없어서 외아들로 자랐지만, 그러면서도 외롭다거나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던가 하고 생각한 일은 없었습니다. 혼자도 상관없다 싶었지요. 그런데 아까 당구를 치면서 문득 내게도 하쓰미 씨 같은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마트하고 멋지고, 미드나이트 블루 원피스에다 금귀고리가 잘 어울리고, 당구도 잘 치는 누나 말입니다."
하쓰미는 기쁘게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요 일 년 동안, 내가 남에게 들은 말 중에서 지금 당신의 말이 최고로 기쁘군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로서도 하쓰미 씨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나는 약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하쓰미 씨 같으면 누구하고도 행복해질 것 같은데 어째서 하필이면 나가사와 같은 사람에게 매이게 됐습니까?"
"아마도 그런 일이란 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인가 봐요.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가사와의 말을 빌자면 '그건 네 책임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가 되겠지만요."
"그렇게 말하겠네요." 하고 나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말이에요, 와타나베 씨. 난 그렇게 머리가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나는 어느 편인가 하면 어리석고 고지식한 여자예요. 시스템이라든가 책임이라든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을 하고, 좋은 사람에게 밤마다 안기고,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그걸로 좋은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내가 바라고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요."
"그가 구하고 있는 건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해요, 안 그래요?" 하고 하쓰미가 말했다.
"사회에 나가 세파에 시달리고, 좌절하고, 어른이 되고 그런 것 말입니까?"
"그래요. 그리고 오래 나와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나에 대한 감정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다릅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고, 게다가 매일매일 그것을 강화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에 얻어맞으면 더욱 강해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등을 보이느니 차라리 괄태충이라도 삼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쓰미 씨는 도대체 뭘 기대합니까?"
"그렇지만 와타나베 씨, 지금의 나로선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하고 하쓰미는 테이블 위에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말했다.
"그렇게도 나가사와가 좋습니까?"
"좋아요" 하고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허어"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남아 있던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난 그저 어리석고 고지식한 여자일 뿐이에요" 하고 하쓰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맥주 더 마시겠어요?"
"아니, 이제 됐습니다. 슬슬 일어나야지요. 붕대와 맥주, 고마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쓰미는 나를 보고, 전화를 보고, 그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한 후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조용히 닫힐 때, 수화기를 집어 드는 하쓰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것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것은 열한시 반이었다. 나는 그대로 나가사와의 방으로 가서 노크했다. 그리고 열 번 정도 노크하고 나서야 오늘이 토요일 밤임을 깨달았다.
토요일 밤엔 친척집에 묵는다는 명목으로, 나가사와는 매주 마다 외박 허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고, 윗도리와 바지를 벗어서 옷걸이에 건 뒤 파자마로 갈아입고, 이를 닦았다. 그리고 어, 내일이 또 일요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치 나흘에 한 번 정도의 간격으로 일요일이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더 일요일이 지나면 나는 스무 살이 된다. 나는 침대에 벌렁 누운 채 벽의 달력을 보면서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큰 컵으로 커피를 마시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옛 레코드를 들으면서 긴 편지를 썼다.
창밖에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방안은 수족관처럼 썰렁했다. 옷상자에서 막 꺼내온 두터운 스웨터에는 방충제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유리창 위쪽에는 통통한 파리 한 마리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바람이 없는 탓인지, 일장기가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걸치던 토가 자락처럼 축축하게 깃대에 엉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심약한 얼굴의 말라빠진 누런 개가 정원의 꽃에다 코를 대고 모조리 킁킁킁 냄새를 맡아 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비가 내리는 날에 개가 꽃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녀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다가 펜을 든 오른손의 상처가 아파 오면 그런 빗속의 정원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하다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입은 일을 쓰고, 일요일 밤에 나가사와와 하쓰미, 나 셋이서 나가사와의 외교관 시험 합격의 축하연 비슷한 것을 가졌다고 썼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떤 음식점이고 어떤 요리가 나왔는지를 설명했다. 요리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도중에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졌다는 등의 얘기를 썼다.
하쓰미와 당구장에 갔던 일과 관련하여 기즈키와의 이야기를 쓸까 말까하고 좀 망설이다가 결국은 쓰기로 했다. 써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기즈키가 죽은 날-그가 마지막으로 친 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건 상당히 어려운 쿠션을 이용해야만 하는 공이었기에, 나는 그게 설마 맞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그런데 아마 우연이었겠지만 그 공이 정확하게 코스를 따라가서, 흰 공과 빨간 공이 녹색의 펠트 위에서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살며시 부딪쳐 그것이 결국 그날의 최종 득점이 됐던 거야.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깨끗하고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그 이후 2년 반 가까이 나는 결코 당구를 친 적이 없지.
그런데 하쓰미와 당구를 친 그날 밤, 나는 첫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즈키를 떠올리지 않았고, 그랬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즈키가 죽은 뒤 앞으론 당구를 칠 때마다 그 녀석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랬는데도 나는 한 게임이 끝나 자동판매기에서 펩시콜라를 뽑아 마시기 직전까지도 기즈키를 생각조차 안한 거야. 그런데 거기서 갑자기 기즈키가 생각났던 것은, 기즈키와 함께 자주 다니던 당구장에도 펩시 판매기가 있어서, 우린 자주 그 펩시 값을 걸고 게임을 했었기 때문이야.
기즈키를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일로, 나는 무언가 그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때는 마치 내가 그를 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야.
하지만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이런 식으로도 생각했지. 그로부터 이미 2년 반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직도 열일곱 살 그대로다, 하고. 하지만 그것은 내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냐.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것은 아직도 선명하게 내 속에 남아 있고, 그 중의 어떤 것은 그 당시보다 오히려 더 선명할 정도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래. 나는 이제 곧 스물이고, 나와 기즈키가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나이에 공유했던 것 중의 어떤 것은 이미 소멸되어 버려서, 그것은 아무리 한탄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거야. 나는 이 이상 더 잘 설명할 순 없지만 나오코라면 내가 느낀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이해해 주리라고 믿어. 그리고 이런 것을 이해해 줄 사람은 나오코 밖에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
나는 지금까지 해오던 이상으로 나오코 생각을 하고 있어. 오늘은 비가 오고 있구나. 비가 오는 일요일은 나를 좀 혼란스럽게 만들어. 비가 오면 빨래를 할 수 없고, 따라서 다리미질도 못하게 되니까. 산책도 못하고, 옥상에서 뒹굴지도 못하지. 책상 앞에 앉아 <카인드 오브 블루>를 자동 반복으로 틀어 놓고 몇 번이고 들으면서, 비 내리는 마당 풍경이나 멍하니 바라보는 정도가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전에도 썼지만 나는 일요일엔 태엽을 감지 않아. 그런 탓으로 편지가 너무 길어졌어. 이만 쓰겠어. 그리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겠어. 안녕.
제 9 장 봄철의 새끼 곰만큼 네가 좋아
이튿날의 강의에도 미도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전화통화를 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나 있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볼 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전화를 하겠다던 그녀의 말이 생각나 그만 두었다.
그 주의 목요일에 나는 식당에서 나가사와와 마주쳤다. 그는 식사쟁반을 들고 와 내 옆자리에 앉더니, 일전엔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괜찮아요, 나야말로 잘 먹었고" 하고 나는 말했다. "하긴, 묘하다면 좀 묘한 취직 축하연이었지만요."
"그러게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하쓰미하곤 화해가 됐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야겠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네게도 꽤 심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반성하고 있는 건가요? 어디 몸이 안 좋은 건 아닙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고 나서 희미하게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하쓰미하고 나와 헤어지라고 충고했다면서?"
"당연하지요."
"뭐, 딴은 그렇긴 해."
"그 여자, 좋은 사람이에요" 하고 나는 된장국을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고 있어" 하고 나가사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내게는 좀 과분하다 싶게 좋은 여자야."
전화가 온 것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죽은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동안에 머리가 물에 잠겨 뇌가 물렁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십오 분이었지만 그것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의 무슨 요일인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 오후 여섯 시가 좀 지났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국기 게양이라는 것도 제법 도움이 되는 것인가 보다.
"와타나베, 지금 한가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금요일."
"지금이 오후?"
"당연하죠. 이상한 사람이야. 지금은 오후, 으음, 여섯시 십팔 분."
역시 저녁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잠에 빠져버린 거다. 금요일-하고 나는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금요일 밤엔 아르바이트가 없다.
"시간 있어. 어, 지금 어디에 있지?"
"우에노 역. 지금부터 신주쿠로 갈 테니까 거기서 만나지 않겠어요?"
우리는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DUG에 도착해 보니, 미도리는 이미 카운터 맨 끝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남성용의 구겨진 흰 스탠드칼라 코트 아래 얇은 황색 스웨터를 입고, 블루진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목에는 팔찌 두 개를 끼고 있었다.
"뭘 마시고 있어?"
"탐 칼린즈"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위스키소다를 주문하고 나서야, 그녀의 발밑에 큰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갔었어요. 막 돌아오는 길이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어딜 갔었지?"
"나라와 아오모리."
"한꺼번에?"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내가 아무리 별난 애라지만 나라와 아오모리를 한꺼번에 갈 거 같아요? 따로따로 갔었어요. 두 번으로 나누어서. 나라엔 그와 같이 갔었고, 아오모리엔 혼자서 훌쩍 다녀왔어요."
나는 위스키소다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미도리가 물고 있는 말보로에 불을 붙여 줬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 장례식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에."
"장례식 같은 건 간단해요. 우린 그런 데 익숙해 있거든요. 검은 옷을 입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적절히 다 일을 진행해 주니까. 친척 아저씨라든가 동네 사람들이 다들 알아서 술을 사오고, 초밥도 준비하고, 위로도 해주고,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자기 좋을 대로 유품을 나눠 갖기도 하고, 아주 편하지요. 피크닉이나 다름없어요. 날이면 날마다 병간호에 시달리던 때에 비하면 피크닉이에요. 지칠 대로 지쳐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걸요, 언니도 나도. 기운이 빠져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정말로. 하지만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이 집 딸들은 차갑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고 흉을 봐요. 그래서 우린 오기로 더 울지 않지요. 우는 척해도 안 될 건 없지만,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화가 나니까. 다들 우리가 우는 걸 기대하고 있으니까 더욱 울어 주지 않는 거예요 나와 언니는 그런 점에선 마음이 맞아요. 성격은 꽤 다른데도."
미도리는 팔찌 소리를 찰랑찰랑 내면서 웨이터를 불러, 탐 칼린즈를 추가하고 피스타치오 한 접시를 주문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들 돌아간 뒤에 언니와 둘이서 우린 새벽까지 청주를 마셨어요. 큰 병으로 한 병 반 정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욕을 있는 대로 다 했지요. 그 녀석은 바보 천치다, 개똥이다, 비루먹은 개다, 돼지다, 위선자다, 도둑놈이다, 하고 마냥 지껄였어요. 그랬더니 가슴이 후련해지더군요."
"그랬겠지."
"그리고 잔뜩 취해서 잠자리에 들어 푹 잤어요. 정신없이. 도중에 전화가 걸려 와도 아예 무시하고 쿨쿨 잔거예요.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둘이서 초밥을 시켜다 먹으며, 의논해서 결정했어요. 당분간 가게 문을 닫고 서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자고.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애써 왔으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잖겠어요? 그래서 언니는 그이와 둘이서 마음 편히 지내고, 난 그와 둘이서 2박 3일 정도 여행을 하면서 실컷 즐겨나 보자고 생각한 거예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귀 언저리를 뻑뻑 긁었다.
"미안해요, 말이 거칠어서."
"괜찮아. 그래서 나라에 간 거로군."
"그래요, 옛날부터 난 나라가 좋았어요."
"그래서 실컷 즐겼어?"
"아니 한 번도....."하고 그녀는 대답한 후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 도착해 가방을 내던진 순간에 생리가 시작된 거예요, 거침없이."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랐다고요. 울고 싶더라니까, 정말. 여러 가지로 긴장해 있어서 빨라진 것 같아요. 그도 끙끙 화를 내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에요, 그는. 하지만 할 수 없잖아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난 양이 많아요, 그게. 통증도 심하고. 처음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나와 만나지 말자고요."
"그러고 싶지만 어떻게 그걸 알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럼 나, 생리가 시작되면 2, 3일 동안 빨간 모자를 쓸게요. 그럼 알 수 있지 않아요?" 하고 미도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으면 길에서 만나도 못 본 척 도망가면 돼요."
"차라리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그래 주면 좋을 텐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나라에선 뭘 했지?"
"할 수 없이 사슴과 놀기도 하고, 여기저기 산책만 하다 돌아왔어요, 정말 엉망이지 뭐예요. 그와 싸우고는 그 뒤로 지금껏 만나지도 못하고. 뭐, 그렇게 해서 도쿄로 돌아와 2, 3일 동안 아무 일도 안하고 있다가, 이번엔 혼자서 마음 편하게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아오모리에 갔던 거예요. 히로사키에 친구들이 있어서 한 이틀 동안 오모리에 묵고, 그 뒤에는 시모키타라든가 닷피 등을 돌았어요. 좋은 곳이에요, 굉장히. 나 그 지방 지도의 해설서를 쓴 적이 있거든요, 한 번. 와타나베는 그곳에 가본 적 있어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하고 미도리는 탐 칼린즈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벗겼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줄곧 와타나베를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와타나베가 있었으면 했어요."
"어째서?"
"어째서?" 하고 되뇌니 미도리는 허무를 응시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라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즉, 어째서 나를 생각해 냈느냐는 거야."
"좋아하니까, 그런 거 뻔하지 않아요? 그 밖에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느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네겐 애인도 있고, 나를 생각할 까닭이 없잖아" 하고 나는 위스키소다를 천천히 마시면서 말했다.
"애인이 있다고 해서 자기를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을 아니지만....."
"봐요,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는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해 두지만 지금 내 속엔 한 달분 가량의 이런저런 것들이 쌓이고 엉키어 있어서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지독하게. 그러니 더 이상 심한 말은 하지 말아 줘요. 그렇잖으면 나, 여기서 엉엉 울게 될 것 같고, 나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울어요. 그래도 좋아요? 난 말이에요, 주위와 관계없이 짐승처럼 운다고요,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스키소다를 두 잔째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먹었다. 세이커가 흔들리고 유리잔이 부딪치고 제빙기에서 얼음을 뜨느라 달그락 소리가 나는 뒤꼍에서, 사라 본이 옛 러브 송을 부르고 있었다.
"하긴 탐폰 사건 이후, 나와 그의 사이는 좀 험악해졌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탐폰 사건?"
"음, 한 달쯤 전에 나와 그, 그리고 그의 친구들 대여섯 명이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거든요. 그때 내가, 우리 이웃집의 어떤 부인이 재채기를 하는 순간 그 탐폰이 훌렁 빠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우습지요?"
"우스운데" 하고 나는 웃으며 동의했다.
"다들 박수를 치며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만 화를 벌컥 냈어요. 그런 저질스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서 분위기가 왕창 깨져 버렸어요."
"흐음."
"좋은 사람이지만 그런 것엔 편협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예를 들면 내가 흰색 아닌, 색깔이 있는 속옷을 입으면 화를 내거든요. 편협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런 거?"
"으음, 그렇지만 그런 건 기호의 문제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로서는 그런 인물이 미도리를 좋아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었지만, 그건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자기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 줄곧 같았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약속한 대로 미도리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 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주위에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미도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미도리는 얼굴을 빛내면서 손가락을 딱 하고 퉁겼다.
"어땠어요? 잘 됐어요?"
"도중에 왠지 창피해져서 그만 뒀어."
"왜, 안돼요?"
"그래."
"유감이군요." 하고 미도리는 곁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창피해 하거나 하면 안돼요. 지독하게 야한 생각을 해도 좋으니까. 내가 좋다는데 꺼릴 게 없잖아요. 그래, 다음엔 내가 전화로 말해 줄게요. 아아..... 거기 거기..... 아아, 좋아..... 더 못 참겠어, 나, 될 것 같아..... 아아, 거긴 말고..... 그런 것. 그걸 들으면서 자기가 하는 거야."
"기숙사 전화는 현관 옆 로비에 있어서, 다들 그 앞을 지나 출입하게 되어 있어" 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런 데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다간 사감한테 맞아 죽는다고, 틀림없이."
"그래? 그럼 어쩌지?"
"어쩌긴. 다시 나 혼자 어떻게 해보아야지."
"힘을 내요."
"으음."
"내가 섹시하지 못한 거예요, 존재 그 자체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하고 내가 말했다. "뭐라고 할까, 이를테면 입장의 문제야."
"난 말이야, 등이 몹시 민감해요, 손으로 살며시 애무해 주면."
"명심해 둘게."
"저, 지금부터 야한 영화 보러 안 갈래요? 끔찍한 SM인데"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미도리와 나는 장어 집에 들러 장어를 먹고, 신주쿠에서도 몇 안 되는 그런 초라한 영화관에 들어가, 성인 영화 세편을 연속해서 보았다. 신문을 사서 보니까 SM물은 거기서밖에 상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영화관이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들어갔을 때, 바로 그 SM영화가 시작되었다. 직장 여성인 언니와 고교생인 여동생이 치한 몇에게 납치되어 감금당한 채, 변태적인 폭행을 당하는 거였다. 치한들이 여동생을 폭행하겠다고 협박하며, 언니에게 온갖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는 가운데, 언니는 마침내 완전한 자학성 변태자가 되고, 여동생은 그러한 광경을 강제로 낱낱이 보고 있다가 머리가 이상해진다는 줄거리였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굴절되어 암울한 데다 비슷한 장면만 반복되고 있어서, 나는 도중에 좀 지겨워졌다.
"내가 여동생이라면 저 정도로 미치진 않겠어요. 좀 더 열심히 보고 있지" 하고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럴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 동생 말이야, 처녀 고교생 치곤 유두가 너무 검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정말."
미도리는 매우 열심히 그 영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처럼 열성적으로 본다면 입장료쯤은 너끈히 본전을 뽑고도 남을 거라고 나는 감탄했다. 미도리는 무슨 생각이 날 적마다 일일이 그걸 나에게 보고했다.
"어머머, 불쌍해, 저런 짓을 다하다니" 라든가, "지독해요, 셋에게 한꺼번에 당하면 망가지겠어요." 라느니, "와타나베, 나도 누가 저렇게 한 번 해 주면 좋겠어." 하는 따위였다. 나는 영화 구경보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쪽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휴식 시간에 장내를 둘러보니, 미도리 이외의 여자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가까이에 앉아 있던 학생같이 보이는 젊은 사내는 미도리를 보자 멀리 자리를 옮겨갔다.
"저 말이지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이런 거 보고 흥분돼요?"
"뭐, 그야 때때로" 하고 내가 말했다. "이런 영화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 진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장면이 나오면 여기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게 일제히 스탠드 업? 서른 개 마흔 개가 일제히? 그런 걸 생각하면 좀 이상한 기분이 안 들어요?"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고 나는 말했다.
두 번째 영화는 비교적 정상적인 영화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만큼 첫 번째 것보다 더 따분했다. 구순 성애가 너무나 흔히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런 장면마다 효과음이 영화관 내에 크게 울려 펴졌다.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이 기묘한 혹성 위에서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 이상한 감동을 느꼈다.
"누가 저런 소리를 생각해 냈을까?" 하고 나는 미도리에게 말했다.
"나, 저 소리 좋아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섹스가 진행될 때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소리가 난다는 걸 난 그때까지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침대가 삐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한 장면들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나갔다.
미도리는 처음엔 재미있어 했으나 차차 지겨워졌던지 그만 나가자고 나를 끌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신주쿠 거리의 공기가 그때처럼 상쾌하게 느껴진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재미있었어."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다음에 또 구경 와요."
"몇 번 봐도 다 그게 그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할 수 없잖아요, 우리도 늘 그게 그거니까."
듣고 보니 사실 그건 그랬다.
영화관에서 나와 우리는 다시 다른 바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나는 위스키를 마셨고, 미도리는 뭔지 알 수 없는 칵테일을 서너 잔 마셨다. 그리고는 바에서 나오자마자 미도리는 나무에 올라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부근엔 나무 같은 건 없어. 그리고 그렇게 휘청거려선 나무에 못 올라간다고" 하고 나는 말했다.
"자기는 언제나 분별력 있게 굴면서 사람을 기죽여요, 취하고 싶어서 취한 거예요. 그것으로 좋은 거 아네요? 취해도 나무쯤은 올라 갈 수 있다고요. 흐응, 높디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매미처럼 오줌이나 뿌려 주는 거예요."
"지금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지?"
"그래요."
나는 신주쿠 역의 유료 화장실까지 미도리를 데려가서는, 동전을 내고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매점에서 석간신문을 사서 그걸 읽으면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도리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15분이 지나 좀 걱정스러워서, 가보아야 하나, 하고 생각할 즈음에야 겨우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미안해요, 안자 있다가 그만 졸아 버렸지 뭐예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기분은 어때?" 하고 나는 코트를 입혀 주면서 물었다.
"그렇게 좋진 않아."
"집까지 바래다줄게" 하고 나는 말했다. "집에 가서 목욕하고 푹 자면 다 풀릴 거야. 피곤해서 그래."
"집엔 안가요. 지금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없고, 그런 데서 혼자 자긴 싫어요."
"이런, 그럼 대체 어떻게 할 거야?" 하고 내가 물었다.
"이 근처 러브호텔에 들어가서 우리 둘이 껴안고 자는 거야. 아침까지 푹. 그리고 아침이 되면 여기 아무데서나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학교에 가요."
"처음부터 그러려고 날 불러냈나?"
"물론이에요."
"그럼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불러내야 했잖아. 아무리 봐도 그게 정상이잖아. 애인이란 그럴 때를 위해 있는 거라고."
"하지만 나, 자기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럴 순 없어" 하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첫째 난 열두시 까지 기숙사에 돌아가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무단외박이 되니까. 전에 한 번 그랬다가 혼이 났어. 둘째 나 역시 여자와 자면 아무래도 참을 수 없으니까, 그걸 참으면서 까지 끙끙거리긴 싫어. 정말, 무리하게 떼를 쓸지도 모르니까."
"날 때리고, 결박하고 뒤에서?"
"이것 봐, 농담이 아니야, 이건."
"하지만 나 외로워요. 지독하게 외로워요. 나도 미안한 줄은 알지요. 아무것도 주지는 않으면서 온갖 것을 요구만 하고. 제멋대로 지껄이고, 불러내고, 끌고 다니고.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는 상대는 자기밖에 없어. 지금까지 20평생 동안 난 단 한 번도 내 응석이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고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전혀 모른 척했고, 그 사람도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응석을 부리면 화를 내거든. 그리곤 싸움을 하죠. 그러니까 이런 말은 정말 자기에게밖에 못해요. 그리고 나, 지금 지칠 대로 지쳐 있어요. 누구한테 선가 귀엽다든가 예쁘다든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잠들고 싶어요. 그저 그것뿐이에요. 눈을 뜨면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있을 테고, 두 번 다시 이런 일방적인 요구는 하지 않겠어요, 절대로. 아주 착한 애가 될 테니까."
"그래도 곤란해."
"부탁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나, 여기 주저앉아서 밤새도록 엉엉 울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과 자버릴 거예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나가사와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기숙사에 돌아와 있는 것처럼 손을 써 줄 수 없겠는가 하고 부탁했다. 여자 애와 지금 같이 있거든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알았어,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힘이 되어 주지, 하고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명패를 재실 쪽으로 바꿔 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놀다와. 내일 아침 내 방 창문으로 해서 들어오면 될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신세는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잘 됐어?"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럭저럭" 하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디스코라도 추러 가요."
"너 피곤하잖아?"
"그런 거라면 전혀 관계없다고요."
확실히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 미도리는 조금씩 기운을 회복해 가는 것 같았다. 위스키 코크를 두 잔 더 마시더니, 이마에 땀이 밸 때까지 춤을 추었다.
"아주 즐거워" 하고 미도리는 테이블에 앉아 한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렇게 춤을 추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몸을 움직이니까 정신도 해방되는 것 같아요."
"너야 늘 해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지도 못해" 하고 그녀는 방긋 웃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기운이 나니까 배고 고프네요. 피자라도 먹을래요?"
나는 내가 잘 가는 피자 하우스로 그녀를 안내한 후, 생맥주와 안초비 피자를 주문했다.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열두 조각 중 넷만을 먹고, 나머지는 미도리가 모두 먹어치웠다.
"꽤 회복이 빠르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고 휘청거리더니"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응석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야"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래서 받침대가 필요 없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 피자 정말 맛있군요."
"저, 정말 집에 지금 아무도 없어?"
"그래요, 언니도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어요. 언니는 겁이 많아서 내가 없으면 혼자 못 자요."
"러브호텔 같은 덴 가지말자"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데 가봤자 허무해질 뿐이야. 그런 거 집어치우고 너희 집으로 가자. 내가 덮은 이불 정도야 있겠지?"
미도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린 야마노테선 전철을 타고 오쓰카까지 가서, 고바야시 서점의 셔터를 올렸다. 셔터에는 휴업중이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셔터는 오랫동안 올려지지 않았던 모양으로, 어두운 점포 안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서가의 절반쯤이 비어 있었고, 잡지는 거의 다 반품할 양으로 묶여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점포는 더 휑해 보였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파도에 의해 밀어붙여진 해변의 폐선처럼 보였다.
"가게를 계속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하고 내가 물었다.
"팔기로 했어요." 하고 미도리가 쓸쓸히 말했다. "팔아서 언니와 그 돈을 반으로 나눌 거예요. 그리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고 몸 하나로 살아갈 거예요. 언니는 내년에 결혼하고 나는 앞으로 3년 남짓 대학에 다니면 돼요. 그만한 돈은 될 거예요. 아르바이트도 할 거고, 가게가 팔리면 어디 아파트라도 빌려서 당분간 언니와 둘이 살려고 해요."
"가겐 팔릴 것 같아?"
"그럴 것 같아요. 아는 사람 중에 털실 가게를 열겠다는 사람이 얼마 전부터 여길 팔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가게를 장만하고, 빚을 조금씩 갚으며, 갖은 애를 다 썼는데 결국 남은 것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잖아요. 마치 물거품이 스러지듯 사라진 거예요."
"네가 남아 있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 하고 미도리는 반문하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켠 후 토해 냈다. "그만 위로 올라가요. 여긴 추워요."
2층으로 올라가자 그녀는 나를 식탁 앞에 앉혀놓고 목욕물을 끓였다. 그 사이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엽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목욕물이 데워질 때까지 그녀와 나는 식탁을 사이에 두로 마주앉아 엽차를 마셨다.
그녀는 탁자 위에 턱을 괴고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와, 냉장고 온도 조절 장치의 돌아가다 멈추다 하는 소리 이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타나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자기 꽤 재미있게 생겼네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나는 조금은 기분이 상해서 대꾸했다.
"나 역시 얼굴이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기 얼굴은 뭐랄까, 자꾸 보고 있으면 차츰 이 사람이면 됐다 싶어지거든요."
"나 자신도 가끔 날 그렇게 생각하지. 뭐, 그런 대로 됐다고 말이야."
"나, 지금 나쁘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난 말이지, 감정 표현이 아주 서툴러요. 그래서 자주 오해를 받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야. 이 말은 조금 전에도 했던가요?"
"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자면 나도 조금씩 남자에 대해 배우고 있는 거예요."
미도리는 말보로 담배를 들고 오더니 한 개비를 꺼내 피웠다.
"최초가 제로라면 배울 것도 많은 법이지."
"그럴 테지."
"아 그래요. 우리 아버지한테 향을 피워 주겠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영정이 있는 방으로 가서 향을 피우고 합장을 했다.
"나 말이야, 얼마 전에 아버지 사진 앞에서 옷을 홀랑 다 벗었댔어요. 다 벗고 알몸을 보여 드렸어요, 요가 식으로 앉아서. 아버지, 이게 젖이고, 이게 배꼽이고....."
"그건 또 왜?" 하고 나는 아연해서 물었다.
"그저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내 존재의 절반은 아버지의 정자잖아요? 보여 드리면 어때요. 이게 당신의 딸이라고. 저 좀 취한 탓도 있었지만."
"흐음."
"그때 언니가 들어오더니 기겁을 하더군요. 내가 아버지 영정 앞에서 홀랑 벗고 서 있었으니 기겁을 할 수밖에....."
"으음, 그랬겠지."
"그래서 내 뜻을 설명해 줬어요. 이러이러하다고. 그러니 언니도 내 옆에 앉아 옷을 벗고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라고. 하지만 언니는 벗지 않았어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나가 버리더군요. 그런 면에서 언니는 너무 보수적이에요."
"비교적 정상인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음, 자기는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어요?"
"난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데 퍽 어설픈 편이야. 그런데 그분과는 둘이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어. 그런 대로 부담스럽지 않았으니까. 여러 가지로 이야기도 했고."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에우리피데스."
미도리는 몹시 즐겁다는 듯 깔깔댔다.
"정말 별스럽군요. 죽음을 앞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초면의 병자에게 난데없이 에우리피데스 이야기를 하다니! 아마도 그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버지 영정 앞에서 벌거벗는 딸도 아마 없을 거야."
미도리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불단의 종을 땡 하고 쳤다.
"아버지 편히 쉬세요. 우린 지금부터 즐겁게 지낼 테니까 안심하고 주무세요. 이젠 고통스럽지 않지요? 돌아가셨으니까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아직도 아프시면 하느님한테 대드세요.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요. 천당에서 어머니 만나 사이좋게 지내세요. 소변 시중을 들 때 그걸 보았는데, 정말 훌륭했어요. 그러니 힘내세요. 그럼 편히 주무세요."
우리는 교대로 목욕을 하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가 몇 번밖에 사용 안한, 새것과 다름없는 파자마를 입었다. 조금 작은 듯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도리는 불단이 있는 방에 내 이불을 펴주었다.
"불단 앞인데 무섭지 않아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한 게 없으니까"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잠들 때 까진 곁에 있으면서 안아 줘요, 응?"
"좋아."
나는 미도리의 작은 침대 가장자리에서 몇 번이나 굴러 떨어질 뻔 하면서도, 줄곧 그녀를 안고 있었다. 미도리는 내 가슴팍에 코를 밀어붙이고, 내 허리에 손을 감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그녀의 등으로 돌리고, 왼손으론 침대를 잡은 채 떨어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었다. 성적으로 달아오를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내 코앞엔 머리가 있었고, 그 짧게 컷한 머리카락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저, 저, 뭔가 말해 줘요" 하고 미도리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요.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불러 줘요."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너무 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미도리는 얼굴을 들더니 나를 보았다.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해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멋진 말을 해줘요."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미도리는 깊숙이 내 품에 안겨 왔다.
"최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만큼 내가 좋으면 내 말을 뭐든지 들어주겠죠? 화 안내죠?"
"그럼."
"그리고 날 언제까지나 소중히 생각해 줘요."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짧고 부드러운, 사내 애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걱정 마, 모든 게 다 잘 될 테니까."
"하지만 겁이 나요, 나"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미도리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 있자니,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가지런한 숨소리도 들려 왔기에,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이라도 읽을까 하였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책 같은 게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미도리의 방으로 가서 책꽂이의 책이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발소리가 그녀를 깨우게 될까봐 그만 두었다.
한참 멍하니 맥주를 마시는 동안에 아, 그래, 이 집은 책방이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등을 켜고 문고본을 살펴보았다. 읽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태반은 벌써 읽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읽을거리가 필요했기에 오랜 재고로 등표지가 변색돼 버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고르고, 책값에 해당되는 돈을 카운터에 놓았다. 적어도 그 만큼은 고바야시 서점에 재고가 줄어든 셈이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그 책을 내리 읽었다. 처음으로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그리고 8년 후, 나는 여자의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여자 친구의 죽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사이즈가 작은 파자마를 입은 채 같은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참 기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내가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읽는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수레바퀴 밑에서는 진부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나는 밤이 깊어 정적 어린 부엌에서 나름대로 제법 즐기며 그 소설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갔다. 선반 위에 먼지 쌓인 브랜디가 한 병 있기에 커피 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브랜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긴 하였지만 잠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세 시 조금 전에 조용히 미도리를 살피러 갔지만, 그녀는 상당히 고단했던 모양으로 푹 잠이 들어 있었다. 창밖에 서 있는 상점가의 가로등이 달빛처럼 희뿌옇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에 등을 돌린 자세로 그녀는 자고 있었다.
미도리의 몸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귀를 가까이 대어 보니 숨결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부친을 꼭 닮은 자세라고 나는 생각했다.
침대 옆엔 여행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흰 코트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앞의 벽엔 스누피가 그려진 달력이 걸려 있었다.
나는 창문의 커튼을 조금 열고 인적 없는 상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상점마다 다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술집 앞에 줄지어 있는 자동판매기들만이 몸을 움츠린 모습으로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거리 트럭의 윙윙거리는 타이어 소리가 이따금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진동시켰다. 나는 부엌으로 돌아가 브랜디를 한 잔 더 마신 다음 계속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었다.
그 책을 다 읽어갈 무렵, 하늘은 이미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물을 끓여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테이블 위에 있던 메모지에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 브랜디를 조금 실례했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샀다, 날이 밝았으니 돌아간다, 안녕, 이라고 나는 썼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잠들어 있는 너는 정말 사랑스러웠어. 하고 덧붙여 썼다. 그러고 나서 커피 잔을 씻고, 부엌 전 등을 끄고, 계단을 내려와 조용히 셔터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웃 사람들이 보면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했지만, 아침 여섯 시 이전에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까마귀가 지붕 위에 앉아 주변을 노려보듯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도리 방의 핑크색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잠깐 올려다 본 뒤 전철역까지 걸어갔고, 종점에서 내려 기숙사까지 또 걸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대중식당이 문을 열었기에 거기서 따뜻한 밥과 된장국, 그리고 배추절임과 계란 후라이를 먹었다. 그리고 기숙사 뒤켠으로 돌아가 1층의 나가사와의 방 창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나가사와는 금방 창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라도 마실 텐가?" 라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가, 이를 닦고는 바지를 벗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꿈도 없는, 무거운 납덩이와 같은 잠이 찾아들었다.
나는 매주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녀에게서도 몇 통인가의 편지가 왔다. 그리 긴 편지는 아니었다. 11월에 드니 점점 아침저녁으로 더 추워져 간다고 편지에 씌어 있었다.
당신이 도쿄로 돌아가 여기에서 없어져 버린 것과 가을이 깊어진 것이 거의 동시였기 때문에, 내 몸 한구석이 휑하니 빈 구멍이 나 버린 듯한 기분은 당신이 없어진 탓인지 계절의 탓인지 얼마동안은 제대로 분간을 못했어요.
레이코 언니와는 자주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편지에 안부 전해 달라는 부탁도 받았고, 레이코 언니는 언제나 다름없이 내게 친절히 대해 주고 있어요. 그녀가 없었던들 여기의 생활을 내가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의문스러워요.
외로워지면 나는 울어 버려요.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레이코 언니는 말하지요. 하지만 외로움이란 정말 괴로운 것이에요. 내가 외로워하고 있으면 밤의 어두움 속에서 온갖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곤 해요. 밤에 나무들이 바람 곁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듯 온갖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 와요. 이미 저승사람이 된 기즈키나 언니와도 그럴 때 많은 이야기를 하지요. 그들 역시 외로워서 말상대를 찾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밤엔 자주 당신의 편지를 되읽곤 해요. 밖에서 들어오는 대부분의 것은 나의 머리를 혼란시키지만, 당신이 써서 보내 주는 당신 주변의 세계만은 나를 더 없이 편안하게 해줘요. 이상하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고, 레이코 언니도 마찬가지로 몇 번은 다시 읽어요. 그리고 그 내용을 두고 둘이서 이야길 하곤 해요. 미도리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가 난 퍽 좋았어요.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당신의 편지를, 몇 안 되는 우리 오락 중의 하나로-편지는 여기선 오락이에요-항상 즐겁게 기다리고 있어요.
나도 되도록 시간을 내서 편지를 쓰려고 애는 쓰지만, 편지지를 대하기만 하면 마음이 곧 가라앉고 말아요. 이 편지도 지금 온갖 힘을 다해 쓰고 있는 거예요.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레이코 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 줘요. 난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것들이 글이 되어 나와 주질 않아요. 그래서 나는 편지 쓰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답니다.
미도리라는 여자는 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 편지를 읽은 후 그녀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같다고 말하니까, 레이코 언니는 당연하지, 나도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걸 하고 말했어요.
우린 요즘 매일같이 송이버섯도 캐고 밤도 주워서, 그걸 먹고 있어요. 밤밥이나 송이버섯 밥이 계속 되고 있지만, 아주 맛이 있고 물리지도 않아요. 그러나 레이코 언니는 여전히 조금밖에 안 먹고, 담배만 계속 피우고 있어요, 새들도 토끼들도 잘 있어요, 안녕.
나의 스무 살 생일이 3일 지난 뒤에 나오코로부터 소포가 왔다. 그 속에는 포도색의 라운드 스웨터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하고 나오코는 적고 있었다.
당신의 스무 살이 행복하기를 빌고 있어요. 나의 스무 살은 어쩐지 엉망으로 끝날 것 같지만, 당신이 내 몫까지 모두 행복해진다면 더 이상이 기쁨이 없을 것 같아요. 이건 진심이에요.
이 스웨터는 레이코 언니와 내가 반반씩 짠 거예요. 나 혼자서 했더라면 아마 내년 밸런타인데이까지 걸렸을 거예요. 잘 짜여 진 절반이 그녀의 솜씨고, 잘못 짜여 진 절반이 내 솜씨에요.
레이코 언니는 무엇을 해도 솜씨가 좋아서, 그녀를 보고 있으려면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만 느껴져요. 내가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란 결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안녕, 건강해요.
레이코가 쓴 짧은 메시지도 들어 있었다.
잘 있어요? 당신에게 나오코는 최고의 행복과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저 손재주 없는 쓸모없는 여자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도 뭐, 간신히 때 맞춰 스웨터를 완성시켰어요. 어때요, 멋지죠? 색깔과 모양은 둘이서 결정했어요. 생일을 축하해요.
제 10 장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 것
1969년이라는 해는, 나에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진창을 떠올리게 한다. 한 발짝 발을 떼어놓을 적마다 신발이 훌렁 벗겨질 것만 같은 깊고 끈적한 진창이다. 그러한 진창 속을 나는 무척이나 힘겹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 암울한 빛의 진창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마저도 그러한 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느리게 뒤뚱뒤뚱 흐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미 저만큼 앞장서서 가고 있었으나, 나와 나의 시간만은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 주위의 세계는 크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존 콜트레인을 비롯한 이런 저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변혁을 부르짖었고, 그 변혁은 바로 가까운 저 길모퉁이에까지 다가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사건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전혀 무의미한 배경 그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거의 고개를 처박다시피 숙이고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눈에 비쳐지는 것은 무한히 계속되는 진창뿐이었다. 오른발을 앞에 내딛고, 그리고 또 왼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치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조차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가을은 겨울로 바뀌어 갔지만, 내 생활에 변화다운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대학에 다니고, 일주일에 세 번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이따금 위대한 개츠비를 되읽었고, 일요일이 되면 빨래를 하고, 나오코에게 긴 편지를 썼다. 때때로 미도리와 만나 식사를 하거나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고바야시 서점을 매각하는 일은 잘 진행되어,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지하철 묘가다니 역 근처에 2DK 짜리 아파트를 빌려 살게 되었다. 언니가 결혼하면 거길 나와서 다른 아파트를 빌릴 거라고 미도리는 말했다.
나는 한 번 그곳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았다. 양지 바른 깨끗한 아파트였는데, 미도리는 서점에서 살 때보다는 생활이 퍽 즐거운 듯이 보였다.
나가사와 선배가 몇 번인가 여자 사냥을 가자고 유혹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일이 있다고 거절했다. 모든 것이 번거롭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와 자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밤거리에 나가 술을 마시고, 적당한 여자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에 간다는 과정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지겨웠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염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싫증도 내지 않는 나가사와 라는 사나이에게 새삼스럽게 외경스러움을 느꼈다.
하쓰미에게 그런 말을 들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름도 알 수 없는 하찮은 여자와 자느니 나오코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편이 나에게는 행복스러웠다. 초원의 한가운데서 나를 사정으로 이끌어 준 나오코의 손가락의 감촉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12월 초에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내, 겨울 방학에 그곳에 가도 좋은가를 물었다. 레이코 여사가 대신 답장을 주었다. 꼭 와줄 것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오코는 조금 편지 쓰기가 어려워서 내가 대신 쓴 거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진 말라, 파도 같은 것이 일고 있을 따름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대학이 방학에 들어가자 나는 배낭에 짐을 챙기고, 설화를 신은 후 교토로 떠났다. 그 기묘한 의사가 하던 말대로 눈이 쌓인 산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지난번처럼 나오코와 레이코 여사의 방에서 이틀을 묵었고, 지난번과 거의 비슷한 사흘을 보냈다. 해가 저물면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쳤고,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는 피크닉 대신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겼다.
스키를 신고 한 시간쯤 산 속을 달렸더니 숨이 차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한가한 시간에는 모두가 제설 작업하는 걸 도왔다. 미야타라고 하는 그 기묘한 의사는 또 우리들의 저녁 테이블에 찾아와서, 왜 사람의 중지는 인지보다 길고, 발가락은 그 반대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수위 오무라 씨는 또 도쿄에 돼지고기 이야기를 했다. 레이코 여사는 내가 선물대신 들고 간 레코드판을 받고 몹시 기뻐해 주었고, 그 중의 몇 곡은 악보로 옮겨 기타로 연주했다.
가을에 왔을 적보다 나오코는 훨씬 말수가 적어져 있었다. 셋이 있으면 그녀는 거의 말이 없었고, 소파에 앉아서 그저 싱글싱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을 더 레이코 여사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마음 쓰지 말아요."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지금은 그럴 때에요. 말하기보다 듣고 있는 편이 더 즐거워요."
레이코 여사가 일을 만들어 어딘 가로 가버리면 나와 나오코는 침대 위에서 포옹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며 어깨, 그리고 젖가슴에 가만히 입맞춤을 했고, 나오코는 지난번처럼 다시 손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사정이 끝나자 자는 나오코를 끌어안고, 이 두 달 동안 내내 네 손의 감촉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했다고.
"다른 누구와도 자지 않았어요?" 하고 나오코가 물었다.
"안 잤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저, 그럼 이것도 잊지 말아 줘요" 하고 그녀는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나의 페니스에다 살며시 입술을 대고, 그리고 따뜻하게 감싸면서 혀를 간지럽게 움직였다. 나오코의 매끄러운 머리칼이 나의 아랫배를 슬면서 그녀의 입술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찰랑 흔들렸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사정을 했다.
"기억해 주겠어요?" 하고 그 뒤에 그녀가 물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거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나오코를 힘껏 끌어당겨 속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그 작은 숲에 이르렀으나 그곳은 메말라 있었다. 나오코는 머리를 흔들며 나의 손을 치웠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번 학년이 끝나면 기숙사를 나와서, 어딘가에 방을 구해 보려고 해" 라고 나는 말했다. "기숙사 생활도 점점 지겹고 아르바이트를 하면 생활비는 그럭저럭 메워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얘긴데 나오코만 좋다면 우리 함께 살았으면 해. 전에도 말했지만."
"고마워요. 그렇게 얘기해 주니 몹시 기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여기도 나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 조용하고, 환경도 좋고, 레이코 여사도 좋은 사람이고.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은 못 돼. 오래 있기엔 장소가 너무 특수하니까.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나가기가 더 힘들게 될 거야.
나오코는 아무 대구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참 밖엔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구름이 어둡게 해를 가리며 낮게 떠 있어서 눈으로 뒤덮인 대지와 하늘 사이에는 아주 작은 공간밖에 열려 있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 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나는 3월까진 이사할 테니까, 내게 오고 싶으면 언제라고 오면 돼."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들어 올릴 때처럼 두 팔로 나오코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나는 알몸이었고 그녀는 앙증맞은 삼각 흰 팬티만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았다.
"왜 난 젖어 오질 않지?" 하고 나오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된 건 정말 그때 한 번뿐이에요. 4월의 그 스무 살의 생일날. 자기에게 안겼던 그 밤뿐이에요. 왜 안 되는지 몰라."
"그건 정신적인 거니까 시간이 흐르면 잘 될 거야. 조급해 할 필요 없어."
"내 문제는 다 정상적인 거예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만일 내가 일생 동안 젖는 일이 없고, 일생 동안 섹스를 못해도 자긴 변함없이 날 좋아할 수 있겠어요? 언제까지나 손과 입술만으로 참을 수 있어요? 아니면 섹스 문제는 다른 여자와 자며 해결할 거예요?"
"난 본질적으로 낙천적인 인간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티셔츠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플란넬 셔츠를 입은 후, 청바지를 입었다. 나도 옷을 입었다.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자기도 천천히 생각해 봐요."
"생각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나오코의 펠라티오는 굉장했어."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방긋 미소를 지었다.
"기즈키도 그렇게 말했어요."
"나와 그는 생각이나 취미 면에서 모든 게 잘 맞았었지" 하고 말하고 나는 웃었다.
그리고 우린 부엌에서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조금씩 기즈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조심조심 언어를 선택하면서 그녀는 이야기를 했다.
눈이 내렸다 멎었다 했지만, 사흘 동안 하루도 맑은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3월에 또 올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헤어질 적에 말했다. 그리고 두터운 코트를 입은 채 그녀를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안녕, 하고 그녀가 말했다.
1970년 이라는 낯선 울림을 가진 해가 오고, 나의 십대는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진창에 발을 내디뎠다.
학년말 시험이 있었고 나는 비교적 쉽게 그것을 통과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거의 매일 강의실에 나갔던 덕분에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에 통과하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기숙사에는 몇 번인가 트러블이 있었다. 운동권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던 학생들이 기숙사 내에 헬멧이나 쇠파이프를 숨겨 놓고 있었고, 그 때문에 기숙사 사감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체육계 학생들과 충돌이 벌어져, 두 사람이 부상을 입고 여섯 명이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그 사건은 꽤나 오래까지 꼬리를 물어 매일처럼 어디에선가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기숙사 내에는 계속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 불똥이 튀어 하마터면 체육계 학생들에게 얻어맞을 뻔했지만, 나가사와 선배가 중간에 끼어들어 무마해 주었다. 어쨌거나 나는 기숙사에서 나오려는 참이었다.
시험이 일단락되자 나는 열심히 방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겨우 기치조지 교외에서 알맞은 집을 찾았다.
교통은 좀 불편했지만 고맙게도 독립 가옥이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집을 얻은 셈이었다. 넓은 땅 한 귀퉁이에 문지기의 살림집이나 별채처럼 동떨어져 있었고, 본채와의 사이에는 적잖이 황폐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은 앞문을 사용하고 나는 뒷문을 사용하게 되어 있어 프라이버시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방 하나에 작은 주방과 화장실, 그리고 넓은 미닫이 옷장이 붙어 있고, 뜰을 마주 보고 있는 툇마루까지 있었다. 내년쯤 어쩌면 손자가 도쿄로 올라올지 모르니 그때는 비워 줘야 한다는 게 조건이었지만, 그 덕에 시세보다 집세도 제법 쌌다. 주인은 사람이 좋아 보이는 노부부였고, 따로 어렵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마음 편히 살아 달라고 했다.
이사는 나가사와 선배가 거들어 주었다. 어디선가 작은 트럭을 빌려 와선 내 짐을 날라주고, 약속대로 냉장고와 텔레비전 그리고 대형 보온병을 물려주었다. 나에겐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 이틀 후엔 그도 기숙사를 나와 미타의 어느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어 있었다.
"당분간은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잘 지내" 하고 헤어지면서 나가사와가 말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말했듯이 먼 훗날, 묘한 곳에서 널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서로 바꿔치기한 여자 말인데, 미인 아닌 여자 쪽이 더 좋았어."
"동감입니다"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선배님, 하쓰미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고, 보기보다 상처 받기 쉬운 여자인 것 같으니까요."
"음, 그건 알고 있어" 하고 그는 수긍했다. "그래서 진심을 말하는 건데, 내 뒤를 네가 인계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너와 하쓰미 같으면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테니까."
"농담하지 마세요." 하고 나는 아연해서 말했다.
"농담이야" 하고 나가사와가 말했다. "자, 행운이 있기를.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너도 상당히 강한 편이니까 어떻게든 잘해 나가리라 믿는다. 그런데 한 가지 충고해도 될까?"
"좋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동정하지 말아" 하고 그가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기억해 두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는 새로운 세계로, 나는 나의 진창으로 되돌아갔다.
이사한 지 사흘 후에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로운 집에 대해 쓰고, 기숙사의 갈등에서 벗어나 더 이상 되지 못한 패거리들의 쓸데없는 생각에 휘말려들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기쁘고 시원하다, 여기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고 생각한다고.
창밖은 넓은 정원이며, 동네 고양이들의 집회 장소가 되고 있다. 한가할 적에는 툇마루에 누워 그런 고양이들을 바라보곤 한다. 도저히 몇 마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지만, 어쨌든 많은 수의 고양이야. 그놈들은 모두가 뒹굴며 햇살을 쬐고 있다.
내가 이 한구석에 살게 된 것이 그들로서는 별로 탐탁지 않은 것 같지만, 오래 된 치즈를 놓아주었더니 그래도 몇 마린가는 주춤주춤 다가와서 먹는다. 이러는 동안에 그들과도 사이가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 한 마리는 귀가 절반 떨어져 나간 얼룩무늬 고양인데, 이게 놀랄 만큼 그 기숙사 사감을 닮았다. 지금이라도 정원에서 국기를 올리기 시작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학교에서는 좀 멀어졌지만, 전공 과정에 들어가면 오전 강의가 줄어드니까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전철 속에서 여유 있게 책을 읽을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 됐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할 일은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주일에 3, 4일 정도 힘들지 않게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자리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렇게만 되면 매일 태엽을 감는 그런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나로선 결론을 서두를 생각은 없지만, 봄이라는 계절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썩 좋은 계절이다. 만일 우리가 4월부터 함께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되면 나오코도 대학에 복학이 될 테고. 함께 사는 게 문제가 된다면, 이 근처에 나오코가 살 만한 아파트를 구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바로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봄이라는 계절에 꼭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이 좋겠다면 여름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이에 대해 나오코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답장해 주었으면 한다.
난 앞으로 좀 더 성실히 아르바이트를 해볼 작정이다. 이사 비용을 충당해야 하니까. 자취 생활을 시작해 보니 이것저것 돈 드는 데가 제법 많다. 냄비며 식기 같은 것도 마련해야 하니까.
하지만 3월이 되면 시간이 나니까 꼭 나오코를 만나러 가고 싶다. 편리한 날짜를 알려 주면 좋겠다. 그러면 그날에 맞춰 교토로 가려고 생각한다. 나오코와 만나는 날을 즐거움으로 간직하면서 답장을 기다린다.
그러고 나서 2, 3일 동안 나는 기치조지의 거리에서 조금씩 이것저것을 사들인 후, 집에서 내 손으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목재상에서 제목을 사다가 자르고 가다듬어 선반도 올렸고, 조미료도 제법 갖추어 놓았다. 생후 6개월 정도 되는 흰 암고양이가 나와 얼굴이 익어 함께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그놈에게는 갈매기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대강 그 정도나마 모양이 갖추어지자 나는 시내 페인트집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얻어 2주 동안 조수로 일했다. 급료는 좋았지만 대단한 노동이었고 신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줄곧 멍했다.
하루 일이 끝나면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와 놀고, 그리고는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나도 나오코한테선 답장이 없었다.
나는 페인트칠을 하면서 문득 미도리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3주 가까이 미도리와는 연락이 없었고, 이사를 한 것조차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슬슬 이사를 할까 생각한다고 내가 말했고 그러냐고 말한 것이 끝이었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미도리네 아파트 전화번호를 돌렸다. 언니인 듯싶은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내가 이름을 대자 잠깐만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미도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 말이죠. 미도리가 몹시 화를 내며, 학생하곤 이야기하기 싫다는 데요." 하고 언니로 짐작되는 사람이 그녀의 말을 전했다.
"이사할 적에 미도리에게 아무 연락도 안 하셨죠?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 버린 뒤, 감감 무소식이었죠? 그래서 굉장히 화가 나 있는 거예요. 그 앤 한 번 화를 내면 웬만해서 풀리지 않아요. 동물과 같으니까요."
"제가 설명을 할 테니 좀 바꿔 주실 수 없습니까?"
"설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대요."
"그럼 지금 설명할 테니 죄송하지만 미도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싫어요, 그런 거." 하고 언니로 보이는 사람이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 건 직접 해요. 학생은 남자지요? 스스로 책임을 지고 현명하게 해결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사과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도리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사에 집 정리에 돈을 벌기 위한 노동에 쫓겨 미도리의 일은 전혀 생각조차 않았던 것이다. 미도리뿐만 아니라 나오코조차도 거의 생각지를 못했다. 나에겐 어려서부터 그런 점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열중하면 그 밖의 주변의 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반대로 미도리가 행방을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이사를 하고, 그대로 3주일 동안이나 연락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를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나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것도 꽤 깊은 상처일 것이다. 우리가 비록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부분에선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남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공연히 상처를 입게 한다는 것이 몹시 싫었다.
나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새 책상에 앉아 미도리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그대로 썼다. 변명도 설명도 집어치우고 내가 무신경했음과 부주의했음을 사과했다. 미도리가 무척 보고 싶다, 새로 이사 온 집도 구경 와 주었으면 좋겠다. 답장을 바란다 하고 썼다. 그리고 속달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기묘한 봄의 시작이었다. 나는 봄방학 동안 줄곧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도 갈 수 없고, 고향에도 갈 수 없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었다. 며칠쯤 만나러 와 달라는 나오코의 편지가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낮에는 기치조지로 나가서 두 편 연속 상영하는 영화를 보거나, 재즈 음악 다방에 앉아 반나절이 넘도록 책을 읽곤 했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계속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 편지에는 답장에 관해선 전혀 쓰지를 않았다. 그녀를 재촉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페인트 가게에서 하는 일에 대해 썼고,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정원의 복숭아꽃에 대한 이야기, 친절한 두부 집 할머니와 심술궂은 채소 가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내가 매일 어떤 음식을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서 썼다. 그래도 답장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듣거나 하는 것에도 지치자 나는 조금씩 정원을 손질했다. 주인한테는 큰 빗자루와 갈퀴, 그리고 쓰레받기에다 전지가위까지 얻어 잡초를 뽑고, 웃자란 식목들을 적당하게 잘라 다듬었다. 조금 손질을 했을 뿐인데도 정원은 제법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자니, 주인이 나를 불러 차라도 한잔 들고 하라고 했다.
나는 안채의 툇마루에 앉아 그와 둘이서 차를 마시고, 쌀 과자를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퇴직을 한 뒤에 한동안 보험 회사의 임원으로 있다가, 2년 전에 그것도 그만두고 지금은 이렇듯 한가로이 살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집도 땅도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독립해 버려 아무 일 하지 않고도 한가로이 노후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줄곧 부부가 둘이서 여행을 한다고.
"좋으시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좋질 않아." 하고 그가 말했다. "여행 같은 건 하나도 재미가 없어. 일을 하는 게 훨씬 좋다고."
정원을 손질 안하고 버려 둔 것은 이 근처 정원사에 변변한 사람이 없어서고, 사실은 손수 조금씩 해나가면 되는데, 요즘에 코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풀을 만질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군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시고 나자 그는 창고를 나에게 보여 주면서 감사의 표시가 될 것도 없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전부 필요 없는 물건들이니,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갖다 쓰라고 했다.
창고 속엔 정말 갖가지 것이 쌓여 있었다. 목욕용 물통에서부터 어린이용 풀, 야구 방망이까지 있었다. 나는 고물 자전거와 그리 크지 않은 식탁과 의자 두 개, 그리고 거울과 기타를 발견하고 이것만 빌리고 싶다고 말했다. 좋을 대로 써도 좋다고 그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나는 꼬박 하루 걸려 자전거의 녹을 닦아 내고, 기름을 치고,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기어를 조정하고, 자전거 점포에 가서 클러치와이어를 새것으로 갈았다. 그러고 나니 자전거는 몰라볼 만큼 깨끗해졌다.
식탁은 먼지를 깨끗이 닦은 후 니스를 다시 칠했다. 기타 줄도 전부 새것으로 갈고, 갈라진 나무판은 접착제로 붙였다. 녹도 와이어브러시로 깨끗이 닦고 나사도 조정했다. 좋은 기타는 아니었지만 정확한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기타를 손에 들어 본 것도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옛날에 연습하였던 드리프터즈의 업 온더 루프를 더듬어 가며 천천히 쳐보았다. 신기한 정도로 어느 정도는 코드가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나는 쓰다 남은 목재로 우편함을 만들어 빨간 페인트를 칠한 후, 이름을 적어서 문 앞에 달아 놓았다. 그러나 4월 3일까지 거기에 들어 있는 우편물이란 고작 고등학교 동창회 통지뿐이었고, 나는 설사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런 모임에만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와 기즈키가 함께 있었던 클래스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걸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4월 4일 오후, 한 통의 편지가 우편함에 들어 있었지만, 그것은 레이코 여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겉봉 뒤에 이시다 레이코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가위로 깨끗이 잘라 툇마루에 앉아서 그것을 읽었다.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은 있었지만 읽어보니 바로 그대로였다.
첫머리에 레이코 여사는 답장이 너무 늦어진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나오코는 당신에게 답장을 쓰려고 내내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대신 써주마, 답장이 늦어지면 안 되니까 하고 설득했지만, 나오코는 이건 매우 개인적인 일이니 기어이 자신이 쓰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렇게 늦어져 버리고 말았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끼쳤는지 모르겠지만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레이코는 쓰고 있었다.
와타나베도 이 한 달 동안 나오코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고통스러웠는지 모르지만, 나오코로서도 이 한 달은 대단히 괴로운 한 달이었어요. 그것만을 알아주어야 해요. 정직하게 말해서 그녀의 지금 상황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에요. 그녀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 하고 있지만 아직 까지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질 않아요.
생각해 보면 최초의 징후는 편지가 잘 씌어 지지 않게 된 거였어요. 11월 말인가 12월 초부터 였지요. 그때부터 조금씩 환청이 시작되었어요. 그녀가 편지를 쓰려고 하면 여러 사람이 말을 걸어 편지 쓰는 걸 방해하는 거예요. 그녀가 할 말을 고르려고 하면 방해하는 거지요.
하지만 와타나베의 두 번째 방문 때까지만 해도 그런 증상은 비교적 경미했고, 나 자신도 정직히 말해서 그렇게 심각하게는 생각하질 않았어요. 우리들은 어느 정도 그런 증상의 주기 같은데 있으니까요.
하지만 와타나베가 돌아간 뒤부터 그 증상은 한결 심각하게 되고 말았어요. 그녀는 지금 일상 대화를 나누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답니다. 언어가 선택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나오코는 지금 몹시 혼란에 빠져 있어요. 혼란스러운 데다 겁까지 먹고 있는 거예요. 환청도 점점 심해지고요.
우린 매일 전문의와 함께 상담 진료를 받고 있어요. 나오코와 나, 그리고 의사와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 속의 상처 입은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려는 거예요.
나는 가능하다면 와타나베도 참가하는 상담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의사도 거기에 찬성했지만 나오코가 반대했어요. 그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만날 때에는 깨끗한 몸으로 만나고 싶으니까 라는게 그 이유였지요. 문제는 그게 아니고 하루빨리 회복되는 것이라고 나는 설득하였지만 그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전에도 와타나베에게 설명했다고 생각되지만 여긴 전문적인 병원은 아니에요. 물론 훌륭한 전문의가 있어 효과적인 치료도 행해지고 있지만 집중적인 치료는 곤란해요. 이곳 시설의 목적은 환자가 자기 치료를 가능케 하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 정확하게 말해서 의학적인 치료는 거기엔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 만일 나오코의 증상이 이 이상 악화된다면 다른 병원이나 의료 시설로 옮겨 갈 수밖에 없겠지요.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물론 그렇게 되어도 치료를 위한 일시적인 출장이니까 다시 이리로 돌아오는 건 가능해요. 혹은 일이 잘 돼서 그대로 완치되어 퇴원하게 될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우린 온 힘을 기울이고 있고, 나오코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와타나베도 그녀의 회복을 빌어 줘요. 그리고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편지를 보내주기 바래요.
편지를 다 일고 나자 나는 그대로 툇마루에 앉아 봄기운이 완연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오래된 벚꽃나무가 있어, 한밤의 등불처럼 흐드러진 벚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은 부드러웠지만 햇살은 어쩐지 뿌옇고 이상한 빛깔로 흐려 있었다. 조금 있으니 어디에선가 갈매기가 나타나 툇마루의 판자를 잠시 박박 긁더니 내 곁에서 기분 좋은 듯이 몸을 늘어뜨리고 잠들어 버렸다.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솔직하게 말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될 때가 오겠지,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라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등을 기둥에 댄 채, 갈매기를 쓸어 주면서 온종일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후로 접어들자 해가 기울며 어슴푸레해지더니 이윽고 푸른 빛 어둠이 정원을 감쌌다.
갈매기는 이미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벚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의 어둠 속에서 벚꽃은 마치 내게는 살갗을 터뜨리고 튀어나온 짓무른 살덩이처럼 보였다. 정원은 그러한 많은 살덩이의 달콤하고 무거운 썩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코의 육체를 생각했다. 나오코의 아름다운 육체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고, 그 피부로부터는 무수한 식물의 싹이 돋아나, 그 적색의 작은 싹들은 어디에선지 불어오는 바람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육체가 병을 앓아야 하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나오코를 조용히 놔두지 않는가, 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쳤지만 방안에도 역시 그놈의 향기는 충만해 있었다. 봄의 향기가 온 지면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오로지 썩은 냄새뿐이었다. 나는 커튼을 모두 쳐버린 방안에서 봄을 격렬하게 미워했다. 나는 봄이 나에게 가져온 것을 미워하고, 그것이 내 몸 깊은 곳에서 일으키고 있는 듯한 아픔 같은 것까지도 미워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강렬하게 무엇인가를 미워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나는 깊은 바다의 밑바닥을 걷고 있는 듯한 묘한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와도 나에겐 그것이 잘 들리지 않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도 그들은 그것을 듣지 못하였다. 마치 내 몸 주위에 무언가 빈틈없는 투명 유리 막이라도 둘러 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막 때문에 나는 외계와 제대로 접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도 또한 내 살에 접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은 무력하지만 이렇게 되어 있는 한, 그들도 나에 대해 무력할 것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배가 고파지면 내 주위에 있는 것을 씹고, 물을 마시고, 슬퍼지면 위스키를 마시고 잠을 잤다. 욕탕에도 들어가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사흘이 지나갔다.
4월 6일 미도리에게서 편지가 왔다. 4월 10일 수강 신청이 있으니 그날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쓰여 있었다.
답장을 이렇게 늦게 쓰긴 했지만 이걸로 서로 비겼으니, 이젠 사이좋게 지내자, 아무래도 나와 만나지 못하면 외로우니까 하고 편지에 적고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네 번이나 되풀이 읽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편지가 도대체 무슨 뜻이지? 나는 그저 막연하기만 하였고, 한 문장이 다음 문장과 이어지는 의미상의 접점이 잘 찾아지질 않았다. 어째서 수강 신청하는 날의 만남이 비김이 되고 무엇 때문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것일까? 어쩐지 내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의식이 턱없이 이완되고, 음지 식물의 뿌리처럼 물컹하게 부풀어져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아 라고 하던 나가사와의 말을 돌연 생각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것은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그래요, 나가사와 선배님 당신은 훌륭해요,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랜만에 빨래를 하고, 목욕탕에 가서 수염을 깎고, 방 청소를 하고, 시장을 보아 그럴 듯한 식사를 지어먹고, 그 동안 배를 주렸을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었으며, 맥주 이외의 술은 마시지 않고 체조를 삼십뿐 정도 했다. 수염을 깎을 때 거울을 보고 나서야 내 얼굴이 핼쑥해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유난히 튀어나와 있어서 어쩐지 남의 얼굴 같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좀 멀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레이코 여사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레이코여사의 편지를 받고 내가 쇼크를 받은 큰 이유는, 쾌유 쪽으로 믿고 있었던 나오코에 대한 나의 낙관적인 생각이 일순간에 뒤집혀진 데에 있었다. 나오코 스스로도 자기 병은 뿌리가 깊다는 말을 하였고, 레이코 여사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두 번의 만남에서 나오코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현실적인 사회로 복귀하겠다는 용기를 나오코가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용기를 되찾게 되기만 하면, 우리 둘이서 힘을 합쳐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내가 허약한 가설 위에 지어 올렸던 환상의 성은 레이코여사의 편지로 아차 하는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엔 무감각하고 밋밋한 평면이 덩그렇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나는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야만 했다. 나오코가 이번에 다시 한 번 회복하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회복이 된다 해도 회복 시의 그녀는 이전보다 더 쇠약하고 더욱 더 자신을 읽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새로운 상황에 나 자신을 적응시켜야만 한다. 물론 내가 강해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스스로 사기를 북돋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회복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아, 기즈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너와는 달리 난 살려고 결정했고 그것도 내 나름대로 올바르게 살겠다고 결정했다. 너도 틀림없이 괴로웠겠지만 나 역시 괴롭다, 정말이야. 이렇데 된 것도 네가 나오코를 남겨 놓고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는 않을 거다.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 쪽이 강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 질 거다. 그리고 성숙해 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껏은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나는 십대의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이란 것을 느낀다. 아아,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고.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머, 어떻게 된 거야 와타나베?"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많이 야위었잖아, 자기?"
"그런가?" 하고 나는 말했다.
"지나쳤던 거 아니에요, 그 유부녀 애인과?"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 해 10월 초부터 여자와 잔일은 한 번도 없어."
미도리는 갈라지는 듯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벌써 반년이나 그걸 안했다고요? 정말?"
"그래."
"그럼 왜 그렇게 야위었어요?"
"어른이 됐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내 양어깨를 잡고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표정을 찌푸리더니 곧 방긋 웃었다.
"정말이야, 확실히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전에 비해서....."
"어른이 됐기 때문이야."
"자긴 정말 최고에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하고 그녀는 정말 감격한 듯이 말했다. "식사하러 가요. 배가 고파요."
우린 문학부 뒤켠에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난 그날의 런치 정식을 주문했고, 그녀도 그게 좋겠다고 해서 둘 다 런치 정식을 주문했다.
"저, 화가 나 있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무엇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앙갚음으로 오랫동안 답장을 안 썼던 데 대해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자기는 정중히 사과를 했는데도 말이에요."
"내 쪽이 잘못했으니 할 수 없지 뭐" 하고 나는 말했다.
"언니는 그래선 못 쓴다고 날 나무랐어요. 너무나 마음이 좁고 너무나 어린애 같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든 마음이 후련해진 거 아냐? 앙갚음을 해서?"
"응."
"뭐, 그럼 됐지 않아."
"자기는 정말 너그러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자기, 정말 반년 동안이나 섹스를 안했어요?"
"안했어."
"그럼, 전에 날 잠들게 해 주었을 때, 사실은 굉장히 원했던 거 아니에요?"
"아마 그랬을 거야."
"그러면서도....."
"넌 지금 내 가장 소중한 친구여서, 널 잃고 싶지는 않다고." 하고 나는 말했다.
"나 그때 자기가 달려들었어도 아마 거부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 몹시 혼란스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내 것은 굉장한데?"
그녀는 빙긋 웃더니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나, 전부터 자길 믿겠다고 결정했어요. 백 퍼센트. 그래서 그때도 나 안심하고 편히 잠들었던 거예요. 자기하고 라면 걱정 없다고 안심해도 좋다고. 그때 푹 잤지요, 나?"
"음, 확실히"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자기가 내게, 저, 미도리 널 갖고 싶어. 그러면 모든 게 잘 될 테니까. 그랬더라면 아마 응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런 말한다고 해서 자기를 유혹하고 있다거나, 능청을 떨면서 자극하고 있다 곤 생각하지 말아 줘요. 난 그저 내가 느낀 그대로 정직하게 말해 주고 싶을 뿐이니까."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린 점심을 먹으면서 수강 신청카드를 보여 주었고, 두 강의를 함께 받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은 그녀와 얼굴을 맞대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도리의 언니도, 그녀 자신의 한동안은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지질 못했다. 그때까지의 그녀들의 인생에 비해서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누군가의 병간호를 하거나, 가게 일을 거들어 주면서 매일을 바쁘게 보내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고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 이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게 우리 자신을 위한 본래의 생활이라고,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한껏 기를 펴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불안했어요. 몸이 이삼 센티미터 가량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이건 거짓이다, 이렇게 편한 인생이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얼마 안 있어 이게 완전히 뒤집혀 엎어지는 날이 있을 것만 같아 둘이서 긴장을 풀지 못했지요."
"고생을 타고난 자매 같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너무나 가혹했으니까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 두 자매가 그 동안 고생 한 값을 이제부터 되돌려 받으면 되니까."
"미도리 자매 같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나는 말했다. "언니는 매일 뭐하고 지내?"
"언니 친구가 최근에 액세서리 가게를 냈어요.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거기 일을 봐주러 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남는 시간은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약혼자와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어쨌거나 인생을 즐기고 있는 편이에요."
미도리는 나의 새로운 자취 생활에 대해 물었다. 나는 집의 크기라든가 구조, 넓은 정원, 그리고 고양이, 갈매기라든가 주인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재미있어요?"
"나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데 왜 기운이 없어 보이죠?"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봄인데도 말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애인이 떠준 멋진 스웨터를 입고 있으면서도 말예요."
나는 깜짝 놀라 입고 있던 포도색 스웨터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자기는 정말 정직해. 그런 거야 짐작으로 맞추는 거 아니에요?" 하고 미도리는 어이없어 했다.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기운이 없지요?"
"기운을 내려 하고 있는데."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몇 번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머리가 나쁜 탓이겠지만, 가끔 미도리의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
"비스킷 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 버리면 그 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걸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 라고."
"음, 하나의 인생철학이군."
"하지만 그건 정말이에요. 난 경험으로 그걸 배웠거든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미도리와 같은 클래스 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미도리와 셋이서 수강 신청 카드를 주고받고 하더니, 지난해 독일어 성적이 어땠고, 운동권의 패거리들이 충돌하는 바람에 누가 다쳤고, 그 구두 참 좋은데 어디서 샀느냐는 따위의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한동안 늘어놓았다. 저절로 들려오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그 이야기들이 어쩐지 지구의 저 뒤켠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다름없는 봄날의 대학 풍경이었다. 하늘은 뿌옇고, 벚꽃이 피고, 얼핏 보기에도 신입생 티가 나는 학생들이 새 책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는 사이 나는 또 조금 멍한 기분이 되어 갔다.
나는 금년에도 대학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나오코를 생각했다. 창가에는 아네모네 꽃이 꽂힌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두 여학생이 그럼 또 봐 하고 자기들 테이블로 돌아간 후, 미도리와 나는 가게에서 나와 거리를 산책했다.
헌책 가게를 돌아 책을 몇 권 사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게임 센터에서 핀볼을 하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적으로 말은 미도리가 하는 편이고 나는 응, 응, 대답만 하고 있었다. 미도리가 목이 마르다고 하기에 나는 가까이 있는 가게를 찾아 콜라 두병을 사왔다. 그 사이 그녀는 리포트 용지에다 볼펜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뭐야 그건" 하고 내가 묻자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세 시 반이 되자 그녀는, "이제는 가봐야지, 언니와 긴자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전철역까지 걸어가 거기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내 코트 주머니에 네 번 접은 리포트 용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읽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걸 전철 안에서 읽었다.
전략.
지금 자기는 콜라를 사러 갔고, 나는 그 틈을 이용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니 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자기에게 전달될 가망이 없으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거의 아무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저, 알고 있어요? 자기는 오늘 내게 몹시 가혹한 행동을 했다는 걸. 자기는 내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것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나, 애써 조금씩 머리를 길러 겨우 지난 주말에야 여자다운 머리 스타일로 바꿀 수 있게 됐다고요. 그런데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죠? 꽤나 예쁘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만나 놀라게 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알아보지도 못했으니 그건 너무했지 뭐예요?
하긴 자기는 내가 오늘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는지도 모르죠. 나도 여자에요. 얼마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금쯤은 나를 똑바로 보아주면 안돼요? 단 한마디, 그 머리 예쁜데, 하고만 말해 줬던들 그 후에 자기가 무엇을 했건, 얼마만큼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건, 난 자기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 자기에게 거짓말을 한 거예요. 긴자에서 언니와 만날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난 오늘 자기 집에 가서 잘 생각으로 잠옷까지 갖고 왔다고요. 그래요, 내 백 속엔 잠옷과 칫솔이 들어 있었죠.
흥, 참 어리석기도 하지. 그런데 자긴 자기 집으로 가자는 한마디 유혹도 없었어요. 뭐, 하지만 좋아요. 자기는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혼자 있게 해줄게요. 열심히 온갖 것을 마음껏 생각해 보라고요.
하지만 내가 자기에 대해서 전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에요. 난 다만, 다만 외로운 거예요. 오히려 자기는 내게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 내가 자기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자기는 언제나 자기 세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아무리 노크를 해도 잠시 눈을 치뜰 뿐,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콜라를 든 자기가 막 돌아오고 있어요.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며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어요.
자기는 지금 내 옆에서 꿀꺽꿀꺽 콜라를 마시고 있어요. 콜라를 들고 돌아오면서 아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잖아! 하고 놀라워 해줄 것을 기대해 보았지만 허사였어요. 만일 그래 주었다면 이 따위 편지는 찢어 버리고 저, 자취방을 구경하고 싶어요. 맛있는 저녁 지어 줄게요. 그리고 사이좋게 함께 자요. 하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자기는 철판처럼 무신경했어요. 안녕.
P.S. 이다음에 교실에서 만나도 내게 말 걸지 말아요.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 미도리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무도 받지를 않았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딱히 없었기에 나는 거리를 걸으며,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았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온전히 비어 있고, 월. 화. 수. 목요일엔 다섯 시부터 일할 수가 있었지만, 그 같은 내 스케줄에 딱 들어맞는 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체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시장을 보는 길에, 다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언니가 전화를 받더니, 미도리는 아직 안 돌아왔고 언제 돌아올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을 먹고 미도리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몇 번을 고쳐 써도 잘 써지지 않아, 결국은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봄이 되어 다시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고 썼다. 나오코를 만나지 못해 매우 섭섭하다, 어떠한 형식이든 나오코와 만나고 싶었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강해지려고 결심했다, 그 밖에는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고 썼다.
그리고 이건 나 자신의 문제고, 나오코로서는 어쩌면 상관이 없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난 이젠 아무하고도 자지 않고 있어. 나오코의 손길이 머물렀던 때의 그 기억을 잃어버리기 싫기 때문이야. 그것은 나로서는 나오코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야. 나는 언제나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
나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아 한참 동안 그것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훨씬 짧은 편지였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는 편이 그녀에게 내 뜻을 더 잘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글라스에 3센티미터 가량의 위스키를 부어, 두 모금에 그걸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나는 기치조지 역 부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만 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그리 크지 않은 이탈리아 요리점의 웨이터 자리였는데, 조금은 그저 그랬지만 점심을 먹여 주고 교통비도 주었다. 월. 수. 목의 야간 근무자가 쉴 적에는-그들은 자주 쉬었다. -대신 출근해도 좋다는 이야기여서 나로서도 퍽 다행스러웠다. 3개월 뒤에는 급료를 올려 주마며, 이번 토요일부터 출근해 달라고 매니저가 말했다. 신주쿠 레코드 가게의 그 엉터리 지배인에 비하면 상당히 정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미도리의 아파트에 전화하자 또 언니가 받아, 미도리는 어제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는 오히려 자기가 알고 싶다, 무엇인가 짚이는 데가 없느냐며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백에 잠옷과 칫솔을 넣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수요일 강의에서 나는 미도리를 보았다. 그녀는 쑥색 스웨터를 입고 여름에 자주 끼고 다니던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뒷좌석에 앉아서, 전에 한 번 본 일이 있는 안경낀 자그마한 여자아이와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가서 강의가 끝나고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미도리에게 말했다.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먼저 나를 쳐다보고, 그리고 미도리가 나를 쳐다봤다. 미도리의 머리는 전에 비하면 확실히 훨씬 여자다운 스타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약간 어른스럽게도 보였다.
"나, 약속이 있어요." 하고 미도리가 조금 고개를 기울이는 듯한 자세로 말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5분이면 되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찌푸렸다. 무엇인가 백 미터 가량 저쪽의 무너져 가는 폐옥을 바라다보는 듯한 유쾌하지 않은 눈초리였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얘는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대요. 미안하지만, 이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제일 앞 우측 끝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고(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에 대한 총론 및 미국 문학에서의 그의 위치), 강의가 끝나자 천천히 셋을 헤아린 후 뒤를 돌아보았다. 미도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4월은 혼자서 보내기엔 너무나 외로운 계절이었다. 4월에는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코트를 벗어 던진 채, 양지바른 곳에 모여 이야기를 하거나, 캐치볼을 하거나, 사랑은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한 외돌토리였다. 나오코도 미도리도 나가사와도, 누구도 모두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겐 안녕 하고 인사할 상대조차 없었다. 그 돌격대마저도 나는 그리웠다.
나는 그러한 괴로운 슬픔을 달랠 길 없는 고독 속에서 4월을 보냈다. 몇 번인가 더 미도리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같았다.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그 어조로 보아 진심으로 느끼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체적으로 그 안경 낀 여자와 함께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키가 크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남학생과 같이 있었다. 유달리 다리가 긴 남학생으로 그는 언제나 흰 농구화를 신고 있었다.
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5월은 4월 보다 더 가혹했다. 5월이 되자 나는 깊어 가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떨림은 대개 해질녘에 찾아들었다. 목련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어 오르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으로 차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긴 시간이 걸려 그것은 지나갔고, 그 뒤에 둔탁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그럴 적에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는 근사한 일, 기분 좋은 일, 이름다운 일 밖에는 쓰지 않았다.
풀내음, 상쾌한 봄바람, 달빛, 최근에 본 영화, 좋아하는 노래, 감명을 받은 책, 그러한 것에 대해서만 썼다. 그런 편지를 되풀이 읽노라면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멋진 세계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러한 편지를 몇 통이나 썼다. 하지만 나오코에게서도 레이코 여사에게서도 편지는 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레스토랑에서, 나는 이토라는 동년배의 아르바이트 학생과 알게 되어 이따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미술 대학 유화과에 다니는 얌전하고 말이 없는 사나이로,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엔 꽤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일이 끝나면 근처의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해서 우리는 대체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날씬하고 잘생긴 사나이로, 미대의 학생치고는 머리도 짧고 청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정상적인 기호와 사고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소설을 좋아해서 조르주 바타유와 보리스 비앙의 것을 즐겨 읽고, 음악은 모차르트와 모리스 라벨의 곡을 주로 듣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처럼 그런 걸 화제로 삼을 수 있는 친구를 찾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자기 아파트로 초대해 주었다. 이노카시라 공원 뒤쪽에 있는 조금 이상한 구조의 단층 아파트였는데, 방안에는 그림 재료라든가 캔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림을 보고 싶다고 나는 말했지만, 아직은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하며 보여 주지 않았다.
우린 그가 아버지한테서 몰래 들고 온 시바스 리갈을 마시며, 풍로에 물고기를 구워 먹고, 로벨 카사드쉬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들었다.
그는 나가사키 출신이었으며 고향에 애인이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돌아갈 적마다 그녀와 자곤 했는데, 최근엔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되잖아. 여자란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스물이나 스물 한 살쯤 되면 갑자기 여러 가지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거야. 몹시 현실적이 되어 가는 거지. 그렇게 되면 말이야, 지금까지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던 것이 그저 그렇게 따분하게만 비쳐지지. 날 만나기만 하면 말이야, 대개 섹스를 한 뒤이긴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뭘 하겠느냐 묻는 거야."
"뭘 할 생각이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뭘 하겠느냐고 하지만 뭘 할 게 없어, 그림쟁이한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도 그림쟁이가 되지 못해. 그렇지 않겠어? 미대 나와 보았자 밥조차 먹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나가사키에 돌아와서 미술 선생이 되라는 거야. 그녀는 영어 선생을 할 작정이거든, 나 참."
"그 여자를 이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거 같군."
"아마 그런 것 같아." 하고 이토는 시인했다. "게다가 난 미술 선생같은 건 되고 싶질 않다고. 원숭이 같이 떠들기만 하고 버릇없는 중학생들에게 그림이나 가르치며 일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아."
"그건 어떠하든, 그럼 그녀와는 헤어지는 게 좋은 거 아냐? 서로를 위해서 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어, 불쌍해서. 그녀는 나와 결혼할 생각인데, 헤어지자, 난 이젠 널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고 말을 꺼낼 수가 없는 거야."
우린 얼음도 넣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시바스 리갈을 마시고, 고기 안주가 바닥이 나자 오이와 샐러리를 길게 썰어 된장에 찍어 먹었다. 오이를 아작아작 씹자니까 문득 죽은 미도리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미도리가 없는 나의 생활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에 생각이 미치자 턱없이 외로운 기분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점점 부풀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너, 애인 있어?" 하고 이토가 물었다.
"있기는 있어" 하고 나는 한 호흡을 쉰 후 대답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서로 마음은 통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이 없으니까" 하고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훌륭함에 대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그는 시골 사람들이 산길을 잘 알고 있듯이, 모차르트의 훌륭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부친이 좋아했기 때문에 세 살 적부터 줄곧 모차르트를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그렇게 깊이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 바로 여기가..... 라든가 어때, 여기..... 라고 하는 적절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모차르트의 콘체르토에 귀를 기울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노카시라 공원 숲 위로 떠 있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시바스 리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맛 좋은 술이었다.
그는 하룻밤을 묵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볼일이 있다고 사양하고는 잘 마셨노라고 인사를 한 후에 아홉시 전에 그의 아파트에서 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희한하게도 미도리가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하지만 지금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몇 번이나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와의 관계를 끊고 싶지는 않아. 넌 정말로 몇 안 되는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이고, 널 만나지 못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니까. 언제쯤 너와 이야기할 수 있지? 그것만이라도 가르쳐 줘."
"내가 이야기할게요, 그때가 되면."
"건강해?"
"그저 그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5월 중순경에 레이코 여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언제나 보내 주는 편지 고마워요. 나오코는 몹시 기뻐하며 읽고 있어요. 나도 보여 달라고 해서 읽고요. 괜찮지요, 내가 읽어도?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해 미안해요. 정직하게 말해서 나도 좀 피곤했고, 좋은 소식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에요. 나오코의 사정은 그렇게 좋지를 못해요. 일전에 고베에서 나오코의 어머니가 찾아와, 전문 의사선생님을 모시고 나와 넷이서 많은 의견을 서로 나누었어요. 그래서 당분간 전문 병원에 가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그 결과를 보고 나서 다기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합의에 이르렀지요.
나오코는 가급적이면 계속 여기 있으면서 고쳐 보고 싶다고 하고, 나도 그녀와 헤어지기가 쓸쓸하고 걱정도 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여기서 그녀를 컨트롤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보통은 이렇다 할만 한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때때로 감정이 몹시 불안정해지는 일이 있어서, 그럴 때에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죠. 환청이 심해져서 나오코는 모든 것을 닫고 자기 속으로 기어들어 가버려요.
그래서 나도 나오코가 한동안 적당한 시설에 들어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전에도 와타나베에게 말했지만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에요. 희망을 잃지 말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거예요.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죠.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예요.
이 편지가 와타나베에게 닿을 무렵이면 나오코도 그쪽 병원으로 옮겨가고 없을 거예요. 연락이 언제나 뒤로 쳐져서 미안하지만 여러 가지 일이 잇따라 조급하게 결정돼 버렸어요.
새로운 병원은 확실히 좋은 병원이에요. 좋은 의사도 있고요. 주소를 뒤에 적어 놓았으니까 편지를 그쪽으로 보내요. 나오코에 대한 소식은 내 쪽에도 전해지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 주겠어요.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으면 와타나베에게도 얼마나 좋겠어요.
와타나베도 괴롭겠지만 기운을 내요. 나오코는 없지만 가끔도 좋으니까 내게도 편지 줘요. 그럼 안녕.
그 봄에 나는 매우 많은 편지를 썼다. 나오코에겐 일주일에 한 번씩 썼고, 레이코 여사에게도, 미도리에게도 몇 번인가 편지를 썼다.
강의실에서 쓰고, 집의 책상에서 갈매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고, 휴식 시간에 아르바이트하는 이탈리아 요리점의 테이블에서도 썼다. 마치 편지를 씀으로써 산산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생활을 겨우 지탱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괴롭고 쓸쓸한 4월과 5월을 보냈다고, 나는 미도리에게 보낸 편지에다 썼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쓸쓸한 봄을 체험한 것은 처음이며, 이 모양이면 차라리 2월이 세 번 계속되는 편이 훨씬 낫다. 지금 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새로운 헤어스타일은 네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매우 귀엽다. 지금은 이탈리아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요리사한테서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네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나는 매일 학교에 다니며, 일주일에 두세 번 이탈리아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토와 책이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서 보리스 비앙의 책을 몇 권인가 빌려 읽고, 편지를 쓰고 갈매기와 놀고, 스파게티를 만들고, 정원을 손질하고, 나오코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많은 영화를 보았다.
미도리가 말을 걸어온 것은 6월 중순경이었다. 나와 미도리는 2개월 동안이나 말없이 지냈던 것이다.
그녀는 강의가 끝나자 내 옆자리에 앉아, 잠시 턱을 괴고 묵묵히 있었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 특유의 바람을 수반하지 않은 곧은 비로, 그것은 온갖 것을 여지없이 적시는 거센 비였다. 다른 학생들이 교실에서 다 나간 뒤에도 미도리는 계속 그런 자세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진 재킷의 호주머니에서 말보로를 꺼내 입에 물고는 성냥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미도리는 그 입술을 둥글게 오무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다 천천히 내뿜었다.
"내 헤어스타일 괜찮아요?"
"굉장히 좋아."
"얼마만큼 좋아?" 하고 미도리가 다시 물었다.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잠시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나보다도 그녀가 더 마음이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담뱃재를 바닥에 털고는 불쑥 일어섰다.
"점심 먹으러 가요. 배가 고파"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어디로 가지?"
"니혼바시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식당."
"무엇 때문에 일부러 그런 데까지 가지?"
"이따금 거기 가고 싶어져요, 나."
그래서 우리는 전철을 타고 니혼바시까지 갔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비가 내린 탓인지 백화점 안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물었다. 그저 비의 냄새가 떠돌 뿐, 점원들도 할 일이 없어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지하의 식당으로 가서 윈도우의 견본을 면밀히 검토해 본 후 둘 다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점심때였지만 식당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백화점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하고 나는 백화점 식당에서밖에 볼 수 없는, 희고 매끈매끈한 컵에 담긴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난, 좋아해요. 이런 거"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뭔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 돼요. 아마도 어렸을 적의 기억 탓일 거예요. 백화점 같은 덴 좀처럼 누가 데려다 주지 않았으니까."
"난 자주 다녔던 것 같아. 어머니가 백화점에 가는 걸 좋아하셨거든."
"좋았겠어요."
"별로 좋은 것도 없었어. 난 백화점에 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이 아니고, 귀여움을 받았으니 좋았겠다, 는 뜻이에요."
"응, 외아들이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른이 되면 백화점 식당엘 혼자 가서 맛있는 것을 실컷 먹어 보자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그렇지만 허무해요. 혼자 이런 곳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어본들 재미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특별나게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넓고 붐비고 시끄럽고 공기도 나쁘고. 하지만 이따금 이곳에 오고 싶어지거든요."
"지난 두 달 동안 쓸쓸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편지에서도 읽었어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점심 먹어요. 난 지금 그 밖에 일은 생각지도 못하겠어."
우리는 반원형 칠그릇에 담겨진 도시락을 말끔히 먹고, 국을 마시고, 차를 마셨다. 미도리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다 피우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성큼 일어서서 우산을 들었다. 나도 함께 일어나 우산을 들었다.
"이젠 어딜 갈 거지?" 하고 내가 물었다.
"백화점에 와서 점심을 먹었으니 다음은 옥상이잖아, 당연히"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비가 내리는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완동물 용품 매장에도 점원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매점도 닫혀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들고 비로 흥건히 젖은 회전목마라든가 나무 의자, 그리고 간이매점들 사이를 산책했다. 도쿄의 한복판에 이렇게 인기척 없고 황량한 곳이 있다는 게 나로선 새로운 놀라움이었다. 미도리는 망원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동전을 넣어 주고,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우산을 받쳐 주었다.
옥상 한 귀퉁이에 지붕이 있는 오락장이 있었고, 어린이용 게임 기계가 몇 대 줄지어 있었다. 우린 거기 있는 발돋움용 나무통에 나란히 걸터앉아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이야기 할 게 있지요, 자기?"
"변명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땐 나도 나사가 빠져 머리가 멍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런저런 일 모두가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너와 만나지 못하게 되자 깨달았어. 네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티어 왔다는 것을. 네가 없으니까 너무 괴롭고 쓸쓸했어."
"하지만 자기는 모르죠? 자기와 만나지 못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했는지를?"
"몰랐어, 그런 거"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넌 나 때문에 화가 나 있고, 그래서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
"어째서 자기는 그렇게 바보야? 만나고 싶을 게 뻔 하잖아요? 이미 난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난 그렇게 간단히 누가 좋아지고 미워지고 하는 사람이 아냐, 그런 것도 몰라요?"
"그런 물론 그렇지만....."
"물론 나도 화가 났어요. 마구 발길질을 해줘도 시원치 않을 만큼.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자기는 멍하니 다른 여자 생각만 하고 있고,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말예요, 그것과는 별도로 나, 자기와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이라니?"
"자기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요. 말하자면 난 자기와 함께 있는 편이 점점 더 즐거워졌다고요.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보다. 그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고 좀 난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나, 그 사람 좋아해요. 좀 고집이 세고 편협하고 파시스트긴 하지만, 좋은 점도 많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좋아진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자기는 어쩐지 좀 특별해요, 내게 있어서는. 함께 있으면 썩 잘 어울린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난 자기를 신뢰하고 있고, 좋고, 놓치기가 싫어요. 요컨대 나 자신도 혼란스러워진 거야. 그래서 그 사람한테 가서 솔직하게 의논했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와타나베와는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그 사람은 말했어요. 만일 와타나베와 만나려면 나와는 헤어지자고."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깨끗이."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말보로를 입에 물더니, 손으로 가려 성냥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어째서?"
"어째서?" 하고 미도리는 소리를 질렀다. "자기, 머리가 이상한 것 아냐? 영어의 가정법을 알고, 순열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묻는 거지요? 어째서 그런 걸 여자에게 말하게 해요? 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니까 그렇게 하는 게 뻔 하잖아요. 나도 좀 더 근사한 남자를 좋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자기가 좋아져 버렸으니까."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미도리는 물이 고인 곳에다 담배를 던졌다.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난처한 표정은 짓지 말아요, 슬퍼지니까. 괜찮아요,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따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안아 주는 정도는 할 수 있죠? 나도 지난 두 달 동안 정말 괴로웠으니까."
우린 게임장 뒤켠에서 우산을 받쳐 든 채 포옹을 했다. 단단히 몸을 붙이고 서로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도 진의 재킷 옷깃에서도 비 냄새가 났다. 여자의 몸이란 왜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재킷 너머로 나는 그녀의 따뜻한 젖가슴의 감촉을 확실히 가슴에 느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는 사람과 접촉한 것 같았다.
"자기와 요전에 만났던 날 밤,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헤어졌어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난 널 정말 좋아해" 하고 내가 말했다. "마음으로부터 널 좋아해. 앞으로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은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 여자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요, 그 여자와 잔 일 있어요?"
"1년 전에 꼭 한 번."
"그리곤 만나지 못했어요?"
"두 번 만났어. 하지만 같이 자진 않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왜 그래요? 그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나로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사정이 몹시 얽혀 있어. 어떤 문제가 엉키어 있는 데다 그게 오래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정말은 어떤 건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나도 그 여자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게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책임이라는 거야. 그래서 난 그것을 저버릴 수가 없는 거야.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느끼고 있어. 설사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해도."
"난 살아있는 피가 흐르는 여자에요."
미도리가 내 목덜미에 볼을 비벼대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자기에게 이렇게 안겨서 자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라고요. 자기가 이래라 하면 난 그게 뭐든지 할 거예요. 나, 약간 억지스러운 데가 있긴 하지만 정직하고 좋은 아이고, 일 잘하고, 얼굴도 이렇게 예쁘고, 가슴도 잘생겼고, 요리도 잘하고, 아버지의 유산도 신탁 예금을 해 두었고..... 너무나 싸구려로 넘어 간다고 생각지 않아요? 자기가 갖지 않으면 그 동안에 난 어딘 가로 가버릴 거예요."
"시간이 필요해" 하고 나는 말했다. "생각을 하고, 정리도 하고, 판단을 할 시간이 필요해.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은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날 마음속으로부터 좋아하고,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미도리는 몸을 떼더니 방긋 미소를 짓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기다려 줄게요. 자기를 믿으니까" 하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를 가질 때는 나만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나를 안을 때는 나만을 생각해 줘요 내가 말하는 뜻 알겠어요?"
"잘 알아."
"그리고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지만 상처만은 입히지 말아줘요. 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도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고요. 행복해지고 싶은 거예요."
나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하찮은 우산 따위는 집어치우고 두 팔로 더 좀 꼭 안아 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우산을 쓰지 않으면 흠뻑 젖어 버릴 텐데?"
"괜찮아요. 그까짓 것, 아무러면 어때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안기고 싶어요. 나, 두 달 동안이나 참아 온 걸요."
나는 우산을 발밑에 놓고 비속에서 힘껏 미도리를 끌어안았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둔중한 타이어 소리만이 안개처럼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비는 소리도 없이 집요하게 계속 쏟아졌고,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를 흠뻑 적시고 눈물처럼 볼을 따라 흐르고 그녀의 진 재킷과 나의 황색 나일론 윈드브레이커를 어두운 색깔로 물들였다.
"어디 지붕 있는 데로 슬슬 가지 않을래?"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이대로 있다간 감기 들겠어."
"그렇군."
"저, 우리 어쩐지 강을 헤엄쳐 온 사람 같아요." 하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기분 좋았어."
우린 백화점에서 좀 큼직한 수건을 사 가지고, 번갈아 세면장으로 들어가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전철을 바꿔 타가며 그녀의 아파트까지 갔다.
미도리는 곧 나부터 샤워할 수 있게 준비해 주고, 이어서 그녀도 샤워를 했다. 그리고 내 옷이 마를 때까지 욕의를 빌려주고 그녀는 폴로셔츠와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주방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셨다.
"자기 이야기 좀 해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내 어떤 이야기?"
"글쎄..... 어떤 게 싫어요?"
"닭고기와 성병과 그리고 말이 많은 이발사가 싫어."
"그 밖에?"
"4월의 고독한 밤과 레이스 달린 전화기 커버가 싫어."
"그 밖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밖에 특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나의 그이는-즉 전의 그이는 싫어하는 게 많았어요. 내가 아주 짧은치마를 입는 것이라든가 담배 피우는 걸 싫어했고, 금방 술에 취한다든가 야한 말을 한다든가 그의 친구들 욕을 한다든가..... 그러니까 그런 나에 관해 싫은 게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 줘요. 고칠 수 있는 건 고쳐 나갈 테니까."
"별로 없는데" 하고 나는 잠깐 생각한 끝에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어."
"정말?"
"네가 입고 있는 건 뭐든지 좋고, 네가 하는 일도, 말하는 것도, 걸음걸이도, 술주정도, 무엇이든 좋아해."
"정말 이대로 좋은 거예요?"
"또 바뀌면 어떤 게 좋은지 모르겠으니까 그대로가 좋아."
"얼마만큼 나 좋아해?"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돼버릴 만큼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으음" 하고 미도리는 조금은 만족한 듯이 말했다. "한 번 더 안아줄 거야?"
나와 미도리는 그녀 방의 침대에서 힘껏 포옹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린 이불 속에서 입술을 포갰고, 세계의 형성에서부터 삶은 계란의 정도에 따른 기호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를 했다.
"비오는 날엔 개미들은 도대체 뭘 하지?"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몰라" 하고 내가 말했다. "아마도 집을 청소하거나 저장품을 정리하는 게 아닐까. 개미는 일을 열심히 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어째서 개미는 진화도 못하고 지금도 그저 개미지요?"
"모르겠는데. 하지만 몸의 구조가 진화에 적합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즉 원숭이 같은 것에 비해서 말이야."
"자기도 의외로 모르는 게 많네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와타나베라면 세상의 일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세계는 넓어" 하고 내가 말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어"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리고 욕의 자락 밑으로 손을 넣어 나의 남성을 잡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와타나베, 안됐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고 정말 안 되겠어요. 이렇게 거창해서야....."
"농담이겠지" 하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농담이야" 하고 미도리는 킥킥 웃었다.
"괜찮아, 안심해요. 이 정도라 해도 어떻게든 들어갈 거니까요. 나, 자세히 봐도 돼요?"
"좋도록 해"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 잠시 동안 내 페니스를 만지작거렸다. 표피를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고환의 무게를 저울질 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첨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 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와는 싫은 거죠?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지기 전엔."
"싫을 리가 없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머리가 이상해 질 만큼 원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고집이 세군요. 나라면 안 그래요. 생각은 그 뒤에 할 거라고."
"정말 그래?"
"거짓말" 하고 미도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참을 거예요. 내가 자기래도 역시 같을 거예요. 그리고 난 자기의 그런 점이 좋아요. 정말 정말 좋아요."
"얼마만큼?" 하고 나는 물었지만 미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내게 몸을 밀착시키고 내 젖꼭지에 입술을 댄 다음, 내 남성을 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은 나오코가 해주던 손의 움직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양쪽 다 부드럽고 훌륭했지만 뭔가 차이기 있어서, 전혀 별개의 체험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으음, 자기 지금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지요?"
"아니" 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정말?"
"정말이야."
"이럴 때 다른 여자 생각하면 싫어요."
"생각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내 가슴이나 거기 만지고 싶어요?" 하고 미도리가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한꺼번에 여러 가질 하면 자극이 너무 강하거든."
미도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내의를 벗고, 자신의 것을 내 페니스 끝에 갖다 댔다.
"여기에 사정해도 좋아."
"하지만 더러워질 텐데."
"눈물이 나니까 싱거운 소린 하지 마" 하고 미도리는 울먹일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탁하면 그만이야. 사양 말고 마음껏 해버려요.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새것을 사서 선물하면 되잖아. 아니면 내 것 가지곤 기분에 들지 않아 안 되겠어요?"
"설마"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자....."
내가 사정을 끝내자 미도리는 나의 정액을 점검했다.
"정말 많아" 하고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너무 많았나?"
"괜찮아, 바보같이. 마음껏 하라고 그랬잖아요." 하고 미도리는 웃으며 말하고 내게 키스했다.
저녁때가 되자 미도리는 근처에서 장을 봐와서는 밥을 지어 주었다. 우린 주방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며 튀김을 먹고, 완두콩을 넣은 밥을 먹었다.
"많이 먹고 많이 만드는 거예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그러면 내가 부드럽게 해결해 줄 테니까요."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나,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어요. 서점 운영할 때 여성 잡지에서 그런 걸 배웠다고요. 저, 임신 중엔 그거 못하니까 그 동안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리해 주는 방법이 특집이었어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요. 즐거워요?"
"즐겁지" 하고 나는 말했다.
미도리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역에서 샀던 석간을 펼쳐 보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까짓 것 조금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읽어 보았자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아무 뜻 없는 신문의 지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난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나를 둘러싼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불쑥불쑥 내 주위에서 세계가 두근두근 맥박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일에 대해 나는 전혀 후회가 없었다. 오늘을 다시 한 번 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비 내리는 옥상에서 미도리를 세차게 안았을 것이고, 물벼락을 맞은 듯 젖었을 것이며, 그녀의 침대에서 그녀의 손가락에 의해 사정을 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선 한 가닥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미도리를 좋아했고 그녀가 나에게 되돌아온 것이 무척 기뻤다. 그녀하고 라면 둘이서 잘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미도리는 자기 자신이 말하던 대로 숨 쉬고 있는 현실의 여자며, 그 따스한 몸을 내 품에 내맡기고 있지 않았던가.
나로선 미도리의 몸을 열고 그 따뜻함 속으로 침몰되어 가고 싶은 세찬 욕망을 누르는 게 고작이었다. 나의 페니스를 잡은 손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저지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나는 그걸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누가 그걸 감히 멈출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나는 미도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훨씬 이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거였다. 다만 그런 결론을 내가 오랫동안 회피해 왔을 뿐이었다.
문제는 내가 나오코에게 그러한 상황 전개를 잘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오코에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코 역시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과정에서인지 이상한 형태로 비뚤어져 버린 방식이긴 했지만 나는 틀림없이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었고, 내 속엔 나오코를 위해 꽤 넓은 자리가 빈 채로 보존되어 있었다.
나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레이코 여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정직한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 툇마루에 앉아 비가 내리는 밤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서 몇 가지 문장을 나열해 보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이런 편지를 레이코 여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정직한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도 퍽 괴로운 일입니다." 하고 나는 첫머리에다 썼다. 그리고 미도리와의 지금까지의 관계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오늘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썼다.
나는 나오코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도리와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대로 자꾸자꾸 저 끝까지 떠밀려 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무섭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걸어가고, 호흡을 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뒤흔듭니다. 저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몹시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결코 변명할 생각은 아닙니다만, 나는 내 나름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셈이고,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지 않도록 줄곧 조심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미궁과 같은 곳에 내동댕이쳐졌는지 나로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에겐 레이코 여사밖에 의논할 상대가 없습니다.
나는 속달 우표를 붙여 그날 밤으로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레이코 여사에게서 답장이 온 것은 그로부터 5일 후였다.
전략.
우선 좋은 뉴스.
나오코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도 한 번 전화로 이야기했지만 말이 꽤 분명했어요. 어쩌면 머지않아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다음은 와타나베 군에 관해서.
그런 식으로 온갖 일을 그저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나는 생각해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성실한 것이라면 누구도 미궁 속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요. 자신을 가져요.
나의 충고는 매우 간단해요. 우선 첫째로 그 미도리에게 당신이 강하게 매료되었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것은 잘 되어질 수도 있고 그다지 잘 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연애란 원래가 그런 거예요.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겠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성실의 한 모습이니까요.
둘째로 학생이 미도리와 섹스를 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은 와타나베군 자신의 문제지, 나로선 무어라고도 할 수 없어요. 미도리와 둘이서 잘 이야기해 보고 남들이 가는 결론을 내도록 해봐요.
셋째로 나오코에겐 아직 그 일은 덮어두도록 해요. 만일 그녀에게 뭔가 이야기 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상황이 오면, 그땐 나와 와타나베 군 둘이서 좋은 방법을 생각하기로 해요. 그러니 지금은 나오코에겐 잠자코 있도록 해요. 그 일은 그저 내게 맡겨줘요.
넷째, 와타나베는 지금까지 나오코의 든든한 지주가 되어 왔듯이 혹시 그녀에게 연인으로서의 애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해도,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해요.
우리는(우리란 정상인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 총칭이에요)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에요. 자로 깊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 나갈 순 없어요. 안 그래요?
나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미도리라는 여자는 매우 멋있는 여자인 것 같아요.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것은 편지만 봐도 잘 알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나오코에게도 마음이 끌린다는 것도 잘 알겠어요.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죠. 이 드넓은 세계에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고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고,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군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은 때라고 생각하세요.
와타나베 군은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어들이려고 해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 봐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 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하고 산다고요. 정말이에요, 그건! 그러니 와타나베 군도 더욱 더 행복해 져야 해요. 행복해지는 노력을 해봐요.
물론 나는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없다는 걸 섭섭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결국 무엇이 좋았다는 것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 와타나베 군은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 지도록 해요. 경험에 의한 나의 생각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 세 번 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일생을 후회하게 돼요.
나는 매일 들려 줄 사람도 없이 기타를 치고 있어요. 이것도 무언가 쓸모없는 짓이죠.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도 싫군요. 언젠가 다시 와타나베 군과 나오코가 있는 방에서 포도를 먹으며 기타를 치고 싶어요.
그럼 이 맘.
6월 17일
이시다 레이코
제 11 장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나오코가 죽은 뒤에도 레이코 여사는 내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며, 그것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답장을 쓰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좋은가? 게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오코는 이미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 줌의 재가 돼버린 것이다.
8월말 나오코의 장례식이 조용히 끝나자, 나는 도쿄로 돌아와 주인에게 당분간 집을 비우겠으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아르바이트 직장에는 죄송하지만 당분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도리에게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는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3일 동안 매일, 영화관을 돌며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았다. 도쿄에서 개봉되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배낭에 짐을 꾸리고 돈을 남김없이 찾은 다음, 신주쿠 역으로 가서 바로 출발하는 급행열차를 탔다.
도대체 어디를 어떤 식으로 돌아왔는지 나로서는 전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풍경이나 냄새나 소리는 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지명이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갔는지 차례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기차나 버스로, 때로는 지나가는 트럭 조수석을 얻어 타고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이동했으며, 공터나 역, 공원이나 냇가, 해안, 그밖에 잠을 잘 만한 곳이 있으면 어디서든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파출소 한 구석을 빌려 잔적도 있고, 묘지 언저리에서 잔적도 있다. 사람들 왕래에 방해가 되지 않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걷다 지친 몸을 침낭 속에 묻고 싸구려 위스키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곧 잠들었다. 친절한 도시를 만나면 사람들이 음식을 갖다 주기도 하고, 모기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불친절한 도시에선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 나를 공원에서 내쫓았다.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구하고 있었던 것은 모르는 도시에서 푹 잠을 자는 일 뿐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나는 막노동을 3, 4일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벌었다. 어디든 무엇인가 할 일은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도시에서 도시로 하나씩 이동해 갔다. 세계는 넓고 이상한 사상과 기묘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한 번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뭘 해요, 개학한지가 언젠데?"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리포트를 제출해야 할 것도 제법 있다고요. 어떻게 할 거예요, 도대체? 벌써 3주째에요, 소식을 끊은 지가. 어디서 뭘 하고 있어요?"
"안됐지만 지금은 도쿄로 돌아갈 수가 없어, 아직은."
"할 말은 그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제대로. 10월이 되면....."
미도리는 아무 말 없이 찰칵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그래도 여행을 계속 했다. 때때로 싸구려 여관에 들어 목욕도 하고 수염도 깎았다. 거울을 보니 나는 정말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햇볕에 타서 살갗은 까슬까슬해지고, 눈은 퀭했으며, 여윈 뺨에는 까닭 모를 반점과 상처가 나 있었다. 지금 막 캄캄한 굴속에서 기어 나온 인간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확실히 내 얼굴이었다.
그 무렵 내가 걷고 있었던 곳은 산인 지방의 해안이었다. 도토리가 아니면 효고의 북쪽 해안이거나 그 부근에서 항상 걸었다.
해안을 따라 걷는 것은 마음 편했다. 모래밭 어딘가에는 반드시 기분 좋게 잠을 잘 수 있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도에 밀려온 나무를 주워 모닥불을 피우고, 생선 가게에서 사온 마른 고기를 구워 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위스키를 마시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오코를 생각했다.
그녀가 죽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묘한 일이었다. 내게는 그 사실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관 뚜껑에 못질을 하는 그 소리까지 들었는데도, 그녀가 무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순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게 선명하고 강렬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페니스를 살며시 입에 물고, 그 머리칼이 내 아랫배를 살짝 스치며 간질이던 그 모습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따스함과 숨결, 그리고 안타까운 사정의 감촉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마치 5분 전에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 나오코가 있어 손을 뻗으면 그 몸에 손이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나오코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속에는 나오코의 추억이 너무나 가득히 채워져 있었고, 그 추억들은 정말 작은 틈새를 억지로 헤집고 잇따라 밖으로 퉁겨져 나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출을 억누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나는 그녀가 그 비 내리는 아침에 노란 비옷을 입고 새집을 청소하거나 모이 푸대를 나르고 있던 광경을 생각해 냈다. 절반쯤 무너져 버린 생일 케이크와, 그날 밤, 내 셔츠를 적신 나오코의 눈물의 감촉을 생각해 냈다.
그 겨울에 그래, 그날 밤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 그녀는 카멜 오버코트를 입고 내 곁은 걷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머리핀을 꽂고, 언제나 그것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해맑은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푸른 가운을 입고, 소파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다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사자와 함께 살았다. 거기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혹은 포옹할 수도 있었다.
그 장소에서 죽음이란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거기에선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기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마음 쓰지 말아요." 하고.
그런 장소에선 나는 슬픔이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여기에 있잖아요? 하고 나오코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나와 같은 사소한 몸짓이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치유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죽임이라면 죽음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이구나, 하고. 그래요, 죽는다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죽음이란 건 그저 죽음일 뿐이에요, 게다가 나는 여기 있으니 아주 편안해요. 어두운 파도 소리 틈에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자 나는 혼자서 모래밭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이 깊은 어두움이 되어 보다 흡사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선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감으로 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의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던 어느 저녁, 내가 폐선 그늘에 침낭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젊은 어부가 다가와서 내게 담배를 권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십 몇 개월 만에 담배를 피웠다. 왜 울고 있느냐고 그가 내게 물었다.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이렇게 여행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마음으로부터 동정해 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술 한 병과 컵을 두 개 가져왔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모래밭에서 우리는 둘이서 술을 마셨다.
자기도 열여섯 살 때 모친을 잃었다고 어부는 말했다. 그리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서도 자기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만 하다가, 그래서 몸을 잔뜩 망가뜨린 채 세상을 떴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멍청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것은 아주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내게 느껴졌다. 그게 도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돌연 이 사내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격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네 어머니가 어쨌다는 거야? 나는 나오코를 잃었어! 그렇게 아름다운 육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거라고! 그런데 왜 넌 그따위 네 어머니 얘기나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그런 노여움은 곧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내게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먹지는 않았지만 배낭 속에 빵과 치즈와 토마토와 초콜릿이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모래밭엔 불꽃놀이를 하고 난 휴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파도는 마치 미친 듯이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말라빠진 개가 꼬리를 흔들며 찾아와 무엇인가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내가 피운 작은 모닥불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자 단념하고 돌아갔다.
삼십 분 쯤 뒤에 그 어부가 나무 도시락 두 개와 새로운 술을 들고 돌아왔다. 이걸 먹게, 하고 그는 말했다. 아래 것은 김밥 유부초밥이니까 내일 먹게,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술을 자기 잔에 붓고, 내 잔에도 따랐다. 나는 인사를 하고 두 사람 분은 충분히 될 거 같은 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또 둘이서 술을 마셨다. 이제 더 이상 못 마실 정도의 한계까지 마시자 그는 자기 집에 와서 묵으라고 했지만, 여기서 혼자 자는 게 편하다고 했더니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그는 헤어질 때 포켓에서 넷으로 접은 5천 엔짜리 지폐를 꺼내, 내 셔츠 포켓에 찔러 넣으면서 이걸로 영양가 있는 거라도 사먹게, 당신, 얼굴이 형편없어, 하고 말했다. 이미 대접을 잘 받았으니 거기에다 돈까지 받을 순 없다고 사양했지만, 그는 돈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건 돈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받아 둬라, 하고 그는 말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그것을 받았다.
어부가 돌아간 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잤던 여자 친구가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가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며, 그리고 어떤 상처를 입을지 따위는 거의 생각도 안 해 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에 대한 일은 거의 생각조차 안 해 본 것이다.
그녀는 아주 온순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그러한 온순함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거의 뒤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를 용서해 주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몹시 기분이 울적해진 나는 폐선 옆에다 토했다. 과음한 탓으로 머리가 지끈거렸고, 어부에게 거짓말을 해서 돈까지 얻은 일로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슬슬 도쿄에 돌아가도 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영원히 이런 일을 계속 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침낭을 말아 배낭에 챙긴 다음, 그것을 메고 국철역까지 걸어가서, 지금 도쿄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역무원에게 물었다. 그는 시간표를 살피더니 밤 열차를 바로 갈아타면 아침 까진 오사카에 도착 할 수 있고, 거기서 신칸센으로 가면 도쿄에 도착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어부에게 얻은 5천 엔으로 도쿄까지의 기차표를 샀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신문을 사서 날짜를 보았다. 거기엔 1970년 10월 2일 이라고 박혀 있었다. 꼭 한 달 동안 여행을 계속 해온 셈이었다. 어떻게든 현실세계로 돌아가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달 동안의 여행은 나의 심경을 북돋아 주지도 못했고,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준 충격을 가볍게 해 주지도 않았다. 나는 한 달 전과 별 다른 변화가 없는 상태를 한 채 도쿄로 돌아왔다.
미도리에게 전화조차 걸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게 이제 끝났어, 우리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자..... 그렇게 말하면 좋은 것일까? 물론 나로서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말하든, 어떤 표현을 빌리든, 결국 말해야 할 사실은 하나인 것이다. 나오코는 죽었고, 미도리는 남아 있는 것이다. 나오코는 흰 재가 되었고, 미도리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 며칠인가를 보냈다.
나의 기억 대부분은 산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게 이어져 있었다. 내가 나오코를 위해 마련해 둔 몇 개인가의 방에는 쇠사슬이 늘어져 있었고, 가구는 흰 천으로 덮여 있었으며, 창틀에는 보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그런 방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나는 기즈키를 생각했다. 이봐, 기즈키. 너는 기어코 나오코를 손에 넣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좋아. 나오코는 원래 네 것이었으니까. 결국은 그녀가 가야 할 장소였겠지, 아마.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이 불완전한 산자의 세계에서 나는 나오코에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나는 나오코와 둘이서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어. 그렇지만 괜찮아, 기즈키. 나오코는 네게 줄게. 나오코는 네 쪽을 택했으니까. 그녀 자신의 마음처럼 어두운 숲 깊은 곳에서 목을 맨 거야.
이봐, 기즈키. 너는 옛날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어. 때때로 나는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내 자신을 위해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도쿄로 돌아온 지 4일째 되던 날, 레이코 여사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봉투에는 속달 우표가 붙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와타나베 군과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아 몹시 걱정하고 있다. 전화를 걸어 주면 좋겠다. 아침 아홉 시와 밤 아홉 시에 전화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나는 밤 아홉 시에 그 번호를 돌렸다. 신호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코 여사가 나왔다.
"건강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저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저, 나 모레쯤 와타나베 군을 만나러 가도 괜찮을까?"
"오다니요, 도쿄로 말입니까?"
"응, 그래요. 와타나베하고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가지 않으면 만나러 못 가잖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젠 나갈 때도 됐어요. 이미 8년이나 있었으니까. 더 이상 있으면 썩어 버려요."
나는 거기에 맞는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레 신칸센으로 세 시 이십 분에 도쿄역에 도착하니까 마중 나와 줄래요? 내 얼굴 아직 기억해요? 그게 아니면 나오코가 죽었으니 나 같은 여자에겐 이제 흥미가 없다는 게 아닐까?"
"천만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모레 세 시 이십 분에 도쿄역으로 마중 가겠습니다."
"금방 알 거야. 기타를 든 중년 여자를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도쿄역에서 나는 금방 레이코 여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용 트위드 재킷에다 흰 바지를 입고, 빨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짧아 여기저기 삐쳐 있었고, 오른손에는 여행용 갈색 가방을, 왼손에는 검은 기타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얼굴의 주름살을 한꺼번에 흩트리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도 그만 활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들고 중앙선의 승강장까지 나란히 걸었다.
"와타나베, 언제부터 그런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아니면 도쿄에선 요즘 그런 지독한 얼굴을 하는 게 유행인가?"
"한동안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먹는 게 시원치 않았거든요" 하고 나는 말했다.
"신칸센은 어땠습니까?"
"그거 형편없더군요. 창문도 열리지 않게 되어 있고, 도중에 도시락을 사려고 생각했었는데 뜻같지 않아서 아주 혼났어요."
"차안에서 뭔가 팔지 않았습니까?"
"그 비싸기만 하고 맛없는 샌드위치? 그런 건 굶어죽게 된 말이라도 다 못 먹어요. 난 말이지, 고텐바에서 도미밥을 사 먹는 게 좋았거든."
"그런 말을 하면 늙은이 취급을 당합니다."
"괜찮아, 난 늙은인데, 뭐"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기치조지까지 가는 전철 속에서 그녀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무사시노의 풍경을 신기한 듯이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8년이 지나고 보니 풍경도 달라졌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와타나베,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죠?"
"모르겠는데요."
"너무 무섭고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거든. 나 혼자 덩그마니 이런 곳에 내팽개쳐졌으니"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그렇지만 미칠 것만 같다는 게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지 않아?"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레이코 여사는 이제 전혀 걱정 없고 게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거길 나왔으니까요."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나오코와 와타나베 군 덕분이에요. 나는 나오코가 없는 그 장소에 남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었고, 도쿄로 나와 와타나베와 한 번 조용히 이야기 할 필요를 느꼈어요. 그래서 거길 나온 거예요. 만일 그런 게 없었더라면, 난 아마 일생동안 거기에 처박혀 있게 되었을 거야."
나는 수긍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레이코 여사는?"
"아사히가와로 가려고 해. 아사히가와!" 하고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음대 다닐 때 친했던 친구들이 아사히가와에서 음악 교실을 하고 있거든요. 내게 도와달라고 2, 3년 전부터 성화였지만 추운 데는 가기 싫다고 거절하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않아요, 겨우 자유로운 몸이 되었는데, 가는 곳이 하사이가와라면 좀 엉뚱하잖아요. 왠지 거긴 무언가 잘못 만들어진 굴 같은 곳 아냐?"
"그렇게 형편없는 곳은 아닙니다." 하고 나는 웃었다. "한번 가본 적이 있지만, 나쁘지 않은 도시입니다. 좀 재미나는 분위기도 있고."
"정말?"
"그래요. 도쿄에 있는 것보다는 좋습니다, 틀림없이."
"으음, 달리 갈 데도 없고, 짐도 이미 부쳐 버렸으니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와타나베, 그럼 한 번 아사히가와에 놀러 와주겠어?"
"물론 가지요. 하지만 지금 바로 갈 겁니까? 그전에 얼마쯤 도쿄에 있을 거죠?"
"응 2, 3일 동안. 가능하다면 좀 느긋이 지내고 싶어. 와타나베 군에게 신세를 져도 될까? 곤란하게 하진 않을 테니까."
"전혀 상관없습니다. 난 침낭에 들어가 벽장 속에서 자면 되니까요."
"안됐는데."
"안될 것도 없습니다. 벽장이 꽤 넓으니까요."
레이코 여사는 다리 사이에 낀 기타 케이스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리듬을 잡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내 몸을 길들일 필요가 있어요. 아사히가와에 가기 전에. 아직 바깥 세상에 전혀 익숙하지 못하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긴장도 하고 있고. 그런 거 좀 도와주겠어? 나, 와타나베 군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니까."
"나라도 좋다면 얼마든지 도와 드리죠" 하고 나는 말했다.
"나, 와타나베 군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무엇을 귀찮게 하고 있습니까?"
레이코 여사는 나의 얼굴을 보고 삐죽이 웃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치조지에서 전철을 내려 버스를 타고 내방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말은 하지 않았다. 도쿄의 거리 모습이 달라져 버렸다든가, 그녀의 음대 시절 이야기라든가, 내가 아사히가와에 갔을 때의 이야기 같은 대화를 간간이 나눴을 뿐이다.
나오코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레이코 여사를 만난 것은 10개월 만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걷고 있자니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따스해져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같은 생각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나오코와 둘이서 도쿄 거기를 함께 걸을 때도, 나는 이와 꼭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일찍이 나와 나오코가 기즈키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듯이, 지금 나와 레이코 여사는 나오코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레이코 여사는 한참을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음을 알자 그녀도 말을 멈췄으므로 그대로 둘이서 버스를 타고 내 방까지 갔다.
내가 맨 처음, 꼭 일 년전에 교토로 나오코를 방문했을 때와 똑같이 맑은 햇살이 눈부신 오후였다. 구름은 뼈처럼 희고 가늘었으며, 하늘은 꿰뚫릴 듯이 드높았다. 다시 가을이 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람 냄새와 햇살의 빛깔, 풀숲에 피어 있는 작은 꽃들과 잠깐 잠깐씩 들려오는 소리의 울림들이 나에게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계절이 돌아 올 적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기즈키는 열일곱 살 그대로고 나오코는 스물 하나인 채 그대로다. 영원히.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좀 놓여요." 하고 버스를 내려 주위를 돌아본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데니까요"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가 별채로 안내하니까 레이코 여사는 온갖 것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아주 좋은 곳이잖아?"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거 다 와타나베가 만들었어요? 이 선반이랑 책상 같은 것?"
"그래요" 하고 나는 물을 끓이고 차를 넣으면서 말했다. "다 돌격대 덕분입니다. 그가 나를 청결한 성격으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래서 주인도 좋아합니다. 집을 깨끗이 써준다고요."
"아, 그래요. 주인한테 인사하고 올게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주인은 정원 저쪽에 살고 있겠죠?"
"인사? 인사를 무엇 때문에 합니까?"
"당연한 일이잖아. 와타나베 집에 이상한 중년 여자가 굴러 들어와서 기타를 치거나 하면 주인도 뭔가, 하고 생각하겠지? 그런 건 미리미리 깔끔하게 해 두는 게 좋아요. 그것 때문에 선물까지 준비해 왔으니까."
"머리회전이 잘 되는군요"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나이 덕이야. 교토에서 온 와타나베의 이모라고 해둘 테니까 잊지 말고 입을 잘 맞춰요. 참, 이럴 땐, 나이 차가 있어서 편리하군.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여행 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들어 나가고, 나는 툇마루에 앉아 차를 한 잔 더 마시면서 고양이와 놀았다. 레이코 여사는 이십 분 쯤 지나서 돌아왔다. 그녀는 돌아오자 여행 가방에서 과자 통을 꺼내더니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이십 분씩이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하고 나는 과자를 먹으면서 물었다.
"그야 물론 와타나베 이야기지" 하고 그녀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 볼에 비벼대면서 말했다.
"깔끔하고 성실한 학생이라고 칭찬하던데."
"내가 말입니까?"
"그래요, 물론 와타나베죠." 하고 레이코 여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 기타를 발견하자 손에 들고 잠시 줄을 고르더니 카를로스 조빔의 데사피나도를 연주했다. 그녀의 기타 연주를 듣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그것은 예전과 다름없이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 주었다.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집 창고에 굴러다니던 걸 빌려 와 좀 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뒤에 무료로 레슨 해 줄게요." 하고 말하고 레이코 여사는 기타를 내려놓고, 트위드의 윗도리를 벗은 후 마루 기둥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상의 밑에 마드라스체크의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 이거 멋진 셔츠죠?" 하고 레이코 여사가 물었다.
"그런데요" 하고 나도 동의했다. 확실히 아주 멋진 셔츠였다.
"이거 나오코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알아요? 나오코와 나는 옷 사이즈가 거의 같았어요. 특히 거기 처음 들어왔을 무렵엔. 나중에 그 애가 살이 붙어서 사이즈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대체로 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요. 셔츠도 바지도 신발도 모자도. 사이즈가 달랐던 건 브래지어 정도가 아니었을까. 난 거의 가슴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우린 언제나 옷을 바꿔 입곤 했어요. 아니, 둘이서 거의 공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어요."
나는 새삼스럽게 레이코 여사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듣고 보니 정말 키나 몸집이 나오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굴 모습이라든가 손목이 가는 탓으로 레이코 여사 쪽이 나오코보다 말라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의외로 몸매가 단단한 것도 같았다.
"이 바지도 윗도리고 그래요, 전부 나오코의 것이야. 와타나베는 내가 나오코의 것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게 싫은가요?"
"아닙니다. 나오코 역시 누가 입어 주는 걸 기뻐할 겁니다. 특히 레이코 여사가."
"이상해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작은 소리로 손가락을 무슨 버릇처럼 퉁겼다.
"나오코는 아무한테도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옷에 관해서 만큼은 글을 남겼어요. 메모지에 딱 한줄 흘려 놓았는데, 그게 책상 위에 놓여 있었어요. 옷은 다 레이코 여사에게 드리도록 해 주세요, 하고. 이상한 애라는 생각 안 들어요? 자기가 지금부터 죽으려 하고 있을 때, 어째서 옷 같은 게 생각이 났을까. 옷 같은 거야 아무려면 어때요. 달리 말해 두고 싶은 일이 산처럼 많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모르죠."
레이코 여사는 담배를 피우면서 잠시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으음, 처음부터 하나하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이야기해 줘요" 하고 나는 말했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 나오코의 병은 회복 상태에 들어가 있지만, 지금 근본적으로 집중 치료를 해주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나오코는 좀 더 장기적인 치료를 목적으로 그 오사카의 병원에 옮겨가게 되었어. 거기 까진 틀림없이 편지에 썼을 거예요. 8월 10일 전후에 부쳤다고 생각되는데."
"그 편지는 읽었습니다."
"8월 24일에 나오코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나오코가 한 번 그쪽에 가보고 싶다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어요. 자신이 직접 짐도 정리하고 싶고, 가능하면 하룻밤 같이 잘 수 없겠는가 하고. 나로선 좋다고 했지요. 나도 무척 나오코가 보고 싶었고, 이야기가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이튿날인 25일에 어머니와 둘이서 택시를 타고 왔어요. 그래서 우리 셋이 짐을 정리한 거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저녁 무렵이 되자 나오코가 어머니에게, 이제 돌아가셔도 좋아요, 대충 다 되었으니까, 하고 말했지. 그래서 어머니는 택시를 불러 타고 돌아갔어요. 나오코는 아주 건강해 보여서 어머니나 나나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어요. 사실은 그때까지 나는 무척 걱정을 했거든요. 그녀가 의기소침해서 입을 다물고 우울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그런 병원의 검사라든가 치료라는 게 사람의 에너지를 퍽 소모시키는 일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괜찮을까 하고 걱정했던 거지.
그런데 만난 첫눈에 아아, 이거라면 됐어, 하고 생각했어요. 얼굴도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해졌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농담도 했고, 말씨도 이전보다 훨씬 정상적이었고, 미장원에 갔었다면서 새 헤어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정도라면 어머니 없이 우리 둘이라도 걱정 없겠다고 생각했지요. 저 레이코 언니, 병원에서 이 기회에 말끔히 치료를 받을 거예요 하고 말하기에 나도 그게 좋을 지고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리곤 우리는 둘이서 밖을 산책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길 했어요.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요, 나오코는 이런 말도 했어요. 둘이서 여길 나갈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함께 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레이코 여사와 둘이서요?"
"그래요"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하면서 어깨를 조금 움찔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난 좋지만 와타나베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과의 일은 확실하게 해 둘 테니까, 하더라고요. 그것뿐이야. 그리고 나와 어디에서 살자느니, 무엇을 하자느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새집에 가서 새들과 놀고."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레이코 여사는 또 담배에 불을 붙였고, 고양이는 그녀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애는 처음부터 전부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기운차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건강하게 보였던 거야. 그리고 방안의 여러 가지 것을 정리하고, 필요 없는 건 바깥뜰의 드럼통에 넣어 태워 버렸어요. 일기장 대신 쓰고 있던 노트라든가 편지 따위, 그런 것 모두 말이야. 와타나베의 편지도.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 그걸 왜 태우냐고 물었어요. 다구나 와타나베의 편지는 그때까지 줄곧 소중하게 보관하면서, 자주 꺼내 다시 읽곤 했으니까. 그랬더니 지금까지의 것은 전부 처분하고, 지금부터 새롭게 태어날 거예요, 하기에 난 그렇구나 하고 비교적 단순하게 넘겼지요.
그럴 듯한 얘기 아냐, 그 애 나름으로는. 그래서 난 나오코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그날의 나오코는 정말 사랑스러웠어. 와타나베에게 보여 주고 싶을 만큼.
그러고 나서 우린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아껴 두었던 고급 포도주를 둘이서 마시고, 난 기타를 쳤어. 비틀즈를.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이라든가 미셸 등 나오코가 좋아하는 그런 곡들을.
그리고 우린 기분이 좋아져서 전등을 끄고, 적당히 옷을 벗은 후 침대에 누웠어요. 지독하게 더운 밤이어서, 창문을 열어 놓고 있었는데도 바람 한 점 없었어요. 밖은 먹칠을 한 것처럼 깜깜하고, 벌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지요. 방안에까지 진한 여름 풀 냄새가 가득했고. 그런데 갑자기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와타나베와의 섹스 이야기. 그것도 정말 상세하게. 어떻게 옷을 벗겼고, 어떻게 몸을 만졌고, 자기가 어떻게 젖었고, 어떤 식으로 문을 열었고, 그게 얼마나 근사했던가를 굉장히 선명하게 말하는 거야. 그래서 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당황해서 물었지요. 그때까지 그 애는 섹스 이야기 같은 건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 적도 없었거든. 물론 우린 어떤 종류의 요법 같은 것으로 섹스 이야기도 정직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애는 자세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부끄럽다고.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술술 털어놓으니 나도 놀랐지 뭐야. 그저 어쩐지 하고 싶어졌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어요. 듣고 싶지 않으면 안하겠지만..... 좋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끔히 털어놔. 들어줄 테니까, 하고 나는 말했어. 그의 것이 들어왔을 때, 난 어찌나 아프고 얼얼한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어요, 하고 그 애는 말했어요. 난 처음이기도 했고, 젖어 있으니까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어쨌든 너무 아팠어요, 머리가 멍해질 만큼. 그는 깊숙이 들어왔고, 이 정도면 끝인가 했는데 내 다리를 좀 들게 하고 더 깊숙이 들어왔어요. 그러자 내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오는 거예요. 꼭 얼음 물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손발이 시려오고 한기가 났어요. 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건가, 이대로 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가 내가 아파하는 것을 눈치 채고, 깊이 넣은 채로 더는 움직이지 않고 나를 부드럽게 안고, 머리라든가 목덜미, 가슴에다 마냥 키스해 줬어요, 오랫동안. 그러니까 차차 온기가 돌아오고 다시 그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레이코 언니, 그게 정말 좋았어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이대로 이 사람한테 안겨서 일생동안 이걸 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좋았다면 와타나베와 같이 살고, 매일 그걸 하면 좋았지 않아? 하고 난 말했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어. 난 그걸 알아요. 그건 한 번 왔다가 가 버린 거라는 걸. 그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어떻게 하다가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난 일이에요. 그 뒤에도 전에도 난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어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난적도 없고, 젖어 본 일고 없어요. 물론 나는 자세히 설명해 줬어요. 그런 것은 젊은 여성에게는 일어나기 쉬운 일이고 나이가 들면 자연히 고쳐지는 게 태반이라고. 게다가 한 번 잘 됐으니 걱정 할 것 없다고, 나 역시 결혼 초엔 잘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었다고. 그게 아니에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어요. 난 아무런 걱정도 안 해요. 난 다만 이제 누구도 내 속으로 들어오길 원치 않고 있을 뿐이에요. 이젠 누구에 의해서도 어지럽혀지기가 싫을 뿐이에요."
나는 맥주를 비워 버렸고, 레이코 여사는 두 개비 째 담배를 다 피워 버렸다. 고양이가 레이코 여사 무릎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자세를 바꾸더니 다시 잠들어 버렸다. 레이코 여사는 망설이다가 세 개비 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부터 나오코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난 그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어루만져 주면서 걱정 마, 모든 게 잘 될 거야. 하고 말해 줬어요. 너처럼 젊고 예쁜 여자는 남자한테 안겨서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에요. 무더운 밤인 데다 나오코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나는 목욕 타월을 들고 와 그 애의 얼굴과 몸을 닦아 줬어요. 팬티까지 축축해서 그것도 벗기고..... 이상할 것 없어. 우린 줄곧 목욕도 함께 했고 그 애는 내 여동생 같았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고 나는 말했다.
"안아 주면 좋겠다고 나오코가 그랬어요. 이렇게 더운데 안기는 어떻게 안느냐고 그랬지만,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기에 안아 줬어요. 목욕 수건으로 몸을 감아서 땀이 끈끈하지 않게 해놓고, 얼마동안 그러다 진정이 된 것 같아 또 땀을 닦아주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후 재웠어요. 어쩌면 잠든 척했는지도 모르지만 금방 잠이 들었어요. 어떻든 잠든 얼굴이 무척 사랑스러웠어요. 무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처란 모르고 지내온 열 서넛 되는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그걸 보고 나도 잠들었어, 안심하고. 여섯 시에 눈을 떠보니까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어요. 잠옷이 던져져 있고, 옷과 운동화와 언제나 머리맡에 두고 자던 회중전등이 없어진 채로. 서둘러! 난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잖아, 회중전등을 갖고 나갔다는 건 아직 어두울 때 방에서 나갔다는 얘기니까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책상 위 같은 델 보니까, 그 메모지가 있었어. 옷은 다 레이코 여사에게 드리도록 해 주세요, 하는. 그래서 난 급히 모두에게로 뛰어가서 나오코를 찾아봐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원이 숙소 안에서부터 주변의 숲 속까지 샅샅이 찾았어요. 그 애를 찾기까지는 다섯 시간이 걸렸어. 그 앤 오래 전부터 튼튼한 줄까지 준비해 왔었던 거야."
레이코 여사는 깊이 한숨을 몰아쉬곤 고양이의 머리를 힘없이 쓰다듬었다.
"차 들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고마워"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 툇마루로 들고 갔다.
이미 해질녘이 가까워 햇살이 상당히 여려져 있었고, 나무 그늘이 길게 우리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개나리며 진달래,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심어진 것 같은, 기묘하게 어수선한 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구급차가 와서 나오코를 데려갔고, 나는 경찰에게 여러 가지 조사를 받았어. 조사라고 해도 대단한 심문은 없었어요. 하여간 유서 비슷한 걸 남겨 놓은 게 있으니 자살이라는 건 확실했고, 게다가 정신병 환자였으니까 자살 같은 건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그저 형식적으로 물었을 뿐이야. 경찰이 돌아가자 나는 곧 전보를 쳤죠, 와타나베 군에게.
"쓸쓸한 장례식이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너무나 조용하고, 사람도 적었고, 그 집사람들은 나오코가 죽은 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에만 신경을 쓰고 있고. 아무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살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가 봅니다. 사실, 장례식엔 가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 때문에 형편없는 기분이 되어 곧 여행을 떠나 버렸습니다."
"와타나베, 우리 산책 좀 할까?"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저녁 반찬거리라도 사오게. 나 배가 고파졌어."
"좋습니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전골"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전골 같은 거 먹어본 지가 아득하거든, 몇 년씩이나 됐어. 전골 꿈까지 꿨다니까. 고기에다 파하고 당면, 두부, 그리고 쑥갓을 넣고, 그걸 보글보글 끓여서....."
"그건 좋지만, 내겐 그걸 끓일 만한 냄비가 없습니다."
"문제없이, 내게 맡겨요. 주인한테 빌려올 테니까."
그녀는 성큼 일어서서 안채 쪽으로 가더니, 모양새 좋은 전골냄비와 가스풍로, 그리고 긴 고무호스를 빌려 왔다.
"어때? 내 실력 괜찮지?"
"그렇군요."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우린 동네에 있는 가까운 상점 거리로 나가 소고기와 계란, 야채, 두부 등 일체를 사고, 술을 파는 가게에서 비교적 질이 좋아 보이는 백포도주를 샀다. 내가 사겠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녀가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조카한테 식료품 계산을 하게 했다면 친척들 간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어?"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그리고 나 제법 돈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아무러면 무일푼으로 길을 나섰을까."
집으로 돌아오자 레이코 여사는 쌀을 씻어 안치고, 나는 고무호스를 끌어와 툇마루에서 전골을 해먹을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레이코 여사는 기타 케이스에서 자신의 기타를 꺼내, 벌써 어두워진 툇마루에 앉아 악기의 조율을 확인한 듯 천천히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
세밀한 곡을 일부러 느리게 치기도 하고, 빨리 넘어가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대강대강 치는가 하면 센티멘털하게 연주하면서, 그 온갖 리듬에 사뭇 사랑스러운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타를 치고 있을 때의 레이코 여사는 흡사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바라보고 있는 열일곱 여덟 살의 소녀처럼 보였다. 눈빛이 반짝이고 힘이 들어간 입을 오물거리기도 하였고, 순간순간 아련한 미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였다. 연주를 끝내자 그녀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좋아요, 그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남편이나 딸을 만나러는 안 갈 건가요? 도쿄에 있지요?"
"요코하마, 그렇지만 안가요. 전에도 내가 말했죠? 그 사람들 이제 나와는 관계를 안 갖는 게 좋아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질 테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그녀는 빈 세븐 스타 답배갑을 구겨 버리더니 가방에서 새것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끝난 인간이야. 와타나베 눈앞에 있는 건 나 자신의 잔존 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옛날에 다 죽어 버렸고, 난 그저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만 난 지금의 레이코 여사가 정말 좋습니다. 잔존 기억이든 뭐든. 그리고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지 몰라도, 레이코 여사가 나오코의 옷을 입어 주고 있다는 게 나로선 몹시 기쁩니다."
레이코 여사는 방긋 웃더니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와타나베는 그 나이에 비해 여자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난 생각한 대로 정직하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밥이 다 되었기에, 나는 냄비에다 기름을 두르고 전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꿈은 아니겠지?" 하고 레이코 여사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백 퍼센트 현실인 전골 요립니다. 내 경험으론." 하고 나는 흥겨운 듯 말했다.
우리는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전골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밥을 먹었다. 고양이가 냄새를 맡고 왔기에 고기를 나누어주었다. 배를 채우고 나서 우리는 툇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았다.
"만족합니까, 이것으로?" 하고 나는 물었다.
"무척. 더할 나위 없이" 하고 레이코 여사는 포만감이 이제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 이렇게 과식해 보긴 처음이야."
"이제부터 뭘 하죠?"
"담배 한 대 피우고 목욕탕엘 가고 싶어요. 머리가 엉망이어서."
"좋습니다. 목욕탕이 바로 가까운 데 있으니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와타나베. 괜찮다면 말해 주면 좋겠는데, 그 미도리라는 여자와는 잤나요?" 하고 레이코 여사가 물었다.
"섹스를 했느냐는 말입니까? 안했습니다. 여러 가지 것이 확실히 정리될 때 까진 안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확연해진 게 아닐까....."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오코가 죽어 버렸으니 모든 게 제자리로 왔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지, 와타나베 군은 나오코가 죽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그 미도리와는 헤어질 수 없다고. 나오코가 살아 있든 죽었든 그것과는 관계가 없이.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선택했고,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한 거야. 와타나베도 이제 어른이니까 자신의 선택에 대해선 확실한 책임감을 가져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아요."
"그렇지만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난 나오코에게 언제까지나 나오코를 기다리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최후의 최후에 그녀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이건 누구 탓이라든가 아니라든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아마 내가 도중에서 내팽개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나는 나 자신을 용설 할 수 없습니다. 레이코 여사는 그게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나와 나오코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린 처음부터 생사의 경계선에서 맺어진 것이니까요."
"와타나베 군이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픔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면, 와타나베는 그 아픔을 앞으로 인생을 꾸려 가는 동안 계속 간직하면 돼요. 그래서 만일 배울 것이 있다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요.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니까. 이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아요. 그러니 괴롭겠지만 좀 강해져요.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돼야 해요. 난 와타나베에게 그 말을 하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 먼 길을 그 관 같은 전철을 타고서."
"레이코 여사가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로선 아직 그 준비가 안 돼 있습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죽는 게 아닙니다."
레이코 여사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우리들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거야, 나도 와타나베도."
우리는 냇가의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서 목욕탕엘 갔고, 조금은 상쾌한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툇마루에 앉아 포도주를 마셨다.
"와타나베, 컵 하나 더 가져다주지 않겠어?"
"네 그러죠. 하지만 뭘 할 건데요?"
"지금부터 둘이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르는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가 말했다.
"쓸쓸하지 않은 장례식을."
내가 컵을 가지고 오자 레이코 여사는 거기에 가득 포도주를 채우고 정원의 석등 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안고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성냥이 있으면 가져다주겠어요? 될수록 큰 것이 좋아."
나는 부엌에서 큰 성냥 통을 들고 와서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럼, 내가 한 곡 연주할 때마다, 성냥개비를 나란히 놓아줄래요? 나, 지금부터 기타를 칠 테니까."
그녀는 우선 헨리 맨시니의 디어헌터를 아주 깨끗하고 조용히 연주했다.
"이 레코드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선물했었지?"
"그래요,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나오코가 이 곡을 무척 좋아해서요."
"나도 좋아해, 이 곡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니까."
그녀는 디어헌터의 멜로디를 몇 소절 가볍게 다시 켜고는 포도주를 들었다.
"취하기 전에 몇 곡이나 연주 할 수 있을까? 으음, 이런 장례식이 라면 쓸쓸하지 않고 좋지?"
레이코 여사는 이어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예스터데이를 치고, 다음엔 미셸과, 섬싱을 치고 히어 컴즈 더 선과 푸울 온더 힐을 연주했다. 나는 성냥개비 일곱 개를 나란히 놓았다.
"일곱 곡"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하고 나서 포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인생의 슬픔이라든가 아름다움 같은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이 사람들이란 물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그리고 조지 해리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돌리고 담배를 비벼 끄더니 다시 기타를 들어 페니 레인을 치고, 블랙 버드를 치고, 줄리아를 치고, 예순네 살이 되면을 치고, 노웨어 맨을 치고, 앤드 아이 러브 허를 치고, 헤이 주드를 쳤다.
"이제 몇 곡이지?"
"열네 곡" 하고 나는 대답했다.
"후우" 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와타나벤 한 곡쯤 뭐 연주 못해?"
"서툽니다."
"그래도 좋아."
나는 내 기타를 들고 나와 어정쩡하게 업 온더 루프를 쳤다. 레이코 여사는 그 동안 숨을 돌리며 담배를 피우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내가 다 치고 나자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녀는 기타용으로 편곡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드뷔시의 월광을 정중하고 아름답게 연주했다.
"이 두 곡은 나오코가 죽은 뒤에 마스터한 거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했다.
"나오코의 음악적 취향은 마지막까지 센티멘털리즘이란 지평을 떠나지 못했어."
그리고 그녀는 바카락의 곡을 몇 곡인가 더 연주했다. 클로스 투 유, 워크 온 바이, 비에 젖어도, 웨딩벨 블루스 등을.
"스무 곡"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마치 인간 자동 전축이 된 건 같아" 하고 레이코 여사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음대 때의 교수들이 이런 걸 보면 놀라 자빠질 걸."
그녀는 포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잇따라 아는 곡을 연주해 나갔다.
보사노바의 곡을 열곡 가까이 치고 로저스 하트나 거쉰의 곡을 치고, 밥 딜런과 레이 찰스, 그리고 캐롤 킹과 비치 보이스 스티비 원더, 거기에 위를 보고 걷자와 블루 벨벳, 그린 필드 등, 어떻든 이런 저런 곡을 모조리 쳤다. 그녀는 가끔 눈을 감기도 하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기도 했으며, 멜로디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포도주가 바닥이 나자 우린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정원에 놓았던 유리컵 속에 포도주를 석 등에 끼얹고 나서 그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웠다.
"이것으로 이제 몇 곡이지?"
"마흔여덟 곡" 하고 나는 말했다.
레이코 여사는 마흔 아홉 곡 째로 엘리노의 릭비를 쳤고, 쉰 곡 째로 다시 한 번 노르웨이의 숲을 쳤다. 쉰 곡이 끝나자 그녀는 손을 놓고서 위스키를 마셨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충분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대단합니다."
"좋아요,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 하고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요, 멋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덤으로"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쉰한 곡 째로 예의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
"와타나베, 나와 그거 해" 하고 연주를 끝낸 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커튼을 드리운 어두운 방안에서 레이코 여사와 나는 정말 당연한 일처럼 서로를 안고, 서로의 육체를 갈구했다. 나는 그녀의 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벗겼다.
"나 결국 이상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19세 연하의 남자에게 팬티를 벗기울 줄은 생각도 못해 봤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럼 스스로 벗겠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벗겨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 주름투성이니까 실망하진 말아요."
"나, 레이코 여사의 주름살이 좋은 걸요."
"눈물이 나는데" 하고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온갖 곳으로 입술을 가지고 갔고, 주름이 있으면 거길 혀로 더듬었다. 그리고 소녀 같이 빈약한 젖가슴에 손을 대고, 젖꼭지를 부드럽게 물고, 따뜻하게 젖어드는 그 작은 숲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움직였다.
"으음, 와타나베" 라고 그녀는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거기가 아니야, 거긴 그냥 주름이라고."
"이럴 때도 농담밖에 못해요?"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안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두려워 나. 이미 오래 전부터 안했으니까. 어쩐지 열일곱 여자아이가 남자아이 하숙집에 놀러왔다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야."
"나도 정말로 열일곱 살의 여자아이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나는 그 주금 속에 손가락을 놓고, 목덜미에서부터 귓가로 입을 맞추며 젖꼭지를 비볐다. 그리고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목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자 나는 그 가녀린 다리를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알지? 임신 안하게....."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 나이에 임신한다면 창피하잖아."
"걱정 말고 안심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깊숙이 그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몇 번인가 움직였고,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사정을 했다. 그것은 억누를 길 없는 격렬한 사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매달린 채 그 따스함 속에서 몇 번이나 쏟았다.
"미안합니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바보, 그런 생각은 왜 해" 하고 그녀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와 자?"
"으음, 그래요."
"나와 할 때는 그런 생각 안 해도 괜찮아 잊어. 잊고 좋을 때 좋을 만큼 쏟아. 어때, 좋았어?"
"네, 굉장히."
"참을 것까진 없어. 그대로가 좋아. 나도 굉장히 좋았어."
"레이코 여사!"
"왜?"
"당신은 누군가와 다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멋진데 아깝지 않아요."
"그런가, 그럼 생각해 보겠어, 그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잠시 뒤 다시 그녀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 아래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틀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조용히 움직이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그녀와 나누었다. 그녀 속에 들어간 채로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근사했다. 내가 농담을 하고 그녀가 킬킬 웃으면 그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우리는 오래오래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너무 좋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럼 그걸 해봐요."
나는 그녀의 허리를 치켜들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몸을 돌리듯 해서 그 감촉을 즐기고는, 그 즐거움의 끝에서 사정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밤 네 번의 정사를 가졌다. 그 뒤 그녀는 내 품안에서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몇 번 내쉬었으며, 몸을 여러 번 가늘게 떨었다.
"나 이제 일생 동안 이걸 안 해도 되겠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고 그래 줘. 부탁이야. 나머지 인생의 몫을 다했으니까 안심하라고."
"누가 그걸 확신하겠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비행기로 가는 게 빠르고 편하다고 권했지만 그녀는 기차로 가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세이칸 연락선이 좋아. 하늘을 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우에노 역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는 기타 케이스를, 나는 여행 가방을 들고, 기차가 올 때까지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도쿄에 올 때와 같은 트위드 재킷에다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말 아사히가와라는 곳,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라고 그녀가 물었다.
"좋은 곳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 쓰겠습니다."
"특히 와타나베의 편지 좋아해요, 나. 나오코는 다 태워 버렸지만..... 그렇게 좋은 편지였는데."
"편지는 그저 종이일 뿐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아요."
"정직하게 말해서 나, 두려워. 혼자서 아사히가와에 가는 게 말이야. 그러니 편지해 줘. 와타나베의 편지를 읽으면 언제나 와타나베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내 편지로 된다면 얼마든지 쓰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레이코 여사라면 어딜 가든 잘 해낼 겁니다."
"그런데 내 몸 속에 아직도 뭔가 잠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이거 착각일까?"
"잔존 기억입니다, 그건" 하고 나는 말하며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날 잊지 말아 줘"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잊지 않을 겁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와타나베와 만나는 일이 두 번 다시없을지 모르지만, 난 어딜 가든 언제까지라도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기억할 거야."
나는 그녀의 눈을 봤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릴 훔쳐보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행복해야 해요" 하고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가 와타나베에게 충고할 만한 것은 이미 다 했으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행복 하라는 것밖에는."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많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게 잔뜩 있다, 온 세상에서 너 외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마치 전 세계의 가랑비가 온 지구의 잔디밭에 내리고 있는 것 같은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 동안 줄곧 유리창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얼굴을 들고 공중전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딘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 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저자 후기
외부와 단절한 채 오직 글쓰기에만 매달려 완성한 자전적 소설
나는 원칙적으로 소설에 후기를 붙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로, 이 소설은 5년 전쯤에 쓴 <개똥벌레>라는 단편소설을 그 축으로 하고 있다. 나는 이 단편을 기본으로 해서 4백자 원고지 300매 분량으로 깔끔한 연애소설을 써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과 원더랜드>를 마치고 다음 장편을 시작하기 전에 기분전환 정도의 가벼운 기대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원고 분량이 900매 정도나 불어나 '가볍다'고 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이 소설에 쓰여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이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과 원더랜드>에 자전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인데, F.스코트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와 <위대한 개츠비>가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자전적 소설이다. 아마도 이는 감각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일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쓸 만하다거나 쓸 만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처럼 이 소설도 역시 좋거나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작품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됨됨이를 넘어 존속하기를 바랄 뿐이다.
셋째로, 이 소설은 남부 유럽에서 쓰여 졌다. 1986년 12월 21일에 그리스 미케네 섬의 한 빌라에서 쓰기 시작해서, 1987년 3월 27일 로마 교외의 아파트와 호텔에서 완성했다. 일본이 아닌 곳에서 쓰여 졌다는 사실이 이 소설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뚜렷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전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지 전화도 없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오직 글쓰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 밖에 큰 환경의 변화는 없었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그리스에서, 중반부는 시실리에서, 후반부는 로마에서 쓰여졌다. 아테네의 싸구려 호텔 방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없었다. 나는 매일 타베루나에 가, '서전트 페퍼즈 론리 하츠 클럽 밴드'의 테이프를 워크맨을 통해 120회 정도 반복해 들으면서 이 소설을 써내려 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레논과 매카트니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이 소설은 이미 죽음으로 이별한 나의 친구들과, 살아 있지만 떨어져 있는 나의 몇몇 친구들에게 바친다.
1987년 6월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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