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빵가게 습격

chocohuh 2012. 12. 6. 11:20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팠다. 아니,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마치 우주의 공허를 그대로 삼켜 버린 것같이 속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도넛 구멍처럼 작은 공백이었던 것이, 날이 감에 따라 우리 몸 안에서 자꾸자꾸 커져서 마침내는 바닥 모를 허무가 되었다. 공복이라는 장중한 BGM이 달린 금자탑인 것이다.
공복감은 왜 생기는가? 물론 그것은 식료품의 부족에서 온다.
왜 식료품은 부족한가? 적당한 등가 교환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등가 교환물을 갖고 있지 못한가? 어쩌면 우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한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 공복감은 상상력의 부족에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러면 어때.
신도, 마르크스도, 존 레논도 죽었다.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팠고 그 결과 악으로 달리려 했다. 공복감이 우리를 악으로 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공복감으로 하여금 우리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실존주의 같은 것이다.


"아니야, 난 이제 안되겠어" 하고 내 짝은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된다.
그럴 수 밖에 우리는 이미 꼬박 이틀을 물밖에 마시지 못했다. 꼭 한 번 해바라기 이파리를 먹어 봤지만 다시 또 먹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식칼을 들고 빵 가게로 떠났다. 빵 가게는 상가 중앙에 있었고 양 옆으로는 이불 가게와 문방구가 있었다. 빵 가게 주인 남자는 대머리의 쉰 살이 넘은 공산당원이었다.
우리는 손에 식칼을 들고 천천히 상가의 빵 가게까지 걸어갔다. '백주의 결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빵 굽는 냄새가 차츰 강하게 풍겨왔다. 그 냄새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악'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갔다.

빵 가게를 습격한다는 것과 공산당원을 습격한다는 데에 우리는 흥분했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행해진다는 사실에 히틀러 유겐트적인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늦은 오후여서 빵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엉성한 시장 가방을 들고 있는 눈치코치 없는 아줌마였다. 그 아줌마의 주위에서는 위험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범죄자들의 계획적인 범행은 자주 푼수 같은 아줌마들 때문에 훼방을 받곤 한다. 적어도 텔레비젼의 범죄물에선 노상 그렇다.


나는 단짝더러, 아줌마가 나갈 때까진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는 눈짓을 보냈다. 그리곤 식칼을 몸뒤에 감추고 빵을 고르는 척했다.
아줌마는 이쪽이 지칠 만큼 시간을 끌면서 마치 양복장이나 삼면경을 고르는 듯한 신중함으로 튀김빵과 메런빵을 접시에 담았다.
그러고도 이내 그걸 사는 게 아니었다. 튀김빵과 메런빵은 그녀에게 있어선 일시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으로 결정하기엔 아직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선 메런빵이 선택으로부터 미끄러졌다. 어째서 난 메런빵을 고르고 말았을까 하는듯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걸 고르는게 아니었는데, 첫째 너무나 달다. 그녀는 메런빵을 다시 선반에다 되올려 놓고 조금 생각한 뒤 크라상 두 개를 살며시 접시에 담았다. 새로운 선택이 행해진 것이다.
빙산은 약간 풀리고 구릉 사이로는 봄의 햇살마저 넘쳐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도야? 저 아줌마도 함께 해치우자구" 하고 나의 단짝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글쎄, 기다리라니까" 하고 나는 그를 제지했다.


빵가게 주인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그너의 선율에 도취된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공산당원이 바그너를 듣는 일이 과연 옳은 행위인지 어떤지 나로선 잘 알수가 없다.
아줌마는 크라상과 튀김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뭔가 또 탐탁치 않은 듯했다. 크라상과 튀김빵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질적인 면까지 있다고 느낀 것 같았다.

서모스탯(자동 온도 조절 장치)이 고장난 냉장고처럼 빵을 얹어 놓은 접시는 그녀의 손 안에서 달각달각 흔들렸다. 물론 정말로 흔들린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흔들렸단 말이다. 달각달각달각......


"해치우자" 하고 단짝은 말했다. 그는 공복감과 바그너와 아줌마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 때문에 복숭아 털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아줌마는 아직도 접시를 손에 들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지옥을 방황하고 있었다.
튀김빵이 먼저 연단에 서서, 로마 시민들을 향해 감동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연설을 했다.
아름다운 어구, 근사한 문장, 듣기 좋은 목소리......짝짝짝 하고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다음으로 크라상이 연단에 서서 교통 신호에 관한 어딘지 두서 없는 연설을 했다. 회전을 하려는 차는 정면의 청신호를 보고 직진하다 마주오는 차들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에 좌회전합니다. 뭐 그런 식이다.


로마 시민들은 무슨 소린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어려운 이야기 같아서 짝짝짝짝 하고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는 크라상 쪽이 약간 컷다. 그러자 튀김빵은 다시 선반으로 되돌려졌다.
아줌마의 접시에는 아주 단순한 완벽함이 찾아들었다. 크라상이 두개.
마침내 아줌마는 가게를 나갔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너무너무 배가 고파요. 그런데 돈이 한푼도 없답니다." 하고 나는 주인에게 고백했다. 식칼을 몸 뒤에 감춘 채 말이다.
"옳아" 하고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 위에는 손톱깍이 하나가 얹혀 있었다. 우리는 그 손톱깍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늙은 매의 발톱이라도 깎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톱깎이였다. 아마 뭔가 장난을 하려고 만들어 낸모양이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빵을 먹으면 되잖아." 주인이 말했다.
"하지만 돈이 없는걸요."
"돈은 필요없으니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구." 주인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톱깎이 쪽을 보고 말했다.


"아세요, 우리는 나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래서 남의 동정을 받을 수 없지요."
"응."
"그런 말입니다."
"좋아" 하고 주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자네들 맘대로 빵을 먹어도 좋아. 그 대신 이 늙은이는 자네들을 저주해 주지. 그럼 되겠지."
"저주라니, 어떤 식으로요?"
"저주는 언제나 불확실한 거야. 버스 시간표하고는 다르다구."
"이봐, 잠깐." 단짝이 끼어들었다.
"난 싫어. 저주는 받기 싫단 말이야.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어때?"
"잠깐, 잠깐. 난 죽고 싫지 않아" 하고 주인이 말했다.
"나도 저주받는 건 싫다구" 하고 단짝이 대꾸했다.
"하지만 뭐든지 교환이 필요하잖아"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뭐든지 교환이 필요하잖아"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손톱깎이만 노려보며 잠자코 있었다.

"어때 자네들 바그너 좋아하나?" 하고 주인이 입을 열었다.
"아니오." 내가 대답했다.
"좋아요." 단짝이 대답했다.
"좋아해 준다면 빵을 먹게 해주지."


마치 암흑 대륙에 전도를 나선 선교사의 말 같았지만 우리는 곧 그 말을 듣기로 했다. 적어도 저주를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좋아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도 좋아할게요." 단짝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그너를 들으면서 배가 부를 때까지 빵을 먹었다.


"음악사상에 찬연하게 빛나는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1859년 발표된 것으로, 후기 바그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하고 주인은 해설서를 읽었다.
"흠흠."
"우물우물."
"콘봐르 국왕의 조카 트리스탄은 숙부의 약혼자인 왕녀 이졸데를 맞이하러 갔는데 귀로 선상에서 이졸데와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초반에 나오는 첼로와 오보에의 아름다운 테마가 이 두사람의 사랑 모티프입니다."
두시간 후 우리는 서로가 만족한 상태로 헤어졌다.
"내일은 '탄호이저'를 듣자구"하고 주인이 말했다.


방으로 돌아왔을때, 우리의 허무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상상력이 경사진 고갯길을 굴러 떨어지듯이 달까닥 달까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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