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1973년의 핀볼

chocohuh 2012. 12. 6. 10:50

1963-1973

 

낯선 고장의 이야기 듣기를 병적으로 좋아했다.

한때, 10년도 전의 얘기지만, 닥치는 대로 주위의 사람들을 붙들고는 태어난 고장이며 자라난 지역 얘기를 들으며 돌아다닌 적이 있다. 남의 얘기를 솔선해서 듣는다는 유형의 사람이 극단적으로 부족했던 시대였는지, 누구나가 친절하게 그리고 열심히 얘기해 주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내 얘기를 듣고는 일부러 오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말라 버린 우물에 돌이라도 던져 넣듯이 나를 향해서 실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한결같이 만족하며 돌아갔다. 어떤 이는 기분 좋은 듯이 얘기하고, 어떤 이는 화를 내면서 얘기했다. 정말로 요령 좋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루한 이야기가 있고, 눈물 나게 하는 서글픈 이야기가 있고, 농담 반의 엉터리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능력이 허락하는 한 진지하게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구나가 누군가에게, 혹은 또는 세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전달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골판지 상자에 빽빽이 쑤셔 넣어진 원숭이 무리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그런 원숭이들을 상자에서 한 마리씩 끄집어내서는 정성껏 먼지를 털고 엉덩이를 딱 하고 두드리고 나서 초원으로 놓아주었다. 그들의 그 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도토리라도 갉아먹으면서 사멸해 버렸을 것이다. 결국은 그런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고생은 많으면서 얻는 바는 적은 작업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만일 그 해에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세계 콩쿠르 대회’가 개최되었더라면 나는 문제없이 세계 챔피언으로 뽑혔을 것이다. 그리고 상품으로 부엌에서 쓰는 성냥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야기한 상대 중에는 토성 태생과 금성 태생이 한 사람씩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우선은 토성의 이야기,

“거기는, ......지독히 추워.”하고 그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생각만 해도, 미쳐 버려”

그는 어느 정치적인 그룹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 그룹은 대학의 9호관을 점거하고 있었다. “행동이 사상을 결정한다, 그 역은 불가.”라는 것이 그들의 모토(moto)였다. 무엇이 행동을 결정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 9호관에는 워터 쿨러와 전화와 급탕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고, 이층에는 이천 장의 레코드 컬렉션과 알테크 A5를 갖춘 조촐한 음악 감상실까지 있었다. 그곳은(예를 들자면 경마장 화장실 같은 냄새가 나는 8호관에 비교한다면 이라는 이야기지만) 천국이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뜨거운 물로 말끔히 수염을 깎고, 오후에는 마음껏 닥치는 대로 장거리 전화를 걸고, 날이 저물면 다 같이 모여서 레코드를 들었다. 덕택에 가을이 끝날 때쯤에는 그들 전원이 클래식 매니아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기분 좋게 개인 11월 오후 제 3 기동대가 9호관에 돌입했을 때에는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이 풀 볼륨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지마는, 진위 여부는 모르겠다. 1969년을 둘러싼 흐뭇한 전설 중의 하나다.

내가 위태롭게 쌓아 올려진 바리케이드 대신인 긴 의자 밑을 빠져나갔을 때는, 하이든의 G단조 피아노 소나타가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애기동백이 핀 야마노테의 언덕길을 올라가서, 여자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때의 그 그리운 분위기 그대로였다. 그는 나에게 가장 훌륭한 의자를 권하고, 이학부 건물에서 슬쩍해 온 비커에다가 미지근한 맥주를 부어 주었다.

“게다가 인력이 굉장히 강하거든.”하고 그는 토성 이야기를 계속했다. “입에서 뱉은 껌 찌꺼기에 발을 부딪쳐서 발등이 부서진 녀석까지도 있어. 지, 지옥이야.”

“과연.” 이 초 정도 있다가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때쯤에는 나는 삼백 종류 남짓한 실로 다양한 맞장구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태, 태양도 굉장히 작아. 홈베이스 위에 올려놓은 여름 밀감을 외야에서 쳐다보는 것만큼 작지. 그러니깐 언제나 어둡다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왜 모두 나가 버리지 않아?” 나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좀 더 살기 좋은 별도 많이 있을 텐데.”

“모르겠네. 아마도 태어난 별이기 때문이겠지. 므, 뭐 그런 거지. 나도 대학을 나오면 토성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후,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 혀, 혀, 혁명이다.”

어쨌건 멀리 떨어진 도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러한 거리를, 나는 동면을 앞둔 곰처럼 몇 개든 간직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떠오르고, 늘어선 집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먼 곳의, 그리고 영원히 만나지도 않을 사람들의 삶의 느긋한, 그리고 확실한 굴곡을 느낄 수도 있다.

 

나오코도 몇 번인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의 말은 한마디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어.”

나오코는 해가 잘 드는 대학 라운지에 앉아서, 한 쪽 팔로 턱을 괸 채, 귀찮은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녀가 얘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언제나 천천히, 그리고 정확한 말을 찾으면서 이야기한다.

마주 보고 앉은 우리들 사이에는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담배꽁초가 그득 찬 종이컵이 한 개 놓여 있었다. 높은 유리창으로부터 루벤스의 그림처럼 들어오고 있는 햇빛을 테이블 한가운데 뚜렷하게 명암의 경계선을 긋고 있다. 테이블 우에 올려놓은 나의 오른손은 햇빛 속에, 그리고 왼손은 그늘 속에 있었다.

1969년 봄, 우리들은 이처럼 스무 살이었다. 라운지는 새 가죽 구두를 신고, 새로운 강의 요령을 껴안고, 머리에 새로운 뇌를 채워 넣은 신입생 덕에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우리들 곁에는 시종 누군가가 누군가하고 부딪혀서는 투덜거리거나 사과를 하거나 하고 있었다.

“도대체 거리라고 할 마한 곳이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똑바른 선로가 있고, 역이 있고,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운전사가 놓칠 정도로 초라한 역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삼십 초 남짓, 둘이 묵묵히 햇빛 속에서 흔들리는 담배 연기를 별 뜻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플랫폼 끝에서 끝까지 개가 항상 산책하고 있어. 그런 역. 알겠지?” 나는 끄덕거렸다.

“역을 나서면 작은 로터리가 있고, 버스 정거장이 있어. 그리고 가게가 몇 개인가......꼭 잠이 덜 깬 것 같은 가게야. 거기를 곧바로 가면 공원에 부딪히게 되지. 공원에는 미끄럼틀이 하나, 그리고 그네가 세 대.”

“모래톱은?”

“모래톱?” 그녀는 천천히 생각하고 나서 확인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있어”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침묵에 잠겼다. 나는 다 탄 담배를 종이컵 안에서 꼼꼼하게 껐다.

“지독하게 지루한 거리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지루한 거리가 생겨났는지 상상조차 못하겠어.”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나는 그렇게 말해 보았다.

나오코는 목을 흔들고 혼자 웃었다. 성적표에 쭉 A가 늘어서 있는 여학생이 자주 짓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이상하게 오랫동안 나의 마음속에 남았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그 웃음만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플랫폼을 종단하는 개를 어떻게 해거든 만나보고 싶었다.

 

그때부터 사년 뒤, 1973년 5월, 나는 혼자서 그 역을 방문했다. 개를 보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수염을 깎고, 반년 만에 넥타이를 매고, 새 코드봔 구두를 신었다.

 

지금이라도 녹슬어 버릴 것 같은 서글픈 두 차량으로 편성된 교외 전차를 내리자. 맨 처음 그리운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주 옛날의 피크닉 냄새다. 오월의 바람은 그처럼 시간의 저쪽 펀에서부터 불어 왔다. 얼굴을 들고 귀를 기울이면 종달새 소리조차도 들려온다.

나는 긴 하품을 하고 나서 역 벤치에 걸터앉아, 지겨운 기분으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아침 일찍 나설 때의 신선한 기분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똑같은 일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없는 데자뷰, 되풀이할 때마다 나빠져만 간다.

전에 몇 명인가의 친구들하고 한방에서 뒤섞여 자며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 새벽녘에 누군가가 나의 머리를 밟는다. 그리고 ‘미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소변 소리가 들린다. 되풀이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담배를 입가에 문 채, 아직 발에 잘 익지 않은 가죽 구두 바닥을 콘크리트 바닥에 북북 문질러 보았다. 발의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다. 통증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만, 마치 몸이 몇 개인가의 각기 다른 부분으로 절단되어 버린 것 같은 위화감을 나에게 계속 주고 있었다.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화감......

그런 위화감을 나는 가끔 느낀다. 조각이 뒤섞여 버린 두 가지 종류의 퍼즐을 동시에 조립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거나 그런 때에는 위스키를 마시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황은 더 나빠져 있다. 되풀이다.

눈을 떴을 때, 양편에 쌍둥이 여자아이가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 경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양편에 쌍둥이 여자아이라는 일은 과연 처음이었다. 둘은 내 양어깨에 코끝을 붙이고 기분 좋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잘 개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윽고 둘은 거의 동시에 눈을 뜨자 침대 밑에 벗어 던진 셔츠하고 블루진을 부스럭부스럭 입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굽고, 냉장고에서 버터를 꺼내서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정말로 익숙한 솜씨였다. 유리창 밖 골프장 철망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새가 걸터앉아서 기관총을 쏴 대는 것처럼 지저귀고 따갑게 있었다.

“이름은?” 하고 나는 둘한테 물어 보았다. 과음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통성명할 만한 이름이 아니야.” 하고 오른쪽에 앉은 쪽이 말했다.

“사실, 대수로운 이름이 아닌 걸.” 하고 왼쪽이 말했다.

“알지?”

“알아.”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들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토스트를 씹고, 커피를 마셨다. 정말 맛있는 커피였다.

“이름이 없으면 난처해?” 하고 하나가 물었다.

“글쎄, 어떨까?”

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꼭 이름이 필요하다면, 적당히 붙여도 돼.” 하고 다른 한쪽이 제안했다.

“당신이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르면 돼.”

그녀들은 항상 교대로 이야기했다. 꼭 FM 방송의 스테레오 체크 같다. 덕택에 머리가 더 아팠다.

“예를 들어서?”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오른쪽과 왼쪽.” 하고 하나가 얘기했다.

“종과 횡.” 하고 또 하나가 말했다.

“상과 하.”

“앞과 뒤.”

“동과 서.”

“입구와 출구.” 나는 지지 않게 간신히 그렇게 덧붙였다. 둘은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다. 대개의 것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전기 청소기, 동물원, 소스 그릇.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아파트의 개수대 아래에 쥐덫을 놓아 본 적이 있다. 미끼로는 페퍼민트 껌을 썼다. 온 방안을 찾아 헤맨 끝에 음식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 코트 주머니에서 영화관 입장권 반쪽과 함께 그것을 찾아냈다.

삼 일째 되는 날 아침에 작은 쥐가 그 덫에 걸려 있었다. 런던의 면세점에 쌓여 있는 캐시미어 스웨터 같은 색의 아직 어린 쥐였다. 인간으로 친다면 십오륙 세라고나 할 수 있을 터였다. 애달픈 나이다. 껌 조각이 발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잡기는 잡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뒷발이 덫에 낀 채, 쥐는 나흘째 되는 아침에 죽어 있었다. 그의 모습은 나에게 하나의 교훈을 남겨 주었다.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이다.

 

선로는 언덕을 따라서, 곡 자(잣대)라도 댄 것처럼 쭉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훨씬 더 저 앞에는 잡목 숲의 거무스레한 녹색이 휴지 조각이라도 뭉쳐 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조그맣게 보인다. 두 개의 레일은 태양 빛을 둔하게 반사시키면서 겹치듯이 초록색 가운데로 사라져 있었다. 어디까지 가 보아도 틀림없이 똑같은 풍경이 영원히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넌더리가 났다. 이럴 것 같으면 지하철 쪽이 훨씬 낫다.

담배를 피워 버리자 나는 몸을 쭉 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천천히 바라보다는 행위 자체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그러면서, 전체가 희미한 봄 특유의 불투명한 베일에 덮여 있었다. 그 종잡을 수 없는 베일 위에서부터 하늘의 푸르름이 조금씩 침투하려고 하고 있었다. 햇빛은 고운 먼지와도 같이 소리도 없이 대기 가운데를 내려와, 그리고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땅위에 쌓였다.

미지근한 바람이 빛을 흔든다. 마치 나무 사이를 떼 지어 옮겨 다니는 새처럼 공기가 천천히 흐른다. 바람은 선로를 따라 완만한 녹색 사면을 미끄러지고, 궤도를 넘고, 나무들 잎사귀를 흔든다고 할 것도 없이 숲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뻐꾸기 소리가 한 줄기, 부드러운 빛 속을 가로질러 저쪽 편 능선으로 사라져 간다. 언덕은 몇 개인가의 기복을 이루며 일렬로 이어지고, 잠이 든 거대한 고양이같이 시간의 양달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발의 통증은 한창 심해졌다.

 

우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열두 살 때 나오코는 이 지방에 왔다. 1961년, 서력으로 말하면 그렇게 된다. 리키 넬슨이 <헬로 메리 루>를 노래한 해다. 그 당시 이 평화로운 녹색 계곡에는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몇 채인가의 농가하고 약간의 말, 가재투성이의 강, 단선 교회 전차와 하품이 나올 것 같은 역, 그뿐이었다. 대개의 농가 마당에는 몇 그루인가의 감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 귀퉁이에는 기대는 순간에 간단히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비를 맞도록 내버려 둔 헛간이 있었고, 선로에 면한 헛간 벽에는 휴지라든가 비누의 야한 블리키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정말이지 그런 곳이었다. 개조차도 없었어,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그녀가 이사한 집은 한국 전쟁 때쯤에 세워진 양옥 이층집이었다. 과히 넓다고 할 것은 없었지만, 굵고 튼튼한 기둥과 용도에 따라 세밀하게 선택한 양질의 목재 덕분으로 집은 묵직하고 차분하게 보였다. 바깥은 세 단계로 나뉘어진 농담의 녹색으로 칠하여져 있었고, 각각의 색은 태양과 비와 바람으로 멋지게 퇴색하여 주위 풍경에 딱 어울리게 녹아들어 있었다. 마당은 넓고, 그 안에는 몇 개인가의 숲과 작은 연못이 있었다. 숲 가운데는 아틀리에 대신에 사용하던 아담한 팔각형 정자가 있고, 밖으로 튀어나온 창에는 완전히 색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레이스 커튼이 걸려 있었다. 연못에는 수선화가 만개하고 있었고, 아침이 되면 참새가 모여서 거기에서 목욕을 했다.

그 집의 설계자이기도 했던 처음 주인은 나이 먹은 서양 화가였지만, 그는 나오코가 이사하기 전 해 겨울, 폐를 다쳐서 죽었다. 1960년, 보기 뷔가 <러버 볼>을 노래한 해다. 이상하게도 비가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이 지역에는 눈은 거의 어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지독히 찬비가 온다. 비는 땅속으로 스며들고, 땅위를 습습한 냉랭함으로 뒤덮었다. 그리고 땅속을 달콤한 지하수로 채웠다.

 

여기서 오 분 정도 선로를 따라서 걸은 지점에는 우물 하는 직공의 집이 있었다. 그 집은 강가의 습한 저지대에 있었고, 여름이 되면 집 주위를 모기하고 개구리가 꽉 둘러싼다. 직공은 오십 남짓한 까다롭고 괴팍한 사나이였지만, 우물 파는 데 있어서만큼은 정말 천재였다. 그는 우물 파기를 부탁 받으면, 우선 부탁한 집의 부지를 며칠이건 간에 걸어 다니고 툴툴 불평을 하면서 여기저기의 흙을 손으로 집어서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납득이 가는 지점을 찾아내면 몇 사람인가의 동료를 불러서 땅을 일직선으로 파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이 지방 사람들은 맛있는 우물물을 마음껏 마실 수가 있었다. 마치 유리잔을 든 손가지 투명하게 비춰 버릴 것같이 맑고 차가운 물이었다. 후지산의 눈이 녹은 물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거짓말이 뻔하다. 여기까지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나오코가 열일곱 살이 된 가을, 직공은 전차에 치여서 죽었다. 억수 같은비와 찬술과 난청 탓이었다. 시체는 몇 천이나 되는 고기 조각이 되어 부근의 들판으로 흩어져 날아갔고, 그것을 양동이 다섯 개분으로 회수하는 동안 일곱 명의 순경이 끝에 갈고리가 달린 긴 막대기로 배를 주린 들개 무리를 쫒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기는 양동이 한 개분 정도의 살점은 강에 떨어져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 물고기 먹이가 되었다.

직공에게는 두 사람의 아들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뒤를 잇지 않고 이 지방을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남겨진 집은 누구 하나 가까이 가는 사람조차 없는 채로 폐옥이 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허물어져 갔다. 그리고 그때 이래로, 맛있는 물이 나오는 우물은 얻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나는 우물을 좋아한다. 우물 볼 때마다 돌멩이를 집어넣어 본다. 돌멩이가 깊은 우물 속 수면에 부딪히는 소리만큼 마음을 놓이게 하는 것은 없다.

 

1961년에 나오코의 식구가 이 땅에 옮아 살게 된 것은 아버지 혼자만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죽은 서양화가와 친한 친구였기도 했고, 물론 이 지역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 분야에서는 조금은 이름이 알려진 불문학자였던 것 같지만 나오코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쯤 갑자기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가 후로는 마음대로 이상한 옛날 서적을 번역하는 마음 편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타락한 천사라든가, 파계승, 악마를 쫓는 법, 흡혈귀 따위의 책이다. 자세히는 모르겠다. 꼭 한 번 잡지에 게재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나오코의 말에 의하면 젊었을 때에는 이래저래 진기하고 즐거운 인생을 보낸 사람이었던 것 같고, 그러한 사진에서도 얼마간 엿볼 수가 있었다. 헌팅캡을 쓰고 까만 안경을 쓰고, 카메라 렌즈 일 미터 정도 위를 무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오코 식구가 이사를 했을 시절, 이 지역에는 그러한 종류 색다른 문화인이 모인 막연한 형태의 콜로니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마치 제정 러시아 시대의 사상범이 유배된 시베리아 유형지와 같은 것이었다 보다.

유형지에 관해서는 트로츠키의 전기에서도 조금 읽은 적이 있다. 어찌된 셈인지 바퀴벌레 이야기와 토나카이의 이야기만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토나카이의 이야기......

트로츠키는 어둠을 타고 토나카이 썰매를 훔치고, 유형지를 탈출했다. 얼어붙은 은백색 황야를 네 마리 토나카이는 달리고 달렸다. 그들이 토하는 숨은 하얀 덩어리가 되고, 발굽은 아무도 밟지 않은 처녀 설을 흩날렸다. 이틀 후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토나카이들은 피로 때문에 쓰러졌고,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죽은 토나카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맹세를 했다. 나는 반드시 이 나라에 정의와 이상과, 그리고 혁명을 가져오겠다고. 붉은 광장에는 지금도 이 네 마리 토나카이의 동상이 서 있다. 한 마리는 동쪽을 향하고, 한 마리는 북쪽을 향하고, 한 마리는 서쪽을 향하고, 한 마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스탈린조차도 이 토나카이들을 부술 수는 없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사람은 토요일 아침 일찍 붉은 광장을 보면 된다. 빨간 볼을 한 중학생들이 하얀 숨을 토하면서 토나카이들한테 걸레질을 하고 있는 상큼한 광경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콜로니 이야기다.

그들은 역에서 가까운 편리한 평지를 피해서, 구태여 산중턱을 골라서는 거기에 각자의 뜻에 맞는 집을 세웠다. 그 하나하나는 터무니없이 넓은 마당을 가졌고, 마당 안에는 잡목 숲이나 연못이나 언덕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어떤 집 마당에는 진짜 은어가 헤엄치는 깨끗한 냇물조차도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호도애 소리로 잠을 깨고, 너도밤나무 열매를 발로 밟으면서 마당을 돌고, 멈추어 서서는 잎사귀 사이에서 떨어지는 아침 햇살을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시간은 흐르고, 도심에서 급속히 뻗은 주택 화의 물결은 약간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도 미쳤다. 동경 올림픽을 전후한 때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풍요로운 바다처럼 보였던 드넓은 뽕나무밭은 불도저로 까맣게 깔아뭉개졌고, 역을 중심으로 하는 평탄한 거리가 조금씩 형성되어 갔다.

새로운 주민의 대부분은 중견 샐러리맨으로서, 아침 다섯 시가 지나면 벌떡 일어나 얼굴을 씻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전철을 타고, 밤늦게 초주검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느긋하게 거리나 자기 집을 바라볼 수 있는 때는 일요일 오후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개를 키웠다. 개들은 차례차례 교배했고, 강아지는 들개가 되었다. 옛날에는 개조차 없었어, 하고 나오코가 말한 것은 그런 뜻에서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지만 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열 개비 정도의 담배의 불을 붙이고, 그리고 비벼 껐다. 플랫폼 중앙까지 걸어가 수도꼭지에서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맛있는 마셨다. 그래도 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역 옆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다. 강을 막은 것 같은 형태로, 가늘고 꼬불꼬불한 연못이다. 주변에는 키 큰 수초가 무성했고, 가끔 수면에서 고기가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기슭에는 몇 명인가의 남자가 거리를 두고 앉아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칙칙한 수면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낚시줄은 마치 수면에 박힌 은 바늘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희미한 봄 햇살 아래에서 낚시꾼이 데려온 것 같은 하얀 커다란 개가 클로버 냄새를 열심히 맡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가 십 미터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울타리에서 몸을 내밀고 불러 보았다. 개는 얼굴을 들고, 딱할 정도로 흐린 갈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그리고 꼬리를 두세 번 흔들었다. 손가락을 퉁기자 개는 다가와서 울타리 사이로 코끝을 집어넣고 나의 손을 긴 혓바닥으로 핥았다.

들어와 하고 뒤로 물러서면서 개를 불렀다. 개는 주저하듯이 뒤를 바라보고, 뭔지 잘 모르면서 꼬리를 흔들어 댔다.

“안에 들어와, 기다리다 지쳤어.”

나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어 포장지를 빼고 개에게 보였다. 개는 한참 동안 껌을 바라보고 나서 결심을 하고 울타리를 빠져서 들어왔다. 나는 개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어 주고 나서 손바닥으로 껌을 뭉쳐 끝 쪽을 향해서 힘껏 던졌다. 개는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나는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몇 번이고 자신한테 타일렀다. 모든 것은 끝나 버린 거야, 이젠 잊어버려, 하고. 그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냐, 라고. 하지마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오코를 사랑했던 일도, 그리고 그녀가 이미 죽어 버린 일도, 결국 무엇 하나 끝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성은 구름에 뒤덮인 더운 별이다. 더위와 습기 때문에 주민의 태반은 요절해 버린다. 삼십 년 살면 전설이 될 정도다. 그리고 그 몫만큼 그들의 마음은 사랑으로 차 있다. 모든 금성인 은 모든 금성인을 사랑한다. 그들은 남을 미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는다. 흉도 안 본다. 살인도 싸움도 없다. 있는 것은 사랑과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뿐이다.

“비록 오늘 누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슬퍼하지 않아.”

금성 태생의 조용한 사나이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그 몫만큼 살아 있을 때 사랑해 두거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사랑해 둔다는 거로군.”

“자네들이 사용하는 말은 잘 모르겠어.” 하고 그는 목을 흔들었다. “정말 그렇게 잘 될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고 그는 말했다. “금성은 슬픔으로 메워져 버리지.”

 

내가 아파트로 돌아오자 쌍둥이는 깡통에 든 오일 사딘(정어리) 같은 형태로 나란히 침대에 기어 들어간 채 킬킬 웃고 있었다.

“어서 와요.” 하고 한쪽이 말했다.

“어디에 갔었어?”

“역이야.”라고 말한 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쌍둥이 사이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지독히 졸렸다.

“어디에 있는 역?”

“뭣 하러 갔었어?”

“먼 곳에 있는 역이야. 개를 보러 갔지.”

“어떤 개?”

“하얗고 커다란 개였어. 하지만 개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야.”

내가 담배에 불을 붙여서 다 피울 때까지,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슬퍼?” 하고 한쪽이 물어 왔다.

나는 가만히 끄덕거렸다.

“잘 자.”하고 한쪽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기도 하고 동시에 쥐라고 불린 사나이의 이야기기도 하다. 그 해 가을‘우리’들은 칠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었다.

1973년 9월, 이 소설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입구다.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없으면 문장을 쓰는 의미 따위는 전혀 없다.

 

 

핀볼의 탄생에 대하여

 

레이먼드 멀로니라는 인물의 이름에 짐작이 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때 그러한 인물이 존재했고, 그리고 죽었다. 그뿐이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깊은 우물 바닥의 소금쟁이에 대한 것만큼 밖에는 모른다. 하지만 핀볼 역사상 제1호기가 1934년에 이 인물의 손에 의해 테크놀러지라는 황금빛 구름 가운데에서 이 오욕에 찬 지상에 부여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가 대서양이라고 하는 거대한 웅덩이를 사이에 두고 바이마르라는 사다리의 첫쨋 단에 손을 대려고 하던 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레이먼드 멀로니 씨의 인생은 라이트 형제나 말컴 벨과 같이 신화적 색채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흐뭇할 만한 소년 시절의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인 유레카도 없다. 극소수의 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해서 씌여진 유별난 것을 다루는 전문서 제 1 페이지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1934년 핀볼 제 1 호기는 레이먼드 멀로니씨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사진조차 없다. 물론 초상화도 없고 동상도 없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멀로니 씨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핀볼 머신의 역사는 지금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으리라고, 하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이 멀로니 씨에 대한 우리들의 부당한 평가는 배은 망덕한 행위가 아닌가, 하고. 그러나 만일 당신이 멀로니 씨의 손으로 만들어진 핀볼 제 1 호기 ‘바리프’를 볼 기회가 있으면 그러한 의심은 해소될 것임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무엇 하나 없기 때문이다.

핀볼 머신과 히틀러의 걸음은 어떤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양쪽이 다 일종의 수상쩍음을 지니며 시대의 물거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리고 그 존재 자체로 보다는 진화 속도에 의해서 신화적인 오러를 획득했다는 점에서 진화는 물론 세 개의 바퀴, 즉 테크놀러지와 자본 투자, 그리고 사람들의 근원적인 욕망으로 지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놀랠 만한 스피드로 이 진흙으로 빚은 인형과도 같은 소박한 핀볼 머신에 여러 가지 능력을 계속 부여했다. 어떤 이는 ‘빛이 있으라!’ 고 소리쳤고, 어떤 이는 ‘전기가 있으라’고 소리쳤고, 어떤 이는 ‘플리퍼가 있으라!’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빛은 필드를 비추고, 전기가 마그넷의 힘으로 볼을 튕겨내고, 플리퍼의 두 개의 팔이 그것을 되던졌다.

스코어가 플레이어의 기량을 십진법 수치로 환산했고, 강한 흔들림 대해서는 램프가 반응했다. 그 다음에는 시퀀스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생겨났고, 보너스 라이트, 엑스트라 볼, 리플레이라 하는 여러 가지 학파가 거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 시기에 핀볼 머신은 일종의 주술성조차 띠게 되었다.

 

이것은 핀볼에 관한 소설이다.

 

핀볼 연구서 <보너스 라이트>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이 핀볼 머신에서 얻을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숫자로 환치된 프라이드뿐이다. 잃을 것은 정말로 굉장히 많다. 역대 대통령 동상을 전부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동전과 (하기는 당신이 리처드 M. 닉슨의 동상을 세울 마음이 있다면 말이지만) 되찾을 길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당신이 핀볼 머신 앞에서 고독한 소모를 계속하는 동안 어떤 이는 프루스트를 계속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드라이브 인 시어터(drive-in theater)에서 여자 친구하고 <용기 있는 추적을 보며 헤비 패딩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기도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핀볼 머신은 당신을 아무데도 데려가지 않는다. 리플레이 램프만 켤 뿐이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마치 핀볼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처럼 조차 느껴진다.

영겁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은 많이는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추측할 수는 있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에고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축소에 있다.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고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 표현이나 에고의 확대나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서 가차없이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해브 어 나이스 게임(Have a nice game)

 

1

 

물론 쌍둥이 자매를 구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단 한 가지도 몰랐다. 얼굴도 목소리도 머리 스타일도 모든 것이 똑같고 게다가 점도 혹도 반점도 없다고 한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 완벽한 카피(copy)다.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도 똑같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부르는 노래, 수면 시간, 생리 기간까지도 같았다.

쌍둥이라고 하는 상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상상력을 훨씬 넘는 문제였다. 그러나 만일 나한테 쌍둥이 형제가 있어서 우리들 두 사람의 모든 것이 똑같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나는 대단한 혼란에 빠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그녀 둘은 극히 평온하게 살고 있었고, 내가 그녀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자 굉장히 놀라고, 그리고 화조차 냈다.

“전혀 다른데 말이야.”

“아주 딴 사람이야.”

나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어깨를 움추렸다.

두 사람이 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만한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녀들하고 살기 시작하고 나서 내 안에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눈에 띄게 퇴보해 갔다. 그것은 마치 세포 분열에 의해서 번식하는 생물이 시가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나하고 나의 친구는 시부야에서 남평대로 향한 언덕에 있는 맨션을 빌려서,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자금은 친구의 아버지가 냈다고 해도 놀랠 만한 액수는 아니다. 바의 권리금 외에는 스틸제 책상이 세 개, 열 권 정도의 사전, 전화와 버본 위스키를 반 타스 샀을 뿐이다. 남은 돈으로 철제 간판을 만들고,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 내서 거기에 새겨서 문에 걸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나자 두 사람은 네 개의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위스키를 마시면서 손님을 기다렸다. 1972년 봄의 일이었다.

몇 달인가 지나자 우리들은 정말이지 풍족한 광맥을 판 것을 알아차렸다. 놀랠 만한 양의 의뢰가 우리들의 조촐한 사무실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들은 그 수입으로 에어컨과 냉장고와 홈바 세트를 샀다.

“우리들은 성공자다.”라고 친구는 말했다.

나도 무척 만족했다. 누군가로부터 그 정도로 따뚯한 말을 들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인쇄소와 흥정을 해서 인쇄를 필요로 하는 번역 서류를 일괄 취급하게 하기로 하고 그 대가로 리베이트(수수료)까지도 받아 냈다. 나는 외국어 대학 학생과에 몇 명인가의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모아 달라고 하고, 미처 처리하지 못하는 번역을 맡기기도 했다. 여자 사무원을 고용하여 잡일이나 경리나 연락을 맡겼다. 비즈니스 스쿨을 막 나온 다리가 긴, 눈치가 빠른 여자 아이여서 하루에 이십 번이나 <페니 레인>을 (그것도 멋대가리 없이) 흥얼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결점은 없었다. 저건 제대로 만난 거야, 하고 친구는 말했다. 그러니깐 그녀한테는 보통 회사의 일 백 오십 퍼센트 정도의 월급을 지급하고, 보너스 다섯 달 분을 주고, 여름과 겨울에는 열흘 간의 휴가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 셋은 각기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사무실은 2DK이었지만 이상하게도 DK는 두 개의 방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성냥개비로 뽑기를 만들었고, 그 결과 내가 안쪽 방을 차지하고 친구가 현관에 가까운 앞쪽 방을 차지하였다. 여자아이는 중앙 DK에 앉아서 <페니 레인>을 노래하면서 장부를 정리하거나, 온 더 록(on the rock)을 만들거나, 바퀴벌레 잡이를 조립하거나 했다.

나는 필요 경비로 사들여 온 두 개의 서류함을 책상 양편에 놓고 왼쪽에는 번역이 안 된 문서를, 오른쪽에는 번역이 끝난 문서를 쌓아 놓았다.

문서의 종류도 의뢰하는 사람도 정말 다양했다. 볼 베어링의 내압성에 관한 <아메리칸 사이언스>기사, 1972년도의 전미 칵테일 북, 윌리엄 슈타일런의 에세이에서부터 안전 면도기의 설명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서가 ‘몇 월 며칠까지’라는 딱지를 붙이고 왼쪽 책상 위에 쌓여 있었고,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 건 끝날 때마다 엄지손가락 폭 하나 정도의 위스키가 없어졌다.

생각해 보면 덧붙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 는 것이 우리들과 같은 수준의 번역의 뛰어난 점이었다. 왼손에 동전을 쥔다. 딱 하고 오른손에 왼손을 올려놓는다. 왼손을 치운다. 오른손에 동전이 남는다. 그뿐이다.

열 시에 사무실에 나가고, 네 시에 사무실을 나온다. 토요일에는 가까이에 있는 디스코 테크에 가서 J&B를 마시면서 산타나의 카피 밴드를 따라서 춤췄다.

수업만은 나쁘지 않았다. 회사 수입 가운데서 사무실의 집세와 약간의 필요 경비, 여자아이 월급, 아르바이트의 급여, 거기에다가 세금을 빼고 나머지를 십 등분해서 하나는 회사용으로 저금을 하고, 다섯 개는 그가 갖고, 네 개는 내가 가졌다.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책상 위에 현금을 늘어놓고 등분해 가는 것은 정말이지 즐거운 작업이었다. <신시내티 키드>의 스티브 매퀸과 에드워드 G. 로빈슨의 포커 게임 신을 연상시켰다.

그가 다섯, 내가 넷이라는 배당도 정말이지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경영은 그한테 미뤄 놓고 있었던 것이고, 내가 위스키를 너무 마실 때에도 그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참아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구는 병약한 아내와 세 살 난 아들과 금방 라디에이터가 고장나는 폭스바겐을 갖고 있었고, 그것 가지고도 부족해서 항상 무엇인가 고민 거리를 끌어안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쌍둥이 여자아이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물론 믿어 주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다섯 개를 갖고 내가 네 개를 가졌다.

그렇게 해서 나의 이십 대 중반을 전후하는 세월이 흘러갔다. 오후의 양달 같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대체 사람 손으로 쓰여진 것 중에서”라는 것이 우리들의 삼색으로 인쇄한 팜플렛의 빛나는 캐치프레이즈였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년에 한 번 돌아오는 지극히도 한가한 시기가 되면 우리들 세 사람은 시부야 역전에 서서 지루를 면하기 위해서 그 팜플렛을 나누어주곤 했다.

얼마만한 시간이 흘렀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침묵 속을 나는 걸었다. 일이 끝나면 아파트에 돌아와 쌍둥이가 끓여 주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순수 이성 비판>을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다.

가끔씩, 어제의 일이 작년의 일처럼 느껴지고, 작년이 어제처럼 느껴졌다. 심할 때는 내년이 어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971년 9월호의 <에스콰이어>에 게재된 케네스 타이넌의 <폴란스키론>을 번역하면서 계속 볼 베어링의 일을 생각하기도 했다.

몇 달이건 몇 년이건, 나는 혼자서 깊은 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햇살, 그리고 침묵. 그리고 침묵......

 

쌍둥이를 분간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그녀들이 입고 있는 트레이너 셔츠다. 이미 완전히 바래 버린 네이비 블루 셔츠고, 가슴에는 하얀 글자로 숫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하나는 ‘208’, 또 하나는 ‘209’이다. ‘2’가 오른쪽 젖꼭지 위에 있고, ‘8’ 또는 ‘9’가 왼쪽 젖꼭지 위에 있다. ‘0’은 그 한가운데에 오똑하니 끼여 있었다.

그 번호는 뭘 의미하지, 하고 나는 첫 날 둘한테 물어 보았다. 아무 뜻도 없어, 라고 그녀들은 말했다.

“기계의 제조 번호 같은 것이구나.”

“무슨 소리야?” 라고 하나가 물었다.

“즉 말이야. 너희들하고 똑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어서 말이지. 그 NO. 208하고 NO. 209라는 얘기지.”

“설마.”하고 209가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둘뿐이었어.” 라고 208아 말했다. “게다가 이 셔츠는 얻은 거야.”

“어디에서?” 라고 는 내가,

“슈퍼마켓의 개점 기념일에서 선착순 몇 명한테 무료로 주었거든.”

“내가 209명째 손님이고,” 라고 209

“내가 208명째 손님.” 하고 208.

“둘이서 티슈 페이퍼를 세 상자 샀거든.”

“오케이, 그럼 이렇게 하자.” 하고 나는 말했다. “너를 208이라고 부르자. 너는 209. 그러면 구별할 수 있어.” 나는 둘을 차례로 손가락질했다.

“소용없어.” 하고 하나가 말했다.

“어째서?”

둘은 잠자코 셔츠를 벗고 그리고 그것을 교환해서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썼다.

“나는 208.” 하고 209가 말했다.

“나는 209.” 하고 208이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내가 꼭 두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번호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두 사람을 구별할 방법 따위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셔츠밖에 두 사람은 거의 옷이라고는 갖고 있지 않았다. 산책 도중에 남의 방에 굴러 들어와서 그대로 눌러앉아 버린, 그런 꼴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사실 그런 것이겠지. 나는 필요한 것을 사도록 주초에는 언제나 약간의 돈을 두 사람에게 주었지만, 그녀들은 식사에 필요한 거시 이외에는 커피, 크림, 비스킷밖에 사지 않았다.

“옷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아?”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곤란하지 않아.” 하고 208은 대답했다.

“옷 따윈 흥미 없는 걸.” 하고 209.

일주일에 한 번 뭇사람은 사랑스러운 듯이 목욕탕에서 트레이너 셔츠를 빨았다. 침대 속에서 <순수 이성 비판>을 읽으면서 우연히 눈을 들면, 둘이 벌거벗은 채 목욕탕 타일 위에 나란히 앉아서 셔츠를 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정말로 멀리 와 버렸다는 것을 실감한다. 왠지는 모르겠다. 작년 여름, 풀의 보드에서 아래서 틀니를 읽고 나서 부타는 가끔 그런 느낌이 든다.

내가 일에서 돌아오면 남향으로 향한 유리창에 208, 209라는 번호가 붙은 트레이너 셔츠가 펄럭이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에는 눈물까지 나왔다.

 

왜 내 방에 살게 되었는지, 언제까지 있을 셈인지, 도대체 자네들은 뭔지, 나이는? 태생은? ...... 나는 무엇하나 질문하지 않았고, 그녀들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셋이서 커피를 마시거나 로스트 볼을 찾으러 골프 코스를 저녁에 산책하거나, 침대에서 장난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메인 어트랙션은 신문 해설로서, 나는 매일 한 시간에 걸쳐서 두 사람한테 뉴스를 해설했다. 둘은 놀랠 만큼 아무것도 몰랐다. 미얀마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구별조차 못했다. 베트남이 두 개로 나뉘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삼 일이 걸렸고, 닉슨이 하노이를 폭격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나머지 사흘이 걸렸다.

“당신은 어느 쪽을 응원하고 있어?” 하고 208이 물었다.

“어느 쪽?”

“즉, 남쪽이야 북쪽이야.” 하고 209.

“글세, 어떨까? 잘 모르겠는데.”

“어째서?” 하고 208.

“나는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니깐 말야.”

두 사람 다 나의 설명으로는 납득하지 않았다. 나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틀리니까 싸우는 것 아냐?” 하고 208이 추궁했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두 개의 대립되는 생각이 있다는 얘기지?” 하고 208.

“그렇지. 하지만 말야, 세상에는 일백이십만 정도의 대립되는 사고 방식이 있거든. 아니,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지.”

“거의 아무하고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얘긴가?” 하고 209.

“아마도.”하고 나. “거의 아무하고도 친구 따윈 될 수 없지.”

그것이 1970년대에 있어서의 내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예언했고, 내가 굳혔다.

 

2

 

1973년 가을에는 무언가 심술궂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구두 안의 작은 자갈처럼 쥐는 확실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해의 짧은 여름이 9월 초의 불확실한 대기의 흔들림 속에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린 후에도, 쥐의 마음은 아직 약간 남은 여름의 자취 속에 머물고 있었다. 낡은 T셔츠, 컷오프 진, 비치 샌들....... 그런 언제나와 같은 차림으로 ‘제이스 바’에 다녔고, 카운터에 걸터앉아 바텐더인 제이를 상대로 약간은 찬 맥주를 계속 마셨다. 오 년 만에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고, 십오분마다 손목 시계를 쳐다보았다.

쥐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마치 어딘가에서 뚝 하고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죽어 버린 로프를 손에 쥔 채 그는 엷은 가을의 어둠 속을 방황했다. 풀밭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너고 몇 개인가의 문을 밀었다. 그러나 죽은 끈은 그를 어디에도 데려가지 않았다. 날개가 떨어진 겨울 매미처럼. 바다를 앞에 둔 강의 흐름처럼 쥐는 무력했고 고독했다. 어딘가에서 나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그때까지 쥐를 푹 둘러싸고 있었던 친밀한 공기를 지구의 뒤편까지 날려 보내 버린 것같이 느껴졌다.

하나의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다른 계절이 또 다른 문에서 들어온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문을 열면서 이봐 잠깐 기다려 줘, 하나 미처 말못한 것이 있단 말야, 하고 소리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안에는 이미 또 다른 계절이 의자에 앉아서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만이 미처 못 다한 말이 있다면, 하고 그는 말한다. 내가 들어 주지. 잘되면 전해 줄 수는 있을지도 몰라. 아냐, 괜찮아, 하고 사람은 말한다. 대수로운 것이 아냐. 바람 소리만이 주위를 뒤덮는다. 대수로운 일이 아냐. 하나의 계절이 죽은 것뿐이지.

 

매년의 일이지만,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서의 차가운 계절을, 대학에서 내쫓긴 이 부잣집 청년과 고독한 중국인 바텐더는, 늙은 부부처럼 서로 기대면서 보냈다.

가을은 언제나 기분 나쁜 계절이다. 여름 동안 휴가로 돌아왔던 적은 수의 그의 친구들은, 9월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짧은 이별의 말을 남긴 채, 멀리 떨어진 그들 자신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여름의 햇빛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수령을 넘듯이 그 색채를 희미하게 바꿀 때쯤에는 쥐의 주위를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오로라같이 감싸고 있었던 어떤 광휘도 사라졌다. 그리고 따뜻한 꿈의 잔재도 가느다란 강줄기처럼 가을의 모래밭 속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 제이에게도 가을은 결코 기쁜 계절은 아니었다. 9월도 중순이 되면 가게의 손님이 눈에 띄게 줄기 때문이다. 예년의 일이지만 그 가을의 조락은 괄목할 만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제이도 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가게를 닫을 시간이 되어도, 프라이드 포테이토용으로 깐 감자가 바케스 반정도 남아 있는 그런 꼴이었다.

“곧 바빠지겠지.” 하고 쥐는 제이를 위로하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너무 바쁘다고 또 불평을 말하기 시작한단 말야.”

“글쎄 어떨까”

제이는 카운터 안에 갖고 들어온 스툴에 묵직하게 걸터앉아서, 아이스 픽 끝으로 토스터에 묻은 버터 덩어리를 떨어뜨리면서 미심쩍은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몰랐다.

쥐는 잠자코 책 페이지를 뒤적이고, 제이는 술병을 닦으면서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양쪽이 잘린 담배를 피웠다.

 

쥐에게 때의 흐름이 그 균등성을 조금씩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삼 년 정도 전부터였다. 쥐가 대학을 그만둔 봄이다.

쥐가 대학을 그만둔 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여러 가지 이유가 복잡하게 엉킨 채 일정한 온도에 도달했을 때, 소리를 내면서 퓨즈가 날아갔다. 그리고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퉁겨져 나가고, 어떤 것은 죽었다.

대학을 그만둔 이유는 아무한테도 설명하지 않았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다섯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한 사람한테 설명할 수 있다면 다른 모두도 듣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그러다가는 온 세상을 향해서 설명을 해야 할 처지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만 해도 쥐는 마음속으로부터 넌덜머리가 났다.

“안마당의 잔디를 깎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꼭 무엇인가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됐을 때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대학의 안마당 잔디를 보러 간 여자아이까지도 있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던데 뭘, 하고 그녀는 말했다. “조금 휴지 조각이 어질러져 있었지만...... 취향의 문제지 뭐.” 하고 쥐는 대답했다.

“서로 좋아하지 못했던 거지. 나도, 대학 쪽도 말이야.” 조금 기분이 좋을 때에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만 말해 버리면 그 후는 침묵을 지켰다.

벌써 삼 년 전의 일이 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속도였다. 그리고 한때 그 안에서 격렬하게 숨쉬고 있었던 몇 개인가의 감정도 급속히 색이 바래고, 뜻이 없는 오래 된 꿈과 같은 것으로 그 형태를 변화시켜 갔다.

 

쥐는 대학에 들어간 해에 집을 나와서 아버지가 한때 서재 대신에 사용하던 맨션의 한 방으로 이사갔다. 부모도 반대하지 않았다. 장래 아들한테 줄 생각으로 산 것이었고, 당분간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기야 그것은 누가 어떻게 보든 고생이라고 할 만한 따위는 아니었다. 멜론이 야채로 보이지 않는 것하고 같다. 방은 정말이지 넉넉하게 설계된 2DK이었고, 에어컨에 전화, 17인치 컬러 텔레비전, 샤워가 붙은 배스(bath), 트라이엄프가 수납된 지하 주차장, 게다가 일광욕에는 이상적인 멋진 베란다까지 붙어 있었다. 남동쪽 귀퉁이에 있는 맨 위층의 유리창으로부터는 거리와 바다가 한눈에 바라다 보였다. 양쪽 유리창을 열면 풍요로운 나무들의 향내와 들새의 지저귐을 바람이 실어 왔다.

평온한 오후 시간을, 쥐는 등의자 위에서 보냈다. 멍하니 눈을 감으면, 완만한 물의 흐름처럼 시간이 그의 몸속을 통과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이든 몇 시간이든 몇 주일이든 쥐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몇 개인가의 감정의 파도가 생각난 듯이 그의 마음을 때렸다. 그럴 때는 쥐는 눈을 감고 마음을 꽉 잠그고 파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저녁나절 직전의 잠깐 동안의 엷은 어둠의 한때다. 파도가 사라진 뒤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언제나와 같은 조촐한 평화로움이 그를 찾아왔다.

 

3

 

신문 외판원 외에는 내 방을 노크하는 인간 따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깐 문을 연 적도 없으며 대답조차 한 적도 없다.

그러나 일요일날 아침의 방문자는 서른 다섯 번이나 노크를 계속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서 기대듯이 하면서 문을 열었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사십 정도 된 사나이가 강아지라도 안은 것처럼 헬멧을 들고 복도에 서 있었다./

“전화국에서 왔습니다.” 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배전반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수염을 깎아도 부족할 만큼 시커먼 얼굴의 사나이였다. 눈 아래까지 수염이 자라고 있었다. 약간은 안됐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지독히 졸렸다. 아침 네 시까지 쌍둥이하고 백가몬(서양 주사위 놀이)을 했기 때문이다.

“오후에 해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어째서요?”

그는 넓적다리에 붙은 바깥 주머니를 꼼지락꼼지락 더듬고 나서 까만 수첩을 나한테 보였다. “오늘 하루 량의 일이 꽉 차 있거든요. 이 지역이 끝나면 금방 다른 쪽으로 가야 됩니다. 이 보세요.”

나는 반대쪽에서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이 지역에서 남아 있는 것은 이 아파트뿐이었다.

“어떤 공사를 하시는데요.”

“간단합니다. 배전반을 꺼내고 선을 자르고 새로운 것하고 연결합니다. 그뿐. 십 분이면 끝납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역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것으로도 부자유스럽지 않은데요.”

“지금 것은 구식입니다.”

“구식이라도 괜찮습니다.”

“네에, 좋습니까?” 하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아주 곤란하다고.”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배전반은 모두 본사의 커다란 컴퓨터에 접속되어 있지요. 그런데 댁만이 남하고 다른 신호를 내면 이것은 아주 곤란하게 되거든요. 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하드웨어하고 소프트웨어의 통일 문제군요.”

“아셨으면 좀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나는 단념하고 문을 열고 사나이를 안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왜 배전반이 내 방에 있나요?” 나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관리실이라든가 어딘가 그런데 있는 것 아니에요?” “보통은 그렇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엌 벽을 꼼꼼하게 조사한 후에 배전반을 찾았다. “하지만 모두 배전반을 굉장히 귀찮아하거든요. 보통은 사용하지 않고, 게다가 부피는 크고 말이죠.”

나는 끄덕거렸다. 남자는 양말을 신은 채 부엌 의자에 올라가서 천장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꼭 보물찾기 같아요. 모두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소에다가 배전반을 집어넣거든요. 불쌍하게도. 그 주제에 방에는 쓸데없이 커다란 피아노를 넣고 인형 케이스를 장식하고 하니 정말 우습죠.”

나는 동의했다. 남자는 부엌을 단념하고 머리를 흔들면서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예를 들자면, 요전번에 간 맨션의 배전반 같은 것은 참 불쌍했죠. 도대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나조차도......”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방 귀퉁이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쌍둥이가 가운데에 내 몫만큼의 스페이스를 남긴 채 나란히 담요에서 목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하는 사람은 아연해서 십오 초간 입도 열지 못하였다. 쌍둥이도 잠자코 있었다. 그러니깐 할 수 없이 내가 침묵을 깨뜨렸다.

“에에, 전화 공사를 하시는 분이야.”

“잘 부탁해요.” 하고 오른쪽이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하고 왼쪽이 말했다.

“아니요...... 뭐.” 하고 공사하는 사람이 말했다.

“배전반 교환을 하러 오셨어.” 하고 나.

“배전반?”

“뭐예요, 그게?”

“전화 회선을 지배하는 기계야.”

모르겠어. 하고 둘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나머지 설명을 공사하는 사람에게 맡겼다.

“음...... 즉 말이죠, 전화 회선이 몇 개이건 거기에 모인다 이런 얘기입니다. 뭐랄 까요, 엄마 개가 한 마리 있고, 그 밑에 강아지가 몇 마리나 있잖아요? 아시겠죠?”

“?”

“모르겠는데요.”

“에에, 그래서 그 엄마 개가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이겁니다. .... 엄마 개가 죽으면 강아지들도 죽는다 . 그래서 엄마가 죽게 되면 내가 새로운 엄마로 바꿔 주러 간다. 뭐 이런 얘기지요.”

“멋있네.”

“굉장하네.”

나도 감탄했다.

“음, 그런 이유로 오늘 온 것입니다. 주무시는 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은.”

“상관없어요.”

“어머, 꼭 보고 싶어요.”

남자는 한숨 돌린 듯이 타월로 땀을 닦고 방을 빙글 둘러보았다.

“자, 이제 배전반을 찾지 않으면......”

“찾을 필요 따윈 없어요.” 하고 오른쪽이 말했다.

“다락 안이에요. 판때기를 벗기면 돼.” 하고 왼쪽이 말했다.

나는 굉장히 놀랬다. “이봐, 어째서 그런 일을 알고 있지? 나도 몰랐는데.”

“하지만 배전반 이야기 아니야?”

“유명하잖아.”

“이거야 원.” 하고 공사인이 말했다.

 

십 분 정도로 일은 끝났지만 그 동안 쌍둥이들은 이마를 가까이하고 무엇인가를 속삭이면서 킬킬 웃고 있었다. 덕분에 남자는 몇 번이고 배선을 실수했다. 공사가 끝나자 쌍둥이는 트레이너와 블루진을 침대 안에서 꼼지락꼼지락 입고 부엌에 가서 모두한테 커피를 끓여 부었다.

나는 공사인한테 남아 있는 데니시 페스트리를 권해 보았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서 커피랑 함께 먹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부인이 안 계세요?” 하고 208이 물었다.

“아뇨, 있습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은 일어나 주지 않거든요.”

“불쌍하게.” 하고 209.

“나도 좋아서 일요일에 일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삶은 계란은 먹습니까.” 나는 불쌍해져서 그렇게 물어 보았다.

“아녀, 됐습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쳐서야 안 되지요.”

“괜찮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어차피 모두의 것을 만들 테니깐.”

“그럼, 주십시오. 반숙 정도로 해서.”

 

삶은 계란을 까면서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도 이십일 년 간 여러 집을 돌아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인데요.”

“뭐가 말입니까?”

“즉, 응...... 쌍둥이 여자하고 자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봐요, 당신도 힘드시겠어요?”

“그렇지도 않아요.” 하고 나는 두 번째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이이는 굉장하다니까.” 하고 208이 말했다.

“완전히 짐승이야.” 하고 209가 말했다.

“질렸습니다.” 하고 남자가 말했다.

 

정말로 질렸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그는 먼젓번 배전반을 잊어버리고 갔다. 혹은 아침밥에 대한 사례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쌍둥이들은 하루 종일 그 배전반을 갖고 놀았다. 어느 쪽인가가 엄마 개가 되고 다른 한쪽이 새끼가 되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를 떠들어댔다.

나는 둘한테는 상관하지 않고 오후 내내 갖고 돌아온 번역 일을 계속했다. 하청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시험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내 일이 잔뜩 밀려 있었던 것이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지만 세시가 조금 지났을 때부터 전지가 다 되어 가는 것처럼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해 네시에는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이제 한 줄도 진행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책상 위에 깔아 놓은 유리 위에 양팔꿈치를 대고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조용한 오후의 빛 가운데를 천천히 마치 엑토플래즘처럼 방황하였다.

1973년 9월...... 마치 꿈 같았다. 1973년, 그런 해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무턱대고 우스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 하고 208이 물었다.

“피곤한 것 같아. 커피라도 마실까?”

둘은 끄덕거리고 부엌으로 나가, 하나가 돌돌하고 콩을 갈고, 또 하나가 물을 끓여서 컵을 데웠다. 우리들은 창가 마룻바닥에 한 줄로 나란히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잘 안 되나 봐.” 하고 209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 하고 나는 말했다.

“지친 거야.” 208.

“무엇이?”

“배전반 말이야.”

“엄마 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둘은 고개를 끄덕했다.

“죽어 가고 있어.”

“그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둘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나는 잠자코 담배를 피웠다. “골프 코스를 산책 안 할래?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로스트 볼도 많을지 모르지.”

우리들은 한 시간 정도 백가몬을 하고 나서 골프장 철망을 넘어가, 아무도 없는 석양녘의 골프 코스를 걸었다. 나는 밀드레드 베일리의 <이츠 소 피스풀 인 더 컨트리>를 휘파람으로 두 번 불었다. 좋은 곡이네 하고 둘은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로스트 볼은 한 개도 찾지 못했다. 그런 날도 있다. 아마도 동경 안의 싱글 플레이어가 온통 모였었나 보지. 그렇지 않으면 골프장이 로스트 볼을 찾는 전문 비글 개라도 키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낙심해서 방으로 돌아왔다.

 

4

 

무인 등대는 몇 번이고 구부러진 긴 방파제 끝에 오똑하니 서 있었다. 높이는 삼 미터 정도. 그다지 큰 것은 아니다. 바다가 더러워지기 시작하고, 연안에서 생선이 완전히 자취를 없앨 때까지는 몇 적인가의 어선이 이 등대를 이용했다. 항구라고 할 만한 곳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닷가에 레일처럼 간단한 나무틀이 짜여졌었고 어부가 윈치로 로프를 끌어서 어선을 모래밭에 끌어올렸다. 세 채 정도 되는 어부의 집이 바닷가 근처에 있었고 방파제 안쪽에는 아침나절에 잡은 잔 생선이 나무 상자에 담겨 널어져 있었다.

고기가 자취를 감춘 것하고, 주택 도시에 어촌이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는 주민들의 두서 없는 요청과 그들이 바닷가에 세운 오두막이 시유지의 불법 점거라고 하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어부들은 이 땅을 떠났다. 1962년의 일이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가 하는 것은 알 수도 없다. 세 채의 오두막은 간단하게 철거되었고, 노후화한 어선은 쓸데도 버릴 데도 없는 채 바닷가의 숲속에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어선이 사라진 뒤 등대를 이용하는 배라고는 연안을 왔다갔다하는 요트나, 농무나 태풍을 피해서 들어오는, 항구 밖에 정박 중인 화물선 정도가 되었다. 그것도, 무엇인가 소용이 닿을는지도 모르겠다고 할 정도의 것이다.

등대는 뭉툭하고 까맣고, 마치 종을 푹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남자의 뒷모습 같기도 하였다. 날이 저물고, 엷은 잔광 속에서 푸르름이 흐를 때쯤 종의 손잡이 부분에는 오렌지빛 라이트가 켜지고, 그것이 천천히 돌기 시작한다. 등대는 항상 석양 나절의 그 정확한 포인트를 포착했다. 근사한 저녁 노을 속에서도, 짙은 농무 속에서도 등대가 포착하는 순간은 항상 같았다. 빛과 어두움이 섞이고, 어두움이 빛을 넘으려 하는 그 일순이다.

소년 시절, 쥐는 석양 속을, 그 순간을 보기 위해서만 몇 번이고 바닷가에 가곤 하였다. 파도가 높지 않은 오후에는 튀어나온 방파제의 낡은 바닥 돌을 세면서 등대까지 걸어갔다. 뜻밖이라고 할 만큼 많은 해수면에서 초가을에 나타나는 잔고기 무리를 볼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처럼 튀어나온 방파제 곁에서 몇 번이고 원을 그리고 나서 먼 바다 쪽으로 사라져 갔다.

겨우 등대에 도달하면 튀어나온 방파제 끝에 걸터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하늘에는 브러시로 그은 것 같은 가는 구름이 몇 줄기인가 흐르고 눈에 띄는 한에서 완전히 푸른색에 차 있었다. 푸른색은 끝없이 깊고, 그 깊이는 소년의 발을 자기도 모르게 떨리게 하였다. 그것은 두려움과도 같은 떨림이었다. 바다 향기도, 바람의 색도, 모든 것이 놀랠 만큼 선명하였다. 그는 시간을 두고 주위의 풍경에 조금씩 마음을 익숙하게 하면서,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지금은 깊은 바다 때문에 완전히 멀어져 버린 자기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얀 모래사장과 방파제 초록색 소나무 밭이 찌그러진 것처럼 얕게 퍼져 있었고, 그 뒤에는 푸르스름하고 검은 산줄기가 하늘을 향해서 선명하게 늘어서 있었다.

왼쪽 저 멀리에는 거대한 항구가 있었다. 여러 개의 크레인, 떠 있는 독(dock). 상자 같은 창고, 화물선, 고층 빌딩, 그러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에는 안쪽을 향해서 꼬부라진 해안선을 따라 조용한 주택가나 요트 하버, 양조 회사의 낡은 창고가 잇따라 있었고 그곳이 일단락 지어진 지점에서부터 공업 지대의 둥근 공 모양의 탱크라든가 높은 굴뚝이 늘어서 있었고, 그 하얀 연기가 희미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열 살 먹은 쥐에게 있어서 세계의 끝이기도 하였다.

소년 시절을 통해서 봄에서 초가을에 걸쳐, 쥐는 몇 번이고 등대에 가 보았다. 파도가 높은 날이면 물살이 그의 발을 씻었고, 바람이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이끼가 낀 바닥 돌은 몇 번이고 그의 작은 발을 미끄러뜨렸다. 그래도 등대에 가는 길은 그에게는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친숙한 것이 되었다. 방파제 끝에 앉아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구름이나 작은 물고기 떼를 바라보고, 주머니에 담은 작은 돌을 저 멀리를 향해서 던진다.

석양 노을이 하늘을 덮을 때쯤 해서, 그는 같은 길을 따라서 그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도중 뭐라고 할 수 없는 슬픔이 항상 그의 마음을 휩쌌다. 앞날에 그를 기다리는 세계는 너무나도 넓고, 그리고 강했고 그가 들어갈 만한 여지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자의 집은 방파제 끝 부근에 있었다. 쥐는 거기에 갈 때마다 소년 시절의 막연한 느낌이나, 석양의 냄새를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해안가에 차를 세워 놓고, 모래밭 위에 늘어선 방사용의 뜨문뜨문한 소나무 밭을 빠져나간다. 발 밑에서 모래가 건조한 소리를 낸다.

아파트는 이전에 어부들의 오두막이 있었던 부근에 서 있었다. 몇 미터만 구멍을 파면 불그죽죽한 바닷물이 나올 것 같은 땅이다. 아파트의 앞마당에 심어진 칸나 꽃은 짓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여자 방은 이층에 있었고, 바람이 강한 날에는 고운 모래가 사각사각하고 유리창에 부딪혔다. 깨끗한 남향 아파트였지만, 거기에는 어딘지 모르는 음산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바다 때문이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너무 가까워, 바다 냄새, 바람, 파도 소리, 생선 냄새...... 그 모든 것이 다.

생선 냄새 따윈 나지 않아, 라고 쥐는 말했다.

나,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끈을 잡아당겨서 유리창의 블라인드를 딱 하고 닫는다. 당신도 살아보면 알아.

모래가 유리창을 친다.

 

5

 

내가 학생 시절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아무도 전화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지우개 하나 갖고 있었는지조차도 미심쩍다. 관리실 앞에 근처 국민학교에서 불하된 얕은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공중 전화가 한 놓여 있었다. 그것이 아파트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전화였다. 그러니깐 배전반 따위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평화로운 시절의 평화로운 세계였다.

관리인은 관리실에 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주민 중의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었고, 상대를 부르러 뛰어갔다. 물론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는(특히 한밤중 두 시 같은 때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으려 가지 않았다. 전화는 죽음을 예감한 코끼리처럼 몇 번인가 미친 듯이 울부짖고(서른두 번이라는 것이 내가 센 최고 숫자다), 그리고 죽었다. 죽었다는 말은 정말 글자 그대로였다. 벨의 최후의 소리가 아파트의 긴 복도를 꿰뚫고 밤의 어두움 속에 흡수되고 나면, 갑자기 정적이 주위를 뒤덮었다. 정말 기분 나쁜 침묵이었다. 누구나가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이미 죽어 버린 전화를 생각했다.

한밤중의 전화는 항상 어두운 전화였다.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고 그리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 아니라니깐, 그렇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렇지? ...... 거짓말이 아니라니깐. 왜 거짓말을 하겠어? ...... 아니, 그냥 지친 거야 ......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알아....... 그러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금 생각하게 해줄래?...... 전화 가지고는 잘 말못하겠어......”

누구나가 나름대로 잔뜩 트러블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트러블은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왔고, 우리들은 정신을 잃다시피 그것을 주어서는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다. 뭔가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거겠지.

전보도 왔다. 한밤중 네 시경 아파트 현관에 오토바이가 멈추고, 난폭한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방의 문이 주먹으로 노크된다. 그 소리는 항상 나에게 죽음의 신이 도착한 것을 생각나게 했다. 땅땅.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거나 미쳤으며, 시간의 앙금 속에 자기의 마음을 파묻고, 덧없는 생각에 마음을 태우고, 각기 서로 폐를 끼치고 있었다. 1970년, 그런 해였다. 만일 인간이 정말로 변증법적으로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생물이라고 한다면, 그 해도 역시 교훈의 해였다.

 

나는 일층의 관리실 옆방에 살았고, 그 머리가 긴 소녀는 이층의 계단 곁에 살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 오는 회수로는 그녀는 아파트 내의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나는 미끌미끌 미끄러지는 열다섯 개의 계단을 몇 천 번이라고 할 것 없이 왕복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말이지, 실로 여러 가지 전화가 그녀에게 걸려 왔다. 정중한 목소리가 있었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있었고, 슬픈 듯한 목소리가 있었고, 오만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그러한 목소리가 나를 보고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서글플 정도로 평범한 이름이라는 것밖에는, 기억에 없다.

그녀는 항상 수화기를 향해서, 얕고 피곤에 지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였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은 음산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가끔 길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지만, 말을 한 적은 없다 마치 깊은 정글 속의 오솔길을 하얀 코끼리를 타고 가는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걷고 있었다.

 

반년 정도 그녀는 그 아파트에 살았다. 가을이 시작할 때부터 겨울이 끝날 때까지의 반년이었다.

내가 수화기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그녀의 문을 노크하고, 전화입니다, 라고 소리치면, 조금 사이를 두고 미안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요, 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들은 적이 없다. 하기야 나도 전화입니다, 라는 말 이외에는 한 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고독한 계절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옷을 벗을 때마다 온몸의 뼈가 피부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정체 불명의 힘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것이 나를 어딘가 다른 세계로 데려가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전화가 울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에게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하려고 하는 인간 같은 것은 이제는 누구 하나 없었고, 적어도 내가 얘기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누구 하나 얘기해 주지 않았다.

다소간에 누구나가 자기 시스템을 쫓아서 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시스템하고 너무 틀리면 화가 났고, 너무 닮아 있을 때는 서글퍼진다. 단지 그것뿐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오는 전화를 받은 것은 그 겨울이 끝날 때쯤이었다. 3월 초, 맑게 개인 토요일 아침이었다. 아침이라고 해도 벌써 열시 남짓해서, 햇빛은 좁은 방안 구석구석에까지 투명한 겨울의 밝음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멍하니 벨 소리를 들으면서, 침대 곁에 있는 창에서 보이는 캐비지 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만 흙 위에는 녹다 만 눈이 물 덩이같이 군데군데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한파가 남기고 간 최후의 눈이었다.

벨은 열 번 정도 울리고 나서 아무도 수화기를 받지 않은 채 그쳤다. 그리고 오 분 뒤에 다시 한 번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넌덜머리가 나는 기분으로 파자마 위에 카디건을 뒤집어쓰고, 문을 열고 전화를 잡았다.

“......는 계십니까?” 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억양이 적은, 종잡을 데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적당히 대답을 하고 나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그녀의 방을 노크했다.

“전화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방에 돌아와, 침대 위에 똑바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얕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치고는 정말이지 짧은 전화였다. 십오 초 정도나 되겠지.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침묵이 주위를 덮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사이를 두고, 천천히 발걸음 소리가 내 방 쪽으로 다가와서, 그리고 문이 노크되었다. 두 번씩, 그리고 그 사이에 심호흡 한 번의 시간이 있었다.

문을 열자 하얀 두꺼운 스웨터하고 블루진을 입은 그녀가 서 있었다. 순간 나는 내가 전화를 잘못 연결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가슴 앞에 꽉 팔을 끼고, 가늘게 떨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명 보트 위에서 가라앉아 가는 배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아니 거꾸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들어가도 될까? 추워서 죽을 지경이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채 나는 그녀를 안에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가스 스토브 앞에 앉아서 양손을 쪼이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지독히도 아무것도 없는 방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가에 침대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싱글 베드 치고는 너무 컸고, 세미 더블치고는 너무 작다. 어쨌든 그 침대도 내가 산 것은 아니었다. 친구가 준 것이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나한테 왜 침대 따위를 주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거의 말을 해본 적도 없는 상대였다. 그는 지방의 부호의 아들이었지만, 대학의 앞마당에서 다른 섹트(sect)의 패들한테 얻어맞고, 작업화로 얼굴을 걷어채이고, 그래서 눈이 나빠져서 대학을 그만두었다. 내가 대학 진료소에 데리고 가는 동안에 그가 쭉 훌쩍거렸기 때문에 나는 넌덜머리가 났었다. 며칠 뒤에, 시골에 돌아가 살 거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침대를 주었다.

“뭐 따뜻한 거 마실 수 있을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아무것도 없어, 하고 말했다. 커피도 홍차도 녹차도, 주전자조차 없었다. 작은 냄비가 하나 있을 뿐이고, 나는 매일 아침 거기에 물을 끓여서 수염을 깎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일어서서, 잠깐 기다려 줘, 라고 말하고 방을 나서자, 오 분 뒤에 골판지 상자를 하나 양손에 끌어 나고 돌아왔다. 상자 안에는 티백과 녹차가 반년 분 정도, 비스킷 두 봉, 그래뉴당, 포트와 식기 세트 일습, 거기에 스누피 만화 그림이 그려진 텀블러가 두 개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널빤지 상자를 침대 위에 꽝 하고 놓고, 포트에 물을 끓였다.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꼭 로빈슨 크루소잖아.”

“그렇게 즐겁지 않아.”

“그렇겠지 뭐.”

우리는 잠자코 홍차를 마셨다.

“이거 전부 당신에게 줄게.”

나는 놀라워서 홍차가 목에 막혔다. “왜 주지?”

“몇 번이나 전화를 바꿔 주었잖아요. 사례야.”

“너도 필요할 텐데.”

그녀는 고개를 몇 번인가 가로 저었다. “내일 이사 가. 그러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는 잠자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좋은 이야기? 아니면 나쁜 이야기?”

“별로 신통치가 않아.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는 거니까.”

방안 가득 비추고 있던 겨울 해가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이야기 따윈 듣고 싶지 않을 것 아냐? 나 같으면 듣지 않겠어. 좋지 않은 추억을 남긴 사람의 식기 따윈 쓰고 싶지 않거든.”

 

다음날은 아침부터 차가운 비가 왔다. 가는 비였지만 그것은 나의 레인 코트에 스며들어 스웨터를 적셨다. 내가 든 대형 트렁크도 그녀가 든 슈트케이스와 숄더 백도 모두 검게 젖어 버렸다. 택시 운전사는 이봐요, 짐을 시트에 올려놓지 말아요, 하고 기분 나쁜 듯이 말했다. 차 안 공기는 히터와 담배 연기로 탁했고, 카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유행가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퉁겨서 올리는 방향 지시기처럼 오래된 노래였다. 잎사귀가 떨어진 잡목 숲은 마치 바다 밑 산호처럼 길 양쪽에 축축한 가지를 펄치고 있었다.

“처음부터 동경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래?”

“흙은 너무 검고, 강은 더럽고, 산도 없고...... 당신은?”

“경치 따위에는 신경 쓴 적 없어.”

그녀는 한숨을 쉬고 웃었다. “당신 같으면 잘 살아 나갈 거야.”

역의 플랫폼에 짐을 놓았을 때, 그녀는 나를 향해서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하고 말했다.

“이제는 혼자 갈 수 있어.”

“어디까지 가는데?”

“훨씬 북쪽이야.”

“춥겠네?”

“괜찮아, 익숙한걸 뭐.”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창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귀 근처까지 손을 들었지만 전차가 사라져 버리자 그 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대로 레인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비는 날이 저물도록 계속 내렸다. 근처 주점에서 맥주를 두 병 사 와서 그녀가 준 글라스에 부어서 마셨다. 몸속까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 글라스에는 스누피하고 우드스톡이 개집 위에서 즐거운 듯이 놀고 있는 만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이런 글자가 씌여 있었다.

“행복이란 따뜻한 동료.”

쌍둥이가 잠이 푹 들은 후에 나는 잠이 깼다. 오전 세 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은 가을달이 화장실 창에서 보였다. 부엌 싱크대 옆에 세워진 배전반을 손에 들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세히 비춰 보아도 그것은 단지 더러워진 의미 없는 보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그것을 원래의 장소에 돌려놓고,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달빛 아래에서는 무엇이든지 창백하게 보인다. 어떤 것에나 가치도 방향도 의미도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림자조차 불확실하다. 나는 담배를 개수통에 던져 버리고 금방 두 번째에 불을 붙였다.

어디까지 가야 나는 나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 예컨대 어디란 말이야? 좌석이 두 개 달린 뇌격기라는 것이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낸 유일한 장소였다. 하지만 그것은 엉뚱했다. 도대체 기뢰 폭격기 따위는 삼십 년이나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 되버린 것 아니냐.

나는 침대에 돌아가서 쌍둥이 사이에 기어 들어갔다. 쌍둥이는 각각 몸을 구부리고, 침대 바깥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천장을 바라본다.

 

6

 

여자가 욕실 문을 닫는다. 그리고 샤워 소리가 들린다.

쥐는 시트 위에서 일어나 기분이 잘 수습되지 못한 채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테이블 위에도, 바지 주머니에도 없었다. 성냥개비 하나 없다. 여자의 백 속에는 그런 것은 없다. 할 수 없이 방의 불을 켜고 책상 서랍을 차례차례 찾아서 어딘가의 레스토랑 이름이 적힌 오래된 종이 성냥을 찾아내서 불을 붙였다.

창가의 등의자에는 그녀의 스타킹과 속옷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고, 그 등에는 재단이 잘 된 겨자색 원피스가 걸려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새것은 아니지만 잘 손질된 바가젤리의 숄더백하고 작은 손목 시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쥐는 맞은편 등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문 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산중턱에 세워진 그의 아파트에서는 어둠 속에 되는 대로 뿌려진 사람들의 삶이 분명하게 내려다보이게 되어 있었다. 가끔 쥐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 다운 힐의 코스의 선 골퍼처럼 몇 시간이고 정신을 집중해서 그런 풍경을 바라볼 때가 있다. 몇 시간이고 정신을 집중해서 그런 풍경을 바라볼 때가 있다. 비탈은 드문드문 가옥의 불빛을 모으면서, 발밑을 천천히 경사져 내려가고 있었다. 까만 숲이 있고, 작은 언덕이 있고, 군데군데 하얀 수은등 빛이 개인용 풀의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비탈이 겨우 경사가 완만해지는 부근에서 마치 땅표면에 맺어진 빛의 띠처럼 고속 도로가 사행하고 있었고, 그것을 건너 바다까지의 일 킬로미터 정도를 평탄한 거리가 점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바다. 바다와 하늘의 어두움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녹아들고, 그 어둠의 가운데 등대의 오렌지빛 광선이 떠올랐다가 그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확실히 구획을 지을 수 있는 그 단층 사이를 어두운 페어웨이가 한줄기 꿰뚫고 있었다.

강이다.

 

7

 

쥐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하늘이 아직 조금은 여름의 눈부신 광휘를 남기고 있었던 9월 초였다.

쥐는 신문의 지방판에 매주 게재되는 불필요한 물건의 매매 코너에서, 베이비 사이클이나, 링거폰이나 어린이용 자전거 사이에서 전동 타이프라이터를 발견했다. 전화에는 여자가 나와서 사무적인 목소리로 일년 사용, 보증은 앞으로 일년 남았고, 할부는 안 되고, 가지러 올 수 있는 분이면, 하고 말했다. 상담이 성립되고, 쥐는 차로 여자의 아파트로 가서 돈을 치르고 타이프라이터를 받았다. 여름 동안 간단히 일로 번 돈하고 거의 같은 액수였다.

날씬하고 조그마한 여자로, 소매 없는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현관에는 여러 가지 색과 형태를 한 관엽 식물이 쭉 늘어서 있었다. 잘 정돈된 얼굴이고, 머리는 뒤로 묶고 있었다. 나이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22세에서 28세까지의 어느 나이라고 해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삼일 후에 전화가 걸려 와서, 타이프라이터의 리본이 반 타스 정도 남아 있으니까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세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쥐는 그것을 가지러 가는 김에 그녀를 제이스 바에 데려가 리본을 준 사례로 몇 잔인가의 칵테일을 대접했다. 별로 이야기가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세 번째 만나게 된 것은 나흘 후로, 시내에 있는 어느 실내 풀이었다. 쥐는 차로 그녀를 아파트까지 바래다주었고, 그리고 잤다.

어쩌다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쥐는 알 수가 없다. 어느 쪽이 먼저 그러자고 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공기의 흐름과 같은 것이었겠지.

며칠인가 지난 후에, 그녀와의 관계는 일상 생활 속에 박혀진 부드러운 쐐기같이 쥐 안에서 그 존재감을 키우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무엇인가가 쥐를 꿰뚫었다. 그이 몸에 매달리는 여자의 가는 팔을 생각해 낼 때마다 쥐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따사로움 같은 것이 퍼져 가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그녀는 그녀 나름의 작은 세계 안에서 어떤 종류의 완벽함을 달성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쥐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취미가 좋은 원피스를 입고, 깨끗한 내의를 입고,몸에는 아침의 포도밭 같은 냄새가 나는 오데코롱을 바르고, 주의 깊게 단어를 골라서 이야기하고,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고, 거울을 보면서 몇 번이고 연습을 한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쥐의 마음을 조금이지만 슬프게 한다. 몇 번 만난 후에 쥐는 그녀의 나이를 스물 일곱으로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오차도 없이 맞았다.

유방은 작고, 여분의 살이 없는 가는 몸은 예쁘게 일광욕이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은 일광욕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는 식으로 그을린 것이었다. 뾰족한 볼의 뼈와 얇은 입술은, 잘 자라난 양가집 규수다움과 마음이 강함을 느끼게 했지만, 전체를 뒤흔다는 사소한 표정의 변화가 그 속에 있는 무방비할 정도의 나이브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미술 대학 건축과를 나와서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고 그녀는 말했다. 태어난 데? 여기는 아냐. 대학을 나와서 여기에 왔지. 일주일에 한 번 풀에서 헤엄을 치고, 일요일 밤에는 전차를 타고 비올라 연습을 하로 다니고 있어.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쥐는 막연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그녀는 모차르트를 연주했다.

삼 일 정도 감기 때문에 쉰 덕분에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입안은 까끌까끌했고, 온 몸을 샌드페이퍼로 문지른 것 같은 기분이다. 팜플렛이나 서류나 소책자나 잡지가 내 책상 주위에 개미처럼 쌓여 있었다. 공동 경영자가 다가와서 나에게 이것저것 병문안 같은 것을 말하고 나서, 자기 방에 돌아갔다. 사무를 보는 여자아이는 언제나처럼 뜨거운 커피와 롤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담배를 사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공동 경영자에게 세븐 스타 한 갑을 빌려 필터를 찢고 반대편에 불을 붙여 피웠다. 하늘은 흐리고, 어디서부터가 공기고 어디서부터가 구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주위는 마치 습한 낙엽을 억지로 태우는 것 같은 냄새가 난다. 혹은 그것도 열 탓인지 모르겠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제일 앞에 있는 개미집을 부시기 시작했다. 전부 ‘급함’이라고 하는 고무인이 찍혀 있었고, 그 아래는 펠트 펜으로 기한이 쓰여져 있었다. 다행히도 ‘급함’인 개미집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더 다행한 일은 이삼 일 안에, 라는 것도 없었다. 일주일에서 이주일, 이라는 기한의 것 뿐으로, 반을 하청을 주면 잘 끝날 것 같았다. 나는 한 권씩 손에 잡고 해치워야 할 순서로 책을 바꿔 쌓았다. 덕분에 개미집은 전보다 훨씬 불안정한 모습이 되었다. 신문 일면에 실려 있는 성별 연령별 내각 지지율의 그래프 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모양뿐 아니라 그 내용이 실로 마음 설레게 하는 멋진 배합이었다.

 

① 찰스 란킨 저

ㆍ<과학 질문 상자> 동물편

ㆍP. 68 "고양이는 왜 얼굴을 씻는가?“에서 P.89 "곰이 생선을 잡는 법” 까지

ㆍ10월 12일까지 완료할 것

 

② 미국 간호 협회 편

ㆍ<치사 병자와의 대화>

ㆍ전 16페이지

ㆍ10월 19일가지 완료할 것

 

③ 프랑크 데시트 주니어 저

ㆍ<작가의 병력> 제3장 “화분 병을 둘러싼 작가들”

ㆍ전 23페이지

ㆍ10월 23일까지 완료할 것

 

④ 르네 클레르 작

ㆍ<이탈리아의 밀짚모자>(영어판, 시나리오)

ㆍ전 39페이지

ㆍ10월 26일까지 완료할 것

 

주문한 사람의 이름이 없는 것이 정말이지 유감스러웠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러한 문서의 번역을(그것도 ‘급함’으로) 원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곰이 강 앞에 서서 나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치사 병자 앞에 한 간호원이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씻고 고양이 사진을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채 커피를 마시고 종이 점토 같은 맛이 나는 롤빵을 한 개만 먹었다. 머리는 얼마간 맑아지기 시작했지만, 손발이 아직도 저렸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등산용 칼을 꺼내 오랜 시간을 들여 F연필을 꼼꼼하게 깎고, 그리고 서서히 일에 착수했다.

카세트 테이프로 오래된 슈탄 겟츠를 들으면서 정오까지 일했다. 슈탄 겟츠, 알 헤이그, 지미 레이니, 테니 코틱, 타이니칸, 최고의 밴드다. <점핑 위스 심포니 시드>의 겟츠의 솔로를 테이프에 맞추어 전부 휘파람으로 불고 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점심 시간에는 빌딩을 나와 오분 정도 언덕을 내려가 혼잡한 레스토랑에서 생선 프라이를 먹고, 햄버거 스탠드에서 오렌지 주스를 두 잔 계속해서 마셨다. 그리고 펫 숍에 들러, 유리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알비시니아 고양이와 십 분 정도 놀았다. 언제나와 똑같은 점심 시간이었다.

방에 돌아와서 시계가 한 시를 가리킬 때까지 멍하니 조간신문을 보았다. 그리고 오후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여섯 자루의 연필을 깎고 세븐 스타의 나머지 필터를 전부 찢어서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여자아이가 뜨거운 일본차를 가져다 주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아.”

“일은?”

“잘 돼 가.”

하늘은 아직 희뿌옇게 흐려 있었다. 오전보다도 그 회색 빛이 더 짙어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유리창에서 목을 내밀자 희미한 비의 예감이 느껴졌다. 몇 마리인가의 가을 새가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부웅 하는 도회 특유의 둔탁한 울림(지하철의 열차, 햄버거 굽는 소리, 그러한 무수한 소리의 교향곡이다)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창을 닫고, 카세트 테이프로 찰리 베이커의 <저스트 프랜드>를 들으면서 “철새는 언제 자는가?” 라는 항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네 시에 일을 마치고, 하루치의 원고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사무실을 나선다. 우산을 드는 대신에 사무실에 놓아두는 얇은 레인코트를 입기로 했다. 역에서 석간을 사고, 만원전차에서 한 시간 정도 시달린다. 전차 안에까지 비 냄새가 났지만, 아직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역전 슈퍼마켓에서 저녁거리를 살 때쯤이 되어서 겨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는 비였지만 발아래 보도는 비 빛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가까운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다방은 혼잡했고, 거기에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비 냄새가 나고 있었다. 웨이트리스의 블라우스에서도, 커피에서도 비 냄새가 났다.

버스 터미널을 둘러싼 가로등이 황혼 속에서 드문드문 켜지기 시작했고, 그 사이를 몇 대인가의 버스가 마치 계류를 오르내리는 송어처럼 왕래했다. 버스에는 샐러리맨이나 학생, 주부들이 가득 탔고, 각기 황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새까만 독일 세퍼드를 데리고 있는 중년 여자가 유리창 밖을 지나갔다. 몇 명인가의 국민학생이 고무공을 통통 퉁기며 지나간다. 나는 다섯 개비의 담배를 끄고, 식은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열 때문에 눈이 얼만가 움푹해져 있다. 그래도 괜찮아. 오후 다섯시 반의 수염이 얼굴을 조금 어둡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런 대로 괜찮겠지. 하지만 그것은 전혀 내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통근 전차 맞은편 자리에 어쩌다 앉은 스물네 살 먹은 사나이의 얼굴이었다. 내 얼굴도 내 마음도, 그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는 시체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마음과 누군가의 마음이 스쳐 지나간다. 야아, 하고 나는 말한다. 야아, 하고 상대방도 대답한다. 그뿐이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아무도 두 번 다시 되돌아보지 않는다.

만일 내가 양쪽 귓구멍에 치자나무 꽃을 꽂고, 양쪽 손가락에 물갈퀴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면 몇 사람인가는 되돌아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뿐이다. 세 발자국만 걸으면 모두 잊어버린다. 그들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내 눈도. 나는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아무한테도 아무것도 줄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8

 

쌍둥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슈퍼마켓의 갈색 종이 봉투를 어느 쪽인가의 한쪽에게 주고, 불이 붙은 담배를 문 채 샤워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비누칠도 하지 않고 샤워를 맞으면서, 멍하니 타일 벽을 보았다. 전기가 나간 채의 어두운 욕실 벽을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사라졌다. 내가 이제는 손댈 수도, 다시 부를 수도 없는 그런 그림자였다.

나는 그대로 욕실을 나와서 타월로 몸을 닦고, 침대에 드러누었다. 빨아서 막 말린 코럴 블루의 주름 하나 없는 시트였다. 나는 천장을 향해서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 하루의 일을 떠올렸다. 쌍둥이들은 그 사이 야채를 자르고, 고기를 볶고 쌀을 씻었다.

“맥주 마셔?” 하고 하나가 물었다.

“아아.”

208이라고 쓰인 셔츠를 입은 쪽이 침대 까지 맥주와 잔을 가져다 주었다.

“음악은?”

“있으면 좋겠어.”

그녀는 레코드 진열장에서 헨델의 <레코더 소나타>를 꺼내서 리플레이에 올려 놓고, 바늘을 내렸다. 몇 년 전의 발렌탕니 데이에 내 여자 친구가 선물로 준 레코드다. 레코더와 비올라와 챔발로 사이에서 기조 저음처럼 고기 볶는 소리가 끼어 든다. 나와 내 여자 친구는 이 레코드를 틀어 놓은 채 몇 번이고 섹스를 하곤 했었다. 레코드가 끝나고, 바늘이 탁탁 소리를 낼 때까지,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껴안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비가 소리도 없이 어두운 골프장에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맥주를 마시고,

한스 마르틴 린데가 F장조 소나타의 마지막 한 음을 마칠 때쯤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 셋은 그 날 저녁 모처럼 말이 없었다. 레코드는 끝났기 때문에, 방안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와 셋이 고기 씹는 소리밖에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식사가 끝나자 쌍둥이들은 식기를 치우고 둘이 부엌에 서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또 셋은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생명이 부여된 것같이 향기로운 커피였다. 한 쪽이 일어서서 레코드를 걸었다. 비틀즈의 <러버 솔>이었다.

“이런 레코드 산 적 없는데?”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우리들이 샀어.”

“준 돈을 조금씩 모았거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비틀즈는 싫어?”

나는 가만히 있었다.

“유감이네. 기뻐할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한쪽이 일어나서 레코드를 끄고, 소중한 듯이 먼지를 털고 재킷에 집어넣었다. 셋은 침묵에 잠겼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변명을 했다. “조금 피곤하고 짜증이 났을 뿐이야. 다시 한 번 듣자.”

둘은 얼굴을 마주하고 방긋 웃었다.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여기는 당신 집인걸.”

“우리들 일 같은 것 신경 쓰지 마.”

“다시 한 번 듣자.”

결국 우리들은 <러버 솔>의 양면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얼마간 편안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쌍둥이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커피를 다 마시자 쌍둥이는 내 체온을 쟀다. 둘이서 몇 번이고 체온계를 노려보았다. 삼십 칠도 오분, 아침보다 오분 정도 높았다. 머리가 띵했다.

“샤워 같은 거 하니까 그렇지.”

“자는 게 좋겠어.”

그대로였다. 나는 옷을 벗고 <순수 이성 비판>과 담배를 한 갑 들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담요에서는 약간이지만 태양 냄새가 났고, 칸트는 여전히 훌륭했지만, 담배는 축축한 신문지를 구겨서 가스 버너로 불을 붙인 듯한 맛이 났다. 나는 책을 덮고 쌍둥이의 목소리를 멍하니 들으면서 암흑 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공원 묘지는 산꼭대기에 가까운 널찍한 부지를 이용해서 펼쳐져 있었다. 고운 모래를 갈아 놓은 보도가 종횡으로 무덤 사이에 뻗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진달래가 풀을 먹인 양과 같은 형태로 군데군데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광대한 부지를 내려다보면서 고사리같이 꾸부러진 키가 큰 수은등이 몇 개고 늘어서 있었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하얀빛을 구석구석에까지 던지고 있었다.

쥐는 공원 묘지 남동쪽 끝에 있는 숲속에 차를 세우고, 여자의 어깨를 안은 채 눈 밑에 펼쳐진 거리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는 마치 평탄한 주형에 집어넣은 질퍽질퍽한 광선처럼 보였다. 혹은 커다란 나방이가 금분 가루를 흩어 놓은 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는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쥐에게 기대고 있었다. 쥐는 어깨에서 옆구리에 걸쳐서 그녀의 몸무게를 묵직하게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무게였다.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서

죽어 가는 하나의 존재가 갖는 무게였다. 쥐는 한 손으로 담뱃갑을 집어 불을 붙였다. 가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눈 밑의 경사면을 기어 올라와 소나무 숲의 뾰족한 잎사귀를 흔든다. 여자는 정말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쥐는 여자의 볼에 손을 대고 한 손가락으로 얇은 여자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축축하고 뜨거운 그녀의 숨을 느낀다.

공원 묘지는 묘지라고 하기보다는 마치 버려진 도시처럼 보인다. 부지의 반 이상은 빈터였다. 거기에 들어갈 예정인 사람들이 아직은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끔, 일요일 오후에 가족을 데리고 자기가 잠들 장소를 확인하러 왔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묘지를 바라보면서 음, 이 정도면 전망도 좋고, 계절마다의 꽃도 갖추고, 공기도 좋다, 잔디도 손질이 잘 되어 있다, 스프링클러까지 있다. 제사 음식을 노리는 들개도 없다, 게다가, 하고 그들은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밝고 건강하게 보이는 게 좋다, 하고. 그런 식으로 그들은 만족하고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또다시 분주한 삶 속으로 되돌아갔다.

아침저녁으로 관리인은 끝에 납작한 판때기를 붙인 긴 막대기로 자갈길을 다졌다. 그리고 한가운데 있는 연못의 잉어를 노리고 오는 아이들을 쫓았다. 게다가 하루에 세 번, 아홉 시와 열두 시와 여섯 시에 공원 안의 스피커로 <올드 블랙 조>의 오르골을 틀었다. 음악은 튼다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쥐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저물기 시작한 오후 여섯 시의 사람 없는 묘지에서 <올드 블랙 조>의 멜로디가 흐르는 것은 제법 볼 만한 것이었다.

여섯 시 반에 관리인은 버스로 지상으로 돌아가고, 묘지는 완전한 침묵으로 덮였다. 그리고 몇 쌍인가의 남녀가 차로 와서는 껴안았다. 여름이 되면 숲속에는 몇 대나 되는 그런 차가 늘어섰다.

공원 묘지는 쥐의 청춘에 있어서도 역시 뜻깊은 장소였다. 아직 차를 탈 수 없던 고등학교 때, 쥐는 250cc의 오토바이 뒤에 여자아이를 태우고 강 옆의 언덕길을 몇 번이고 왕복하곤 했다. 그리고 항상 같은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그녀들을 안았다. 여러 가지 향내가 쥐의 코끝을 완만하게 흐르고, 그리고 사라져 갔다. 여러 가지 꿈이 있었고, 여러 슬픔이 있었고, 여러 약속이 있었다. 결국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되돌아보면 죽음은 광대한 부지의 각각의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가끔 쥐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그 점잔을 빼고 있는 공원 묘지의 자갈길을 목적도 없이 걸어 보았다. 각각의 이름과 때와 그리고 각각의 삶을 짊어진 죽음은 마치 식물원의 관목의 줄처럼 같은 간격을 유지한 채 끝도 없이 계속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없었고, 향기도 없었고 어둠을 향해서 뻗어야 될 촉수도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상실한 나무처럼 보였다. 그들은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실을 언어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남은 자들에게 그런 일을 내맡겼다. 둘은 숲에 들어가 힘껏 껴안았다. 바다로부터 부는 바람, 나뭇잎의 향내, 숲속의 귀뚜라미, 그러한 살아가는 세계의 슬픔만이 주위에 차 있었다.

“오래 잤어?” 하고 여자가 묻는다.

“아니.” 하고 쥐는 말한다. “대단한 시간은 아니야.”

 

9

 

같은 날의 같은 되풀이였다. 어딘가를 접어 두지라도 않는다면 착각해 버릴 것 같은 하루였다.

그 날은 계속 가을 냄새가 났다.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일을 마치고, 아파트에 들어오자 쌍둥이의 모습이 없었다. 나는 양말을 신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멍하니 담배를 피웠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에서 무엇 하나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일어나 한참 맞은편 하얀 벽을 노려보았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벽을 노려볼 수도 없겠지, 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졸업 논문을 맡았던 지도 교수가 근사한 말을 했었다. 문장은 좋아, 논지도 명확해, 하지만 테마가 없어, 라고. 정말이지 그런 식이었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니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몇 년이고 나는 혼자 살아왔다. 제법 잘해 오지 않았던가, 그걸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이십 사년 간, 금방 잊어버릴 만큼 짧은 세월은 아니다. 꼭 무엇을 찾는 도중에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병따개? 옛날 편지? 영수증? 귀마개?

단념하고 베갯맡에 있는 칸트를 손에 들었을 때, 책 사이에서 메모지가 떨어졌다. 쌍둥이의 글씨였다. 골프장에 놀러 나가겠습니다, 고 씌여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나하고 같이가 아니면 골프 코스에는 들어가지 말도록, 하고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저녁나절의 골프 코스는 위험하다. 언제 공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테니스 슈즈를 신고, 트레이너 셔츠를 목에 두르고 아파트를 나서자, 골프장 철망을 넘었다. 완만한 기복을 넘고, 십이 번 홀을 넘고, 휴게용 오두막을 넘고, 숲을 지나서, 나는 걸었다. 서쪽 끝에 펼쳐진 숲 사이로부터 잔디에 석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십 번 홀 근처에 있는 쇠 아령 같은 모양을 한 벙커 위에서 쌍둥이가 남겨 놓고 간 것 같은 커피 크림 비스킷의 빈 상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뭉쳐서 주머니에 넣고, 뒷걸음질치면서 모래사장에 남겨진 세 사람의 발자국을 지웠다. 그리고 작은 개울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 언덕을 올라간 지점에서 쌍둥이를 발견했다. 쌍둥이는 언덕 반대측 비탈에 설치된 노천 에스컬레이터의 계단 중간에 나란히 앉아, 백가몬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두 사람만 오면 위험하다고 말했잖아.”

“황혼이 너무 예뻤거든.” 하나가 변명했다.

우리들은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와, 갈대가 하나 가득 난 풀바타에 걸터앉아, 선명한 석양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멋진 광경이었다.

“벙커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돼.” 하고 나는 말했다.

“미안해요.” 하고 둘은 말했다.

“옛날 말야, 모래톱에서 다친 적이 있거든. 국민학교 때야.”

나는 왼쪽 두 번째 손가락을 둘에게 보여 주었다. 하얀 실밥 같은 상처 자국이 칠 밀리미터 정도 남아 있었다. “누군가 깨진 사이다 병을 파묻어 놓았더라고.” 둘은 끄덕였다.

“물론 비스킷 빈 상자에 손가락을 벨 사람은 없지. 하지만 모래톱에 뭔가를 남겨 놓으면 안 돼. 모래톱은 신성하고 깨끗한 곳이거든.”

“알았어.” 하나가 말했다.

“조심할게.” 또 하나가 말했다. “그밖에 다친 적 있어?”

“물론이지.” 나는 온몸의 상처를 둘에게 보였다. 상처의 카탈로그 같은 것이다. 우선 왼쪽 눈, 이건 축구 시합 때 공에 부딪혔지. 지금도 망막에 상처가 남아 있거든. 그리고 콧마루, 이것도 축구야. 해딩할 때 상대방 이빨에 부딪혀 버렸어. 아랫입술도 일곱 바늘 꿰맸지. 자전거에서 떨어졌어. 트럭을 미처 못 피해서 말야. 그리고 부러진 이빨......“

우리들은 차가운 풀 위에 한 줄로 누워서 갈대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계속 들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고 나서 우리는 아파트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내가 목욕을 하고 맥주를 한 변 다 마실 때쯤 세 마리 송어가 구워졌다. 그리고 그 곁에 깡통 아스파라거스와 거대한 크레송이 붙어 있었다. 송어에서는 그리운 맛이 났다. 여름의 산길 같은 맛이다. 우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송어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접시 위에는 송어의 하얀 뼈와 연필 정도 되는 거대한 크레송의 대밖에 남지 않았다. 둘은 금방 식기를 씻고, 커피를 끓였다.

“배전반 이야기를 하자.” 고 나는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죽어 가고 있을까?”

“너무 많은 것을 빨아먹은 거야, 틀림없이.”

“펑크가 난 거야.”

나는 왼손에 커피 컵을 들고, 오른쪽에 담배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어요.”

“땅으로 돌아가는 거지.”

“패혈증 고양이를 본 적 있어?”

“아니.” 하고 나는 말했다.

“몸의 구석구석에서부터 돌처럼 딱딱해지기 시작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말야. 마지막에 심장이 멈춰 버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

“마음은 알아.” 하나가 말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당신한테는 짐이 너무 무거웠을 거야.”

그것은 마치 올해 겨울에 눈이 적으니까 스키는 단념해요, 라고 말할 때처럼 정말로 간단한 말투였다. 나는 단념하고 커피를 마셨다.

 

10

 

수요일 밤 아홉시에 침대에 들어가, 눈이 떠진 것은 열한 시였다. 그때부터는 아무리 해도 잘 수가 없었다. 마치 두 사이즈 정도 작은 모자를 쓴 것처럼 무엇인가가 머리 주변을 억누른다. 나쁜 기분이었다. 쥐는 단념하고 파자마를 입은 채 일어나, 부엌에서 얼음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여자를 생각했다. 유리 창가에 서서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고, 어두운 방파제 끝을 눈으로 더듬고, 여자 아파트 근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을 치는 파도 소리를 생각하고, 아파트의 유리창에 떨어지는 모래 소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일 센티미터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정이 떨어졌다.

여자와 만나기 시작하고 나서, 쥐의 생활은 한없는 일주일의 되풀이로 변해 있었다. 나날의 감각이 전연 없다. 몇 월? 아마 10월이겠지. 모르겠다...... 토요일에 여자를 만나고, 일요일에서 화요일까지의 삼 일간 그 추억에 잠긴다.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의 반을 다가오는 주말의 계획에 썼다. 그리고 수요일만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서 방황한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다. 수요일......

십 분 정도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나서 파자마를 벗고, 셔츠 위에 윈드브레이커를 껴입고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다. 열두시가 지난 거리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가로등만이 시커먼 보도를 비추고 있었다. 제이스 바의 셔터도 이미 닫혀 있었지만, 쥐는 반쯤 그것을 올리고 몸을 굽히고 들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제이는 빤 타월을 한 타스 정도 의자 등에 걸어 말려 놓고, 카운터에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참이었다.

“맥주 한 병만 마셔도 될까?”

“좋고말고.” 제이가 기분 좋은 듯이 그렇게 말했다.

폐점 후에 제이스 바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운터만 남기고, 조명은 꺼졌고. 환기 장치나 에어컨 소리도 꺼져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마루나 벽에 배인 냄새만이 희미하게 공기 속에 떠돌고 있었다.

쥐는 카운터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잔에 부었다. 객석의 공기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층으로 나뉜 채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미지근하고, 그리고 축축했다.

“오늘은 안 올 생각이었지.” 쥐가 변명했다. “하지만 잠이 깨서 말야, 어떻게든 맥주가 마시고 싶었거든, 금방 갈게.”

제이는 카운터 위에서 신문을 접고, 바지에 떨어진 담뱃재를 손으로 털었다.

“천천히 마시고 가도 돼. 배가 고프면 뭐 만들어 줄게.”

“아냐,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맥주면 돼.”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글라스 하나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을 글라스에 붓고 거품이 가라앉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괜찮으면 같이 안 마실래?” 쥐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제이는 조금 곤란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하지만 한 방울도 못 마셔.”

“몰랐는데.”

“원래 체질이 그렇게 되어 있나 봐. 받지를 않아.”

쥐는 몇 번인가 끄덕이고, 잠자코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자기가 이 중국인 바텐더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하긴 제이에 관해서는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 제이는 지독히도 고요한 남자다. 자신에 관해선 뭐 하나 이야기하지 않았고, 누가 질문해도 주의 깊게 서랍을 여는 것처럼 항상 지장이 없는 대답을 꺼내 올 뿐이었다.

제이가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라는 것은 그다지 진기한 것은 아니다. 쥐의 고등학교 축구 클럽에는 포워드와 백스에 한 사람씩 중국인이 있었다.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음악이 없으니 쓸쓸하네.” 제이는 그렇게 말하고 주크박스의 열쇠를 쥐에게 던졌다. 쥐는 다섯 곡을 고르고 카운터에 돌아와 맥주의 나머지를 마셨다. 스피커에서 웨인 뉴턴의 오래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집에 빨리 돌아가야 되지 않아?” 쥐는 제이에게 그렇게 물었다.

“상관없어.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혼자 사나?”

“아아.”

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끄집어내 구겨진 부분을 펴고 불을 붙였다.

“고양이 한 마리 있어.” 하고 제이가 툭 말했다. “늙은 고양인데, 하지만 이야기 상대는 되지.”

“이야기하나?”

제이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제 오래 교제했으니까 서로 속마음을 알지. 나는 고양이 마음을 알고, 고양이는 내 마음을 알고.”

쥐는 담배를 문 채 신음 소리를 냈다. 주크박스가 딱 소리를 내면서, 레코드를 <맥아더 파크>로 바꾼다.

“이봐, 고양이는 어떤 일을 생각하지?”

“여러 가지지. 나나 당신하고 똑같다고.”

“힘들 것 같은데.” 쥐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제이도 웃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손가락 끝으로 카운터 표면을 문댔다.

“한 손밖에 없어.”

“한 손?” 쥐는 되물었다.

“고양이 말야, 절뚝발이라고. 사 년 정도전의 겨울이었지. 고양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 손바닥이 마멀레이드같이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어.”

쥐는 손에 들었던 잔을 카운터에 놓고, 제이의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차에 치었는가도 생각했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너무 심했어. 타이어에 치인 것 가지고는 그렇게 되지 않지. 마치 바이스에 걸린 것 같은 상태였어. 완전히 납작했지. 누군가가 장난쳤는지도 몰라.”

“설마.” 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누가 고양이 손을......“

제이는 양쪽 끝이 잘린 담배 끝을 몇 번인가 카운터에 두들기고 나서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렇지, 고양이 손을 뭉갤 필요 따윈 전혀 없지, 아주 얌전한 고양이이고, 나쁜 짓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아. 게다가 고양이 손을 뭉갠다고 해서 누가 득을 볼 것도 아니고, 무의미하고 너무 심해. 하지만 말야, 이 세상에는 그런 식의 이유도 없는 악의가 산더미처럼 있거든. 나도 이해할 수 없고, 자네도 이해할 수 없지.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거든. 둘러싸여 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

쥐는 맥주 잔에 눈길을 준 채,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됐어, 모르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지.”

제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두운 텅 빈 객석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하얀 연기가 공중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둘은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쥐는 잔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고, 제이는 변함 없이 카운터 판을 손가락으로 문댔다. 주크박스는 마지막 레코드를 흘리기 시작했다. 펄셋 보이스의 달콤한 솔 발라드였다.

“이봐, 제이.” 쥐는 잔을 보면서 말했다. “나는 스물 다섯 해나 살아오면서 뭐 하나 몸에 붙인 것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제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자 않고, 자기 손가락 끝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사십 오년에 걸쳐서 하나밖에 알지 못했지. 이런 것이야. 사람은 어떤 것에서는 노력만 하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거지. 아무리 평범하고, 아무리 흔한 일에서라도 반드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어떤 것에서는 노력만 하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거지. 아무리 평범하고, 아무리 흔한 일에서라도 반드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어떤 면도질에도 철학은 있다고 말야, 어딘가에서 읽었다고, 사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 남을 수 없는 거지.”

쥐는 끄덕거리고 삼 센티미터 정도 바닥에 남은 맥주를 마셨다. 레코드가 끝나고 주크박스가 딱 소리를 내고, 그리고 가게는 고요 속에 잠겼다.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지만, 하고 말하려다 말고 쥐는 말을 삼켰다. 쥐는 웃으면서 일어서서 잘 먹었습니다, 고 말했다. “집까지 차로 바래다줄게.”

“아냐, 됐어, 집은 가깝고, 게다가 걷는 것을 좋아하거든.”

“그럼 잘 자, 고양이한테 안부 전해 주고.”

“고마워.”

 

계단을 올라와서 밖에 나서자 냉랭한 가을 냄새가 났다. 가로수 하나하나를 가볍게 주먹으로 두들기면서 쥐는 주차장까지 걸어가 파킹 미터를 향해 달려, 여자 아파트가 보이는 해안가 도로에 차를 세웠다. 아파트 창의 반 정도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몇 개인가의 커튼 너머로는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여자 방은 어두웠다. 침대 곁의 램프도 꺼져 있었다. 이미 잠들었나 보다. 아주 쓸쓸했다.

파도 소리가 점점 세지는 것 같았다. 마치 파도가 지금이라도 방파제를 넘어 쥐를 차째 어딘가 멀리 흘러 보내 버릴 것 같이 생각되었다. 쥐는 라디오 스위치를 켜고, 의미도 없는 디스크 자키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시트를 넘어뜨려 머리 뒤에서 양손을 끼고 눈을 감는다. 몸은 무겁고, 피곤에 젖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여러 감정은 있을 곳을 못 찾은 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쥐는 한숨 놓고 텅 빈 머리를 누인 채, 멍하니 파도 소리에 섞인 디스크 자키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잠이 천천히 다가왔다.

 

11

 

목요일 아침, 쌍둥이가 나를 깨웠다. 언제나 보다 십오분 정도 빨랐지만 마음쓰지 않고, 뜨거운 물로 수염을 깎고, 커피를 마시고, 잉크가 흠뻑 손에 묻은 것 같은 조간을 구석구석까지 읽었다.

“부탁이 있어.” 쌍둥이 중 하나가 말했다.

“일요일에 차를 빌릴 수 있을까?” 또 하나가 말했다.

“아마도.” 내가 말했다. “그런데 어디에 가고 싶어서?”

“저수지.”

“저수지?”

둘은 끄덕였다.

“저수지에 뭣 하러 가?”

“장례식.”

“누구의?”

“배전반.”

“그렇군.” 나는 말했다. 그리고 신문을 계속 읽었다.

 

일요일에는 공교롭게도 아침부터 가는 비가 계속 내렸다. 하긴 배전반의 장례식에 어떤 날씨가 어울리는 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쌍둥이는 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잠자코 있었다.

나는 토요일 밤에 공동 경영자에게 하늘색 폭스바겐을 빌렸다. 여자라도 생겼나, 라고 그는 물었다. 응, 하고 나는 말했다. 폭스바겐 뒷좌석에는 그의 아들이 묻힌 것 같은 밀크 초콜릿의 얼룩이 마치 총격전 뒤의 핏자국처럼 온통 배어들어 있었다. 카 스테레오용 카세트 테이프에는 괜찮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편도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를 우리들은 음악도 듣지 않고, 오로지 무인 가운데 계속 달렸다. 비는 차가 달림에 따라 규칙적으로 강해졌다, 약해졌다, 다시 강해졌다. 하품이 나올 것 같은 비였다. 포장 도로를 고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차의 슈욱 하는 소리만이 같은 템포로 이어졌다.

쌍둥이 중 하나는 조수석에 앉고, 또 하나는 쇼핑백에 든 배전반과 보온병을 들고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장례식 날에 어울리게 엄숙하였다. 그리고 나도 그에 따랐다. 도중에 휴게소에서 구운 옥수수를 먹을 때도 우리들은 엄숙하였다. 그리고 옥수수 알이 뚝뚝 몸뚱이에서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우리들은 마지막 한 톨까지 갉아먹은 세 자루의 옥수수를 뒤에 남기고, 다시 차를 달렸다.

지독히 개가 많은 곳으로, 그들은 마치 수족관의 방어 떼처럼 빗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끊임없이 클랙슨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비에도 차에도 전혀 흥미가 없다, 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개는 클랙슨 소리에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잘 피했다. 그러나 물론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개들은 모두 똥구멍까지 흠뻑 젖고, 어느 놈은 발자크의 소설에 나오는 수달처럼 보이고, 어느 놈은 생각에 잠긴 승려처럼 보였다.

쌍둥이 중의 한 사람은 나에게 담배를 물게 하고, 거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작은 손바닥을 내 면 팬츠 안쪽에 대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것은 나를 애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한 행위처럼 생각되었다.

비는 영원히 내릴 것처럼 보였다. 10월의 비는 항상 그런 식으로 내린다. 모든 것을 적실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 내린다. 땅 표면은 흠뻑 젖어 있었다. 나무도 고속도로도 밭도 차도 집도 개도 모든 것이 구석구석까지 비를 빨아먹고, 세계는 구제할 길 없는 냉랭함에 차 있었다.

얼마간 산길을 올라가서, 깊은 숲의 사잇길을 나가자 저수지로 나왔다. 비로 인해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비는 눈길에 닿는 데까지 저수지 수면 위로 내리붓고 있었다. 저수지가 비를 맞고 있는 광경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참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연못 곁에 차를 세우고, 차 속에 앉은 채 보온병의 커피를 마시고, 쌍둥이가 사 온 쿠키를 먹었다. 쿠키에는 커피 쿠키, 버터 크림, 메이플 시럽의 세 종류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불공평해지지 않기 않도록 정확히 삼등분 해서 먹었다.

그 사이에도 비는 끊임없이 저수지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는 지독히 고요하게 오고 있었다. 신문지를 가늘게 찢어 두꺼운 카펫 위에 흩뿌리는 것만큼의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클로드 루루슈 영화에서 자주 내리는 비다.

우리는 쿠키를 먹고, 커피를 두 잔 마셔 버리자, 약속이나 한 듯이 무릎을 툭툭 털었다. 아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 슬슬 일을 마쳐야지.” 쌍둥이 중 하나가 말했다.

다른 하나가 끄덕였다.

나는 담배를 껐다.

우리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저수지를 향해 튀어나온 다리의 막다른 끝까지 걸어갔다. 저수지는 강을 막아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수면은 산중턱을 씻듯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구부러져 있었다. 물의 색깔에서 무서울 정도의 물의 깊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비는 거기에 가벼운 파문을 만들면서 내리고 있었다.

쌍둥이 중 하나가 종이 봉투에서 예의 배전반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배전반은 빗속에서 보통 때보다 더 초라하게 보였다.

“뭔가 기도해 줘.”

“기도?” 나는 놀래서 소리쳤다.

“장례식인 걸, 뭔가 기도가 필요하잖아.”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나는 말했다. “실은 준비돼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뭐든지 괜찮아.”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젖으면서 적당한 말을 찾았다. 쌍둥이는 걱정스러운 듯이 나하고 배전반을 교대로 바라봤다.

“철학의 의무는,” 나는 칸트를 인용했다. “오해에서 생기는 환상을 제기하는 데 있다. 배전반이여, 저수지 바닥에서 편안히 잠들라.”

“던져 줘.”

“응?”

“배전반 말야.”

나는 오른팔을 마음껏 백스윙시킨 다음 배전반을 사십 오 도 각도로 힘껏 던졌다.

배전반은 빗속에 멋진 원을 그리고 날아가 수면을 쳤다. 그리고 파문이 천천히 퍼지고, 우리들 발밑까지 밀려 왔다.

“멋진 기도였어.”

“당신이 생각한 거야?”

“물론이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개처럼 흠뻑 젖은 채, 저수지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봤다.

“얼마나 깊어?” 하고 하나가 물었다.

“지독히 깊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고기가 있을까?” 하고 또 하나가 물었다.

“어느 연못이고 고기는 있지.”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들은 틀림없이 기품 있는 기념비처럼 보였을 것이다.

 

12

 

그 주의 목요일 아침, 나는 그 가을 처음으로 스웨터를 입었다. 아무런 특색 없는 회색의 셰틀랜드 스웨터로, 겨드랑이 밑은 조금 터져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 보다 기분 상으로나마 꼼꼼하게 수염을 깎고, 두툼한 면바지를 입고, 색이 바래 버린 데자트 부츠를 꺼내서 신었다. 구두는 마치 발밑에 경건하게 앉아 있는 두 마리 강아지처럼 보였다. 쌍둥이가 온 방을 뒤져서 내 담배와 라이터와 지갑과 정기 패스를 찾아내서 들려주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여자아이가 끓여 준 커피를 마시면서 여섯 개의 연필을 깎는다. 온 방안이 연필심과 스웨터 냄새로 가득 찼다.

점심에는 밖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아비니시아 고양이하고 논다. 쇼케이스 유리의 일 센티미터 정도 되는 틈으로 손가락 끝을 집어넣자, 두 마리의 고양이는 다투어서 점프하고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 날은 펫 숍 점원이 고양이를 안게 해 주었다. 고급 캐시미어 같은 촉감이었고, 고양이는 촉촉한 코끝을 내 입술에 대었다.

“아주 사람을 잘 따르거든요.” 점원이 설명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고양이를 케이스에 돌려주고, 용도가 없는 캣 푸드를 한 상자 샀다. 점원은 그것을 꼼꼼하게 포장해 주었다. 내가 캣 푸드의 꾸러미를 안고 펫 숍을 나올 때에도 두 마리의 고양이는 꿈의 파편이라도 바라보듯이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여자아이가 스웨터에 묻은 고양이털을 털어 주었다.

“고양이하고 놀았거든.” 하고 나는 슬그머니 변명했다.

“겨드랑이가 풀렸네.”

“알아, 작년부터인걸. 현금 수송차를 습격했을 때 백 미러에 걸렀지.”

“벗어요.” 그녀는 재미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스웨터를 벗자 그녀는 의자 곁에 긴 다리를 꼬고, 까만 실로 겨드랑이를 꿰매기 시작했다. 그녀가 스웨터를 꿰매고 있는 동안에 나는 책상에 돌아가 오후 몫의 연필을 깎고 나서 다시 일에 착수했다. 누가 뭘라 해도 나는 일에 관해서만은 한마디도 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시간에는 정해진 일을 꼼꼼히, 그것도 가능한 양심적으로 한다는 것이 나의 방법이다. 아우슈비치에서라면 틀림없이 소중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문제는,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내게 맞는 장소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뭐 구태여 아우슈비츠나 좌석이 두 개 붙어 있는 뇌폭격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이미 아무도 미니스커트 따윈 입지 않았고, 잔과 딘 따위는 듣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양말 걸이가 붙은 거들을 입은 여자아이를 본 적이 언제였더라?

시계가 세시를 가리켰고, 언제나처럼 여자아이가 뜨거운 일본차와 쿠키를 가지고 책상으로 왔다. 스웨터도 멋지게 꿰매져 있었다.

“저, 조금 의논해도 될까?”

“하지만.” 하고 나는 말하면서 쿠키를 먹었다.

“11월의 여행 이야긴데.” 그녀는 말했다. “북해도 같은 데는 어떨까?”

11월에는 우리들 셋은 항상 사원 여행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담 결정했어. 곰은 안 나오겠지요?”

“어떨까?” 고 나는 말했다 “벌써 동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안심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런데 저녁 같이 안 할래요? 가까운 곳에 맛있는 새우 요릿집이 있는데.”

“좋지.” 라고 나는 말했다.

레스토랑은 사무실에서 택시로 오 분 정도 걸리는 조용한 주택가 가운데 있었고, 우리가 자리에 앉자 까만 옷을 입은 웨이터가 야자수 섬유로 짠 카펫 위를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수영 비트판 만큼이나 되는 메뉴판을 두 장 두고 갔다. 요리 전에 맥주를 두 병 주문했다.

“여기 새우는 아주 맛있어, 살아 있는 채 삶아요.”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잠시 동안 가는 손가락으로, 목에 건 별 모양의 팬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식사 전에 해 보리는 게 좋아.”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말해 보리고 나서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했다. 매번의 일이다.

그녀는 아주 살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사분의 일 센티미터 정도의 미소는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잠시 입 주위에 머물고 있었다. 가게가 지독히 비어 있었기 때문에 새우가 수염을 움직이는 소리조차도 들릴 것 같았다.

“지금 일 좋아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글쎄, 일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불만은 없어.”

“나도 불만은 없어요.” 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한 입 마셨다. “월급도 괜찮고, 당신들 두 사람도 친절하고, 휴가도 꼭꼭 갈 수 있고......”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스무 살이거든요.” 하고 그녀는 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치고 싶지는 않아요.”

요리가 테이블에 놓여지는 동안, 우리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자네는, 아직 젊어.” 나는 말했다. “이제부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지. 인생 따윈 자꾸 변해 가는 거야.”

“바뀌지는 않아.” 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로 능숙하게 새우 껍질을 벗기면서 가느다랗게 말했다. “아무도 나 따윈 좋아하지 않아. 신통치 않은 바퀴벌레 잡이를 조립하거나, 스웨터를 꿰매거나 하면서 일생을 마치는 거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몇 살이나 늙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네는 귀엽고 매력적이고, 다리도 길고 머리도 좋아. 새우 껍질도 잘 벗기고, 틀림없이 잘 돼 갈 꺼야.”

그녀는 잠자코 새우를 먹었다. 나도 새우를 먹었다. 그리고 새우를 먹으면서 저수지 바닥의 배전반을 생각했다.

“당신은 스무 살 때 무엇을 했지?”

“여자아이한테 빠져 있었지.” 1969년, 우리들의 해.

“그녀랑 어떻게 되었는데?”

“헤어졌지.”

“행복했었어?”

“멀리서 보면,” 하고 나는 새우를 삼키면서 말했다. “대개의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우리가 요리를 다 먹을 때쯤, 가게는 조금씩 손님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포크나 나이프나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번잡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를, 그녀는 커피와 레몬 스플레를 주문했다.

“지금은 어때? 애인은 있어?” 그녀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쌍둥이를 배제하기로 했다. “아니.” 라고 나는 말했다.

“쓸쓸하지 않아?”

“익숙해졌어. 훈련으로.”

“어떤 훈련?”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그녀의 머리 오십 센티미터 정도 위로 뿜었다.

“나는 이상한 별자리에서 태어났거든. 즉 말야. 갖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넣었지. 하지만 뭔가를 손에 넣을 대는 다른 뭔가를 짓밟아 왔어. 알겠어?”

“조금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이것은 사실이야. 삼 년 정도전에 그 사실을 알았어.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지. 이젠 아무것도 원하지 말자고 말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평생 그렇게 해 나갈 작정이야?”

“아마도.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되거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구두 상자 속에서 살면 되겠다.”

멋진 의견이었다.

 

우리들은 역까지의 길을 나란히 걸었다. 스웨터 덕분에 밤은 기분이 좋았다.

“오케이, 어떻게 해보지 뭐.”라고 그녀는 말했다.

“별로 도움은 안 됐지만 말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훨씬 나아.”

우리는 같은 폼에서 반대편의 전차를 탔다.

“정말 쓸쓸하지 않아?” 그녀는 최후로 다시 한 번 그렇게 물었다. 내가 그럴 듯한 대답을 찾고 있는 동안에 전차가 왔다.

 

13

 

어느 날 무엇인가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뭐래도 괜찮다. 사사로운 것이다. 장미 봉오리, 잃어버린 모자, 어릴 때 마음에 들어 했던 스웨터, 오래 된 진 피트니의 레코드...... 이미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조촐한 것들의 나열이다. 이틀이나 삼 일 정도, 그 무언가는 우리들 마음속을 방황하고, 그리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암흑, 우리들의 마음속에 몇 개인가의 우물이 파져 있다. 그리고 그 우물 위를 새가 지나간다.

 

그 가을의 일요일 저녁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은 핀볼이었다. 나는 쌍둥이와 함께 골프 코스의 여덟 번째 그린 위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덟 번 홀은 파5의 롱홀이고 장애물도 언덕도 없다. 국민학교 복도 같은 페어웨이가 똑바로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칠 번 홀에서는 근처에 사는 학생이 플푸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파질 것 같은 두 옥타바의 음계 연습을 배경으로 석양이 언덕에 반쯤 몸을 묻으려고 하고 있었다. 왜 그런 순간에 핀볼대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핀볼의 이미지는 내 안에서 자꾸만 자꾸만 커져 갔다. 눈을 감으면 범퍼가 볼을 치는 소리나, 스코어가 숫자를 두들겨 내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1970년 나하고 쥐가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계속 마시고 있었을 때, 나는 결코 열렬한 핀볼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제이스 바에 있는 대는 그 당시로는 드문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 이라고 불리는 모델이었다. 필드가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져 있었고, 상부에 한 장, 하부에 두 장의 플리퍼가 붙어 있었다. 솔리드스테이트가 핀볼의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오기 전의 평화로운 좋은 시대의 모델이다. 쥐가 핀볼에 열중하고 있었을 때 92500이라는 그의 베스트 스코어를 기념하기 위해서 쥐와 핀볼대의 기념 사진을 찍게 된 적이 있었다. 쥐는 핀볼대 옆에 기대어서 씽긋 웃고, 핀볼대도 92500이라는 숫자를 튕겨낸 채 생긋 웃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코닥의 포켓 카메라로 찍은 유일한 마음 흐뭇한 사진이었다. 쥐는 마치 제 2 차 대전의 격추왕처럼 보였다. 그리고 핀볼대는 낡은 전투기처럼 보였다. 정비사가 프로펠러를 손으로 돌리고, 하늘에 올라간 뒤 파일럿이 바람막이를 꽝 하고 닫는, 그런 전투기였다. 92500이라는 숫자가 쥐와 핀볼대를 연결시켰고, 어딘지 모르게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핀볼 회사의 수금원 겸 수리인이 제이스 바에 왔다. 그는 삼십 정도 된 이상할 정도로 바짝 마른 사람으로, 거의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가게에 들어오면 제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핀볼대 밑에 있는 통을 열쇠로 열고 잔돈을 자르르 캔버스 옷감으로 된 자루에 쏟아 넣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개를 집어, 점검을 위해 기계에 놓고 두세 번 플런저의 용수철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재미없다는 듯이 공을 퉁겼다. 그리고 공을 범퍼에 맞추고 마그네틱의 상태를 점검하고, 모든 레인을 통과시키고, 모든 레인을 통과시키고, 모든 타깃을 떨어뜨렸다. 드롭 타깃, 킥아웃 홀, 로트 타깃, 마지막으로 보너스 라이트가 켜지면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볼을 아웃 라인에 떨어뜨리고 나갔다. 담배가 반쯤 탈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담뱃재를 터는 것도 잊어버리고, 쥐는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둘은 언제나 아연히 그 테크닉을 바라보았다.

“꿈 같아.” 라고 쥐는 말했다. “ 저 정도의 테크닉만 있으면 십오만 정도는 가볍지. 아니야 이 십만까지 갈지도 몰라.”

“프로인데 뭐, 할 수 없지.” 라고 나는 쥐를 위로했다. 그래도 에이스 파일럿의 긍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거에 비하면 아직 나 따윈, 여자의 새끼손가락 끝을 잡은 정도밖에 안 돼.” 쥐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스코어 보드 숫자가 여섯 자리가 넘을, 가망 없는 꿈을 언제까지고 꾸고 있었다.

“저게 일인걸.” 나는 설득을 재촉했다. “처음에야 즐거웠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야, 아침부터 밤까지 저 짓만 계속해 봐. 누구든지 지겨워지지.”

“아니,” 하고 쥐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

 

14

 

‘제이스 바’가 오랜만에 손님으로 혼잡했다. 낯이 익지 않은 얼굴이 거의 다 였지만 그래도 손님이기 때문에 제이의 기분이 나쁠 리는 없었다. 아이스 픽의 얼음을 깨는 소리, 온 더 록잔을 돌리는 딸가닥딸가닥 소리, 웃음소리, 주크박스의 잭슨 파이브, 만화의 웃음처럼 천장에 떠 있는 하얀 연기, 마치 여름의 전성기가 다시 한 번 돌아온 것 같은 밤이었다.

그래도 쥐에게는 아무래도 무엇인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카운터 끝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서, 펼쳐 놓은 채인 책의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다가 단념하고 책을 덮었다. 될 수 있으면 맥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셔 버리고, 방에 돌아가서 자고 싶었다. 만일 정말로 잘 수만 있다면......

그 일주일 동안 쥐는 운한테서도 버려져 있었다. 토막난 수면과 맥주와 담배, 날씨까지 망가지고 있었다. 산기슭을 씻어 낸 빗물이 흘러 들어가 바다를 갈색과 회색의 얼룩으로 바꿔 버렸다. 보기 싫은 전망이었다. 머릿속은 꼭 낡은 신문을 뭉쳐서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은 얕았고, 항상 짧았다. 너무 난방이 잘된 치과 의사의 대기실 같은 잠이었다. 누군가 문을 열 때마다 잠이 깬다. 시계를 바라본다.

그 주 중반에 쥐는 위스키를 혼자 마시면서, 모든 생각은 당분간 동결시키기로 결정했다. 의식의 틈 하나 하나마다 백곰이라도 건널 수 있을 만큼 두꺼운 얼음을 둘러치고, 이것으로 주 후반부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세우고 잤다. 그러나 눈이 떴을 때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머리가 조금 아팠을 뿐이다.

 

쥐는 눈앞에 늘어서 있는 여섯 병의 빈 맥주병을 멍하니 바라본다. 처음 맥주를 마신 것은 열여덟 살 때다. 몇 천 병이나 되는 맥주, 몇 천 개나 되는 프라이드 포테이토, 주크박스의 몇 천 장이나 되는 레코드. 이 모든 것이, 마치 거룻배에 쳐 오는 파도처럼 왔다가는 사라져 갔다. 나는 이미 충분할 만큼의 맥주를 마시지 않았는가. 물론 서른이 되든, 마흔이 되든 얼마든지 맥주는 마실 수 있어. 하지만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시는 맥주는 특별하단 말이야. ......스물 다섯 살, 은퇴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나이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대학을 나와서 은행의 대부 계원이라도 하고 있을 나이다.

쥐는 빈 병의 줄에 다시 한 병을 더하고, 넘칠 지경의 잔을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입을 닦는다. 그리고 축축한 손을 팬츠 엉덩이에 닦았다.

자, 생각해 봐, 쥐는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피하지 말고 생각해. 스물 다섯 살...... 조금은 생각해도 괜찮은 나이야. 열두 살의 남자아이가 둘 모인 나이란 말야. 너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없지, 한 사람 몫도 없어. 피클의 반병 속에 들어가 있는 개미집만큼의 값어치도 없어. 그만둬. 시시한 메타포는 이제 지겨워. 아무 소용도 없어. 생각해 봐, 너는 어디에서인가 틀렸어 생각해 봐. ......알게 뭐야.

쥐는 단념하고 나머지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손을 들고 새것을 부탁한다.

“오늘 너무 마시는 것 같아.” 제이가 말했다. 그래도 결국 여덟 번째 맥주가 앞에 놓인다.

조금 머리가 아프다. 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몇 번 위아래로 흔들린다. 눈 깊은 곳에 아른함을 느낀다. 토해, 머릿속에서 소리가 났다. 토해 보려, 그리고 나서 느긋하게 생각해 봐. 자, 서서 화장실까지 가. ......안 돼, 일루까지도 못 걷겠다. ......그래도 쥐는 가슴을 펴고 화장실까지 걸어가 문을 열고, 거울을 보며 아이라인을 고치고 있는 젊은 여자를 내쫓고, 변기를 향해서 쭈그렸다.

토하다니 몇 년 만이지? 토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네. 바지는 벗는 거였나?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둬. 아무 소리말고 토해 버려. 위액까지 토해 버려.

위액까지 토하고 나서 쥐는 변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비누로 얼굴과 손을 씻고, 젖은 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조금 음침하지만 코와 턱 모양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공립 중학교 여선생이라면 마음에 들어 해 줄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에서 나와 아이라인을 반쯤 그린 여자에게 가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카운터로 돌아가 맥주를 반 잔 마시고, 제이가 준 얼음 냉수를 단숨에 마셨다. 머리를 두세 번 흔들고,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머리 기능이 정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됐어, 하고 쥐는 소리내어 말했다. 밤은 길어, 천천히 생각해.

 

15

 

내가 정말 핀볼의 주술 세계에 들어간 것은 1970년 겨울이었다. 그 반년을 나는 어둠 속에서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초원 한 가운데에 내 사이즈에 맞는 구멍을 파고 그곳에 완전한 몸을 묻고, 그리고 모든 소리에 귀를 막았다. 무엇 하나 내 흥미를 끌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눈을 뜨면, 코트를 입고 게임 센터 한쪽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계는 겨우 찾아낸 스리 플리퍼스의 ‘스페이스십’, 제이스 바하고 완전히 똑같은 모델이었다. 동전을 집어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기계는 몸부림을 치듯이 일련의 소리를 내면서 열 개의 타깃을 올렸고, 보너스 라이트를 켜고 스코어를 여섯 개의 제로로 돌려놓고 레인의 맨 처음 볼을 튕겨냈다. 수없이 동전이 계속 기계에 던져졌고, 꼭 한 달 뒤 차가운 비가 내리는 초겨울 저녁, 내 스코어는 기계가 마지막 모래주머니를 던진 것처럼 여서 자리를 넘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플리퍼 단추에서 잡아떼듯이 떼어 내고, 등쪽 벽에 기대서 얼음처럼 차가운 깡통 맥주를 마시면서 스코어보드에 표시되어 있는 105220이라는 여섯 개의 숫자를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하고 핀볼 머신의 짧은 밀월은 그와 같이 시작되었다. 대학에는 거의 얼굴도 내밀지 않고, 아르바이트에서 탄 월급의 태반을 핀볼에 집어넣었다. 하깅 패스, 트랩, 스톱, 쇼트...... 대개의 테크닉에 숙달했다. 내가 플레이할 때 등뒤에는 항상 누군가가 구경하게끔 되었다. 빨간 입술 연지를 바른 여고생이 내 팔에 부드러운 젖을 대기도 했다.

스코어가 십오만을 넘을 때쯤 정말 겨울이 왔다. 나는 추워서 인적이 드문 게임 센터에서 더플 코트(모자가 달린 무릎까지 내려오는 방한 코트=역주)를 둘러쓰고 머플러를 귀까지 끌어올린 채 핀볼 기계를 계속 품었다. 화장실 거울에서 가끔 보는 내 얼굴은 말라서 뼈가 나오고 피부는 지독히 바삭하게 건조해 있었다. 세 개임 끝날 때마다 벽에 기대서 쉬고, 덜덜 떨면서 맥주를 마셨다. 맥주의 마지막 한 입은 항상 납 같은 맛이 났다. 그리고 담배꽁초를 발밑에 어질러 놓고 주머니에 찔러 넣은 핫도그를 씹었다.

그녀는 근사했다.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 나만이 그녀를 이해했고 그녀만이 나를 이해했다. 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녀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보드에 여섯 개의 제로를 퉁겨 냈고, 그리고 나에게 미소지었다. 나는 일 밀리미터의 오차도 없는 위치로 플런저를 잡아당기고,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볼을 레인에서 필드로 퉁겨 낸다. 볼이 그녀의 필드를 달려 돌아다니는 동안, 내 마음은 마치 양질의 해시시를 피울 때처럼 한없이 해방되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내 머릿속에 맥락도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여러 사람의 모습이 필드를 덮은 유리판 위에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유리판은 꿈을 비춰 내는 이중의 거울처럼 내 마음을 비추었고, 그리고 범퍼나 보너스 라이트에 맞추어 점멸했다.

당신 탓이 아니야,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나쁘지 않아, 힘껏 했잖아. 아니야, 라고 나는 말한다. 왼쪽 플리퍼, 탭 트랜스퍼. 구 번 타깃. 아니라니까. 나는 뭐 하나 하지 못했어. 손가락 하나 못 움직였어. 하지만 하려고 했다면 할 수 있었단 말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것이야, 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나는 말한다. 하지만 뭐 하나 끝나지 않았어, 언제까지고 틀림없이 똑같을 거야. 리턴 레인, 트랩, 킥아웃 홀 리바운다, 하깅, 6번 타깃...... 보너스 라이트. 121150. 끝났어, 모든 게, 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해가 된 2월, 그녀는 사라졌다. 게임 센터는 말끔히 부서졌고, 다음날에 그것은 올 나이트 영업의 도넛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커튼 같은 무늬의 제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바삭바삭한 도넛을 같은 무늬의 접시에 담아서 들고 오는 그런 가게다. 밖에 바이크를 늘어놓은 고교생이나 야근하는 운전사, 계절에 맞지 않은 히피나 바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한결같이 넌덜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지독히 맛없는 커피와 시나몬 도넛을 주문하고, 게임 센터에 대해서 뭐가 아는 게 없냐고 웨이트리스에게 물어 보았다.

그녀는 수상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도넛이라도 쳐다보는 그런 눈길이었다.

“게임 센터?”

“얼마 전까지 여기에 있던 것 말야.”

“몰라.” 그녀는 졸린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한 달 전의 일 따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도시다.

나는 어두운 마음을 안은 채 거리를 걸어다녔다.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 아무도 그 행방을 몰랐다.

그리고 나는 핀볼을 그만뒀다. 그럴 만한 때가 오면 누구든 핀볼을 그만둔다. 그뿐이다.

 

16

 

며칠이고 내린 비는 금요일 저녁에 갑자기 개었다. 유리창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는 지겨울 정도로 빗물을 빨아먹어 전신이 부풀어 있었다. 석양이 끊기기 시작한 구름을 미묘한 색으로 바꾸고, 그 반사가 방안을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쥐는 T셔츠 위에 윈드브레이커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섰다. 아스팔트 보도는 군데군데 고요한 물웅덩이를 간직한 채 까맣게 한없이 뻗어 있었다. 온 거리에 비가 막 개인 후의 석양 냄새가 난다. 강을 따라서 늘어선 소나무는 온몸을 흠뻑 젖신채, 초록색 잎 끝에서 가는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갈색으로 물들은 빗물은 강으로 흘러 들어가 콘크리트로 된 강바닥을 거쳐 바다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석양은 금방 끝나고, 축축한 어둠이 사방을 덮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습기는 일순간에 안개로 변해 갔다.

쥐는 차 유리창에 팔꿈치를 내민 채 천천히 시내를 돌아다녀 봤다. 야마노테의 언덕길을 서쪽을 향해서 하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결국 강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방파제 곁에 차를 세워 놓고 시트를 뒤로 젖히고 담배를 피웠다. 모래사장도, 기슭을 보호하는 블록도, 방사림도 모두 까맣게 젖어 있었다. 여자 방의 블라인드로부터는 따뜻하게 보이는 노란색 광선이 흘러나왔다. 손목 시계를 본다. 일곱시 십오분.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기 방의 온기 속으로 녹아드는 시간이다.

쥐는 양손을 머리 뒤로 돌리고, 눈을 감고 그녀 방의 모습을 생각해 내려고 해보았다. 두 번밖에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문을 연 곳이 세 평 정도 되는 다이닝 키친...... 오렌지 빛깔 테이블 클로스, 관엽 식물 화분, 의자가 네 개, 오렌지 주스, 테이블 위의 신문,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티 포트...... 모든 것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리고 얼룩 하나 없다. ......그 안은 두 개의 작은 방 칸막이를 치워 버려서 원 룸이 되어 있었다. 유리를 깐 갸름한 책상, 그 위에는 도자기 맥주 조끼가 세 개,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연필이랑 자랑 제도 펜이 꽉 채워져 있다. 트레이 속에는 지우개랑 문진, 잉크 지우개, 오래된 영수증, 접착 테이프, 색색 가지 클립...... 그리고 연필 깎기, 우표.

책상 곁에는 오래 써 온 제도판, 긴 팔이 있는 라이트, 셰이드 빛은 ...... 녹색이다. 그리고 막다른 벽에는 침대가 있다. 복고풍의 작은 나무 침대다. 둘이 올라타면 공원의 보트와 같이 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안개는 시간이 갈수록 그 농도를 더해 갔다. 젖빛 어둠이 해변을 천천히 흐른다. 가끔 도로 안쪽에서 노란 안개들이 가까이 와서는, 스피드를 떨어뜨리고 쥐 앞을 지나간다. 창가에 들어오는 가는 물줄기가 차 안의 모든 것을 적신다. 시트 프런트 글라스, 윈드브레이커, 주머니의 담배, 모든 것을. 멀리 정박하고 있는 화물선의 안개 고적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송아지같이 날카로운 비명을 울리기 시작한다. 무적은 각각의 음계로 짧고 길게 어둠을 꿰뚫고, 산 쪽으로 날아간다.

왼쪽 벽에는, 하고 쥐는 생각을 계속한다. 책장과 작은 라디오 세트, 그리고 레코드다. 그리고 양복장, 벤 샨(러시아 태생의 유태계 미국 화가=역주)의 복제화가 두 장, 책장에는 대수로운 책은 없다. 거의가 다 건축 전문서다. 그리고 여행과 관련되는 책, 가이드 북, 여행기, 지도, 몇 권인가의 베스트 셀러, 모차르트의 전기, 악보, 사전이 몇 권인가...... 불어 사전 표지 안에는 뭔가 표창의 말이 씌어져 있다. 레코드, 팻 분, 보비 달링, 플래서스.

거기에서 쥐는 막혔다. 뭔가가 빠졌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거다. 그것 때문에 방 전체가 현실감을 상실한 채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뭐지?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 줘...... 방의 조명과 ......카펫이다. 어떤 조명이었지? 그리고 무슨 색 카펫이었나?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쥐는 차 문을 열고 방사림을 빠져나가, 그녀의 방을 노크해서 조명과 카펫 색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리석다. 쥐는 다시 한 번 시트에 기대어서, 이번에는 바다를 바라본다. 까만 바다 위에는 하얀 안개 외에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등대의 오렌지색 불빛이 심장의 고동처럼 정확한 점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천장과 바닥을 상실한 채 잠시 동안 어둠 속에 떠올라 있었다. 그릭 조금씩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그 이미지가 흐려지기 시작해서, 끝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쥐는 고개를 천장으로 향하고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스위치를 끈 것처럼 머릿속의 모든 빛을 꺼 버리고, 새로운 어둠 속에 마음을 묻었다.

 

17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 그녀가 어딘가에서 계속 나를 부르고 있다. 며칠이고 며칠이고 그런 일이 계속 되었다.

나는 쌓여진 일거리를 무서운 스피드로 처리해 나갔다. 이제는 점심도 먹지 않았고, 아비시니아 고양이하고도 놀지 않았다. 아무하고도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 보는 여자아이는 가끔 내 상태를 볼 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래를 흔들고 되돌아갔다. 두시까지 하루 치 일을 마치고, 원고를 여자아이 책상에 내던지며 사무실을 튀어 나갔다. 그리고 온 동경의 게임 센터를 돌아보고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누구 하나 그 기계를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었다.

“플리퍼 지저 탐험은 안 돼? 이제 막 들어온 기계인데.”

어느 게임 센터의 주인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그는 조금 낙심한 듯했다.

“스리 플리퍼인 사우스 포 같은 것도 있는데 말야. 사이클 히트로 보너스 볼이 나오지.”

“미안하지만 스페이스십밖에 흥미가 없어.”

그래도 그는 친절하게 아는 핀볼 매니아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사람이라면 당신이 찾고 있는 기계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 소위 말하는 카탈로그 매니아거든. 기계에 대해서는 제일 잘 알걸. 조금 괴상한 남자이기는 하지만 말야.”

“고마워.” 하고 나는 인사를 했다.

“아니야, 괜찮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

 

나는 조용히 커피숍에 들어가 그 번호를 돌려보았다. 다섯 번 정도 벨이 울리고 나서 남자가 나왔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배후에서는 일곱시 NHK 뉴스와 아기 소리가 들린다.

“핀볼의 어떤 기계에 대해서 말씀을 여쭙고 싶은데요.” 나는 이름을 대고 나서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잠시 동안 전화 저쪽에서 모든 것이 침묵했다.

“어떤 기계 말인가요?” 하고 남자가 말했다. 텔레비전 음량이 작아졌다.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이라고 하는 기계입니다”

남자는 생각에 잠기듯이 신음 소리를 냈다.

“보드에 혹성과 우주선 그림이 그려진......”

“잘 압니다.” 그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꼭 대학원을 막 나온 강사 같은 말투였다. “시카고의 길버트 앤드 선즈의 1968년도 모델입니다. 비극의 기계로 다소 알려진 것이죠.”

“비극의 기계?”

“어떨까요, 만나 뵙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다음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우리들은 명함을 교환하고 나서 웨이트리스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그가 진짜 대학 강사였기 때문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나이는 서른을 넘긴 정도이고, 머리카락은 벌써 엷어지기 시작했지만 몸은 햇빛에 그을리고 튼튼해 보였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죠.” 라고 그는 말했다.

“사막에 물을 뿌리는 것 같은 일이죠.”

나는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댁의 번역 사무소에서는 스페인어는 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영어를 하고, 또 한 사람이 불어를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힘이 부치거든요.”

“그것은 유감인데요.” 라고 그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유감스러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잠시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스페인에 가신 적은?” 하고 그가 물었다.

“아뇨, 유감스럽게도.” 라고 나는 말했다.

커피가 오고, 스페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고, 우리들은 침묵 가운데 커피를 마셨다.

“길버트 앤드 선즈라는 회사는 말하자면 후발 핀볼 머신 회사입니다.” 그가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2차 대전부터 한국 전쟁까지 폭격기의 폭탄 투하 장치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의 휴전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고 했던 것이죠. 핀볼 머신, 빙고 모신, 슬롯 머신, 주크박스, 팝콘 벤더......, 소위 말하는 평화 산업이지요. 핀볼 제 1 호기는 195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나쁘지 않았죠. 정말 튼튼했고, 값도 쌌거든요. 하지만 재미없는 기계였죠. 빌보드지의 평을 빌린다면 ‘소비에트 육군 부대의 관급 브래지어 같은 핀볼 머신’이었던 것입니다. 하기야 장사로는 성공했습니다. 맥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제국에 수출했던 것이지요. 그런 나라에는 전문 기술자가 적거든요. 그러니까 복잡한 기계보다는 고장이 적은 튼튼한 것이 환영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물을 마시는 동안 침묵했다. 슬라이드용 스크린과 긴 막대기가 없는 것이 실로 유감스러운 듯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미국의, 즉 전 세계 의라는 이야기가 됩니다만, 핀볼 산업은 네 개 정도의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고드리브, 발리, 시카고 코인, 윌리엄스...... 소위 말하는 빅포죠, 거기에 길버트사가 끼여 든 거죠. 치열한 싸움이 오 년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 길보트사는 핀볼에서 손을 뗐죠.”

“손을 떼요?”

그는 끄덕이면서 나머지 커피를 맛이 없다는 듯이 마셔 버리고 손수건으로 입 가장자리를 몇 번이고 닦았다.

“에, 진 셈이죠. 하긴 회사 자체는 벌었지만 말이죠. 중남미 수출로 말이죠. 하지만 상처가 너무 커지기 전에라는 이유로 손을 뗐죠. ...... 결국 핀볼을 만드는 노하우라는 게 대단히 복잡하거든요. 숙련된 전문 기술자가 몇 사람이고 필요하고, 그 것을 통솔할 설계자가 필요하죠. 게다가 전국을 커버할 네크워크가 필요하죠. 부품을 항상 스톡해 둘 에이전트가 필요하고, 어느 부분이 고장나도 다섯 시간 이내에 뛰어갈 수 있는 숫자의 수리공도 필요하고 말이죠. 유감스럽게도 신참인 길버트사에는 그만한 여력이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섰고, 그때부터 약 칠 년간 자동 판매기라든가 크라이슬러의 와이퍼를 만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핀볼을 단념한 것은 아니었죠.”

그는 거기에서 입을 다물었다.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테이블 위에다 담배 끝을 툭툭 치고 나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포기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프라이드가 있었던 거지요. 비밀 공장에서 연구는 계속되었습니다. 빅 포를 퇴직한 사람들을 몰래 스카우트해서 프로젝트 팀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막대한 연구비를 지급하고 이렇게 명령을 내렸지요. 빅 포의 어떤 기계에도 지지 않을 기계를 만들어라. 그것도 오 년 이내에 라고 말이죠. 1959년의 일이었죠. 그 오년 간을 회사 쪽에서도 유효하게 사용했죠. 그들은 다른 제품을 이용해서 밴쿠버에서 와이키키까지 완벽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놓았던 거죠.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셈이죠.

재개의 제 1 호기는 예정대로 1964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빅 웨이브’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가죽 가방 속에서 까만 스크랩북을 꺼내 페이지를 열고, 나에게 건네 주었다. 잡지에서 오려 낸 것 같은 빅 웨이브의 전체 사진, 필드 도안, 보드 디자인, 게다가 인스트럭션 카드까지 붙어 있었다.

“이것은 정말 유니크한 기계였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없었던 여러 가지 아이디어에 차 있었죠. 예를 들자면 시퀀스 패턴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빅 웨이브’는 자기 스스로 자기 테크닉에 맞는 패턴을 선택할 수 있었죠. 이 기계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습니다.

물론 길버트사의 그러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는 이제는 극히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만, 그 당시로는 대단히 신선했던 것입니다. 또 이 기계는 대단히 양심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죠. 첫째, 튼튼했죠. 빅 포의 사용 가능 년수가 약 삼 년인 데 비해, 이것은 약 오 년을 쓸 수 있었죠. 둘째로 투기성이 적고, 테크닉 중심이라는 점, ...... 글 후 길버트사는 그러한 노선을 쫒아 몇 개인가의 명기를 생산해 냈습니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스카이 파일럿’, ‘트랜스 아메리카’......, 그 어느 것이나 매니아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죠. ‘스페이스십’은 그들의 최후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스페이스십’은 앞의 네 대하고는 완전히 취향을 바꾼 기계입니다. 앞의 네 대가 여러 가지로 아이디어를 짜낸 기계였던 것에 반해 ‘스페이스십’은 지독히 오서독스하고 심플한 것이었습니다. 빅 포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구 이외에는 뭐 하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거꾸로 말해서 도전적인 기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있었던 거겠죠.“

그는 내가 알아듣게 이야기하려는 듯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시고, 코피가 없어지자 물을 마셨고, 물이 없어지자 담배를 피웠다.

“‘스페이스 십’은 이상한 기계였죠. 얼른 보기에는 장점이 없는 기계로 보입니다. 하지만 해보면 무엇이나가 다르죠. 똑같은 플리퍼, 똑같은 타깃인데 다른 기종하고 뭔가가 다르다, 이겁니다. 그 무엇인가가 마약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당겼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스페이스십’을 비극의 기계라고 부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 장점을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 그들이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때가 늦었던 거죠. 둘째로 회사가 도산해 버린 것, 너무 양심적으로 했던 거죠. 길버트사는 어느 컨글로머릿(복합 기업)에 흡수당했습니다. 본사에서는 핀볼 부문은 필요 없다고 했죠. 그뿐입니다. ‘스페이스십’은 천부 천오백 대 정도 생산되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지금은 환상의 명기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스페이스십’의 매이너 거래 가격은 이천 달러 정도입니다만, 팔려고 내놓은 적은 거의 없죠.”

“왜 없죠?”

“아무도 내놓지 않기 때문이죠. 아무도 내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한 기계죠.”

그는 이야기를 마치자 습관적으로 손목 시계를 보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두 잔째 커피를 주문했다.

“일본에는 몇 대 수입됐나요?”

“조사해 봤습니다. 석 대입니다.”

“적군요.”

그는 끄덕였다.

“길버트사의 제품을 취급하는 루트가 일본에 없었기 때문이죠. 69년에 어떤 수입 대리점이 실험적으로 주문을 했습니다. 그것이 그 세 대입니다. 추가하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길버트 앤드 선즈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죠.”

“그 석 대 말인데요, 행방을 알 수 있을 까요?”

그는 커피 잔에 넣은 설탕을 몇 번이고 휘젓고 나서 귓불을 북북 긁었다.

“한 대는 신주쿠에 있는 작은 게임 센터에 팔렸습니다. 게임 센터는 작년에 망했죠. 기계 행방은 모릅니다.”

“그것은 압니다.”

“또 한 대는 시부야의 게임 센터로 흘러갔죠. 거기는 작년 봄에 불이 나서 타 버렸습니다. 하긴 화재 보험 덕에 아무도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말이죠. ‘스페이스십’ 한 대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해 보니 비운의 기계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타의 매 같군요.” 나는 말했다.

그는 끄덕였다. “그런데 최후의 한 대의 행방을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 제이스 바의 전화와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작년 여름에 처분해 버렸거든요.”

그는 소중한 듯이 그것을 수첩에 메모했다.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신주쿠에 있던 기계입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행방을 알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몇 개 있죠. 가장 일반적인 것은 스크랩입니다. 기계의 회전은 아주 빠르죠. 보통의 기계는 삼 년이면 감가상각되어 버리고, 수리비를 들이느니 새것으로 바꾸는 쪽이 득이 됩니다. 물론 유행의 문제도 있지만 말이죠. 그래서 스크랩된다는 거죠. 제 2의 가능성은 중고품으로 누가 사가는 것입니다. 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지만 아직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기계는 때때로 어딘가 스낵 같은 데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취객이나 아마추어를 상대하면서 일생을 마치죠. 세 번째, 이것은 극히 드문 케이스이긴 합니다만, 매니아가 사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팔십 퍼센트까지는 스크랩이죠.”

나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어두운 기분으로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가능성에 관해서인데요, 조사할 수가 있을 까요?”

“해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어려울 것입니다. 매니아끼리의 횡적 연락이 거의 없는 세계이지요. 명부도 없고, 회지도 없고, ......하지만 해보죠. 나 자신도 ‘스페이스십’에는 다소 흥미가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그는 깊은 의자에 등을 파묻고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당신의 ‘스페이스십’ 베스트 스코어는?”

“165000”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거 대단한데.”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실로 대단해.” 그리고 다시 귀를 긁었다.

 

18

 

그 후의 일주일 정도를 나는 이상할 정도의 고요함과 평온함 속에서 보냈다. 핀볼의 울음소리는 아직 얼마간 귓속에 남아 있었지만, 겨울 양달에 떨어진 벌의 날개 소리 같은 그 산란한 신음 소리는 이제는 사라지고 있었다. 가을은 나날이 깊어짐을 보이고 있었고, 골프장을 둘러싼 잡목 숲은 지면에 마른 잎을 쌓아 가고 있었다. 완만한 구릉의 여기저기에서 그러한 낙엽을 태우는 가는 연기가, 마법의 끈처럼 똑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파트 창에서 보였다.

쌍둥이는 조금씩 말수가 적어지고, 조금씩 다정해져 갔다. 우리들은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레코드를 듣고, 담요 안에서 껴안고 잤다. 일요일에는 우리는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식물원까지 걷고, 상수리나무 숲속에서 표고버섯과 시금치 샌드위치를 먹었다. 상수리나무 위에서 꽁지가 까만 들새가 투명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공기가 조금씩 차져 갔기 때문에, 나는 둘을 위해서 새로운 스포츠 셔츠를 두 장 사고, 나의 낡은 스웨터하고 같이 주었다. 덕분에 둘은 208도 209도 아닌 올리브 그린의 라운드 스웨터와 베이지의 카디건이 되었지만, 둘 다 불평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밖에 둘에게 양말과 새 스니커도 사주었다. 그리고 마치 다리 긴 아저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월의 비는 근사했다. 바늘처럼 가늘고, 솜처럼 부드러운 비가 마르기 시작한 골프장 잔디 위에 내렸다 그리고 물웅덩이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대지에 서서히 스며들어갔다. 비가 개인 후의 잡목 숲에는 축축한 낙엽 냄새가 떠돌고, 저녁노을이 몇 줄기인가 비치면서 땅 위에 얼룩을 그린다. 잡목림을 빠져나가는 샛길 위를 몇 마리인가의 새가 달리듯 가로지른다.

 

사무실에서의 나날도 똑같았다. 일은 한숨 돌렸고, 나는 카세트 테이프로 빅스 바이더백이나, 우디 허먼, 바디 벨링건 등 옛날 재즈를 듣고, 담배를 피면서 느긋하게 일을 계속했고, 한 시간마다 위스키를 마시고, 쿠키를 먹었다.

여자아이만이 바쁘게 시간표를 조사하고, 호텔이나 비행기를 예약하고, 게다가 내 스웨터를 두 번 꿰매고, 블레이저 코트의 메탈 단추를 다시 달아 주었다. 그녀는 머리형을 바꾸고, 입술 연지를 엷은 핑크로 바꾸고, 가슴의 융기가 눈에 띄는 얇은 스웨터를 입었다. 그리고 가을 공기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모든 것이 영원히 그 모습을 남길 것같이 느껴지는, 멋진 일주일이었다.

 

19

 

제이에게 도시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괴로웠다. 왠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힘들었다. 가게에 삼 일간 계속해서 갔고, 삼 일 다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야기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그래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 마시고,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무력감에 지배당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 봤자 아무데도 갈 수 없다, 고 생각한다.

시계가 열두시를 가리키면 쥐는 단념하고, 그리고 얼만가는 휴우하고 안심하고 일어서서, 언제나처럼 제이에게 안녕 하고 인사하고 가계를 나선다. 밤바람은 이제는 완전히 차가웠다. 아파트에 돌아와서, 침대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본다. 깡통 맥주를 따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옛날 서부극, 로버트 테일러, 커머셜, 일기예보, 그리고 화이트 노이즈......, 쥐는 텔레비전을 끄고 샤워를 한다. 그리고 또 한 개 깡통 맥주를 따고, 또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이 도시를 떠나 어디에 가면 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마음 밑바닥서부터 공포심이 기어 올라왔다. 시커멓게 빛나는 땅속 벌레와 같은 공포였다. 그들은 눈도 없었고, 연민의 정도 지니지 않았다. 그리고 쥐를 그들과 똑같이 땅 밑바닥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쥐는 그들의 온몸의 미끈거림을 느낀다. 깡통 맥주를 딴다.

그 삼 일 동안에 쥐의 방은 빈 맥주 깡통과 담배꽁초로 가득 찼다. 지독히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여자 살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언제까지고 그녀 안으로 들어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한테는 되돌아갈 수 없다. 네가 스스로 다리를 태워 버렸잖아, 라고 쥐는 생각한다. 네가 스스로 벽을 칠하고 그 속에 자기를 가둬 버렸잖아......

쥐는 등대를 바라본다. 날이 새고 바다가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선명한 아침 햇살이 마치 테이블 클로스라도 걷어 내듯이 어두움을 사라지게 할 때쯤, 쥐는 침대 속으로 들어가, 갈 곳 없는 그의 괴로움과 함께 잠이 들었다.

 

도시를 떠나려는 쥐의 결심은 한때는 동요가 없는 확고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각도에서 검토했고, 그리고 얻은 결론이었다. 아무데도 빈틈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성냥을 켰고, 다리를 태워 버렸다. 그래서 마음을 남길 것도 사라져 버렸다. 거리에는 얼마간 내 그림자가 남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거리는 계속 변할 것이고, 언젠가는 그 그림자도 자취가 사라지겠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제이......

왜 그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이렇게 산란하게 하는지 쥐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여기를 나가, 건강하게 지내.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서로 상대방 일을 뭣 하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낯선 타인이 만나고, 그리고 스쳐 지나간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쥐의 마음은 아팠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 굳게 쥔 주먹을 몇 번인가 흔들어 본다.

 

쥐가 제이스 바의 셔터를 밀어 올린 것은 월요일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제이는 언제나처럼 가게의 조명을 반정도 끈 테이블에 앉아서 하는 일도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쥐가 들어오는 것을 본 제이는 조금 웃고, 고개를 끄덕했다. 제이는 어둠 속에서 이상하게 늙어 보였다. 까만 수염이 볼과 턱을 그림자처럼 덮고 있었고, 눈은 움푹 들어가고, 얇은 입술은 말라서 갈라져 있었다. 목에는 혈관이 떠 있었고 손에는 노란 담뱃진이 배어 있었다.

“피곤해?” 하고 쥐는 물었다.

“약간.”이라고 제이는 말했다. “그런 날도 있지. 누구한테나 있어”

쥐는 끄덕이고 나서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가. 제이 맞은편에 앉았다.

“비 오는 날과 월요일에느 누구의 마음도 어두워진단 말야. 노래에도 있어.”

“정말이야.” 제이는 담배를 낀 자기 손가락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빨리 돌아가서 자는 게 좋을걸.”

“아니, 괜찮아.”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벌레라도 쫓는 것같은 느릿느릿한 고갯짓이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잠들 것 같지 않아.”

쥐는 반사적으로 손목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열두시 이십분이었다.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시간은 죽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셔터를 내려 버린 제이스 바 안에는 몇 년 동안 그가 추구해 온 반짝임의 파편도 없었다. 모든 것이 바래고, 모든 것이 지쳐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한테 콜라를 줄래?”하고 제이가 말했다. “자네는 맥주라도 마시면 되겠지.”

쥐는 일어서서 냉장고에서 맥주와 콜라를 꺼내, 잔과 함께 테이블로 날라 왔다.

“음악은?” 제이가 묻는다.

“아니, 오늘은 조용하게 지내자.” 쥐는 말했다.

“뭔가의 장례식 같군.”

쥐가 웃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맥주와 콜라를 마셨다. 책상에 올려놓은 쥐의 손목 시계가 부자연스러운 만큼 커다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열두시 삼십오분. 굉장히 긴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제이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쥐는 제이의 담배가 우리 재떨이 안에서 필터까지 재가 되어 타 버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지쳤어?” 하고 쥐가 물어 보았다.

“글쎄?” 제이는 말하고, 생각 난 듯이 다리를 바꿔 꼬았다.

“이유 같은 건 아마 아무것도 없을 거야.”

쥐는 반 잔 정도 맥주를 마시고 나서, 한숨을 쉬고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봐, 제이. 사람은 전부 썩어 가, 그렇지?”

“그렇지.”

“썩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쥐는 무의식중에 손등을 입술에 댄다. “하지만 하나 하나의 인간에게는 그 선택의 수가 아주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껏해 봤자......두 가지나 세 가지지.”

“그럴지도 모르지.”

거품이 다 나와 버린 맥주는 물구덩이처럼 잔 밑바닥에 담겨 있었다. 쥐는 주머니에서 얇아진 담뱃갑을 꺼내, 마지막 한 가치를 입에 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거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썩는 게 아닌가 하고 말야, 그렇지 않아?”

제이는 콜라 잔을 기울인 채, 잠자코 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은 계속 변하지. 변하는 데 어떤 뜻이 있는지 나는 쭉 몰랐어.” 쥐는 입술을 깨물고,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 어떠한 진보건, 어떤 변화건, 결국은 붕괴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야. 그렇지 않을까?”

“그럴 꺼야.”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기쁨에 넘쳐서 무를 향해 가는 무리한테 한 조각의 애정도, 호의도 지닐 수가 없었어. ......이 도시에서 말야.”

제이는 가만히 있었다. 쥐도 잠자코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의 성냥을 잡고, 천천히 불을 옮겨 붙이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문제는.” 하고 제이가 말했다. “자네가 변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정말이야.”

지독히 고요한 몇 초가 흘렀다. 십초 정도 되겠지. 제이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란 말야, 놀랄 만큼 어색하게 만들어졌거든.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말야.”

쥐는 병에 남아 있는 맥주를 잔에 붓고 한숨에 들이켰다.

“주저하고 있어.”

제이는 몇 번인가 끄덕거렸다.

“결정을 못하고 있어.”

“그런 느낌이 들었지.” 제이는 그렇게 말하여, 이야기하기에 지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쥐는 천천히 일어서서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시계는 이미 한 시가 지나 있었다.

“잘 자.”하고 쥐가 말했다.

“잘 자.”하고 제이가 말했다. “이봐, 누군가가 말했지. 천천히 걸어라. 그리고 물을 충분히 마셔라 하고 말야.”

쥐는 제이에게 미소를 짓고,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가로등이 인적 없는 거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쥐는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큼의 물을 마시면 충분할까라고 생각한다.

 

20

 

스페인어 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11월의 연휴가 막 끝난 수요일이었다. 점심 시간 전에 공동 경영자가 은행에 간 뒤, 나는 사무실에 있는 부엌에서 여자아이가 만들어 준 스파게티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스파게티는 이 분 정도 너무 삶아졌고, 바질리코 대신에 잘게 썬 자소가 뿌려져 있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가 스파게티를 만드는 법에 관해서 토론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아이가 전화를 받고 두 세마디 얘기하고 나서 어깨를 움츠리는 듯이 하면서 수화기를 나에게 건넸다.

“스페이스십 일인데요.” 그가 말했다. “행방을 알았습니다.”

“어디지요?”

“전화로는 말씀드리기 어려운데요.” 그가 말했다. 쌍방이 잠시 침묵했다.

“라는 것은?” 내가 물었다.

“전화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라는 얘기입니다.”

“일견이 불여백문이라는 거군요.”

“아니오.” 그는 우물우물했다. “눈으로 직접 보신다 하더라도 설명하기 어렵다, 라고 해야 될 겁니다.”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을 기다렸다.

“일부러 잘난 척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놀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뵙고 싶습니다.”

“알았습니다.”

“오늘 다섯시 정도면 어떨까요?”

“좋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플레이는 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스파게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어디에 갈 건데?”

“핀볼을 하러 가. 행방은 아직 몰라.”

“핀볼?”

“그래 플리퍼로 볼을 퉁겨서......,”

“알아, 하지만 왜 핀볼 따위를......,”

“글세, 이 세상에는 우리들의 철학 가지고는 짐작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지.”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핀볼을 잘해?”

“전에는. 내가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지.”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잃지 않아도 돼.”

그녀가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나는 나머지 스파게티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진저 에일을 꺼내서 마셨다.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에는 대단한 의미가 없지. 상실될 것의 영광이란 정말 영광은 아니다라고 할까?”

“누구의 말이야?”

“누구의 말인지는 잊어버렸어. 하지만 그대로야.”

“이 세상에 상실되지 않는 것도 있을까?”

“있다고 믿지. 자네도 믿는 쪽이 좋아.”

“노력해 볼게.”

“나는 어쩌면 너무 낙관적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알아요.”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반대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래서 오늘밤은 핀볼을 하러 가는 거네.”

“응.”

“양손을 들어 봐요.”

나는 천장을 향해서 양손을 올렸다. 그녀는 내 스웨터의 겨드랑이를 꼼꼼이 점검했다.

“오케이, 다녀와요.”

 

나하고 스페인어 강사는 처음에 만났던 같은 커피 점에서 만나서, 곧바로 택시를 탔다. 메이지 거리를 똑바로, 하고 그는 말했다.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 그는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고, 나에게도 한 대 권했다. 그는 회색 양복에 세로줄이 세 개 들어 있는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와이셔츠도 블루 넥타이보다는 약간 연한 블루다. 나는 회색 스웨터에 블루 진 그리고 색이 바랜 데자트 부츠였다. 꼭 교수실에 불려 간 시원찮은 학생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택시가 와세다 거리를 지나갈 때 운전사가 좀더 앞입니까? 하고 물었다. 메지로 거리입니다, 하고 강사는 말했다. 택시는 잠시 뒤에 메지로 거리로 들어섰다.

“상당히 멉니까?” 그는 말하고 두 번째 담배를 찾았다. 나는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상점가의 풍경을 잠시 눈으로 좇았다.

“찾는 데 고생했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매니아들의 리스트에 닥치는 대로 부딪여 봤죠. 스무 사람 정도인데, 동경뿐 아니라 전국에 부딪쳐 봤습니다. 하지만 수확이 제로였어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실 이상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중고 기계를 취급하고 있는 업자를 조사해 봤죠. 별로 많지 않거든요. 다만 거래한 기계 리스트를 조사하게 하는 데는 고생을 좀 했죠. 방대한 숫자니깐 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때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1971년 2월경이라는 얘기니까 말이죠. 조사해 달라고 했죠. 길버트앤드 선즈 스페이스십 시리얼 넘버 165029, 있었어요. 1971년 2월 3일 폐기 처분.”

“폐기 처분?”

“스크랩입니다. <골드 핑거>에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얘기죠. 네모나게 납작하게 눌러서 재생하거나 항구에 묻거나 하는 거죠.”

“하지만 댁에서는......”

“글세 좀 들어봐요. 나는 단념하고 업자한테 고맙다고 말하고서는 집으로 되돌아왔죠. 하지만 말이죠, 마음 밑바닥에 뭔가 앙금 같은 것이 걸려 있더라고요. 육감 같은 것이죠. 아니야 그렇지 않다, 고 말이죠. 나는 다음날 다시 한 번 업자한테 가 보았죠. 그리고 그 고철 상의 스크랩 가게까지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크랩 작업을 삼십 분 정도 보다가 사무실 들어가서 명함을 내어놓았습니다. 대학 강사라고 하는 명함은 그 실체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약간 효과가 있거든요.”

그는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약간이지만 말이 빨라져 있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게 나를 다소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책을 쓰고 있는데 스크랩 작업에 대해서 알고 싶다, 고 말이죠.”

그는 협력해 주었죠. 하지만 1971년 2월의 핀볼대에 대해서는 무엇하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죠. 이 년 반도 전의 일이고, 일일이 조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죠. 끌어 모아서 꽝,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어 보았죠. 만일 말이지 거기에 있는 무언가, 예를 들어서 세탁기라든가 발동기를 단 자전거의 차체(바이크의 보디) 같은 것을 내가 갖고 싶다고 하면 적당한 돈을 주면 양도해 줄 수 있는 가요, 라고 말이죠, 좋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런 예가 또 있습니까?” 하고 내가 물어 봤습니다.“

가을의 석양은 금방 끝나고, 어둠이 길을 덮기 시작했다. 차는 교외에 들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층 관리 담당자한테 물어 봐 주세요, 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물론 이층에 올라가서 담당자한테 물어 봤죠. 1971년경에 핀볼 기계를 인수해 간 사람이 없는가 하고 말이죠. 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어떤 인물이냐고 내가 묻자 그는 전화번호를 가르켜 주었습니다. 핀볼 기계가 들어올 때마다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해 둔 것 같았습니다. 몇 푼인가 받고 말이죠. 그래서 나는 그한테 그 사람이 몇 대 정도 핀볼 기계를 인수해 갔느냐고 물어 보았죠. 글쎄, 그가 말했습니다. 보기만 하고 사지 않을 때도 있고, 살 때도 있고 잘 모르겠는데, 하고 말이죠. 하지만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하고 내가 묻자 가르쳐 주었어요. 적어도 오십 대는 된다고 말이죠.”

“오십 대.” 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래서,”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 인물을 방문하는 겁니다.”

 

21

 

주위는 완전한 암흑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단색의 어둠이 아니고 여러 가지 물감을 버터처럼 두껍게 발라 놓은 암흑이었다.

나는 택시 유리창에 얼굴을 붙인 채 그런 암흑을 쭉 바라보았다. 어둠은 이상하게도 평면적이었다. 실체가 없는 물질을 예리한 칼날로 자른 절단면처럼도 보였다. 기묘한 원근감이 어둠을 지배하고 있었다. 거대한 밤의 새가 그 날개를 펼치고, 내 눈앞을 선명하게 막아선다.

인가는 달려감에 따라서 드물어지고, 드디어 몇 만이라고 하는 벌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초원과 숲만이 되었다. 구름은 바위처럼 낮게 드리우고 지상의 모든 것은 마치 목을 움츠리고 있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벌레만이 땅 위를 뒤덮고 있었다.

나와 스페인어 강사는 이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교대로 담배를 피워 댔다. 택시 운전사도 도로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노려 본 채 담배를 피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끝으로 무릎을 톡톡 두들겨 대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택시의 문을 열고 도망치고 싶다는 총동에 사로잡혔다.

배전반, 모래사장, 저수지, 골프 코스, 스웨터의 올의 풀림, 그리고 핀볼....... 어디까지 가면 되는 것일까, 생각한다.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뿔뿔이 흩어진 카드를 끌어안은 채, 나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방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목욕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담배와 칸트를 갖고 따뜻한 침대로 들어가고 싶었다.

왜 나는 어둠 속을 계속 달리는 것일까? 오십 대의 핀볼머신이라니 그것은 너무나도 황당하다. 꿈이다. 그것도 실체가 없는 꿈이다.

그래도 스리 플리퍼 스레이스십은 나를 계속 불렀다.

 

스페인어 강사가 차를 세운 것은 도로에서 오백 미터 정도 떨어진 빈터의 한가운데였다. 빈터는 평탄했고, 발목까지 부드러운 울이 얕은 여울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등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양계장 냄새가 났다. 눈에 보이는 불빛은 없었다. 도로의 가로등이 겨우 주변 풍경을 희미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무수한 벌레 소리가 우리들을 둘러쌌다. 마치 발목부터 어딘가에 끌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잠자코 눈을 어둠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여기가 아직 동경인가요?” 나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물론,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세계의 끝 같아요.”

스페인어 강사는 그럴 듯한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인 채 아무 소리 안 했다. 우리는 풀 향내와 닭똥 냄새를 맡으면서 담배를 피웠다. 연기는 봉화 같은 모양이 되어서 낮게 흘렀다.

“저쪽에 철망이 있습니다.” 그는 사격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팔을 곧바로 뻗고, 어둠의 안쪽을 손가락질했다. 나는 시선을 집중해서 겨우 철망 같은 것을 인식했다.

“철망을 따라서 똑바로 삼백 미터 정도 걸어 주세요. 막다른 곳에 창고가 있습니다.”

“창고?”

그는 내쪽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했다. “네, 넓은 창고니깐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양계장의 냉동 창고였죠.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양계장이 망했거든요.”

“하지만 닭 냄새가 나는 대요.”라고 내가 말했다.

“냄새......? 아, 땅에 배어 있죠. 비 오는 날은 더 지독합니다. 날개짓 하는 소리까지 들려 얼 것 같은 기분입니다.”

철조망 안쪽은 전혀 아무것도 안 보였다. 무서울 만큼의 어둠이었다. 벌레 소리까지 숨이 막힐 듯하다.

“창고 문은 열려진 채입니다. 창고의 소유자가 열어 두었습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기계는 그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안에 들어갔었나요?”

“한 번만..,.... 넣어 달라고 했죠.” 담배를 문 채 그는 끄덕했다. 오렌지빛 불빛이 어둠 속에서 흔들린다. “문을 열면 오른쪽 바로에 전기 스위치가 있습니다. 계단에 주의하세요.”

“당신은 안 가십니까?”

“혼자 가세요. 그런 약속입니다.”

“약속?”

그는 발밑의 풀 사이에 담배를 버리고 꼼꼼하게 비벼 꼈다.

“그렇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계셔도 된답니다. 돌아갈 때에는 반드시 전기를 꺼 주세요.”

공기는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땅이 갖고 있는 냉기가 우리들 주위에 들어찼다.

“소유주는 만나 보셨나요?”

“만났습니다.” 조금 사이를 두고 그는 대답했다.

“어떤 사람입니까?”

강사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풀었다. “별로 특징도 없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눈에 띌 만한 특징은요.”

“왜 핀볼 기계를 오십 대나 모았을까요?”

“뭐,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뿐이죠.”

그것 뿐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강사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헤어져, 혼자서 양계장 철망을 따라 걸었다. 그것만은 아니야, 라고 나는 생각한다. 핀볼대를 오십 대 모으는 것은 포도주 라벨을 오십 장 모으는 것하고는 좀 이야기가 다르다.

 

창고는 웅크린 동물처럼 보여다. 주위에는 키 큰 풀이 빽빽이 자라고 있었고, 솟아 있는 회색 벽에는 유리창 하나 없었다. 음산한 건물이었다. 철로 된 양쪽으로 열리는 문 위에는 양계장 이름이었던 것 같은 글씨가 하얀 페인트로 두껍게 지워져 있었다.

나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잠시 동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혀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체념하고 입구까지 걸어가, 얼음처럼 찬 철문은 닫았다.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고, 그리고 내 앞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둠이 펼쳐졌다.

 

22

 

내가 암흑 속에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몇 초인가 있다가 천장 위 형광등이 깜박깜박하더니 그 하얀빛이 창고 속에 넘쳤다. 형광등은 전부 해서 백 개는 되었다. 창고는 밖에서 본 느낌보다 훨씬 넓었지만 그래도 그 빛의 양은 압도적이었다. 눈이 부셔서 나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에는 어둠은 사라지고, 침묵과 냉랭함만이 남아 있었다.

창고는 거대한 냉장고의 내부같이 보였지만, 건물의 본래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리창 하나 없는 벽과 천장은 광택이 나는 하얀 칠로 칠해져 있었지만 노란색이라든가 까만 색이라든가, 기타 알 수 없는 색의 얼룩이 온통 달라붙어 있었다. 벽이 지독히 두껍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은 한눈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치 납상자 속에 처박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원히 여기서 못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고, 몇 번이고 뒤에 있는 문을 되돌아보게 했다. 이만큼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물도 또 없을 것이다.

극히 호의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코기리 무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리를 구부린 코끼리의 백골 대신에 눈에 띄는 한 핀볼 기계가 콘크리트 바닥에 쭉 늘어서 있었다. 나는 계단 위에 서서 그 이상한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이 무의식중에 입가를 더듬고,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 돌아갔다.

대단한 숫자의 핀볼 기계다. 일흔 여덟이라는 것이 그 정확한 숫자였다. 나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몇 번이고 핀볼대를 헤아려 봤다. 일흔 여덟, 틀림이 없다. 기계는 같은 방향으로 팔렬 종대를 이루고 창고의 막다른 벽까지 늘어서 있었다. 마치 분필로 바닥에 선을 그어서 늘어놓은 것처럼, 그 줄에는 일 센티미터의 착오도 없었다. 아크릴 수지 안에 웅거된 파리처럼 주위의 모든 것은 정지하고 있었다. 무엇 하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흔 여덟 개의 죽음과 일흔 여덟의 침묵,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나까지도 그 가고일의 무리 속에 집어넣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춥다. 그리고 역시 죽은 닭 냄새가 난다.

나는 천천히 다섯 단 정도 되는 좁은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는 더 추웠다. 그래도 땀이 났다. 기분 나쁜 땀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땀을 닦는다. 담나 겨드랑이 밑에 고인 땀만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계단 맨 아랫단에 걸터앉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웠다.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나는 이런 식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녀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문을 닫고 난 뒤에는 벌레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이 무거운 안개처럼 땅위에 가라앉아 있었다. 일흔 여덟 대의 핀볼 머신은 삼백 십이 개의 다리를 꽉 땅에 박고 그 오갈 데 없는 무게를 꼼짝 않고 견디고 있었다. 서글픈 광경이었다.

나는 걸터앉은 채 <점핑 위스 심퍼니 시드>의 처음 네 소절을 휘파람으로 불러 보았다. 슈탄게츠와 해드 세이캥 앤드 풋태핑 리듬 섹션...... 가로막는 것이 하나도 없는 황량한 냉동 창고에, 휘파람 소리는 아주 근사하게, 깨끗이 울려 퍼졌다.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다음 네 소절을 불렀다. 그리고 또 네 소절. 모든 것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무도 목을 흔들지도 않았고, 아무도 발을 구르지 않는다. 그래도 내 휘파람 소리는 창고 구석구석에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갔다.

“지독히 춥다.” 한바탕 휘파람을 불고 나서, 그렇게 소리를 내어서 중얼거려 보았다. 울리는 소리는 천장에 부딪히고, 안개처럼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담배를 문 채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고 여기에 앉아서 원맨쇼를 계속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니까. 냉기는 닭 냄새와 함께 몸속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차가운 흙을 손으로 턴다. 그리고 담배를 신발로 뭉게 끄고 나서, 곁에 있는 양철 깡통 속에 던져 넣는다.

핀볼......핀볼이야. 그것 때문에 여가까지 온 게 아니냔 말이야. 추위가 머리 회전까지도 멈추게 해 버린 것 같았다. 생각해 봐, 핀볼이야, 일흔 여덟 대의 핀볼. ......오케이, 스위치다. 이 건물 어딘가에 일흔 여덟 대의 핀볼 기계를 부활시키는 전원 스위치가 존재할 것이다. 스위치, 찾자.

나는 양손을 블루 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건물 벽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 보았다. 펑퍼짐한 콘크리트 벽에는 냉동 창고로 쓰였던 흔적이 배선이나 아연 관이 끊어진 채 군데군데 매달려 있었다. 여러 가지 기계라든가 계량기라든가 정크션 박스, 스위치 뒤에는 그런 것이 마치 거대한 힘으로 억지로 잡아뜯긴 것처럼, 뻐끔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벽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미끌미끌했다. 거대한 괄태충이 기어간 뒤 같았다. 실제로 걸어 보니깐 건물은 대단히 넓었다. 양계장 냉동 창고치고는 이상하게 넓었다.

내가 내려온 계단 바로 맞은편에 똑같은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간 지점에는 똑같은 철제문이 있었다. 빙 한바퀴를 돈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힐 정도로 모든 것이 똑같았다. 나는 시험삼아 손으로 문을 밀어 보았지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빗장도 열쇠도 걸려 있지 않았지만, 마치 무엇 인가로 덧칠해 놓은 것처럼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문에서 손을 떼고, 무의식중에 손바닥으로 얼굴의 땀을 닦는다. 닭 냄새가 났다.

스위치는 그 문 곁에 있었다. 레버 식의 커다란 스위치였다. 내가 그 스위치를 켜자, 땅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 같은 얕은 신음 소리가 한꺼번에 주위를 덮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질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몇 만이라고나 할 새의 무리가 날개를 펼치는 것 같은 딱딱딱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뒤돌아 서서 냉동 창고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일흔 여덟 대의 핀볼 기계가 전기를 빨아먹고, 그리고 그 스코어보드에 몇 천 개라고 하는 제로(0)자를 두들겨 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멈추자 그 뒤에는 벌떼 같은 붕 하는 둔탁한 전기 음만이 남았다. 그리고 창고는 일흔 여덟 대의 빈볼 기계의 잠시 동안의 삶으로 가득 찼다. 한 대 한 대가 필드에 여러 가지 원색 빛을 점멸시키고, 보드에 힘껏 그들의 꿈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마치 검열이라도 하듯이 일흔 여덟 대의 피볼 기계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몇 개인가는 사진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 빈티지 기계였고, 몇 개인가는 게임 센터에서 본 적이 있는 그리운 모델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채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 기계도 있었다. 윌리엄스의 ‘프랜드십 7’, 보드에 그려진 우주 비행사의 이름이 누구였지? 글렌......? 60년대 초의 얘기다. 발리의 ‘그랜드 투어’, 푸른 하늘, 에펠탑, 해피 아메리칸 느래블러......곳드리프의 <킹스 앤드 퀸스>. 롤 오버 레인이 여덟 개나 있는 모델이다. 수염을 깨끗이 깎은, 될 대로 되라 하는 얼굴을 한 서부의 도박사...... 양말대 밑에 숨겨 놓은 스페이드의 에이스......

슈퍼 히어로, 괴수, 칼리지 걸, 풋볼, 로켓, 그리고 여자...... 그 모든 것이 어두운 게임 센터 안에서 색이 바래고 죽어 간 흔한 꿈이었다. 여러 히어로라든가 여자들이 보드 위에서 나에게 미소지었다. 블론드, 플라치나 블론드, 블루네트, 빨간 머리, 까만 머리의 멕시코 아가씨, 포니 테일,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가진 하와이 아가씨, 앤 마그리트,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그 누구나가 멋진 가슴을 자랑스러운 듯이 내밀고 있었다. 어떤 것은 허리까지 풀어제낀 얇은 블라우스 밑에서, 어떤 것은 원피스식 수영복 아래서, 어떤 것은 끝이 뾰족한 브래지어 밑에서...... 그녀들은 영원히 그 가슴 형태를 망가뜨리지 않은 채, 분명하게 빛이 바래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심장이 고동에 맞추듯이 그 램프를 계속 점멸시키고 있었다. 일흔 여덟 대의 핀볼 머신, 그것은 오래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꿈의 무덤이었다. 나는 그녀들 곁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은 열 훨씬 뒤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동료들 사이에 껴서 대단히 조용하게 보였다. 숲속의 평평한 돌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 앞에 서서 그 그리운 보드를 바라보았다. 깊은 다크 블루 색의 우주, 잉크를 흘린 것 같은 푸른색이다. 그리고 작은 하얀 별, 토성, 화성, 금성, 그 앞에는 순백색의 우주선이 떠 있다. 우주선 창에는 불이 켜 있고 그 속은 마치 가족의 단란한 한때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둠 속을 몇 줄기인가의 유성이 선을 그으면서 흐르고 있다.

필드도 옛날 그대로였다. 똑같은 다크 블루. 타깃은 미소가 엿보기에 하는 이처럼 새하얗다. 별 모양으로 쌓여진 레몬 엘로의 열 개의 보너스 라이트가 천천히 빛을 상하 시키고 있었다. 두 개의 퀵 아웃 홀은 토성과 화성, 로 타깃은 금성. ...... 모든 것은 고요함에 차 있었다.

야! 나는 말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필드 유리판에 손을 올려놓았다. 유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내 손의 온기가 하얗게 흐린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을 거기에 남겼다. 그녀는 겨우 잠에서 깬 것처럼 나에게 미소지었다. 그리운 미소였다. 나도 미소짓는다.

꽤 오랫동안 못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야. 그녀가 말했다. 나는 생각하는 척하면서 손가락을 꺾었다. 삼 년 정도이지 뭐, 금방 이야.

우리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잠시 침묵에 잠긴다. 커피숍에서라면 커피를 마시거나, 레이스 커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릴 장면이다.

자네 일을 자주 생각하지. 내가 말한다. 그리고 지독히 비참한 기분이 된다.

잠이 안 오는 밤에?

응, 잠이 안 오는 밤에. 나는 되풀이한다. 그녀는 쭉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춥지 않아? 하고 그녀가 물었다.

추워, 아주 추워.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신한테는 너무 추울 걸. 틀림없이.

그렇겠지, 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신다.

게임은 안 할 거야? 하고 그녀가 물었다.

안 해,라고 내가 대답한다.

왜?

165000,이라는 것이 내 베스트 스코어였어.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어. 내 베스트 스코어이기도 한 걸.

그것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거든, 하고 내가 말한다.

그녀는 침묵한다. 그리고 열 개의 보너스 라이트만이 천천히 위아래로 점멸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발밑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왜 왔어?

자네가 나를 불렀거든.

불렀다고? 그녀는 조금 망설이고 그리고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럴지도 몰라. 불렀는지도 모르겠어.

굉장히 찾아 헤맸다고.

고마워, 하고 그녀가 말했다. 뭔가 얘기해 줘.

여러 가지가 아주 변해 버렸어, 라고 내가 말했다. “네가 있었던 게임 센터는 올나이트 도넛 숍이 되어 버렸어. 지독히 맛없는 커피를 팔아.”

그렇게 맛없어?

옛날, 디즈니 동물 영화에서 죽어 가고 있었던 얼룩말이 꼭 그런 색의 흙탕물을 마시고 있었지.

그녀는 큭큭 웃었다. 멋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기분 나쁜 거리였어. 그녀가 진지하게 말한다. 모든 게 조잡하고 더럽고.......

그런 시대였거든.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어?

번역일 이지.

소설?

아니, 하고 내가 말한다. 나날의 거품 같은 것뿐 이야. 하나의 시궁창 물을 다른 시궁창으로 옮긴다. 그 뿐이야.

즐겁지 않아?

어떨까?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여자아이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쌍둥이하고 지내고 있어. 커피를 아주 맛있게 끓여.

그녀는 생긋 웃은 채, 한참 우주로 눈길을 주었다. 무언가 이상해, 모든 것이 진짜로 일어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아니, 정말로 일어났어. 다만 사라져 버렸을 뿐이지.

괴로워?

아니, 나는 고래를 흔들었다. 무에서 생겨난 것이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그 뿐이지, 뭐.

우리는 다시 한 번 침묵 속에 빠졌다. 우리들이 같이 나누고 있는 것은 훨씬 전에 죽어 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따뜻한 추억의 얼마인가는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계속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 다시 한 번 무의 소용돌이에 집어넣을 때까지의 찰나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을 것이다.

이제 가는 게 좋겠어, 라고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냉기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나는 몸서리치고 담배를 비벼 껐다.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 라고 그녀가 말했다.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건강하게 지내 줘.

고마워, 하고 내가 말했다. 안녕,

나는 핀볼의 열을 빠져나와 계단을 올라가 레버 스위치를 껐다. 공기가 빠지는 것처럼 핀볼의 불이 꺼지고, 완전한 침묵과 잠이 사방을 덮었다. 다시 한 번 창고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문을 닫을 동안의 긴 시간 내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택시를 집어타고 아파트에 돌아온 것은 한밤중 조금 전이었다. 쌍둥이는 침대 안에서 주간지의 크로스 워드를 거의 다 완성시키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지독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온몸에서 냉동된 닭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전부 세탁기에 집어넣고 뜨거운 목욕을 했다. 남들만큼의 의식을 찾기 위해 삼십 분 정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었지만, 그래도 몸속까지 스며든 냉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쌍둥이는 반침에서 가스 스토브를 꺼내서 불을 붙여 주었다. 십오분이 지나자 떨림은 멈추고, 한숨 돌리고 나서 깡통 어니언 수프를 데워서 먹었다.

“이젠 괜찮아.”라고 내가 말했다.

“정말?”

“아직 차가워.” 쌍둥이는 내 팔목을 잡고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금방 따뜻해질 거야.”

그리고 우리들은 침대에 기어 들어가 크로스 워드 퍼즐의 마지막 두 개를 완성시켰다. 하나는 옥새 송어 또 하나는 산책길이었다. 몸은 금방 데워졌고, 우리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깊은 잠에 떨어져 갔다. 나는 트로츠키와 네 마리 토나카이의 꿈을 꿨다. 네 마리의 토나카이는 모두 털실 양말을 신고 있었다. 지독히 추운 꿈이었다.

 

23

 

쥐는 이제 여자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녀의 방의 불빛을 바라보는 것도 그만두었다. 유리 창가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마치 촛불을 불어 끈 후에 흐르는 한 줄기 하얀 연기처럼 그의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어둠 속을 잠시 동안 떠돌고 그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어두운 침묵이 다가왔다. 침묵. 한 장 한 장 껍질을 벗겨 낸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쥐는 알 수가 없었다. 긍지?..... 그는 침대 위에서 몇 번이고 자기 양손을 바라본다. 아마도 긍지 없이 사람은 살아 나가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어두워. 너무나도 어둡다.

 

여자하고 헤어지는 것은 간단했다. 어느 금요일날 저녁 여자에게 전화 거는 것을 그만둔다. 그뿐이었다. 그녀는 한밤중까지 계속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몇 번인가 전화로 손이 가려는 것을 쥐어 참았다. 해드폰을 뒤집어쓰고 볼륨을 크게 해서 레코드를 계속 틀었다. 그녀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벨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열두시까지 기다리고 그녀는 단념하겠지. 그리고 얼굴을 씻고 이를 닦고, 침대에 들어가겠지. 그리고 전화는 틀림없이 내일 걸려 올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전기를 끄고 잔다. 토요일 아침에도 전화는 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유리창을 열고, 아침을 만들고, 화분에 물을 준다. 그리고 점심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단념하겠지. 거울을 향해서 머리에 브러시를 하면서, 몇 번인가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웃어 보인다.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될거였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의 시간을 쥐는 꼭꼭 블라인드를 내린 방안에서 벽에 걸린 전자 시계 바늘을 보면서 보냈다. 방안의 공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얕은 잠이 몇 번인가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간다.

시계 바늘은 이제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다. 어둠의 농담이 몇 번인가 되풀이될 뿐이다. 쥐는 자기 몸이 점점 실체를 잃고, 무게를 잃고, 감각을 잃어 가는 것을 견디었다. 몇 시간, 도대체 몇 시간이나 나는 이렇게 하고 있었던 것일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앞의 하얀 벽은 그가 숨쉬는 것에 맞추어서 천천히 흔들렸다. 공간이 일정한 밀도를 지니고, 그의 육체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는 포인트를 재서 쥐는 일어서고 샤워를 하고, 몽롱한 의식 속에서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몸을 닦고, 냉장고의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새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 들어가, 이제 끝났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깊은 잠이 왔다. 지독히 깊은 잠이었다.

 

24

 

“도시를 떠나기로 했어.”라고 쥐는 제이에게 말했다.

저녁 여섯시, 막 개점한 가게다 카운터는 왁스가 되어 있었고 가게 안의 재떨이에는 담배꽁초 한 개 없다. 술병은 깨끗이 닦여져서 라벨을 앞으로 해서 늘어서 있고, 단호하게 접힌 종이 냅킨이라든가, 다바스코 소스라든가, 소금병이 조그만 트레이에 정확히 담겨져 있다. 제이는 세 종류의 드레싱을 각각의 작은 그릇 속에서 섞고 있었다. 마늘 냄새가 가느다란 안개처럼 주위에 떠돌고 있다. 그런 식의 조금은 괜찮은 시간이었다.

쥐는 제이한테 빌린 손톱깎기로 손톱을 깎아 재떨이에 떨어뜨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가다니, 어디에 가는 건데?”

“목적은 없어. 모르는 거리로 가.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 좋겠어.”

제이는 깔대기를 사용해서 드레싱을 각각의 커다란 플라스크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 세 개의 병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타월로 손을 닦았다.

“거기에서 무얼 할 건데?”

“일하지.” 쥐는 왼쪽 손톱을 깎고 몇 번이고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에서는 안 되나?”

“안 돼.”라고 쥐가 말했다. “맥주가 마시고 싶은데.”

“내가 한턱 내지.”

“고맙게 받겠어.”

쥐는 얼음으로 식힌 잔에 맥주를 천천히 붓고, 단숨에 반을 마셨다. “왜 여기는 안 되다는 건지 묻지 않아?”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말이야.”

쥐는 웃고 나서 혀를 찼다. “이봐, 제이, 안 돼. 누구나가 그런 식으로 묻지도 않고 얘기하지도 않고 서로 이해하는 척해 봤자, 아무데도 도달하지 않아. 이런 것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야, 나는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그런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젠 돌아오지 않을 건가?”

“물론 언젠가는 돌아오지. 언젠가는 말이야. 도망가는 것도 아닌 걸, 뭐.”

쥐는 작은 접시에 땅콩의 주름투성이 껍데기를 소리를 내어 까고 재떨이에 버렸다. 잘 닦인 카운터의 나무판에 맥주의 하얀 이슬이 고인 것을 그는 종이 냅킨으로 닦았다.

“몇 시에 출발하는데?”

“내일, 모레, 모르겠어. 아마 이삼 일 중 하루겠지. 준비는 다 됐거든.”

“굉장히 갑작스런 얘기네.”

“응......, 당신한테도 여러 가지로 폐만 끼쳤지.”

“글세. 여러 가지가 있었지.” 제이는 진열장에 늘어놓은 잔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은 모두 꿈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이는 잠시 있다가 웃었다.

“그렇지. 가끔 나는 자네하고 스무 살이나 나이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단 말이야.”

쥐는 맥주의 나머지를 잔에 따라서 천천히 마셨다. 이렇게 천천히 맥주를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 병 더 마실래?”

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됐어. 이게 마지막 한 병이라는 생각으로 마신 거야. 여기에서 마시는 맥주로는 말이야.”

“이젠 안 올 건가?”

“그럴 생각이야. 마음이 아파지니까 말이야.”

제이가 웃었다. “또 언젠가 만나자.”

“이번에는 만나면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

“냄새로 알 수 있지.”

쥐는 깨끗해진 양쪽 손가락을 다시 한 번 천천히 훑어보고, 남은 땅콩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종이 냅킨으로 입을 닦고나서 자리를 떴다.

 

마치 어둠 가운데의 투명한 단층을 미끄러지듯이 바람은 소리도 없이 흘렀다. 바람은 머리 위의 나무들 가지를 희미하게 흔들고, 그 잎사귀를 규칙적으로 땅 위로 떨어뜨린다. 차 지붕 위에 떨어진 잎사귀는 작은 마른 소리를 내고 잠시 지붕 위를 방황하고 나서 프런트 글라스의 경사를 따라 펜더에 쌓였다.

공원 묘지 숲속에서 쥐는 혼자서, 모든 언어를 사실한 채 프런트 글라스의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의 몇 미터인가 전방에서 땅은 뚝 절단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어두운 하늘과 바다와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쥐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양손을 스티어링에 올려놓은 채 꼼짝도 않고 하늘의 한 점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불이 붙어 있지 않은 담배가 끼여 있었고, 그 끝은 공중에 몇 개인가의 복잡한, 그리고 뚯없는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제이에게 얘기해 버리고 난 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허탈감이 그를 휩쌌다. 간신히 몸을 한 군데로 모우고 있었던 여러 가지 의식의 흐름이 갑자기 각각의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 같기도 했다. 어디까지 가야 그 흐름이 다시 하나가 될는지 쥐는 알 수가 없었다. 언제인가는 망망한 바다에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두운 강의 흐름이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는지도 모른다. 이십오 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도 느껴졌다. 왜지? 라고 쥐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모르겠다. 질문은 좋았지만 대답은 없다. 좋은 질문에는 언제나 대답이 없다.

바람이 다시 얼만가 강해졌다. 그 바람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람이 피어오르게 한 약간의 훈훈함을 아주 먼 세계로 실어 갔고, 그리고 뒤에 남겨진 차가운 어둠 속에 무수한 별을 빛나게 했다. 쥐는 스티어링에서 손을 떼고, 잠시 입술 사이에서 담배를 굴리고, 생각난 듯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머리가 조금 아프다. 아프다고 하기보다는 양쪽 관자놀이를 찬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것 같은 기묘한 감촉이었다. 쥐는 머리를 흔들고,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어쨌든 끝난 거야.

그는 컴파트먼트에서 전국판 도로 지도를 끄집어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몇 개인가의 도시의 이름을 소리를 내어 차례대로 읽어보았다. 거의 다가 들은 적도 없는 작은 도시였다. 그런 도시가 도로를 따라 어디까지고 늘어서 있었다. 몇 페이진 가 읽은 후에 이 며칠 간의 피곤이 거대한 파도처럼 갑자기 그에게 닥쳐왔다. 그리고 혈액 가운데를 미지근한 덩어리가 천천히 돌았다.

졸렸다.

잠이 모든 것을 깨끗이 사라지게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들기만 한다면......

눈을 감았을 때, 귓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방파제를 치고, 콘크리트 호안 블록 사이를 바느질하듯이 미끌어져 가는 겨울 파도였다.

이것으로 이제는 아무한테도 설명하지 않아도 돼, 쥐는 생각했다. 그리고 바다 밑은 어떤 도시보다도 따뜻하고, 그리고 평온함과 고요함에 차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냐,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제는 아무것도.......

 

25

 

핀볼의 신음 소리는 나의 삶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사념들도 사라졌다. 물론 그것으로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처럼 ‘대단원’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말이 피폐해지고, 칼이 부러지고, 갑옷이 녹슬었을 때, 나는 강아지풀이 무성한 풀밭에 드러누워, 조용하게 바람의 소리를 듣자. 그리고 저수지 바닥이든 양계장의 냉동 창고든, 아무데도 좋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자.

나에게 있어서 이 한때의 에필로그는 비에 노출된 빨래 너는 곳 같인 극히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이다.

어느 날 쌍둥이는 슈퍼마켓에서 면봉을 한 상자 샀다. 그 상자에는 삼백 개의 면봉이 들어 있었다. 내가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마다 쌍둥이는 내 양쪽에 앉아서 양쪽 귀를 동시에 청소했다. 둘은 분명히 귀청소를 잘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맥주를 마시면서, 두 개의 면이 내는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귓속에서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귀를 청소하는 도중에 나는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양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내 소리가 들려?”라고 오른쪽이 말했다.

“아주 조금.”라고 내가 말했다. 내 소리가 코 뒤쪽에서 들린다.

“이 쪽은?”라고 왼쪽이 물었다.

“똑같아.”

“재채기 따위를 하니까 그렇지.”

“정말 바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꼭 볼링 레인 맨 끝에서 스플릿치의 일곱째 핀과 열 번째 핀이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물 마시며 나을까?”라고 하나가 물었다.

“설마.”하고 나는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그래도 쌍둥이는 나한테 양동이 한 개분의 물을 마시게 했다. 배가 괴로워졌을 뿐이었다. 귀는 아프지 않았으니깐, 재치기하는 순간에 귀지가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반침에서 회중 전등을 한개 끄집어내어 둘한테 조사시키게 했다. 둘은 바람구멍이라도 들여다보듯이 귀안에 빛을 비치고 몇 분이나 걸려서 조사했다.

“아무것도 없어.”

“먼지 하나 없는데.”

“그럼 왜 안 들리는 거야.”하고 나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수명이 끊어졌나 봐.”

“귀머거리가 된 거야.”

나는 두 사람에게 상관 안 하고 전화 번호부를 조사해서, 가장 가까운 이비인후과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소리는 상당히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 탓도 있어서 간호원이 조금은 동정해 준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얼마 동안 현관을 열어 둘 테니 곧 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서둘러서 옷을 입고 아파트를 나서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의사는 쉰 살 남짓 한 여의사로, 헝클어진 철조망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아주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합실 문을 열고, 손을 딱딱 쳐서 쌍둥이를 입을 다물게 하고 나서 나를 의자에 앉히고,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내가 설명을 마치자, 그녀는 이제 알았으니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 고 말했다. 그리고 바늘이 붙어 있지 않는 거대한 주사기 모양의 물건을 끄집어내서 거기에 엿색의 액체를 하나 가득 빨아 넣고 난 후, 나에게 블리크의 메가폰 같은 것을 주고 그것을 귀밑에 대게 했다. 주사기를 내 귓속에 들어가고, 엿색깔을 한 액체는 귓구멍 속에서 얼룩말 떼처럼 퉁긴 후에 귀에서 흘러나와서 메가폰 속에 떨어졌다. 그 짓을 세 번 되풀이 한 후 가는 면봉으로 귓속을 쑤셨다. 양쪽 귀에서 그 작업이 완료됐을 때, 나의 귀는 완전히 원상 회복했다.

“들리는데요.”라고 내가 말했다.

“귀지.”라고 그녀는 간결하게 말했다. 말 잇기의 계속같이 들렸다.

“하지만, 안 보였는데요.”

“구부러져 있으니까.”

“?”

“당신 귓구멍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구부러져 있다니 깐.”

그녀는 성냥갑 뒷면에 내 귓구멍 그림을 그려 줬다. 그것은 책상 모서리에 붙이는 보강용 금속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일 당신의 귀지가 이 모서리를 꺾어 버리면, 누가 물러도 되돌아오지 않아요.”

나는 으르렁거렸다. “어떡하면 됩니까?”

“어떡하다니......., 다만 귀를 청소할 때 주의만 하면 돼요. 주의.”

“귓구멍이 남보다 꾸부러져 있기 때문에, 뭔가 달리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습니까?”

“달리 미치는 영향?”

“예를 들어서......, 정신적으로.”

“없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십오분이나 길을 돌아서 골프장을 가로질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십일 번 홀의 도그 레그는 귓구멍을 연상시켰고, 깃발은 면봉을 생각나게 했다. 또 있다. 달에 걸쳐진 구름은 B52편대를 연상시켰고, 소복하게 울창한 서쪽 숲은 물고기 모습을 한 문진을 연상시켰고, 하늘의 별은 곰팡이가 파슬리 가루를 연상시켰고......, 이제 그만두자, 어쨌든 귀는 아주 예민하게 온 세상의 소리를 구별하고 있었다. 마치 세계가 한 장 베일을 벗어 던진 것처럼 느껴졌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저 멀리에서 밤새가 울고, 몇 킬러미터나 먼 곳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얘기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라고 또 한 사람이 얘기했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과거와 현재에 관해서는 ‘이대로’. 미래에 관해서는 ‘아마도’라고.

그러나 우리들이 걸어온 어둠을 뒤돌아보았을 때, 거기에 있는 거도 역시 불확실한 ‘아마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확실히 지각할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들의 몸을 다만 빠져나가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쌍둥이를 전송하러 가는 동안 내가 계속 생각한 것은 대개 그런 것이었다. 골프장을 빠져 나와서 두 정거장 앞의 버스 정거장까지 걸으면서 나는 쭉 잠자코 있었다. 일요일 오전 일곱시, 하늘은 끝없이 파랬다. 발밑의 잔디는 봄이 될 때까지의 임시적인 죽음에 대한 예감에 차 있었다. 얼마 있다 거기에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겠지. 그리고 맑은 아침 햇빛에 빛나겠지. 하얀색을 띤 잔디가 우리들 발밑에서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무얼 생각하고 있지?” 쌍둥이 중 하나가 물었다.

“아무것도.”라고 내가 말했다. 그녀들은 내가 준 스웨터를 입고, 종이 봉투에 넣은 트레이너 셔츠와 약간의 갈아입을 옷을 겨드랑이에 끌어안고 있었다.

“어디로 가?”라고 나는 물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우리는 벙커의 모래밭을 넘어 팔 번 홀의 곧바른 페어웨이를 건너, 노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서 내려갔다. 굉장히 많은 수의 참새들이 잔디 위라든가 철망 위에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하고 내가 말했다. “너희들이 없어지면 굉장히 쓸쓸해질 거야.”

“우리들도 마찬가지야.”

“쓸쓸해.”

“하지만 가잖아?”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돌아갈 곳은 있는 거야?”

“물론이야.”라고 하나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아.”하고 또 하나가 말했다.

우리들은 골프장 철망을 넘고 숲을 빠져 나와, 버스 정거장 벤치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다. 일요일 아침의 정거장은 굉장히 조용했고, 온화한 햇살이 차 있었다. 우리들은 그 햇살 속에서 말 잇기를 계속했다. 오 분 정도 돼서 버스가 오자 나는 둘에게 버스 요금을 주었다.

“또 어딘가에서 만나자.” 하고 내가 말했다.

“또 어딘가에서.”라고 하나가 말했다.

‘“또 어딘가에서.”라고 또 하나가 말했다.

그것은 마치 산울림처럼 내 마음속에서 얼마 동안 울리고 있었다.

버스 문이 딱 하고 닫히고 쌍둥이가 유리창으로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나는 혼자서 같은 길을 되돌아와, 가을 햇살이 넘치는 방에서 쌍둥이가 놓고 간 ‘러버 솔’을 듣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유리창 밖을 지나가는 11월의 일요일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비쳐 보일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11월의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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