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
1970.11.25
"있잖아,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어?"
"너를? 뭣 때문에 내가 널 죽여야만 하는 거지?"
"그저, 내가 깊이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날 죽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야. 나는 스물다섯 살까지 살 거야. 그리고 죽을 거야."
수요일 오후의 피크닉
신문을 보고 우연히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친구가 전화로 나에게 그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가 천천히 읽어 준 조간신문의 일단 기사는 꽤 평범한 내용이었다. 대학을 갓 나온 풋내기 기자가 연습 삼아 쓴 것 같은 서툰 문장이었다. 몇 월 며칠, 어딘가의 길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운전하는 트럭에 사람이 치였다. 그 사고를 낸 누군가는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로 조사 중이다. 그 친구가 읽어 준 기사는 잡지의 속표지에 실려 있는 짧은 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장례식은 어디서 할 것 같아?"하고 물어 보았다.
"글쎄, 모르지. 그런데 도대체 그 애한테 집 같은 게 있었을까?"하고 그는 대답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집은 있었다. 나는 그날 당장 경찰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에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어 장례식 일정을 물어 보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수고만 아끼지 않는다면 웬만한 일은 곧 알 수 있게 마련이다.
그녀의 집은 옛 부터 서민들이 모여 사는 번화한 거리에 있었다. 나는 도쿄(東京)가 상세히 그려진 구분 지도를 펴놓고, 그녀의 집 번지에 빨간 볼펜으로 표시를 했다. 지도에서 본 그 곳은 정말 서민적인 거리였다. 지하철과 국철, 그리고 노선버스가 균형을 잃은 거미줄처럼 뒤얽히고, 서로 겹치고, 개천이 몇 줄기 흐르고 있어 다닥다닥 붙은 길들이 멜론 껍질의 주름살처럼 지표에 달라붙어 있었다.
장례식 날, 나는 와세다(초아전)에서 시내 전철을 탔다. 종점과 가까운 역에서 내려 지도를 펼쳐 보았지만, 지도는 지구의 정도로밖에는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담배를 사며 길을 물어야만 했다. 그녀의 집은 갈색 판자로 울타리를 친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문을 들어서자, 왼쪽에 조금은 쓸모가 있을 법한 좁은 뜰이 있었다. 뜰 한구석에는 못쓰게 된 도자기 화로가 팽개쳐져 있었고, 그 화로 속에는 15센티미터나 빗물이 고여 있었다. 뜰의 흙은 검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가 열여섯 살 때 집을 뛰쳐나간 후 소식을 끊었던 탓도 있어, 장례식은 일가친척들만 조촐하게 치러졌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많은 친척이고, 서른을 갓 넘은 그녀의 오빠 같기도 하고 형부 같기도 한 사람이 장례식을 이끌어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50대 중반으로 왜소한 편이었는데, 검은 양복의 소매에 상장 을 두르고 문 옆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직후의 아스팔트 도로를 연상케 했다. 내가 돌아올 때 말없이 머리를 숙이자, 그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1969년 가을로 나는 스무 살, 그녀는 열일곱 살 이었다. 대학 근처에 작은 다방이 있었는데 나는 자주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그저 그런 곳이었지만, 거기에 가면 하드 록을 들으면서 아주 맛없는 커피를 마실 수는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책읽기에 빠져 있었다. 치열 교정기처럼 생긴 안경을 끼고 있었고, 손은 뼈가 앙상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녀에게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커피는 항상 식어 있었고, 재떨이에는 언제나 꽁초가 수북 했었다.
책의 제목만 바뀌었다. 어떤 때는 미키 스피레인이었고, 어떤 때는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였으며, 또 어떤 때에는 <긴즈버그 시집>이었다. 요컨대 책이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곳에 드나드는 학생들은 그녀에게 책을 빌려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옥수수라도 갉아 먹듯이 닥치는 대로 읽어 치웠다. 그때는 책을 빌려주고 싶어 하는 녀석들만 우글대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녀는 한 번도 책이 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어스, 스톤스, 버즈, 디퍼플, 무디블루스,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공기에는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금만 힘을 줘 걷어차기만 해도 웬만한 것은 맥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기도 했고, 그다지 신통치 않은 섹스도 했고, 결론 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책을 빌려주고 빌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엉망이었던 1960년대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야흐로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사망 기사의 스크랩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생각해 낼 수도 있지만, 이제 와서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뿐이다.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간혹 그녀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그들도 역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왜, 옛날에 말이야 누구하고도 자는 애 있었잖아. 이름이 뭐더라, 생각이 잘 안 나는군. 나도 몇 번 같이 잤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묘할 거야.
옛날 어느 곳에 누구하고도 자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물론 엄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그녀가 누구하고나 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녀 나름대로의 기준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바라보면,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와 잤다. 나는 꼭 한번 순수한 호기심에서 그녀에게 그 기준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다.
"글쎄" 그녀는 30초가량 생각에 잠겼다.
"물론 누구라도 상관없는 건 아니지. 싫다고 느낄 때도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결국 난 여러 종류의 삶을 알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몰라. 아니면, 내게 있어서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방식 같은, 뭐 그런 걸 말이야"
"함께 자는 것으로"
"응" 이번에는 내가 생각에 잠길 차례였다.
"그래서…….그래서 조금은 알았어?"
"조금은"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1969년 겨울부터 1970년 여름에 걸쳐서, 그녀와는 거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대학은 폐쇄를 되풀이하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그것과는 별도로 사소한 개인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1970년 가을에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 이미 손님들을 완전히 바뀌어 아는 얼굴이라고는 그녀 한 사람 정도였다. 여전히 하드록은 울리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긴장감이 감돌지는 않았다. 오로지 그녀와 맛없는 커피만이 1년 전 그대로였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옛날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대부분은 대학을 그만두었다. 한 사람은 자살했고, 한 사람은 행방을 감추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그녀는
"1년 동안 뭐하며 지냈어?"라고 내게 물었다.
"여러 가지지 뭐"라고 나는 대답했다.
"조금은 현명해졌어?"
"조금은."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와 잤다. 나는 그녀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른다. 누가 가르쳐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침대에서 그녀의 입을 통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집을(내친 김에 고등학교도) 뛰쳐나왔다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하루 종일 록 음악이 흐르는 다방의 의자에 앉아서 몇 잔이고 커피를 마시며, 끝없이 담배를 피워대고 책장을 넘기면서 커피 값과 담뱃값(당시의 우리에게는 상당한 금액이었다)을 내줄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대개의 경우 그 상대와 잤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 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서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 밤에 그녀는 미타가(삼경) 변두리에 있는 내 아파트를 찾아 왔었다. 그녀는 내가 만든 간단한 저녁을 먹고, 재떨이를 가득 채우고, FEN의 록 프로그램을 크게 틀어 놓고 들으면서 섹스를 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잡목림을 산책하면서 ICU(국제 기독교 대학)의 캠퍼스까지 걸어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라운지에서 연한 커피를 마시고, 날씨가 좋으면 캠퍼스의 잔디밭에 누워 뒹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걸 수요일의 피크닉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올 때마다, 진짜 피크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진짜 피크닉?"
"응,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잔디밭이 있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고······."
그녀는 잔디 위에 앉아 몇 개비나 성냥을 버리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해가 뜨고 다시 지고, 사람들이 왔다가 가버리고, 공기처럼 시간이 흘러가잖아. 왠지 피크닉 같지 않아?"
그때 나는 스물두 살을 몇 주일 앞둔 스물한 살이었다. 당분간 대학을 졸업할 가망은 없고, 그렇다 고해서 대학을 그만둘 만한 확실한 이유도 없을 때였다. 기묘하게 서로 얽혀 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온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나만이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970년 가을에는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서글펐고, 그리고 모든 것이 빠르게 바래져가는 것만 같았다. 태양의 햇살과 풀 냄새, 그리고 작은 빗소리조차도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야간열차에 탄 꿈을 꾸었다. 언제나 똑같은 꿈이었다. 담배 연기와 화장실 냄새와 사람들의 훈김으로 후텁지근한 야간 열차였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혼잡하고, 좌석에는 오래전에 누군가가 토한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의 역에 내렸다. 그곳은 인가의 불빛하나 보이지 않는, 역원의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고장이었다. 시계도 열차 시간표도 아무것도 없는, 그런 꿈이었다.
그런 시기에, 몇 번인가 고통스럽게 그녀를 만났던 것 같다. 그녀를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이제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내 자신에게 했던 정도로 그녀를 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나의 행동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면(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행동을 꽤 즐기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결국 그녀가 나에게서 찾던 것은 다정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분이 묘해지고 어쩌다 공중에 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짚은 것처럼 슬퍼진다. 나는 1970년 11월 25일의 그 기묘했던 오후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세찬 비에 떨어진 은행잎이, 잡목림 사이로 난 오솔길을 말라 버린 시내처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그 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낙엽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와 날카로운 새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느닷없이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나에게 물었다.
"별 거 아니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조금 앞질러 가다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웠다. 나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항상 기분 나쁜 꿈을 꾸는 거야?"
"자주 그래. 대개는 자동판매기에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는 꿈이지만 말이야."
그녀는 웃으며 내 무릎에 손을 얹어 놓았다가 치웠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
그녀는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운동화로 신중하게 밟아 껐다.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법인가 봐. 그렇게 생각 안 해?"
나는 "모르겠어."라고 대꾸했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두 마리 새가 지면으로부터 날아오르더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갔다. 우리는 한동안 새가 사라진 언저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마른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도형을 몇 개 그렸다.
"너와 함께 누워 있으면, 가끔 아주 슬퍼져."
"미안하게 생각해"라고 나는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더군다나 네가 나를 안고 있을 때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아. 내가······."
그녀는 거기서 갑자기 입을 다물고 천천히 땅바닥에 세 개의 평행선을 그었다.
"모르겠어." 나는 조금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특별히 마음을 닫고 있겠다는 생각은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 자신도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이야.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되도록 공평하게 파악하고 싶거든.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현실적이 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
"얼마만큼의 시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1년으로 끝날지도 모르고, 10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녀는 작은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버리고, 일어서서 코트에 붙은 마른풀을 털어 냈다. "저어, 10년이란 세월이 영원처럼 느껴지지 않아?"
나는 "글쎄"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숲을 빠져나가 ICU의 캠퍼스까지 걸어가 여느 때처럼 라운지에 앉아서 핫도그를 먹었다. 오후 두 시였는데, 라운지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미시마 유키오(삼오유기부)의 모습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비쳐지고 있었다. 볼륨이 고장 난 탓에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어쨌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핫도그를 다 먹고 나서, 커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한 학생이 의자에 올라가 볼륨 버튼을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단념하고 내려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를 원해"라고 나는 말했다.
"좋아."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파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는 소리 없이 울며 담요 속에서 가냘픈 어깨를 떨고 있었다. 나는 난로에 불을 붙이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 시였다. 하늘 한가운데에는 새하얀 달이 떠 있었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렸다가 물을 끓이고 티백으로 홍차를 만들어 둘이서 마셨다. 설탕도 레몬도 밀크도 넣지 않은 그냥 뜨거운 홍차였다. 그러고 나서 담배 두 개비에 불을 붙여서 한 개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뿜어내기를 연거푸 세 번하고 나더니 한바탕 기침을 했다.
"있잖아,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어?"라고 그녀가 물었다.
"너를?"
"응"
"왜 그런 걸 묻지?"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손끝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그저 그냥."
"없어"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뭣 때문에 내가 널 죽여야만 하는 거지?"
그녀는
"그러네."라고 대답하며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내가 깊이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날 죽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야."
"나는 사람을 죽일 타입은 아니야."
"그래?"
"아마도."
그녀는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남아 있던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스물다섯 살까지 살 거야. 그리고 죽을 거야."
1978년 7월, 그녀는 스물여섯 살로 죽었다.
☆☆☆ 제2장 ☆☆☆
1978.7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이미 상실된 사람이었다. 설사 그녀가 아직도 조금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는 그녀의 슬립 몇 장과 함께 내 앞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떤 사람은 잊혀지고, 어떤 사람은 모습을 감추며, 어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1. 열여섯 걸음 걷는 것에 대하여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칙 하는 컴푸레서 소리를 내며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의식의 단편을 그러모은 다음 문을 향해 아파트의 복도를 열여섯 걸음 걸었다. 눈을 감은 채 정확히 열여섯 걸음, 그 이 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위스키 덕분에 머릿속은 닳아빠진 나사처럼 흐리멍덩했고, 입안은 담배의 타르 냄새로 가득했다.
아무리 취했더라도 눈을 감은 채 자로 선을 그은 것처럼 똑바로 열여섯 걸음을 걸을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의미 없는 자기 훈련 덕분이다. 취할 때마다 등줄기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고, 아침 공기와 콘크리트 복도의 냄새를 한껏 폐에 들이마신다. 그러고 나서 눈을 감고 위스키의 안개 속을 똑바로 열여섯 걸음 걷는 것이다.
그 열여섯 걸음의 세계에서, 나는 '가장 예의바른 술주정꾼'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있다. 그건 간단한 일이다. 취했다는 사실을 사실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도 '그렇지만'도 '다만'도 '그래도'도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나는 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장 예의바른 술주정꾼이 된다. 가장 일찍 일어나는 찌르레기가 되고, 가장 마지막으로 철교를 건너는 유개 화차가 된다.
5·6·7······.
여덟 번째에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뜨고 심호흡을 한다. 가벼운 이명이 일었다. 녹슨 철조망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닷바람과 같은 이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다를 보지 못했다.
7월 24일, 오전 여섯 시 삼십 분. 바다를 보기에는 이상적인 계절이고, 이상적인 시간이다. 아직 모래사장을 더럽힌 사람은 없다. 파도치는 해변 가에는 바닷새의 발자국만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진 침엽수의 나뭇잎처럼 흩어져 있다.
바다라.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바다에 대한 건 그만 잊어버리자. 그런 건 아주 옛날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열여섯 걸음을 걷고 멈춰 서서 눈을 떠보니, 나는 언제나처럼 정확하게 문의 손잡이 앞에 서 있었다. 우편함에서 이틀 치분의 신문과 두 통의 편지를 꺼내서 옆구리에 낀다. 그리고 마치 미로(迷路)와 같은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 그것을 손에 든 채로 차가운 철문에 잠깐 이마를 댔다. 귀의 뒤쪽에서 짤그랑 하는 작은 소리가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이 솜처럼 알코올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정상인 것은 의식뿐이다.
제기랄.
문을 3분의 1쯤 열고 살짝 미끄러지듯이 들어가 문을 닫는다. 현관은 아주 조용했다. 필요 이상으로 고요했다.
그 다음 나는 발밑의 빨간 구두를 발견했다. 눈에 익은 빨간 구두였다. 그것은 흙투성이 테니스 화와 싸구려 비치 샌들 사이에 끼여, 철지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보였다. 구두 위에는 미세한 먼지와 같은 침묵이 떠 있었다. 그녀는 부엌의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두 팔 위에 이마를 얹고, 쭉 뻗은 머리로 옆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햇볕에 타지 않은 흰 목덜미가 보였다. 처음 보는 무늬 있는 원피스의 어깻죽지 사이로 브래지어 끈이 약간 들여다보였다.
내가 웃옷을 벗고, 검은 넥타이를 풀고, 손목시계를 푸는 동안, 그녀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등을 보고 있으려니 옛날 일이 생각났다. 그녀와 만나기 이전의 일말이다.
나는 "왔어?"
하고 말을 걸어 보았는데, 도무지 내 목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먼데에서 일부러 운반되어 온 목소리 같았다. 예상대로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도 보였고, 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고, 죽어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손가락 끝으로 눈을 눌렀다. 선명한 햇살이 테이블을 가르고 있었다. 그림자에는 색깔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시들어 버린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었다. 창 밖에서는 누군가 길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아스팔트길에 물을 뿌리는 소리가 났고, 아스팔트길에 물을 뿌리는 냄새가 났다.
"커피라도 마시지 않을래?"
역시 대답은 없었다.
나는 대답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일어나 부엌에서 2인분의 커피콩을 갈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켰다. 커피콩을 다 갈고 난 다음에야 사실은 아이스티가 마시고 싶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언제나 지나고 나서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 내곤 한다.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는 그야말로 아침에 어울리는 잔잔한 팝송이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그런 노래를 듣고 있자니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와 노래 제목만이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열 살을 더 먹었을 뿐이다.
주전자의 물이 다 끓은 걸 확인하고 가스 불을 끄고는 30초 동안 식힌 다음 커피 가루 위에 부었다. 가루가 뜨거운 물을 빨아들일 만큼 빨아들이고 나서,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자 따뜻한 향기가 방안 가득 퍼졌다. 밖에서는 벌써 매미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있었던 거야?"
나는 주전자를 손에 든 채 그렇게 물어 보았다.
테이블 위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주 약간 흔들렸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군."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주전자의 김과 강한 햇살 때문에 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싱크대 위의 창을 닫고 에어컨디셔너의 스위치를 켠 다음, 테이블 위에 커피 잔 두 개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마셔"라고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는 조금씩 본래의 내 목소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
"마시는 게 좋을 거야."
족히 30초 정도가 지나고 나서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균일한 동작으로 테이블에서 얼굴을 들더니 그대로 시든 화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는 머리카락이 젖은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희미하고 촉촉한 기운이 그녀의 주의를 오로라처럼 감돌았다.
"신경 쓰지 말아요. 울 생각은 없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크리넥스 상자를 내밀자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코를 푼 다음, 뺨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성가시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치웠다.
"사실은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나갈 생각이었어요. 당신과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요. 이젠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아졌을 뿐이에요. 그래도 곧 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어쨌든 커피나 마시라고."
나는 라디오의 교통 정보를 들으면서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가위로 두 통의 편지를 개봉했다. 한 통은 가구점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기간 중에 가구를 사면 전부 20퍼센트 할인이 된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나머지 한 통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상대방에게서 온 읽고 싶지도 않는 편지였다.
나는 두통의 편지를 한꺼번에 뭉쳐서 발밑의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먹다 남은 치즈 크래커를 먹었다. 그녀는 추위를 참고 있다는 듯이 두 손으로는 커피 잔을 감싸고 입술은 커피 잔 가장자리에 가볍게 댄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냉장고에 샐러드가 있어요."
"샐러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토마토와 강낭콩. 그것밖에 없더군요. 오이는 상한 것 같아서 버렸어요."
"알았어."
나는 냉장고에서 샐러드가 담겨 있는 푸른색 오키나와(아엄) 유리 접시를 꺼내, 병 밑바닥에 3밀리미터 가량 남아 있던 드레싱을 병이 완전히 빌 때까지 모조리 끼얹었다. 토마토와 강낭콩은 그림자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래커에서도 커피에서도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아침햇살 탓일 게다. 아침햇살이 모든 걸 분해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전혀 본 기억이 없는 종이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담배 끝이 바지직 하고 마른 소리를 냈고, 보랏빛 연기는 아침햇살 속에 기하학적 무늬를 그렸다.
"장례식이 있었어. 식이 끝난 후에 신주쿠(新宿)로 나가 줄곧 혼자서 마셨어."
고양이가 어디선가 와서 하품을 길게 한 다음, 그녀의 무릎 위에 사뿐히 올라앉았다. 그녀는 고양이의 귀 뒤쪽을 몇 번 긁어 주었다.
"설명 안 해도 돼요. 이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설명하는 게 아니야, 그저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브래지어 끈을 원피스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언젠가 사진에서 본 바다 밑에 가라앉아 버린 거리가 떠올랐다.
"옛날에 좀 알던 사람이었어,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요?"
고양이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담뱃불 끝은 바라보고 있었다.
"왜 죽었는데요?"
"교통사고야. 뼈가 열세 개나 부러졌다나."
"여자?"
"응."
일곱 시 뉴스와 교통 정보가 끝나고, 라디오에서는 다시 가벼운 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 잔을 접시 위에 올려놓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어, 내가 죽어도 그렇게 술을 마실 거예요?"
"술을 마신 것과 장례식은 관계없다고. 관계있었던 건 처음 한두 잔 정도겠지."
밖에서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무더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싱크대 위의 창문으로 고층 빌딩들이 보였는데, 여느 때보다도 훨씬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시원한 거라도 마시겠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차가워진 캔 콜라를 꺼내, 유리잔에 따르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하고나 자는 애였어"라고 나는 말했다. 마치
"고인은 누구와도 자는 여자였습니다."하는 조사(弔辭) 같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라고 그녀는 물었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어쨌든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였단 말예요?"
"그렇다니까."
"하지만 당신하고는 달랐겠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특별한 여운이 있었다. 나는 샐러드 접시에서 얼굴을 들고, 시들어 버린 화분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냥요"라고 대답했다.
"당신이란 사람, 그런 타입이잖아요."
"그런 타입?"
"당신에겐 어딘가, 그런 구석이 있다고요. 모래시계나 마찬가지죠. 모래가 다 떨어지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와서 뒤집어 놓고 가거든요."
"그런가?"
그녀의 입술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남은 짐을 가지러 왔어요. 겨울 코트, 모자, 그런 것들을요. 골판지 상자에 정리해 두었으니까, 한가할 때 운송 센터까지 날라다 줄래요?"
"집까지 갖다 줄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오는 것 싫어요. 아시겠어요?"
하긴 그 말이 맞다. 나는 엉뚱한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주소는 알죠?"
"알아."
"볼일은 이것뿐이에요. 너무 오래 있어서 미안해요."
"서류는 그거면 다되는 건가?"
"네, 다 끝났어요."
"꽤 간단하군. 성가신 일이 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람은 모두 그런 줄 알아요. 하지만 일단 끝나 버리고 나면, 사실은 정말 간단하다고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한 번 고양이 머리를 긁어 주었다.
"한 번만 더 이혼을 하면 베테랑이 되겠네."
고양이는 눈을 감고 작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그녀의 팔에 살며시 고개를 올려놓았다. 나는 커피 잔과 샐러드 접시를 싱크대에 처넣은 다음 비대신 청구서로 크래커 가루를 한군데로 모았다. 햇빛 때문에 눈 속이 따끔거렸다.
"자질구레한 것은 당신 책상 위의 메모지에 전부 적어 놓았어요. 여러 가지 서류가 있는 곳, 쓰레기 수거일, 그런 것 말이에요. 모르는 게 있으면 전화하세요."
"고마워"
"아이를 원했나요?"
"아니. 아이 따위 원하지 않아"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꽤나 망설였다고요. 하지만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잘 된 거예요. 만약에 아이가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이가 있어도 이혼하는 부부는 얼마든지 있어."
"그래요"라고 그녀는 대꾸하고는 내 라이터를 잠깐 만지작거렸다.
"당신을 지금도 좋아해요. 하지만 반드시 그런 문제만은 아닌가 봐요. 그건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어요."
2. 그녀의 소멸・사진의 소멸・슬립의 소멸
그녀가 돌아간 후 나는 캔 콜라를 하나 더 마시고 나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면도도 했다. 비누도 샴푸도 세이빙 크림도, 모든 게 떨어져가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로션을 바르고, 귀를 후볐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남은 커피를 다시 데웠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이제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작은 아이고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의 그림에 나옴 직한 낯선 거리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오랫동안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꼬박 스물네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것에 비해서는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나른했지만, 머리만은 숙달된 수생 동물처럼 마구 얽힌 의식의 수로를 목적도 없이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는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오래 전에 읽었던 미국 소설이 생각났다. 아내가 가출하자 남편이 식당의 맞은편 의자에 아내의 슬립을 몇 달이나 걸어 둔다는 이야기였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시들어 버린 제라늄 화분을 놓는 것보다는 훨씬 멋진 일인 것 같다. 고양이도 그녀의 물건이 있으면 조금은 안정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침실에 있는 그녀의 서랍을 차례로 열어 보았지만 전부 텅텅 비어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좀먹은 낡은 머플러 한 장과 옷걸이 세 개, 방충제를 싼 봉지뿐이었다. 그녀는 남김없이 모조리 가져 가버린 것이다.
욕실에 잡다하게 널려 있던 자질구레한 화장품, 염색 용구, 칫솔, 헤어드라이어, 영문 모를 약, 생리용품, 부츠부터 샌들, 슬리퍼에 이르는 모든 신발, 모자 상자, 서랍에 하나 가득 들어 있던 액세서리, 핸드백, 숄더백, 슈트케이스, 지갑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속옷과 양말, 편지, 그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문마저도 지워 놓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장과 레코드 선반의 3분의 1가량이 비어 있었다. 그녀가 직접 샀거나, 내가 그녀에게 사준 책이나 레코드였다.
앨범을 펴보니 그녀가 찍혀 있는 사진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은 그녀가 있던 자리가 정확히 오려져 있어, 나만이 남아 있었다. 나 혼자 찍은 사진과 풍경이나 동물을 찍은 사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 권의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은 완벽하게 수정된 과거였다. 나는 늘 혼자였고, 그 사이사이에 산과 강, 사슴, 그리고 고양이 사진이 있었다. 마치 태어났을 때도 혼자였고 계속 외톨이였으며, 앞으로도 외톨이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앨범을 덮고, 담배를 두 개비 피웠다.
슬립 하나쯤 남겨 두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물론 그녀의 문제고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나는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녀가 의도했던 것처럼 애당초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억지로라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그녀의 슬립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재떨이를 물에 담그고 에어컨디셔너와 라디오의 스위치를 끈 다음, 다시 한 번 그녀의 슬립에 대해 생각하고 나서 단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이혼에 동의하고 그녀가 아파트를 나가 버린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에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흐릿하여 실체가 없는, 미지근한 젤리와도 같은 한 달이었다. 뭔가가 변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굽고, 일하러 나가고, 밖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두세 잔쯤 마시며, 집에 돌아와서 한 시간 가량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불을 끄고 잤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일을 하는 대신 아침부터 몇 군데의 극장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혼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책을 읽다가 잤다. 마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매일 달력의 숫자를 새까만 칠을 해나가듯, 그런 식으로 한 달을 지내 왔다.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일어나 버린 일이다. 우리가 지난 4년 동안 아무리 잘 지내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는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사진만 사라진 앨범과 똑같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내 친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가버렸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그리고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 그녀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그녀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그건 당신 자신의 문제야"라고 나는 말했었다.
6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녀가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캔 맥주의 고리를 손가락에 끼고 장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여유 있는 말투로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에요?"라고 물었다.
"어떻게 되든 좋다는 건 아내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한참 후에 그녀는
"사실은 당산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럼 헤어지지 않으면 되잖아"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도 이제는 아무데도 갈 수 없어요."
그녀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몇 달 후면 서른이 되고 그녀는 스물여섯이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일의 크기에 비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쌓아 온 일 따위는 정말로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또는 제로였다. 우리는 마치 무위도식하며 저축해 놓은 돈을 탕진하듯이 지난 4년 동안 살아온 것이다.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그녀는 나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사회적 부적합자고 내가 사회적 적합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비교적 잘해 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대로 계속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뭔가가 무너졌다.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우리는 평온하고 기나긴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이미 상실된 사람이었다. 설사 그녀가 아직도 조금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우리는 서로의 역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든 구원할 길은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그녀의 슬립 몇 장과 함께 내 앞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떤 사람은 잊혀지고, 어떤 사람은 모습을 감추며, 어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7월 24일, 오전 8시 25분
나는 디지털시계의 네 개의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 잠들었다.
☆☆☆ 제3장 ☆☆☆
1978.9
여름도 끝나가는 9월의 오후. 나는 일을 쉬고 침대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줄곧 고래의 페니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바다는 짙은 남빛이었고, 거친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천장은 높고, 전시실 안에는 나 말고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었다. 고래의 페니스는 고래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페니스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1. 고래의 페니스・세 가지 직업을 가진 여자
여자와 자는 것을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요양 행위로서 즐기는 섹스가 있고,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즐기는 섹스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요양을 위한 섹스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섹스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자기 요양 행위였던 섹스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섹스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뭐랄까, 우리의 성생활은 고래의 성생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고래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성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명제다. 여렸을 때 집에서 자전거로 30분가량 걸리는 곳에 수족관이 있었다. 수족관은 언제나 섬뜩한 수족관적 침묵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서, 가끔 어딘가에서 찰싹 착싹 물 튀기는 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어두컴컴한 복도의 모퉁이에 반어 인(半魚人)이라도 숨을 죽이고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다랑어 떼가 거대한 풀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용상어는 좁은 수로(水路)를 거슬러 올라가며, 피라니아는 고깃덩어리를 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전기뱀장어는 단작스러운 꼬마전구를 깜빡이고 있었다.
수족관에는 무수히 많은 물고기가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서로 다른 이름과 서로 다른 비늘과 서로 다른 아가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 지구상에 그처럼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존재해야만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수족관에 고래는 없었다. 고래는 너무나 커서 수족관을 부숴 하나의 수조(水槽)를 만든다 해도, 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수족관에는 고래의 페니스가 있었다. 말하자면 대용품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시절 내내 진짜 고래 대신에 고래의 페니스를 바라보았다. 섬뜩한 수족관 같은 통로를 걸어 다니는 일에 싫증이 나면,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천장이 높은 전시실의 소파에 앉아 고래의 페니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몇 시간씩 보내곤 했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바싹 마른 작은 야자나무처럼 보였고, 어떤 때에는 거대한 옥수수처럼도 보였다. 만약 거기에 '고래의 생식기·수컷'이라는 팻말이 없었다면, 아마 아무도 그것이 고래의 페니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남극해(南極海)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에서 발굴한 유물과도 같은 운치가 있었다. 그것은 내 페니스와도 달랐고, 내가 그때가지 봤던 어떤 페니스와도 달랐다. 그리고 거기에는 잘라낸 페니스 특유의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까지 감돌았다.
내가 처음으로 여자아이와 성교를 한 뒤에 머리에 떠올렸던 것도, 그 거대한 고래의 페니스였다. 나는 그것이 어떤 운명을 겪고 어떤 경위를 거쳐서 수족관의 휑뎅그렁한 전시실로 오게 됐는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거기에는 구원 같은 것은 전혀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모든 일에 절망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고래가 아니다 라고.
나는 잠자리에 누워 새로 사귄 여자 친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고래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족관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갈 무렵의 수족관이었다. 수조의 유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나는 두툼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전시실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푸르스름한 기미가 감도는 짙은 잿빛이었고, 끊임없이 밀려왔다. 잘게 부서지는 하얀 파도는 여자아이들이 입는 원피스의 하얀 레이스 칼라를 연상케 했다.
"뭘 생각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옛날 일"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스물한 살로, 호리호리한 매력적인 몸매와 마력적인 만큼 완벽한 모양의 두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출판사의 아르바이트 교정원이면서 귀만 전문적으로 찍는 광고 모델이었고, 품위 있는 집안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조그만 클럽에 속해 있는 콜걸이기도 했다. 그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 그녀의 본업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어떤 게 본래의 모습인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귀 전문 모델로서의 그녀가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녀도 시인했다. 그렇지만 귀 전문 광고 모델이 활약할 수 있는 분야는 극히 한정되어 있고, 모델로서의 지위로 개런티도 아주 형편없이 낮았다. 대개의 광고 대행업자나 카메라맨, 메이크업 담당자, 잡지 기자는 그녀를 단지 '귀의 소유자'로 취급했다. 귀 이외의 그녀의 육체나 정신은 완전히 묵살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고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귀는 내 자신이고, 나는 귀거든요"
그녀는 교정원으로서나 콜걸로서 일을 할 때에는 한 순간일지라도 절대로 귀를 남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진짜 내가 아니니까요"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녀가 속해 있는 콜걸 클럽의 사무실(일단은 탤런트 클럽이라는 명목으로 되어 있다)은 아카사카(赤坂)에 있었는데, 모두에게 미세스 X라고 불리는 경영자는 백발의 영국 여자였다. 그녀는 무려 30년 동안이나 일본에 살았기에,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대부분의 기본적인 한자는 읽을 수 있었다.
미세스 X는 콜걸 클럽에서 5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여성전문 영어회화 강좌를 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집안이 꽤 괜찮아 보이는 여자아이들을 가려내 콜걸 클럽 쪽으로 스카우트했다. 반대로 콜걸 중에서 몇 명이 영어회화 교실에 다니기도 했다. 물론 그녀들은 수업료를 조금씩 면제받았다. 미세스 X는 콜걸들을 '디어'라 불렀다. 그녀가 '디어'라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봄날 오후와 같은 부드러운 여운이 깃들어 있었다.
"깔끔한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입고 자야 해, 디어. 팬티스타킹은 안 돼요"라든가
"너는 홍차에 크림을 넣었었지, 디어?"
하는 식이었다. 고객은 철저하게 파악되어 있었는데, 고객의 대부분은 40대와 50대의 유복한 사업가들이었다. 3분의 2가 외국인이고,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미세스 X는 정치가와 노인, 성격 이상자와 가난뱅이는 싫어했다.
나의 새 여자 친구는 한 다스쯤 되는 미인만 모인 콜걸들 가운데서는 가장 볼품이 없었으며, 옷차림도 평범했다. 사실 귀를 가린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밖에는 주지 못했다. 미세스 X가 왜 그녀에게 눈독을 들여 스카우트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평범함 가운데의 특별한 매력을 인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저 평범한 아이가 한 사람쯤 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세스 X의 의도는 적중해, 그녀에게도 몇 사람 확실한 고객이 생기게 되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두 번 평범한 옷을 입고, 평범한 화장을 하고, 평범한 속옷을 입고, 평범한 비누 냄새를 풍기며 힐튼이나 오쿠라나 프린스 같은 호텔에 가서 남자와 자고, 한 달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었다. 그 이외의 밤의 절반을 그녀는 돈을 받지 않고 나와 잠자리를 같이했다. 나는 그녀가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지내는지는 몰랐다.
출판사 아르바이트 교정원으로서의 그녀의 생활은 더욱 평범했다. 그녀는 일주일에 사흘만 간다(神田)의 작은 빌딩 3층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교정도 보고, 차도 끓이고, 지우개를 사러 계단을 내려가기도(엘리베이터가 없으므로) 했다. 그녀는 그 회사에서 유일한 젊은 독신 여성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희롱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장소와 상황에 따라 빛을 발하기도 하고 발하지 않기도 했다. 내가 그녀를(혹은 그녀의 귀를) 우연히 만난 것은 아내와 헤어진 직후인 8월 초였다. 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의 광고 카피 하청 일을 하고 있어서, 그 회사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귀와 대면하게 되었다.
광고 대리점의 연출가는 책상 위에 기획서와 확대한 흑백 사진 몇 장을 놓고, 일주일 내에 이 사진을 붙일 헤드 카피를 세 개정도 생각해 달라고 했다. 석장의 사진은 모두 거대한 귀를 찍은 것이었다.
귀?
"나는 어째서 귀지요?"라고 물었다.
"알게 뭐람. 어쨌든 귀야. 자네는 일주일 동안 귀에 대해서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런 연유로 해서 나는 일주일 동안, 귀를 찍은 사진만을 바라보며 지냈다. 책상 앞의 벽에 셀로판테이프로 그 석 장의 거대한 귀를 찍은 사진을 붙여 놓고,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그걸 바라보았다. 샌드위치를 먹거나 손톱을 자르면서도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만에 그럭저럭 일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후에도 귀를 찍은 사진을 벽에 붙여 두었다. 떼기가 귀찮았던 탓도 있었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 나의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 버린 탓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진을 떼어 서랍 속 깊숙이 처넣어 버리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 귀가 모든 면에서 나를 매료시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모양을 한 귀였다. 100퍼센트 완벽한 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확대된 인체의 일부(물론 성기도 포함해서)에 그렇게 강하게 이끌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뭔가 운명적인 거대한 소용돌이와 같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어떤 커브는 모든 상상을 초월한 대담함으로 화면을 단숨에 가로지르고, 어떤 커브는 비밀스런 세심함으로 한 무리의 작은 음영을 만들어 내며, 어떤 커브는 고대 벽화처럼 무수한 전설을 그려내고 있었다. 귓불의 매끄러움은 온갖 곡선을 초월하고, 그 도톰한 살은 모든 생명을 능가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후 그 사진을 찍은 카메라맨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귀의 주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건 또 왜?"라고 카메라맨은 물었다.
"흥미가 있어서 그래. 굉장히 멋진 귀거든."
"글쎄 그야, 확실히 귀는 ······. 하지만 인물은 그다지 보잘것없는 아이라고. 젊은 애와 데이트하고 싶다면, 일전에 찍은 수영복 모델을 소개해 줄게." 카메라맨은 우물우물하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마워" 하며 전화를 끊었다.
두 시, 여섯 시, 열 시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바쁘게 인생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이튿날 아침 열 시였다. 나는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나서 지난번의 광고 건으로 이야기가 좀 있는데,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일은 벌써 끝났다고 들었는데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일은 끝났지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약간 당황한 모양이었으나,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이튿날 저녁에 아오야마(靑山) 거리에 있는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이제까지 가본 적이 있는 집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프랑스 요리 전문점에 전화를 걸어 예약했다. 그리고 새 셔츠를 꺼내 놓고, 시간을 들여서 넥타이를 골랐으며, 아직 두 번밖에 입지 않은 웃옷을 입었다.
그녀는 카메라맨이 충고해 준 대로 그다지 신통치 않은 여자였다. 옷차림도 얼굴 생김새도 평범해서 이류 여자 대학의 합창부 부원처럼 보였다. 그러나 물론, 나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녀가 늘어뜨린 머리카락 속에 귀를 완전히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한 것이다.
"귀를 가리고 있군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네"라고 그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예정보다 조금 일찌감치 도착한 탓에 우리가 디너 타임의 첫 손님이었다. 조명을 낮춘 다음 웨이터가 기다란 성냥을 그어 빨간 초에 불을 붙이며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헤드 웨이터가 예리한 눈으로 냅킨과 식기와 접시의 세팅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있었다.
오늬무늬 모양으로 짜 맞춘 떡갈나무 마룻바닥은 깨끗이 닦여 있어, 웨이터의 구두창이 뚜벅뚜벅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웨이터의 구두는 내가 신은 구두보다도 훨씬 비싸 보였다. 화병의 꽃은 새로 꽂은 것이었고, 새하얀 벽에는 한 눈에 진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현대적인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나는 포도주 리스트를 보고 되도록 담백한 백포도주를 고르고, 오르되브르(스프가 나오기 전에 간단하게 먹는 음식. 전채)로 오리고기 파이와 도미의 테린느와 아귀(바닷물고기의 하나) 간의 사와 크림을 시켰다. 그녀는 메뉴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바다거북 수프와 그린 샐러드와 혀 가자미 무스를 주문하고, 나는 섬게 수프와 파슬리 맛이 나는 송아지 고기구이와 토마토 샐러드를 주문했다. 내 반 달치 식비가 날아가 버릴 판이었다.
"아주 멋진 집인데요. 자주 오시나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일 관계로 가끔 올 뿐이죠. 혼자일 때는 레스토랑 같은 데보다는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적당히 만든 걸 먹는 편이 성미에 맞거든요. 그게 편해요. 쓸데없이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바에서는 보통 뭘 드세요?"
"여러 가지지만, 글쎄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자주 먹어요."
"오믈렛과 샌드위치"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
"바에서 매일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먹는 거예요?"
"매일은 아니고, 사흘에 한 번은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지요."
"그럼 사흘에 이틀은 바에서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먹는군요."
나는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왜 오믈렛과 샌드위치죠?"
"괜찮은 바는 맛있는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내놓는 법이거든요."
그녀는 "그래요?"하고 대꾸했다.
"별난 분이네요."
"그렇지 않아요"라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식탁위의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만 바라보았다.
"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셨지요?"라고 그녀가 유도하듯이 물었다.
"어제도 말했듯이, 일은 완전히 끝났어요. 문제도 없고, 그러니까 할 이야기는 없어요."
그녀는 핸드백 안에 있는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박하담배를 꺼내 레스토랑에 있던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그래서요?' 하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 헤드 웨이터가 확신에 찬 구둣발 소리를 내며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외아들의 사진이라도 내보이듯이 생긋 미소 지으며 포도주의 라벨을 나에게 보여 주고, 내가 끄덕이자 기분 좋은 작은 소리를 내며 마개를 딴 다음 조금씩 따라 주었다. 식비가 응축된 맛이 났다.
헤드 웨이터가 물러가자 번갈아서 웨이터 둘이 오더니 테이블에 세 개의 큰 접시와 두 개의 덜어 먹는 작은 접시를 놓았다. 웨이터가 가고 나자 우리는 다시 단둘이 되었다.
"꼭 당신의 귀를 보고 싶었어요."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파이와 아귀 간을 접시에 덜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실례가 됐나요?"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맛있는 프랑스 요리는 실례가 되지 않아요."
"귀에 대한 이야기는 실례인가요?"
"그렇지도 않아요, 이야기하는 각도에 따라서는 요."
"당신이 좋아하는 각도에서 이야기하죠."
그녀는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요. 그게 가장 좋아하는 각도니까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포도주를 마시며 식사를 계속했다.
"내가 모퉁이를 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누군가는 벌써 다음 모퉁이를 돌고 있다. 그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하얀 옷자락이 언뜻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하얀 색만이 강렬하게 새겨져서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느낌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의 귀에서 느끼는 건, 바로 그런 느낌이에요."
우리는 다시 묵묵히 식사를 했다. 나는 그녀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내 잔에도 따랐다.
"그런 정경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니고, 그런 느낌이 드는 거지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맞아요."
"이제까지 그런 걸 느껴 본 적 있어요?"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내 귀 탓이라는 거지요?"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하는 건 아니에요. 하기는 확신 같은 걸 가질 수도 없지요. 귀의 생김새가 누군가에게 항상 어떤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얘긴 들은 적도 없으니까요."
"파라 포세트 메이저스의 코를 볼 때마다 재채기가 나는 사람을 알아요. 재채기란 그런 정신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나 봐요. 일단 원인과 결과가 결부되어 버리면 좀처럼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거든요."
나는 "파라 포스 메이저스의 코에 대한 건 잘 모르지만"하고 말을 꺼내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고 나서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를 잊어버렸다.
"그것과는 조금 다르단 말이지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네, 그것과는 조금 달라요"라고 내가 대답했다.
"내가 받는 느낌은 굉장히 막연하고, 게다가 한결같거든요."
나는 양손을 1미터 가량 벌렸다가 5센티미터로 좁혔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데요."
"막연한 동기에 입각한, 응축된 현상."
"바로 그거예요"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내 일곱 배쯤 머리가 좋군요."
"통신 교육을 받았거든요."
"통신 교육?"
"그래요, 심리학 통신 교육."
우리는 마지막 하나 남은 파이를 나눠 먹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를 또 잊어버렸다.
"당신은 내 귀와 그런 당신의 감정의 상관관계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요. 다시 말해서 당신의 귀 자체가 직접 나에게 감동을 주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뭔가가 당신의 귀를 매개로 나에게 감동을 주는 건지 도저히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하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살짝 어깨를 움직였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기분 좋은 것인가요, 아니면 불쾌한 것인가요?"
그녀는 두 손으로 포도주 잔을 감싼 채 잠깐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좀 더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묘사력도 부족하고"라고 내가 대꾸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당신이 말하는 내용을 대강 알아들었으니까요."
"그럼 난 어떻게 할까요?"
그녀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다섯 개의 빈 접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멸망한 행성 군처럼 보였다.
긴 침묵을 깨고
"이봐요"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당신이 그래도 좋다고 한다면 요."
"물론 좋고말고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것도, 아주아주 친한 친구가 되는 거예요"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난 지 30분 만에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친한 친구로서 당신에게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
"우선 한 가지는 왜 귀를 내놓지 않느냐는 것. 또 한 가지는 이제까지 네 귀가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특별한 힘을 미친 적이 있었는가 하는 거야."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죠"라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여러 가지?"
"네,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귀를 내놓지 않은 내 모습에 내가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귀를 내놓고 있을 때의 너와 귀를 내놓고 있지 않을 때의 네가 다르다는 거야?"
"그렇지요."
두 명의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고 수프를 가져왔다.
"귀를 내놓고 있을 때의 너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꽤 오래된 일이라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사실 열두 살 때부터 귀를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하지만 모델 일을 할 때는 귀를 내놓잖아?"
"네"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네. 하지만 그건 진짜 귀가 아니에요."
"진짜 귀가 아니라고?"
"그건 폐쇄된 귀예요."
나는 수프를 두 모금 마시고 나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폐쇄된 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을래?"
"폐쇄된 귀는 죽은 귀죠. 내가 스스로 귀를 죽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통로를 차단해 버린다는 말인데……. 알아듣겠어요?"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거나 물어 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귀를 죽인다는 건,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야?"
"아뇨, 귀는 제대로 들려요. 하지만 귀는 죽은 거죠. 당신도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수프를 떠먹던 스푼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등을 곧게 쭉 편 다음 양쪽 어깨를 5센티미터 가량 위로 올리고 턱을 한껏 당기고 나서, 10초가량 그 자세로 있다가 갑자기 어깨를 탁 떨구었다.
"이제 귀는 죽었어요. 당신도 해봐요."
나는 그녀와 똑같은 동작을 천천해 세 번 되풀이해 보았지만, 뭔가가 죽었다 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술기운이 좀 더 빨리 퍼질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 귀는 제대로 죽지 못하는 모양인데"하고 나는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죽일 필요가 없다면 죽일 수 없더라도 아무 지장 없을 테니까."
"좀 더 물어 봐도 될까?"
"좋아요."
"네가 말하는 걸 종합해 보면 이런 얘긴 것 같은데. 즉 너는 열두 살 때까지는 귀를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귀를 가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귀를 내놓은 적이 없다. 부득이하게 귀를 내놓아야 할 때는 귀와 의식 사이의 통로를 폐쇄한다. 그런 거지?"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맞아요."하고 대답했다.
"열두 살 때 네 귀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서두르지 마세요, 부탁이에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오른손을 테이블 너머로 내밀어 내 왼손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 나는 남은 포도주를 두 잔에 따른 다음 천천히 내 잔을 비웠다.
"우선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나에 대한 어떤 걸?"
"모두. 어떻게 자랐다든가, 나이는 몇 살이라든가, 무엇을 하고 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에요."
"평범한 이야기지. 너무 평범해서 아마 듣고 있으면 잠이 올 걸."
"난 평범한 이야기가 좋아요."
"내 이야기는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는 평범한 이야기거든."
"괜찮으니까 10분 동안만 이야기해 봐요."
"생일은 194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지. 크리스마스이브는 생일로는 그다지 좋은 날이 아니야. 왜냐하면 생일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이 겹쳐 버리거든. 모두들 대충 넘기려고 들지. 별자리는 염소자리고 혈액형은 A형인데, 염소자리에 혈액형이 A형인 사람은 은행원이나 구청직원이 제격이라지 아마. 사수자리와 천칭자리와 물병자리와는 궁합이 나쁘다고 하더군. 어때, 따분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평범한 거리에서 자라 평범한 학교를 나왔지. 어릴 때는 말수가 적은 아이였고 커서는 따분한 아이가 됐어. 평범한 여자아이와 알게 되어 평범한 첫사랑을 했지. 열여덟 살 때 대학에 들어가 도쿄로 나왔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친구와 둘이서 작은 번역 사무소를 시작해, 그럭저럭 밥벌이는 했어. 3년쯤 전부터는 선전지와 광고 관계 일에도 손을 댔고, 그 쪽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여자를 사귀게 되어 4년 전에 결혼했는데, 두 달 전에 이혼했지. 이혼 사유를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는 없어. 늙은 수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있고, 담배는 하루에 마흔 개비 정도 피우지. 도저히 끊을 수가 없거든. 양복 세벌과 넥타이 여섯 개, 그리고 흘러 간 레코드를 오백 장 가지고 있지. 엘러리 퀸이 쓴 소설의 범인은 모두 기억하고 있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한 질 가지고 있지만, 반밖에 못 읽었어. 여름에는 맥주를 마시고, 겨울에는 위스키를 마시지."
"그리고 사흘 중 이틀은 바에서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먹는다?"
"맞았어."라고 나는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인생인데요."
"줄곧 따분한 인생이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요컨대 별도리가 없다는 얘기지."
나는 시계를 보았다. 9분 20초가 흘렀다.
"하지만 지금 말한 게 당신의 모든 것은 아니잖아요."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내 두 손을 잠깐 동안 응시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 아무리 따분한 인생이라도 10분 안에 전부 이야기할 수 는 없으니까."
"내 감상을 말해도 돼요?"
"물론."
"나는 초면인 사람을 만나면, 10분 동안 그 사람의 말을 듣지요. 그리고 상대가 말한 내용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상대를 파악하죠. 이런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아니"라고 대답하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네 방법이 옳을 거야."
한 웨이터가 와서 테이블에 접시를 나란히 놓더니 다른 웨이터가 와서 접시에 요리를 보고 좋게 담고, 소스 담당이 그 위에 소스를 뿌렸다. 쇼트에서 세컨드로, 세컨드에서 퍼스트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 방법을 당신에게 적용시켜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무스 케이크에 나이프를 대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인생이 따분한 게 아니라 당신이 따분한 인생을 추구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나요?"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내 인생이 따분한 게 아니라 내가 따분한 인생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어쨌든 나는 이미 그것을 얻었거든. 모두 따분함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나는 따분함 속에 안주하려고 하고 있지. 마치 러시아워에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듯이 말이야. 그러니까 내 인생이 따분해졌다고 해서 불평을 하진 않아. 아내가 달아날 정도면 말 다했지."
"부인과는 그래서 헤어졌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마디론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니체도 말했듯이 신들도 따분함에는 항복한다고 하잖아, 뭐 그런 거지."
우리는 천천히 요리를 먹었다. 그녀는 도중에 소스를 더 청했고, 나는 빵을 더 먹었다. 메인 디시를 다 먹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 딴 생각을 했다. 접시를 물리고 블루베리 셔벗을 먹은 다음 에스프레소 커피가 나왔을 때,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는 아주 잠깐 공중을 떠돌다가 소리 나지 않는 환기 장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몇 테이블에도 손님이 있었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모차르트의 콘체르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의 귀에 대해서 조금 더 듣고 싶어"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이 묻고 싶은 건, 내 귀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거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신 스스로 확인해 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에게 그것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매우 한정된 형태로밖에는 이야기할 수가 없고, 그러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을 위해서 귀를 내놓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정말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왜?"
"당신의 따분함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단단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할 수 없지"라고 내가 대꾸했다.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손위에 얹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얼마 동안 앞으로 몇 달쯤 내 곁을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괜찮아요?"
"좋아."
그녀는 핸드백에서 검은색 머리띠를 꺼내 그것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감싸듯이 해서 뒤로 돌려 한 번 비틀더니 재빨리 묶었다.
"어때요?"
나는 숨을 죽이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안은 바싹바싹 마르고, 몸의 어디에서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흰 회벽이 물결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게 안의 말소리와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한 엷은 구름과 같은 것으로 모습을 바꾸더니, 다시 원래대로 되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해질녘의 그리운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겨우 몇 백 분의 일 초 정도의 짧은 순간에 내가 느꼈던 것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쥐어짜듯이 "굉장해.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군"하고 말했다.
그녀는 내말에 "그 말이 맞아요."하고 대꾸했다.
2. 귀의 개방에 대하여
"그 말이 맞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비현실적이리만큼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내가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든 것이 우주처럼 팽창하고,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 두꺼운 빙하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오만하리만큼 과장되고,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 깎여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범위 내의 모든 관념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귀는 일체가 되어 오래된 한 줄기 빛처럼 시간의 사면(斜面)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간신히 한숨 돌리고 나서
"너는 굉장해"하고 말했다.
"알고 있어요. 이런 상태가 귀를 개방한 상태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몇 사람의 손님이 고개를 돌려, 우리 테이블 쪽을 넋 나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를 더 따라 주러 온 웨이터는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테이프 테크의 릴만이 계속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박하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고, 나는 황급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녀가
"당신하고 자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3. 속(續) 귀의 개방에 대하여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진실로 위대한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인가 사흘 동안 잠깐씩 귀를 내놓았을 뿐, 그녀는 다시 그 빛나는 기적적인 조형물(造形物)을 머리카락 속에 숨기고, 원래의 평범한 여자아이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것은 마치 3월초에 시험 삼아 코트를 잠시 벗어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직 귀를 내놓을 시기가 아니었어요. 아직 내 힘을 스스로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별로 상관없어."라고 대꾸했다. 귀를 가린 그녀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끔 귀를 보여 주었는데, 대부분 섹스를 할 경우였다. 귀를 내놓은 그녀와의 섹스에는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비가 내릴 때면 정확하게 비 냄새가 났다. 새가 지저귀면 정확하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요컨대 그랬다.
나는 언젠가 그녀에게 "다른 남자와 잘 때는 귀를 내놓지 않아?"하고 물었다.
"물론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귀를 내놓지 않고 섹스를 할 때는 어떻지?"
"아주 의무적이죠. 마치 신문지를 씹고 있는 것처럼 아무 느낌도 없고요. 하지만 괜찮아요, 의무를 다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귀를 내놓고 할 때가 훨씬 멋지겠지?"
"그야 그렇지요."
"그럼 내놓으면 되잖아. 뭣 때문에 일부러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하고 말했다.
확실히 나는 모르는 게 많았던 것 같다.
우선 무엇보다도 나를 특별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게 특별히 뛰어나거나 유별난 점이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간단하죠. 당신이 나를 원했기 때문에. 그게 가장 큰 이유예요."
"만약에 다른 누군가가 너를 원했다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당신이 나를 원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멋져요."
"왜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까?"라고 나는 질문해 보았다.
"그건 당신이 자신의 절반으로만 살기 때문이죠. 나머지 반은 어딘가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거예요"라고 그녀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으음" 하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닮은 셈이죠. 나는 귀를 막고 있고, 당신은 절반만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내 나머지 반쪽은 당신의 귀처럼 빛나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당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머리를 올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여름도 끝나가는 9월의 오후, 나는 일을 쉬고 침대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줄곧 고래의 페니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바다는 짙은 남빛이었고, 거친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천장은 높고, 전시실 안에는 나 말고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었다. 고래의 페니스는 고래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페니스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아내의 슬립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이제 그녀가 슬립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도 생각나질 않았다. 슬립이 부엌 의자에 걸려 있는 실체 없는 어렴풋이 풍경만이 내 머리 속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기 말이지, 너 슬립을 입지 않니?"라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여자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서 얼굴을 들고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없어요."
"그래"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게 있어야 더 잘된다면······."
나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라니까"라고 허둥대며 말했다.
"아무튼 정말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직업상 그런 데에는 꽤 익숙해진 데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다니까"라고 나는 말했다.
"너와 네 귀만으로 정말 충분해.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
그녀는 시시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나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15초쯤 지나서 다시 한 번 얼굴을 들었다.
"있잖아요, 10분 후쯤에 중요한 전화가 걸려 올 거예요."
"전화?"
나는 침대 옆의 검은 전화기를 보았다.
"그래요, 전화벨이 울릴 거예요."
"그걸 알아?"
"알아요."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내 가슴에 머리를 얹어 놓은 채 박하담배를 피웠다. 잠시 후에 내 배꼽 옆에 재가 떨어졌는데, 그녀는 입을 오므리더니 그것을 침대 밖으로 날려 버렸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그녀의 귀를 끼웠다. 황홀한 감촉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형체가 없는 온갖 이미지가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양에 관한 일이에요. 많은 양과 한 마리의 양."
"양?"
"네"라고 대답한 후 그녀는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한 모금 빨고 나서 재떨이에 비벼 껐다.
조금 있다가 머리맡의 전화가 울렸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내 가슴 위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전화벨이 네 번 울리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당장 이리로 와주지 않겠어?"라고 상대방이 말했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어느 정도로 중요한데?"
"와보면 알아"라고 그는 말했다.
"어차피 양에 대한 이야기겠지"라고 나는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수화기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어떻게 알고 있지?"라고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양을 쫓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 제4장 ☆☆☆
양을 쫓는 모험 Ⅰ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1. 기묘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서장
한 사람의 인간이 습관적으로 많은 양의 술을 마시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과는 대개 똑같다.
1973년에 나의 공동 경영자는 즐거운 주정뱅이였다. 1976년에 그는 아주 조금 신경질적인 주정뱅이가 되었고, 그리고 1978년 여름에는 초기 알코올 중독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에 어설프게 손을 대고 있었다. 많은 습관적 음주자가 그렇듯이 취하지 않았을 때는 그는 예민하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착실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를 예민하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착실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자신이 확실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완벽 하게 동화(同化)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제대로 동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주량이 늘어남에 따라서 거기에 미묘한 오차가 생기고, 그 미묘한 오차는 이윽고 깊은 골을 만들게 되었다. 그의 착실함과 호감이 너무나 앞질러 가서 그 자신조차도 따라 잡을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일을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는 잃어버린 것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보다 깊은 알코올의 안개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은 날이 저물 때까지 그는 정상이었다. 나는 벌서 몇 년 동안이나 날이 저문 뒤에는 의식적으로 그와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왔으므로, 나에게 있어서 그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날이 저문 후의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고,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잘해 나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예전과 같은 친구는 아니었다.
100퍼센트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70퍼센트도 미심쩍지만) 적어도 그는 내 대학 시절의 유일한 친구인데, 그런 친구가 비정상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바로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일인 것 같다.
내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한 잔으로 그치면 그는 정상이었지만, 마시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젠가는 두 잔을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 회사를 떠나 다른 일을 찾게 되리라.
나는 에어컨디셔너 앞에서 땀을 식히면서 여자아이가 가져다준 차가운 보리차를 마셨다. 그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의 강한 햇살이 환상적인 물보라처럼 리놀륨 바닷가에 내리쬐고 있었다. 눈 아래에는 공원의 녹음이 펼쳐져 있었고, 잔디위에 벌렁 누워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그는 볼펜 끝으로 왼손 손바닥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이혼했다며?"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두 달 전 이야기야"라고 대꾸했다. 선글라스를 벗으니 눈이 따끔거렸다.
"왜 이혼했어?"
"개인적인 일이야."
"알고 있어"라고 그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개인적이지 않은 이혼이란 들어 본 적도 없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서로의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 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우리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쓸데없이 캐물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는 그녀와도 친구였고, 약간 쇼크였단 말이야. 게다가 너희들은 줄곧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거든." 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계속 잘 지냈지. 그리고 싸우고 나서 헤어진 것도 아니야."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는 여전히 볼펜 끝으로 손바닥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는 짙은 파란색 새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있었다. 오데코롱과 로션의 냄새로 잘 어울렸다.
나는 스누피가 서핑 보드를 안고 있는 그림이 찍힌 티셔츠에, 하얗게 될 정도로 빨아댄 낡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흙투성이 테니스 화를 신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가 더 정상이었다.
"우리 셋이서 함께 일하던 시절을 기억하나?"
"기억하구말구"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땐 즐거웠지"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에어컨디셔너 앞을 떠나서 방 한가운데에 있는 푹신푹신한 스웨덴제 하늘색 소파에 앉아, 접대용 담배 케이스에서 필터 달린 폴몰을 한 개비 집어서 무거운 탁상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일을 너무 크게 벌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네는 광고나 잡지를 말하는 거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어지간히 고민했을 게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안 돼 보였다. 나는 탁상용 라이터의 무게를 확인하고 나서 나사를 돌려 불꽃을 조절했다.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라고 말하고 나서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런 일들은 애당초에 내가 맡아 온 것도 아니고, 내가 하자고 말을 꺼낸 것도 아니잖아. 자네가 일을 맡아 왔고, 자네가 해보자고 했던 거야. 안 그래?"
"거절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고, 그때는 마침 한가하기도 했고······."
"돈이 되기도 했지."
"돈벌이는 됐지. 덕분에 넓은 사무실로 이사할 수 있었고 사람도 늘어났고, 차도 바꿨고, 맨션도 샀고, 두 아이를 돈이 많이 드는 사립학교에 넣을 수도 있었지. 서른 치고도 돈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해."
"자네가 번거야. 부끄러울 건 없어."
"누가 부끄럽대?"라고 그는 대꾸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내던졌던 볼펜을 집어서 손바닥 한가운데를 몇 번인가 가볍게 콕콕 찔렀다.
"하지만 말이야, 옛날 일을 생각하면 왠지 거짓말 같아. 둘이서 빚을 지며 번역 일을 맡으러 돌아다니고, 역전에서 광고지를 돌리던 시절의 일들 말이야",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으면 둘이서 광고지를 돌릴 수 있어."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여러 가지가 변했어."라고 그가 말했다.
"생활의 페이스라든가 사고방식이 말이야. 우선 우리가 진짜로 얼마나 벌어들이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조차도 모르고 있잖아. 세무사가 와서 뭔지 모를 알쏭달쏭한 서류를 만들고 무슨 공제니 감가삼각이니 세금 대책이니, 그런 일이나 하고 말이야."
"어디서나 하는 일이야."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실제로도 하고 있지. 하지만 옛날이 좋았어."
나는 "자라남에 따라 감옥의 그늘은, 우리의 주위에 커지는구나."라는 옛 시(詩)의 구절을 읊조렸다.
"뭐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라고 나는 되물었다.
"지금은 어쩐지 착취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착취?"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2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고, 의자의 높이 때문에 그의 머리는 나보다 20센티미터쯤 위에 있었다. 그의 머리 뒤로는 석판화가 걸려 있었다. 본적이 없는 새로운 그림으로, 날개가 달린 물고기 그림이었다. 물고기는 제 등에 날개가 달려 있다는 데에 그다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용법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나 자신을 향해
"착취?"하고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착취야."
"도대체 누구에게서?"
"여러 곳에서 조금씩."
나는 하늘색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때마침 내 눈 높이에 있는 그의 손과 그의 손 안에 있는 볼펜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쨌든 우리는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그는 말했다.
"마찬가지야. 아무도 변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럼. 착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건 동화 속에나 나오는 거야. 자네 구세군의 나팔이 정말로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래, 분명히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라고 그는 수긍했다.
"지난 주 자네는, 그러니까 우리는 마가린 광고 카피를 만들었어. 사실 나쁘지 않은 카피였지. 평도 좋았고. 자네는 지난 몇 년 동안 마가린 같은 걸 먹어 본 적이 있나?"
"없어. 마가린을 싫어하거든."
"나도 없어. 결국 그런 거야. 적어도 옛날의 우리는 확실하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했고, 그것이 긍지이기도 했지. 그런데 그게 지금은 없어. 실체가 없는 말을 그저 마구 떠들어대고 있을 뿐이야."
"마가린은 건강에 좋아. 식물성 지방이고, 콜레스테롤도 적고 말이야. 성인병에도 잘 안 걸리고 요즘엔 맛도 나쁘지 않지. 값싸고 오래 보관할 수도 있고."
"그럼 자네도 먹지 그래."
나는 소파에 푹 파묻혀서 천천히 팔다리를 쭉 폈다.
"마찬가지야. 우리가 마가린을 먹든 안 먹든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점잖은 번역 일이나 엉터리 마가린 광고 카피나 근본은 마찬가지야. 아닌 게 아니라 자네 말처럼 우리는 실체가 없는 말을 해대고 있지. 하지만 실체가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이것 보라고, 성실한 일 따위는 아무데도 없는 거라고. 성실한 호흡이나 성실한 오줌이 아무데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자네 옛날에는 좀 더 순진했는데."
나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라고 대꾸하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아마 어딘가에 순수한 마을이 있고, 그 곳에선 순진한 푸줏간 주인이 순수한 로스 햄을 썰고 있겠지. 대낮부터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순수한 거라고 생각한 다면 얼마든지 마시라고."
볼펜으로 똑똑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오랫동안 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미안해. 그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어."라고 사과했다.
"괜찮아.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그가 말했다.
에어컨디셔너의 자동온도 조절장치가 뚝 하는 소리를 냈다. 무섭도록 조용한 오후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가지라고. 우리 힘만으로 여기까지 해왔잖아?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서. 백이 있거나 직함이 있는 것만으로도 목에 힘주는 그런 족속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우리는 옛날에 친구였지?"라고 그가 말했다.
"지금도 친구야. 줄곧 힘을 합해 함께 해왔잖아"라고 나는 대답했다.
"이혼하길 바라진 않았어."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그만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하고 화제를 바꿨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볼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그 남자가 온 건 오늘 아침 열한 시였어."라고 그는 말했다.
2. 기묘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그 남자가 온 것은 오전 열한 시였다. 우리와 같은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는 두 종류의 오전 열한 시가 있다. 즉 겁나게 바쁘든지 겁나게 한가하든지 둘 중 의 하나다. 그 중간이 없다. 그러니까 오전 열한 시에는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분주하게 일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꿈속을 헤매고 있다. 중간적인 일은(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오후를 위해 남겨 두면 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찾아온 것은 후자 쪽의 오전 열한 시였다. 그것도 기념비적으로 한가한 오전 열한 시였다. 9월 초에 미친 듯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다가 그게 끝나자 일이 뚝 끊어졌다.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한 달 늦은 여름휴가를 잡았는데도 남은 친구들에게는 연필을 깎는 정도의 일밖에 없었다.
내 친구는 수표를 끊으러 은행에 가고, 한 사람은 근처에 있는 오디오 메이커의 쇼룸에서 새로 나온 레코드를 들으며 시간을 때우고, 혼자서 회사에 남은 여사원은 전화를 지키면서 여성지에 실린 '가을의 헤어스타일'이라는 기사를 읽고 있었다.
남자는 소리도 없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 내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남자는 의식적으로 조용히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습관적이고 자연스러웠다. 너무나 습관적이고 자연스러워, 여사원은 남자가 들어온 것조차 제대로 실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남자가 책상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책임자를 만나고 싶소."
라고 남자는 말했다. 장갑으로 책상 위의 먼지를 털어 내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업무상 찾아온 거래처 사람치고는 눈매가 너무 날카로웠고, 세무서 직원치고는 차림새가 좋았으며, 경찰관치고는 너무 지적으로 보였다. 그녀에게는 그 이외의 직업은 떠오르질 않았다. 남자는 세련된 불길한 뉴스처럼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잡지를 황급히 덮으며
"지금 자리에 안 계신데요"라고 말했다.
"앞으로 30분 정도면 돌아오실 텐데요."
"기다리겠소."하고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남자는 말했다. 그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 볼까 망설이다가 체념하고 남자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남자는 하늘색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정면 벽에 걸린 전기 시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불필요한 동작은 전혀 없었다. 잠시 후 보리차를 가지고 갔을 때에도 그는 그 자세로 그대고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자네가 지금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야. 거기에 앉은 채, 꼬박 30분을 똑같은 자세로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라고 내 친구는 말했다.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소파의 움푹 팬 부분을 바라본 다음 벽에 걸린 전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내 친구를 보았다.
9월 말치고는 이상할 만큼 무더웠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정말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고급 맞춤인 듯한, 회색 양복 소매 밖으로 횐 셔츠가 정확히 1.5센티미터 엿보였고, 미묘한 색조의 줄무늬 넥타이는 아주 약간 좌우 비대칭이 되도록 세심하게 손질되어 있었으며, 검은 코도반(말 궁둥이 가죽) 구두는 반들반들 윤이 났다.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마흔쯤 되어 보였고, 키는 175센티미터 남짓한데다가 군살은 1그램도 붙어 있지 않았다. 가는 손에는 주름 하나 없고, 날씬하게 쭉 뻗은 열 손가락은 오랜 세월에 걸쳐 훈련되어, 통제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원초적인 기억을 항상 품고 있는 군생 동물을 연상시켰다.
손톱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 완벽하리만큼 다듬어져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열 개의 멋진 타원이 그려져 있었다. 실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어딘지 기묘한 느낌을 주는 손이었다. 그 손은 극히 한정한 분야에서의 고도의 전문성을 느끼게 했는데, 그것이 어떠한 분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은 그 손만큼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지는 않았다. 단정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무표정하고 단조로웠다. 콧날도 눈도 나중에 커터 나이프로 손질한 것처럼 직선적이고, 입술은 얇고 메말라 있었다.
남자는 전체적으로 거무스름하게 볕에 그을어 있었으나, 그것이 어딘가의 바닷가나 테니스 코트에서 장난삼아 태운 것이 아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종류의 태양이 우리가 모르는 장소의 상공에서 내리 쫴 그런 종류의 볕에 그을린 얼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시간은 놀라울 만큼 천천히 흘렀는데 하늘을 향해서 치솟은 거대한 기계 장치의 하나의 볼트를 연상시키는 차갑고 냉랭하고 경직된 분위기에 휩싸인 30분이었다. 내 친구는 은행에서 돌아왔을 때, 방안의 공기가 몹시 무겁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못으로 바닥에 고정된 듯한,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야"라고 친구는 말했다.
"물론이겠지"하고 나도 말했다.
혼자서 전화를 지키고 있던 사원은 긴장한 탓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친구가 영문도 모른 채 응접실로 들어가 자기가 경영자라고 밝히자, 남자는 비로소 자세를 허물어뜨리고 양복 윗주머니에서 가느다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귀찮다는 듯이 연기를 공중에 내뿜었다. 주위의 공기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간단히 하지요"라고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단호한 태도로 손이 베일 정도로 빳빳한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플라스틱 비슷한 특수한 종이로 만든 명함이라서 부자연스러울 만큼 새하얗고, 거기에는 작고 검은 활자로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직함도 없고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었다. 다만 넉 자로 된 이름뿐이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아파오는 명함이었다. 친구는 뒤집어서 뒤가 완전한 백지 임을 확인하고 난 후에 다시 한 번 앞을 본 다음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분의 존함은 아시겠지요?"라고 남자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턱 끝을 아주 약간만 움직여서 끄덕였다. 시선만이 고정되어 있었다.
"태워주세요."
"태워요?'
친구는 멍하니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명함을 지금 당장 태워 버리세요."라고 남자는 자르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 친구는 황급히 탁상용 라이터를 손에 들고 새하얀 명함 모서리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가장자리를 손으로 잡은 채 절반쯤 태운 다음 커다란 크리스털 재떨이에 내려놓고, 두 사람은 다 타서 흰 재가 될 때까지 그걸 바라보았다. 명함이 완전히 재가 되어 버리자, 방은 대량 학살 직후를 연상시키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얼마 후에 남자는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 내가 당신에게 말씀드리는 모든 건 그분은 의사고, 희망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희망······."하고 친구는 말했다.
"물론 희망이라는 것은 어떤 한정된 목표에 대한 기본적 자세를 가장 아름다운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 방법도 있지요. 알고 계시죠."하고 남자는 말했다.
내 친구는 머릿속에서 남자의 말을 현실적인 일본어로 대치해 보았다.
"압니다."
"그렇지만 이건 개별적인 이야기도 정치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비즈니스'라는 말을 영어식으로 제대로 정확하게 발음했다. 아마도 일본계 미국인 2세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당신도 비즈니스맨이고, 나도 비즈니스맨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사이에는 비즈니스 이외에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시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와 같은 비현실적인 요소를 세련된 형태로 바꿔 현실의 대지(大地))에 끼워 넣어 가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비현실적으로 치 닫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까지 말한 남자는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낀 초록색 돌로 된 반지를 오른손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 쪽이 간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때때로 비현실이 현실을 압도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현실의 세계에서는 비즈니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려움을 지향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남자는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일로 인해서 당신이 어떤 어려운 작업 또는 결단을 요구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내 친구는 제대로 이해도 못한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 이쪽의 희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귀사에서 제작하신 P 생명의 PR지 발행을 즉각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라며 남자는 친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페이지의 담당자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양복의 속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낸 다음 그 안에서 네 번 접은 종잇조각을 꺼내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친구는 종이를 손에 들고 펼쳐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제작한 생명보험 회사의 그라비어(사진 제판에 의한 요판 인쇄의 하나) 페이지를 복사한 것이었다. 홋카이도(北海道)의 평범한 풍경 사진, 구름과 산과 양과 초원, 그리고 어딘가에서 모방한 그다지 신통치 않은 목가적인 시, 그것뿐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첫 번째 희망에 관해서 말하면, 이건 희망 이라기보다는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우리의 희망에 따른 결정이 내려진 겁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나중에 홍보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십시오."
"그렇습니까?"라고 내 친구는 말했다.
"그러나 귀사 정도의 규모라면 이와 같은 트러블에서 받는 불이익이 매우 클 거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 업계에서는 적지 않은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두 번째 요구 조건을 수락해 그 담당자가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정보를 주신다면, 우리는 당신들이 받은 불이익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아마도 보상 이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만약 희망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하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어차피 아웃 당할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질문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 사진이 문제인 셈이군요?"라고 친구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남자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서 주의 깊게 말을 추려 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럴 권한은 나에게 주어져 있지 않으니까요."
"담당자에게는 전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세 시에는 여기에 와 있을 겁니다."라고 친구는 말했다.
남자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러면 네 시에 차를 보내지요. 그리고 이건 중요한 일인데 이 건에 관해서는 일체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니겠지요?"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사무적으로 헤어졌다.
3.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
"그렇게 된 거야"라고 내 친구는 말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나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우선 명함 속의 인물이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인물이 왜 양의 사진에 신경을 쓰는지도 알 수가 없고. 마지막으로 그 인물이 우리의 발행 물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명함 속의 인물은 우익(右翼)의 거물이야. 이름도 얼굴도 거의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니까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자네 정도밖에 없을걸."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우니까"라고 나는 변명했다.
"우익이라고 하지만 흔히 말하는 우익이 아니야. 어쩌면 우익조차 아닐지도 모르지."
"점점 더 알 수 없군."
"사실을 말하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책을 낸 것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도 아니지. 인터뷰도 사진 촬영도 일체 허용되지 않거든.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야. 5년 전에 어느 월간지의 기자가 그가 연루된 부정 융자 사건을 특종 기사로 다루려고 했다가, 당장에 묵살 당했지."
"꽤 자세히 알고 있군."
"그 기자와 간접적으로 아는 사이였거든."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 기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데?"
"영업부로 밀려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전표 정리를 하고 있어. 매스컴의 세계라는 게 의외로 좁아서 그런 친구는 꽤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아프리카 원주민 부락 입구에 해골이 걸려 있는 것과 비슷하거든."
"그렇겠군."하고 나는 대꾸했다.
"그러나 전쟁 전의 그의 약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 1913년에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나와 이 직업 저 직업 전전하다가 우익이 됐지. 딱 한 번 형무소에 들어갔지, 아마. 형무소에서 나와 만주로 갔고 그곳에서 관동군의 참모들과 친해져서 특수공작 관계조직을 만들었지. 그 조직의 내용까지는 잘 몰라.
그는 그 무렵부터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되지 시작한 거야. 마약을 취급했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야. 그리고 중국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소련이 참전하기 2주일 전에 구축함을 타고 귀국했어. 혼자 들지도 못할 정도의 귀금속과 함께 말이야."
"뭐라고 할까. 절묘한 타이밍이군."
"실제로 그 사람은 타이밍을 포착하는 데는 명수지. 쳐들어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 고 있는 거야. 그리고 착안점이 좋아. 점령군도 A급 전쟁 범죄자로 체포는 했지만, 조사는 도중에서 중단되고 불기소 됐어. 이유는 병 때문인데, 그 대목은 모호하기 짝이 없지. 아마 미군과 거래가 있었을 거야. 맥아더는 중국 대륙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친구는 다시 볼펜을 집어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나오자, 어딘가에 숨겨둔 재물을 반으로 나눠 절반으로는 보수당의 파벌을 통째로 매입하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광고업계를 매입했지. 아직은 광고업이라는 것이 광고지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시 대에 말이야."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군. 그런데 은닉 재산에 대한 배상 청구는 나오지 않았나?"
"무슨 소리야. 보수당의 파벌을 하나 통째로 매입했다니까."
"아 참, 그렇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그는 그 돈으로 정당과 광고를 장악했고, 그 구조는 지금까지도 이어 지고 있지. 그가 표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광고계와 집권 정당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거든. 광고를 장악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알겠나?"
"아니."
"광고를 장악한다는 건 출판과 방송의 대부분을 장악한 게 되는 거야. 광고가 없는 곳에서는 출판과 방송이 존재할 수 없지. 물이 없는 수족관과 같다고나 할까. 자네가 보게 되는 정보의 95퍼센트까지가 이미 돈으로 매수되어서 선별 된 것이라고."
"아직 잘 모르겠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 인물이 정보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까진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그가 생명 보험 회사의 PR지에까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대형 대리점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맺은 계약이잖아."
내 친구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완전히 식어버린 보리차를 마셨다.
"주식이야. 놈의 자금원은 주식이거든. 주식조작, 매점매석, 탈취, 뭐 그런 거지. 그를 위한 정보를 그의 정보기관이 수집하고, 그것을 그가 취사선택하는 거야. 그중 매스컴에 흘러나오는 것은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선생께서 자신을 위해서 쥐고 있는 거지. 물론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협박 비슷한 짓도 하지. 협박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 그 정보는 매치 펌프(한편으로는 사건을 밝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습을 제안하여 금품을 받는 방식)용으로 정치가에게 흘리는 거야."
"어느 회사든 약점 한두 가지쯤은 있다 이거군."
"어떤 회사든 주주 총회에서 폭탄선언 같은 걸 듣는 건원치 않거든. 그러니 대개는 하라는 대로 하게 돼 있지. 다시 말해서 선생께서는 정치가와 정보 산업과 주식이라는 삼위 일체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지. 이젠 이해하겠지만, PR지 하나쯤 뭉개 버린다든지 우리를 실업자로 만드는 일쯤은 그에겐 삶은 달걀껍질 까기보다도 간단한 일이라고."
"흐흠"하고 나는 신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만한 거물이 어째서 홋카이도의 풍경 사진 한 장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냐고."
"참 좋은 질문이야"라고 했지만, 어투는 그다지 감동하지 않은 듯 무감각했다.
"바로 내가 자네에게 하려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야."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양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았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모르는 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라고 친구가 내게 물었다.
"구석에서 이름도 없는 난장이가 물레를 돌리고 있는 거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 줄 수 없겠나?"
"내 육감이야."
친구는 "맙소사"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최신 정보가 두 가지 있어. 아까 말했던 월간지의 기자에게 전화로 물어 봤는데, 하나는 선생이 뇌졸증인지 뭔지로 쓰러져서 재기 불능이 되었다는 이야기야. 하지만 그건 정식으로 확인 안 된 이야기지. 또 하나는 여기에 왔던 남자에 관한 얘긴데, 그는 선생의 제1비서로, 조직의 현실적인 운영을 맡고 있는 말하자면 이인자인 셈이지. 그는 일본계 미국인 2세인데 스탠포드를 나와, 12년 전부터 선생 밑에서 일하고 있지. 정체불명의 사나이지만, 머리가 무섭게 잘 돌아가는 모양이야. 알아낸 건 그 정도야."
"고마워"라고 나는 인사말을 했다.
그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천만에"라고 말했다.
그는 과음만 하지 않으면 어디를 보더라도 나보다 훨씬 정상이었다. 나보다도 훨씬 친절하고 순수하고 사고방식 또한 건전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가 취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괴로웠다. 나보다 성실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망가져 가는 것이다.
그가 방을 나간 다음에, 나는 서랍에서 그의 위스키를 찾아내 혼자서 마셨다.
4. 양을 세다.
우리는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날개 달린 종자가 변덕스런 봄바람에 날려 오듯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앞의 '제로'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없고 가 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가지 견해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 대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그렇듯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 는 똑같은 요리 같은 것이다.
이것은 비유다.
내가 PR지의 그라비어에 양의 사진을 실은 것은 한 쪽의 관점 (A)에서 보면 우연이고, 다른 쪽 관점 (B)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A) 나는 PR지의 그라비어 페이지에 어울리는 사진을 찾고 있었다. 내 책상 서랍에는 우연히 양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진을 썼다. 평화로운 세계의 평화로운 우연.
(B) 양의 사진은 책상 서랍 속에서 줄곧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잡지의 그라비어에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 나는 그것을 다른 무엇인가에 썼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공식은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인생의 모든 단면에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훈련하면, 나는 오른손으로 (A)적인 인생을 조종하고, 왼 손으로는 (B)적인 인생을 조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좋다. 도넛의 구멍과 마찬가지다.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존재로 받아들이느냐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문제고, 그 때문에 도넛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 친구가 볼일을 보러 나가 버리자 갑자기 방안이 휑했다. 전기 시계의 바늘만 소리도 없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차를 보내기로 한 네 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옆 작업실도 잠잠했다.
나는 하늘색 소파 위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폭신폭신한 민들레 종자처럼 기분 좋은 에어컨디셔너 바람을 쐬면서 전기 시계의 바늘을 바라보았다. 전기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한, 적어도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세상은 아니다로 어쨌든 계속 움직이고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한,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이 전기 시계의 바늘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왠지 기묘한 일 같았다. 세상에는 또 다른 확인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뜨거운 감촉이 목구멍을 지나 식도의 벽을 따라 제대로 위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창 밖에는 새파란 여름 하늘과 흰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맑게 갠 하늘이었지만, 왠지 오래 써서 낡은 중고품처럼 보였다.
경매에 붙여지기 전에 약용 알코올로 보기 좋게 광낸 중고품 같은 하늘이었다. 나는 그런 하늘을 위해, 옛날에는 신품이었던 여름 하늘을 위해, 또 한 모금의 위스키를 마셨다. 나쁘지 않은 스카치 위스키였다. 그리고 그런 하늘도 눈에 익고 나니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점보제트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딱딱한 껍질로 덮인 벌레처럼 보였다. 나는 두 잔째의 위스키를 마저 마셨을 때,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양이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친구의 책상 위에 있던 그라비어 페이지를 복사한 것을 들고 소파로 돌아왔다. 그리고 위스키 맛이 배어 있는 얼음을 빨아먹으면서 사진을 20초가량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사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끈기 있게 생각해 보았다.
사진에는 양 떼와 초원이 찍혀 있었다. 홋카이도 특유의 거대한 자작나무다. 근처 치과 집의 현관 옆에서 자라고 있는 것 같은 빈약한 자작나무가 아니다. 곰 네 마리가 동시에 발톱을 갈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한 자작나무인 것이다. 잎이 우거진 모양새를 보니 계절은 봄인 듯싶었다.
배경의 산꼭대기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산 중턱의 골짜기에도 조금 남아 있었다. 아마 4월이나 5월쯤 됐을 것이다. 눈이 녹아 땅바닥이 질척한 계절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아마 푸르겠지. 흑백 사진이라서 푸르다는 확신은 가 질 수 없었다. 어쩌면 연어 살빛인지도 모른다. 흰 구름은 산 위에 엷고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양 떼가 의미하는 것은 양 떼고 자작나무숲이 의미하는 것은 자작나무숲이며, 흰 구름이 의미하는 건 흰 구름이었다. 그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테이블 위에 그 사지을 내던지고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나서 하품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진을 손에 들고, 이번에는 양의 수를 세어 보았다. 그러나 초원의 드넓고 양들은 소풍 나온 아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도시락을 먹듯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므로, 멀리가면 갈수록 그것이 양인지 아니면 그저 흰 점인지가 불확실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흰 점인지 아니면 눈의 착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눈의 착각인지 허무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일단 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만을 볼펜 끝으로 세어 보았다. 서른둘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서른두 마리의 양.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풍경 사진이다. 구도가 잘 잡힌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깊은 맛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문제의 냄새다. 그것은 내가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고, 지난 석 달 동안 줄곧 느껴 왔던 일이다. 나는 이번에는 소파에 드러누워 얼굴 위로 사진을 들고 양의 수를 다시 한 번 세어 보았다. 서른세 마리
서른세 마리?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비웠다. '그래 좋아'라고 나는 생각했다. 설사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하더라도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뭔가 일어났다면, 그건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다.
나는 소파에 누운 채 다시 한 번 양의 수에 도전해 봤다. 그리고 오후에 마신 두 잔의 위스키에 어울리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들기 전에, 나는 아주 잠깐 새 여자 친구의 귀에 대해서 생각했다.
5. 차와 그 운전사 1
데리러 온다던 차는 약속대로 네 시에 왔다. 비둘기시계처럼 정확했다. 여 사원이 나를 깊은 잠의 늪에서 끌어내 주었다. 나는 세면실에서 대충 세수를 했는데도 졸음이 통 가실 질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에 도착할 때까지 세 번이나 하품을 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하품이었는데, 호소를 하는 쪽도 그 호소를 받는 쪽도 나였다.
그 거대한 자동차는 건물 현관 앞의 길 위에 잠수함처럼 떠 있었다. 조심성 있는 가족이라면 보닛 속에서라도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차였다. 유리창이 칙칙한 파란색이라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차체는 그야말로 장엄한 검정색이었고, 범퍼에서 휠 캡에 이르기까지 얼룩 하나 없었다. 차 옆에는 말끔한 흰 셔츠에 오렌지색 넥타이를 맨 중년의 운전사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진짜 운전사였다. 그는 내가 다가가자 아무 말 없이 문을 연 다음, 내가 정확히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기도 운전석에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데 새 트럼프를 한 장씩 뒤집을 때 정도의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친구에게서 산 내 15년 된 폭스바겐에 비하면, 귀마개를 하고 호수 밑바닥에 앉아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차의 내부 장식도 대단했다. 대형차의 액세서리가 그렇듯 결코 품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널찍한 뒷좌석 한가운데에는 고상한 디자인의 푸시 폰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은으로 된 라이터와 재떨이, 담배 케이스의 세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운전석 위에는 조립식 책상과 작은 캐비닛이 놓여 있어서 글을 쓸 수 있거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에어컨디셔너의 바람은 조용하고 자연스러웠으며, 바닥에 깐 카펫은 부드러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놋대야를 타고 수은으로 된 호수를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도대체 이차에 얼마만큼의 돈을 들였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 봐도 허사였다. 모든 것은 내 상상력의 범위를 초월했다.
운전사는 내게 "음악이라도 틀까요?"하고 물었다.
"되도록 잠이 올만한 거면 좋겠는데"라고 나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운전사는 좌석 밑을 손으로 더듬어 카세트테이프를 골라 계기판의 스위치를 눌렀다. 어딘가에 교묘하게 숨겨진 스피커에서 무반주인체로 소나타가 조용히 흘러 나왔다. 나무랄 데 없는 곡에다 나무랄 데 없는 소리였다.
"언제나 이 차로 손님을 모십니까?"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늘 이차로 모셨습니다."라고 운전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요?"라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원래 선생님 전용차였거든요"라고 잠시 후에 운전사는 말했다. 운전사는 보기보다는 훨씬 붙임성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금년 봄부터 몸이 안 좋아지셔서 바깥출입을 안 하시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차를 놀리는 것도 그렇고 해서요.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차라는 것은 정기적으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성능이 저하되거든요."
나는 "아 그렇겠군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선생의 건강이 나쁘다는 것은 비밀도 아닌 셈이다. 나는 담배 케이스의 담배 한 개비를 손으로 집어서 바라보았다. 상표명이 없는 오리지널 궐련인데, 코에 가까이 대보니 러시아 담배에 가까운 냄새가 났다. 나는 피울까 아니면 호주머니에 넣어 둘까 한동안 망설이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제자리에 놓았다. 라이터와 담배 케이스에는 한가운데에 정교하게 도안 된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었다. 양 문장이었다.
양?
무슨 생각을 해도 부질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젓고 눈을 감았다. 귀가 찍힌 그 사진을 처음 봤던 오후부터 내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지요?"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30분에서 40분, 교통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요."
"그럼 냉방을 조금 약하게 해주시겠어요? 좀 더 자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운전사는 에어컨디셔너를 조절하고 나서 계기반 스위치 중 하나를 눌렀다. 두툼한 유리가 소리 없이 스르르 올려져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를 차단시켰다. 좌석은 바흐의 음악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침묵에 싸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나는 시트에 뺨을 묻고 잠들었다. 꿈속에는 젖소가 나왔다. 비교적 말쑥했는데 나름대로 고생도 해온 듯한, 타입의 젖소였다. 우리는 넓은 다리 위에서 스치듯 지나갔다. 기분 좋은 봄날 오후였다. 젖소는 한 손에 낡은 선풍기를 들고서 나에게 그것을 싸게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이 없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없었다.
그럼 집게와 교환하면 어떻겠느냐고 젖소가 물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는 젖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열심히 집게를 찾았다. 그러나 집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정말로 어제까지 있었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선반 위를 살펴보기 위해서 의자를 가져온 장면에서, 운전사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깨웠다.
"도착했습니다."라고 운전사는 간결하게 말했다.
문이 열리더니 저녁 무렵의 여름 햇살이 내 얼굴에 내리쬐었다. 몇 천 마리의 매미가 시계의 태엽을 감는 것처럼 울어대고 있었다. 냄새도 났다.
나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켠 후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내가 꾼 꿈이 상징적인 꿈이 아니길 빌었다.
6. 실지렁이 우주란 무엇인가?
상징적인 꿈이 있고, 그런 꿈이 상징하는 현실이 있다. 또는 상징적인 현실이 있고, 그런 현실이 상징하는 꿈이 있다. 상징은 말하자면 실지렁이 우주의 명예 시장(市長)이다. 실지렁이 우주에서는 젖소가 집게를 찾고 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젖소는 언젠가 집게를 손에 넣을 것이다. 나와는 관계없는 문제다. 그러나 만약에 젖소가 나를 이용해서 집게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나는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우주에 내던져지게 된다. 사고방식이 다른 우주에 내던져져 가장 난처한 일은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내가 젖소에게 묻는다.
"왜 너는 집게를 원하는 거지?"
젖소가 대답한다. "배가 몹시 고파서요."
내가 묻는다. "배가 고픈데 왜 집게가 필요한 거지?"
젖소가 대답한다. "복숭아나무 가지에 묶는 거지요."
내가 묻는다. "왜 복숭아나무지?"
젖소가 대답한다. "그러니까 선풍기를 넘겨준 거 아닙니까?"
끝이 없다. 그리고 나는 끝없이 젖소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젖소도 나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실지렁이 우주다. 그런 우주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다른 상징적인 꿈을 꾸는 수밖에 없다.
1978년 9월의 오후에 바퀴가 넷 달린 그 거대한 차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그와 같은 실지렁이 우주의 중심이었다. 요컨대 나의 바람은 각하(却下)된 것이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만한 가치는 있었다.
차는 약간 높은 언덕의 중심에 서 있었다. 뒤에는 차가 올라온 듯한, 자갈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것은 인위적일 정도로 구불구불 구부러지면서 멀리 보이는 문으로 통해 있었다. 길 양쪽에는 노송나무와 수은등이 연필꽂이처럼 같은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 문까지 아마도 15분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노송나무의 줄기마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매미들이 기를 쓰고 매달려, 세계가 종말이라도 향해 굴러가기 시작한 듯이 울어대고 있었다.
노송나무 가로수의 바깥쪽은 가지런히 손질한 잔디밭이었고, 언덕의 경사를 따라서 철쭉과 수국 외에도 이름 모를 식물들이 끝없이 흩어져 있었다. 찌르레기 한 떼가 잔디 위를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언덕의 양쪽에는 좁은 돌층계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석등과 연못이 있는 일본식 정원이, 왼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골프코스가 있었다. 골프코스 옆에는 럼레이즌 아이스크림 같은 색깔의 휴식용 정자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그리스 신화 풍 석상이 있었다. 석상 맞은편에는 거대한 차고가 있었는데 다른 운전사가 다른 차에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차종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고 폭스바겐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한 번 정원을 빙 둘러보았다. 흠잡을 데 없는 정원이었지만, 약간 머리가 아팠다.
"우편함은 어디에 있지요?"하고 확인 삼아 물어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누가 문까지 신문을 가지러 가는데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우편함은 뒷문에 있습니다."라고 운전사는 대답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뒷문이 있었다.
나는 정원을 살펴보고 나서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기 위해 정면을 향했다.
그것은 뭐랄까, 매우 고독한 건물이었다. 예를 들어 거기에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물론 약간의 예외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예외가 얼룩처럼 번져 마침내는 하나의 다른 개념이 되고 만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약간의 예외가 생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런 느낌의 건물이었다. 목적지를 모르는 채 아무렇게나 진화한 고대 생물처럼도 보였다.
우선 처음에는 메이지(明治)풍의 양옥 구조인 것 같았다. 천장이 높은 고전적인 현관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2층짜리 크림색 건물이었다. 창은 긴 이중창이었는데 페인트는 몇 번이나 칠한 것 같아 보였다. 지붕은 물론 구리판으로 이어져 있었고, 홈통은 로마의 상수도처럼 견고했다. 건물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옛날 좋았던 시절의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안채의 오른편에 어떤 익살맞은 건축가가 거기에 맞출 요량으로 같은 경향과 같은 계열의 색으로 된 별채를 붙여 놓았다. 의도한 바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두 채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은 접시에 셔벗과 부로콜리를 함께 담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십 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아무 변화 없이 흘렀고, 그 곁에 석조 탑 같은 것이 보태졌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는 장식적인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잘못의 원인이었다. 벼락을 맞아 타버렸어야 했다.
장중한 두 건물은 통해 이어져 있었고 그것은 또다시 일직선으로 별관으로 이어졌다. 그 별관이라는 것이 또 기묘한 건물이었는데, 적어도 거기에선 일관된 테마를 느낄 수 있었다. '사상의 상반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한 마리의 당나귀가 좌우에 같은 양의 꼴을 놓고 어느 쪽부터 먹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한 채 굶어 죽어 가는, 그런 종류의 비애가 그 건물에는 감돌고 있었다.
안채 왼편에는 그와 대조적으로 다이라(平) 가문이 권세를 휘두르던 시대(일본의 중세 시대에 해당)의 일본식 가옥이 길게 뻗어 있었다. 울타리와 잘 손질된 소나무가 있었으며, 고급스런 복도가 볼링장의 레인처럼 쭉 뻗어 있었다. 어쨌든 그만한 건물이 예고편이 있는 동시 상영 영화 세 편처럼 언덕 위에 펼쳐진 풍경은 꽤 볼 만했다. 만약에 그것이 누군가의 취가와 졸음을 떨쳐 버리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설계된 것이었다면, 그 의도는 제대로 들어맞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다양한 시대가 낳은 다양한 이류의 재능이 막대한 돈과 결부되어야 이런 풍경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정원과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운전사가 바로 내 곁에 서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동작이었다. 아마도 그가 데리고 온 모든 손님이 나와 똑같은 장소에 오랫동안 서서, 똑같이 멍하니 주위의 풍경을 바라본 모양이었다.
"둘러 보시려면 천천히 보십시오. 아직 8분가량 여유가 있으니까요"라고 그는 말했다.
"굉장히 넓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 이외에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3,250평이 됩니다."라고 운전사가 대꾸했다.
"활화산이라도 있으면 어울리겠군."하고 나는 농담을 해보았다. 그러나 물론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아무도 농담 따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8분이 지나갔다.
내가 안내된 곳은 현관 바로 오른편에 있는 다다미 여덟 장정도 크기의 서양 식 방이었다. 천장은 굉장히 높고, 벽과 천장이 맞닿는 경계선에는 빙 둘러 조작이 되어 있었다. 세월을 느끼게 하는 차분한 분위기의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리얼리즘의 극치라고 할 만한 정물화가 걸려 있었다.
사과와 화병과 페이퍼 나이프, 화병으로 사과를 쪼개고 나서 페이퍼 나이프로 껍질을 벗기는지도 모른다. 씨와 속은 화병에 넣어 두면 된다. 창에는 두꺼운 천으로 된 커튼과 레이스 커튼이 이중으로 쳐져 있었고, 둘 다 같은 색의 끈으로 걷어 올려 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비교적 괜찮은 부분의 정원이 보였다. 졸참나무 바닥인 마룻바닥은 알맞은 빛깔로 윤이 났다. 바닥의 절반을 차지하는 카펫은 낡은 색조에도 불구하고 털은 아주 튼튼했다.
나쁘지 않은 방이었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
기모노를 입은 나이 지긋한 가정부가 방으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포도 주스 잔을 하나 놓고 나갔다. 그녀의 뒤에서 문이 찰카닥 하고 닫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테이블 위에는 차 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은제 라이터와 담배 케이스와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전에 본 것과 똑같은 양의 문장이 새 겨져 있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내 필터 담배를 꺼내 은제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에 높은 천장을 향해서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포도 주스를 마셨다. 10분 후에 다시 한 번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키 큰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잘 오셨습니다."라고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라고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남자는 말없이 내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품평이라도 하듯이 한동안 바라보았다. 확실히 내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남자에게는 표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 제5장 ☆☆☆
쥐로부터의 편지와 뒷이야기
고맙게도(정말로 고마운 일이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던져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이 기분은 말할 수 없이 근사해. 내던질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 정도지. 나를 내던진다는 생각도 그다지 나쁘지 않군.
1. 쥐의 첫 번째 편지
1977년 12월21일 소인
잘 있었나?
벌써 꽤 오랫동안 자네를 만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도대체 몇 년이나 됐지?
몇 년일까?
세월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있네. 왠지 납작한 검은 새가 머리 위에서 푸드득거리고 있는 것 같고, 무엇이든 셋 이상을 셀 수가 없다네. 미안하지만 자네가 세어 보기 바라네.
모두에게 아무 말도 않고 거리를 뛰쳐나와 자네에게 적잖이 폐를 끼친 것 같네. 아니면 자네에게도 말없이 떠나와 불쾌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네. 나는 몇 번이나 자네에게 변명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네. 꽤 많은 편지를 썼다가는 찢어 버렸지. 하지만 이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여서, 내 자신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물며 남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나.
아마도.
나는 옛날부터 편지를 잘 못 썼다네.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정반대의 말을 잘못 사용하기도 하지. 그리고 편지를 씀으로써 오히려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네. 게다가 나는 유머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장을 쓰면서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지.
하긴 편지를 잘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편지를 쓸 필요도 없겠지. 왜냐하면 자신의 문맥 속에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네. 문맥 속에서 살아가는 일 따위는 불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몹시 추워서 손이 곱아 있다네. 마치 내 손이 아닌 것 같군. 내 뇌도 내 뇌가 아닌 것 같아. 지금 눈이 내리고 있네. 남의 뇌 같은 눈이야. 그리고 남의 뇌처럼 자꾸자꾸 쌓여 가고 있다네(의미가 없는 문장이지).
추운 것만 빼면 나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네. 그 쪽은 어떤가? 내 주소는 알리지 않았지만, 신경 쓰지 말게. 자네에게 뭔가를 숨기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것만은 알아주기 바라네. 이것은 내게 있어서는 아주 기묘한 문제라네. 자네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면 그 순간부터 내 속에서 뭔가가 변해 버릴 것 같거든.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일세.
자네는 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일을 언제나 잘 이해해 주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네. 그러나 자네가 제대로 이해해 주면 줄수록, 나는 점점 더 제대로 말을 못하게 되는 것 같아. 아마 선천적으로 어딘가 결함이 있나 봐.
물론 누구에게나 결함은 있지.
그러나 내 최대의 결함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결함이 점차 커져 간다는 데에 있다네. 다시 말해서 몸속에서 닭을 기르고 있는 것과 같지. 닭이 알을 낳고, 그 알이 다시 닭이 되고, 그 닭이 또 알을 낳는 거야. 그런 식으로 그런 결함을 안은 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물론 살아갈 수 있겠지. 결국은 그것이 문제지.
어쨌든 나는 내 주소를 쓰지 않겠네. 아마 그게 더 나을 거야. 내 자신에게도 자네에게도 말이야.
아마 우리는 19세기의 러시아에서나 태어났어야 했는지도 몰라. 나는 무슨무슨 공작, 자네는 무슨무슨 백작이고, 둘이서 사냥도 하고 결투도 하고 사랑의 쟁탈전도 벌이고, 형이상적인 고민도 하고 흑해 주변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기도 하는 거지. 그리고 노년에는 '무슨무슨 난(亂)'에 연루되어 둘이 함께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거기서 죽는 거야.
멋있다고 생각지 않나? 나도 19세기에 태어났다면 좀 더 훌륭한 소설다운 소설 을 쓸 수 있었을 텐데. 도스토예프스키 정도는 못되더라도. 아마 그에 가까운 이는 되었을 거야.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자네는 그저 무슨무슨 백작 이었을지도 모르지. 그저 무슨무슨 백작이라는 것도 괜찮지 않나? 어딘지 19 세기 적이거든.
하지만 이제 그만두세. 20세기로 돌아가자고.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우리가 태어난 거리가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거리야.
세계에는 참으로 다양한 거리가 있지. 그 거리마다에는 저마다의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나를 매혹시킨다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상당히 많은 거리를 지나쳐 왔다네.
아무런 계획 없이 되는대로 아무 역에 내리면 작은 로터리가 있고, 그곳에 개가 있고, 상점가가 있지. 어디나 똑같아. 개의 생김새까지 똑같지. 우선 그 거리를 한 바퀴 빙 돌아보고 나서 복덕방에 들어가 싸구려 하숙집을 소개받는 거야. 물론 나는 타지 사람이고, 작은 거리는 배타적이라서 금방은 믿어 주지 않지. 하지만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마음만 먹으면 꽤 붙임성 있게 굴 수 있네. 그래서인지 15분 안에 웬만한 사람과는 친해질 수 있거든. 그렇게 하여 거처를 마련하고 그 거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보도 얻는다네.
그 다음은 일거리 찾기라네. 이것 역시 여러 사람과 친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자네라면 아마 진절머리를 내겠지만(나도 나름대로 지겹다네), 어차피 기껏해야 서너 달 살 텐데 누구와 친해지든 그게 그거지.
우선 그 거리의 젊은 친구들이 모이는 찻집이나 스낵 바 같은 데를 찾은 다음(어느 거리에나 그런 곳은 있게 마련이지. 그 거리의 배꼽 비슷한 거라네), 그 집의 단골이 되고, 아는 사람을 만들어서 일을 소개받는 거야. 물론 이름이나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적당히 꾸며대는 거지. 그런 연유로 해서, 나는 이제는 자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이름과 프로필을 가지고 있다네. 가끔 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 조차 잊어버릴 정도라네.
일만 해도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봤지. 대개는 따분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하는 건 즐거워. 가장 많이 한 것은 주유소 일일 거야. 그 다음이 스낵바의 바텐더. 서점에서 점원일도 했고, 방송국에서 일한 적도 있지. 막노동도 했고 화장품 세일즈도 했네. 세일즈맨으로서의 나는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그리고 여러 여자와 잤지. 서로 다른 이름과 다른 프로필로 여자와 자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
대충 이런 생활을 반복했지.
그리고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됐네. 이제 아홉 달만 있으면 서른 살이 되겠지. 이런 생활이 내게 어울리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방랑기가 있는 성격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네. 누군가 썼듯이, 오랜 방랑 생활에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성향, 즉 종교적인 성향, 예술적인 성향, 정신적인 성향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르지. 그중 하나라도 갖추지 않으면 오랜 방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네(굳이 하나를 말한다면······. 아니야. 그만두지).
어쩌면 나는 문을 잘못 연채 그대로 물러설 수 없게 된 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기왕 열었으니 잘해 봐야 되지 않겠나. 왜냐하면 언제까지나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만은 없는 일이니까.
대충 이런 이야길세.
처음에도 말했듯이(말했었나?), 자넬 생각하면 나는 좀 불안해진다네. 자넬 생각하면 내가 그런대로 정상적일 때의 일들이 떠오르기 때문인가 봐.
(추신)
내가 쓴 소설을 동봉하네. 내게는 이제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적당히 처리해 주게.
이 편지가 12월 24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속달로 보내네. 제대로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생일 축하하네.
그리고 화이트 크리스마스
쥐의 편지는 세밑도 임박한 12월 29일에 내 아파트 우편함에 꼬깃꼬깃해진 채 처박혀 있었다. 반송 쪽지가 두 장이나 붙어 있었다. 수신인의 주소가 옛날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알릴 길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연두색 편지지 넉 장에 깨알같이 쓰인 편지를 세 번이나 읽어 보고 나서, 봉투를 손에 들고 반쯤 희미해진 소인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내가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는 고장의 소인이었다.
나는 책꽂이에서 지도를 꺼내 그 고장을 찾아보았다. 쥐의 편지 글로 보아 혼슈(일본 열도의 주가 되는 섬. 본토)의 북단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그 곳은 아오모리 현에 있었다. 아오모리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걸리는 작은 고장이다. 아침에 두 번, 낮에 한 번, 저녁에 두 번. 12월의 아오모리라면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그곳은 신호등이 얼어 버릴 정도로 굉장히 춥다.
나는 그 편지를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불쌍한 사람이군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불쌍한 사람들이군요."라고 말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원고지 200매 가량 되는 소설은 제목도 보지 않고 책상 서랍에 쑤셔 넣었다. 왠지 읽고 싶지 않았다. 편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난로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세 개비 피웠다.
쥐에게서 다음 편지가 온 것은 이듬해 5월이었다.
2. 두 번째 쥐의 편지
소인은 1978년 5월
지난번 편지에서 내가 좀 말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깡그리 잊어버렸다네.
나는 다시 장소를 옮겼지. 이번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네. 아주 조용한 곳이야. 내게는 지나치게 조용한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게 있어서 하나의 종결점이지. 나는 이곳에 와야만 했기 때문에 온 것 같기도 하고, 또 모든 흐름을 기억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은 생각도 든다네. 나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어.
이건 형편없는 문장이야. 너무도 막연해서, 아마 자넨 무슨 말인지 통 알 수 가 없겠지. 아니면 자네는 내가 자신의 운명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물론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지.
그러나 내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자네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 문장이 이런 식으로 형편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자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 정상이라네. 이런 적이 없었을 만큼 정상이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겠네.
이 근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주 조용하네.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매일 책을 읽으며(여기에는 10년이 걸려도 다 읽지 못할 정도의 책이 있어) FM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이나 레코드(여기에는 레코드도 상당히 많아)를 듣고 있다네. 이처럼 한꺼번에 몰아서 음악을 듣는 게 무려 10년 만이군. 롤링 스톤스라든가 비치보이스가 아직도 활약하고 있다니 놀랍군. 시간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이어져 있는 건가 봐. 우리는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서 시간을 습관적으로 잘라 내버리니까 자칫 착각하기 쉽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확실히 이어져 있네. 여기에는 자신의 사이즈라는 것이 없어. 따라서 제 사이즈에 맞춰서 남의 사이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칭찬하거니 비방하는 친구들도 없다네. 시간은 투명한 강처럼 있는 그대로 흐르지.
여기에 있다 보면 가끔 내 원형질마저 해방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네. 즉 나는 문득 아무 생각 없이 자동차에 시선을 보내는데, 그것이 자동차라는 걸 인식하기가지 몇 초가 걸릴 때가 있지. 물론 어떤 종류의 본질적인 인식은 있지만, 그것이 경험적인 인식과 제대로 교차되지 않아. 최근 들어 그런 일이 조금 잦아졌어. 아마 오랫동안 혼자서 외롭게 지냈기 때문일 거야.
여기서 제일 가까운 마을까지 차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네. 아니, 마을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되지. 아주 작은 마을의, 그것도 잔해(殘骸)라네. 아마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거야. 그래도 그런대로, 어쨌든 마을은 마을이지. 의류라든가 식료품, 휘발유 따위를 살 수 있지. 만약 보고 싶다면 사람의 얼굴도 볼 수 있네. 겨울 동안에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서 차는 거의 다닐 수 없게 된다네. 도로 주의가 습지대라 지표 그 자체가 셔벗처럼 얼어붙어 버리는 거야. 그리고 그 위에 눈이 내려서 어디가 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지. 이 세상의 종말 같은 경지라네.
나는 3월 초에 처음 이 고장에 왔네. 지프의 바퀴에 체인을 감고, 그런 풍경 속을 지나온 거야. 마치 시베리아로 유형 가는 것처럼 말이야.
지금은 5월이어서 눈도 말끔히 녹았다네. 4월에는 산골짜기에서 줄곧 눈사태 소리가 들려 왔지. 자네는 눈사태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나? 눈사태가 그친 다음에는 정말 완벽한 침묵이 찾아온다네.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릴 정도로 완벽한 침묵이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
산속에 줄곧 갇혀 있었기에 나는 이래저래 벌써 석 달이나 여자와 자지 못했다네. 그런대로 괜찮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인간 그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릴 것 같아.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좀 더 따뜻해지면 직접 나서서 어딘가에서 여자를 찾아내려고 마음먹고 있어. 자랑은 아니지만, 내게 있어서 여자를 물색한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어쩐지 나는 '마음만 먹으면'이라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섹스어필 비슷한 것을 꽤 발휘할 수가 있거든. 그래서 비교적 쉽게 여자를 구할 수 있다네. 문제는 나 자신이 그런 능력에 익숙해 지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다시 말해서 어느 단계까지 가면 어디까지가 내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내 섹스어필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거야. 어디부터가 로렌스 올리비에고 어디서부터가 오셀로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도중에 미처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되어 이것저것 모조리 내던져 버리게 된다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거지. 이제까지의 내 인생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일의 끝없는 반보이었어.
고맙게도(정말로 고마운 일이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던져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네. 이 기분은 말할 수 없이 근사해. 내던질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 정도지. 나를 내던진다는 생각도 그다지 나쁘지 않군. 아니, 이런 글은 약간 감상적인 것 같군. 사고방식으로서는 조금도 감상적이지 않은데, 글로 쓰고 보면 감상적이 되네.
난처한 일이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여자에 대해서였던가.
여자들에겐 예쁜 서랍이 달려 있고 그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지. 나는 그런 것이 아주 좋아. 나는 그런 잡동사니 하나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내 줄 수가 있다네. 섹스어필의 본질이란 요컨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무것도 되는 일은 없지. 그 다음은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지금 섹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네. 흥미를 섹스라는 한 점으로 압축하면, 감상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지.
흑해 주변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야.
여기까지 다시 읽어 보았네. 약간 이치에 맞지 않는 데도 있지만 나로서는 정직하게 쓴 것 같네. 무엇보다도 지루한 것이 좋군.
게다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에게 쓰는 편지조차 아닌 것 같네. 이건 아마 우체통에게 보내는 편지일 거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지 말아 주게. 여기에서는 우체통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지프로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네.
여기서부터는 진짜 자네에게 쓰는 편지야.
자네에게 두 가지 부탁이 있네. 둘 다 서둘러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자네 마음이 내킬 때 처리해 주면 돼. 자네가 그렇게 해주면 내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 아마 석 달 전이라면, 자네에게 무엇 하나 부탁할 수가 없었을 걸세. 그러나 지금은 자네에게 무엇이든 부탁할 수가 있네.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진보지.
첫 번째 부탁은 감상적인 것이라네. 즉 '과거'에 관한 부탁이야. 나는 5년 전에 그 거리를 떠날 때,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다급했던 탓에 몇몇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네와 J, 그리고 자네가 모르는 한 여자야. 자네에게는 다시 한 번 만나서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다시는 작별 인사를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만약 자네가 그 거리로 돌아갈 일이 있다면, 내가 보내는 작별 인사를 그들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네.
물론 이것이 아주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네. 내가 직접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자네가 돌아가서 그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주었으면 하네. 그 편이 내가 직접 편지를 쓰는 것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녀의 주소와 전화번호는 따로 적어 두었네. 만약 이사를 했거나 결혼을 했다면 그것으로 됐네. 만나지 말고 그냥 돌아와 주게. 그러나 지금도 같은 주소에 살고 있다면, 그녀를 만나서 내 인사를 대신 전해 주게. 그리고 J에게도 잘 전해 주게. 내 몫의 맥주까지 마시게나.
또 한 가지는 약간 색다른 부탁이야.
한 장의 사진을 동봉하네. 양의 사진이지. 이것을 어디라도 좋으니까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내놓아 주기 바라네. 이것도 너무 제멋대로인 부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네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 내 섹스어필을 몽땅 자네에게 넘겨도 좋으니, 이 부탁만은 들어주었으면 하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사진은 내게는 중요한 것이거든. 언젠가 훗날에 설명할 때가 올 거야.
수표를 동봉하네. 필요할 때 쓰게. 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여기에 있으면 돈 쓸 데가 없어 고민일 지경이고,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부디 내 몫의 맥주 마시는 일을 잊지 말게나.
반송 사유를 적은 쪽지를 떼어 보니, 소인은 읽을 수 없었다. 봉투 속에는 10만 엔짜리 은행 수표와 여자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쪽지, 양이 찍힌 흑백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나는 집을 나올 때 그 편지를 우편함에서 꺼내 들고 회사에 와 책상에 앉아 그것을 읽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연두색 편지지였고, 수표는 삿포로에 있는 은행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쥐는 홋카이도로 건너간 모양이다.
눈사태에 관한 내용은 왠지 얼른 와 닿지 않았지만, 쥐 자신이 썼듯이 전체적으로는 매우 솔직하게 쓴 편지였다. 게다가 농담으로라도 10만 엔짜리 수표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거기에 편지를 봉투째 넣어 두었다.
그때는 아내와의 관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던 탓도 있어 내게는 그다지 신통치 않은 봄이었다. 그녀는 벌써 나흘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냉장고 속에서는 우유가 고약한 냄새를 뿜어내고, 고양이는 항상 배고파하고, 세면대에 놓여 있는 그녀의 칫솔은 화석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그런 집 안에 아련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햇빛만은 언제나 무료다.
길고 긴 막다른 골목 아마 그녀가 말한 대로일 것이다.
3. 노래는 끝났다.
나는 6월에 거리로 돌아왔다.
나는 적당한 이유를 꾸며 사흘간의 휴가를 얻은 후, 화요일 아침에 혼자서 신칸센을 탔다. 흰색 반팔 스포츠 셔츠와 무릎에 구멍이 나기 직전인 초록색 면바지, 흰색 테니스 화, 짐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면도하는 것조차도 잊어 버렸다. 오랜만에 신은 테니스화의 뒤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뚤게 닳아 있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몹시 부자연스럽게 걷고 있었던 모양이다.
짐도 들지 않고 열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건 멋진 일이었다. 마치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는 동안에 시공(時空)의 일그러짐 속에 휘말려 버린 뇌격기(어뢰를 발사하여 적의 군함을 공격하는 비행기) 같은 기분이다. 거기에는 완벽하게 아무것도 없다. 치과의 진료 예약도 없고, 책상 서랍 속에서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문제도 없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을 만큼 얽혀 버린 인간관계도 없다. 신뢰감이 강요하는 하찮은 호의도 없다.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을 일시적인 나락(奈落)의 밑바닥으로 쓸어 넣어 버리고 온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무창이 비뚤게 닳아 버린 낡은 테니스 화, 그뿐이다. 그것은 또 다른 시공에 대한 막연한 기억처럼 내 두 발에 단단히 매달려 있지만, 그것도 그리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런 것은 몇 개의 캔 맥주와 물기 없이 바싹 마른 햄 샌드위치가 날려 보내 준다.
4년 만에 거리로 돌아왔다. 4년 전에는 내 결혼에 관한, 말하자면 사무적인 절차를 위해서 돌아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무적인 절차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을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았다는 데서 무의미한 여행이었다. 요컨대 사고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끝나 버린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저 그뿐인 것이 선로의 앞 쪽으로 가면 매우 큰 차이를 갖게 된다.
그 이후로 나에게 '거리'란 없다. 내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도 내가 찾길 원하지 않는다.
캔 맥주를 두 개 마시고 나서 30분가량 잤다. 눈을 떴을 때에는 처음에 느꼈던 홀가분한 해방감은 이미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열차가 나아감에 따라 하늘은 장마철의 우중충한 회색으로 뒤덮여 갔고, 그 밑으로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따분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그런 따분함에서 벗어 날 수는 없다. 반대로 속력을 내면 낼수록 우리는 따분함의 한복판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따분함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20대 중반의 샐러리맨은 꼼짝도 하지 않고 경제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삼색 여름 양복에 검은 구두. 세탁소에서 막 찾아온 듯한, 흰 셔츠. 나는 열차의 천장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비틀스가 취입한 곡의 곡명을 차례차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일흔세 번째에서 멈춰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폴 매카트니는 대체 몇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잠깐 창밖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고, 앞으로 여섯 달만 있으면 나의 20대는 막을 내린다.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10년간이었다. 내가 얻은 가치는 없고,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은 무의미했다. 내가 거기서 얻은 건 무료함뿐이었다.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내 마음을 흔들고, 내 마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마저 흔드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잃어야 했기에 잃은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말고 나에게 무슨 방법이 있었을 까?
적어도 나는 살아남았다. 좋은 인디언은 모두 다 죽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역시 오래 살아야만 했다.
무엇 때문에?
돌담에게 전설을 전하기 위해서?
설마.
"왜 호텔 같은 데에 묵는 거야?"
내가 종이 성냥 뒤에 호텔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주자, J는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자네 집이 있으니까 거기서 묵으면 되잖아."
"아젠 내 집이 아니야"라고 나는 말했다.
J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앞에 마른안주를 세 가지 놓고 맥주를 반쯤 마시고 나서, 쥐의 편지를 꺼내 J에게 건네주었다. J는 수건으로 손을 닦은 다음 두 통의 편지를 대충 훑어보고 나서 한 번 천천히 차근차근 읽었다.
그는 놀랍다는 듯이
"흐흠 살아 있긴 했구나"하고 말했다.
"살아 있다마다."라고 나는 대꾸하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면도를 좀 하고 싶은데 면도기와 세이빙 크림을 빌릴 수 있을까?"
J는 "괜찮고말고."라고 하며 카운터 밑에서 휴대용 세트를 꺼내 주었다.
"세면대에서 하면 되지만, 더운물은 안 나올 거야."
"찬물이면 어때. 바닥에 술 취한 여자가 뒹굴고 있지만 않다면 말이야. 면도에 방해가 되거든"이라고 나는 말했다.
제이스 바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옛날의 제이스 바는 국도 옆의 낡은 건물 지하에 있는 작고 습한 가게였다. 여름밤에는 에어컨디셔너의 바람이 미세한 안개가 될 정도였다. 오래 마시고 있노라면 셔츠까지 축축해졌다.
J의 본명은 길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중국 이름이었다. J라는 이름은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미군 기지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미군 병사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본명은 잊혀졌다.
내가 오래 전에 J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는 1954년에 미군기지의 일을 그만두고 그 근처에서 작은 바를 열었다. 그것이 최초의 제이스 바였다. 장사는 꽤 잘됐다. 손님의 대부분은 공군의 장교 급이어서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가게가 자리를 잡았을 무렵 J는 결혼했는데 5년 후에 아내가 죽었다. 사인(死因) 에 대해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격렬해졌을 무렵인 1963년 J는 가게를 팔고, 멀리 떨어진 나의 '거리'로 왔다. 그리고 그 곳에서 2대째 제이스 바를 열었다.
그것이 내가 J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고,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고,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나는 쥐를 알기 전에는 언제나 혼자서 제이스 바에 다녔다. 나는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담배를 피웠고,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고는 레코드를 들었다. 그 무렵의 제이스 바는 정말이지 한산한 편이어서, 나와 J는 카운터 너머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통 생각나지 않는다. 말수 적은 열일곱 살짜리 고등학생과 홀아비 중국인 사이에 도대체 무슨 화젯거리가 있었을까?
내가 열여덟 살 때 거리를 떠나자 쥐가 그 뒤를 이어서 맥주를 마셨다. 1973년에 쥐가 거리를 떠나 버리자, 그 뒤를 잇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반년 후에는 도로 확장 때문에 가게도 이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2대째 제이스 바를 둘러싼 우리의 전설은 끝났다.
3대째 제이스 바는 예전의 건물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강변에 있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엘리베이터까지 딸린 새로 지은 4층 건물의 3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이스 바에 간다는 게 왠지 기분이 묘했다. 카운터의 자리에서 거리의 야경이 바라보인다는 것도 묘했다.
새 제이스 바의 서쪽과 남쪽으로는 커다란 창이 나 있어 그걸 통해 산줄기와 이전에는 바다였던 곳이 바라다 보였다. 바다는 몇 년 전에 완전히 메워져 그 자리에는 묘비 같은 고층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는 한동안 창가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고 나서 카운터로 돌아왔다.
"옛날엔 바다가 보였지"라고 나는 말했다.
J는 "그랬지"라고 대꾸했다.
"자주 거기서 헤엄치곤 했는데"
J는 "그래"라며 담배를 물고 무거워 보이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기분은 이해해. 산을 허물고 집을 짓고, 그 흙을 바다로 가져다가 메우고 거기에 집을 지은 거야. 그런 일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거든."
나는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보즈 스캣구즈의 새 히트송이 흐르고 있었다. 주크박스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홀에 있는 손님의 대부분이 대학생 커플로, 그들은 말쑥한 차림으로 물 탄 위스키나 칵테일을 한 모금씩 얌전하게 마시고 있었다. 엉망으로 취한 여자아이도 없었고, 짜릿한 주말의 떠들썩함도 없었다.
틀림없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파자마로 갈아입고, 깨끗이 이를 닦고 자겠지.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괜찮은 일이다. 산뜻하다는 것은 대단히 근사하다. 애당초 세계에도 바에도 사물의 바람직한 모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J는 그러는 동안 줄곧 내 시선을 쫓고 있었다.
"어때, 가게가 달라져서 어수선하지?"
"그렇지 않아. 혼돈이 그 모양을 바꾸었을 뿐이지. 기린과 곰이 모자를 맞바꾸고, 곰과 얼룩말이 목도리를 서로 바꾼 거야"하고 내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여전하군."하며 웃었다.
내가 "시대가 바뀐 거지"라고 말했다.
"시대가 바뀌면 여러 가지가 바뀌는 법이지. 하지만 결국은 그걸로 된 거야. 모든 게 뒤바뀌는 거니깐.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지."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새 맥주를 마시고, 그는 새 담배를 피웠다.
J는 "생활은 어때?"하고 물었다.
"나쁘지 않아"라고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부인과는 어때?"
"글쎄, 모르겠어. 사람과 사람의 일이니까 말이야. 잘될 것 같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 부부란 그런 거 아닌가?"
J는 "글쎄"라고 말하며 난처하다는 듯이 새끼손가락 끝으로 코를 긁었다.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 까맣게 잊어버렸어. 까마득한 옛날 일이거든."
"고양이는 잘 있어?"
"4년 전에 죽었어. 자네가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 돼서던가. 장에 탈이 나서······. 하지만 사실은 죽을 때가 됐던 거지. 자그마치 12년이나 같이 살았으니까. 마누라와 살았던 기간보다 길었거든. 12년을 살았다면 굉장하지 않아?"
"그렇군."
"산 위에 동물용 공원묘지가 있어서 거기에 묻었어. 고층 건물이 내려다보이지. 이제 이 고장에서는 어디를 가도 고층 건물 밖에 안 보여. 하긴 고양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말이야."
"허전하지?"
"응, 그야 허전하지. 어떤 사람이 죽더라도 그처럼 허전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비정상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J가 다른 손님을 위해서 칵테일과 시저스 샐러드를 만드는 동안, 나는 카운터 위에 있던 북유럽제 퍼즐을 가지고 놀았다. 세 마리의 나비가 클로버 위를 날고 있는 도형을 유리 상자 속에서 조립하는 것이었는데, 10분 정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내던졌다.
J가 "아이는 갖지 않을 거야?"라고 돌아와서 물었다.
"이제는 슬슬 가져도 될 나이 아니야?"
"갖고 싶지 않아."
"그래?"
"왜냐하면 나 같은 아이가 태어나면 분명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 할 테니까."
J는 이상하다는 듯이 웃으며 내 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자네는 너무 앞질러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교체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을 더 허물어서 바다를 메우고, 더 빨리 달리는 차가 발명되고 더 많은 고양이가 치어 죽어. 그뿐 아니겠어?"
"그건 사물의 어두운 면이지. 좋은 일도 일어나고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거든."
"세 가지씩 예를 들어주면 믿어 주지"라고 나는 말했다.
J는 잠깐 생각하더니 웃었다.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자네들 아이들의 세대지, 자네들은 아니야. 자네들 세대는······."
"이미 끝났다 이건가?"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야"라고 J는 말했다.
"노래는 끝났다. 그러나 멜로디는 아직 울려 퍼지고 있다."
"자네는 언제나 말을 잘하는군."
나는 "왜 아니꼬워?"하고 대꾸했다.
제이스 바가 혼잡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나는 J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홉 시였다. 찬물로 면도를 한 자리가 아직도 따끔거렸다. 애프터 세이브 로션 대신 모드카 라임을 바른 탓도 있었다. J의 말에 의하면 그게 그거라지만, 얼굴에서 온통 보드카 냄새가 났다.
밤은 기묘하게 포근했고,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있었다. 습한 남풍이 천천히 불고 있었다. 여느 때와 똑같았다. 바다 냄새와 비가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일대는 나른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천 부지의 풀숲에서는 벌레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내리고 있는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인데도 몸이 흠뻑 젖어 버릴 것 같이 가는 비말이다.
수은등의 아련한 흰 불빛으로 강이 흐르는 게 보였다. 복사뼈까지 밖에 안 오는 얕은 물살이었다. 물은 예전과 다름없이 맑았다. 산에서 직접 흘러내려오기 때문에 오염될 리도 없었다. 강바닥은 산에서 운반되어 오는 자갈과 부드러 운 모래로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에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폭포가 있었다. 폭포가 밑의 웅덩이에서는 작은 물고기가 놀고 있었다.
물이 적은 시기에는 물줄기가 고스란히 모래땅으로 빨려 들어가, 나중에는 약간의 습기를 지닌 하얀 모래 길만이 남는다. 나는 산책하는 김에 그런 길을 상류까지 더듬어가 물줄기가 강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지점을 찾곤 했었다. 거기서는 마지막 가느다란 한 줄기가 뭔가를 찾아낸 것처럼 갑자기 멈췄다가 다음순간에는 사라져 버리곤 했다. 땅의 밑바닥 어둠이 그들을 살짝 삼켰다.
강을 따라 난 길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었다. 물줄기와 함께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강의 숨결을 느낀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바로 이 거리를 만든 장본인이다. 몇 만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그들은 산을 허물고 흙을 나르고 바다를 메워, 그곳에 나무들이 우거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거리는 그들의 것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이다.
장마 덕분에 물줄기는 강바닥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계속 바다까지 이어졌다. 강을 따라서 심어진 나무들의 어린 잎 냄새가 났다. 그 푸름이 주변의 공기 속에 차분히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잔디 위에는 몇 쌍의 커플이 어깨를 서로 맞대고 있거나 노인이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초여름 밤이었다.
나는 도중에 있던 가게에서 산 캔 맥주 두 개를 봉지에 담아 가지고, 그것을 들고 바다까지 걸어갔다. 강물은 약간 후미지거나 반쯤 매립된 운하 같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너비 50미터 가량으로 잘려진 옛날 해안선의 흔적이었다. 모래톱은 옛날 그대로의 모래톱이었다. 낮은 파도가 일어, 둥근 나무토막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 콘크리트 방파제에는 못이 박힌 채 있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로 쓰인 낙서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었다. 50미터 정도만 남은 그리운 해안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높이 10미터나 되는 높은 콘크리트 벽 사이에 꼭 끼여 있었다. 그리고 벽은 그 좁은 바다를 사이에 낀 채 몇 킬로미터나 저쪽까지 똑바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바다는 50미터 정도만 남겨 놓고 완벽하게 말살되어 있었다.
나는 강을 떠나 이전의 해안 도로를 따라서 동쪽으로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낡은 방파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바다를 잃은 방파제는 왠지 기묘한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 나는 예전에 자주 차를 세우고 바다를 바라보던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방파제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셨다.
바다 대신 매립지와 고층 아파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굴곡 없이 밋밋한 아파트들은 공중 도시를 만들려다가 그대로 방치된 불행한 다리 위에 걸쳐진 도리처럼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철부지 아이들처럼도 보였다.
각 동(棟) 사이를 누비듯이 아스팔트 도로가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군데군데에 거대한 주차장과 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슈퍼마켓이 있고, 주유소가 있고, 넓은 공원이 있고, 번듯한 집회장이 있었다. 모든 게 새롭고, 부자연스러웠다.
산에서 운반된 흙은 매립지 특유의 으스스 추워 보이는 빛깔을 띠고 있었고, 아직 구획 정리되지 않은 부분은 바람에 실려 온 잡초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잡초는 놀랄 만한 속도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서 인위적으로 옮겨진 나무들이나 잔디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처에 잠입하려고 했다.
서글픈 풍경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는 이미 새로운 규칙이 세워져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두 개의 캔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이전에는 바다였던 매립지를 향해서 빈 깡통을 하나씩 힘껏 내던졌다. 빈 깡통은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가 있는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다 피워 갈 때 손전등을 든 사내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마흔 살 안팎으로 보였고, 회색 셔츠와 회색 바지에 같은 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틀림없이 지역시설의 경비원일 것이다.
"아까 뭔가를 던졌지요?"라고 사나이는 내 곁에 서서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요."하고 나는 대답했다.
"무엇을 던졌지요?"
"둥글고, 금속으로 되어 있고, 뚜껑이 있는 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경비원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왜 던졌지요?"
"이유 같은 건 없어요. 12년 전부터 계속 던지고 있지요. 반다스를 한꺼번에 던진 적도 있는데 아무도 시비를 걸지는 않았거든요."
"옛날은 옛날이요. 지금 이곳은 시유지고, 무단으로 시유지에 쓰레기를 버리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경비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잠깐 동안 가만히 있었다. 몸속에서 순간 뭔가가 떨리더니 멎었다.
"문제는 당신 말이 다 맞는다는 것이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내 말에 사내는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워 오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어두운 데다가 비도 뿌리기 시작했으니.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뭘 던지지 마시오."
"다시는 던지지 않겠소. 잘 가시오"라고 나는 말했다.
경비원도 "잘 가시오"라고 하며 갔다.
나는 방파제 위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비원이 말한 것처럼 슬슬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더 피우고 조금 전 경비원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10년 전의 나는 좀 더 터프 했던 것 같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다.
강을 따라 난 도로로 되돌아와 택시를 잡아탔을 무렵에는 안개 같은비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호텔로 가자고 말했다.
초로의 운전사는 "여행 중이신가요"라고 물었다.
"네."
"여기는 처음이세요?"
"두 번째예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4. 그녀는 솔티 독을 마시면서 파도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제게요?"라고 그녀는 반문했다.
전화감이 이상하게 먼데다가 혼선이 되어 필요 이상으로 큰소리로 말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서로의 말에서 미묘한 뉘앙스가 상실되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서 코트 깃을 세우면서 이야기하는 듯한, 형편이었다.
"사실은 저에게 보낸 편지지만, 어쩐지 댁한테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요?"
"그렇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말해 버리고 나니 내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에 혼선이 사라졌다.
"당신과 쥐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쥐에게서 당신을 만나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전화를 한 겁니다. 당신이 편지를 읽어보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도쿄에서 여기까지 오셨나요?"
"그런 셈이지요."
그녀는 기침을 하고 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친구라서 예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저한테 직접 쓰지 않았을까요?"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저도 모르겠네요. 이제는 모두 다 끝나 버린 게 아닐까요? 혹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요?"
나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호텔의 침대에 벌렁 누워서 수화기를 든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다 밑바닥에 드러누워서 물고기의 그림자를 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몇 마리까지 세어야 다 세는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이가 사라져 버린 건 5년 전으로, 그때 전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아주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마치 우물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렸다.
"5년이나 지나면 모든 일들은 완전히 변해 버리게 마련이죠."
"그렇겠죠."라고 나는 수긍했다.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요.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이미 아무데도 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나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나는 대꾸했다.
우리는 그대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게 언제지요?"
"5년 전 봄, 그가 자취를 감추기 얼마 전이에요."
"그는 떠나기 전에 당신한테 무슨 말을 했나요? 즉 떠나는 이유라든가······."
"아뇨"라고 나는 말했다.
"말없이 사라져 버린 거군요?"
"그런 셈이지요."
"그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말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말입니까?'
"그래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기댔다.
"글쎄요. 아마 반년쯤이면 싫증이 나서 돌아오려니 생각했지요. 무슨 일을 오래 계속하는 타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돌아오지 않았다 이거군요."
"그렇지요."
그녀는 전화 저편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귓전에서 그녀의 조용한 숨결이 계속됐다.
"지금 어디에 묵고 계시지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호텔입니다."
"내일 다섯 시에 호텔의 커피 하우스로 가겠어요. 8층 말이에요. 괜찮겠죠?"
"알았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저는 흰 스포츠 셔츠에 초록색 면바지를 입겠습니다. 머리는 짧고······."
그녀는 조용하고 침착한 말투로
"짐작이 가니까 됐어요."하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짐작이 간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았다. 알 수 없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일이 무수히 많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해지는 건 아닌가보다 어떤 러시아 작가가
"성격은 조금씩 변하지만 평범함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한 적이 있다. 러시아인은 가끔 아주 재치 있는 말을 한다. 겨울 동안에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샤워를 하며 비에 젖은 머리를 감고 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른 채 잠수함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오래된 미국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함장과 부함장이 으르렁거리고 있는데다가 잠수함은 너무 낡았고, 누군가는 폐소 공포증에까지 걸렸다는 참담한 줄거리였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 이렇게 마지막에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라면 전쟁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듯싶은 느낌의 영화였다. 이러다가는 핵전쟁으로 인류는 멸망했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는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끄고 잠자리에 든 지 10초 만에 잠들었다.
가랑비는 이튿날 다섯 시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네댓새 동안 활짝 갠 초여름 날씨가 계속되어 이제는 장마가 끝났나 보다고 생각하던 참에 내린 비였다. 8층 창에서 내려다보니 땅바닥의 구석구석까지 검게 젖어 있었다.
고가(高架)로 된 고속도로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차가 몇 킬로미터나 밀려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들은 빗속에서 조금씩 용해되고 있었다. 항구의 제방이 용해되고, 크레인과 늘어선 빌딩이 용해되고, 검은 우산 아래에서 사람들이 용해되어 갔다. 산의 녹음도 용해되면서 소리 없이 기슭으로 퍼져 갔다.
그러나 몇 초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거리는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여섯 대의 크레인은 비 내리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차량 행렬은 생각난 듯이 가끔 동쪽으로 흐르며, 우산을 쓴 무리들은 보도를 가로지르고 있고, 산의 녹음은 만족스러운 듯이 6월의 비를 듬뿍 빨아들이고 있었다. 넓은 라운지 한복판의 한 단 낮게 된 곳에 바다색으로 칠해진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화사한 핑크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아르페지오와 싱커페이션으로 가득 찬 호텔 커피 라운지에 어울릴 만한 전형적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연주였지만, 곡의 마지막 한음이 공중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섯 시가 지났는데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하는 일도 없이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면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스무 살 안팎으로 보였는데, 어깨가지 내려온 풍성한 머리카락은 케이크에 얹은 휘핑크림처럼 단정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머리는 리듬에 맞춰서 기분 좋게 좌우로 흔들렸고, 곡이 끝나면 다시 가운데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곡이 시작 되었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옛날에 알던 한 여자아이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국민 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와 그녀는 나이도 피아노 수준도 엇비슷했으므로 몇 번인가 함께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내가 그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면, 가늘고 흰 손가락과 예쁜 머리와 나풀거리던 원피스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녀의 손가락과 머리와 원피스를 따로 떼어 내어 버려, 그 나머지만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세계는 나와는 관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나와는 관계없이 길을 건너고, 연필을 깎고,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서 1분에 50미터 나아가는 속도로 이동하고, 갈고 닦은 제로의 음악을 커피 라운지에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이 말은 언제나 나에게 코끼리와 거북이가 필사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원반을 생각나게 했다. 코끼리는 거북이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북이는 코끼리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쪽도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이 늦어져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오늘은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우산 꽂이의 열쇠를 내려놓은 다음 메뉴를 보지도 않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그녀의 나이를 한눈에 알 수는 없었다. 만약에 전화로 나이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서른셋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서른셋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서른셋으로 보였다. 만약에 그녀가 스물일곱이라고 했다면 그녀는 스물일곱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옷 입는 취향은 산뜻해서 호감이 갔다. 헐렁한 흰 면바지에 오렌지색과 노란 색이 들어간 체크무늬 셔츠에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가죽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모두 새것은 아니었지만, 잘 손질되어 있었다. 반지도 목걸이도 팔찌도 귀고리도 아무것도 없다. 짧은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옆으로 넘기고 있었다.
눈가의 작은 주름은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단추를 두 개 끄른 셔츠의 깃 사이로 엿보이는 가늘고 흰 목덜미와 테이블에 올려놓은 손등만이 미묘하게 그녀의 나이를 암시하고 있었다. 작은, 정말로 작은 데서부터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간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그것은 조금씩 온몸을 뒤덮어 간다.
"일이라면, 무슨 일인데요?"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설계 사무소예요. 벌써 꽤 오래됐어요."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천천히 꺼낸 다음 천천히 불을 붙였다. 여자가 피아노 뚜껑을 덮고 일어나더니 쉬기 위해서인지 어디론가 나갔다. 나는 아주 조금 그녀가 부러웠다.
"언제부터 그와 친구가 되셨죠?'라고 그녀가 물었다.
"벌써 11년이 되는군요. 당신은?"
"두 달과 열흘"이라고 그녀는 금방 대답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예요. 두 달 열흘. 일기를 쓰고 있어서 기억해요."
오렌지 주스가 나오고 나의 빈 커피 잔이 치워졌다.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세 달 동안 기다렸어요. 12월, 1월, 2월. 제일 추울 때지요. 그 해 겨울은 추웠지요?"
나는 "생각이 안 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이야기하면 5년 전 겨울의 추위가 어제의 날씨처럼 들렸다.
"댁은 그런 식으로 여자를 기다린 적 있으세요?"
"아니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어떤 한정된 시간에 기다리는 일에만 집중하면, 이제 나머지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고 말지요. 그것이 5년이든 10년이든 한 달이든 마찬가지죠."
나는 수긍했다.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반쯤 마셨다.
"처음에 결혼했을 때도 그랬어요. 저는 언제나 기다리는 쪽이었고, 기다리다 지쳐서 결국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되고 말았지요.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스물 둘에 이혼하고는 이곳으로 왔어요."
"제 아내와 같군요."
"뭐가요?"
"제 아내도 스물 하나에 결혼해서, 스물 둘에 이혼했거든요."
그녀는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빨대로 오렌지 주스를 빙빙 저었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젊었을 때 결혼해서 바로 이혼하는 건 생가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죠. 간단히 말하자면 아주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찾게 되는 거죠. 하지만 비현실적인 것이란 그리 오래 가진 않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이혼하고 나서 그를 만나기까지의 5년간, 저는 이 거리에서 외톨이로, 음, 비교적 비현실적으로 지냈어요.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별로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고, 애인도 없고,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나가서 도면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서 장을 보고,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거예요. FM 방송을 틀어 둔 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욕실에서 스타킹을 빤답니다. 아파트가 바닷가 근처에 있어서 언제나 파도 소리가 들리지요. 아주 단조롭고 쓸쓸한 생활이 에요."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마저 마셨다.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섯 시가 지나자 라운지는 칵테일 아워로 바뀌어 천장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거리에는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크레인 끝에도 빨간 등이 켜졌다. 가느다란 바늘 같은 비가 어스레한 어둠을 뚫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술이라도 마시겠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보드카에 그레이프프루트를 탄 것을 뭐라고 하더라.·····."
"솔티 독."
나는 웨이터를 불러서 솔티 독과 커티 삭의 온더록스(얼음 위에 위스키 등을 부은 것)를 주문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단조롭고 쓸쓸한 생활까지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렇게 쓸쓸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파도 소리만은, 약간 쓸쓸했어요. 아파트에 입주할 때 관리인은 곧 익숙해질 거라고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지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 바다는 없지 않습니까?"
그녀가 따스한 미소를 짓자 눈가의 주름이 약간 움직였다.
"그래요. 그 말은 맞아요. 이제 바다는 없지요. 하지만 지금도 가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아마 오랫동안 귀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쥐가 나타난 거로군요?"
"그래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요."
"뭐라고 불렀나요?"
"이름을 불렀지요.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다. '쥐'라는 것은 별명 치고도 너무 유치하다.
나는 "글쎄요"라고 대꾸했다.
마실 것이 나왔다. 그녀는 솔티 독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술에 묻은 식염을 종이 냅킨으로 닦았다. 종이 냅킨에는 립스틱이 약간 묻어났다. 립스틱이 묻은 종이 냅킨을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솜씨 좋게 접었다.
"그는 뭐랄까······. 상당히 비현실적이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알 것 같습니다."
"내 비현실성을 깨기 위해서, 그 사람의 비현실성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그래서 좋아하게 되었지요. 아니면 좋아하게 되고 난 후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고요. 어차피 마찬가지지만요."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여자가 돌아와서 오래된 영화 음악을 치기 시작했다. 잘못된 장면을 위한 잘못된 배경 음악처럼 들렸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결과적으로 나는 그 사람을 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그것을 처음부터 줄곧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모르겠는데요, 그건 댁과 그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니까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초 정도 침묵이 흐른 후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쥐의 편지를 꺼내 테이블 한 가운데에 놓았다. 두 통의 편지는 한참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여기서 읽어야만 하나요?"
"집에 가지고 가서 읽으세요. 읽고 싶지 않으면 버리시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에 편지를 넣었다. 딱 하는 백의 쇠장식물의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나는 두 개 비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잔째 위스키를 주문했다. 나는 두 잔째 위스키를 제일 좋아한다. 첫 잔째의 위스키로 한숨 돌린 기분이 되고, 두 잔째의 위스키로 머리가 정상이 된다. 석 잔째부터는 맛 따위는 없다. 그저 위(胃) 속에 들어 부울 뿐이다.
"이 일 때문에 도쿄에서 일부러 오신 거예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절하시군요."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습관적이지요. 만약에 입장이 뒤바뀌었더라면 그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해준 적이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계속 서로에게 비현실적인 폐를 끼쳐 왔거든요. 그것을 현실적으로 처리하느냐 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구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일어서서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계산은 제가 하게 해주세요. 40분이나 늦기도 했고요."
"그편이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말씀하세요."
"댁은 전화로 내 외모가 짐작이 간다고 하셨지요?"
"네, 저는 분위기라는 뜻으로 말한 건데요."
"그래서, 바로 알아보셨나요?"
"네"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비는 여전히 똑같은 세기로 내리고 있었다. 호텔 창을 통해서는 옆 건물의 네온사인이 보였다. 그 인공적인 초록색 빛 속을 뚫고 무수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빗줄기는 땅바닥의 한 점을 향해서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담배를 두 개비 피운 다음,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서 다음날 아침 열차를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거리에서 내가 할 일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만이 깊은 밤까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 제6장 ☆☆☆
양을 쫓는 모험 Ⅱ
양은 아주 높은 빈도로 선생님의 환각 속에 나타나지. 다섯 번의 환각 속에 네 번 정도는 등장하는 셈이지. 그것도 보통의 양이 아니고, 등에 별을 지고 있는 밤색 양이네. 그리고 그 라이터에 새겨진 양의 문장은 선생님이 1936년 이래 자신의 도장으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지. 그 문장의 양은 의무 기록에 남겨진 양의 그림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네. 또 자네가 갖고 있는 사진 속에 양과도 똑 같지.
1. 기묘한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 1
검은 옷을 입은 비서는 의자에 앉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관찰하는 시선도, 구석구석까지 훑어보는 것 같은 시선도, 몸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시선도 아니었다.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고, 그 중간조차도 아니었다. 그 시선에는 내가 아는 어떤 종류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남자는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뒤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벽 앞에 내가 있었으니 결국 남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남자는 테이블 위의 담배 케이스를 집어 뚜껑을 열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끝은 손톱으로 몇 번 튀겨서 손질하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비스듬히 앞쪽으로 뿜어냈다. 그리고 라이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그러는 동안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내 친구가 설명해 준 대로였다. 옷차림은 지나치게 단정하고, 얼굴은 지나치게 반듯하고, 손가락 또한 길고 가늘었다. 날카로운 모양으로 쑥 들어간 눈꺼풀과 유리 세공품처럼 차가운 느낌의 눈동자가 없었다면, 필시 완벽한 동성연애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 눈 때문에 동성연애자로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닮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연상시키지 않았다.
눈동자는 자세히 보니 이상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갈색을 띤 검정에 아주 조금 파란색이 섞여 있고, 오른쪽과 왼쪽이 그 정도가 달랐다. 마치 오른쪽과 왼쪽이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무릎 위에서 손가락이 희미하게 계속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당장에라도 열 손가락이 그의 손을 떠나서 이쪽으로 다가올 것만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기묘한 손가락이었다. 그 기묘한 손가락이 천천히 테이블 위로 올라와 3분의 1가량이 줄어든 담배를 비벼 껐다. 잔속에서 얼음이 녹아, 포도주스에 투명한 물이 섞여 가는 것이 보였다. 섞이는 것이 균일하지는 않았다.
방은 영문 모를 일종의 침묵에 뒤덮여 있었다. 넓은 저택에 들어가면 가끔 이와 비슷한 침묵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 넓이에 비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너무 적은 데서 생겨나는 침묵이다. 그런데 그 방을 지배하고 있는 침묵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침묵은 묘하게 무겁고, 왠지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옛날에 그 같은 침묵을 어딘가에서 경험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어떤 침묵이었는지를 생각해 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낡은 앨범을 넘기듯이 기억을 더듬어 그것을 생각해 냈다. 불치의 환자를 둘러싼 침묵이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예감을 잉태한 침묵이다. 공기는 먼지투성이였고 뭔가 의미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죽지"라고 남자는 나를 응시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마치 내 마음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거라네."
그 말만 하고 나서, 남자는 다시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매미는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끝나가고 있는 계절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남자는 "나는 당신과 가능한 한 정직하게 이야기하려 하오"라고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공식 문서를 직역한 것 같은 말투였다. 어구의 선택과 문법은 정확했지만,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네. 정직과 진실의 관계는 선두(船頭) 선미(船尾)의 관계와 비슷하지. 먼지 정직함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진실이 나타나는 거야. 그 시간적인 차이는 배의 규모에 정비례하고, 거대한 사물의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법일세. 우리가 생애를 마친 다음에야 겨우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책임도 당신의 책임도 아니네."
대답하려야 대답할 말이 없어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남자는 침묵을 확인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당신을 굳이 여기가지 오게 한 이유는, 그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하기 위해서요, 나와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지. 우리는 서로 정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진실에 한걸음이라도 다가가는 거라네."
남자는 거기서 헛기침을 하고 소파의 팔걸이에 올려놓은 자기 손을 흘끗 보았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너무 추상적이겠지. 그러니까 현실적인 문제부터 시작함 세. 당신이 만든 PR지 말인데, 그 얘긴 이미 들었을 테지?"
"들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사이를 두고서 말문을 열었다.
"그 얘길 듣고 아마 당신도 놀랐을 거요. 누구든지 자신이 애써서 만들어 낸 것이 파기되면 유쾌할 리 없지. 그것이 생활 수단의 일환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현실적인 손실도 클 테고, 안 그런가?"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현실적인 손실에 대해 당신의 설명을 듣고 싶은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는 항상 현실적인 손실이 따르고, 광고주의 기분에 따라 애써 만든 것이 퇴짜를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우리 같은 작은 규모의 회사에게는 치명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치명적인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 광고주의 의향에 100퍼센트 따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잡지면 잡지 한 줄 한 줄을 광고주와 함께 체크해 나가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위험을 피합니다.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재력이 부족한 '한 마리 늑대'니까요."
"누구나 그러면서 커나가는 거지"라고 남자는 위로해 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당신의 잡지를 뭉개 버려서 당신 회사는 상당한 재정상의 타격을 받았다는 걸로 당신 말을 해석해도 되겠소?"
"맞습니다. 이미 인쇄해서 제본까지 해버린 거니까, 용지비와 인쇄비를 한 달 이내에 지불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외주(外注)기사의 원고료도 있지요. 금액으로는 500만 엔 정도지만, 난처한 것은 그것을 빚 갚는데 쓰려고 계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1년 전에 과감하게 설비에 투자를 했거든요."
"알고 있소"라고 사나이는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광고주와의 계약 관계도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광고주는 한 번 말썽을 일으킨 광고 대리점은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 보험 회사와 1년 동안 PR지 발행계약을 맺고 있는데, 만약에 이번 일로 그 건이 파기되면, 우리 회사는 실질적으로는 침몰하게 됩니다. 우리 회사는 작은데다가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판 덕분에 알음알음으로 커온 회사기 때문이죠. 일단 나쁜 말이 돌고 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검은 옷의 사나이는 내가 말을 끝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뚫어지게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 후에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군. 게다가 말한 내용도 우리가 조사한 바와 일치하고 있소. 그 점은 높이 평가하지. 그래서 말이야, 만약에 내가 생명 보험 회사에 무조건적으로 폐기분 잡지에 대해 지불하고 앞으로의 계약도 계속 진행하라고 충고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아무 일도 없는 거겠죠.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사소한 의문을 남긴 채 따분한 일상생활로 되돌아갈 뿐이지요."
"게다가 프리미엄이 붙을 수도 있네. 내가 명함 뒤에 한마디 쓰기만 해도 당신 회사는 앞으로 10년 치 일거리를 맡을 수 있을 거요. 그것도 쩨쩨한 광고지 일거리가 아니고 말이오."
"요컨대 거래군요."
"호의적인 교환이지. 나는 당신의 공동 경영자에게 PR지가 발행정지 되었다는 정보를 호의로 제공했소. 그것에 대해 당신이 호의를 보여준다면, 나 또한 당신에게 호의를 보이겠네. 그렇게 생각해 줄 수 없을까? 내 호의는 쓸모가 있을 거요. 당신도 언제까지나 머리 둔한 주정뱅이와 함께 일할 수 없는 거 아니겠소?"
"우리는 친굽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밑바닥이 없는 우물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은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돌이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30초가 걸렸다.
"뭐, 잘되겠지"라고 남자는 말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당신 문제고. 나는 당신의 경력에 대해 꽤 상당히 알아보았는데, 나름대로 상당히 재미있더군. 인간을 대충 두 가지로 나누면 현실적으로 평범한 그룹과 비현실적으로 평범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당신은 분명히 후자에 속하지. 이건 기억해 두는 게 좋을걸. 당신이 걸어온 운명은 비현실적인 평범함이 걸어온 운명이기도 하니까."
"기억해 두겠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음이 녹아 버린 포도 주스를 반쯤 마셨다.
"그러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양에 관한 이야기 말일세."
남자는 몸을 움직여 봉투에서 대형 흑백 사진을 꺼내 내 쪽을 향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방안에 아주 약간 현실의 공기가 파고들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당신 잡지에 실린 양의 사진이오."
네거를 쓰지 않고 잡지의 그라비어를 그대로 확대한 것치고는 놀랄 만큼 선명한 사진이었다. 아마도 특수한 기술을 쓴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사진은 당신이 어딘가에서 손에 넣어 그 잡지에 사용했네. 틀림없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지난 여섯 달 이내에 아마추어가 찍은 사진이오. 카메라는 싸구려 포켓 사이즈고, 찍은 사람은 당신이 아니지. 당신은 니콘의 렌즈가 하나인 리플렉스 카메라를 가지고 있고, 사진을 좀 더 잘 찍지. 지난 5년 동안은 홋카이도에 간 적이 없고, 그렇지?'
"글쎄요"라고 나는 말했다.
남자는 "흠"하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의 질을 확인하는 듯한, 침묵이었다.
"좋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세 가지 정보요. 당신이 어디서, 누구에게 이 사진을 받았는가, 그리고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서투른 사진을 잡지에 썼는가 하는 것이지."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저널리스트에게는 뉴스 소스의 비밀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남자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몇 번인가 그 행동을 되풀이하고 나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침묵은 그러고 나서도 한참 이어졌다. 어딘가에서 뻐꾸기라도 울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뻐꾸기는 울어 주지 않았다. 뻐꾸기는 저녁땐 울지 않는다.
"당신은 정말 기묘한 친구군"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 사무실을 문 닫게 말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었소? 그렇게 하면 당신은 더 이상 저널리스트라고도 할 수 없게 되지. 하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시시한 팸플릿이나 광고지 따위 일을 저널리즘이라고 가정 할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오."
나는 다시 한 번 뻐꾸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왜 뻐꾸기는 저녁땐 울지 않는 걸까?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의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몇 가지 있네."
"아마 그럴 테지요"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나는 그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입을 연다 하더라도 전부 다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어느 정도가 전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안 그렇습니까?"
모든 게 허세였지만, 코스는 제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그것에 이은 침묵의 불확실성은, 내가 포인트를 땄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재미있군. 당신의 비현실성은 어딘지 감상적인 데가 있는 것 같소. 어쨌든 좋소.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주머니에서 확대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것으로 사진을 세밀하게 살펴보시오."
나는 왼손에 사진을 들고, 오른손에는 확대경을 들고 천천히 사진을 바라보았다. 몇 마리는 이쪽을 향하고, 몇 마리는 다른 쪽을 보고, 또 몇 마리는 무심코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분위기가 아직은 서먹서먹한 동창회의 스냅 사진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한 마리씩 양을 점검하고, 풀이 우거진 모습을 살피고, 배경인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고, 그 뒤의 산줄기를 살피고,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데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사진과 확대경에서 눈을 떼고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뭔가 색다른 데를 찾았소?"라고 물었다.
"아무것도"라고 나는 대답했다.
남자는 별로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당신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요? 양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소"라고 남자가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공부한 내용은 거의 쓸모없는 전문적인 것이니까요."
"알고 있는 것만 말해 주겠소?"
"우제목, 초식성, 군집성, 아마 메이지(메이지 천황 시대의 연호, 1868 ~ 1912) 초기에 일본에 수입됐을 겁니다. 털과 고기가 이용되고 있다. 뭐 그런 정도지요."
남자는 "맞았소."라고 한 다음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다만 사소한 점을 정정한다면, 양이 일본에 수입된 것은 메이지 초기가 아니고 안세이(고메이 천황의 연호 1854 ~ 1860) 때였지. 그러나 당신 말대로 그 이전에는 일본에 양은 존재하지 않았소. 헤이안(간무 천황의 헤이 안쿄 정도 이후 마카쿠라 시대 성립 시까지 약 400년간, 794 ~ 1192) 시대에 중국에서 도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그 후 양은 어딘가에서 멸종해 버렸지. 그러니까 메이지까지, 대부분의 일본인은 양이라는 동물을 본 적 도 없고 양에 대해 알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샘이지. 십이지에도 들어 있는 비교적 대중적인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양이 어떤 동물인가 하는 것은 아무도 몰랐네. 다시 말해서 용이나 맥(중국 전설에서 인간의 악몽을 먹는다는 동물. 전체적인 모습은 곰, 코는 코끼리, 눈은 무소, 꼬리는 소, 발은 범과 비슷)과 마찬가지로 상상의 동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사실 메이지 이전의 일본인에 의해서 그려진 양의 그림은 하나같이 엉터리야. H.G. 웰즈가 화성인에 관해 가지고 있던 지식과 비슷한 정도라 할 수 있소.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인은 양에 대한 지식을 별로 갖고 있지 않지. 요컨대, 역사적으로 양이라는 동물이 생활이라는 단계에서 일본인과 관련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야. 양은 국가적 수준에서 미국으로부터 일본에 수입되어 육성되었고, 그리고 버려 졌어. 그것이 양이야. 제2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와의 사이에서 양모와 양고기가 자유화됨으로써, 일본에서의 양 사육에 따르는 이익은 거의 제로가 된 셈이지. 불쌍한 동물이라 생각하지 않소? 말하자면 일본의 근대화 그 자체지. 그러나 물론 나는 당신에게 일본 근대의 공허성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메이지 이전의 일본에 양은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과, 그 이후에 수입된 양은 정부에 의해서 한 마리 한 마리 엄격하게 체크되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이오.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겠소?"
그것은 내게 묻는 말이었다.
"일본에 존재하는 양의 종류가 전부 파악되고 있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거지. 게다가 양은 경주마와 마찬가지로 우량종 교배가 제일 중요하니까, 일본에 있는 양의 대부분은 몇 대 이전까지 간단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 다시 말해서, 철저하게 관리된 동물이란 말이오. 이종교배에 대해서도 몰 체크가 가능하지. 밀수입도 없고, 일부러 양을 밀수입하려는 괴짜도 없으니까. 종으로 말하면, 사우스다운, 스패니시 메리노, 코트월드 중국양, 슐롱셔, 콜리데 일, 체비오트, 로마노트스키, 오스트프리시안, 보더레스터, 롬니마슈, 링컨, 도세트 흔, 서포크, 대충 이 정도지. 그런데"라고 남자는 끊은 다음,
"다시 한 번 사진을 잘 살펴보시오"하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사진과 확대경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앞줄의 오른쪽에서 세 번째 양에 맞췄다. 그리고 옆의 양을 살펴보고, 다시 한 번 오른쪽에서 세 번째 양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뭔가 알아냈소?"라고 남자가 물었다.
"종류가 다르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맞았네. 그 오른쪽에서 세 번째 양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평범한 서포크 종이지. 그 한 마리만 다르다네. 서포크 보다는 훨씬 땅딸하고, 털 빛깔도 달라, 얼굴도 검지 않고, 뭐랄까, 훨씬 힘찬 느낌이지. 나는 이 사진을 면양의 몇몇 전문가에게 보여 줬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런 양은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어쩌면 세계에도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양을 보고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오."
나는 확대경을 들고 다시 한 번 오른쪽에서 세 번째 양을 관찰해 보았다. 자세히 보니 등 한가운데에 커피를 흘린 것처럼 엷은 색깔의 얼룩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희미하고 선명치 않아서 필름의 흠처럼도 보였고, 착시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실제로 누군가가 그 양의 등에 커피를 흘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등에 희미한 얼룩이 보이는군요."
"얼룩이 아니네."라고 남자는 말했다.
"별 모양의 반문이네. 이것과 비교해 보게나."
남자는 봉투에서 한 장의 복사된 종이를 꺼내 내게 직접 건네주었다. 그것은 양의 그림의 카피였다. 진한 연필로 그렸는지 여백에 검은 손가락 자국이 묻어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서툴지만, 뭔가 호소하는 구석이 있는 그림이었다. 세밀한 부분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사진의 양과 그 그림 속의 양을 번갈아 가며 비교해 보았다. 분명히 똑같은 양이었다. 그림 속의 양의 등에는 별 모양의 반문이 있었고, 그것은 사진의 양의 얼룩과 대응되고 있었다.
남자는 "그리고 이것"하고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내게 주었다. 묵직한 느낌의 은제 특별 주문품으로 듀퐁 것인데, 거기에는 차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양의 등에는 선명하게 별 모양의 반문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가 조금씩 아파 오기 시작했다.
2. 기묘한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 2
"나는 조금 전에 당신에게 평범함에 대해서 이야기했소.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평범함을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요. 간단히 말하면 세계자체가 평범하니까 당신 역시 평범한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하고 남자가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세계는 평범하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세계는 처음부터 평범했는가? 그렇지 않소. 세계의 원초는 혼돈이고, 혼돈은 평범이 아니오. 평범해지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생활과 생산 수단을 분화시키고 나서 부터지.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설정함으로써 그 평범함을 고정시켰네. 그래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시즘에 직결되는 거지. 마르크스를 긍정하오. 그는 원초의 혼돈을 기억하고 있는 흔치 않은 천재 중의 한사람이니까. 나는 똑같은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도 긍정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마르크시즘을 인정하지 않소. 그건 너무나 평범하거든."
남자는 목구멍 깊은 데에서 작은 소리를 냈다.
"나는 지금 아주 정직하게 말하고 있소. 그것은 당신이 조금 전에 정직하게 말해준 데 대한 나 나름대로의 보답이오. 그리고 이제부터 당신의 소박한 의문에 대해서 답변하기로 하겠소. 그러나 내가 그 말을 마쳤을 때 당신에게 남겨진 선택의 여지는 아주 좁게 한정될 테니 그것을 양해해 주길 바라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도박에 거는 돈을 올린 거요. 됐소?"
"할 수 없겠죠."라고 나는 대답했다.
"현재 이 저택 안에서 한 노인이 죽어가고 있소"라고 남자는 말을 꺼냈다.
"그 원인은 명백히 밝혀졌지. 뇌 속에 거대한 혈혹이 있소. 뇌의 모양이 일그러질 정도로 큰 혹이지. 당신은 뇌 의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간단히 말해서 피의 폭탄이오. 혈액 순환이 저해되어서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지. 골프공을 삼킨 뱀처럼 말이오. 그것이 터지면 뇌의 기능은 정지하는데 수술할 수도 없네. 하찮은 자극에도 터져 버리기 때문이오. 즉 현실적으로 표현을 하면, 그냥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앞으로 일주일 후에 죽을지도 모르고, 한 달 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소."
남자는 입술을 오므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죽는 게 이상할 것은 없소. 노인이고, 병명도 분명하니까. 이상한 것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느냐 하는 거요."
남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32년 전에 죽었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라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아니면 42년 전에. 그 혈혹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A급 전범의 건강 진단을 하던 한 미국 군의관인데,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지. 도쿄 재판(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의 주요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국제 재판)이 있기 얼마 전 말일세. 혈혹을 발견한 의사는 그 엑스선 사진을 보고 심한 쇼크를 받았소. 왜냐하면 뇌에 그처럼 거대한 혈혹이 있는데도 살아 있는 더구나 정상인 이상으로 활동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학 상식을 초월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그 무렵 군병원이었던 세이로가 병원으로 이송되어 정밀 진찰을 받게 되었네. 진찰은 1년 간 계속되었는데, 결국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소.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다는 사실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 외에는 말이오. 그러나 그는 그 후로도 아무런 지장 없이 정력적으로 살았지. 두뇌활동도 극히 정상적이었네. 이유는 알 수 없었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이론적으로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만 몇 가지 세부적인 증세는 밝혀졌네. 40일 주기로 사흘 동안 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거지. 본인의 말로는 이 두통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36년인데, 그때가 혈혹의 발생 시기로 추정되네. 두통이 너무 심해서, 그 기간에는 진통을 가라앉히는 약을 투여했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마약이지. 마약은 확실히 고통을 완화시켜 주기는 했지만, 그 대신 기묘한 환각을 가져다주었다네. 고도로 응축된 환각이지.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본인밖에 모르지만, 어쨌든 그다지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네. 환각 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미군 당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소. 의사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네. 나는 그것을 비합리적으로 입수해서 몇 번 읽어 본적이 있는데, 그것은 사무적인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로 끔찍한 것이었소. 그 환각을 실제로 그것도 정기적으로 체험하는 일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세."
남자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어째서 그런 환각이 생기는지도 알 수 없었네. 아마도 혈혹이 주기적으로 방사(放射)하는 에너지 같은 것이 있어서, 두통은 그에 대한 육체의 반응이 아닌 가 추측되었지. 그리고 그 반응의 벽이 제거되었을 때 에너지가 뇌의 어떤 부분을 직접 자극해서, 그 결과로 환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물론 이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지만, 이 가설에는 미국의 군부도 흥미를 가졌었다네. 그래서 철저한 조사가 시작되었지. 정보기관에 의한 극비 조사 말일세. 그저 일개 개인의 혈혹 조사에 어째서 미국의 정보기관이 나서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몇 가지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네. 우선 첫 번째 가능성은 의학 조사라는 명목 하에 미묘한 종류의 상황 청취가 아닌가하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중국 대륙에서의 첩보 루트와 아편루트의 장악이오. 미국은 장개석의 장기적인 패퇴에 의해서 중국과의 줄을 잃어 가고 있었거든.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루트를 애타게 원하고 있었네. 그런 심문을 공식적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사실 선생님은 그런 일련의 조사 후에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고 석방되었네. 뒷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이를테면 정보와 자유의 교환 같은 거지. 두 번째 가능성은 우익 지도자로서의 선생님의 색다른 행동과 혈혹과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일이네. 이것은 나중에 자네에게도 설명하겠지만 재미있는 착상이지. 그러나 결국은 그들도 아무것도 알아내지는 못했을 걸세.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것을 밝혀 낼 수 있겠나? 물론 해부라도 하면 몰라도 그렇게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세 번째 가능성은 '세뇌'에 관한 거네. 뇌에 일정한 자극 파를 보냄으로써 특정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상이지.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유행하고 있었거든. 사실 그때 미국에는 그런 세뇌에 대한 연구 그룹이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있네. 정보기관이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조사했는지는 분명치 않네. 그리고 또 거기에서 어떠한 결론이 나왔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모든 것은 역사 속에 묻혀 갔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미군 상층부의 극소수와, 선생님뿐이지.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나를 포함해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걸세.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네."
남자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방으로 들어온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혈혹의 발생 시기, 즉 1936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것이 밝혀져 있네. 1932년 겨울에 선생님은 요인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서 형무소에 들어가셨었지. 그 옥살이는 1936년 6월까지 계속되었네. 형무소의 공식기록과 의무(醫務) 기록도 남아 있고,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셨지. 그걸 요약해 보면 대충 이런 이야기지. 선생님은 형무소에 들어가시고 얼마 안 돼서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셨다네. 그것도 보통 불면증이 아니고 아주 위험할 정도의 불면증이었지. 사나흘 때로는 일주일 가까이 한잠도 못 주무신 적도 있었던 거야. 당시의 경찰은 정치범을 재우지 않으면서 자백을 강요했거든. 특히 선생님의 경우는 황도파와 통제파의 투쟁에 얽혀 있었던 만큼 신문도 가혹했지. 상대방이 잠을 자려고 하면 물을 퍼붓고 죽도(竹刀)로 때리고, 강한 불빛을 내리 쬐는 거지. 그런 식으로 해서 죄수를 재우지 않는 거야. 그런 일이 여러 달 계속되면 대개의 사람은 망가져 버리지. 수면 신경이 파괴되어 버리는 거네. 결국 죽거나 미쳐 버리거나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하는 거지. 선생님은 그 마지막 길에서 헤매고 계셨던 거네. 그런데 1936년 봄에 불면증이 완전히 회복 되셨네. 즉 혈혹이 발생한 시기와 같은 시기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극단적인 불면증이 어떤 이유로 뇌의 혈액 순환이 저해해서 혈혹이 생겼다, 그런 말씀인가요?"
"그것이 가장 상식적인 가설이네.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니까 미군 의료진도 생각해 냈겠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거기에는 어떤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빠져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혈혹 현상은 그 요인의 종속물이 아니었을까 싶네. 왜냐하면 혈혹을 가진 사람은 여럿 있지만, 그와 같은 증상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그것만으로는 선생님이 생존해 계시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거든."
남자가 한 말은 확실히 조리에 맞는 말이었다.
"또 한 가지 혈혹에 관한 기묘한 사실에 있네. 즉 선생님은 1936년 봄을 경계로 해서 말하자면 딴 사람으로 거듭나셨네. 그때까지의 선생님은 한마디로 말해서 평범한 우익 행동가였지. 홋카이도의 빈농에서 삼남으로 태어나 열두 살 때 집을 나와 조선으로 건너갔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본국으로 돌아와서 우익 단체에 들어가셨네. 혈기만은 왕성해서 언제나 일본도(日本刀)를 휘두르는 그런 타입이야. 아마 글자도 제대로 못 읽으셨을 걸세. 우익의 지도자로 뛰어오르셨네. 인심을 장악하는 카리스마성, 면밀한 논리성,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연설 능력, 정치적인 예지 능력, 결단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이 지니는 약점을 지렛대로 삼아 사회를 움직여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셨지."
남자는 한숨을 돌리고 가볍고 헛기침을 했다.
"물론 우익 사상가로서의 선생님의 이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유치한 것이었지. 하지만 그런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네. 문제는 그것을 어디까지 조직화 할 수 있느냐지. 마치 히틀러가 생활권과 우성 민족이라는 유치한 사상을 국가적으로 조직화했듯이 말일세.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길을 걷지 않으셨네. 선생님께서 걸었던 길은 뒷길, 즉 그림자의 길이네. 표면에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지. 그러기 위해서 선생님은 1937년에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셨네. 그러나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혈혹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혈혹이 생긴 시기와 선생님이 기적적인 자기 변혁을 이룩한 시가가 딱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일세."
"말씀하시는 가설에 따르면 혈혹과 자기 변혁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고 위치적으로는 평행이며, 그 위에 수수께끼 같은 요인이 있다는 거군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자네는 아주 이해가 빠르군. 명확하고도 간결해"하고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양은 어디에 얽히는 거지요?"
남자는 담배 케이스에서 두 개비 째의 담배를 꺼내어, 손톱 끝으로 손질하고 나서 입술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지 않았다.
남자는 "차근차근 이야기하지"라고 말했다.
짓누르는 듯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남자는 "우리는 왕국을 구축했지"하며 말을 시작했다.
"강대한 지하의 왕국이지. 우리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네. 정계. 재계. 매스 커뮤니케이션, 관료 조직, 문호, 그밖에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까지 장악하고 있지. 우리를 적대시하는 것까지 장악하고 있거든. 권력에서부터 반 권력에 이르는 모든 것을. 그것들의 대부분은 장악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네. 요컨대 매우 궤변적인 조직이지. 그리고 선생님은 이 조직을 전후에 혼자서 쌓아 올리신 걸세. 다시 말해서 선생님은 국가라는 거대한 배의 밑바닥을 혼자서 지배하고 계시는 셈이지. 선생님이 마개를 뽑으면 배는 가라앉을 것이고, 승객은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낫는지 알기도 전에 바다에 내던져질 걸세."
여기까지 말한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이 조직에는 한계가 있네. 즉 왕의 죽음이지. 왕이 죽으면 왕국은 붕괴되는 거지. 왜냐하면 그 왕국은 한 사람의 천재적 자질에 의해서 구축되고 유지되어 온 것이기 때문일세. 내 가설에 따르면, 어떤 수수께끼 같은 요인에 의해서 구축되고 유지되어 왔다는 말일세.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모든 것은 끝장이지. 왜냐하면 우리 조직은 관료 조직이 아니라 한 사람의 두뇌를 정점으로 한 완전한 기계기 때문이지. 거기에 우리 조직의 의미가 있고, 약점이 있는 거라네. 아니면 있었던 거지. 선생님의 죽음으로 인해 조직은 조만간 분열되고, 불길에 휩싸인 바르하라 궁전처럼 범용(凡庸)의 바다 속으로 침몰해 가겠지. 아무도 선생님의 뒤를 이을 수는 없네. 조직은 분열되는 거야 마치 광대한 궁전이 헐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듯이 말일세. 균질과 확률의 세계지. 거기에는 의지라는 것이 없네. 어쩌면 당신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분열 말일세. 그러나 생각해보라고. 일본 전체가 아주 납작해져서 산도 해안도 호수도 없고, 거기에 똑같은 아파트만 주 욱 늘어놓는 게 놓은 일일까?"
"모르겠는데요. 그런 질문 자체가 적당한지 어떤지를 알 수조차 없습니다."하고 나는 대답했다.
남자는 "자네는 머리가 좋군."하고 말하며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끼었다. 손가락 끝은 천천히 리듬을 타고 있었다.
"아파트 이야기는 물론 비유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조직은 둘로 나뉘어져 있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부분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부분이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부분은 있지만, 크게 나누면 우리 조직은 이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네. 그 밖의 부분에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앞으로 나아가는 부분이 '의지 부분'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부분이 '수익(收益) 부분' 이네. 사람들이 선생님을 문제 삼을 때에 거론하는 것은 이 '수익 부분'뿐이지. 그리고 또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사람들이 분할을 원하고 몰려들 부분도 이 '수익 부분'뿐이야. '의지 부분'은 아무도 욕심을 내지 않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분열의 의미야. 의지는 분열될 수 없네. 100퍼센트 계승되거나 100퍼센트 소멸되는 것 둘 중 하날세."
남자의 손가락은 여전히 무릎 위에서 완만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처음과 똑같았다. 기준점이 없는 시선과 차가운 눈동자, 표정 없는 단정한 얼굴, 그 얼굴은 시종 똑같은 각도에서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의지'란 뭐지요?"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공간을 제어하고, 시간을 제어하고, 가능성을 제어하는 관념이네."
"물론 누구도 알 리가 없지. 선생님만이, 말하자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계셨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자기 인식의 부정일세. 거기에서 비로소 완전한 혁명이 실현되는 거지. 자네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노동이 자본을 포함하고 자본이 노동을 포함하는 혁명이네."
"환상처럼 들리는데요."
"그 반대지. 인식이야말로 환상이네."
남자는 여기서 말을 잠시 끊었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저 말일 뿐이야. 말을 아무리 늘어놓는다 해도, 선생님이 품고 계셨던 의지의 형태를 자네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네. 내 설명은 나와 그 의지 사이의 관련을 또 다른 언어적인 관련으로 나타낸 것일 뿐이지. 인식의 부정은 또한 언어의 부정과도 관련이 있는 걸세. 개인의 인식과 진화적 연속성이라는 서구 휴머니즘의 두 기둥이 그 의미를 잃을 때, 언어도 역시 그 의미를 잃는 거지. 존재는 개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혼돈으로서 있다네. 자네라는 존재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혼돈일 뿐이야. 나의 혼돈은 자네의 혼돈이기도 하고, 자네의 혼돈은 나의 혼돈이기도 하지. 존재가 커뮤니케이션이고, 커뮤니케이션이 존재라네."
갑자기 방이 몹시 추워졌고 내 곁에 따뜻한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잠자리로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지금은 9월이고, 밖에서는 아직도 무수히 많은 매미가 울어대고 있었다.
"당신들이 1960년대 후반에 했던, 아니면 하려고 했던 의식의 확대화는, 그것이 개체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탓에 완전히 실패로 끝났지. 다시 말해서 개개의 질량은 변함없는데 의식만 확대되어 가면 그 궁극에 있는 것은 절망뿐이네. 내가 말하는 평범함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지. 그러나 아무리 설명한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걸세. 게다가 나도 이해 따위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네. 다만 정직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지. 아까 자네에게 건네준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겠는데, 그 그림은 미국 육군 병원의 의무 기록을 복사한 것이지. 날짜는 1946년 7월 27일로 되어 있었네. 그 그림은 의사의 요청에 따라 선생님이 손수 그리신 거야. 환각을 기록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말이야. 사실 이 의무 기록에 의하면 이 양은 아주 높은 빈도로 선생님의 환각 속에 나타나지. 숫자로 말하자면, 약 80퍼센트 즉 다섯 번의 환각 속에 네 번 정도는 양이 등장하는 셈이지. 그것도 보통의 양이 아니고, 등에 별을 지고 있는 밤색 양이네. 그리고 그 라이터에 새겨진 양의 문장은 선생님이 자신의 도장으로 1936년 이래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지. 당신도 눈치 챘겠지만, 그 문장의 양은 의무 기록에 남겨진 양의 그림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네. 그리고 그것은 또 지금 자네가 갖고 있는 사진 속의 양과도 똑같지. 꽤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단순한 우연이겠지요."라고 나는 말했다. 딴에는 되도록 가볍게 들리도록 말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또 있지. 선생님은 양에 관한 모든 자료와 정보를 열심히 모으셨어.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그 주에 일본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신문·잡지에서 추려낸 양에 관한 기사를 오랜 시간에 걸쳐 손수 체크하고 계셨지. 나는 줄곧 그 일을 도와 왔거든. 선생님께서는 매우 열심이셨네. 마치 뭔가를 찾고 있는 듯이 말이야. 선생님이 병상에 누우시고 부터는 내가 극히 개인적으로 그 작업을 이어 받았지. 아주 흥미로웠거든. 대체 무엇이 나올까? 거기에 자네가 나왔네. 자네와 자네의 양 말일세.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은 아닌 것 같네."
나는 손으로 라이터의 무게를 확인했다. 아주 기분 좋은 묵직한 무게였다.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무게가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열심히 양을 찾고 계셨을지 당신을 알겠소?'
"모르겠는데요. 선생님께 여쭤 보는 편이 빠르겠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물어 볼 수 있다면 물어 봤겠지. 선생님은 지난 2주일 동안 의식이 없으시다 네. 아마 의식이 다시 돌아오진 않을 게야. 그리고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별 모양이 있는 양의 비밀도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히고 말겠지. 나는 그것만은 도저히 찾을 수 없네. 개인적인 득실(得失)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대의(大義)를 위해서 말이야."
나는 라이터의 뚜껑을 열어 불을 붙인 다음 다시 뚜껑을 닫았다.
"당신은 아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허황되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로 허황된지도 모르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희망을 자네가 이해해 주기 바라네. 선생님이 돌아가신다. 하나의 의지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의지의 주변에 있는 것도 모두 사멸한다. 뒤에 남는 것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그 양을 찾아야겠네."
그는 처음으로 몇 초 동안 눈을 감았고, 그 동안엔 침묵이 흘렀다.
"내 가설을 말하겠네. 어디까지나 가설이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나는 그 양이야말로 선생님의 의지의 원형(原型)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네."
"동물 쿠키 같은 이야기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남자는 내말을 무시했다.
"아마도 양이 선생님 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네. 그건 아마 1936년의 일일 걸세. 그리고 그때 이래로 40년이 넘도록 양은 선생님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을 거네. 마치 그 사진처럼 말이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주 재미있는 가설인 것 같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특수한 양이지. 매우 특수한 양이야. 나는 그것을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네의 협력이 필요하네."
"찾아내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쩌기는 어쩌나. 아마 나는 어쩌지도 못할 거네. 내가 뭔가를 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도 클 걸세. 내 소망이 사라져 가는 것을 이 눈으로 지켜볼 뿐이지. 그리고 만약에 그 양이 뭔가를 원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싶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내 인생에는 더 이상 의미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 매미만이 여전히 울고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저녁나절의 바람에 가볍게 서로 스치고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저녁나절의 바람에 가볍게 서로 스치고 있었다. 집안은 여전히 괴괴했다. 마치 막을 길 없는 전염병처럼 죽음의 입자가 온 집안을 감돌고 있었다. 나는 선생의 머릿속의 초원을 떠올려 보았다. 풀은 말라 버리고 양이 달아난 뒤의 망막한 초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네가 사진을 입수한 루트를 가르쳐 줄 수 없겠나?"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당신에게 정직하게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자네도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저는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제가 말을 하면 사진을 준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양과 관련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당신에게 있다는 말이군."
"근거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뿐이지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줄곧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감 비슷한 거지요."
"그래서 말을 할 수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라고 나는 말하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저는 폐라는 것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는 편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방법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알고 있지요. 그래서 되도록 그걸 피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폐를 끼치게 되고 말지요. 어차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처음부터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잘 알아들을 수가 없군."
"평범함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며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나는 담배를 물고 손에 든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들이마셨다. 기분이 아주 조금 상쾌해졌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그 대신 당신이 양을 찾아내야 하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조건이지. 오늘부터 두 달 이내에 자네가 양을 찾아내면, 우리는 자네가 원하는 만큼의 보수를 내겠네. 만약에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네 회사도 자네도 끝장이지. 됐나?"
"할 수 없죠."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런데 만약에 모든 것이 어떤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고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면요?"
"결과는 마찬가지지. 자네에게도 나에게도, 양을 찾아내느냐 찾아내지 못하느냐 둘 중에 하나겠지. 중간은 없어.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든 아까도 말했듯이 자네가 판돈을 낚아 올린 거야. 볼을 잡은 이상 골대까지 달리는 수밖에 없겠지. 설사 골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렇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남자는 웃옷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더니 내 앞에 놓았다.
"이것을 비용으로 써도 좋네. 부족하면 전화하게. 즉시 더 줄 테니. 질문 있소?"
"질문은 없지만 감상은 있습니다."
"무슨?"
"전체적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황당한 이야기지만, 직접 들으니 어딘지 진실성이 있는 것 같군요. 아마 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더라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겁니다."
남자는 아주 조금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보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일부터라도 움직이는 게 좋을 거네. 방금 말했듯이 오늘부터 두 달이오."
"어려운 일입니다. 두 달로는 어림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광대한 땅에서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는 일이니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뚫어지게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뚫어지게 응시하면, 왠지 내 자신이 텅 빈 수영장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러워지고 금이 가고 내년에는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텅 빈 수영장 말이다. 남자는 30초 동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 가는 게 좋겠네"하고 남자는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것 같았다.
3. 차와 그 운전사 2
"회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어디 다른 데로?"라고 운전사가 내게 물었다. 올 때의 그 운전사였는데, 올 때보다는 대하는 게 조금 부드러웠다. 아마 붙임성 있는 성격인 모양이다.
나는 안락한 시트 위에서 한껏 팔다리를 쭉 펴고 나서 어디로 가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회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내 동료에게 이것저것 설명할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도대체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휴가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막연히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적인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있는 정상적인 세상을 봐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니시신주쿠로"라고 나는 대답했다.
저녁때라서 신주쿠로 가는 길은 몹시 정체되고 있었다. 어느 지점을 지나가자, 차는 닻을 내린 것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파도에 흔들려서 차가 몇 센티미터쯤 이동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지구의 자전 속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이 도로의 표면은 시속 몇 킬로미터로 우주 공간을 회전하고 있는 걸까? 나는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해서 어림수를 내보았지만, 그것이 유원지의 놀이 기구인 커피 잔보다도 빠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우주인이 내게
"이봐, 적도는 시속 몇 킬로미터로 회전하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나는 몹시 난처해 할 것이다. 아마 나는 화요일 다음에 왜 수요일이 오는지조차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고 비웃을까?
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고요한 돈 강>을 세 번씩 읽었다. <도이치 이데올로기>도 한 번 읽었다. 원주율도 소수점 이하 열여섯 자리까지 외울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비웃을까? 아마 비웃을 것이다. 실컷 비웃을 것이다.
"음악이라도 틀까요?"라고 운전사가 물었다.
나는 "좋지요"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쇼팽의 발라드가 차내에 흐르기 시작했다. 결혼식장의 대기실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봐요, 원주율을 알아요?"하고 나는 운전사에게 물어 보았다.
"3.14 말이지요?"
"그래요. 그런데 소수점 이하 몇 자리까지 외울 수 있어요?"
"서른두 자리까지는 알지요. 그 이상은 좀……."하고 운전사는 대수롭지 않다 는 듯이 말했다.
"서른두 자리?"
"네, 좀 특별한 기억법이 있거든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니, 됐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기가 죽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쇼팽을 듣고, 차는 10미터 가량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에 있는 차의 운전자나 버스 승객들은 우리가 탄 도깨비 같은 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창이 특수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남들의 눈길이 유난히 집중되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꽤 교통 체증에 대한 종교적인 해석처럼 들리는데요."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음"하는 신음 소리를 낸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는 것과 우익의 거물의 운전사라는 것은 모순 아닌가요?"
"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다음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물론이지요. 매일 밤 전화를 걸고 있는걸요."
"하지만"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조금 망설였다. 머리가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께 전화를 건다면, 회선이 너무 복잡해서 항상 통화중이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서 오후에 전화번호를 문의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 걱정은 없어요. 말하자면 하나님은 동시적인 존재거든요. 그러니까 한꺼번에 백만 명이 전화를 건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백만 명과 동시에 말씀을 하 실 수 있어요."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정통적인 해석인가요?"
"즉 뭐랄까, 신학적으로 말이오."
"저는 급진적이랍니다. 그래서 교회와 잘 맞지 않나 봐요."
"그래요?"라고 나는 대꾸했다.
차가 50미터 가량 전진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비로소 내가 계속해서 라이터를 꼭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남자가 건네준 양의 문장이 새겨진 듀퐁 라이터를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가지고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 은제 라이터는 처음부터 줄곧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내 손안에서 어색함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게로 보나 촉감으로 보나 나무랄 데가 없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결국 그것을 갖기로 했다. 라이터 한 두 개쯤 없어 졌다고 해서 곤란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두세 번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대신 1회용 비크 라이터를 차안에 던져두었다.
운전사가 갑자기
"몇 년쯤 전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하고 말을 꺼냈다.
"무얼요?"
"하나님의 전화번호요."
나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그들이 미친 것일까?
"당신에게만 살짝 가르쳐 주셨나요?"
"그래요. 저에게만 살짝 가르쳐 주셨어요. 훌륭하신 분이죠. 당신도 알고 싶으세요?"
"가능하다면"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알려 드릴게요. 도쿄 945의......."
"잠깐"하고 말을 끊은 나는 수첩과 볼펜을 꺼내 그 번호를 메모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알려 줘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누구에게나 가르쳐 주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은 좋은 분인 것 같아서요."
"고맙소. 하지만 대체 하나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나는 크리스천도 아니고"하고 내가 말했다.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 고민하고 있는 일을 솔직하게만 말씀하시면 되는 겁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님은 따분해 하시거나 경멸하시거나 하는 법이 없거든요."
"고마워요. 전화해 보지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운전사는 말했다.
차량 행렬이 원활하게 흐르기 시작하여 신주쿠의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주쿠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
차가 목적지에 닿았을 때, 거리는 벌써 엷은 남색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여름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이 빌딩 사이를 누비며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아가씨들의 치맛자락을 흔들고 있었다. 타일을 깐 보도에 샌들이 부딪히는 똑똑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고층 호텔의 맨 꼭대기 층의 넓은 바에 들어가, 하이네켄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가 나오기까지 10분이 걸렸다. 나는 그 동안 의자의 팔걸이 위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자니, 몇 백 명이나 되는 난쟁이들이 비로 머릿속을 쓸고 있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그들은 계속해서 쓸어대고 있었다. 아무도 쓰레받기를 사용할 생각을 안 했다. 맥주가 나오자, 나는 그것을 두 모금에 다 마셨다. 그리고 작은 접시에 담긴 땅콩도 모조리 먹어 치웠다. 이제 비질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계산대 옆에 있는 전화박스에 들어가 대단한 귀를 가진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는 그녀의 집에도 우리 집에도 없었다. 아마 어딘가에 식사하러 나간 모양이다. 그녀는 절대로 집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나는 헤어진 아내의 새 아파트의 전화번호를 돌려 보았지만, 벨이 두 번 울렸을 때 생각이 바뀌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특별히 할 말도 없는데다가, 무신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곳들 말고는 전화를 걸 만한 데가 없었다. 1,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거리의 한복판에서, 전화를 걸 만한 상대가 단 두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은 이혼한 아내다. 나는 단념하고 10엔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전화박스를 나왔다. 그리고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하이네켄을 두 병 더 주문했다.
이렇게 해서 하루가 저물어 간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까지 이처럼 무의미한 하루도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의 마지막 하루가 좀 더 그럴 듯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날 하루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휘둘리다가 저물어 버리고 말았다. 창 밖에는 차가운 초가을의 어둠이 번지고 있었다. 땅 위에는 작고 노란 가로등의 불빛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그것은 마치 짓밟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맥주가 날라져 왔다. 나는 처음 한 병을 비우고 나서 두 접시의 땅콩을 전부 손바닥에 쏟아 놓고 하나하나 먹어 갔다. 옆 테이블에서는 수영 강습을 받고 돌아가는 길인 중년 여성 네 명이 한창 수다를 떨며 가지각색의 트로피컬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웨이터는 부동자세로 선채 목만 구부리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웨이터는 중년의 미국인 부부에게 열심히 메뉴를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땅콩을 전부 먹어 치우고 세 병째 맥주를 들이켰다. 세 병째 맥주를 다 마시고 나자 더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리바이스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뜯은 다음 1만 엔짜리 지폐 뭉치를 한 장씩 세었다. 종이 띠로 묶은 신권 다발은 지폐라기보다는 트럼프처럼 보였다. 절반쯤 세자 손가락이 얼얼하고 아팠다. 96까지 셋을 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웨이터가 와서 빈병을 치우며, 한 병 더 주문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지폐를 세면서 말없이 끄덕였다. 그는 내가 지폐 다발을 세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백오십 장을 다 세고 나서 봉투에 다시 넣어, 그것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을 때 새 맥주가 나왔다. 나는 또 땅콩을 한 접시 먹었다. 다 먹고 나서 어떻게 그렇게 먹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프루트케이크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서 메뉴를 보여 달라고 했다. 오믈렛은 없었지만 샌드위치는 있었다. 치즈와 오이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뭐가 곁들여서 나오냐고 물어 보았더니 포테이토칩과 피클이라고 했다. 포테이토칩은 그만두고 피클을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 손톱깎이가 있는지도 물어 보았다. 물론 손톱깎이는 있었다. 호텔의 바에는 정말 모든 것이 다 있다. 나는 전에 호텔 바에서 불어 사전을 빌린 적도 있다.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천천히 야경을 바라보고, 재떨이에 대고 천천히 손톱을 깎고 다시 한 번 야경을 바라보고 손톱을 갈았다. 그렇게 밤은 깊어 갔다. 나는 도시에서의 시간 보내기에 관한 한 베테랑의 경지에 달했다. 스피커를 통해 내 이름이 호명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 이름으로 들리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고 몇 초쯤 지나자 내 이름은 조금씩 내 이름 고유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내 머리 속에서 순수한 내 이름이 되었다. 내가 손을 들어 신호를 하자, 웨이터가 무선 전화기를 테이블까지 가져다주었다.
"예정이 좀 변경되었네. 선생님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셨거든. 이제 시간이 별로 없네. 그래서 자네에게 준 시간도 앞당겨야겠네."하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얼마나."
"한 달 이상은 기다릴 수 없네. 한 달 만에 양을 못 찾으면 자네는 끝장이야. 자네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게 되는 거지."
한 달, 하고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서는 시간에 대한 관념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한 달이나 두 달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는 데에 일반적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기준이 없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용케도 여기를 알아냈군요."라고 나는 말해 봤다.
"우리는 웬만한 일은 대부분 알 수 있소"라고 남자는 대답했다.
"양이 있는 곳만 빼고는 말이군요."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런 셈이지"라고 남자는 말했다.
"어쨌든 움직이라고. 자네는 시간을 너무 허비하는군.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네. 자네를 그런 입장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자네 자신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이 맞다. 나는 봉투 속에서 1만 엔짜리 지폐를 꺼내 계산을 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지상에서는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두 발로 정상적으로 걷고 있었는데, 그런 광경을 보고도 특별히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5. 5,000분의 1
내 방으로 돌아오자, 우편함에는 석간신문과 함께 세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한통은 은행으로부터의 잔액 통지였고 한통은 어느 모로 보나 따분할 것 같은 파티의 초대장이었으며, 또 한통은 중고차 센터의 선전 광고였다. 좀 더 좋은 차로 바꾸면 인생이 그만큼 밝아진다는 선전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나는 세통의 편지를 겹쳐서 한꺼번에 가운데를 찢은 다음 휴지통에 버렸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컵에 따라 부엌의 테이블에 앉아서 마셨다. 테이블 위에는 여자 친구가 남기고 간 메모가 놓여 있었다.
"식사하러 나가요. 아홉 시 반까지 돌아올게요."라고 씌어 있었다.
테이블 위의 디지털시계는 현재의 시각이 9시 30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잠깐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 숫자는 31로 바뀌고 조금 지나자 32가 되었다.
시계를 바라보는 것도 싫증이 나서 나는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욕실에는 네 종류의 샴푸와 세 종류의 린스가 있었다. 그녀가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들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욕실에 들어가면 반드시 뭔가가 늘어나 있다. 세어보니 세이빙 크림이 네 종류, 치약이 다섯 종류나 있었다. 순열 조합으로 하면 대단한 수가 된다. 욕실에서 나와 조깅용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으니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불쾌감이 사라져 상쾌해졌다.
열 시 이십 분에 슈퍼마켓의 종이 봉지를 들고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언제나 밤중에 슈퍼마켓에 간다. 종이 봉지 속에는 청소용 브러시 세 개, 클립이 한 갑, 적당히 차가운 캔 맥주가 여섯 개 들어 있었다. 나는 또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양에 관한 이야기였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요."라고 그녀는 대꾸했다.
냉장고에서 소시지 통조림을 꺼내 프라이팬에다 볶아서 먹었다. 내가 세 개를 먹고, 그녀가 두 개를 먹었다. 부엌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저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기묘한 비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혈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꽤 긴 이야기여서 이야기가 끝났을 때에는 시계 바늘이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야"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다했는데도 그녀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줄곧 귀를 팠고 몇 번인가 하품도 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거죠?'
"출발?'
"양을 찾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나는 두 개째의 캔을 따려다가 얼굴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가긴 어딜 가"하고 말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일이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곤란해질 것도 없지 뭐. 어차피 회사는 그만둘 생각이었고, 누가 훼방을 놓더라도 먹고 살 정도의 일은 구할 수 있다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녀는 새 면봉을 상자에서 꺼내 잠시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간단한 얘기는 아니잖아요. 요컨대 양을 한 마리 찾아내면 되는 거죠?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찾기는 무슨 재주로 찾아. 홋카이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데다가 양도 몇 십만 마리나 있다고. 그 속에서 무슨 수로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낸단 말이야? 불가능해. 설사 그 양의 등에 별 모양이 있더라도 말이야."
"5,000마리예요."
"5,000마리?"
"홋카이도에 있는 양의 수말이에요. 1947년에는 27만 마리나 있었는데 지금은 5,000 마리밖에 없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나간 다음에 도서관에 가서 조사해 봤거든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모르는 게 없군."
"그렇지 않아요. 모르는 게 훨씬 많은걸요."
"그래"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리고 두 개째의 캔 맥주를 따서 그녀의 잔과 내 잔에 반씩 따랐다.
"어쨌든 홋카이도에 지금은 5,000 마리밖에 없어요.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말이에요. 어때요, 이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죠?"
그녀의 말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5,000 마리든 27만 마리든 별로 다를 게 없어. 문제는 광대한 땅에서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낸다는 데에 있는 거야. 게다가 단서는 하나도 없고."
"단서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우선 사진이 있고, 당신 친구가 있잖아요. 어떤 루트를 통해서든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모두 아주 막연한 단서지. 사진 속의 풍경이란 어디에나 있는 흔해 빠진 것이고, 쥐 녀석이 보낸 편지는 소인조차도 분명하지 않잖아."
그녀는 맥주를 마셨다. 나도 맥주를 마셨다.
"양을 싫어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양은 좋아해"라고 나는 대답했다.
머리가 다시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가지 않기로 이미 결정했다고"라고 나는 말했다. 나 자신을 타이를 생각으로 말했던 것인데 그다지 잘되지 않았다.
"커피 마실래요?"
"좋지"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빈 깡통과 잔을 치우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녀는 물이 끓을 때까지 옆방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들었다. 조니 리버스가 <미드나이트 스페셜>과 <롤 오버 베토벤>을 연거푸 불러대고 있었다. 그 다음 노래는 <시크릿 에 이젠 맨>이었다. 물이 끓자 그녀는 커피를 타면서, 테이프에 맞춰 <자니 B 굿>을 불렀다. 그동안 나는 석간신문을 읽었다. 아주 가정적인 풍경이었다. 양에 대한 문제만 없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테이프가 끝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얇은 비스킷 몇 조각을 먹었다. 나는 계속 석간신문을 읽었다. 더 이상 읽을 만한 게 없어지면 같은 데를 두 번 읽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하고 영화배우가 죽기도 하고 곡예를 하는 고양이도 있지만, 몽땅 나와는 관계없는 사건뿐이었다. 그동안 계속 조니 리버스는 오래된 로큰롤을 부르고 있었다. 테이프가 끝나자 나는 석간신문을 접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설사 허사로 끝난다 하더라도 양을 찾아다니는 편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거나 협박을 당하거나 휘둘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명령을 받거나 협박을 당하거나 휘둘리면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찾아야 할 것조차도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잠시 후에 나는 대꾸했다.
그녀는 말없이 귀를 파고 있었다. 가끔 머리카락 사이로 포동포동한 귓불이 보였다.
"지금쯤 홋카이도는 멋질 거예요. 관광객도 적고, 날씨도 좋고, 양도 모두 밖에 나와 있을 거고요. 적절한 시기라고요."
"그렇겠지."
"만약"이라고 그녀는 말하며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비스킷을 마저 먹었다.
"당신이 나를 데려가 주면, 틀림없이 당신한테 도움이 될 텐데요."
"왜 그렇게 양을 찾는 일에 신경을 쓰는 거지?"
"나도 그 양이 보고 싶으니까요."
"아무것도 아닌 보통 양이어서 헛수고가 될지도 몰라. 게다가 당신까지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게 될지도 모르고."
"상관없어요. 당신에게 골치 아픈 일은 내 일이기도 하잖아요."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난 당신이 좋아요."
"고마워. 그 뿐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석간신문을 접어서 테이블 한옆으로 밀어 놓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담배 연기를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이야기는 왠지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이야기는 왠지 마음에 안 들어. 꺼림칙해."
"어떤 일말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라고 나는 말했다.
"전체적으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황당하면서도 세부적인 데는 이상하게 아주 또렷하고 게다가 딱 맞아떨어지거든.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 위의 고무 밴드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게다가 양을 찾아내고 나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그 양이 진짜로 그 남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특수한 양이라면, 그것을 찾아냄으로써 지금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친구는 이미 그 심각한 문제에 휘말려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당신에게 그런 사진을 보냈을 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내가 가진 카드를 모조리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는데, 그 카드가 전부 상대의 카드에 진 것이다. 모두에게 내 작전을 들켜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체념하며
"아무래도 갈 수밖에 없겠군."하고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우며
"아마 당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거예요. 그리고 양은 꼭 찾을 수 있을 테고요."
그녀는 귀 손질을 마치고 면봉을 화장지에 싸서 버렸다. 그리고 고무 밴드를 집어 머리를 뒤로 묶어 귀를 내놓았다. 방안의 공기가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6. 일요일 오후의 피크닉
눈을 뜬것은 아침 아홉 시였다. 그녀는 옆에 없었다. 아마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그대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메모는 없었다. 욕실에는 그녀의 손수건과 팬티가 널려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서 마시고, 사흘 된 빵을 토스터에 넣었다. 빵에서는 벽에 바르는 흙 같은 맛이 났다. 부엌의 창문을 통해 옆집 마당의 협죽도가 보였다. 누군가가 멀리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올라가고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채 아래쪽으로 뛰어 내려가는 것처럼 치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찐 비둘기 세 마리가 전봇대에 앉아서 의미도 없이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비둘기는 뭔가 의미를 담고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의 물집이 아파서, 그래서 울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둘기 쪽에서 보면 의미가 없는 것은 바로 나일지도 몰랐다.
두 장의 토스트를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었을 때에는 비둘기의 모습은 사라지고 전봇대와 협죽도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튼 일요일 아침이다. 일요일자 신문에는 산울타리를 뛰어넘고 있는 말의 컬러 사진이 실려 있었다. 말 위에는 검은 모자를 쓴 안색이 나쁜 가수가 타고 있었는데, 옆 페이지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옆 페이지에는 난(蘭)의 재배법이 장황하게 실려 있었다. 난의 종류는 수백 가지고 각각에는 서로 다른 역사가 있었다. 어느 나라인가 그 나라의 왕후는 난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난은 왠지 모르게 운명을 생각하게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고, 운명이 있다.
여하튼 양을 찾으러 갈 결심을 하고 나니 기분이 아주 홀가분해졌다. 손가락 끝에까지 골고루 생기가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무 살이라는 분수령(分水嶺)을 넘은 이래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식기를 싱크대에 집어넣고 고양이에게 아침밥을 준 다음 검은 양복의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여섯 번 울리고 나서 남자가 받았다.
"잠을 깨운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나는 언제나 일찍 일어나니까"라고 남자는 말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지?"
"무슨 신문을 보시지요?"
"전국지 전부와 지방지 여덟 가지. 지방지는 저녁에나 오지만 말이야."
"그걸 모두 읽으시나요?"
"그것도 일이니까"라고 남자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래서?"
"일요일자 신문도 읽으시나요?"
"물론 읽는데"라고 남자는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말 사진 보셨습니까?"
"그 말 사진 봤네."라고 남자는 대답했다.
"말과 기수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요?"
초승달 빛이 비춰 들듯이 수화기를 통해 침묵이 방안으로 전해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귀가 아파올 것만 같은 완벽한 침묵이었다.
"그게 용건인가?'라고 남자가 말했다.
"아니, 그저 잡담이지요. 공통의 화제가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우리의 공통의 화제라면 다른 것이 있네. 가령 양 이야기라든가."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지만, 난 자네처럼 한가하지가 못하다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할 수 없겠나?"
남자의 말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는 내일 양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꽤 망설였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기로 했죠. 하지만 이왕 하는 거니깐 제 방식대로 하고 싶어요. 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겠어요. 나에게도 잡담을 할 권리쯤은 있으니까요. 일일이 행동을 감시당하고 싶지도 않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겁니다."
"자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오해하고 있군."
"그 쪽이야말로 제가 처한 상황을 오해하고 계시군요. 아시겠어요? 나는 밤새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지요. 잃어서 아쉬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누라와는 헤어졌고, 일도 오늘로 손을 뗄 작정입니다. 집은 셋집이고, 살림살이는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지요. 재산이라고는 저축해 둔 200만 엔 정도가 고작이고 중고차가 한 대, 그리고 늙은 수고양이 한 마리뿐입니다. 양복은 전부 유행이 지난 고물이고, 가지고 있는 레코드도 대개가 골동품 비슷한 것이지요.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신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섹스어필할 구석도 없고, 재능도 없고, 그다지 젊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쓸데없는 말만 하고 나중에 후회하지요. 다시 말해서,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범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잃을 수 있겠어요? 있다면 가르쳐 주시지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 동안 나는 셔츠의 단추에 얽혀 있는 실밥을 떼고, 볼펜으로 메모지에 별을 열세 개 그렸다.
"누구나 잃고 싶지 않은 게 한두 개는 있는 법이네. 자네에게도 말이야"라고 남자는 말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찾아내는 데는 프로거든. 인간에게는 욕망과 프라이드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이 반드시 있는 법일세. 모든 물체에 무게 중심이 있듯이 말이야. 우리는 그것을 찾아낼 수가 있지. 두고 보면 자네도 알게 되네. 그리고 그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것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라나 뭐, 그런 것은 좀 더 나중에 나타나는 문제야. 지금 시점에서는 자네가 말하는 요지를 모르는 바 아니네. 자네의 요구는 받아들이기로 하지. 쓸데없는 참견은 않기로 하겠네. 한 달 동안은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됐나?"
"좋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럼 이만"하고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를 끊긴 했는데 꺼림칙했다. 나는 꺼림칙한 기분을 없애기 위해서 팔굽혀펴기 서른 번과 윗몸 일으키기 스무 번을 하고 나서 설거지를 한 다음 사흘 정도 밀린 빨래를 했다. 그렇게 해서 기분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9월의 일요일이다. 이제 여름은 오래된 낡은 기억처럼 어디론가 사려져 버렸다.
나는 새 셔츠를 입고, 케첩이 묻지 않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양쪽 색깔이 같은 양말을 신고, 브러시로 머리를 빗었다. 그래도 열일곱 살 때 느꼈던 일요일 아침의 분위기를 다시 만끽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제대로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아파트의 주차장에서 폐차 직전의 폭스바겐을 몰고 나와 슈퍼마켓으로 가, 고양이 먹이 캔 한 다스와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와, 여행용 면도기 세트와 속옷을 샀다. 그리고 도넛 가게의 카운터에 앉아서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시나몬 도넛을 한 개 먹었다.
카운터의 정면 벽은 거울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 도넛을 먹고 있는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도넛을 먹다 말고 손에 든 채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내 얼굴을 쳐다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남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도넛을 마저 먹고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역 앞에 여행 대리점이 있기에 다음날 삿포르행 비행기 두 좌석을 예약했다. 그 다음에 역 빌딩으로 들어가 캔버스지로 된 어깨에 메는 여행 가방과 비 올 때 쓰는 모자를 샀다. 그때마다 주머니 속의 봉투에서 빳빳한 1만 엔짜리 지폐를 꺼내 지불했는데, 아무리 써도 지폐 다발은 통 줄기 않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이 약간 소모될 뿐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타입의 돈이 존재한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쓰고 나면 비참한 기분이 되고, 다 써버렸을 때에는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자기혐오에 빠지면 돈을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땐 돈이 없다. 구원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역 앞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두 개비 피우고, 돈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일요일 아침의 역 앞은 가족과 함께 나온 사람들과 젊은 커플로 붐볐다. 멍하니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내가 헤어질 때에.
"아이를 가질 걸 그랬나 봐요"라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이제 아이가 몇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나를 상상해 보았더니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다. 내가 아이라면 나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우고 나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빠져 나와 슈퍼마켓의 주차장에 세워 둔 차의 뒷좌석에 짐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급유와 오일 교환을 부탁한 다음 가까운 곳에 있는 책방에 들려 문고본을 세 권 샀다. 그렇게 해서 두 장의 1만 엔 권이 나가고, 주머니 속을 꾸깃꾸깃한 거스름돈으로 가득 찼다. 아파트에 돌아와서 부엌에 있던 유리 그릇 속에 거스름돈을 전부 던져 넣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여자 친구가 돌아온 것은 오후 세 시였다. 그녀는 체크무늬 셔츠에 겨자 색 면바지를 입고, 보기만 해도 내 머리가 아파올 듯한,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와 똑같은 커다란 캔버스 천으로 된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녀는 여행 준비를 하고 왔어"라고 말하며 불룩한 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꽤 오래 걸리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녀는 선글라스 낀 채 창가의 낡은 소파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박하담배를 피웠다. 나는 재떨이를 들고 그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소파로 뛰어올라 그녀의 발목에 턱과 앞발을 걸쳤다. 그녀는 담배를 피울 만큼 피우고는 나머지를 내 입술 사이에 끼우고 하품을 했다.
"여행 가는 게 좋아?" 나는 물어 보았다.
"네, 신나요. 특히 당신과 함께 간다는 사실이."
"하지만 만약에 양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이제 아무데로도 돌아올 수가 없어지게 되는 거야. 평생을 여행만 다니는 처지가 될지도 몰라."
"당신 친구처럼요?'
"그렇지.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는 서로 닮은꼴이지. 다른 점은 그는 자신의 의지로 도망쳤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는 거지."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고양이가 고개를 들고 요란스런 하품을 하고 나서 다시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여행 준비는 다했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아니, 이제부터 해야지. 하지만 짐은 별로 없을 거야.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 정도니까. 당신도 그렇게 큰 짐을 들고 갈 필요는 없어. 필요한 건 거기서 사면되거든. 돈은 있어."
"취미예요. 커다란 짐을 가져가지 않으면 여행 다니는 기분이 들지 않거든요."
그녀는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런가?"
활짝 열어 제친 창을 통해 날카로운 새소리가 들렸다. 들어 본 적이 없는 울음 소리였다. 새 계절의 새로운 새인가 보다. 나는 창으로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을 손바닥에 받아, 그것을 그녀의 볼에 살짝 얹어 놓았다. 그 자세 그대로 꽤 시간이 흘렀다. 나는 흰 구름이 창끝에서 이동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도저히 지금이 지금이라고는 생각되지가 않아. 내가 나라는 것도 어쩐지 딱 와 닿지를 않아. 그리고 여기가 여기라는 것도 말이야. 언제나 그래. 훨씬 뒤에 가서야 겨우 그게 연결되는 거야. 지난 10년 동안 줄곧 그랬어."
"왜 하필이면 10년이죠?"
"끝이 없이 때문이지. 그뿐이야."
그녀는 웃으며 고양이를 안아 살짝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아 줘요."
우리는 소파 위에서 서로 끌어안았다. 고가구점에서 사들인 고색창연한 소파는 천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옛날 냄새가 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그런 냄새와 잘 어울렸다. 그것은 희미한 기억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뒤로 넘긴 다음 귀에 입술을 댔다. 세계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작은, 정말로 작은 세계였다. 거기에서는 시간이 온화한 바람처럼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셔츠 단추를 모두 풀고 손바닥을 가슴 밑에 놓고 그대로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죠?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 말이야?"
"네, 내 몸과 나 자신 말이에요."
나는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 같군"하고 대답했다.
나는 정말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가을의 첫 번째 일요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있잖아요, 참 좋아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웅."
"어쩐지, 꼭 피크닉 온 것 같아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까요."
"피크닉?"
"그래요."
나는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그녀를 꼭 안았다. 그리고 입술로 이마의 앞머리를 치운 다음 다시 한 번 귀에 입을 맞췄다.
"그 10년은 길었어요?" 그녀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글쎄, 아주 길었던 것 같은 느낌이야. 아주 길었고,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어."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소파의 팔걸이에 올려놓은 목을 아주 조금만 구부리고 미소 지었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웃음이었는데, 그것이 어디서 그리고 누가 지었던 웃음인지는 통 생각나지 않았다. 옷을 벗어버린 여자들에게는 겁이 날 만큼 고통된 부분이 많아 그것이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우리 양을 찾아요. 양을 찾아내면 모든 일이 잘될 테니까요."
나는 잠깐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두 귀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오래된 정물화처럼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쌌다.
7. 한정된 집요한 사고방식에 대하여
여섯 시가 되자 그녀는 단정하게 옷을 입고 욕실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몸에 스프레이식 오데코롱을 뿌린 다음 이를 닦았다. 그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서, <셜록 홈즈의 사건 기록>을 읽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내 친구 와트슨의 생각은 한정된 좁은 범위의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집요한 데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꽤 멋진 서두였다.
"오늘 밤은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주무세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일 때문에?"
"네. 사실은 쉬는 날인데, 할 수 없죠 뭐. 내일부터 계속 쉬기로 했으니까 앞 당겨진 거예요."
그녀가 나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다시 문이 열렸다.
"참 여행하는 동안 고양이는 어떻게 할 거죠?"라고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군. 하지만 알아볼게."
그리고 문이 닫혔다.
나는 냉장고에서 우유와 치즈 스틱을 꺼내 고양이에게 주었다. 고양이는 먹기 거북하다는 듯이 치즈를 먹었다. 이가 완전히 약해진 모양이다.
냉장고 안에는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뉴스다운 뉴스가 없는 일요일이었다. 이런 날의 저녁 뉴스에는 대개 동물원 풍경이 나온다. 기린과 코끼리와 팬더를 대충 보고 나서 나는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끄고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고양이에 관한 일인데요"라고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고양이?'
"고양이를 기르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군가가 맡아 주지 않으면 여행을 떠날 수가 없거든요."
"애완동물 호텔이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나."
"늙어서 약해요. 한 달이나 우리 속에 가둬 두면 죽어 버릴 겁니다."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댁에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댁이라면 정원도 넓고 고양이 한 마리쯤은 맡아줄 여유가 있으시겠지요?"
"그건 좀 어렵네. 선생님은 고양이를 싫어하시고 정원에서는 늘 새와 가까이 지내고 계시거든. 그런데 고양이가 오면 새가 다가오지 않게 되겠지."
"선생님은 의식이 없으시고, 게다가 제 고양이는 새를 잡을 만큼 영리하지도 않아요."
손톱으로 다시 책상을 톡톡 치다가 멈췄다.
"좋네. 내일 아침 열 시에 운전사를 보내겠네."
"고양이 먹이와 화장실용 모래를 보내겠습니다. 먹이는 정해진 상표의 것만 먹으니까 떨어지면 똑같은 것을 사주십시오."
"자세한 것은 운전사에게 말하게.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네."
"창구는 하나로 해두었으면 합니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요."
"책임?'
"다시 말해서 제가 없는 동안에 고양이가 없어진다든지 죽는다든지 하면, 만약에 양을 찾더라도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래? 알았네. 약간 빗나가기는 했지만, 당신은 아마추어치고는 제법이군. 메모를 할 테니까 천천히 말하게."
남자가 말했다.
"고기의 비계는 주지 마세요, 모두 토해 버리니까. 이가 나빠서 질긴 것도 안 돼요. 아침엔 우유 한 병과 통조림, 저녁에는 멸치 한줌과 고기나 치즈 스틱을 주세요. 화장실은 매일 길아 줘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거든요. 설사를 잘 하는데, 이틀이 지나도 낫지 않거든 수의사에게 약을 받아서 먹여야 합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수화기 저쪽에서 남자가 볼펜으로 받아 적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라고 남자가 물었다.
"귀가 짓무르기 쉬우니까, 하루에 한 번 올리브유를 묻힌 면봉으로 귀를 청소해 줘야 합니다. 싫다고 요동을 치는데 고막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구에 흠이 날 염려가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발톱을 깎아 주세요. 보통의 손톱깎이면 됩니다. 벼룩은 없지만, 예방을 위해서 가끔 벼룩 제거 샴푸로 씻기는 게 좋을 거예요. 샴푸는 애완동물 가게에 가면 팔아요. 고양이를 씻긴 후에는 수건으로 잘 닦고 나서 솔질을 해주고, 마지막으로 드라이어로 말려 주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니까요."
볼펜 소리.
"그 밖에는?"
"대충 그 정돕니다."
남자는 메모한 사항을 전화기를 통해 쭉 읽었다. 잘 정리된 메모였다.
"됐나?"
"좋습니다."
"그럼"하고 남자는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주위엔 벌써 완전히 어둠이 깔렸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잔돈과 담배와 라이터를 넣고, 테니스 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단골 스낵에 들어가 치킨커틀릿과 롤빵을 주문하고, 그것이 나올 때까지 브라더스 존슨의 새 레코드를 들으면서 또 맥주를 마셨다. 브라더스 존슨이 끝나자 레코드는 빌 위저스로 바뀌고, 나는 빌 위저스를 들으면서 치킨커틀릿을 먹었다. 그리고 메이너드 커거슨의 <스타워즈>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별로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커피 잔이 물려진 다음 공중전화에 동전을 세 개 넣고, 친구의 집 전화번호를 돌렸다. 전화는 국민 학생인 그의 큰아들이 받았다.
"안녕(낮 인사)"하고 나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안녕하세요(밤 인사)."하고 정정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 아이가 옳았다.
잠시 후에 친구가 받았다.
"어떻게 됐어?"라고 그가 물어 왔다.
"지금 이야기해도 돼? 식사 중 아니야?"
"식사중이지만 괜찮아. 어차피 대단한 식사도 아니고, 그 쪽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것 같군."
나는 검은 양복의 남자와 나눈 대화를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커다란 자동차라든가 넓은 저택, 죽어 가는 노인, 그런 이야기 말이다. 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전화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덕택에 내 이야기는 뭐가 뭔지 통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하고 친구가 대꾸했다.
"이야기하면 안 되거든. 말하면 자네가 곤란하게 돼. 즉 자네에게는 가정도 있고......."
나는 말하면서 아직 융자가 끝나지 않은 방 네 개짜리인 그의 고급 아파트와 저혈압인 그의 아내와 그의 귀여운 두 아들을 떠올렸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그랬군."
"어쨌든 내일부터 여행을 떠나야 해. 긴 여행이 될 것 같아.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세 달이 될지 나도 잘 몰라. 어쩌면 도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몰라."
"그래?"
"그래서 회사 일은 자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네. 나는 손을 떼겠어. 자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일은 그런대로 일단락 지었고, 공동 경영이라고는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자네가 관리했고 나야 반은 놀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없으면 실무의 자질구레한 일은 알 수 없잖아."
"일을 좀 축소하는 거야. 다시 말해서 옛날로 돌아가는 거지. 광고라든가 편집 일은 전부 취소하고 옛날의 번역 사무소로 돌아가는 거야. 자네가 일전에 말했듯이 말이야. 여사원 한 명만 남기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내보내야겠지. 이제 필요 없으니까 말이야. 두 달 치 월급을 퇴직금으로 주면 아마 아무도 불평을 안 할 거야. 사무실도 좀 더 작은 데로 옮기면 돼. 수입은 줄겠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야. 세금이나 자네가 말한 착취 따위에 대한 걱정도 훨씬 줄겠지. 자네에게 맞을 거야."
그는 잠시 말없이 생각했다.
"안 돼. 분명히 잘 안 될 거야"하고 말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찾는 사이에 웨이트리스가 성냥을 그려 불을 붙여 주었다.
"그렇지 않아. 줄곧 함께해 온 내가 말하는 거니까 틀림없어."
"자네와 함께였기 때문에 해올 수 있었던 거야. 이제까지 혼자 뭔가를 해서 제대로 된 적이 없다고."
그가 대꾸했다.
"이봐, 잘 들어.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니라 축소하라는 거야. 옛날에 우리가 하던, 산업 혁명 이전의 번역 수작업이야. 자네와 여사원 한명, 외주 번역 아르바이트생 대여섯 명과 프로 두 명, 못할 이유가 없잖아."
"자네는 나라는 놈에 대해 잘 모르는 거야."
동전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다시 동전 세 개를 넣었다.
그는 "난 자네와는 달라"라고 말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네는 혼자서 해나갈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못하고. 누군가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든지, 의논을 하지 않고는 일을 진행시키지 못할 거야."
나는 수화기를 손으로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다. 흑염소가 백염소의 편지를 먹고, 백염소가 흑염소의 편지를 먹고…….
"여보세요"라고 그가 불렀다.
나는 "듣고 있어"라고 말했다.
전화 저편에서 두 아이가 텔레비전의 채널을 가지고 말다툼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 생각을 하라고"라고 나는 말해 보았다. 페어플레이는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못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자네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이야. 세상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면 아이 따위는 만들지 말았어야지.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일을 하고 술 같은 건 마시지 말아야지."
그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손짓으로 맥주를 주문했다.
"하긴 자네 말이 맞아"라고 그는 대꾸했다.
"어떻게 해볼게. 잘될지 어떨지는 자신이 없지만 말이야."
"잘 될 거야.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6년 전에도 그만큼 할 수 있었잖아."
나는 컵에 맥주를 따르고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자네와 함께 있어서 얼마나 안심하고 있었는지 모를 거야"라고 친구는 말했다.
"또 전화 할게."
"그래."
"오랫동안 고마웠네. 즐거웠어."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볼일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오면 또 함께 일을 하자고."
"그러지."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6년이나 함께 일을 해보면 그만한 것을 알게 되는 법이다.
나는 맥주병과 컵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 계속 마셨다.
실업자가 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나는 조금씩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잃고, 10대를 잃고, 친구를 잃고, 아내를 잃고, 앞으로 세 달 후면 20대를 잃게 된다. 예순이 되었을 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허사였다. 한 달 후의 일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이를 닦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다음 잠자리에 들어가 <셜록 홈즈의 사건 기록>을 계속 읽었다. 그리고 열한 시에 불을 끄고 푹 잤다.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8. 정어리의 탄생
아침 열 시에 잠수함 같은 그 차가 아파트 현관에 멈췄다. 3층 창으로 내려다보니, 차는 잠수함이라기보다는 쿠키를 만드는 금속 틀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삼백 명의 아이들이 달라붙어서 먹는 데에 2주일 정도는 걸릴 만한 거대 한 쿠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그녀는 창틀에 걸터앉아서 잠시 자동차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은 기분 나쁠 정도로 맑게 개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표현주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하늘이었다. 멀리 상공을 날고 있는 헬리콥터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작게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마치 눈꺼풀이 잘려 나간 거대한 눈 같았다.
나는 방의 창문을 모두 닫고 잠근 다음 냉장고의 스위치를 끄고 가스 밸브가 잠겼는지 확인했다. 빨래는 모두 거두어 들였으며, 침대에는 커버를 씌우고 재떨이는 씻어 놓았다. 욕실에 있는 엄청난 약품류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두 달 치 집세는 미리 지불했고 신문도 중단시켰다. 문 앞에서 바라보는 사람 없는 방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괴괴했다. 나는 그런 방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보낸 4년간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생각했고, 내가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었을지도 모를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철문을 닫았다.
운전사는 나를 기다리는 동안 천으로 열심히 앞 유리를 닦고 있었다. 차에는 여전히 얼룩이 하나도 없고, 그것은 태양 아래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손을 대도 피부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나도 인사했다.
그리고 내 여자 친구도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녀가 고양이를 안고, 내가 고양이 먹이와 화장실용 모래가 든 종이 봉지를 들었다.
운전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막힌 날씨군요"하고 말했다.
"뭐라고 할까, 아주 투명한 것 같아요."
우리는 끄덕였다.
나는 "이처럼 맑은 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전해지기 쉽겠지요?"라고 말해 보았다.
운전사는 싱글벙글하면서 대꾸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메시지는 만물 속에 이미 있습니다. 꽃에도 들에도 구름에도......."
"차는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차에도 있지요."
"하지만 차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내가 말했다.
"누가 만들었든 신의 의지라는 것은 만물 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귀진드기 처럼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공기처럼요"라고 운전사는 정정했다.
"그럼 가령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차에는 알라가 들어가 있겠군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차는 생산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입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정말입니다."
"그럼 미국에서 만들어져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출된 차에는 어떤 신이 들어 있을까요." 내 여자 친구가 물었다.
어려운 문제였다.
"참, 고양이에 대해서 일러드려야겠군요"라고 내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운전사도 다행이라는 듯이"귀여운 고양이군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결코 귀엽지 않았다. 귀엽다기보다는 정반대였다. 털은 닳아빠진 융단처럼 뻣뻣하고, 꼬리 끝은 60도 각도로 구부러지고, 이는 누런 데다 가 오른쪽 눈은 3년 전에 다쳐서 고름이 계속 나와 이제는 거의 시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운동화와 감자를 분간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발 안쪽은 바싹 말라 버린 콩 같고 귀에는 숙명처럼 귀진드기가 붙어 있으며, 나이 탓으로 하루에 스무 번은 방귀를 뀌었다. 아내가 공원 벤치 밑에서 주워 왔을 때만 해도 어리고 말끔한 수고양이였는데, 고양이는 1970년대의 후반을 비탈길에 놓인 볼링공처럼 파국을 향해서 급속히 굴러 내려갔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 고양이의 비극성을 그나마 덜어 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조장하고 있는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운전사는 "어디, 어디 보자"라고 고양이를 향해서 말했지만, 역시 손은 대지 않았다.
"이름이 뭐죠?"
"이름이 없어요."
"그럼 뭐라고 부르지요?"
나는 말했다. "부르지 않아요.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데 이름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은데요?"
"정어리도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도 이름 같은 건 붙이지 않아요."
"하지만 정어리와 인간 사이에는 우선 마음의 교류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다가 제 이름이 불린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야 뭐, 붙이는 건 자유겠지만."
"다시 말해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인간과 마음을 교류할 수 있으며, 게다가 청각을 가진 동물만 이름이 붙여질 자격이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런 말이 되겠네요."
운전사는 스스로 납득한 듯이 몇 번인가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제가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여도 될까요?"
"그야 전혀 상관없지요. 하지만 어떤 이름을?"
"정어리 어떻습니까? 즉 이제까지 정어리와 똑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나쁘지 않은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운전사는 우쭐해서 "그렇죠."하고 말했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어쩐지 천지 창조 같아." 그녀의 말에 나는 "여기에 정어리 있으라."라고 말했다.
"정어리 이리 온"하고 운전사는 말하며 고양이를 안았다. 고양이는 겁을 먹어 운전사의 엄지손가락을 물고 방귀를 뀌었다.
운전사는 우리를 공항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고양이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끔 방귀를 뀌었다. 운전사가 자주 창문을 열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는 길에 고양이에 대한 주의 사항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귀청소를 하는 방법이라든가 화장실요 방취제를 파는 집이라든가 먹이의 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잘 돌볼 테니까요. 제가 이름을 지어 준 대부 아닙니까." 운전사가 말했다.
도로가 아주 한산해서 차는 산란기의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공항을 향해서 달렸다.
"왜 배에는 이름이 있고, 비행기에는 이름이 없을까요? 왜 971편이라든가 326 편이라고만 하고 '은방울꽃호'나 '데이지호'와 같은 개별적인 이름은 붙이지 않을 까요?"
내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아마 배에 비해서 너무 많아서 그럴 겁니다. 그리고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되고."
"그런가요? 배도 공장에서 생산되고, 비행기보다 많다고요."
"하지만" 하고 나서 운전사는 몇 초 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을 이었다.
"현실적인 문제로 시내버스에 일일이 이름을 붙일 수도 없을 테니까 말이지요."
"시내버스 하나하나에 이름이 붙어 있다면 참 좋을 텐데"라고 여자 친구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승객이 좋아하는 버스만 골라서 타게 되지 않을까요? 가령 신주쿠에서 센다가야까지 가는 데에, '영양호'라면 타는데 '노새호'라면 타지 않는다든가"라고 운전사가 말했다.
나는 여자 친구에게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었다.
"하긴 정말 '노새호'라고 하면 타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노새호'의 운전사가 불쌍합니다." 운전사가 운전사 입장에서 발언을 했다.
"'노새호'의 운전사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맞아요."라고 나는 맞장구 쳤다.
"그래요."하고 그녀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나는 '영양호'에 탈래요."
"거봐요"라고 운전사는 말했다.
"그런 겁니다. 배에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공장에서 생산되기 전부터 친숙해져 있었다는 흔적이죠. 원리적으로는 말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러니까 말처럼 사용되고 있는 비행기에는 이름이 붙어 있어요. 예를 들면 '스피리츠 오브 세인트루이스'나 '에노라 게이'처럼 말이지요. 확실히 의식의 교류 가 있거든요."
"그런 즉 생명이라는 개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목적성이라는 것은 이름에 있어서는 양의적인 요소겠네요?"
"그렇습니다. 목적성 만이라면 번호면 되지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당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겠군요."하고 나는 대꾸했다.
"하지만 말이죠, 만약에 이름의 근본이 생명의 의식 교류 작업에 있다면 왜 역이나 공원, 야구장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요? 생명체가 아닌데도 말이지요."
"하지만 역에 이름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목적적으로가 아니라 원리적으로 설명해 달라는 거지요."
운전사는 신중하게 생각하느라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뀐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뒤따라오던 캠핑카로 꾸민 하이 에이스가 <황야의 7인>의 주제 음악을 흉내 낸 소리를 울렸다.
"호환성이 없기 때문 아닐까요. 예를 들어서 신주쿠 역은 하나 밖에 없고 시부야역과 바꿀 수는 없잖아요. 호환성이 없다는 점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대량 생산물이 아니라는 점. 이 두 가지면 어떻습니까?" 운전사가 말했다.
"신주쿠 역이 에코다에 있다면 좋은데"라고 여자 친구가 말했다.
"신주쿠 역이 에코다에 있으면, 그것은 에코다 역이지요"라고 운전사가 반박했다.
운전사의 말에 그녀는 "하지만 오다큐 선도 함께 따라 오는 거예요"하고 말했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리죠. 만약 역에 호환성이 있다면 어떻게 되나요? 만약에 말이죠, 만약 국철의 역들이 전부 대량 생산물의 조립식으로 신주쿠 역 과 도쿄 역을 그대로 몽땅 교환할 수 있다면?"
내가 말했다.
"간단하지요. 신주쿠에 있으면 신주쿠 역이고, 도쿄에 있으면 도쿄 역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물체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역할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뜻이 되겠군요. 그건 목적성이 아닌가요?"
운전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문득 생각이 났는데요."라고 운전사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따뜻한 눈길을 보내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닐 까요?'
"무슨 뜻이죠?'
"즉 도시라든가 공원이라든가 길, 야구장, 영화관 등에는 모두 이름이 붙여져 있지요? 그것들은 지상에 고정되어 있는 대가로서 이름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새로운 학설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가령 내가 의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어딘가에 꽉 고정되었다고 하면, 내게도 훌륭한 이름이 붙을까요?"
운전사는 백미러 속의 내 얼굴을 흘끗 보았다. 어딘가에 함정이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고정이라니요?"
"말하자면 냉동되어 버린다든가, 뭐 그런 거지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미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군."하고 말했다.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우리는 공항 카운터에서 탑승권을 받고 나서 따라온 운전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끝까지 전송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출발까지는 아직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기에 단념하고 돌아갔다.
"꽤 별난 사람이네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저런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곳이 있어. 거기서는 젖소가 집게를 찾아다니고 있지"하고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왠지 <고개 위의 우리 집>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공항의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좀 이른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새우 그라탱을 주문했고, 그녀는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창 밖에선 747이라든가 트라 이스타가 일종의 숙명을 생각하게 하는 장중함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파게티를 한 가닥 한 가닥 의심스러운 듯이 점검하면서 먹었다.
"비행기 안에서 식사가 나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라고 불만스러운 듯이 그녀는 말했다.
"아니야"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그라탱 덩어리를 입 속에서 조금 식혀서 삼킨 다음 곧 찬물을 마셨다. 그저 뜨겁기만 할 뿐 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기내식이 나오는 건 국제선이야. 국내선이라도 좀 더 긴 거리라면 도시락 정도가 나오는 수도 있지만 말이야. 하지만 별로 맛이 없어."
"영화는요?"
"영화는 무슨, 없어. 삿포로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거든."
"그럼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무것도 없지. 자리에 앉아서 책이나 좀 읽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야. 버스나 마찬가지지."
"신호등만 없을 뿐이네요."
"그래, 신호등은 없지."
그녀는 "맙소사"라고 말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스파게티가 반쯤 남았는데 포크를 놓더니 종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름 같은 건 붙일 필요도 없는 거 아니에요?"
"글쎄 말이야. 따분한 거지. 시간이 훨씬 단축된다는 것뿐이야. 기차로 가면 열두 시간을 걸리니까."
"그래서 남은 시간은 어디로 갔죠?"
나도 그라탱 먹는 걸 도중에서 그만두고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남은 시간?"
"비행기 덕분에 열 시간 이상이나 시간이 절약되는 셈 아니에요? 그만큼의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죠?"
"시간은 아무데도 안가. 가산될 뿐이지. 우리는 그 열 시간을 도쿄에서든 삿포로에서든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거야. 열 시간이면 영하를 네 편 보고 식사를 두 번 할 수 있지. 안 그래?"
"영화도 보고 싶지 않고, 식사도 하고 싶지 않다면요?"
"그건 그 쪽 사정이지. 시간 탓은 아니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잠깐 몽땅한 747 기체를 바라보았다. 나도 함께 그것을 바라보았다. 747을 보면 언제나 옛날에 이웃에 살던 뚱뚱하고 못생긴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탄력이 없는 거대한 유방과 퉁퉁 부은 발, 꺼칠한 목덜미. 공항은 그런 아줌마들의 집회장처럼 보였다. 몇 십 명이나 되는 그런 이주머니들이 차례차례 왔다가는 사라졌다.
목에 힘을 주고 공항 로비를 왔다 갔다 하는 파일럿과 스튜어디스는, 그녀들에 비해 기묘하게 평면적으로 보였다. DC7이나 프랜드십(쌍발 터보프롭식의 여객기)의 시대에는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정말로 그랬는지는 나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747이 뚱뚱하고 못생긴 아주머니를 닮은 탓에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든 모양이다.
"저 시간은 팽창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아니, 시간은 팽창하지 않아"라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말했는데요. 전혀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 다음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시간은 팽창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시간을 늘어나고 있잖아요. 당신이 말했듯이 가산되고 있고요."
"이동에 필요한 시간이 줄었다는 것뿐이야. 총시간은 변하지 않아. 단지 영화를 많이 볼 수가 있다는 것뿐이란 말이야."
"영화를 보고 싶다면 말이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삿포로에 도착하자마자 동시 상영 영화를 보았다.
☆☆☆ 제7장 ☆☆☆
돌고래 호텔의 모험
(양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중국 북부, 몽고 지역에서는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라네. 그 사람들 사이에서는 양이 체내에 들어온다는 것은 신의 은총이라고 여겨지고 있지. 예를 들어서 원(元)나라 시대의 어떤 책에는 칭기즈칸의 체내에는 '별을 짊어진 백양'이 들어가 있었다고 씌어져 있지.)
1. 영화관에서 이동이 완성되다. 돌고래 호텔로
비행기를 타고 있는 동안, 그녀는 창가에 앉아서 줄곧 눈 아래에 펼쳐지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옆에서 내내 <셜록 홈즈의 사건 기록>을 읽었다. 아무리 가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지상에는 시종 비행기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있으므로 그 산과 들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의 그림자 속에는 우리의 그림자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지상에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종이컵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난 그 사람 좋던데요."하고 말했다.
"그 사람?"
"운전사 말이에요."
"응, 나도 좋아"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정어리란 이름도 마음에 들어요."
"맞아. 아닌 게 아니라 좋은 이름이야. 고양이도 나랑 있는 것보다 거기에 있는 편이 행복할지도 모르지."
"고양이가 아니라 정어리예요."
"그래. 정어리."
"왜 내내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어요?"
"왜일까?"라고 나는 반문했다. 그리고 양의 문장이 새겨진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마 이름이라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거야.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고, 우리는 우리고, 그들은 그들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래요? 우리라는 말은 어쩐지 마음에 들어요. 왠지 빙하 시대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아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빙하 시대?"
"가령 우리는 남에게 이동해야 한다든가 매머드를 잡아야 한다든가 말이에요."
"그렇군."하고 나는 말했다.
지토세(千歲) 공항에서 짐을 받아 가지고 밖으로 나오자 공기는 예상했던 것 보다 차가웠다. 나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면 셔츠를 티셔츠 위에 껴입고, 그녀는 셔츠 위에 털실로 짠 조끼를 입었다. 도쿄보다 정확히 한 달 정도 일찍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삿포로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우리는 빙하 시대에 만나야 했던 게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당신은 매머드를 잡고 나는 아이를 기르고."
"멋있을 것 같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을 잤고, 나는 버스의 창을 통해 도로 양쪽에 이어지고 있는 깊은 숲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삿포로에 도착하자마자 찻집에 들어갔는데, 나는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우선 기본 방침을 정하자고. 분담을 하는 거야. 즉 나는 사진의 풍경에 대해 알아보고 당신은 양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렇게 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거든."
"합리적인 것 같아요."
"잘된다면 말이지"라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당신은 홋카이도에 있는 양 목장의 분포와 양의 종류를 알아보는 거야. 도서관이나 도청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야."
"도서관이라면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다행이군."하고 대꾸했다.
"지금부터 시작해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세 시 반이었다.
"아니, 오늘은 벌써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내일부터 하지. 오늘은 좀 쉬다가 묵을 데를 정한 다음 식사를 하고 목욕하고 자는 거야."
"영화가 보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영화?"
"왜냐하면 모처럼 비행기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잖아요."
"그야 그렇지"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제일 먼저 눈에 띈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본 것은 범죄 영화와 초자연 현상을 다룬 영화 두 편이었는데, 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텅 빈 영화관에 들어간 것도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나는 심심풀이 삼아 관객의 수를 세어 보았다. 우리를 포함해서 여덟 명이었다. 영화의 등장인물이 훨씬 더 많았다.
하긴 영화도 보통 이하였다. MGM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나서 메인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난 순간 벌써 등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였다. 실제로 그런 영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진지한 눈길로 뚫어져라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을 걸 틈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단념하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초자연적 내용을 다룬 영화로 악마가 거리를 지배하는 영화다. 악마는 교회의 초라한 지하실에 살며 임파선 염을 앓고 있는 목사를 앞잡이로 부리고 있었다. 악마가 왜 그 거리를 지배할 마음을 먹었는지 나는 영문을 알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옥수수 밭으로 둘러싸인 형편없이 초라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 거리에 몹시 집착하고 있어, 한 소녀만이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오지 않는 데에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악마는 화가 나면 흐물흐물한 초록색 플루트 젤리처럼 몸을 떨며 진노했다. 그 진노하는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저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데가 있었다.
우리 앞자리의 중년 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때 울리는 기적 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코를 골고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서는 진한 애무 행위가 진행 중이었고, 뒤쪽에서는 누군가 거대한 소리로 방귀를 뀌었다. 중년 남자의 코고는 소리가 한순간 멈출 정도의 거대한 방귀였다. 여고생 두 명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정어리 생각이 났다. 정어리 생각을 하니 내가 도쿄를 떠나서 삿포로에 와 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의 방귀 소리를 듣기 전까지 나는 자신이 도쿄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잠들어 버렸다. 꿈속에 초록색 악마가 나왔다. 꿈속의 악마는 전혀 미소를 자아내게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장내가 밝아지면서 나도 잠을 깼다.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차례로 하품을 했다. 나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와서 그녀와 먹었다. 작년 여름에 팔다 남은 것처럼 딱딱했다.
"계속 잤어요?"
"응"하고 나는 대답했다.
"재미있었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마지막에 마을이 폭발해 버렸어요."
"저런."
영화관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고요하다기보다도 내 주위만이 이상하게도 괴괴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있잖아"라고 그녀가 말을 꺼냈다.
"어쩐지 이제야 몸이 이동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계속 이렇게 하고 있어요. 불안하거든요."
"그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딘가 딴 데로 이동해 버릴 것 같아요. 어딘가 아주 형편없는 곳으로."
장내가 어두워지고 예고편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치고 귀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당신 말이 맞아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탈 걸 그랬나 봐."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조용한 이동을 계속했다. 그녀는 내 어깨에 줄곧 뺨을 대고 있었다. 어깨가 그녀의 입김에 의해 따뜻해지고 촉촉해졌다.
영화관을 나와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해질녘의 거리를 산책했다. 나와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친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싫지 않았고, 하늘에는 희미하게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정말로 맞는 곳에 있는 걸까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극성은 정확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가짜 북극성처럼도 보였다. 너무 크고 너무 밝았다.
"글쎄"하고 나는 대꾸했다.
"뭔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처음 오는 거리란 다 그런 법이야. 아직 이 거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곧 익숙해질까요?"
"아마 이틀이나 사흘 정도면 익숙해질 거야"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걷다가 지쳐 눈에 띄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생맥주를 두 잔씩 마시고 감자와 연어 요리를 먹었다. 되는대로 들어간 집치고는 음식이 꽤 괜찮았다. 맥주는 아주 맛있었고 화이트소스는 담백하고도 감칠맛이 났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자, 이제 슬슬 묵을 데를 정해야겠지?"
"묵을 곳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대강 그려 뒀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어떤?"
"어쨌든 호텔 이름을 차례로 읽어 봐요."
나는 무뚝뚝한 웨이터에게 직종별 전화번호부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 '여관, 호텔'이라는 페이지를 모조리 읽어 나갔다. 마흔 번째 호텔 이름을 읽고 있는데 그녀가 잠깐, 하고 제동을 걸었다.
"그 곳이 좋겠어요."
"그 곳?"
"방금 마지막으로 읽은 호텔 말이에요."
"돌핀 호텔"하고 나는 다시 읽었다.
"무슨 뜻이에요?"
"돌고래 호텔."
"거기에 묵기로 해요."
"들은 적도 없는데."
"하지만 거기 말고는 묵을 만한 호텔이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번호부를 웨이터에게 돌려준 다음 돌고래 호텔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흐릿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더블이나 싱글이라면 빈방이 있다고 했다. 나는 더블과 싱글 이외에는 어떤 방이 있느냐고 참고로 물어 보았다. 물론 더블과 싱글 이외의 방은 없었다. 약간 머리가 혼란스러워졌지만, 어쨌든 더블을 예약하고 요금을 물었다.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 보다 40퍼센트 가량이 쌌다.
돌고래 호텔은 우리가 들어갔던 영화관에서 서쪽으로 세 블록 가서 남쪽으로 한 블록 내려간 데에 있었다. 호텔은 작고 개성도 없었다. 이만큼 개성이 없는 호텔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 특색 없는 호텔이었다. 그 무개성(無個性)에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분위기조차 감돌고 있었다. 네온사인도 큰 간판도 제대로 된 현관조차도 없었다. 레스토랑의 종업원용 출입구 같은 멋없는 유리 문 옆에 '돌핀 호텔'이라고 새겨진 동판이 끼워져 있을 뿐이었다. 돌고래 그림조차 그려져 있지 않았다.
건물은 5층이었지만, 마치 큰 성냥갑을 세로로 세워 놓은 것처럼 밋밋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다지 낡진 않았는데, 그래도 남의 눈을 끌 정도로는 낡았다. 분명히 처음 지었을 때부터 이미 낡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돌고래 호텔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눈에 돌고래 호텔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 호텔인데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괜찮아 보이는 호텔?"하고 나는 되물었다.
"아담하고 쓸데없는 것도 없을 것 같고요."
"쓸데없는 것?"하고 나는 반문했다.
"당신이 말하는 쓸데없는 것이란 얼룩이 없는 시트라든가 물이 새지 않는 세면대, 조절이 잘되는 에어컨디셔너, 부드러운 화장지, 새 비누, 볕에 바래지 않은 커튼 따위를 말하는 거겠지?"
"당신은 너무 사물의 어두운 면만 보는 것 같군요. 어쨌든 우리는 관광 여행을 온 게 아니잖아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문을 열자 로비는 생각보다 넓었다. 로비 한가운데에는 응접세트와 대형 컬러텔레비전이 한 대 놓여 있었다.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퀴즈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의 양옆에는 커다란 관엽 식물 화분이 놓여 있었는데 잎이 반쯤 변색되어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그 두 화분 사이에 서서 잠시 로비를 바라보았다. 잘 살펴보니 로비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가구가 너무 없어 넓어 보였던 것이다. 응접세트와 괘종시계와 커다란 거울,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벽으로 다가가 시계와 거울을 바라보았다. 양쪽 다 어딘가에서 기증한 것이었다. 시계는 7분이나 틀렸고, 거울에 비친 내 목은 내 몸통에서 조금 어긋나 있었다.
응접세트도 호텔 그 자체와 비슷할 정도로 낡은 것이었다. 오렌지색이었는데 상당히 기묘한 색이었다. 잔뜩 볕에 바래게 한 다음 일주일 동안 비를 맞히고, 그 다음 지하실에 처넣어서 일부러 곰팡이를 슬게 한 것 같은 오렌지색이었다. 총천연색 영화의 초기 무렵에 이런 색을 본 적이 있다.
가까이 가보니 응접세트의 긴 의자에는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중년 남자가, 말린 생선이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처음에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자고 있을 뿐이었다. 코를 가끔 실룩거렸다. 콧잔등에는 안경 자국이 나 있었는데, 안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냥 잠든 게 아닌 모양이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프런트에 서서 카운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벨을 눌렀다. 찌르릉 하는 소리가 휑뎅그렁한 로비에 울려 퍼졌다.
30초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긴 의자 위의 중년 남자도 깨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벨을 울렸다.
긴 의자 위에서 중년 남자가 신음 소리를 냈다.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신음 소리였다. 그러고 나서 남자는 눈을 뜨고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그치듯이 세 번째 벨을 눌렀다.
남자는 펄쩍 뛰어오르듯이 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로비를 가로질러 내 옆을 지나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프런트 직원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남자는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 버려서……."
"깨워서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별 말씀을"하고 프런트 직원은 말했다. 그리고 내게 숙박 카드와 볼펜을 내밀었다. 그는 왼손 새끼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이 없었다.
나는 카드에 일단 본명을 적었다가 생각이 바뀌어 그것을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새 카드에 엉터리 이름과 엉터리 주소를 적었다. 평범한 주소와 평범한 이름이었는데,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이름과 주소였다. 직업은 부동산업으로 해 두었다.
프런트 직원은 전화 옆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테의 두꺼운 안경을 쓰고 내 숙박 카드를 자세히 읽었다.
"도쿄 도 스기나미 구(杉竝區)……29세, 부동산업."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손가락에 묻은 볼펜 잉크를 닦았다.
프런트 직원은 "사업상 용무로?"라고 물었다.
"뭐, 그런 셈이지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며칠 동안 묵으시겠습니까?"
"한 달"하고 나는 말했다.
"한 달?"
그는 새하얀 도화지를 바라볼 때와 같은 눈초리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달 내내 묵으실 건가요?"
"곤란한가요?"
"아니오, 저, 곤란하지는 않습니다만, 사흘마다 정산을 해주셔야만하기 때문예요."
나는 가방을 바닥에 놓고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빳빳한 1만 엔 권 스무 장을 세어 카운터 위에 놓았다. "부족해지면 또 낼 테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프런트 직원은 나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서 열쇠가 죽 꽂힌 곳을 보고 한참 망설이다가 406이라는 번호가 붙을 걸 집었다. 거의 모든 열쇠가 꽂혀 있었다. 돌고래 호텔은 경영적으로 성공한 호텔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돌고래 호텔에는 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우리는 손수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 호텔에는 쓸데없는 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폐병에 걸린 커다란 개처럼 덜커덩덜커덩 흔들렸다.
"오래 묵으려면 이렇게 작고 깔끔한 호텔이 좋아"라고 그녀가 말했다.
작고 깔끔한 호텔이란 표현은 아닌 게 아니라 나쁘지 않은 표현이었다. <앙앙>의 여행 가이드 페이지에라도 나올 법한 문구다. 오래 묵으시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마음 편한 작고 깔끔한 호텔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작고 깔끔한 호텔의 방에 들어서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창틀을 기어 다니고 있던 작은 바퀴벌레를 슬리퍼로 후려치고, 침대 밑에 떨어져 있던 두 올의 음모를 집어서 휴지통에 버리는 일이었다. 홋카이도에서 바퀴벌레는 처음 보았다. 그녀는 그동안 물의 온도를 조절하면서 목욕 준비를 했다. 아무튼 거대한 소리가 나는 수도꼭지였다.
나는 욕실 문을 열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좀 더 괜찮은 호텔에 묵어도 되잖아.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야."
"돈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의 양 찾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어쨌든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요."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담배를 한 개비 피운 다음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켜고, 채널을 모조리 틀어 보고 나서 껐다. 텔레비전 영상만은 정상이었다. 물소리가 그치고 그녀의 옷이 문밖으로 집어 던져지더니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창의 커튼을 열자, 길 건너편에는 돌고래 호텔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만그만한 빌딩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재라도 뒤집어 쓴 듯이 지저분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줌 냄새가 났다. 아홉 시가 다되었는데도 몇몇 창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바쁜 듯이 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하기는 그들이 나를 봐도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커튼을 닫고 침대로 돌아와 아스팔트 도로처럼 딱딱하게 풀을 먹인 시트에 드러누워서 헤어진 아내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남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상대방 남자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처음엔 내 친구였으니까 잘 모를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는 스물일곱 살 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재즈 기타리스트인데,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재즈 기타리스트치고는 비교적 정상적인 남자였다. 성격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스타일이 없을 뿐이다. 어느 해에는 케니 바렐과 B. B 킹 사이를 방황했고, 어느 해에는 래리 코리엘과 짐 홀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녀가 어떻게 나 다음으로 그런 남자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한 사람 한 사람 속에는 경향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그가 나보다 뛰어난 점은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것뿐이고, 내가 그보다 뛰어난 점은 설거지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대개의 기타리스트는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손가락을 다치게 되면 존재 이유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나는 그녀와의 섹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심심풀이로 4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면서 몇 번 정도 섹스를 했는지 계산해 보았다. 그러나 결 국 나온 숫자는 부정확한 숫자였고, 부정확한 숫자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일기를 써 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적어도 수첩에 표시만이라도 해두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으면 4년 동안 내가 한 섹스의 횟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가 있었을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정확하게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현실성이다.
헤어진 아내는 섹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초경이 있던 해부터 대학 노트에 생리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참고 자료로서 섹스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 노트는 전부 여덟 권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소중한 편지나 사진과 함께 잠글 수 있는 서랍에 보관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섹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록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녀와 헤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죽으면"하고 그녀는 자주 말하곤 했었다.
"저 노트는 태워 저요. 석유를 듬뿍 뿌려서 완전히 태우고 난 뒤 땅에 묻어 줘요. 한 글자라도 보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난 내내 당신과 자고 있잖아. 몸의 구석구석까지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어. 새삼스럽게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세포는 한 달마다 바뀌는 거예요. 이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말이에요."
그녀는 가냘픈 손등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나에 대한 단순한 기억에 지나지 않아요."
그녀는 이혼하기 한 달 전을 제외하면, 그처럼 야무지게 사물을 파악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인생에 있어서의 현실성이라는 것을 정말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 번 닫은 문은 다시는 열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열어 둘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내가 지금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녀에 대한 단순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쓸모없게 된 세포처럼 자꾸자꾸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한 섹스의 정확한 횟수조차도 모른다.
2. 양(羊)박사 등장
이튿날 아침 여덟 시에 눈을 뜨자, 우리는 옷을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근처의 찻집에 들어가서 모닝 서비스를 먹었다. 돌고래 호텔에는 레스토랑도 커피숍도 없다.
"어제도 말했듯이 우리는 분담해서 행동하는 거야"라고 하며 나는 양의 사진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이 사진의 배경에 찍혀 있는 산을 단서로 삼아 장소를 찾아보겠어. 당신은 양을 키우고 있는 목장을 중심으로 찾아보라고. 방법은 알겠지? 어떤 사소한 힌트라도 좋다. 무턱대고 홋카이도를 헤매고 다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테니까."
"문제없어요, 내게 맡겨요."
"그럼 저녁에 호텔에서 만나자고."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선글라스를 썼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마 간단히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그랬으면 좋겠는데"하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수월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나는 도청 관광과에 갔었고, 여러 관광 안내소와 관광 회사며 등산 협회를 찾아갔고, 관광과 산에 인연이 있음직한 곳은 모조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누구하나 사진에 찍힌 산을 본 기억이 있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말했다.
"아주 평범한 산이군. 게다가 사진에 찍혀 있는 부분이 일부라서 말이지." 내가 하루 온종일 돌아다니며 얻은 결론이라면 단 하나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지간히 특징이 있는 산이 아닌 한 일부분만을 보고 알아맞히기는 어렵다는 거였다.
나는 도중에 서점에 들어가 홋카이도 전도(全圖)와 <홋카이도의 산>이라는 책을 샀다. 찻집에 들어가 진저에일을 두 병 마시면서 읽어보았다. 홋카이도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산이 있었고, 모든 산이 비슷한 색깔에 비슷한 모양이었다.
쥐의 사진에 찍힌 산과 책에 실린 사진 속의 산을 하나씩 비교해 보았는데 10분 정도 하고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책의 사진에 찍혀 있는 산의 숫자는 홋카이도의 산 전체로 보면 극히 일부인 것이다. 더구나 똑같은 하나의 산이라도 보는 각도를 바꾸면 완전히 느낌이 달라져 버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산은 살아 있습니다."라고 필자는 그 책의 서문에 쓰고 있었다.
"산은 그것을 보는 각도, 계절, 시각 또는 보는 사람의 기분 하나에도 그 모습을 싹 바꾸어 버리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산의 일부분, 아주 하찮은 일부분만 파악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맙소사, 라고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쓸데없다고 생각된 일에 착수하여, 다섯 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비둘기와 함께 옥수수를 뜯어먹었다.
그녀 쪽의 정보 수집 작업의 상황은 나보다는 조금 났지만 헛수고로 끝난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돌고래 호텔 뒤에 있는 식당에서 조촐한 식사를 하면서 오늘 하루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도청의 축산 과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던데요. 즉 양은 이제는 버림받은 동물이더군요. 양을 키워도 수지가 맞지 않는 거예요. 적어도 대량 사육, 방목 이라는 형태로는 말이죠."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적은 만큼 찾아내기 쉽다고 할 수도 있겠네."
"그게 그렇지만도 않아요. 면양의 사육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면 독자적인 조합 활동도 있을 테고, 그 나름대로 제대로 된 루트를 관청에서도 파악할 수가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중소 면양 사육자의 실태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다는 거죠. 모두가 고양이나 개를 기르듯이 제멋대로 조금씩 양을 키우고 있는 실정이거든요. 일단은 파악되어 있는 면양업자의 주소를 서른 개정도 적어 왔지만, 4년 전의 자료라서 4년 동안에 이동이 꽤 있었겠지요. 일본의 농업 정책은 3년마다 어지럽게 변했으니까요."
나는 혼자서 맥주를 마시면서 "어쩌지"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꽉 막힌 것 같군. 홋카이도에는 백 개 이상의 비슷한 산이 있고, 면양 업자의 실태에 대해선 전혀 모르다니."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잖아요.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인데."
"네 귀는 이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메시지는 당분간은 오지 않아요."
그녀는 그러면서 생선 조림을 집어먹고 된장국을 마셨다.
"까닭은 모르지만 스스로 그걸 느낄 수가 있어요. 즉 메시지가 오는 것은 내가 뭔가 망설이고 있을 때라든가, 정신적인 기아감(飢餓感)을 느끼고 있을 때로 한정되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정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에만 로프가 나타난다는 건가?"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과 이렇게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만족스러울 때에는 메시지는 오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양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잘 모르겠는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몰리고 있는 거야. 만약에 양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주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거라고. 어떤 곤란한 입장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 친구들이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는다면, 그건 진짜로 곤란한 입장 일거야. 그 친구들은 프로거든. 설사 선생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조직은 남을 테고, 뿐만 아니라 그 조직은 일본 전국에 하수도처럼 널리 퍼져 있어서, 우리를 곤란한 입장에 몰아넣으려고 하겠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고 만 거야."
"꼭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베이더>같지 않아요?"
"어처구니없다는 점에서는 그렇지. 어쨌든 우리는 말려들어 버린 건데, 내가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나와 당신을 가리키는 거야. 처음에는 나 혼자였지만 도중에 당신이 끼어들었지. 이래도 물에 빠지기 직전이라고 할 수 없을까?"
"어머, 이런 일이 난 좋아요. 모르는 사람과 잔다든지 귀를 내놓고 플래시를 터뜨린다든지, 인명사전의 교정을 보는 일들보다는 훨씬 좋아요. 생활이란 바로 이런 거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서 "당신은 지금 물에 빠지기 직전이 아니며 따라서 로프도 오지 않는다 이거군."
"그건 말이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양을 찾아야 해요. 아마 나도 당신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걸요."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서 섹스를 했다. 나는 섹스라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그것은 뭔가 한정된 형태의 가능성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삿포로에서의 사흘째와 나흘째도 하는 일없이 보냈다. 우리는 여덟 시에 일어나서 모닝 서비스를 먹고 헤어져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면 저녁을 먹으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호텔로 돌아가서는 섹스를 하고 잤다.
나는 낡은 테니스 화를 버리고 새 운동화를 사서신고, 몇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돌아다녔다.
그녀는 관공서나 도서관의 자료를 근거로 면양 사육업자의 긴 명단을 만들어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얻은 건 없었다. 아무도 산을 알아보지 못했고, 어느 면양 사육업자도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한 노인은 전쟁 전에 사할린에서 이런 산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쥐가 사할린까지 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할린에서 도쿄까지 속달로 편지를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닷새째와 엿새째가 지나가고 10월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햇살만은 따뜻했지만 바람은 약간 차가워져 나는 저녁이 되면 얇은 면으로 된 스포츠용 점퍼를 껴입었다. 삿포로의 거리는 넓고 지겨울 정도로 직선적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직선으로만 구성된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마모시키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나는 확실히 마모되어 갔다. 나흘째에는 동서남북 방향 감각이 소멸했다. 동쪽의 반대가 남쪽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해서 나는 문방구에서 자석을 샀다. 자석을 가지고 돌아다니자 거리는 자꾸자꾸 비현실적인 존재로 바뀌어 갔다. 건물은 촬영소의 무대 배경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길가는 사람들은 판자를 도려낸 것처럼 평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은 포환처럼 밋밋한 대지의 한 쪽에서 떠올라 넓은 하늘에 활 모양을 그리며 한쪽으로 졌다.
나는 하루에 커피를 일곱 잔이나 마셨고, 한 시간마다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식욕을 잃어 갔다.
"신문에 광고를 내보면 어떨까요? 당신 친구에게 연락해 달라고 말이에요." 그녀가 제안했다.
"나쁘지 않군."하고 나는 말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제쳐 놓고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네 군데의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이튿날 조간에 3행짜리 광고를 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뒤 이틀 동안 나는 호텔 방에서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는 그날 중에 세통 걸려 왔는데 한통은 쥐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한 시민으로부터의 문의 전화였다.
"친구의 별명입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만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또 한통은 장난 전화였다.
"찍찍"하고 전화 속의 상대방은 소리를 냈다.
"찍찍."
나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 도시라는 데는 기묘한 곳이다.
나머지 한통은 지독하게 가냘픈 목소리의 여자로부터 온 전화였다.
"모두들 저를 쥐라고 불러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멀리에 있는 전선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목소리였다.
"수고스럽게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은 남자거든요"라고 나는 말했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저도 쥐라고 불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일단 전화하는 편이 나 을 것 같아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니오, 뭘요, 그분은 찾으셨나요?"
"유감이지만, 아직 입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저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결국 제가 아니고……."
"글쎄 말입니다. 유감입니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귀 뒤를 긁었다.
"사실은 당신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와?"
"잘은 모르지만, 오늘 아침 신문 광고를 보고나서 줄곧 망설였어요. 당신에게 전화하면 필시 폐가 될 것 같아서……."
"그럼 당신이 쥐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군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아무도 나를 쥐라고는 부르지 않아요. 원래 친구가 없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쨌든 고맙습니다."
"미안해요. 홋카이도 분이신가요?"
"도쿄입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도쿄에서 친구를 찾으러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몇 살이나 되신 분이지요?"
"갓 서른이 됐습니다."
"당신은요?"
"두 달만 있으면 서른입니다."
"독신?"
"그렇습니다."
"저는 스물 둘이에요. 나이를 먹으면 여러 가지 일이 편해지는 걸까요?"
"글쎄요"라고 나는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편해지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고."
"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는데."
"미안하지만, 계속 여기서 전화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군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어쨌든 전화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단수의 매춘 권유 전화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액면 그대로 고독한 여자아이의 전화였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결국 실마리는 없다.
다음날 걸려 온 전화는 한통뿐이었는데
"쥐에 관한 일이라면 나한테 맡겨 두세요."라는 머리가 좀 이상한 남자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15분에 걸쳐서 시베리아 억류 중에 쥐와 싸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단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창가에 놓은 스프링이 튀어나오기 직전인 의자에 앉아 전화 벨소리가 나길 기다리면서 건너편 빌딩 3층에 있는 회사의 근무 상황을 온종일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어떤 회사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회사에는 열 명 가량의 사원이 있고, 농구의 시소게임처럼 계속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누군가가 거기에 도장을 찍고, 다른 누군가가 봉투에 그것을 넣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점심시간에는 가슴이 커다란 여사원이 모두에게 차를 끓여 주었고, 오후에는 몇 사람인가가 커피를 시켜 마셨다. 그래서 나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져 프런트 직원에게 전화 메모 부탁을 해놓고 근처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신 다음 나온 김에 캔 맥주를 두 개 사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회사의 사람이 네 명으로 줄었다. 가슴이 큰 여사원은 젊은 사원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그녀를 중심으로 회사의 활동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보면 볼수록 비정상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필시 금문교의 와이어 로프 같은 브래지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몇 사람의 젊은 사원은 그녀와 자고 싶어 하는 듯했다. 두 장의 유리창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성욕이 나에게 전달되어 왔다. 다른 사람의 성욕을 느낀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것이 나 자신의 성욕인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다섯 시가 되어 그녀가 빨간 원피스로 갈아입고 돌아가 버리자, 나는 창의 커튼을 닫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벅스 바니>의 재방송을 보았다. 돌고래 호텔에서의 여드레째는 그렇게 해서 저물어 갔다.
"맙소사"라고 나는 말했다. 맙소사 라는 말은 차츰 내 입버릇처럼 되어 갔다.
"벌써 한 달의 3분의 1이 지났고, 게다가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그래요." 그녀는 수긍했다.
"정어리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저녁 식사 후에 돌고래 호텔의 로비에 있는 질이 좀 떨어지는 오렌지색 소파 위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 말고는 손가락이 세 개인 그 프런트 직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구를 바꾸기도 하고 유리창을 닦기도 하고 신문을 정리하기도 했다. 우리 이외에도 몇 사람의 숙박 객은 있을 텐데 모두가 그늘에 놓인 미라처럼 소리 없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다. 프런트 직원은 화분에 물을 주면서 조심스럽게 나에게
"하시는 일은 잘되십니까?"라고 물었다.
"별로 잘 풀리지 않는데요."라고 나는 대꾸했다.
"신문에 광고를 내셨던 모양이지요?"
"그래요"라고 나는 말했다.
"유산 상속 관계로 사람을 찾고 있답니다."
"유산 상속이요?"
"그래요. 그런데 상속인이 행방불명이라서."
"그렇군요."하고 그는 납득했다.
"재미있어 보이는 직업이군요."
"그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어딘지 <백경(白鯨)>과 비슷한 운치가 있어요."
"백경?"하고 나는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찾는 일은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매머드라든가?"라고 내 여자 친구가 물었다.
"그렇지요. 무엇이든 마찬가지지요"라고 프런트 직원은 대답했다.
"제가 여기를 돌핀 호텔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실은 멜빌의 <백경>에 돌고래 가 나오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차라리 고래 호텔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고래는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거든요"라고 유감스러운 듯이 그는 말했다.
"돌고래 호텔이란 정말 멋진 이름이에요"라고 여자 친구가 말했다.
프런트 직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오래 머무시는 것도 무슨 인연인 것 같아서 감사의 뜻으로 포도주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고맙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 고맙군요."라고 나도 말했다.
그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차게 한 백포도주와 잔 세 개를 가지고 나왔다.
"자, 건배하실까요. 저는 근무 중이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우리는 "그러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다지 고급품은 아니지만 담백하고 상쾌한 맛이 나는 포도주였다. 잔도 포도 무늬가 들어 있는 꽤 괜찮은 것이었다.
"<백경>을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물어 보았다.
"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뱃사람이 되려고 했죠."
"그런데 지금은 호텔을 경영하고 계시는군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보시다시피 손가락을 잃었거든요"라고 남자는 말했다.
"실은 화물선의 짐을 내리다가 손가락이 끼였습니다."
"저런"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때는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래도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인가 봐요. 지금은 그럭저럭 이렇게 호텔을 하나 갖게 됐습니다. 보잘것없는 호텔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대로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벌써 10년이 되었죠."
그렇다면 그는 그냥 프런트 직원이 아니고 지배인인 것이다.
"최고로 훌륭한 호텔이에요"하고 그녀가 칭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지배인은 말하며, 우리의 잔에 두 잔째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하지만 10년치고는 뭐랄까, 건물에 운치가 있군요."라고 나는 눈 딱 감고 말해 보았다.
"네. 이건 전쟁 후 얼마 안 돼서 지어졌거든요. 대단치 않은 인연이 있어서 싼값으로 사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호텔 전에는 대체 무엇으로 쓰였었나요?"
"홋카이도 면양 회관이라고 해서, 면양에 관한 여러 가지 사무의 자료를……."
"면양?"하고 나는 되물었다.
"양이지요"라고 남자가 대답했다.
"이 건물은 1967년까지 홋카이도 면양 협회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도내의 면양 사업이 부진했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된 거예요"라고 남자는 말하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당시에 관장으로 있던 사람이 실은 저의 아버지셨거든요. 아버지는 당신께서 애착을 갖고 있던 면양 회관의 문을 닫게 된 걸 애석하게 여기셔서 면양에 관한 자료를 보존한다는 조건하에, 이 건물과 땅을 비교적 싼값으로 협회로부터 불하 받으셨던 거지요. 그래서 지금도 이 건물의 2층은 전부 면양 자료실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긴 자료라고 해도 오래된 것들이라 아무 소용도 없지만, 말하자면 노인의 취미 같은 것이고 나머지 부분을 제가 호텔로 운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연이군."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우연이라니요?"
"실은 내가 찾고 있는 인물이 양과 관계가 있거든요. 단서라면 그가 보내온 한 장의 양의 사진뿐이랍니다."
"그래요?"
"괜찮으시다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는 말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첩에 끼워 놓은 양의 사진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카운터에서 안경을 가져다가 뚫어지게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건 눈에 익은데요"라고 그는 말했다.
"본 적이 있나요?"
"틀림없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전등 밑에 세워 두었던 사다리를 가져다가 반대쪽 벽에 세우고, 천장 가까이에 걸려 있던 액자를 떼어 가지고 사다리를 내려왔다. 그리고 액자에 수북이 쌓인 먼지를 걸레로 닦아 내고 나서 우리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이것과 똑같은 풍경이 아닌가요?"
액자 자체도 꽤나 낡은 것이었지만 그 속의 사진은 더욱 낡아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그 사진에도 역시 양이 찍혀 있었다. 전부 60마리 정도는 될 것이다. 울타리가 있고 자작 나무숲이 있고 산이 있었다. 자작 나무숲의 모양은 쥐의 사진과 생판 달랐지만, 배경인 산은 틀림없이 똑같은 산이었다. 사진의 구도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맙소사"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는 매일 이 사진 밑을 지나다니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돌고래 호텔로 해야 한다고 그랬잖아요."라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자, 그러면"하고 나는 한숨 돌리고 나서 남자에게 물었다.
"이 풍경의 장소가 어디지요?"
"모르겠는데요."라고 남자는 대답했다.
"이 사진은 면양 회관 시절부터 줄곧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요?"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길은 있지요."
"어떻게?"
"우리 아버지에게 여쭤 보세요. 아버지는 2층 방에 기거하고 계시지요. 거의 2층에만 틀어박혀 줄곧 양에 관한 자료를 읽고 계신답니다. 저는 벌써 보름 가까이 뵙지 않았는데 식사를 문 앞에 가져다 두면 30분 후에는 비어 있으니까, 살아 계신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에게 여쭤 보면 이 사진의 장소를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면양 회관의 관장으로 계셨고 양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계시거든요. 세상 사람들에게 양 박사라 불릴 정도니까요."
"양 박사라"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3. 양 박사 많이 먹고 많이 이야기하다.
양 박사의 아들인 돌고래 호텔 지배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양 박사의 이제까지의 인생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1905년에 센다이(仙台)의 무사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라고 아들은 말했다.
"서기(西紀)로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특별히 유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웬만큼 전답도 있고, 예전에는 조다이가로(城代家老, 에도시대 말기에 성 주인의 부재중에 일체의 정사를 도맡은 중신)까지 지낸 가문입니다. 막부 시대 말기에는 고명한 농학자(農學者)도 배출했지요."
양 박사는 어려서부터 학업 성적이 뛰어나 센다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신동이었다. 학업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에도 뛰어나 중학교 시절에는 센다이를 찾은 어느 황족(皇族)앞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해 금시계를 하사받은 적도 있었다.
가족들은 그가 법률을 전공해 그쪽 방면으로 나가길 바랐는데, 양 박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법률에는 흥미 없습니다."라고 젊은 양 박사는 말했다.
그의 부친은 말했다.
"그렇다면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도 괜찮겠지. 집안에 음악가가 한 사람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음악에도 흥미 없습니다."라고 양 박사는 말했다.
"그럼" 하고 부친이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다는 거냐?"
"농업에 흥미가 있습니다. 농정(農政)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부친은 좋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양 박사는 고분고분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절대로 굽히지 않는 타입의 청년이었다. 부친조차도 참견할 수가 없었다.
다음 해에 양 박사는 희망대로 동경 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신동으로서의 재능은 대학에 가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누구나가, 교수들조차도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학업 성적은 여전히 범상치 않았으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요컨대 한 점 나무랄 데 없는 엘리트였다. 나쁜 데에도 물들지 않고 틈만 나면 책을 읽었으며 책에 싫증이 나면 대학의 교정에 나가 바이올린을 켰다. 학생복 주머니에는 항상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는 슈퍼 엘리트로서 농림성(農林省)에 들어갔다. 그의 졸업 논문의 테마는 간단히 말하면 본국과 조선과 대만을 일체화한 광역적인 계획 농업 화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약간 이상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당시엔 꽤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양 박사는 2년 간 농림성에서 열심히 공부한 후, 조선 반도로 건너가 벼농사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리고 <조선 반도에서의 도작에 관한 시안(試案)>이라는 리포트를 제출하여 채택되었다.
1934년에 양 박사는 도쿄로 불러들여져 육군의 젊은 장관에게 소개되었다. 장관은 장차 중국 대륙 북부에서의 군의 대규모 전개에 대비해 양모(羊毛)의 자급자족 태세를 확립해 달라고 말했다. 그것이 양 박사와 양의 첫 만남이었다. 양 박사는 본국과 만주와 몽고에서의 면양 증산 계획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현지 시찰을 위하여 이듬해 봄 만주로 건너갔다. 그의 전락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935년의 봄은 평온한 가운데에 지나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7월이었다. 양 박사는 혼자서 말을 타고 훌쩍 면양 시찰을 나간 채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양 박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군대도 합세한 수색대가 필사적으로 황야를 찾아 다녔으나, 그의 모습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리 떼의 습격을 당했거나 도적 떼에게 끌려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서 사람들이 완전히 단념했을 무렵, 양 박사는 몹시 초췌한 모습으로 해질녘의 캠프로 돌아왔다. 얼굴은 홀쭉하게 여위고 군데군데 상처를 입었는데 눈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말도 없고 금시계도 없어졌다. 길을 잃은 데다 말이 다쳤다고 그는 설명했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나서 관청에선 기묘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가 양과 '특수한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그 '특수한 관계'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상사가 그를 숙소로 불러 사실을 추궁하게 되었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소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신이 양과 특수한 관계를 가졌다는 게 사실인가?"라고 상사는 물었다.
"사실입니다"라고 양 박사는 대답했다.
다음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다.
Q:"특수한 관계란 성행위를 가리키는가?"
A:"그렇지 않습니다."
Q:"설명해 주기 바란다."
A:"정신적 행위입니다."
Q:"그건 설명이 아니네."
A:"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교령(交靈)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합니다."
Q:"자네는 양과 교령했다는 건가?"
A:"그렇습니다."
Q:"행방불명되었던 일주일 동안 양과 교령하고 있었다는 건가?"
A:"그렇습니다."
Q:"그것은 직무 일탈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A:"양에 대한 연구가 저의 직무입니다."
Q:"고령은 연구 사항이라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앞으로는 삼가 주기 바라네. 자네는 동경제국 대학 농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곳에 들어온 후에도 뛰어난 근무 성적을 기록하고 있지. 말하자면 장래 동아시아의 농정을 짊어 져야 할 인물인. 그것을 인식해야만 하네."
A:"알겠습니다."
Q:"교령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양은 가축일 뿐이야."
A:"잊어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Q:"상황을 좀 더 설명해 주게."
A:"양이 저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Q:"설명이 안 되네."
A:"이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1936년 2월 양 박사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몇 차례인가 똑같은 질문을 받은 다음, 그 해 봄에는 농림성 자료실에 배속되었다. 자료 목록을 만든다든지 책장 정리를 하는 일이었다. 요컨대 그는 동아시아의 농정의 중추에서 추방된 것이다.
당시의 양 박사는 가까운 친구에게 말했다.
"양은 내 속에서 사라져 버렸어. 그러나 그것은 전에는 내 속에 있었던 거야"라고.
1937년 양 박사는 농림성을 그만두고, 이전에 그가 그 중심적 역할을 맡았던 일본, 만주, 몽고의 면양 300만 마리 증식 계획을 이용하여 농림성의 민간 융자금을 받아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양치기가 되었다. 양 56마리.
1939년 양 박사 결혼. 양 128마리
1942년 장남 출생(현재의 돌고래 호텔 지배인). 양 181마리.
1946년 양 박사의 면양 목장, 미 점령군의 연습장으로서 접수되다. 양 62마리.
1947년 홋카이도 면양 협회 근무.
1949년 부인 폐결핵에 걸려 사망.
1950년 홋카이도 면양 회관 관장 취임.
1960년 장남 고타루(小樽) 항에서 손가락 절단.
1967년 홋카이도 면양 회관 폐관.
1968년 돌핀 호텔 개업.
1978년 젊은 부동산업자, 양의 사진에 대해서 질문.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맙소사"라고 했다.
"아버님을 꼭 만나 뵙고 싶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만나시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싫어하시니까, 죄송하지만 두 분께서만 가주셔야겠습니다."
양 박사의 아들이 말했다.
"싫어하신 다구요?"
"제가 손가락이 두 개 없는데다가 머리가 벗겨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세요? 좀 별난 분이신 것 같군요." 내가 말했다.
"아들인 제가 이런 말하는 건 좀 뭣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별난 어른이죠. 아버지는 양과 인연을 맺으면서부터 완전히 사람이 달라지셨어요. 아주 까다롭고 가끔씩은 잔인해지십니다. 하지만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 정이 많은 어른이랍니다.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 그걸 알 수 있어요. 양이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겁니다. 그리고 양은 아버지를 통해서 저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지요."
"아버님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녀가 말했다.
"네, 그래요. 좋아합니다."라고 돌고래 호텔의 지배인은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싫어하세요. 태어나서 한 번도 안겨 본 적이 없답니다. 따뜻한 말을 해주신 적도 없고요. 제가 손가락을 잃고 머리가 벗겨지고부터는 그 일로 저를 늘 괴롭히신답니다."
"아마 괴롭히실 마음은 없으실 거예요"라고 그녀가 위로했다.
"내 생각도 그래요"라고 나는 말했다.
"고맙습니다."라고 지배인은 말했다.
나는 "우리가 직접 가도 만나 주실까요?"하고 물어 보았다.
"모르지요"라고 지배인은 대답했다.
"하지만 두 가지만 조심하면 만나 주실 겁니다. 하나는 양에 관해 질문할 게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저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왔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알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양 박사의 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는 썰렁하고 공기는 습했다. 전등은 밝지 않았고, 복도 구석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체취가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긴 복도를 걸어가 아들이 일러준 대로 막다른 곳에 있는 낡은 문을 노크했다. 문 위에는 '관장실'이라는 오래된 플라스틱 팻말이 붙어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노크해 보았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세 번째로 노크했을 때 안에서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라고 남자가 말했다.
"양에 대해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똥이나 먹어라"하고 양 박사가 안에서 고함을 질렀다. 일흔 셋이라는 나이치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라고 나는 문 너머로 소리쳤다.
양 박사는 "양에 대해서 할 얘기는 아무것도 없어. 멍청한 놈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1936년에 없어진 양에 대해서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문이 세차게 열렸다. 양 박사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양 박사의 머리카락은 길고 눈처럼 새하얗다. 눈썹도 흰데다가 고드름처럼 눈을 덮고 있었다. 키는 165센티미터 가량이고 몸은 꼿꼿하다. 골격은 굵고 콧날은 얼굴 한복판에서 스키 점프대 같은 각도로 도전적으로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온 방안에 체취가 감돌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채취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느 지점을 넘어서고부터는 체취임을 포기하고 시간과 빛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넓은 방에는 오래된 책과 서류가 쌓아 올려져 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책은 대부분이 외국어로 씌어 진 학술서로 하나같이 얼룩투성이였다. 오른쪽 창가에는 꾀죄죄한 침대가 있었고, 정면의 창 앞에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과 회전의자가 있었다. 책상 위는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서류위에는 양 모양을 한 유리로 된 문진이 놓여 있었다. 전등은 어둡고, 먼지를 뒤집어쓴 스탠드만이 책상 위에 60와트의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양 박사는 회색 셔츠와 검은 카디건을 입고, 모양이 거의 없어져 버린 오늬무늬의 두꺼운 바지를 입고 있었다.
회색 셔츠와 검은 카디건은 광선의 정도에 따라 흰 셔츠와 회색 카디건으로도 보였다. 원래는 그런 색이었는지도 모른다.
양 박사는 책상 너머의 회전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우리에게 침대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마치 지뢰라도 피해가는 것처럼 책을 피하고 넘으면서 침대까지 겨우 가 거기에 앉았다. 내 리바이스 청바지가 영원히 시트에 달라붙어 버리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지저분한 침대였다. 양 박사는 책상 앞에 앉아 깍지를 낀 채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에까지 검은 털이 나 있었다. 손가락의 검은 털은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백발과 기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다음 양 박사는 전화를 집더니 수화기에다 대고
"빨리 밥 가져와"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너희들은 1936년에 없어진 양의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래?"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큰소리를 내며 휴지로 코를 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뭘 물어 보고 싶은 건가?"
"양쪽 모두입니다."
"그럼, 먼저 말을 해보지."
"1936년 봄에 박사님에게서 달아난 양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라고 양 박사는 말했다.
"내가 42년 동안 모든 걸 내던지고 찾아다닌 것에 대해 자네가 알고 있다는 얘긴가."
"네, 그렇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엉터리일지도 모르지."
나는 주머니에서 은제 라이터와 쥐가 보내 온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는 털이 난 손을 내밀어 라이터와 사진을 집어 들고는 스탠드 불 밑에서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침묵이 입자(粒子)처럼 오랫동안 방안을 감돌았다. 육중한 이중 유리창이 도시의 소음을 차단하고, 칙칙 거리는 낡은 전기스탠드 소리만이 침묵의 무게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노인은 라이터와 사진을 살펴보고 나더니 딱 소리를 내며 스탠드의 스위치를 끄고, 굵은 손가락으로 두 눈을 비볐다. 그 행동은 마치 안구(眼球)를 두개골 속으로 쑤셔 넣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손가락을 떼었을 때 눈은 토끼처럼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미안하네. 줄곧 멍청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네." 양 박사가 말했다.
"괜찮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여자 친구는 생긋 웃었다.
"자네는 사념(思念)만이 존재하고 표현이 뿌리째 뽑힌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가?"라고 양 박사가 물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옥이지. 사념만이 소용돌이치는 지옥이야. 한 줄기의 빛도 없고 한 움큼의 물도 없는 땅 속의 지옥이지. 그리고 그것이 지난 42년간의 내 생활이었네."
"양 때문이군요."
"그렇지. 양 때문이지. 양이 나를 그런 곳에 버려 둔 거야. 1936년 봄의 일이지."
"그래서 양을 찾기 위해서 농림성을 그만두셨군요?"
"공무원이란 원래가 모두 멍청이거든. 놈들은 사물의 진정한 가치 따위는 몰라. 놈들은 그 양이 지니는 의미의 중대함에 대해서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그때 노크 소리가 나고
"식사 가져왔는데요."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 박사는 "두고 가"하고 고함을 질렀다.
바닥에 쟁반을 놓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내 여자 친구가 문을 열고 식사를 양 박사의 책상까지 가져다주었다. 쟁반 위에는 양 박사를 위해서 수프와 샐러드와 롤빵과 고리 완자가, 우리를 위해서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자네들 밥은 먹었는가?"라고 양 박사가 물었다.
"먹었습니다."라고 우리는 대답했다.
"무얼 먹었지?"
"송아지 고기 와인 조림." 내가 대답했다.
"구운 새우." 그녀가 대답했다.
양 박사는 "그래?"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수프를 먹고, 수프 위에 띄워져 있던 빵 조각을 질겅질겅 씹었다.
"미안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해야겠네. 배가 고파서 말이야."
우리는 "어서 드십시오."라고 말했다.
양 박사는 수프를 마시고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양 박사는 수프 접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수프를 마셨다.
"그 사진을 찍은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내가 물었다.
"알지. 잘 알아."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가만있어 봐"라고 양 박사는 말하고 나서 빈 수프 접시를 옆으로 치워다.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어. 먼저 1936년의 이야기를 하지. 우선 내가 말하겠네. 그러고 나서 자네가 말하게."
나는 끄덕였다.
양 박사가 "간단하게 설명하면"하고 말을 꺼냈다.
"양이 내 속으로 들어온 것은 1935년 여름이야. 나는 만주와 몽고의 국경 근처에서 방목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에 길을 잃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보냈지. 꿈속에 양이 나타나서 내 속에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어보는 거야. 나는 좋다고 했지. 그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어쨌든 꿈이라는 걸 빤히 알고 있었고 말이야."
노인은 킥킥거리며 샐러드를 먹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양이었어. 나는 직업상 전 세계의 양을 전부 알고 있었는데, 그건 정말 특별한 양이었지. 뿔이 기묘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고, 다리는 땅딸막하게 굵고, 눈빛은 샘물처럼 투명했지. 털은 하얗고, 등에 별 모양으로 갈색 털이 나 있었지. 그런 양은 아무데도 없어.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양에게 내 몸 속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한 거야. 양 연구자로서도 그런 진귀한 종류의 양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양이 몸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대체 어떤 느낌이죠?"
"특별한 건 없네. 그저 양이 있다고 느끼는 것뿐이지. 아침에 일어나서 느끼는 거야. 양이 내 속에 있다고 말이야. 아주 자연스런 느낌이지."
"두통을 경험한 적은 없으십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어."
양 박사는 고기 완자에 소스를 골고루 묻혀서 입 속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양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중국 북부, 몽고 지역에서는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라네. 그 사람들 사이에서는 양이 체내에 들어온다는 것은 신의 은총이라고 여겨지고 있지. 예를 들어서 원(元)나라 시대의 어떤 책에는 칭기즈 칸의 체내에는 '별을 짊어진 백양'이 들어가 있었다고 씌어져 있지. 어때, 재미있지?"
"재미있습니다."
"사람의 체내에 들어갈 수 있는 양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있다네. 그리고 양을 체내에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나 양이 달아나 버리면, 그 불사성(不死性)도 상실되는 거지. 모든 것은 양에 달린 거네. 양은 마음에 들면 몇 십 년이라도 같은 데에 있고, 마땅찮으면 홱 나가 버리지. 양이 달아나 버린 사람들은 보통 '양이 빠져나간 사람'이라 불리는 데 즉 나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거네."
우물우물
"나는 양이 내 몸 속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줄곧 양에 관한 민속학이라든가 전설을 연구하기 시작했네. 현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오래된 책을 뒤져보기도 했지. 그러던 중 사람들 사이에 내 속에 양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것이 내 상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네. 내 상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그리고 나는 '정신 착란'이라는 딱지가 붙여져서 본국으로 소환되었어. 이른바 식민지 병이라는 거지."
양 박사는 고기 완자를 세 개나 먹어 치우고 나서 롤빵을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질 정도의 식욕이었다.
"근대 일본의 본질을 이루는 어리석음은, 우리가 아시아의 다른 민족과의 교류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거라네. 양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지. 일본에서의 면양 사육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양모·식육의 자급자족이라는 관점에서만 파악되었기 때문이고, 생활에서의 사상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었던 거네. 시간을 따로 떼어 결론만을 효율적으로 훔쳐내려고 한 거야. 모든 일이 그래. 다시 말해서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은 거지. 전쟁에 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 양도 일본까지 함께 왔겠군요?"하고 나는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렇지"라고 양 박사는 대답했다.
"부산에서 배로 돌아왔어. 양도 함께 따라왔지."
"양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모르지"라고 양 박사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걸 알 수 없다네. 양은 나에게는 아무것도 일러주지 않았거든. 하지만 놈에게는 뭔가 거대한 목적이 있었지. 그것만은 나도 알 수 있었어.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변화시킬 만한 거대한 계획 말이야."
"그것을 한 마리의 양이 하려고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양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조각남은 롤빵을 입 속에 마저 쑤셔 넣더니 탁탁 손을 털었다.
"놀랄 거 없네. 칭기즈칸이 했던 일을 생각해 보라고."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더구나 이 일본을 양이 택했을까요?" 내가 물었다.
"아마 내가 양을 깨우고 만 걸 거야. 양은 몇 백 년 동안 그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었겠지. 그걸 내가, 바로 내가 깨운 거지."
"선생님 탓은 아닙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양 박사는 말했다. "아니네. 내 탓이야. 좀 더 일찍 그것을 알아차렸어야 했어. 그랬으면 나도 손을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나는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내가 깨달았을 때에는 양은 이미 달아나 버린 뒤였다네."
양 박사는 입을 다물고 고드름 같은 흰 눈썹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42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그의 몸 구석구석에까지 배어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이미 양의 모습은 없었어.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양이 빠져나간 사람'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네. 한마디로 지옥이야. 양은 사념만을 남겨 두고 간 거야. 그러나 양 없이는 그 사념을 방출할 수가 없어. 그것이 '양이 빠져나간 사람'이라는 거지."
양 박사는 다시 한 번 휴지로 코를 풀었다.
"자, 이번에는 자네가 이야기할 차례네."
나는 양 박사를 떠난 뒤의 양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양이 옥중의 우익 청년의 체내에 들어갔다는 것. 그는 출옥하여 곧 우익의 거물이 되었고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정보망과 재산을 쌓아 올렸다는 것. 전쟁 후 A급 전범이 되었으나, 중국 대륙에서의 정보망과 교환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는 것. 대륙에서 가지고 돌아온 재산을 밑천으로 전후의 정치·경제·정보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장악했다는 것, 등등.
"그 인물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라고 양 박사는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양은 아무래도 적임자를 찾아낸 것 같군."
"그러나 금년 봄, 양은 그의 몸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현재 의식 불명이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양이 줄곧 그의 뇌의 결함을 커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스런 일이야. '양이 빠져나간 사람'에게 있어서 어설픈 의식 따위는 차라리 없는 게 편하다네."
"왜 양은 그의 몸을 떠났을까요? 그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서 거대한 조직을 구축했는데."
양 박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아직도 모르겠나? 그 인물의 경우도 나와 마찬가지야. 이용가치가 없어진 거지.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고, 양은 한계에 이른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어. 아마 그는 양이 진짜로 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겠지. 그의 역할은 거대한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고, 그 역할이 끝나자 그는 버림받은 거지. 마치 양이 나를 수송 수단으로 이용했듯이 말일세."
"그럼, 양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 박사는 책상 위에서 양의 사진을 집어서 손가락으로 탁탁 쳤다.
"온 일본을 헤매겠지. 새로 기거할 만한 인물을 찾아서 말이야. 아마 양은 그 새로운 인물을 어떻게 해서든 그 조직위에 올려놓을 작정이었을 거네."
"양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까도 말했듯이, 유감이지만 나는 그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네. 양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양적(羊的) 사념의 구현이라고 밖에는 말이야."
"그것은 선한 것일까요?"
"양적 사념에 있어서는 물론 선이지."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몰라"라고 노인은 대꾸했다.
"정말 몰라. 양이 떠난 뒤에는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양의 그림자인지, 그것조차도 알 수가 없어."
"선생님이 아까 손을 쓸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씀하신 건 무슨 뜻인가요?"
양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에게 그것을 말할 생각은 없네."
다시 침묵이 방안을 뒤덮었다. 창밖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삿포로에 와서 처음 내리는 비였다.
"마지막으로 그 사진의 장소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9년 동안 살았던 목장이야. 거기서 양을 기르고 있었지. 전후에 곧 미군에게 징수됐다가 반환되었을 때 어느 부자에게 목장이 딸린 별장으로 팔았다네. 지금도 같은 주인이 소유하고 있을 거야."
"지금도 양을 기르고 있나요?"
"모르지. 하지만 그 사진을 보면 아무래도 지금도 기르고 있는 모양이군. 어쨌든 마을에서 떨어진 곳이라서 인가도 없어. 겨울에는 교통도 두절되지. 소유주가 쓰는 기간은 1년에 두세 달 정도일 걸세. 조용하고 좋은 곳이지만 말이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누가 관리하고 있나요?"
"겨울에는 아마 아무도 없을걸. 나 말고는 그런 데에서 한겨울을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기슭에 있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면양 사육장에 돈을 내고 위탁하면 양을 돌봐 주거든. 지붕의 눈은 저절로 땅에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고 도난당할 염려도 없지. 그런 산 속에서 뭔가를 훔치더라도 마을까지 가지고 나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지. 어쨌든 엄청난 양의 눈이 오니까 말이야."
"지금은 누가 있을까요?"
"글쎄, 지금은 없지 않을까. 이제 곧 눈이 내릴 테고, 곰은 겨울을 날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그 곳에 갈 생각인가?"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가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방법도 없으니까요."
양 박사는 잠깐 동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술 옆에 고기 완자의 토마토소스가 묻어 있었다.
"실은 자네들 전에 또 한 사람이 그 목장에 대해서 물어 보러 왔었다 네. 금년 2월이었던가. 나이는 글쎄, 자네와 비슷할까. 호텔 로비에 걸려 있던 사진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던가. 나도 마침 따분하던 참이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지. 소설 쓸 때 자료로 삼고 싶다고 하더군."
나는 주머니에서 나와 쥐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양 박사에게 보여 주었다. 1970년 여름에 제이스 바에서 J가 찍어 준 사진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옆을 쳐다보고 있었고, 쥐는 카메라를 향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있었다. 둘 다 젊고 새까맣게 그을어 있었다.
"한 사람은 자네군"하고 양 박사는 스탠드 불을 켜고 사진을 바라보았다.
"지금보다 젊군."
"8년 전 사진입니다"라고 나는 대꾸했다.
"또 한 사람은 아마 그 사람일 거야. 좀 더 나이를 먹고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틀림없어."
"수염?"
"깨끗하게 정리한 콧수염과 나머지는 손질하지 않고 그냥 기른 수염이었어."
나는 수염을 기른 쥐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으나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양 박사는 목장까지 가는 자세한 지도를 그려 주었다. 아사히가와(旭川)근처 에서 지선(支線)으로 갈아타고, 세 시간 가량 가면 기슭에 마을이 있으며, 그곳에서 목장까지 차로 다시 세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 양에는 이 이상 말려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내가 그 좋은 예지. 그 양에 말려들어 행복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왜냐하면 양의 존재 앞에서는 일개 인간의 가치관 따위는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어쨌든 자네에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
"그렇습니다."
"조심하게. 그리고 식기는 문밖에 내놔 주게." 양 박사가 말했다.
4. 안녕, 돌고래 호텔
우리는 하루 동안 출발 준비를 했다.
스포츠 용품점에서 등산 장비와 휴대용 식료품을 준비했고, 백화점에서 두툼한 스웨터와 털양말을 샀다. 서점에서 그 부근의 5만 분의 1 지도와 지역 사에 관한 책을 샀다. 신발은 눈길을 걸을 수 있는 튼튼한 스파이크 슈즈로 했고, 속옷은 뻣뻣한 방한용 속옷으로 했다.
"이런 것은 내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 그녀가 말했다.
"눈 속에선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어질 걸"하고 나는 말했다.
"눈이 쌓이는 계절까지 있을 작정이에요?"
"모르지. 하지만 10월말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할 테고, 준비만은 해두는 게 좋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서 그 짐을 큰 배낭에 넣고, 도쿄에서 가지고 온 나머지 짐은 하나로 정리해서 돌고래 호텔의 지배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실제로 그녀의 백에 들어 있던 것은 거의가 쓸데없는 짐이었다. 화장품 세트, 책 다섯 권과 카세트테이프가 여섯 개, 원피스에 하이힐, 종이 주머니에 하나 가득 들어 있는 스타킹과 팬티, 티셔츠와 반바지, 여행용 자명종 시계, 스케치북과 24색 색연필, 편지지와 봉투, 목욕 수건, 소형 구급상자, 헤어드라이어, 면봉.
"왜 원피스와 하이힐 같은 걸 다 가지고 왔지?"
"혹시 파티 같은 게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파티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잖아."
그러나 결국 그녀는 내 배낭 속에 똘똘 뭉친 원피스와 하이힐을 집어넣었다. 화장품은 근처의 상점에서 작은 여행용 세트로 바꿨다.
지배인은 기꺼이 짐을 맡아 주었다. 나는 이튿날까지의 요금을 정산하고, 한 두 주일이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으셨나요?"라고 지배인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나는 대답 했다.
"나도 가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도대체 무얼 찾으면 되는 것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겁니다. 저의 아버지는 줄곧 무엇인가를 찾으시던 어른이랍니다. 지금도 찾고 계시죠. 저도 어려서부터 계속 아버지의 꿈에 나타났던 흰 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지요. 그래서인지 인생이란 그런 것이구나, 라고 믿어 버리게 된 겁니다.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것이 진짜 인생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지배인이 말했다.
돌고래 호텔의 로비는 여느 때처럼 괴괴했다. 나이 든 청소부가 대걸레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흔 셋이 되었는데도 양은 찾지 못하셨어요. 정말로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도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인에게도 그다지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부터라도 아버지가 행복해지시기를 바라지만, 아버지는 저를 우습게보시고 제 말은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제 인생에 목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돌고래 호텔이 있잖아요."라고 내 여자 친구가 다정하게 말했다.
"게다가 이제 아버님의 양을 찾는 작업도 일단락 지어졌을 거예요. 나머지 부분은 우리가 맡았으니까요." 내가 덧붙였다.
지배인은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빕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그 두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잠시 후 단둘이 되었을 때 그녀가 내게 물었다.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아마 잘 될 거야. 어쨌든 42년 동안의 공백이 메워졌으니까. 양 박사의 역할은 끝났어. 그 뒤의 양의 행적은 우리가 찾아야 만 한다고."
"그 부자, 어쩐지 마음에 들어요."
"나도 그래."
짐을 정리하고 나서 우리는 섹스를 했고, 그리고 거리로 나와 영화를 봤다. 영화 속에서도 많은 남녀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섹스 장면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제8장 ☆☆☆
양을 쫓는 모험 Ⅲ
"나는 양을 삼킨 채로 죽은 거야. 놈은 빠져나갈 여유도 없었어."
"정말 그렇게 해야만 했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양은 완전히 나를 지배했을 테니까, 마지막 기회였지. 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자네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내 기억과 내 자신의 나약함을 지닌 본래의 내 모습으로 말이야."
1. 주니타키 마을의 탄생과 발전과 전락
삿포로에서 아사히가와로 향하는 이른 아침의 열차 속에서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주니타키(十二瀧)의 역사>라는 케이스에 든 두툼한 책을 읽었다. 주니타키는 양 박사의 목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다지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읽어 둬서 손해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저자는 1940년 주니타키에서 출생,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에 향토 사학자로서 활약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활약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저서는 이 책 한 권뿐이었다. 발행은 1970년 5월, 물론 초판이었다.
책에 따르면, 현재의 주니타키 정(町, 지방 공공 단체의 하나)에 최초로 개척민이 발을 들여놓은 때는 메이지 13년(1880년) 초여름이었다. 총인원 열여덟 명 모두가 쓰가루(津輕)의 소작농으로, 재산이라고는 얼마 안 되는 농기구와 의류, 이불, 그리고 가마솥, 식칼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들은 삿포로 근처에 있던 아이누(홋카이도·사할린 쿠릴 열도에 사는 털이 많은 민족)부락에 들러 없는 돈을 몽땅 털어서 아이누 청년을 길 안내자로 고용했다. 그는 눈에 어두운 빛이 감도는 깡마른 청년으로, 아이누어로 '달의 참과 이지러짐'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아마도 조울증 증세가 있지 않았나. 저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렇지만 길 안내에 관한 한, 이 청년은 보기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그는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데다가 굉장히 의심이 많은 열여덟 명의 음침한 농민들을 이끌고 이시카리가와(石狩川, 홋카이도의 가장 긴 강)를 따라 북상했다. 그는 어디로 가면 비옥한 땅을 찾을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 일행은 그곳에 도착했다. 넓고 물도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일대에는 온통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청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가 좋습니다. 짐승이 적고 토지도 비옥하고 연어도 잡혀요."
리더 격인 농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좀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좋겠네."
농민들은 아마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더 좋은 땅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좋아, 그렇다면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될 거 아닌가.
그 후에 일행은 이틀 동안 북쪽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첫 번째 땅보다는 덜 비옥하지만 홍수의 염려가 없는 고지대를 발견했다.
"어때요? 여기도 좋아요, 괜찮죠?" 청년이 말했다.
농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몇 번인가 되풀이한 후에, 그들은 마침내 현재의 아사히가와에 도달했다. 삿포로부터 7일, 약 140킬로미터에 걸친 여행이다.
별 기대 없이 청년은 물었다. "여기는 어때요?"
농민들은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산으로 가야 해요"라고 청년은 말했다.
농민들은 즐겁다는 듯이 "상관없어"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그들은 시오카리(고狩) 고개를 넘었다.
농민들이 비옥한 평야를 피해서 일부러 미개한 오지를 찾고 있었던 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었다. 실은 그들 모두가 거액의 빚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나 다름없이 고향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기 쉬운 평야는 있는 힘을 다해 피해야만 했다.
물론 아이누 청년이 그런 사정을 알리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비옥한 땅을 거부하며 계속 북상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고뇌하고, 곤혹스러워하고, 혼란을 느끼고, 자신감을 상실했다.
그러나 청년은 상당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던지 시오카리 고개를 넘을 무렵에는 농민들을 북으로 북으로 인도하는 이해할 수 없는 숙명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거친 길이나 위험한 늪지대를 골라 농민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시오카리 고개를 넘어서 나흘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일행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만났다. 그리고 의논 끝에 동쪽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것은 확실히 형편없는 땅이고, 형편없는 길이었다. 그들은 바다처럼 우거진 얼룩조릿대를 헤치고, 키보다도 높은 풀밭을 반나절 동안 횡단하고, 가슴까지 흙탕물에 잠기는 습지를 가로지르고, 바위산을 기어 올라가며 어쨌든 동쪽으로 나아갔다. 밤에는 강가에 천막을 치고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이뤘다. 손은 얼룩조릿대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고, 파리매와 모기는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귓구멍에까지 들어와 피를 빨아먹었다.
동쪽으로 나아간 지 닷새째 되는 날 산이 가로막고 있어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도저히는 아니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면 사람은 살 수 없다고 청년은 선언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1880년 7 월 8일, 삿포로에서 26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들은 먼저 지형을 살펴보고 수질, 토질을 조사한 다음 그곳이 그런대로 농경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각 가정에 땅을 할당하고 나서 그 중심에 통나무로 공동 오두막을 세웠다.
아이누 청년은 마침 근처에 사냥 나와 있던 한 무리의 아이누 족에게 이곳의 지명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 보았다.
"이런 별 볼일 없는 땅에 이름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라고 그들은 대꾸했다.
그런 까닭에 이 개척지에는 그 후로도 얼마 동안 이름조차 없었다. 사방 60킬로미터 안에 인가가 없는(혹 있었다고 해도 서로 왕래를 원치 않는)부락에는 이름 따위는 애당초에 필요하지 않았다. 메이지 21년(1888년)에 도청의 관리가 와서 개척민 전원의 호적을 만들며 부락에 이름이 없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지만, 개척민들은 아무도 곤란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
곤란은커녕 개척민들은 낫이나 괭이를 들고 공동 오두막에 모여
"부락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라는 결의까지 했다. 관리는 할 수 없이 부락 옆을 흐르는 강에 열두 개의 폭 포가 있었던 데서 '주니타키 부락'이라 이름 지어 도청에 보고하고, 그 후에 '주니타키 부락'(후에 주니타키 정)은 이 취락의 정식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훨씬 뒤의 이야기다. 메이지 14년(1881년)으로 되돌아가자.
땅은 약 60도 각도로 벌어진 두 개의 산 사이에 끼여 있고, 그 한가운데를 시냇물이 깊은 골짜기가 되어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별 볼일 없는 광경이었다. 지표에는 조릿대가 휘감겨 있고, 거대한 침엽수가 땅 밑에 뿌리를 펼치고 있었다. 늑대라든가 사슴, 곰이라든가 들쥐, 크고 작은 온갖 새들이 많지 않은 나뭇잎과 고기와 물고기를 찾아서 일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파리와 모기는 정말 많았다.
"당신들, 정말로 여기서 살 건가요?"라고 아이누 청년은 물어보았다.
"물론"이라고 농민들은 대답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이누 청년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개척민들과 함께 그 땅에 머물렀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저자는 추측하고 있었다(저자는 실로 자주 추측을 했다). 아무튼 만약 그가 없었다면 개척민들이 무사히 그 겨울을 넘길 수 있었을지 아주 의문스럽다.
청년은 개척민들에게 겨울철에 채소 구하는 법, 눈을 막는 법, 얼어붙은 냇물에서 물고기 잡는 법, 겨울잠을 자기 전의 곰을 내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풍향에 의한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고, 동상을 방지하는 법, 얼룩조릿대의 뿌리를 맛있게 굽는 법, 침엽수를 일정한 방향으로 잘라서 넘어뜨리는 요령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청년을 인정하게 되고, 청년도 자신감을 찾게 되었다.
그는 후에 개척민의 딸과 결혼하여 세 아이를 두었고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미 그때 '달의 참과 이지러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누 청년의 그와 같은 분투에도 불구하고, 개척민들의 생활은 아주 형편없었다. 8월에는 한 가족이 오두막에서 살게 되었는데, 세로로 쪼갠 통나무를 쌓아 올려 지은 집이었기에 겨울에는 눈보라가 사정없이 들이쳤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한 자나 눈이 쌓여 있는 일도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불도 대개는 한 집에 한 채씩밖에 없어 남자들은 불을 지피고 그 앞에서 거적 을 두르고 잤다. 가지고 있던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민물고기라든가 눈을 파헤쳐 검게 된 머위나 고비를 찾아내 먹었다. 유달리 혹독한 겨울이었지만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다툴 일도 울 일도 없었다. 타고난 가난만이 그들의 무기였다.
봄이 왔다. 두 아이가 태어나 부락의 인구는 스물한 명이 되었다. 임산부는 출산 두 시간 전까지 들에서 일했고, 이튿날에는 벌써 밭에 나와 있었다. 새 밭에는 옥수수와 감자를 심고, 남자들은 나무를 베고 뿌리를 태워 황무지를 개간했다. 새 생명이 싹트고 싱싱한 열매가 맺혀, 사람들이 후유하고 한숨을 돌렸을 무렵에 메뚜기 떼가 몰려왔다.
메뚜기 떼는 산을 넘어서 왔다. 처음에 그것은 거대한 먹구름처럼 보였다. 다음에 부웅하는 땅울림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건지 아무도 몰랐다. 아이누 청년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자들에게 밭 여기저기에 불을 피우라고 했다. 있는 세간을 깡그리 가져다가 석유를 몽땅 들어부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냄비를 가지고 와서 방망이로 힘껏 두들기라고 했다. 그는(뒤에 누구나가 인정했듯이)할 수 있는 일은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게 허사였다. 몇 십만 마리의 메뚜기는 밭에 몰려와 작물을 실컷 먹어 치우며 밭을 망쳐 놓았다.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메뚜기 떼가 사라져 버리자 청년은 밭에 엎드려 울었다. 농민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들은 죽은 메뚜기를 한데 모아 태우고 곧 개간 일을 다시 시작했다.
사람들은 또 민물고기와 고비와 머위를 먹으며 겨울을 났다. 그리고 봄에 세 아이가 태어났고 사람들은 밭에 작물을 심었다. 여름에 다시 메뚜기 떼가 몰려와 작물을 송두리째 쓸어 갔다. 아이누 청년은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메뚜기의 습격은 3년 만에 끝났다. 장마가 메뚜기 알을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마가 너무 길었던 탓에 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다음 해에는 풍뎅이가 이상 발생(異常發生)을 했고, 그 다음해 여름에는 냉해를 입었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는 책을 덮고 캔 맥주를 하나 더 마시고, 가방 속에서 이크라(연어나 송어의 알을 헤쳐서 소금물에 절인 식품)도시락을 꺼내서 먹었다.
그녀는 맞은편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잠들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의 아침 햇살이 그녀의 무릎에 엷은 빛의 천을 살짝 덮어 주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들어온 작은 나방이 바람에 나부끼는 종잇조각처럼 나풀나풀 떠돌고 있었다. 나방은 이윽고 그녀의 가슴 위에 앉아 잠깐 쉬다가 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나방이 날아가 버린 뒤에 그녀는 아주 조금 더 늙어 보였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나서 책을 펴고 <주니타키의 역사>를 계속 읽었다.
6년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개척촌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작물은 열매를 맺고 오두막은 개량되었으며, 사람들은 한랭지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통나무 오두막집을 널빤지로 튼튼하게 다시 정비했고 부뚜막을 만들었으며 석유등을 매달았다. 사람들은 얼마 안 남은 작물과 민물고기 말린 것과 사슴뿔을 배에 싣고 이틀에 걸쳐 장에 내다 팔아 소금과 의류와 기름을 샀다. 몇몇 사람은 개간할 때 벤 나무에서 숯 굽는 법을 터득했다. 강 하구에는 몇 개의 비슷한 촌락도 생겨 교류를 하게 되었다.
개척이 진행됨에 따라서 일손의 부족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 사람들은 회의를 열어서 이틀 동안 의논을 한 끝에 고향 마을에서 몇 사람을 불러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빚이었는데, 편지로 살짝 알아보았더니 빚쟁이 쪽은 완전히 단념한 것 같다는 회답이 왔다.
그래서 가장 나이 많은 농민이 고향 마을의 몇몇 옛 친구에게 이리로 와서 함께 개간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보냈다. 메이지 21년에, 호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도청 관리에 의하여 부락에 주니타키 부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바로 그때다.
다음 해에 여섯 가족, 열아홉 명의 새 개척민이 부락에 왔다. 그들은 보수된 공동 오두막에서 살게 되었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재회를 기뻐했다. 새 주민들은 각자 땅을 배당 받아 전에 있던 주민들의 협력 하에 밭을 일구고 집을 지었다.
메이지 25년(1892년)에는 네 가족, 열여섯 명이 왔다. 메이지 29년(1896년)에는 일곱 가족, 스물네 명이 왔다. 이와 같이 주민은 계속 불어났다.
공동 오두막은 확장되어 어엿한 집회소가 되었으며 그 옆에는 작은 신사(神社)도 만들어졌다. 주니타키 부락은 주니타키 마을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주식은 여전히 기장밥이었지만 가끔은 거기에 흰쌀도 섞이게 되었다. 부정기적이기는 했지만 우체부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물론 불쾌한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관리가 가끔 나타나 세금 징수와 징병을 했다. 그것을 특히 불쾌하게 느낀 사람은 아이누 청년(그는 그 무렵 벌써 3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이었다. 그는 납세나 징병의 필요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옛날이 더 좋았던 것 같아"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도 마을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메이지 35년(1902년)에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고원이 목초지로 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거기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면양 목장이 만들어졌다. 도청에서 관리가 나와 울타리 두르는 법과 물 끌어오는 법, 목사(牧舍)건축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어서 강가의 길이 죄수들에 의해서 정비되고 나서 얼마 후 정부가 거의 무상에 가까운 값으로 불하한 양떼가 그 길로 왔다. 농민들은 왜 정부가 그처럼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어지간히 고생을 했으니 어쩌다 좋은 일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정부는 친절한 마음에서만 농민에게 양을 불하한 것은 아니다. 장래의 대륙 진출에 대비하여 방한용 양모의 자급을 목표로 하는 군부가 정부를 부추겨 정부는 농상무성(農商務省)에 면양 사육의 확대를 명했다. 그래서 농상무성이 홋카이도 도청에 그 일을 강제로 떠맡긴 것뿐이었다. 러일 전쟁이 임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면양에 가장 흥미를 가졌던 사람은 아이누 청년이었다. 그는 도청의 관리에게 면양 사육법을 배워 목장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그처럼 양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인구 증가에 따라서 갑자기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 집단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탓이리라. 목장에 온 것은 사우스다운 서른여섯 마리와 슐롱셔 스물한 마리 그리고 보더콜리 개 두 마리였다. 아이누 청년은 얼마 안 가서 유능한 양치기가 되었고, 양과 개는 해마다 계속 불어났다. 아이누 청년은 양과 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관리는 만족했다. 강아지들은 우량 목양견(牧羊犬)으로 각지의 목장으로 인수되어 갔다.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마을에서는 다섯 명의 청년이 징병되어 중국 대륙의 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들 다섯 명은 모두 같은 부대에 배속되었는데, 낮은 언덕을 놓고 서로 공방전을 벌일 때 적의 유탄이 부대의 우측에서 폭파해, 두 명이 죽고 한명이 왼팔을 잃었다. 전투는 사흘 후에 끝났는데, 나머지 두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죽은 고향 사람들의 뼈를 주워 모았다. 그들은 모두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마을에 합류한 사람들의 아들이었다. 전사자 중의 한 사람은 양치기가 된 아이누 청년의 장남이었다. 그들은 양모로 만들어진 군용 외투를 입은 채 죽었다.
"무엇 때문에 남의 나라까지 가서 전쟁 같은 걸 하는 거죠?"하고 아이누인 양치기는 사람들에게 물으며 돌아다녔다. 그때 그는 벌써 마흔 다섯 살이었다.
아무도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후 아이누인 양치기는 마을을 떠나 목장에 틀어박혀서 양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아내는 5년 전에 폐렴이 악화되어 죽었고 나머지 두 딸도 이미 출가했다. 마을에선 양을 돌보는 대가로서 그에게 어느 정도의 급료와 식량을 주었다.
그는 아들을 잃고 나서는 완전히 까다로운 노인이 되었는데 예순두 살에 죽었다. 양 돌보는 일을 거들어 주던 소년이 어느 겨울날 아침, 우리의 바닥 위에 누워 있는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동사(凍死)였다. 처음 그곳에 왔던 보더콜리의 손자가 되는 개 두 마리가 그의 시체 양옆에서 절망적인 눈을 하고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울타리 안에 깔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양들의 이가 맞부딪히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우리 안에서 마치 캐스터네츠 합주처럼 울려 퍼졌다.
주니타키의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이누 청년에 대한 역사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캔 맥주 두 개 만큼의 소변을 보았다. 자리에 돌아와 보니 그녀는 잠에서 깨어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논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끔 사일로(한랭 지대의 목초 저장용 창고)도 보였다. 강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져 갔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풍경과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잠깐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다 피우로 나서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철교의 그림자가 책장 위에서 아른거렸다.
양치기 노인이 되어 죽은 불운한 아이누 청년의 이야기가 끝나버리자, 그 뒤의 역사는 너무나 따분했다. 고창(고창, 되새김질 동물에게 생기는 병으로, 갑자기 가스가 많이 발생하여 배가 불룩해짐)으로 어느 해에 열 마리의 양이 죽은 일, 냉해로 벼농사가 일시적으로 타격받은 일을 제외하면 마을은 순조롭게 계속 발전해 다이쇼(大正, 1912 - 1926년의 일본의 연호)에는 정으로 승격 했다. 마을은 풍요로워졌고 더욱더 정비되어 갔다.
국민 학교가 지어지고 사무소가 생기고 우체국 출장소도 생겼다. 홋카이도의 개척은 거의 끝난 것이다. 경작지는 한계에 달해 영세 농민의 아들들 중에는 만주나 사할린으로 신천지를 찾아서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쇼와(昭和, 1926 - 1989년의 일본의 연호) 12년(1937년)의 페이지에는 양 박사에 대한 기사도 적혀 있었다. 농림성 공무원으로서 조선 및 만주에서 연구 업적을 쌓은 ○○씨(32세)는 일신상의 사정으로 사퇴하고 지니타키 정의 북쪽 산위의 분지에 면양 목장을 열었다, 라고 되어 있다. 양 박사에 관한 기사는 통틀어 그것뿐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향토 사학자도 쇼와에 들어서고부터는 마을의 역사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기술도 단편적이고 내용도 판에 박은 것 같았다. 문체도 아이누 청년을 다루었던 페이지에 비하면 훨씬 생기가 없었다.
나는 쇼와 13년(1938년)부터 40년(1965년)까지의 27년을 건너뛰고, '현재의 정' 이라는 페이지를 읽기로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현재'란 1970년을 말하는 것이므로 진짜 현재는 아니었다. 진짜 현재란 1978년 10월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 마을의 통사(通史)를 쓰는 이상은 역시 마지막에 '현재'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설사 그 현재가 곧 현재성(現在性)을 잃는다 하더라도 현재가 현재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가 현재이기를 포기해 버린다면 역사는 역사가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주니타키의 역사>에 따르면, 1969년 4월 시점에서의 인구는 1만 5,000명, 10년 전에 비하면 6,000명이나 줄었는데, 그 감소분의 대부분은 이농자다. 고도 성장하의 산업 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한랭지 농업이라는 홋카이도의 특수성이 있어 비정상적일 정도의 높은 이동률을 보였다, 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떠난 뒤의 농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임지가 된 것이다. 증조부들이 피땀 흘려서 나무를 베어 개간한 땅에 자손들은 다시 나무를 심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현재의 주니타키 정의 주된 산업은 임업과 목재 가공업이다. 몇몇 작은 제재 공장이 들어서 사람들은 거기서 텔레비전의 나무틀이라든가 화장대라든가 곰이나 아이누 인형을 만들고 있다. 이전의 공동 오두막은 지금은 개척 자료관이 되어 있다. 거기에는 당시의 농기구와 식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러일 전쟁에서 전사한 청년들의 유품도 있다. 큰곰의 이빨 자국이 난 도시락통도 있다. 고향에 빚쟁이의 소식을 물은 편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현재의 주니타키 정은 아주 따분한 고장이다. 대개의 마을 사람들은 일터에서 집에 돌아가면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네 시간은 텔레비전을 보고 잔다. 선거의 투표율은 꽤 높지만 당선될 인물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마을의 슬로건은 "풍요로운 자연 속의 풍요로운 인간성"이다. 역 앞에 그런 간판이 세워져 있다.
나는 책을 덮고 나서 하품을 한 다음 잤다.
2. 주니타키 마을의 또 한 번의 전락과 양들
우리는 아사히가와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북을 향해서 시오카리 고개를 넘었다. 98년 전에 아이누 청년과 열여덟 명의 가난한 농민들이 더듬어 간 것과 거의 똑같은 경로였다.
가을 햇살이 원시림의 흔적과 타오를 듯이 붉게 단풍든 마가 목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공기는 너무도 고요하고 맑디맑았다.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정도였다.
열차는 처음에는 한산했지만 도중에 통학하는 남녀 고등학생들로 꽉 차, 그들의 웅성거림과 환성과 비듬 냄새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야기 소리와 발산할 데 없는 성적 욕망으로 넘쳤다. 그런 상황이 30분가량 지속되고 나서 그들은 어딘가의 역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열차는 또다시 휑뎅그렁해져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와 그녀는 초코렛을 반씩 나눠 먹으면서 각자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은 조용히 지표를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보고 있을 때처럼 밖의 모든 풍경이 아주 멀리 느껴졌다. 그녀는 잠깐 동안 <조니 B 굿>의 멜로디를 작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는 전에 없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열두 시가 조금 지나서 열차에서 내렸다. 나는 플랫폼에 내려서서 한껏 기지개를 켠 다음 심호흡을 했다. 폐가 오그라들 정도로 공기는 맑았다. 햇빛이 따사로워 피부에 닿는 느낌이 상쾌했지만, 기온은 삿포로보다 확실하게 2도는 낮았다.
선로를 따라서 벽돌로 지어진 낡은 창고가 여러 개 늘어서 있고, 그 옆에는 직경 3미터는 됨직한 통나무가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올려 져 있었는데 간밤에 내린 비를 빨아들여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를 태우고 온 열차가 출발해 버리자 뒤에는 인적도 없고, 화단의 매리골드만이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플랫폼에서 보이는 거리는 전형적인 작은 지방 도시였다. 작은 백화점이 있고, 혼잡하고 어수선한 중심가가 있고, 열개 정도의 노선이 있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관광 안내소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재미없을 것 같은 거리였다.
"여기가 목적지예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아니야, 여기가 아니야. 여기서 한 번 더 열차를 갈아타야 돼. 우리의 목적지는 여기보다도 훨씬 작은 데라고."
나는 하품을 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여기는 말하자면 중간 지점이야. 최초의 개척자들은 여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거야."
"최초의 개척자라고요?"
나는 대합실의 불기 없는 난로 앞에 앉아,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그녀에게 주니타키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연호(年號)가 복잡해졌으므로 <주니타키의 역사>의 권말 자료를 갖고 하얀 노트에 간단한 연표를 그렸다. 노트 왼쪽에 주니타키 정의 역사를, 오른쪽에는 일본 역사상의 주요 사건을 적어 넣었다. 꽤 훌륭한 역사 연표가 되었다.
예를 들면 메이지 38년인 1905년에는 뤼순(旅順)이 함락되었고, 아이누 청년의 아들이 전사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때는 양 박사가 태어난 해기도 했다. 역사는 조금씩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왠지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일본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 살아온 것 같군요"라고 그녀는 연표의 좌우를 비교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런 것 같군"하고 대꾸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약간 복잡하지.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어."
"그래요?"
대합실은 대개의 대합실이 그렇듯이 휑뎅그렁하니 아무 멋도 없었다. 벤치는 말할 수 없이 불편했고, 재떨이에는 물을 빨아들인 꽁초가 가득 했으며 공기는 탁했다. 벽에는 몇 장의 관광지 포스터와 지명수배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우리 말고는 낙타색 스웨터를 입은 노인과 네 살 쯤 된 사내아이를 데리고 있는 애기 엄마가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고 소설 잡지를 탐독하고 있었다. 마치 반창고를 떼어내는 것처럼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한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15분 정도가 걸렸다. 사내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는 권태기의 부부처럼 보였다.
"결국 모두 가난하고, 잘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겠지." 내가 말했다.
"주니타키의 사람들 처럼요?"
"맞아, 그래서 모두 필사적으로 밭을 갈았던 거지. 그래도 대부분의 개척자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었지."
"왜요?"
"땅 때문이야. 홋카이도는 추운 곳이니까. 몇 년에 한차례씩은 꼭 냉해가 닥쳐와 작물을 수확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먹을 것도 없게 되고, 자연 수입도 없으니까 석유도 살 수 없지. 다음해에 쓸 씨앗이나 모종도 살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땅을 담보로 고리 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거지. 그러나 이 지역의 농업 생산성은 그 이자를 낼 수 있을 정도로 높지 않거든. 결국은 땅을 빼앗기고 마는 거고. 그렇게 해서 많은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해간 것이지."
나는 <주니타키의 역사>의 페이지를 넘겼다.
"쇼와 5년(1930년)에는 주니타키 정의 인구 중 자작농이 차지하는 비율은 46퍼센트로까지 떨어졌어. 쇼와 초기의 대불황과 냉해가 겹쳤던 거야."
"애써서 고생해가며 땅을 개간해 밭을 일구었는데, 끝내 빚에서 헤어날 수는 없었네요."
40분가량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거리를 산책하러 혼자 나갔다. 나는 대합실에 남아서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읽다만 책을 펼쳤지만, 10분 후에 단념하고 책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에는 주니타키의 양들이 들어가 있어서 내가 거기에 보내는 활자를 오독오독 소리를 내면서 모조리 먹어 치웠다.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지나가는 화물 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열차가 발차하기 10분 전에 그녀가 사과를 한 봉지 사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점심 대신에 그 사과를 먹고 나서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는 그야말로 폐차 직전 상태였다. 바닥은 무른 부분부터 물결 모양으로 닳아서 통로를 걸어가면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시트의 보풀은 거의 없어졌고 쿠션은 마치 한 달이나 된 빵 같았다. 화장실 냄새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숙명적인 공기가 차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10분이나 걸려 창을 밀어 올려 한 동안 공기를 받아들였는데,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가는 모래가 날아 들어와 열 때와 비슷한 시간을 들여서 다시 닫아야만 했다.
열차는 두 량, 전부 합해서 열다섯 명가량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부 무관심과 권태라는 굵은 고삐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낙타색 스웨터의 노인은 아직도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의 독서 속도를 고려하면 석 달 전에 나온 잡지라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뚱뚱한 중년 여자는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를 열심히 듣고 있는 음악 평론가와 같은 얼굴로 뚫어져라 공간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은밀히 그녀의 시선을 좇아보았지만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도 모두 조용했다. 아무도 떠들지 않았고, 아무도 뛰어다니지 않았고, 밖의 풍경을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끔 미라의 머리를 부젓가락으로 두드리는 것 같은 마른 소리를 내며 기침을 했다.
열차가 역에 설 때마다 누군가가 내렸다. 누군가가 내리면 차장도 함께 내려서 차표를 받고 차장이 타면 열차는 발차했다. 복면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은행 강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무표정한 차장이었다. 아무도 새로 타진 않았다. 창 밖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빗물 때문인지 탁했다. 가을 햇살 아래에서 강물은 카페오레 색을 띠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마치 방수로(放水路)처럼 보였다. 강을 따라서 포장도로가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가끔 목재를 실은 거대한 트럭이 서쪽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보였는데, 전체적으로는 지극히 한산했다.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광고판은 텅 빈 공백을 향해서 부질없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잇달아 나타나는 스마트하고 도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거기서는 볕에 그을은 여자 아이가 비키니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기도 하고, 중년의 성격 배우가 얼굴을 찡그리고 스카치 잔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고, 잠수용 시계가 잔뜩 물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고,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돈을 처들인 근사한 방안에서 모델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기도 했다. 광고 산업의 새로운 개척자들은 실로 솜씨 좋게 그 대지를 개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열차가 종점인 주니타키 역에 도착한 것은 두 시 사십 분이었다. 우리는 둘 다 어느 사이엔가 깊이 잠이 들어 역의 이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디젤 엔진이 마지막 한숨을 짜내는 듯한, 소리를 낸 뒤에는 완전한 침묵이 다가왔다. 피부가 따끔따끔 쓰라릴 것 같은 침묵이 내 눈을 뜨게 했다. 알고 보니 차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물 선반에서 두 사람의 짐을 내리고 그녀의 어깨를 몇 번인가 흔들어 깨워 열차에서 내렸다. 플랫폼에 부는 바람에는 이미 가을의 끝을 느끼게 하는 서늘함이 섞여 있었다. 태양은 일찌감치 져서 땅에는 새까만 산 그림자가 숙명적으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방향을 달리하는 두 개의 산줄기가 마을 앞에서 합류해, 바람으로부터 불꽃을 지키기 위해서 오목하게 모아진 두 손바닥처럼 거리를 폭 감싸고 있었다. 기다란 플랫폼은 높게 이는 거대한 파도를 향해 당장에라도 돌진하려고 하는 빈약한 보트 같았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 박사의 옛날 목장은 어디에 있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산 위에. 차로 세 시간이 걸리지."
"지금 바로 가는 거예요?"
"아니, 지금부터 가면 한밤중이 될 걸. 오늘은 어디서든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지." 내가 대답했다.
역의 정면에는 휑뎅그렁한 인적이 없는 작은 로터리가 있었다. 택시 승강장에는 택시가 없었고, 로터리 한가운데에 있는 새 모양의 분수 안에는 물이 없었다. 새는 부리를 벌린 채 무표정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수의 둘레는 매리골드를 심은 화단으로 둥글게 둘러쳐져 있었다. 마을이 10년 전보다 훨씬 더 쇠퇴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의 모습이라곤 거의 없고, 어쩌다 스쳐가는 사람들은 쇠퇴한 거리에 사는 사람들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터리 왼편에는 수송을 철도에 의존했던 시절에 세워진 낡은 창고가 반 다스 쯤 늘어서 있었다. 낡은 벽돌로 지어졌고 지붕은 높고 철문은 여러 번 덧칠해져 단념하고 방치해 둔 상태였다. 창고 지붕에는 거대한 까마귀가 일렬로 늘어 앉아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고 옆의 빈터에는 키가 큰 풀들이 밀림처럼 우거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낡은 자동차 두 대가 비를 맞은 채 버려져 있었다. 두 대 모두 타이어가 없고 보닛이 열려 있어 내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폐쇄된 스케이트 링크와 같은 로터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대부분의 글자는 비바람에 지워져서 판독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주니타키 정'이라는 글자와 '대규모 도작 북한지(大規模稻作北限地)'라는 문구뿐이었다. 로터리 정면에는 작은 상점가가 있었다. 상점가는 보통 거리의 상점가와 비슷했는데, 도로가 쓸데없이 넓어 거리가 한층 더 썰렁했다. 넓은 도로 양쪽에 늘어선 마가 목은 선명하게 물들어 있었지만 썰렁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들은 마을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각각의 생명을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그 보잘것없는 그날그날의 생활만이 썰렁함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500미터 정도 되는 상점가의 끝까지 걸어가 여관을 찾았다. 그러나 여관은 없었다. 상점의 3분의 1은 셔터를 내렸다. 시계방 앞의 간판은 반쯤 떨어져서 덜컹덜컹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상점가가 끝나는 곳에 잡초가 우거진 넓은 주차장이 있고, 크림색 페어레이디와 스포츠카 타입의 붉은 세리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모두 새 차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무개성의 신선함, 휑뎅그렁한 거리의 분위기와 그런대로 어울렸다.
상점가 끝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넓은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 되어 강까지 이어지고, 강과 맞닿은 데서 T자 형으로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 내리막길 양쪽에는 작은 단층 목조 가옥들이 늘어서 있고, 먼지로 뒤덮인 정원수의 비죽 비죽한 가지들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모든 나무가 왠지 모르게 기묘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집집마다 현관에는 커다란 석유 탱크와 똑같은 우유 상자가 달려 있었고, 지붕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높게 텔레비전 안테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텔레비전 안테나는 마을 뒤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산줄기에 도전이라도 하 듯이 그 은빛 촉수를 공중에 둘러치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여관 따윈 없는 것 아니에요?"하고 물었다.
"걱정 마. 아무리 형편없는 마을에도 여관은 반드시 있는 법이거든."
우리는 역으로 되돌아가서 역무원에게 여관의 위치를 물었다. 부자 사이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의 역무원은 어지간히 따분했던 참인지 여관의 위치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이 든 역무원이 말했다. "여관은 두 군데 있어요. 하나는 상당히 비싸고, 하나는 꽤 싸죠. 비싼 쪽은 도청의 높은 사람이 왔을 때라든가 정식 연회를 열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식사는 꽤 잘 나와요"라고 젊은 역무원이 덧붙였다.
"또 하나는 행상인이나, 젊은 사람, 말하자면 그저 보통 사람들이 투숙하지요. 겉보기에는 초라하지만, 뭐 지저분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목욕탕도 꽤 쓸 만하고요."
"하지만 벽이 얇아요."라고 젊은 역무원이 말했다.
그리고 그 얇은 벽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이 한바탕 벌어졌다.
"비싼 쪽으로 하겠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아직 봉투에는 꽤 많은 돈이 남아 있었고 절약해야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젊은 역무원이 메모지를 찢어서 여관까지 가는 길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10년 전에 비하면, 상당히 거리가 쓸쓸해졌군요." 내가 말했다.
내 말에 나이 든 역무원이 대꾸했다.
"맞아요. 목재 공장은 아무래도 옛날 같지가 않고 이렇다 할 산업도 없는데다가, 농업은 갈수록 쇠퇴하고 인구마저도 줄었으니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는 반 편성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니까요." 젊은 역무원이 덧붙였다.
"인구는 어느 정도 되나요?"
"약 7,000명 정도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도 안 될걸요. 5,000명쯤이나 될 까요?"라고 젊은 쪽이 말했다.
"이 선(線)도 말이죠,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고요. 글쎄, 전국에서 세 번째 규모로 적자래요"라고 나이 든 역무원이 말했다.
이 노선보다도 못한 선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지만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역을 나왔다.
여관은 상점가를 지나서 내리막길을 내려가 오른쪽으로 돌아 300미터 정도 더 걸어간 강변에 있었다. 느낌이 좋은 오래된 여관이었는데, 거리가 활기를 띠었을 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강 쪽으로 손질이 잘된 정원이 있고, 그 한구석에서는 새끼 셰퍼드가 밥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방으로 안내해 준 여종업원이, "등산 오셨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네, 그래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2층에는 방이 둘밖에 없었다. 방은 넓었으며, 복도에 나가면 열차의 창을 통해 보였던 것과 똑같은 카페오레 색 강이 내려다 보였다.
그녀가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해서 나는 그 사이에 혼자서 정 사무소(町事務所)에 가보기로 했다. 정 사무소는 상점가에서 서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텅 빈 길가에 있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견고한 새 건물이었다.
나는 정 사무소의 축산과 창구에서 2년쯤 전에 자유 기고가 비슷한 일을 했을 때에 사용하던 잡지사 이름이 찍힌 명함을 건네며, "면양 사육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라고 말을 꺼냈다.
여성 주간지에서 면양에 대해 취재를 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상대방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곳에는 현재 200마리 가량의 면양이 있는데, 모두 서포크 입니다. 즉 식육용이죠. 고기는 부근의 여관이나 음식점에 출하되고 있는데, 아주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수첩을 꺼내 적당히 메모하는 척했다. 아마 그는 앞으로 몇 주일 동안은 여성 주간지를 계속 사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요리와 관계있는 일입니까?" 한바탕 면양의 사육 상황을 설명해 준 다음에 상대방이 내게 물어왔다.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양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의 테마입니다."
"모든 것이오?"
"즉 성격이라든가 생태, 뭐 그런 거지요."
"그러세요?"라고 상대방은 대꾸했다. 나는 수첩을 덮고 차를 마셨다.
"산 위에 오래된 목장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있지요. 전쟁 전까지는 어엿한 목장이었는데 전후 미군에게 접수되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환되고 나서 10년 동안은 어느 돈 많은 사람이 별장으로 사용했는데 원체 교통편이 나빠서요. 그러는 사이에 아무도 오지 않게 되고 지금은 빈집이나 다름없어서. 그래서 정에서 빌려 쓰고 있지요. 사실은 정에서 사들여서 관광 목장으로 꾸미면 좋겠지만, 가난한 곳이라서 어쩔 수 없는 형편입니다. 우선 도로 정비도 필요하구요."
"빌려 쓰다니요?"
"여름에는 이 고장의 면양 목장 사람이 50마리 가량의 면양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목장으로서는 꽤 좋은 곳이고, 정에서 경영하는 목초지만으로는 풀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9월 하순이 되어 날씨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다시 양을 데리고 내려오는 거지요."
"그 양이 있는 시기를 아십니까?"
"해에 따라서 약간씩 변동은 있지만, 보통은 5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예요."
"몇 명이나 양을 데리고 가나요?"
"한 사람이죠. 지난 10년 동안 같은 사람이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직원은 정에서 운영하는 면양 사육장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
"지금 가시면 만날 수 있습니다. 차로 모셔다 드리지요." 그가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차로 데려다 주지 않고는 사육장에 가는 방법이 없었다. 정에는 택시도 렌터카도 없을뿐더러 걸어가면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직원이 운전하는 소형 자동차는 여관 옆을 지나서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긴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서 썰렁한 습지대를 빠져나가 산으로 접어드는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갔다. 타이어가 말아 올리는 자갈이 바지직바지직 마른 소리를 냈다.
"도쿄에서 오시니 이곳이 죽은 마을처럼 보이시지요?"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애매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실제로도 죽어 가고 있답니다. 철도가 있는 동안은 그래도 괜찮지만 없애면 정말로 죽어 버릴 거예요. 마을이 죽어 버린다는 것은 왠지 묘한 일이지요. 사람이 죽는 건 이해가 가는데 마을이 죽는다는 건 말이지요.……."
"마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될까요? 아무도 모르겠죠. 모르는 채로 모두가 마을을 빠져 나올 거예요. 만약 인구가 1,000명 이하가 된다면 그런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만 우리의 일도 거의 없어져 버릴 테니까요. 사실은 우리도 달아나야 만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나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고 양의 문장이 새겨진 듀퐁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삿포로로 가면 좋은 일이 있답니다. 삼촌이 인쇄소를 하고 계신데 일손이 모자라거든요. 학교를 상대하니 경영도 안정적이고, 사실은 그게 좋겠지요. 이런 데서 양이나 소의 출하 숫자나 체크하고 있는 것보다는요."
"그렇겠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면 그게 안 돼요. 이해하시겠어요? 마을이 정말로 죽어 버린다면, 그 모습을 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들어서요."
"당신은 이 고장 출생이세요?"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울한 빛깔의 태양이 3분의 1가량 산 너머로 기울었다.
면양 사육장 입구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기둥 사이에 '주니타키 정 영 면양 사육장(十二瀧町營緬羊飼育場)'이라는 간판이 매어져 있었다. 간판 밑을 지나가면 비탈길이 있고, 비탈길은 단풍든 잡목 숲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숲을 빠져 나가면 우리가 있는데, 관리인의 집은 그 뒤에 있습니다. 돌아가 실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리막길이니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태양의 마지막 빛이 노랗게 물든 단풍잎에 오렌지색을 더해 주고 있었다. 나무들은 높고, 얼룩진 빛이 숲을 통과하는 자갈길 위에서 아른거렸다.
숲을 빠져 나가자 언덕의 경사면에 기다란 우리가 보이고 가축냄새가 났다. 우리의 지붕은 빨간 양철 지붕으로, 통풍을 위한 굴뚝이 셋 있었다.
우리 입구에는 개집이 있고, 사슬에 매인 몸집이 작은 보더콜리가 나를 보고 두세 번 짖었다. 졸린 듯한, 눈을 한 늙은 개였는데, 적의를 품고 짖는 게 아니어서 목 주위를 쓰다듬어 주니까 곧 얌전해졌다. 개집 앞에는 밥과 물이 든 노란 플라스틱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개는 내가 손을 놓자 그대로 만족하고 개집으로 돌아가 앞발을 가지런히 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우리 안은 어두컴컴하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바닥의 한 가운데 넓은 통로가 있고, 그 양쪽은 양을 가두어두기 위한 울타리로 되어 있었다. 통로 양쪽에는 양의 소변이나 청소한 물을 빼기 위한 U자형 도랑이 있었다. 널빤지로 된 벽에는 군데군데 유리창이 있어서 그걸 통해 산의 능선이 보였다.
석양이 오른쪽 양들은 붉게 물들이고 왼쪽 양들에게는 푸르스름하고 칙칙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내가 우리로 들어가자 200마리의 양들이 일제히 내 쪽을 보았다. 절반가량의 양들은 서 있고,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깔린 마른 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파래서 마치 얼굴의 양쪽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정면으로 빛을 받으면 의안(義眼)처럼 반짝거렸다. 그들은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며 어느 놈도 꼼짝하지 않았다. 몇 마리는 마른 풀을 딱딱 소리를 내며 씹고 있었는데, 그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마리는 울타리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은 물 마시는 걸 멈추고 그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마치 집단으로 사고(思考)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사고는 내가 입구에 멈춰 섬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다. 모든 것이 정지하고, 모두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의 사고도 다시 시작되었다. 여덟 개로 나뉜 울타리 속에서 양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암컷을 모아 놓은 울타리 안의 암컷들은 씨받이 수컷둘레에 모이고, 수컷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양들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각자 자세를 취했다. 호기심이 강한 몇 마리만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가만히 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들의 얼굴 양쪽에는 수평으로 돌출한 검고 긴 귀가 있었고 거기에는 플라스틱 칩이 달려 있었다. 어떤 양에는 파란 칩이, 어떤 양에는 노란 칩이, 어떤 양에는 빨간 칩이 달려 있었다. 그들의 등에는 컬러 마커로 그린 표시가 있었다. 나는 양들이 겁먹지 않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되도록 양들에게 관심이 없는 척하며 울타리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한 마리의 어린 수컷에 손을 댔다. 양은 움찔하며 몸을 떨뿐 달아나지는 않았다. 다른 양들은 의심이 많은지 가만히 양과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수컷은 내손이 마치 양떼 전체가 살며시 내민 불확실한 촉수(觸手)라도 되는 듯, 긴장으로 몸이 굳어 나를 지켜보았다.
서포크는 어딘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양이다. 모든 것이 검은데 체모만이 희다. 귀는 커서 나방의 날개처럼 옆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파란 눈과 탄력 있는 긴 콧등에는 어딘지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내 존재를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주어진 경치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것 같았다. 몇 마리의 양이 소리 내어 세차게 소변을 보았다. 소변은 바닥을 흘러 U자 도랑으로 흘러 들어가더니, 내 발밑을 지나갔다. 태양은 산 뒤쪽으로 지려하고 있었다. 엷은 남빛 어둠이 물을 섞은 잉크처럼 산의 비탈진 곳을 덮고 있었다.
나는 우리에서 나와 보더콜리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나서 심호흡을 한 다음, 우리 뒤로 돌아가 시내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건너서 관리인 숙사로 갔다. 관리인의 집은 아담한 단층집으로 옆에는 목초와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큰 헛간이 딸려 있었다. 집보다도 헛간이 훨씬 더 컸다.
관리인은 헛간 옆에 있는 너비 1미터, 깊이 1미터 가량의 콘크리트 도랑 옆에 소독약이 든 비닐 자루를 쌓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내 모습을 멀리서 한 번 흘끗 바라보고 나서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작업을 계속했다. 내가 도랑까지 가자 그는 겨우 손을 멈추고 목에 감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남자는 "내일 양을 전부 소독해야 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업복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해진 담배를 꺼내어 손가락으로 잘 펴서 불을 붙였다.
"여기에 소독 액을 채우고 양을 모조리 담그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겨울철에 벌레투성이가 되고 만답니다."
"혼자서 하나요?"
"아뇨, 두 사람이 도와주러 오지요. 그리고 저와 개가 하지요. 개가 일을 제일 잘 한답니다. 양도 개는 믿고요. 양이 믿어주지 않으면 목양견은 될 수 없지요."
남자는 키가 나보다 5센티미터 가량 작았지만 딱 벌어진 체격이었다. 나이는 40대 후반으로 짧게 자른 빳빳한 머리는 마치 헤어브러시처럼 꼿꼿했다. 그는 피부라도 벗기듯이 작업용 고무장갑을 벗어 탁탁 털고 나서 허리를 치고 나서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면양 사육사라기보다는 신병 교육 담당 하사관처럼 보였다.
"그런데 뭔가를 알고 싶으신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
"물어 보세요."
"이 일은 하신 지 오래됐나요?"
"10년요, 길다고도 할 수 있고 짧다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양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요. 그 전에는 자위대(自衛隊)에 있었지요." 그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겨울에는 줄곧 여기에 있나요?"
"그렇지요. 뭐, 대개는요"라고 대답하며 그는 헛기침을 했다.
"달리 갈 데도 없고 게다가 겨울에는 겨울대로 제법 자질구레한 일이 꽤 있거든요. 이 근처는 눈이 2미터 정도 쌓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지붕이 내려앉아서 양이 오징어처럼 되고 마니까요. 먹이도 줘야 하고, 우리 청소도 해야 하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양의 절반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는군요."
"양을 데리고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요?"
"간단해요. 사람들은 옛날부터 줄곧 그렇게 해왔으니까. 양치기가 방목장에 정착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고, 그 전에는 1년 내내 양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고요. 16세기의 스페인에서는 양을 몰 때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온 나라에 있어서 임금님도 거기는 들어가지 못했대요."
남자는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더니, 작업화 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어쨌든 양은 겁만 먹지 않으면 온순한 동물이어서 개의 뒤를 묵묵히 따라 간다고요."
나는 주머니에서 쥐가 보내 온 사진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산 위의 목장이지요?"
"그렇군요. 틀림없어요. 양도 우리 양이 맞고요." 남자는 말했다.
"이건요?"
나는 볼펜 끝으로 등에 별 모양이 있는 땅딸막한 양을 가리켰다.
남자는 사진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이건 아닌데요, 우리 양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상하군요. 이런 것이 끼여들리가 없다고요. 주위는 전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고 아침저녁으로 제가 한 마리씩 체크하는데다가 색다른 놈이 끼어들면 개가 알아차리죠. 양들도 웅성대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양은 머리털 난 후 본 적이 없는데요."
"금년 5월에 양을 데리고 산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무슨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나요?"
"무슨 일은요, 평화롭기만 했어요." 남자가 대꾸했다.
"당신 혼자서 여름 한철을 산에서 지낸 셈인가요?"
"혼자가 아니었어요. 이틀에 한번은 정 사무소 직원도 오고 관리가 시찰을 나올 때도 있지요. 또 일주일에 한번은 마을로 내려가고 대신 다른 사람이 양을 돌봐 주곤 했어요. 식량이나 잡화 따위도 보충해야 하고 말이지요."
"그럼 혼자서만 산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니로군요?"
"그야 그렇지요. 눈만 쌓이지 않는다면 목장까지는 지프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거든요. 산책이나 비슷한 거지요. 하긴 눈이 한 번 쌓였다 하면 차도 소용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틀어박히게 되는 거예요."
"지금 산 위에는 아무도 없지요?"
"별장 주인 말고는요."
"별장 주인? 별장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는데……." 관리인은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신발로 문질러 껐다.
"죽 사용하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고 있답니다. 사용하고 싶을 땐 언제든지 쓸 수 있다고요. 집은 제가 계속 손봐 와서 전기도 가스도 전화도 언제나 쓸 수 있고 유리창은 하나도 깨지기 않았으니까요."
"정 사무소 사람은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고 그러던데요."
"그 친구들이 모르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진가요. 저는 정 사무소의 일과는 별도로 별장 주인에게 고용되어 있는 셈이고 쓸데없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거든요. 물론 말하지 말라는 부탁도 받았고요."
남자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고 했으나 담뱃갑은 비어 있었다. 나는 반쯤 피운 라크(담배 이름)에 두 번 접은 1만 엔짜리 지폐를 얹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나서 받아들고는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문 다음 나머지는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언제부터 와 있나요?"
"봄, 눈이 녹기 전쯤이니까 3월일 거예요. 5년 만에 왔던가?……. 무엇 때문에 이제 와서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하긴 뭐 그거야 주인 마음이고 제가 알 바가 아니지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걸 보면 그럴 만한 사정이라도 있는가 보죠. 어쨌든 그때부터 줄곧 위에 있어요. 식료품이라든가 석유 같은 건 제가 몰래 사다가 지프로 조금씩 날라다 드리죠. 그만큼 사 모았으면 앞으로 1년은 끄떡없을걸요."
"그 사람 나와 비슷한 나이에 수염을 기르지 않았나요?"
"맞아요."라고 관리인은 말했다.
"맙소사"라고 나는 말했다. 사진을 보여 줄 필요도 없었다.
3. 주니타키에서의 밤
관리인과의 협상은 돈을 준 덕택에 아주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관리인은 이튿날 아침 여덟 시에 여관으로 와서 우리를 산 위의 목장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관리인은 "뭐, 양의 소독은 오후부터 해도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딱 부러지는 성격에다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라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내린 비로 지반이 약해져서 한 군데 차가 지나가지 못할 데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때는 걸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건 제 탓이 아니니까요."
"괜찮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쥐의 아버지가 홋카이도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생각해 냈다.
옛날에 쥐가 별장에 대해서 몇 번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산 위, 넓은 초원, 오래된 2층 집. 언제나 나는 나중에야 중요한 일이 생각난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에 그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처음에 그 생각을 해냈더라면 얼마든지 알아볼 방도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넌더리를 내면서 차츰 저물어 가는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마을까지 왔다. 한 시간 반 동안 자동차 세 대를 보았을 뿐이다.
두 대는 목재를 실은 대형 트럭이었고, 한 대는 소형 트랙터였다. 세 대 모두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아무도 같이 타고 가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어 주지는 않았다. 하기는 그 쪽이 나도 바라는 바였다.
여관에 다다른 것은 일곱 시가 지나서였는데 주변은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몸은 꽁꽁 얼어 있었다. 셰퍼드는 나를 보자 개집에서 목을 내밀고 킁킁거렸다. 그녀는 블루진에 내 라운드 스웨터를 입고 입구 가까이에 있는 게임실에서 전자오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게임실은 낡은 응접실을 개조한 것인지 그 곳엔 꽤 쓸 만한 벽난로가 있었다.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진짜 벽난로였다. 방에는 게임기 네 대와 핀볼이 두 대 있었는데, 핀볼은 더 이상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낡은 싸구려 스페인제였다.
"배고파 죽기 직전이에요." 그녀는 기다리다 지친 듯이 말했다.
나는 식사를 부탁해 놓고 목욕을 대충하고 나서 몸을 말리는 동안에 오랜만에 체중을 재보았다. 60킬로그램, 10년 전과 똑같았다. 옆구리에 붙어 있던 군살도 지난 일주일 동안에 완전히 빠졌다.
방에 돌아오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찜 요리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면서 면양 사육장과 자위대 출신 관리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양을 못보고 놓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이제 겨우 골문 앞까지 온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좋겠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히치콕의 영화를 보고 잠자리에 든 다음 불을 껐다. 아래층의 시계가 열한 시를 쳤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해." 내가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벌써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여행용 시계의 알람을 맞추고 달빛 아래에서 담배를 한 개비 피웠다. 강물 소리 외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이동했던 탓에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의식만은 또렷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귀에 거슬리는 잡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노라니 내 주위에서 마을 풍경이 용해되어 갔다. 집들은 황폐해졌고 선로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이 녹슬어 버렸으며, 경지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마을은 100년이라는 그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대지 속으로 함몰해 갔다.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이 시간이 퇴보했다. 사슴과 곰과 늑대가 대지에 모습을 나타내고 메뚜기의 대군이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얼룩조릿대가 바닷가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울창한 침엽수림은 태양을 가렸다.
그처럼 모든 인간의 일이 소멸된 후에도 양들만은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양들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몇 만이라는 숫자의 양이었다. 딱딱딱하는 그 단조로운 이빨 소리가 땅 위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두 시를 치자 양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잠들었다.
4. 불길한 커브 길을 돌다.
흐릿하게 구름이 낀 으스스한 아침이었다. 나는 이런 날에 차가운 소독액 속에서 헤엄치게 될 양들을 동정했다. 어쩌면 양들은 추위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홋카이도의 짧은 가을은 서서히 끝나 가고 있었다. 두터운 회색 구름은 눈이 내릴 듯한, 예감을 잉태하고 있었다. 도쿄의 9월에서 홋카이도의 10월로 뛰어든 덕분에 나는 1978년 가을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을의 시작과 끝은 있는데 가을의 중심이 없었다.
여섯 시에 눈을 떠서 세수를 하고 식사 준비가 될 때까지 혼자 복도에 앉아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은 어제보다 약간 줄어들었고 탁하던 기운은 말끔히 가시고 없었다.
강 건너편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영근 벼이삭이 불규칙한 아침 바람에 기묘한 물결 모양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콘크리트 다리 위를 트랙터가 지나갔다. 트랙터의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가 바람을 타고 언제까지나 작게 들려 왔다. 세 마리의 까마귀가 단풍진 자작나무숲 사이에서 나타나 강위에서 원을 그리고 나더니 난간 위에 앉았다. 난간에 앉은 까마귀들은 전위 연극에 나오는 방관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배역에도 싫증이 났는지 그들은 차례로 난간을 떠나 강의 상류를 향해서 날아가 버렸다.
여덟 시 정각에 면양 관리인의 낡은 지프가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지프는 상자 모양의 지붕이 달린 것으로 불하품인지 보닛 옆에는 자위대의 소속 부대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상해요. 어제 산위에 전화를 걸어 봤는데 도무지 연결이 안 돼요." 관리인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나와 그녀는 뒷 자석에 올라탔다. 차내에선 희미하게 휘발유 냄새가 났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게 언제지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글쎄요, 지난달일 거예요. 지난달 20일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어요. 원래 볼일이 있으면 그 쪽에서 걸어오곤 했으니까요. 살 물건의 리스트라든가 말이에요."
"신호도 가지 않아요?"
"도무지 먹통이라니까요. 어딘가에서 줄이 끊어졌나? 눈이 많이 오면 그런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눈은 오지 않았어요."
관리인은 고개를 위로 하고 목덜미를 배배 틀었다.
"어쨌든 가봅시다. 가보면 알 수 있겠죠."
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휘발유 냄새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차는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어제와 똑같은 코스를 더듬어서 산을 올라갔다. 면양 사육장 앞을 지날 때, 우리는 셋이서 그 두 기둥과 간판을 바라보았다. 사육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양들은 파란 눈으로 각각의 침묵의 공간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소독은 오후부터 할 건가요?"
"그래야지요. 하지만 뭐 급할 건 없어요. 눈이 오기 전에만 해치우면 되니까요."
"눈은 언제쯤부터 오기 시작하는데요?"
"다음 주쯤에 내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관리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핸들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아래를 보고 잠시 기침을 했다.
"쌓이기 시작하는 건 11월부터예요. 이곳의 겨울에 대해서 뭐 아는 것 있으신 가요?"
"아니요"라고 나는 말했다.
"일단 쌓이기 시작하면 한없이 쌓이지요. 그렇게 되면 아무도 손을 못 써요. 집안에 틀어박혀서 움츠리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도대체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니까요."
"하지만 계속 이곳에서 살아왔잖아요."
"양을 좋아하니까요. 양은 착한 동물이고 사람얼굴도 정확히 기억하거든요. 양을 돌보고 있노라면 1년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그저 그런 일이 반복될 뿐이지요. 가을에 교미하고, 겨울을 나고 봄에 새끼를 낳고, 여름에 방목을 하죠. 새끼 양이 커서 그 해 가을에는 벌써 교미를 하고, 그렇게 되풀이되는 거예요. 양은 해마다 바뀌고 저만 나이를 먹는 거지요. 나이를 먹으니 이 마을을 훌쩍 떠나는 게 점점 더 내키지 않아요."
"겨울에는 양은 무얼 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관리인은 그제서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핸들에 손을 올려놓은 채 이쪽으로 휙 돌아 그녀의 얼굴을 집어 삼킬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스팔트가 깔린 직선 도로인데다가 마주 오는 차가 없어서 괜찮았지만, 그래도 식은땀이 흘렀다.
"겨울 동안 양들은 우리 안에서 꼼짝 않고 있지요." 관리인은 간신히 앞으로 돌아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따분해 하지 않나 보죠?"
"댁은 자신의 인생을 따분하다고 생각하나요?"
"모르겠어요."
"양도 비슷하겠지요.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해 봤자 알 턱도 없을 테니까요. 마른풀을 먹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가벼운 싸움도 하고, 뱃속의 새끼 생각도 하면서 겨울을 나는 거지요." 관리인이 말했다.
산의 비탈이 조금씩 가팔라지면서 도로도 큰 S자형 커브를 그리기 시작했다. 전원적인 풍경은 차츰 모습을 감추고 절벽처럼 우뚝 솟은 원시림이 길 양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가끔 숲 사이로 평야가 바라다보였다.
"눈이 쌓이면 이 근처는 도저히 달릴 수가 없게 되지요. 하긴 달릴 필요도 없지만 말이에요"라고 관리인은 말했다.
"스키장이나 등산 코스는 없나요?" 내가 물어 보았다.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지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관광객도 오지 않고요. 그러니까 마을이 갈수록 쓸쓸해져 가는 것이고 쇼와 30년대(1955-1964년) 중반 무렵까지만 해도 한랭지 농업의 모델로서 그런대로 활기가 있었는데 쌀이 남아돌기 시작하고부터는 아무도 냉장고 같은 곳에서 농업을 하는 데에 흥미를 갖지 않게 된 거지요. 하기야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목재 공장은 어떻게 되었나요?"
"일손이 모자라니까 좀 더 편리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지금도 조그만 공장이 몇 개 있지만 보잘 것 없지요. 나무는 우리 마을은 그냥 지나치고 산에서 곧바로 나요리(名奇)나 아사히가와로 보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로만 멀쩡해지고 마을은 날로 쇠퇴해가는 거지요. 큼직한 스파이크 타이어를 단 대형 트럭이라면 웬만한 눈길은 문제없거든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휘발유 냄새가 마음에 걸려 담뱃갑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대신 주머니에 남아있던 레몬 드롭스를 빨아먹기로 했다. 입속에서 레몬 향과 휘발유 냄새가 뒤섞였다.
그녀가 "양들도 싸움을 하나요?"라고 물었다.
관리인은 "잘 싸운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리 지어서 행동하는 동물은 모두 그렇지만, 양의 사회에서도 양마다 확실한 서열이 정해져 있어요. 한 울타리 속에 50마리의 양이 있으면 서열 1위부터 50위까지 있지요. 그리고 모든 양이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답니다."
"어머, 어쩜"하고 그녀가 놀랐다.
"그래서 관리하기가 쉬운 겁니다. 제일 높은 서열의 양을 끌고 가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니까요."
"하지만 확실하게 서열이 정해져 있다면 굳이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어떤 양이 다쳐서 힘을 못 쓰게 되거나 하면 서열이 불안정해지거든요. 그러면 그 아래의 양이 위로 올라오려고 도전하지요. 그렇게 되면 사흘 가량은 우당탕거리며 소란을 피워댄답니다."
"가엾어라."
"뭐, 돌고 도는 거지요. 밀려나는 양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거니까요. 게다가 일단 도살됐다 하면 서열 1위고 50위고가 어디 있어요. 모두가 사이좋게 바비큐가 되거든요."
"어쩜"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제일 불쌍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씨받이 수컷이지요. 양의 할렘이라고 들어 본 적 있어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우리는 대답했다.
"양을 기르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교미의 관리예요. 그러니까 암컷은 암컷끼리, 수컷은 수컷끼리 격리시킨 다음 암컷 우리 속에 수컷을 한 마리만 넣어 주는 겁니다. 대개 제일 강한 서열 1위의 수컷이지요. 다시 말해서 가장 좋은 씨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면 씨받이 수컷은 원래의 수컷우리로 되돌아오는데, 그 동안 우리에서는 새로운 서열이 정해지게 되죠. 씨받이 수컷은 교미를 한 덕분에 체중이 절반이나 준 형편이니까 어떤 놈과 싸워도 승산은 제로지요. 그런데도 다른 모든 양과 차례로 한 번씩은 싸워야 하니 참담한 거지요."
"양은 어떤 식으로 싸우나요?"
"머리로 박치기를 해요. 양의 머리는 무쇠처럼 단단하고 속이 텅 비어 있어요."
그녀는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양이 이마로 박치기하며 싸우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30분쯤 더 가다 보니 아스팔트 포장이 갑자기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도로의 폭도 절반으로 좁아졌다. 양쪽의 어두운 원시림이 거대한 파도처럼 차를 향해 서 갑자기 밀려왔다. 대기의 온도는 몇 도쯤 내려갔다.
길이 너무 험해서 차는 지진계의 바늘처럼 위아래로 흔들렸다. 발밑에 놓여 있는 스페어 탱크의 휘발유가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두 개골 속에서 뇌수(腦髓)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한, 소리다.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길이 20분 아니 30분쯤 계속되었을까. 손목시계의 바늘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좌석에 매달려 있는 벨트를 꼭 잡았고 그녀는 내 오른팔에 매달렸으며, 관리인은 핸들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잠시 후 "왼쪽" 하고 관리인이 짧게 말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길의 왼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둡고 미끌미끌한 원시림의 벽이 지표에서 뜯겨 나간 것처럼 사라지고 대지가 허무 속에 함몰했다. 거대한 골짜기였다. 경치는 웅장했지만 거기에는 따뜻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깎아지른 암벽은 모든 생명의 자취를 털어 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위의 풍경에 그 불길한 숨결을 토해 내고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서 난 길의 앞쪽에 기묘할 정도로 매끈한 원추형 산이 보였다. 그 끝은 거대한 힘으로 비틀어서 구부린 것 같은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다. 관리인은 흔들거리는 핸들을 꽉 잡은 채 턱으로 그 산 쪽을 가리켰다.
"저 산 뒤까지 돌아가는 거예요."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무거운 바람이 오른편 비탈에 우거진 초록색 풀을 밑에서부터 쓸어 올리고 있었다. 차의 유리창에 잔모래가 부딪혀와 탁탁 소리를 냈다.
아슬아슬한 커브 길을 몇 번 돌아 나와 차가 원추형의 꼭대기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오른편 비탈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변모하더니 이윽고 수직 암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밋밋한 거대한 벽에 새겨진 좁은 공간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 되었다.
날씨는 급속히 나빠지고 있었다.
푸른빛이 약간 섞인 연회색은 그 불안정한 미묘함에 싫증이라도 난 듯이 우중충한 회색으로 바뀌고, 거기에 그을음처럼 고르지 않은 검은색이 흘러 들어갔다. 주위의 산들도 그에 따라서 음울한 그림자로 어둡게 물들여져 갔다.
바람이 절구 모양으로 된 부분에서 소용돌이치며 혀를 동그랗게 하고 숨을 내 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스웨터 속에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관리인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계속 커브를 틀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알아들으려는 듯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수그린 채 조금씩 차의 속도를 줄이며 길이 약간 넓어진 곳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엔진이 멎자 우리는 얼어붙을 듯한, 침묵 속에 내팽개쳐졌다. 바람소리만이 대지를 떠돌고 있었다.
관리인은 핸들 위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지프에서 내리더니 신발 바닥으로 땅바닥을 쿵쿵 굴러 보았다. 나도 차에서 내려 그 옆에 서서 노면을 쳐다보았다.
"역시 안 되겠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이 내렸어요." 관리인이 말했다.
나는 도로가 그다지 젖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속이 젖어 있어서 모두 속는 거지요. 이 근처는 말이지요, 좀 특이한 곳이거든요."
"특이하다고요?"
그는 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웃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성냥을 그었다.
"어쨌든 조금 걸어 볼까요."
우리는 다음 커브 길까지 200미터 가량 걸었다. 목에 휘감기는 불쾌한 한기를 느꼈다. 나는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깃을 세웠다. 하지만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커브 길을 돌자마자 관리인은 걸음을 멈추고 입에 담배를 문 채 말없이 오른 편 낭떠러지를 노려보았다. 낭떠러지 한가운데에서 물이 솟아 나와 밑으로 떨어져 작은 시내를 이뤄 길을 천천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은 점토가 섞여 있어 연갈색으로 탁했다. 낭떠러지의 젖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더니 바위는 보기보다는 훨씬 물러서 표면이 부슬부슬 무너졌다.
"여기는 굉장히 진땀나는 커브 길이에요"라고 관리인이 말했다.
"땅바닥도 무르고,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에요. 왠지 모르게 불길해요. 양들조차도 여기서는 언제나 겁을 먹거든요."
관리인은 잠깐 콜록거리고 나서 담배를 땅바닥에 버렸다.
"안됐지만 무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걸을 수는 있을까요?"
"걷는 건 상관없을 거예요. 중요한 건 진동이니까요."
관리인은 다시 한 번 신발 바닥으로 힘껏 노면을 굴려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소름 끼칠 것 같은 소리였다.
"음, 걷는 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프까지 되돌아갔다.
관리인은 나란히 걸어가면서 말을 꺼냈다.
"여기서부터 4킬로미터 정도 될 겁니다. 여자 분하고 가더라도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예요. 길은 외길이고 그다지 가파른 오르막길도 없으니까요. 끝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계속 위에 계실 겁니까?"
"글쎄, 잘 모르겠어요. 내일 돌아올지도 모르고 일주일이 걸릴지도 모르죠. 형편 봐서요."
그는 다시 담배를 물었지만 이번에는 불을 붙이기 전에 콜록거렸다.
"조심하십시오. 아무래도 금년에는 눈이 예년보다 빨리 내릴 것 같으니까 말이에요. 눈이 쌓였다 하면 여기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되거든요."
"조심하죠."라고 나는 말했다.
"현관 앞에 우편함이 있는데 열쇠가 그 밑바닥에 끼워져 있어요. 아무도 없으면 그걸 사용하면 될 거예요."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지프에서 짐을 내렸다. 나는 얇은 점퍼를 벗고 두꺼운 등산용 파커를 뒤집어썼다. 그래도 몸속으로 스며드는 한기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관리인은 좁은 길 위에서 낭떠러지 여기저기에 차제를 부딪치며 간신히 지프의 방향을 바꿨다. 부딪칠 때마다 낭떠러지의 바위 부스러기가 주르륵 밑으로 떨어졌다.
겨우 차를 돌리고 나서 관리인은 클랙슨을 울리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지프는 휙 커브 길을 돌며 사라지고 그 뒤에는 우리 둘만 달랑 남았다. 마치 세계의 끝에 내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배낭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특별히 할 말도 없어 둘이서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 아래의 깊은 골짜기의 밑바닥에는 은빛 시내가 완만하게 가느다란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양쪽은 울창한 푸른 숲으로 덮여 있었다. 골짜기 건너편에는 단풍으로 채색된 낮은 산줄기가 물결치면서 이어져 있었고, 그 저쪽에는 평야가 희미하게 보였다. 추수를 마친 후에 벼를 태우는 연기가 몇 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망이야 물론 나무랄 데 없었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즐거워지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서먹서먹하고,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이교도적이었다.
하늘은 온통 회색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구름이라기보다는 균일하게 염색된 천처럼 보였다. 그 아래를 검은 구름이 무리 지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이 닿을 것만 같았다. 구름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일본해를 건너 홋카이도를 가로질러서 오호츠크로 빠지는 무거운 구름이다. 잇따라 왔다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구름의 무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의 불확실성이 견디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변덕스러운 바람이 한 번만 불어오면 암벽에 새겨진 완만한 커브와 함께 허무의 골짜기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라고 하며 무거운 배낭을 짊어졌다. 비나 진눈깨비가 내리기 전에 지붕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었다. 이런 썰렁한 데서 물에 빠진 생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진땀나는 커브 길'을 빠져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관리인의 말대로 그 커브 길에는 불길한 데가 있었다. 몸이 먼저 막연한 불길함을 느꼈고, 그 막연한 불길함이 머리의 어딘가를 두드리며 경고하고 있었다. 강을 건널 때 갑자기 온도가 다른 웅덩이에 발을 처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00미터 정도 지나는 동안, 땅바닥을 디디는 구두 소리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몇 줄기 냇물이 땅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커브 길을 빠져 나온 후에도 거기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서 속도를 늦추기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러고 나서 30분쯤 걷다 보니 낭떠러지의 경사가 완만해지고 드물게나마 나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리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어깨의 힘을 뺐다.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길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길은 평탄해지고 주위의 험악한 분위기도 덜해졌으며, 차츰 온화한 고원(高原)의 풍경이 펼쳐졌다. 새가 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30분 후에 우리는 그 기묘한 원추형 산에서 완전히 벗어나 탁자처럼 밋밋한 넓은 고원으로 나왔다. 고원은 깎아지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대한 화산의 윗부분이 몽땅 함몰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물든 자작나무 수해(樹海)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자작나무 사이에는 선명한 색상의 관목과 부드러운 잡초가 우거져 있었고, 군데군데 바람에 쓰러진 자작나무가 갈색으로 썩어 가고 있었다.
"괜찮은 곳 같은데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 커브 길을 빠져 나오자 확실히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로 곧게 뻗은 길이 자작나무의 수해를 관통하고 있었다. 지프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길인데, 머리가 아파 올 정도로 일직선이었다. 커브 길도 없고 가파른 비탈길도 없었다. 앞을 보니, 모든 것이 하나의 점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그 점의 상공을 흐르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바람소리조차도 광대한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통통한 검은 새가 가끔 빨간 혀를 내밀며 주위의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냈지만, 그 새가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자 침묵이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그 틈새를 메웠다. 길을 꽉 메운 낙엽은 이틀 전에 내린 비를 빨아들인 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새 이외에 침묵을 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작나무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쭉 뻗은 곧은 길 역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그리도 찍어 누르던 낮은 구름도 숲 사이로 바라보니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15분 정도 걸어가니 맑은 개울이 있었다. 거기에는 자작나무 줄기를 묶어서 난간을 만든 튼튼한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주변은 쉼터처럼 되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다 짐을 내려놓고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마셨다. 이제까지 마셔 본 적 없는 맛있는 물이었다. 물은 손이 벌개 질 정도로 차가웠고, 그리고 달았다. 부드러운 흙냄새가 났다.
여전히 잔뜩 찌푸린 날씨였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녀는 등산화 끈을 고쳐 맸고, 나는 난간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하류 쪽에서 폭포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를 들으니 그다지 큰 폭포는 아닌 듯싶었다. 길 왼쪽에서 변덕스런 바람이 불어와 쌓여 있는 낙엽에 잔물결을 일으키더니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가 버렸다.
담배를 피우고 나서 신발로 비벼 끌 때, 그 옆에 떨어져 있는 또 다른 꽁초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주워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짓밟힌 그 꽁초는 세븐 스타였다. 습기가 없는 것을 보면 비가 온 후에 피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제 나 오늘이다.
나는 쥐가 무슨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담배를 피웠는지 안 피웠는지 조차도 생각나질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꽁초를 개울에 버렸다. 물의 흐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아래쪽으로 흘려보냈다.
"무슨 일이에요?"그녀가 물었다.
"담배꽁초 하나를 발견했어."내가 대답했다.
"바로 얼마 전에 누군가가 여기에 앉아서 나처럼 담배를 피웠던 모양이야."
"당신 친구?"
"글쎄, 알 수 없지."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올려 오랜만에 나에게 귀를 보여 주었다. 폭포소리가 내 의식 속에서 갑자기 멀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그녀가 "아직도 내 귀를 좋아해요?"라고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손을 내밀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귀를 만졌다.
나는 "좋아해"라고 말했다.
거기서 15분 정도 걸어가니 갑자기 길이 끝났다. 자작나무 수해도 잘려 나간 것처럼 끝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호수처럼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 주변에는 5미터 간격으로 말뚝이 박혀 있었고, 말뚝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녹슨 낡은 철조망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양의 방목장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양쪽으로 열리는 닳아빠진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풀은 부드럽고 대지는 축축했다.
검은 구름이 초원 위를 흐르고 있었다. 구름이 흘러가는 쪽으로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바라보는 각도는 달랐지만, 틀림없이 쥐의 사진에 찍혀 있던 것과 똑같은 산이었다. 사진을 꺼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몇 백 번이나 사진을 통해서 보던 풍경을 실제로 바로 눈앞에서 본다는 게 참으로 묘했다. 그 거리가 몹시 인공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다기보다도 누군가가 사진에 맞춰 이곳에 임시로 풍경을 서둘러 만들어 낸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문에 기대서서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우리는 찾아낸 것이다.
"도착했어요." 그녀는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도착했군."하고 대꾸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초원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미국 농가풍의 낡은 목조 2층집이 보였다. 40년 전에 양 박사가 짓고 그리고 쥐의 아버지가 사들였던 건물이다. 비교할 것이 없는데다가 멀리서 보니 집의 크기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나, 화려하지 않은 아담한 집이었다.
흰색 페인트는 잔뜩 찌푸린 하늘 밑에서 불길하게 칙칙해 보였다. 적갈색에 가까운 겨자색 지붕 한가운데 벽돌로 만든 네모난 굴뚝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집 둘레에 울타리가 없는 대신 해묵은 상록수 몇 그루가 가지를 뻗어 비바람과 눈으로부터 건물을 지켜 주고 있었다.
집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무리 봐도 기묘한 집이었다. 느낌이 나쁘지도 을씨년스럽지도 않았고, 모양이 특별히 유별나지도 심하게 낡지도 않은 집이었다. 단지 기묘했다. 그것은 제대로 감정 표현을 못한 채 늙어 버린 거대한 생물처럼 보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는 게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면 좋을지를 몰랐던 것이다.
근처에는 비 냄새가 감돌았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 건물 을 향해서 초원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갔다. 서쪽에서는 이제까지와 같은 조각구름이 아닌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원은 지겨울 정도로 넓었다.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처럼 넓고 평탄한 땅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먼 곳의 바람의 움직임까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구름의 흐름과 교차하듯이 새떼가 북쪽을 향해서 머리 위를 가로질러갔다.
한참 뒤에 우리가 그 건물에 다다랐을 때, 이미 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건물은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크고 낡았다. 여기저기의 흰 페인트가 부스럼 딱지처럼 벗겨져 있었고, 벗겨진 부분은 비를 맞아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페인트가 벗겨진 걸 보면 새로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페인트를 모조리 벗겨 내야만 할 것이다. 그 고생을 생각하면 남의 일이지만 진저리가 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확실히 낡게 마련인가 보다. 그 별장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집이 낡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무들은 끊임없이 계속 자라 마치 <스위스의 로빈슨>에 나오는 수상 가옥(樹上家屋)처럼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지를 쳐주지 않은 탓에 나무의 가지가 제멋대로 뻗어 있었다.
험준한 산길을 떠올려 보니, 40년 전에 이만 한 집을 지을 자재를 양 박사가 어떻게 여기까지 운반해 왔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노력과 재산의 전부를 여기에 쏟아 부었을 것이다. 삿포로에 있는 어두컴컴한 호텔 2층 방에 틀어박혀 있을 양 박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보상받지 못한 인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양 박사의 인생일 것이다. 나는 차가운 비속에 서서 건물을 아마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길고 높은 이중창 바깥에 달린 나무 블라인드에는 고운 모래 먼지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비가 모래 먼지를 기묘하게 고정시키고 그 위에 새로 모래 먼지가 쌓이고 새로 내린 비가 그것을 다시 고정시키고 있었다.
현관문에는 눈높이에 사방 10센티미터의 유리창이 달려 있었는데, 창문은 안쪽에서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놋쇠로 된 손잡이의 틈새에도 모래 먼지가 잔뜩 끼여 있어서, 내가 손을 대자 우수수 밑으로 떨어졌다. 손잡이는 썩은 어금니처럼 흔들거렸는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꺼운 떡갈나무 널빤지를 석장 겹친 낡은 문은 보기보다는 훨씬 튼튼했다. 시험 삼아 주먹으로 몇 번 두들겨 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주먹이 아플 뿐이었다. 거대한 메밀 잣 밤나무 가지가 모래 산이 허물어져 내릴 때와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관리인이 일러준 대로 우편함 밑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열쇠는 안쪽에 달린 쇠장 식에 매달려 있었다. 놋쇠로 만들어진 복고풍 열쇠인데, 손이 닿는 부분은 이미 하얗게 변색되어 있다.
"이런 곳에 항상 열쇠를 놓아두다니 너무 허술한 거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일부러 이런 곳까지 와서 뭘 훔쳐가는 미친놈은 없어." 내가 대꾸했다.
열쇠는 열쇠 구멍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딱 들어맞았다. 열쇠는 내 손안에서 한 바퀴 회전한 다음 찰칵하는 시원스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블라인드가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던 탓에 집안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어두워서 눈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어슴푸레함이 방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넓은 방이었다. 넓고 고요했으며 낡은 헛간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어렸을 때 맡았던 기억이 있는 냄새였다.
오래된 가구나 버려진 깔개가 자아내는 오래된 시간의 냄새, 뒷손질로 문을 닫자 바람소리가 뚝 그쳤다.
"여보세요." 나는 큰소리로 불러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물론 부질없는 짓이었다. 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난로 앞에 있는 괘종시계만이 째깍거리고 있었다.
잠시 몇 초 동안, 내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시간의 전후가 뒤 바뀌고 몇 군데가 서로 겹쳤다. 짓눌리는 듯한, 괴로운 감정의 기억이 마른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눈을 뜨자 모든 것은 수습되어 있었다. 눈앞에는 기묘하게 단조로운 회색의 공간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괜찮아. 어쨌든 올라가 보지."
그녀가 전등의 스위치를 찾고 있는 동안, 나는 어둠 속에서 괘종시계를 살펴보았다. 시계는 쇠사슬이 달린 세 개의 분동(分銅)을 끌어올려서 태엽을 감도록 되어 있었다. 분동은 이미 세 개가 전부 아래까지 다 내려와 있었는데, 시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쇠사슬의 길이로 보아, 분동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쯤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주일 전에는 여기에 누군가가 있어서 시계의 태엽을 감았던 것이다.
나는 세 개의 분동을 맨 위까지 감아올리고 나서 소파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전쟁 전부터 사용했던 것 같은 낡은 소파였으나 앉기에 편안했다. 너무 푹신하지도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적당했다. 꼭 사람의 손바닥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딱 소리가 나며 전등이 켜지고 부엌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거실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다음 긴 의자에 앉아서 박하담배를 피웠다. 나도 박하담배를 피웠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나도 조금씩 박하담배를 좋아하게 되었다.
"당신 친구는 여기서 겨울을 날 생각이었나 봐요." 그녀가 말했다.
"부엌을 대충 살펴보았는데, 겨울 한철은 지낼 만큼 연료와 식료품이 준비되어 있어요. 꼭 슈퍼마켓 같아요."
"그런데 본인이 없잖아."
"2층을 좀 살펴볼까요."
우리는 부엌 옆에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도중에서 묘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공기층이 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조금 아파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많이 아파?"
"네, 그렇지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일엔 익숙하니까."
2층에는 침실이 세 개 있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큰 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방 두 개가 있었다.
우리는 세 방의 문을 차례로 열어 보았다. 어느 방에도 최소한의 가구밖에 없어 휑하고 어두컴컴했다. 넓은 방에는 더블베드와 화장대가 있었는데, 침대는 틀만 남아 있었다. 죽어버린 시간의 냄새가 났다.
안쪽 작은 방에만 사람 냄새가 남아 있었다. 침대는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베개는 약간 패여 있었으며, 무늬 없는 파란색 파자마가 머리맡에 개켜져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에는 오래된 구형 스탠드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책이 한 권 뒤집어져 있었다. 콘래드의 소설이었다.
침대 옆에는 참나무로 만든 단단한 서랍장이 있었고, 서랍 속에는 남자용 스웨터와 셔츠, 바지, 양말, 속옷 따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스웨터와 셔츠는 낡아서 조금 닳기도 하고 해진 데도 있었으나 고급이었다. 그중의 몇 개는 낯이 익었다. 쥐의 것이었다. 사이즈는 37짜리 셔츠와 73짜리 바지. 틀림없었다.
창가에는 최근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단순한 디자인의 구식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 서랍에는 싸구려 만년필과 잉크 세 갑과 편지지 세트가 들어 있었는데 편지지는 모두 백지였다. 두 번째 서랍에는 반쯤 없어진 기침약 병과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세 번째 서랍은 비어 있었다. 일기도 수첩도 메모도 아무것도 없다. 쓸데없는 것은 모조리 긁어모아서 처분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지나치게 정리가 잘 되 있어서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만져보니 흰 먼지가 묻어났다. 대단한 먼지는 아니었다. 역시 일주일 정도로 여겨졌다.
나는 초원 쪽으로 나 있는 이중창을 밀어 올리고 바깥쪽 블라인드를 열었다. 초원을 스치는 바람은 점점 더 강해지고 검은 구름은 더욱 낮게 흐르고 있었다. 초원은 몸부림치는 생물처럼 바람 속에서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그 건너편에 자작나무가 보이고 산이 보였다. 사진과 완전히 똑같은 풍경이었다. 양이 없을 뿐이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괘종시계가 한차례 차임을 울리고 나서 종을 열두 번 쳤다. 마지막 소리가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라고 그녀가 물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내가 대답했다.
"일주일 전까지 쥐는 여기에 있었던 거야. 짐도 남아 있어. 틀림없이 돌아올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눈이 쌓여 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겨울을 나게 되고 당신의 한 달 기한도 끝나 버리잖아요."
그 말이 맞았다.
"당신 귀는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어?"
"잘 안 돼요. 귀를 열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와요."
"그럼 여기서 느긋하게 쥐가 돌아오길 기다릴 도리밖에 없지." 내가 말했다.
요컨대 그 이외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는 동안, 나는 넓은 거실을 한 바퀴 돌며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거실 벽 중앙에는 진짜 난로가 있었다.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없었지만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손질되어 있었다. 떡갈나무 잎이 몇 장 굴뚝으로 들어와 있었다. 장작을 땔 정도로 춥지 않은 날을 위해서 대형 석유난로도 놓여 있었다. 연료계의 바늘을 보니 석유는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난로 옆에 있는 유리문이 달린 붙박이 책장에도 엄청난 수의 고서가 가득 꽂혀 있었다. 나는 몇 권을 꺼내 대충 훑어보았는데, 전부 전쟁 전의 책으로 대부분은 가치가 없는 책들이었다. 지리와 과학, 역사, 사상, 정치에 관한 것이 많은데 그것들은 40년 전의 일반적인 지식인의 기초 교양을 연구하는 목적 이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전후에 발행된 책도 있었지만, 굳이 가치를 따지자면 비슷한 정도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라든가 <그리스 희곡선>이라든가 그 밖의 몇 권의 소설만이 기억 속에서 퇴색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와 같은 책들도 긴 겨울을 나는 데는 그런대로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이처럼 상당한 수의 가치 없는 책이 한군데에 모여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책장 옆에는 역시 붙박이로 된 장식장이 있어, 거기에는 1960년대 중반에 유행했던 북셀프형 스피커와 앰프와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이백 장 가량의 레코드는 모두가 낡았고 흙투성이 엇지만, 그래도 가치는 있는 것들이었다. 음악은 사상만큼은 기억 속에서 퇴색하지 않는다. 나는 진공관 앰프의 파워 스위치를 켜고, 아무 레코드나 골라서 바늘을 얹어 보았다. 냇 킹 콜이 <국경의 남쪽>을 부르고 있었다. 방안의 분위기가 195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벽의 맞은편에는 높이 180센티미터 가량의 이중창이 같은 간격으로 네 개가 나란히 있었다. 창을 통해 초원에 내리는 회색 비가 보였다. 빗발이 거세지면서 산줄기는 희미하게 보였다.
마룻바닥 한복판에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그 위에 소파 세트와 스탠드가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식탁 세트는 방 한구석에 치워져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굉장히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벽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문이 있었는데 문을 열어 보니 그곳은 다디미 여섯 장 정도의 꽤 넓은 창고였다. 창고에는 필요 없는 가구와 카펫과 식기, 골프 세트, 장식품, 기타, 매트리스, 외투, 등산화, 헌 잡지 따위가 가득 쌓여 있었다. 중학교의 수험 참고서라든가 무선 조종 비행기까지 있었다. 그 물건들의 대부분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 걸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 건물 안에서는 시간이 기묘하게 흘렀다. 거실에 놓인 구식 괘종시계와 같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기분으로 여기에 와서는 분동을 감아올린다. 분동이 올라가 있는 한 시간은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고 분동이 내려와 버리면 시간은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정지한 시간의 덩어리가 바닥위에 색 바랜 생활의 층을 쌓아 올린다.
나는 몇 권의 낡은 영화 잡지를 가지고 거실로 돌아와 그것을 펴보았다.
그라비어로 인쇄하여 소개된 영화는 <알라모>였다. 존 웨인이 처음으로 감독한 작품으로 존 포드도 전면적으로 도왔다고 씌어있었다. 미국인의 마음에 남을 수 있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고 존 웨인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버 모피 모자는 존 웨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를 가지고 나타나 우리는 마주앉아서 그것을 마셨다. 빗방울이 단속적으로 유리창을 때렸다. 시간은 조금씩 무게를 더하고 방안은 서늘한 어스레함 속에 잠겼다. 전등의 노란빛이 꽃가루처럼 공중을 맴돌았다.
"피곤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줄곧 찾아다니다가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일 거야. 아마 적응이 잘 안 되는 거겠지. 그런데다가 천신만고 끝에 겨우 사진 속의 풍경을 찾게 되었는데도 쥐도 양도 없으니 말이야."
"한숨 주무세요. 그동안 식사 준비를 해놓을 테니까."
그녀는 2층에서 담요를 가져다가 나에게 덮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석유난로를 켜고 내 입술에 담배를 물린 다음 불을 붙여 주었다.
"힘내세요. 잘될 거예요."
"고마워"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고 혼자가 되자 몸이 갑자기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모금을 빨고 담배를 끈 다음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불과 몇 초 만에 잠이 들었다.
5. 그녀는 산을 떠나다. 그리고 엄습하는 공복감
시계가 여섯 시를 쳤을 때 나는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불은 꺼지고 방은 짙은 땅거미로 뒤덮여 있었다. 몸 구석구석 손가락 끝까지 저려왔다.
피부를 통해서 잉크빛 땅거미가 몸속까지 스며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는 이제 그친 것 같았고 유리창 너머로 새소리가 들려왔다. 석유난로의 불꽃만이 방의 흰 벽에 기묘하게 확대된 엷은 그림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스탠드의 스위치를 켜고 부엌으로 가서 찬물을 두 잔이나 마셨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크림스튜가 들어있는 냄비가 올려 져 있었다. 냄비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재떨이에는 그녀가 피우고 비벼 끈 박하담배의 꽁초가 두 개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이미 이 집을 떠나 버린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없는 것이다.
나는 싱크대에 두 손을 얹고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그녀는 이제 없다. 그것은 확실했다. 이치나 추리가 아니고 현실에 없는 것이다. 휑뎅그렁한 집 안의 공기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내가 아파트를 나가 버리고 나서 그녀를 만나기까지의 두 달 남짓 진절머리 나도록 맛보았던 그 공기다.
나는 그래도 확인하기 위해서 2층으로 올라가 세 방을 차례로 살펴보고 벽장까지 열어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숄더백과 다운재킷도 없어졌다. 등산화도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녀는 가버린 것이다. 그녀가 메모라도 남겼을 만한 곳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으나 메모는 없었다. 시간으로 미루어 그녀는 이미 산을 내려가 버렸을 것이다.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막 잠에서 깨어난 터라 머리가 아직 잘 돌아가지 않았던 데다가, 머리가 잘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에 일일이 정확한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일은 이미 오래 전에 내 능력의 범위를 넘어섰다. 요컨대 주위의 모든 사물을 흐르는 대로 맡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몹시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할 정도의 공복감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계단을 내려가서 식품 저장고로 쓰고 있는 지하실로 들어가, 붉은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맛을 보았다. 조금 찼지만 담백한 맛이었다. 부엌으로 돌아와서 나이프로 싱크대 위의 빵을 썰고 써는 김에 사과 껍질도 벗겼다. 스튜를 데우는 동안 포도주를 석 잔 마셨다.
스튜가 데워지자 포도주와 음식을 거실 테이블에 늘어놓고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의 <퍼피디아>를 들으면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후에는 소스 팬에 남아 있던 커피를 마시고 난로 위에서 찾아낸 트럼프를 갖고 혼자 놀았다.
영국에서 19세기에 발명되어 한때 유행했지만 너무나 복잡해서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이 멀리하게 된 게임이다. 어느 수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25만 번에 한 번 성공하는 확률이라고 한다. 세 번쯤 해보았지만 당연히 잘되지 않았다. 트럼프와 식기를 치우고 병에 3분의 1쯤 남은 포도주를 마저 마셨다.
창밖은 밤의 어둠에 덮여 있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긴 의자에 벌렁 누워서 잡음이 심한 낡은 레코드를 몇 장 계속해서 들었다.
쥐는 돌아올까?
아마 돌아오겠지. 여기에는 그가 겨울 한철을 나기 위한 식료품과 연료가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쥐는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거리'로 돌아가 버렸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딘가의 여자와 산 밑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들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최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쥐도 양도 찾지 못한 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인 한 달은 지나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검은 옷의 남자는 나를 그가 말하는 소위 '신들의 황혼'속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이고 말 것이다. 나를 끌어들이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타입이기 때문이다.
약속한 기간 한 달에서 딱 절반이 지나고 있다. 10월의 두 번째 주, 도시가 가장 도시답게 보이는 계절이다. 아무 일도 없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어딘가의 바에서 오믈렛이라도 먹으며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좋은 계절의 좋은 시간 그리고 비가 갠 후의 땅거미, 으드득 소리가 나는 빙수와 실팍한 통널빤지로 된 카운터, 고요한 강물처럼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
그런 일을 멍하게 생각하고 있을 동안 이 세상에 또 한 사람의 내가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쯤 어떤 바에서 기분 좋게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쪽의 내가 더 현실의 나처럼 여겨졌다. 어딘가에서 초점이 어긋나 진짜 나는 현실의 내가 아니게 되고 만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런 환상을 떨쳐버렸다.
밖에서는 밤새가 낮은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쥐가 사용하지 않던 작은 방에 잠자리를 보았다. 매트리스와 시트와 담요는 계단 옆의 벽장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방의 가구는 쥐의 방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사이드 테이블과 책상과 서랍장과 스탠드. 구식이지만 기능만을 생각해서 야무지게 물건을 만들던 시절의 산물이다.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다.
머리맡의 창으로는 역시 초원이 내다보였다. 비는 말끔히 개고 짙게 드리워져 있던 구름 사이로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반달이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 초원의 풍경이 한층 더 또렷이 보였다. 그것은 서치라이트로 비춘 깊은 바다 밑처럼 보였다.
나는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누워 사라졌다가는 나타나는 풍경을 내내 바라보았다. 그 불길한 커브 길을 돌아 혼자서 산을 내려가는 그녀의 이미지가 한동안 거기에 겹쳤으며, 그것이 사라져 버리자 이번에는 양떼와 그 사진을 찍고 있는 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달이 구름 속에 숨었다가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그것도 사라졌다.
나는 스탠드를 켜고 <셜록 홈즈의 모험>을 읽었다.
6. 차고에서 발견한 것・초원의 한가운데서 생각한 것
처음 보는 종류의 새 떼가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현관 앞 메밀 잣 밤나무에 매달려서 지저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촉촉이 젖은 채 아침 햇살 속에서 반짝였다.
나는 옛날 생각이 나게 하는 수동식 토스터로 빵을 굽고,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계단 프라이를 만들고, 냉장고에 있던 포도 주스를 두 잔 마셨다. 그녀가 없어서 쓸쓸했지만, 쓸쓸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구원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쓸쓸함이라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감정이었다. 작은 새들이 날아가 버린 뒤의 괴괴한 메밀 잣 밤나무 같았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욕실에서 입가에 묻은 노른자위 자국을 씻어내고 5분 동안이나 양치질을 했다. 그리고 꽤 망설이다가 역시 면도를 했다. 욕실에는 새것이나 마찬가지인 세이빙 폼과 질레트면도기가 있었다. 칫솔과 치약과 세숫비누, 스킨로션, 오데코롱까지 있었다. 선반에는 색색의 수건이 열 장 정도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다. 그야말로 쥐다운 꼼꼼함이었다. 거울에도 세면대에도 얼룩 하나 없었다.
화장실도 욕조도 대체로 비슷했다. 타일의 이음새 부분은 낡은 칫솔과 세제로 새하얗게 닦여 있다. 알아줄 만하다. 화장실에 있는 향료 상자에서는 고급 바에서 마시는 진 라임 같은 향기가 감돌았다.
욕실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배낭 속에는 이제 세 갑의 담배가 남아 있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을 다 피워버리고 나면 금연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웠다. 아침 햇살은 상쾌하고 소파는 편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시계가 천천히 아홉 시를 쳤다.
나는 쥐가 온 집 안의 세간을 정리하고, 화장실의 타일 이음새를 깨끗하게 씻어 내고, 아무도 만날 일이 없는데도 셔츠를 다리고 수염을 깎던 이유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시간에 대한 정상적인 감각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방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지만, 우선 무엇을 해야 좋을 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청소를 해야 하는 곳은 이미 쥐가 다해 놓았다. 높은 천장의 검댕까지 말끔히 털어 놓았다.
그래 좋아, 이러다가 무슨 생각이 나겠지.
우선 집 주위를 산책하기로 했다.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붓으로 그린 것과 같은 흰 구름이 몇 줄기 흐르고 여기저기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집 뒤에는 큰 차고가 있었다. 낡은 쌍바라지 문 앞에 담배꽁초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세븐 스타였다. 이번의 꽁초는 비교적 오래 전에 핀 것으로, 종이가 터져서 필터가 드러나 있었다. 나는 집안에 재떨이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것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재떨이였다. 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다. 나는 필터를 손바닥 위에서 잠깐 굴려 보고 나서 원래 있던 곳에 버렸다.
무거운 빗장을 풀고 차고의 문을 열자 안은 널찍했고, 널빤지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검은 흙 위에 몇 줄기의 평행선을 또렷이 그려내고 있었다. 휘발유 와 흙냄새가 났다.
차는 낡은 랜드 크루저였다. 차체에도 타이어에도 흙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휘발유는 거의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쥐가 언제나 키를 감춰 두는 곳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예상대로 키는 거기에 있었다. 키를 꽂고 돌려 보니 엔진은 곧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늘 그랬듯이 자동차 정비에 관한한 쥐의 솜씨는 알아줄 만했다. 나는 엔진을 끄고 키를 원래의 자리에 둔 다음 운전석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 안에는 별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 지도와 수건과 초코렛 반쪽이 있을 뿐이다. 뒷좌석에는 철사 한 묶음과 대형 펜치가 있었다. 뒷좌석은 쥐의 차치고는 어지럽혀져 있었다.
나는 뒷문을 열고 좌석 위에 떨어져 있는 먼지를 손바닥으로 끌어 모아 벽의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에 비춰 보았다. 그것은 쿠션에서 비어져 나온 속처럼도 보였다. 아니, 양털처럼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그것을 싸서 가슴께에 잇는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왜 쥐가 차를 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고에 차가 있다는 것은 그가 걸어서 산을 내려갔거나 산을 내려가지 않은 것,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쪽도 이치에는 맞지 않았다. 사흘 전까지는 벼랑 밑 길을 충분히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며, 쥐가 집을 비워 두고 이 고원의 어딘가에서 한뎃잠을 계속 자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생각하기를 단념하고 차고의 문을 닫고 초원으로 나가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본들 이치에 닿지 않는 상황에서 이치에 닿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 하다.
해가 높아짐에 따라 초원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증기를 통해서 정면의 산이 어렴풋이 흐려 보였다. 사방이 풀내음으로 가득했다. 축축한 풀을 밟으면서 초원의 한가운데까지 걸었다. 정확히 한복판쯤에 낡은 타이어가 놓여 있었다. 고무는 이미 완전히 하얘져서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 위에 걸터앉아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별장은 해안에 돌출한 흰 바위처럼 보였다.
초원 한복판의 타이어 위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어렸을 때 자주 참가했던 원영(遠泳)대회가 생각났다. 나는 섬에서 섬으로 헤엄쳐 건너가다 한가운데서 멈춰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언제나 야릇한 기분이 되곤 했었다. 두 지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기묘한 일이었다. 멀리 떨어진 대지 위에서 사람들이 지금도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무엇보다도 사회가 나를 제외시키고도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가장 기묘했다.
15분가량 거기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걸어서 별장으로 돌아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셜록 홈즈의 모험>을 계속 읽었다.
두 시에 양 사나이가 왔다.
7. 양 사나이 오다.
시계가 두 번 종을 치고 난 직후에 노크 소리가 났다. 처음엔 두 번, 그리고 두 번쯤 호흡할 시간을 두고 세 번.
그것이 노트 소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누군가가 이 집 문을 노크한다는 건 나에게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쥐라면 노크 없이 문을 열 것이다. 어쨌든 여기는 쥐의 집이다. 관리인이라면 한 번 노크하고 나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 것이다. 그녀라면 아니, 그녀일 리가 없다. 그녀는 부엌문을 통해 살짝 들어와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 이다. 현관문을 노크하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문을 열자, 거기에는 양 사나이가 서 있었다. 양 사나이는 열린 문에도 문을 연 나에게도 별반 흥미가 없다는 얼굴로, 문에서 2미터쯤 떨어진 데에 있는 우편함을 무슨 신기한 것이라도 보는 양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양 사나이의 키는 우편함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150센티미터쯤일 것이다. 게다가 새우 등에 다리가 굽어 있었다.
그런데다가 내가 서 있는 곳과 땅바닥은 15센티미터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마치 버스의 창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양 사나이는 그 결정적인 차이를 무시하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우편함을 열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우편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을까?"
양 사나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빠르게 물었다. 뭔가에 화를 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들어오십시오."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몸을 굽히고 시원시원하게 등산화 끈을 끌렀다. 등산화에는 곰보빵 껍질처럼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양 사나이는 벗은 등산화를 두 손에 들고 마주 대더니 익숙하게 탁탁 털었다. 달라붙어 있던 진흙은 포기했다는 듯이 땅에 떨어졌다. 그다음 양 사나이는 집 안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슬리퍼를 신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혼자서 소파에 앉더니 후유,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양 사나이는 양 가죽을 머리에서부터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땅딸막한 몸집은 그런 차림에 잘 어울렸다. 팔과 다리 부분은 이어 붙인 것이다. 머리 부분을 덮은 후드도 역시 만든 것이었는데 그 꼭대기에 달린 도르르 말린 두 개의 뿔은 진짜였다. 후드 양쪽에는 철사로 만든 것 같은 납작한 두 귀가 수평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의 위쪽을 덮은 가죽 마스크와 장갑과 양말은 모두 검정색이었다. 옷의 목 부분에서 넓적다리 부분에 걸쳐 지퍼가 달려 있어 간단히 입고 벗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슴 부분에 역시 지퍼가 달린 주머니가 있었고, 거기에는 담배와 성냥이 들어 있었다. 양 사나이는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후유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부엌에 가서 닦아 놓은 재떨이를 가지고 왔다.
"술이 마시고 싶은데"라고 양 사나이가 말을 꺼냈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반쯤 남은 포 로제스 병을 찾아 잔 두 개와 얼음을 가져왔다.
우리는 각자 온더록스를 만들어 건배도 하지 않고 마셨다. 양 사나이는 잔을 다 비울 때까지 혼자서 뭔가 중얼거렸다. 양 사나이의 코는 몸에 비해 커서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날개처럼 좌우로 벌어졌다. 마스크의 구멍으로 엿보이는 두 눈은 침착하지 못하게 내 주위의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고 있었다. 잔을 비우고 나서 조금 안정되는 듯한, 눈치였다. 양 사나이는 담배를 끄고 마스크 밑으로 두 손을 넣어서 눈을 비볐다.
"털이 눈에 들어가서 말이야"라고 양 사나이가 말했다.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몰라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양 사나이는 눈을 비비면서 "어제 오전에 여기에 왔지?"라고 말했다.
"내내 지켜보고 있었네."
양 사나이는 반쯤 녹은 얼음 위에 위스키를 붓고 흔들지도 않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오후에 여자가 혼자서 나갔지."
"그것도 보고 있었나?"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쫓아 보낸 거지."
"쫓아 보냈다고?"
"그래, 부엌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돌아가는 게 좋다고 말해주었어."
"왜지?"
양 사나이는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왜라는 질문 방식은 아마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가 보다. 내가 단념하고 또 다른 질문을 생각하는 동안에 그의 눈은 서서히 다른 빛을 띠어 가고 있었다.
"여자는 돌고래 호텔로 갔네."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돌고래 호텔로 돌아간 거야."
"어떻게 그걸 알지?"
양 사나이는 입을 다물었다.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말없이 테이블 위의 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돌고래 호텔로 돌아갔단 말이오?"라고 나는 말했다.
"그래, 돌고래 호텔은 좋은 호텔이야. 양 냄새가 나거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 보니 양 사나이가 걸친 양가죽은 몹시 더러웠고, 털은 기름으로 뻣뻣해져 있었다.
"그녀가 가면서 무슨 말을 남기진 않았어?"
양 사나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자는 아무 말도 없었고, 나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지."
"당신이 가버리는 게 좋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갔단 말이오?"
"그렇다니까. 여자가 가고 싶어 해서 가버리는 게 좋다고 말해준 거야."
"그녀는 자기가 원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아니야!" 양 사나이는 고함을 질렀다.
"여자는 가고 싶어 했어. 하지만 그녀 자신도 아주 혼란스러워했지. 그래서 내가 쫓아 보낸 거야. 당신이 여자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걸 몰라?"
양 사나이는 일어서서 오른쪽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하고 쳤다. 위스키 잔이 5센티미터 가량 옆으로 미끄러졌다.
양 사나이는 잠깐 그 자세로 서 있었으나 이윽고 눈의 반짝임이 흐려지더니 힘이 빠진 것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
"당신이 여자를 혼란스럽게 만든 거야. 아주 나쁜 일이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당신은 자기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거야."
양 사나이는 이번에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인가?"
"그래, 그 여자는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지. 당신은 자기 일밖에 생각하지 않은 거야."
나는 소파에 푹 파묻혀서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어쨌든 끝나버린 일이니까"하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끝나?"
"당신은 그 여자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걸."
"내가 내 일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래. 당신이 자기 일만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 죄 값이지."
양 사나이는 일어서서 창가로 가 한 손으로 무거운 창문을 쭉 밀어 올리고 밖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대단한 힘이었다.
"이렇게 맑게 갠 날에는 창을 열어 놓아야지."
양 사나이는 말했다. 그리고 양 사나이는 방을 반 바퀴 빙 돌고 책장 앞에 서더니 팔짱을 낀 채 책의 겉표지를 보았다. 옷의 뒤에는 작은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뒤에서 보면 진짜 양이 두발로 일어서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난 친구를 찾고 있소"라고 내가 말했다.
"그래?"하고 양 사나이는 등을 보인 채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에 한동안 살았을걸. 바로 일주일 전까지 말이야."
"모르겠는걸."
양 사나이는 난로 앞에 서서 선반위의 트럼프를 손으로 한 번 훑었다.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도 찾고 있는데."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런 건 본 적도 없는데"라고 양 사나이가 대꾸했다.
그러나 양 사나이가 쥐와 양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는 지나치게 무관심한 척하려고 했다. 너무 빨리 대답을 했고 어조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작전을 바꿔 그야말로 상대방에게 이제는 흥미를 잃었다는 기색을 보이며 하품을 하고 책상 위의 책을 집어서 책장을 넘겼다. 양 사나이는 약간 안절부절 못하며 소파 주위를 돌았다.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책 읽는 게 재미있나?"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나는 "응"하고 간단히 대꾸했다. 양 사나이는 그러고 나서도 계속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아까는 큰소리를 쳐서 미안해." 양 사나이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가끔 말이지, 그, 양적(羊的)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부딪쳐서 그렇게 된다고. 뭐 딴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게다가 당신도 나를 책망하는 듯한, 말을 해 서."
"됐어." 내가 대꾸했다.
"당신이 그 여자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데 대해서도 미안하게는 생각해. 하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거든."
"그래."
나는 배낭 주머니에서 라크를 세 갑 꺼내서 양 사나이에게 주었다. 양 사나이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고마워, 이 담배는 처음인데. 그런데 당신은 필요하지 않은가?"
"담배는 끊었어." 내가 말했다.
"그래, 그게 좋지." 양 사나이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몸에 나쁘니까."
양 사나이는 담배가 소중한 듯이 팔에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그 부분이 네 모지게 볼록해졌다.
"난 친구를 꼭 만나야만 해. 그래서 아주 멀리서 여기까지 온 거야."
양 사나이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지?"
양 사나이는 애처롭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들어 붙인 귀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그러나 이번의 부정은 앞의 부정보다 훨씬 약했다.
"이곳은 좋은 곳이지. 경치 좋겠다, 공기 좋겠다, 당신도 아마 마음에 들 거야." 양 사나이는 화제를 바꿨다.
"좋은 곳이지." 나도 동의했다.
"겨울이 되면 더 좋아지지. 주위는 온통 눈으로 뒤덮이고 꽁꽁 얼어붙어 버리거든. 동물들은 모두 겨울잠을 자고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아."
"줄곧 여기에 있을 건가?"
"응"
나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양 사나이는 동물과 똑같다. 이쪽이 물러서면 다가온다. 계속 여기에 있을 거라면 서두를 필요는 없다.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캐내면 되는 것이다.
양 사나이는 왼손으로 오른손에 낀 검은 장갑의 끝을 엄지손가락부터 차례로 잡아당겼다. 몇 번 당기자 장갑은 쏙 빠졌는데 꺼칠꺼칠하고 가무잡잡한 손이 드러났다. 작지만 통통했고 엄지손가락 연결 부분부터 손등 한가운데에 걸쳐서 예전에 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양 사나이는 손 등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뒤집어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행동은 쥐가 자주 하던 짓이다. 그러나 양 사나이가 쥐일 리는 없다. 키가 20센티미터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여기에 계속 있을 건가?" 양 사나이가 물었다.
"아니, 친구나 양 중에서 하나라도 찾으면 갈 거야. 그래서 왔으니까."
"이곳 겨울은 참 좋지. 눈에 덮여 하얗고 반짝반짝 빛나거든. 그리고 몽땅 얼어붙어 버린다고."
양 사나이는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혼자 킥킥거리더니 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입을 벌리자 지저분한 이가 보였다. 앞니가 두 개 빠져 있었다. 양 사나이의 사고의 리듬은 왠지 모르게 고르지 않아서, 그것이 방의 공기를 팽창시키기도 하고 수축시키기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슬슬 돌아가야지. 담배 고맙네."라고 양 사나이는 느닷없이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친구와 그 양을 빨리 찾기를 빌겠어."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그에 대해서 뭔가 알게 되거든 가르쳐 주겠지?"
양 사나이는 잠시 거북한 듯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래, 가르쳐 주지."
나는 조금 우스웠지만 웃음을 참았다. 양 사나이는 아무래도 거짓말하는 것이 서툰 모양이었다.
양 사나이는 장갑을 끼고 나서 일어났다.
"또 오지. 며칠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또 올 거야." 그러고 나서 눈빛이 흐려졌다.
"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꼭 만나고 싶어."
"그럼 다시 오지"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그리고 뒷손질로 탕하고 문을 닫았다. 꼬리가 걸릴 것 같았으나 무사했다. 블라인드 틈새로 보니 양 사나이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편함 앞에 서서 페인트가 벗겨진 흰 상자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스락거리며 양 가죽 옷을 고쳐 입고는 빠른 걸음으로 동쪽 숲을 향해서 초원을 가로질러 갔다. 수평으로 튀어나온 귀가 수영장의 다이빙대처럼 흔들렸다. 양 사나이는 멀어짐에 따라서 선명하지 않은 흰 점이 되고, 마침내는 비슷한 색깔의 자작나무 줄기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양 사나이가 사라진 뒤에도 내내 초원과 자작나무숲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양 사나이가 조금 전까지 이 방에 있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테이블에는 위스키 병과 세븐 스타 담배꽁초가 남아 있었고, 맞은편 소파에는 양털이 몇 올 붙어 있었다. 나는 랜드 크루저의 뒷좌석에서 발견한 양털과 그것을 비교해 보았다. 똑같았다.
양 사나이가 돌아간 뒤,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부엌에서 햄버거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양파를 다져서 프라이팬에 볶고, 그 사이에 냉장고에서 꺼낸 쇠고기를 해동시켜 잘게 다졌다. 부엌은 꽤 깨끗했고 웬만한 조리 기구와 조미료는 갖추어져 있었다. 길만 제대로 포장하면 이대로 여기에 산장풍의 레스토랑을 열어도 될 것 같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제쳐 놓고 양 떼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족 동반이라면 초원에서 양과 놀면 되고, 연인들은 자작나무숲을 거닐면 된다. 아마 잘될 거다.
쥐가 경영하고, 내가 요리를 만든다. 양 사나이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산장풍 레스토랑에서라면 그의 엉뚱한 차림도 아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양치기로는 그 현실적인 면양 관리인을 끼어 줄 수도 있다. 현실적인 사람이 한 사람쯤 있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개도 필요하다. 양 박사도 아마 놀러 와줄 것이다.
나는 나무주걱으로 양파를 저으면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그 놀라운 귀를 가진 여자 친구를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양 사나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서 여기에 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마……,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대해 계속 생각하기로 했다.
J, 만약 그가 여기에 함께 있다면 여러 가지 일이 잘될 것이다. 모든 일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용서하는 일과 불쌍히 여기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을 중심으로.
양파가 식는 동안, 나는 창가에 앉아서 다시 초원을 바라보았다.
8. 바람의 특수한 통로
그날로부터 아무 일 없이 사흘이 지나갔다. 양 사나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먹고, 책을 읽고, 해가 지면 위스키를 마시고 잤다. 아침엔 여섯 시에 일어나서 초원을 반달 모양으로 반 바퀴 뛰고 나서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다.
초원의 아침 공기는 급속히 냉기를 더해 갔다. 선명하게 물들었던 자작나무 잎은 하루가 다르게 듬성듬성해지고, 겨울바람은 마른 가지 사이를 누비며 고원을 가로질러 남동쪽에서 처음으로 불어왔다. 조깅을 하다가 초원의 한가운데에 멈춰 서면 그 바람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바람 소리가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짧은 가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운동 부족과 금연 탓으로 나는 여기 오고 나서 사흘 만에 2킬로그램이나 체중이 늘어서 조깅으로 1킬로그램을 줄였다. 담배를 피울 수 없는 게 약간 고통스러웠지만, 사방 30킬로미터 이내에는 담배 가게가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그녀와 그녀의 귀를 생각했다. 내가 이제까지 잃은 것에 비하면 담배를 못 피우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나는 시간을 활용해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보았다. 오븐을 써서 로스트비프까지 만들었다. 냉동 연어를 손질해서 마린(생선이나 고기를 식초, 포도주, 긺 등에 재운 요리)도 만들었다. 신선한 야채가 부족했으므로 먹을 수 있을 만한 들풀을 초원에서 찾아내 가다랭이포를 넣어 삶기도 했다. 그리고 양배추로 간단한 절임도 만들었다. 양 사나이가 올 때를 대비해 몇 종류의 술안주 도 준비했다. 그러나 양 사나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로 오후의 시간은 초원을 바라보며 보냈다. 초원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작나무숲 사이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그대로 초원을 가로질러서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대개 그것은 양 사나이였는데, 어떤 때에는 쥐이기도 하고, 그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그것은 별 모양이 있는 양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만이 불어댔다. 초원이 바람의 특수한 통로인 것처럼 보였다. 바람은 중요한 사명을 띠고 갈 길을 서두르기라도 하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초원을 가로질러 갔다.
내가 이 고원에 오고 나서 이레째 되던 날 첫눈이 내렸다. 이상하게 그날은 아참부터 바람도 불지 않고, 하늘에는 온통 잔뜩 찌푸린 무거운 납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조깅을 하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레코드를 듣고 있을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찌그러진 모양의 단단한 눈이었다. 유리창에 닿을 때마다 딱딱 소리를 냈다.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고 눈발은 30도 가량 비스듬한 선을 그리면서 그 비스듬한 선은 백화점 포장지의 무늬처럼 보였지만, 그러다가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밖이 하얘져 산도 숲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도쿄에 어쩌다 내리는 것과 같은 소담한 눈이 아니라 진짜 북국(北國)의 눈이었다. 모든 것을 모조리 덮어 버리고 대지를 얼어붙게 만드는 눈이었다.
뚫어져라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금세 눈이 따가워졌다. 나는 커튼을 내리고 석유난로 옆에서 책을 읽었다. 레코드가 다 돌아갔다가 바늘이 자동적으로 되돌아와 버리고 나자, 주위는 무서울 정도로 괴괴해졌다. 마치 생명 있는 것들이 모두 사멸해 버리고 난 후의 침묵 같았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집안을 한 바퀴 돌았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갔다가 창고와 욕실과 화장실과 지하실을 살피고 2층 방의 문을 열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침묵만이 기름처럼 방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방의 넓이에 따라서 침묵의 울림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나는 외톨이로, 태어난 이후 이처럼 외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난 이틀 동안 처음으로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는데, 물론 담배는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얼음 없이 위스키를 마셨다. 만약 이런 식으로 겨울 한철을 난다면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집 안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될 정도의 술도 없었다. 위스키가 세 병, 브랜디가 한 병, 그리고 캔 맥주가 열두 개, 그것뿐이었다. 아마 쥐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 나의 회사 친구는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을까? 제대로 회사를 정리하고 본인이 바라던 대로 원래의 작은 번역 사무소를 다시 시작했을까? 아마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 할 시기다. 우리는 6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눈은 점심때가 지나서 그쳤다. 내리기 시작할 때와 똑같이 갑자기 뚝 그쳤다. 두꺼운 구름이 점토처럼 군데군데에서 틈새를 보여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 초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멋진 광경이었다. 밖으로 나가 보니 땅에는 단단한 눈이 작은 설탕 과자처럼 여기저기에 온통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각자 자신의 몸을 단단하게 해 녹아 없어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계가 세 시를 칠 무렵에는 눈이 거의 녹았다.
땅은 촉촉하게 젖었고 저녁 무렵의 태양이 초원을 포근한 빛으로 감쌌다. 새들은 마치 갇혔다가 풀려 난 것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쥐의 방에서 <빵 굽는 법>이라는 책과 콘래드의 소설을 가져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읽었다. 3분의 1가량 읽은 데서 쥐가 서표(書標) 대신 끼워둔 10센티미터 정도의 신문 조각을 발견했다. 날짜는 알 수 없었지만 종이의 색깔로 보아 비교적 최근의 신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잘라 낸 기사의 내용은 지방 정보에 관한 거였다. 삿포로의 어느 호텔에서 고령화 사회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린다거나, 아사히가와 근처에서 역전 경주(驛傳競走)가 열린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중동의 위기에 대한 강연회도 있었다. 뒷면은 신문 광고였다. 나는 하품을 하고 책장을 덮은 다음, 부엌에서 남은 커피를 끓여 마셨다.
나는 오랜만에 신문을 읽고 내 자신이 일주일 동안 세계의 흐름에서 완전히 뒤쳐져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잡지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쿄는 핵미사일에 의해 붕괴되었을지도 모르고, 전염병이 산 밑의 세상을 뒤덮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화성인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차고의 랜드 크루저까지 가면 라디오를 들을 수는 있지만 특별히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면 특별히 알 필요도 없는 것이고, 나는 이미 필요한 만큼의 걱정거리는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무언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는데도 정신을 팔고 있다가 모르고 넘어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망막에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는 무의식적인 기억이 새겨져 있다. 나는 커피 잔을 설거지통에 쳐 넣고는 거실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신문 조각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다. 내가 찾고 있던 것은 역시 그 뒷면에 있었다.
나는 종잇조각을 책갈피에 꽂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쥐는 내가 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문은 어떻게 그가 이 기사를 발견했을까? 아마 산에서 내려왔을 때 우연히 발견했겠지. 아니면 뭔가를 찾으려고 몇 주일 치의 신문을 한꺼번에 읽은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 기사를 보았을 때에는 나는 이미 돌고래 호텔을 떠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연락하려고해도 전화가 이미 죽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쥐는 나에게 연락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연락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쥐는 내가 돌고래 호텔에 있다는 사실로 조만간 이리로 올 거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고, 나를 만나고 싶었다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나 적어도 메모라도 남기고 갔을 것이 아닌가.
요컨대 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다. 만약에 나를 여기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나를 배제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집은 그의 집이니까.
나는 그 두 명제(命題)를 가슴에 안은 채 시계의 긴 바늘이 문자판을 천천히 한 바퀴 도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늘이 한 바퀴 돈 뒤에도 나는 그 두 명제의 핵심에 다다를 수 없었다.
양 사나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것은 확실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재빠르게 알아차린 바로 그 사람이, 반년 가까이나 여기에 살고 있던 쥐를 모를 리가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양 사나이의 행동은 쥐의 의사를 반영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양 사나이는 내 여자 친구를 산에서 내려가게 해 나를 혼자 있게 만들었다. 그의 등장은 무슨 예고임에 틀림없다. 내 주위에서 확실히 무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주위는 깨끗이 정리되고 무슨 일인가 일어나려고 한다.
나는 전깃불을 끄고 2층으로 올라가 누워서 달과 눈과 초원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차가운 별빛이 보였다. 나는 창을 열고 밤의 냄새를 맡았다. 나뭇잎들 스치는 소리에 섞여서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새소리 인지 짐승 소리인지 알 도리가 없는 기묘한 울음 소리였다. 이렇게 해서 산 위에서의 일곱 번째 날이 지나갔다.
잠에서 깨어나 초원을 달리고 샤워를 하고 나서 아침을 먹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이었다. 하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뜩 흐려 있었지만 기온은 약간 올라갔다. 아무래도 눈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블루진과 스웨터 위에 야케(후드가 달린 방한용 외투)를 뒤집어쓰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초원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양 사나이가 사라진 언저리에서 동쪽 숲으로 들어가 숲속을 돌아다녀 보았다. 길다운 길은 물론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가끔 오래된 자작나무가 넘어져 있었다. 땅은 평탄했지만 군데군데에 말라버린 개천과도 같은 아니면 참호의 흔적과도 같은 너비 1미터 가량의 도랑이 이어져 있었다. 어떤 때는 깊어지고 어떤 때는 낮아지며, 그 밑바닥에는 복사뼈를 덮을 만큼의 낙엽이 쌓여 있었다.
도랑을 따라가니까 이윽고 말의 등처럼 우뚝 솟은 길이 나왔다. 길의 양쪽은 완만한 경사의 마른 골짜기였다. 마른 잎 빛깔의 살찐 새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길을 가로질러 숲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철쭉나무의 붉은 잎이 숲 여기저기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한 시간쯤 돌아다니다가 나는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양 사나이를 찾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 마른 골짜기를 따라 걷다가, 시냇물을 찾고 나서는 흐름에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갔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폭포에 닿은 것이고, 폭포 가까이에서 우리가 올 때에 지나왔던 길과 통할 것이다.
10분가량 걸어가니 폭포 소리가 들렸다. 시냇물은 바위에 부딪혀 여기저기로 방향을 바꾸었고, 군데군데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었다. 물고기는 없고 수면에는 몇 장의 낙엽이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바위를 타고 폭포를 내려간 다음에 미끄러운 비탈길을 기어 올라갔다. 그러자 눈에 익은 길이 나왔다.
다리 옆에 양 사나이가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 사나이는 장작을 가득 담은 큰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여기저기 헤매고 돌아다니면 곰을 만날 텐데. 이 근처에서 한 마리가 헤매고 있는 것 같으니까. 어제 오후에 그 흔적을 발견했지. 돌아다니고 싶거든 자네도 나처럼 허리에 방울을 차는 게 좋을 거야."
양 사나이는 털옷의 허리 언저리에 핀으로 고정 시킨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었다.
"당신을 찾고 있었어." 나는 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알고 있어. 찾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양 사나이가 말했다.
"그런데 왜 부르지 않았지?"
"당신이 스스로 찾길 원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가만히 있었지 뭐."
양 사나이는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맛있다는 듯이 피웠다. 나는 양 사나이의 옆에 걸터앉았다.
"여기서 살고 있나."
"그렇지"하고 양 사나이는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야."
"하지만 내 친구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
침묵이 흘렀다.
"아주 중요한 일이지."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내 친구의 친구라면 나와 당신도 친구인 셈이지?"
"그렇겠지"라고 양 사나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내 친구라면 나한테 거짓말은 안 하겠지, 그렇지?"
"그래"하고 양 사나이는 난처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말해 주지 않겠어? 친구로서."
양 사나이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말할 수 없어. 정말 미안하지만, 말할 수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되게 돼 있거든."
"누가 입을 열지 못하게 했어?"
양 사나이는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바람이 마른 나무들 사이에서 소리를 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어." 내가 가만히 말했다. 양 사나이는 뚫어져라 내 눈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이곳의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군?"
"몰라."
"좋아. 여기는 보통 장소가 아니야.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일전에 이곳은 좋은 곳이라고 했잖아."
"나한테는 그렇지." 양 사나이가 말했다.
"내게는 여기 말고는 살 곳이 없으니까. 여기에서 쫓겨나면 이제 갈 곳이 없거든."
양 사나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서 그 이상의 말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 한 일 같아 보였다. 나는 장작이 들어 있는 자루를 바라보았다.
"그걸로 겨울 동안 불을 때는 건가?" 양 사나이는 말없이 끄덕였다.
"하지만 연기가 안 보이던데."
"아직은 불을 피우지 않지, 눈이 쌓일 때까지는. 하지만 눈이 쌓이고 나서 내가 불을 피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연기가 보이지 않을걸. 그렇게 불을 때는 방법이 있거든." 양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눈은 언제쯤부터 쌓이기 시작할까?"
양 사나이는 하늘을 올려다본 다음 내 얼굴을 보았다.
"금년엔 눈이 예년보다 이르다고. 앞으로 열흘 후쯤이면."
"앞으로 열흘이면 길이 얼어붙어 버린단 말이지?"
"아마 그럴 거야.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고 아무도 내려가지 못하지. 좋은 계절이야."
"여기서 살 건가?"
"계속. 오랫동안 계속 살 거야." 양 사나이가 말했다.
"뭘 먹고 살지?"
"머위, 고비, 나무 열매, 새, 작은 물고기와 게도 잡히지."
"춥지 않아?"
"겨울은 추운 법이야."
"뭔가 아쉬운 게 있으면 나누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맙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로 없어."
양 사나이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초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도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왜 이곳에 숨어 살게 됐지?"
"틀림없이 당신은 웃을 걸"하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아마 웃지 않을 거야"라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 왜 웃어야 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네."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았거든."
우리는 그대로 한동안 입을 다물고 걸었다. 나란히 걷고 있자니 양 사나이의 머리가 내 어깨 옆에서 흔들렸다.
"어느 나라와의 전쟁?"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몰라."
양 사나이는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양인 채로 있는 거야. 양인채로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주니타키에서 태어났나?"
"응,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
"말하지 않을게."
"마을을 싫어해?" 내가 물었다.
"산 아래 마을 말인가?"
"그래."
"좋아하지 않아. 군인들이 우글거리니까."
양 사나이는 다시 한 번 기침을 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지?"
"도쿄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나?"
"아니."
양 사나이는 그것으로 나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우리는 초원의 입구에 닿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들렀다 가지 않겠어?"하고 나는 양 사나이에게 물어 보았다.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돼. 아주 바빠. 다음에 들르지." 그가 말했다.
"내 친구를 만나고 싶어. 앞으로 일주일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지."
내 말에 양 사나이는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귀가 펄럭펄럭 흔들렸다.
"미안하지만 전에도 말한 것처럼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만약 전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래"하고 양 사나이가 말했다.
"고마워"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다닐 때는 제발 방울을 잊지 말도록 해." 헤어질 때 양 사나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고, 양 사나이는 전과 마찬가지로 동쪽 숲으로 사라졌다. 겨울 빛으로 칙칙한 무언(無言)의 푸른 초원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날 오후 나는 빵을 구웠다. 쥐의 방에서 찾아낸 <빵 굽는 법>이라는 책은 아주 친절한 책이어서, 표지에는 "글자만 읽을 줄 알면 당신도 간단히 빵을 구울 수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는데, 정말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책의 지시에 따라 아주 간단하게 빵을 구웠다. 온 집안에 구수한 빵 냄새가 감돌고 따뜻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맛도 초보자의 솜씨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부엌에는 밀가루도 이스트도 듬뿍 있어서 여기서 겨울 한철을 나게 되더라도 빵 걱정만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쌀도 스파게티도 질릴 정도로 있었다.
나는 저녁에 빵과 샐러드와 햄과 달걀을 먹고 식후에는 복숭아 통조림을 먹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연어 통조림과 미역과 양송이를 사용해 필라프를 만들었다.
낮에는 냉동되어 있던 치즈 케이크를 먹고 진한 밀크 티를 마셨다.
세 시에는 헤이즐넛 아이스크림에 코앙트로를 쳐서 먹었다.
저녁에는 닭고기를 뼈째 오븐에 굽고 수프를 먹었다.
나는 다시 살이 찌고 있다.
아흐레째의 점심때가 지나서 책장의 책을 바라보고 있다가 낡은 책 한 권이 아주 최근에 읽힌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윗부분만 먼지가 없고 책이 줄에서 비어져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책장에서 꺼내 긴 의자에 앉아서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아시 아주의의 계보>라는 전쟁 중에 발행된 책이었다. 종이 질은 아주 나빴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전쟁 중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내용이 일방적이고 시시해서 3페이지마다 하품이 나올 만큼 따분했는데, 그래도 군데군데에 복자(인쇄물에서 밝히기를 꺼려 ×등으로 대신 나타내는 것)가 있었다. 2.26사건(1936년 2월 26일 일본 군부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국수주의적 쿠테타)에 관해서는 한 줄도 언급이 없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맨 마지막 페이지에 흰 메모 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누런 종이를 줄곧 보아 온 뒤라 그 하얀 종잇조각은 무슨 기적처럼 보였다. 그 페이지 오른쪽 끝에는 권말 자료라고 되어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차례로 나가다가 중간쯤에서 '선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양에 홀린' 선생이다. 본적은 홋카이도 군(郡) 주니타키 정.
나는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머릿속에서 말이 형성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뭔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아차렸어야만 했다. 가장 먼저 알아차렸어야만 했을 것이다. 처음에 선생이 홋카이도의 빈농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것을 체크해 두었어야만 했다. 선생이 아무리 교묘하게 과거를 말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조사해 볼 무슨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검은 옷의 비서라면 아마 당장에 조사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것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을 것이다. 마치 내 반응과 행동에 대한 온갖 가능성을 체크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부러 귀찮게 수고를 해가며 설득하고 또는 협박해서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왜지? 설사 무엇을 하더라도 나보다는 그들이 훨씬 더 능숙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유에서 나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장소를 가르쳐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혼란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괴기하고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쥐는 뭔가를 알고 있다. 나만 아무것도 모른 채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은 모두가 어긋나 있고, 내 모든 행동은 헛 다리를 짚고 있다. 물론 내 인생은 시종 그런 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는 누구도 책망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이런 식으로 나를 이용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용하고, 짜내고, 때려눕힌 것은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정말 마지막 한 방울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지금 당장에라도 산을 내려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발을 들여 놓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간단한 일은 소리 내어 울어 버리는 것이었지만 울 수도 없었다.
훨씬 뒤에 내가 정말로 울어야 할 뭔가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위스키 병과 잔을 가져다가 5센티미터 정도를 마셨다. 위스키를 마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9. 거울에 비치는 것・거울에 비치지 않은 것
열흘째 되는 날 아침 나는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잃을 만한 것은 이미 몽땅 잃어버렸다.
그날 아침 한참 조깅을 하고 있는데 두 번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가 얼음 조각으로 바뀌고 그리고 불투명한 눈이 되었다. 산뜻했던 첫눈과는 달리 이번 눈은 몸에 달라붙는 불쾌한 느낌의 눈이었다. 나는 조깅을 도중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목욕물을 데웠다. 목욕물이 데워질 때까지 줄곧 난로 앞에 앉아 있었는데 몸은 녹지 않았다. 서늘한 냉기가 몸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장갑을 벗어도 손가락을 구부릴 수가 없었고, 귀는 당장에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온몸이 질 나쁜 종이처럼 껄끔거렸다.
뜨거운 목욕물에 30분간 몸을 담그고 있다가 브랜디를 넣은 홍차를 마시자 겨우 몸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때때로 엄습하는 단속적인 오한은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이것이 산의 겨울인 것이다.
눈이 저녁때까지 계속 내려 초원은 온통 흰색으로 뒤덮였다.
밤의 어둠이 일대를 감쌀 무렵 눈은 그치고 다시 깊은 침묵이 안개처럼 다가 왔다. 나로서는 막을 길 없는 침묵이었다. 나는 플레이어를 자동 반복으로 해 놓고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스물여섯 번 들었다.
물론 쌓인 눈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양 사나이가 예언했던 것처럼 대지가 얼어붙어 버릴 때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었다. 초원의 눈은 조금씩 사라져 가고, 남은 눈은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지붕에 쌓인 눈은 큰 덩어리가 되어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와 소리 내며 땅에 떨어져 부서졌다.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메밀 잣 밤나무의 잎 한 장 한 장의 끝에 작은 물방울이 빛났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거실 창가에 선 채로 가만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나와는 관계없이 전개되고 있다. 나의 존재와는 관계없이 누구의 존재와도 관계없이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다. 눈은 내리고 다시 눈은 녹는다.
눈이 녹거나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집안 청소를 했다. 눈 때문에 몸이 완전히 둔해져 있었는데다가 사실 나는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 청소 정도 못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원래 요리나 청소를 싫어하진 않는다.
그러나 넓은 집을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노동이었다. 10킬로미터를 뛰는 게 차라리 덜 힘들 것 같았다. 나는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고 나서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마룻바닥을 가볍게 물걸레질하고 나서 웅크리고 앉아 마루에 왁스칠을 했다. 반쯤 하자 숨이 차왔다. 그래도 담배를 끊은 덕택에 그다지 심하진 않았다. 목구멍에 뭔가 걸리는 것 같은 불쾌감이 없었다. 나는 부엌에서 차가운 포도 주스를 마시고 한숨 돌리고 난 다음 점심 전에 나머지를 해치웠다. 블라인드를 모두 열어 제치자 왁스칠을 한 덕분에 집 안 전체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옛날 생각이 나는 촉촉한 대지 냄새와 왁스 냄새가 상쾌하게 어우러졌다.
왁스칠할 때 사용한 여섯 장의 걸레를 빨아서 밖에 넌 다음 냄비에 물을 끓여서 스파게티 국수를 삶았다. 버터를 듬뿍 넣고 백포도주와 간장을 넣었다. 오래간만에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했다. 근처 숲에서 오색 딱따구리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스파게티를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청소를 계속했다. 욕조와 세면대, 변기를 닦고 가구를 닦았다. 가구는 쥐가 손질을 잘하고 있었던 덕분에 그다지 더러운 부분이 없어 가구 닦는 스프레이만으로도 깨끗해졌다. 집 안으로 들어와 유리창의 안쪽을 닦고 청소를 끝냈다. 그리고 저녁때까지 두 시간 가량 레코드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때가 되어 쥐의 방에 새 책을 가지러 가다가 계단 옆에 있는 커다란 거울이 몹시 더러운 것을 보고 걸레와 유리용 스프레이로 닦았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왜 쥐가 이 거울만은 더럽게 내버려 두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양동이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나일론 수세미로 일단 거울을 닦아 들러붙은 기름기를 문질러 닦아내고 나서 다시 걸레로 닦았다. 거울은 양동이의 물이 새까매질 정도로 때가 껴 있었다. 절묘한 장식으로 테두리가 되어 있는 보기에도 오래된 거울이었지만 값비싼 물건 같았고, 깨끗이 닦고 나니 뿌연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일그러진 부분도 없고 흠집도 전혀 없었으며, 미리 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비춰 볼 수 있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한동안 내 몸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데는 없었다. 나는 나였고, 항상 짓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거울 속의 상(像)은 필요 이상으로 또렷했다. 거기에는 거울에 비친 상 특유의 단조로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내가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내가 거울에 비친 상이고 상으로서의 밋밋한 내가 진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오른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보았다. 거울 속의 내가 한 짓을 내가 되풀이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는 내가 진짜로 자유 의지를 갖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건지 아닌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자유 의지'라는 말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왼손의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귀를 잡았다. 거울 속의 나도 완전히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그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 의지'라는 말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단념하고 거울 앞을 떠났다. 그도 역시 거울 앞을 떠났다. 열이틀 째에 세 번째 눈이 내렸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눈은 내리고 있었다. 아주 조용하게 내리는 눈이었다. 단단하지도 않고 질퍽한 물기도 없었다. 그것은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와 쌓이기 전에 녹았다. 살며시 눈을 감는 것처럼 조용히 내리는 눈이었다.
나는 벽장에서 낡은 기타를 꺼내 와서 어렵게 줄을 조율하여 옛 곡을 쳐보았다. 베니 굿맨의 <에어메일 스페셜>을 들으면서 연습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어 벌써 딱딱하게 굳어 버린 집에서 만든 빵에 두껍게 썬 햄을 끼워 캔 맥주와 함께 먹었다.
30분쯤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양 사나이가 왔다. 눈은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방해가 된다면 다시 오지"라고 현관문을 연 채로 양 사나이는 말했다.
"아니, 괜찮아. 따분하던 참이었으니까." 나는 기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양 사나이는 전과 마찬가지로 신발의 흙을 문 밖에서 털고 나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눈 속에서는 그의 두툼한 양 가죽옷이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팔걸이에 두 손을 올려놓고 몸을 들썩거렸다.
"아직 쌓이지 않겠나?" 내가 물었다.
"아직 쌓이지 않아."
"눈에도 쌓이는 눈과 쌓이지 않는 눈이 있거든. 이건 쌓이지 않는 눈이야."
"그래?"
"쌓이는 눈은 다음 주에 내릴 거야."
"맥주도 마시겠어?"
"고맙네. 하지만 이왕이면 브랜디가 더 좋겠는데."
나는 부엌으로 가서 그를 위한 브랜디와 나를 위한 맥주를 준비해서 치즈 샌드위치와 함께 거실로 가져왔다.
"기타를 치고 있었군. 나도 음악은 좋아하거든. 악기는 아무것도 다룰 줄 모르지만 말이야."
양 사나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잘 못해. 벌써 10년 가까이나 치지 않았거든."
"그래도 좋으니까 조금만 쳐보지 그래."
나는 양 사나이가 무안할까 봐 <에어메일 스페셜>의 멜로디를 대강치고 나서 원 코러스, 애드리브 같은 것을 치려다가 소절(小節)수를 잊어버려 그만 두었다.
"잘하는데." 양 사나이는 진지하게 칭찬해 주었다.
"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겠지?"
"잘한다면. 하지만 잘하려면 귀가 잘 들어야만 하고 잘 들으면 자신이 치는 소리가 지긋지긋해지거든."
양 사나이는 "그런가?"라고 대꾸했다.
양 사나이는 브랜디를 잔에 따라서 홀짝홀짝 마셨고, 나는 캔 맥주를 따서 그대로 마셨다.
"전하라는 말은 전하지 못했지." 양 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말 하려고 온 건가?"
나무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붉은 사인펜으로 표시해 놓은 날짜까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달라졌네. 나는 몹시 화가 나 있어. 이처럼 화가 난건 난생 처음이야." 내가 말했다.
양 사나이는 브랜디 잔을 들어 손에 든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기타를 집어 들어 그 뒤판을 힘껏 난로의 벽돌에 후려쳤다. 거대한 불협화음 소리를 내며 뒤판이 박살났다. 양 사나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귀가 떨리고 있었다.
"나에게도 화를 낼 권리는 있어." 내가 말했다. 나 자신을 향해 한 말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화를 낼 권리는 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알아주기 바래. 난 당신을 좋아해." 우리는 한동안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조각난 구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보드라운 눈이었다.
나는 새 맥주를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계단 앞을 지날 때 거울이 보였다. 또 한 사람의 나도 역시 맥주를 가지러 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더크 수프>의 글루초 마르크스와 하포 마르크스처럼.
내 뒤로 거실이 비치고 있었다. 내 뒤의 거실과 거울 속의 거실은 같은 거실이었다. 소파도 카펫도 시계도 그림도 책장도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다지 멋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거실이다.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아니 뭔가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파란색 뢰벤브로이 캔을 꺼내 손에 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거울 속의 거실을 바라보고, 그리고 진짜 거실을 바라보았다. 양 사나이는 소파에 앉아서 여전히 물끄러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양 사나이의 모습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양 사나이의 모습은 거울 속에는 없었다. 아무도 없는 휑뎅그렁한 거실에 응접세트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거울 속의 세계에서 나는 외톨이었다. 등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색이 안 좋은데"라고 양 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캔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감기가 든 모양이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곳 겨울은 춥거든. 공기도 습하고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군."
"아니야"라고 내가 말했다.
"오늘은 자지 않겠어. 여기서 친구를 기다리겠어."
"오늘 온다는 걸 알 수 있나?"
"알지. 그는 오늘 밤 열 시에 여기에 올 거야." 내가 말했다.
양 사나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마스크 사이로 엿보이는 눈에 표정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늘 밤 짐을 싸서 내일은 떠날 거야. 그를 만나거든 그렇게 전해 줘. 아마 그럴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양 사나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가버리면 쓸쓸하겠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말이야. 헌데 치즈 샌드위치를 가져가도 될까?"
"그럼."
양 사나이는 종이 냅킨에 샌드위치를 싸서 주머니에 넣고는 장갑을 꼈다.
양 사나이는 돌아갈 때
"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하고 말했다.
"만날 수 있겠지"라고 내가 대꾸했다.
양 사나이는 초원의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윽고 눈이 완전히 그를 감쌌다. 그리고는 침묵만이 남았다.
나는 양 사나이의 잔에 브랜디를 2센티미터 정도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이윽고 위까지 뜨거워졌다. 그리고 30초쯤 지나자 몸의 떨림이 멎었다. 괘종시계의 소리만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마 자야 할 것이다.
나는 2층에서 담요를 가져다가 소파 위에서 잤다. 나는 사흘 동안 숲 속을 헤 매던 아이처럼 지쳐 있었다.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나는 악몽을 꾸었다. 아주 불쾌한,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기분 나쁜 꿈이었다.
10. 그리고 시간은 흘러간다.
어둠이 밀려왔다. 누군가가 거대한 쇠망치로 얼어붙은 지구를 부수고 있었다. 쇠망치는 정확히 여덟 번 지구를 내리쳤다. 지구는 깨지지 않았다. 약간 금이 갔을 뿐이었다.
여덟 시, 밤 여덟 시.
나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다. 몸이 저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군가가 나를 얼음과 함께 셰이커에 넣고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잠이 깨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눈을 뜨고 처음 얼마 동안은 마치 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서로 겹쳐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자신의 인생을 남의 인생으로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런 인물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게 생각된다.
나는 부엌에서 세수를 하고 물을 두 잔 마셨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래도 얼굴의 화끈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내 인생의 파편을 그러모았다.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내 인생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내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남에게는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도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넓은 방에 혼자 외로이 있으면 그런 느낌이 드는 법이다.
나는 세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아내가 말했듯이 결국엔 모든 것을 잃어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도 상실되어 간다. 나는 손바닥으로 내 볼을 눌러 보았다. 어둠 속에서 손 안에 느껴지는 내 얼굴은 내 얼굴 같지가 않았다. 내 얼굴의 형을 뜬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기억조차도 불확실하다. 모든 사물의 이름이 용해되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둠 속에서 여덟 시 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은 그쳤지만 여전히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완벽한 어둠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소파에 앉아서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내 손조차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난로를 꺼서 방안은 썰렁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깊은 우물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어둠의 입자(粒子)가 내 망막에 이상한 도형을 그렸다. 그려진 도형은 잠시 후에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다른 도형이 그려졌다. 수은(水銀)처럼 정지한 공간 속에서 어둠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시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겼다. 시간은 나를 날려 보냈다. 새로운 어둠이 새로운 도형을 그렸다.
시계가 아홉 시를 쳤다. 아홉 번째 종소리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침묵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야기해도 될까?"라고 쥐가 말했다.
"되고 말구."라고 내가 대답했다.
11.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들
"되고 말구"라고 나는 말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왔어." 쥐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보다시피 한가한데 뭐."
쥐는 조용히 웃었다. 그는 내 등 뒤에 있었다. 마치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왠지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야." 쥐가 말했다.
"아마 우리는 서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고는 정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나 봐."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지."
쥐는 미소 지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등을 맞대고 있더라도 그의 미소는 느낄 수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공기의 흐름이나 분위기만으로도 여러 가지 일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지만 말이다.
쥐는 말했다. "하지만 무료할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누군가가 말했었지."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여전히 머리는 잘 돌아가는군. 맞았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 소동에 관해서는 난 어지간히도 직감력이 없었지.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야. 자네들이 그처럼 많은 힌트를 줬는데도 말이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잘한 편이야."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쥐는 다시 자기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는 어지간히 신세를 지고 말았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 이외엔 방법이 없었어. 편지에도 썼듯이 말이야. 자네 말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거든."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 좀 듣고 싶어. 이대로는 납득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쥐는 "그렇겠지"라고 수긍했다.
"물론 이야기해야지. 하지만 그전에 맥주나 한잔씩 하지."
내가 일어서려는 것을 쥐가 말렸다. "내가 가져오지. 어쨌든 여기는 내 집이니까."
쥐가 어둠 속을 뚫고 머뭇거림 없이 부엌까지 가서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한 아름 꺼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방안의 어둠과 눈을 감았을 때의 어둠과는 어둠의 색깔이 조금 다르다.
쥐가 돌아와서 테이블 위에 캔 맥주를 몇 개 내려놓았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서 하나를 따서 반쯤 마셨다.
"보이지 않으니까 맥주가 아닌 것 같군"하고 나는 말했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둡지 않으면 좀 곤란하거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쥐는 "그건 그렇고"라고 말을 꺼내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빈 캔을 테이블 위에 다시 놓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쥐가 이야기를 시작하길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쥐가 남은 맥주의 양을 확인하기 위해 캔을 좌우로 흔드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의 버릇이었다.
쥐는 다시 한 번 "그건 그렇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다음 딱 하는 소리를 내며 캔 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우선, 어떻게 해서 내가 여기에 오게 됐는지부터 설명하기로 하지. 괜찮겠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에게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쥐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 땅을 산 건 1953년의 일이었어. 내가 다섯 살 때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데에 땅을 샀는지 나는 잘 몰라. 아마 미군과 관계된 루트를 통해 싼값에 불하받은 게 아닌가 싶어.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는 교통편이 말이 아니니까. 여름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눈이 쌓였다 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미군은 도로를 정비해서 레이더 기지로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지만, 결국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서 그만둔 거야. 물론 마을도 돈이 없으니까 도로 공사에 손을 댈 엄두도 못 냈지. 도로를 정비해 봤자 특별히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 그래서 이 땅은 버려진 땅이 되고 만 거야."
"양 박사는 이리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았나?"
"양 박사는 내내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은 아무데도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나는 말했다.
"맥주를 더 마시지 그래."라고 쥐는 권했다.
생각 없다고 나는 말했다. 난로를 꺼버렸기 때문에 몸속까지 얼어 버릴 것 같았다. 쥐는 맥주를 따서 혼자 마셨다.
"아버지는 이 땅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손수 길도 좀 고쳤고 집도 손질을 했지. 돈이 꽤 들었을 거야. 하지만 그 덕분에 차만 있으면 여름에는 그런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지. 난방 장치, 수세식 변소, 샤워, 전화, 비상용 자가 발전장치 등을 설치했거든. 정말 양 박사가 여기서 어떤 식으로 살고 있었는지 난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야."
쥐는 트림인지 한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냈다.
"1955년부터 1963년 무렵까지 우리는 여름이 되면 여기에 오곤 했지. 아버지, 어머니와 누나와 나, 그리고 잔일을 하는 여자 아이와 말이야. 생각해 보면 그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정상적인 시절이었어. 그렇지만, 목초지를 마을에 빌려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이곳은 마을의 양으로 가득 찼었지. 사방에 양뿐이었어. 그래서 내 여름의 기억은 항상 양과 결부되어 있었던 거야."
나는 별장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평생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부터 우리 가족은 거의 여기에 오지 않게 됐어. 집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 별장을 갖게 된 탓도 있고, 누나가 결혼해 버린 탓도 있고, 내가 가족과 서먹해지기도 했고, 아버지 회사가 한동안 복잡했고, 뭐 이런 저런 일들 때문이지.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이 땅은 다시 버림받게 된 거야. 내가 마지막으로 여기에 온 게 1967년이었던가. 그때는 혼자서 왔지. 혼자 한 달 동안 여기서 지냈어."
쥐는 이 대목에서 뭔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잠깐 입을 다물었다.
"외롭지 않았어?" 내가 물었다.
"외롭긴, 가능하면 계속 여기서 지내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 왜냐하면 여기는 아버지의 집이거든. 아버지에게 신세 지고 싶지는 않았거든."
"지금도 그렇잖아?"
"그건 그래"라고 쥐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삿포로의 돌고래 호텔 로비에서 이곳의 사진을 우연히 보았을 때 꼭 한 번 와보고 싶어진 거야. 말하자면 감상에 젖어서 말이야. 자네도 그런 때가 있겠지?"
"응"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매립되어 버린 바다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 양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거야. 등에 별 모양이 있는 꿈속의 양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그 일 알고 있지?"
"알고 있어."
"그 다음 일은 간단히 설명할게."하고 쥐는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여기서 겨울을 나고 싶어진 거야. 아버지의 집이라는 사실은 이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장비를 갖추고 이곳에 왔지.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 양을 만났겠지?"
쥐는 "맞았어."라고 말했다.
"그 뒤의 일을 이야기하는 건 정말 괴로워. 이 괴로움은 어떻게 이야기해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쥐는 두 번째의 빈 맥주 캔을 우그러뜨렸다.
"가능하면 자네가 물어 보지 않겠나? 자네도 이제 대충은 알고 있겠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도 상관없겠어?"
"상관없어."
"자네는 이미 죽은 거지?"
쥐가 대답할 때까지 무서울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불과 몇 초였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척 긴 침묵이었다. 입 속이 바싹바싹 말랐다.
쥐는 조용히 말했다. "맞았어. 나는 죽었어."
12. 시계의 태엽을 감는 쥐
"부엌의 대들보에 목을 맸어."라고 쥐는 말했다.
"양 사나이가 차고 옆에 묻어 주었지. 죽는 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더군. 만약 자네가 그걸 걱정하고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언제?"
"자네가 여기에 오기 일주일 전이야."
"그때 시계의 태엽을 감았지?"
쥐는 웃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30년에 걸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일이 겨우 시계의 태엽을 감는 일이었다니 말이야. 죽어 가는 녀석이 왜 시계의 태엽 따위를 감는 걸까? 참 이상한 일이지."
쥐가 입을 다물자 주위는 고요하니 시계 소리만이 들렸다. 눈이 그 이외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우주 속에 우리 두 사람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
쥐는 "그만둬"하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만약은 없어. 자네도 그건 알고 있을 거야. 안 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네가 일주일 일찍 여기에 왔다고 하더라도 역시 나는 죽었을 거야. 그야 좀 더 밝고 따뜻한 데서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야.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더욱 괴로울 뿐이지. 게다가 난 그런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왜 죽어야만 했던 거지?"
어둠 속에서 손바닥을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결국은 자기변호가 되고 마니까. 죽은 자가 자기변호를 하는 것처럼 꼴불견은 없다고 생각지 않나?"
"하지만 자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맥주를 더 마시지 그래."
"추워서 그래"라고 나는 말했다.
"이제 그다지 춥지 않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캔을 따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셔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이제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간단히 말하지. 자네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말이야."
"내가 말한다고 해서 도대체 누가 믿어 주겠어?"
쥐는 "그건 그렇군."하고 나서 웃었다.
"아마 아무도 믿지 않겠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말이야."
시계가 아홉 시 반을 알리는 종을 쳤다.
"시계를 멈추게 해도 될까? 시끄러워서 말이야." 쥐가 물었다.
"물론이지. 자네 시계잖아."
쥐는 일어서서 괘종시계의 문을 열고 추를 세웠다. 모든 소리와 모든 시간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양을 삼킨 채로 죽은 거야. 양이 깊이 잠들길 기다렸다가 부엌의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맨 거지. 놈은 빠져 나갈 여유도 없었어."라고 쥐는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해야만 했어?"
"정말 그러게 해야만 했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양은 완전히 나를 지배했을 테니까, 마지막 기회였지."
쥐는 다시 한 번 손바닥을 비볐다.
"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자네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내 기억과 내 자신의 나약함을 지닌 본래의 내 모습으로 말이야. 자네에게 암호 비슷한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지. 자네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구원받았나?"
"구원받았지."
쥐는 조용히 대답했다.
"요는 나약하다는 거야. 모든 것은 거기서 비롯되고 있어. 자네는 그 나약함을 이해할 수 없을 걸세."라고 쥐는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지."
쥐는 "그건 일반론이지"라고 하며 몇 번인가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일반론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사람은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나는 지금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약함이라는 것은 몸속에서 썩어 가는 거야. 마치 회저병(懷疽病)에 걸린 것처럼 말이지, 나는 10대 중반부터 줄곧 그것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언제나 초조했지. 자신의 속에서 뭔가가 썩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느낀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자네는 알겠나?"
나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마 자네는 모를 거야." 쥐가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는 그런 면이 없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그건 나약함이야. 나약함은 유전병과 같지.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스스로 고칠 수가 없는 거야. 어느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 것도 아니고, 점점 나빠져 갈 뿐이지."
"무엇에 대한 나약함이라는 거지?"
"전부 다. 도덕적인 나약함, 의식의 나약함,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나약함."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웃을 수가 있었다.
"그야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나약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나."
"일반론은 그만두지.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물론 인간은 누구나 나약해. 그러나 진정한 나약함은 진정한 강인함과 마찬가지로 드문 법이야. 끊임없이 어둠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나약함을 자네는 모를 걸세. 그리고 그런 것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거야. 모든 것을 일반론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 거리를 떠난 거야. 더 이상 타락해가는 내 모습을 남들 앞에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어. 자네도 포함해서 말이야. 혼자서 낯선 곳을 돌아다니면 적어도 남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거든. 결국은" 이라고 말하고 나서, 쥐는 한동안 어두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결국은 내가 양의 그림자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것도 그 나약함 때문이야. 나 자신이 어쩔 수가 없었어. 아마 그때 금방 자네가 와줬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야. 결심하고 산을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나는 틀림없이 그 곳으로 다시 되돌아갔을 테니까. 나약함이란 것은 그런 거야."
"양이 자네에게 무엇을 요구했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요구했어. 나의 몸, 나의 기억, 나의 나약함, 나의 모순…… 양은 그런 것들을 아주 좋아하거든. 양은 촉수를 잔뜩 가지고 있어서 말이지, 내 귓구멍이나 콧구멍에 그걸 쑤셔 넣고 빨대로 빨아들이듯이 쥐어짜는 거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지 않아?"
"그 대가는?"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지. 하기는 양이 구체적인 형태로 내게 제시해 준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야. 그래도……."
쥐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도가니 같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한 거야. 거기에 몸을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도 가치관도 감정도 고통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거야. 우주의 한 지점에 모든 생명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의 다이너미즘에 가깝지."
"그래도 너는 그걸 거부했겠지?"
"그래, 내 몸과 함께 모든 것은 매장되었어. 앞으로 한 가지만 더 하면 영원히 매장돼."
"앞으로 하나?"
"앞으로 한 가지야. 그건 나중에 자네에게 부탁하게 될 거야. 지금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우리는 동시에 맥주를 마셨다. 조금씩 몸이 따뜻해져 갔다.
"혈혹은 채찍 비슷한 것인가 보지? 양이 숙주(宿主)를 조종하기 위한"하고 내가 물었다.
"맞았어, 그것이 생기면 그때는 양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거야."
"선생님이 목표로 했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쳤어. 아마 그 도가니 속의 풍경을 견딜 수 없었겠지. 양은 그를 이용해서 강대한 권력 기구를 구축했지. 그러기 위해서 양은 그의 안으로 들어간 거야. 말하자면 일회용이지. 사상적으로 그 남자는 제로야."
"그리고 선생님이 죽은 다음에 자네를 이용해서 그 권력 기구를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군."
"그렇지."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완전히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관념의 왕국이지. 거기서는 모든 대립이 일체화 되는 거야. 그 중심에 나와 양이 있지."
"왜 거부했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 위에 소리도 없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난 나의 나약함이 좋아. 고통이나 쓰라림도 좋고 여름 햇살과 바람 냄새와 매미 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무작정 좋은 거야. 자네와 마시는 맥주라든가…."
쥐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모르겠어."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우리는 아무래도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 낸 모양이야."라고 쥐는 말했다.
"자네는 세상이 좋아져 간다고 믿고 있나?"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누가 알 수 있겠나?" 쥐는 웃었다.
"만약에 일반론의 왕국이 정말로 있다면, 자네는 거기서 임금님이 될 수 있을 거야."
"양을 빼고 말이지."
"양을 빼고."
쥐는 세 개째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빈 캔을 바닥에 놓았다.
"자네는 되도록 빨리 산을 내려가는 게 좋을 거야. 눈에 갇혀 버리기 전에 말이지. 이런 데서 겨울 한철을 나고 싶지는 않겠지. 앞으로 네댓새면 눈이 쌓이기 시작할 거고 얼어붙은 산길을 넘는 건 굉장한 일이거든."
"자네는 어떻게 할 거지?"
쥐는 어둠 속에서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제 내게는 지금부터라는 건 없어. 겨울 동안에 사라지는 일 뿐이지. 겨울 한철이라는 것이 얼마나 긴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겨울은 한철이니까. 자네를 만나서 반가웠네. 가능하면 더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J가 안부 전하더군."
"내 안부도 전해 주게."
"그녀를 만났어."
"어땠어?"
"잘 지내더군. 아직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어."
"그럼 아직 결혼하지 않았나 보지?"
"응"하고 나는 대답했다.
"끝났는지 끝나지 않았는지 자네에게 묻고 싶어 하던데."
"끝난 거야."하고 쥐가 말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끝낼 수는 없었더라도 어쨌든 끝난 거야.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생이었어. 그러나 물론 자네가 좋아하는 일반론을 빌리면 누구의 인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그렇지?"
"맞아"라고 나는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더 물어 보겠네."
"물어 봐."
"우선 한 가지는 양 사나이에 관한 거야."
"양 사나이는 좋은 친구야."
"내가 여기에 왔을 때 양 사나이는 자네였지?"
쥐는 목을 돌리며 뚝뚝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의 몸을 빌렸었지. 자네는 훤히 알고 있었군?"
"도중에 알았어. 처음에는 몰랐지." 내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네가 기타를 박살냈을 때는 놀랐다고. 자네가 그렇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데다가 그건 내가 처음으로 산 기타였거든. 싸구려지만 말이야."
"미안해"하며 나는 사과했다.
"자네를 놀라 게 해서 끌어내려고 했던 것뿐이야."
"됐어. 내일이면 어차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걸. 뭐." 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은 자네의 여자 친구에 대해서겠지?"
"맞아."
쥐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손을 비비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 대해선 가능하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 그녀는 계산 밖의 요소였거든."
"계산 밖?"
"응, 나는 아는 사람들끼리 파티를 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그 여자가 끼어들었지. 우리는 그 여자를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자네도 알다시피 그 여자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를 끌어당기는 능력 말이야. 하지만 여기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어. 이곳은 그녀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 곳이거든."
"그녀는 어떻게 됐지?"
"그녀는 괜찮아. 잘 있어. 다만 이제 그녀는 자넬 매료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쥐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사라졌어. 그녀의 안에서 뭔가가 사라져 버렸어."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 기분은 이해해"라고 쥐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건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사라질 거였어. 나나 자네나 그리고 여러 여자들 안에서 뭔가가 사라져 가듯이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가 봐야겠어. 너무 오래 있을 수는 없어. 아마 또 어딘 가에서 만날 수 있겠지." 쥐가 말했다.
나는 "그럴 테지"라고 말했다.
"가능하면 좀 더 밝은 데에서 여름에 만나면 좋을 텐데"라고 쥐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내일 아침 아홉 시에 괘종시계를 맞추고, 그리고 괘종시계 뒤에 나와 있는 코드를 서로 연결해 주었으면 좋겠네. 초록색 코드는 초록색 코드와 빨간색 코드는 빨간색 코드와 연결하면 돼. 그리고 아홉 시 반에 여기를 나가서 산을 내려가 주게. 열두 시에 우리끼리 간단한 모임이 있거든. 알겠지?"
"그렇게 할께."
"자네를 만나서 반가웠어."
순간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잘 있게." 쥐가 말했다.
"또 만나자고." 내가 말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쥐는 구두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가서 문을 열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은 없고 천천히 스며드는 것 같은 냉기였다.
쥐는 문을 연 채 잠시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방안을 보는 것도 아니고,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아닌 전혀 다른 뭔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의 손잡이나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간의 문을 닫듯이 찰칵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뒤에는 침묵만이 있었다. 침묵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13. 초록색 코드와 빨간색 코드・얼어붙은 갈매기
쥐가 가고 나서 잠시 후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오한이 밀려왔다. 욕실에서 몇 번이나 토하려고 했지만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스웨터를 벗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한과 고열이 번갈아 찾아왔다. 방은 그때마다 넓어졌다 좁아졌다 했다. 담요와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고, 땀이 식자 몸을 죄는 듯한, 추위로 변했다.
"아홉 시에 시계를 맞추고 "라고 누군가가 내 귓전에 속삭였다.
"초록색 코드는 초록색 코드에 빨간색 코드는 빨간색 코드에 아홉 시 반에 여기를 나가서."
"괜찮아. 잘 되어가는 거야." 양 사나이가 말했다.
"세포가 바뀌어가는 거예요"라고 아내는 말했다. 그녀는 흰 레이스가 달린 슬립을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무의식 적으로 목이 10센티미터나 좌우로 흔들렸다.
빨간색 코드는 빨간색 코드에 초록색 코드는 초록색 코드에.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여자 친구는 말했었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겨울의 육중한 파도다. 남빛 바다와 목덜미처럼 하얀 파도. 얼어붙은 갈매기.
나는 밀폐된 수족관의 전시실에 있다. 고래의 페니스가 여러 개 진열되어 있고 너무 더워 숨이 가쁘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야만 한다.
"안 됩니다. 한 번 열면 다시는 닫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됩니다." 운전사가 말했다.
누군가가 창을 연다. 몹시 춥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내 살갗을 찢는다.
"당신은 고양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정어리"라고 나는 대답한다.
"아니에요, 정어리가 아니에요"라고 운전사가 말한다.
"이름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이름이 곧 바뀝니다. 당신은 자신의 이름조차도 모르지 않습니까?"
몹시 춥다. 게다가 갈매기의 수가 너무 많다.
"평범함은 머나먼 길을 걷는다."라고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초록색 코드가 빨간색 코드고, 빨간색 코드가 초록색 코드지."
"전쟁에 대해선 무슨 말을 들었나?"라고 양 사나이가 물었다.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가 <에어메일 스페셜>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찰리 크리스천이 긴 독주곡을 연주했다.
그는 크림색 소프트 모자(펠트 천으로 남든 중절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것이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이미지였다.
14. 불길한 커브 길을 다시 찾다
새가 울고 있었다.
햇빛이 블라인드 틈새를 통해 줄무늬 모양으로 침대에 내리쬐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손목시계는 일곱 시 삼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담요와 셔츠는 물을 한 양동이 쏟아 부은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는 아직 멍하니 흐렸지만 열은 떨어졌다. 창밖은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새 아침 햇살 아래서 초원은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피부에 와 닿는 냉기의 감촉이 상쾌했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하룻밤 사이에 안색이 아주 창백해지고 볼의 살이 쏙 빠졌다. 나는 세이빙크림을 여느 때의 세 배나 얼굴 전체에 바르고 정성껏 면도를 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소변을 보았다.
소변을 보고 나자 힘이 쭉 빠져 목욕 가운을 걸친 채 15분 동안이나 긴 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
새가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눈이 녹기 시작하여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가끔 멀리에서 철썩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나는 여덟 시 반에 포도 주스를 두 잔 마시고 사과 한 개를 통째로 먹었다. 그리고 짐을 챙겼다. 지하실에서 백포도주 한 병과 허쉬초코렛 큰 거 한 개 그리고 사과 두 개를 가져 왔다.
짐을 챙기고 나자 방안에 서글픈 공기가 감돌았다. 모든 것이 끝나려고 한다. 나는 손목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괘종시계의 세 개의 분동을 감아올리고, 바늘을 아홉 시에 맞췄다.
그리고 무거운 시계의 뒤로 돌려 나와 있는 네 개의 코드를 연결했다. 초록색 코드는 초록색 코드에. 그리고 빨간색 코드는 빨간색 코드에.
코드는 송곳으로 뚫은 네 구멍에서 나와 있었다. 위쪽에 한 쌍, 아래쪽에 한 쌍. 코드는 지프 안에 있던 것과 똑같은 철사로 단단히 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괘종시계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나서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잘되면 좋을 텐데"하고 나는 말했다.
"잘되면 좋을 텐데"하고 상대방도 말했다.
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초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다.
발밑에서 눈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다. 발자국 하나 없는 초원은 은빛 화구호(火口湖)처럼 보였다. 뒤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한 줄로 집까지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은 놀랄 정도로 삐뚤어져 있다. 똑바로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멀리 떨어져서 보니 집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이 갑갑하다는 듯이 몸을 비틀자 지붕에서 눈이 흔들려 떨어졌다. 눈덩이가 소리를 내며 지붕의 경사를 미끄러져 땅에 떨어지며 부서졌다.
나는 계속 초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길고 긴 자작 나무숲을 빠져 나와 다리를 건너고, 원추형 산을 따라서 빙 돌아 진땀나는 커브 길로 나왔다.
커브 길에 쌓인 눈은 다행히 얼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며 눈을 밟아도 나락(奈落) 밑바닥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 같은 꺼림칙한 기분에서 벗어 날 수는 없었다. 나는 조금씩 허물어지는 벼랑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그 커브 길을 끝까지 돌았다.
겨드랑이 밑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치 어렸을 때 꾸었던 악몽 같았다. 오른쪽에 평야가 보였다. 평야도 역시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를 주니타니 강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기적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맑게 갠 날씨였다.
나는 한숨 돌리고 나서 배낭을 짊어지고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음 모퉁이를 돌자 본 적이 없는 새 지프가 서 있었다.
지프 앞에는 그 검은 옷의 비서가 서 있었다.
15. 열두 시의 모임
"기다리고 있었소."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그래 봤자 20분쯤이지만 말이야.
"어떻게 알았지요?"
"장소 말이오? 아니면 시간?"
"시간 말입니다." 내가 배낭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내가 대체 어떻게 해서 선생님의 비서가 됐을 것 같소? 노력? IQ? 아니면 요령? 설마. 내게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야. 자네의 말을 빌자면 육감이지." 남자는 베이지색 다운 재킷에 스키용 바지를 입고 초록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와 선생님 사이에는 공통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지. 예를 들면 이성이라든가 논리라든가 윤리를 초월한 부분에서."
"있었다고?"
"선생님은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소. 아주 훌륭한 장례식이었지. 지금 도쿄는 선생님의 후계자를 뽑느라고 야단법석이네. 평범한 친구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지. 수고스럽게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웃옷 주머니에서 은빛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우겠소?"
"아니오."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당신은 잘했어. 기대 이상이었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놀랐소. 하기는 당신이 궁지에 몰리면 조금씩 힌트를 줄 생각이었지만 말이야. 하긴 양 박사와의 만남은 아주 절묘했어. 가능하다면 내 밑에서 일하게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처음부터 여기를 알고 있었군요?"
"당연하지. 도대체 나를 뭐로 아는 거요?"
"질문해도 됩니까?"
"좋소. 간략하게 하시오."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이 말했다.
"왜 처음부터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은 거죠?"
"당신이 자발적으로 자유 의지에 의해 여기에 와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지. 뿐만 아니라 그를 구렁텅이에서 끌어내 주기를 바랐던 거요."
"구렁텅이?"
"정신적인 구렁텅이지. 사람은 양에게 홀리게 되면 일시적으로 얼이 빠지게 되는 법이거든. 말하자면 기억 상실증 비슷한 거지. 거기서 그를 끌어내 주는 것이 당신의 임무였던 거야. 그런데 자네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여야 했네. 어떤가, 간단하지?"
"글쎄."
"근원을 밝히면 모든 게 간단하네.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 중요한 거야. 컴퓨터는 인간의 감정의 흔들림까지는 계산해 주지 않거든. 말하자면 수작업(手作業)이지. 그런데 애써서 짠 프로그램이 생각대로 진행되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고 할 수 있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건 그렇고"라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은 결말로 향하고 있어. 나의 계산과 당신의 순진함 덕분에 말일세. 나는 그를 얻게 되는 거야. 맞지?"
"그런 것 같군요. 그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열두 시 정각에 모임이 있다고 했거든요." 내가 말했다.
나와 남자는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열 시 사십 분이었다.
남자는 말했다. "슬슬 가봐야겠군.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말이야. 당신을 지프로 아래까지 데려다 주겠소. 그리고 이건 당신이 일한 대가요."
남자는 가슴의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금액을 보지 않고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소?"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자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당신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소. 그리고 당신 친구는 회사 문을 닫았더군. 안타까운 일이야. 전도유망했는데 말이야. 광고 산업은 앞으로 더욱 잘될 텐데. 당신 혼자서 해도 괜찮을 것 같군."
나는 "당신은 미쳤어요."라고 말했다.
"언젠가 또 만나세"라고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커브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어리는 잘 있습니다."라고 운전사는 지프를 운전하며 말했다.
"통통하게 살도 쪘어요."
나는 운전사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 도깨비 같은 차를 몰고 있을 때와는 딴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선생님의 장례식이나 고양이를 돌본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나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열한 시 반에 지프가 역에 도착했다.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노인 한 사람이 삽으로 로터리의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말라빠진 개가 그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고마워요"라고 나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천만에요" 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의 전화번호 시도해 보셨어요?"
"아니오, 그럴 틈이 없었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통화가 되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마 바쁘신가 보죠." 내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몸조심 하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내가 다시 인사를 했다.
상행 열차는 열두 시 정각에 출발한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고, 열차의 승객도 나를 포함해서 네 사람뿐이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를 안심시켰다. 어쨌든 나는 삶이 있는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설사 그것이 따분함으로 가득 찬 평범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세계인 것이다.
나는 초코렛을 먹으면서 발차를 알리는 벨소리를 들었다. 벨이 울리고 나서 열차가 덜커덩 소리를 냈을 때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나는 창을 힘껏 밀어 올리고 목을 밖으로 내밀었다. 폭발음은 10초 간격으로 두 번 들렸다. 열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3분쯤 뒤에 원추형 산언저리에서 한 줄기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열차가 오른쪽으로 커브 길을 돌 때까지 30분 동안이나 그 연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나는 강을 따라서 하구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30미터 정도 되는 모래사장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난생 처음 그렇게 울어 보았다.
두 시간 동안 울고 나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고운 모래를 털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걷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파도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모든 것이 끝났군. 모든 것이 끝났어." 양 박사가 말했다.
"끝났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자네에게 감사해야만 하겠지."
"저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아니야"라며 양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이제 살기 시작하지 않았나."
나는 "그렇군요."하고 말했다.
방을 나올 때, 양 박사는 책상에 엎드려서 소리를 죽인 채 울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끝까지 알 도리가 없었다.
"행선지는 말하지 않고 어딘가로 가버렸습니다. 왠지 몸이 안 좋아 보이더군요." 돌고래 호텔의 지배인은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됐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짐을 받아 전에 머물렀던 방에 묵었다. 방의 창을 통해서는 전과 마찬가지로 정채 불명의 회사가 보였다. 가슴이 큰 여사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젊은 남자사원 둘이 담배를 피우며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숫자를 불러주고, 또 한 사람이 자를 사용해 커다란 종이에 꺾은 선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회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은 전과 똑같았다. 여섯 시가 되자 모두 돌아가고 건물은 캄캄해졌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보았다. 산 위의 폭발 사고에 관한 뉴스는 없었다. 맞아, 폭발 사고는 어제 일어난 일이었지. 도대체 나는 하루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한 걸까? 생각해 내려고 하면 머리가 아팠다.
어쨌든 하루가 지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루하루 나는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언젠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나는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끄고 신발을 신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혼자서 얼룩투성이인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얼룩은 먼 옛날에 죽어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간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
색색의 네온이 방안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귓전에서 손목시계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계를 풀어 방바닥에 집어 던졌다.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이라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나는 스웨터를 입고 거리로 나가 제일 먼저 눈에 띈 디스코텍에 들어가서 멈추지 않고 계속 연주되는 솔 뮤직을 들으면서 온더록스를 더블로 석 잔 마셨다. 그러자 정신이 좀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들 내가 정신 차리길 원한다.
돌고래 호텔로 돌아오자 지배인은 긴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의 마감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내일 아홉 시에 떠나요." 내가 말했다.
"도쿄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니오."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전에 들를 데가 있어요. 여덟 시에 깨워 주시겠어요?"
"그러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원, 별 말씀을." 그리고 지배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통 식사를 안 하세요. 저대로 두면 돌아가시겠어요."
"괴로운 일이 있었거든요."
"알아요. 그러나 아버지는 저한테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았어요."라고 지배인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아마 이제 모든 게 잘될 거예요. 어느 정도 시간만 지나면 말이지요."하고 내가 말했다.
이튿날에 점심은 비행기 안에서 먹었다. 비행기는 하네다(羽田)에 들렀다가 다시 한 번 하늘을 날았다. 왼쪽에는 계속 바닷가 펼쳐지고 있었다.
J는 여전히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 여자아이는 꽃병의 물을 갈기도 하고 테이블을 닦기도 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이 거리로 돌아오자 아직 가을이었다.
제이스 바의 창으로 보이는 산은 곱게 단풍이 들어있었다. 나는 문도 열지 않은 가게의 카운터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땅콩 껍질을 한 손으로 벗기자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그렇게 기분 좋게 껍질이 벗겨지는 땅콩을 사는 일도 쉽지가 않아"라고 J가 말했다.
"그래?" 나는 땅콩을 씹으면서 대꾸했다.
"그런데 또 휴가야?"
"그만뒀어."
"그만둬?"
"이야기하자면 길어."
J는 감자 껍질을 다 벗기고 나서 큰 소쿠리에 담아 씻은 다음 물기를 뺏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몰라. 내 퇴직금에다 공동 경영권의 매입분이 조금 들어올 거야. 대단한 돈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리고 이런 것도 있지."
나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금액은 보지도 않고 J에게 건네주었다. J는 그것을 보고 나서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금액이네. 왠지 수상한데."
"바로 그거야."
"이야기하자면 길어진다 이거지?"
나는 웃었다.
"그걸 맡길 테니까 가게의 금고에 넣어 두라고."
"금고 같은 게 어디 있어?"
"금전 등록기 있잖아."
"은행의 금고에 넣어 둘게." J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할 건데?"
"이봐, J. 이 가게로 옮길 때 돈이 좀 들었지?"
"들었지"
"빚은?"
"좀 있어."
"그 수표로 빚을 갚을 수 있겠어?"
"오히려 돈이 남아. 하지만."
"어때. 그렇게 하고 나와 쥐를 이 가게의 공동 경영자로 해주지 않겠어? 배당금도 이자도 필요 없어. 그저 이름만이면 돼."
"하지만 그러면 너무 미안하잖아."
"됐어. 그 대신 나와 쥐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때는 여기서 받아들여 주면 되는 거야."
"이제까지도 늘 그렇게 해왔잖아."
나는 맥주잔을 든 채 뚫어지게 J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아.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
J는 웃으며 앞치마의 주머니에 수표를 쑤셔 넣었다.
"자네가 처음 취했을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 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13년 전."
"벌써 그렇게 됐나?"
J는 전에 없이 30분 동안이나 옛날이야기를 했다. 드문드문 손님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일어섰다.
"오자마자 일어서는 거야?" J가 말했다.
"예의바른 놈은 오래 앉아 있지 않는 법이거든" 하고 나는 말했다.
"쥐를 만났지?"
나는 카운터에 두 손을 얹은 채 심호흡을 했다.
"만났어."
"그것도 설명하려면 긴 이야기란 말인가?"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을 만큼 긴 이야기야."
"간단하게 얘기할 수도 없어?"
"간단하게 얘기하면 의미가 없어진다고."
"잘 지내던가?"
"잘 있었어. 만나고 싶어 하더군."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
"그럼, 공동 경영자니까. 그 돈은 나와 쥐가 번거야."
"기분이 아주 좋은데."
나는 카운터의 의자에서 내려와 그리운 가게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런데 공동 경영자로서 핀볼과 주크박스가 있었으면 싶은데."
"다음에 올 때까지 들여놓을게." J는 말했다.
나는 강을 따라서 하구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50미터 정도 되는 모래사장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난생 처음 그렇게 울어 보았다. 두 시간 동안 울고 나서 겨우 일어설 수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걷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파도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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