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대학시절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작가는 내게 그렇게 말하였다. 내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일종의 위안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뭔가를 쓰게 되고 보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고 만다. 내게, 쓸 수 있는 영역이란 너무나도 제한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하여 뭔가를 쓸 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쓸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8년간 나는 이러한 딜레마를 계속 써왔다. ― 8년. 긴 세월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자세를 계속 갖고 있는 한, 늙는 다는 것이 그렇게 고통은 아니다. 이것은 일반론이다.
스물을 조금 넘겼을 적부터 쭉, 나는 그런 삶의 자세로 살아가려 노력해 왔다. 덕분에 남들로부터 적잖이 뼈아픈 타격을 받고, 속고, 오해 당하고, 또한 그와 동시에 수많은 신기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인간들이 다가와서는 내게 이야기를 걸었고, 마치 다리를 건너듯 소리를 내며 내 위를 지나갔으며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20대 후반의 해를 맞이하였다.
지금 나는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야기를 마친 시점에서도 어쩌면 사태는 전혀 변화하지 않은 상태로 있게 될 지도 모른다. 결국, 문장을 쓰는 일은 자기요양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요양을 향한 작은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내가 정직해 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직한 말들은 깊은 어두움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변명을 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여기서 내가 한 이야기들은 현재의 내게 있어서 베스트다. 덧붙일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잘 되면 훨씬 나중에 몇 년이나 몇 십 년 후에, 구제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때,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오고, 나는 더욱 아름다운 말로 세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리라.
☆
나는 문장에 대하여 많은 것을 데릭 허트필드에게서 배웠다. 거의 전부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허트필드 자신은 모든 의미에서 불모의 작가였다. 읽어보면 안다. 문장은 읽기 어려운데다가 줄거리는 엉터리이며 테마는 치졸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장을 무기 삼아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비범한 작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헤밍웨이, 핏제럴드, 등등 그의 동시대인에 속하면서도 그의 그 전투적인 자세는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단, 유감스럽게도 그 허트필드는 최후까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었다. 결국, 불모라고 한 건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8년 그리고 2개월, 그는 그 불모의 싸움을 계속하였고, 그리고 죽었다. 1938년 6월의 어느 맑게 개인 일요일 아침, 오른손에 히틀러의 초상화를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우산을 펼친 채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 내린 것이다. 그가 살아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도 대단한 화제가 되지는 못하였다.
내가 절판이 된 허트필드의 최초의 한 권을 손에 넣은 것은, 사타구니에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 있었던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내게 그 책을 준 삼촌은 3년 후 장암을 앓았고, 몸 전체가 산산조각으로 찢기어, 몸의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으로 플라스틱 파이프를 쑤셔 넣은 채,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마치 교활한 원숭이처럼, 지독한 적갈색으로 변한 채 오그라들어 있었다.
☆
내게는 도합 세 명의 삼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상하이의 교외에서 죽었다. 종전 후 자신이 묻은 지뢰를 밟았던 것이다. 단 한사람 살아남은 삼촌은 마술사가 되어 전국의 온천지를 돌아다니고 있다.
☆
허트필드는 좋은 문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장을 쓴다는 작업은 즉,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고 자[척도]이다」(「기분 좋은 게 뭐가 나쁘지?」1936년)
내가 한손에 자를 들고 조심조심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해였고, 그때로부터 이미 15년이나 지났다. 15년에 걸쳐서 나는 참으로 다양한 것들을 내던져 왔다. 마치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가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화물을 내던지고, 좌석을 내던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엾은 스튜어드를 내던지는 것처럼, 15
년 동안 나는 있는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그 대신 거의 아무 것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그것이 과연 바른 일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나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편해진 건 확실하지만,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려 하는 때에 대체 내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두렵다. 나를 태우고 난 후에는 뼈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어두운 마음을 가진 자는 어두운 꿈밖에는 꾸지 못한다. 더욱 어두운 마음은 꿈조차 꾸지 않는다.」죽은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밤, 내가 최초로 한 일은 팔을 뻗어 그녀의 눈꺼풀을 슬며시 덮어주는 것이었다. 내가 눈꺼풀을 덮음과 동시에 그녀가 79년간 품어온 꿈은 마치 포도(鋪道)에 내린 여름날의 지나가는 비처럼 조용히 사라졌으며 뒤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
한 번 더 문장에 대하여 쓴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내게 있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한 달 걸려서 한 줄도 못 쓰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삼일 밤 삼일 낮을 쉬지 않고 써놓고 보니 그것들이 모두 엉뚱한 것들이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쓴다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비기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십대였을 때였든가, 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곤 일주일 정도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던 적이 있다. 조금만 센스를 발휘하면 세계는 내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하고 시간은 그 흐름을 바꾸는........그런 느낌이었다.
그것이 함정임을 알아차린 것은 불행하게도 훨씬 뒤의 일이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한 줄의 선을 긋고 왼쪽에는 그 동안 내가 얻은 것을 적고, 오른쪽에는 잃은 것들을 적어 넣었다. 잃어버린 것들, 짓밟아 버린 것들, 내버린 것들, 희생으로 삼은 것들, 배반한 것들……. 나는 그것들을 끝까지 계속하여 쓸 수 없었다.
우리가 인식하고자 힘쓰는 것들과 실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들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기다란 자를 가지고서도 그 길이를 모두 잴 수는 없다. 내가 여기에 써넣을 수 있었던 것들은 단순한 리스트이다. 소설이나 문학이 아니며, 예술도 아니다. 한가운데에 한 줄의 선이 그어진 한 권의 그냥 노트이다. 교훈이라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예술이나 문학을 원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인이 쓴 것을 읽으면 된다. 진정한 예술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노예제도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이 그러했듯이, 노예들이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고, 그리고 그 동안 시민들은 지중해의 태양이 내리쬐는 아래에서 시 읊기에 몰두하고, 수학을 연구한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새벽 3시에 잠들어 고요해진 부엌의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유의 인간에게는 이 만큼의 문장을 쓸 재주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나다.
2
이 이야기는 1970년 8월 8일 날 시작하여, 18일후, 즉 같은 해 8월 26일에 끝난다.
3
「부자새끼들 다 엿 먹어라」
쥐는 카운터에 두 손을 짚은 채로 나를 보고는 우울한 듯이 그렇게 소리쳤다. 어쩌면 쥐가 소리를 지른 상대는 내 뒤에 있는 커피밀이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나와 쥐는 카운터 바로 옆자리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나를 향하여 소리를 지를 필요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이건, 큰 소리를 내고 나자 쥐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만족한 얼굴로 맥주를 맛나게 마셨다. 단, 주위에는 쥐의 큰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곤 한사람도 없었다. 좁은 가게는 손님들로 가득하였으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할 것 없이 비슷한 꼴로 큰소리를 서로 내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침몰직전의 여객선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진드기야」쥐는 그렇게 말하고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새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아무 것도 없어. 얼굴이 부자 비스 구리한 새끼들을 보면 말이지, 속에서 신물이 넘어온단 말이야」 나는 얇은 맥주잔 끄트머리에 입술을 댄 채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고 카운터에 올려놓은 두 손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모닥불을 쬐기라도 하듯이 뒤집어 가며 몇 번이고 세심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단념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손가락 열 개를 순서대로 찬찬히 점검해보기 전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한여름 내내, 나와 쥐는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25미터짜리 풀장에 하나 가득할 만큼의 맥주를 마시고, 「제이스 바」바닥 하나 가득히 5센티미터 두께로 땅콩 껍질을 어질러 놓았다. 그리고 그 여름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을 만큼, 지루한 여름이었다.
「제이스 바」의 카운터에는 담뱃진으로 누렇게 뜬 한 장의 판화가 걸려 있었고, 어쩌면 좋을지 모를 만큼 지루해졌을 때면, 나는 몇 시간이고 질리는 기색도 없이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마치 로르샤흐 테스트(Rorschach Test -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로르샤흐가 고안해낸 그림을 이용한 심리상태(complex)진단법, 譯者註)에서 사용되는 것 같은 그 그림은 내게는 마주 앉은 두 마리 녹색 원숭이가 공기가 거의 빠진 두 개의 테니스공을 주고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바텐더인 제이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나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게 보이네, 라고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뭐를 상징하고 있는 걸까?」나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왼쪽 원숭이가 너고, 오른쪽이 나지. 내가 맥주병을 던지면 네가 술값을 던져 보내는 거야」
나는 감탄하여 맥주를 마셨다.
「속에서 신물이 넘어와」
쥐는 한바탕 손가락들을 쳐다보고 나자 그렇게 되풀이하였다.
쥐가 부자들 욕을 한 건 지금 시작된 일이 아니며, 또 실제로 그는 부자들을 퍽 미워하기도 하였다.
쥐네 집도 상당한 부자였지만, 내가 그것을 지적할 적이면 쥐는 언제나 「내 탓이 아니야」라고 말하였다. 때때로(대개는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내지는 그와 비슷한 경우이지만), 「아니야, 네 탓이기도 해」고 내가 말하고는, 그렇게 말한 후에는 반드시 기분이 안 좋아 지곤 하였다. 쥐의 변명에도 일리는 있었기 때문이다.
「왜 부자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니?」
그날 밤 쥐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거기까지 진도가 나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모른다고 하기라도 하듯이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확실히 말해서 말이지, 부자들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야. 회중전등하고 자가 없으면 자기 엉덩이도 못 긁는 위인들이지」
확실히 말해서, 라는 것이 쥐의 입버릇이었다.
「그래?」
「응. 그 새끼들은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생각하지를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늉을 할뿐이지…….왜 그렇다고 생각하니?」
「글쎄?」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물론 부자가 되려면 조금은 머리가 필요하지만, 계속 부자로 있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 없거든. 인공위성에 휘발유가 필요 없는 거하고 똑 같지. 뱅글뱅글 똑 같은 데를 돌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말이지, 나는 안 그래, 너도 달라. 그렇지?」
「아아」
「그런 거야」
쥐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자 주머니에서 화장지를 꺼내어 심심한 듯이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쥐가 대체 얼마만큼 진지한 것인지를 나는 잘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죽어.」나는 시험 삼아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건 그래. 모두 언젠가는 죽지. 그렇지만 말이야 그때까지 50년은 살아야 하는 거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50년 사는 거는 확실히 말해서 아무 생각도 안 하면서 5천년 사는 것보다 훨씬 피곤해. 그렇지?」
그의 말대로 였다.
4
내가 쥐를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봄이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간 해였고, 두 사람 모두 꽤나 취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 어떤 사정으로 우리가 새벽 4시가 좀 지난 시각에 쥐의 검정 피아트 600에 함께 타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공통의 친구라도 있었던 것이리라.
여하튼 우리는 형편없이 취해 있었으며 게다가 속도계의 바늘은 80 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보기 좋게 공원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철쭉꽃을 심어놓은 정원을 짓밟고, 돌기둥에 있는 힘껏 자동차를 부딪치고도 상처하나 나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요행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충격으로부터 깨어나 부서진 자동차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보니 피아트의 보닛 뚜껑은 10미터 정도 앞에 있는 원숭이 우리 있는 곳까지 날아가 있었고, 자동차 코끝 정확히 돌기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갑작스레 잠으로부터 깬 원숭이들은 무척 화를 내고 있었다.
쥐는 스티어링 휠에 두 손을 얹어 놓은 채 몸을 접기라도 하듯이 구부리고 있었으나 어디를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대시 보드 위에 한 시간 전에 먹은 피자 파이를 토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자동차 지붕위로 올라가 선 루프를 통하여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괜찮냐?」
「으응, 근데 좀 많이 마셨나보다. 오바이트를 하다니」
「나올 수 있겠니?」
「좀 끌어 올려 주라」
쥐는 엔진을 끄고 대시 보드 위에 놓인 담뱃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천천히 내 손을 잡고는 자동차 지붕위로 올라왔다. 우리는 피아트 지붕 위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로 밝아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몇 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왜인지 나는 리처드 버튼이 주연한 전쟁영화를 떠올렸다. 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야, 우리 재수 좋지」 5분 정도 지난 후, 쥐가 그렇게 말하였다.
「좀 봐라. 상처 하나 없쟎냐. 이거 믿을 수 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차는 완전히 갔군.」
「신경 쓸 거 없어. 차는 다시 사면되지만 재수야 돈으로는 못 사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는 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자니?」
「그런 것 같아.」
「다행이다.」
쥐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불만스럽다는 듯이 몇 번쯤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재수가 좋아」
「그래」
쥐는 테니스화의 뒤꿈치로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꽁초를 원숭이 우리 있는 곳을 향하여 손가락으로 퉁겨 날려 보냈다.
「야, 우리 두 사람이서 팀을 하나 만들래? 뭐든지 아주 잘 될 거야」
「제일 처음 뭐를 하지?」
「맥주 마시자」
우리는 근처 자동판매기에서 캔 맥주를 6개 사들고 바다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는 모래바닥 위에 누워 그것을 다 마셔버리고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근사한 날씨였다.
「나를 부를 때는 쥐라고 하면 되」
「왜 그런 이름이 붙었니?」
「잊어버렸어. 꽤 옛날 일인데. 처음에는 그렇게 불리니까 기분 나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뭐든지 익숙해져 버리지」
우리는 빈 맥주 캔을 모두 바다로 내던져 버리고는 제방에 기대어 머리 위로부터 더플코트를 뒤집어쓰고 한 시간 정도 잤다. 잠이 깨었을 때, 일종의 이상하기까지 한 생명력이 내 온몸에 넘쳐나고 있었다.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100킬로라도 뛸 수 있겠어」내가 쥐에게 말하였다.
「나두야」쥐가 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해야만 했던 일은, 공원의 보수비를 이자 붙은 3년 할부로 시청에 지불하는 것이었다.
5
쥐는 엄청나게 책을 읽지 않는다. 그가 스포츠 신문과 디렉트 메일 이외의 활자를 읽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가끔씩 시간 때우기로 읽고 있는 책을 그는 언제나 마치 파리가 파리채를 바라보기라도 한 양 진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책 같은 걸 읽니?」
「왜 맥주 같은 걸 마셔?」
나는 초에 절인 전갱이와 야채샐러드를 한입씩 번갈아 먹어가며 쥐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되물었다.
쥐는 그 질문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였다. 5분 정도 지나 그가 입을 열었다.
「맥주의 좋은 점은 전부 소변이 되서 몸 밖으로 나와 버린다는 점이지. 원 아웃 1루 더블 플레이. 아무것도 남지를 않거든」
쥐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먹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왜 책만 읽냐?」
나는 전갱이의 마지막 조각을 맥주와 함께 삼키고 나서 접시를 치우고는 옆에 놓아두었던 읽고 있던 「감정교육」을 손에 들고 펄럭펄럭 페이지를 넘겼다.
「플로베르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이지」
「살아있는 작가의 책은 안 읽어?」
「살아있는 작가는 아무 가치도 없어」
「왜?」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대개의 일들이 용서될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나는 카운터 안에 놓인 포터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루트 66」의 재방송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하였다. 쥐는 다시 한 번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럼 산 사람은 어때? 대개의 일들을 용서할 수 없는 거야?」
「글쎄,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어. 하지만 그런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용서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제이가 와서는 우리 앞에 새 맥주 두병을 놓고 갔다.
「용서할 수 없다면 어쩔래?」
「베게라도 끌어안고 자야지」
쥐는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기하다. 나는 잘 이해가 안 돼」
쥐는 그렇게 말하였다.
내가 쥐의 술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으나 그는 아직 몸을 웅크린 채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게 작년 여름 이었어」쥐가 그렇게 말하였다.
「제목이랑 작가랑 다 잊어 버렸지. 왜 읽었는지도 잊어버렸어. 하여간 여가가 쓴 소설이었지. 주인공은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이고 30살 정도의 여자였는데, 자기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떤 병?」
「잊어버렸는데, 암이나 뭐 그런 거였어. 그 밖에 불치의 병이 있니?.……. 그래서 말이야 그 여자가 바닷가 피서지에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오나니를 하지. 목욕탕, 숲 속, 침대 위, 바다 속이라든지 정말 다양한 장소에서 말이지」
「바다 속에서?」
「응……. 믿을 수 있니? 왜 그런 일까지 소설에 쓰는 걸까? 달리 소설에 쓸 일은 얼마든지 있는 거 아니니.」
「글쎄」
「난 질색이다, 이런 소설은. 토가 나오려고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면 전혀 다른 소설을 쓰겠다.」
「예를 들면?」
쥐는 맥주잔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하였다.
「이런 건 어떠냐? 내가 타고 있는 배가 태평양 한가운데서 침몰하는 거야. 거기서 나는 부표에 매달린 채로 별을 바라보며 혼자 밤바다 위에 떠있는 거야.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밤이지. 그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역시 부표에 매달린 젊은 여자가 헤엄쳐 오는 거야」
「예쁜 여자니?」
「거야 당연하지」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딘지 모르게 유치해」
「글쎄 들어봐. 그리고는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바다 위에 둥둥 뜬 채로 세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취미라든지, 함께 잔 여자가 몇 명인지, 텔레비전 프로, 어제 꾼 꿈에 대해서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말이지. 그리고 둘이서 맥주를 마시지」
「야 잠깐만. 대체 어디에 맥주가 있다는 거야」
쥐는 잠시 생각하였다.
「둥둥 떠 다녀. 배 식당에서 캔 맥주가 떠내려 온 거지. 오일 새딘 캔도 같이 말이야, 이제 됐냐?」
「응」
「그러는 사이에 날이 밝아 온다. <앞으로 어쩌지요?> 여자가 내게 묻지. <저는 섬이 있을 것 같은 쪽으로 헤엄을 칠거에요> 여자가 그렇게 말해. 하지만 섬은 없을지도 모르지. 그것보다는 여기 둥둥 뜬 채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보면 반드시 비행기가 구조하러 올 거라고 내가 말하지. 하지만 여자는 혼자 헤엄쳐 가버린다」
쥐는 거기서 한 템포 쉬고는 맥주를 마셨다.
「여자는 이틀 낮과 이틀 밤을 헤엄쳐 어딘가의 섬에 도착하고, 나는 나대로 술이 덜 깬 채로 비행기에 구조되지. 그래서 말이지 몇 년인가가 지난 후에 두 사람은 시내의 한 작은 바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거야」
「그래서 둘이서 또 맥주를 마시겠지?」
「슬프지 않니?」
「글쎄」라고 내가 말하였다.
6
쥐의 소설이 가진 훌륭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섹스 신이 없다는 점. 그리고 한사람도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만 내버려둬도 사람은 죽고, 여자와 잔다. 그런 법이다.
☆
「내가 틀렸다고 생각해?」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쥐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말해서, 둘 다 틀렸어」
「왜 그렇게 생각해?」
「으 응」쥐는 작게 신음하고는 윗입술을 혀로 핥았다. 할 수 있는 대답 같은 것이라곤 없었다.
「나는 팔뚝이 빠질 만큼 열심히 섬까지 헤엄쳐 갔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말이야 몇 번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내가 틀리고 네가 옳은 지도 모른다고 말이지.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데 어째서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바다 위에 가만히 둥둥 떠 있는 걸까 하고 말이야.」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우울한 듯이 눈언저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쥐는 우물쭈물하며 하릴없이 주머니를 뒤졌다. 3년 만에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내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니?」
「조금」
「정말 조금?」
「……. 잊어버렸어.」
두 사람은 한참 서로 말이 없었다. 쥐는 다시 무언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공평하게 만들어져 있다고.」
「누가 한 말이야?」
「존 F 케네디.」
7
어렸을 적, 나는 지독히 말이 없는 아이였다. 부모님은 이를 걱정한 나머지 나를 잘 아는 한 정신과 의사의 집에 데려 가셨다.
의사의 집은 바다가 보이는 고지대에 있었고, 내가 해가 잘 드는 응접실 소파에 앉자, 품위 있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차가운 오렌지 주스와 두 개의 도넛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무릎 위로 설탕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해 가며 도넛의 절반을 먹고 오렌지 주스를 모두 마셨다.
「더 마시겠니?」의사가 내게 묻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단 둘이 마주보고 있었다. 정면의 벽에는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원망스러운 듯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옛날에 말이다, 어떤 곳에 너무 사람 좋은 산양이 하나 있었단다.」
멋진 시작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람 좋은 산양을 상상해 보았다.
「산양은 늘 무거운 금시계를 목에 걸고는 휴우 하며 걸어 다녔어. 그런데 그 시계는 괜히 무겁기만 한데다가 부서져서 움직이지도 않았지. 그래서 친구 토끼가 와서 이렇게 말했단다.
<여보세요, 산양씨 왜 산양씨는 움직이지도 않는 시계를 늘 매달고 다니시나요? 무거워 보이는 데다, 아무 도움도 안 되잖아요>라고 말이야. <그야 무겁기는 하지> 산양이 말했단다. <하지만 익숙해져 버렸어. 시계가 무거운 데에도, 또 움직이지 않는 데에도 말이야>」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싱글거리며 나를 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루는 산양씨의 생일날 토끼가 예쁜 리본이 달린 상자를 선물했단다. 그거는 번쩍번쩍 빛나고, 너무 가볍고, 게다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새 시계였지. 산양씨는 무척 기뻐하며 그것을 목에 걸고 모두에게 자랑스레 내보이며 다녔단다.」
거기서 이야기는 갑자기 끝났다.
「네가 산양, 내가 토끼, 시계는 네 마음이란다.」
나는 속은 기분인 채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일에 한번씩, 일요일 오후 나는 전차와 버스를 갈아타고는 의사의 집에 다녔고, 커피 롤, 애플파이, 팬케이크, 꿀이 들어간 끄로와쌍을 먹으며 치료를 받았다. 1년 정도의 기간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치과의사에게까지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문명이란 전달이란다, 라고 그가 말하였다. 만일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알겠니. 제로란다. 만약에 네가 배가 고프다고 해보자. 너는 「배가 고파요.」라고 한마디 하면 된단다. 내가 너한테 과자를 주지. 먹어도 돼.(나는 과자를 한 개 집었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과자는 없어. (의사는
심술궂은 품으로 과자 접시를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제로야. 알겠지. 너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배는 고프거든. 그래서 너는 말을 하지 않고 그거를 표현하고 싶어. 제스처 게임이야. 한번 해 볼래.
나는 배를 움켜쥐고 괴로운 듯 한 얼굴을 지었다. 의사는 웃었다. 그거는 소화불량 같다. 소화불량…….
다음으로 우리가 한 일은 프리 토킹이었다.
「고양이에 대해서 뭐든지 좋으니까 얘기해 볼래?」
나는 생각하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빙글빙글 돌렸다.
「생각나는 거면 뭐든지 좋아」
「네발 달린 동물이에요」
「코끼리도 그런 걸」
「훨씬 작아」
「그리고?」
「집에서 기르고, 기분 내키면 쥐를 죽여요」
「뭐를 먹니?」
「물고기」
「소시지는?」
「소세지두」
이런 식이다.
의사가 한 말은 옳다. 문명이란 전달이다. 표현하고, 전달해야 할 일들이 없어졌을 때, 문명은 끝난다. 찰칵……. OFF
14살 되던 해 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둑이 터진 듯 나는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14년 동안의 블랭크를 메우기라도 하듯 세 달을 걸려 계속 말을 해댔고 7월 중순이 되어 말을 끝내자 40도의 고열을 내며 3일간 학교를 쉬었다. 열이 내리고 난 후, 나는 결국 말이 없지도 않고 수다쟁이도 아닌 평범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8
갈증 탓이리라. 내가 잠에서 깬 것은 아침 여섯시 전이었다. 다른 사람 집에서 눈을 뜨면 언제나 다른 몸뚱이에 또 다른 영혼을 억지로 쑤셔 넣은 듯 한 기분이 들곤 한다. 겨우겨우 좁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 옆에 있는 간단한 싱크대에서 마치 말처럼 몇 잔인가의 물을 연거푸 마시고서 침대로 돌아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바다가 아주 조금 보였다. 자그마한 물결이 방금 떠오른 태양을 반짝이며 반사시키고 있었고 눈여겨 가만히 바라보니 몇 척인가의 구질구질한 화물선이 지겨운 듯 한 모습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무더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주위의 집들은 아직 조용히 잠들어 있었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때때로 울려오는 전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희미한 라디오 체조의 멜로디 정도였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옆에서 자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남쪽으로 뚫린 창문에서 직접 들어오는 태양의 빛이 여자의 몸으로 하나 가득 펼쳐졌다. 그녀는 타월 커버를 발아래 까지 밀어젖힌 채 푹 잠들어 있었다. 때때로 숨결이 거칠어지며 잘생긴 유방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몸은 근사하게 태양에 구워져 있었으나 시간이 지난 탓에 약간 거무튀튀한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수영복 모양으로 뚜렷이 남은 자국은 이상하게 하얀 것이 마치 부패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담배를 다 피우고 10분 정도 그녀의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우선 여자의 이름을 내가 알고 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이름생각해내기를 포기하고 하품을 하고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스물에서 약간 아래이고 마른 편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한껏 벌려 머리에서부터 순서대로 키를 재보았다. 여덟 번을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발꿈치 언저리에서 엄지손가락이 하나 남았다. 158 센티미터라는 말이겠지.
오른쪽 유방 밑에 10엔 동전 정도 크기의 소스를 엎지른 것 같은 얼룩이 있었고 하복부에는 엷은 음모가 홍수가 지나간 후의 작은 강위에 떠있는 물풀과 같이 기분 좋게 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왼쪽 손에는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었다.
9
그녀가 잠에서 깨기까지는 그로부터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잠에서 깨고 나서, 일의 순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5분이 걸렸다. 그 동안 나는 팔짱을 끼고 수평선 위에 떠 있는 두터운 구름이 모습을 바꾸며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내가 그녀 있는 곳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목덜미까지 끌어올린 타월 커버를 몸에 둘둘 만 채 위장의 바닥에 아직 남은 위스키 냄새와 싸워가며 표정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기억 안나요?」
그녀는 딱 한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명해 봐요」
「어디서부터 시작하죠?」
「제일 처음부터요」
대체 어디가 처음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어떤 식으로 말하면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지도 알 수 없었다. 잘 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10초 정도 생각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덥지만 기분 좋은 하루였어요. 나는 오후 내내 풀에서 수영을 하고 집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나서 식사를 했죠. 8시가 좀 지난 때였죠. 그리고 차를 타고 산보하러 나갔어요. 해안 쪽에 차를 세우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바다를 보고 있었어요. 언제나 그렇게 하곤 하죠.
30분 정도 그렇게 있자니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졌어요. 바다만 쳐다보고 있자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게 되고, 사람만 보고 있으면 바다가 보고 싶어지죠.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제이스 바』에 가기로 했어요. 맥주가 마시고 싶었는데다가 거기라면 대개는 친구들과 만날 수가 있거든요. 근데 녀석은 거기 없었어요. 그래, 혼자 마시기로 했죠. 한 시간 동안 맥주 세병 마셨죠.
나는 거기서 말을 끊고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었다.
「근데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를 읽어 보셨나요?」
그녀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마치 해변가로 끌어올려진 인어처럼 단단히 타월로 온몸을 둘둘 만 채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즉 말이죠, 혼자서 술을 마실 적마다 그 얘기를 생각하곤 해요. 지금 머릿속에서 쩽그렁 하고 소리가 나고 편해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를 않아요. 소리 같은 건 나지도 않죠. 그러는 동안 기다리는 데 지쳐서 녀석 네 아파트에 전화를 해 봤어요. 나와서 같이 한잔하자고 할 생각이었어요. 근데 전화를 받은 건 어떤 여자였어요…….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녀석은 그런 타입이 아니거든요. 설령 지네 방에 여자 50명을 데려다 놓고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어도 지 전화는 지가 받죠. 이해하겠죠?
저는 잘 못 건 척하며 사과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전화를 끊고서 조금 기분이 안 좋더군요. 왜 그랬는지는 잘 몰라도 말이죠. 그리곤 맥주를 한 병 더 마셨어요.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더군요. 물론 그런 거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맥주를 다 마시고는 제이를 불러서 계산을 하고는 집에 가서 스포츠 뉴스에서 야구 결과를 보면서 자려고 생각했어요. 제이는 저를 보더니 얼굴을 씻으라고 하더군요. 맥주 한 상자를 마셔도 얼굴만 씻으면 운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할 수 없이 저는 얼굴을 씻으려고 세면대 있는 곳으로 갔죠. 솔직히 말하면 얼굴을 씻을 생각은 없었어요. 씻는 척만 하는 거죠. 그 집에 있는 세면대는 대개는 배수구가 막혀서 물이 언제나 고여 있곤 해서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아요. 근데 어제는 간만에 물이 고여 있지를 않더군요. 대신 바닥에 아가씨가 넘어져 있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요?」
「아가씨를 일으켜 세우고 거기서 데리고 나와서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한테 아가씨를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며 돌아다녔죠. 그리고는 제이와 함께 상처를 치료했어요.」
「상처요?」
「넘어졌을 때 어디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죠.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타월 속에서 손을 꺼내어 손가락으로 이마에 있는 상처를 가볍게 눌러보았다.
「그리고 제이하고 상의를 했어요. 어쩌면 좋겠느냐고 말이죠. 결국 제가 집까지 차로 데려다 주게 되었죠. 아가씨, 백을 뒤져보니 지갑하고 열쇠, 그리고 아가씨에게 보낸 엽서가 한 장 들어 있더군요. 저는 지갑 속에 있는 돈으로 계산을 하고 엽서에 적힌 주소를 갖고 아가씨를 여기까지 데려왔고, 문을 열고 침대에 눕혔죠. 그게 다예요. 영수증은 지갑 속에 들어있어요.」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왜 여기서 잤죠?」
「?」
「왜 저를 데려다 주고 나서 그대로 사라져 주지 않은 거예요?」
「제 친구 중에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죽은 애가 하나 있어요. 위스키를 나발로 마시고는 안녕하고 헤어져서 집까지 씩씩하게 걸어갔죠. 이를 닦고 파자마를 갈아입고 잤어요. 아침에는 차갑게 죽어 있었죠. 훌륭한 장례식이었어요.」
「……. 그래서 저를 밤새 간호했다는 말이군요.」
「사실 4시쯤에는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근데 잠이 들어버렸죠. 아침에 일어나서 가려고 생각했죠. 근데 그만두기로 해버렸어요.」
「왜요?」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쯤은 설명을 해줘야 될 것 같아서요」
「퍽이나 친절하시군요.」
나는 그녀의 말속에 담겨진 최대한의 독을, 목을 움츠린 채 받아넘겼다. 그리고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저……. 무슨 말 했나요?」
「조금요.」
「어떤 말이요?」
「여러 가지요. 하지만 다 잊어버렸어요. 별 거 아닌 말들이었어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부터 가볍게 신음하였다.
「엽서는요?」
「백 속에 들어있어요.」
「읽었어요?」
「설마」
「왜요?」
「제가 그걸 읽을 필요가 하나가 없잖아요.」
나는 질린 기분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나를 초조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단 그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나를 약간은 그리운 기분으로 만들었다. 오랜 옛날의 어떤 것. 더 극히 당연한 상황에서 만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조금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실재로 극히 당연한 상황에서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전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몇 시에요?」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조금은 한숨 돌린 기분으로 일어서서 책상 위의 탁상시계를 보고는 유리잔에 물을 담아 돌아왔다.
「아홉 시요」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벽에 기대어 단숨에 물을 마셨다.
「많이 마셨나요?」
「꽤요. 저라면 죽었어요.」
「죽을 것 같아요」
그녀는 머리맡에 두었던 담배를 한 가치 손에 쥐고는 불을 붙이고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고 갑작스럽게 성냥을 열려진 창문을 통하여 항구 쪽으로 내던졌다.
「옷 좀 집어줘요.」
「어떤 거요?」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아무 거나요. 부탁이니 뭐 물어보지 말아요.」
나는 침대 건너편에 있는 옷장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인 후 소매가 없는 푸른 색 원피스를 골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속옷도 입지 않고 머리로부터 옷을 입고는 혼자 등 지퍼를 채운 후 한숨을 한번 쉬었다.
「이제 가야겠어요.」
「어디를?」
「일하러요.」
그녀는 내뱉듯이 그렇게 말하자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녀가 세수를 하고 브러시로 머리를 빗는 것을 아무 의미도 없이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였고 그 이상은 어쩔 수 없다기라도 하는 듯 한 체념을 닮은 공기가 부유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내 기분을 조금 무겁게 하였다.
육 죠 정도의 방안에 싸구려 가구를 종류별로 갖추어 들여놓은 후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누울 만큼의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거기에 서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어떤 일이에요?」
「거기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죠」
하긴 그렇다.
담배 한가치가 모두 타 없어질 동안의 시간,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채 거울 속의 눈 밑에 생긴 검은 힘줄을 손가락으로 계속 눌러댔다.
「몇 시죠?」그녀가 한 번 더 물었다.
「10분 지났어요.」
「시간이 없어요. 이제 빨리 옷 입고 집으로 가시죠.」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오데꼴롱을 겨드랑이 밑에 뿌렸다. 「물론 집은 있겠죠?」
있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T 셔츠를 입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한 번 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가요?」
「항구 근처요? 왜요?」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그럼 지각 안 하죠.」
그녀는 헤어브러시를 한쪽 손에 쥔 채로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듯 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울 수 있다면 필시 마음이 편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이봐요. 이것만은 기억해 두세요. 분명히 저는 많이 마셨고, 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제 책임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의 사무적으로 헤어브러시의 손잡이로 몇 번쯤 손등을 툭툭 쳤다. 나는 말없이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렇죠?」
「그렇겠죠.」
「하지만 말이죠, 의식을 잃은 여자랑 자는 녀석은……. 진짜 저질이에요.」
「하지만 아무 짓도 안했는걸요.」
그녀는 격앙된 기분을 짓누르고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왜 제가 발가벗고 있었죠?」
「아가씨가 벗었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브러시를 침대 위에 내던지고는 숄더백 안으로 지갑, 립스틱, 두통약과 그 밖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구겨 넣었다.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증명할 수 있어요?」
「자기가 검사해 보면 알죠.」
「어떻게요?」
그녀는 확실히 진짜로 화가 난 듯 했다.
「맹세해요.」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기분이 약간 상했다.
그녀는 그 이상 말하기를 포기하고 나를 방 바깥으로 내보내고는 자기도 나와 문을 걸어 잠갔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강변으로 뚫린 아스팔트길을 차 있는 곳까지 걸었다.
내가 자동차 앞 유리에 앉은 먼지를 화장지로 닦아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자동차 둘레를 천천히 걸어서 한 바퀴 돌고는 보닛에 흰 페인트로 커다랗게 그려놓은 소 얼굴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는 큰 코뚜레를 달고 입에는 한 송이 장미를 문 채 웃고 있었다. 퍽 천박한 웃음이었다.
「거기가 그렸나요?」
「아뇨, 전에 주인.」
「어째서 소 그림 같은 걸 그렸을까요?」
「글쎄 말예요.」
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한 번 소그림을 보고는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 것을 후회하기라도 하듯이 입을 다물고는 차에 탔다.
차안은 무척 더웠다. 항구에 도착할 대까지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연신 타월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가며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불을 붙여 세 모금 정도 피우곤 필터에 뭍은 루주를 점검이라도 하듯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그것을 자동차 재떨이에 눌러 넣고, 그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기요, 어제 일 말인데요. 대체 어떤 얘기를 했죠?」
차를 내릴 대가 되어 그녀는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여러 가지였죠.」
「한 가지만 알려 주세요.」
「케네디 얘기요.」
「케네디?」
「존 F 케네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 것도 기억 안나요.」
차를 내릴 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천 엔짜리 지폐를 한 장 백미러 뒤쪽에 쑤셔 넣고 갔다.
10
지독하게 더운 밤이었다. 내버려두면 저절로 계란 반숙이 익을 정도의 더위였다.
나는 「제이스 바」의 묵직한 문을 언제나 그런 것처럼 등으로 밀어 열고는 에어컨으로 썰렁해진 공기를 들이마셨다. 술집 안에는 담배와 위스키와 프라이드 포테이토와 겨드랑이 밑과 하수구의 냄새가 바움쿠헨(Baumkuchen - 나무과자라는 뜻. 버터, 설탕, 계란, 밀가루 등을 반죽하여 나무의 나이테 모양으로 구워 만든 과자, 譯者註)처럼 차곡차곡 서로 겹쳐지며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언제 나와 똑 같은 카운터 끄트머리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는 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낯선 제복을 입은 프랑스 해군병사가 셋, 그들과 함께 온 여자 둘, 스무 살 가량의 커플 하나, 그게 전부였다. 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맥주와 콘비프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나서 책을 꺼내고는 천천히 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10분 정도 지나 그레이프 후루트와 같은 유방을 철렁이며 야한 원피스를 입은 30세가량의 여자가 들어와서는 내 한자리 건너 옆자리에 앉아, 내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술집 안을 한바탕 둘러보고는 기믈렛을 주문하였다. 그녀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일어서서 넌더리가 날만큼 긴 전화를 걸고 그것이 끝나자 핸드백을 끌어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결국 40분가량의 시간 동안 그것이 3번 되풀이되었다. 기믈렛을 한 모금, 긴 전화, 핸드백, 화장실이다.
바텐더인 제이가 내 앞으로 와서는 질려버린 얼굴로 후장 찢어지는 거 아니냐고 했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나보다 훨씬 능숙한 일본어를 구사한다.
그녀는 제3차의 화장실로부터 돌아오자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내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이봐요, 미안하지만 잔돈 좀 빌려줄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어 카운터 위에 늘어놓았다. 10엔짜리 동전이 도합 열세 개 있었다.
「고마워요. 살았다. 더 이상 가게에다 돈 바꿔 달라고 하면 인상 찌푸리거든요.」
「괜찮아요. 덕분에 몸이 무척 가벼워 졌는걸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잽싸게 동전들을 모아들고 전화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책읽기를 그만두고 제이에게 부탁하여 포터블 텔레비전을 카운터로 꺼내오도록 하여 맥주를 마셔가며 야구중계를 보기로 했다. 대단한 시합이었다. 4회 초밖에 안됐음에도 두 사람의 투수가 홈런 두 방을 포함하여 6개의 안타를 두들겨 맞고, 외야수중의 하나는 견디다 못한 끝에 빈혈을 일으키고는 쓰러지고 투수교대 시간 중에는 6편의 광고를 때렸다. 맥주와 생명보험과 비타민제와 항공사와 포테이토칩과 생리용 냅킨 선전이었다.
여자에게 차인 듯이 보이는 프랑스 해군병사 하나가 맥주잔을 손에 든 채 내 뒤로 와서는 뭐를 보고 있느냐고 불어로 물었다.
「야구」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베이스 볼?」
나는 간단히 룰을 설명해 주었다. 저 남자가 공을 던진다. 그럼 쟤가 방망이로 그걸 때리지. 한 바퀴 돌면 한 점 들어오는 거야. 해군병사는 5분 정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으나 광고가 나오자 왜 쥬크 박스에 죠니 알리디의 레코드가 없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인기가 없거든.」내가 대답하였다.
「그럼 프랑스 가수는 누가 인기가 있냐?」
「아다모」
「걘 벨기에 사람이야.」
「미셸 뽈나레프」
「메르드(똥이다)」
해군병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5회 초가 되어서야 그녀가 돌아왔다.
「고마워요. 뭐하나 살게요.」
「신경 안 써도 되요」
「빌린 걸 안 갚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미에요. 좋은 거건 나쁜 거건 말이죠.」
나는 빙그레 웃으려 하였으나 잘 안 되었고,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제이를 불러 이 사람한테는 맥주, 나는 기믈렛 이라고 말하였다. 제이는 정확히 세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운터 끄트머리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사람이 안 온 거 같네요. 그렇죠?」
「그런 거 같군요.」
「상대는 여자?」
「남자에요.」
「그럼 나하고 똑같네.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은데.」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몇 살로 보여요?」
「스물여덟.」
「거짓말쟁이.」
「스물여섯.」
여자는 웃었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데요. 독신으로 보여요? 아님 유부녀로 보여요?」
「상금 있습니까?」
「낼 용의 있어요.」
「결혼했죠.」
「응……. 절반은 맞았어요. 지난달에 이혼했거든요. 지금까지 이혼한 사람하고 얘기해 본 적 있어요?」
「아뇨. 하지만 신경통 걸린 소를 본 적은 있어요.」
「어디서?」
「대학 실험실에서요. 5명이 한데 달려들어서 교실로 밀어 넣었죠.」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학생?」
「에에」
「나도 옛날엔 학생이었어요. 60년경이죠. 좋은 시대에요.」
「어떤 점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키득거리며 웃고는 기믈렛을 한 모금 마시고 갑자기 생각난 듯이 손목시계를 봤다.
「또 전화를 해야지.」라고 말하고는 핸드백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내 질문은 답을 얻지 못한 채 한참동안 공중
에서 방황하였다.
맥주를 절반쯤 마시고서 제이를 불러 계산을 하였다.
「도망가는 거야?」제이가 말하였다.
「그래.」
「연상의 여인은 싫어하니?」
「나이는 상관없지. 하여간 쥐가 오면 안부 전해 주게.」
내가 술집을 나갈 때 그녀는 전화를 마치고 네 번째 화장실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계속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멜로디였으나 제목은 좀처럼 떠올라 주지 않았다. 퍽 옛날 노래다. 나는 해안가의 길에 차를 세우고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며 어떻게라도 노래제목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것은 「미키 마우스 클럽의 노래」였다. 이런 가사였다고 기억한다.
「우리 모두의 신나는 이 한마디, MICKEY MOUSE」
확실히 좋은 시대였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11
┌────┐
│ O N │
└────┘
와 여러분 안녕하세요. 모두 건강하신가요? 저는 최고로 기분 째지는 날입니다. 여러분들께 절반 나눠 드리고 싶을 정도라고요. 여기는 라디오 N E B, 여러분들이 사랑하시는 「팝스 텔레폰 리퀘스트」시간입니다. 지금부터 아홉시까지 멋진 토요일 밤의 두 시간 동안, 끝내주는 핫 튠을 쩌렁 쩌렁 울려드리겠습니다. 그리운 노래, 추억의 노래, 즐거운 노래, 한바탕 흔들고 싶어지는 노래, 지겨운 노래, 오바이트 쏠리는 노래, 뭐든지 좋습니다! 어서 어서 전화해 주세요. 전화번호는 모두 잘 알고 계시죠? 좋습니까, 전화번호 누르실 때는 틀리지 않도록. 건 사람은 손해보고, 받은 사람 피해보는 잘못 걸린 전화. 그건 그렇고 여섯시의 접수개시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 저희 방송국 전화 10대는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습니다. 그렇지, 벨소리 좀 들어보실래요?.... 어떻습니까, 굉장하죠. 좋습니다. 바로 이 페이스예요. 손가락이 부러질 만큼 팍팍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는 전화가 너무 와서 퓨즈가 나가버렸군요. 하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어제 특제 케이블로 갈았거든요. 코끼리 다리만큼 두꺼운 거죠. 코끼리 다리, 기린 다리보다 훠얼씬 두껍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미칠 듯이 전화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령 방송국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돌아버린다고 한들, 퓨즈는 절대로 안 나갑니다. 알겠습니까? 오늘도 지겹게 더운 날이었지만 그런 건 흥겨운 록을 들으면서 날려버립시다. 근사한 음악이란 그러기 위해서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쁜 여자하고 똑같아요. 오케이, 첫곡입니다. 이건 아무 말 없이 들어 주세요. 진짜로 좋은 곡이죠. 더위 따위는 잊어버리는 거예요. 브룩 벤튼, 「Rainy night in Georgia」.
┌────┐
│ OFF │
└────┘
…….후우…….왜 이렇게 더운 거지, 정말…….
…….저기, 에어컨 더 세게 안 되냐?.…….지옥이다, 여기는
…….야, 그만해, 난 말이야 땀 되게 흘린 다구…….
…….그렇지, 바로 그거야…….
…….저기, 나 목마른데, 누가 시원한 콜라 안 갖다 줄래?
…….괜찮아. 오줌 같은 거 안 싸. 내 방광은 말이지, 특별히 튼튼하게…….그래, 방광
…….고마워, 멋지군…….음, 아주 차가워…….
…….야, 병따개가 없다…….
…….멍청한 소리는 관둬라, 이빨로 이걸 어떻게 따니?
…….야, 레코드 끝난다. 시간 없어, 장난 그만치고…….야아, 병따개!
…….제길…….
┌────┐
│ O N │
└────┘
멋지군요. 이것이 음악입니다. 브룩 벤튼의 「비오는 조지아」, 조금 시원해 지셨나요? 근데 오늘 최고기온이 몇 도였다고 생각하시나요? 37도예요. 37도. 여름이라고는 해도 너무 덥죠. 완전 오븐 아닙니까. 37도라면 혼자 가만히 있는 것 보다 여자하고 끌어안고 있는 게 더 시원할 정도죠. 믿어집니까? 오케이, 수다는 이쯤으로 하고. 음악이 계속 나갑니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Full stop the rain」자 나갑니다, 베이비.
┌────┐
│ OFF │
└────┘
…….야 야 됐다 됐어, 마이크 스탠드 끄트머리로 열어버렸다…….
…….카아, 시원해…….
…….괜찮아. 딸꾹질 안 나와. 걱정이 너무 많구나, 너도…….
…….야, 야구 어떻게 됐어?
…….딴 방송국에서 중계 하고 있지?
…….야, 잠깐만, 왜 방송국에 라디오가 한 대도 없는 거냐? 범죄다, 이건…….
…….알았어, 이제 됐어. 그건 그렇고 이번엔 맥주가 마시고 싶은데. 아주아주 시원한…….
…….야, 졌다 졌어, 딸꾹질 나올 것 같아…….
…….딸꾹…….
12
7시 15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거실 등나무 의자에 드러누워 캔 맥주를 마셔가며 연신 치즈 크
래커로 손을 가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야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라디오 NEB의 팝스 텔레폰 리퀘스트. 라디오 듣고 계셨습니까?」
나는 입안에 남아 있던 치즈 크래커를 황급히 맥주와 함께 목구멍으로 흘려 넘겼다.
「라디오?」
「그렇죠, 라디오. 문명이 낳은…….딸꾹…….제일 좋은 기계죠. 전기 청소기보다 훨씬 정밀하고 냉장고 보다는 훨씬 작고 텔레비전보다 훠얼씬 싸죠. 지금 뭐하고 계셨나요?」
「책을 읽고 있었어요.」
「쯧쯧, 그럼 못쓰죠. 라디오를 안 들으시면 안 되죠. 책이야 읽어봤자 고독해질 뿐이에요. 그렇죠?」
「아, 예」
「책 같은 거야 스파게티 삶는 동안 시간 때우기로 슬쩍 보는 거죠. 아시겠습니까?」
「아, 예」
「조금은 …….딸꾹…….얘기가 잘 통할 것 같은 분이에요. 있잖아요. 딸꾹질이 멎지 않는 아나운서와 말해 본 적 있으신가요?」
「아뇨.」
「그럼 이게 처음이시군요. 라디오를 듣고 계신 여러분들도 처음이시겠죠. 그런데 왜 제가 방송 중에 댁에 전화를 드렸는지 아십니까?」
「아뇨.」
「실은 말이죠, 당신에게 신청곡을 선물한 아가씨가 …….딸꾹…….있단 말씀이죠.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아뇨.」
「신청곡은 비치 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스>, 아 추억의 곡이로군요. 어떻습니까, 이제 아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고서는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음…….안타깝군요. 맞추시면 특제 T 셔츠를 보내 드릴 텐데요. 좀 맞춰 주세요.」
나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이기는 하였지만, 기억의 한구석에 무엇인가가 걸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캘리포니아 걸스…….비치 보이스……. 어떻게, 생각나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5년쯤 전에 같은 반 여자애한테서 그런 레코드를 빌린 적이 있어요.」
「오, 어떤 여학생이었나요?」
「수학여행 갔을 때, 떨어드린 콘택트렌즈를 찾아 주었고, 그 대가로 그 레코드를 빌려줬죠.」
「콘택트렌즈요……. 근데 레코드는 제대로 돌려 주셨나요?」
「아뇨, 잃어버렸어요.」
「그럼 곤란한데. 사서라도 돌려주는 게 좋아요. 여자한테는 말이죠, 빌려주기는 해도…….딸꾹…….빚은 지지 말라고 말이죠. 그거 아시죠?」
「네.」
「좋습니다. 5년 전 수학여행가서 콘택트렌즈 떨어뜨린 그녀, 물론 라디오는 듣고 계시겠죠? 음, 그럼 그녀의 이름은?」
나는 겨우겨우 생각해 낸 이름을 대었다.
「여보세요, 그분이 레코드사서 돌려 드린 데요. 잘됐군요…….그런데 몇 살이신가요?」
「스물한 살입니다.」
「멋진 나이로군요. 학생?」
「네」
「…….딸꾹…….」
「네?」
「어떤 걸 전공하시나요?」
「생물학이요.」
「호오…….동물을 좋아하시나요?」
「네에.」
「어떤 점이?」
「웃지 않는 점이려나요?」
「호오, 동물은 웃지 않나요?」
「개나 말은 조금은 웃어요.」
「호호오, 어떨 때?」
「즐거울 때.」
나는 몇 년 만으로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딸꾹…….강아지 만담가 같은 것이 있어도 좋다는 말이로군요.」
「아저씨가 그럴지도 모르죠.」
「핫핫핫핫핫.」
13
「캘리포니아 걸스」
East Coast의 아가씨들은 죽여주지요.
패션도 끝내준다구요.
남부 아가씨들의 걸음걸이, 말씨,
음, 녹다운이지요.
Middle West의 상냥한 시골 아가씨들,
내 가슴을 파고들지요.
북부의 귀여운 아가씨
당신을 넋 놓고 쳐다봐 주지요.
근사한 아가씨들이 모두 캘리포니아의 아가씨들이라면…….
14
T셔츠는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우편으로 도착하였다.
이런 T 셔츠였다.
15
다음날 아침 나는 아직 빳빳한 그 새 T셔츠를 입고 한참동안 항구 주변을 이렇다 할 갈 곳도 없이 산책하고는 눈에 뜨인 한 작은 레코드 가게의 문을 열었다. 가게 안에 손님의 기척이라곤 없었고, 가게 점원 아가씨가 혼자 카운터에 앉아 지겨운 얼굴로 전표를 체크하며 캔 콜라를 마시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잠시 레코드 진열대를 둘러보고는 갑자기 그녀와 면식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일주일전에 제이스 바 세면대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 여자였다. 야, 라고 내가 말하였다. 그녀는 약간 놀라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T 셔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남은 콜라를 모두 마셨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죠?」
그녀는 포기했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였다.
「우연이죠. 레코드 사러 왔어요.」
「어떤 거를요?」
「<캘리포니아 걸스>가 들어간 비치 보이스의 LP.」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서 레코드 진열장까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잘 훈련된 개와 같은 모습으로 레코드를 끌어안고는 돌아왔다.
「이걸로 됐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가게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번에는 2장의 LP를 갖고 돌아왔다.
「글렌 굴드하고 박하우스, 어떤 게 좋죠?」
「글렌 굴드」
그녀는 한 장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1장을 본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그밖에는?」
「<걸 인 캐리코>가 들어간 마일스 데이비스.」
이번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역시 그녀는 레코드를 끌어안고 돌아왔다.
「다음은?」
「그걸로 됐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카운터 위에 세 장의 레코드를 늘어놓았다.
「이거 전부 본인이 들으실 건가요?」
「아뇨, 선물할 거예요.」
「인심이 넉넉하시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비좁아 답답한 곳에 있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고는 오천오백오십 엔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돈을 내고 레코드를 받았다.
「여하튼 덕분에 점심때까지 레코드가 세 장 팔렸군요.」
「잘됐군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카운터의 의자에 앉아 전표다발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언제나 혼자서 가게를 보시나요?」
「여자 직원이 한 명 더 있어요. 지금 식사하러 나간 거예요.」
「식사 안 하세요?」
「그 친구 와서 교대하죠.」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는 그녀의 작업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저기 괜찮다면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그녀는 전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 밥 먹는걸 좋아하죠.」
「저도 그래요.」
「그래요?」
그녀는 성가시다는 듯이 전표를 옆으로 제쳐 놓고는 플레이어에 하퍼스 바자르의 신보를 올려놓고 바늘을 올렸다.
「그럼 왜 같이 가자고 하시죠?」
「가끔씩은 습관을 바꿔보고 싶어서요.」
「혼자서 바꾸시죠.」
그녀는 전표를 모아들고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제 신경 쓰지 마시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말한 걸로 기억하지만 정말 저질이에요.」그녀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입술을 둥글게 오므린 채 네 개의 손가락으로 전표를 펄럭펄럭 넘겼다.
16
내가 제이스 바로 들어갔을 때, 쥐는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 얼굴을 찡그려 가며, 전화번호부만큼이나 되는 헨리 제임스의 무시무시하게 긴 소설을 읽고 있었다.
「재밌냐?」
쥐는 책으로부터 얼굴을 떼고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하지만 꽤나 책을 읽었어. 요전에 너하고 얘기하고 나서 말이야.『나는 빈약한 진실보다 화려한 허위를 사랑한다.』이거 알고 있니?」
「아니.」
「로제 바딤. 프랑스 영화감독이지. 이런 것도 있었다.
『뛰어난 지성이란 두 개의 대립하는 개념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한다.』」
「누구냐? 그건.」
「잊어버렸다. 정말이라고 생각하니?」
「거짓말이다.」
「왜?」
「밤 3시에 잠에서 깨어 배가 고프다고 하자. 냉장고를 열어보아도 아무 것도 없어. 어쩌면 좋겠니?」
쥐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제이를 불러 맥주와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주문하고는 레코드 꾸러미를 꺼내어 쥐에게 주었다.
「이건 뭐냐?」
「생일 선물이지.」
「하지만 다음 달이야.」
「다음 달에는 이미 여기 없으니까.」
쥐는 꾸러미를 손에 든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냐. 섭섭하구나. 네가 없다니.」쥐는 그렇게 말하고는 꾸러미를 열고 레코드를 꺼내어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글렌 굴드, 레너드 번스타인. 음……. 들어 본 적 없는걸. 너는 어떠냐?」
「나도.」
「하여간 고맙다. 확실하게 말해서 무척 기쁘다.」
17
3일간 나는 줄곧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내게 비치 보이스의 LP를 빌려준 여자아이.
나는 고등학교의 사무실에 가서 졸업생 명부를 찾아보았고 그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니, 테이프로 녹음된 어나운스 먼트가 나와, 이 번호는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는 번호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나는 번호 문의 전화를 걸어 그녀의 이름을 대 보았으나, 교환수는 5분 동안 찾은 후에 그런 이름으로는 도저히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런 이름으로는, 이라는 부분이 좋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나는 예전에 한반이었던 몇 명인가 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를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고, 대부분은 그녀가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였다. 마지막 한명은 왜인지 알 수 없으나 나를 향하여 너 같은 거 하고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삼일 째 되는 날 나는 한 번 더 학교에 가서는 사무실에서 그녀가 진학한 대학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그것은 야마노테[山の手, 본래는 '산에 가까운 곳'이란 뜻으로 평평한 고지대를 가리킨다. 도쿄의 야마노테라고 하면 분쿄구[文京區]와 신주쿠구[新宿區] 일대를 말한다. downtown 정도의 의미로 쓰임]에 있는 이류 여자대학의 영문과였다. 나는 대학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나는 맥코믹 샐러드드레싱의 모니터 담당자인데 앙케이트와 관련하여 그녀와 연락을 취하고자 하므로 정확한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 실례인줄은 알지만 중요한 용건이기 때문이라고 정중히 말하였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알아 두겠으니 15분후에 한 번 더 전화를 해주겠느냐고 말하였다. 내가 맥주를 한 병 마시고나서 전화를 걸자 직원은 그녀는 올해 3월에 자퇴원을 냈노라고 하였다. 이유는 건강상의 요양 때문입니다 라고 그는 말하였으나 어떤 병인지, 지금은 샐러드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휴학원이 아닌 자퇴원인지, 등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옛날 주소라도 상관없으니 혹 알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그것을 내게 알려 주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하숙집이었다. 내가 그곳으로 전화를 걸자 여주인인 듯 한 인물이 나와서는 그녀는 올봄에 방을 나간 후로,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는 품이 알고 싶지도 않다는 듯 한 투였다. 그것이 나와 그녀를 이어주는 라인의 끄트머리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혼자 「캘리포니아 걸스」를 들었다.
18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등나무 의자 위에서 절반은 졸며 펼쳐놓은 대로인 책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굵은 저녁 소나기가 몰려와서는 마당에 있는 나무 잎사귀들을 적셔 놓았고, 그리고는 사라져 갔다. 한바탕의 소나기가 지나간 뒤로는 바다냄새 나는 축축한 남풍이 불어오기 시작하였고, 베란다 위로 늘어선 화분에 심어놓은 관엽 식물의 잎사귀들을 가볍게 흔들고는, 이내 커튼을 흔들었다.
「여보세요」라고 그녀가 말하였다. 그것은 마치 불안정한 테이블에 엷은 유리잔을 살짝 올려놓는 것과 같은 말투였다.
「저, 기억나시나요?」
나는 조금 생각하는 시늉을 하였다.
「레코드는 잘 나가나요?」
「별로에요……. 불경기인가보죠, 아마. 아무도 레코드 같은 거는 안 들어요.」
「응」
그녀는 수화기를 손톱으로 톡톡 두들겼다.
「전화번호 찾느라 꽤 고생했어요.」
「그랬나요?」
「『제이스 바』에 물어봤어요. 거기 있는 사람이 댁의 친구한테 물어봐 주었어요. 키가 크고 좀 별난 사람이었어요. 몰리에르를 읽고 있었지요.」
「과연.」
침묵.
「모두 쓸쓸해하더군요. 일주일씩이나 나타나지 않다니 몸이 아픈 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 저한테 화나셨나요?」
「왜요?」
「제가 심한 말을 해서요.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어요.」
「이보세요, 저에 관해서 라면 아무 신경 안 써도 되요.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면 공원에 가서 비둘기들한테 콩이라도 주고 오시지요.」
그녀가 한숨을 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이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들렸다. 그 뒤로는 밥 딜런의 「네쉬빌 스카이라인」이 들렸다. 레코드 가게의 전화인 것이리라.
「댁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말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해요.」그녀는 빠른 말투로 그렇게 말하였다.
「자기 자신에게 엄하시군요.」
「네에, 그러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하고는 있지요.」
그녀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오늘밤 만날 수 있을까요.」
「좋지요.」
「8시에 제이스 바에서. 어때요?」
「알았어요.」
「……. 저어, 기분 나쁜 일이 너무 많았어요.」
「이해해요.」
「고마워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19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나는 스물한 살이 된다. 아직 충분히 젊기는 하지만 이전만큼 젊지는 않다. 만일 그것이 마
음에 들지 않는다면, 일요일 아침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는 없다.
대공황을 다룬 옛날 영화 가운데에서 이런 조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봐, 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아래를 지나갈 때면 언제나 우산을 받친다네. 위에서 사람들이 자꾸 떨어져 내리지 않나.」
나는 스물한 살이며, 적어도 지금 죽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세 명의 여자와 잤다.
최초는 고등학교 때 클래스 메이트였는데,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서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땅거미 지는 숲속에서 그녀는 갈색 슬리프 온 슈즈를 벗고, 흰 면양말을 벗었으며, 엷은 녹색의 서커(sucker) 천으로 만든 원피스를 벗고, 사이즈가 맞지 않음을 뚜렷이 알 수 있는 속옷을 벗고 약간 망설인 후 손목시계마저 끌렀다.
그리고 우리는 일요판 아사히신문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 몇 개월 만에 갑자기 헤어졌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잊어버릴 정도의 이유였다. 그때 이후로 그녀와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나는 가끔씩 그녀를 생각하곤 한다. 그것뿐이다.
두 번째 상대는 지하철 신쥬쿠역에서 만난 히피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었고 무일푼으로 잘 곳도 없었는데다가 가슴도 거의 없었다. 영리해 보이는 예쁜 눈을 가진 아이였다. 그날은 신주쿠에서 가장 격렬한 데모가 있었던 밤이었고, 전차, 버스 그 어느 것도 모두 멎어 있었다.
「그런데서 얼쩡거리다가 너 잡혀간다.」내가 말하였다. 그녀는 폐쇄된 개찰구 안에서 웅크린 채,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아저씨들은 잠은 재워주잖아.」
「그러다 큰일 난다.」
「익숙해졌는걸.」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녀에게도 한 대 주었다. 최루가스 탓에 눈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밥 안 먹었니?」
「아침부터.」
「그럼 내가 뭐 좀 사줄게 우선 밖으로 나가자.」
「왜 먹을 걸 사주려고 하나요?」
「글쎄.」왜 그런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녀를 개찰구로부터 끌고 나와서는 인적이 끊긴 거리를 메지로까지 걸어갔다.
그 지독히도 말이 없었던 소녀는 일주일 정도 내 아파트에 체재하였다. 그녀는 매일 오후가 지나서야 눈을 떴고 식사를 마치고는 담배를 피우고 멍한 모습으로 책을 읽고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끔씩 나와 마음 내키지 않는 듯 한 섹스를 하였다. 그녀가 갖고 있던 유일한 소지품은 흰 캔버스 천으로 만든 가방이었고 그 안에는 두툼한 윈드브레이커와 두 장의 티셔츠, 블루진 한 벌, 지저분한 세장의 속옷과 탐폰이 한 상자 들어 있을 뿐이었다.
「어디서 왔니?」
「너는 모르는 곳.」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였고, 그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슈퍼마켓에서 산 식료품 봉투를 끌어안고 돌아와 보니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흰색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그밖에 사라진 것도 몇 개쯤 있었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올려놓았던 약간의 잔돈과 카톤 박스 들이의 담배, 그리고 새로 빨아 놓은 내 티셔츠였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남겨두고 간 듯 한 노트에서 짖어낸 종이조각이 있었고, 거기에는 단 한마디 「재수 없는 놈」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나를 보고 하는 말이리라.
세 번째 상대는 대학 도서관에서 알게 된 불문과 여학생이었는데, 그녀는 이듬해 봄방학 때 테니스 코트 옆에 있는 초라한 잡목이 우거진 숲속에서 목을 매었다. 그녀의 시체는 새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고, 두 주간을 바람을 맞으며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날이 저물면 누구도 그 숲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20
그녀는 제이스 바의 카운터에 거북스러운 모양으로 걸터앉아 얼음이 거의 다 녹아버린 진저 엘이 담긴 글라스 바닥을 스트로우로 휘젓고 있었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내가 옆자리에 앉자 그녀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였다.
「바람 맞추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어요.」
「어떤 일?」
「신발이요. 신발을 닦았죠.」
「이 농구화 말씀이신 가요?」
그녀는 내 운동화를 가리키며 미심쩍은 듯이 말하였다.
「설마. 아버지 구두요. 가훈이에요. 아이는 모름지기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야 하느니라.」
「왜요?」
「글쎄요. 필시 구두가 뭔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하여간 아버지는 매일 판에 박아 놓은 것 같이 8시에 집으로 돌아오시죠. 나는 구두를 닦고는 언제나 맥주를 마시러 튀어 나가곤 하죠.」
「좋은 습관이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네, 아버지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셔야겠네요.」
「아버지 다리가 두 개밖에 없는 거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죠.」
그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훌륭한 집임에 틀림없겠어요.」
「으응, 훌륭한데다가 돈까지 없으니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죠.」
그녀는 스트로우 끄트머리로 계속 진저 엘을 저어댔다.
「하지만 저희 집에 훨씬 가난했어요.」
「어떻게 그걸 알죠?」
「냄새요. 부자가 냄새로 부자를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냄새로 알아 볼 수가 있다고요.」
나는 제이가 가져온 맥주를 잔에 따랐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나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요?」
「훌륭한 사람은 자기 집 시시콜콜한 얘기는 하지 않는 법이에요. 그렇죠?」
「본인이 훌륭한 사람?」
15초 동안, 그녀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얘기하는 게 좋아요.」
「왜죠?」
「첫째로 어차피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말하게 될 거고, 둘째, 나라면 그 일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아요.」
그녀는 웃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세 번 내뿜을 동안 아무 말 없이 카운터 판자의 나뭇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5년 전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어요. 심했죠. 고스란히 2년 동안 고생하시고 나서 말이죠. 저희는 그 일로 돈을 다 써버렸죠. 깨끗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가족들은 산산조각으로 공중분해. 자주 있는 일이에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어머니는?」
「어딘가에 살아 계세요. 연하장이 오거든요.」
「별로 반갑지 않은 거 같군요.」
「그렇죠.」
「형제는?」
「쌍둥이 동생이 있어요. 그게 다죠.」
「어디 살아요?」
「삼만 광년 정도 떨어진 곳.」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신경질적으로 웃고는 진저 엘의 글라스를 옆으로 밀었다.
「가족들 험담하는 거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에요. 사람이 우울해져요.」
「신경 쓸 거 없어요. 누구든지 뭔가를 끌어안고 있는 법이죠」
「저하고 마찬가지인가요?」
「응, 늘 세이빙 크림 깡통을 움켜쥐고 울죠.」
그녀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몇 년 만에 웃는 것과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저기요, 왜 진저 엘 같은 걸 마시고 있나요?」 나는 그렇게 물어 보았다.
「설마 금주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음…….그럴 생각이었는데, 이젠 아니에요.」
「뭘 마셔요?」
「차가운 백포도주.」
나는 제이를 불러서 새 맥주와 백포도주를 주문하였다.
「저기,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글쎄요, 이상한 기분이죠. 같은 얼굴에, 같은 지능지수, 같은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차고……. 언제나 지겨웠어요.」
「남들이 자주 착각했나요?」
「네에, 여덟 살까지는요. 그 해에 저는 아홉 개밖에는 손가락이 없게 되서 더 이상 누구도 헷갈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의식을 집중할 때처럼 두 손을 바싹 붙인 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녀의 왼손을 잡고는 다운라이트 불빛 아래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칵테일글라스와 같이 싸늘한 작은 손이었으며 거기에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손가락 네 개가 기분 좋게 늘어서 있었다. 그 자연스러움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적어도 손가락이 여섯 개 늘어서 있는 것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여덟 살 때 전기 청소기 모터에 새끼손가락이 끼었어요. 튕겨져 나가 버렸죠.」
「지금은 어디 있어요?」
「뭐가요?」
「새끼손가락이요.」
「잊어버렸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새끼손가락이 없는 게 마음에 걸리나요?」
「네, 장갑 낄 때.」
「그밖에는?」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다른 여자 애들이 목이 두꺼운 거나 종아리에 털 많이 난 거를 신경 쓰는 거하고 비슷한 정도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대학에 다녀요. 도쿄에 있는.」
「귀성중이시군요.」
「그렇죠.」
「뭘 공부하세요?」
「생물학. 동물을 좋아해요.」
「저도 좋아해요.」
나는 잔에 남은 맥주를 모두 마시고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몇 개쯤 집었다.
「저기요……. 인도의 바가르푸르에 있었던 어떤 표범은 3년 동안 인도 사람 350명을 먹었어요.」
「그래요?」
「그리고 표범을 잡기 위해 불려온 영국인 짐 콜베트 대령은 그 표범을 포함해서 8년 동안에 125마리나 되는 표범과 호랑이를 쏴 죽였죠. 그래도 동물이 좋아요?」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음미하는 듯이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좀 별난 사람이로군요.」
21
세 번째 여자 친구가 죽은 3개월 후, 나는 미쉴레의 「마녀」를 읽고 있었다. 훌륭한 책이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로렌느 지방의 뛰어난 재판관 레미는 팔백 명의 마녀를 화형에 처하였으나 이 '공포정치'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레미 왈(曰) '나의 정의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지라, 어제 잡아온 열여섯 명은 사람들이 손대기를 기다리기도 전에 스스로 목을 메 달았을 정도이다.'」
나의 정의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지라, 라고 한 부분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다.
22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풀장에 다닌 탓으로 빨갛게 그을린 얼굴을 카마인 로션으로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10번 벨이 울릴 때까지 내버려 두고나서 나는 포기하고 얼굴 위에 체스 판 모양으로 가지런히 올려놓은 거즈를 떼어내곤 의자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예요.」
「아, 안녕.」
「뭐, 하고 계셨어요?」
「아무 것도 안 했어요.」
나는 목덜미에 두른 타월로 아직도 얼얼한 얼굴을 닦았다.
「어제는 즐거웠어요. 정말 오랜만에 말이죠.」
「잘됐군요.」
「응......, 비프스튜 좋아해요?」
「네.」
「그걸 만들었는데, 저 혼자 먹으려면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먹으러 오실래요?」
「괜찮죠.」
「오케이, 한시간만에 오세요. 안 그러면 전부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어 버릴 거예요. 알았죠?」
「저기…….」
「저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그래요, 이유는 그거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탑 포티를 들으며 10분가량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더운물로 정성스레 수염을 깎고는 세탁기에서 막 되돌려온 셔츠와 버뮤다 쇼츠를 입었다.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나는 해안선을 따라 저녁 해를 바라보며 차를 몰아갔고, 국도로 들어가기 직전에 차가운 두병의 와인과 카톤 박스들이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그녀가 식탁을 치우고 그 위에 새하얀 식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나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과도 끄트머리로 따고 있었다. 비프스튜의 축축한 열기로 방안은 무척 무더웠다.
「이렇게 더워지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요. 마치 지옥이로군요.」
「지옥은 더 더워요.」
「보고 온 사람 같군요.」
「어떤 사람한테 들었어요. 너무 더워서 미칠 지경이 되면 좀 시원한 데로 갔다가, 거기서 좀 지나면 다시 원래 있던 데로 돌아오죠.」
「사우나탕이네요.」
「그런 식이죠. 하지만 개중에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더 이상 본래대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어쩌죠?」
「천국에 데려가게 되죠. 그리고 거기서 벽에 페인트칠하는 일을 하게 되요. 즉 말이죠, 천국의 벽은 언제나 새하얀 색깔이어야만 하거든요. 작은 얼룩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단 말이죠. 이미지가 나빠지기 때문이죠. 그런 식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페인트칠만 하니까 대부분은 기관이 좋지 않아요.」
그녀는 그 이상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병속으로 바진 코르크 조각을 조심스레 끄집어내고는 두 잔을 따랐다.
「차가운 와인과 따뜻한 마음」
건배할 때, 그녀는 그렇게 말하였다.
「뭐에요? 그건.」
「텔레비전 광고에요. 차가운 와인과 따뜻한 마음. 본적 없나요?」
「없어요.」
「텔레비전 안 봐요?」
「아주 조금만 봐요. 옛날엔 자주 봤지만 말이죠. 제일 좋아하는 거는 명견 러쉬였어요. 물론 초대 러쉬죠.」
「동물 좋아하시는군요.」
「예」
「저는 시간만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봐요. 뭐든 지요. 어제는 말이죠, 생물학자와 화학자의 토론회를 봤어요. 그거 보셨나요?」
「아뇨.」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기억을 해내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파스퇴르는 말이죠, 과학적 직관력을 갖고 있었어요.」
「과학적 직관력?」
「즉, 보통 과학자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죠. A 이퀄 B, B 이퀄 C, 고로 A 이퀄 C, Q․E․D,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파스퇴르는 달라요. 그 사람 머릿속에 있는 건, A 이퀄 C 이것뿐이란 말이죠. 증명 같은 건 하나도 없죠. 하지만 그의 이론이 옳았다는 건 역사가 증명한 거고, 그는 일생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귀중한 발견을 했죠.」
「종두.」
그녀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여봐요, 종두는 제너잖아요. 용케도 대학에 들어가셨군요.」
「……. 광견병의 항체, 거기다가 감온살균, 이었나?」
「정답.」
그녀는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가볍게 웃고는 잔에 담겨진 와인을 모두 마신 후 다시 한잔을 따랐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는 그런 능력을 과학적 직관력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런 거 본인에게 있으신가요?」
「거의 없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것 같군요. 여자하고 잘 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웃고는 부엌으로 가서 스튜 냄비와 샐러드 양재기와 롤 케이크를 갖고 왔다. 하나 가득 열어 젖혀진 창문에서는 이제야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어 왔다.
그녀와 나는 그녀의 플레이어로 레코드를 들으며 천천히 식사를 하였다. 그 동안 그녀는 주로 내가 다니는 대학과 도쿄의 생활에 대하여 물었다. 별반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양이를 이용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와(물론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대개가 심리 면에서의 실험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실상 나는 두 달 동안 36마리나 되는 크고 작은 고양이들을 죽였다.), 데모, 파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기동 대원에게 맞아 부러진 앞니의 자국을 보여주었다.
「복수하고 싶어요?」
「설마 그럴 리가요.」
「왜요? 저 같았으면 그 짭새를 기어이 찾아내서 망치로 이빨을 몇 대쯤은 부러뜨려 놨을 거예요.」
「나는 나고, 거기다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게다가 기동대원들이란 게 다들 얼굴이 비슷비슷해서 어디 쉽게 찾을 수 있나요.」
「그럼 의미라곤 없잖아요.」
「의미?」
「이빨까지 부러진 의미요.」
「없죠.」
그녀는 싱겁다는 듯 한 가벼운 신음을 내뱉고는 비프스튜를 한입 먹었다.
그녀와 나는 식후의 커피를 마시고 좁은 부엌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는 테이블로 돌아와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MJQ의 레코드를 들었다.
그녀는 젖꼭지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엷은 셔츠에 허리 품이 넉넉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게다가 테이블 밑에서 그녀와 나의 발은 몇 번인가 부딪혔고 그 때마다 나는 조금씩 얼굴이 빨개졌다.
「맛있었어요?」
「무척.」
그녀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왜 늘 뭘 물어보기 전에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죠?」
「글쎄요. 버릇이에요. 언제나 중요한 것만 빼먹고 말하곤 해요.」
「충고 하나 해도 될까요?」
「플리즈」
「그거 안 고치면 손해 봐요.」
「아마 그렇겠죠. 하지만 말이죠, 낡은 차하고 똑같아요. 어디 한 군데를 고치면 또 다른 데가 말썽을 일으키죠.」
그녀는 웃고는 레코드를 마빈 게이로 바꿨다. 시계는 8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구두 안 닦아도 되나요?」
「밤중에 닦죠. 이빨하고 같이요.」
그녀는 테이블에 가는 두 팔꿈치를 괴고 그 위로 기분 좋게 턱을 올려놓은 채로 내 눈을 엿보듯이 하며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하였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창문 밖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며 몇 번인가 눈길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더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믿어도 상관없어요.」
「뭐를요?」
「요전에 저한테 아무 짓도 안 한 거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듣고 싶나요?」
「아뇨.」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그녀는 키득키득 웃고는 내 술잔에 와인을 따르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듯이 어두운 창문을 바라보았다.
「때때로요, 누구한테도 폐를 안 끼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요. 그거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글쎄요.」
「저기요, 제가 폐를 끼치고 있는 거는 아닌지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말씀이죠?」
「지금은요.」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슬며시 손을 뻗어 내 손위에 올려놓았고, 한참이 지난 후 되돌렸다.
「내일부터 여행가요.」
「어디로요?」
「정해 놓지는 않았어요. 조용하고 시원한 곳으로 갈 생각이에요. 일주일 정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면 전화할게요.」
☆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나는 갑자기 처음으로 데이트했던 여자아이를 생각했다. 7년 전의 이야기다. 나는 데이트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저기, 따분하지 않으신가요?」라고만 계속해서 물었던 것 같은 기억이다.
우리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한 영화를 보았다. 주제가는 이런 노래였다.
「나는 그녀와 싸웠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편지를 썼지요.
미안해, 내가 나빴어, 라고 말이죠.
하지만 편지는 제게 돌아오고 말았죠.
수신처 불명, 수신인 불명」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23
내가 세 번째로 함께 잔 여자아이는 내 페니스를 「그대의 레종 데 뜨르」라고 불렀다.
☆
나는 전에 인간의 존재이유(레종 데뜨르)를 주제로 한 소설을 쓰려고 한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 쭉 나는 인간의 레종 데뜨르에 대하여 생각을 계속하였고, 덕분에 기묘한 성벽(性癖)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꾸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다. 약 8개월간을 나는 이 충동에 사로잡혀 지냈다.
전차에 타면 나는 우선 승객들의 머리수를 세었고, 계단의 수를 모두 세었으며 시간여유가 있다면 맥(脈)을 재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일로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의 기간 동안 나는 358회의 강의에 출석하였고, 54회의 섹스를 하고, 6921 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당시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수치로 치환함으로써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달할 무언가가 있는 이상, 나는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의 개비수와 올라간 계단의 수, 그리고 내 페니스의 사이즈에 대하여 누구 한사람 흥미를 갖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레종 데뜨르를 잃고 외톨이가 되었다.
☆
그런 연차로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는 6922 개비 째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24
그날 밤, 쥐는 맥주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은 결단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 대신 짐 빔 로크를 연거푸 5잔 마셨다.
우리는 바의 안쪽에 있는 어두컴컴한 코너에서 핀 볼을 상대로 시간을 보냈다. 몇 푼 쯤 되는 잔돈을 대가로 죽어버린 시간을 제공해 주는 그냥 잡동사니이다. 그러나 쥐는 그 어떤 것에 대하여서도 진지하였다. 때문에 내가 그날 밤에 치러진 여섯 번의 게임에서 두 번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야, 왜 그러니?」
쥐는「아무것도 아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카운터로 돌아와 맥주와 짐 빔을 마셨다. 그리고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입을 다문 채 쥬크 박스에 차례차례로 걸려지는 레코드를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피플」, 「우드스톡」, 「스피리트 인 더 스카이」, 「헤이 데어 론리 걸」…….
「부탁이 있다.」
「어떤?」
「누굴 만나줬으면 해.」
「…….여자?」
조금 망설인 후 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한테 부탁을 하지?」
「그 밖에 누가 있니?」쥐는 빠른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여섯 잔째 위스키의 첫 번째 한 모금을 마셨다.
「양복하고 넥타이 갖고 있니?」
「갖고는 있지. 그렇지만…….」
「내일 두시.」쥐가 말하였다.「있잖아. 여자는 대체 뭘 먹고 산다고 생각하니?」
「신발 밑창」
「그럴 리가.」쥐가 말하였다.
25
쥐가 좋아하는 것은 막 구워낸 핫케이크이다. 그는 그것을 깊숙한 접시에 몇 장쯤을 겹쳐 놓고 칼로 깔끔하게 사등분한 뒤, 케이크 위에 코카콜라를 한 병 내리 붓는다.
내가 처음으로 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5월의 부드러운 햇볕 아래로 테이블을 내어 와서는 한창 그 기분 나쁜 음식을 위 속으로 흘려 넣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음식의 뛰어난 점은,」라고 쥐가 내게 말하였다. 「식사와 음료가 일체화되어 있다는 점이지.」
나무들이 무성히 우거진 넓은 정원으로는 여러 가지 색과 모양의 들새들이 모여들어 잔디밭에 하나 가득 널려진 흰 팝콘을 열심히 쪼고 있었다.
26
나와 잔 세 번째 여자아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죽은 사람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젊어서 죽은 여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죽음으로 해서 그녀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살아남은 우리는 1년마다, 한 달 마다, 그리고 하루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는 내 자신이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곤 한다. 그리고 무섭게도 그것은 진실이다.
☆
그녀는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인은 아니었다.'라는 표현은 정당하지 못하리라.
「그녀는 그녀에 어울릴 만큼의 미인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딱 한 장 갖고 있다. 뒷면에 날짜가 적혀 있고, 그것은 1963년 8월로 되어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머리를 총탄에 관통당한 해이다. 그녀는 어딘가의 피서지인 듯 한 해안의 방조제에 앉아 조금 불편한 듯이 미소를 짓고 있다. 머리는 진 세바그풍으로 짧게 깎아 올렸고(어느 정도냐면 그 헤어스타일은 내게 아우슈비츠를 연상시켰다), 붉은 깅검(gingham)으로 된 소매가 긴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녀는 얼마간 어설프게 보였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것은 그것을 본 사람의 가장 섬세한 부분으로까지 관통해 지나가 버릴 듯 한 아름다움이었다.
가볍게 포개어진 입술과 섬세한 촉각과 같이 위를 향한 코, 자기가 자른 듯 한 앞머리는 아무렇게나 넓은 이마위로 드리워졌고 그곳으로부터 약간 부풀어 오른 뺨에 걸쳐 희미한 여드름 자국이 남아있다.
그녀는 열네 살이고, 그것이 그녀의 21년간의 인생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나로서는.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목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진지하게 (농담이 아니라),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하늘의 계시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새벽 4시 전이었으며 우리는 알몸으로 침대위에 있었다. 나는 하늘의 계시란 어떤 것인가 물어 보았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지.」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조금 지난 후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천사의 날개처럼 하늘에서 내려 와.」
나는 천사의 날개가 대학 교정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지만 멀리서 보면 그것은 마치 화장지와 같이 보였다.
☆
왜 그녀가 죽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녀 자신이 알고 있었는지 조차 의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27
나는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새였고, 정글 위를 서쪽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나는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날개에는 피 자욱이 검게 남아 있었다. 서쪽 하늘로는 불길한 검은 구름이 하나 가득 하늘을 뒤덮어 오기 시작하였고 주위로는 희미한 비의 향기가 풍겨왔다.
꿈을 꾼 것은 퍽 오랜만의 일이었다.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한참동안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로 온몸의 기분 나쁜 땀을 씻어내고는 토스트와 사과쥬스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담배와 맥주의 덕분에 마치 목구멍으로 낡은 솜을 잔뜩 쑤셔 넣어놓은 듯 한 맛이었다. 식기를 싱크대에 내던져 두고 나는 올리브 그린의 양복과 말끔히 다려놓은 셔츠 그리고 검정 니트 타이를 골라서는 그것을 손으로 감싸 안은 채 응접실의 에어컨 앞에 앉았다.
텔레비전 뉴스쇼의 아나운서는, 오늘은 올 여름 들어 가장 더운 하루가 될 것입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하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는 옆에 있는 형의 방으로 들어가 거대한 책의 산으로부터 몇 권 쯤을 골라 응접실의 소파에 드러누워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2년 전 형은 방 하나 가득한 책과 걸 프렌드를 한 사람 남겨 놓은 채 이유도 말하지 않고는 미국으로 가 버렸다. 그녀와 나는 때때로 함께 식사를 한다. 우리 형제는 정말 많이 닮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어디가요?」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그렇게 물어 보았다.
「전부.」그녀의 대답이다.
그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점, 우리가 십 몇 년간을 번갈아 닦아온 구두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시계가 12시를 가리켰고, 나는 바깥의 더운 날씨를 생각하며 끔찍한 기분으로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었다.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거리를 천천히 차를 타고는 둘러보았다. 바다로부터 산을 향하여 늘어선 비참하다 싶을 정도로 가늘고 길쭉한 모양의 마을이었다. 강과 테니스 코트, 골프 코스, 죽 늘어선 넓은 저택들, 벽 그리고 또 벽, 몇 개쯤 되는 작고 깔끔한 레스토랑, 부띠끄, 낡은 도서관, 달맞이꽃들이 우거진 들판, 원숭이 우리가 있는 공원, 마을은 언제나 같았다.
나는 다운타운 특유의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둘러보고 나서 강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서는 강어귀 가까운 곳에서 차를 내려 강물에 발을 담갔다. 테니스 코트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여자가 둘, 흰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볼을 치고 있었다. 햇볕은 오후가 되어 급격히 강렬해졌고, 라켓을 휘두를 적마다 그녀들의 땀방울이 코트 위로 흩어졌다.
나는 5분정도 그것을 바라보고는 차로 돌아와 시트를 눕히고 눈을 감고는 한참동안 파도소리에 뒤섞인 그녀들이 내는 공치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엷은 남풍이 가져오는 바다향기와 덥혀진 아스팔트의 냄새가 나로 하여금 옛날의 여름을 생각하게 하였다. 여자아이, 피부의 온기, 옛날 로큰 롤, 방금 세탁한 버튼다운 셔츠, 수영장 탈의실에서 맛본 담배 냄새, 희미한 예감, 모든 것이 다할 줄 모르는 달콤한 여름의 꿈이었다. 그리고 어느 해 여름(그게 언제였더라?), 꿈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딱 두시가 되어 「제이스 바」앞에 차를 세웠을 때, 쥐는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카잔차키스의 「한 번 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읽고 있었다.
「그 여자는 어디 있니?」나는 이렇게 물어 보았다.
쥐는 아무 말 없이 책을 덮고는 차에 올라타고 선글라스를 썼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 둬?」
「그만 뒀어.」
나는 한숨을 쉬고는 조여 맨 넥타이를 넉넉하게 느슨하게 풀고, 재킷을 뒷좌석에 내 던지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 어디로 가실까요?」
「동물원」
「좋습니다.」내가 말하였다.
28
마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처음으로 여자와 함께 잔, 마을이다.
앞으로 바다, 뒤로는 산, 이웃에는 거대한 항구도시가 있었다. 아주 작은 마을이다. 항구로부터 돌아오는 길, 국도를 자동차로 달려올 때엔 담배는 피우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성냥불을 그었을 때 자동차는 이미 마을을 지나쳐 버리기 때문이다.
인구는 7만 그리고 조금 더. 이 숫자는 5년 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으리라. 그 대부분은 마당이 달린 2층집에 살며, 자동차를 소유하고, 적지 않은 집들이 자동차를 2대 소유하고 있다. 이 숫자는 내가 어림짐작한 상상은 아니다. 시청 통계 과에서 연도 말이면 으레 발표를 하고 있는 것이다. 2층집이라고 한 부분이 무척 좋다.
쥐는 3층집에 살았고, 옥상에는 온실까지 딸려 있다. 경사면을 파내어 만든 지하는 차고였고, 그의 아버지의 벤츠와 쥐의 트라이엄프 TR III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었다. 신기하게도 쥐의 집에서 가장 가정다운 분위기를 갖추고 있는 곳이 이 차고였다. 소형비행기 정도라면 쏙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차고에는 디자인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거나 쓰다 질린 텔레비전과 냉장고, 소파, 테이블 세트, 스테레오 장치, 사이드 보드와 같은 것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었으며 그와 나는 자주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쥐의 아버지에 대해서 나는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만나 본 적도 없다. 어떤 사람이냐고 내가 물으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게다가 남자다, 라고 그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소문에 의하면 쥐의 아버지는 옛날에 무척 가난했던 듯하다. 전쟁전의 일이다. 그는 전쟁이 시작하기 직전 고생 끝에 화학약품 공장을 손에 넣었고 해충제거 연고를 팔기 시작하였다. 그 효과에 상당한 의문이 있기는 하였지만, 용케도 전쟁이 남방으로까지 확대되자, 연고는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창고를 창고 속에 처넣었고, 이번에는 이상스러운 영양제를 팔았고,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갑자기 그것을 가정용 세제로 바꾸었다. 이들의 성분이 모두 똑 같다는 이야기였다.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25년 전 뉴기니의 정글에는 해충제거 연고를 잔뜩 바른 일본군 시체가 산을 이루었었고, 지금은 어느 집의 화장실에나 그것과 같은 마크가 붙은 화장실용 파이프 청소기가 널려 있다.
그렇게 쥐의 아버지는 부자가 되었다.
물론 내 친구들 가운데에는 가난한 집의 아이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시영 버스의 운전사였다. 아마 부자 버스 운전사도 있기는 하겠지만, 내 친구의 아버지는 가난한 버스 운전사였다. 그의 집에는 거의 언제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그의 집에 놀러 갔다. 아버지는 버스에 타고 있거나 경마장에 있었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는 나와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는데, 그와 내가 친구가 된 데에는 약간의 계기가 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내가 소변을 보고 있는데, 그가 내 옆으로 와서는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 없이 동시에 소변을 마치고 함께 손을 씻었다.
「야, 나 좋은 거 있다.」
그는 바지 엉덩이에 손을 문질러 씻으며 그렇게 말하였다.
「그래?」
「보여줄까?」
그는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네었다. 그것은 발가벗은 여자가 한껏 사타구니를 벌리고, 그곳에 맥주병을 꼽고 있는 사진이었다.
「죽이지」
「확실히 그렇구나.」
「우리 집에 가면 더 끝내주는 게 있는데.」그가 말하였다.
그런 식으로 그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마을에는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는 18년간 그곳에서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마을은 내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고, 내가 가진 추억의 거의 대부분은 그곳과 이어져 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해의 봄, 이 마을을 떠나왔을 때,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시름 놓았다.
여름방학과 봄방학 때 나는 마을로 돌아오지만, 대개는 맥주를 마시며 지낸다.
29
일주일 정도 쥐의 컨디션은 지독히 나빴다. 가을이 가까워진 탓도 있을 것이고, 그때 그 여자 탓도 있을 것이다. 쥐는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제이를 붙잡고 슬쩍 떠 보았다.
「있잖아, 쥐가 요새 왜 그런다고 생각해?」
「글쎄, 나도 대체 통 잘 모르겠다. 여름이 끝나가서 그런가?」
가을이 가까워지면, 언제나 쥐의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카운터에 앉아 멍하니 책을 바라다보며, 내가 말을 걸어도 별 관심 없다는 듯 한 뻔 한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주위로는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 가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무렵이 되자 쥐는 완전히 맥주를 끊고, 버본 로크를 마구 마셔댔으며, 카운터 옆에 있는 쥬크 박스에 밑도 끝도 없이 돈을 집어넣고, 핀볼 기계를 반칙 사인이 나올 때까지 발로 내질러 제이를 당황하게 하였다.
「아마 뒤쳐지는 듯 한 느낌 때문에 그럴 거야. 그 기분은 알겠어.」
라고 제이가 말하였다.
「그래?」
「모두들 어딘가로 가버리잖아. 학교로 돌아가거나, 직장으로 돌아가거나 말이지. 너도 그렇잖아.」
「그렇긴 하네.」
「네가 이해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여자 애 일은?」
「조금 지나면 분명 잊어버릴 거야.」
「뭐 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글쎄.」
제이는 말끝을 흐리고는 다른 일을 하러 돌아갔다. 나는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쥬크 박스에 잔돈을 넣고 몇 곡인가를 고르고는 카운터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다.
10분 정도 지나 제이가 한 번 더 내 앞으로 왔다.
「저기, 쥐가 너한테 아무 말도 안한 거야?」
「응.」
「이상한 일이다.」
「그래?」
제이는 손에 들은 글라스를 몇 번이고 닦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너한테는 상담을 하고 싶어 했을 텐데.」
「왜 안 했을까?」
「하기 어려웠던 게지. 자기를 멍청하다고 할 것만 같은 느낌 때문에 말이야.」
「내가 안 그러지.」
「그런 식으로 보이는 거지. 옛날부터 그런 느낌이었어. 착한 애인데, 너한테는 뭐라고 할까, 어딘가 세상이치를 다 깨달아 버린 듯 한 부분이 있어……. 특별히 나쁘게 말하는 거는 아니고.」
「알아.」
「그저 말이지, 나는 너보다 20년이나 연상이고, 그런 만큼 여러 가지 싫은 일들을 경험했거든. 그러니까, 이거는 뭐랄까…….」
「노파심.」
「그래.」
나는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쥐한테는 내가 한번 말해볼게.」
「응, 그게 좋을 거야.」
제이는 담배를 끄고는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소로 들어가 손을 씻으며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기분으로 맥주를 한 번 더 마셨다.
30
예전엔 누구라도 쿨하게 살고 싶다 생각하는 시대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을 반절 밖에는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 결심하였었다. 이유는 잊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나는 몇 년인가에 걸쳐서 실행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의 반절 밖에는 말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쿨한 것과 어떤 식으로 관계가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연중 성애제거를 해야만 하는 오래된 냉장고를 쿨하다고 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정체된 시간 속에서 이내 잠들어 버리고자 하는 의식을 맥주와 담배로 날려 버려가며 이 문장을 써내려 가고 있다. 몇 번이고 더운 샤워를 하고, 하루에 2번 수염을 깎고, 오래된 레코드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듣는다. 지금, 내 뒤에서는 그 시대에 뒤떨어진 피터 폴 & 메리가 노래하고 있다.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다 끝난 일 아니니.」
31
다음날 나는 쥐를 불러내어 시내에 있는 호텔의 풀장으로 갔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으며, 교통이 불편한 탓도 있었는지라 풀장에는 10명 정도의 손님들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중 절반이 헤엄치기보다는 일광욕에 열중하고 있는 미국인 투숙객들이었다.
구화족[舊華族 : 1869년 황족(皇族)과 사족(士族, 무사계급)의 사이에 놓인 族稱. 당초에는 왕실 귀족 및 다이묘(봉건영주)를 칭하는 호칭(구화족)에 지나지 않았으나, 1984년 화족 령에 의하여 메이지 유신의 공신들, 이후 실업가들에게까지 적용돼 작위를 부여받고 특권을 가진 사회적 신분이 되었다. 1947년 일본 전후헌법의 시행과 함께 폐지]의 별채를 개축해 만든 호텔에는 잔디를 빼곡히 깔아놓은 근사한 정원이 있었고, 풀장과 본채를 갈라놓고 있는 장미 울타리를 따라 펼쳐진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눈 아래로 바다와 항구와 마을이 뚜렷하게 내려다 보였다.
나와 쥐는 25미터 풀을 경주를 하며 몇 번 쯤 왕복하고 나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시원한 콜라를 마셨다. 내가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을 동안 쥐는 오로지 홀로 무척 기분 좋은 듯이 계속 헤엄을 치고 있는 미국인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게 갠 하늘로 몇 대인가의 제트기가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은 흰 비행기구름을 남기며 날아서는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렸을 적에는 비행기들이 더 많이 날아다닌 것 같은데.」
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대부분은 미군 비행기였는데. 프로펠러 두 개 달린 거. 그거 기억나니?」
「P 38?」
「아니. 운송기야. P 38보다는 훨씬 크지. 무지하게 낮게 날았던 적이 있었는데, 공군 마크까지 보였어…….그리고 내가 기억나는 게 DC 6, DC 7, 거기다가 세이버 제트를 본 적이 있어.」
「꽤 옛날이구나.」
「그렇지, 아이젠하워 때였어. 항구로 순양함이 들어오면, 우리 동네가 온통 MP하고 해군들 투성이가 됐지. MP 본 적 있니?」
「응」
「여러 가지 것들이 없어져 가는구나. 물론 군인들이 좋은 건 아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버는 정말 근사한 비행기였어. 네이팜만 떨어드리지 않는다면 말이지. 네이팜이 떨어지는 거 본적 있니?」
「전쟁영화에서.」
「인간이란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해내는 물건이다. 게다가 그게 진짜 잘 돼 있거든.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네이팜이 그리워지게 될지도 몰라.」
나는 웃으며 2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비행기 좋아하니?」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옛날에 말이야. 하지만 눈이 나빠져서 관뒀지.」
「그래?」
「난 하늘이 좋아. 언제까지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데다가, 보고 싶지 않을 때는 안 봐도 되니까.」
쥐는 5분 동안 쭉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때때로 말이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 내가 부자라는 사실에 말이지. 도망치구 싶어 진다고. 이해하겠니?」
「알 리가 있나.」나는 황당한 어투로 대답하였다. 「하지만 도망치면 되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이지.」
「…….아마 그렇겠지. 그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 어딘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말이지. 애당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학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니?」
「그만 뒀어. 돌아갈 수도 없지.」
쥐는 선글라스 안쪽으로, 아직도 계속 헤엄을 치고 있는 여자아이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왜 그만 뒀니?」
「글쎄, 질려버려서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내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다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자기를 생각하는 만큼 남도 생각했고, 덕분에 경찰한테 얻어맞기도 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모두 결국은 자기가 갈 곳으로 돌아가고 말지. 나만은 돌아갈 곳이 없었단다. 의자 게임 비슷한 거지.」
「앞으로 뭐 할 거니?」
쥐는 타월로 발을 닦아가며 한참 동안 생각했다.
「소설을 쓰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니?」
「물론 쓰면 좋지.」
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소설?」
「좋은 소설이지. 내게 있어서 말이야. 난 말이지, 내게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렇지만 쓸 대마다 나 스스로가 계발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
「그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거나…….아니면 매미를 위해서 쓰거나지.」
「매미?」
「으응.」
쥐는 벌거벗은 가슴에 매단 케네디 코인 펜던트를 한참동안 만지작거렸다.
「몇 년인가 전에 여자애하고 둘이서 나라에 간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더운 여름날 오후에 말이지 우리는 3시간 정도를 산길을 걸었어. 그 동안에 우리가 만난 상대라고 한다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고는 날아가 버리는 들새니, 길가에 넘어져서 날개를 파닥파닥 대는 매미라든지 그런 것들이었지. 우선 너무 더웠거든.
한참동안 걷고 나서 우리는 풀이 가지런하게 자라있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에 앉아서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혔어. 경사면 아래로는 깊은 도랑이 있었고, 그 건너편으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진 봉긋 솟아오른 섬 같이 생긴 고분이 있었어. 옛날 천황의 말이지. 본 적 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생각했다. 어째서 이렇게 커다란 것을 만든 걸까 하고 말이지…….물론 어떤 무덤에건 의미는 있지. 어떤 인간이든지 언젠가는 죽는다,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런 걸 가르쳐 주지. 하지만, 그건 너무 컸어. 거대함이란 때때로 사물의 본질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리곤 하거든. 솔직히 그건 전혀 무덤으로는 안 보였지. 산이었어. 도랑의 수면은 개구리와 수초로 하나 가득이었고, 울타리 주위로는 거미줄 투성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분을 바라보고는 수면을 건너오는 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내가 느낀 기분은 말이지, 도저히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단다. 아니, 그건 기분 같은 게 아니었어. 마치 완전히 둘러 싸여져 버리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지. 즉, 매미와 개구리와 거미와 바람, 모두가 일체가 되어 우주를 흘러가는 거야.」
쥐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품이 다 빠져버린 콜라의 최후의 한 모금을 마셨다.
「문장을 쓸 때마다 나는 그 여름 오후와 나무가 우거진 고분을 생각해 내.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지. 매미와 개구리와 거미와, 그리고 여름에 우거진 풀들과 바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하고 말이야.」말을 다마치자 쥐는 목덜미 뒤로 두 손을 괴고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뭐좀 써 봤니?」
「아니, 한 줄도 쓰지 않았어.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지.」
「그래?」
「그대들은 땅의 소금일지니.」
「?」
「소금이 효력을 잃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여기의 소금으로 삼을 것인가.」
쥐는 그렇게 말하였다.
저녁이 되어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풀장에서 나와 만토바니의 이탈리아 민요가 흘러나오는 호텔의 작은 바에 들어가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넓은 창문으로는 항구의 불빛이 뚜렷이 보였다.
「여자애는 어떻게 됐니?」
나는 과감히 그렇게 물어 보았다.
쥐는 손등으로 입에 묻은 거품을 닦고 생각에 잠기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말해서, 그거에 대해서 너한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너무 바보스런 일이어서 말이야.」
「하지만 한번 상담하려고 했었지?」
「그랬지. 하지만 하룻밤 동안 생각해 보고 그만뒀어. 세상에는 어절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라고 말이야.」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충치. 어느 날 갑자기 아파 오기 시작하지. 누군가가 위로해 준다고 해서 통증이 멎는 건 아니거든. 그렇게 되면 말이지 자기 자신한테 무척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녀석들한테 그냥 막 화가 나기 시작해. 이해하겠니?」
「조금은.」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하지만, 잘 생각을 한번 해봐 조건은 다 똑같아. 고장 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억센 놈도 있을 것이고 운 나쁜 놈도 있지. 거친 놈이 있는가 하면 약해 바진 놈도 있어.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지. 하지만 용가리 통뼈 같은 강함을 지닌 놈이란 있지 않아. 모두 똑같단 말이지. 뭔가를 갖고 있는 놈은 언젠가 그걸 잃지나 않을까 쫄아 있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놈은 영원히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나 아닐까 걱정하지. 모두 똑같아. 그렇기 때문에 빨리 그걸 알아차린 사람이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만 해. 그런 척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렇지? 강한 인간이란 어디고 있질 않거든. 강한 척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응.」
쥐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맥주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고 해 주겠니?」
쥐는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자동차로 쥐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혼자 제이스 바에 들렀다.
「말했니?」
「말했어요.」
「그거 잘됐다.」
제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앞에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가져다 놓았다.
32
데릭 허트필드는 그 방대한 작품량에도 불구하고 인생과 꿈과 사랑에 대하여 직접 말하는 일이 극히 드문 작가였다. 비교적 시리어스 (시리어스라고 한 것은 우주인이나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지만)한 반자전적 작품, 「무지개 둘레를 한 바퀴 반」(1937)에서 허트필드는 냉소와 욕설과 농담과 역설 가운데에 아울러 아주 조금이지만 짧은 말로 자신의 속내를 피력하고 있다.
「나는 이 방에 있는 가장 신성한 서적, 즉 알파벳 순 전화번호부에 맹세코 진실만을 말한다. 인생은 텅 빈 것이다라고. 그러나 물론 구원은 존재한다. 즉, 본디 모든 것의 시작에 있어서 그것은 완전히 텅 빈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고난에 고난을 거듭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그것을 줄이고, 끝내는 텅 빈 것으로 만든 것이다. 어떤 식으로 고생을 하고, 또 어떤 식으로 그것을 감소시켜 왔는지는 일일이 여기에 적지 않겠다. 그것은 성가신 일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로맹 롤랑이 지은 『장 크리스토프』를 읽기 바란다. 거기에 전부 쓰여 있다.」
허트필드가 「장 크리스토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 이유는, 단지 그 작품이 한 인간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실로 꼼꼼히 그리고 순서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과, 게다가 그것이 무시무시하게 긴 소설이라는 점에 있었다. 소설이란 것이 정보인 이상 그래프와 연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으며, 그 정확도는 양에 비례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그는 늘 비판적이었다. 물론 양에 관하여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라고 그는 말한다. 거기에는 우주의 관념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작품은 무척이나 뒤죽박죽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말이다.
「우주의 관념」이라는 말을 그가 사용하였을 때, 그것은 대개 「불모(不毛)」를 의미하였다.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소설은 「플란다스의 개」였다. 「이봐, 너는 그림을 위해서 개가 죽는다는 걸 믿을 수 있나?」라고 그는 말하였다.
한 신문기자가 인터뷰 중 허트필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 소설의 주인공 월드는 화성에서 두 번 죽고, 금성에서 한번 죽는데요.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요?」
허트필드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우주공간에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뇨.」라고 기자가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런 건 누구도 알 수 없지요.」
「아무나 다 아는 걸 소설로 써서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허트필드의 작품 가운데에「화성의 우물」이라는, 그의 작품 군 가운데에서도 이색적인, 마치 레이 브라드베리의 출현을 암시하는 듯 한 단편이 있다. 아주 옛날에 읽어본 탓에 상세한 부분은 잊어버렸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만을 여기에 적는다.
이 소설은 화성의 지표에 파놓은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매우 깊은 우물로 들어간 청년의 이야기이다. 우물이 수만 년 전의 과거에 화성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확실했지만,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점잖게 수맥을 비껴서 파여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런 것을 만들어 놓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실제로 화성인은 그 우물들이 이외에는 무엇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문자, 주거, 식기, 철, 무덤, 로켓, 도시, 자동판매기, 심지어 조개껍질마저 없었다. 우물만이 있었다. 그것을 문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지구인 학자들이 그 판단에 고심하게 되는 부분이기는 하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 우물들은 아주 능숙하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수백 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기왓장 하나 부서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몇 명인가의 모험 대와 탐험대가 우물로 들어가 보았다. 로프를 이용한 이들은 우물의 끝이 안 보이는 깊이 때문에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로프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그 누구 하나 돌아 온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우주를 방황하던 한 청년이 우물로 들어갔다. 그는 우주의 광대함에 권태를 느끼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죽음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우물은 조금씩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고, 기묘한 힘이 상냥하게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1킬로미터 정도 내려가서는 옆으로 뚫어 놓은 터널을 하나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들어가 그 구불구불한 길을 정처 없이 계속 걷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계속하여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계가 멎어 있었기 때문이다. 2시간이었을지도 모르며 이틀 동안이었을지도 몰랐다. 공복감과 피로는 전혀 느끼지 않았으며 좀 전에 느꼈던 그 신기한 힘은 여전히 그의 몸을 감싸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돌연 태양의 빛을 감지하였다. 터널은 또 다른 우물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물을 기어 올라가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그는 우물 언저리에 걸터앉아 무엇 하나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없는 황야를 바라보았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가 달랐다. 바람 냄새, 태양…….태양은 중천에 떠 있으면서도 마치 석양과 같이 오렌지 빛의 거대한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앞으로 25만년 후에 태양은 폭발해. 찰칵…….OFF지. 25만년. 그리 대단한 시간은 아닌데 말이야.」
바람이 그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나는 신경 안 써도 돼. 그저 바람이지. 만약에 네가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화성인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듣기 나쁘지 않거든. 단, 말이라는 게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하지만 말을 하고 있어.」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너야. 나는 네 마음속에 힌트를 주고 있을 뿐이야.」
「태양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늙었어. 죽어가고 있지. 나도, 그리고 너도 어절 도리가 없단다.」
「어째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네가 우물을 지나오는 동안 약 15억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 너희들 속담에도 있듯이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다, 지. 네가 지나온 우물은 시간의 일그러짐을 따라서 파 놓은 것이란다. 즉 우리는 시간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거지.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죽음까지를 말이야. 그래서 우리에게는 삶이 없으며 죽음도 없어. 바람이지.」
「질문 하나해도 될까?」
「기꺼이.」
「너는 뭘 배웠니?」
대기가 미세하게 흔들리고는 바람이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영원의 정적이 화성의 지표를 뒤덮었다. 젊은이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어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고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33
전화벨이 울렸다.
「돌아왔어요.」라고 그녀가 말하였다.
「만날 수 있을까?」
「지금 나올 수 있나요?」
「물론.」
「5시, YWCA 문 앞에서.」
「YWCA에서 뭐를 하나요?」
「불어회화.」
「불어회화?」
「OUI」
나는 전화를 끊고는 샤워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내가 맥주를 다 마실 무렵에 폭포수와 같은 저녁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YWCA에 도착했을 때 비는 말끔히 개어 있었으나, 문을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미심쩍은 듯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했다. 나는 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는 엔진을 끄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비로 거무튀튀하게 젖은 문기둥은 황야에 서 있는 2개의 비석과 같이 보였다. YWCA의 좀 지저분하고 음침한 건물 옆으로는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싸구려인 임대 빌딩이 서 있었으며 옥상에는 전기냉장고의 거대한 광고 패널이 달려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30살가량의 빈혈에 걸린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가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는, 그럼에도 즐겁다는 듯 문을 열고 있었던 탓에 나는 냉장고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냉동실에는 얼음과 1리터들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냉동 새우 팩, 그 아랫단으로는 달걀 케이스와 버터, 커먼 벨 치즈, 본레스 햄, 다시 그 아랫단으로는 생선과 닭다리, 제일 아래쪽 플라스틱 케이스에는 토마토, 오이, 아스파라거스, 상추, 그레이프 후루트가, 냉장고 문에는 큰 병들이 코카콜라와 맥주가 3병씩, 그리고 우유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스티어링 휠에 기댄 채, 냉장고의 내용물을 헤치우는 순서를 쭉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1리터의 아이스크림은 지나치게 많았으며, 드레싱이 없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녀가 문에서 나온 것은 5시를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라코스테의 분홍빛 폴로셔츠와 흰 면으로 된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뒤로 묶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 사이에 그녀는 세 살 정도 늙어 있었다. 헤어스타일과 안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독한 비였어.」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신경질적으로 스커트 자락을 바로잡았다.
「비 맞았어요?」
「조금.」
나는 뒷자리에서 풀장에 갖고 갔던 이후로 계속 내팽개쳐 두었던 비치 타올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얼굴의 땀을 닦고 머리카락을 몇 번쯤 닦고는 내게 돌려주었다.
「비가 막 내리기 시작했을 때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완전히 홍수였어요.」
「하지만 덕분에 시원해지기는 했어요.」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창밖으로 내밀어 밖의 온도를 확인하였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바로 전 만났을 때와는 다른 뭔가 뒤틀린 듯 한 공기가 존재하였다.
「여행은 재밌었나요?」나는 이렇게 물어 보았다.
「여행 같은 건 가지 않았어요. 거짓말 한 거예요.」
「왜 거짓말을 했죠?」
「나중에 말할게요.」
34
나는 대대로 거짓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작년이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무척 싫은 일이다. 거짓과 침묵은 현대 인간사회에 만연하는 2개의 거대한 죄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우리들은 자주 거짓말을 하고, 늘 입을 다물어 버리곤 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일 년 내내 계속 말을 하고, 그것도 진실 밖에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진실의 가치 따위는 없어지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
작년 가을, 나와 내 걸 프렌드는 벌거벗은 채 침대 속에 들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무척 허기진 상태였다.
「뭐 좀 먹을 거 없을까?」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찾아볼게.」
그녀는 알몸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오래된 빵을 찾아내서는 양상추와 소시지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인스턴트커피와 함께 침대까지 갖고 왔다. 그날은 10월치고는 좀 추운 밤이었으며, 침대로 돌아 왔을 때 그녀의 몸은 통조림 연어 마냥 차가웠다.
「겨자는 없었어.」
「이정도면 일류지.」
우리는 이불을 둘러 쓴 채 샌드위치를 먹으며 텔레비전에서 옛날 영화를 봤다.
「콰이강의 다리」였다.
마지막에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에서 그녀는 한참 동안 낮게 신음하였다.
「왜 저렇게 죽을 둥 살 등 다리를 만드는 거지?」그녀는 멍하니 머뭇거리며 서있는 알렉 기네스를 가리키며 내게 그렇게 물었다.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지.」
응…….」그녀는 입에 빵을 하나 가득 담은 채 인간의 긍지에 대하여 한참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 머릿속에서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저기, 나 사랑해?」
「물론.」
「결혼하고 싶어?」
「지금 당장?」
「언젠가…….더 나중에.」
「물론 결혼하고 싶지.」
「하지만 내가 물어볼 때까지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하려고 그랬는데 잊어버리고 있었어.」
「…….애기는 몇이나 갖고 싶어?」
「세 명.」
「남자? 여자?」
「여자가 둘에 남자 하나.」
그녀는 커피로 입안에 있는 빵을 집어삼키고 나서 내 얼굴을 응시하였다.
「거짓말쟁이」(두꺼운 글씨, 譯者註)라고 그녀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틀렸다. 나는 한가지 밖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35
우리는 항구 가까이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서 브래디 마리와 버번을 주문하였다.
「진실을 듣고 싶어요?」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작년에, 소를 해부했어요.」
「그래요?」
「배를 갈라보니까 위 속에는 한주먹거리 만큼의 풀 밖에는 들어 있지 않았죠. 나는 그 풀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집으로 갖고 돌아 와서는 책상 위에 놓았어요. 그리고는, 뭐든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때면 그 풀 덩어리를 바라보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곤 해요. 왜 소는 이렇게 맛없어 보이고 비참한 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소중한 것이라
도 되는 듯이 반추해서는 먹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그녀는 조금 웃고는 입술을 오므리고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보았다.
「알았어요. 아무 것도 말 안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물어 봐도 되나요?」
「물론.」
「왜 사람은 죽는 거죠?」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죠. 개체는 진화의 에너지를 견뎌 낼 수 없기 때문에 세대교체를 해요. 물론 이건 하나의 설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죠.」
「지금도 진화하고 있어요?」
「조금씩.」
「왜 진화하죠?」
「그 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어요. 단지 확실한 것은 우주 자체가 진화하고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나름의 방향성이나 의지가 개재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우주는 진화하고 있고, 결국 우리는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죠.」나는 위스키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오고 있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몰라요.」
「그래요?」
「그래요.」
그녀는 술잔의 얼음을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려가며 흰 테이블보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제가 죽고 100년이 지나면 아무도 저의 존재 따윈 기억하지 못하겠죠.」
「그렇겠죠.」
가게를 나와 우리는 신기로울 이만치 선명한 저녁 속을, 조용한 창고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란히 걷고 있자면 그녀 머리칼에서 풍겨 오는 헤어 린스의 향기를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버드나무 잎 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은, 아주 조금이기는 했지만 여름이 끝나 감을 떠오르게 하였다. 한참을 걷고 나서, 그녀는 손가락이 다섯 개 붙어 있는 쪽의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언제 도쿄로 돌아가요?」
「다음 주요. 시험이 있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겨울엔 또 올 거예요. 크리스마스 때는 말이죠. 12월 24일이 생일이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산양자리지요?」
「그래요. 무슨 자리인가요?」
「똑같아요. 1월 10일.」
「왠지 손해 보는 별자리인 거 같아요. 예수 그리스도와 같죠.」
「그러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고쳐 잡았다.
「없어지면 쓸쓸해 질 것 같아요.」
「꼭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고들은 대개가 상당히 오래된 것들이었고, 기와와 기와 사이에는 짙은 녹색의 매끄러운 이끼가 빼곡히 끼어 있었다. 높고 어두운 창문으로는 튼튼해 보이는 철창이 끼워져 있었고, 묵직한 곰팡이가 낀 문들에는 각각 무역회사의 표찰들이 붙어 있었다. 선명한 바다의 향기가 느껴지는 부근에서 창고거리는 끝이 나고 있었으며, 버드나무 가로수도 이가 빠진 듯이 끝나고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풀이 우거진 항만철도의 궤도를 넘어 인기척이 없는 제방 창고의 돌계단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면으로는 조선회사 도크의 등불에 불이 들어오고 그 옆으로는 짐을 내려놓은 탓으로 수선(水線)이 올라간 그리스 국적의 화물선이 마치 내버려지기라도 한 듯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갑판의 흰 페인트는 파도와 바람에 붉게 녹슬었고 배 옆으로는 환자의 부스럼과도 같이 조개껍질이 빽빽이 들러붙어 있었다.
우리는 상당히 긴 시간을 입을 다문 채 바다와 하늘과 배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해질녘의 바람이 바다를 건너고, 그리고는 풀들을 흔들고 있는 동안, 땅거미는 느릿느릿 엷은 밤으로 변하고 몇 개쯤 되는 별들이 도크 위로 반짝거리기 시작하였다.
긴 침묵이 지난 후 그녀는 왼손을 주먹을 쥐고선 오른쪽 손바닥을 몇 번이고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빨개 질 대까지 계속하여 두드리고 나서는 마치 넋이라도 나간 양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 싫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도?」
「미안해요.」그녀는 얼굴을 붉히곤 정신을 되찾은 듯이 손을 무릎위로 되돌렸다.
「싫은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그 정도로는 말이죠?」
그녀는 약간 미소 짓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는 바다로부터 온 바람을 타고 그녀의 머리칼 사이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가만히 있자면 말이죠, 여러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게 들려요…….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아버지, 엄마, 학교 선생님, 여러 사람들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는 짜증나는 것들뿐이에요. 너 같은 건 나가죽어라 라든가, 지저분한 말들…….」
「어떤?」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두모금 정도 피운 담배를 가죽 샌들에 비벼 끄고는 손가락 끝으로 지그시 눈을 눌렀다.
「이거 병이라고 생각해요?」
「글쎄요.」나는 모르겠다는 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된다면 의사한테 한번 가 봐요.」
「됐어요.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녀는 두 개비 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웃으려고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얘기 한 거 처음이에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언제까지고 조그맣게 흔들렸고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는 차가운 땀이 배어 있었다.
「거짓말 같은 거 하고 싶은 맘 진짜 없었어요.」
「알고 있어요.」
우리는 한 번 더 침묵에 빠졌고, 제방에 부딪히는 작은 파도소리를 들어가며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해 낼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
문득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의 눈물로 젖어 있는 뺨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나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름의 향기를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다. 파도의 향기, 먼 기적, 여자 피부의 감촉, 헤어린스의 레몬 향, 해질녘의 바람, 엷은 희망 그리고 여름의 꿈…….
그러나 그것들은 마치 어긋나 버린 트레이싱 페이퍼와 같이, 모든 것이 조금씩, 그리고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옛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36
30분 걸려 그녀의 아파트까지 걸었다.
기분 좋은 밤이었고, 울고 난 후였던 탓에 그녀는 놀랄 만큼 기분이 좋았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와 나는 몇 군데인가의 상점에 들러 그다지 소용이 될 것 같지 않은 자잘한 쇼핑을 하였다. 딸기 냄새가 나는 치약과 화려한 비치 타월, 몇 가지의 덴마크 제 퍼즐, 6가지 색깔의 볼펜, 그런 것들을 감싸 안고 그녀와 나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 때때로 멈추어 서서는 항구 쪽을 뒤돌아보곤 하였다.
「차는 그대로 둔 채죠?」
「나중에 가지러 올 거예요.」
「내일 아침엔 안 되나?」
「상관없지.」
그리고 그녀와 나는 나머지 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늘밤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요.」
그녀는 포도(鋪道)를 향하여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구두를 못 닦겠네.」
「가끔씩 스스로 닦는 것도 좋죠.」
「닦으실까요? 손수.」
「정직, 성실한 분이니까요.」
조용한 밤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뒤척거리며 코끝을 나의 오른쪽 어깨에 갖다 대었다.
「추워.」
「추워요? 30도는 너끈히 되요.」
「몰라요. 추워.」
나는 발밑에 내팽개쳐져 있는 타월 커버를 집어 어깨까지 끌어올린 후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부들부들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몸 어디 안 좋은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서운 거예요.」
「뭐가?」
「뭐든지. 무섭지 않아요?」
「무서울 거 없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대답이 가지는 존재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확인해 보기라도 하는 듯 한 그런 침묵이었다.
「저하고 섹스하고 싶으세요?」
「응.」
「미안, 오늘은 안돼요.」
나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했어요.」
「애기?」
「네.」
그녀는 내 등 뒤로 휘감은 손의 힘을 빼고는 손가락으로 내 등에 작은 원을 몇 번 쯤 그렸다.
「이상해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그래요?」
「상대 남자 말예요. 완전히 잊어 버렸어요. 얼굴도 생각이 나질 않아요.」
나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아주 잠깐 동안만 이었지만…….
누구를 좋아한 적 있어요?」
「에에.」
「그녀 얼굴을 기억하고 있나요?」
나는 세 명의 여자 얼굴을 기억해내려 하였지만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뚜렷이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아뇨.」라고 나는 말하였다.
「이상한 일이군요. 왜 그럴까요?」
「아마 그러는 쪽이 편하기 때문이겠죠.」
그녀는 옆얼굴을 내 벌거벗은 가슴에 댄 채로 말없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도저히 해야겠다면 뭔가 다른…….」
「아니, 신경 쓰지 마요.」
「정말?」
「응.」
그녀는 내 등 뒤로 휘감은 팔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나는 명치 부근으로 그녀의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견딜 수 없게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한참 전부터 여러 가지 일이 잘 되지 않게 돼 버렸어요.」
「몇 년 정도 전부터요?」
「12, 13…….아버지가 병에 걸린 해. 그보다 옛날 일은 뭐 하나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쭉 안 좋은 일 뿐이었죠. 머리 위로 말이에요, 언제나 나쁜 바람이 불어오는 거예요.」
「바람도 방향이 바뀌게 마련이죠.」
「진짜로 그렇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그녀는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사막과 같은 침묵의 건조 속에서 나의 말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씁쓸함만이 입안을 맴돌았다.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말이죠, 언제나 그렇게는 되 주지 않더군요. 사람을 좋아하려고도 했고, 참을성을 가지려고도 했어요. 근데…….」
그녀와 나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를 놓고 입술을 나의 유수에 가볍게 입맞춤한 채 잠들은 듯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 동안, 참으로 오랜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절반은 졸면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그녀는 꿈을 꾸듯, 가만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37
야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라디오 N.E.B, 팝스 텔레폰 리퀘스트. 다시 토요일 밤이 찾아 왔습니다. 지금부터 2시간, 멋진 음악을 듬뿍 들려 드리겠습니다. 한편, 여름도 거의 다 끝나가는군요. 어떻게, 근사한 여름이었나요?
오늘은 음악을 들려드리기 전에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를 소개하도록 하지요.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편지라고요.
「안녕하세요.
매주 이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애청자입니다.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올 가을로 입원생활도 벌써 3년째에 접어드는군요.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에어컨디셔너를 틀어 놓은 병실 창문으로 겨우 바깥 풍경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는 제게 계절의 흐름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찾아온다는 것은 역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열일곱 살이며 최근 3년간은 책도 읽지 못하고 텔레비전도 보지 못하고, 산보도 못하고, 심지어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 조차도, 잠자다 뒤척거리는 일도 하지 못하고 지내 왔습니다. 이 편지는 쭉 제 곁에서 저를 돌보아 준 누나가 써주었답니다. 제 병간호를 위하여 대학을 그만두었습니다. 물론 저는 누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3년 동안 침대 위에서 배운 것은 어떠한 비참한 일로부터도 사람은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이라도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병은 척추신경의 병이라고 합니다. 무척 성가신 병이지만 물론 회복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3%밖에 되지는 않지만……. 이것은 의사 선생님(멋진 분이십니다)께서 알려주신 이와 같은 병의 회복사례에 대한 수치입니다. 그의 설에 의하면 이 숫자는 신인투수가 자이언츠를 상대로 노 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보다는 간단하지만, 완봉하기보다는 조금 어려운 정도라고 합니다.
때때로 만약에 회복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까하고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습니다.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질 만큼 두렵습니다. 평생 이렇게 돌처럼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본 채 책도 읽지 못하고 바람 속을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 받지 못하고, 몇 십 년을 걸쳐서 여기서 이대로 늙고, 그리고 쓸쓸하게 죽어가야 하는가하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답니다. 새벽 3시쯤 되어서 눈이 떠지면 가끔씩 제 등뼈가 조금씩 녹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릅니다.
슬픈 이야기는 이제 안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나가 하루에도 몇 백번이고 제게 들려주는 것처럼, 좋은 일만을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꼭 자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일들은 대개 한밤중에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병원 창문으로는 항구가 보입니다. 매일 아침 저는 침대에서 일어나 항구까지 걸어가서는 바다의 향기를 가슴으로 하나 가득 들이마셔 봤으면…….이라고 상상합니다. 만일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래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이 왜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침대 위에서 삶을 마친다 하더라도 견뎌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건강하세요.」
이름은 적혀 있지 않군요.
제가 이 편지를 받은 것은 어제 3시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저는 방송국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셔가며 이 편지를 읽고는 저녁에 일이 끝나고 항구까지 걸어가 산 있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병실에서 항구가 보인다면 항구에서는 당신의 병실이 보일 테지요. 산이 있는 쪽으로는 참 많은 불빛들이 보였답니다. 물론 어느 불빛이 당신이 있는 병실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것은 가난한 집 불빛이었고, 또 어떤 것은 부잣집 불빛이죠. 어떤 것은 호텔이고, 학교 불빛도 있고, 회사도 있죠. 참 많고 당양한 사람들이 각기 살아가고 있고나라고 그 때 저는 생각했답니다. 제가 그런 식으로 느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이죠, 갑자기 눈물이 나오더군요. 운 것은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근데 말이죠, 당신을 동정해서 운 건 아니었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말씀입니다. 한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으세요.
나는 너희들을 좋아해. (굵은 글씨, 譯者註)
앞으로 10년이 지나고도, 이 프로그램, 제가 틀었던 레코드, 그리고 저에 대한 것을 아직 기억해 주신다면, 제가 지금 한 말도 생각해 주세요.
그녀의 신청곡을 듣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굿 럭 챰」 이 곡이 끝나면 1시간 50분 동안 다시 언제나와 같이 강아지 만담으로 돌아갑니다.
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8
도쿄로 돌아가는 날 저녁 나는 옷가방을 든 채로 「제이스 바」에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았지만 제이는 나를 안으로 들어오라 하여 맥주를 내어 주었다.
「오늘밤 버스로 돌아가.」
제이는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만들 감자의 껍질을 벗겨가며 몇 번 쯤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고 나면 쓸쓸해. 원숭이 콤비도 해소되었군.」제이는 카운터 위에 걸린 판화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였다.
「쥐도 쓸쓸해 할 거야.」
「응.」
「도쿄는 재밌니?」
「어디든 다 똑같지.」
「그렇지. 나는 도쿄 올림픽이 있었던 해 이래로 여기서 나가 본 적이 없다.」
「여기가 좋아?」
「너도 말했지. 어디든 다 똑같아.」
「응」
「하지만 몇 년쯤 지나면 한번 중국에 가보고 싶어.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항구에 가서 배를 볼 적마다 그렇게 생각해.」
「우리 삼촌은 중국에서 죽었어.」
「그래…….많은 사람들이 죽었구나. 하지만 모두 형제지.」
제이는 내게 몇 병인가의 맥주를 대접하였고, 덤으로 갓 튀겨낸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비닐봉지에 넣어 주었다.
「고마워.」
「됐어. 기분만으로…….하지만 다들 눈 깜짝할 새에 크는구나. 처음으로 너를 봤을 땐 아직 고등학생이었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안녕, 이라고 말하였다.
「건강하고.」라고 제이가 말하였다.
8월 26일, 이라는 가게의 달력 아래에는 이런 격언이 적혀 있다.
「아낌없이 주는 자는, 늘 받는 자이다.」
나는 야간 버스의 표를 사고, 대기실 벤치에 앉아 줄 곳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불빛들이 꺼지기 시작하였고, 마지막에는 가로등과 네온의 불빛만이 남았다. 먼 기적이 희미한 바닷바람을 날라다 주었다.
버스 문에서는 두 명의 승무원이 양옆에 서서 표와 좌석번호를 체크하고 있었다. 내가 표를 건네자 그는 「21번 차이나」라고 말하였다.
「차이나?」
「네, 21번 C석, 이니셜이죠. A는 아메리카, 미국, B는 브라질, C는 차이나, D는 덴마크. 이 친구가 잘못 들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좌석 표를 체크하고 있는 직원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버스에 올라타고는 21번 C석에 앉아 아직 따끈한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먹었다.
모든 것들은 스쳐 지나간다. 아무도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39
이것으로 나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물론 후일담은 있다.
나는 스물아홉이 되었고, 쥐는 서른이 되었다. 꽤 먹은 나이이다. 「제이스 바」는 도로 확장 시에 개축되어 아주 아담한 가게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이는 여전히 매일 같이 한 양동이분의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으며, 단골들도 옛날이 더 좋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맥주를 마시러 온다.
나는 결혼해서 도쿄에서 살고 있다.
나와 아내는 샘 퍼킨파의 영화가 들어 올 때마다 극장에 가고, 돌아올 때는 히비야 공원에서 맥주를 두 병씩 마시고 비둘기들에게 팝콘을 나누어 준다. 샘 퍼킨파의 영화 가운데에서 나는 「가르시아의 목」을 좋아하고, 그녀는 「콘보이」가 최고라고 한다. 퍼킨파 이외의 영화로, 나는 「재와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며, 그녀는 「수녀 요한
나」를 좋아한다. 오래 살다보면 취미마저 닮아 가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하니?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럴 거야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꿈이란 결국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쥐는 아직도 소설을 쓰고 있다. 그는 그 가운데 몇 편인가의 복사본을 매년 크리스마스에 보내준다. 작년에는 정신병원 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의 이야기였고, 재작년 것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배경으로 한 코믹 밴드의 이야기였다. 변함없이 그의 소설에는 섹스 신이 없고, 등장인물은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원고용지 첫 장에는 늘,
「HAPPY BIRTHDAY 그리고 WHITE CHRISTMAS」라고 쓰여 있다. 내 생일이 12월 24일이기 때문이다.
왼쪽 손가락이 네 개 밖에 없는 여자아이와 나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내가 겨울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레코드점을 그만두고, 그 아파트에서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홍수와 시간의 흐름 속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여름이 되어 이곳으로 돌아 왔을 땐, 늘 그녀와 함께 걸었던 같은 그 길을 걸었고, 창고의 돌계단에 앉아 혼자 바다를 바라본다. 울고 싶다고 생각할 때면 언제나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법이다.
「캘리포니아 걸스」의 레코드는 아직도 레코드 진열장의 한 구석에 있다. 여름이 될 때마다 나는 그것을 꺼내어 몇 번이고 듣는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를 생각하며 맥주를 마신다. 레코드 진열장 옆에는 책상이 있으며 그 위로는 메마른 미이라와 같이 되어 버린 한 덩어리의 풀이 매달려 있다. 소의 위에서 꺼낸 풀이다.
죽은 불문과 여자 아이의 사진은 이사 가는 통에 잃어버렸다.
비치 보이스는 오랜만에 새 LP를 발표하였다.
멋진 여자들이 모두
캘리포니아 걸이라면…….
40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데릭 허트필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허트필드는 1909년 오하이오 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말수가 적은 전신 기사였고, 모친은 별점과 쿠키를 잘 굽는 약간 뚱뚱한 여인이었다. 어두운 허트필드 소년에게 친구라곤 한사람도 없었으며, 틈만 나면 코믹 북이나 펄프 매거진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어머니가 구운 쿠키를 먹는 식으로 나날을 보내며 하이스쿨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 도시의 우체국에서 일을 해보기도 하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으며, 이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나아갈 길은 소설가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의 다섯 번째 작품인 단편이 「웨어드 테일즈」에 팔린 것이 1930년이었고, 고료는 20달러였다. 그 이듬해 일 연간 그는 매월 7만 단어씩의 원고를 써내려갔고, 그 이듬해에 그 페이스는 월 10만 단어로 올라갔으며 죽기 전 해에는 15만 단어에 이르렀다. 레밍턴 타자기를 매해 새로 구입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가 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은 모험소설과 괴기물이며, 그 두 가지를 능숙하게 섞어놓은 「모험의 사나이 월드」시리즈는 그의 최대 히트작이 되었고 도합 42편에 이른다. 이 속에서 월드는 3번 죽고, 5천명의 적을 죽이며, 화성인 여자를 포함하여 전부 375명의 여자와 잔다. 그 가운데에 몇 편인가를 우리는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
허트필드는 실로 많은 것들을 미워하였다. 우체국, 하이스쿨, 출판사, 당근, 여자, 개,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가 좋아한 것은 세 개밖에 없다. 총과 고양이와 어머니가 구운 쿠키이다. 그는 파라마운트 촬영소와 FBI의 연구소를 제외하면 아마 전 미국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총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다. 고사포와 대전차포 이외의 모든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가 가장 자랑으로 여긴 것은 총신에 진주를 장식한 38 구경 리볼버로, 거기에 탄환은 한발밖에 장전되어 있지 않았으며 「나는 언젠가 이것으로 나 자신을 리볼버할 거야.」라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다.
그러나 1938년에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는 뉴욕까지 가서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올라가, 옥상에서 떨어져 내려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되어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유언을 따라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두움이 갖는 깊이를 이해할 손가.」 허트필드, 다시 한 번…….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만일 데릭 허트필드라는 작가와 만날 수 없었다면 소설 같은 것을 쓰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나아갔을 길이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 되어 있을 것이란 것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 고베의 고서 방에서 외국선원이 두고 간 듯이 보이는 허트필드의 페이퍼백을 몇 권인가 한데 모아 산 적이 있다. 한 권에 50엔이었다. 만일 그곳이 책방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도저히 책으로
는 여겨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물건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표지는 거의 다 떨어져 나가 있었고, 페이지는 오렌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아마도 화물선이나 구축함 하급선원의 침대 위에 올려진 채 태평양을 건너고, 그리고 시간의 아득히 먼 저 편으로부터 내 책상 위로 오게 된 셈이다.
☆
몇 년인가가 지난 후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허트필드의 묘를 찾아보는 것이 목적인 짧은 여행이다. 묘의 장소는 열렬한(그리고 유일한) 허트필드 연구가인 토머스 맥류어씨가 편지로 알려 주었다.
「하이힐 굽 한 작은 묘입니다. 놓치지 말도록 하시기를.」라고 그는 적고 있다.
뉴욕에서 커다란 관과 같은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라타 오하이오 주의 작은 그 도시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였다. 나 말고 그 도시에서 내린 승객은 한사람도 없었다. 도시 외곽의 초원을 지나간 곳에 묘지는 있었다. 도시보다 넓은 묘지다. 내 머리 위로는 수 마리의 종달새들이 빙글빙글 동그라미를 그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천천히, 한 시간 정도 들여 나는 허트필드의 묘를 찾아내었다. 주위의 초원에서 꺾어온 먼지가 뽀얗게 앉은 들장미를 바치고는 묘를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5월의 부드러운 햇볕 아래에서는 삶과 죽음이 비슷하게 평안한 듯이 느껴졌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고 몇 시간이고 종달새들의 노래를 들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장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디에 도착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우주의 복잡함에 비교한다면」이라며 허트필드는 말한다.
「이 우리들의 세계 따윈 지렁이 골 같은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도 바라고 있다.
☆
마지막으로 허트필드의 기사에 관해서는 전술한 맥류어씨의 노작, 「불임의 별들의 전설」(Thomas McClure; Legend of the Sterile Stars: 1968)로부터 몇 가지를 인용하였음을 밝히며 이에 감사의 뜻을 적고자 한다.
1979년 5월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