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초코렛 HUHSI chocolate

무라카미하루키

WHAM

chocohuh 2022. 6. 15. 14:10

원고를 쓰고 있는 도중에 잉크가 다 떨어졌다. 새 잉크통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맥이 빠져 한숨을 쉬었다. 좀 더 주의 깊게 쓸 것을. 잉크가 떨어지는 것은 간장이나 설탕이 다 떨어지는 것과 의미가 달랐다. 나는 잉크 배합 기준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해 잠시 동안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은 것은 어쩐지 눈치 빠를 것 같은 여자였다.

 

", -. 지금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입으로 뭘 먹고 있었다.

"급해요!" 내가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중으로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소설인데 도중에 잉크가 떨어졌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다른 잉크로는 단 한 줄도 못 써요. 그 잉크가 꼭 필요해요. 한 시간 이내로 어떻게든 마련해줘요. 알겠죠?"

"하지만 -." 여자는 말하면서 물인지 주스인지 커피인지 뭔가를 마시다 그것을 꿀꺽 - 삼켰다.

"정말로 아무도 없어요. 모두들 다 나가고 없어요."

"그건 유감이군요. 난 지금 사활이 걸린 문제예요. 한 시간 이내로 누구든 좋으니 보내주세요."

"누구든지 좋다고 했어요, 지금 -." 여자가 말했지만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잉크가 떨어지면 나는 도대체 안절부절 이었다.

 

한 시간 후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보니 거기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원피스를 입은 스무 살 전후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분위기에 별로 어울리지 않은 검은색 플라스틱 007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제가 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잉크 배합할 줄 알아요?" 내가 물었다.

"해본 일은 없어요. 재료와 방법을 말씀해주시면 되잖아요?" 맙소사, 하고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커스텀 메이드(주문) 잉크의 배합은 아주 미묘한 작업으로 약간의 밸런스 차이만 있어도 문체가 영 틀려버린다. 그런 것을 아르바이트 여자 대학생 따위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주방에 들어가 냄비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눈대중해서 컵에 따랐다. 그다음에 유리봉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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