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법: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한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쓰기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카메라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 눈으로 여러 가지를 정확히 보고 머릿속에 정경이나 분위기, 소리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새겨 넣는 일에 집중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날은 여행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여행에 대해서 글을 쓰고, 나아가 여행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참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정말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해외여행이란 것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다 마코토가 <무엇이든 보겠다>를 썼던 시대와는 다른 것이다. 가려고 생각만 하면, 즉 그럴 마음이 있고, 거기 드는 비용만 준비되기만 하면 대충 세계 어느 나라에라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정글에도 갈 수 있고, 남극에도 갈 수 있다. 단체 여행도 물론 가능하다.
그래서 여행에 관해서라면, 설사 아무리 먼 벽지에 가더라도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먼저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도한 계획이나 지나친 의욕 같은 것은 배제하고, "다소 비일상적인 일상"으로 여행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현대의 여행기는 시작되어야만 한다. "잠시 어디 좀 갔다 오겠네"하는 것은 좀 극단적이겠지만...... "눈을 부릅뜨고 결의를 새롭게"하는 느낌이라면 읽는 쪽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미국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하는 것과, 시코쿠에서 사흘 내내 하루 세 끼를 오로지 우동만 계속 먹어대는 것 중 도대체 어느 쪽이 변경(邊境)인지 잘 모르겠다. 참 어려운 시대다.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 놓을 뿐이다. 가령 "보자기 아주머니!"라고 적어 넣고, 나중에 수첩을 펼쳐 그것을 보면, 아, 그렇지, 터키와 이란의 국경 근처의 그 작은 마을에 그런 이색적인 아주머니가 있었지, 하고 쉽게 생각해 낼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요컨대 내가 가장 알아보기 쉬운 형태의 헤드라인이면 된다. 바다에 부표를 띄우듯이 그렇게 적어 놓는다. 서류 서랍의 색인과 같다.
나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는 동안 점점 나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일시나 장소 이름이나 여러 가지 숫자 같은 것은 잊어버리면 글을 쓸 때 현실적으로 곤란하니까, 자료로서 가능한 한 꼼꼼히 메모해 두는데, 세밀한 기술이나 묘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글쓰기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카메라 같은 것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여분의 에너지를 가능한 한 절약하고, 그 대신 눈으로 여러 가지를 정확히 보고, 머릿속에 정경이나 분위기, 소리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새겨 넣는 일에 의식을 집중한다. 호기심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때그때 눈앞의 모든 풍경에 나 자신을 몰입시키려 한다. 모든 것이 피부에 스며들게 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내 경험으로 보건데 그렇게 하는 쪽이 나중에 글을 쓸 때도 훨씬 도움이 된다. 반대로 말한다면, 일일이 사진을 보지 않으면 모습이나 형태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취재 여행을 가더라도 작가는 겉으로 보기엔 편하다.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을 맡은 사람만이 바쁘게 뛰어 다닌다. 그 대신 작가는 여행지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가 힘이 든다. 사진은 현상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작가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메모한 단어에 의지해 머릿속에 여러 가지 현장을 재현시켜 가는 것이다.
대개 귀국해서 한 달이나 두 달쯤 지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경험적으로 그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결과가 좋은 것 같다. 그 동안 가라앉아야 할 것은 가라앉고, 떠올라야 할 것은 떠오른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만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굵은 라인이 형성된다.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 이상 오래 내버려 두면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 문제다. 모든 일에는 어디까지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여행기를 쓰는 것은 나에게 매우 귀중한 글쓰기 수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여행기에서 원래 해야 할 일은 소설의 원래 기능과 거의 마찬가지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 예를 들면 대개의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것과 같은 문맥으로.
하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곳에도 갔었단다, 이런 생각을 했단다 하고 누군가에게 얘기해도, 자신이 정말 그곳에서 느낀 것을, 그 감정의 차이 같은 것을 생생하게 상대방에게 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에게, "아아, 여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것이구나.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연애란 그렇게 멋진 일이구나. 나도 멋진 연애를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보다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떻게든 하게 만드는 것이 프로의 글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거기에는 기술도 필요하고, 고유의 문체도 필요하며, 열의나 애정이나 감동도 물론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기를 쓰는 것은 소설가인 나에게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되었다. 처음엔 좋아서 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나는 원래 여행이라는 것을 좋아했다. 옛날부터 좋아했다. 헤딘이나 스탠리라든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람들의 여행기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랐다. 동화 같은 것보다는 아무튼 '변경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스탠리가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면서 콩고의 오지에서 행방불명된 리빙스턴 탐험대를 찾아내는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새로운 것으로는 폴 세로우의 여행기도 잘 읽었다. 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는 것은 자신이 직접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누구나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어서, 이제 변경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렸고, 모험의 질도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탐험'이나 '비경'과 같은 말은 점점 진부해져서 현실적인 수준에서는 거의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지금도 '비경' 어쩌고 하는 옛날식 타이틀을 붙인 방대한 프로를 방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고지식한 사람은 실제로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여행기를 쓰기에는 그다지 행복한 시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하는 행위가 그 본질상 여행자의 의식의 변혁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 움직임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기라는 것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 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정말 신선한 감동은 거기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런 궁극적인 추구가 없다면, 설사 땅 끝까지 간다고 해도 변경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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